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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00/138)

<100화>

일주일 내로 사형될 거 같은데 그사이에 날 죽이러 올 틈이 있을지 의문이다.

긴장감이 사라진 방에는 기묘한 편안함이 찾아왔다. 나는 하이라이트 장면을 위해 숨겨 두었던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이 순간을 위해 인고의 시간을 버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황제가 의아하면서도 꼼꼼히 글을 읽었다. 공백으로 비어진 서명란까지 보고나자 황제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놀랍군.”

나는 실룩거리려는 입꼬리를 아래로 잡아당기려 애썼다. 황제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지금으로부터 23시간 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쿠카리에의 양심 고백과 민야라를 몰아낼 계획. 그리고 쿠카리에가 타락한 마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나는 민야라를 제거해 주겠다고 확언하면서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 냈다. 바로 쿠카리에가 족장이 되어 망가진 동산을 회복하고 제국과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는 것.

우리는 쿠카리에가 족장이 됐다는 전제하에 이미 계약서를 썼다. 제국과 더스크번 사이의 교류를 전보다 활발히 하고, 품질 검사를 최소 1년에 네 번씩 하며, 데이타스 약초의 값을 30% 인하한다는 계약을.

쿠카리에는 이미 서명했고, 남은 것은 황제의 사인뿐이다.

“민야라를 사형시킬 계획이시죠? 지금 더스크번에 쿠카리에를 제외하고 마땅히 족장이 될 인물은 없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일주일 내로 쿠카리에는 족장으로 승계할 거예요.”

“그러나 변수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네.”

그래서 안전장치 하나를 해 놓았다. 나는 민야라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킬 경우를 대비해 쿠카리에에게 가진 스크롤의 대다수를 줬다.

쿠카리에의 진심이라면 충분히 마을 사람들의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일이 틀어진다고 한들 그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마을을 지킬 거다. 정확히는 데이타스를.

“그럼 일주일만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요? 쿠카리에에게 족장이 되면 제게 편지를 보내 달라고 했거든요. 저는 당연히 그가 편지를 보낼 거라고 확신해요.”

황제가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미소를 지었다. 실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거나.

그가 계약서를 서랍 속에 집어넣고 말했다.

“좋아. 자네의 말을 믿어 보지.”

됐다. 지겹고 힘들고 짜증 났지만 한편으로는 짜릿했던 출장이 드디어 끝났다. 나는 후련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

세상에서 가장 독한 사람을 꼽아 보라고 묻는다면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제이든의 이름을 말할 수 있다. 내가 윌터의 손에 데이타스 약초를 쥐여 준 게 고작 하루 전이다.

아무리 데이타스의 치유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몸이 낫자마자 바로 사무실로 출근하는 게 사람인가?

제이든이 내 보고를 진지하게 들으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내 과감하고도 현명했던 선택을 설명했다. 제이든은 불필요한 수식어를 알아서 걸러 들었다.

흡사 자기 자랑과도 같았던 보고가 끝나고, 제이든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입술을 휘었다. 어제 황제가 지었던 표정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물론 제이든은 극구 부정할 테지만.

제이든이 내 잘남을 담담히 인정했다.

“기대 이상이군.”

나는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절 믿는다고 하셨잖아요. 믿음에 보답하려면 이 정도 성과는 들고 와야죠.”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찡긋 윙크를 날리자 제이든이 질색하며 혀를 찼다. 나는 배꼽 잡아 대며 웃고 싶은 걸 참고 기계처럼 하하 웃었다. 제이든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군. 평소엔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굴던 네가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묘안을 생각해 낸 거지?”

좋아, 제이든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긴 했지만 이로써 더욱 명확해졌다. 나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검지로 내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원래 바보랑 천재랑 한 끗 차이라잖아요.”

제이든이 곧바로 내 말을 신랄하게 받아쳤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더니. 그 얘길 하고 싶은가 보군.”

“아, 진짜! 제가 데이타스 약초까지 드렸는데 서운하게 계속 그러실 거예요?”

이 문제에 관해선 할 말 많았다. 제이든이 며칠간의 고통을 떠올리고 미간을 찡그렸다. 도대체 어디서 바이러스를 묻히고 왔던 건지. 그때 제이든은 다시 생각해도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시끄러우니까 나가.”

와, 권력을 이용해 축객령을 내리겠다 이거지?

나는 깊은 배신감을 느끼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순순히 나가 주기엔 아직 제이든한테 볼일이 남았다.

제이든은 문득 무척 피곤해져서 마른세수를 했다.

“할 말 남았나?”

나는 웃음기를 싹 빼고 진지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도 이미 말씀드린 거지만, 쿠카리에는 무조건 제게 편지할 거예요.”

“어떻게 확신하지?”

더스크번에 일어난 일을 안 이상 제국은 그곳에서 행해지는 반인륜적인 짓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내 멋대로 맺은 계약의 여부와 상관없이 더스크번에 기사단을 보내고, 이번 일을 구실로 더스크번을 손안에 두려고 하겠지.

물론 내가 제시했던 일주일을 기다려 주긴 할 테다. 쿠카리에가 족장이 되어 계약의 효력이 발생하면 무력을 동원하는 것보다 큰 이익을 낳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마감기한이 넘어가는 즉시 제국은 행동할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황제와 제이든에게 그 계약은 중요하지 않았다. 현 족장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상황에서 쿠카리에가 고작 일주일 만에 적법한 전통을 따라 승계할 가능성은 매우 낮거든.

계약이 성사되든 말든 그들이 내게 감탄한 이유는 평민 여자가 홀로 악명 높은 더스크번에 가서 족장을 잡아오고, 부족장의 호감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요?”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는 데만 치중한 나머지 사람들이 곧잘 하는 실수.

“쿠카리에한테는 간절함과 결단력이 있거든요. 상황을 바로잡는 데 그거면 충분하죠.”

제이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의아함이 경험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날씨에 반해 인간은 가엽도록 나약하다. 때론 감당하기 힘든 폭풍우에 휩쓸려 방황하기도 하고, 때론 찌는 듯한 더위에 끝없는 무력함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혹한의 추위가 심장 깊숙한 곳에 숨은 작은 희망마저 얼리기도 한다.

그러나 때론 아주 사소한 것들이 혼돈을 잠재우기도 하고, 단비 같은 비를 내리기도 하며, 한 줄기 햇살을 선물하기도 한다.

내가 쿠카리에게게 본 사소한 힘이 바로 간절함과 결단력이다. 마을을 지키고자 하는 간절함, 그리고 족장의 뜻을 거스르고 이방인과 손을 잡는다는 결단력.

그 두 가지 요소만으로도 나는 감히 확신을 입에 담을 수 있다. 제이든도 그 영롱하게 빛나는 금안을 봤다면 내 말을 이해했을 것이다.

제이든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눈썹을 으쓱였다. 그게 본론이 아닌 걸 알고 있으니 빨리 말하고 나가라는 뜻이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좋았어! 이 정도면 밑밥은 깔렸고, 마무리는 쿠카리에의 편지를 받고 해야지.

“이게 다예요. 그럼 안녕히!”

***

오늘 오후, 친구들이 무사 귀환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조촐한 파티를 열어 주기로 했다. 장소는 할리의 방. 참여 인원은 당연히 매일 보는 세 명이다.

할리는 파티를 위해 방 청소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덕분에 레이는 아침부터 할리의 방으로 끌려갔다. 파티 주인공인 내가 할 일은 약속 시간까지 농땡이를 피우는 게 전부다.

나는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점심을 먹었다. 오늘따라 밥맛이 좋았다. 등 뒤에서 내 이름이 들리지만 않았더라면 완벽한 점심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혜라? 걔가 뭘 했다고 대단하다는 말이 많아?”

“걔가 황태자님 편찮으실 때 총대 메고 더스크번 갔다 왔잖아.”

나는 푹 익은 감자를 찍어 먹으려다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야, 뒷말을 생중계로 듣게 될 줄은 몰랐네.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어.”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 절대 그런 쉬운 소리 못 할걸?

“걔는 족장을 잡아 왔잖아. 너는 혼자서 그 크바리엣 부족의 우두머리를 잡아 올 수 있겠어?”

그래. 내 이름이 뜨거운 감자가 된 게 바로 민야라가 사형되면서부터였다. 사건이 워낙 커서 어쩔 수 없이 나 혼자 더스크번에 갔다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지.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어째 듣다 보니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았다. 어디서 들었더라? 최근은 아니고 아주 먼 옛날인데…….

“나 혼자로는 절대 무리지. 근데 그건 누구나 그럴걸?”

“걔가 혼자 해낸 일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어쩐지 여자가 인상을 찡그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프를 휘휘 저으며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라고 모함할지 조금 기대되기도 하고, 슬슬 열이 오르기도 했다.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보나 마나 누가 도와준 게 분명해. 왜, 그 여자 주변 인맥 보면 짱짱하잖아.”

“……소공작이랑 차기 마탑주 말하는 거야? 그 사람들이 도와줬다고?”

전개가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

나는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며 감정을 다스렸다. 그사이 남자는 당사자가 코앞에서 듣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잘도 헛소리를 지껄였다.

“당연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여자 혼자 어떻게 그 악명 높은 더스크번에서 살아 돌아와? 분명 차기 마탑주든 누구든 따라가서 걜 도와줬을 거야.”

여자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말했다.

“가만 보면 너 걔 되게 싫어하더라. 저번에 보좌관으로 승진했을 때도 엄청 욕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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