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Reach
#17
아침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도경은 평소처럼 바로 의자에 앉는 대신, 손님용 테이블 앞에 서서 데스크를 바라보았다. 컴퓨터 모니터와 키보드, 연필꽂이, 사무실용 전화기 그리고 명패. 검정으로 색이 통일된 물건 중 오늘따라 유독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명패였다. 까만 금속으로 제작된 명패의 재질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명패에 새겨진 글자들이었다.
이 사 권 도 경.
이사라고 다 같은 이사가 아니었다. 도경의 이름 앞에 붙은 이사는 본사의 부장만도 못했다. 그는 짧게 심호흡했다. 오전부터 신경이 곤두서는 것으로 보건대 오늘 종일 컨디션이 별로일 예정이었다.
심호흡을 마치고 의자에 앉아 밖에서 받아온 신문을 데스크 위에 내려놓았다. A일보에서 발간된 한국어 신문이 맨 위였고 스포츠신문과 영자 신문들이 깔려 있었다.
A일보 신문 1면에 박힌 사진이 심상치 않았다. 문화면도 아닌데 떡하니 영화 제목이 박혀있었다. B미디어가 제작해 배급한 영화였다. 그 영화가 히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모든 히트작이 조간신문 1면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돈이었다. 아직 그게 진실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설령 소현이 도경을 두고 바람을 피웠다 하더라도 변치 않는 점. B미디어는 A미디어보다 훨씬 컸다. A미디어의 본질이 종이신문이라면 B미디어의 본질은 영화였다. B미디어 뒤엔 그보다 더 큰 B그룹이 있었다. 스케일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돈이 많은 자는 정해진 수순처럼 권력을 원한다. 돈 없이는 권력을 쟁취할 수 없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B그룹이 권 회장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도경과 소현은 각각 서로에게서 챙길 득이 확실한 관계였으나 집안 서열이 확연히 상승한 쪽은 소현이었다. 도경의 부모보단 소현의 부모가 훨씬 더 사윗감을 탐냈다는 이야기다. 입이 닳도록 말하고 또 말해도 모자랐다. 도경은 소현이 아니었어도 어떻게든 살아남긴 했을 것이다.
소현과의 관계로 인해 도경이 권 회장의 예쁨을 받았던 적도 분명 있었다. 다만 그건 지저분한 현경의 사생활과 비교되어 얻었던 상대적 효과였다. 요새 권 회장이 고기를 빼앗긴 맹수처럼 구는 것은 그저 자존심이 상해서였다.
둘째아들로 첫째아들이 망쳐놓은 집안 이미지를 좀 미화시켜보려고 했더니 웬걸, 장남이 망나니였다면 차남은 등신이었던 것이다. 권 회장의 입장에서 더 두고 보기 힘든 놈은 망나니가 아닌 등신이었다. 연예인도 못 된 지망생 나부랭이에게 여자나 뺏긴, 사내구실 못하는 등신새끼. 자존심, 그놈의 자존심.
도경은 신문을 반으로 접고, 또 다시 반으로 접었다. 그런 다음 쓰레기통에 곱게 꽂아 넣었다. 글렀다. 기분이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명패로 현경과 권 회장을 한 대씩 후려 패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물려주려면 주먹이나 물려줄 것이지, 왜 자존심같이 피곤한 걸 물려줘 가지고.
노크소리가 그의 사고를 끊었다.
“네.”
안 봐도 노크의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대리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역시나 이안이었다. 도경은 모니터 하단의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00. 아무리 이안이라지만 남의 회사로 놀러 오기엔 너무 양심이 없는 시간이었다.
“들어오라고 하…….”
“커피 사 왔어!”
직원을 밀치다시피 하고 등장한 이안의 양손에 알록달록한 테이크아웃 컵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도경은 한숨을 안으로 삼키며 인내심을 다졌다. 참자, 쟤는 나한테 80점짜리다. 80점짜리는 쉽게 구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맛 좀 보고 평가해줘. 이번에 우리 회사 1층에 새로 차린 덴데 망하면 안 돼. 내가 들여오자고 한 거라.”
“괜찮네.”
받자마자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셨다. 그래야 빨리 이안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도경의 영혼 없는 반응에도 활짝 웃은 이안이 제 사무실인 양 편하게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형 어제는 뭐 했어?”
이안은 지한을 따라 호텔까지 갔던 당사자다. 어제 한 일을 묻는 의도가 빤했다. 자기 덕분에 만난 지한과 뭘 했는지 샅샅이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알잖아.”
“아니, 나는 다 모르지. 둘이 만나게 해주기만 하고 빠졌는데. 만난 거지, 어제? 걔랑?”
남들 같으면 메시지로 채근해서 물어봤을 내용을 이안은 다음날 회사로 찾아와서 직접 물어봤다. 메시지로 길게 대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도경의 성격 때문이었다. 역시 80점짜리였다.
“응.”
“그 호텔 걔가 일하는 데잖아. 이시우. 걔도 봤어?”
“어.”
“잠깐. 그럼 셋이서 본 거야?”
“아니, 어젠 다른 데 갔어.”
이안의 연락을 받고 호텔로 향하는 내내 도경은 지한이 이미 바 안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았길 바랐다. 시우에게 도경의 정체를 알리는 것은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안은 지한이 이미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바 안에 들어가서 술 한 잔을 마시고도 남았을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택시에서 내렸는데 호텔 주차장을 둘러싼 나무 사이로 편의점 앞에 서있는 길쭉한 남자가 보였을 때, 도경은 거의 환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던 지한이 밖에 있었다.
“그럼 이시우는 언제 본 건데.”
“전에 바에서.”
“전에? 어제 말고 전에도 우지한을 만났어?”
도경이 다가서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기에 어깨를 건드렸더니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숨을 들이마시던 지한의 얼굴이 화질 좋은 영상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바람에 날아가던 담배 연기. 새카만 머리카락.
“아니, 나 혼자.”
진한 눈매.
“형 혼자 그 바에 갔다고? 왜?”
이안이 앉은 상태로 의자를 들고 다가왔다. 쓰레기통을 발로 밀고 바로 옆까지 와 의자를 내려놓은 그는 사무실 안에 그들의 말을 엿듣는 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속닥거렸다.
“설마 이시우를 꼬시는 거야?”
“너 오늘 출근 안 해?”
“걔 꼬셔서 얻다 쓰는데?”
딱히 대답하려던 것도 아니지만, 이안이 알아서 자문자답했다.
“이시우 꼬셔서 우지한이랑 갈라서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구나. 헐. 맞지.”
지한에게서 시우를 뺏어온다. 한 번도 고려해본 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소현과 바람난 새끼의 유일한, 가족인지 동반자인지 하는 것을 없애버린다. 한때는 상당히 가치 있게 느껴졌던 옵션이다. 의외의 변수가 생겨서 삭제해 버리긴 했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네.”
변수가 목적지를 바꾸었다.
도경의 말을 곱씹어보듯 몇 초간 조용하던 이안이 꽥 소리쳤다.
“뭐! 진심이야? 나는 농담이었다고.”
“뭐가 진심이야. 네 말도 나쁘지 않다고 한 게 다야.”
노크 소리가 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밖에서 누가 또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도 이안이 왔음을 알렸던 대리가 재등장했다. 박 실장님 곧 도착하신대요, 이사님이 폰 안 보신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알겠다고 말한 도경은 이안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이안은 언제 꽥꽥거렸냐는 듯 얌전히 커피를 들고 나갔다. 그래봤자 얼마 안 되어 또 나타날 것이다. 사무실에 남아 있겠다고 우기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혼자 남게 된 도경은 그날의 운에 새삼 감사했다. 지한은 마치 마주치면 술을 사주겠다는 도경의 말을 믿고 나온 사람처럼 그때와 똑같은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시우를 데리러 왔다고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도경과 만나려고 온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신은 금물이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바 안에서 술을 시켜놓고 담배가 고파져 나왔을지.
그날도 여지없이 마취에서 깨어난 기색을 하고 있던 지한은 도경이 말을 걸 때마다 멈칫거리고 흠칫거렸다. 그러면서도 꼬박꼬박 대꾸는 잘만 했다. 술 드시러 오신 거예요? 예. 다른 데 가 볼까요, 제가 아는 가게 있는데? 예. 와인 레드로 시킬까요? 예.
도경과 마주 앉게 된 지한은 약간 정신이 빠져 보였다. 실제로도 정신 사납게 굴었다. 시종일관 떨다 말다를 반복하는 다리는 기본이었고 들썩이는 가슴팍은 덤이었다. 하도 그래서 나중엔 정서불안이나 호흡기 질환이 있나 의심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날은 도경에게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오토바이 태워 달라면서요.」
지한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사이 도경은 신속히 계산을 마쳤다. 도경이 다 냈다는 것을 안 지한은 왜 그랬냐고 따지거나 고맙다고 하는 대신 대뜸 오토바이를 언급했다. 도경이 ‘태워달라’고 했다는 것은 다소 왜곡된 발언이었으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렇죠, 라는 도경의 긍정을 들은 지한은 더 말하지 않고 가게 사장에게 펜을 빌린 뒤 카운터에 배치된 명함을 하나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거기다 적어서 건넸다. 무엇을? 자신의 휴대폰 번호 열한 자리를.
도경이 이미 그 번호를 알고 있다는 것은 까마득하게 모르는 채.
「타고 싶을 때…….」
지한이 말끝을 흐리는 바람에 뒤 내용은 듣지 못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타고 싶을 때 연락하라는 소리를 돌려 한 것이었다.
도경은 택시에 올라타자마자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실소가 아니라 진짜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모범택시 기사가 거의 급정거를 했다. 기사를 놀라게 하고도 웃음은 쉽게 끊이지 않았다.
번호를 넘길 줄이야. 가소롭다 못해 깜찍하게까지 느껴졌다. 또 만나고 싶다는 뉘앙스는 먼저 풍기되 바통은 도경에게 넘겼다. 지극히 고전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이제 다음 연락은 도경 쪽에서 취해야 했다. 도경의 번호를 모르는 지한으로선 취하고 싶어도 연락할 길이 없었다.
무슨 꿍꿍이지?
“이사님.”
노크 소리가 들렸던가. 아니, 듣지 못했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도경이 성공적으로 이미지 변신을 시켜놓은 아역 출신 배우의 매니저였다. 요새 한참 허세 부리고 다닌단 소문이 영 없는 말은 아닌지 차림새가 과했다.
“박 실장님 얼굴이 좋으시네요.”
“이사님 덕분입니다.”
적당히 설치고 다니란 말이었는데 그걸 못 알아들었다. 딱히 알 바 아니라 그냥 넘기기로 했다.
“첫 촬영에서 별문제는 없었고요?”
“네? 네, 문제 있을 일이 뭐 있겠어요.”
이 바닥에서 일한 기간과 거짓말 실력은 정비례한다더니 정말로 거짓말하면서도 낯빛에 조금의 변화가 없었다. 촬영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영화감독에게서 전화를 두 통이나 받았다. 배우가 욕심낸다고 해서 원래 배우도 자르고 넘긴 역할인데 촬영 자세가 너무 불량하다, 정말 욕심낸 게 맞느냐 하는 컴플레인이었다.
“연기하는 데도 불만 없고요? 역할이 좀 그렇잖아요. 장면도 적고.”
“안 그래도 시간 아깝다고 투덜거리기는 했는데, 뭐 그래도 펑크 낼 놈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아주 중요한 역할이라 해보라고 한 거지만요. 제가.”
도경의 덫에 걸려들었음을 안 박 실장이 그제야 조금이나마 당황하는 표정으로 부정했다.
“그럼요.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투덜거린다고 한 것도 그냥.”
“국민 남동생 소리만 안 들을 수 있으면 벗기라도 하겠다더니.”
“그…….”
“벌써 그때 얘긴 다 잊어버렸나 봐요.”
“아니, 그럴 리가 있겠, 아닙니다. 제가 말실수했습니다, 이사님.”
도경의 관리 아래 있는 동안은 누구든 잘되어야 했다. 배우면 연기를 잘해야 했고 가수면 노래를 잘해야 했다. 실력이 안 되면 얼굴이라도 국보급이어야 했다. 나중에 가서야 어찌 되든 도경과 엮여있는 한은 일정 수준을 유지해야 했다. 그들이 곧 도경의 얼굴이었다.
“싫으면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세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전 배우한테 다시 돌려주든지. 박 실장님도 보지 않으셨나요? 원래 그 역할 하기로 했던 사람.”
“사진만…… 네. 봤습니다.”
그랬으면서 어떻게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인지, 도경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아깝다고 투덜거렸다는 배우보다 지한이 한 다섯 배쯤 더 잘생겼다. 도경의 눈에도 보이는 차이가 감독에게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B미디어 영화니까 스크린 확보야 일도 아닐 거고. 캐스팅 좋고, 각본 그 정도면 평균 이상이고 뭣보다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일본이랑 중국엔 이미 팔렸고.”
그러니까 더 잘해야만 했다. 보란 듯이 성공시켜서 지한으로 하여금 양가적인 감정이 들게 해야 했다. 저걸 내가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러움과, 내가 저 사람만큼 잘할 수 있었을까 하는 회의감을 둘 다 가져 밤에 잠도 못 들게 만들어야 했다.
“대형 신인 하나 나오겠죠?”
그런데 매니저고 배우고 정신이 빠져 있다니. 세상엔 정말 모자란 것들이 넘쳤다.
“둘이 나이도 비슷하니까 잘됐네. 라이벌 하나 생기면 더 열심히 할 거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실장의 얼굴에 드디어 어두운 빛이 돌았다. 도경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쯤 했으면 충분히 알아듣고도 남았다.
실장을 내보내기가 무섭게 경박스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덜 닫힌 문을 홱 열어젖히고 들어온 이안의 손에 새로운 음료수가 들려 있었다. 형, 이 건물 1층에 있는 카페 가 봤어? 스무디 맛있다. 체인점 아니지? 이안의 말이 도경의 왼쪽 귀로 들어가 오른쪽 귀로 흘러나갔다.
“김무영 다음 달에 한국에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응. 어떻게 알았어? 내가 말해줬었나?”
소현의 달력에서 봤다는 것은 당연히 비밀이었다. 연달아 이안의 말을 무시한 도경은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물었다.
“걔 요새도 오토바이 타?”
“몰라. 난 예전에 한번 그 뒤에 탔다가 진짜 사망하는 줄 알았어.”
제 질문이 무시당하거나 말거나 착실하게 대답을 이어가던 이안이 잘 빨던 빨대를 뱉었다. 도경이 오토바이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일상적이지 못한 일임을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근데 오토바이는 왜?”
도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취미나 만들어볼까 해서.”
정확히 짚자면 도경의 관심은 오토바이라는 이동수단 자체가 아닌, 그 뒤에 함부로 탔다가 벌어질 불상사에 가 있었다. 오토바이 뒤에 타본 적은 없었다. 앞에도 타본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앞보단 뒤가 더 위험하단 것이 일반 상식이었다.
필히 연습해야 하는 짓거리였다. 무턱대고 남의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구역질이라도 하면 정말이지 아스팔트에 이마를 갈고 싶어질 테니까.
#18
시야가 탁했다. 지한은 눈을 비볐다. 그래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맑아지지 않았다. 원인은 그의 눈이 아닌 공간에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에 달린 조명을 보았다. 낡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종류를 샀는지는 몰라도 빛 자체가 어두웠다.
문득 지금 와 있는 룸과 엇비슷하게 어두컴컴했던 한 장소가 떠올랐다. 불빛의 밝기를 빼면 사실 모든 것이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장소였다.
도경과 갔던 바는 지한이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호텔 바가 바로 이런 분위기 아닐까 지레짐작하게 될 만큼 고급스러웠다. 입구에서부터 화장실에서까지 좋은 향기가 났고 끊이지 않은 음악은 지나치게 시끄럽지 않았으며 메뉴마저 단단한 가죽에 감싸져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한이 친구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호스트바의 룸은 공기부터 칙칙했다. 독특한 모양의 램프부터 곳곳에 걸어놓은 액자까지 나름 차별화를 시도한 티는 났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촌스러웠다.
휴대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시우에게서 온 메시지가 쌓인 알림들 위에 새로 떴다.
[은행 있는 데서 왼쪽이야 오른쪽이야?]
그러고 보니 아까 통화할 때 역 이름만 말하고 자세한 위치를 보내지 않았다. 다른 대화창에서 링크를 복사해 붙인 뒤, 지한은 대화창을 나왔다. 배경화면의 달력 아이콘에 뜬 숫자가 기어이 그의 눈길을 붙들었다.
30일. 벌써 일주일이나 됐다. 뭔가에 홀린 듯 호텔까지 갔다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 나왔던, 분명 담배만 피우고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얼결에 도경과 마주쳐 함께 술을 마신 지도. 또 다시 뭐에 홀린 듯 그에게 전화번호를 적어 넘긴 지도.
그런데 전화가 안 온다.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치밀었다. 결코 좋은 기운은 아니었다. 뭐라도 부수고 싶어졌다. 지난번에 집어 던진 휴대폰은 이미 액정이 나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씨발, 한 주먹거리도 안 되게 생긴 새끼 때문에 이게 뭐하는…… 아니지.
지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붙어보기 전엔 몰랐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게 생겨서 무서운 주먹을 가진 인간도, 흔치는 않지만 존재했다.
게다가 선이 가늘고 하얘서 실제 체격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을 뿐, 도경은 보기와 달리 키가 컸다. 지한과 엇비슷해 보였다. 물론 신장보단 체급이 중요했다. 어쨌거나 도경이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은 잘 상상되지 않았다. 주먹은 무슨. 평생 욕도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이 생겼는데.
그 목소리로 내뱉는 욕설도 한 번쯤 들어보고 싶기는 했다.
“미안, 미안. 통화 좀 하고 오느라.”
문이 열리며 지한을 기다리게 했던 주인공이 나타났다. 예전에 본 영화들에서 호스트란 새끼들은 하나같이 풀어헤친 드레스셔츠에 정장을 입고 있었건만 이건 뭐 멋을 좀 부린 대학생이라 해도 믿을 만한 수준이었다. 평범한 대학생들이 신발부터 벨트까지 다 명품으로 맞춰 하고 다닌다면 말이지만.
“그래서 생각은 좀 해봤고?”
‘레오’란 되도 않는 이름으로 활동해 친구들 사이에도 그리 불리는 호스트는 시우가 싫어하는 지한의 친구 중 하나였다. 지한의 친구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쪽은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동기들이었고 다른 쪽은 체육관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다들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시우는 지한이 체육관이란 단어만 꺼내도 경계심을 보였다. 누구에게든 사근사근하게 대하는 시우가 유일하게 지한의 체육관 친구들은 꺼렸다.
“뭘 생각해. 안 한다고 했잖아.”
시우의 편견이라고 치부하기엔 지한이 체육관에 다니면서부터 친 사고가 너무 많았다.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바 아니기에 지한 스스로도 그들과 만나는 횟수를 점차 줄여가던 참이었다. 작년부터 줄이기 시작했고 올해는 다해서 두 번밖에 안 봤다.
“뭐? 진짜 안 해?”
내년이 오기 전엔 더 안 봐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마냥 집에서 놀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뭘로 먹고살 것인지 고민하는 동안 단기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했다.
문제는 직종이었다. 서비스직은 경험도 많지 않을뿐더러 면접에서 붙는다 해도 오래 못 버틸 게 뻔했다. 지한은 스물한 살 때 술을 처마시고 들어와 담배 종류를 잘못 줬다며 진상 피우는 새끼를 바코드 스캐너로 때린 전적이 있었다. 진상이 지한에게 먼저 담뱃갑을 집어던지는 장면이 CCTV에 남아있어 골치 아픈 일 없이 넘어가긴 했으나 얼마 안 가 사장이 지한을 잘랐다.
네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나랑 가치관이 맞지 않는 것 같다, 고 했었다. 네놈은 누가 널 때리면 다음 담뱃갑이 날아오길 기다리는 가치관을 가진 모양이시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경찰서에 불려간 지 얼마 안 된 상태로 또 사고를 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 한 달간 화병에 시달렸다.
“안 한다고.”
그 뒤론 태도가 크게 상관없는 일들을 전전했다. 택배, 배달, 이삿짐 등 몸 힘든 일은 노가다 빼고 한 번씩 다 해본 것 같았다. 스물셋쯤엔가 체육관 관장과 연락이 닿아서 트레이너 자리를 제안받기도 했지만 거절했다. 스무 살 때 이후로 격투에 관련된 것은 순수 운동이라 할지라도 멀리했다.
“그럼 나 만나러는 왜 왔어? 난 네가 마음 있어서 여기까지 온 줄 알았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귀한 줄 알아야 했다. 호적상 위아래로 아무도 없는 고아라면 특히나. 피가 섞이고 말고는 중요치 않았다. 지한은 시우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항상은 못 그래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네가 밥 먹자며.”
소현은 지한이 시우의 말을 듣지 않은 대표적인 예였다. 시우가 소현을 만나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다. 아예 모르니 말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시우가 알았으면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지한을 정신병원에 처넣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철저히 비밀로 했다.
“아 밥 먹지 그래, 근데 나는 이 얘기 하는 김에 밥도 먹자 그런 거지.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너는?”
지한은 밀폐된 공간에서 굳이 담배에 불을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오랜 친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호스트를 해보겠냐는 말, 소현과 만나는 동안엔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을 제안이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공식적으로 한 일은 스턴트 두 번 뛴 게 고작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론 직장인에 버금가는 업무량을 소화했다 말할 자신이 있었다. 오라면 오고, 화를 내면 들어주고, 집어던지는 대로 족족 맞아주고, 가라면 가고, 가는 길에 돌아오라면 다시 돌아가고.
사과를 고가의 명품으로 대신하곤 했던 소현은 지한에게 돈도 줬다. 달라고 해서 받아낸 것은 아니었다. 관계의 초반에만 해도 지한은 주6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소현이 하도 아무 때나 불러대는 탓에 아르바이트에서 잘릴 위기에 놓였고, 그래서 이렇게 아무 때나 부르면 일은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한마디 했다.
그랬더니 다음날 현금다발을 뽑아 왔더랬다. 어떤 계산법으로 정한 액수인진 몰라도 나중에 세어보니 딱 200만 원이었던 만 원 뭉치를 면상에 집어 던지면서 소현이 한 말은 이것이었다. 한 번만 더 징징거리면 너희 집에 불 질러 버릴 거야. 그녀는 가끔 그렇게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곤 했다.
그랬었다.
“멍청해서 미안하게 됐다, 씨발 새끼야.”
“아 또 왜 이러세요. 성질 좀 죽여.”
휴대폰 화면이 재차 밝아졌다. 빌딩 앞까지 왔는데 간판이 없어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시우의 메시지였다. 조금 전 들어왔던 통로를 떠올리고 그대로 알려주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시우는 외부인이었으니 먼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순서였으나 생략했다.
“누구랑 연락을 그렇게 해. 여자?”
“시우.”
팩을 한 것처럼 반들반들한 얼굴이 살짝 굳었다. 체육관에서 만난 녀석들은 모두 시우가 자기네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시우의 등장이 반갑지 않을 만도 했다.
“아. 시우. 걔는 잘 지내?”
“지금 오는 중이래.”
애써 부드러워지려고 노력하는 것 같던 얼굴이 더 확연히 구겨졌다.
“어딜. 여기를?”
“같이 밥 먹게. 왜. 안 돼?”
겨우 표정을 관리한 레오가 어설프게 웃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지금 걔 일할 시간이라 물어본 거…….”
문이 벌컥 열렸다. 시우였다. 용케도 룸까지 맞게 찾아왔다. 이야 오랜만이다, 얼른 들어와. 언제 얼굴을 구겼냐는 듯 벌떡 일어난 레오가 시우를 반겼다. 시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간단한 인사도 하지 않고 룸 안을 둘러본 그가 레오를 노려보았다.
“내가 우지한 끌어들이지 말라 그랬잖아.”
아차. 깜박 잊고 있었던 정보가 너무 늦게 돌아왔다. 소현의 장례식에 갔던 날 시우에겐 체육관 애들 핑계를 댔었다. 지금 시우의 상태라면 왜 이렇게 자주 만나냐는 말이 나오기 충분했다. 그러면 레오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질 테고, 그랬다간 거짓말을 해명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뭘 끌어들여. 내가 안 한다고 했어.”
“그래, 야, 그냥 밥이나 한 끼 먹으려고.”
“너 내가 어디 모자란 줄 알아?”
시우가 다가서려는 레오의 가슴팍을 팍 밀쳤다. 약간 놀라웠다. 지한은 시우가 누군가의 몸에 그런 식으로 손대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레오가 숨을 들이마셨다. 분명 시우를 한 대 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중일 것이다. 평생 그런 욕구를 떨치지 못한 채 살아온 지한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
“네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우지한이 안 한다는 말을 왜 해? 네가 뭘 하라고 했으니까 안 한단 소리도 나온 거잖아. 내가 너희 머리 굴리는 방식을 모를 것 같아? 몇 년을 봤는데?”
‘너희’가 과연 누구부터 누구까지를 가리키는 말인지 구분이 안 갔다. 레오가 지한의 눈치를 봤다. 어쩔까. 지한은 구부정하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시우를 억지로 끌고 나가려는 시도는 역효과를 불러오기 딱 좋았다. 일단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놔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너나 네 친구들이 쓰레기같이 살고 싶다는 거 안 말려. 남의 돈으로 뭘 하든지 말든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하는데, 지한이는 거기 끼게 하지 마. 그게 그렇게 어려워?”
“야, 이시우. 너 말은 똑바로 해라. 우리 중에 저 새끼가 제일 사고 많이 쳤거든?”
지한은 레오를 뜨악하게 쳐다보았다. 저 새끼가 맞은 지 오래돼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그러니까!”
시우가 언성을 높였다. 사실상 고함이었다. 지한은 이제 자신이 왜 시우를 불렀던 가에 대해 생각했다. 쉬는 날이라니까 밥이나 같이 먹을 겸, 그리고 눈치 없는 친구를 포기시킬 겸 부른 것이었다. 결코 남의 업장에 들어와서 지랄이나 하는 꼴을 보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예 건드리지 말라고. 멀쩡하게 살아보겠다는데 끌어들이는 게 친구야? 너희들이 그러고도 친구라고 할 수 있어?”
룸 안에 시우의 얕은 숨소리만 감돌았다. 몇 번에 걸쳐 호흡하는 속도를 낮춘 시우가 차분하게 경고했다.
“내 허락 없이 우지한한테 연락하지 마.”
레오는 대답하지 않고 지한을 쳐다보았다. 대체 시우 새끼 뭔 약을 처먹고 저 지랄이냐고 묻고 싶은 눈빛이었다. 지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시우가 지한의 손목을 잡았다.
“가자.”
시우의 손에 잡힌 자신의 손목을 한 번 내려다본 지한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시우의 손에 이끌려 룸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그들을 부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지만 함께 먹으려던 밥은 먹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 지하철로 환승해 다시 한참을 가는 내내 시우는 지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마디도. 지한이라고 별로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들이 사는 아파트는 역에서 10분 이상을 걸어야 나왔다. 어째 오전보다 더 거세어진 것 같은 바람을 뚫고 걸으며, 지한은 괜한 짓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레오는 예전부터 지한에게 금방 그만둬도 좋으니 심심풀이 삼아 한 번만 가게로 나와 일해보라고 꼬드기던 녀석이었다.
이번에는 지한이 하는 일도 없다고 하니 작정하고 설득하려는 것 같았는데, 솔직히 그냥 참았어도 될 것을 귀찮단 핑계로 시우까지 끼어들게 했다. 하지만 시우가 쓰레기 어쩌고 하는, 자기 딴엔 굉장히 심한 소리까지 했으니 당분간은 성가신 연락을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분간. 언젠간 다시 연락이 올 것이란 소리였다. 지한이 돈을 벌려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끝나지 않는 한. 지한을 욕심내는 친구는 레오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누구는 클럽에서 일해보자 했고 누구는 속옷 모델을 권유했다.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그들은 꾸준히 지한의 의사를 물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지한이 그들보다 약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꾸준히 귀찮게는 해도, 일단 지한이 싫다는데 위협적으로 굴거나 강제로 뭘 시키려 들진 않았다. 지한이 덜 크고 덜 센 남자였다면, 그러니까 한 시우 정도의 남성이었다면 상황은 훨씬 더 골치 아파졌을 것이다.
시우가 지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지한이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신호가 바뀌었다. 지한은 얼른 시우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지한의 친구 중 누구도 시우에게는 뭔가를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
왜지. 지한은 말없이 걷는 데에 열중한 시우의 옆모습을 관찰했다. 한평생 붙어살아 온 상대의 얼굴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결코 못생기진 않았다. 어디 하나 빠지는 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여자들은 지한보다 시우를 더 선호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이시우 인생의 오점은 부모가 아니라 너야, 너. 너만 아니면 멀쩡히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았을 거라고. 지한의 면전에 대놓고 그런 용감한 소릴 한 여자도 있었다. 그걸 왜 그냥 내버려 뒀더라. 한참 지난 일인 데도 지한은 짜증을 느꼈다. 물이라도 끼얹어 줬어야 하는데.
“왜?”
“응?”
“아까부터 왜 자꾸 쳐다봐.”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을 때였다. 시우가 걸음을 멈추고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지한은 눈썹에 힘을 줬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적반하장이었다.
“안 쳐다봤어.”
“지한아.”
“아 왜.”
아, 기억났다. 시우를 좋아했던 그 여자에게 어째서 물 한 잔도 끼얹어주지 못했는지. 여자나 애 때리고 들어오는 날에는 경찰서든 감옥이든 찾아가주지 않을 것이라고, 시우가 늘 지한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기 때문이다. 그 주제가 시우의 입에 오를 때마다 지한은 엄청 화를 냈다. 지한은 여자도, 애도 때리고 싶지 않았다. 때린 적도 없었다.
남자도 사실 안 때릴수록 삶이 편해질 것임은 알았다. 이 세상에 살아 숨 쉬는 모든 남자를 때리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살다 보니 어딜 가나 강해 보이는 상대를 질투해 굴복시키고 싶어 하는 인간들이 있었고, 그런 인간들일수록 상대의 약점을 찾지 못해 안달하다 진짜로 돌아버리기 일쑤였는데, 지한의 앞에 나타난 그런 새끼들이 죄다 남자였던 것에 불과했다.
“머리 아프면 좀 쉬어.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뭔 소리야.”
“돈 몇 달 안 벌어 와도 되니까 애먼 짓 하지 말란 말이야.”
지한은 점퍼 주머니 안의 주먹을 폈다 오므렸다. 휴대폰 말곤 잡히는 것이 없었다. 담배, 담배가 없었다. 담배라도 있어야 떳떳하지 못한 기분이 조금이나마 사그라질 수 있었다.
시우는 지한이 애먼 짓을 하느니 집 안에 조용히 붙어있길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애먼 짓은 이미 했다. 호스트로 뛰는 것이 소현과 만나는 것보다는 더 안전했을 수도 있다. 남편이야 자식이야 신경 쓸 일이 산더미인 사모와 놀아났다면 적어도 배역을 빼앗기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무슨 애먼 짓. 내가 뭘 어쨌는데.”
“아니, 안 했지. 그러니까 앞으로도 하지 말자는 거고.”
“…….”
“알았지?”
지한의 손과 마찬가지로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던 시우의 손이 밖으로 나왔다. 지한은 시우가 얼굴로 손을 뻗는 줄 알았다. 환한 대낮에 밖에서 남의 뺨을 쓰다듬으려는 것인가 하고 피할 준비까지 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시우의 손은 지한의 팔뚝을 두어 번 건드리고 멀어졌다. 잘 부탁해, 우리 이번엔 꼭 잘해보자. 꼭 그리 말하는 동작 같아 지한은 면목이 없어졌다.
진동이 느껴졌다. 지한은 오므리고 있던 주머니 안의 손을 폈다.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꺼내서 화면을 확인하려는데 진동이 끊어졌다. 언제부터 울리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 담배 사서 들어갈게. 먼저 올라가.”
다행히 미심쩍어하지 않고 돌아선 시우의 뒷모습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것까지 본 뒤, 지한은 부재중 목록을 눌렀다. 모르는 번호였다. 일단 시작하는 숫자는 일반 휴대폰 번호와 같았다.
도경일까.
아직까지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 수시로 신경을 갉아먹고 있던 차다. 도경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지한은 거의 1초 만에 소스라쳤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해야 되는 건데? 그는 상식적이지 못한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도경이든 아니든 급하면 저쪽에서 다시 전화를 걸어와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마트에서 산 담배를 들고 상가 뒤편으로 갈 만큼의 시간의 흐른 뒤에도 휴대폰은 새로 진동하지 않았다. 지한은 불과 몇 분 전에 자신이 했던 다짐을 잊고 다른 가능성에 몰두했다. 그가 다른 일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해서 다시 전화하지 않고 있는 것이면?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대체 부재중 전화 한 통으로 왜 이렇게까지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욕이 육성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던 그때, 휴대폰 화면색이 바뀌며 수화기 아이콘이 떴다. 한 손에 담배를 든 채 다른 한 손으로 부재중 번호가 뜬 화면이 띄워진 휴대폰을 들고 있다가 통화 버튼이 눌러진 것이었다. 좆같네, 진짜. 끝내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보니 그새 화면 상단에 통화시간을 알려주는 숫자가 떠있었다. 이미 통화가 연결된 후였다. 지한은 급히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지한 씨?
누구 핸드폰 맞나요, 하는 절차는 없었다. 바로 이름을 불러왔다. 지한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입을 벙긋거렸다.
“전화해서. 아니, 전화했잖아요. 나한테.”
말하면서도 완전히 자신이 있진 않았다. 99프로는 도경의 목소리로 들렸지만 혹시나 잘못 들었을 1프로의 확률이 존재했다. 어쩌다 보니 따지듯 다다닥 쏟아낸 지한의 인사 아닌 인사말에 잠시 침묵한 상대방이 조용히 말했다.
―네. 제가 했는데 안 받으셔서 끊었어요. 바쁘신 것 같아서.
1프로가 날아갔다. 100프로 도경이었다. 지한은 급히 부정했다.
“아니 안 바쁜데.”
그렇게 말해놓고 끝에 작게 요, 하고 덧붙였다. 덧붙이고 나니 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한은 말투 같은 것에 신경 써 본 적이 드물었다. 스스로의 말투가 어떻다는 자각도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알아차리기도 전에 혀가 알아서 움직여버리니 기분이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하는 중이셨어요?
정작 도경은 지한이 반말을 하든, 존댓말을 하든 똑같은 말투를 썼다. 술을 마시러 갔을 때도 그랬었다. 일일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랬던 것 같다. 지한이 되는 대로 지껄여도 도경은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 예의 바르고 차분했다.
“담배 피우러 나왔어요.”
지한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쳐다보며 말했다. 불붙지 않은 담배가 새하얬다.
―지금 밖에 춥지 않아요?
“뭐. 좀. 네.”
그렇게 춥지 않단 뉘앙스로 대답하자마자 코끝이 간질간질했다. 설마, 하는 의심이 끝나기도 전에 기침이 나왔다. 휴대폰 저편에서 약하게 웃는 소리가 전해졌다. 처음 듣는 도경의 웃음소리였다. 웃는 얼굴은 봤어도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워낙 소리 없이 웃어서 그랬다.
처음이라며 놀라워하기엔 지금까지 그와 제대로 대화해본 자리가 딱 한 번뿐이었지만.
―죄송해요. 기분 나쁘지 않으셨죠?
죄송하다는 말을 참 잘하는 남자였다. 그래서 싫다는 게 아니라 좀 신기했다. 지한의 삶 안에 들어와 있는 남자들은 그 말을 하기 싫어 고집을 부리다 경찰이 올 때까지 싸우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 자신을 포함해서.
“안 나빠요.”
―제 친구도 그러더라고요. 엄청 추워도 담배 피우러 밖으로 나가서 가끔 놀라요.
지한은 저도 모르게 담배가 끼워진 두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야 수없이 봐왔다. 도경은 지한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도 전혀 멀찍이 떨어지려 하지 않아서 미처 싫어한다고 생각을 못 했다.
“내 담배 냄새 싫었겠네요.”
지한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가차 없는 비난을 날렸다. 그게 아니지 멍청한 새끼야. 이럴 때 죄송하다는 소리를 하는 거라고.
―괜찮아요. 지한 씨는.
“예?”
―지한 씨 담배 냄새는 괜찮던데요. 별로 안 역하고.
괜찮다니 다행이란 안도감보다 의아함이 조금 더 컸다. 도경의 말은 마치 담배 냄새에도 괜찮은 것이 있고 안 괜찮은 것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럴 수도 있나? 지한이야 모를 일이었다.
―담배마다 냄새가 다른가?
지한의 담배는 모두가 담배 하면 떠올리는 일반 담배였다. 한때 유행했던 과일 향 담배 따위와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니코틴이나 타르가 낮지도 않았다.
“아닐 거 같은데요, 그건.”
―그래요? 제가 잘 몰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어요. 전 담배 안 피우니까.
할 말이 바닥났다. 이제 왜 아까 전화했던 거냐고 물어보면 되는 건가. 그래서 답변을 듣고 나면 통화가 끝나는 거고. 지한의 다리가 알아서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담배에 불부터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도경이 먼저 주제를 바꾸었다.
―오늘은 안 나가셨나 봐요.
“아까 나갔다가 지금은 집 앞.”
―오늘 같은 날은 오토바이 타면 힘들지 않으세요? 바람이 심해요.
그랬지. 그랬었다. 도경에게 번호를 주면서 지한 자신의 입으로 오토바이 타고 싶을 때 연락하란 식의 멘트를 날리지 않았던가. 이제와 곱씹자니 촌스럽고 어설프고 아무튼 형편없는 부분들을 모아서 만든 수작처럼 들렸을 것 같지만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길은 없었다.
그리고 도경은 믿어주지 않겠지만, 지한에게 정말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경이 타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평소처럼 머릿속에서 말이 정리되기 전에 입부터 열리는 바람에 그리된 것이었다.
“안 탔어요, 오늘은.”
―잘하셨네요.
“어……. 네. 뭐.”
―그럼 언제 또 타세요?
오토바이 뒷자리에 한번 타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있었다. 서른 먹은, 말끔하다 못해 반질반질하게 생긴 직장인이 처음일 뿐이었다. 게다가 도경은 소현의 친구였다. 정장을 입고 다녀 직장인이라 칭했지만 실상은 어디 회장 아들쯤 될 것이다. 그런 남자를 뒤에 태우고 달려도 별문제가 없을지, 지한은 잠시 고민했다.
“날씨 좋을 때?”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사실 시작됐을 때부터 겉핥기식 고민이었다. 지한에겐 안 된다고 할 마음이 없었다. 안 된다고 하는 순간 도경과의 다음 만남이 불투명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러면 날씨 좋을 때 지한 씨가 먼저 연락해 주시는 거예요?
“네.”
도경이 웃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웃음이 멎어들었다. 도경은 평소보다 더 작게, 그래서 꼭 속삭이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로 말했다.
―기다릴게요.
통화가 끊어졌다. 담배를 입에 문 지한은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라이터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새 담배를 던지고도 남았을 상황이다. 그는 새 담배를 도로 갑 안에 집어넣었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