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숙면을 하고 느지막한 오후에 눈을 떠 보니 머리맡에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난 분명 어젯밤에 창문을 단단히 잠그고 잤다. 에라이, 에단 그놈이 또!
아로네한테 경고를 받고도 또 장난을 치다니. 나는 몹시 분개하면서 일어났다. 황궁 안에서는 마법을 못 쓴다더니 그 규칙에 에단만은 제외라서 분통이 터졌다.
한 번은 웃으며 넘길 수 있지만 두 번째는 아니지. 나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쪽지를 폈다.
“불을 조심해? ……뭐야?”
립스틱으로 급히 휘갈긴 듯한 필체는 에단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획은 왠지 익숙했다. 나는 천천히 과거를 반추하며 저 강렬한 필체를 어디서 보았는지 찾아보았다.
“……디아즈는 동성애자다.”
영원한 비밀에 의뢰했던 보고서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 있던 글이다. 그때 온몸이 짜릿할 만큼 전율이 일어서 아직까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다소 특이했던 문체까지.
“진짜 뜬금없네. 갑자기 불을 조심하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얼마 전 들었던 점괘와 관련 있는 걸까? 아니, 내 커리어가 망하는 거랑 불을 조심하는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내가 모르고 사무실을 태워 먹지 않는 이상.
“그리고 여긴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내가 아는 마법사들은 다 왜 이런 건지. 주거 침입죄를 증명할 수 있다면 바로 고소장 날리는 건데 말이야.
“아니, 그래서 이거 무슨 뜻인데.”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왜 그날 당일 알려 주지 않고 굳이 쪽지를 보낸 건지 그 이유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놨다. 내 주변의 미친 마법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그리고 애초에 단순한 점괘일 뿐인데 이렇게 고심해야 하나? 타로 한 번 보고 하루 종일 신경 쓰는 성격 아니잖아, 너.
나는 쪽지를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시계를 보자 벌써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식빵 한 조각을 문 채 방을 나왔다.
문이 잘 닫혔나 확인하고 뒤도는 순간 옆집 문이 열렸다. 놀랍게도 기숙사에 입주한 이래로 처음 보는 이웃 주민의 얼굴이었다. 아니, 사실 내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도 지금 처음 알았다.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문을 닫을 생각도 못 한 채 돌처럼 굳었다. 그는 나보다 어려 보였다. 아마 아로네와 또래이려나? 새로 맞춘 옷과 혈색 좋은 피부만 봐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사람 같았다. 아하! 그래서 오늘 처음 봤구나.
나는 놀란 듯 동그랗게 커진 눈이 조금 귀여워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말아요, 해치지 않아요.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여자는 내가 말을 걸 줄 예상 못 한 눈치였다. 그가 입은 옷이 아로네가 만든 거라서 괜히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 나는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혜라예요. 종종 마주치면 인사합시다.”
“네네…… 그럼 좋죠. ……아! 저는 엘리라고 불러 주세요.”
어쩐지 여자는 혼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뭐지? 저 사람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나? 순한 인상이 딱히 나쁜 짓을 할 사람처럼 보이진 않는데. 아니면 그냥 내가 어려운가?
굳이 찾아서 듣진 않지만 주변에 가십 열광 팬 한 명이 있어서 사람들이 날 어떤 이미지로 보는지 안다.
처음엔 아로네의 충견쯤 됐었고, 재정부에서 일했을 때는 지켜볼 만한 애, 그리고 지금은 미래가 기대되면서도 다소 경계할 필요가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혹자는 날 더러 제이든의 비밀 병기라고도 하더라.
음, 그런 소문을 듣고 왔으면 내가 불편할 법도 했다. 나는 끝까지 자애로운 웃음을 유지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엘리가 한 박자 늦게 꾸벅 인사했다. 나는 그대로 엘리를 스쳐 지나가려다 별안간 절대 잊을 수 없는 냄새를 맡고 우뚝 멈춰 섰다.
……금기를 어겼을 때 나는 저주의 냄새. 더스크번의 악몽이 떠오르며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악취의 근원을 찾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거실을 빼곡하게 채운 양초가 보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양초는 낮은 제단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머리카락과 손톱이 있었다. 미친! 저게 뭐야?
대낮인데도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충격받은 심신을 간신히 다스리고 엘리를 바라봤다.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자니 문득 쪽지 내용이 생각났다.
불조심하라는 조언은 수많은 양초와 동거하고 있는 엘리한테 더 필요했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불조심해요.”
“네? 네…….”
조금 어리벙벙해 보여도 대답은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만족하며 쿨하게 갈 길을 갔다. 근데 그 양초와 제단은 뭐였을까?
***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데네브 골탕 먹이기 팀’은 오늘 또 모였다. 세 차례의 공방전 끝에 드디어 데네브가 내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우스운 꼴 하나 보자고 얼마나 정성 들여서 편지를 썼는지. 아쉬워야 하는 쪽이 갑처럼 굴어서 열이 뻗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오늘 보게 될 장관을 생각하면 그간 인내한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인형을 구해 오라는 명령을 듣고 데네브의 보좌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데네브가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하하, 3주 뒤 나와 할리가 정확히 같은 일을 할 거라서 마음 편하게 웃을 순 없네.
사실 오늘 계획은 그리 빡빡하지 않아서 늦게 만나도 됐다. 굳이 티타임 시간에 맞춰 아로네의 집에 온 이유는 알게 모르게 긴장한 아로네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에단도 일찍 온 건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 매일 티격태격 싸우더니 그동안 미운 정이 들긴 했나 보다. ……뭐, 그런 희망적인 생각도 에단이 왜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거냐고 불평하면서 깨져 버렸지만.
저녁 5시 30분. 아로네는 데네브와의 저녁 식사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로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세계 명작 동화와 아름다운 인형들이 그를 맞이하고 있을 터였다.
주인 없는 집은 썰렁했다. 왜 에단과 둘이 남게 될 거란 생각을 못 했을까? 서로 실없는 농담은 잘만 주고받았지만 정작 둘만 남아 본 적은 지금이 처음이라 어쩐지 어색했다.
나는 멍하니 눈만 깜박이다가 3초간의 정적을 못 참고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이미 오자마자 했던 말이기도 했다.
“물약은 갖고 왔나?”
에단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날 바라봤다. 그가 테이블 위를 턱짓하며 말했다.
“꿈꿨어? 여기 있잖아, 물약.”
고급 위스키병처럼 보이는 거라면 아주 잘 보였다. 나는 괜히 멋쩍어서 코를 킁 먹고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테리어를 구경했다. 화려했던 저택의 방과 비교하면 다른 사람이 꾸민 것 같았다.
아로네는 과거를 떠올리게 할 아주 조금의 여지도 남게 두지 않았다. 가져온 물건을 거의 다 태우고 새로 샀을 만큼 그는 철저했다.
나는 우리 둘의 사진이 담긴 커다란 액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침 에단의 얼굴이 시야에 걸려서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무료한 듯 테이블 위로 발을 걸치고 까닥거렸다.
내 주변에 유독 특이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에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지루하고 조용한 건 싫지만 그렇다고 굳이 말을 걸지는 않는 저 도도함 좀 봐.
아로네가 없었다면 평생 에단과 말 섞고 지내는 사이가 될 수 없었을지도 몰랐다. 에단이 시선을 느끼고 무슨 일이냐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너 왠지 피곤해 보인다?”
자칭 타칭 천재라는 애니까 고작 투명 물약의 성능을 업그레이드시킨답시고 잠을 못 자진 않았을 것이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에단이 평소와 달리 조금 저하된 컨디션을 띠는 이유는 뻔했다.
에단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워낙 본판이 잘나서 그런지 종잇장처럼 구겨진 얼굴도 예술이었다.
“가브리엘 그 영감이 갈 날 얼마 안 남았다는 직감이 든다면서 후계자 교육 시간을 두 배로 늘려 버렸거든.”
순간 현대의 개념에서 죽음을 이해하고 경악할 뻔했다. 스승이 곧 죽는다는데 교육 시간이 늘어났다고 불평하는 놈이 바로 내 눈앞에 있다니? 이런 은혜 모르고 싸가지도 없는 놈!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마법사의 죽음은 일반인의 것과 다소 양상이 달랐다. 가브리엘처럼 초월의 경지에 도달한 마법사는 죽어서 천국의 세계에 간다나?
나는 알만 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어쩔 수 없지. 네가 가장 능력 있는데 뭐 어떡해.”
에단이 눈을 번뜩였다. 그가 자세를 고쳐 앉고 설득하듯 말했다. 얼핏 광기 어린 눈동자가 이 사안에 무척 진심이라는 걸 드러냈다.
“가장 뛰어난 사람이 꼭 마탑주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거 구시대적 발상이다.”
어지간히 감투 쓰기 싫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나로선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따지자면 마탑의 왕이 된다는 말인데, 그 권력과 명예를 굳이 왜 마다하는 거지? 국정을 다스려야 하는 황제에 비하면 마탑주의 일은 누워서 떡 먹기일 텐데.
“왜 그렇게 싫어해? 마탑의 짱이 되면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맨날 까이던 네 아이디어도 권력으로 밀어붙이면 되고.”
에단이 심심풀이로 만들었던 장난감들이 번번이 현 마탑주한테 까였다는 걸 안다. 그 까인 장난감이 나한테 고스란히 들어와서 모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