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38)

<129화>

순식간에 잠이 확 깨며 주변 상황이 세세히 눈에 들어왔다. 레이는 기숙사 바깥에 우르르 모여 선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그들 모두 잠자다 뛰쳐나온 듯 잠옷 바람이었다. 응집된 두려움은 더욱 크기를 불렸고, 각각이 내뱉은 고함과 비명은 마구잡이로 섞여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레이는 난장판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누군가를 찾듯 눈을 굴렸다. 수십 명이나 되는 군중 속에서 혜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안 보이는 위치에 있나 보지.”

분명 혜라라면 특유의 동물 같은 직감으로 제일 먼저 뛰쳐나왔을 것이다. 그러니 믿자.

레이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동시에 건너편 방에서 할리가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말이 튀어 나갔다.

“술 좀 줄여.”

“알았으니까 부축…… 제발 부축해 줘. 토할 것 같아.”

레이는 혀를 쯧 차곤 팔을 걸치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의 어깨에 묵직한 무게가 가해졌고, 할리는 살 것 같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대피하는 와중에 걱정하는 게 고작 숙취라니. 희한한 구석에서 대담하다고 생각했다.

강한 바람 때문인지 불길 번지는 속도가 빨랐다. 방문을 열 때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복도 곳곳에 불길이 솟았다. 자욱한 연기가 시야를 차단하고 벽과 천장에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불안한 소리가 났다.

레이는 할리를 끌다시피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불에 잡아먹힐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1초라도 빨리 혜라의 무사를 확인하고 싶었다.

기약 없는 회색 길의 끝이 보였다. 레이는 밖에 나오자마자 할리를 화단 앞에 앉히고 미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머릿수는 더 많아졌는데 여전히 찾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허파에 쌓인 매연을 몰아내며 띵한 정신은 맑아졌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레이는 주변 사람을 붙들며 혜라를 보았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살아남은 그들은 그저 물의 정령술사의 부재를 욕할 뿐이었다.

레이는 시야를 더욱 멀리 두며 갈색 머리카락을 찾았다. 그때 할리가 손을 덜덜 떨며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레이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할 말은 나중에 해.”

“……아니, 지금 해야 해.”

친구 없어졌다는 것도 모르면서 뭐? 조급한 마음은 노기를 띠고 이성의 끈을 저울질했다.

레이는 이를 악물고 할리를 돌아보았다.

그는 어느 장면에 사로잡혀 눈을 못 떼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반파되어 속이 훤히 보이는 방이 보였다. 익숙한 절망감이 폭우처럼 밀려왔다.

“……저기, 혜라 방 아니야?”

미처 고민할 틈도 없었다. 레이는 할리의 만류를 뿌리치고 거의 무너져 가는 여자 기숙사로 달려갔다. 떨리는 손끝은 그의 의지에 따라 수십 마리의 정령을 만들어 냈다.

수많은 범고래가 허공을 헤엄치며 불길을 집어삼켰다. 한밤중의 요란하고 살벌한 불꽃은 허무하게 사그라졌고, 임무를 마친 범고래는 폭죽이 터지듯 비가 되어 눈길을 적셨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짜증 낼 생각도 못 한 채 한 곳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비현실적인 일을 이루고 반쪽짜리 문을 넘는 금발. 아니, 잿더미를 뒤집어써 검게 물든 ‘흑발’의 사내가 있었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새벽 4시 정각.

나는 별안간 타는 듯한 열기를 느끼며 깨어났다.

“아 뜨거!”

간만에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잘 자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그래서 방 전체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코끝에서 느껴지는 화기는 실제의 것이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속치마에 붙여 놓았던 방어 스크롤을 찢었다. 나는 투명한 보호막 안에 서서 끔찍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미친.”

속옷 안에 넣어 놓은 부적을 확인하니 신기하게도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불에 타 죽는 날이 오늘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으니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살림살이에 불길이 옮겨붙는 것을 보며 실실 쪼갰다. 그러나 매연이 안면을 강타했을 땐 차마 웃지 못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한참 동안 기침을 뱉고 나서야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 망할 스크롤은 치명적 공격을 막아 주지, 공기까지 막진 못했다.

보호막이 유지되는 시간은 20분. 고로 앞으로 10분가량 남았다. 방어 스크롤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무조건 그 안에 나가야 했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일어났다.

나는 고등학생 때 배웠던 대피 교육을 떠올리며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보물 상자만 챙겨 방을 나왔다. 돈을 상자에 보관해 놔서 천만다행이었다.

발 한 자국을 떼기가 무섭게 등 뒤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렸다. 나는 돌아가려는 고개를 간신히 붙잡고 퇴로를 살폈다.

응당 비명이 울려야 할 복도는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다. 죽음의 희생양은 나뿐이라고 적막이 알려 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보호막이 있는 한 불길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죽어라 달리면 충분히 살 수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기 전에 잠옷으로 갈아입는 건데.”

나는 드레스를 잡고 오른쪽 발을 뒤로 뺐다. 불 속으로 달려드는 게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쫄지 말자, 혜라야.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대로 달리려는데 별안간 귀청을 때리는 비명이 울렸다. 바로 내 옆에서.

“살려 주세요! 제발! 아무도 없어요?”

나는 절망적으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이 뜬금없는 화재의 용의자를 추린다면 시도 때도 없이 양초를 피워 대는 네가 가장 유력하겠지, 엘리.

나는 한숨을 쉰 뒤 크게 소리쳤다.

“문에서 물러나! 파괴 스크롤 찢을 거니까!”

“……혜라 님? 세상에! 아직 남아 계셨군요!”

기력 없었던 목소리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내가 구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숫자 셋까지 센 뒤 스크롤을 찢었다. 불투명한 파란색 구가 직선을 그리며 문으로 날아갔고, 두꺼운 벽에 균열이 생기더니 우지끈 무너졌다.

나는 벌벌 떨고 있는 엘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살아남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그의 방은 말 그대로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엘리가 내 뒤에 바짝 붙어 서곤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이었다.

“다 제 탓이에요. 이렇게 불이 커질 줄은…….”

위로해 줄 생각일랑 조금도 없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살고 싶으면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짜증 났다. 별것도 아닌 강령술 때문에 죽을 수 있었다는 게 억울하고 어이없었다.

눈치는 있는지 엘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늘 그가 한 일 중 가장 현명한 처사였다.

우리는 최대한 불이 덜 번진 곳을 찾아 빙빙 돌아가느라 3분이면 도착했을 출구를 20분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보호막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몸 곳곳에 화상이 생겼고, 무섭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엘리를 북돋아 주느라 심신은 노쇠하였다.

그러나 출구에 다다르기 5분 전, 알 수 없는 연유로 일제히 불이 꺼진 덕분에 죽지 않고 멀쩡히 출구를 나올 수 있었다.

연기를 뚫고 나오니 반가운 얼굴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두 팔을 벌리며 할리를 바라봤다. ……근데 쟤 표정이 왜 저래?

어쩐지 그는 기뻐하기보다는 경악하는 기색이었다.

“살아 돌아온 친구한테 그게 무슨 불온한 표정이냐. ……잠깐, 레이는 어디 있어?”

누구보다도 날 기다리고 있었을 레이였다. 그런데 수많은 색 중에서도 단연코 돋보이는 찬란한 금색이 보이지 않았다. 문득 드는 불안감에 나는 억지로 웃었다. 설마.

“야, 아니지?”

할리는 주저하며 말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보였다.

“반파된 네 방을 보고…….”

나는 뒤돌아 폐허가 되어 버린 내 방을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나도 같은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레이는 최악의 가정을 했을 테고……. 진짜 미련하고 겁 없고 무모한 놈.

나는 망설임 없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뛰어갔다. 가지 말라는 할리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차마 가만히 앉아 레이를 기다릴 수 없었다.

레이 그놈은 내가 기절했을 뿐이라고 간절히 믿으며 건물 곳곳을 뒤지고 있을 거다. 그러다 위태로운 기둥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나는 휑한 복도에 서서 힘껏 소리쳤다.

“레이! 너 잡히면 나한테 진짜 큰일 난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새벽 4시 38분.

5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레이와 일주일 동안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참이었다. 자기 욕하는 게 들렸는지 수백 번 이름을 불러도 대꾸 한 번 안 하던 놈이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꼴이 엉망이었다. 햇살을 그대로 담아 놓은 것 같았던 머리칼은 먼지와 재로 뒤덮여 석탄처럼 새까맣고, 눈가는 방금까지도 울고 있던 것처럼 붉었다.

레이는 계단 아래에 서 있는 날 보자마자 달려와 안겼다. 덕분에 상처가 압박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나는 레이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별안간 분노가 치솟았다. 레이는 순순히 밀려나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볼에 난 생채기를 보니 속상해서 더욱 화가 났다.

일단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출구로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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