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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123/138)

<123화>

아로네는 빗살을 가를 기세로 엉엉 울었다. 데네브는 언제나 활기찼던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장례식이 진행되는 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의 틈새라도 생기면 아로네처럼 추하게 울 것 같았다.

조문객들이 모두 돌아간 후에도 남겨진 일가족은 여전히 빗속에 서 있었다. 풀에 지친 아로네는 온기를 갈구하며 아버지의 손을 잡았지만 그는 불결한 무언가를 치우듯 아로네의 손을 쳐 냈다.

아버지는 말없이 아로네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아로네를 거슬려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반대로 제게 쏟아지는 관심과 기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납득이 안 되는군. 아로네가 어머니를 죽인 것도 아닌데……. 설마.”

아로네가 태어난 시기와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시기가 정확히 일치한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외도를 알아챘던 것이다.

“아버지가 네 살 아이한테 화풀이할 정도로 분별없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데네브는 그저 아버지에게 깊은 분노와 실망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행실만 똑바로 했어도 어머니는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텐데.

아로네의 출생 논란에 대한 감상은 그게 다였다. 아로네가 부당한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는 생각도 순간 들었지만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다시 심해로 가라앉았다.

데네브 본인 또한 그 차별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방어 기제가 작용한 것이다.

데네브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로네의 평판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질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아로네의 노기가 오래갈까 봐 걱정했다. 악 받친 고함을 하루 종일 듣는 건 정신 건강에 전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로네는 생각보다 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 결과가 사업하겠다는 파격 선언이라서 문제였지만.

아로네는 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을 불러 놓고 말했다.

“지금까지 전 남들 시선을 의식하며 완벽한 인형이 되기 위해 애써 왔어요. 근데, 앞으론 새하얀 도화지 위에 제가 그리고 싶을 것만 그리려고요. 그곳엔 정략결혼도 무익한 사교 파티도 없어요. 그 수단으로 사업을 이용할 거고, 도움 따위 바라지도 않으니 방해나 하지 말아 주세요.”

아로네가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별 특이한 여자와 어울려 다니더니 기어코 물들었구나. 귀족이 사업이라니? 그게 가능한 소리던가.

데네브는 문득 아로네가 본인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철 좀 들었나싶더니 결국 갈 때까지 가는 구나.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출생의 비밀도 숨기고 19년 내내 저한테 화풀이하셨으면 그 정도는 해 주실 수 있잖아요. 그렇죠?”

아버지를 노려보는 시선이 호기로웠다. 데네브는 보란 듯이 비웃었다. 사고 쳐서 아버지의 관심을 끄려는 수작은 한결같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아로네는 평온하게 웃었다. 담력 하나는 인정해 줄 만했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데네브는 영양가 없는 질문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로네가 일주일 만에 포기한다는 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

일주일 만에 아로네가 포기할 거라 생각했다.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혀 보지 않은 애가 무슨 수로 사회에 나가 돈을 벌겠는가?

데네브는 주야장천 뛰어다니는 아로네의 모습을 지켜보며 혀를 찼다. 바늘과 실처럼 꼭 붙어 다니는 그 여자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나 싶었다.

친구가 헛된 꿈을 꾸고 있으면 따끔히 충고해 주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거늘.

“……그 여자라면 오히려 부추겼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여자는 사람을 망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로네가 그 여자를 만난 후로 그토록 쉽게 미래를 포기했을 리 없다.

그러게 진작 경고했을 때 듣지. 데네브는 초췌한 안색의 아로네를 마주칠 때마다 속으로 비웃었다.

그는 아로네의 사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날은 절대 오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아로네가 가문의 힘과 돈을 빌리지 않고도 번듯한 가게를 계약하고, 차근차근 개업 준비를 해 나가면서 데네브는 갈림길 앞에 서게 되었다. 지금 당장 뜯어말려야 할까? 혹은 조금 더 지켜볼까?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결과적으로 데네브는 그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는 단지 아로네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언제나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오만한 눈빛을 짓는 그 애에게 공녀의 삶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 깨달음을 주고 싶었다.

아로네의 사업이 성공할 가능성? 그런 건 애초에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남을 괴롭히는 게 다인 아이가 어떻게 성공을 하겠는가?

그러나 상황은 데네브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아로네는 지친 기색을 내보일지언정 끝까지 도움을 구하지 않고 개업 준비를 마쳤다.

‘공녀’라는 특징은 단숨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신문사들은 앞다퉈 아로네가 만든 옷의 잠재력을 평가했다.

놀랍게도 평가는 정확히 반으로 양분되었다. 바지를 입는 여자라니? 데네브는 난해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혁명이라 칭송하는 사람들도 분명 많았다.

마탑과 협업하여 만든 옷이 출시되었을 때는 이미 사업이 자리를 잡은 후였다. 부정적인 여론이 감쪽같이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바지를 입은 여성을 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됐을 즈음, 아로네는 또 한 번의 통보를 날렸다.

“생각해 보니 나가는 날을 안 알려 드린 것 같아서. 저 내일 떠나요. 그동안 제가 혼자서 크도록 가만히 보고만 계셔 주셔서 감사했어요.”

아로네는 할 말만 내뱉고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에 맞추어 구불거리는 머리칼이 사뿐사뿐 흔들렸다. 표정을 보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웃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네브는 저도 모르게 아로네를 쫓아가 손목을 잡아 세웠다. 아로네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그린 듯이 웃었다.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 한들 그래도 가족인데, 가족 앞에서까지 가면을 쓰는 게 새삼 충격적이었다.

“의외네. 네가 날 잡을 줄은 몰랐는데.”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이대로 아로네를 보내기엔 마음이 찝찝했다. 영문 모를 찝찝함이 이해되지 않아 데네브는 미간을 좁혔다.

“왜 나가는 건데?”

“이 저택에서 좋았던 기억이 없어서.”

“그래도 하나쯤…….”

아로네가 벌레를 내쫓듯 손목을 털었다. 애초에 힘을 주지 않았던 손은 무력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없어. 하나도.”

차갑게 식은 눈동자 한가운데에서 분노의 불씨가 일렁이고 있었다. 데네브는 뿌리 깊은 원망을 목도하고 순간 말문을 잃었다.

그사이 아로네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계단을 내려갔다. 데네브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계단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아로네는 한시라도 빨리 저택을 벗어나고 싶다는 양 평소 그렇게나 중요시하던 격식마저 신경 쓰지 않고 달리듯 걸었다.

누구보다도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했던 애가 제일 먼저 저택을 떠났다. 아로네가 다시는 저택의 문을 넘지 않으리란 예감이 얼핏 들었다.

데네브는 망설임 없는 발걸음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말도 안 된다. 좋았던 기억이 단 하나도 없을 리 없다.

지금 아로네는 그저 또 다른 객기를 부리는 것이다. 남겨진 자들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해 벌이는 영악한 객기가 분명하다. 데네브는 소리쳤다.

“혼자 어떻게 살 건데? 집안일, 경비, 요리, 다 네가 할 거야?”

아로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뭐 잘못 먹었어? 평소처럼 굴어. 어차피 네 알 바 아니잖아.”

그리고 끝이었다. 아로네는 그날부로 가족과 연락을 끊어 버렸다. 애초에 안부 인사를 나누던 사이도 아니었지만.

데네브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로네가 그의 인생에서 님프 가문을 송두리째 잘라 내었다는 것을.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했다.

***

가뜩이나 삭막했던 저택은 아로네가 떠난 후로 더욱 메말랐다.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평정을 가장했지만, 데네브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주인 없는 방을 지날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처음에는 반항아처럼 구는 아로네가 한심해서 그런 줄 알았다. 쉬운 길을 두고 왜 어려운 길을 택할까?

다음으로 든 감정은 분노였다. 데네브는 ‘동생’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온갖 비난을 받게 되어 억울하고 화났다. 아로네가 제 발로 나간 것임에도 사람들은 님프 가문이 사생아를 방출했다고 생각했다.

이유 모를 통증은 계속되었다. 그 병은 약을 먹어도, 유명한 의원을 불러와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데네브가 병명의 원인을 찾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가을 어느 날, 데네브는 우연히 펼친 신문에서 아로네의 인터뷰를 발견했다. 독점 기사를 낼 정도로 아로네가 성공했던가? 데네브는 약간의 흥미를 갖고 페이지를 넘겼고, 예고 없이 아로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참 동안 아로네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아로네는 행복해 보였다. 19년간 정교하게 갈고 닦은 사교용 미소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였다.

“……쟤가 저렇게 웃을 수도 있구나.”

문득 3층 복도를 울리던 낯선 웃음소리가 떠올랐다. 거짓 없이 웃을 수 있는 애가 왜 저택에선 그토록 차갑게 얼굴을 굳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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