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덕분에 걱정 어린 말을 쏟아 놓으려던 레이는 한발 늦었다는 표정을 했다.
“나 오기 전까지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
“네 옆에서 떨어지라는 협박 듣고 있었지.”
저 말이 진짜일까? 고작 같잖은 협박 때문에 게일을 족치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나는 레이를 빤히 쳐다보다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주억였다.
“뭐, 너랑 게일 둘 중 하나 선택하라고 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너긴 하지.”
나는 레이의 표정을 보고 재빨리 덧붙였다.
“그리고 물론 난 괜찮아. 게일이 하는 말은 사람 말처럼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그 5분 때문에 남은 하루 내내 기분 나빠하기엔 내 시간이 너무 소중하거든.”
레이가 한참 눈을 마주하더니 이윽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을 알고 있어.”
정말 괜찮냐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그래서 고마웠다. 나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제이든이 커피 심부름을 시켜서 따끈따끈한 라테를 들고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 찰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이든은 스트레스로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데이타스 때문에. 아무래도 더스트번에 가야겠군.”
도대체 무슨 보고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오염된 치료 물약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전국으로 퍼졌고, 고통을 호소하다 못해 급사하는 사람들은 속출하는데 약의 안정성은 보장할 수 없어졌으며, 크바리엣 부족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니 어째. 가서 담판을 지어야지.
“결국 그렇게 되는군요. 직접 가시나요?”
“사안이 사안이니 그래야겠지. 이번 달 일정 비워 놔.”
방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나는 한 템포 쉬었다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설마 저요?”
“그래 너. 우리 둘만 갈 거야.”
“……예?”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아 멍청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제이든은 내 마음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져 놓고선 태연하게 업무를 봤다. 그가 분주하게 펜을 움직이며 말했다.
“더스트번 관련 자료 줄 테니까 숙지해 놔.”
“예?”
“황궁 도서관 관리인한테도 말해 놓을 테니까 기밀 자료도 한 번 읽어 보고.”
와우. 제이든이 기밀 자료까지 언급한 이상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나는 스물두 살이나 먹고 생떼 부리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얼굴 곳곳에 간절함이 묻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로 할리가 아니라 저랑 간다고요? 아니, 저보다 할리가 더 편하지 않으세요?”
네 애착 인형은 내가 아니라 할리잖아! 제발 지금이라도 잘못 말했다고 하고 문밖의 할리를 불러오라고 명령해 주라.
풍문 속 크바리엣 부족이 얼마나 흉악하고 난폭하고 성질이 나쁜데, 어떻게 그런 곳에 제이든이랑 단둘이 가?
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애절하게 제이든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무정한 제이든은 단칼에 거절했다.
“정치할 때 편하고 말고를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쟤가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네. 나는 차마 꼬투리를 잡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럼 할리가 혼자 남잖아요. 왜 셋이서 가도 되는 걸 굳이 둘만 가야 해요?”
더스크번은 워프 게이트를 이용해도 한 번 갈 때 반나절 이상이 걸리는 곳이다. 게다가 원주민들을 조사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상 현상을 찾으려면 적어도 하룻밤을 묵어야 할 텐데…….
아무리 이게 공적인 일이라고 해도 나는 제이든과 낯선 타지에서 하루 이상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의식주까지 내가 다 책임져야 할 텐데 그게 쉬운 일이던가?
제이든이 신경질적으로 탁, 펜을 내려놓고 나를 째려보았다.
음, 내가 과하게 쫑알거리긴 했지. 나는 자숙하겠다는 듯 눈을 내리떴다.
“왜 굳이 둘만 가야 하냐고? 그 이유는 곧 내가 줄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을 테니까 그쯤 하고 이제 나가. 정신 사나우니까.”
제이든이 만사 귀찮아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부들부들 떠는 주먹을 숨겼다.
***
“뭐라고!”
퇴근 후, 나는 제이든이 준 자료를 읽다가 소리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침대 위로 노곤하게 늘어졌던 몸이 펄쩍 튀어 올랐다.
“진짜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지?”
더스크번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그동안 나는 그게 괴담 같은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기밀 도장이 찍혀 있는 서류에 따르면, 더스크번은 소문 그 이상의 곳이었다.
서류는 더스크번 근처에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들의 일화는 제각각 달랐다.
얼마 전 더스크번에 다녀온 배달자는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뿌연 시야 어딘가에서 소름 끼치는 짐승 울음소리가 울리고, 썩은 냄새가 사위에 진동했다고 덧붙였다. 마치 부패하는 시체들 사이에 들어온 것처럼.
한편 그 전대의 배달자는 나무가 우성한 산림을 보았다고 말했다. 풀벌레 하나 없이 고요한 산속과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없는 산길, 그리고 미로처럼 맴도는 듯한 느낌.
그는 아무리 걸어도 마을은커녕 사람 발자국 하나 찾지 못했다고 부연했다.
시간을 거슬러 최초의 배달자는 평화로운 초원과 맑은 강을 보았다고 했다. 하얀 나비가 날아다니고 향긋한 꽃 냄새가 풍기는 그곳은 극락의 세계와 닮아 있었다고 한다.
목격담은 모두 달랐지만, 단 한 가지 일치하는 점이 있다. 바로 최초의 배달자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배달자까지 단 한 번도 크바리엣 부족을 직접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환상 속에 헤매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거래가 끝난 뒤였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등 뒤엔 약초가 수북이 쌓여 있고, 품 안의 거래금은 사라졌다나?
“근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요…….”
이쯤 되니 크바리엣 부족과 거래하고 간간이 편지를 주고받는 게 거짓말 같았다. 배달자를 무조건 한 명으로 제한하는 것도 신비로움을 유지하기 위해서일까?
“아무래도 나…….”
베일에 싸인 마을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베일이 아니었다. 더스크번은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마 우리는 그 벽을 평생 부수지 못할 것이다.
“……망한 것 같지?”
이건 똥이다. 나는 아주 지독한 똥을 밟아 버렸다.
***
더스크번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지인들의 반응은 폭풍보다 격렬했다.
할리는 진심 어린 애도를 보내는 한편, 자기는 안전한 사무실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가 제이든이랑 개고생하고 있을 때 펜이나 휘두르고 있을 할리를 생각하자니 너무 약이 올랐다.
레이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미래를 걱정했다. 그 또한 더스크번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기사단을 이끌고 가도 모자랄 곳에 제이든과 단둘이 간다고 말하자 인정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하긴, 제이든이 명함만 화려하지 마법이나 정령술 같은 실속 있는 능력은 없다. 그래도 검술 실력만큼은 내로라할 정도라서 나는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될 거라고 도리어 레이를 다독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방금 막 아로네에게 내 출장 소식을 전한 참이었다. 역시나 아로네는 왈칵 분노를 토했다.
“그 더스크번에 제이든이랑 단둘이 간다고? 제정신이래?”
내 주변인들이 이렇게나 날 걱정해 주니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그동안 내가 인간관계를 잘 닦아 놓긴 했구나. 알찬 삶을 살아온 걸 확인받은 것 같아서 뿌듯했다. 나는 이제 해탈해서 허허 웃었다.
“아로네, 난 괜찮아.”
어제 보고서를 읽었을 때는 전혀 괜찮지 않았고, 오늘 아침에도 여전히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태평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아로네가 지금 당장 제이든의 목을 치러 갈 것 같았다. 아무리 상대가 제이든이라고 해도 살인에 동조하는 건 아무래도 별로였다.
아로네가 퍽도 그러겠다는 듯 비소를 지었다.
“괜찮은 게 더 이상해.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래?”
“……알지. 너무 잘 알지.”
“그럼 당장 제이든한테 가서 못 하겠다고 말해. 다른 데는 몰라도 거긴 절대 안 돼.”
아로네는 더없이 단호했다. 아로네가 얼마나 결의에 차 있었냐면, 한 번 올 때마다 500골드 이상씩 쓰고 가는 단골손님마저 돌려보낸 뒤 가게 문을 닫았다. 왜냐고? 내 출장을 막기 위해서!
그런데 말이다. 주변 사람들 반응이 극적이다시피 격렬하니 막연한 두려움 사이로 환장할 호기심이 샘솟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나는 더스크번에 가기 싫으면서도 동시에 그곳이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는 걸까 의문했다.
심지어 그들은 얘기만 들었지 단 한 번도 그 근처에 가 본 적 없다. 공식적인 서류도 오로지 최고위층만 열람할 수 있어서 그들이 아는 소문의 대부분은 부풀려진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욱 두려워하는 걸까? 영원한 비밀은 없는데 더스크번은 예외라서? 그럼 만약 이번 출장이 기적처럼 잘 풀려서 나와 제이든이 그 비밀을 풀어낸다면 어떨까. 그때도 내가 능력에 비해 과소평가될까?
나는 어떤 형식으로든 내 취급이 나아질 거라 확신했다. 덕분에 내 의지는 어젯밤 잠들기 전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강한 호기심과 야망뿐.
나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게 마음 정리가 끝났다는 사인이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았다. 아로네는 탄식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난 갈 거야. 그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그리고 이번 기회에 제대로, 진짜 제대로 내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