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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111/138)

<111화>

헤어스타일링 실력을 보면 내 얼굴도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연회장에는 어떻게든 내 결점을 찾으려는 사람이 다수 포진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완벽한 모습으로 그곳에 가야 했다.

“그럼 좋지.”

레이가 잘 생각했다는 듯 곱게 웃고선 의자를 끌고 와 내 앞에 앉았다. 서랍에 처박아 두고 몇 개월간 그곳에서 썩혔던 화장품을 꺼내 주자 레이는 진지한 눈빛을 띠고 내 얼굴에 다채로운 색을 입혔다.

나는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심장에 해로워서 부러 딴생각을 했다. 그는 날 돋보이게 해 주겠다는 목적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입술을 붉게 칠할 때만큼은 집중력을 잃고 말았다. 그가 멈칫하더니 입술에서 시선을 들어 올려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레이가 무의식적으로 내 뺨을 쓸었다. 나는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지금 무슨 생각해?”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

“화장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

“지금은 안 돼. 곧 연회 시작한단 말이야.”

레이가 아쉬워하면서도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는 그의 입술에 새빨간 얼룩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연회에 늦을 것이다.

“이따 보자. 즐거운 밤에.”

“진심이었어?”

레이가 다 알면서도 모른 척 능글댔다. 나는 그의 콧방울을 툭 건드리곤 말했다.

“나 그런 거엔 장난 안 쳐.”

***

소규모 연회라더니 정말 참석 인원이 적었다. 제국의 대소사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만 참석한 것 같았다.

심지어 두문불출하기로 유명한 학자도 고작 2m 앞에서 사람들과 잡담하고 있었다. 세상에, 전쟁 영웅 리암 피어슨도 왔잖아?

나는 생각보다 대단한 라인업에 속으로 감탄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입장하자마자 괜히 기가 죽었을 테지만, 나는 보통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오히려 흥분만 됐다.

‘뭐, 분위기는 내 입장을 기점으로 미묘하게 싸해진 것 같지만.’

그들은 날 투명 인간으로 만들며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일념이면서도, 이따금씩 날 못마땅하게 째려보거나 흥미롭다는 듯 관찰했다. 이런 취급도 한두 번이 아니라 이젠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 수긍과 순응이 위험한 사인인 거고.

나는 홀로 동떨어져서 샴페인을 홀짝였다. 오늘따라 술이 참 달았다.

황제와 제이든은 언제쯤 올까 생각하던 찰나에 짜증 나는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공작이었다. 심지어 그 옆에는 데네브까지 있었다.

“에이씨…….”

공작은 의중을 가늠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차라리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면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분명 선명하고 강렬한 감정이 저 눈동자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데 공작이 두른 장막이 너무나 두꺼워서 그 감정이 긍정과 부정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알게 뭐람.”

나는 두 부자의 시선으로 멀어지고자 피난처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데네브는 공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귀찮게 하네. 그냥 서로 못 본 척 즐기다 가면 너무 좋을 것 같은데 기어코 시비를 걸겠다 이거지?

데네브는 오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제법이라는 듯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특별 훈장에 비밀 파견단의 지휘관이라……, 열심히 산 모양이야.”

내가 지휘관이 됐다는 건 도대체 어디서 들은 거야? 비밀 파견단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열 손가락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데네브가 젠체하며 말했다.

“그 정도 기밀은 나한테 비밀도 아니야.”

그래, 너 소공작이라서 잘났다. 나는 기세등등한 저 콧대를 꺾어 주려다가 얼마 전의 인형극을 떠올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마터면 맥락도 없이 폭소할 뻔했다. 나는 웃음을 4등분으로 접어 꿀꺽 삼킨 뒤 데네브를 퇴치할 만한 말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아 맞다, 그게 있었지.

나는 악동처럼 웃었다. 데네브가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참, 다음 아로네와의 만남에서 뭘 할지 아직 말씀 안 드렸죠?”

“잠깐, 그건 서신으로 해.”

데네브가 주변을 둘러보고 간절하게 속삭였다. 물론 나는 못 들은 척 말했다. 지금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키워드는…….

“곧 데네브 님은 일약 스타가 될 거예요. 일단 그것만 알아 두세요.”

나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뒤돌았다. 데네브의 불안한 시선이 내 뒤통수에 길게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황제와 제이든이 입장하면서 끊겨 버렸다.

제이든과 스쳐 지나가듯 눈이 마주쳤다. 그가 차분하게 행동하라는 눈빛을 보냈고, 나는 무슨 그런 걱정을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여유로운 가면 속은 다시금 들뜬 심장을 달래느라 난장판이었다.

***

오늘따라 황제가 길게 말하는 느낌이었다. 빨리 훈장을 받고 나가고 싶다는 내 바람이 너무 강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고.

황제는 오늘 이 연회가 얼마나 뜻깊은 의미를 가지는지 장황하게 설명한 뒤 거대한 연회장 문을 눈짓했다. 좌중은 연회의 목적을 떠올리고 긴장감에 침묵했다. 황제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매달고 말했다.

“크바리엣 부족과의 화합을 도모하는 자리에 그들이 없어선 안 되겠지. 어떤 편견도 없이 환대해 주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굳게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고 유난히 창백한 낯빛들이 어색한 발걸음으로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네 명의 평화 사절단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눈이 마주친 쿠카리에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황제는 직접 나와 그들을 맞았다.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외교적 사명감을 갖고 유하게 풀어졌다. 그는 황족에게만 허락된 공간인 단상 위로 그들을 이끌었다.

황제와 황태자 옆에 나란히 앉는다는 것은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크바리엣 부족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약초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원주민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아직도 강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절단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사람들의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나는 황제의 현명함에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가 제국과 더스크번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가시적으로 나타냈으니 제대로 개념이 박힌 사람이라면 사절단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권력은 있지만 머리에 든 건 없는 귀족들도 이 정도 경고면 알아들었을 테고.

저 역사적 순간에 내가 일조했다고 생각하니 훈장의 가치가 더욱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쿠카리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환대가 낯설면서도 내심 좋은 기색이었다. 그가 황제의 눈짓을 받고 버썩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더니 예의 그 태양 같은 눈으로 경계심 어린 낯들을 둘러보았다.

“우리 부족은 더 이상 안개 뒤에 숨지 않기로 결심했다.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다시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 부족은 데이타스의 신성함을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여정을 제국과 함께한다면 큰 영광이다.”

한 달 사이에 더스크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 한마디 더듬지 않고 연설하는 쿠카리에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눈동자가 아침을 맞이하고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사랑과 헌신의 증표가 바로 저런 것이구나.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수많은 제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자비를 베풀고 기회를 준 황제에게 깊은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쿠카리에는 단번에 날 찾아내고 싱긋 웃었다. 그가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그러자 따라온 부족들도 내게 똑같이 인사했다. 단순한 행위였지만 이유 모를 신성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 맹목적이다시피 한 인사가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황제를 향한 것인지 의문했다. 쿠카리에가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개의 목소리에 현혹되지 않는 강인함과 벼랑 끝에서도 돌아갈 길을 찾는 현명함을 가진 혜라에게 부족의 대표로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와우. 나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고백이라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찬사였다. 앞서 황제에게 보낸 감사 인사가 머릿속에서 잊힐 만큼 강렬하기도 했다. 아이고, 이거 좀 곤란한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

그들은 내가 더스크번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했길래 외부인에게 적대적인 크바리엣 부족이 저토록 예우를 갖추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자세한 내막을 들은 황제조차도 내가 일부러 빼먹은 내용이 있는 게 아닌지 물음표를 던졌다.

나는 애매해진 분위기가 곤란해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다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황제가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비로소 지금에서야 내가 훈장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인정한 것 같았다.

그가 이 분위기를 이어 훈장을 가져오라 수하에게 눈짓하고 내 이름을 호명했다.

나는 차분하게 행동하려 노력하며 뚜벅뚜벅 황제 앞으로 걸어갔다. 수십 쌍의 눈길이 발목을 잡아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가 낮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죽어 가는 제국민을 살릴 묘안을 떠올렸고, 더 나아가 수천 년의 역사 중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고로, 제국 역사 최초로 크바리엣 부족과의 화합을 이끌어 내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이 특별 훈장을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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