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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114/138)

<114화>

그래서 준비해 온 노래가 끝난 이후로도 즉흥적으로 가사를 붙여 계속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에단이 내 아름다운 목소리를 떠올리고 눈가를 찡그렸다. 엥, 왜 찡그리지?

“가사며 음정이며 다 엉망이라 나중에는 고막이 찢기는 줄 알았다.”

“뭐? 가사는 몰라도 분명 멜로디는 환상적이었을 텐데?”

에단이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 반응이 이해되지 않아서 동의를 구하듯 아로네를 쳐다봤다. 그러나 아로네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따라 날씨가 좋다느니 딴소리를 했다.

나는 기가 차서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정말 믿기지가 않는다.

“너희 나중에 청력 검사 한번 받아 봐. 다른 애들은 내 노래 못 들어서 난리인데 너희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아로네는 현명하게도 입을 다물었고, 에단은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나는 툴툴거리며 오늘 모인 목적을 상기시켰다.

“데네브랑 제이든한테 한 방씩 먹이니까 기분 어때?”

아로네가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다.

“꽃밭 위를 거니는 기분이야.”

아로네가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나는 노래 실력에 대한 모욕은 새까맣게 잊고 헤실헤실 풀어졌다.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할까? 데네브랑 제이든 둘 중 누굴 먼저 만날래?”

에단이 불숙 끼어들어 말했다.

“난 소공작 쪽에 한 표. 황태자는 안달 날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초조함은 혜라를 향하겠지. 난 그 꼴 못 봐.”

두 쌍의 시선이 날 바라봤다. 에단이 무슨 말이라도 해 보라는 듯 눈을 번뜩였다. 아로네도 내심 제이든에게 똥줄 탄다는 느낌이 뭔지 알려 주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양어깨를 으쓱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해. 제이든은 너랑 또 만날 수 있다는 것만 보장되면 나 귀찮게 안 할걸?”

아로네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데네브한테 연락할게.”

충격의 인형극 이후로 일주일 만에 하는 연락이다. 편지를 받은 데네브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좋아할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에단이 나를 보며 물었다. 참신한 답을 기대하는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 할 거야?”

나는 질문을 아로네에게 넘겼다.

“좋은 생각 있어, 아로네?”

아로네는 말없이 사색에 잠겼다. 나와 에단은 침묵을 지키며 아로네를 기다려 줬다. 그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형체 없었던 분노가 시나브로 선명해졌다. 그가 고요하게 읊조렸다.

“데네브가 내 도전을 비웃었던 걸 아직도 기억해.”

나는 아로네가 무엇을 하려는지 감을 잡고 피식 웃었다. 친구라 그런가 생각도 닮네.

에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로네가 악의에 차서 말했다.

“쓰레기라 생각했던 옷을 데네브가 입고, 그 모습을 온 국민이 본다면 기쁠 것 같아.”

“사진은 내가 찍으면 될까?”

데네브에게 괴랄한 포즈를 시킬 생각을 하니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로네가 듬직한 장군을 보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러면 완벽하지.”

***

데네브는 전과 달리 곧바로 수락 편지를 보내왔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한테 도움이 되는 일인데 모델 한번 해 주는 게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사진작가가 나라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그런 생각은 절대 못 했을 거다.

모델도 오케이 했겠다, 질질 끌 필요가 없어서 우리는 가까운 휴일에 만나기로 했다. 나는 오늘만을 바라보며 지옥 같은 평일을 버텼다.

내가 지옥 같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순전히 제이든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레스토랑 사건으로 툴툴거렸다.

할리보다 나한테 일거리를 더 많이 주는 걸 보면 아로네와 만나기 전까지 계속 그럴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느라 요즘 레이랑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못 하는 중이었다. 레이는 항상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속상한 듯 처진 눈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 데네브의 사진을 찍어 주고 나면 일요일 정도는 레이한테 온전히 쏟을 수 있을 테다. 나는 내일 레이와 뭘 하고 놀까 생각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아, 너무 춥다 진짜.”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바닥에 쌓일 정도는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얼굴을 거세게 후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나는 목도리를 한껏 끌어 올리며 약속 장소로 걸어갔다.

촬영 장소는 수도에서 30km가량 떨어져 있는 ‘프뤼나 숲길’이었다. 편백나무와 삼나무 등 여러 종의 나무들로 빼곡한 그곳은 ‘눈의 여신의 산책로’라는 이명으로 유명하다.

누가 지은 이명인지 참 찰떡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끊임없이 내리는 눈 때문에 제대로 감상하기는 어려웠으나 나뭇가지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눈꽃이 아름다웠다.

나는 에단이 그려 준 약도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눈바람을 헤쳐 나아갔다. 그와 같이 가도 됐는데 굳이 따로 움직인 이유는 하나다. 바로 사진작가 강혜라의 극적인 등장을 위해서!

15분쯤 걸으니 사람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개성 있는 머리색들이 선명해질수록 기적처럼 성난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에단이 움직이는 눈사람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빨리 와!”

쟤는 눈도 좋아. 나는 알겠다는 듯 손을 방방 흔들고 마지막 체력을 끌어모아 달려갔다. 나는 에단한테 질타를 듣기 전에 재빨리 선수 쳤다.

“늦어서 미안.”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아로네는 괜찮다면서 내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 줬다.

“별로 안 기다렸어.”

“너 또 늦잠 잤지?”

에단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나는 에단에게 눈을 흘기고 목석처럼 굳은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데네브는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아로네를 바라봤다.

“……쟤도 오는 거였어?”

나는 기억 구현기를 꺼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연하죠. 제가 사진작가인데.”

“뭐?”

순간 데네브는 나라 잃은 사람의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더욱 창백해지며 배경으로 보이는 설산과 물아일체를 이루었다.

그는 의뭉스럽게 웃는 나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쟤가 날 찍는다고? 확실해, 아로네?”

아로네는 더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응. 싫어?”

아로네는 눈빛으로 굳이 하지 않은 말을 전했다.

‘싫으면 그냥 집에 가도 돼. 동생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더니 그것도 다 입 발린 소리였나 보네.’

우리 모두가 알아챈 속뜻을 데네브가 눈치 못 챘을 리 없었다.

데네브는 중대한 결심을 앞둔 사람이 으레 그러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결연하게 눈을 빛냈다.

“빨리 시작하자.”

곧 데네브는 본인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나는 아로네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로네가 눈짓하자 에단이 옷상자를 들고 왔다.

데네브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침음을 삼켰다. 30벌가량의 옷을 입고 벗었다 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한 것이다.

고급 인력 에단 덕분에 촬영 준비는 4초 만에 끝났다. 그는 손가락을 세 번 튕기는 것으로 모든 걸 해냈다.

첫 번째에 간의 탈의실이 생기고, 두 번째에 우리가 앉을 의자가 튀어나오고, 세 번째에 광범위 보온 마법이 우리를 감쌌다.

나는 데네브를 탈의실로 밀어 넣고 첫 번째 옷을 건네줬다. 개인적으로 마탑과의 합작으로 출시될 겨울 컬렉션 중 가장 기대되는 옷이었다. 보온 마법이 걸린 패딩이라니. 이거 완전 물건이라고.

아로네와 에단은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따뜻한 차를 마셨다. 데네브만 없었다면 소풍 온 줄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데네브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탈의실에서 나왔다. 그는 옷이 어색한지 손을 가만 놔두지 못했다.

“이렇게 입는 게 맞아?”

“네네, 맞아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합시다.”

숏 패딩을 입은 데네브는 부자연스러우면서도 본판이 워낙 잘나서 그럭저럭 어울렸다.

에단이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 군것질거리를 꺼냈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부러워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대충 아무 나무나 가리켰다.

“일단 저 나무를 끌어안으세요. 매미처럼.”

“……뭐?”

데네브는 본인이 잘못 들었다고 굳게 믿는 듯했다. 나는 다시 한번 나무를 가리켰다. 아로네가 무슨 문제 있냐며 지원 사격을 해 줬다.

데네브는 모든 게 다 괜찮다는 말로 아로네를 안심시킨 뒤 나를 죽어라 째려보며 나무로 걸어갔다. 그가 조심스럽게 나무를 끌어안았다.

나는 렌즈를 통해 데네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새까만 흑발이 하얀 눈과 치명적이게 잘 어울려서 문득 제대로 된 결과물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쓸데없는 열정이 불타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청순한 미소 지어 주세요.”

데네브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오우, 청순과 살기는 달라요. 샤워하고 상쾌함 느끼죠? 그 느낌을 생각하세요.”

데네브가 화를 참으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내리며 눈을 접었다. 세상에, 쟤가 저렇게 웃을 수도 있었어? 나는 함성을 지르며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좋아! 아주 좋아! 오케이, 다음!”

나는 데네브가 화내기 전에 다음 옷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뒤돌아 아로네와 에단을 바라보자 웃음이 물밀듯 밀려왔다. 우리는 음 소거로 웃어 대다가 데네브가 나오자마자 일시 정지가 눌린 것처럼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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