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나는 제이든이 도대체 언제 행동을 개시할까 애타게 기다렸다. 세상에, 그렇게 긴 일주일은 생애 처음이었다.
내 기도가 하늘에 닿은 모양인지 드디어 오늘, 제이든이 퇴근하려던 날 붙잡아 세웠다.
할리는 동정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건 걔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거다. 제이든이 왜 굳이 업무 시간을 내버려 두고 퇴근 시간에 날 불렀겠는가? 나랑만 하고 싶은 아주 긴 얘기가 있는 거겠지!
마음속에서는 난리 블루스를 추고 난장판이었지만 표정만큼은 평온함을 유지했다. 두꺼운 문을 닫자 제이든이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그린 듯이 웃었다. 그는 속내를 감출 때 곧잘 저런 미소를 짓곤 했다.
“무슨 일 있나요?”
문득 말에도 텍스트 대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일’이라고만 말해도 알아서 상대방이 ‘있나요?’라고 이해하게. 참나, 몇 개월 동안 저 말을 얼마나 했던지 아주 입에 붙을 것 같다.
제이든은 확실히 마음 정리를 끝냈는지 시선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확신을 갖고 물었다.
“공녀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어서 남으라 했다.”
그럼 그렇지. 나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폈다.
“뭔데요?”
“공녀와 에단, 그 둘 정말 단순한 친우 사이가 맞나?”
제이든은 긍정도 부정도 둘 다 듣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포커페이스에 뛰어나서 흐릿하게 드러난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굳이 명명하자면 질투쯤 됐다.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닌 만큼 나는 제이든을 한번 떠보기로 했다.
“글쎄요……. 아마?”
제이든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난 정확한 답을 원하는데.”
“전 둘이 친구라고 생각해요. ……같이 공식 석상에 올 정도로 친할 줄은 몰랐지만요.”
사실 사건의 전말은 그저 우연이 겹쳤을 뿐이다. 아로네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작업하다가 뒤늦게 출발했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마차의 바퀴가 돌멩이에 걸려 터져 버렸고, 기막힌 타이밍에 에단이 나타났다. 마침 에단은 가기 싫다고 버티다가 수하들의 등살에 못 이겨 늦게나마 개장식에 가던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둘을 친구라는 범주 안에 묶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만나기만 하면 맨날 가시 돋친 말만 주고받는데 걔네를 친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에단이 꾸역꾸역 의상점에 출석 체크를 하는 걸 보면 어떤 식이로든 유대감이 형성되긴 한 것 같았다. 아니면 마탑이 어지간히 지루하던가.
어쨌든 이런저런 사정을 모르는 제이든에게 내 말은 기폭제가 되었다. 제이든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네?”
“뭘 또 그렇게까지……. 아니, 근데 이런 건 왜 물어보세요?”
나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짜증 났다.
“그건 알 거 없고, 4일 뒤로 예약해 놔.”
“……네? 뭘 예약해요?”
제이든이 답답한 듯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려 애썼지만 눈빛에서 드러나는 선명한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4일 뒤, 디아즈 영애의 옷을 맞출 거야.”
“……어디서요?”
내가 생각하는 그게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설마 아로네 가게는 아니겠지. 요즘 아로네가 패션계의 떠오르는 별이라 불려도 많고 많은 의상점 중에 굳이 거길 고르진 않겠지.
“공녀의 의상점에서.”
나는 간신히 험한 말을 속으로 삭혔다.
“굳이 거기서요?”
이번만큼은 제이든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벨라랑 거기에 가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데? 질투 작전이라도 벌이려고? 내가 경악한 것을 보고 제이든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가 도전적으로 말했다.
“그래, 거기서.”
“왜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이든은 말없이 문을 가리켰다. 나는 미소라는 걸 지어 보이며 분부대로 사라져 줬다.
기숙사로 향하는 내내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참나, 나한테 정보는 쏙 빼먹었으면서 정작 재밌는 광경은 못 보게 할 거다, 이거지?
두고 봐. 어떻게든 네가 펼친 기행을 전해 듣고 빠짐없이 글로 남겨 두겠어. 그리고 죽기 전에 꼭 경매장에 팔아넘겨야지.
나는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참았던 불평을 입 밖으로 쏟아 냈다. 만약 제이든이 전에 내가 했던 말을 신경 써서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 거라면 날 과소평가한 거다.
***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서너 번씩 레이와 산책했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그냥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레이와 수다를 떨며 익숙한 길을 밟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저녁을 먹고 난 뒤에 걸었는데, 할리는 우리 둘 사이에 낄 마음은 추호도 없다며 빠졌다. 레이한테 따로 부탁이라도 받은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칼 같은 태도였다.
곧 겨울이 오려는지 해가 점점 짧아졌다. 아마 더스크번으로 출장 갈 때 즈음에는 두꺼운 외투를 입어야 할 듯했다.
끝을 직감한 태양이 남아 있던 모든 힘을 쥐어짜 내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레이의 머리칼이 물을 잔뜩 머금은 장미처럼 변하는 광경은 요즘 내가 좋아하게 된 것들 중 하나였다.
물론 그 사실을 레이는 몰라야 했다. 아직까진.
우리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낙엽이 진 길을 걸었다. 낙엽 밟히는 소리가 간간이 울렸다. 레이가 생각만 해도 설렌다는 듯 들떠서 말했다.
“라크리마 호수 기억나?”
“버드나무가 예쁜 곳?”
“응, 거기.”
아무렴 그곳을 어떻게 잊을까. 명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풍경도 인상 깊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아로네와 말다툼을 했다는 점에서 라크리마 호수는 역사적인 장소라고도 할 수 있다.
“기억나.”
“이번 일요일에 거기로 소풍 갈래? 가을 풍경도 예쁘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출장 준비에 바빠 주말까지 헌납하며 더스크번과 크바리엣 부족에 대해 공부하는 요즘이었다. 또한 시중에 나온 약초 이론서를 모두 읽느라 정말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바쁘면 할 수 없고…….”
레이가 풀 죽어서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삐죽 나온 입술이 조금 귀여워서 나는 저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홀라당 속아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홧김에 말했다.
“으으, 알겠어. 가자.”
“정말?”
레이가 언제 시무룩해했냐는 듯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을 보니 충동적인 선택이 정말 옳았을까 하는 의문도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해가 지기 전에 들어오자.”
“네 말이라면 뭐든 들어야지.”
저번의 그 《짝사랑에 성공하는 100가지 방법》 때문인지 말은 잘했다.
나는 레이의 팔을 아프지 않게 툭 치고 앞서 걸었다. 레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같이 가자며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는 데이트 아닌 데이트에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아래로 내려갈 줄 모르는 그의 입꼬리를 보며 남몰래 웃음을 참았다.
그러나 나름 오붓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당장 고막을 세척하고 싶게 만드는 목소리를 듣고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레이도 짜증스레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어깨동무한 그 상태로 뒤돌아 게일을 노려봤다.
“이런 이런……. 오랜만이네, 레이몬드 군. 그리고 혜라 양.”
게일이 내게 저질스러운 윙크를 던졌다. 나는 레이의 턱에 힘이 실리는 것을 흘긋거리곤 일단 참으라는 듯 그의 등을 두드렸다. 게일이 젠체하며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질문 하나 하지. 혜라 양, 과연 그게 최선의 선택일까?”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용병일 하다 겨우 취직한 풋내기가 최선이냐고 물은 걸세.”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나는 레이를 쳐다보았고 그의 창백한 안색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레이는 고요히 분노했다.
“뒷조사하셨습니까?”
“하면 안 되는 거였나?”
“하면 안 되는 게 상식이죠.”
“자네 얼굴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걸 어쩌겠는가. 찜찜함을 그대로 놔두면 큰 화로 돌아오는 법인데.”
뻔뻔하기까지 하네. 게일 저 망할 놈이 황후 궁 관리인만 아니었어도 진작 입을 잡아 뜯었을 것이다.
레이는 기막히다는 듯 실소했다. 어쩐지 일그러진 눈매에는 층층이 쌓인 세월의 한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추하십니다. 그 나이 먹고.”
“혜라 양이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보군. 자고로 남자란 와인 같은 존재라네. 싸구려 술만 먹으니 잘 모르겠지만.”
“누굴 보고 싸구려라는 건지.”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레이를 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게일을 만날 때마다 도망치듯 떠나는 게 통탄스러웠다.
더 화나는 점은 게일은 다음에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고, 그때도 나는 이렇다 할 해결책을 강구해 내지 못하고 결국 자리를 피할 거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참을 걸어 인적 드문 곳에서 멈춰 섰다. 나는 벤치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이마에 맺힌 땀을 쓱 닦았다.
레이는 앉지도 않고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나는 그의 팔을 끌어 옆에 앉히고 말했다.
“저 새끼 진짜 뭐야? 뒷조사까지 하고 완전 또라이 아니야?”
“그러게. 싫다는 애한테 왜 자꾸 수작질을 부리지.”
레이는 연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오른발을 달달 떨었다. 그가 뒷조사를 당했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게일의 더러운 추파만 신경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면전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았는데도 내 걱정이 돼?”
“그럼 누구 걱정을 해?”
레이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의아함으로 가득 찬 얼굴이 믿기지 않아서 헛숨을 뱉었다. 모욕을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으려면 인생의 우선순위가 어디 있어야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