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흔들렸다. 손톱이 살갗을 짓누르다 못해 기어코 피를 보고 나서야 제이든은 입을 뗐다. 목소리에도 형체가 있다면 사무실 벽이 무력하게 부서질 것 같았다.
“에단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아, 장난 수위 좀 적당히 조절할 걸 그랬나. 퇴근 후에도 사무실로 불려 오다니 이게 뭐람.
나는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때는 그랬었죠.”
“그때는?”
제이든이 기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은 얼핏 살의를 띠고 있었다.
“그럼 지금은 다른가?”
“잘 모르겠어요. 에단 속을 읽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요.”
“그 반대를 묻고 있다는 거 잘 알 텐데.”
아로네가 에단에게 호감을 가졌냐고? 그처럼 답이 명백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해할 여지를 던져 줘야 제이든이 ‘을’의 사랑을 보다 진하게 경험하겠지. 아로네가 나한테 그걸 주문하기도 했고.
“같은 대답을 돌려 드릴게요.”
나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제이든은 선연한 분노를 직통으로 맞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는 나 덕분에 모든 의지를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감정을 고르려 눈을 감았다. 움푹 패인 미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나는 어찌나 힘을 준 건지 핏기 하나 없는 손등을 흘깃하곤 말했다.
“제 임무는 아로네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거였지, 그 애의 마음을 돌려놓는 게 아니었어요.”
제이든이 번뜩 눈을 뜨고 날 노려보았다. 그가 악의적으로 단어를 짓씹어 뱉었다.
“광대 같은 레스토랑 말하는 건가?”
내 연기가 광대처럼 보였다니 심히 유감이다. 이미 끝난 화제를 다시 시작하면 불리한 건 나라서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이해가 안 되네요. 에단이 아로네 주변에서 얼쩡거린다는 건 이미 알고 계셨잖아요. 무도회도 아니고 고작 강연에 같이 온 건데 그게 뭐가 문제죠?”
“고작 강연?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당연히 아니다. 이 사회에서 미혼인 귀족 남녀가 어울리는 건 오로지 한 가지 의미를 가진다.
오늘부로 공녀와 차기 마탑주가 사귄다는 소문이 제국 전역에 퍼질 것이다. 그래서 제이든이 저렇게 노발대발하는 거고.
고루한 편견을 역이용하자는 발상은 놀랍게도 아로네가 떠올렸다. 나는 그 애가 또 다시 구설수의 주인공이 될까 걱정했지만, 결혼과 연애에 뜻이 없는 아로네는 어느 때보다 확고했다.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뭐라 떠들어 대든 본인에게 오는 타격은 하나도 없을 거라 단언하던 그 애들……. 에단은 아무래도 상관없고 아로네가 참 많이 컸다고 생각했다.
“당연하죠. 에단이 툭 하면 의상점에 놀러 오는 거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강연에 같이 온 게 뭐 대수인가요? 게다가 에단도 아카데미 졸업생이잖아요. 물론 강연 거절한 사람이 남의 거 보러 온 게 신기하긴 하지만…… 걔가 언제는 평범했나요.”
제이든이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처럼 보였다.
“강연 시작 몇 시간 전에 오겠다고 한 사람이 파트너를 데려왔잖아. 고작 몇 시간 만에 에단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의상점과 마탑이 가까웠던가?”
나는 침묵했다. 일방적 분노로 시작했던 대화가 심문을 거쳐 혼잣말로 향하고 있었다. 제이든은 여전히 내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주의는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지. 그때도 둘이 같이 있었든지, 아니면 둘만의 연락망이 있든지. ……말해. 어느 쪽이지?”
나는 침음을 삼켰다. 부릅떠진 눈이 일그러진 소유욕을 담고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성을 잃기 직전인 남자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제이든이 이상한 포인트에 꽂히면 물불 안 가린다는 걸 안다. 힘 있는 사람이 간절하고도 불가능한 꿈을 꿀 때 어떤 짓까지 할 수 있는지도 보았다.
여기서 제이든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벨라를 버리고 아로네에게 인생을 걸 것이다. 아로네 주변을 맴도는 에단이라는 벌이 얼마나 위협적인 적수인지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웃기지 않은가? 제 발로 차 버린 보물을 누군가가 차지하려 하자 뒤늦게 아쉬워하는 꼴이란.
제이든을 묶어 둘 최소한의 고삐마저 없어지면 아로네의 삶이 많이 귀찮아질 것이다. 물론 행동 제약이 없어지며 제이든은 더욱 절절맬 테고, 그게 바로 아로네가 원하는 모습이지만 제이든은 정도를 모르니까.
“글쎄요. 유토피아 개장식 때처럼 아카데미로 향하던 중 우연히 만났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에단은 일하지 않을 핑곗거리를 찾아 밖을 쏘다니곤 하거든요.”
제이든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꼭꼭 숨겨진 비밀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양 시선을 옭아맸다.
이윽고 그는 곱게 눈을 접으며 웃었다. 약한 소름이 일었다.
그가 처음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내용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지만.
“네가 쓸모없을 거란 걸 왜 이제 깨달았을까.”
내 말이. 네가 날 계약으로 묶어 둘 수 있는 사람이라 여겨서 다행이었지.
“앞으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일에서 손 떼.”
“하지만…….”
제이든이 사납게 쏘아붙였다.
“별 같잖은 레스토랑을 언제 만회하나 기다려 줬더니 다음 약속은커녕 에단한테 좋은 일만 해 주는군.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격렬한 감정이 태풍처럼 사무실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 상황이 마냥 귀찮다고 생각하던 내가 일순 주춤할 정도로 말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꿋꿋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데네브 님은 순조롭게 관계 회복하고 있어요. 정말 아로네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 색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해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무한한데 오늘 일로 제 도움을 포기하시는 건가요? 그러기엔 제가 가진 이점이 너무 아깝지 않아요?”
제이든은 단호한 얼굴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공작이 네 말 들어서 한 짓이 그 우스운 잡지인가? 다시 한번 말한다. 나가.”
출고된 지 9일 만에 9쇄 할 만큼 인기 많은데 우스운 잡지라니요. 아로네가 데네브에게 감사의 의미로 꽃다발을 보냈다는 말을 들으면 절대 무시 못 할걸? 물론 반쯤은 놀리는 의미였지만.
나는 별말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오늘 내가 한 말 중 가장 진실에 가까웠던 충고였는데 그걸 무시하다니. 쟤도 자기 팔자를 꼬는 재주가 있나 봐.
단언하건대 신시아를 꼬실 때 했던 방식으로는 아로네의 눈길 하나 얻지 못할 것이다. 듣기 싫다는 사람한테 굳이 그 사실을 말해 주진 않을 생각이다.
***
“다들 31일에 시간 비지?”
뜬금없는 내 말에 레이와 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씩 웃고선 품 안에서 고급스러운 봉투 두 개를 꺼냈다. 그중 하나를 할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아로네가 그날 연말 파티를 열어. 원칙대로라면 단골손님과 마탑 관련자들, 그리고 지인들만 갈 수 있는데 너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친구들이잖아? 올해의 마지막인 만큼 화려하게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아서 힘 좀 써 봤어. 어때?”
적어도 할리는 무조건 수락할 거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요즘 제일 잘나가는 의상점이 열 파티의 퀼리티가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레이가 내 머리카락을 장난치듯 비비 꼬며 말했다.
“난 네 친구가 아니라 애인인데.”
얼씨구. 나는 능글맞은 미소를 흘리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하나밖에 없는 애인으로서 내 파트너가 되어 줄래, 레이?”
“기꺼이.”
레이가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슬쩍 올려다보는 눈이 은근했다.
할리가 질색하며 염장 지를 거면 제발 둘만 있는 방에서 해 달라고 사정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리액션 한번 끝내줬다.
나는 낄낄 웃으며 레이의 어깨에 기댔다. 할리가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다가 벌컥벌컥 술잔을 비웠다.
“근데 갑자기 파티는 왜 여는 거야?”
나는 잠깐만 기다리라는 듯 검지를 들어 올렸다. 분명 아로네가 길고 자세하게 설명해 줬는데 뭐라 그랬더라?
미래 지향적이고 현명한 아이디어라고 칭찬도 했는데. 그러니까 옆에서 에단이 이해는 하고 말하는 거냐고 태클 걸고…….
“아, 기억났다. 엄청난 돈을 쏟아 주신 거물들에게 간접적으로 감사를 전하고, 의상점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던가?”
이외에도 데네브에게 새로운 옷을 입히겠다는 목적이 있지만 할리가 그걸 알 필요는 없겠지.
“파티로 특별함을 나타낸다고?”
할리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미간을 좁혔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말을 고르는데 대답은 생뚱맞게도 내 옆에서 튀어나왔다.
“파티에 참석할 사람들은 재산, 권력, 힘 중 적어도 하나씩 갖고 있어. 의상점에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은 모두 성공했다는 특징을 갖고, 반대로 성공한 사람은 공녀가 만든 옷을 입지. 그 파티로 하여금 공녀의 옷은 성공의 상징이 될 거야.”
완벽한 설명이었다. 나는 대견하다는 듯 레이의 팔을 토닥였다. 난 쟤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행동할 때가 그렇게 좋더라.
“대박이지 않아? 파티 그 자체가 하나의 홍보 수단이 된 거잖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
할리가 기똥차다며 감탄을 하다가 별안간 사색이 되었다.
“잠깐만! 혹시 그 참석인 명단에 제이든 님도 있어? 그분만 초대받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면 뒷감당이 엄청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