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러나 곧바로 발화된 문장은 강한 확신을 품고 있었다.
“적어도 데네브는 자기 잘못이 뭔지 정확히 알아. 진심으로 사과했고, 그 사죄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 난 절대 데네브를 용서해 주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니 데네브는 평생 나한테 사과해야 해. ……지금처럼.”
나는 아로네의 어깨를 토닥였다. 얘도 참. 기회 한 번 줘 보기로 했다는 걸 이렇게 돌려 말하네.
“성숙한 결정이네.”
아로네가 어쩐지 안심된다는 듯 미소 지었다.
“고마워.”
묻고 싶은 건 그게 다였다. 나는 볼일 보라며 아로네를 보내 주려다가 갑자기 생긴 궁금증 때문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저 여자 누구인지 알아? 자꾸 이쪽 힐긋거려.”
나는 전방 10시 방향을 눈짓했다. 아로네는 시선의 주인공을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초대한 사람은 아니고 에블린 후작 부인의 파트너로 왔어. 유명한 무역상이야. 옆 대륙으로 수출되는 건 다 저 사람이 담당한다고 보면 돼.”
“그래? 저 사람 너한테 할 말 있나 봐. 아주 뒤통수가 뚫리겠어.”
아로네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 무역상에게 다가갔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과 곧잘 대화를 나누는 아로네를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퍼뜩 레이의 생각이 들어서 그를 찾았다. 레이는 한시도 내게도 시선을 떼지 않은 모양인지 바로 눈이 마주쳤다. 레이가 반색하며 한걸음에 다가왔다.
“이제 가게?”
나는 레이의 팔짱을 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 할리한테도 물어…….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창가에 기대어 간신히 서 있는 할리를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오자마자 술을 들이붓더니 결국 맛이 가고 말았군. 덕분에 루나는 기절한 할리 앞을 맴돌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레이가 귀찮음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데리고 가야겠지?”
“대신 두고두고 우려먹자.”
레이는 할리를 들쳐 업었고, 나는 루나의 어깨를 위로하듯 토닥였다.
“일어나면 연락하라고 할게. ……아니, 그 이전에 쟤랑 연락하고 싶니?”
루나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며 부끄러워했다. 와중에 의사 표현은 더없이 확실했다.
“네. 꼭 연락 달라고 전해 주세요.”
할리가 깨어나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꼬치꼬치 캐물어야겠다. 저 모습을 보고 나서도 연락할 마음이 든다니. 이건 기적이다. 나와 레이는 기막히다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가장 먼저 파티장에서 나왔다.
***
레이는 남은 밤을 함께 보내고 싶어 했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할리라는 복병이 생겨 한밤의 데이트는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할리가 뻗지만 않았어도 바로 내 방으로 직행하는 건데!
물론 할리를 먼저 눕히고 둘만의 시간을 보내도 됐지만 파티에서 가져온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밤을 새우기엔 오늘 너무 즐겁게 논 탓에 체력이 달렸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웠다.
“아…… 역시 누워 있는 게 최고야.”
나는 너무 피곤해서 드레스도 벗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신축성 좋은 소재로 만들어진 드레스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잘까? 씻어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미 내 몸은 침대에 착 달라붙은 지 오래였다. 누구든 날 일으켜 세우려면 적어도 지렛대는 들고 와야 할걸.
피로한 정신은 아무 소리나 지껄였다. 수마가 점점 몰려오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옆방의 광기 어린 중얼거림이 벽을 뚫고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지만 오늘만큼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 조금만 참자. 나는 그리 생각하며 의식의 끈을 놔 버렸다.
불타는 악몽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새벽 2시 48분.
레이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할리를 방에 데려다주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어느새 곧 3시였다.
몸은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으나 할리의 술주정에 지독히 시달린 탓에 정신만큼은 더없이 피로했다.
레이는 한숨을 삼키며 드러누웠다. 살짝 열어 놓은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문득 혜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실 그가 연인의 생각을 하지 않는 순간이 없기도 했다.
“……분명 옷도 안 벗고 잠들었겠지.”
대충 지퍼만 내리고 바로 곯아떨어졌을 혜라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해 아쉬울 다름이었다.
할리가 인사불성이 되지만 않았더라면 밤새 혜라를 꼭 끌어안고 그의 새해 계획을 들었을 텐데.
레이는 혜라가 키스해 주었던 손등을 엄지로 문질렀다. 연한 립스틱 자국은 물에 씻겨 없어졌지만 그때의 감정은 여전히 생생했다. 익살스럽게 휘어진 눈이 사랑스러워 키스를 퍼붓고 싶었었다.
레이는 손등 키스의 바로 이전을 회상했다. 혜라의 춤 솜씨는 여전했고, 덕분에 레이는 셀 수 없이 발을 밟혔지만 신기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즐거워하던 연인의 눈을 바라보느라 고통에 집중할 틈이 없기도 했다.
말도 안 되지 않는가? 5초에 한 번씩 구두 굽에 찍히면서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게.
하지만 고결하게 빛나는 고동색 눈동자는 그를 제외한 세상의 시간을 멈추는 힘이 있었다. 레이는 가능한 한 그 빛을 오래 보고 싶었다.
더욱 시간을 거슬러 올라 레이는 해가 바뀌던 순간을 생각했다. 공기를 울리는 맑은 종소리와 과열된 분위기, 전방위에서 날아드는 환호 소리, 그리고 제게 뛰어들듯 안긴 혜라.
그의 머리 위에 턱을 묻었을 때 나던 은은한 향기를 기억한다. 같은 속도로 뛰던 심장 소리와 숨 막히도록 껴안던 손길 또한 조금도 기억 속에서 흐려지지 않았다. 혜라가 들뜬 표정으로 행복한 새해라고 외치던 것 또한.
그토록 행복한 새해는 오랜만이었다. 혼자였다면 외롭고 절망스러웠을 미래였다. 복수에 성공했다면 목표를 잃어 탈력감이 들었을 테고, 실패했다면 여전히 조급함과 분노에 시달렸겠지.
언제부터인가 죽은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는 밤이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혜라, 그 애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복수심을 희석시켰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묽게.
처음 정체를 드러내기로 결심했을 때까지만 해도 복수마저 포기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본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복수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기에 두 가지의 목적을 갖고 황궁 정령술사가 되었다. 혜라의 마음을 사고, 황제를 죽이겠다는 목적을.
그러나 ‘레이’로서의 삶이 꿈꾸던 그대로 평화롭고 평범해서일까? 날이 갈수록 혜라에 대한 감정이 커져서일까? 그 애와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일까?
어느 순간 레이는 깨달았다. 오랜 앙금을 청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살인은 절대 혜라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극복’이 아니다. 그 애는 절대 살인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혜라가 그의 손에 묻은 피를 알아챘든 못 알아챘든 그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가 황제를 죽인 후 혜라의 눈을 떳떳이 바라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더러운 것을 담은 눈으로 어떻게 그 맑은 눈을 바라보겠는가.
레이는 전쟁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떠올렸다. 황제가 총애하는 정부의 죽음에서 촉발된 전쟁. 그는 분명 황제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사랑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이해 못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정하기 싫지만 어느 정도 황제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또한 혜라가 죽는다면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증오하던 이에게 공감하며 레이는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황제는 연인의 죽음을 전쟁으로 대응했다. 나는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죽음으로 갚고자 결심했다. 그럼 내가 황제와 다른 게 뭐지? 나 또한 괴물이 되어 버렸나?
그는 괴물이 되기 싫었다. 그러나 이미 멀리 와 버린 탓에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노선을 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끌어 낸 장본인, 혜라는 진저리 나는 굴레를 멈출 방법을 알려 주었다.
괴물이 되기 싫다면, 괴물이 되지 않도록 도와줄 사람을 따라가면 된다. 소중한 이들의 죽음이 슬프다면, 그 슬픔을 이해해 줄 사람을 만나면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면, 올곧고 강인한 사람을 곁에 두면 된다.
혜라의 존재 자체가 정답이었다.
“……브랜던은 날 비난할까?”
레이는 밤하늘처럼 까만 천장을 바라보며 자문했다.
“……그럴 리가.”
그들은 살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그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신의라고 했다. 그는 살았고, 드디어 행복해졌다. 그의 행복이 혜라에게 있다는 것을 그들도 이해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늘 마음 한편에서 떠나지 않았던 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레이는 경의를 담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바람을 타고 그의 마음이 하늘에 닿길 바라며.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새벽 4시 12분.
레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손끝에 닿는 이불의 감촉이 얼음처럼 찼다. 깜박하고 창문을 안 닫았나 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잠깐 사이에 감기라도 걸렸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레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창가로 향했다. 그가 무언가 이상을 알아챈 것이 바로 그때였다.
바람에 인위적인 향이 섞여 있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냄새는 불의 소멸성을 담고 있었다.
‘화재라도 일어난 건가? 물의 정령술사들은 어디서 뭘 하길래……. 젠장할 단체 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