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나는 책상에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악물린 잇새 사이로 간간이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제이든은 충격에 빠져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극치를 넘은 고통 덕분에 비탄에 절은 표정을 꾸며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신시아가 레이몬드를 알게 된 것도 그때였어요. 한적하고 인적 드문 곳을 알아봐 달라고 레이몬드를…… 고용했거든요.”
고통이 만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텅 빈 눈동자를 직시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그 애를 묻어 줬어요. 제이든 님에게 만큼은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말하게 되네요.”
제이든은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갈피를 못 잡고 방황했다.
이제야 신시아의 죽음을 알린 나에 대한 분노, 미처 신시아의 병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자책, 마음의 준비도 없이 떠나보내게 됐다는 허무함,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슬픔.
그는 목에 핏대가 서도록 울컥 솟는 감정을 눌렀다. 붉게 충혈된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거짓말 아니에요.”
멈춘 줄 알았던 고통이 또다시 닥쳤다. 손바닥에 새겨진 네 개의 반달에서 새빨간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믿어 주세요. 신시아를 믿는다면…… 그 애의 말을 대신 전하는 제 말도 믿어 주세요. 제발.”
“네가 어떻게 감히…….”
제이든이 벌떡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돌아간 눈이 사형을 선고할 것 같았다. 그가 검을 들고 오지 않은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딱 5분만 더 참아 보자고 다짐하며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남자와 혼절하기 일보 직전인 여자 중 누가 더 비참해 보일까? 우습게도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하세요. 묘비 장소를 아는 건 세상에 오직 저 하나뿐이에요.”
“……바라는 게 뭐야.”
드디어. 나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에 힘을 주었다.
“지금 당장 절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그럼 묘지가 어딘지 알려 드리고 신시아가 레이몬드를 고용할 때 썼던 계약서도 가져올게요.”
제이든은 기막히다는 듯 웃었다. 선명한 악의가 눈앞에서 넘실댔다.
“가끔씩 생각하곤 해. 네 뇌는 어떻게 되어 먹었길래 이런 발칙한 꾀를 부릴까.”
“저는…….”
갑자기 울린 노크 소리가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끊었다. 제이든과 내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낯선 얼굴의 기사가 들어왔다. 그는 제이든에게 편지 한 장과 양피지 두루마리를 건네며 말했다.
“건물 앞에 떨어져 있던 것입니다. 보셔야 할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필체가 어쩐지 익숙했다. 제이든이 빠르게 편지를 읽고선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내게 편지를 던지며 말했다. 나는 바닥으로 휘어지는 궤적을 멍하니 응시했다.
“네가 이겼어.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나는 허리를 굽혀 편지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 단순한 동작조차 힘에 부쳤다.
“……아로네?”
“참 좋겠군그래. 아로네가 온 힘을 다해 편도 들어 주고.”
한계에 다다랐다는 직감이 들었다. 제이든의 목소리가 고막을 거쳐 그대로 통과했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이든이 무어라 소리치는 것도 같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은 없었다. 귀 바로 옆에서 벌이 날아다니는 듯 윙윙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젠장…….”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오전 5시 42분.
밤늦게까지 이어진 파티 때문에 잠에 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엄밀히 말해서 파티는 새벽 2시 즈음에 파했지만, 무역상 나탈리와 유익한 대화를 나누느라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이웃 왕국까지 사업의 규모를 넓히자는 제안은 위험천만하게 들리면서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방해 없는 숙면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는 아로네가 꿈속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현실로 끌어당겼다. 아로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연히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루나, 지금 몇 시인지 알고 찾아온 거니?”
커튼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로네는 등불을 켜고 루나를 올려다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그는 급하게 뛰어온 듯 꼴이 말이 아니었다. 오는 길에 거세게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얼굴에는 진흙이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루나는 파리한 얼굴로 잔뜩 구겨진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보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로네는 등불의 빛에 의지해 한 자 한 자 글을 읽었다.
발신인은 뜻밖에도 제이든의 보좌관, 할리였다.
그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기숙사가 불타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그 과정 속 혜라 또한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니……?
그 대목에서 아로네는 끔찍한 상상을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혜라가 생명에 지장이 가는 상처를 입었을까 봐 걱정됐다. 데이타스 약초로도 고칠 수 없는 상처만큼 최악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이 혜라의 부상을 차악으로 만들어 줬다.
“……반란죄?”
아로네는 편지를 인정사정없이 구겨 던졌다. 방금 그가 본 것을 믿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믿기지도 않았다. 루나가 훌쩍이며 말했다.
“혜라 님 어떡해요……?”
“어떡하긴.”
아로네는 가운을 여미며 일어섰다. 반란이고 뭐고 혜라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 없다. 다른 세계에서 온 애가 무슨 이유로 황실에 원한을 품겠어? 그 애가 남의 분노를 그대로 흡수했을 리도 만무하고.
아로네는 반반한 낯짝을 떠올리며 살벌하게 읊조렸다.
“멜러니 왕자라…….”
레이의 정체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 남자 때문에 혜라가 상처도 치료 못 하고 심문받고 있다는 점이다.
아로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혜라를 무죄로 만드는 것.
아로네는 금고에 넣어 뒀던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언젠가 필요 있을 줄 알고 미리 만들어 둔 그것은 혜라의 가짜 인생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걸로 혜라가 순수한 제국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로네는 루나에게 에단을 불러오라 시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깃펜을 들며 제이든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제이든이 직접 혜라를 취조할 가능성이 높았다. 영원한 이별을 선고당한 제이든이 순순히 호소문을 읽어 줄지 의문이었으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훨씬 나았다.
아로네는 망설임 없이 혜라가 무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적어 내려갔다. 어둠에 휩싸인 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
카이사르 28년 1월 1일 오전 7시 14분.
나는 번쩍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시야에 담긴 것은 할리의 놀란 표정이었다. 눈을 굴리자 역시나 하얀 천장이 보였다. 임시 치료소가 확실했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하자 할리가 호들갑을 떨며 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뭐 하는 거야! 너 지금 절대 안정 취해야 한대. 빨리 다시 누워.”
무작위로 구타당한 듯 온몸이 쑤시긴 했다. 그런데 나한테 지금 안정을 취할 시간이 있던가? 나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절대 안정? 그딴 건 집어치우라고 그래.”
“……그럼 뭐 어쩌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간이침대를 샅샅이 뒤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보물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기사단이 압수했나? 무죄라는 것도 밝혀졌는데 뭐 하러 남의 물건을 훔쳐 가?
기막히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할리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익숙한 상자를 꺼냈다.
“이거 찾아?”
“와, 네가 갖고 있었구나. 완전 다행.”
나는 옷 속에 감춰져 있었던 열쇠 목걸이를 꺼내 잠금을 풀었다. 이리저리 흩어진 사진들과 돈주머니를 옆으로 치우자 유리병에 담긴 데이타스 약초가 보였다.
나는 할리가 데이타스를 잘 볼 수 있도록 유리병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가 감탄을 뱉으며 데이타스를 관찰했다. 특수한 마법이 걸린 유리병은 수개월 동안 약초를 신선하게 유지시켜 주었다.
“몇 개 먹어야 하지?”
할리가 내 몰골을 훑었다. 일그러진 입술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적어도 두 개는 먹어야 할 듯.”
동감이었다. 화상 흔적을 감쪽같이 없애고 심각한 내상을 치료하려면 두 개 정도는 먹어야 수지가 맞을 것 같았다. 나는 데이타스 약초 두 개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상상했던 맛은 아니었다. 인삼처럼 쓸 줄 알았건만, 오히려 데이타스는 혀가 아리도록 달았다. 씹을 필요도 없었다. 약초는 타액과 닿자마자 액체로 변하여 순식간에 목구멍을 넘어갔다.
걸쭉한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화끈한 감각이 발끝부터 퍼져 나갔다. 동시에 먼지 낀 유리처럼 멍했던 정신이 맑아지고, 찢어진 상처가 붙으며 화상 입었던 자리에 새살이 돋았다.
피범벅이 되었던 손바닥도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멀쩡해졌다. 그동안 실감 못 했는데 이제야 왜 사람들이 기를 쓰고 데이타스를 손에 넣으려고 하는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나는 끝 맛을 다시며 할리를 쳐다보았다. 왠지 입에서 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할리가 입을 틀어막고 내 얼굴과 상처를 번갈아 보았다.
“마법 같다……!”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평상시의 할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