<88화>
벨라는 연애 초기의 주체할 수 없는 설렘을 표현한답시고 약속 시간보다 1시간 일찍 왔다. 오늘 오전에 사무실에 비상이 걸리지 않았더라면 그 디테일한 연기는 아주 기특했을 뻔했다.
데이타스 약초 문제가 전보다 더 심각해져서 아침부터 제이든은 심기가 안 좋았다. 멀쩡했던 데이타스가 치료 물약으로 만들어진 후 뒤늦게 썩는 바람에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나?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고 있어서 제이든은 오전 내내 비상 대책 회의를 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벨라가 일찍 와 버린 거지…….
제이든은 안 그래도 할 일 많아서 짜증 나 죽겠는데 벨라까지 신경 써야 하자 결국 우리에게 화풀이를 해 버렸다. 정확하게는 그 소식을 전한 내게.
“디아즈 영애가 도착했다고?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1시간가량 남았을 텐데.”
“네. 그런데 그냥 일찍 오신 거 같아요.”
“네가 약속 시간을 잘못 기재한 건 아니고?”
나는 밀려드는 분노를 잠재우며 항변을 시도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
“됐어. 네가 내려가서 내가 올 때까지 디아즈 영애 감시하고 있어.”
반박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조금도 화나지 않았다. 왜냐? 과정이야 어떻든 내게 자유 시간이 주어졌으니까!
나는 할리의 부럽다는 눈길을 즐기며 날듯이 응접실로 향했다. 이 순간만큼은 벨라가 마주하기 불편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생각나지 않았다. 비록 벨라와 겸상하자마자 그 감상은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지만.
응접실 문이 열리고 벨라가 고개를 쭉 빼던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벨라는 보물 상자를 발견한 사람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오늘 볼 것 같았어. 이리 와서 앉아.”
뭐지, 아로네도 이렇게까지 날 반기지 않는데. 나는 쭈뼛쭈뼛 다가가 벨라의 앞자리에 앉았다. 벨라가 손수 차를 따라주며 넉살맞게 물었다.
“몰랐는데 네가 공녀의 유명한 친구라며?”
갑자기 아로네 얘기라니? 나는 방어적으로 대꾸했다.
“그런데요.”
“잘됐다. 나 공녀랑 친해지고 싶은데 다리 좀 놔 줘.”
벨라가 내 두 손을 덥석 감싸 쥐고 부담스럽게 눈을 반짝였다. 은근슬쩍 손을 빼 보려고 해도 악력은 더욱 세질 뿐이었다.
“싫어요. 아니, 그보다 아로네는 왜요?”
“귀족 최초로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잖아. 나도 공녀를 본받아 조그만 사업 하나를 시작해서 친해지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 음…… 외모가 내 취향이기도 하고.”
공상하듯 초점이 흐려진 눈을 보니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더 기가 찼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까?
진작 알아봤지만 벨라는 정말 종잡을 수 없었다. 우선 나는 가슴 깊이 우러나온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거 하나 확실하게 말해 둘게요. 아로네, 남자 좋아해요.”
“확실해?”
“아, 언니!”
“왜 화를 내고 그래? 알았어! 포기하면 되잖아.”
벨라가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저 인간, 진짜로 진심이었구나. 문득 머리가 미치도록 지끈거렸다.
“그리고 뭐라고요? 사업? 도대체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음……. 엄밀히 따지자면 불법이라 말하기 좀 그래.”
“언니, 마약도 불법인 거 알죠?”
벨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그러는 꼴을 처음 봐서 속이 다 후련했다. 나는 만족스레 웃고 이 기세를 몰아 재차 물었다.
“그래서 어떤 사업인데요?”
벨라는 여전히 말하기 주저했지만 내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자 고해 성사를 하듯 술술 털어놓았다. 내겐 벨라가 친 사고를 사전에 알고 대비할 의무가 있었다.
“요즘 풍기 문란하다고 금지된 소설 있잖아.”
“……설마. 설마 아니겠지.”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으면서도 아니길 바라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남자애들끼리 지지고 볶는 거. 그걸 얼굴 없는 고객에게 중개하는 일이야. 이거 비밀이다?”
벨라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중간 브로커만큼 그에게 잘 어울리는 직업을 없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런 소설을 중매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벨라뿐만 아니라 제이든도 타격을 입을 것이다.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꼬치꼬치 캐묻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얘기가 제이든 귀에 흘러 들어가면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 거라는 걱정을 지나 마지막으로…….
“평생 언니로 모실게요.”
마르지 않는 샘물을 발견했다는 기쁨이 들었다. 어쨌든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면 되잖아?
***
내가 어리고 천진난만했을 시절, 한 친구는 내게 연애 상담을 부탁했다. 내가 모태 솔로라는 것은 나도 알고 걔고 알고 모든 사람들이 알았지만 그때 난 친구들 사이에서 연애 박사로 통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디서 뭐 하고 사는지 모를 내 친구 영희가 말했다. 며칠 사이 잠을 설쳤다더니 안색이 엉망이었다.
“그 사람한테 대시해도 될까?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
커플 달성률 99%를 자랑하는 강 박사는 현명하게 대답했다.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운명이라고 할 수 있어. 길 걷다 우연히 마주친 게 벌써 다섯 번째잖아! 당장 번호 물어봐.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그치? 우리 운명인 거 맞지?”
“그렇다니까! 자, 어서 가!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어!”
영희는 원하는 대답을 얻고 기뻐하며 떠났다. 시야에서 영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2주 내내 징징거려서 화내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잘됐군. 더 이상 영희의 운명론을 듣지 않아도 돼서 참 다행이었다.
나는 그때 했던 말을 복기하며 실없이 웃었다. 우연이 반복되면 그건 운명일 거라고?
운명이라 말하고 싶으면 동, 읍, 면 단위가 아니라 적어도 지역구 정도는 돼야지. 같은 동네에 살면서 자주 마주치는 게 뭐 별거라고 그런담?
……그래, 분명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돌이켜 보니 계속 특정인을 만난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나와 게일 사이에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신이 있다면 어쩜 이리 야박할까? 게일이랑 통성명하자마자 왜 그 사람이 자꾸 내 눈앞에 나타나냐고. 왜!
나는 두꺼운 아름드리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쑥 내밀었다. 10m 앞, 게일이 레이를 붙잡고 무어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레이는 1초라도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게일한테 잡힌 사람이 레이만 아니었다면 그냥 여기서 농땡이 피우면서 게일이 가길 기다리는 건데. 마지막 만남이 좋게 끝나지 않아서 선뜻 레이를 구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눈빛이 사나웠고, 게일의 주둥이는 닫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 어쩔 수 없군.”
나는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문제의 장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느끼한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 뒤돌아 아무것도 못 본 척 굴고 싶었다.
“크흠.”
작게 헛기침을 하자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게일은 환희가 깃든 비소를 지었고, 레이는 일이 복잡하게 됐다는 듯 낭패 어린 표정을 했다.
또 한 명의 희생자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안녕하세요. 그날 이후로 오랜만입니다.”
슬쩍 게일의 손목을 내려다보자 아직도 멍 자국이 선연했다. 치유 물약 하나면 충분히 나을 상처였으나 데이타스 약초 스캔들로 인해 요즘 진짜 치유 물약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뭐, 애초에 물약이 겁나 비싸기도 했고.
게일이 내 시선을 눈치채고 주섬주섬 소매를 끌어 내렸다. 그가 사람 성질을 돋울 정도로 아주 느릿하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가 굳이 혜라 양을 부리는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혜라 양의 그런…… 교양 없는 모습이 매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더군.”
아무래도 게일은 나한테 한 대 맞고 싶어서 작정한 것 같았다. 나는 뭐라 말하나 끝까지 들어 볼 심산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레이는 내 모욕을 참지 못했다.
그의 살의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게일은 적어도 세 번쯤 죽었을 거다.
“무례하군요. 당장 사과하시죠.”
게일은 못 들은 척하며 이어 말했다. 레이는 발끈하여 손을 움찔 떨었지만 내가 그의 약지를 살며시 잡자 손가락을 얽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이 유망한 정령술사의 마음도 뺏었고……. 그간 내가 혜라 양에게 느낀 건 무례함밖에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내가 놓친 게 있긴 한 모양이야.”
“그래서 요지가 뭐죠?”
“나는 맛있는 건 아껴 먹는 편이네.”
“미쳤습니까?”
그 말은 언젠간 날 함락시키겠다는 뜻인가? 나는 레이가 당장이라도 게일을 두들겨 팰 것처럼 몸을 움찔거려서 그의 발을 지그시 밟았다. 그리고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별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너무 자신 있게 해서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모두가 탐내는 보석은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고 말이야.”
워후, 그날 이후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나 보군.
나는 업신여기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뇌 없는 깡통이 말할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기분도 안 상했다. 게일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더욱 결심을 다졌다.
“두고 보게. 곧 혜라 양은 내게 안달복달 매달릴 테니.”
“열심히 해 보세요.”
정복 욕구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레이를 끌고 숙소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게일은 일단 오늘은 선전 포고에서 만족하기로 했는지 따라오지 않았다. 하긴, 쫄래쫄래 따라오는 것도 모양 빠진다.
게일이 반대 방향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꾹 참았던 의문을 밖으로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