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6화 (96/138)

<96화>

황태자랑 간다고 했을 때도 기겁하던 애들인데 사실은 혼자 갔다고 하면 얼마나 난리를 칠까? 다른 애들은 그렇다 치고 아로네가 제이든을 죽이겠다며 달려들지는 않을지 걱정됐다.

물론 레이도 만만치 않다. 날 뒤쫓아 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음, 무조건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돌아가야겠군.”

나는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가져온 무기를 차근차근 살폈다. 공격 스크롤은 주머니와 양말 사이에 끼워져 있고, 단검은 허리춤에 매달아 놨고, 부적은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넣어 놨다.

나는 배낭 옆 주머니에 꽂은 끈적이 그물 총까지 그대로인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그것만 있다면 적이 다가와도 방아쇠 한 발로 그를 끈적이 그물 안에 가둬 둘 수 있을 테다. 에단한테 뇌물을 받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확실히 에단 걔가 사람 회유하는 법을 알아. 열심히 보고 자세하게 썰 풀어 줘야지.”

비록 마법으로 보호되는 비밀 유지 서약에 사인하긴 했지만 차기 마탑주로 불리는 에단이라면 그런 마법쯤이야 손쉽게 해제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내가 제정신으로 돌아가야 가능한 얘기지만.”

건국 초기부터 더스크번과 제국을 오가는 배달자는 까다로운 시험하에 단 한 명만 선발된다.

첫 번째, 입이 무거울 것. 두 번째, 체력이 강할 것. 세 번째,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정신력을 가질 것.

얼핏 보면 단순한 조건들이지만, 사실상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한 번 선발된 배달자는, 그가 못하겠다고 포기 선언을 하지 않는 이상 대개 죽을 때까지 일한다.

제국 역사상 임기를 채운 사람은 단 다섯 명뿐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벌러덩 누워서 흔들리는 천장의 조명을 바라보았다. 갈 길이 바빠서 점심도 샌드위치로 대충 때웠고 벌써 워프 게이트도 세 개나 건넜다. 그런데도 더스크번은 한참 멀리 있어서 족히 4시간은 더 가야 했다.

다시 말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능력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충분했다. 아무리 내가 넉살이 좋다고 해도 적대적인 크바리엣 부족한테까지 그 능청스러움이 통할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이번 만남도 겨우 성사된 거였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난 어찌 되었건 혼자서 진상 규명을 해야 해. ……그런데 만약 내가 엄청난 성과를 들고 상경한다면?”

그러면 더 이상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하지 않을까? 게일 따위의 피라미도 손쉽게 처리하고, 이따금씩 날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나와 말다툼하는 사람들도 ‘감히’라는 단어를 덜 운운하지 않을까?

“……할 수 있을까 의문하는 게 아니라 해내야 해. 반드시.”

나는 꼴도 보기 싫어서 외면하고 있던 금고를 무릎 위에 올려놨다. 로켓을 열자 물방울 모양의 사파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이하게도 금고에는 열쇠 구멍이 없었다. 대신 본디 열쇠를 꽂아야 했을 자리에 물방울 모양 구멍이 나 있었다. 그 자리에 사파이어를 끼워 넣자 잠금 풀리는 소리가 났다.

“……이게 뭐야!”

요약해 놓은 자료가 있다더니 웬 책 한 권이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정독하고 나면 딱 맞춰서 더스크번에 도착할 것 같은 두께였다. 문득 머리가 지끈거려서 사탕 두 개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어디서 무슨 소리가 안 들리나요? 제 멘탈이 나가는 소리가요…….

***

제이든이 직접 작성한 그 노트는 곳곳에 주석이 달려 있었다. 그 정보의 질이 기밀 서고에서 봤던 자료와 차원이 달라서 내심 감탄했다.

내 요약 노트는 제이든의 것에 비하면 시험 전에 급하게 보는 3분 개념집에 불과했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논문 하나를 쓴 제이든이 놀라울 뿐이다.

황태자 정도 되면 모든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럼 그 많은 걸 다 읽고 정리한 걸까?

왜 제이든이 신뢰를 운운하면서까지 내 등을 떠밀었는지 알겠다. 나라도 자료 조사한 게 아까워서 제정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까지 했을 것이다.

4시간 동안 눈알이 빠져라 읽으니 저절로 중요한 정보는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제이든이 짧고 굵게 중요한 것만 정리해 줘서 암기가 더 빨랐다.

“그러니까…… 아직 베일에 싸인 건 데이타스 채집 방법이지?”

크바리엣 부족만이 데이타스를 채집할 수 있는 이유는 알았다. 환각을 일으키는 성분이 더스크번을 둘러싼 영구적 안개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외부인은 안개 속에 들어가자마자 정교한 환각을 보지만, 크바리엣 부족은 안개를 견딜 수 있도록 태어난 덕분에 현실의 맑은 하늘을 본다.

그럼 여기서 의문 하나. 그간 배달자들은 제각각 다른 환각을 봤고, 기막힌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상의 세계는 점점 황폐해졌다. 꽃이 지고 따스함이 사라지며 썩은 냄새가 풍기는 환각. 과연 그게 우연일까?

“나는 무슨 환각을 보려나.”

최근 배달자가 본 환각은 공포 게임의 튜토리얼처럼 으스스했다. 뭐든 간에 살해당하는 환각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데이타스 약초에도 의뭉스러운 점이 있다. 제국의 식물학자들이 데이타스 재배에 번번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존재하는 모든 재배법을 시도해 봤지만 데이타스는 번번이 하루 만에 시들었다.

“왤까? 어쨌든 데이타스도 식물이니 그 많은 재배법 중에 하나쯤은 얻어걸릴 법도 한데.”

크바리엣 족장은 이번 만남을 마지못해 허락하면서 그 조건으로 단독 행동을 제한했다. 덕분에 조사 내내 부족장은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닐 예정이다.

자유롭게 다니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데이타스의 비밀을 알아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전에 부패의 원인을 알아내야겠지만.

“……그런데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

나는 턱을 괴고 빨간색 잉크로 쓰인 필기를 바라봤다. 흑백 세상에 나타난 유일한 색은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 있었다.

「데이타스 약초는 질병을 몰아내고, 부러진 뼈를 잇고, 출혈을 멈추고, 새살이 돋아나게 해 준다. 기적을 일으키는 약초를 상식의 틀에 가둬도 되는 것일까?

……신의 축북이라 불리는 데이타스가 만약 타락했다면? 다시 말해, 저주를 받았다면?」

나는 노트를 탁 덮으며 마지막 구절을 읊조렸다. 수수께끼를 푼 사람이 쓴 것처럼 그 구절에는 유난히 감정이 섞여 있었다.

“타락? 저주?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분명 데이타스 약초는 한낱 식물일 뿐인데 어떻게 타락이나 저주와 연관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토양 오염이 그럴듯하지 않나?

아무리 고민해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접 발로 뛰며 이상한 점을 찾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똑똑. 마부가 문을 두드렸다. 말을 못 하는 그는 내게 다 왔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나는 무거운 배낭을 들쳐 메고 척박한 땅을 밟았다. 이곳은 벌써 한겨울의 공기가 만연했다.

마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치듯 마차를 몰았다. 점점이 멀어지는 마차의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다가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었다. 눈앞의 안개는 곧 신비한 사건이 일어나리라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으로 한 발자국 발을 내디뎠다. 어디에서도 맡아 본 적 없는 끔찍한 냄새가 콧등을 세게 치고 지나갔다.

“……아 토 나올 거 같아.”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서 끔찍한 악취는 더욱 강해졌다. 혼절할 것 같은 정신을 붙들고 나는 한참 동안 심호흡했다. 종국엔 쓰러지듯 주저앉아 질끈 눈을 감고 어지러움이 가시길 기도했다.

와중에도 강렬한 향기는 끊임없이 기도를 타고 넘어왔고, 설상가상으로 소름 끼치는 비명이 사방에서 울렸다. 나는 번쩍 눈을 뜨고 주의를 둘러보았다.

시야를 촘촘히 메웠던 안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부패한 시체 산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목구멍이 막힌 사람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졸도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시체 위를 떠다니는 파리 떼의 날갯짓 소리가 비명 소리와 합쳐져 더욱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화산재로 뒤덮인 것 같은 하늘빛이 사실적이라서 등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에도 나는 굳은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내가 고작 이런 환각에 질 줄 알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다. 갈 길이 바쁜 와중에 충격에 빠져 있을 여유 따위 없었다. 나는 스크롤을 손에 쥐고 죽음의 산을 가로질렀다.

***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토악질이 나올 것 같던 순간, 마법처럼 환영이 사라지고 코끝을 찌르는 악취는 절정에 다다랐다. 나는 예고 없이 밝아진 시야가 당황스러워 얼굴을 찌푸렸다.

눈이 차츰차츰 빛에 익자 일렬로 선 무리가 보였다. 그들은 새하얀 소복을 입고 무기력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간간이 깜박이는 눈이 아니었다면 박제된 인형이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중 유일하게 화관을 쓰고 있는 남자가 내게 다가왔다. 탁한 동공이 지금껏 봤던 시체의 그것 같아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민야라다. 더스크번을 다스리고 있다.”

특이한 말투였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걸까 생각하며 나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입니다. 혜라라고 불러 주세요.”

악수하는 손이 억셌다. 적대심을 감출 마음이 없나 보지? 나는 애써 평온함을 유지했다. 민야라가 의아한 눈길로 내 등 뒤를 흘깃거렸다.

“황태자 전하가 직접 오는 걸로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특이한 말투가 크바리엣 부족의 특징인 것 같다.

“사정이 있어서 저 혼자 왔습니다. 혹시 이게 문제가 될까요?”

“사람은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그럼 환영 만찬부터 즐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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