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Hook (11/38)

  11. Hook

#25

“어, 안에 사람 있네.”

안이 빈 줄 알고 문을 열어젖혔을 여자가 회의실 안에 앉아 있는 도경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도경을 회의실 안에 앉혀 놓은 장본인인 팀장이 와 문을 닫았다. 문을 닫기 직전 도경에게 눈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눈짓을 말로 옮기면 저희 애들이 뭘 몰라서요, 정도가 될 것이다.

평화를 되찾게 된 도경은 회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깨끗한 벽, 자국이나 흠이 거의 없는 책상, 벗겨진 곳이 보이지 않는 의자 하다못해 블라인드까지 죄다 사람 손을 덜 탄 티가 났다. 서울에 올린 지 얼마 안 된 건물이었다. 여러모로 권 회장의 미디어 건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깔끔했다.

도경이 누구의 아들이건 간에 아무 때나 남의 회사 회의실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장손도 아니고 도전 정신도 없는 이안은 모두의 예상대로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식품 회사에 입사했다. 모든 제품이 그렇지만 특히 주 고객층의 연령대가 높은 건강보조제는 종이신문의 광고 비율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었다.

이안을 찾는 도경에게 대신 카드를 찍어주고 회의실까지 내준 팀장은 도경이 본사에서 쫓겨나기 전에 참석했던 술자리에서 알게 된 인연이었다. 프론트의 연락을 받고 1층까지 직접 내려온 팀장을 봤을 때 도경은 그 언제보다 깊게 무게의 불균형을 실감했다. 건물이 얼마나 높든, 부지가 얼마이든 저울에서 더 무거운 쪽은 늘 A미디어였다. 권 회장은 그런 곳에서 친자식을 내쫓은 것이었다.

그러나 괜찮았다. 도경은 침착하게 깍지 낀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 언젠가는 돌아간다. 그러므로 걱정할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된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소현이 어느 쪽이었는지 도경은 아직도 모르겠다. 취할 것이었는지, 버릴 것이었는지.

「너한테 친구가 어디 있어. 강이안? 김무영? 너 정말 걔들이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다른 남자의 존재를 숨기지 않음으로써 도경의 가치는 떨어졌다. 둘 사이에 지한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없었을 손실이었다. 그것만으론 불충분했다. 소현이 도경에게 운이었는지 불운이었는지를 판가름하기 위해선 더 강한 증거가 필요했다.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반 동강 난 차 안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더라면.

「걔네도 속으론 너 같은 거 지겹다고 욕하면서 참고 있을걸. 그것만 하면 다행이게? 제발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지. 남들처럼.」

도경은 살아 돌아온 소현을 어떻게든 붙잡았을까?

「너는 억울할 자격 없어.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면서 뭐가 억울해.」

못되게 군 나를 제발 용서해 달라고 빌고,

「너한텐 나밖에 없어.」

네 말대로 정말 나한테는 너밖에 없더라고 참회했을까?

「나 말곤 아무도 너를 진심으로 걱정하지 않는다고.」

정말 나한테는 너밖에 없었던 걸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점심시간을 앞둔 사무실에 누군가가 등장했다. 인사하고 대화하는 소리들이 뭉뚱그려져 회의실 안까지 전달되었다. 보폭이 넓을 것으로 추정되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경은 건물 앞에서 받아온 신문을 반으로 접고 또 접었다. 단 두 번 만에 더 접히지 않을 만큼 뻑뻑해진 회색 종이의 모서리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꼴 보기 싫었다. 평소처럼 접은 신문을 쓰레기통에 처넣는 대신, 그는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형, 온다고 말을 했으면 내가 일찍 으악!”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집어던졌다.

사무실 안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를 지르며 양팔로 얼굴을 막았던 이안은 아무것도 자신을 때리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후다닥 문을 닫았다. 도경의 손을 벗어나자마자 원래 크기를 되찾은 신문은 문 옆 벽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애초에 이안을 겨냥해 던진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네가 전화를 안 받는데 온다고 어떻게 말해.”

“전화가 안 될 땐 메시지를 하면 되는…….”

되지도 않는 변명은 도경이 눈을 치켜뜨자 바로 끊겼다. 지은 죄를 아는 이안은 얌전히 손을 앞으로 모았다. 밤늦게 클럽에서 놀고 자다 기어 나오는 길인지 머리가 거의 둥지였다.

“네가 못하겠다고 해놓고 강서까지 따라가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이안이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치매가 아니고서야 혼자선 할 짓이 못 된다고 하루 만에 미행을 포기했던 본인의 과거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을 테니 할 말이 없을 수밖에.

“따라다닐 거면 들키지나 말든지. 왜 그러는데. 나랑 싸우고 싶어서 그래?”

“아니.”

회의실 밖에서 사람들이 단체로 일어나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점심시간은 회사원들을 전광석화로 이동시켰다. 금세 밖이 고요해졌다.

도경은 다시 아까처럼 허벅지 위에 손을 모으고 앉아 이안의 벌 받는 학생 흉내가 끝나길 기다렸다. 이어지는 침묵이 이상했는지 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이안이 쭈뼛대며 시선을 들었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근데 왜 그래.”

이안이 다시 바닥과 사랑에 빠진 시늉을 하기 전에, 도경은 턱짓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슬금슬금 책상까지 와 선 이안은 가까이서 보니 더 가관이었다. 셔츠는 구겨져 있었고 재킷은 계절에 비해 너무 얇아 보였다. 열두 시가 다 돼서 출근한 주제에 세수는 하고 왔는지 얼굴만 멀쩡했다.

“내가 심심해서 걔 만나고 다니는 줄 알아?”

일곱 살 먹은 현경의 딸에게 친척 간의 결혼이 어째서 불가능한지를 설명하던 기분으로, 도경은 최대한 답답함을 억누르고 말했다.

“아니면 내가 걔한테 맞아 죽는 꼴 보고 싶어? 그래?”

“아니, 그 동네에 간 거는 진짜로 볼 일이 있어서…….”

“이제 나를 바보 취급까지 하려고?”

더 뻗대봤자 도경의 성질만 테스트하는 꼴이 되리란 것이 파악됐는지, 이안은 잘못을 인정했다.

“잘못했어, 내가…… 안 그럴게. 다신.”

다신 안 그런단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오전 반차까지 써가면서 온 보람이 아주 없진 않았다. 도경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얼른 점심을 해결해야 제시간 안에 회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경을 따라 복도로 나온 이안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잽싸게 눌렀다. 그러곤 도경의 눈치를 봤다. 패드 위에 오줌을 갈겨놓고 나와 간식을 요구하는 개와 겹쳐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도경은 이안을 외면하고 버튼 위의 숫자에 집중했다. 개는 말이라도 잘 듣지.

“뭐 하다 이제 와.”

그러나 이안은 개가 아니었다.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멈출 줄 모르는 구걸의 눈빛은 결국 도경의 입을 열리게 만들었다.

“응? 아, 너무 늦게 일어나서.”

“회사 똑바로 다녀. 나한테 전화 오게 하지 말고.”

B그룹 장 회장은 실제로 도경에게 전화를 한 적 있었다. 당시 도경과 사귀던 소현 때문이 아닌, 집안에서 소현에게 한참이나 서열이 밀리는 이안 때문이었다. 이안이 가장 잘 따르는 형이니만큼 올바른 본보기가 되어달라고 했을 땐 어처구니가 없어 반박할 의지마저 잃었다.

본보기는 그 집 어른들이 걱정할 일이었지 이안과 몇 살 차이도 나지 않는 도경의 소관이 아니었다. 넌 네 애비와 달리 건실해서 좋게 보고 있다는 소릴 칭찬이랍시고 하는 늙은이의 말, 귓등으로 넘기면 그만이긴 했다. 그러나 그런 전화를 또 받아야 한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도경의 잔소릴 관심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인 것이 분명한 이안은 회사 근처 식당에 도착해 착석할 때까지 좋은 기분을 유지했다. 묻지도 않은 제 부모의 안부부터 무영이 새로 구입한 아파트의 전망까지 두서없이 떠들어대더니 급기야는 오늘 도경이 뭣 때문에 회사까지 찾아왔는지도 잊고 지한을 입에 올렸다.

“근데 우지한 걔는 언제 또 만났어?”

“알아서 뭐 하게.”

“알아서 뭐 하냐니, 그래도 내가 많이 도와줬잖아……. 걔가 나 봤다고 말해준 거지? 걔가 또 뭐래? 나 별로래?”

“신경 꺼.”

꼭 2절까지 해서 타박을 들었다.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좀 조용해지나 싶었던 이안은 서비스로 나온 국을 들이마신 뒤 금방 기운을 되찾았다.

“형 크리스마스에 뭐 해?”

뭘 할 건진 몰라도 너랑 함께 보낼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왔다. 도경은 입 밖으로 말 대신 숨을 내보냈다.

“가족들이랑 있겠지.”

사춘기 무렵부터 도경에게 크리스마스는 수많은 일요일 중 하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춘기 이전에도 유명 파티시에의 케이크를 먹고 일주일이면 어디 놔뒀는지도 잊어버릴 선물을 받는 날에 그쳤었다. 늦둥이에게 산타가 다녀갔단 거짓말을 하고 있기엔 양쪽 부모가 다 너무 바빴던 관계로, 유치원생이었을 때부터 12월 25일에 별 환상은 없었다.

따라서 올해도 그는 애인 없고 자식 없는 성인 남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세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예정이었다. 트리, 케이크, 깜박이는 전구, 빨간색, 초록색. 그 정도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다만 올해는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추가되었다. 1, 2, 2, 5.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숫자였다. 소현의 휴대폰 비밀번호. 달력에 적혀있던 글자. JH 생일.

“정해진 스케줄 없으면 무영이 형네 클럽에 같이 갈래? 정식 오픈은 1월인데 크리스마스 때 파티 거기서 할 거래. 약간, 베타 테스트처럼.”

실제처럼 눈앞에 생생히 아른거리던 숫자가 흩어졌다. 도경은 아직도 새 둥지처럼 보이는 머리를 정리하지 않은 채로 클럽 운운하는 이안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놈한테 정말 80점이나 줘도 되는 건가. 스스로의 평가 능력에도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무슨 스무 살이야?”

“형 스무 살 때 클럽 다녔어?”

“아니. 그러니까 안 간다고.”

도경도 클럽을 가보긴 했다. 미국에서 딱 두 번. 소현과 함께였었고, 두 번 다 그녀에게 술을 사주고 싶어 하는 외국인 남자들을 가만히 놔뒀단 이유로 그녀의 친구들에게 욕만 죽어라 먹고 끝났다. 그 뒤론 클럽이 있는 쪽으로 눈길도 안 줬다.

“아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알잖아, 무영이 형이 언제 허접하게 노는 거 봤어? 가자. 가서 나랑 놀면 되지.”

무영이 얼마나 잘 노는지는 클럽을 향한 도경의 거부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한데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 있던 어떤 이미지는 영향을 끼쳤다. 12월 25일에 태어난 그 남자. 늘 과도하게 찢어져있는 바지와 짧은 재킷을 입고 다니는 지한은 왠지 클럽에도 빠삭해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이야 낯을 가리는 중이라 별말 없지만 더 가까워지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혹시 아는가, 지한이 도경을 클럽에 끌고 갈지. 클럽에 끌려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있다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춤까진 안 춰도 최소한 얼어붙어 있지는 않아야 했다. 클럽에 데리고 왔더니 기절해버리는 놈 같은 것에는 그 어떤 매력도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지한에게 도경은 탐나는 대상이어야 하니까.

“봐서.”

도경은 수저를 들었다. 없던 허기가 졌다.

#26

무영의 새 아파트 창가에 앉아 내다보는 바깥 풍경은 낮에나 밤에나 만족스러웠다. 센트럴 파크에 비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지만 귀국한 지도 벌써 4년이 꽉 찼다. 한강과 도시 공원을 양쪽에 다 낀 아파트는 서울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충분히 훌륭한 조건의 거주지였다.

이안은 무영이 만들어준 뱅쇼 잔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뜨끈한 와인의 맛이 달짝지근하고 진한 냄새만큼 흡족하지 못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손을 데우는 용도로 사용 중이었다.

「만약에 네가 돈이 없어.」

사실 투명한 잔 안에 담긴 것이 일반 와인이었더라도 맛있게 마셨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맛을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낮에 만난 도경을 머릿속에서 좀처럼 떨쳐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도 없고 직업도 별로야. 하루 먹고살 돈만 있는 그런 사람이야. 그러면 생일 선물로 뭐가 받고 싶을 것 같아?」

이안의 뇌리가 몇 시간 째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식당에서의 도경이 한 말이었다. 정확히는 질문이었다.

「집?」

돈이 없다. 여기서부터 도경의 가정은 글러먹었다. 그래 본 적이 있어야 뭘 가지고 싶을지 상상하는 것도 가능했다. 나름 열심히 도출해낸 답변을 내놓자 도경은 이안을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놈 취급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억울해서 팔짝 뛰고 싶었다. 본가에 갈 때마다 억지로 읽는 신문 헤드라인만 봐도 이 나라 국민들이 집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집이 없으면 당연히 집부터 가지고 싶겠다는 유추 과정의 어디가 도경에게 멍청해 보였는지 이안은 정말 궁금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도경은 똑똑했다. 심부름센터를 오가거나 지한의 뒤를 쫓는 것처럼 물리적인 일은 남을 시켜도 머리 쓰는 일에 있어서는, 어지간해선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일 선물을 정하지 못해 고심하는 도경이라니. 소현이 살아서 그 꼴을 봤으면 도경이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놀렸을 것이다.

아니지. 이안은 망각하고 있던 점을 상기했다. 도경의 가정 속에 등장하는 집 없는 놈은 지한인 것 같으니 소현이 살아 있었으면 도경의 머리채를 잡았을 수도 있다. 돌아가는 꼴이 점점 요상해지고 있긴 해도 어쨌거나 지한은 소현이 만나던 남자니까.

“맛 어때? 안 쓰게 하려고 오렌지 하얀 것도 내가 다 뗐는데.”

“형은 만약에 집도 없고 직업도 없고 돈도 없으면 생일 선물로 뭐 받고 싶을 거야?”

이안과 똑같은 잔을 손에 들고 거실로 온 무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냔 기색이었다. 그래도 대꾸는 착실하게 해주었다.

“음, 난 그 세 개가 항상 있어서 몰라.”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한 거잖아.”

“그런 이상한 질문 왜 해? 뭐 맞고 왔어?”

“날 뭐로 보는 거야. 일단 저는 약 같은 거 안 하고요, 해도 주사기 같은 건 안 써요.”

“안 한다면서 취향이 확실하네.”

다가온 무영이 이안의 옆에 앉았다. 허벅지가 닿았다. 이안과 맞닿은 다리를 내버려 둔 채 와인을 마시는 무영은 도경을 떠오르게 했다. 비슷해서가 아니라 달라도 너무 달라서. 도경이었으면 질색을 하면서 떨어졌을 것이다.

“관심 있는 사람 생겼어?”

하지만 무영과 도경이 다른 별에서 온 인간들처럼 다른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현재 이안은 뭘 봐도 어떻게든 도경을 연상시킬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상태였다.

“갑자기 관심 있는 사람은 무슨.”

“방금 네 질문 그런 건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데 어떤 선물을 좋아할지 모르겠어. 그런 거.”

이안은 다리를 꼬았다. 무영과 닿아 있던 부분이 자연스레 떨어졌다.

“내 얘기가 아니야.”

“그렇지. 권도경 얘기니까.”

오, 주여. 튀어나오려는 감탄사를 겨우 입 안에서 녹인 이안은 온기가 빠져나가지 않은 잔을 커피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무영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어떻게 안 것인지 몰라도 무영이 입을 털고 다니는 순간 끝장이었다. 지한의 뒤를 밟다 들킨 것만 해도 도경에게 일 년 치 미움을 사기 충분했다.

“방금 그거는 형 생각이다? 난 도경이 형이라고 한 적 없어, 어? 알았지?”

“너 우리 호텔 바에 와 봤어?”

자신의 잔을 이안의 잔 옆에 둔 무영이 똑같이 몸을 틀어 마주 앉았다. 이번엔 무릎이 닿았다. 딱딱하다, 이안은 생각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도경의 무릎은 무영보다 더 딱딱할까? 덜 딱딱할까.

“예전에. 방학 때였나. 5년도 넘었어.”

“그땐 확실하게 없었지.”

“뭐가?”

“내가 권도경이랑 최근에 거기서 술을 두 번 마셨는데. 한 번은 혼자 갔다가 마주친 거고 한 번은 아예 약속 잡고.”

무영이 얼굴을 슥 들이밀었다.

“바텐더 중 하나랑 뭐 있는 거 같더라고. 두 번 다 이상했어.”

지한에만 신경 쓰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한의 동거인 이시우가 그 호텔의 바텐더였더랬다. 무영이 호텔의 소유주는 아니어도 친인척이 운영하는 곳이라 자주 드나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도경도 그곳에 혼자 가서 술을 마신 적 있다고 분명 언급했었다. 무영과 도경이 함께 술을 마실 때도 바엔 당연히 시우가 근무 중이었을 것이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리란 것쯤은 진즉에 알고서 대비했어야 한다.

“거기 수석이 엄청 예민해. 그 사람이 직접 데려온 애라고 했어. 얼마나 일했는지 모르겠는데, 엄청 예뻐해서 집에 갈 때 데려다준대. 손님들도 걔를 좋아하고. 뭔지는 알겠어. 한국인들이 좋아하잖아, 말랑말랑하게 생긴 거.”

뭔들 알았겠는가. 도경이 무영과 연달아 술을 두 번이나 마실 줄도 몰랐고, 기어이 무영의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서 구역질을 참을 줄도 몰랐다. 저 사람을 앰뷸런스에 태워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하는 낯빛으로 내렸던 도경은 과연 지한의 뒤에 탔을까?

둘이 만나는 날을 때려 맞추지도 못해 지한만 쫓아다니다 들켜버린 이안으로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탔겠지, 타고말고. 도경은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휴일에 그 먼길을 내려와 연습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실전에 옮겼을 것이다. 지한의 등에 얼굴을 묻고, 양팔로는 허리를 꽉 감은 도경이 움직이는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하필 고화질이었다.

싫다.

이안은 중지로 명치를 살짝 눌렀다. 아팠다.

“그런데 권도경이 그렇게 생긴 거 좋아할 줄, 그거는 몰랐지. 거기다 남자인데? 소현이가 무서워서 이제 여자는 싫은가?”

“좋아하는 거 아니야.”

배에서 손을 뗀 이안은 발끈했다. 좋아한다니 누가 누굴. 무영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 그렇지? 하고 이안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역시 아닐 것 같았어. 그럼 뭐야? 도경이 왜 그 바텐더 눈치 봐?”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나는 그 바텐더가 누군지도 모르고―.”

“너 지금 표정이 썩은 우유 마신 사람이랑 똑같아.”

거짓말하는 티가 다 난다는 뜻이었다. 이안은 팔꿈치로 무영을 밀었다. 미는 대로 밀려난 무영이 눈을 빛냈다. 누가 혼혈 아니랄까 봐 호박색 눈동자는 얄미울 정도로 잘도 빛났다. 이건 뭐 고래 사이의 새우도 아닌, 전혀 다른 종의 두 동물 사이에서 등골 터지는 하루살이, 잡초 뭐든 간에 보잘것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나도 진짜 다 말해버리고 싶은데, 이건 내 일이 아니라 도경이 형 일이라 안 돼. 정 궁금하면 형이 직접…….”

“걔가 너한테 또 뭐라고 했지? 싸가지 없는 놈.”

머리가 아파왔다. 궁여지책으로 이안은 난로 대용으로만 쓰고 이별하려 했던 와인 잔을 들었다. 술기운은 모든 걱정을 숨겨주었다. 깨는 순간 더 커져서 되돌아온단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아니야. 아무 일 없었어. 진짜로.”

“고민한 내가 바보지. 걔는 더 당해도 돼.”

“뭘 고민해?”

“크리스마스에 에스더도 오거든. 그래서 걔한테 부탁할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했어.”

무영의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나도 소현이 남자 실물 보고 싶으니까 한 번만 더 불러달라고.”

푸흐아악. 딱 그런 소리와 함께 이안의 잇새로 튀어나간 와인은 테이블 유리와 러그에 골고루 흩뿌려졌다. 무영은 새로 산 러그에 처음 생긴 얼룩이 이안의 입 안에 들어갔다 나온 와인이란 점을 어른답게 받아들였다. 괜찮아, 한 다섯 개 사놨어. 러그 따위에 쏟을 관심이 없는 이안에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소현이 누나 남자라는 게 설마.”

“완전 장난 아니라는 거 다 들었어. 나도 그 맛있게, 아니지 멋있게 생긴 다리 보게.”

“우지한을 형 파티에 불렀다고? 안 돼!”

“한 번 불렀는데 두 번은 왜 안 돼.”

안 될 말이었다. 에스더의 별장에서와 곧 있을 크리스마스 파티는 완전히 달랐다. 별장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지한과 도경은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이제 도경과 지한은 같이 술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지한이 아직 도경의 정체를 몰랐다. 별장에 남아있던 소현의 친구 중 누구 하나 지한에게 도경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더 가봐야 알 노릇이었다. 적어도 도경에겐 다행이었다. 그는 지한에게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아 했다. 요새 도경이 하고 다니는 짓을 봐서는 지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못할 게 없단 식인데, 도경과 소현의 역사가 밝혀지는 순간 다 수포로 돌아가게 되어있었다. 아무리 못 배우고 없는 놈이라 할지라도 지한이 생존 본능마저 없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현의 전 남자가 지한에게 순수한 호감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누구에게든.

“잠깐. 한 번만 더 불러달라고 했다는 게……?”

“지난번에 에스더가 걔 불렀었잖아. 너도 왔었다던데? 그거 내가 불러보라고 한 거거든.”

“왜 그런 짓을 해?”

무영이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말간 얼굴로 웃었다.

“죽기 전에 도경이 우는 거 보고 싶어서.”

조금 전까지 술이 궁여지책이었다면 이제는 마지막 남은 보루가 되었다. 이안은 아직 많이 남은 뱅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아까는 입 안에 넣자마자 내뿜느라 맛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이거 설탕 넣은 한약 맛 나.”

“화내지 마. 너는 사랑해, 내가. 알지?”

“나는? 그럼 도경이 형은.”

“이안. 내가 말했지. 너는 너무 착해서 걔를 사랑하는 거야. 나는 너만큼 안 착해. 대신에,” 무영이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여기가 잘 돌아가고 있어.”

뭐라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이안은 머리통을 세게 흔들었다. 혼자 하는 생각 속에서마저 감추기 급급할 필요는 없었다. 뭐라는 것인지 실은 다 알아들었다. 멍청한 놈이나 도경을 사랑한다는 소리였다.

“걱정 안 해도 돼. 사랑하지는 않아도 내가 도경이 많이 좋아해. 나 재미있는 거 다 좋아하니까. 도경이 너무 재미있어. 혼자 얼굴 빨개졌다 파래졌다 하는 거 꼭 휴먼 컬러 LED 같지 않아?”

또 속이 매슥거렸다. 한약 맛이 난다 하더라도 알코올이 간절했다. 이안은 남은 술을 한꺼번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식었다지만 여전히 벌컥벌컥 마시기엔 뜨거운 편에 속하는 술이 식도를 후끈거리게 했다. 달았다. 그리고 썼다.

#27

영업 중인 가게들 사이에서 홀로 불이 꺼져있는 간판은 바로 그 때문에 더 눈에 띄었다. 무늬 없는 까만색 간판 위에 휘갈기듯 쓰인 이름은 너무 작아 알아보기 힘들었다. 간판 위의 글자들이 알파벳이란 것까지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글씨가 컸어도 알아보았을 것이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지한은 학창 시절 영어 꼴찌였다. 반이 아니라 전교에서.

담뱃재가 신발 위로 떨어졌다. 남들 같으면 질색을 하면서 털어냈겠지만 지한은 회색 재가 떨어진 구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선물이었고, 그나마도 선물한 사람이 신으라고 할 때만 신었던 물건이다. 이제 그 사람은 죽고 없으니 언제 또 신을지 모르는 신발이 망가지든 말든. 망가지거든 버리면 그만이었다.

원래는 오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에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잘 모르겠단 식으로 둘러대고 끊었었다. 에스더란 이름을 가진 소현의 친구는 지난번에 너무 아쉽게 헤어졌으니 한 번만 더 보자고 했다. 지한으로선 하나도 안 아쉬웠다. 그리고 그의 기억이 조작되지 않았다면, 별장에서 그만 가보겠다는 그에게 인사하는 소현의 친구들도 전혀 아쉬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었다.

안 왔어야 하는 자리란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스폰서의 친구들과 보내는 크리스마스. 읊는 것만으로도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지한에게 크리스마스는 그냥 빨간 날이 아니었다. 그는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이 확실한 상태로 얼어 죽기 전에 발견되었으니 크리스마스가 아니라면 이브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원장은 그의 생일을 12월 25일로 신고했다.

지한이 고아란 사실을 알게 되는 즉시 일반인들의 눈에서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가련한 눈빛에 부응할 만큼 그가 외로운 생일들만 보내오지는 않았다. 열여덟이 될 때까진 원장과 원장 사모가 있었고, 보육원 동기들이 있었으며, 체육관 친구들도 있었고 또, 그들이 다 없었다 한들 항상 시우가 있었다.

호텔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열두 시에 맞춰 지한의 생일을 챙기는 일이 불가능해진 시우는 오늘 새벽에 선물을 두고 갔다. 방에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한은 이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근래 들어 시우를 대면하는 것이 부쩍 긴장되기 시작했다. 왜인지는 몰랐다. 아니, 살짝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시우는 지한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생일 축하해, 라는 속삭임을 끝으로 방문이 닫혔다. 오후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보니 컴퓨터 옆에 웬 목도리가 놓여 있었다.

별생각 없이 평소처럼 재킷만 걸치고 현관을 열었다가 건물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한기가 무서워서 도로 들어가 목도리를 들고 나왔다. 크림색 목도리는 색깔만큼이나 부들부들한 촉감으로 목에 닿아왔다. 목도리 안으로 얼굴을 반쯤 파묻으려니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권도경 그 사람은 이렇게 추운 날에도 목을 다 내놓고 올까.

그래. 도경이었다. 휴일에, 크리스마스에 생일이기까지 한 날 지한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 득실거릴 클럽 앞까지 오게 한 미끼. 사실 미끼라고 하기도 뭐했다. 에스더는 누가 올 것이라고 알려주지 않았다. 별장에 있었으니 크리스마스 파티에도 당연히 오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지한을 영하 7도의 실외로 이끌었다.

모르겠다. 소주를 마시고 귀가 터질 것처럼 빨개진 모습을 봤을 땐 확실히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느낌이었는데, 다음날이 되고 보니 숙취는 없냐는 메시지 한 번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다 집어치우고 하고픈 대로,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대하자고 아무리 다짐해 봐도 도경을 대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조금씩 몸을 사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경계는 해도 조심하진 않는 것이 지한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조심성이란 것이 여태 고수해온 삶의 태도와는 영 동떨어져 있어서. 어디까지 조심하고 어디서부터 대담해져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도경은 메시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와인을 마시러 갔을 때나, 고깃집에 갔을 때나 새 메시지가 오면 답장을 하기보단 바로 전화를 걸기에 그리 짐작했다.

귀찮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전화하자니 이젠 핑계거리도 없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같은 소리는 도경이 좋아한대도 지한 쪽에서 싫었다. 그러니 남은 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란 메시지 정도였다. 그리 가깝지 않은 사이에도 그날만큼은 인사를 주고받는 경우가 흔했다.

1월이 될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던 와중에 에스더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어설픈 메시지 따위 보내지 않고도 도경과 마주칠 수 있는 기회였다. 올 수밖에 없었다.

그새 반 이상 줄어든 담배를 입술 사이에 막 끼워 넣은 순간이었다. 주머니에 꽂고 있던 왼손이 밖으로 튕겨 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몸이 뒤로 확 젖혀졌다. 누군가가 그의 손목을 잡아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좁은 골목 안으로 끌려 들어온 뒤였다.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낸 그는 담배를 들고 있던 손으로 상대의 목을 잡아 벽에 밀쳤다. 얼굴 뼈를 함몰시킬 순 없으니 배를 걷어차야겠다는 계산까지 마친 지한은 멈칫했다. 하얗게 질린 상대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뭐야, 이건 씨발.”

“뭔, 뭐?”

지한의 손아귀에서 무사히 벗어난 이안이 뒤늦게 콜록거렸다. 목을 살짝 눌렀을 뿐인데 엄살이 도를 지나쳤다. 지한은 손목을 꺾었다. 그를 허락 없이 만졌다가 멀쩡한 몰골로 돌아간 사람은 전무했다. 지한이 빨간 줄과 합의금을 걱정해야 할 성인만 아니었어도 이안은 최소 한 대 정도 맞았을 것이다.

“맞고 싶으면 말로 해. 남의 몸에 손대지 말고.”

“급해서. 죄송해요, 제가 급해서. 아니, 근데.”

방금 전까지 살해 협박을 받은 듯이 질려 있었던 이안은 몇 초 만에 조금 전의 상황을 다 잊어버린 금붕어처럼 금세 기가 되살아나 따졌다.

“왜 또 반말해요? 자꾸 그러면 나도 반말한다?”

“알아서 해. 그런 것까지 내가 정해줘야 돼?”

등신같이 굴면서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 하니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대놓고 하대하는 지한을 째려보는 듯 아닌 듯 헷갈리게 쳐다보던 이안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우지한 씨 오늘 진짜 놀려고 여기 온 거예요?”

“그때 그 여자가 오라고 해서.”

“안에 들어가면 계속 내 얼굴 봐야 되는데, 그래도 들어갈 거예요?”

“내가 왜 네 얼굴을 계속 봐.”

“왜냐하면 다들 널 싫어하니까.”

고상한 척하더니 결국 못 참겠는지 이안도 같이 반말을 시작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들 지한을 싫어한다고? 배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악의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다 잡았다 싶어 안심하면 새로운 변종으로 출현하는 독감 같았다.

“나를…… 난 모르는데, 그때 봤던 사람들. 다.”

“그 싫다는 게 그니까.”

머뭇거린 이안이 지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소현이 누나는 돈이 엄청 많았잖아. 예뻤지, 능력도 있었지. 그런 여자한텐 원래 이상한 놈들이 많이 꼬이고…… 네가 진짜로 그랬다는 게 아니라.”

이안이 침을 삼켰다.

“여기는 소현이 누나 친구들이니까 오해하기가 쉽겠지? 응, 쉽지. 그렇다는 말이에요.”

지한은 골목 바닥으로 눈을 깔았다. 아까 떨어트린 담배가 아직도 불씨를 잃지 않고 깜박였다. 시우의 월급보다 비쌀지도 모르는 구두로 담배를 밟아 짓이겼다. 상처받기엔 너무 불량하게 살아왔다.

“그럼 날 왜 부른 건데. 두 번이나.”

“그야 좀 친해져야 네가 술술 불 거 아냐. 누나하고 어떤 사이였는지, 누나한테 뭘 받았는지 그런 거…….”

뭔가 이상했다. 더듬거리면서도 재수 없는 소리를 끝까지 다 하는 이안을 노려보던 지한은 곧 뭐가 이상한지 알았다. 소현의 친구들이 그런 이유로 지한을 싫어한다면, 사촌인 이안은 왜 그 사실을 당사자에게 와서 나불대고 있는가.

“너는 나한테 이런 걸 왜 알려주고 있고?”

“나? 나는 너, 아니, 우지한 씨가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지한이 타인의 의도를 잘못 넘겨짚을 때가 있다지만 이안의 거짓말은 좀 너무한 면이 있었다. 이안은 지한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번 편의점에서 예상했고, 오늘 확인했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그냥 까놓고 말해.”

“뭐?”

“너 나 마음에 안 들잖아. 그냥 말해. 안 때려.”

“아니, 아니야. 저기 왜 남이 하지도 않은 말을 막, 그렇게 마음대로 왜곡하고 그러지 마세요. 아주 나쁜 습관이니까.”

이안의 양 볼이 소주 때문에 달아올랐던 도경의 귀만큼이나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나 마음에 안 들지 않느냐는 말에 정곡을 찔린 것으로 보였다. 지한은 심호흡했다. 때리지도 못하는데 입으로만 화내봤자 해소되는 것은 없었다.

“알았어. 그럼 그냥 꺼질게.”

정말 집에 갈 생각으로 돌아선 지한은 또 이안에게 손목을 붙들렸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까 봐 두려웠는지 지한이 돌아보자마자 바로 손을 거두기는 했다.

“아니, 아니. 왜 꺼져. 꺼지면 안 돼. 나는 우지한 씨를 오해하지 않는다니까요.”

울상을 지은 이안이 과장된 제스처를 하며 다가섰다. 자기가 덩치는 안 작아도 귀여운 줄 아는 모양인데, 보는 입장에선 주먹만 더 울었다. 성질 같아선 통장에 남은 현금을 합의금으로 다 털어주는 한이 있어도 바닥에 내다꽂고 싶었다.

하지만 지한은 주먹을 폈다. 그는 고작 한 순간의 충동을 참기 싫어서 돈을 날릴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이안은 도경과 친했다.

“같이 들어가서 내 옆에 붙어있으라는 말이지. 다른 사람들이 말 걸면 인사만 하고. 알겠어요?”

취한 사람들이 시끄럽게 웃는 소리에도 몸을 움찔거리던 도경이라면 지한에게 맞아 코피가 터진 이안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니까. 더는 지한에게 형이라고 불리길 원하지 않게 될 거니까. 미친놈이라며 피하게 될 거니까. 그러니까.

“내가 왜 네 옆에―.”

“도경이 형 올 때까지만.”

도경에 대한 생각으로 어지러운 머릿속을 읽은 마냥 그 이름을 꺼내서 놀랐다. 물론 이안에게 지한의 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은 없었다. 우연에 불과했다. 그래도 덜컥 놀랐다.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입을 다문 지한이 설득당하는 중이라고 착각했는지, 이안이 말하는 속도를 높였다.

“형 오면 형이랑 놀아요. 우지한 씨가 버릇없게 말해도 형은 화 안 낸다며. 형 올 때까지만 나랑 붙어있으면 돼.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가지 말고.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않아요?”

놀긴 뭘 노냐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한은 잘 참았다. 도경과 마주치고 싶어서 온 자리는 맞았으니까. 이안이 짜증 나게 군다는 이유로 도경을 못 보고 가는 것은 너무 아까웠다.

클럽 안 분위기는 불이 꺼진 간판과 흡사했다. 바와 계단 쪽을 빼곤 조명이 다 나가 있어 어두침침했고 인테리어는 죄다 시커멨다. 다 시커멓지 않았더라도 실내가 워낙 어두워 어차피 잘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경사진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이안은 지한이 넘어질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더니 한 발짝 먼저 바닥을 밟고 나선 또 손을 뻗었다. 손목을 잡으려던 것이든, 다른 곳을 잡으려던 것이든 짜증이 난다는 점에선 다를 바가 없었다.

지한은 이안의 손이 몸에 닿기 전에 세게 쳐냈다. 짝 소리가 났다. 이안은 졸지에 얻어맞은 손등을 감싸며 웅얼거렸다.

“아니, 나는 넘어질까 봐 조심하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만 골라 하는 면상이 얼마나 멍청해 보이던지 때리고 싶은 마음도 안 들었다.

클럽 안을 두리번거린 이안은 바 의자에 앉았다. 사이좋게 붙어 앉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었던지라, 지한은 이안의 자리와 약간 거리를 두고 섰다.

음악이 재생되었다. 클럽이라고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장르와는 많이 다른, 느긋한 박자의 곡이었다. 플로어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음악을 튼 사람이 누구인진 중요치 않았다. 이안의 말소리를 중화시켜줄 소리라면 뭐든 환영이었다.

“뭐야. 왜 둘이 같이 앉아 있어? 친구 됐어?”

지한이 밟고 내려온 계단과 정반대 방향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상 1층에 해당하는 클럽의 2층에서 막 내려온 여자가 이안과 지한이 앉아 있는 바로 걸어왔다. 오늘 지한을 이 자리로 불러낸 장본인이었다.

“누나는 왜 벌써 와 있어? 뭐 하느라 2층에서 내려오고.”

“사무실 구경하고 왔지. 김무영이 또 바닥에 호피 같은 거 깔아놨을까 봐.”

“호피 깔아놨어?”

“아니. 천만다행이지.”

이안과의 가벼운 대화를 마친 에스더가 지한 쪽으로 돌아섰다. 소현에 비하면 평범한 외모였지만 결코 길에서 찾아보기 쉬운 타입은 아니었다. 그녀에겐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 도경이나 이안 뿐 아니라 소현의 친구들이라면 다 공통적으로 풍기는 기운이기도 했다. 금은보화 속에서 태어난 생의 기운.

“지한 씨 와줘서 고마워요! 지난번에 너무 빨리 가는 바람에 늦게 온 친구들이 많이 아쉬워했거든요. 오늘은 꼭 다 보고 가요?”

“그거 말인데 누나.”

지한에게 대꾸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이안이 끼어들었다. 말로만 끼어든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한과 에스더의 사이에 선 이안은 최대한 별거 아니란 뉘앙스를 풍기고 싶어 하는 것 같은 투로 말했다.

“꼭 인사를 다 해야 할까, 이 사람이? 형, 누나들이랑?”

“무슨 말이 그래. 그럼 여기까지 왔는데 인사를 안 해?”

“이 사람은, 지한 씨는 그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 해봤어?”

에스더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이안을 술주정뱅이 정도로 취급하는 표정이었다. 이름과 얼굴밖에 모르는 여자지만 지한은 에스더에게 공감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고 싶어 하는 이안의 말투는 어설프기 짝이 없어 오히려 굉장히 수상하게 들렸다.

“자기소개하라는 것도 아닌데 뭐가 부담스러워?”

“아니, 아니야. 잘 생각해봐 누나.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정말 모르겠어?”

“왜 이래, 얘가. 너 뭔 약 먹었어?”

“아니, 그게 아니고, 아. 진짜 답답해.”

그들은 곧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단어만 바꿔서. 바로 뒤에 있는 지한을 배제한 채 둘이서 아옹다옹하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정작 본인들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지겨운 말다툼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둘 중 한 명도 아니고 지한도 아닌 제3자였다.

“너희들 진짜 애같이 군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걸어 내려온 남자가 에스더와 이안의 어깨에 손을 하나씩 걸쳤다. 바에 등을 기대고 있던 지한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섰다. 처음 보는 얼굴의 등장에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사람을 바로 앞에 놔두고 너희끼리 그런 얘기 하면 어떡해.”

친구들을 한 번씩 쳐다본 남자가 지한에게 눈길을 던졌다. 언뜻 봐선 백인이었는데 몇 초 더 보니 동양인 같기도 했다. 인종이야 어떻게 되든 키가 지한보다 더 크다는 점은 확실했다.

“강이안이 자꾸 이상한 소리 하잖아. 그때 못 왔던 애들한테 인사시켜주는 걸 지한 씨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대. 누가 보면 대변인 된 줄은 알겠네.”

“아, 누나 그건 무슨 또.”

“그러고 보니까 그날도 네가 나한테 전화해서 지한 씨 왔다고 알려줬었잖아? 뭐야, 둘이 내 뒤에서 따로 연락해?”

지한에겐 이안의 번호도 없었다. 있었다 한들 따로 연락하는 것을 섭섭하단 식으로 말하기엔 에스더와 지한이 심각하게 먼 사이였다. 그래도 오해는 방지해야 할 것 같아서 따로 연락한 적 없다고 말하려는데,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헷갈리게 생긴 남자가 지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저는 김무영입니다. 소현이 친구.”

키가 큰 만큼 손도 컸다. 지한은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지한의 손을 꽉 잡고 짧게 흔든 손이 신속하게 거두어졌다. 별장에서 봤던 사람들을 다 떠올려 봐도 무영이란 남자의 인상이 제일 나았다. 도경은 당연히 제외였다.

“와, 듣던 대로.”

불과 10초,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만에, 지한은 무영에 대한 감상을 뒤집었다. 듣던 대로, 라는 말을 하면서 무영은 지한을 발에서부터 얼굴을 지나 머리통 꼭대기까지 상품의 하자 여부를 가려내듯 훑어보았다.

순식간에 기분이 시궁창이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딱 맞았다. 소현의 친구란 인간들은, 이번에도 역시 도경만 빼고는 정말 죄다, 예의가 없었다. 예의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지한이 그렇게 느낄 정도이니 심각한 수준이었다. 어디 저래서 사회생활은 제대로 하겠나 싶었다.

노비가 주인마님 걱정하는 격이었다. 소현이 그랬듯 그녀의 친구들도 공공장소에선 동화 속 왕자 공주님들처럼 깍듯할 것이다.

무영의 등장 이후 말수가 적어졌던 이안이 갑자기 의자에서 내려와 지한에게 붙어 섰다.

“형, 나 화장실 써도 돼?”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물어보고 볼일 봤어?”

“손님용 쓰기 싫어. 형 거. 쓴다?”

“손님용이 더 깨끗할.”

“고마워!”

무영의 말을 잘라먹은 이안이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지한에게 손을 뻗었다. 다만 잡으려고 할 때마다 거절당한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이 아예 없진 않았는지, 손목이 아닌 재킷 소매를 잡아끌었다. 에스더와도, 무영과도 오래 있고 싶지 않았던 지한은 이안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끄는 대로 끌려가 주었다.

2층 복도 역시 1층 뺨치게 어두웠다. 그 어두운 데에서 성큼성큼 걷는 이안이 신기했다. 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창문들과 굳게 닫힌 문들을 지나 코너를 돌자 또 다른 문 하나가 나왔다. 다른 문들과 똑같은 색을 가진 문이었다. 이안이 문을 열었다. 시야가 살짝 밝아졌다.

클럽 내 다른 장소들보다 밝다뿐이지 여전히 어둡기 짝이 없는 공간 안엔 여럿이 둘러앉는 테이블 대신 명패까지 갖춘 데스크가 있었다. 과하게 큰 가죽 의자와 벽에 걸린 그림들까지, 아래층과는 다른 용도의 공간이란 것을 확실하게 했다.

“저기, 우지한 씨.”

“아무리 봐도 여긴 화장실이 아닌데.”

“어, 화장실 가고 싶어요? 저기 저 문 열면.”

“네가 가고 싶다며.”

멍해졌던 이안의 눈빛이 돌아왔다. 골목에서 존댓말 때문에 기분 나빠했던 자신의 과거가 기억난 듯했다. 그는 인위적인 미소를 만면에 띠고 말했다.

“우지한 씨 여기다 모시려고 거짓말 좀 쳐 봤으니까 그건 그냥 넘어가기로 하고.”

“날 여기다 왜.”

“내가 아까 한 말 벌써 잊어버렸어요? 도경이 형 올 때까지만 좀 참으라니까.”

이안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본음이나 진동이 아닌 클래식 곡이었다. 벨소리마저 가관인 남자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지금 나가, 어, 하고 끊어버린 이안이 지한에게 당부했다.

“나 나가고 나면 안에서 문 잠가요. 무영이 형한텐 내가 얘기해놓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도경이 형 올 때까지 절대 여기서 나오지도 말고. 오케이?”

“아니, 그건 좀.”

“오늘 여기 오는 인간들한테 한 달치 안주거리 되고 싶으면 나오시든가.”

그러더니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선 이안은 정말 나가버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지한은 이안이 시키는 대로 문을 잠갔다. 뛰쳐나가봤자 소현의 친구들에게 붙잡혀 있기나 할 것이라서.

문에서 멀어진 지한은 천천히 오늘 처음 본 남자의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에스더의 우려와 달리 과한 장식이나 소품은 보이지 않았다. 벽지는 까맸고 문은 빨갰다. 복도에서 본 다른 문들도 다 빨간색이었으니 특이사항이라고 할 수 없었다.

벽 한쪽에 세워진 찬장은 주인처럼 키가 컸다. 그 안을 가득 채운 양주병들은 세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한눈에도 개수가 굉장했다. 지한의 흥미는 찬장 옆에 걸린 그림으로 옮겨 갔다. 지렁이 같기도 하고 지렁이처럼 보이는 사람 같기도 한 형태들이 환한 색의 배경 안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지 까진 알아볼 수 없었다. 사무실의 분위기와 썩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었다.

지한은 데스크 위로 관심을 돌렸다. 명패. 긴 스틱들과 건조시킨 꽃송이가 꽂힌 작은 병. 담뱃갑. 그리고 액자. 그는 다리를 굽혀 쭈그리고 앉았다. 그의 눈높이에 들어온 사진은 비슷비슷해 보이는 연령대의 소년소녀들을 담고 있었다. 잔디, 꽃 그리고 뒤로 높이 뻗은 나무들을 갖춘 정원은 한국이 아닌 것 같았다.

제일 먼저 알아본 얼굴은 소현이었다. 아는 얼굴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녀가 정중앙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상은 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중심이었다. 성비가 반반인 그 마당에서 소현은 가장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었고, 편해 보였으며, 신나게 웃고 있었다.

즐거워만 보이는 소현에게서 두 소년과 한 소녀를 지나고 나서야, 지한은 도경을 발견했다. 남들 다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있는데 혼자서만 긴팔에 긴바지 차림인 소년 도경은 뚱해 보였다. 지한은 머리통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좀 달라 보일까 싶어서였다.

어찌 보면 뚱한 것이 아니라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한의 앞에서 방긋방긋 잘만 웃는 어른 도경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의아하게 여길 것까지는 없었다. 지한도 보육원 동기들과 찍은 사진 속에서는 지리기 직전의 겁쟁이로 보이곤 했다.

이 사진 속에 소현의 남자가 있을까?

지한은 다시 사진을 찬찬히 살폈다. 소현의 왼쪽 옆에는 외국인처럼 생긴 소년이 앉아 있었다. 사무실의 주인인 무영 같았다. 소현의 오른쪽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사람은 여자였다. 혹시 영화감독에게 압력을 행사한 사람이 무영인가? 소현과 행복하게 웃는 무영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각각 다른 만화책에서 나온 캐릭터들처럼 따로 놀았다.

사무실 바닥이 쿵쿵 울렸다. 바깥에서 본격적으로 음악소리가 나고 있었다. 파티가 시작하고 있단 증거였다. 지한은 문이 잘 잠겼는지를 재차 확인했다. 그를 여기 두고 나가버린 이안은 여전히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나 들어와서 무영처럼 노골적인 눈길로 훑어보는 것도 싫었다.

어둡고 빨간 공간에 혼자 남아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바닥의 울림이나 느끼고 있자니 속이 갑갑해졌다. 목도리를 벗어던져도 꽉 막힌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쯤 소현의 남자를 알 수 있게 될지, 아니, 알아낼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다. 이안의 말을 다 믿진 않았지만 그의 말이 다 거짓으로 들리지도 않았다.

만약 그의 말처럼 소현의 친구들이 지한을 공사치는 호스트라고 여긴 것이라면, 그래서 진실을 알려고 그에게 친절한 척하는 것이라면 그가 아무리 잘 보이려 해도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한가? 아니었다. 누가 그를 어떻게 봐도 상관없었다.

그러면 도경은?

도경도 소현의 친구였다. 지한이 그녀와 아는 사람이라 잘해주고 싶다,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게 진실일까? 도경은 지한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도경의 속내를 파악하기 전에, 지한은 자기 자신의 속내나 꿰뚫고 싶었다.

처음부터 너무 무모했다. 처음엔 분명 화가 나서 소현의 남자를 알아내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유독 친절한 도경이라면 지한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평소보다는 계산적으로 굴었던 것도 맞다. 맞는데.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서 문제였다.

갑자기 시야 아래쪽이 밝아졌다. 지한은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을 보았다. 화면에 새 메시지가 떠있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도경이었다.

지한은 벌떡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고 눌렀다. 잠금이 풀리며 문이 열렸다. 지한을 본 도경이 뭐라고 말했다. 엄청난 볼륨의 음악이 도경의 목소리를 묻었다. 지한이 못 알아듣고 눈썹을 치켜뜨자 도경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신기할 정도로 음악 소리가 줄어들었다. 닫힌 문에 등을 붙이고 선 도경이 말했다.

“밖에 너무 시끄러워서 도망쳤어요.”

클럽 사무실에서 보는 도경은 평소보다 한결 흐트러져 보였다. 머리도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고 풍기는 향도 좋은데 어째서 살짝 풀려 보이는 것인지, 지한은 머잖아 알았다. 도경은 정장을 입고 있지 않았다. 반짝이는 무언가가 가슴팍 한쪽에 작게 수놓아진 까만 드레스셔츠와 발목에서 끝나는 바지는 물론 조금도 흐트러진 부분이 없었으나, 적어도 타이나 조끼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도경은 덜 강박적으로 보였다.

말없이 서있는 지한을 향해 도경이 살짝 웃어 보였다. 지한도 따라 웃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 끝이 잘 올라가질 않았다. 왜인지는 명확했다. 지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소음을 피해 왔다는 말에 실망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웃는 연기를 제일 못했다.

지한은 코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사무실 공기가 텁텁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도경과 더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간 험한 소릴 하고 말 것 같았다.

도경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도경과 마주치고 싶어서 여기까지 기어 나온 스스로를 향한 짜증이었다. 어쩌면 도경에게 나는 화도 조금은 있었다. 나는 한 번 만나겠다고 먼길을 왔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도망쳐왔단 것이라고…….

“사실 거짓말이에요.”

등에 이어 뒤통수마저 문에 기댄 도경이 말했다. 턱을 살짝 치켜든 자세 때문인지, 아니면 힘주어 뜨지 않은 눈 때문인지 도경의 목소리까지 나른하게 들렸다.

“뭐가요?”

“도망친 게 아니라, 지한 씨 여기 있다고 해서 왔어요.”

“그렇게 말 안 해도 돼요.”

“네?”

지한은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분명 도경은 평생 거짓과 동떨어져 살다 죽을 것처럼 순결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한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너무 많은 함정들을 피하며 살아왔다.

몇 번은 보상처럼 보이는 함정에 홀려 그 안으로 빠지기도 했다. 깊게 파진 함정일수록 한 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함정처럼 보이면 무조건 다 피해가게 되었다.

“나 기분 좋으라고 그런 말 할 필요 없다고.”

그러면 보상을 얻지 못해 굶주릴지언정 앞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속에서 울지는 않아도 되니까.

도경이 눈을 깜박거렸다.

“제가 한 말 때문에 기분 좋으셨어요?”

정말 몰라서 묻는 기색이었다. 지한은 도경의 눈을 피해 시선을 내렸다. 긴 목을 지나, 열린 셔츠 옆으로 살짝 엿보이는 쇄골이 툭 불거져 있었다.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잘못 보지 않았다. 언제나 숨통만 겨우 트이도록 모든 단추를 꽁꽁 잠그고 다니던 도경이, 오늘은 셔츠 맨 위 단추를 잠그지 않았다.

아까는 정확히 보이지 않았던 셔츠 가슴 부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보다 약간 적은 면적을 차지한 그림의 정체는 반짝이는 것들로 촘촘하게 수놓은 꽃이었다. 빨간 문에 기댄 하얀 도경. 까만 셔츠 위의 빨간 꽃.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도경은 여전히 빨간 문에 기대어 서서 지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한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손에 잡힌 쇳덩이를 누르지는 못했다. 도경이 지한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냥 잡았다고 하기엔 다소 누르는 힘이 강했다. 놔달라고 하려 고개를 돌린 지한은 더 이상 자신이 숨을 쉬는지 어쩌는지도 모르는 상태에 빠졌다. 도경이 코앞에 있었다. 한 치의 과장 없는 진실이었다. 도경의 코와 지한의 코가 부딪히기 직전의 거리에 있었다.

문고리에서 손을 뗀 지한은 한 발짝, 어쩌면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숨부터 쉬게 해달라는 의미의 백기였다. 불행히도 도경은 지한의 의사를 오역했다. 부들부들한 감촉이 손목을 감아왔다. 몸이 휘청거렸다. 시야가 한 바퀴 돌더니 등이 문에 부딪쳤다.

지한의 목을 손으로 감싼 도경이 속삭였다.

“나 때문에 기분 좋았냐고 묻잖아.”

호흡이 턱까지 차올랐다. 솟아오른 땀으로 두피가 미지근해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한은 안간힘을 다해 대답했다.

“네.”

도경이 지한에게 돌진하듯 입을 맞추었다. 지한은 눈을 감았다.

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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