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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117/138)

<117화>

그가 생각에 잠긴 채 아득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딴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건 선반 위 유리병들이었다. 여전히 소름 끼쳤다. 사람 눈알은 도대체 무슨 일에 쓰려고 갖고 있는 걸까?

나는 갈색 홍채가 물에 동동 떠 있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눈알 보관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저렇게 오랫동안 물에 담가 놔도 되는 건지 호기심이 들었다.

저 눈알을 사람 눈에 이식할 수 있을까 혼자 궁리하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공상에서 빠져나와 안타레스를 바라봤다. 그는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 탐정처럼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무슨 질문을 하든 명쾌하게 설명해 줄 것 같은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제 경력이 어떻게 끝날까 궁금했었어요. 그런데 당신은 최악의 일이 벌어질 거라 말했고, 며칠 후에는 불을 조심하라는 쪽지를 보냈죠. 정말로 예언이란 게 존재한다면 이 세 가지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거든요. 제가 불에 타 죽기라도 하는 건가요? 하지만 그게 제 경력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안타레스가 수정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에 하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솔직하게 말할게. 검게 물든 수정구를 봤을 땐 자기가 죽는 줄 알았어. 버틸 수 있는 시련은 기껏해야 회색 정도가 최대거든. 하지만 검은색은 선명하고 강렬한 위험을 나타내. 감히 인간이 버틸 수 없는 위험을.”

인간이 버틸 수 없는 위험은 딱 하나, 죽음이다. 그래서 그때 못 볼 거라도 본 양 굴었구나. 나는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점괘를 봐 줬지만 그토록 어두운색은 처음이었어. 신경 쓰여서 다음 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미래를 점쳤지.”

“……제 머리카락이라고요?”

뭐지? 안타레스한테 머리카락을 떼어 준 기억은 없는데. 설마 쪽지만 놓고 간 게 아니라 남의 머리카락까지 주워 간 거야? 나는 소름 돋아서 양팔을 벅벅 문질렀다. 안타레스가 느긋하게 변명했다.

“오해하지 마. 자기가 여기에 떨어뜨리고 간 머리카락 말하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마법사라는 거 알잖아?”

주위에 하나 있는 마법사가 미친놈이라 그런지 의심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안타레스가 내 가늘어진 눈을 못 본 척하며 이어서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먼 미래를 보듯 깊어졌다.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자기의 미래를 봤어. 거센 불길 속에 자기가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지.”

“……제 꿈이랑 일치하네요.”

안타레스와 대화를 나눌수록 어렴풋이 느꼈던 불길한 예감이 점점 현실로 가까워지는 듯했다. 그러나 안타레스는 내 심각한 표정이 보이지 않기라도 한 양 빙그레 웃었다.

“내가 본 미래는 거대한 시간 속 찰나에 불과해. 화재의 원인이 뭔지, 자기가 그 사건으로 어떤 역풍을 맞게 될지는 때가 닥치지 않는 한 아무도 확신할 수 없어.”

“그럼 불에 타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으라고요?”

점은 심심풀이에 불과하다는 지론은 이미 머릿속에서 잊혔다. 나는 금방이라도 꿈이 현실화될까 봐 불안해서 다리를 달달 떨었다.

안타레스는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를 꺼내며 말했다.

“부적 하나 써 줄게. 항상 심장과 가장 가까운 곳에 지니고 다녀.”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부적을 받아 들었다. 살다 살다 내 의지로 부적을 받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행운을 빌게.”

나는 더 캐묻고 싶었지만 안타레스는 영업시간 끝났다며 나를 내보냈다. 천막 문을 닫으려면 아직 1시간이나 남아 있다는 걸 피차 아는데도.

나는 벨라에게 약속했던 간식거리를 사 들고 마차에 올랐다. 생각보다 천막 안에 오래 머물렀던 모양인지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끝없는 칠흑을 멍하니 응시하며 수수께끼 같았던 대화를 생각했다. 문제의 그날이 일어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니. 사실상 목 닦아 놓고 죽음을 기다리라는 말이잖아.

“……모든 일이 다 기막힌 우연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 커리어가 망하는 것도 모자라 불에 타 죽는다는 비관적 미래를 상상할 바에 차라리 모든 게 우연이라 치부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 훨씬 이로웠다. 나는 부적을 품 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당분간 몸 좀 사리지, 뭐.”

***

뻥 뚫린 길은 나를 순식간에 디아즈 저택의 뒷문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벨라가 부모님 몰래 만든 비밀 통로를 통해 비밀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탁자에 앉아 깃펜을 놀리고 있었다.

“저 왔어요.”

벨라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도 놀라지 않고 말했다.

“소파에 앉아 있어. 이것만 쓰고 갈게.”

“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잡지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처음 보는 잡지사인데? 나는 그리 생각하며 첫 장을 넘겼다가 살색의 향연을 보고 기함하며 잡지를 내던졌다. 도대체 저런 건 어디서 구해 오는 건지 경이로울 정도다.

내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이 벨라는 할 일을 마치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벨라가 내가 가져온 호두 파이를 작게 잘라 먹고 감탄을 뱉었다. 그 태평한 모습이 이젠 익숙해서 나는 그저 허허 웃었다.

“베키랑 어떻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 줘요.”

벨라가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연인을 떠올리며 몽롱한 눈빛을 지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내가 처음으로 의상점에 갔을 때였어…….”

벨라는 모든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그의 습관적인 추파에 얼굴을 붉히던 베키가 귀여워서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뒤로 주기적으로 의상점에 들락거리게 되었으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주점에서 베키와 마주치게 되었다는 것까지.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 뒤론 벨라의 불꽃 플러팅이 이어졌고,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아름다운 커플의 탄생이었다.

나는 벨라의 엄청난 기억력에 감탄하면서도 그의 눈빛이 완연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것이라 놀라워했다. 이제 보니 베키 자랑하고 싶어서 오라고 한 거였구나?

그는 베키의 장점을 끝도 없이 늘어놓다가 문득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덧붙였다.

“황태자와 계약 기간은 1년뿐이었고, 계약 조항에서도 사적 연애 생활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아무 문제 없는 거지?”

제이든 본인이 제일 열심히 사적 연애에 올인하고 있는데 뭘. 나는 실소하며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뭐,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목적으로 제이든이 먼저 제안한 계약인데 애꿎은 벨라가 운명의 상대를 찾은 게 조금 아이러니하긴 했다.

***

살짝 열어 놓은 창문 틈새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터질 것 같은 머리를 식혀 주었다. 나는 사약처럼 쓴 커피를 연신 들이켜며 내 팔뚝보다 두꺼운 이론서를 읽었다.

피 같은 주말에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대신 팔자에도 없는 책을 읽는 이유는 뻔했다. 왜겠어! 업무에 필요하니까 읽지!

나는 할리와 달리 아카데미를 나오지도 않았고, 낯선 세계에 지폐 한 장 없이 던져진 지 1년도 안 돼서 상식이 매우 부족했다.

덕분에 이번에 새로 실행한다는 복지 정책을 이해하고 깔끔하게 회의록을 정리하려면 기초적인 지식을 쌓아야 했다. 어느 지역에 어느 정책이 필요한지 내가 대략적이나마 알아야 말이지.

“혜라.”

레이의 목소리였다. 그는 방해하지 않겠다고 거듭 약속한 끝에 내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였다. 나는 깜지 같은 글을 읽느라 바빠 건성으로 답했다.

“어어, 왜?”

“얼마나 남았어?”

정확히 1시간 전에도 같은 질문을 한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이와 눈을 맞췄다. 그가 예쁘게 눈을 접으며 내 팔뚝 안쪽을 엄지로 문질렀다.

“많이 남았어?”

나는 순진무구한 척하는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방해 안 한다며. 벌써 지루해?”

“네 얼굴 구경하는 게 지루할 리가. 그냥 나는…….”

레이가 내 손을 그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습관적으로 그의 뺨을 쓸자 레이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네 관심이 고픈 거지.”

쟤 끼 부리는 것 좀 봐.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너무 좋아서 광대가 천장을 뚫을 것 같았다. 나는 실룩거리는 입매를 애써 아래로 잡아끌었다.

남은 책의 개수를 헤아리자 밤을 새면 그럭저럭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 어쩔 수 없네. 레이가 저렇게 대놓고 유혹을 하니 넘어가 주는 수밖에.

“그럼 딱 9시……. 아니, 9시 30분까지만이다.”

새침하게 대꾸하자 레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기다렸다면서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유난이라고 타박하면서도 그를 마주 안았다.

레이가 흘긋 시계를 보고 말했다.

“안 피곤해? 지금 딱 너 졸릴 시간인데.”

레이 입으로 들으니까 내가 무슨 꼬박꼬박 낮잠을 자야 하는 아기라도 된 기분이었다. 흠, 챙김 받는 기분 나쁘지 않은데?

나는 레이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한결같은 비누 향이 포근했다.

“네 말 들으니까 갑자기 졸린 것 같기도 하다.”

“조금 잘까?”

명백한 의문문이었지만 레이는 이미 답을 아는 사람처럼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나는 그가 내게 꼼꼼히 이불을 덮어 준 뒤 창문을 닫고 오는 모습을 흐뭇한 눈길로 지켜봤다.

레이가 날 마주 바라보고 누웠다. 코앞으로 다가온 잘생긴 얼굴을 보자니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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