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38)

<104화>

그러나 아로네가 제이든을 얼마나 힘들게 끊어 냈는지 뻔히 알면서 그 제안에 냅다 수락할 수도 없었다.

“아오……. 그냥 깔끔하게 훈장 주면 될 걸 또 뭐 하러 조건을 거냐.”

제이든이 아로네와 잘해 보겠다고 마음먹고 나를 징검다리로 이용하겠다고 결정한 이상 내가 이번 제안을 거절한다 한들 나중에 또 같은 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나는 유용한 패였다.

내가 언제 또 훈장을 받을 만한 업적을 세울지, 그리고 그럴 만한 일이 내게 할당될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기회가 왔을 때 잡는 게 낫겠지. 어찌 되었건 결론은 제이든과 손을 잡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 수락해야지. 근데 그렇게 순순하게 돕진 않을걸?”

제이든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막 내가 떠올린 것까지 염두에 뒀을 것 같지는 않다.

제이든을 ‘도와줄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다만 걸리는 건 아로네의 의사다. 내 계략에는 아로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의상점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

“이건 걔네들한테 복수할 최고의 기회야. 생각 있어?”

나는 교양 팀플에서 발표하던 경력을 살려 후회남들 골탕 먹이기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설명했다. 여기서 후회남들이란 제이든과 데네브를 의미한다. 이왕 골탕 먹일 거, 데네브한테도 그 기회를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도 포함시켰다.

“복수할 기회라…….”

아로네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내가 아는 아로네는 그를 아프게 한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새로운 관계를 쌓아 가지 않을 것이다. 그 고통을 되돌려 주는 거라면 모를까. 그가 조금 들뜬 기색으로 말했다.

“이번 달 매출량이 최고치를 갱신했다는 소식보다 네가 얘기해 준 게 더 설레네.”

“그럼 한다는 얘기지?”

“훈장도 받고 복수도 하고……. 당연히 해야지.”

아로네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기발하고 우스꽝스러운 계획을 세우리라 믿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해 거만하게 웃었다. 남을 놀려먹는 데에 있어서 나는 거의 신이었다.

“훗, 나만 믿고 있어. 사흘만 주면 기똥찬 계획서를 만들어 올게.”

“그런데 혜라, 만약 제이든이 눈치채면 어떡하지?”

절대 그럴 일 없겠지만, 제이든이 기만을 알아챈다면 아마 난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그러니 더욱 교묘하고 그럴듯한 장난을 쳐야 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아마 제이든은 마법으로 구속되는 각서에 서명하라고 할 건데, 우리한텐 차기 마탑주가 있잖아? 제이든 걔 의외로 그런 거 되게 맹신해서 절대 의심 못 할걸.”

그러고 보니 오늘은 웬일로 에단이 가게에 없었다. 지박령인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이긴 했나 봐.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갑자기 소파가 조금 더 아래로 푹 꺼졌다. 의아해하며 옆을 돌아보자 1초 전까지만 해도 없던 사람이 태평하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었다.

“으아아악!”

나는 벌러덩 뒤집어지며 괴성을 질렀다. 에단 이 무서운 놈, 생각하기가 무섭게 나타나다니!

내가 너무 놀라서 어버버하는 한편, 아로네는 익숙하다는 듯이 고아하게 차를 마셨다. 심지어 에단도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이쯤 되니 내가 과장하는 것 같아서 슬그머니 제자리에 앉았다. 에단이 쿠키를 베어 물려다가 멈칫했다.

“근데 아까 내 얘기 하고 있지 않았나.”

아로네를 쳐다보자 그가 괜찮다는 의미로 살짝 웃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에단이 미치도록 좋아할 거라 확신했다. 나는 인심 써 준다는 듯 새침하게 말했다.

“제이든이랑 데네브한테 복수해 줄 겸 장난칠 건데 너도 하고 싶으면 껴 줄게.”

에단이 선뜻 믿지 못하고 되물었다.

“황태자랑 소공작 말하는 거지?”

“어. 걔네한테 아주 엄청난 장난을 선사할 거야. 아로네랑 잘 지낼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하면서 그걸 빌미로 괴상한 짓을 하도록 유도하는 거지.”

“너…….”

에단이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기대돼서 미칠 것 같다는 눈동자 하나만으로도 그의 모든 감정이 전해졌다. 나는 답을 알면서도 괜히 물었다.

“어때, 낄 거야?”

“그걸 굳이 말해야 아나?”

나는 앞으로 잘해 보자며 에단에게 악수를 청했다. 에단이 정중하게 손을 흔들곤 짜 놓은 계획 있냐며 나를 들들 볶았다. 아로네는 일찌감치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작업실로 피신했다.

고로 나는 에단의 피 말리는 성격을 홀로 감당해야했다. 살…… 려…… 줘…….

***

요즘 할리는 점집에 다녀왔냐는 질문을 시도 때도 없이 하며 나를 들들 볶았다. 접때 술 취해서 한 말을 왜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나는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이룬 공을 고작 부적 따위에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할리의 생각은 달랐다. 심지어 그는 나를 점성술의 세계에 입문시키겠다는 터무니없는 포부까지 갖고 있었다. 이번 주 내내 망한 영업을 듣고 있자니 진이 쏙 빠져서 결국 항복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레이와 함께 그 용하다는 점성술사를 찾아가는 중이다. 첫 번째 데이트치고는 평범하지 않았다.

나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낯선 길을 둘러보았다. 화려함의 상징인 수도에 이런 낡고 인적 드문 길이 있는 줄 몰랐다. 레이는 할리가 그려 준 약도를 한 번 쓱 훑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갈림길 앞에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옳은 길을 찾았다. 맨날 헤실헤실 웃는 모습만 보다가 방금처럼 천재적 순간을 목격할 때 가슴이 뛰곤 했다.

나는 레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 사귀는 사이인데 거리낄 필요 없겠지.

“레이, 넌 예언 같은 거 믿어?”

레이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쌌다.

“어렸을 때는 믿었어.”

“지금은?”

레이는 잠시간 침묵했다. 두 번째 입김이 망연히 사라질 때, 그는 희망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내용에 따라 다를 것 같아.”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떤 걸 믿을 건데? 부자 될 거라는 점괘?”

“아니. 돈을 많이 벌고 말고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나로선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답변이었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눈으로 레이를 쳐다봤다. 최근의 내겐 돈과 권력이 가장 중요했다.

“정말? 진심으로?”

레이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찬 바람도 물리칠 것 같은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는 네가 제일 중요해.”

“그 말 되게 듣기 좋다.”

레이가 코끝을 맞대고 능청스레 말했다.

“평생 해 줄게.”

쟤가 저렇게 대놓고 플러팅 날릴 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나는 괜히 부끄러워서 레이를 천막 안으로 밀어 넣었다. 레이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손깍지를 껴 왔다.

천막을 걷자마자 점성술사가 우리를 맞이하리라 생각했건만, 생뚱맞은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것 같았다.

우리는 보라색 천에 줄지어 걸린 랜턴을 따라 걸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하가 뚫려 있나?

잠시 후, 낡은 판자를 얼기설기 모아 만든 조잡한 문이 나왔다. 울퉁불퉁하게 그려진 까마귀 그림에서 점성술사의 범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레이가 정말 문을 열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 또한 이 장소가 찝찝한 게 분명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모험 한번 해 보지, 뭐.”

내 뜻이 곧 레이의 뜻이었다. 레이가 똑똑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선반을 빼곡하게 채운 목적을 알 수 없는 유리병들이었다. 사람 눈알부터 시작해서 개구리 뒷다리, 상어의 이빨까지 별 희한한 게 다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내 주먹만 한 수정구, 그리고 어쩐지 구면인 것 같은 초록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담겼다.

“……어라?”

핏빛 도는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가 날 알아보고 빙긋 웃었다. 붉은 립스틱을 보자 여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또 보게 될 거라고 말했지?”

영원한 비밀의 길드장이 도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너무 황당해서 인사할 생각도 못 했다. 레이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타레스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양 쾌활하게 말했다.

“뭣들 해? 점괘 들으러 왔으면 앉아야지.”

***

일단 우리는 원형 탁자 앞에 앉았다. 천장 아래에 매달린 조명이 느리게 자전하며 안타레스의 얼굴 위로 별 모양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사방을 둘러싼 기이한 물건들이 날 압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혼자 왔으면 조금 겁먹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오른손을 감싼 온기를 느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안타레스가 영원한 비밀의 길드장이라는 건 피차 아는 바이다. 돈도 잘 버는 사람이 왜 이런 외진 곳에서 점성술사로 활동하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자기야, 눈앞에 보이는 걸 믿어.”

“……자기야?”

레이가 작게 중얼거리곤 안타레스에게 못마땅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태평하게 윙크를 하는 안타레스가 어이없어서 실소했다. 하여간 수수께끼 같은 여자야.

안타레스가 기대된다는 듯 미소 지었다.

“자, 누가 먼저 할래? 아무래도 자기부터?”

고개를 끄덕이자 안타레스가 그럴 줄 알았다며 내 앞으로 수정구를 들이밀었다.

“수정구 위에 오른손을 올려놔.”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수정구는 훈훈한 온기가 도는 천막 안과 달리 얼음처럼 차가웠다. 안타레스는 계속해서 내게 지시했다.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우고 오직 수정구에만 정신을 집중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네가 궁금한 딱 한 가지를 떠올려.”

수정구의 안개 같은 빛은 바람결을 타고 흘러가듯 쉬지 않고 움직였다. 나는 은빛 실타래를 바라보며 황궁에서의 내 삶이 어떤 종지부를 찍을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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