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Tackle (10/38)

  10. Tackle

#23

오토바이 정비소가 있는 블록엔 그 흔한 카페 하나가 없었다. 지한의 오토바이에서 손봐야 할 곳은 몇 군데 난 흠집과 찌그러진 번호판이 다였지만 먼저 온 손님 때문에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12월의 거리에서 버티고픈 시간은 아니었다.

지한은 정비소 옆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불과 몇 미터 차이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대로변과는 다른 세상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은커녕 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날씨 탓이 클 것이다.

지한이라고 딱히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일하러 나갈 곳도, 호출해줄 사람도 없는 그는 그냥 얌전히 집이나 지키다 상사의 차를 얻어 타고 귀가한 시우나 맞아주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랬는데 굳이 옷을 꾸역꾸역 껴입고 서울까지 왔다. 오토바이 뒤꽁무니 꼴이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다. 번호판을 언제 찌그러트렸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일 년 안팎의 일이었단 것만 기억났다. 그따위 것도 번호판이라고 달고 다니다니 참 남들이 보기에 없는 놈 같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 도저히 하루도 두고 보고 싶지가 않아져 그 길로 끌고 올라왔다.

오랜만에 나타나 오토바이 수리를 맡기자 보육원 동기는 드디어, 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지한을 대견해 했다. 평생 남들 시선은 신경 안 쓰고 살 줄 알았더니 ‘드디어’ 매일 타고 다니는 이동수단의 꼴을 살필 만큼 철이 들었냐는 것이었다.

지한은 코웃음 쳤다. 체육관 놈들이 일확천금의 꿈에 빠져있다면 보육원 놈들은 평범한 어른의 꿈에 빠져 있었다.

가망 없긴 양쪽 다 마찬가지였지만 하나만 고르라면 후자가 조금 더 헛된 꿈이었다. 평범한 어른이라니. 그들에겐 평범함도 어른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멀쩡한 부모 밑에서 자라 비슷한 사람과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며 어른이 되는 일반인들 흉내를 내려고 하니 사진만 봐도 기억을 다 도려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만.

이득은 없고 실만 있는 생각을 강제로 멈춘 지한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낡은 영수증과 휴대폰 말곤 잡히는 것이 없었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목도 말랐다. 그는 좁은 골목길을 두리번거렸다. 저 끝에 작은 편의점 하나가 보였다. 발걸음이 알아서 빨라졌다.

초라한 골목 끝에 위치한 점포치곤 제법 넓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식사대에 사람이 있는지를 살폈다. 남자 한 명. 나쁘지 않았다. 시끄럽게 굴지만 않는다면 누가 옆에서 뭘 하든 관심 없었다.

계산을 마친 지한이 담배와 캔을 들고 식사대로 걸어올 때까지 먼저 와 서있던 남자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휴대폰에 집중하느라 누가 자길 쳐다보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남자가 차지한 식사대 자리 위엔 뜯어진 과자 봉지 이외에도 뜯지 않은 박스가 서너 개 쌓여 있었다. 남이 음식을 낭비하든 말든 그 또한 관심 없긴 한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눈이 착각했을 경우를 대비해, 지한은 남자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양털인지 뭔지 하여튼 푹신해 보이는 후드티를 입은 남자의 손목엔 부담스럽게 번쩍거리는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키는 지한보다 작았지만 왜소하진 않았다. 다리도 길고, 어깨도 그만하면 좁지 않고. 턱도 제법 남자답고. 처음 봤을 때도 어디가 부족해 보였던 건 아니지만, 확실히 입을 다물고 있는 쪽이 훨씬 나았다.

확실한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대체 이 추레한 골목에서 혼자 뭘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지한과 같은 편의점 안에 있는 남자는 소현의 사촌 동생이었다.

지한은 캔을 식사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이안이 고개를 틀어 뒤를 보았다. 식사대 위에 놓인 캔에서 그것을 잡고 있는 손으로, 손에서 다시 팔로 옮겨 가던 시선이 드디어 얼굴로 올라왔다.

“헉.”

지한을 알아본 이안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는 것으로 모자라 뒷걸음질까지 치다 그대로 자빠질 뻔했다. 식사대를 붙들어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은 그는 지한이 비웃지도 않았는데 혼자 하, 하하, 하고 하나도 안 웃기게 들리는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 하하.”

“…….”

“……음, 네. 안녕하세요.”

아는 얼굴이라 온 것도 맞고, 인사를 받았으면 돌려줘야 하는 것도 맞았는데 막상 같이 안녕하시냐고 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잘 모르는 사이에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이렇게까지 자주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던가? 도경은 그렇다 치고 이안까지?

“저…… 저 기억 안 나세요? 소현이 누나 사촌 동생.”

별장에서도 비슷한 소리를 하더니 또 기억 안 나느냔 소리였다. 지한은 캔을 따며 대꾸했다.

“나요. 강이안.”

“오, 네, 맞아요!”

갑자기 높아지는 이안의 목소리에 아르바이트생이 식사대 쪽을 살폈다. 지한의 기분이 한층 더 이상해졌다. 이름을 기억하는 게 그렇게까지 호들갑을 떨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 이안의 행동은 호들갑이 아니라 꼭.

“그, 어, 여기서 일하시나 봐요?”

나쁜 짓 하다 들킨 놈 같았다.

“아니요.”

“아하.”

아하, 라니. 점점 더 이상했다. 한꺼번에 밀려 들어간 탄산 때문에 식도가 미치게 따끔거리지만 않았다면 이안이 나쁜 짓을 하고 있었다는 확신에 빠져 당신 뭐 잘못한 거 있냐는 소리를 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액체를 다 삼키고 나서도 따가운 목구멍 덕분에 강제로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헛기침한 지한은 자신의 시각이 너무 편협했을 가능성을 고려했다. 누가 아는가. 이런 동네에 이안의 회사가 있을지.

“회사가 근처?”

“아― 아니, 그런 거는 아니고……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잠깐. 이 동네에.”

역시 이안이 이런 후줄근한 동네로 출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가설이었다. 볼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과자를 쌓아놓고 휴대폰에 열중하는 것이 대체 볼일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까지는 지한의 머리로 짐작이 되지 않았다.

어느새 지한과 마주 보고 서게 된 이안이 웃는 척을 했다. 누가 봐도 억지로 웃는 척하는 표정이었다. 이상했던 기분은 이제 아리송하게 바뀌었다. 붙든 것도 아닌데 자리를 뜨지 않고 엉망진창인 연기를 계속하는 까닭이 궁금했다.

지한은 콜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콜라 마시는 게 뭐 그리 보기 힘든 광경이라고 한시도 눈을 떼지 않던 이안이 지한의 눈길에 하하, 하고 또 어설픈 소리를 냈다. 멍청한 건지 순한 건지 모를 남자였다. 도경과 어떻게 친한 사이인 것인지는 더더욱 모를 남자였고.

가만. 눈앞에서 어디 모자란 것처럼 굴고 있는 남자가 도경과 친한 사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가짐이 약간 달라졌다. 지한은 아직까지도 도경과 술을 마신 뒤 자신의 룸으로 올라갔다던 정체불명의 일행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안이라면 미스터리로 남았던 그 일행의 정체를 밝혀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 나아가선 본인이 바로 그 일행이었을 수도 있고.

“혹시 지난주 월요일에 술 마셨어요?”

“예? 예 저요? 월요일 뭐라고요?”

또 저질렀다. 다짜고짜 머릿속에서만 있어야 하는 말을 소리 내어 해버리기. 다행히 이안은 지한의 뜬금없는 질문에 불쾌해하지 않았다.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지난주 월요일에 호텔에서 술.”

“아니요? 안 마셨는데요!”

아르바이트생이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몇 초간 이안과 지한이 있는 쪽을 주시했다. 지한은 목소리를 낮췄다.

“왜 소리를 질러. 누가 보면 내가 때리는 줄 알겠네.”

깜박, 깜박. 일정한 속도로 눈을 깜박인 이안이 덩달아 작게 말했다.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반말해요?”

지한의 입이 의지와 관계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걸 사람들은 보통 비웃는 소리라고 불렀다.

“몇 살인데.”

“우지한 씨보다는 많아요.”

“내가 몇 살인지는 어떻게 알고.”

“도경이 형이 말해줬어요.”

핑퐁처럼 오가던 대화에 잠시 브레이크가 걸렸다. 지한은 이안이 한 말을 곱씹었다. 도경에게 지한의 나이를 들었다고? 그러니까 도경이 이안에게 지한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인데, 좋아야 하는지 싫어야 하는지가 헷갈렸다.

“둘이 만나서 내 얘기해요?”

“아 당연히 다른 얘기도 많이 하는데! 그니까…… 잠깐 우지한 씨 얘기가 나와서. 네. 암튼 저 우지한 씨보다 나이 많으니까 반말하지 마세요.”

이안이 눈을 부릅떴다. 겁을 주려고 한 것이었다면 전혀 효과가 없었다.

“권도경 씨한테 형이라고 하지 않나.”

“네. 그렇죠. 왜냐하면 도경이 형이 저보다 나이 많으니까.”

“그 사람은 나한테 뭐라고 안 하던데.”

“뭘 뭐라고 안 해요?”

지한은 차가운 캔을 꽉 쥐었다 폈다.

“내가 지금처럼 말해도 뭐라고 안 한다고.”

다시 대화가 중단되었다. 조금 전의 기세로 봐선 뭐 어쩌라는 거냐고 따지고 들 것 같았는데, 갑자기 조용해진 이안은 지한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지한은 그런 이안을 보며 마주칠 때마다 분위기가 바뀌는 신기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장례식에서의 첫인상은 굉장히 지루해 보인다는 것이었고 별장에선 밝지만 조금 맹한 데가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세 번째 인상은 또 약간 달랐다. 여전히 맹해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안이 지한을 안 좋아한다는 느낌은 받은 적 없었다. 좋고 말고 할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오늘의 이안은 지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동네에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안이 아,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허둥지둥하던 그는 뜯어놓은 과자 봉지를 들고 돌아섰다. 미개봉 상태의 작은 박스들은 그대로 식사대 위에 있었다.

“저기 이거. 과자.”

“가져요!”

끝내 아르바이트생의 눈총을 한 번 더 받은 이안이 쏜살같이 문을 열고 나갔다. 밖으로 나간 그는 정비소가 있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까지 본 지한은 식사대 위를 쳐다보았다. 이안이 두고 간 박스들은 총 넷이었다. 개중엔 진한 핑크색 꽃 같은 문양이 찍힌 것도 있었다. 저것들을 가지라고? 짜증이 솟구쳤다. 누굴 거지 취급하나. 지한은 상자들을 구석으로 밀었다. 기분이 아주 살짝 나아졌다.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려 받은 오토바이는, 새것 같진 않아도 이제 더 이상 폐차장에서 주워온 쓰레기로 보이지는 않았다. 재룟값만 받은 보육원 동기는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지한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언제 시우랑 다 같이 한번 보자. 지한은 대답하지 않고 헬멧을 뒤집어썼다. 거짓말보단 무응답이 나았다.

해가 일찍이 졌다. 도로뿐 아니라 인도에까지 사람이 많았다. 움직이지 않는 차들 사이로 빠져나와 달리다 보니 어느덧 시우의 호텔 근처였다. 습관이 그를 자주 달리던 도로로만 인도한 결과였다. 지한은 방향을 틀었다.

도심 한복판의 강가는 시내 중심가보다 한산했다. 낮은 기온 탓도 있겠고, 많은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시작하거나 준비하고 있을 시간대 탓도 있었다. 지한은 자동차 통행로 옆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잠시 숨을 돌렸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꼬맹이가 그의 앞을 지나며 제 부모에게 조잘댔다. 아빠와 엄마 사이에 낀 아들.

체육관에 다니던 시절 지한과 그의 친구들은 하라는 운동 대신 한강으로 와 시간을 때운 적이 많았다. 어떤 때는 오토바이를 탔고 어떤 때는 술을 마셨다.

집이 좀 사는 놈이든 못 사는 놈이든 ‘어릴 때 가족들이랑’ 한강에 와본 적 있다는 소리들은 빼놓지 않고 했었다. 남들이 예상하는 것만큼 사무치게 부럽거나 하진 않았다. 뭐든 있어 봤어야 상실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가족을 가져본 기억이 없으니 그리움을 느낄 대목도 없었다. 불편함은 느꼈다. 가족이 있었으면, 집이 있었으면 그리고 돈이 있었으면. 지금보다 훨씬 편하게 살았을 텐데.

불평할 자격이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적어도 지한에게는 시우가 있었다. 먹고 살기는 하니까. 거리에서 자진 않으니까.

그렇다면 가족이 있고 집이 있으며 돈이 있는 사람들은 다 편하게 살아갈까, 또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말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예를 들어 도경 같은 사람도 삶의 어느 대목에서인가는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소현도 그랬으므로. 잊지 말아야 했다. 소현이 사실은 다중인격자처럼 화를 냈다 웃었다 하는 여자였듯 도경에게도 반드시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면이 있으리란 것을.

어찌 보면 지한은 도경이 완벽하지 않기를 바라야 맞는 것일 수도 있었다. 허술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나중에 지한에게 도움도 주고 할 것 아닌가. 머리까지 100프로 완벽하게 가동하는 인간이라면 몇 년을 기다려도 지한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휴대폰을 꺼냈다. 새로운 메시지가 지한을 반겼다. 아직도 지한의 영입을 포기하지 않은 레오였다. 지한은 그 메시지를 읽지 않고 스크롤을 내렸다. 도경과는 주고받은 메시지가 없으니 대화창 자체가 아예 없었다.

친구 목록을 누른 지한은 의미 없이 목록만 오르락내리락했다. 권도경. 기역 자로 시작하는 이름 세 글자만 나열된 정직한 계정명 옆의 프로필 사진은 어느 나라인지 모를 해외 풍경이었다. 사진을 누르자 뒤로 배경 사진이 크게 떴다. 사진 속 장소는 레스토랑이나 카페로 보였다. 하얀 식탁보 위에 또 다시 하얀 접시가 놓여 있었다. 접시 위에는 연한 빛깔의 이름 모를 과자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지한은 휴대폰에 얼굴을 들이댔다. 잎이 다섯 개 달린 연분홍색 과자는 아무리 봐도 벚꽃을 흉내 낸 모양이었다. 이걸 직접 찍어서 배경으로 설정했다고, 권도경 그 남자가……? 식탁보도 접시도 의자도 다 하얀 카페에 앉아 디저트 사진을 찍는 도경이라니, 어쩐지 웃겼다.

사진 구경을 끝낸 지한은 도경의 이름 밑에 뜬 번호에 눈길을 빼앗겼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지난주 월요일이었다. 한 주가 지나 금요일이 되었으니 거의 이 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날을 따지고 있자니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인놀음을 하는 기분이었다. 저번에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었다. 현실은 친구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었지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는 애매한 사이. 그 정도.

여하튼 연락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전화가 하고 싶으면 번호를, 메시지가 하고 싶으면 채팅 버튼을 누르면 그만이었다. 지한의 엄지가 전화번호와 채팅 버튼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전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바로 할 말을 생각해내 매끄럽게 입 밖으로 내는 것이 힘든 지한에겐 별로 좋은 수단이 아니었다.

결국 지한은 채팅 버튼을 눌렀다. 텅 빈 대화창이 떴다. 휴대폰을 만지느라 라이더용 장갑을 벗고 있었더니 손가락이 얼어붙기 직전이었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 방법 따위나 궁리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 말하는 거 기분 나빠요?]

텍스트를 치고 나서 보니 뉘앙스가 별로인 것 같기도 했다. 1이 사라지지 않았을 때 지워버리고 다시 말을 거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마음만큼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네?]

게다가 벌써 답장이 와버렸다. 도경이 그렇게 메시지를 빨리 볼 줄은 정말 몰랐다. 에라. 어차피 말해버린 이상 궁금했던 것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지한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으로 힘겹게 화면을 눌렀다.

[그래서 내가 몇 살인지 말한 거 아닌가]

즉흥적인 대화에 능숙하지 않으므로 전화를 피한다는 전략은 쓸모가 없었다. 지한은 문자로 대화할 때도 결코 말을 잘하지 못했다.

휴대폰 화면이 까맣게 변하며 번호가 떴다. 도경으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다.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장이 온 것보다 더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여보세요.”

―무슨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서 전화 드렸어요.

인사도 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도경의 말투는 최고로 깍듯했다. 동시에, 그 어떤 때보다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제 말은 몇 살인지 말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순식간이었다. 지한은 아직 뭐라고 해야 할지 결정하지도 못했는데 도경의 목소리는 그새 바로 차분해져 있었다. 도경이 화라도 냈으면 정말 곤란할 뻔했다. 지한의 대응 능력은 상대가 화를 낼 때 최악으로 떨어졌다.

“그게 뭐냐면…… 아까 그 사람 만났는데요. 그, 있잖아요. 이안인가.”

―걜 만나셨다고요? 지한 씨가?

“만나기로 하고 만난 게 아니라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아.

감탄도 아니고 탄식도 아닌 소릴 끝으로 잠시 침묵하던 도경이 그래요, 하고 단조롭게 대꾸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곧잘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그쪽이 나 몇 살인지 말해줬다고.”

―아. 그건.

“그리고 나보고 왜 반말하냐고도 했고요. 그래서 혹시 음. 그쪽도 기분 나빴나 물어본 거예요.”

지한과 시우의 옷을 망가트려 놓는 놈의 이름을 원장에게 발설하던 어린 보육원생으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흡사하지만 결코 똑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원장에게 혼나는 보육원생을 보고 서있어야 했을 땐 속이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권력자에게 붙기 위해 동지들을 버린 배신자가 된 것 같아 찝찝했었다. 지금은 달랐다. 찝찝함은 극히 적고 시원함은 컸다.

―걔가 그래요? 제가 기분 나빠서 지한 씨 나이를 알려줬다고?

“아니요. 그렇게 말한 건 아니고.”

―전 기분 나빴던 적 없어요.

시원하다는 표현만으론 부족했다. 이제 지한은 우쭐한 기분까지 들었다.

“알았어요. 그럼 됐어요.”

―그게 끝이에요?

“기분 안 나빴다면서요.”

최선의 답변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강가와 겨울의 조합으로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 때문에 머리가 평소보다 배는 느리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한은 자유로운 왼손이라도 급히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바람 소리.”

―지금 어디신데요?

“말하면 나오게요?”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고 있다 한들 방금 한 말은 집중력 핑계를 대기 민망했다. 무의식적으로 나온 본심에 가까웠다. 본심이 뭐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해본 말,”

―어디신지 아직 말 안 해주셨어요.

도경이 지한에게 지금 어디냐고 묻는 이유는 왠지 만나고 싶어서가 아닐까, 라고 의심했다는 것 정도.

“한강이요. 반포. 그, 섬 있는 쪽.”

―저 지금 퇴근길이니까 거기로 갈게요. 밖에 많이 추워요?

정말로 오겠다고 하는 도경의 태도가 너무 스스럼없어 놀라웠다. 강풍이 정통으로 지한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정신을 차렸다.

“엄청.”

―어디 들어가 계세요. 차 막힐 것 같으니까.

“그냥 밖에 있을게요. 들어갈 데도 없고.”

―그럼 제가 빨리 갈게요.

퇴근 시간대의 정체는 개인이 서두른다고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알면서도 왠지 도경이 그렇게 말한다면 현실로 이루어질 것처럼 느껴졌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지한은 장갑을 꼈다. 이어서 헬멧도 썼다. 도경이 빨리만 온다면 얼마간은 버텨볼 자신이 있었다.

10분이 지나갈 때부터 목도리를 감지 않은 목의 피부가 따갑다 못해 아파오기 시작했고, 20분이 지나가면서부터는 신발과 양말로 두 번 감싸인 발끝이 고통을 호소했다. 설상가상으로 낡은 보호필름이 맛이 갔는지 헬멧 실드에 서리가 조금씩 끼는 것 같았다. 지한은 헬멧을 벗었다. 갑작스레 맞닥트린 바람에 눈이 절로 찡그려졌다.

경주하듯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들 뒤로 까만 차 한 대가 나타났다. 매끄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자가용은 부드럽게까지 들리는 엔진음을 내며 다가왔다. 긴 송곳니를 드러낸 고양잇과 동물의 얼굴 엠블럼을 단 차가 바로 앞에서 속도를 줄이기 전부터, 지한은 그 차의 운전자가 도경일 것이라 짐작했다.

“늦었죠, 죄송해요. 얼른 타세요.”

짐작은 맞았다. 운전석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오늘도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머리가 잘 어울리는 도경이었다. 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금요일 저녁이란 점을 감안하면 절대 늦지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얼른 타라니까 조수석에 올라타기는 했는데, 막상 타고 나서 보니 밖에 있는 오토바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지한은 운전석 쪽을 쳐다보았다. 도경이 백미러로 뒤에 오는 차가 없는지를 살피며 말했다.

“거의 2주 만이잖아요.”

“아. 네. 그렇죠.”

“식사하셨어요?”

“아니요.”

“같이 저녁 먹을까요?”

지한은 다시 창밖의 오토바이를 쳐다보았다. 도경의 차를 타고 이동한다면 오토바이는 영락없이 한강에 두고 갔다 와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자니 도경이 여기까지 지한을 데려다주러 또 와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한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경의 차를 따라가겠다고 하자니 그건 그것대로 폼이 안 났다. 쉽게 끝나지 않는 고민을 이어가고 있던 와중 지한이 어딜 보고 있는지 알아차린 도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거 다른 사람이 잠깐 몰아도 돼요? 더 편한 데로 가져다 놓게요.”

“상관없긴 한데, 다른 사람 누구를.”

“잠시만요.”

도경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지한은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리는 도경의 옆모습을 구경했다. 휴대폰을 쥔 손등에 힘줄이 솟아나 있었다. 힘줄 옆으로 희미하지만 색깔은 구분되는 푸른 핏줄들도 보였다.

솟아난 힘줄과 손가락을 연결하는 손등 뼈마저 억세단 느낌보단 그냥 다듬은 듯 보기 좋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났다. 뼈나 힘줄은 다듬을 수 없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지한은 구경이 아닌 감상을 하고 있었다.

“응, 난데. 혹시 오토바이 몰 줄 아는 사람 있어? 너 말고. 거기 스태프 중에 지금 브레이크인 사람 있을 거 아냐.”

볼륨이 낮아 도경의 통화 상대가 말하는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걸어서 10분이면 올 것 같은데. 알아, 그건 내가 잘 챙겨줄게. 알았어.”

그것으로 짧은 통화는 끝났다. 휴대폰을 재킷 앞주머니에 넣은 도경이 지한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만 기다릴까요? 금방 온대요. 지한은 누가 온다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알겠다고 했다.

오디오에서 음악이 재생되었다. 이제 막 튼 것이 아니라 지한이 조수석에 올라타기 전부터 줄곧 재생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도경이 소리를 줄여놨다가 다시 키운 듯했다. 보통 소음은 어색한 공기를 희석시켜 주지만 이 경우는 딱 그 반대였다. 도경의 차 스테레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가사도, 베이스드럼도 없는 클래식이었기 때문이다.

클래식은 지한을 힘들게 만들었다. 살면서 몇 번씩은 꼭 들어본 멜로디를 연주하는 현악기 소리를 들을 때면 단순한 답답함을 넘어서 사방에 날카로운 물체가 달린 방 안에 감금된 것처럼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음악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많은 사람들이 특정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이 문제였다.

클래식을 들을 때마다 반강제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반짝이는 식기.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로 갈수록 넓어지는 잔 밑바닥에 깔린 붉은 술. 좋은, 특이한, 때로는 독한 향을 풍기는 사람들. 웃는 사람들. 잘 사는 사람들. 잘 살아서 잘 웃는 사람들. 속사정이 어쨌거나 죽을 때까지 지한보다는 더 행복할 사람들.

“이안이랑은 어디서 마주치셨어요?”

도경의 목소리가 잡념을 깨부쉈다. 지한의 입에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아. 아까 친구가 일하는 정비소에 갔었는데. 그 동네 편의점에서 봤어요. 그 동네에 볼일 있다 그러더라고요.”

“친구네 동네가 혹시 이 근처인가요?”

“아니요. 강서…… 그냥, 여기서 멀어요.”

도경이 눈썹을 살짝 늘어뜨렸다. 울상이라고 하기엔 약했지만 어쨌든 그 계열에 속하는 표정이었다.

“나쁜 애는 아니에요. 지한 씨한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큰 의미는 없었을 거예요.”

“신경 안 써요.”

사실은 불쾌했고, 더 나아가선 이안이 왜 갑자기 지한을 안 좋아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도경이 이안을 대신해 사과하는 모습은 길게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이안이야 앞으로 볼 일 없을 테니 잊으면 그만이었다.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 지한 씨 얘기 하고 다니는 것 같아서 저한테 전화하셨던 거 아니에요?”

“하고 다녀요?”

“그러고 싶어도 아는 게 없어서 못 하죠.”

지한은 입 안을 깨물었다. 툭하면 아무렇게나 말하는 스스로의 입을 차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콧속으로 단 냄새가 들어왔다. 도경의 향이 달라졌다. 아직 지난번의 그 향을 언제 어디서 맡아봤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는데. 아쉬웠다.

“뭐가 알고 싶은데요?”

수시로 백미러와 정면을 오가던 도경의 시선이 조수석으로 향했다. 지한은 어금니에서 힘을 풀었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 이가 얼얼했다.

“물어보면 알려주시는 거예요? 뭐든지?”

“알려줄 수 있는 거면.”

대꾸는 태연하게 했지만 지한은 긴장했다. 뭐든지, 라니 얼마나 대단한 것을 물어보려고 그러나 싶었다.

잠시 후 도경이 지한의 점퍼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브랜드 좋아하세요?”

긴장이 탁 풀렸다. 조금씩 올라간 눈매와 입술 끝이 웃음기를 잃지 않고 있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도경의 얼굴에서 농담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브랜드 같은 거 잘 몰라요. 이건 선물로 받은 거.”

“누가 준 선물이에요?”

지한은 애꿎은 소매를 잡아 뜯었다. 이미 도경을 만날 때 한 번 입었던 옷이었다. 날짜까지는 기억나지 않는 어느 봄날 소현이 지한에게 입혀놓고 이상하리만치 흐뭇해했던.

“친구.”

“친구…….”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도경이 약하게 웃었다. “여자요?”

하필이면 시우에게 온 연락인 줄도 모르고 여자냐고 묻던 호스트 자식이 떠올랐다. 지한은 진담과 농담을 전부 담아 답했다.

“왜 다들 내가 누구 얘기만 꺼내면 여자냐고 물어보는 건지.”

“정말 몰라서 그래요?”

도경이 눈을 한껏 위로 치켜떴다. 워낙 옆으로 길게 찢어진 것이 특징인 눈이다 보니 아무리 크게 떠도 동그래 보이진 않았다.

“여자들이 좋아할 것같이 생겨서 그런 거잖아요.”

여자들이 좋아하게 생겼다, 라. 목구멍까지 부정의 말이 차올랐다. 놀랍게도 지한은 남자에게 고백받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한의 귀에 대고 ‘한 번만 하자’고 속닥거렸다가 맞아 갈비가 나간 놈의 시비도 고백으로 칠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다. 여자들은 어려서나 커서나 지한에게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끊임없이 힐끗대는 것과 직접적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였다.

“여자가 준 거 아니에요?”

조금 더 정직해지자면 지한은 남자의 손에 속옷 안을 내준 적도 있었다. 내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액을 토해낸 적도…… 그는 손끝으로 허벅지를 눌렀다. 지금은 첫 경험의 추억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맞아요.”

“거봐.”

도경은 자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져서 즐겁기만 한 모양이었다. 그가 점퍼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마음이 복잡해지고 있는 지한과 다르게.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물어보세요.”

지금이었다. 소현과 얼마나 친했냐고 물어볼 절호의 기회. 도경도 대화의 흐름과 전혀 상관없는 주제로 질문을 던졌으니 지한도 똑같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도경과 나누는 대화가 소현을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 싫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죽은 사람이라 꺼림칙해서 그런 건지 뭔지. 그냥 싫다.

바깥에서 누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도경이 차창을 내리며 지한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도경의 입에서 뭘 달란 소리가 나오기 전에 지한은 알아서 오토바이 키를 흰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운전석 밖에서 웬 남자가 도경의 이름을 확인했다. 얼굴은 낯설었는데 그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낯설지 않았다. 쉬고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하고 말한 도경이 남자에게 현금을 건넸다. 반으로 접힌 지폐에선 금빛이 났고, 최소 두 장 이상이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도경에게서 돈을 받은 남자가 곧장 지한의 오토바이로 뛰어갔다.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타는 폼이 능숙했다. 지한은 남자의 유니폼이 낯익은 이유를 깨달았다. 시우가 일하는 호텔의 유니폼과 동일했다.

오토바이를 먼저 보낸 도경의 차가 앞으로 스르륵 나아갔다. 도경은 운전하는 자세조차 흐트러짐이 없었다. 공원을 빠져나오는 길목에서 교복 무리가 지나가며 안까지 다 들리게 차를 품평했다. 저거 1억 넘는 거야! 지한은 도경이 민망해할까 봐 운전석 눈치를 살폈다.

결론적으론 전혀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었다. 차주인 도경은 고등학생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아예 못 들은 사람처럼 앞만 보고 운전했다. 그러면 그렇지. 괜히 걱정한 지한 자신만 바보 같았다. 역시 도경도 어디 회장 아들인 것이 분명했다.

“물어보고 싶은 거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도경이 불쑥 말을 걸었다. 지한은 겨우 숨을 안으로 삼켰다. 하도 꿋꿋하게 정면만 보고 운전하기에 옆에 탄 사람은 안중에 없는 줄 알았다.

“……잊어버렸어요.”

“생각나면 말해주세요.”

“아, 맞다. 오늘은 내가 살게요.”

“그럼 지한 씨가 가고 싶은 데로 가요.”

최소한 피식거리기라도 할 줄 알았건만, 도경은 지한의 말을 전혀 우습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외였다. 그처럼 돈 많고 나이까지 지한보다 위인 사람들은 돈도 없고 나이도 어린놈이 계산하겠다고 나서면 그것이 자신들에 대한 도전이라도 되는 양 불쾌하단 식으로 반응했다. 다 그런지는 몰라도 지한이 겪어온 바로는 그랬다.

그는 잘못을 깨달았다. 도경을 다른 보통의 인간들과 비교하다니. 도경은 보통이 아니었다. 생김새든, 말투든, 표정이든.

“진짜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요? 별로 안 좋아할 텐데.”

“저 가리는 거 없어요. 다 잘 먹어요. 아, 육회 빼고.”

목소리든.

“그럼 마포 쪽으로 가요. 내가 길 알려줄게요.”

도경은 운전 중에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운전이 서툴러서는 아니었다. 그가 모는 차는 과속이나 급정거 없이 안정적으로 도로 위를 달렸다. 똑바른 자세로 운전에 집중한 도경은 대충 보면 화가 났다고 착각할 법한 얼굴이었다. 자세히 봐야만 도경의 입술 끝이 계속해서 미세하게 올라간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틈나는 대로 도경을 곁눈질한 지한은 당연히 알았다. 왠지 조금은 도경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조금은.

차 안에선 음악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래도 견딜 만했던 것은 플레이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넘어가면서부터였다. 그놈의 바이올린 소리만 없어도 훨씬 속이 편했다. 그러고 보면 소현의 차 안에서도 곧잘 클래식 곡들이 흘러나왔었다.

차이가 있다면 그녀의 스피커에선 주로 무서운 소리가 났었다는 것이다. 도경의 스피커에선 예쁜 소리가 났다. 별. 하늘. 반짝반짝. 그런 낯간지러운 것들을 절로 떠오르게 하는.

비교가 안 됐다.

들을수록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피아노 멜로디가 물리기 시작할 즈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경의 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이 알아서 양옆으로 길을 터주었다. 주로 오토바이를 타고 오거나 지하철역에서 나와 걸어왔던 곳이라 그렇게까지 좁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차마 못 했다.

1억짜리에 흠집이라도 나면 죄책감이 느껴질 것 같아 신경을 곤두세웠던 지한은 후진하느라 뒤를 돌아보는 도경의 얼굴이 너무 아무렇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1억짜리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은 웬만해선 새 차를 살 여력 또한 있기 마련이었다. 그 점을 망각해선 안 됐다.

오늘은 내가 사겠다는 지한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처럼, 가게 안으로 들어온 도경은 또 한 번 의외의 면을 보였다. 취한 대학생들과 회사원들로 북적이는 고깃집 안은 시장판 못지않게 시끄러웠다. 의자는 등받이도 없었고 벽엔 젊은 손님들이 남기고 간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솔직히 지한은 도경이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그렇게 덥석 앉을 줄 몰랐다. 가고 싶은 데로 가잔 말을 괜히 들었다는 뒤늦은 자책감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가게 안까지 들어와 앉은 뒤였다. 후회는 소용없었다.

주문은 지한이 알아서 했다. 어차피 도경은 양옆 테이블과 뒤쪽 테이블에서 동시다발로 쏟아내는 고음 대결에 적응하기도 바빠 보였다. 티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누가 크게 웃거나 꽥꽥댈 때마다 움찔거리는 어깨까진 숨길 수 없었다.

남의 집 귀한 자식에게 고생을 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해진 지한은 손수 도경의 컵을 뒤집어 물을 따라주었다. 스테인리스 잔에 담긴 물을 보기만 하고 마시진 않던 도경이 상체를 테이블 가까이로 숙였다. 지한도 덩달아 허리를 수그렸다.

“아직도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생각 안 나셨어요?”

지한은 도경의 눈을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

하나 있었다.

“혼자 살아요?”

사적이라면 사적인 질문에 도경은 망설이지 않고 답해주었다.

“네.”

“근데 어떻게 그렇게 잘 입고 다녀요?”

지한이 도경의 옷을 가리켰다. 오늘도 도경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진한 청록에 가까운 색이었는데 도경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그는 한 번도 겹치는 옷을 입고 나타난 적이 없었다.

“내가 아는 남자들은 혼자 살면 좀, 후줄근해 가지고. 티가 나던데.”

도경이 고개를 반쯤 숙이고 웃었다. 지한은 웃지 않았다. 그는 도경이 누구와 사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 알고 싶은 것을 묻기 위해선 먼저 동거인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생각이 진행되는 와중에 내뱉었을 뿐이고.

고개를 든 도경이 지한에게 물었다.

“지한 씨는요. 혼자 사세요?”

“아니요.”

지한은 잠시 뜸을 들였다. 웃느라 피가 너무 잘 돌았는지 도경의 양 볼이 약간 발그레해 보였다.

“친구랑 같이 살아요.”

“되게 친하신가 봐요.”

“네.”

“지한 씨 친구 많을 것 같아요.”

“……자주 만나는 애들은 거의 없어요. 같이 사는 친구 말고는.”

“왜요?”

지한은 또 뜸을 들였다. 시우가 지한의 친구들을 싫어하게 된 연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도경에게 오히려 민폐였다. 그러려면 지한이 어떤 사건·사고에 휘말려 왔는지를 설명해야 했고, 그러다 보면 보육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텐데, 고기도 안 올라간 불판을 사이에 둔 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같이 사는 친구가 싫어해요.”

어차피 지한이 거짓말을 친다 한들 도경은 영영 모를 터였다. 도경이 시우와 가까워지지만 않는다면야. 시우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낯선 얼굴들을 상대했다. 게다가 도경도, 시우도 서로가 지한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시우와 도경이 바텐더와 손님 이상으로 가까워질 확률은 지한이 로또에 맞을 확률보다 낮았다.

지한의 거짓말을 믿은 듯 도경이 턱을 끄덕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죠.”

왜냐고 물으면 뭐라고 거짓말할지까지 생각해놨던 지한은 부끄러워졌다. 20년을 함께한 지한보다 도경이 더 시우의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았다. 도경은 지한의 친구가 누구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였음에도.

“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걔는 나한테 좋은 것만 해주고 싶어 하니까.”

도경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점퍼를 선물로 받았다는 말에 여자냐고 묻던 때 지었던 것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친구 이상인 것 같은데요.”

“예? 뭐가, 걔요? 나랑?”

“이렇게 듣기만 했을 때는요.”

“남자라니까?”

가게 사장이 생고기를 들고 왔다. 큼지막하게 잘린 고깃덩어리가 달구어진 불판에 닿자마자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를 쏘아 올렸다. 세 덩어리를 다 불판에 올린 사장은 와서 뒤집어드릴 테니까 손대지 마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장이 다른 테이블로 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다시 지한을 마주 본 도경은 어린애들이 갸웃거릴 때 하는 것처럼 머리통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남자끼리도 친구 이상일 수 있잖아요.”

멈칫했던 지한은 곧 딱 잘라 말했다.

“친구예요.”

“그럼 지한 씨 따로 만나는 사람은 있으세요?”

“따로 만나는 사람?”

“사귀는 사람.” 하고 도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애인. 연인. 그런 거요.”

그냥 여자친구라고 하면 될 것을 어렵게도 돌려서 말한다 싶었다. 그러나 조금 전 도경이 한 발언을 생각하면 꼭 돌려서 말했다고만 생각할 것은 아니었다. 남자끼리도 친구 이상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사귀는 대상을 여자로 한정하지 않을 테니.

“없는데, 그런 걸 왜 물어봐요.”

“지한 씨도 저 혼자 사냐고 물어보셨으니까?”

“나야 궁금한 이유가 있었잖아요.”

“저도 지한 씨같이 생긴 남자는 어떤 사람이랑 사귀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요?”

왜 이렇게 한 마디도 안 지는 거야, 순간적으로 욱할 뻔했던 지한은 빠르게 인정했다. 그가 말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시우밖에 없었다. 시우는 져주니까.

가라앉히고 나서 생각하니 욱할 거리도 아니었다. 지한이 도경에게 진짜로 묻고 싶었던 질문도 실은 그것이었다. 도경에게 연인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사람인지. 지한은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막혔고, 도경은 그새 선수를 쳤다. 선수를 빼앗겼다고 짜증 낼 일이 아니라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도경이 먼저 물어봤으니 지한도 자연스레 물어볼 기회가 생겼다.

“그쪽이 더 궁금한데, 나는.”

도경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쪽이 혹시 저예요?”

“아. 바로 앞에 있는 사람한테 누구 씨 이렇게 부르는 거 잘 못하겠어서.”

“형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지한은 도경에게 형이라 칭하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도경이 형. 상상하자마자 턱 끝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퍼져 양 볼을 뒤덮었다. 손대지 말란 사장의 말을 까먹은 척 집게로 고기를 뒤집었다. 불이라도 난 것처럼 연기가 무시무시하게 퍼졌다. 잠깐이라도 빨개진 얼굴을 가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건 좀 더 나중에…… 편해진 다음에.”

“저랑 있는 거 불편하세요?”

“불편한 건 아닌데 아직 잘 모르는 건 맞잖아요.”

“그럼 오늘 다 물어보세요. 궁금한 거.”

도경이 지한의 앞에 거꾸로 엎어져있던 컵을 가져가 물을 따랐다. 지한은 그때까지 제 잔이 비어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물로 가득 채운 지한의 컵을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 놓은 도경이 씩 웃었다.

“잘 아는 사이 되게.”

술은커녕 맹물도 안 마셔놓고 어째 취한 사람보다 더 대담하게 굴었다. 조금 전에 오른 열이 다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열기가 지한의 피부를 데웠다. 그렇게까지 민망해할 필요는 없었다. 도경이 알아서 자리를 깔아준 셈이었다. 물어보기만 하면 됐다.

“만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다고 대답하는 속도가 엄청 빨랐다. 말투는 칼 같았다. 정말 없는 것 같았다. 영문도 모르고 조마조마하던 가슴이 한결 펴졌다. 지한은 뜸 들이지 않고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어떤 사람 좋아해요?”

“사실 저는 태어나서 딱 한 사람하고밖에 안 만나봤어요. 그런 식으로는.”

“……되게 좋아했나 보네.”

도경이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주시했다. 지한이 앉은 자리 뒤의 벽 어딘가에 깨나 길게 꽂혀있던 시선은 사장이 고깃덩어리들을 다 뒤집어놓고 사라졌을 때쯤 거두어졌다.

“특별한 사이였죠.”

단순히 좋아했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대답으로 들렸다.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는 감정이 반드시 좋아한다는 감정과 일맥상통하지는 않았다. 사랑하는 상대만큼이나 죽이고 싶은 새끼 또한 특별했다. 도경이 옛 연인을 죽이고 싶어서 특별하다 표현한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근데 왜.”

“잘 모르겠어요. 왜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갔는지는.”

“바람났어요?”

말이 다 끝나기도 전부터 자신의 주둥이를 가격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진짜 바람나서 헤어진 거였으면 어쩌려고 그딴 걸 물어보냔 말이다. 그 말은 사과해야 할 것 같아서 저, 하고 부르려는데 도경이 더 빨리 말했다.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저랑 사귀다 그런 건지, 헤어지고 나서 그런 건지.”

아무래도 정말로 바람나서 도경을 떠난 모양이었다. 지한은 진심으로 미안해졌다. 이별은 그 자체로도 힘든 법인데 바람난 옛 연인이라니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한편으론 묘한 안도감도 들었다. 평생 딱 한 명하고만 사귀어 봤는데 그 사람이 바람나서 헤어졌으면 다시 붙을 일은 적지 않을까.

지한이 저를 걱정해 조용해진 거라 여겼는지, 도경이 밝은 톤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젠 만날 일 없으니까.”

다행이면서도 위로해줘야 할 것 같은 이중적인 마음이 지한을 헷갈리게 했다.

“왜, 그런 말이랑 똑같은 거 아닌가. 아무리 예뻐도 내 거 되면 남의 게 더 좋아 보이고 그런.”

지한은 타의로 말을 멈추어야 했다. 도경이 제대로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남들처럼 크게 소리를 내가며 웃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늘 숨죽여 웃는 도경치곤 제법 흐트러진 축에 속했다.

“거기서 저는 뭔가요. 예쁜 거?”

“거가 아니고 남자. 예쁜…….”

“제가 예쁘다고요?”

도경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찌푸렸다 했다.

“예쁘게 생겼잖아요.”

“그런 소리 처음 들어봐요.”

“무슨.”

“진짜예요.”

부끄러워서 그냥 둘러대는 말인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닌 듯했다. 도경의 귀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한의 눈엔 예쁘단 말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의 반응으로 보였다.

“아무도 예쁘다고 한 적 없다고요?”

“제가 기억하기론.”

“흘려들어서 그런 거 아니고?”

“전 어떤 말도 안 흘려들어요.”

지한은 반찬 접시들이 이국의 음식이라도 되는 양 신기하게 들여다보는 도경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몇 번을 봐도 변치 않았다. 예쁘게, 실은 아름답게 생긴 남자였다. 차마 아름답다고까지는 말할 수가 없어서 예쁘다고 했을 뿐이다.

“이상하게 듣지 말고요, 사실 난 처음 봤을 때 계속 그 생각만 했는데.”

“에스더네 별장에서요?”

“아니, 장례식에서.”

간장에 절여진 양파를 해부할 기세로 관찰하고 있던 도경이 지한을 쳐다보았다.

“그때 저를 알고 계셨던 거예요?”

“누군지 몰라도 얼굴은 볼 수 있잖아요.”

“고마워요.”

“뭐가요.”

“칭찬해줘서?”

도경이 아래를 보며 말했다. 얼굴은 제 색으로 돌아왔는데 귀만 빨갰다. 지한은 찬물을 마셨다. 가라앉을 만하면 곧장 퍼지는 열기에 얼굴이 잠잠해질 틈을 가지지 못했다.

180g짜리 고기 네 덩어리를 먹는 동안 그들은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보통 남자 두 명이서 4인분은 턱도 없는 양이었으나 도경은 보기보다 더 입이 짧았다. 덩달아 지한도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두 병째 시킨 소주를 반 이상 남기고 일어설 때까지 지한은 도경에 대해 꽤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도경은 해외에서 학교를 나왔고, 회화 실력은 한국어가 더 뛰어나지만 논술이나 보고서를 쓸 때는 영어가 더 편한 장기 유학생 출신이었다. 논술이고 보고서고 해당 사항이 없는 지한에겐 전혀 유용한 정보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흥미롭게 들었다.

외국인들과 같이 앉아 수업을 듣거나 한인 타운에서 소주를 처음 접하는 도경을 눈앞에 그려보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한은 도경처럼 상대와 스스럼없이 공유할 수 있는 역사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도경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발 자신의 차례는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약속대로 계산은 지한이 했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마자 체온이 뚝뚝 떨어졌다. 차가 세워진 곳으로 걸어가던 중 도경이 작게 말했다.

“빨리 형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지한은 걸음을 멈췄다. 몇 발자국 앞서가던 도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별거 없는 말이었다. 형이라고 불러달라는 게 뭐 어쨌다고. 과잉 반응이었다. 알지만 안다고 다 되는 게 세상일은 아니었다. 침을 삼키고, 발을 억지로 움직이고,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는 손을 오므렸다 펼쳤다 한 끝에 지한은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예?”

도경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이상하게 듣진 말고요.”

돌아선 도경은 지한을 기다려주지 않고 계속해서 앞서나갔다. 둘 사이의 거리가 점차 멀어져 도경이 먼저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을 때, 지한은 도경의 마지막 말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의 시작점을 알아차렸다. 지한이 고깃집에서 한 말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었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저 앞에서 대리기사와 인사하는 도경이 보였다. 대리기사를 운전석으로 보낸 도경은 뒷좌석 앞에 서서 두리번거리다 지한을 발견하곤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뿐이었다. 문을 열어놓은 채 기다리고 있을 뿐임에도, 지한의 귀엔 다른 것이 들렸다. 어서 내게로 와. 간지럽게 속삭이는 음성이 두 귀로 똑똑히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지한은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소현이 지한에게 준 선물을 빼앗아간 새끼는 조금 더 나중에 알아내도 되는 것이었다. 도경을 몇 번 더 만나고 나서. 그를 형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다음에.

그때 물어봐도 늦지 않았다.

#24

집에 도착한 도경은 신발장을 벗어나자마자 코트부터 벗어젖혔다. 지한과 헤어지는 순간부터 벗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리기사에게 돈을 쥐여주고 혼자가 된 주차장에서 벗을 기회가 있었으나 잘 참아냈다.

육안이든 카메라든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선 경거망동하고 싶지 않았다. 움직이면서 코트를 벗는 것 또한 도경에겐 경거망동의 범주에 속했다. 실용성은 없고 제한만 많은 강박이었으나 정작 그 본인은 그 습관이 얼마나 소모적인지 모르고 지나갔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는 세탁실로 들어가 코트를 세탁기 위에 눕혀놓았다. 보통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 하는 옷들은 가사도우미가 올 때마다 소지품이나 옷을 보관하는 방에 가져다 두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몇 평 되지도 않는 세탁실에서 벌써부터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그 냄새를 방에서까지 맡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세탁실에서 나와 주방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세탁실로 돌아간 그는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를 확인했다. 한 번. 잠겼다. 두 번. 그래도 불안했다. 세 번. 잠긴 것이 분명했다. 비로소 안정이 찾아왔다.

곧장 욕실로 향했다. 늘 하는 것처럼 다른 방들을 다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코트 안에 입고 있던 모든 옷과 머리카락, 심지어는 피부에까지 배인 것 같은 냄새를 한시라도 빨리 씻어내야 했다. 그러나 욕실 거울 앞에 선 그는 하려던 것처럼 바로 셔츠를 벗지 못했다.

빨갛다.

귀. 양쪽 귀가 전부, 귓불까지. 시뻘겠다. 최근 바꾼 조명이 너무 환해 눈이 이상 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하고 손으로 귀를 만져보았다. 불 옆에 서있다 온 것처럼 뜨끈뜨끈했다. 추운 곳에서 따듯한 실내로 들어오면서 생기는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는 위안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히터가 빵빵한 차 안에 있다가 지하 2층의 주차장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왔다. 온도차 때문이라면 여태까지 시뻘겋게 익어있지 않아야 했다.

쥐어뜯는다고 붉은 기가 사라질 리 없었다. 자극을 가하면 가할수록 피부는 더 진한 색으로 물들기만 할 것이다. 잘 아는 바였기에 도경의 손은 귓불을 아프지 않게 쥐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불쑥불쑥 치미는 충동이 시키는 대로 잡아당기지도, 손톱으로 긁어내리지도 않았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귀에서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빨갰을까. 그는 거울 속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우지한 앞에서 계속 이런 꼴을 하고 있었다고?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니 당장에 양쪽 귀를 다 뜯어내고 싶었다.

스스로에게 해를 가해야겠다는 압박감이 들 때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세요. 생각의 포커스를 다른 곳으로 옮기세요. 음식, 옷, 숫자 단순할수록 좋아요. 그래도 안 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최면술사만도 못한 담당의의 목소리가 환청이 되어 귓가에 맴돌았다. 안일하기 짝이 없는 조언이었다. 도움을 요청하라니,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내 귀를 찢어버리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매달리기라도 하란 말인가? 어림도 없었다.

도경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손을 내렸다. 귀는 불판 위로 뿜어버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가며 마신 소주가 다 그 부위로 간 것처럼, 귀는 계속해서 달아오르고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터져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듯이.

빨갛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