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Jab (5/38)

  5. Jab

#13

가끔 도경은 자신에게 직관적 기억력이 없다는 것을 분하게 여겼다. 한 번 본 것은 모조리 사진처럼 찍어 뇌에 저장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실제로 만났을 당시의 지한을 최대한 생생하게 떠올리려, 애쓰지 않아도 됐을 터다.

「이 번호 알아요? 이 사람이 별장 주인이에요?」

완벽히 복원되지 않는 기억에 꿈틀거리던 배 속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제아무리 직관적 기억력을 타고나봤자 돈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시간과 돈을 맞바꿔야 할 테니까. 도경은 바로 그 돈을 타고났다. 됐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선두였다.

「생각해 보니까 나한테 이름도 안 가르쳐 줘서요.」

속이 진정되자 기억력이 한층 또렷해졌다. 산을 등진 테라스에 팽배하던 겨울 공기의 온도와 수시로 이동하던 구름의 그림자 외에도 떠오르는 것들은 더 있었다. 예의를 차리려다 만 어법과 목구멍이 긁힌 것처럼 갈라지던 목소리. 생각해보니까 자신한테 이름도 안 가르쳐준 별장 주인이 괘씸했는지 찌푸려지던 눈썹.

생각해 보니까, 라니. 그럼 생각해보기 전엔 이상하단 걸 몰랐다는 말인가? 하긴. 그러니 이름도 모르는 여자가 오란 곳까지 왔을 것이다. 지한은 결코 도경이 이해할 수 없는 부류에 속할 가능성이 높았다.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을 땐 정말로 머릿속이 텅 빈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타입.

도경이 ‘소현과 친했으니 아직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란 핑계를 대가며 별장 주인을 대신해 양해를 구했을 때, 지한은 분명 궁금한 것이 있는 기색이었다. 소현에 관련된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라고 일부러 소현을 언급했다. 더럽게 타이밍을 못 맞추는 별장 주인이 등장하지만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소현을 입에 올리는 지한의 표정이 어떤지. 도경에게 소현이란 이름을 말하는 순간의 그가 어떤 기운을 풍기는지.

그러나 지한과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도경은 다른 기회를 잡아야 했다.

기억이 되감기되었다.

도경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옷을 입은 지한. 도경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구두를 신은 지한. 도경의 취향을 온몸에 뒤집어쓴 지한은 자세가 수시로 흐트러졌고, 나름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한 것 같은 말투는 자꾸 반말과 존댓말의 경계를 오갔으며, 휴대폰을 꺼내고 집어넣는 단순한 동작에서조차 조심성이 부족했다. 사진에서보다 훨씬 더 극명했다. 지한의 값어치는 오직 겉가죽에만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넝마를 걸쳐놨어도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게 생겼다.

그래서 당황했다. 흙먼지를 끼얹어도 가려지지 않을 얼굴에 달린 눈이 돌진하듯 던져오는 시선을 받고 본능적으로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을 수도 있겠지만 도경은 아니었다. 마치 몸을 던져 달려드는 것처럼 강하고 선명한 눈빛이었는데 거기에 공격 의사는 조금도 섞여있지 않았다.

그 순간은 홀로 아침을 먹으려 하기 직전이나 오후 회의 도중처럼 규칙 없이 무작위로 뇌리에 떠올랐고, 그럴 때마다 도경은 당황스러운 기분에 빠져야만 했다. 담당의가 한동안 안정적으로 유지해온 약물 복용량을 늘려서 처방해주었다. 효과는 없었다.

도경이 제일 잘 알았다. 약으로는 도경을 괴롭히는 증상을 물리칠 수 없었다. 이안이 말을 거는 데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도경에게로 향하던 지한의 시선이 불러일으켰던 감을 잊지 않았다. 도경의 감은 주인에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고 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경고의 뿌리가 어디였는지를 깨닫기 전에는 무슨 약을 먹어도 듣지 않게 되어있었다.

소현은 지한에게 도경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절대로. 했다면 지한이 그런 눈빛으로 도경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눈빛? 그런 눈빛이 무엇인가 하면…… 그러니까 그걸 아직 모르겠다.

도경은 스스로의 감을 믿었다. 다만 확신이 들지 않을 때는 판단을 보류했다. 감각을 보충해줄 근거 없이 막연한 느낌만 올 때가 있었다. 주로 상대나 상황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가 없을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무엇인가가 감지되기는 하는데 정작 그 ‘무엇인가’의 정체는 알 수 없는.

열심히 지한의 신상정보를 받아다 도경에게 나른 이안이 들으면 발끈할 소리였다. 도경은 이미 지한이 평생을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이고, 10대 때 사람을 패서 입원시켰던 폭력성이 있으며, 괜히 체육관 관장이 바람을 넣은 탓에 무기나 다름없는 주먹을 가지게 됐다는 일대기를 알고 있었다.

현재까지 지한과 만나는 친구들은 다 보육원 출신이며 그중 가장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은 동거 중인 시우였다. 가장 성실한 시우는 가장 성공한 케이스가 되지 못했다.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도경이 얼추 계산해도 지한과 시우는 버는 돈에 비해 토해내야 할 액수가 높았다. 월세나 세금은 그렇다 치고 빚이 문제였다. 사채업자들이 돈 버는 원리를 전혀 몰랐을 어린 시절 빌린 원금부터가 너무 셌다. 그 센 이자를 부른 원금, 도경이었다면 10대 시절이었어도 바로 내어줄 수 있었을 금액이었다.

이만큼이나 알았다. 그럼에도 부족했다. 지한에서 심부름센터로, 심부름센터에서 이안으로, 다시 이안에서 도경으로. 세 다리를 건너온 정보에는 생동감이 없었다. 이론을 숙지했으면 실전에 들어가야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친족도, 소속된 조직도 없는 지한을 상대로 벌이는 판에 필요한 값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소현이 공들여 만든 배역은 허탈하리만치 쉽게 뺏었다. 더 손 쓸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한은 분명 굉장한 얼굴을 가졌지만 연예계엔 그 엇비슷한 수준의 미모에 끼와 인맥을 다 갖추고 있어도 못 뜨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첫 작을 어긋나게 만들어 놨으니 그 뒤론 지한이 알아서 망할 차례였다.

즉 시작하자마자 이미 끝이 보이는 판이었다. 도경이 개입하지 않아도 지한의 삶은 어차피 어그러져 있었다. 그것을 도경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지한이 무슨 자신감으로 소현을 따라 죽지 않았으며 언제쯤 알아서 죽을 계획인지를 알고 싶었다. 소현과 지한이 한날 한자리에 죽었어야 한다는 안타까움 또한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지한은 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다 비참해져야 했다. 마침내 알아서 죽을 마음을 먹을 때까지.

그런데 어떻게. 문제는 그 단순한 부사에서 시작된다. 어떻게. 일단 도경은 지한에게 물리적으로 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살아있는 인간에게 상해를 입히는 일은 위험부담이 컸다. 실은 위험부담보다도 손을 더럽히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손에 남의 피를 묻히느니 차라리 칼에 찔리고 싶었다.

도경을 세상에 내놓은 것만으론 모자라 미래까지 뒤흔들 영향력을 가진 권 회장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도경을 유배지에 더 깊숙이 처박으려 했다. 도경이 현경처럼 돈을 날려먹거나, 수준에 맞지 않은 상대와의 염문을 퍼뜨렸으면 억울하지도 않았다.

하나 이제는 죽어서 어차피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게 된 소현이 죽기 직전 도경 아닌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다는 죄목을 도경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지나쳤다. 도경의 의지와는 무관한 두 사람의 관계로 인해 도경이 피해를 입는 상황에는 상식이 부재했다.

죽이기라도 했어야 하나요, 묻는 도경을 권 회장은 내쫓았다. 도경이 그렇게 했어야 한다고 믿고도 남았으리라. 목숨을 못 끊어놔서 이 동네 저 동네에 다 소문이 날 때까지 살려뒀으면 최소한 어디 하나 부러트려는 놨어야 한다고. 그렇게 하지도 못한 주제에 도덕 챙기는 시늉을 하는 아들을 두들겨 패고 싶었을 것이다.

안다, 안다. 아무리 닮지 않았다 해도 피를 나눈 부모와 자식이니까, 도경도 그 속을 알았다. 도경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다. 내 자식이 그런 거지새끼보다 못하다는 말이야? 그런데 그걸 온 세상이 안단 말이지? 이 죽일 놈, 그 새낄 못 죽이겠으면 네가 나가 죽어! 이해하고 또 이해했다. 순간적으로 분화하는 그 감정만큼은.

도경은 지한을 더 알아야 했다. 서류상으로 말고. 남들의 입을 통해 듣는 모습도 말고, 진짜 그와 닿아야 했다. 그래야만 ‘어떻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현경이 보는 앞에서 권 회장에게 모욕을 당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도경은 한 가지를 결심했다. 지한에게 직접 접근하지는 않기로. 암만 정교한 우연을 만들어 접촉한다 한들 지한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 만남에서 받은 인상으론 결코 도경을 공격할 만한 낌새가 감지되지 않았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과소평가는 금물이었다.

황 원장이 시켜서 억지로 쓴 티가 팍팍 나는 현경의 안부 메시지를 읽고 무시했던 어느 아침, 새로운 옵션이 멈춰있던 도경의 뇌리를 두드렸다. 멀리 돌아가야 하는 길이기는 해도 훨씬 더 안전한 선택지.

도경은 그 선택지를 골랐다.

“여행은 잘 갔다 오셨나요?”

월요일 밤 열한 시. 호텔 지하에 위치한 바는 조명도, 인테리어도 어둡지만 선곡 하나만큼은 가벼웠다. 이 바에 한해선 월요일도 별다른 핸디캡이 되지 않았다. 항상 일정한 수 이상의 손님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웬만하면 월요일에 오고 싶었다. 첫 방문 때는 뭣 모르고 토요일에 왔다가 잔뜩 취한 외국인 무리가 목청 높여 떠드는 럭비 실황을 들어야 했다. 한 번으로 족한 경험이었다.

“그럼, 잘 갔다 왔지. 선물도 사 왔는데?”

여덟 시간 근무를 마친 뒤 자정까지 바에 앉아있는 일은 물론 쉽지 않았다. 오늘은 방송국에 가야 할 일도 없고 퇴근 시간을 한참 넘겨 올라온 제안서나 계약서도 없는 날이었다. 내일도 특별히 타이트한 스케줄은 없을 예정이라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일상의 리듬을 망가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움직여야 했다. 리듬이 망가지면 허점이 생겼다.

“선물이요? 제 선물?”

“별거 아니니까 그냥 받아.”

도경과 의자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앉은 손님이 쇼핑백을 통째로 들어 넘겼다. 잘 됐다. 바 안쪽에서 끊임없이 뭘 하느라 도경 쪽으론 잘 오지도 않는 바텐더의 동선만 쫓으며 앉아있으려니 자꾸 생각이 엉뚱한 데로 흘러 피로감을 느끼던 참이었다. 직관적 기억력이나 지한과 마주쳤던 테라스의 공기 같은 것은 그만 생각하고 싶었다.

“핸드크림이에요? 안 그래도 필요했어요. 진짜로.”

“손이 물에 많이 닿잖아. 일할 땐 못 바르더라도 쉴 때 자주 발라.”

시우가 순하게 웃었다. 순하다고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 눈매였다. 도경은 시우 옆에서 함께 웃는 지한을 상상했다.

지한의 얼굴이 그려지려다 말았다. 상상에 실패하고 나서야 도경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인간은 본 적 있는 것만 상상할 줄 알았다. 지한의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있어야 상상도 가능했다.

“한국이랑은 공기가 달라. 하늘이 진짜 하늘색인 거 있지. 한국 들어와서 산 이후론 그쪽 갈 때마다 놀라. 원래 하늘이 저런 색이었지, 그러면서.”

새 칵테일을 받은 손님이 다녀온 나라의 대기와 자연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의 향연이었다. 시우는 한시도 손님에게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직업정신이라면 직업정신일 텐데, 신기한 점은 손님의 이야기를 듣는 시우가 마치 진심으로 호기심을 가지고서 대화에 임하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재미없는 화제에도 성심성의껏 반응하는 것이 바텐더의 직업적 숙명이란 관념을 가진 도경의 눈에조차.

“거기서도 영어로 다 돼요?”

“웬만하면? 난 사실 계속 차로 다니니깐 잘 모르고, 내 동생이 걷는 거 좋아하거든. 시내 쪽 벗어나도 기본적으로 영어는 다 한대.”

“저도 영어 공부해야 되겠네요.”

“여행 가게? 어디?”

말이 너무 짧았다. 숄을 두른 손님의 나이가 꽤 있어 보이기는 했다.

“간다면 저는…… 일단 미국.”

“뉴욕? 베가스?”

“아무 데나 상관없어요. 경기만 볼 수 있으면.”

“경기?”

“MMA 경기 보고 싶어요. 복싱도 좋고요.”

“격투기 같은 걸 좋아했어?”

진심으로 놀랐다는 투였다. 도경이 지한과 시우의 역사를 모르는 일반 손님이었다면 피차 마찬가지였을 것이지만 그는 그들이 자란 고아원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시우가 격투기 경기를 보고 싶다고 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지한이 했었으니까.

“할 줄은 모르고요, 보는 것만.”

“운동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았는데…… 좋아해도 축구나 야구 정도.”

“어려서부터 자주 봐서요.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감탄사 비슷한 소리를 내는 손님에게 웃어 보인 시우가 상체를 틀었다. 그의 손이 뻗어진 곳은 도경이 앉아있는 자리와 가까웠다. 냅킨을 집어 올리는 과정에서 시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위쪽으로 올라갔다.

아, 이런. 눈이 마주치기 전에 다른 곳을 보고 있어야 했는데 그만 늦어버렸다. 도경은 낭패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시우도 미소로 응대했다. 신기하리만치 어리게 생긴 남자였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지한과 동갑으론 보이지 않았다.

단골이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연스레 둘의 대화도 끊겼다. 아쉬웠다. 격투기는 지한과 관련된 주제였다. 조금만 더 놔뒀으면 지한의 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바쁘셨나 봐요.”

도경의 대각선에 선 시우가 말을 걸었다. 드디어 도경의 차례인가 보다. 오늘로 네 번째 방문이니 시우에게 도경은 새로 생긴 단골 후보쯤으로 입력되어 있을 듯했다. 도경은 조금 전과 같이 살짝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디저트 와인 새로 들어온 게 있는데, 단 거 잘 안 드시는 분들도 이건 다들 좋아하시더라고요. 한 잔 드려볼까요?”

“네.”

도경 앞에 놓여있던 빈 잔을 수거하는 손길이 빨랐다. 시우가 글라스를 세팅하고 와인 코르크를 따는 동안 도경은 머리를 굴렸다. 어떤 톤의 대화가 적절할지.

“맛있네요.”

매 방문 도경은 대화를 잘 들을 수 있는 바에 앉았다. 어느 연령대의 손님과도 수월하게 대화를 이어나가고, 그렇기에 상당한 단골손님들을 거느리고 있는 시우는 고객에 맞춰 여러 주제를 넘나들 줄 알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은 잘 말하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도경이 듣고 싶은 것은 지한의 이야기였다. 제 이야기도 아니고 함께 사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일터에서 만난 고객에게 할 가능성은? 낮았다. 극히.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시우의 입에서 먼저 지한이란 이름이 나오길 기대하진 않았다. 도경이 처음에 기대했던 것은 지한 자체였다. 심부름센터에서 받은 사진을 보면 지한은 종종 시우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다녔다. 차가 끊기는 시간에 퇴근하는 시우를 위해 호텔까지 데리러 올 때도 있는 것 같았다. 한 번쯤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래요?”

기대는 엇나갔다. 지한은 두 번의 평일과 한 번의 주말 중 어느 새벽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우가 도경을 쳐다보았다. 내가 좋아할지 말지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지는 것처럼 들렸을까 싶었는데, 이내 싱긋 웃는 얼굴을 보니 그렇진 않은 듯했다.

“단 거 잘 드시니까 이것도 취향에 맞으시지 않을까 했거든요.”

도경은 시우가 따라준 와인을 내려다보았다. 어두운 실내는 와인을 거의 시커먼 색처럼 보이게 했다. 취향이라. 도경이 사는 데 있어 맛은 아주 부수적인 요소였다. 허기는 집중력을 떨어트리고 따라서 능률도 갉아먹는다. 그러므로 제때 먹었다.

딱히 특정 메뉴를 먹고 싶다고 바라는 경우는 드물었다. 밥도 그러니 술은 더했다. 해봐야 대학생 때 배운 와인이나 한두 잔 마시고 관두었다. 선물로 수도 없이 들어온 위스키는 얼음을 넣어야 먹을 만한데, 마실 때마다 그 짓을 감수할 만큼 맛있는 줄은 모르겠어서 아예 시작을 않았다.

그렇지만 도경은 시우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주는 대로 마셨다. 맛은 느끼지 못했다.

나갔던 손님이 급히 돌아와 시우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며 옷가지와 가방을 챙기는 사이 계산을 마치고 온 시우가 카드와 영수증을 공손히 돌려주었다. 돌아서기 전 손님이 그런다. 다음엔 꼭 같이 퇴근하자. 시우는 별말 없이 웃음만 지었다.

테이블엔 몇 팀이 남아있지만 바 자리에 남은 손님은 도경 하나였다. 머리가 삐걱거렸다. 어디서 진짜 녹슨 기계 소음이 나는 것만 같았다.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벌레가 꿈틀거리며 배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기분이 도지려 했다. 도경은 바를 닦는 시우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오늘도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갈 순 없었다.

“손님이랑 같이 퇴근도 하시나요?”

시우의 눈이 약간 커졌다. 도경은 인정했다. 부하직원들과의 회의에서든, 광고기획사와의 미팅에서든 잡소리 없이 의견만 깔끔하게 피력하기로 소문난 그의 사담 실력은 형편없었다. 남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가 이렇게까지 힘들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냥 도경에게 그 능력치가 부족한 것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퇴근하고 나면 차가 끊겨서요. 보통은 매니저님이 저 가는 길에 데려다주시는데 가끔 시간 안 맞으면 택시 타고 가거든요. 어쩌다 그거 아시고 난 다음부터 기회 되면 저 데려다주고 싶다고 하셨었어요.”

도경과 반대로 그 능력치가 대단한 시우는 금세 만면에 웃음기를 도로 뿌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도경은 표정을 굳히지 않으려 억지로 입술 끝을 들어올렸다. 이런 것에서까지 분함을 느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눈앞의 남자는 그런 거라도 있어야 먹고 살기 편할 터였다. 거지새끼니까.

“술 마신 상태로 남을 데려다준다고요?”

“아, 기사님이 있으세요. 그렇긴 한데 어차피 전 너무 늦게 끝나서…….”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란 듯 시우가 말끝을 흐렸다. 바의 영업 마감은 열두 시였다. 뒷정리까지 하고 가야 할 테니 퇴근은 한 시쯤. 늦으면 두 시.

“피곤하시겠네요.”

“저는 대신에 출근도 늦게 하니까요. 밤에 술 드시고 아침에 출근하시는 분들이 훨씬 더 피곤하시죠.” 말을 하다 말고 도경을 힐끔거린 시우가 덧붙였다. “그런데 손님은 안 그래 보이세요.”

뭐가 안 그래 보인다는 건지는 들어야 알 수 있었다. 도경은 적당히 대꾸했다.

“안 그래 보인다는 게?”

“항상 되게 깔끔하셔서요. 일하고 오신 다른 분들하곤 되게 분위기가 달라요. 음……. 엄청 정돈된 느낌?”

가볍지만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이 갑자기 요란해졌다. 누구의 결정인진 몰라도 선곡 미스였다. 시우가 뭐라고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도경은 팔꿈치를 바에 대고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계속 말해보란 뜻에서 취한 제스처였는데, 막상 그리 자세를 취하고 나니 어딘가 묘해 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닐 수도 있었다. 확신은 서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도, 본사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그리고 좌천된 이후로도 자신감 하나는 잃어본 적 없는 도경에게 딱 하나 미개척지로 남아있는 분야가 있었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상대의 성욕을 끌어내기 위해 행하는 의식을 잘 몰랐다. 들어서 알고는 있어도 직접 실행한 경험은 없다는 의미였다. 경험이 없으니 자신이 어떠한 자세를 취했을 때 상대에게 유혹으로 받아들여질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시우에게 그런 꿍꿍이를 품은 사람으로 보여야겠단 계획은 없었으므로, 도경은 망설였다.

시우가 도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음악 볼륨이 확 줄어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도경은 바에 몸을 바짝 붙인 자세를 유지한 채 물었다.

“칭찬인가요?”

5만 원 지폐를 팁이랍시고 아무렇게나 던지는 손님 앞에서도 사근사근 잘만 웃던 시우가 도경의 말에는 웃음기를 약간 잃었다. 어째서인지는, 역시 모르겠다. 권 회장을 따라 나간 술자리에서 국무총리의 비위를 맞춰야 했을 때도 오늘보단 머릿속이 평온했다.

“네, 당연히.”

칭찬이죠. 어쩐지 힘이 들어간 발음으로 말한 시우가 평소의 웃는 얼굴을 되찾았다. 새로 들어온 손님이 바에 앉았다. 도경은 와인글라스로 주의를 돌렸다. 오늘은 그만 일어서는 편이 좋겠다.

호텔 밖으로 나오니 저녁때보다 온도가 훨씬 낮아져 있었다. 도경은 코트 주머니 안에 손을 넣고 몇 초간 녹인 뒤 다시 뺐다. 걸을 때 손은 밖으로 나와 있어야 한다. 추우면 장갑을 껴라. 유치원생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부모의 말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강박이 되었다.

줄지어 서있는 까만 택시들을 지나 걸었다. 차를 끌고 오지 않았으니 집에 가려면 택시를 잡아야 할 것이다.

호텔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서 물을 사 나왔다. 냉수가 몸 안으로 들어오자 지하 바에 있는 몇 시간 동안 내리 시달린 정신이 조금이나마 맑아졌다.

다른 손님들을 들먹여가면서까지 도경을 칭찬한 시우의 의도를 당장 알 순 없었다. 시우가 적어도 도경을 진상이나 존재감 없이 스치는 손님으론 여기지 않는다는 것만 알면 됐다.

일단은 그랬다. 모로 가도 시우에게 잘 보여야 좋았다. 시우는 지한에게 유일한 가족 유사품이었다. 시우보다 지한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자, 알고 보자. 뭘 어떻게 할지는 다 알고 난 뒤에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였다.

물을 더 마시려 아랫입술에 병 입구를 댔던 도경은 도로 병을 내렸다. 눈, 코, 입 부위를 가리지 않고 침투한 담배 연기가 그대로 도경의 기관지를 통과했다. 아주 가까이서 건너오는 연기였다.

굳이 다른 사람이 서있는 자리로 발암물질을 뿜어대는 무례한 놈의 낯짝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경은 연기가 불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장 기대치가 낮아져있던 바로 그 순간에 줄곧 맞닥뜨리길 바라온 대상을 발견했다.

우지한.

도경은 신속히, 그러나 소란스럽지는 않게 고개를 제 위치로 돌려놓았다. 1, 2초 남짓한 찰나였지만 지한이 확실했다. 그가 뭘 입고 있는지도 다 봤다. 사진 속에서 본 적 있는 것들이었다. 인조 가죽으로 만들어진 재킷과 너덜거리는 청바지. 낡은 오토바이. 시우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아는지 오토바이에 시동이 걸려있지 않았다.

앞쪽에 시선을 고정한 도경은 천천히 생수병 뚜껑을 닫았다. 이것도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일 수 있는데, 도경은 지한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한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겠답시고 그와 동거하는 남자의 일터에까지 와 고생하는 이 상황이 우스꽝스럽다 못해 비통함까지 느껴지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 지한이 도경을 알아보지도 못한다면 너무 불쾌해 물을 끼얹고 싶어질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갔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월요일 밤거리엔 사람도, 차도 드물었다. 조용했다.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달갑지 않은 기분이었다.

설마 지한이 정말로 도경을 못 알아보고 있는 것이라면 물을 끼얹는 것으론 부족했다. 뺨을 한 대 올려붙여도 시원찮았다. 네가 뭔데 날 알아보지도 못해? 나는 너 때문에― 도경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마음, 마음의 소리를 음소거해야 했다.

더는 못 참겠다. 도경은 지한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정 안 되면 담배 한 대만 빌려달란 핑계를 대서라도 말을 걸어보겠단 다짐이 허무하게 멀어졌다. 지한이 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넝마 같은 바지에도 잘 빠진 모양새가 가려지지 않는 다리를 짝짝이로 짚고 서서, 담배 든 손은 아래로 떨어트린 채로.

지한이 도경에게 다가왔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도경은 빠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올렸다. 구멍 좀 늘어나고 헤졌다고 해서 바지를 넝마라 할 것이 아니었다. 현재 지한의 신체에 걸쳐진 것 중 제일 넝마다운 것은 신발이었다.

더 가까이 왔다 간 승부를 앞둔 격투기 선수들처럼 보이리란 생각이 도경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거짓말처럼 지한이 멈추었다. 턱을 살짝 치켜든 그의 머리통이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었다.

도경이 아는 표정이었다. 별장 테라스에서도 지한은 그런 얼굴이었다. 마취에서 풀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별장.”

지한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에서 망할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났다. 인상 쓰지 말자. 최면에 가까운 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도경은 기다렸다. 별장에서 뭐 어쨌다는 건지 지한이 더 친절하게 말해주기를.

“별장에서 나한테 그, 김에…… 그 여자 이름 알려준.”

이안 하나로도 충분하건만, 이제는 지한까지 사람 이름 몇 글자를 기억 못 하고 앉아있었다. 가여울 지경이었다. 새대가리 같은 것들.

“에스더.”

“아.”

그게 다였다. 잠깐 기억이 안 났네요, 라거나, 그것도 너무 길면 맞아요, 정도의 간편한 어구도 있었다. 그러나 지한은 엉뚱한 루트를 탔다.

“도경. 권도경.”

도경은 숨을 삼켰다. 대뜸 이름을 불러서 뭐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다행이었다. 그의 이름마저 기억이 안 난다고 했으면 더 상대할 의욕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 이름 기억하시네요. 우지한 씨.”

이름을 불러서 대꾸를 해줬으면 본인도 그에 맞는 반응을 해야 하건만, 지한은 바싹 타들어 간 꽁초를 바닥에 던지기나 했다. 꽁초가 지한의 발 옆으로 떨어졌다. 더러운 신발이 꽁초를 비벼 짓이겼다. 반동으로 작게 튀어나간 불씨는 얼마 못 가 저절로 빛을 잃고 죽었다.

그럴 리야 없겠으나, 담배꽁초를 버리고 난 지한은 방금 전까지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다 잊어버린 것 같은 눈치였다. 도경은 인내심을 가지고 새롭게 대화를 텄다.

“집에 가시는 길인가요?”

“아니요.”

질문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답이었다. 지한의 사담 실력은 도경보다 훨씬 더 나쁜 듯했다. 소현의 휴대폰 대화창에 남아있는 메시지들만 봐도 짐작 가능했던 바이긴 했다. 대화를 이끌어가기는커녕 남이 묻는 말에 대답 하나 똑바로 못했다. 정말 못하는 건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근처 살아요?”

대답 하나 못한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먼저 질문을 해왔다. 도경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도경은 제게 눈길을 고정한 지한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밤에도 전혀 연해지지 않는 이목구비였다.

“근처는 아니고, 차로 10분은 걸려요.”

이 동네 주민도 아니면서 이 시간에 여기는 왜. 딱 그렇게 묻고 싶어 하는 빛이 지한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러면서 직접 묻지는 않았다. 웃기지도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봐야 하는 법이었다. 알아서 대답해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지가 뭔데. 확 그냥.

“여기 안 사는데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해요?”

뭉개버리기에 아까운 면상이기는 했다.

“술 한잔했어요. 여기 호텔 바가 괜찮더라고요.”

도경의 뒤로 우뚝 선 호텔을 본 지한이 중얼거렸다.

“지하에 있는 바?”

뜬금없이 짧아지는 지한의 말투는 시우에게 시종일관 반말을 유지하던 단골손님을 생각나게 했다. 그 여자는 나이가 많기라도 했지.

“네. 가보신 적 있나 봐요.”

지한은 눈만 깜박일 뿐 긍정을 하지 않았다. 이런. 가본 적 없는 눈치였다. 도경은 지한이 사실대로 털어놓기 전에 선수를 쳤다.

“잘하면 안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요새 일주일에 한 번은 오거든요.”

“아.”

“혹시 저 보시면 아는 체하세요. 제가 한잔 사 드릴게요.”

지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눈썹과 눈도 함께 찡그려졌다.

“나한테 술을 사준다고?”

도경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섯 살이나 어린 게 말본새에서 매너라고는 개털 한 올만큼도 못 찾아보겠다. 그래도 지금은 지한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그 주먹에 대비할 예방책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전 그냥 소현이 아시던 분이라고 하니까 잘해드리고 싶어서. 기분 나쁘셨어요?”

“아― 아니.”

도경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지한이 머뭇대다 입술을 깨물었다. 도경은 다시 기다렸다.

한참 만에 지한이 입을 열었다.

“기분 안 나빠요.”

그 말을 끝으로 대화는 끝났다. 도경도 더는 할 말이 없고, 지한은 원래 할 말이 그다지 없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할 말이 있는데 잘 못하는 중이라 해도 알 바 아니었다.

일단 지한은 이것을 알아야 했다. 도경은 언제까지고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뵙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한 뒤, 도경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돌아섰다. 도경의 등에 대고 인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지한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정도 호기심은 누를 줄 알아야 했다. 그들은 또 마주치게 될 것이다. 몇 번이고. 수도 없이.

밤거리를 달리는 택시 안으로 끝없이 선 가로등이 명도 낮은 빛을 흘려보냈다. 뒷좌석이 단단하게 등을 받쳤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갔다. 혈색 좋은 입술을 자꾸만 깨물던 모습이 화질 좋은 영상처럼 선명하게 재생됐다. 기분 안 나빠요. 제발 오해하지 말라는 듯 다급하게 덧붙이던 말도.

웅크리고 있던 감각이 다시금 기지개를 켰다. 여전히 뭐라 단언할 수 있는 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도경은 눈을 떴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택시가 속도를 높였다. 부드럽던 엔진 소음이 거칠어졌다. 낡은 오토바이에서 나는 굉음처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