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제이든은 선뜻 입이 떼어지지 않아 하루 종일 타이밍을 쟀다. 그 딴에는 티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혜라는 쓸데없이 눈치가 좋았다.
“제이든 님, 저한테 하실 말씀 있지 않아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녀에게 미련이 남았다는 오해만큼 끔찍한 게 없었다.
제이든은 무심한 척 혜라의 옷으로 물꼬를 텄다. 역시나 혜라는 작은 화제를 던져 줘도 필요한 정보의 이상을 말했다.
제이든은 혜라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언제 다시 잡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도 될지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중 갑자기 화제에 오른 에단의 이름은 뜻밖이었다.
“에단 걔, 가게에 자주 놀러 오던데요? 저랑도 그 이후로 몇 번 더 마주쳤어요. 차기 마탑주라는 사람이 그렇게 한가해도 되나 몰라.”
공녀가 마탑과 단독 계약을 맺은 것도 의아했는데 더 나아가 에단과 친분까지 쌓은 줄은 몰랐다. 관심이 없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근데 왜 기분이 나쁠까. 전 약혼자가 조숙하게 굴기는커녕 금세 외간 남자랑 놀아나서? 과거의 연적이 내 전 약혼자 주위를 맴돌아서? 마탑이 처음으로 계약을 체결한 곳이 황궁도 아닌 일개 의상점이라서?
사실 제이든이 기분 나빠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파혼하고 제일 기뻐했던 사람이 바로 제이든 본인인데 공녀가 에단이랑 친하게 지내든 말든 그가 신경 써야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혜라가 말한 문장 중 한 단어가 유난히 제이든의 심기를 건드렸다.
“……자주라고.”
부정하던 현실을 직시할 때가 온 것 같다. 제이든은 마침내 공녀의 변화를 인정했다. 아로네 님프는 더 이상 제이든 헤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
공녀가 사업을 하든 말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제이든이 신경 쓰는 건 오직 떠나간 공녀의 마음이었다.
공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할 거라 생각한 적 없다. 그의 사랑은 태양이 동쪽에서 뜬다는 진리와 맞닿아 있었다. 13년의 사랑이 고작 몇 달 만에 사라졌다는 게 말이 되는가?
관심 좀 가져 달라고 애원하듯 바라볼 때는 언제고 금세 다른 남자랑 어울리는 꼴이 어이없었다. 1년 사이에 파혼, 사생아, 사업, 출가까지 온갖 일을 겪더니 드디어 사교계 평판을 완전히 포기한 건가 싶었다.
일평생 자기 전 공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공녀의 변화를 받아들인 이래로 그 여자는 자꾸만 제이든의 일상에 침범하여 물음표를 던졌다.
과거를 돌이키며 혐오했던 애정의 흔적을 찾는 일이 점점 빈번해졌고, 제이든은 아무도 남지 않은 곁을 둘러보며 내심 허전함을 느꼈다.
겨우 공녀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도 소용없었다. 모든 잡지가 표지로 공녀의 사진을 내걸었다.
환하게 웃는 공녀를 보며 제이든은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공녀가 그에게 웃어 준 적이 있었던 것도 같은데 그때가 언제인지, 무슨 상황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기묘한 상황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제이든의 시간은 어느새 먼 과거로 돌아가 있었고, 현실에서 보고 듣는 공녀의 소식은 제이든의 신경을 끌었다.
제이든은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에게 털어놓지도 못하는 고민은 점점 크기를 불렸고, 마침내 물집이 터진 건 유토피아 개장 기념 피로연 때였다.
오랜만에 공녀를 보는 자리라 조금 긴장했었다. 그의 떠나간 마음을 인정하긴 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공녀는 개장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피로연이 열리기 직전, 에단과 함께 등장했다.
그들을 감싼 분위기는 편안했다. 서로 악담을 주고받던 아카데미 시절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별것도 아닌 게 어쩜 그리 아니꼽던지.
제이든이 상상한 재회는 결코 이렇지 않았다. 그는 이유 모를 분노를 느꼈다. 에단과 같은 마차에서 내렸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공녀가 답답했다.
“친우끼리 오는 게 뭐가 의외인가요?”
친우라, 언제든 갖다 붙이기 좋은 단어지. 에단의 팔짱을 낀 여자가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면 곧이곧대로 믿어 줬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단과 제이든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제이든은 비로소 불치병의 원인을 깨달았다. 그가 아로네에게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
제이든은 밤낮으로 고민했다. 어떻게 아로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까?
“타이밍 한번 참 얄궂군. 아로네가 날 사랑하지 않게 된 후에야 그 애를 좋아하게 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의 힘으로 역부족일 것 같았다. 제이든은 일단 시간을 두고 마땅한 수가 떠오를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사이 에단이 아로네를 채갈까 봐 불안하긴 했지만 성급함은 일을 그르치는 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운 좋게도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제이든은 분명 혜라가 더스크번의 공로를 요구할 거라 예상했다. 경이로운 성과를 얻고 귀환했으니 포상을 내리는 게 도리이긴 하나 굳이 먼저 그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다.
“제 성과를 증명할 공식적인 증표가 필요해요.”
처음으로 혜라가 그의 예상대로 행동하는 순간이었다. 제이든은 짜릿함을 느꼈다.
“특별 훈장 정도면 만족하나?”
“……만약 그 계약에 서명하실 거면 더스크번 파견단에 제 이름도 올려 주세요. 지휘관으로.”
“그러지.”
혜라는 기뻐하면서도 의아한 눈치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기막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제이든은 그 표정을 음미하며 말했다.
“네게 훈장과 지휘관 자리를 약속하지. 단, 네가 어떠한 술수 없이 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보좌관 혜라는 믿을 만하나 연애 조력자로서의 혜라는 재앙이었다. 그럼에도 제이든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아로네는 제이든의 만남 요청을 무시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동시에 그는 하나뿐인 친구의 부탁이라면 뭐든 할 사람이었다. 반면 혜라는 보기보다 야욕이 대단한 사람이었고.
혜라는 1급 보안 마법과 강제 마법이 걸린 계약서에 영혼을 묶었다. 피로 매개되는 계약은 다른 것보다 강력하고 파기하기 어렵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려운 수준을 넘어 아예 불가능했다.
혜라가 온 힘을 다해 도와줄 거란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제이든은 그저 계약서의 구속력을 믿었고, 그를 비웃듯 믿음은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
혜라는 자리를 만들어 줬다는 의미에서 착실했지만 그 알맹이에 있어선 조력자가 아니라 차라리 훼방꾼이었다.
첫 번째 데이트였다. 아로네는 끔찍한 노래가 마음에 들었는지 식사 내내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그의 호감을 따야 하는 제이든 입장에선 아로네의 주의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어서 낭패였다.
데이트를 망친 주범은 다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제이든은 혜라를 한 번 더 믿어 보기로 했지만, 아카데미 강연에서 에단을 보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여유 부릴 수 없었다.
그는 혜라를 시켜 되는 대로 아로네와 약속을 잡았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하고, 유행하는 연극도 보고, 아로네가 좋아한다는 화가의 전시회도 갔다 왔다.
제이든은 있는 힘을 다해 아로네에게 그의 마음을 피력했지만, 아로네는 꿈쩍하지 않았다.
제이든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은 이미 지난 세월 동안 모조리 소진되었다는 양 아로네의 식은 불꽃은 다시 지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전이 없는 관계가 답답했다. 내킬 때마다 아로네를 만날 수 있는 에단과 달리 그는 일주일 전부터 사정해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자존심 상했다.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이든은 연말 파티에 초대받고 드디어 관계가 진척되는 것인가 기대했다.
해의 마지막 날, 그는 평소보다 옷차림에 신경 쓰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파티장은 황궁에서 꽤 멀었지만 설레는 마음은 시간의 태엽을 더욱 빨리 돌렸다.
제이든은 한 손에 꽃다발을 꼭 쥐고 걸었다. 촘촘히 늘어선 가로등들이 어슴푸레한 길을 밝혀 주었다.
희한하게도 거리는 고요했다. 쉬지 않고 내리는 함박눈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그는 오늘 파티에서 계약 연애의 종결을 선언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소 무모한 결정이긴 하지만 에단을 밀어내려면 승부수를 둘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제이든은 긴장감을 억누르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대로 문을 열고 파티장에 들어가자…….
“이게 무슨…….”
텅 빈 홀이 보였다. 정중앙의 상자를 제외하면 사람도 가구도 아무것도 없었다. 초대장을 거듭 살펴도 위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일단 수상한 상자를 살피기로 했다. 그 안에는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
황량한 파티장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요. 아마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나 의아하셨겠죠? 그 의문에 답해드리자면. 네, 그곳이 제가 전하를 초대한 장소예요.
전하를 연모한 시간이 자그마치 13년이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전하는 제게 눈짓 하나 건네지 않으셨죠.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이라 저는 항상 인내했습니다. 지쳤던 적도 분명 있었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역경을 딛고 일어설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 더 나아질 미래를 기약했습니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제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 전하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전하가 절 사랑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매달렸던 거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