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에단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물었다. 그는 하루에 한 번씩 내게 편지를 보내며 장난질이 언제 시작되는 거냐고 독촉했다.
덕분에 에단이 얼마나 참을성이 없는 성격인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떤 또라이가 까마귀를 길들여서 전령으로 쓸 생각을 하는 거냐고.
“어휴, 오늘 직접 알려 주러 온 거니까 좀 진정해. 누가 보면 내가 너한테 전 재산 빌린 줄 알겠다.”
내 타박에도 에단은 전혀 기죽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늦게 소식을 전하는 나를 나무라듯 바라봤다.
소란을 듣고 아로네가 작업실에서 나왔다. 그가 소매에 달라붙은 실밥을 정리하며 다가왔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응. 누가 대낮부터 까마귀를 보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 말이지. 굳이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하진 않겠어.”
나는 에단을 노려보았다. 아로네가 기막히다는 듯 한숨을 내쉬곤 에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두 여자의 말 없는 질책을 받으며 에단은 눈만 끔벅거렸다. 아로네가 사뭇 권위적으로 말했다.
“내 일인데 왜 네가 난리니? 혜라 귀찮게 하지 마.”
나는 소리 없이 웃으며 아로네 뒤에 숨었다. 약 올리듯 빼꼼 내민 혓바닥을 보고 에단은 실소를 뱉었다. 그가 억울해서 왈칵 언성을 높였다.
“잠 못 잔 사람이 쟤밖에 없는 줄 알아? 나도……!”
웁스, 저 내용은 아로네가 알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에단의 말을 끊고 연극적으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잡담은 이쯤하고 이제 회의하지 않을래?”
아로네는 끊긴 말의 뒷내용이 궁금한 눈치였다. 나는 아로네의 등을 테이블 쪽으로 살살 밀었다. 아로네 몰래 에단한테 경고의 눈빛을 쏘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단한테 복수하려고 비둘기 다섯 마리를 부랴부랴 훈련시켰다는 걸 아로네한테 들켰다간 일장연설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레이한테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1시간이나 들었다.
어쨌든 나는 병균 가득한 전령들에게 똥 폭탄을 주문했다. 억울해 미치려고 하는 에단을 보니 비둘기들이 그의 방을 훌륭하게 엉망으로 만들어 놨나 보다. 쌤통이다, 이놈아!
에단은 입막음 시도하는 나를 개무시했다. 아로네가 의자에 앉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초.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벙긋거렸다.
‘아로네한테 이르면 앞으로 재미있는 일에 너 안 끼워 줄 거임. 네 농담에도 안 웃어 줄 거임.’
쾌락이 인생 최고의 가치인 에단에게 내 선전 포고는 충격적이었다. 에단이 제법이라는 듯 이를 갈았다.
나는 그가 포기한다는 의미로 미간을 구기는 것을 보고난 다음 아로네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에단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찻잔 세 개가 나타났다. 나는 아로네와 에단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먼저 제이든 쪽이 어떻게 진행될 건지 말해 줄게.”
나는 기왕 이야기하는 김에 처음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제이든에게 제안 수락을 알리던 날로 돌아간다.
***
역시나 제이든은 마법 걸린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이 계약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실제적인 노력을 통해 재결합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계약서에 사인하는 그날 당일, 에단이 마법을 풀어 줬다.
사실 제이든은 이미 벨라과 계약 연애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선뜻 아로네와 접촉할 수 없었다. 아로네를 떠본답시고 저지른 짓이 있기도 하고, 머지않아 연말이라 그런지 동반 행사 일정이 많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바쁜 시기에 섣불리 아로네를 만났다가 황제가 알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 제약을 제이든 또한 인지하고 있어서 내가 처음으로 놔 줄 징검다리는 곧 열릴 연회 이후로 유예되었다. 적지 않은 일을 겪으면서 제이든이 깨달은 바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제이든이 내게 약속했던 훈장과 지휘관 자리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그는 연회에서 훈장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고위 귀족만 초대되는 그 연회는 크바리엣 부족과의 화합을 도모한다는 목적을 가진다. 더스크번 쪽에서도 부족 대표 몇 명이 온다고 들었다.
그 중요한 자리에 내가 참석하고 상을 받다니! 물론 눈치가 보여서 연회 끝까지 남아 있기는 어려울 테지만 참석 그 자체에 의의가 있다.
왜 제이든이 굳이 3주 뒤로 계약 이행을 미뤘는지 알 것 같았다. 딱 봐도 내 기분이 한창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 한탕 해 보려는 거지, 뭐.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나는 산뜻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데네브한테 집중하자.”
에단이 말도 안 된다면서 투덜거렸다. 아로네는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데네브와 제이든을 비교했을 때 확실히 제이든이 훨씬 거물이었지만, 그래도 놀리기 쉬운 상대는 무조건 데네브였다. 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 내가 데네브한테 안성맞춤인 장난을 생각해 왔다고.”
“뭔데?”
아로네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데네브와 상극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나는 자유로운 삶을 살며 얼굴빛이 훨씬 밝아진 그를 바라봤다.
“데네브가 주장한 대로 못다 한 오라버니의 역할을 아주 충실하게 하도록 만들 거야.”
아로네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못다 한 오라버니의 역할’이라니, 말만 들어도 우스운 것이다. 그가 기대하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내가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나는 기쁨에 겨워 소리치듯 말했다.
“꿈과 사랑이 가득한 동화책 읽어 주기! 그리고 오순도순 인형 놀이하기! 어때? 완전 짱이지!”
나는 긍정적 반응이 쏟아지리라 확신했다. 데네브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 동화? 인형놀이? 너 술 마셨냐?”
에단은 날 몰라도 한참 몰랐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건 순도 100% 진심인 건데.
아로네는 정성스럽게 동화책을 읽어 주는 데네브를 상상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아로네가 빵 터지는 순간은 1년에 몇 번 되지 않는다. 나는 본능적으로 언제나 들고 다니는 기억 구현기를 꺼내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에단이 미친 사람 보듯 우리를 번갈아 봤다. 어쩌다 여기에 끼게 되었냐는 자기 한탄이 어이없어서 나는 콧방귀를 꼈다.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는 아로네를 대신해서 에단이 질문했다. 그는 아직도 내가 제정신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소공작이 반성하고 있다 해도 설마 그런 광대 같은 짓까지 하겠어?”
동화책을 읽어 주고 인형 놀이하는 게 딱히 광대 같은 짓은 아니지만, 데네브 같은 사람들은 죽어도 안 할 짓이긴 했다.
“하긴, 한번 떠보니까 별 기겁을 하더라.”
그러나 이 사기극의 주인공은 아로네였고, 그 애는 데네브가 망가지기만 한다면 뭐든 좋아할 것이다. 봐 봐, 이미 떠봤다는 말에 또 웃음보가 터져서 이번에는 눈물까지 흘리잖아.
나는 아로네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이어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이것저것 잴 때인가? 정말 관계 회복하고 싶으면 아무리 창피해도 해야지. 안 그래, 아로네?”
아로네가 겨우 웃음을 그치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난 유년기의 결핍을 지금에서라도 채우고 싶어.”
“그 표현 좋다. 데네브한테 말하면 마지못해 예쁜 인형을 사 올 거야.”
나는 수첩을 꺼내 꼼꼼히 필기했다. 에단이 흘긋 필기를 내려다보고 앓는 소리를 냈다.
“너 정말 대단하다. 뭐? 내색하진 않지만 사실 아로네는 외로웠던 유년 시절에 대한 상처를 갖고 있다고? 언젠가 너한테 데네브의 온기를 바랐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알다가도 모르겠다. 데네브가 곧 죽어도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어쩔 수 없이 한다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은데, 에단 쟤는 왜 자꾸 태클을 거는 걸까?
나는 팔짱을 끼고 에단을 째려봤다.
“뭐야?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그제야 에단은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 재미있는 광경을 우리는 못 보잖아. 그건 고문이야. 내가 못 볼 바엔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나아.”
놀부 심보가 따로 없네. 주기적으로 배달되는 마법 장난감―호의가 아니라 에단이 나를 훌륭한 리뷰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 에단의 손에서 탄생되지만 않았다면 진즉에 꿀밤 다섯 대를 먹여 줬을 거다.
나는 아로네에게 고개를 돌리고 아주 정중하게 물었다.
“아로네, 혹시 우리가 투명 물약을 먹는다면 그 자리에 함께 있어도 되겠니? 데네브는 그 사실을 절대 눈치 못 챌 거야.”
아로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지. 네가 곁에 있다는 걸 알면 나도 조금 더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거야.”
“무르기 없기다.”
에단이 눈을 부릅뜨고 아로네에게 경고했다. 나는 에단의 발을 세게 지르밟았다. 부탁하는 주제에 눈은 왜 저렇게 뜨는 거야. 하여간 이럴 때마다 에단이 차기 마탑주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태생부터 권력자였다, 이거지.
에단이 미간을 찌푸리며 날 짜증스레 쳐다봤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이대로 데네브한테 전달하는 걸로 하고, 에단 너는 장시간 지속되는 물약을 개발해 놔. 아, 음 소거되는 것도 같이. 할 수 있지? 난 네 능력을 믿어.”
“당연히 할 수 있긴 한데 너 자연스럽게 나한테 명령…….”
나는 자연스럽게 에단의 말을 끊고 벌떡 일어났다.
“좋았어! 오늘 해야 하는 얘기는 여기서 끝! 그럼 데네브한테 편지 오는 대로 알려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