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와중에 게일은 대답 없는 레이에게 더욱 화가 나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들 좀 보세요! 불리해지니까 입 다무는 꼴 좀 보시라고요! 둘이 꼭 붙어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이 반란 분자들을 당장 가둬야 합니다! 방화도 이들이 한 짓이 분명합니다! 황궁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이라고요!”
게일이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기사단에게 신호했다. 처음부터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던 기사단은 구실을 잡았다는 눈빛을 띠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여론은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게일에게 넘어갔다. 여기서 진짜 방화범을 밝힌다고 한들 사람들이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중 낯익은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 엘리는 매정하게 눈을 피했고, 스칼렛은 무언의 의미를 전하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네가 무고하다는 걸 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기사단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란 분자로 지목됐다고 바로 처형당하진 않을 것이다. 특히나 나는 보좌관이니 더욱 철저하게 조사받겠지. 그러나 에단은 말했다. 진실의 물약에도 허점은 있다고.
레이가 슬그머니 손을 풀었다. 그가 내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사죄했다. 힘없는 목소리는 역설적이게도 어느 때보다 단호한 결의를 품고 있었다.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네 말대로 이건 나만의 고통이니 내가 해결할게.”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이 여전히 다정해서 감정이 북받쳤다. 그와 동시에 번뇌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기사단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살벌하게 속삭였다.
“헛소리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무슨 수를 쓰든 살아남아서 내 얼굴 보고 직접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진실의 물약이 모든 걸 간파하는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알겠어?”
레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나와 레이를 떨어뜨려 놓고 양팔을 포박했다.
레이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나를 보고 화를 참듯 이를 악물었다. 움찔거리는 손이 금방이라도 정령을 불러낼 것 같았다. 나는 허튼짓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기사가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 나는 순순히 걷다가 할리를 스쳐 지나갈 때 입을 벙긋거렸다.
‘나 믿지? 그럼 레이도 믿어.’
할리는 묘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난 그가 내 편을 들어줄 거라 확신했다. 내가 무혐의로 풀려날 때까지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줄 것이다. 우리는 친구니까.
우리는 한참 걷다가 갈림길을 앞두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나는 레이의 뒷모습을 마지막까지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대책. 어그러진 인생을 원점으로 되돌릴 대책이 필요하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새벽 5시 1분.
하룻밤 사이에 친구 두 명을 잃었다. 할리는 우두커니 서서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임시 대피소로 차츰차츰 사라질 때까지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술에서 깬 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지금 보는 광경이 헛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단단히 포박된 채 끌려가는 레이와 온몸에 상처를 달고 연행되는 혜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던 이들이 정치범이란다. 할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프레이야 멜러니라니?”
믿기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프레이야 멜러니의 죽음을 알고 있다. 그중 소수만이 프레이야의 시신이 행방불명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사실상 그 어린 나이에 전쟁에서 살아남았을 리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황제는 굳이 수색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전쟁도 끝났는데 어린애의 시체를 찾는답시고 무엇 하러 기사단을 움직여야 하냐는 것이다.
애초에 데우스 왕궁이 불타며 대부분의 유산이 소실된지라 수배지에 내걸 프레이야의 초상화 한 점 남아 있지 않기도 했다. 그의 외양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라곤 어두운 갈색과 숲처럼 푸른 눈동자가 다였다.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은 타국의 어린 왕자를 기억 속에서 지워 버렸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프레이야가 얼마나 재능이 많건, 어떻게 대역 죄인이 되었건 제국민들에겐 그저 타국의 왕자일 뿐이었다.
망각은 할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게일의 발작 같은 외침을 듣고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2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국내 정세와 역사에 빠삭한 그조차 버벅거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마저 정지했던 그 순간, 할리는 숨도 못 쉬며 두려워하는 레이를 보고 입을 벌렸다.
생뚱맞은 게일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게일 브라운은 칼리아 황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숙청에서 살아남은 귀족이다.
생활 반경이 다르다고 쳐도 1왕자의 수족인 그가 가장 총애받았던 막내 왕자를 한 번도 못 마주쳤을 리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이의 떨리는 손끝이 게일의 말이 사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배신감이었다. 데우스의 왕자가 황궁에 잠입한 이유는 뻔했다. 우정이라 여겼던 관계가 사실은 원활한 복수를 위한 발판이었다니. 충격에 빠진 뇌는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만 생각했다.
하지만 레이의 정체와 별개로 그가 방화범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악의를 품고 불을 저질렀다면 혜라를 구하러 뛰어드는 일은 없었겠지. 그렇다면 혜라에 대한 감정은 진짜라는 건데…….
할리는 눈길 위로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을 바라보았다. 혜라의 것인지 레이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찬 바람이 그의 드러난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혜라는 다 알고 있었을까?”
길길이 날뛰는 게일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게 연기 같지는 않았다. ‘멜러니’라는 성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바로 못 알아채더니만.
할리는 대자로 드러누웠다. 그는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시린 기운을 느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널 믿고 레이를 믿으라고?”
그는 혜라가 남긴 전언을 떠올렸다. 혜라는 심문을 받으러 가는 사람 같지 않게 호기로운 눈빛을 보냈다. 누가 보면 차 한 잔 마시러 가는 줄 알 정도였다. 대책 없이 멀쩡한 모습이 그 애다워서 상황도 잊고 웃음이 나왔다.
혜라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는 어떤 위기 속에서도 이겨 낼 수 있을 거라며 투지를 불태웠다. 심지어 그 애는 애인이 반란죄로 잡혀가고 본인은 동조자로 의심받는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러지?
거짓말로도 혜라를 완전한 선인이라 말할 수 없다. 당한 건 두 배로 돌려줘야 하고, 이따금씩 무심한 얼굴로 사람 상처 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필요하다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애는 선했다. 약자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마음을 가졌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위험도 감수하며, 무엇보다 남을 감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혜라는 레이의 비밀을 몰랐던 게 확실하다. 그러나 비밀이 밝혀지는 과정이 워낙 극적이고 요란해서 혜라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최악의 가정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레이를 믿겠다는 거지?”
혜라는 진실을 깨닫고도 레이를 지지했다. 그들이 맞잡은 손은 두터운 신뢰로 묶여 영영 풀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할리는 그 믿음의 근거가 결코 사랑은 아닐 거라 감히 짐작했다. 애당초 혜라는 사랑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위험에 끌어들일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혜라를 믿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이씨. 일 잘 풀리면 나한테 거하게 밥 사야 한다, 너.”
할리는 벌떡 일어나 달렸다. 당장 제이든에게 가야 했지만 공녀에게 급서를 부칠 시간 정도야 있을 것이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새벽 5시 56분.
어휴 따분해라. 나는 취조실에 앉아 무료하게 발을 까닥였다. 날 여기로 데려온 기사는 나간 뒤로 한참 동안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하면 밖이 보이기라도 하는 양 문을 쏘아보았다. 역시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꺼운 철문이 바깥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 준 덕분에 적막이 감돌았다.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전등이 범죄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조금 떨렸다. 그러고 보니 바닥 군데군데에 검붉은 얼룩이 나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취조실을 구경하는 데에 질려 의자에 등을 기댔다. 굴러다니는 나무판자를 주워 와 대충 기워 만든 듯 의자는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범죄자 대우가 너무하네, 이거.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 몸을 뒤트는 와중에 별안간 툭 불거진 못이 상처를 찔렀다. 나는 꽥 비명을 지르며 등을 어루만졌다.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아팠다.
이렇게 바로 잡혀 올 줄 알았으면 건물에서 나오자마자 데이타스를 먹는 건데. 기사 놈들이 내 보물 상자를 뺏어 간 게 분했다.
그래도 상자를 열려고 고군분투할 그들을 생각하니 조금 즐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맞춤 제작된 열쇠가 없으면 절대 안 열릴 거다, 이 바보들아!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다시 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언젠가 이 자리에 앉을 거라고 내심 짐작하긴 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난 기껏해야 귀족 폭행죄나 모욕죄로 끌려올 줄 알았지, 반란 가담이라니? 다른 차원에 있는 우리 부모님의 령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여기까지 쫓아올 정도로 어이없는 죄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