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138)

<121화>

그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며 치를 떨었다.

“걱정 마. 초대받았다고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다고?”

할리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듯 눈을 깜박였다. 나는 그저 의미심장하게 웃어 주고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술잔을 기울였다.

할리는 끈질기게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내가 끝까지 빙글거리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한 달 남짓한 사기극이 드디어 그날 막을 내릴 것이다. 내가 쏘아 올리고 아로네가 끝내는 연극은 해피 엔딩일까, 배드 엔딩일까. 얼마 후 열릴 파티가 무척 기대되었다.

***

점심시간. 나는 막 일어나서 구내식당으로 내려가던 중이었다.

오늘 메뉴가 역대급이라 내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볍고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말이다. 1층 로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악에 받친 고함이 내 노래에 찬물을 끼얹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소음의 근원지를 찾았다.

“세상에 저게 뭐람?”

옆집 사는 엘리가 로비 직원 바이올렛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항의하는 모습이 순한 얼굴이랑 완전 정반대라 인지 부조화가 왔다.

‘……엮이지 않는 게 좋겠지?’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슬금슬금 출구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의 내 운세는 별로였나 보다. 엘리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가 나를 발견했다.

그가 구세주를 만난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나를 바이올렛 앞으로 끌고 갔다. 겉보기로 사람 판단하는 거 아니라지만 저 얇은 팔목에서 어떻게 이런 괴력이 나오는 거지?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바이올렛과 엘리를 번갈아 보았다. 바이올렛은 골치 아프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엘리가 내 두 손을 꼭 부여잡고 말했다.

“혜라 님, 제발 저한테 죄가 없다고 말 좀 해 주세요.”

나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피했다. 분명 통성명했을 때는 정상인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마약에 취한 사람 같았다.

“무슨 일인데요?”

엘리는 왈칵 분노를 쏟아 냈다.

“아니, 저한테 민원이 수십 건씩이나 들어왔다면서 퇴소 조치를 내리겠다는 거예요. 혜라 님, 한번 말씀해 보세요. 제가 시끄러웠나요?”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그 수십 건의 민원 중 일부는 내가 넣은 거라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 하나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을 보니 바이올렛의 편을 들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게다가 내 팔뚝을 옥죄고 있는 손아귀 힘이 황소 같았다.

나는 도와 달라는 눈빛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봤다. 그도 내가 민원을 넣었다는 걸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젠장.

“가끔 엘리 씨 말소리가 들리긴 했…….”

와, 눈빛 뭐야? 나는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황급히 말을 돌렸다.

“들리긴 했지만 그건 제가 유별나게 청력이 좋아서 그런 것 같고요……. 근데 방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거예요?”

놀랍게도 엘리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딱히 떳떳한 짓은 아닌가 보지? 바이올렛이 비웃듯 말했다.

“강령술이 취미시랍니다.”

“뭐라고요?”

그럼 전에 스치듯 보았던 양초와 제단이 다 귀신 불러낼 때 사용되는 거였어? 그동안 벽 너머에 귀신이 우글댄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니…….

엘리는 뻔뻔하게도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어이가 없어선. 제 취미가 뭐가 어때서요? 제가 악마를 불러내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조용히 방에서 취미 생활을 한 것뿐이잖아요. 주변에 민폐 끼친 건 아무것도 없다고요.”

대박인데? 아무래도 엘리는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아주 나쁜 습관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내가 도를 넘은 뻔뻔함에 입을 벌리자 바이올렛이 공감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평소의 모습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럼 이거 하나 말해 봐요. 정말 유령을 불러낸 적 있어요?”

“아직까진 없어요. 제 믿음이 부족한가 봐요.”

얘 진짜 웃기네. 귀신 하나 불러내는 데 믿음이 필요하나?

“어쩌다 그런 취미를 갖게 되었는데요?”

엘리가 짜증스레 대꾸했다.

“지금 저 취조하시는 거예요?”

거의 한 대 칠 기세였다. 나는 그의 손을 꾸역꾸역 떼어 내고 얼얼한 팔뚝을 문질렀다. 뭔 말을 무서워서 못 하겠네.

“도와주려고 물어보는 거예요.”

“……아카데미 시절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저한테 전파했어요. 그때 한창 힘들었을 시기라 강령술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강령술처럼 은밀하고 어두운 취미를 전파했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엘리를 꼼꼼히 훑었다. 그러다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가 특이한 문양을 띄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제국 단일신인 르메스의 상징과 묘하게 달랐다.

“그 목걸이는 뭐예요?”

엘리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목걸이를 옷 안으로 감췄다.

“……그 사람한테 선물 받은 거예요.”

“문양이 좀 특이하던데?”

그가 살벌하게 눈을 치켜떴다. 나는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뭐야, 왜 저렇게 과민 반응해? 죄 들킬까 봐 불안한 사람처럼?

“이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죠?”

더 자극했다간 정말로 한 대 맞을 것 같았다. 나는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이렇게나 억울해하니 지켜보는 게 어떨까요? 민원 넣은 사람들이 방 호수를 착각한 거일 수도 있잖아요.”

한밤의 소음은 호수를 착각할 수 없을 만큼 분명했지만 나는 바이올렛한테 ‘일단 내 말대로 해’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럼 조사를 철저히 한 뒤 다시 조취를 취할게요. 엘리 양은 가 보셔도 좋아요.”

“진작 그럴 것이지.”

엘리가 바이올렛을 위아래로 훑어보곤 찬 바람을 일으키며 떠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떠나자마자 참았던 욕을 쏟았다.

“와, 쟤 뭐예요? 기가 쎈 건지, 싸가지가 없는 건지, 경우가 없는 건지. 진짜 역대급.”

“말도 마요. 1시간 동안 화냈다니까요.”

엘리는 왜 하필 내 옆방에 사는 걸까? 가능한 한 빨리 쫓아내야겠다.

“근데 아까 왜 그 사람 옹호했어요? 혜라 씨가 가장 먼저 신고했잖아요.”

“일단 돌려보내야 저랑 바이올렛 씨가 안전할 것 같더라고요. 차라리 조금 시간 뒀다가 기사단 동원해서 끌어내 버려요. 딱 보니까 쟤는 말로 해서 들을 인간이 아니야.”

바이올렛이 똥 한번 제대로 밟았다며 한숨 쉬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나갔다.

근데 그 이상한 문양은 뭐였을까? 신의 상징을 함부로 바꾸면 성기사단한테 끌려갈 텐데. 흠, 내가 잘못 봤나?

***

나는 방금 전의 불쾌한 기억을 잊고 희희낙락하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기숙사 밥맛이 진짜 끝내줬다. 할리도 탄성을 지르며 작게 자른 고기를 입안에 넣었다.

“고기가 살살 녹지 않냐.”

“나 솜사탕인 줄 알았잖아.”

나는 황홀경에 빠진 할리를 보고 킥킥 웃었다. 그리고 레이에게 말을 걸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별로 줄지 않은 그릇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왜 안 먹어?”

“먹고 있어.”

거짓말. 레이는 내 볼록 솟은 볼때기를 흐뭇하게 쳐다보느라 고기가 식어 가는 것도 몰랐다.

“너 은근 손 많이 가.”

손수 그의 입에 고기를 넣어 주자 레이가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오물오물거리는 입술이 귀여웠다. 음, 왜 나만 쳐다봤는지 알 것 같군.

“꼴깝을 떠네.”

할리가 평소처럼 질투하는 줄 알고 웃어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할리 목소리라기엔 너무 느끼했다. 우리 셋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동시에 쳐다봤다.

“뭐야?”

심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보자니 절로 말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나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게일을 쳐다봤다.

그는 나한테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내 앞과 옆을 둘러싼 애들이 무서워서 눈치만 봤다. 레이가 싸늘하게 말했다.

“저희한테 볼일 있으십니까?”

“……볼일 없소.”

게일이 시선을 피하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씩씩대며 말했다. 마주친 눈동자에 악의가 가득했다.

“이 말은 꼭 해야겠군. 그날 혜라 양이 내게 했던 말,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니 유념하게.”

게일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홱 몸을 돌렸다. 진짜 오늘 뭐지? 마가 꼈나? 나는 멍하니 그 뒤뚱거리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레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날 네가 했던 말이라니?”

“별거 아니야. 꺼지라는 말은 좀 돌려서 했어.”

할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정말 돌려서 말한 거 맞아? 저 사람 엄청 화난 것 같은데.”

“알게 뭐야.”

레이는 그가 모르는 시간 속 게일이 또 나한테 헛소리했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난 기색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아무튼 넌 신경 안 써도 돼. 이따 저녁에 아로네 만날 것만 신경 써.”

레이는 갑자기 입맛이 싹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

“인사해, 얘가 내 남친 레이야.”

레이는 잔뜩 긴장한 채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아로네가 티 나지 않게 레이의 위아래를 훑었다. 평온한 표정을 보니 일단 겉모습은 합격한 것 같았다.

“드디어 만나네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나와 레이는 아로네를 마주 보고 앉았다. 덕분에 레이는 음식을 먹기도 전에 체한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걱정일랑 할 필요 없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건만. 아로네랑 사이좋았던 적이 없어서 어지간히 떨리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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