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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1/138)

<101화>

아, 이제야 기억났다. 악의적으로 내 업적을 까는 저 남자. 내가 재정부에서 일했을 시절 틈만 나면 나한테 일거리를 떠맡기던 사람이다.

“아니, 좀 웃기잖아. 딱 봐도 공녀 덕분에 낙하산으로 들어왔는데 공적이란 공적은 다 가져가는 게.”

오케이, 밥맛 다 떨어졌다.

나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먼저 나를 발견한 여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벌렸다. 남자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여자를 바라봤다.

“뭐야, 왜 그래?”

나는 남자의 어깨를 잘게 부술 기세로 아주 강하게 틀어잡았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홱 고개를 돌렸다.

“아악! 도대체 누가……!”

그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나는 남자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누구긴. 공적이란 공적은 다 가져가는 낙하산이지.”

남자는 마녀에게 목소리를 팔아 버린 인어 공주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네 열등감 표출 방식이 어떻든 상관 안 하는데 거기에 애꿎은 사람 끌어들이지 마. 그러고 살면 기분 좋니?”

나는 손바닥을 탈탈 털며 식당을 나왔다. 저 새끼 때문에 하루 다 망쳤다.

기를 쓰고 능력을 증명해 냈더니 내가 한 게 아니라네. 분명 쟤 같은 사람들이 더 많겠지?

어쩌면 내가 무슨 일을 해냈는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신분과 성별과 배경을 갖고 있느냐지.

“……그럼 난 뭘 한 거지?”

문득 자신이 없어졌다. 내가 뭘 하든 아무도 날 인정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전 세계로 도망치고 싶을 만큼 막막했다.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남은 시간을 죽였다.

***

할리와 레이가 준비한 파티는 근심 걱정을 잊게 해 줄 만큼 근사했다. 알록달록한 풍선이 날아다니고 바닥에는 레드 카펫과 꽃잎이 깔렸다.

레드 카펫의 끝에는 ‘제국에서 제일 멋지고 똑똑하고 유쾌한 혜라야, 살아 돌아와서 정말 기뻐’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나는 우울한 감정을 가리려고 평소보다 오버해서 리액션했다. 리액션하는 데 얼마나 집중했던지, 레이가 내 표정을 샅샅이 살피는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날이 날인 만큼 할리는 가장 아끼는 와인을 꺼냈다. 공작의 와인 창고에서 많이 보던 와인 라벨이었다.

술까지 들어갔겠다,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다. 반쯤 고주망태가 된 할리가 벌떡 일어나 내게 쓰러질 듯 상체를 기울였다. 레이가 정석적인 미소를 유지하며 할리를 약하게 밀어 제자리에 앉혔다.

할리는 의자 등받이 너머로 훅 고개를 꺾었다가 오뚝이처럼 휙 돌아왔다. 그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검지로 날 가리켰다.

“말해 봐. 내 부적이 가장 도움 됐지?”

풀린 눈을 보니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면 진상을 부릴 것 같았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참, 이거 참……. 내가 정보 알려 줄까?”

“음, 그럼 고맙지.”

자아도취 상태에 빠진 할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계속 피식거렸다. 저렇게 혼자 생쇼를 하고도 다음 날이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너무 신기했다.

이상한 주정 부렸다고 놀리면 극구 반대하며 도리어 내 기억을 의심하던 과거란!

나는 이번 기회에 할리의 코를 단단히 눌러 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사진 기사에 빙의하여 할리의 꼬장을 미친 듯이 기록하자 레이는 빼앗긴 관심이 섭섭해서 괜히 내 입에 청포도를 넣어 주었다.

취기에 살짝 달아오른 뺨이 마치 분홍색 블러셔를 바른 것 같아서 나는 레이의 예쁜 모습도 정성스럽게 찍었다. 나는 완벽한 피사체에 깊이 감동하여 탄성을 내질렀다.

“바로 그거야! 좋아! 아주 좋아!”

레이는 수줍어하는 듯싶다가도 내 열렬한 환호에 못 이겨 요구하는 대로 포즈를 취해 줬다. 우리는 한동안 화보 찍기 놀이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같이 셀카를 찍었다.

사이좋게 얼굴을 맞대고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은 아직 인화되지 않았음에도 레전드였다. 레이가 다소 들뜬 채로 말했다.

“인화하고 꼭 나한테도 줘야 해.”

“당연하지. 이건 우리 인생 샷이야.”

내 단호한 눈빛을 보고 레이가 못 말리겠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할리가 작게 투덜거리며 터덜터덜 침대로 향했다.

“나만 혼자지……. 나만 외로워…….”

그것이 할리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지다니 진짜 경이로운 애라니까.

“이제 그만 나갈까?”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쓰레기를 치우고 소등도 꼼꼼히 한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더스크번에 갔다 오는 사이에 수도는 이미 겨울맞이를 모두 마쳤다. 찬바람이 귀 끝을 휙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순간 소름이 오소소 돋아서 어깨를 떨었다. 그때, 간간이 스치던 손가락이 은근슬쩍 올라와 제 검지와 내 것을 얽었다.

나는 살짝 놀랐지만 태연한 척했다. 레이가 내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며 물었다.

“오늘 기분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었어?”

족집게가 따로 없네.

“어떻게 알았어? 완벽한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어디 있겠어?”

오늘만큼은 좀 몰라 줬으면 했는데.

내가 말해 주기 싫다는 듯 딴청만 부리자 레이가 중지도 얽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재미있는 거 보여 줄까?”

“……뭐 보여 줄 건데?”

“가 보면 알아. 어때, 나한테 네 기분을 풀게 해 줄 영광을 줄래?”

눈을 맞추며 씩 웃는 얼굴이 자신 있어 보였다.

“좋아.”

레이가 잘 선택했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가 중간에 도망가면 안 된다는 핑계로 손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나는 꼭 잡은 손을 보며 혹여나 내 심장 소리가 거기까지 닿을까 봐 걱정했다.

굳이 추운 밤에 산책하려는 사람은 우리뿐이라 산책로는 고요했다.

레이는 내 기분을 띄우려고 부러 평소보다 재잘거렸다. 눈물이 나올 만큼 우울한 건 아니었는데도 내가 처져 있는 모습이 엄청난 일인 양 구는 그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분수대 앞 벤치에 앉았다. 나는 레이가 주변에 사람이 있나 둘러보는 동안 분수대 꼭대기에 있는 석상을 바라봤다. 한 쌍의 커플이 다정히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언젠가의 가을밤 우리처럼.

물이 조르르 떨어지는 소리만 울리던 공간에 달콤한 미성이 수채화처럼 번져 나갔다.

“혜라.”

“……응?”

레이가 환하게 웃으며 밤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순간 그 미소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리다가 레이가 친히 내 고개를 돌려주고 나서야 하늘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꿈같은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커다란 범고래 무리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다 삼아 자유로이 헤엄쳤다. 범고래 정령은 별빛을 그대로 투과시켜 마치 반짝이는 점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처럼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광경은 평생 처음이었다.

“이게 도대체…….”

감탄하며 레이를 쳐다보자 그가 아직 더 남았다는 듯 입꼬리를 휘었다. 그가 입술 앞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비눗방울을 불듯 호 불었다.

그의 입김이 닿은 자리에 투명한 노란색 나비가 하나둘씩 피어올랐다. 나는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날개를 펄럭이는 나비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이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 내밀어 봐.”

나는 잠자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조심스럽게 펴진 손끝에 나비 한 마리가 사뿐 내려앉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마음이 따뜻하게 덥혀지는 느낌이었다.

“혜라, 나 봐 봐.”

어쩐지 먹먹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레이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화관을 내 머리에 씌워 줬다. 화관을 이룬 프리지아는 내가 유일하게 꽃말을 알고 있는 꽃이었다.

응원. 그래, 분명 응원이란 뜻이었다.

“너 진짜 뭐야?”

어떻게 사람이 이래?

“왜? 기분 좀 풀렸어?”

레이가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곤 그의 목도리를 벗어 얼음장처럼 굳은 내 손을 칭칭 감쌌다. 사실은 그의 손도 새빨갛게 부르텄는데도.

도대체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나는 손이 녹는 걸 생생히 느끼며 아찔함 또한 느꼈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레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간 레이가 내게 보여 준 진심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처음엔 그저 외모에 홀릴 것 같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저 애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커다란 애정이 멋쩍어서 부담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영원할 것 같은 애정이 경이롭기도 했다.

레이는 내 별난 구석을 이상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그대로 이해해 주고, 오히려 내가 특별하다고 말했다. 가장 고귀한 의미에서.

사실은 저 애 또한 나한테 특별하지 않나? 레이는 진심으로 날 위하고, 나와 함께하는 시간 중 1초마저 소중히 여기며 수많은 상실을 공감했다. 단언하건대 그건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이다.

“……응, 기분 풀렸어. 근데 있잖아.”

그러니 레이 쟤라면 귀찮고 성가신 연애라도 한번 해 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내 인생 최고의 위로를 해 준 저 아이라면 내 일상을 내어 줘도 되지 않을까?

나는 반쯤은 충동적으로, 그러나 강한 확신을 갖고 말했다.

“나랑 연애할래?”

레이는 뜻밖의 고백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 반응도 못 하고 눈만 끔벅이는 걸 보면 이게 정말 현실인지 자문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뺨을 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맞닿았다.

“미안, 너무 늦었지. 늦은 만큼 더 많이 말해 줄게. ……좋아해. 좋아해 레이야.”

레이가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널 더 좋아하게 만들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그가 내 얼굴을 금세 바스러질 꽃잎을 만지듯 살살 쓰다듬었다. 마주한 눈동자에서 이젠 참지 않아도 되는 애정이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나는 더 이상 그 과분한 애정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제9장: 후회남들 골탕 먹이기 대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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