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제이든은 무대 뒤에 서서 사회자가 호명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사회자가 흥분한 마음을 겨우 잠재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틈새로 보이는 객석은 빼곡하게 차 있었다. 객석 사이 복도에 서 있는 할리와 기막힌 우연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가 기억 구현기를 든 손을 방방 흔들었다.
나는 제이든 사진을 잘 찍으라는 의미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제이든 등 뒤에 대고 수군거렸다.
“제이든 님, 혹시 떨리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제이든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코앞에 다가온 얼굴을 보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가 울컥 치솟은 분노를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저번처럼 이상한 사탕 얘기하는 거라면 그만둬.”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음, 평소보다 발화점이 극히 높은 것을 보아 매우 긴장했나 보군.
“피로 완화 사탕이요? 그게 아니라 이번에는 긴장 완화 사탕이에요.”
제이든이 일일이 말하기도 입 아프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에단이 만든 건가?”
“제가 생각해 내고 에단이 만들었죠. 효과 엄청 좋아요. 한 개만 먹어도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평온해진다니까요? 분노 조절에도 괜찮고요. 어때요, 하나 드릴까요?”
제이든의 눈길이 파란색 사탕에 닿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매몰차게 고개를 돌리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됐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꽉 쥐어진 주먹은 완연한 긴장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혀를 차곤 사탕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후회할 텐데 그냥 달라고 하지.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에단이 만든 거라면 다 피해야 해?
사실 제이든은 고작 강연 따위에 긴장한 게 아니다. 앞서 강연한 졸업생들 중 아로네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강연을 마친 사람들은 강당 맨 앞줄에 앉아 학생들과 함께 남은 강연을 들었다. 즉, 제이든이 아로네와 눈을 마주 보고 제국의 미래를 논하게 될 거란 의미다.
가짜 애인이 아로네 옆에 버젓이 앉아 있는 와중에 평정을 유지하는 것은 아무리 제이든이라도 어려웠다. 방해 공작이 가득했던 레스토랑에서 겨우 계약 연애라는 비밀을 털어놓긴 했지만 찜찜한 건 매한가지였다.
제이든의 현재 애인과 과거의 약혼자가 나란히 있는 광경이라니. 그게 살아생전 볼 수 있는 장면이었냐고.
아로네는 먼지만큼도 벨라를 의식하지 않았지만 제이든은 달랐다. 그는 제 덕에 입방에 오를 아로네를 걱정함과 동시에 혹여나 벨라의 존재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진작 아로네의 참석 소식을 알았다면 제이든은 결코 강연 부탁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연 시작 몇 시간 전에 섭외된 사람을 무슨 수로 알고 피하겠어?
아마 제이든은 이 모든 게 아로네의 두 번째 복수라는 것도 모를 테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 내가 일부러 강연 순서를 맨 뒤로 미루었다는 것도 모르겠지.
사회자가 준비한 멘트가 슬슬 막바지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순서가 제이든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무엇 하러 제이든 소개를 그렇게 오래 한 건지 모르겠다.
“그럼 마지막으로, 제이든 황태자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리며 제이든이 무대로 걸어 나갔다. 당당하게 펴진 어깨와 직선을 그리는 걸음걸이, 그리고 곧게 쳐든 턱. 내심 긴장하던 모습이 연기 같을 정도로 그는 무대와 어울렸다.
나는 새삼 제이든이 황태자라는 것을 자각했다. 수백 쌍의 눈길쯤이야 부담도 안 된다는 저 눈빛은 타고난 것이었다.
나는 아카데미 직원의 눈초리를 무시하고 가림막 뒤에 딱 붙어 섰다. 방금 전보다 제이든의 표정이 잘 보였다.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갈 유능한 인재들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하고 싶군.”
제이든은 군림자의 미소를 띠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누군가를 찾듯 빠르게 움직이던 눈동자는 이윽고 한 곳에 멈추었다. 여유만만했던 표정이 일그러진 것도 동시였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아로네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단과 화기애애하게 잡담을 나누고 있는 아로네가.
제이든은 굳은 표정으로 문제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아로네는 강연이고 뭐고 아무것도 귀에 안 들어온다는 양 에단의 농담에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로네와 데네브가 썸을 타는 듯한 모습. 그 말도 안 되는 연출에 가담한 장본인인데 미리 전달받은 대사를 모를 리가 있나.
무지한 제이든은 그 연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짐작해 보았다. 글쎄다, 아마 과거의 연적이 또 나타났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럼 이번의 제이든은 사랑싸움에서 자신할 수 있을까? 멍청하지 않고서야 본인이 한참 뒤처졌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그래서 더욱 분한 거고.
가장 먼저 이상을 알아챈 사회자가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지만 제이든은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침묵이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생각한 사람들조차 슬슬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제이든의 시선이 아로네에게 못 박혀 떨어지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대본을 들고 제이든에게 걸어갔다. 제이든이 들고 간 대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강연하셔야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눈동자가 내게 향했고,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
제이든이 알아들었으리라 믿었다. 이 말을 침착한 상태에서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제이든은 그제야 분노를 삼키고 대본을 내려다봤다. 나는 재빨리 백스테이지로 돌아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가 대본 따위 필요 없다는 듯 뒤집어엎고 고개를 들었다. ……너 뭐 하는?
“으레 사람들은 황태자라는 직위가 화려하고 멋질 거라고만 생각하지. 그러나 실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아. 더 많은 국민을 살리기 위해 주야장천 글을 들여다봐야 하고, 서로 다른 이념과 목적을 가진 세력을 조화롭게 다스려야 하고, 때로는 나라를 위해 의지가 거세된 결정을 하기도 하지.”
저건 합의된 대사가 아니었다. 제멋대로 할 거면 지난 며칠간의 끝없는 대본 수정은 뭐였지? 시간 낭비?
이런 변수를 생각 못 한 내가 바보 같았다. 나는 제발 제이든이 헛소리를 하지 않게 해 달라며 온갖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생을 살며 힘든 결정을 할 때가 오네. 우리는 그릇된 결정을 할까 두려워 선택의 무게를 꼼꼼히 재고 최선이라 생각한 길을 가지. 선택을 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길의 끝에 빛이 있을지 혹은 낭떠러지가 있을지 알지 못해. 그저 내가 옳다고 믿고 나아갈 뿐.”
오케이.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 없다. 어느새 아로네도 잠시 연기를 멈추고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로네 쪽으로 기울어진 에단의 상체는 여전히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었다. 역시나 제이든은 그 은근한 기울어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옳은 선택을 내릴 순 없는 법이네. 중요한 건 내가 선택한 그 길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야. 그대로 주저앉아 비관하느냐, 혹은 또다시 긴 여정을 시작하느냐.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선 본인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 단순해 보이는 전제가 사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지.”
……세상에, 쟤 설마?
나는 새로운 시작과 과오의 인정이라는 단어에 특정 상황을 대입해 보았다. 내 짐작대로라면 지금 제이든은 인생이라는 큰 틀 아래서 아로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로네도 눈치챈 것 같았다. 그가 담담히 제이든과 눈을 맞추었다. 제이든은 슬며시 웃고선 이어 말했다.
“하지만 본인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확신하건대 맑고 또렷한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거네. 우물 안 개구리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기분이 어땠을 것 같은가? 내 경우엔 더없이 아름답고 애틋했어. 더 나아가 어리석었던 과거를 보상하고도 남을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지.”
나는 확신했다. 그래, 지금 제이든은 아로네에게 사죄를 하고 있었다.
“세니스 아카데미를 다닐 정도면 분명 제각각 뛰어난 재능과 박학한 지식을 갖고 있겠지. 그러나 인생은 지식과 재능 따위로만 굴러가지 않아. 자신감은 좋지만 본인이 언제나 옳다는 생각은 오만에 불과하다는 걸 언제나 명심하게. ……이 자리의 모든 이가 언제나 현명한 선택을 내리길 바라며 이만 강연을 마치겠네.”
제이든이 살짝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중 몇몇은 눈물을 쏟으며 열렬한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곧바로 단상을 내려가 벨라에게. 아니, 어쩌면 바로 옆에 있는 아로네에게 향하는 듯했다.
그러나 제이든이 미처 닿기도 전에 아로네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에단과 순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목적지를 잃은 손은 쓸쓸히 허공을 저었다.
사인을 요청하는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벨라는 복화술로 정신 차리라고 말했다. 제이든은 시끄러운 혼란 속에서 한참 동안 사라진 인영의 그림자를 쫓듯 멀거니 서 있었다.
나는 아로네를 대신해서 그 모습을 오래오래 눈에 담았다.
***
제이든의 거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할 정도로 그를 충분히 봐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서 고요히 분노하는 사내는 내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