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38)

<98화>

나는 감에만 의지하여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폭풍의 눈에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은 두렵기보단 오히려 흥분됐다.

깊이 들어갈수록 나뭇가지의 얽힘은 더욱 복잡해졌고, 악취로 인한 두통은 더욱 강해졌다. 생명을 앗아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치명적이었다.

“……겁나 아프네 진짜.”

이 고통을 혼자만 느껴서 너무 억울했다. 정령의 기운을 느꼈을 때는 내가 특별한 것 같아서 마냥 좋았는데 지금은 무슨 대가를 치르든 후각을 마비시키고 싶었다.

고난의 길 끝에는 쿠카리에가 있었다. 그는 반으로 댕강 잘린 고목 앞에 서있었다. 나는 인사 따위 생략하고 다짜고짜 물었다.

“여기 있는 나무들이 데이타스 약초의 원천인가요?”

쿠카리에는 애달픈 눈빛으로 나무를 쓰다듬었다. 애정 어린 손길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다루는 것 같았다.

“맞다. 데이타스는 나무속에서 자란다. 나뭇가지나 몸통을 자르면 데이타스가 나온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꽃처럼 개화하는 게 아니라 나무 안에서 자란다고요?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만약 그렇다면 왜 식물학자들이 데이타스 재배에 번번이 실패했는지 설명된다. 근데 상식적으로 어떻게 식물이 나무 안에서 자라지?

“데이타스는 신이 내린 축복. 신은 전능하다.”

하루 종일 느끼는 거지만 여기 사람들 화법 때문에 정말 환장할 것 같았다. 딱딱 끊어 말해도 의미는 전달된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모든 걸 말해 주신다고 하셨죠. 그 얘기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쿠카리에는 말없이 나를 다른 나무로 데려갔다. 그 나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뭇가지를 잃은 채였다. 쿠카리에는 비슷하게 훼손된 나무를 약지 끝으로 이었다. 그가 침울하게 말했다.

“족장은 미쳤다. 금기를 어기고 돈에 현혹되었다.”

“더 자세히 말해 주시겠어요?”

그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자 영롱하게 빛나는 금안이 보였다. 나는 생동력 넘치는 눈동자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저 빛을 왜 이제야 발견한 거지?

“데이타스를 채집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의식이 있다. 데이타스는 신성한 식물. 신께 허락받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요컨대 데이타스는 신성을 띤 식물이므로, 그걸 채집하기 전에 신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동안 빠짐없이 기도를 해야 한다. 족장은 오만하고 탐욕스럽다. 족장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렸다.”

“기도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 바엔 차라리 데이타스 하나라도 더 채집해서 팔았다는 거죠? 그래서 저주를 받았고요.”

“저주받은 데이타스는 정반대의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은 거구나.”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도 탐욕 앞에서는 별수 없구나.

민야라가 언제까지 이 사실을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오늘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내가 비밀을 알았다는 걸 그가 눈치채면 난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온갖 무기를 들고 와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었나요?”

“절반은 족장의 편이다.”

쿠카리에는 그 사실이 못내 화가 나는 것처럼 보였다. 불끈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부족장님의 편인가요?”

“아마도. 하지만 확신할 수 없다.”

“저주받은 약초 때문에 죽은 사람이 벌써 수만 명이에요. 지금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생각, 있으신가요?”

쿠카리에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는 그가 제발 긍정해 주길 기도했다.

“기회만 있다면 목숨을 다해 데이타스를 지킬 것이다. 나는 마을을 되찾고 싶다.”

쿠카리에는 망가진 데이타스 나무를 둘러보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힘주어 뜬 눈이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나는 태양처럼 반짝이는 저 눈동자가 민야라의 것처럼 죽지 않길 바랐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었지만 그가 이 마을과 데이타스에 엄청난 애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제이든에게 해결책을 떠넘기는 대신 내 직감과 능력을 믿고 도박을 해 보기로 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 같이 마을을 되찾아 봐요.”

……솔직히 말해서 가장 이성적인 행동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척 더스크번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면 족장은 무사히 조사를 넘긴 줄 알고 안심하고 있겠지. 사실 나는 모든 걸 알고 제이든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보고했는데도.

제이든은 황실 기사단을 보내 족장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할 거다. 그리고 데이타스의 재배법을 알았으니 크바리엣 부족을 몰아내고 본격적으로 데이타스 대량 재배를 시도하겠지.

재배법을 쏙 빼고 보고해도 결과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밀을 말해 줄 사람은 많았고, 제국은 강한 군사를 갖고 있으니.

그래. 귀족의 시각으로 봤을 땐 이게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난 평민이고, 그 선택이 쿠카리에에겐 죽음과도 같다는 걸 이해한다.

이번 출장에서 나는 고문 수준의 환각을 이겨 냈고, 적대 어린 시선에도 방긋방긋 웃으며 어떻게든 수상한 점을 찾아보려 애썼고, 평생 못 잊을 악취 때문에 쓰러질 것 같아도 꿋꿋이 참았다.

갖은 수모 끝에 알아낸 비밀을 제이든에게 알려 주면 과연 그 공로는 누구에게 돌아갈까? 비밀을 알아낸 건 나지만 기사단을 보내 사기꾼을 잡아들인 사람은 제이든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이든의 이름을 칭송할 것이다.

내가 그 꼴을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볼 수 있겠어? 애초에 이 출장을 계기로 내 능력을 증명해 내겠다고 다짐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문제를 해결할 거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대신 부족장님의 협조가 필요해요.”

반드시.

***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 지고 새로운 태양이 떴다. 한숨도 자지 못한 몸은 축축 늘어졌지만 정신만큼은 각성제 한 사발을 마신 듯 말똥했다.

나는 재차 짐을 확인하고 오두막 문을 열었다. 아늑했던 공간에 찬바람이 훅 들이닥쳤다.

거셌던 눈바람이 잦아들자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지붕 아래에 투명한 고드름이 생기고, 자갈길은 눈으로 뒤덮여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콧날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여전히 아리도록 차가웠다.

배웅을 해 주겠답시고 온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 줄지어 섰다. 자는 모습을 훔쳐봤던 남자가 첫 번째 줄에 서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 보니 홀쭉하게 패인 볼과 툭 불거진 광대가 더욱 눈에 띠었다.

나는 초점 잃은 동공을 인상 쓰고 바라보다가 혹여나 눈이 마주칠까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민야라가 탐색하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조사는 잘 마쳤는가?”

“글쎄요. 보는 눈이 많아서 조사하기 쉽진 않더군요.”

민야라는 입을 가리고 가증스러운 탄식을 뱉었다. 미묘하게 휘어진 눈이 만족감을 담고 있어서 저절로 턱에 힘이 들어갔다.

“멀리서 왔는데 소득 없이 돌아가서 유감이다.”

슬쩍 쿠카리에를 곁눈질하자 그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과장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허세 어린 말투는 덤이었다.

“소득 없다고 누가 그래요? 조사하기 어려웠다고만 했지 허탕 쳤다고는 말 안 했는데, 나.”

“……이해하지 못했다.”

민야라가 불길함을 느끼고 눈알을 굴렸다. 나는 가능한 한 활짝 웃었다.

“그쪽이 저지른 죄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내가 알게 됐다는 말이에요. 이제 좀 이해가 가시나?”

민야라는 순간 심장이 멈춘 사람처럼 눈을 홉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마을 사람들은 저게 무슨 말이냐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내 말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사람들만 얼굴을 험상궂게 굳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감히 발뺌하려 하는 게 괘씸해서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인간 하나 때문에 내가 한 고생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떠질 것 같았다.

“어디서 거짓말을 해? 댁이 금기를 어기고 데이타스를 마구잡이로 팔았다는 거, 증언해 줄 사람도 있거든?”

민야라가 홱 고개를 돌리고 쿠카리에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나는 세게 박수를 쳐서 분산된 주의를 다시 내게 모았다.

“이봐요, 족장 아저씨. 왜 애꿎은 사람을 나무라? 지금 그쪽이 집중해야 할 사람은 나야.”

나는 밤새 갈고 닦은 비웃음을 지었다. 한쪽 입꼬리만 비죽 올라가고 하찮다는 듯이 미간을 좁힌 표정인데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꽤나 열불이 날 거다.

“감히 내 마을에서…….”

민야라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내게 증오 어린 시선을 보냈다. 분노로 타오르는 눈빛이 내 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았다.

“그냥 순순히 인정해요. 왜 쉬운 길을 굳이 돌아가? 그리고 혹시 모르잖아요, 내가 황태자 전하한테 말 좀 잘해 줄지.”

나는 눈을 찡긋거렸다. 민야라는 분해서 뒷골 잡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흉흉한 기색의 사람들을 차근차근 둘러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판은 깔아졌고 이제 남은 건 협상뿐.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민야라가 귀청 떨어지도록 크게 고함을 질렀다. 핏발 선 눈이 독기를 담고 번뜩였다.

“잡아라!!”

내게 살기를 보내던 무리가 동시에 뛰쳐나왔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끈적이 그물 총을 꺼내 재빨리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조준은 완벽했다. 나는 끈적이 그물에 손발이 묶여 옴짝달싹 못 하는 사람들을 깔깔거리며 비웃었다. 그들이 금방이라도 다시 덤빌 듯이 눈을 부라렸다.

그래 봤자 할 수 있는 건 쓰레기봉투처럼 바닥을 굴러다니는 게 전부라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는 민야라에게 총구를 겨누고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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