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Corner Work (14/38)

  14. Corner Work

#34

닦으려고 집어 든 글라스에서 광이 났다. 조금 전에 이미 닦은 글라스였다. 뒤로 지나가던 팀장이 시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신 차리란 소릴 다정하게도 했다.

“나 지난번에 먹은 거.”

바에 앉자마자 불성실한 주문을 완료한 손님은 요 몇 주 새 등교하듯 자주 바에 드나들어 직장 동료처럼 친근해진 호텔 대표의 조카였다. 친근하다는 것은 순전히 낯이 익숙해진 정도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무영은 싸가지가 없었다.

영업용 미소를 띤 채 뒤돌아선 시우는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무영이 문을 통과해 바까지 걸어오는 과정에서 분명 누구에게든 한 번 이상은 인사를 받았을 텐데 아무 소리도 들은 기억이 없었다. 뇌가 아직도 반 이상 잠들어 있었다. 이러다 사고라도 치면 큰일이었다.

“이안아! 여기.”

“테이블에 앉자니까 왜 불편하게.”

“원래 술은 바에 앉아서 마셔야 더 맛있어.”

주문대로 무영이 지난번에 마셨던 코냑을 잔에 따라 대령했다. 고맙단 말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시우를 쳐다보지도 않는 태도는 거슬렸다. 인간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횟수가 반드시 나쁜 태도에 대항하는 면역력을 증진시켜 주진 않았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에 불과했다. 중년인 팀장에게도 하대하는 무영에게 시우는 술집에서 일하는 천민2쯤이나 되면 다행이었다.

“뭐 마시고 싶어? 너도 이거 마실래?”

멀리 보자면 무영이 시우를 술 내놓는 기계 취급하는 것은 좋은 현상일지도 몰랐다. 고객들과의 지나친 친밀감은 언젠가 독이 되어 돌아왔다. 바텐더에게 손님들은 사가 아닌 공이었다.

“아니, 나는 다른 거.”

그리고 사실 무영은 양호한 축에 속했다. 말하는 싸가지가 없을 뿐, 어떤 도련님들처럼 기물을 파손하거나 손찌검을 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거 뭐. 원하는 맛을 설명해봐.”

무영이 일행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도경과 왔을 때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져야 할 적정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남기긴 했었다.

오늘은 더했다. 자신이 원하는 맛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특정 술을 기억해 내려고 하는 것인지 무영의 일행은 쭈뼛거리기만 하고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5성급 호텔 바에선 매일 보기 힘든 유형의 손님이었다. 출장 온 외국인들이나 퇴근한 직장인들에게선 나지 않는 생생한 기운이 풍겼다. 티가 없고 건강한.

“레드 와인인데…… 단 거.”

무영이 바를 두드렸다. 시우는 냅킨을 내려놓고 두 남자 앞에 섰다. 일 년 전에 딱 한 번 바에 행차했던 대표는 가식이 도를 넘어선다고 느껴질 정도로 체면을 챙겼었는데 훨씬 어린 조카는 매너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잘 보면 옷차림에서부터 티가 났다. 흔히들 말하는 재벌 몇 세일 무영은 거의 지한처럼 입고 다녔다. 수십 수백 배 비싼 버전으로.

“들었어? 얜 레드 와인인데 단 거.”

대중없는 주문은 늘 피곤했다. 잠을 못 자 비몽사몽 한 날이라면 특히 더 그랬다. 와인 진열대 앞에 선 시우는 의외로 금방 해결책을 찾았다. 언제나 좋은 냄새를 풍기는 그, 한 번 보면 잊기 힘들게 생긴 손님이 잘 마셨던 레드 와인도 아주 달았다.

“그래서 좋은 모델 못 찾겠으니까 나보고 하래. 쇼핑몰 모델을. 미쳤지.”

“형 키 커서 물어본 거 아니야?”

코르크를 한 번에 따는 데 실패했다. 앞의 두 남자가 대화에 집중하느라 못 봐서 천만다행이었다. 시우는 다시 손에 힘을 주고 오프너를 눌렀다.

“내가 모델 하면 우리 집 영감이 나를 살려주겠어?”

성공했다. 드디어 잠이 다 깬 기분이었다. 네 시가 넘도록 지한이 귀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하기 전날 꼴딱 밤을 새우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설사 지한이 예정이 없이 외박했다 해도 알아서 들어오겠거니 하고 잤어야 하는 것을. 지한은 열다섯 살도 아니고 시우와 같은 스물다섯이었다. 뭘 하고 돌아다니든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할 수는 없었다.

“클럽 열었는데 안 죽었잖아.”

“그거야 자기한테도 좋은 부분 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클럽은 내 얼굴 안 팔잖아. 모델은 얼굴에 몸까지 나가서 안 돼.”

“그럼 얼굴 말고 몸만 나가게 해 달라 해. 형인지 모르면 상관없는 거 아니야?”

“그렇게 좋은 거면 네가 하세요.”

잠이 완전히 깬 것과는 별개로, 수면에 이어 당까지 부족한 몸은 조금만 방심할라치면 바로 힘을 잃었다. 떨리는 손으로 시음할 만큼의 와인을 따른 시우는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시음 먼저 해보실 수 있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무영의 일행이 두 모금 남짓한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는 턱을 끄덕이자 무영이 다시 시우에게 이걸로, 라며 주문했다. 말을 못 하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무영을 통해서만 의견을 전달하는 초면의 남자는 시우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와인 병을 잡아 기울이기에도 부족한 에너지를 지한의 생각에까지 나눠 쏟느라 그 이외의 대상에게까지 갈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한이 스물다섯 아니라 서른다섯이었어도 시우는 안심하고 먼저 잠들 수 없었을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말할 자격이 없었다. 연락이 닿지 않을 때마다 그가 누구를 때리고 있는지, 혹은 누구에게 맞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를 준비해야 감옥에 보내지 않을 수 있는지 미리 계산하는 습관은 절대로 가지고 살아가기 편한 요소가 아니었다.

「걔가 시우 너보다 작았으면 좋았을걸.」

어려서부터 사고치고 들어오는 데 일가견이 있었던 지한이지만 작년엔 유독 밖으로 돌았다. 지난여름 보육원 동기들이 시우의 생일을 미리 축하해주겠다고 마련했던 자리에 지한은 오지 않았다. 당일도 아닌데 웬 난리냐고 짜증 낼 것이 뻔해 아예 오라고 하지 않았었다.

「왜?」

「그래야 때려서라도 못 나가게 할 수 있었을 거 아니야.」

지한의 빈자리를 두고 참석자 중 하나가 뼈 있는 농담을 했다. 다들 웃는데 혼자서만 웃지 않으면 수상해 보일 것을 알아 따라 웃었지만 정말이지 웃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지한을 때려눕힐 능력이 없어 원통한 날들이 분명히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한 혼자 돌아다니지 않을 수 있게 붙잡아둘 수 있다면. 다른 사람도 안 만나고 그냥 집에 있게만 할 수 있다면. 얌전하게. 안전하게.

“너 아는 애 중에 모델 할 만한 애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자꾸 나한테 전화 와서 귀찮아.”

“형이 모르면 나도 모르지. 내가 아는 사람들이랑 형 아는 사람들이랑 거의 같은데.”

와인을 다 따라 넘긴 뒤에도 뭔가를 빼먹은 것 같은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무영의 일행이 와인을 꼴딱꼴딱 반 이상 마셨을 때쯤, 시우는 자신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알았다. 이름을 안내하지 않고 그냥 술만 줬다. 무영과 일행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와인의 이름 따윈 안중에 없어 보였다.

“그래도. 어, 나 전화 왔어.”

휴대폰을 들고 일어선 무영이 그때까지 풀고 있지 않던 목도리를 바에 대충 던져놓고 나갔다. 목도리 끄트머리가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혼자 남은 남자는 글라스 안의 와인을 들여다보느라 친구의 목도리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시우만이 방치된 목도리를 외면하지 않고 있었다. 복슬거리는 재질의 목도리는 디저트 위에 올라간 크림을 연상시키는 색으로, 음식과 인형을 동시에 떠오르게 했다. 남의 목도리 하나에 그렇게까지 세세한 감상을 남길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시우가 지한에게 사준 생일선물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실례합니다, 손님.”

들여다 봤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술에 과하게 집중해있던 눈동자가 위로 움직였다. 잠깐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찰나나마 분명히 남자는 시우를 쳐다보았다. 시우도 남자를 보고 있었기에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시우를 쳐다본 적도, 부르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는 듯이. 시우는 남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손님. 일행분 목도리가.”

목도리가 스르륵 밀려났다. 남자는 미동 없이 목도리를 보고만 있었다. 떨어진 뒤에도 주우려는 시도는커녕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테이블에 술을 갖다 주고 돌아오는 길이던 다른 직원이 목도리를 주웠다. 목도리를 건네받은 남자가 갑자기 인상을 썼다. 그러더니 못 보일 것을 보인 사람처럼 목도리를 무릎 위로 가져갔다. 아무리 봐도 불편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우는 남자가 한참 들여다보던 와인으로 주의를 돌렸다. 먹다 보니 처음처럼 맛있지가 않았나.

“와인은 입에 잘.”

“네, 네.”

떨어지는 목도리를 보고만 있을 땐 게으르기 짝이 없더니 시우의 말을 자를 때는 재빨랐다. 남자의 시선이 한 군데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시우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물러섰다. 혹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다른 바텐더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태어나 처음 본 남자가 시우와 눈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 까닭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무영이 앉자마자 일행에 의해 도로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무영의 귀에 대고 짧게 속닥거린 남자는 그 길로 바를 빠져나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있던 무영도 곧 계산하고 자리를 떴다. 거의 바로 새로운 손님들이 빈자리들을 메웠다. 무영과 그의 일행은 서서히 시우의 의식에서 존재감을 잃어갔다.

한 시가 다 되도록 지한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팀장이 오늘은 집에 어떻게 갈 것이냐고 물었다. 가끔 지한이 연락 없이 올 때도 있는지라 호텔 옆 편의점까지 나가봤으나 오토바이는 보이지 않았다. 팀장이 조수석에 올라타는 시우에게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넸다. 걔가 오늘은 많이 피곤한가 보지, 연락도 없이 안 오고. 시우는 그러게요, 하며 안전벨트를 맸다. 딱 까무러치고 싶을 만큼 졸렸다.

하지만 차가 한 시간 남짓한 걸리는 거리를 달려와 작은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설 때까지 그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내내 묵묵히 운전만 한 팀장은 차에서 내리는 시우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늘은 푹 좀 자라.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지킬 자신은 없었다.

거의 열두 시간 만에 돌아온 집 안은 불 켜진 곳이 하나도 없어 밤거리보다 훨씬 더 캄캄했다. 오토바이로 데리러 오지 않은 날이면 지한은 시우가 올 만한 시간에 맞춰 부엌 불을 켜놓았다. 온 집 안에 불이 다 꺼져있단 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지한이 잠들었거나, 나갔거나.

거실 불을 켠 시우는 혹시라도 잠들어있을 경우를 대비해 지한의 방문을 조심조심 열었다. 이불을 허리까지 덮은 지한이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시우와 끌어안고 자던 10대 시절에만 해도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 크게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잘 자던 지한이었다. 성인이 되고 혼자 자게 되면서부턴 번번이 이불이 발밑으로 내려가 있거나 바닥에 떨어져있곤 했다.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자 지한이 안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웅크렸다. 하루 종일 자고도 남았을 텐데 또 자는 걸 보니 전날 엄청 피곤했던 모양이다. 뭘 하느라 그렇게 피곤한 것인지가 미스터리였다.

새벽에 기어들어 온 지한을 붙잡고 물어보기야 했다. 왜 이제 왔느냐고,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도 지한은 내일 얘기하자는 답변만 돌려주었다. 그럴 때 붙들어봤자 죄 없는 물건만 부서지고 끝난다는 점을 모르지 않아서 놔줬다. 시우에게 미안해서라도 오늘은 말해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누가 방에 들어와도 깨지 않을 만큼 깊이 잠들어있을 줄이야.

들어올 때보다 더 조심히 나가던 중, 컴퓨터용 책상 위에 놓인 직사각형 물체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지한은 원래 휴대폰을 침대에 잘 두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부분은 휴대폰의 위치가 아니었다. 액정에 나 있던 수많은 흠집들이 사라져 있었다.

달라진 점은 또 있었다. 매끈한 액정 하단에 홈 버튼이 없었다. 수리된 것이 아니었다. 아예 다른 모델이었다.

시우는 지한이 잠들어있는 침대를 쳐다보았다. 고른 숨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35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집 안에서 느긋하게 앉아 머리나 바삐 굴리며 보내야 할 일요일을 망친 범인은 M그룹 문화재단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책의 출판기념회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직 관계자들에게만 뜻깊고 참석자들에겐 친하지 않은 지인의 결혼식보다 더 지루한 행사였다.

도경의 자리는 연단에서 가장 멀찍이 떨어져있는 테이블 중 하나였다. 눈도장이고 뭐고 골이 울리다 못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수백 명이 모인 장소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최대한 구석에라도 박혀있으려 고른 자리는 도경의 안녕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얘기가 와전된 것 같은데 그냥 의견 차가 좀 있었을 뿐입니다. 몸싸움 그런 건 없었어요]

오전에 영화감독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소현이 살아 있었다면 지한의 데뷔작이 되었을 영화를 촬영 중인 감독은 정말 많은 생각 끝에 연락을 드리는 것이라 강조했다. 돌려 말하느라 애썼지만 감독의 말은 결국 도경의 배우가 여전히 불성실하고 태도도 나쁘니 회사에서라도 군기를 잡아서 보내라는, 협박과 하소연이 다 들어간 부탁이었다.

배우를 잘 관리하지 못한 주제에 변명만 늘어놓기 바쁜 매니저의 태도는 두통을 악화시켰다. 글자만 봐도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아 대화창을 나온 도경은 때마침 새 메시지가 도착해 맨 위로 올라간 대화창을 엉겁결에 누르고 말았다.

[여자 쪽에서 고소한다고 했답니다. 일단 합의금 얘기 던져놨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도경이 환생시킨 것이나 다름없는 가수의 매니저였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더니 드디어 건수를 올렸다. 더 악화될 것도 없는 두통에 기름이 뿌려졌다. 도경은 휴대폰을 엎어놓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밥값 못하는 새끼들 때문에 조만간 자연 발화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숙취?”

비어있던 옆자리에 털썩 앉은 불청객이 물었다. 도경은 손가락 마디를 구부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달갑지 않은 진동이 목덜미에서부터 두피를 타고 올라왔다. 아침도 먹었고 빼먹은 약도 없었다. 며칠째 설쳤던 잠도 지난밤엔 과다 복용한 수면제의 힘을 빌려 다섯 시간 이상 깨지 않았다. 한두 시간밖에 못 자고 출근하는 날들에 비하면 오늘 도경은 아주 상태가 양호해 마땅했다.

“아니.”

신경성이었다. 어지간한 증상들은 약의 복용량을 늘이면 해결이 되는데 비해 두통은 무작위였다. 어떤 날은 한 알만 먹어도 괜찮아지고 어떤 날은 네 알을 먹어도 머리통을 벽에 갖다 박고 싶은 현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두통은 후자에 속했다. 아직 자해 충동이 일어나는 레벨에는 도달하지 않았으나 정자세를 유지하고 있기에는 무리였다.

“이거 끝나고 뭐 해?”

남의 안색이 좋든 말든 쿠키를 씹는 데에만 열중한 무영이 입가에 묻은 가루를 손가락으로 털어내며 또 말을 걸었다. 일정 없으면 너도 술 마시러 올래? 도경은 이안을 귀찮아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이안만 있을 때가 호시절이었다.

“무영아, 잠깐 나와 봐. 물어볼 게 있어.”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연단과 가까운 테이블에서 떠들던 에스더가 어느새 도경의 테이블 앞에 와 있었다. 제발 에스더 말대로 무영이 어디로든 갔으면 좋겠다는 도경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영이 귀찮다며 일어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에스더도 도경의 테이블에 합석했다. 앉고 나서도 찝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전염병 환자 취급받는 것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다만 오늘따라 조금 더 불쾌했다. 두통 때문이리라.

“너 이성호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왜?”

“다른 애들이 걔한테도 술 마시러 가자고 했더니 너 오면 안 온다 그랬다는데?”

“글쎄. 나한테 관심이 많은가 보네. 나는 별로 없는데.”

대화가 허무맹랑하게 끊겼다. 도경은 다시 손가락 관절로 이마 옆을 눌렀다. 보기 좋은 자세가 아니라 신경 쓰이긴 했지만 출판기념회에 강 회장과 황 원장은 둘 다 참석하지 않았다. 현경은 어디 앉았는지 머리꼭지도 안 보였다. 조금은 구부정하게 있어도 괜찮았다.

“아, 그리고 권도경. 너한테도 물어볼 거 있어.”

“뭐.”

“너 우지한이랑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식의 급습은 달갑지 않았다. 테이블 위로 손을 내린 도경은 허리를 쭉 폈다. 도경과 지한의 사이를 캐묻는 의도야 맞추기 쉬웠다. 도경이 지한을 어떻게 할까 봐 걱정인 것이었다. 꼴에 의리를 지키겠답시고 도경보단 소현이 가지고 놀던 남자의 편을 들겠다는 것인가 본데, 고작 준비한 전략이 정면 돌파라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어째서 도경이 정직하게 털어놓을 것이라고 여겼단 말인지. 머리가 나쁜 것도 죄였다.

“뭐가 어떻게 돼.”

“애들이 너랑 그 사람 봤다고 그러던데.”

“보면 안 돼?”

“크리스마스 때 둘이 같이 나갔다는 게 진짜야? 클럽에서.”

같이 나갔다는 것에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꼴을 보니 진실을 알게 되면 심장마비로 즉사할 기세였다. 못된 상상이 도경을 가로질렀다. 소현의 친구들에게 단체 문자라도 발송하고 싶었다. 며칠 전 도경의 거실 소파위에 지한이 누워 있게 된 과정에 대해. 엉덩이를 이리저리 틀어대면서도 차마 도경의 몸에는 손을 대지 못하더라고. 맞은 부위와 아닌 부위의 구분이 무색하게 온 얼굴이 발개져서.

출판기념회에 적합한 회상은 아니었다.

“본 사람 있다면서 나한테 왜 또 물어봐.”

“작년에 별장에서 이안이가 나한테 우지한 왔다고 전화했던 거, 그것도 지금 생각하니까 네가 시켰지?”

자꾸 얼굴로 올라가려 드는 손을 깍지로 잠갔다. 다음 주엔 병원에 가서 두통에 좋은 약을 추가해 달라고 할 셈이었다. 도경이 시도해보지 않은 진통제가 존재한다면 말이지만.

“걔가 먼저 널 찾았어. 우린 그냥 도와주기만 했고.”

에스더가 코로 웃었다.

“야, 나 소현이 친구야.”

“알아.”

“너 우지한이 누군지 아는 거 맞아?”

“너희들이 장례식에서 알려줬잖아.”

“뭐? 누가 너한테.”

“나 들으라고 다들 큰 소리로 말한 거 아니었어?”

무영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척했다. 제 아무리 큰 손이라 해도 눈까지 가려주진 못했다. 재미있어 죽으려고 하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뭐, 둘이 만나서 소현이 추모식이라도 따로 해?”

“해본 적은 없는데 그것도 괜찮겠네.”

“나 지금 너랑 말장난하는 거 아니거든?”

“왜 이렇게 마인드가 꽉 막혔어? 남자친구 둘이 모여서 추모할 수도 있지.”

에스더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가버렸다. 반동으로 넘어가려는 의자를 잡아채 세운 무영이 에스더 못지않게 경악했다.

“추모? 그거 내가 생각하는 뜻 맞아?”

“너는 왜 깡패 아들이랑 엮여서 쟬 이 테이블에 오게 만들어.”

두통과 에스더의 급습을 동시에 감당하느라 지친 머리가 언어를 덜 정제시켜 내보냈다. 무영과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던 성호의 집안이 철거 용역들과 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깡패란 표현은 싸고 노골적이었다. 입에 올리고 싶은 단어가 아니었다. 직접적으로는.

“듣는 깡패 아들 슬퍼.”

“멀쩡한 너희 엄마 깡패 만들지 마.”

“너 진짜 입에 그거, 침 안 바르고 거짓말 잘한다. 나는 못 해서 문제인데. 너한테 배워야겠다.”

무영의 도발에 일일이 넘어가 줄 시간이 없었다. 도경은 에스더와의 대화에서 말실수한 것이 있었는지 빠르게 되감기했다. 이미 도경과 지한이 짧게나마 함께 있는 광경을 본 사람들이 많다면 아예 지한이 도경의 정체를 다 안다고 오해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래야 도와준답시고 지한을 따로 불러내는 헛짓거리를 할 확률이 줄어들었다.

도경이 누구인지 알고도 개의치 않는 소현의 액세서리. 그런 인식이 박힌 뒤에도 소현의 친구들이 지한을 도와주려고 할까? 절대. 그들은 지한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진작 지한에게 도경을 조심하라고 충고해 줬어야 한다.

바닥을 구르며 싸워야 할 놈들끼리 손을 잡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뿐이었다.

“금요일 밤에 뭐 했어?”

금요일 밤이란 말에 본능적으로 반응할 뻔했다. 그날은 밤늦게 지한에게 전화가 걸려왔던 날이다. 계획에 없이 지한을 집 안까지 들인 날이기도 했다.

“남의 사생활에 관심 꺼.”

“그러고 싶은데 그날 내가 걔 너희 집까지 데려다줬어.”

더는 부정이 불가능했다. 금요일 밤에 무영이 도경의 집에 데려다준 인물은 지한일 수밖에 없었다.

“데려다준 게 아니고 갑자기 내린다고 해서 내려줬는데 너희 집 앞이었던 거긴 해. 그게 그건가?”

남의 속을 요동치게 해놓고 정작 무영 본인은 태평하게 포크로 케이크 조각을 짓뭉갰다. 도경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콱 주었다. 서로에게 눌린 손가락뼈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둘이 손잡고 기도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혹시 그랬어?”

“네가 때렸어?”

크림과 빵가루로 더러워진 포크가 마침내 접시 위에 놓였다. 무영은 어쩜 그런 의심을 할 수 있냐는 투로 완전히 다른 소리를 했다.

“공짜로? 너 나한테 레슨비도 안 줬어.”

“말해. 원하는 거.”

“골프 치러 가자.”

“농담하는 거라면 그만해. 나 지금 그럴 컨디션이.”

“이안이 너도 같이 치러 갔으면 좋겠대.”

이안만 있었을 때가 좋았다는 감상은 취소였다. 무영과 이안 둘 다 꺼지는 쪽이 도경의 삶에 이로웠다.

“알았어. 날짜 정해서 말해.”

“오. 진짜?”

“누가 때렸어.”

“이성호가.”

별개인 줄 알았던 사건이 되돌아와 지한과 연결되었다. 일 년에 한 번이나 볼까 말까 한 성호가 뜬금없이 무영에게 적대심을 드러냈는데 알고 보니 지한을 때린 놈이었다. 우연일 수 없었다. 무영은 성호와 지한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

“그건 정말 몰라. 우리 엄마 빌딩 있는 데 있지, 그 골목. 거기다 차 세워놓고 있는데 앞에서 싸움이 난 거야. 보니깐 룸 손님 같은 사람이 웨이터 싸대기를 막 갈겨. 근데 웨이터가 우지한이더라고.”

“그래서 끼어들었어?”

“이안이가 말리라고 해서. 이안이한테 뭐라고 하면 나 진짜 화낼 거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

당시 지한이 싸구려 중의 싸구려처럼 생긴 유니폼을 입고 있었던 맥락도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 갖다 버리고 싶게 생긴 유니폼은 호스티스 가게의 웨이터 복장이었고 제 아버지를 닮아 싸게 노는 성호는 그곳에 손님으로 갔다가 지한과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홀 안을 돌아다니며 성호를 찾는 수고는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쩜 양반 아닌 티를 그리 내는지 성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의 등장은 담배 냄새를 함께 끌고 들어왔다. 옆 사람의 말에 고개를 내젓던 성호가 멈칫했다. 입구와 가까운 테이블에 앉은 도경을 봐버렸으니 모르는 체할 수는 없고,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무영은 꼴도 보기 싫고. 충분히 알 만한 심정이었기에 도경은 관용을 베풀었다.

“안녕.”

성호뿐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도 도경이 먼저 건넨 인사에 당황한 듯했다. 도경에 관련해 왜곡된 정보 중 하나는 그가 남을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다.

도경의 테이블로 다가온 성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왜 때렸어?”

성호의 얼굴에서 어색한 웃음이 반쯤 사라졌다. 아직 도경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때리긴 뭘 때려.”

“금요일 밤에 사람 때리다 얘한테 걸렸다며.”

드디어 도경의 말을 알아들은 성호가 하, 하고 상체를 들썩였다. 순식간에 태도가 불량해졌다.

“네가 무슨 선생이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왜.”

“걔가 누군지 알아?”

“뭐. 내가 때린 애? 알 게 뭐야.”

“소현이 친구야.”

보는 눈이 하나둘 늘어났다. 도경이 혼자 머리를 싸매고 있든 말든 인사도 않고 있던 앞 테이블 인간들은 이제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쪽을 구경하기 바빴다. 차분하게. 도경은 몇 번이고 되뇌었다. 이목이 쏠릴수록 차분하게.

“너랑 결혼하기로 했던 그 장소현?”

“그래.”

“걔 친구가 왜 그런 데서 술이나 나르고 있어?”

그런 의문은 혼자서만 품어야지 남에게 떠벌리는 것이 아니었다. 친구도 아니고 적들에게 편협한 시각을 떠벌리다니, 역시 못 배운 놈다웠다.

“그런 데서 술이나 마시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데.”

연단 근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협주곡도, 사람들의 대화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위태로운 침묵이 퍼진 구역은 도경의 테이블 주위로 한정되었다. 도경을 말로 이겨 먹으려 들다간 같이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는 소문을 철석같이 믿는 것인지, 성호가 그냥 돌아섰다.

도경은 그 소문을 최초로 유포한 자가 소현이었을 것이라 여기고 살아왔다. 그와 말싸움을 가장 많이 해본 장본인이었으니까.

“어디 가? 나 말 안 끝났어.”

한 자리에 한참을 서있던 성호가 되돌아왔다. 한꺼번에 양주를 몇 잔씩 들이마신 사람처럼 안면이 벌게져 있었다. 성호의 뒤로 문이 열렸다. 뭘 하다 이제 기어들어 오는지 모를 이안이 도경을 발견하곤 반갑게 웃었다.

“묻는 말에 대답은 하고 가야지. 걔 왜 때렸냐고. 돈 주고 대학 졸업장 땄다고 해서 귀까지 먹는 건 아니잖아.”

모든 일이 대개 그렇듯 간발의 차이가 도경을 보호했다. 성호는 도경의 테이블 위에서 집어던질 만한 것을 찾느라 시간을 지체함으로써 이안이 올 때까지 기다려준 셈이 되었고, 덕분에 이안은 샴페인 잔을 움켜잡는 성호의 손을 포착했으며, 아주 뜸하게 나오는 순발력을 발휘해 도경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개새끼 뒈졌어.”

그다음 전개는 뻔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무영이 성호에게 몸을 날렸다. 뒤늦게 애새끼들의 난장판을 안 어른들이 문을 열었다. 홀 밖을 지키고 있던 가드들이 뛰어 들어왔다. 샴페인에 홀딱 젖은 이안이 어째야 하냐는 눈으로 도경을 쳐다보았다. 도경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두통이 싹 가셨다.

***

선물하기 적당한 물건이 떠오른 것은 직원들이 모두 나가 휑한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잠들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고 있던 한 점심시간이었다. TV에선 막장으로 유명한 드라마의 재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알코올중독에 가정폭력까지 고루 갖춘 주인공이 길길이 날뛰다 어린 자식의 휴대폰을 빼앗아 집어던졌다. 아역 배우의 공포에 질린 고성은 도경으로 하여금 최근에 본, 일부러 모서리 같은 곳에 대고 찍어 내린 것처럼 엉망인 상태의 휴대폰을 기억하게 했다. 노숙자도 사양할 상태의 기기를 계속 들고 다니는 지한에게 선물할 만한 물건으로 동일 기기의 최신 모델보다 더 적절한 후보는 없었다.

포장된 상자 안에 담긴 선물은 늦지 않은 시일 내에 주인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 주인이 한밤중에 남의 집 앞으로 찾아오지만 않았다면.

예정에 없다가 벌어져 버린 일이야 지한의 방문뿐이 아니었다. 클럽 사무실에서 놀랍도록 얌전히 입 안을 내주었던 지한이 도경의 거실에선 격하게 반응한 것도, 그러면서 제 허리에 올라탄 도경을 가만히 놔둔 것도, 딸꾹질을 시작한 것도, 도경이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지한의 입을 틀어막은 것도 다 예정에는 없던 일들이었다.

지한의 콧대는 손바닥에 닿는 것으로도 그 높이가 느껴졌다. 그를 갖다버린 부모의 생김새가 궁금해지는 바람에 지한이 놀랐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도경이 손으로 지한의 코와 입술을 덮은 목적은 숨을 못 쉬게 해서 기절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어린 아들이 딸꾹질을 할 때마다 코를 틀어막고 함께 숨을 참았던 황 원장을 따라 했던 것뿐이다. 커지다 못해 튀어나오려는 지한의 눈을 보고서야 손을 뗐다. 딸꾹질을 멈추게 해주려던 것이라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옮기진 못했다. 좁은 소파 위에서 어떻게든 몸을 뒤로 빼려 무리하던 지한이 굴러떨어진 탓이었다.

손부터 내밀고 본 데에 불순한 의도는 없었다. 오직 일으켜 세워주려는 의도 하나로 내민 손을 멍하니 보던 지한이 후다닥 일어섰다. 그의 바지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휴대폰이 거실 바닥으로 하강했다. 환한 전등 아래서 더욱 선명해진 액정 위의 흠집들을 봤을 때, 도경은 불현듯 옷 방 안에 모셔둔 상자 안의 선물을 떠올렸다.

「가지 말고 있어 봐요.」

도경이 거실을 벗어나기 전 던진 한마디에 지한은 정말로 나가지 않았다. 방에 들어갔다 나와 거실로 돌아올 때까지 꿈쩍 않고 같은 자리를 지키는 지한은 도경에게 영문 모를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참 말을 잘 들었다.

손을 내밀었을 때와 같이 불순하지 않은 의도로, 도경은 상자가 담긴 쇼핑백을 내밀었다. 쇼핑백을 받아 안에 담긴 상자를 확인한 지한이 황당하단 눈빛으로 도경을 쳐다보았다. 상자를 봤으면 그 안에 든 물건이 휴대폰이란 것도 짐작했을 텐데 어째서 어이없어하는지 도경으로선 선뜻 넘겨짚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도 넘겨짚어야 했다. 수많은 이들의 꿍꿍이를 넘겨짚고 먼저 선방해 여기까지 무사히 왔듯이.

얼마 걸리지 않아 그는 자신이 5분 안팎으로 저지른 실수들을 추려낼 수 있었다. 지한에게 왜 그러는지 말도 안 하고 입을 틀어막아 버린 것. 도망칠 기세로 일어선 지한을 내버려 둔 채 혼자 방에 갔다 온 것. 그런데 기껏 가지고 왔다는 게 휴대폰이라는 것.

백 번 강조해도 모자랐다. 도경은 마음먹고 남을 유혹해본 적이 없었다. 시도가 전무했으니 성공한 전적 또한 없었다. 따라서 조금 전까지 혀를 섞었던 상대에게 자연스럽게 선물을 건네기까지 두기 적당한 시간 차 같은 것은 모를 수 있었다.

상대를 넘어오게 하기 좋은 말과 행동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주는 영화는 많았어도 키스를 하고 나서 어느 정도 쉰 뒤에 다음 행동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영화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짓이었다. 모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봤자 하찮은 자기 위안밖에 안 됐다. 어디서부터 변명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자니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처럼 짜증이 났다.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때린 것도 아니고, 싫다는데 억지로 키스한 것도 아니고. 거기다 신입사원 월급으로도 못 살 최신 기종을 줬는데 어째서 변명을 해야 한단 말이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도경이 내면과 언쟁을 벌이는 사이 상자를 꺼내 열어본 지한은 어떤 표정을 지었다. 그것 또한 도경에겐 영 익숙지 않은 것이라 신속한 대응에 실패했다. 지한은 화가 나 보이지 않았다.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다.

억지로, 굳이 분류하자면 살짝 촉촉해진 눈 때문에 슬퍼 보인다고 해야 맞았다. 한편으론 안으로 말린 입술이 묘하게 웃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도경이 눈앞의 표정을 읽어내는 데에 골몰해있던 바로 그때, 지한이 또 예정에 없던 행동을 취했다. 간다는 말도 없이 돌아서서 현관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밖에 추워요.」

코트까지 들고 쫓아나왔는데도 버릇없이 굴면 더는 예쁘게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안 그래도 등신 호구인 척하느라 안면에 경련이 올 지경이었다. 더 수틀리게 하면 계획이고 뭐고 무영에게 굽실대서라도 외국 용역들을 고용해 코뼈부터 깨부숴 놓으란 오더를 넣고 싶어질 수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지한은 코트를 받아들었다. 열어본 상자가 담긴 쇼핑백은 손목에 걸쳐져 있었다. 신발을 구겨 신은 그가 몸을 반쯤만 튼 채로 도경을 바라보았다. 도경은 한결 평온해져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예정에 없던 일의 연속으로 혼란스러운 밤이었지만 현관 앞에 선 지한의 입에서 나올 말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상황에서 도경이 지한에게 들어야 할 소리는 고맙다는 말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한은 다시 한번 예정에 없던 선택지를 고름으로써 피곤한 밤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그대로 현관을 열고 나갔다. 고맙다는 말은커녕 가보겠다는 인사조차 없이.

도경은 닫힌 현관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혹시라도 밖에서 다시 열어달라고 할까 해서. 내가 멍청해서 까먹었는데 고마워요, 그런 말로 사죄하러 돌아오겠지 싶어서.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부터 도경은 잠기운도 물리치는 두통에 시달렸다.

***

겨울과 골프는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었다. 이한치한 운운하며 11월 초에도 필드에 나가는 권 회장 밑에서 자랐다지만 무영과 이안이 도경을 불러낸 토요일은 2월을 코앞에 둔 1월 말이었다. 이번 주말엔 추위가 주춤할 것이란 지난밤의 일기예보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추위가 얼마나 주춤하든 1월은 한겨울이었다.

겨울 실외 활동이 유난히 신경에 거슬리는 이유 중 하나는 옷의 두께였다. 몸에 걸친 옷의 부피가 커질수록 움직임도 둔화되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둔하니 남들 눈에는 배로 둔해 보일 것이다. 목도리도 잘 안 하는 도경에게 충전재가 많이 들어간 계열의 외투는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도경은 현관을 나섰다. 장갑도 잊지 않고 챙겼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라거나 싸가지가 없다는 평은 듣고 넘길 수 있어도 신뢰할 수 없단 평가는 용납 불가였다. 살면서 직접 몸을 부딪치고 함께 굴러야 하는 타인들은 아군보다 적인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적과의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보증은 신용도였다. 상대가 도경에게 사적으로 어떤 감정을 가졌든 거래만큼은 걱정 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유지하는 편이 현명했다. 그러므로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출입구 근처에 주차해놨던 차 안은 밤새 외부에서 들어왔을 영하의 공기로 얼어있었다. 문을 닫아도 입김이 나왔다. 히터를 가장 약한 세기로 틀어 둔 채 잠시 좌석 헤드에 머리를 댔다. 히터를 세게 틀어 시간을 절감할 수도 있었으나 인공적인 바람이 피부에 닿는 느낌이 싫었다.

진짜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고 도경의 차에 탔던 누군가 말했었다.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은 아니었다. 실은 그 말을 하던 누군가의 머리 모양과 향수까지 다 기억할 수 있었음에도, 도경은 강제로 의식의 흐름을 차단했다. 유쾌하지 않은 생각을 하기엔 비축된 체력이 없다시피 했다.

냉기가 어느 정도 가셨다. 핸들을 잡기에 앞서 장갑을 벗었다. 새로 구입해 빡빡한 가죽은 손을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잡아 뺀 손이 빨개져 있었다. 고요한 차 안에 진동하는 소리가 난입했다. 동시에 차량용 블루투스 화면에도 발신자의 이름과 번호가 떴다.

우지한.

그 세 글자를, 도경은 꽤 오랜 시간 두고만 보았다. 지한이 멋대로 찾아왔다 멋대로 뛰쳐나간 지 며칠이 지났는지 세어보기도 싫을 만큼 오래되었다. 기본 예의도 없는데 경우까지 없었다. 주제 파악은 그나마 하는 줄 알았는데 뻔뻔하게 저 좋을 때 연락하는 꼴을 보면 그것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대체 지한에게 얼굴과 몸 말고 다른 능력이 있기는 한 것인지 진심으로 의심이 갔다.

그러나 뒷골을 싸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부분은 따로 있었다. 사실 도경은 며칠 만에 지한에게 전화가 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13일 차였다. 무영의 주먹에 성호가 쌍코피를 터뜨린 지는 6일이 지났다. 날짜나 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운 것은 둘째 치고 낯설었다.

너무 낯설어서 뜨악했다. 단 하루도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고 마음에 담는 짓은 한가한 어린 애들에게나 어울린다고 여겼었는데 어느 순간 도경이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속에서 화한 기운이 올라와 끓는 물처럼 부글거렸다. 잠을 푹 못 자니 각기 다른 통에서 나온 약을 네 알이나 삼키고도 진정이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목을 양옆으로 꺾었다 세웠다. 큰 그림, 큰 그림. 권 회장의 아들로 태어나 배운 가장 훌륭한 교훈이 뭔가. 사소한 자존심에 목매다 대의를 그르쳐 개망신당하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여보세요.”

―아. 나, 아니…… 전데요.

“네.”

서로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름도 아니고 전데요, 라는 인사말은 또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오늘도 여지없이 자기 멋대로 구는 지한이었다.

―……집?

“주차장에 내려왔어요. 왜요?”

―그 아파트 앞에 와 있어서, 지금.

기어를 바꾼 도경은 천천히 핸들을 돌리며 지한이 하는 말을 해석했다. 도경의 아파트 앞이라면 그렇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 아파트 앞이란 어디인 것일까.

“그 아파트라고 하시면?”

―아. 그.

지한이 하나도 어려울 것 없는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도경은 퍼뜩 벽지부터 의자까지 죄다 더러운 고깃집을 떠올렸다. 거기서 지한이 고백하듯 털어놨던 말이 스쳤다. 도경 씨라고 못 부르겠다던.

“저희 아파트요?”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전화가 끊기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차가 지상으로 올라왔다. 차창을 뚫고 들어온 빛이 얼굴로 쏟아졌다. 경비실이 있는 출입구를 통과한 직후, 그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쇼핑백을 끌어안고 서있는 남자는 누가 뭐래도 지한이었다.

지한의 바로 앞까지 가 조수석 창을 내렸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지한이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르는 정류장 앞은 차를 세워두기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통화를 종료한 도경은 조수석 문의 잠금을 풀었다.

“타세요.”

조금 전처럼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말끝을 흐리며 복장 터지게 하면 진짜 머리채라도 뜯고 싶어질 것 같았는데, 어쩐 일인지 군소리 없이 바로 올라탔다.

지한이 도경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지한이 언제 한 번이라도 도경의 말에 틀렸다고 딴죽을 걸거나 싫다고 한 적 있던가. 툭툭 잘린 지한의 말투는 단순한 매너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의 언어능력 자체가 평균 미달이었다.

언덕을 내려와 갓길에 차를 세운 도경은 조수석을 보기 전에 시끄러운 속부터 가라앉혔다. 말도 없이 자꾸 아파트 앞으로 와서 연락하면 뭐 어쩌란 거냐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 만약 내가 밖에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다그치고 싶은 마음.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라도 할 작정이었냐고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

머잖아 그는 엇나가는 분노의 방향을 인지했다. 그가 느끼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지한의 안위를 향한 걱정에 기반하고 있었다. 터무니없었다.

“오전부터 저희집 앞엔 왜.”

“옷 돌려주려고. 이거, 코트요. 드라이했어요.”

뭘 잘 빌려주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일단 남이 사용한 것은 옷이든 책이든 도경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돌려받길 원하지 않아서였다. 어차피 버려질 코트가 담긴 쇼핑백을 지한은 소중하게도 끌어안고 있었다.

“조금만 늦으셨으면 저 없었을 뻔했는데 그땐 어쩌려고 다 와서 전화를 하셨어요.”

“친구 때문에 어차피 근처 가야 돼서, 가는 길에.”

도경의 관심은 영영 돌려받지 않아도 되는 코트보다 지한이 걸치고 온 옷에 더 쏠려 있었다. 빌어먹을 항공 점퍼. 사시사철 도경의 옷장에서 사라지지 않는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지한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날은 죄송해요.”

슬금슬금 기어 나오던 짜증이 주춤했다. 도경은 사고가 일시 정지된 기분에 빠졌다.

“그날?”

“내가, 아니, 제가 너무 정신없어서 급하게 나왔는데. 생각해 보니까 선물 받고 고맙다는 말도 안 하고 나와서. 근데 다 설명할 수 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도경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다짐이라도 새기고 온 것인지, 지한이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말을 이어갔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어요. 내가 전화하기 전에. 이 동네 지나기 전에, 다른 데서 일하다가, 약간. 싸움같이.”

“알아요.”

“알아요? 뭘…….”

지한의 이름이 떴던 차량용 화면에 다른 이름이 떴다. 무영이었다. 낭패였다. 지한을 처음 차에 태웠을 땐 미리 휴대폰과 차량의 블루투스를 끊어 놨었다. 오늘은 지한을 태울 것이라 예견하지 못했으니 당연히 연결된 상태였다. 통화 내용을 그대로 들려주게 생겼다. 최대한 짧게 하고 끊는 수밖에 없었다.

“왜.”

―언제 출발해? 아직 서울이야?

“곧.”

―올 때 편의점에서 요구르트 젤리 사다 줘. 두 개. 그 젤리 어느 편의점에서 파는지 알아?

마침 용건도 가당찮았다. 더한 요구를 하기 전에 미리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한이 듣고 있는데 너무 거리낌 없이 굴었단 자각은 끊고 나서 몇 초가 지난 뒤에야 들었다.

“어, 나는 그럼 여기서 내릴게요.”

“저한테 미안하시다면서.”

13일 만에 나타나서 달랑 코트만 주고 가겠다니, 그쯤 되면 순진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눈으로는 아쉬워 죽겠다는 빛을 쏴대고 있으면서.

“그냥 가시려고?”

지한이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미세하게 벌어진 입 안이 보일 듯 말 듯했다. 그러면…… 하고 그가 망설였다. 평균 이하인 언어능력이 이상한 쪽으로 튀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아까 말씀하신 그 친구, 오늘 안 만나면 큰일 나요?”

“그, 아니요, 뭐 그렇진 않을.”

“그러면 저랑 골프장 가서 점심 드실래요? 골프는 안 치셔도 돼요.”

“오늘? 지금?”

“미안한 값으로.”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가, 아예 깨물었다가 하던 지한이 머뭇머뭇 말했다.

“오토바이를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그, 빵 같이 파는 카페 주차장에 대놨는데 그건 어떻게.”

“누가 훔쳐 가면 하나 사 드릴게요.”

“아?”

“됐죠?”

지한의 입이 조금 전보다 더 벌어졌다. 그 상태로 한 템포 늦게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니 넋이 빠진 사람 같아 보였다. 본인은 모르는 듯했다.

오토바이에 관한 대화를 끝으로 지한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통화할 때 말곤 늘 도경의 차 안을 메우는 음악소리 덕분에 견디기 어려운 적막은 없었다. 게다가 도경은 머리를 바삐 굴리느라 지한에게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있었다.

미리 골프 클럽에 내려가 있는 무영과 이안에게 지한도 데려간다고 알려주기는 해야 할 텐데 당사자가 바로 옆에 타고 있으니 전화하기가 뭐했다. 무영이 주둥이를 어떻게 놀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이안이 더 안전했으나 그도 마냥 안심되진 않았다. 제 딴엔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시키지도 않은 미행을 하다 걸렸을 때부터 이안의 속내는 다 까발려졌다. 도경이 지한에게 순수한 호감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왜 신경을 쓰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미리 말해줘야 부작용이 덜하지 않을까. 매도 모르고 맞는 것보다는 알고 맞는 것이 더 나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전화를 걸었다가 왜 그 새끼를 데려오냐고 소리라도 지르면, 그랬는데 지한이 그 소리를 다 들어버리면 그건 더 엉망이었다. 이래서 즉흥적인 결정이 위험했다. 뭐든 매 단계의 계획이 철저하게 짜이기 전엔 실행에 옮기는 것이 아니었다.

“피아노 좋아해요?”

하도 생각이 많아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 한가한 고속도로 위의 차들은 간격을 유지하며 달리고 있었다. 도경은 조수석을 힐끗 보았다. 지한의 시선이 재생 중인 파일명을 볼 수 있는 화면에 가 있었다.

“듣기 편해서 그냥 틀어놔요. 어렸을 때 치기도 했고.”

“피아노를 쳤다고요?”

“네.”

전방을 주시하느라 지한이 뭘 어쩌고 있는지 다 보이지는 않았다. 종이 구겨지는 소리에 쓸데없이 손으로 쇼핑백을 누르나보다 예상만 했다.

“지한 씨는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그냥…… 아무거나.”

그 소릴 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한이 또 쇼핑백을 눌렀다. 머릿속에서 엉켜가는 생각들만으로도 복잡해 죽겠는데 소음까지 끼어드니 딱 기절할 맛이었다. 도경은 오른손을 뻗어 지한의 무릎 위에 있는 쇼핑백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들어서 뒷좌석 바닥에 던져버렸다.

시야 오른쪽 끝에 놀라서 운전석을 쳐다보는 지한의 얼굴이 걸렸다. 웬만해선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산만하게 굴고 싶지 않았지만, 그냥 두자니 찝찝했다.

조수석 쪽에 대고 짧게 눈을 접어 보인 뒤 다시 앞을 봤다. 황 원장은 그 나이에도 남들에게 눈웃음으로 칭찬받았다. 도경도 그녀처럼 웃을 줄 알았다. 웃음에 박해서 아는 이가 거의 없을 뿐.

지한의 입에서 피아노란 단어를 나오게 했던 곡이 끝났다. 바로 다음 곡이 재생되었다. 같은 작곡가의 곡이었다. 규칙적인 박자로 이어지는 선율이 단조로웠다.

“피아노 잘 쳐요?”

끝난 줄 알았던 주제가 다시 튀어나왔다. 의외였다. 지한은 평생 피아노와 연이 없을 것처럼 생겼다.

“안 친 지 좀 돼서 지금 치라고 하면 많이 틀릴 것 같아요. 외워서 칠 수 있는 것도 없고.”

“어울린다.”

“네? 뭐가요?”

“손가락. 피아노랑.”

도경은 핸들에 올라가 있는 자신의 양손을 쳐다보았다. 매일 보는 손이라 감흥은 없었다.

“그래요?”

“되게 길고, 그래서.”

지한의 말끝이 살짝 떨렸다. 듣기만 해도 긴장이 전해졌다. 평소에도 다리를 떨거나 숨을 몰아쉬는 등 정신 사나운 습관이 있긴 했다만 오늘은 어째 더 심했다. 도경은 핸들에 감겨있던 손가락을 살짝 폈다 접었다. 손가락이 길어서 뭐 어쨌다는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물어보자니 구차해서 관두었다.

“지한 씨 손도 크지 않아요?”

보통 키가 크면 팔다리가 길고 팔다리가 길면 손도 컸다. 대보지 않아서 정확한 길이는 모르지만 지한은 손가락도 길쭉한 축이었던 것 같다.

“커도, 쓸데가 없어서.”

“저도 별로 손가락 쓸데는 없어요.”

지한이 웃었다. 확실하진 않았다. 바람 소리와 함께 기분 좋게 터져 나오는 저음을 들었으니 웃었다고 여기기로 했다. 어떤 얼굴로 웃었는지, 웃은 다음엔 바로 무표정이 되었는지 아니면 계속 웃고 있는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룰을 지킴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는 인간만 아니었더라면 도경은 운전하는 내내 지한의 표정을 최소 백 번은 살폈을 것이다.

그러나 시속 100km가 가능한 도로 위에서 정면 아닌 방향을 볼수록 발작하고 싶어지기나 하는 어른으로 자랐기 때문에, 그는 꿋꿋하게 앞만 봤다. 편의점을 찾느라 휴게소에 들렀을 때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지한의 표정을 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지한은 그다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불쾌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불편한데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비논리적이었지만 그렇게밖에 안 보였다.

클럽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댔을 무렵엔 출발한 지 한 시간 반 이상이 지나가 있었다. 있는 줄도 모르게 조용하던 지한은 시동이 꺼지자마자 벨트를 풀었다. 계속 떠든 것도 아니면서 먼 거리를 용케 잠들지 않고 왔다.

아무리 햇살이 강한 날이어도 겨울바람은 맨살을 시리게 했다. 트렁크에서 골프 가방을 꺼내 세우던 중 지퍼가 도경의 손등을 할퀴었다. 손에 힘이 빠지는 찰나를 못 버티고 가방이 기울어졌다. 도경을 따라 트렁크까지 와 있던 지한이 몸으로 가방을 막아냈다.

“도경!”

더 늦게 들었으면 좋았을 목소리가 주차장까지 나와 도경을 마중했다. 짧은 무스탕에서 겨울 필드를 얕보는 패기가 돋보이는 무영의 손에 탄산수 병이 들려 있었다. 도경을 기다리며 라운지에서 죽치고 있었던 듯했다. 한시라도 빨리 손에서 떨쳐내고 싶은 편의점 봉지부터 내밀었다. 봉지를 받아든 무영이 팔을 벌렸다. 포옹이라도 하자는 듯한 자세였다. 도경이 몸을 뒤로 빼 피하는데도 징글맞게 다가서던 무영은 트렁크 문 뒤에서 지한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뭐야. 얘를 데려왔어?”

“도경이 형 벌써 도착했어? 길 안 막혔나 보네!”

클럽 하우스 문에 달린 풍경 소리는 곧 우렁찬 인사소리에 묻혔다. 인사소리만큼이나 우렁찬 발소리가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이안이 뛰어오는 사이 도경의 차 트렁크는 내려가고 있었다. 한달음에 차까지 온 이안은 정작 도경의 앞에 서자 활기를 잃어버렸다. 도경의 골프 가방을 끌어안고 서있는 지한을 발견한 것이었다. 지한의 등장에 본인도 분명 어느 정도는 놀랐을 것이면서 금세 태연한 기색을 되찾은 무영이 이안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나도 몰랐는데 도경이가 친구 데려왔어. 괜찮지?”

무영이 뭐라고 하건 말건 지한만 쳐다보던 이안이 이내 도경에게로 홱 눈을 돌렸다. 누가 보면 생사를 함께하기로 한 전우에게 배신당했다고 착각할 만한 시선이었다. 이안이 유연하게 대처하길 기대하진 않았지만 상처받은 역할을 표방할 줄도 몰랐다. 누누이 일깨워 주지만 도경은 이안의 소꿉놀이에 장단을 맞춰줄 의무가 없었으므로.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것 이상의 반항은 해본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르는 이안이 조용히 돌아섰다. 어깨가 쳐져있었다. 무영이 이안을 따라잡았다. 도경은 그들이 건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지한에게서 골프 가방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쟤는 신경 쓰지 마세요, 철이 없어서 가끔 저래요. 지한이 턱을 끄덕였다. 타의로 끌려와 홀대받은 사람치곤 의연했다.

전반 나인 홀은 무영의 욕설과 이안의 탄식이 거의 끊이지 않고 배경음처럼 따라붙었다. 도경은 그 사이에서 공만 치고 카트에 올라탔다. 혼자 카트 뒷좌석에 앉아있는 지한을 최대한 덜 심심하게 놔두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가능하면 무영과 거리를 두려는 이유에서이기도 했다.

무영은 승패가 걸린 일에 한해 성질이 엄청나게 더러워졌다. 도경도 승패에 집착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웠지만 그렇다고 무영처럼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제2의 인격을 드러내진 않았다.

“오늘따라 애들 상태가 좀 그러네요.”

9번 홀 그린에서 퍼팅에 실패한 무영이 신발 앞코로 잔디를 찍어 내렸다. 나이가 차고 나선 한국 사람들 앞에서 잘 안 쓰던 영어 욕도 랩처럼 연달아 지껄였다. 자기가 무슨 미국 마피아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기껏 골프장까지 끌고 와서 보여주는 꼴이 외국어로 화내는 무영 따위란 것에 창피해져 둘러대자 지한이 무슨 소리냔 듯 쳐다보았다.

“제 친구들이요. 원래 안 저래요.”

뻔뻔한 거짓말이었다. 도경의 친구들은 원래 그랬다.

“괜찮아요. 저런 사람 처음 보는 거 아니라서.”

“저런 사람이요?”

“영어로 욕하는 사람.”

도경은 지한의 앞에서 영어로 욕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알 것 같았기에.

골프채를 캐디에게 넘긴 무영이 그만 치고 클럽 하우스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안이 배고프다고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돌아보니 배고프다고 했다는 장본인은 아직도 그린에서 골프화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가운데 자리를 비워놓고 앉아있던 도경은 지한에게 붙어 앉았다. 이안을 가운데 자리에 앉히는 것은 썩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경의 손이 지한의 허벅지를 실수로 건드렸다.

손가락 끝에 너덜너덜한 청바지 구멍 사이의 맨살이 닿았다 떨어졌다. 지한의 다리가 움츠러들었다. 뒤이어 이안이 도경의 다른 옆자리를 채웠다.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충동적으로 손을 뻗을 뻔했다.

하우스로 들어온 무영이 이안을 데리고 디저트 진열대로 간 사이 도경과 지한은 먼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문과 가장 가까이 앉은 지한의 얼굴로 자연광이 쏟아졌다. 이마가 끝나는 부분에서 쑥 들어갔다 높게 뻗어나가는 코로 이어지는 옆얼굴은 아무리 봐도 한국인의 것 같지 않았다. 지한의 얼굴에서 국적과 동떨어지게 생긴 부위는 또 있었다. 눈. 폭도 좁지 않은데 위아래로도 컸다.

지한이 옆에 앉은 도경을 쳐다보았다.

“왜요.”

“보면 안 돼요?”

지한은 피부색이 어두운 편이라 도경에 비해 홍조가 도드라지지 않았다. 불공평했다. 어느 밤 빨개도 너무 빨개져서 잡아 뜯고 싶었던 자신의 귀를 도경은 잊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건.”

맘대로 해요. 뒤로 갈수록 지한의 말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차 안에서부터 그랬지만 필드에 나가면서부터 지한은 더 경직되었다. 단순히 도경과 붙어 있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필드에 나가기 전 예의상 지한에게도 골프를 치겠냐고 물었었다. 지한은 고개를 저었고, 도경은 더 묻지 않았다. 골프가 축구나 농구처럼 학교 쉬는 시간에 자연히 접할 수 있는 종목과 다르단 정도는 일반 상식이었다. 도경의 주변 인간들은 모를 확률이 더 높았지만.

“긴장하지 마세요.”

달달 떨리던 다리가 정지했다.

“제가 요새 잠을 잘 못 자서 피곤해요. 그래서 말이 좀 안 예쁘게 나갔을 수도 있는데…….”

“안 예쁘게 말했다고? 언제?”

오늘 여러 번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해 한 말이었는데 지한은 별 이상한 소릴 다 한단 반응이었다. 도경은 얼른 웃었다.

“요 며칠 사람들이 저 보고 화났냐고 물어봐서 지한 씨도 그러신 줄 알았어요. 아니면 됐어요.”

“긴장한 건 맞는데.”

지한이 허벅지 위의 손을 말아 쥐었다. 손톱에 긁힌 허벅지 표면 위로 빨간 선이 생겨났다.

“화났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선물이.”

“선물이요?”

“그런 선물은 처음 받아봐서.”

“아.”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고 그래서.”

끝까지 고맙다는 세 글자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 비슷한 소리를 2주 만에 들었다. 인류 최초로 엎드려서 절 받은 놈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도경은 그다지 깔끔하지 못한 뒷맛을 느꼈다.

“당연히 받아도 되죠. 제가 원해서 드린 건데.”

눈에 보이는 변화가 느리게 드러날 뿐, 지한의 피부라고 언제까지나 제색을 유지하진 못했다. 얼굴에 전체적으로 붉은 기가 퍼진 지한은 다시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무영과 이안이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왔다. 지한의 맞은편에 앉은 이안이 입에 물고 온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배가 고프다 할 땐 언제고 맥주와 비슷한 알코올함량의 사과주를 사 왔다.

“뭐 시켰어?”

“클럽 샌드위치랑 칼라마리. 아 클램차우더도 시켰다. 우지한 씨 해산물 알러지 있어요?”

주문을 마치고 와서 물어봐봤자 아무 소용없는 질문이었다. 다시 가서 메뉴를 바꿔줄 의향도 없으면서. 뭣도 모르는 지한은 고개를 젓기만 했다. 짜증은 도경만 났다.

네 남자가 둘러앉은 테이블에 편치 않은 정적이 감돌았다. 무영이 휴대폰을 꺼냈다. 지한은 계속해서 다리를 떨고 있었다. 해산물이든 고기든 빨리 먹은 뒤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겠다는 일정표를 세우고 있을 때였다.

“골프 왜 안 쳐요? 날씨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인데.”

이안이 말끝에 요를 붙일 상대는 지한밖에 없었다. 오늘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도 지한뿐이었다. 무영이 이안을 곁눈질했다. 휴대폰 액정 위의 손가락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칠 줄 몰라서.”

성의 없게 들리기는 해도 실속 있는 대답이었다. 칠 줄 모르니 안 친다. 말이 되고도 남는 설명이었다.

“골프를 칠 줄 모른다고?”

이안이 눈썹을 씰룩였다. 걱정이 되려 했다. 뛰어나지 않은 지능을 가진 이안은 가끔 일격에 상대를 보내버리곤 했다. 악의가 없어서 더 치명적인 말들이 있었다.

“모른다고.”

“안 친 지 오래돼서 감이 없어졌다는 말이야?”

“어떻게 치는지를 모른다고. 아예.”

지한의 다리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도경에게는 그 동작의 변화가 이안과 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증거로 보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안 쳐보진 않았을 거 아니야.”

뚝. 얼마 안 가 테이블도 요동치게 할 것처럼 떨리던 다리가 한순간에 멈추었다. 지한의 입가가 미세하게 비틀렸다. 더 놔뒀다간 지한이 이안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강이안. 안 쳐봤을 수도 있지. 왜 말을 그렇게 해.”

그렇다고 이안을 자극시킬 수도 없어서, 도경은 나름대로 좋게 말했다. 이안은 도경의 적이 아니었다.

입을 다무는가 싶던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화장실.”

하도 빨리 돌아서서 확실하진 않았지만 도경의 눈이 맞게 봤다면 이안은 울먹거리기 직전이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지한을 안 좋아하는 것까지는 알았고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안은 도경이 지한에게 접근하게 된 과정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지켜본 유일한 주변인이었다.

도경이 연애놀음이나 하려고 지한과 만나는 것이 아님을 잘 알아서 크리스마스 때도 무영의 사무실에 지한을 고이 숨겨뒀던 것 아닌가? 그때만 해도 알아서 잘하더니 왜 갑자기 유아처럼 구는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지한이 클럽엔 나타나도 되고 골프장에는 나타나면 안 된단 룰이 있는 것도 아닌데.

화장실로 사라지는 이안의 뒷모습을 지켜본 무영이 휴대폰을 집어넣고 도경에게 뭐라 하려 했다. 도경이 더 빨랐다. 그는 이안을 따라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반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예상대로 이안이 세면대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내가 뭘.”

“다 알면서 왜 그러냐고.”

묵묵부답이었다. 도경은 닫힌 칸이 있는지 확인했다. 전부 열려 있었다. 화장실 안에는 그들뿐이었다.

“너 김무영한테 말했어?”

“아니.”

“확실해? 아무것도?”

“안 말했어. 안 말했는데 자꾸 나한테 물어봐. 오늘 형이 쟤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더 물어보게 생겼어.”

무영이 자꾸 물어봐서 혹시라도 자신이 실수하면 다 지한을 데려온 도경 때문이라고 탓하는 것처럼 들렸다. 예고 없이 데려온 것은 사실이라, 도경은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나 너 말곤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너밖에 몰라.”

“응……. 그렇지.”

“너만 믿는다는 소리야. 알겠어?”

그 한 마디에 괜찮아지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안은 알겠다고 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도경을 두고 먼저 나가는 얼굴에서 더 이상 부정적인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혼자 남은 도경은 수도꼭지 아래로 양손을 들이밀었다. 온수가 손등을 때리며 사방으로 갈라졌다. 심한 굴곡 없이 뻗은 손가락을 적신 물줄기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손가락. 도경의 손가락을 묘사하던 목소리가 작게 귓가에 메아리쳤다. 손가락…… 피아노랑. 어찌 들으면 약간은 쉰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 갈라진 저음.

되게 길고, 그래서.

하, 하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자신의 웃음소리였음을 자각한 도경은 위아래 입술을 빈틈없이 붙였다. 설정 시간을 다 채운 수도꼭지가 작동을 멈추었다. 손을 쫙 폈다. 젖은 손이 번들거렸다. 확실히 손가락은 짧은 편보단 긴 편이 더 써먹기 좋았다. 도에서 한 옥타브 위의 미, 파까지를 동시에 눌러야 할 때라든가. 안으로 파고들어야 할 때라든가. 안으로.

깊숙하게.

차단되어 있던 라운지의 소음이 화장실로 훅 끼쳐들었다. 소음은 문이 닫히자마자 멀어졌다.

“자기들끼리만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저 두 사람.”

지한의 눈이 도경의 손에 잠시 머물렀다. 도경은 손을 내렸다. 손 여기저기 맺혀있던 방울들이 마디를 타고 손톱을 지나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도경은 벽에 붙은 페이퍼 타월 케이스 앞으로 갔다. 지한이 살짝 물러섰다. 뻣뻣한 종이가 순식간에 물기를 가져갔다. 종이를 구겨버린 도경이 지한에게 물었다.

“그럼 저희도 도망쳐 버릴까요?”

지한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여전히 긴장감이 풍겨나는 얼굴에 새로운 것들이 깃들었다. 걱정. 떨림. 들뜸. 흥분.

“네.”

기대.

#36

모든 첫 경험은 공평했다. 누구에게나 어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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