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기숙사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해가 완전히 저물었을 때였다. 나는 청명하게 빛나는 달을 올려다보며 아련하게 읊조렸다.
“작작 좀 마실걸…….”
레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잘 알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저녁 시간에만 잠깐 만나서 밥만 먹고 바로 헤어지던 요즘이었다. 몇 시간이고 꼭 붙어 밀린 이야기를 풀어낼 생각에 들떠 했는데…….
하필이면 내 방이 바깥 방향에 있어서 반쯤 쳐진 커튼에 드리운 그림자가 유난히 잘 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문을 두드리지 않아서 내 방으로 온 것 같았다. 레이한테 비상용 열쇠를 줘서 다행이지. 어휴.
나는 빈속을 부여잡고 3층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오늘따라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날 맞았다.
나는 사과 먼저 하자고 다짐하며 거실로 걸어갔다. 레이는 달랑 조명 하나만 켜 놓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가 시선을 맞추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올 때까지 우직하게 소파에 앉아 기다린 듯했다.
“왜 늦었어?”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조심스레 레이 옆에 앉았다. 자연히 그의 시선이 날 따라왔다.
“진짜 미안해. 숙취 때문에 늦잠 잤어. 미안.”
“걱정했어. 날은 어두운데 너는 안 오고.”
엉망진창이 된 입술이 부정적 환영으로 얼룩졌던 기다림의 단편을 보여 줬다. 나는 상처 난 입술을 살살 어루만졌다. 레이는 옅게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내 손길을 내치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딱지 질 것 같은데 이거. 원인 제공자가 나라는 사실이 속상하고 분했다.
“다신 안 그럴게. 약속.”
레이가 한숨을 내쉬며 날 끌어안았다. 그의 손에 내던져진 목도리가 툭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오뚝한 콧방울이 쇄골에 닿았다.
“약속 같은 거 안 해도 돼.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매번 느끼지만 말 한마디가 주옥같았다. 나는 잠시 레이를 밀어내고 가방 속에서 데이타스 약초를 꺼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항시 곁에 두는 습관을 들였는데 잘한 것 같다.
레이가 멀어진 온기가 아쉬운 듯 혀로 입술을 핥았다. 나는 미세하게 일그러진 미간을 펴 주고 그의 입술 위에 데이타스의 잎을 올려놨다.
잎을 꾹꾹 누르자 즙이 나오며 서서히 상처가 아물었다. 레이가 놀라서 물었다.
“이 정도 상처에 쓰기엔 아깝지 않아?”
“아깝기는 무슨. 이따 할 완벽한 키스를 위해서라면 하나도 안 아까워.”
레이는 말문이 막혀서 나를 멍하니 응시했다. 나는 다 쓴 잎을 던져 버리고 씩 웃었다.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쓱 훑자 립밤을 바른 것처럼 매끈했다.
“나 기다리는 동안 뭐 했어?”
“네 생각.”
진부한 말을 진부하지 않은 얼굴이 하니 색달랐다. 레이가 내 손바닥에 뺨을 부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넌 어제 어땠어? 재미있었어?”
“말도 마. 완전 대박이었어.”
나는 갑자기 신이 나서 데네브가 얼마나 끝내주는 모델이었는지에 대해 장황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겪은 재미난 일을 빠짐없이 들려주고 싶었다.
나는 에단의 마법으로 연출한 환상적인 배경과 쉴 새 없이 웃었던 아로네를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내가 천재 사진작가였다는 것도. 레이는 언제나 그랬듯 내 말을 경청하는 듯했다.
사실은 끊임없이 나오는 외간 남자들의 이름 때문에 살짝 토라졌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아챘다. 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요즘 나보다 걔네들이랑 더 시간 보내는 거 같아. 특히 에단.”
“어…… 혹시 삐졌어?”
“아니.”
레이는 새침하게 대꾸했지만 살짝 내리깐 눈은 누가 봐도 삐진 사람이었다. 뭐지, 이 치명적인 귀여움은?
나는 겨우겨우 웃음을 삼키고 레이의 뺨에 뽀뽀했다. 그의 입꼬리가 순간 씰룩거렸다.
“어때, 이제 좀 풀렸어?”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이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뽀뽀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레이 때문에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입술에 꾹 도장을 찍었다.
레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허리를 휘감았다. 그러고선 멀어지려는 내 입술을 살짝 물고 단숨에 숨결을 탐했다. 나는 곧고 단단한 손가락이 뒤통수를 감싸 안는 것을 느꼈다.
얘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지? 나는 허탈함을 느끼면서도 레이의 목을 감싸 안았다.
상실한 오전의 시간을 보상하고도 남을 긴 밤이었다.
***
오늘 밤, 또다시 화재 사고로 죽는 꿈을 꿨다. 내 무의식에 기인하여 만들어진 꿈이든 아니든 간에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건 확실했다. 단순한 점괘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걸까?
나는 퇴근 후 기숙사가 아니라 황궁 밖으로 향했다. 황궁에서 시내까지 거리가 꽤 돼서 웬만하면 밖에 잘 나가지 않았지만, 반복되는 죽음은 내가 귀찮음을 감수하도록 강제했다.
서랍에 처박아 놓은 후로 단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은 약도는 성한 곳 하나 없었다. 나는 구겨진 종이를 들고 길을 찾았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점은 할리의 설명은 지나치게 간소화되었고, 나는 레이처럼 뛰어난 공간 지각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이리저리 헤매다 제자리에 돌아오는 마법을 경험하고 나서야 약도를 깔끔하게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내 이름은 강혜라. 길을 잃었을 땐 감에 의지하지.”
나는 마음 가는 대로 걸었다. 저녁을 포기한 보람이 있게도 점점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그때부턴 흐릿한 기억에 의지하여 좁고 낡은 길을 걸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거칠거칠한 길에 내려앉았을 무렵 드디어 범상치 않은 기운의 천막이 나타났다.
나는 반색하며 달려갔다. 불량배들이 어슬렁거리기 전에 빨리 볼일을 보고 이 인적 드문 골목에서 나가고 싶었다.
천을 거두고 들어가려던 순간, 나는 별안간 딱딱한 무언가와 부딪히고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으헉!”
이마를 문지르며 짜증스레 위를 올려다보자 여자 둘이 화들짝 놀라며 꼭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나는 그 얼굴들이 익숙해서 또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먼저 정신을 차린 벨라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언니랑 베키가 왜 여기서 나와……?
참다못한 벨라가 내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나는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 생각도 못 하고 그들을 번갈아 봤다. 다시 봐도 익숙하지 않은 조합이었다.
“둘이 뭐야?”
벨라가 점집에서 나온 것도 신기한데 그 옆에 베키가 있고, 심지어 사이좋게 손까지 잡고 있다니.
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베키를 바라봤다. 베키는 오랫동안 숨겨 오던 비밀이 까발려진 사람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행동에서 만성적인 두려움이 읽혔다. 벨라가 그런 베키를 보고 어깨를 감쌌다. 그가 아주 작게 말했다.
“혜라 너라면 믿을 수 있겠지. 사실 우리 사귀어.”
“……예?”
갑자기 이게 뭐야? 나는 눈을 끔벅거리며 상황 파악을 했다.
그래. 그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가 분홍색을 띠고 있긴 했다. 아니, 근데 어쩌다가?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도대체 어떤 경로로 사귀게 된 건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하지만 입구 앞에서 이것저것 묻기엔 바람이 찼고, 주변에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몰랐으며, 무엇보다 베키가 너무 동요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벨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한철이면 사라질 감정, 아니죠?”
벨라의 화려한 과거를 알고 있다. 길드의 정보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는다. 하룻밤의 쾌락을 즐기던 벨라가 단순한 흥미로 베키를 꼬드긴 건 아닐지 걱정됐다. 벨라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응, 아니야.”
그럼 됐지, 뭐.
나는 활짝 웃으며 베키를 끌어안았다. 그가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 실없는 농담에도 까르르 웃어 주던 애가 언제 다 커서 연애를 하는 거야? 물론 나이 차가 얼마 나지는 않다만.
“비밀 꼭 지켜 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행복한 연애를 하길 바랄게.”
나는 베키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베키가 그제야 긴장을 풀고 고맙다며 작게 중얼거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흐뭇한 눈으로 지켜보던 벨라가 정확히 5초 후에 우리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그가 능글맞게 웃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건데 같이 갈래? 우리 연애사가 궁금할 것 같은데.”
“데이트 중인데 제가 어떻게 눈치 없이 따라가겠어요?”
마음 같아선 눈치 없는 척 그냥 졸졸 따라가고 싶었다. 베키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로네 님 도와드려야 해서 이제 막 헤어지려던 참이었거든요.”
그런 얘기는 처음부터 해 줬어야지. 나는 재빨리 벨라를 쳐다봤다.
“볼일 먼저 끝내고 맛있는 거 사 들고 갈게요.”
***
안타레스는 내가 찾아올 줄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눈짓으로 자리를 권하곤 오늘은 혼자 왔냐며 의미 모를 미소를 띠었다.
내가 암만 머리를 굴려도 그 미소의 뜻을 절대 알아내지 못하리라는 걸 알아서 자연히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바로 직구를 던졌다.
“불을 조심해. 이거 무슨 뜻이었어요?”
“희한하네. 그때는 점괘에 시큰둥했잖아.”
“그랬죠. 그때는 불에 타 죽는 꿈을 두 번이나 꾸지 않았으니까.”
안타레스의 눈이 번뜩였다. 가뜩이나 붉은 홍채가 먹잇감 발견한 맹수처럼 날 직시하니 당장 도망가야 할 것 같았다.
“꿈속에서 죽은 건 자기 혼자였어?”
“네.”
“혼자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