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많은 이들의 선망을 받으며 전설적인 기록을 썼니? 초기의 야망과 다짐은 사그라지고 결국 그저 그런 삶을 살았니? 열정과 목표가 과했던 나머지 예고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니?
별안간 수정구 한가운데에 검은색 점이 생기더니 점점 커져 수정구 전체를 까맣게 물들였다.
안타레스는 헛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집중력이 와장창 깨지며 현실 감각이 차근차근 돌아오고 수정구도 본래의 빛깔을 되찾았다.
나는 사색이 된 레이와 묘한 눈빛의 안타레스를 번갈아 봤다. 뭐야, 곧 내게 시한부 선고라도 내릴 것 같은 이 분위기는.
“무슨 뜻이에요?”
안타레스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긴장한 레이가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나는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카드 섞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안타레스가 탁자 위에 타로 카드를 가지런하게 펼치고 말했다.
“한 장만 골라.”
나는 가장 가까운 카드를 골라 뒤집었다. 마녀들이 화형대로 걸어가고 있는 그림은 내가 알던 타로 카드에선 볼 수 없던 거였다. 안타레스가 침음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내 왼손을 감쌌다.
“무엇을 떠올렸는지는 묻지 않을게. 묻지 않는 게 이치에 맞기도 하고. 다만, 그 결과가 매우 안 좋을 거야. 매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결말은 누군가의 원한을 사 암살당하는 것이다.
“……제가 위험에 처한다는 말인가요?”
“운명의 신은 언제나 우리의 곁에 있어.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 한마디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말이야.”
빙빙 돌려 말했지만 결국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나는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더스크번에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다른 위험이 날 찾아와?
“자기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길 바라.”
안타레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솔직히 별생각 없었는데 그가 저렇게나 진지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그래 봤자 심심풀이로 보는 점일 뿐인데. 나는 쓸데없는 일에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부러 발랄하게 말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우리 레이 점괘도 볼까요?”
안타레스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가 카드를 섞고 마구잡이로 탁자 위에 흩뿌렸다.
“청년은 미래운 보면 딱일 거 같네. 자, 세 장만 골라.”
레이는 가만히 안타레스를 바라보다가 내가 아주 살짝 발을 누르자 그제야 카드를 골랐다. 안타레스는 카드를 뒤집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내 운세보다도 더 안 좋은 게 나온 것 같았다.
레이가 불안함을 애써 잠재우고 침착한 척 물었다.
“왜 그러시죠?”
안타레스가 말없이 카드를 보여 줬다. 첫 번째는 비가 거꾸로 내리는 카드였고, 두 번째는 두 명의 기사가 서로 칼을 겨누고 있는 카드였고, 마지막은 끝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남자가 그려진 카드였다.
그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불안하게 떨리는 동공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자기 일도 아닌데 저렇게 슬퍼할 일인가?
“과거의 악연이 되풀이될 거야.”
“……확실합니까?”
내 착각일까? 안타레스를 노려보는 눈빛이 꽤 매서웠다.
“확실하고 자시고, 이미 짐작 가는 바 있지 않아?”
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연거푸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에서 답답한 심정이 느껴졌다.
나는 기묘함을 느끼며 은근히 친근해 보이는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순수한 걱정으로 차오른 적안을 보니 의문의 싹이 더욱 커졌다. 뭐지? 얘네 원래 알던 사이인가? 아니, 그 이전에.
“짐작 가는 바라니?”
레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잘도 거짓말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달콤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저번에는 속아 넘어가 줬지만 오늘은 아니다. 대놓고 수상한 티를 냈으면서 어디서 모른 척하려고 그래?
“속일 사람을 속여라. 과거의 악연이란 거 설마 게일 말하는 거야?”
“……아니.”
아니라는 애가 내 눈을 똑바로 못 보네. 나는 그의 양 뺨을 잡고 내게 고정시켰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레이는 끈질기게 시선을 피했다.
“아니기는 무슨, 게일 맞구만. 도대체 어떤 악연인데?”
레이는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게일이 내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했거든.”
분명 레이의 어머니는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래서 레이가 신시아로 살아야 했고.
“쓰레기라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 최악인 사람이네. 아니, 근데 왜 널 기억 못 해?”
레이는 정말 말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아주 어릴 적이기도 하고, 아마 내가 살아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 했을 거야. 변신 물약의 부작용으로 머리가 이렇게 되어 버리기도 했고.”
레이가 염색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나라도 10년 전 봤던 애를 기억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긴 하다. 그 애가 훌쩍 크다 못해 외형까지 변했다면 더더욱.
나는 안타레스에게 물었다.
“과거의 악연이 되풀이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안타레스가 레이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그가 한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자기, 황태자 보좌관 아니었어? 최단기간에 승진도 했고,”
“그런데요.”
“엄청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레이가 미쳤냐는 눈초리로 안타레스를 노려봤다. 나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양심이 찔려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제가 역사랑 문화 쪽에는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뒤떨어져도 다른 걸 잘하거든요.”
안타레스가 깨달았다는 듯 탄식을 뱉고선 레이에게 제법이라는 눈빛을 던졌다.
“어쩐지 순순히 말한다 싶었네.”
“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신경 쓰지 마, 혜라. 원래 저 사람 오락가락하거든.”
레이가 이제 그만 나가자며 내 손을 끌었다. 솔직히 나는 더 머물고 싶었지만 레이의 표정이 ‘1초라도 더는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안타레스는 면전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아도 호호 웃었다. 마법으로 친히 문을 열어 주기도 했다. 그가 쾌활하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또 볼일이 있을까? 나는 손을 흔들면서도 속으론 절대 안 올 거라고 다짐했다.
천막을 나온 뒤로 레이는 미묘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분명 평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고민 있는 사람 마냥 내 말에 도통 집중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불길한 점괘에 있다고 지레짐작했다. 그래서 기숙사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그를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안타레스가 신도 아니고 그냥 단순한 점괘를 봐 줬을 뿐인데 뭘. 걱정하는 일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레이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규칙적으로 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그럼 널 믿어야겠네. 네가 내 신이니까.”
***
“그럼 널 믿어야겠네. 네가 내 신이니까.”
그리 말하긴 했지만 레이는 마냥 가만있을 수 없었다. 안타레스의 점괘는 80%의 확률로 현실이 됐으니까.
어둠이 세상을 뒤덮은 시각, 레이는 점집을 찾았다. 안타레스는 놀란 기색도 없이 레이를 맞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10분만 더 늦게 왔어도 엇갈렸을 뻔했네.”
한가롭게 잡담 나눌 여유 따위 없었다. 레이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까 낮에 그거, 무슨 의미야.”
“되물어 볼 필요도 없이 이미 정확히 해석하지 않았어?”
해석하다 못해 이미 최악의 상황까지 머릿속으로 그리고 난 후였다. 게일이 무지에서 각성하고 또다시 피바람이 부는. 그리고 혜라가 음모에 휘말려 죽게 되는 상황.
레이는 답을 알면서도 꿋꿋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의 불안이 기우에 불과하다고 안타레스에게 확인받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레스는 냉정했다.
“브라운이랑 이미 마주쳤다고 했지. 그 인간이 네 얼굴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야. 조금의 실마리만 있어도 바로라고. 그다음 전개는 말 안 해도 알지?”
답은 과거에 있었다.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그는 즉살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이 아니었다. 레이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애써 달래며 물었다.
“혜라가 위험에 처한다는 건 무슨 소리야? 내 불행이 혜라를 물들였어? 그래서 그 애가 위험해지는 거야?”
안타레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예언자가 아니야. 걔가 정확히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그보다 네가 지금 걔 걱정할 때야? 넌 브라운을 마주치자마자 당장 도망갔어야 했어. 필연적으로 벌어질 일을 알면서도 왜 여기 남아 있는 건데?”
“혜라가 여기에 있잖아.”
“걔가 그 정도로 너한테 소중해? 목숨을 걸 만큼?”
그보다 더 쉬운 질문은 없었다. 레이는 허탈하게 웃으며 답했다.
“당연한 걸 묻네. 그 애는 내 목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어.”
레이는 혜라의 해맑은 웃음을 떠올렸다. 그 애는 태양마저 외면한 어둡고 음습한 곳을 비춘 나의 영원하고도 유일한 구원자다. 신을 버리는 신도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제 발로 지옥에 걸어가겠다고? 그러다 너 진짜 죽어. 아니지, 과연 죽기만 할까? 걔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던데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때도 의연할 수 있어, 너?”
진정한 의미에서 지옥은 혜라를 잃는 것이다. 그러니 낙원을 잃지 않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의 손길을 막아야겠지. 그리 생각하자 불안감은 차차 잦아들고 그 자리에 결의가 아로새겨졌다.
“……네 말마따나 넌 예언자가 아니잖아. 난 20%의 확률에 모든 걸 걸고 그 애와 나의 안전을 지킬 거야. 내 미래에선 누구도 죽지 않아.”
레이는 독기에 휩싸여 다짐했다.
“그 애까지 잃을 수 없어.”
***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