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무고한 사람 데려다가 시간 낭비하는 거라나 뭐라나.
하지만 황제가 직접 그의 과거 행적을 줄줄이 읊어 주었을 땐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구분하지도 못하게 교묘히 섞어 놨으니 애초에 반박하는 게 불가능하기도 했다.
횡설수설하는 게일의 반응을 보고 황제는 내 말을 확실히 믿게 된 것 같았다.
게일이 망상증 환자라고 못 박아 적어 놔서 더욱 게일이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했을 테다. 덕분에 게일은 가장 빠른 날짜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레이는 그 소식을 듣고 안도했지만 사실 나는 조금 불만스러웠다. 선명한 악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좋지만, 그가 저지른 죄에 비해 너무 짧은 고통을 받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나는 더 이상 레이의 신분을 문제시할 사람이 없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황궁 내의 혼란이 수습된 후, 제이든은 나를 해고했다. 취조실을 나오는 동시에 각오했던 일이라서 별로 놀랍진 않았다. 당장 꺼지라고 말하던 눈빛이 얼마나 살벌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송연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더스크번 파견단 지휘관 자리까지 해고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분명 제이든은 나를 자르려고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황제의 입김이 들어간 듯했다.
솔직히 말해서 더스크번 족장과 친분이 있는 나는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었다.
하지만 제이든이 나머지 팀원을 짜게 되는 바람에 다음 더스크번에 방문할 때는 부족민이 아닌 팀원들의 감시를 받을 예정이다. 제이든이 나를 어지간히 혐오한다고 생각했다.
짐을 싸러 마지막으로 사무실에 갔을 때, 할리는 어떻게 된 일이냐며 눈물을 쏟았다.
안쓰럽기도 하지. 나는 제이든의 멘털을 내핵까지 추락시킨 장본인이라는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할리에게 가능한 많은 마법 장난감을 선물했다.
레이에게 그 소식을 전했을 때 그는 미안해서 거의 죽으려고 했다. 본인도 직장에서 잘린 주제에 말이다. 솔직히 나는 매번 생각만 하던 퇴사를 제이든이 대신 이루어 줘서 조금 고맙기도 했다.
게다가 제이든과 나는 너무 많은 관계의 사슬로 엮여 있었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사슬을 끊어 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레이의 죄책감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결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앞으론 고생 안 시킬게.”
나는 코웃음 치며 그의 말을 흘려 넘겼다.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일자리를 구하나 싶었다.
우리는 당분간 좀 쉴 권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 백수가 된 김에 평생의 꿈을 실현해 보기로 했다.
“뭘 또 일해. 우리 여행이나 다니자.”
레이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결정한 순간부터 부단히 여행 계획을 세웠다.
게다가 운 좋게도 첫 파견이 무기한으로 연기돼서 놀다 올 시간은 충분했다. 환각을 뚫어야 한다는 극악한 근무 조건 때문에 파견단 모집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왕 가는 김에 제대로 구경했으면 좋겠다는 내 말에 레이는 은근슬쩍 세계 여행을 추천했고,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돈은 어디서 나오냐고?
불행 뒤에 행복이 온다더니. 에단은 마탑주가 되어 ‘답장해 주세요’라는 이름의 마법 도구를 출시했다. 핸드폰의 하위 버전이라 할 수 있는 그 물건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첩으로 두 권을 한 세트로 한다.
나는 아이디어 제공자로서 가장 먼저 ‘답장해 주세요’를 받았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메신저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어서 놀랐다.
작동 원리도 신기했다. 내가 수첩에 글을 적으면 페어로 묶여 있는 다른 수첩에 내 메시지가 떠오른다는 원리인데, 상대방이 확인할 때까지 메시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아직 문제점이 많았지만 그것도 현대에서 살다 온 내 눈에만 그렇지 이곳 사람들은 ‘답장해 주세요’에 미친 듯이 열광했다. 출시 이틀 만에 전국에서 매진되었을 정도다. 덕분에 내 재산은 날마다 불어나는 중이다.
나와 레이가 여행 준비를 착착 해 나가는 동안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가 사르르 녹으며 푸릇한 어린싹이 돋았다. 따뜻한 봄바람은 누군가에겐 순응을, 누군가에겐 변화를, 또 다른 누군가에겐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제이든은 허구의 묘지에 다녀온 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일에 열중했다. 볼 때마다 살이 빠져 있는 할리가 말했다.
“겉은 멀쩡하거든? 근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일에 매달리는 사람 같아. 눈동자에 총기가 없어.”
제이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막상 할리의 말을 들으니 내가 너무했나 싶어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신시아의 죽음을 논할 때 불쌍할 정도로 동요하던 얼굴을 떠올리니 죄책감이 더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저 제이든이 힘든 시기를 잘 이겨 내길 바랐다. 그 작은 소망은 그래도 반년가량 함께 했던 상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근데 그 결과가 정략결혼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아마 전국의 어떤 사람도 황태자가 그토록 빨리 결혼식을 올릴 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이든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진정한 사랑에 회의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는 수년 이내에 황위 계승을 황제에게 약속받고 이웃 왕국의 공주에게 반지를 건넸다.
그 와중에 데네브는 순조롭게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다소 이른 시기였지만 그의 아비가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병석에 누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듣기론 마음의 병이 곯아 터져 버렸다나?
또한 데네브는 여전히 아로네에게 쩔쩔매며 금은보화를 갖다 바쳤다. 아로네는 그 꾸준한 비굴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요즘 들어 데네브에게 아주 조금씩 사적 공간을 허용하고 있다. 그 미묘한 변화를 데네브가 눈치챘을 런지는 모르겠지만.
참, 아로네는 요즈음 사업에 있어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연말 파티에서 만났던 무역상과 이야기가 잘되었는지 그는 조만간 제국 밖으로도 사업을 확장시킬 거라 말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지금 아로네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세지 못할 만큼 많은 직원들을 거느리고 있다.
단 세 명으로 시작한 사업이 이젠 세계로 뻗어 나간다니. 아로네는 살아 있는 역사가 될 거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서라도 오래오래 건강해야겠다고 다짐했다.
***
나는 떠나기 전 다시 한번 아로네를 꼭 껴안았다. 옆에서 훌쩍거리는 할리의 어깨도 위로하듯 툭툭 두드려 주고,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라와 베키, 그리고 루나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에단은 그들로부터 한 발자국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이 희미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저 모습을 사진으로 못 남겨서 아쉽군. 나는 작별 인사를 나누는 감동적 순간에도 그리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가장 끝에 서 있는 안타레스에게 악수를 청하려다가 그냥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내 허리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나는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시 제 운세 알 수 있을까요?”
안타레스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더없이 맑네. 즐거운 여행길이 되겠어.”
안타레스가 포옹을 풀고 따스한 눈길을 보냈다. 나는 고맙다고 작게 인사한 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친구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다시 제국의 땅을 밟겠지만, 그때도 그들이 여기에 서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 속에서도 좋은 인연을 만든 나 자신이 문득 자랑스러워졌다. 나는 씩씩하게 말했다.
“갈게.”
나는 레이의 손을 잡고 배에 올라탔다. 우리가 마지막 승객이었는지 곧바로 뱃고동 소리가 울리며 돛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배는 순풍을 타고 순식간에 항구에서 멀어졌고, 친구들의 모습도 점점 작아졌다.
나는 뱃머리로 레이를 끌었다. 레이는 밀려온 파도가 배에 부딪히며 만든 하얀 포말을 가리키고 청량하게 웃었다.
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의 말간 얼굴을 한참 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오감이 확장되며 바다의 정취가 생생히 느껴졌다.
간간이 콧등 위로 튀어 오르는 바닷물의 시원함,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지나가는 바닷바람의 습기, 들숨에 섞인 바다 특유의 비릿함.
하나씩 음미하다 보니 잔잔하게 치는 파도처럼 마음이 고요해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햇빛에 반짝이는 윤슬과 지평선과 아득한 바다의 끝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는 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작년 처음 이곳에 왔을 때처럼 부단히 변화에 적응해야 할까?
차원이 뒤바뀐 뒤로 내 삶은 늘 불안정했다.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고, 견고한 신분제에 부당함을 느꼈으며, ‘나’이기 때문에 괴짜라 취급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년을 잘 버텼다. 크고 작은 사건이 날 위협했지만 어쨌든 난 잘 이겨 냈다.
난 변하지 않을 다정한 눈동자를 바라봤다. 세상에 영원이란 게 존재한다면, 그건 바로 레이의 마음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시련은 지치지도 않고 날 계속 시험하겠지. 하지만 전과 달리 난 혼자가 아닐 것이다. 이제는 날 사랑하는 연인이, 친구가, 동료가 있다.
그래, 그것이 나의 세계다. 난 두렵지 않다.
-로판 악녀랑 친구 돼서 호의호식한 썰 푼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