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Fight
#41
이안은 실눈으로 담뱃갑 상단에 인쇄된 그림을 보았다. 목에 구멍이 뚫린 흡연자의 사진 아래 청소년 판매 금지 문구와 담배연기에서 나오는 발암물질의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그는 담뱃갑을 아래로 내렸다. 카페 흡연실은 환풍기로도 해결되지 않는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돈만 있으면 피우는 것부터 물에 타 마시는 것까지 못 구하는 마약류가 없는 미국에서도 끝까지 담배만은 안 피워봤다. 건강 걱정보단 단순히 그 냄새가 싫어서였다.
생애 첫 흡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형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대화창 맨 아래에 있는 메시지는 이안이 세 시간 전 보낸 질문이었다. 메시지 옆의 숫자는 사라졌지만 도경으로부터 온 답장은 없었다. 십 몇 년째 씹혔으면 면역이 생기다 못 해 넘칠 만도 했는데 오늘은 영 회복이 안 됐다.
회복력이 낮아진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었다. 골프장에서 지한을 발견한 순간 이후 쭉, 이안의 정신머리는 제 기능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족히 두 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운전석과 조수석의 간격이 30cm는 될까 말까 한 차 안에서 단둘이 있었다는 점과 이안이 불렀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굳이 지한을 달고 온 도경의 선택 중 어느 쪽이 더한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둘 다 울분이 차오르게 한다는 점만 확실했다.
「너만 믿는다는 소리야.」
물론 이안만 믿는다던 도경의 얼굴을 떠올리면 제 아무리 거센 울분이라도 일시적으로나마 물벼락을 맞은 불처럼 연기만 남기고 꺼졌다.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효과였다. 이안은 저능아가 아니었다. 그가 살짝만 머리 아프게 군다 싶으면 같이 밥을 먹자며 관심을 돌려놓는 도경의 수법을 몰라서 매번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알면서도 도경과 함께 있고 싶으니까 속아 넘어가 주는 것이었다. 현실과 마주하면 죽은 줄 알았던 불씨는 도로 되살아나 타올랐다.
용기를 내 담배를 꺼냈다. 새하얬다. 그 긴 세월 도경과 지랄염병을 떨면서도 소현은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말로 풀었다. 그 새끼 죽이고 싶다, 죽이고 나도 죽어버릴까, 진짜 이번엔 끝이야. 급기야 이안은 소현의 심정을 쥐꼬리만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의리가 있지. 이안은 좁아터진 흡연실에 서서 고개를 내저었다. 도경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남들은 몰라도 그들을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본 이안은 알았다. 도경은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다.
「밤새 알려줬는데 왜 그걸 틀려. 너 지능에 문제 생긴 거 아니야?」
두 남녀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발단은 늘 사소했다. 짧은 방학을 맞이해 무영의 아파트에서 모였던 날은 음악 이론 시험을 다 맞지 못했다든가 두 개 틀렸다든가 하는 주제가 발단이었다. 외우는 건 자신 있다더니 왜 이론을 틀리고 그러냐는 소현의 말을 도경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내가 말해주지도 않은 시험 결과를 누구한테서 캐냈냐며 제발 스토커처럼 굴지 말라는 반격에 소현은 거의 머신건이 되어 나쁜 말들을 연사했다.
「너희 엄마가 날 뭐로 생각하겠어? 내 이름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그런 건 상관도 안 해? 내 시간은 너한테 시간도 아니지?」
그녀의 공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기 힘든 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소현은 먹칠될 만큼의 명예도 없는 고등학생이었다. 게다가 도경이 시험을 평소보다 못 봤다 한들 아무도 그걸 소현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소현은 학교 선생도, 사적으로 고용된 튜터도 아닌, 그냥 예체능을 잘하는 여자친구였다. 아무리 황 원장이 날카로운 여자라도 도경의 성적에 대한 책임을 동급생에게 돌릴 리 만무했다.
「우리 엄만 네가 뭘 해도 안 좋아해.」
언제나 도경의 편인 이안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저런, 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 말만은 안 하는 것이 나았을 테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만 달러짜리 테이블에 컵을 던져 깨트린 소현은 그 뒤로도 연달아 엄청난 소리들을 했다. 한쪽이라도 닥치고 있었으면 물건이 부서지는 것으로 끝났을 테지만 도경도 욕을 듣고만 있을 성격은 못 되었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모든 문장에 반박하는 태도는 소현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물건이 날아들어도 고개만 이리저리 피하며 끝까지 앉아있던 도경의 머리카락이 소현의 손에 잡혔을 때, 이안은 저도 모르게 악 하는 소리를 냈다.
집 안 물건이 부셔져 나가는 꼴을 구경만 하고 있던 무영이 뒤늦게 일어나 소현을 도경으로부터 떼어놓았다. 쉽게 포기할 소현이 아니었다. 그녀는 팔꿈치로 무영의 복부를 가격해 자유로워진 뒤 소파에 있던 도경의 가방을 들고 왔다.
「약은 먹어서 뭐 해? 너 그거 약으로는 못 고쳐. 알잖아. 평생 그 모양으로 살아야 돼. 근데 그런 네가 나보다 잘났다고? 너희 엄마 미친 거 아니야!」
남의 약병을 끄집어내 던지는 여자와 그녀로 인해 산발이 된 남자. 웬만한 사람의 눈엔 전자가 약으로도 못 고칠 병을 앓는 환자로 보였겠지만, 도경은 소현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다음 일어난 일은 지금까지도 거기 있던 셋, 도경을 포함해 넷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안은 도경이 하다못해 쌍욕이라도 하길 바랐다. 물리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은 도경에게 맞지 않는 방 안이었으니 차선책으로 평생 못 잊을 욕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도경은 정말 아무도, 소현도 예상치 못했을 짓을 벌였다. 다 뜯긴 머리로 꼼짝도 하지 않고 서있던 그가 창가로 걸어가서 창문에 머리를 냅다 들이박을 줄 대체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먼저 시비를 걸어놓고 피해자인 척하는 소현이나 악악거리기만 하고 도움은 안 되는 이안이 아닌 도경 자신의 머리를. 그 소중한 머리통을. 그날 무영이 뛰어난 순발력과 힘으로 도경의 허리를 낚아채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도경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러게, 진정으로 도경은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남자였던 것이다. 제 살에서 피를 내면 냈지.
「야, 저 정신병자는 네가 데리고 살든지 말든지 해.」
앰뷸런스에 오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경을 본 소현이 그렇게 말하기에 이안은 내심 좋아했다. 도경이 걱정되긴 했어도 일단 생명에 위협은 없다는 걸 확인한 후이기도 했고, 뭐가 어찌 됐든 도경의 여자친구인 소현이 그를 데리고 살라고 했으니 진짜 그래도 될 것 같다는 기분이 살짝 들었기 때문이다.
개학 후 다시 나란히 걸어 다니는 그 둘을 봤을 땐 뒤통수를 갈겨버리고 싶었더랬다. 둘 다.
그래도 그 모든 사건·사고들을 거쳐 여기까지 온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이안은 도경과 소현의 결혼이 싫지 않았단 것 같다. 소현과 싸우고 나면 그다음 며칠은 도경이 이안에게 조금 더 다정해졌었다.
어쩌다 그러는 것이 아니고 매번 그랬다. 다정해진다는 게 남들처럼 방긋방긋 웃어주거나 따듯한 말을 해준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야시장에 흔쾌히 따라와 주고 블록버스터를 싫은 내색 없이 함께 봐주는 정도로도 이안에겐 충분했다. 거기다 소현은 이안의 핏줄이었다. 도경이 그녀의 남편이 되면 평생 어떻게든 멀어지지 않을 수 있는 핑계를 얻는 셈이었다.
천생연분은 아닐지언정 도경과 소현이 결혼하길 바라며 살아왔다. 소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안은 한, 일 분 정도는 순수하게 그녀를 위해 슬퍼했다. 그다음부턴 현실적인 걱정이 밀려들었다. 만약 도경이 소현의 죽음을 끝으로 이안과도 멀어지게 된다면 정말 소현을 따라 죽고 싶어질 것 같았다.
끼익. 수리 기간을 놓친 듯한 문이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옆으로 열렸다. 흡연실로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이미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남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서있는 이안을 미심쩍게 쳐다보았다. 이안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빨간 원이 떠있는 대화창 중 한 대화창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성호가 우지한 연락처 물어보는데 알려줘?]
신중하게 대응해야 하는 질문이었다. 성호가 지한의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한다고, 무영에게 그 창피를 당해놓고? 보나마나 지한에게 화풀이하려는 의도였다. 당연히 안 된다고 답장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쓸데없는 부분이 의식의 정중앙으로 기어들어 왔다. 이안이 왜 지한에 관한 질문을 받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대변인도 아닌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메시지를 보낸 지 한 5초도 안 돼서 전화가 걸려왔다. 소현의 친구답게 에스더도 성격이 급했다.
“여보세요. 누나, 내 말은.”
―난 이제 우지한이랑 더 볼 일 없어. 그래서 너한테 물어봤는데 말을 왜 그렇게 해?
“그런 뜻이 아니었어. 미안해. 내가 지금 밖이라 정신없어서. 진짜야.”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앞으로 볼 일 더 있어도 내가 연락하기 싫어. 우지한 걔 내가 별론가 봐. 연락할 때마다 못 받을 전화 받은 사람처럼 반응했어. 기분 나쁘게.
피우란 담배는 안 피우고 흡연실에 머무르며 통화하는 이안에게로 쏟아지는 남자의 눈초리가 점점 더 이상해졌다. 이안은 목소리를 줄였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야, 걔는.”
―뭐가 원래 그래. 너랑은 붙어서 잘만 떠들던데.
“누나 기억이 왜곡된 거야. 걔 나한텐 더 싸가지 없어.”
―그럼 내가 연락해서 물어봐?
“아니.”
지한이 소현과 도경의 역사를 다 알고도 도경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라 오해하는 에스더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다간 사달이 나기 십상이었다.
―너한텐 더 싸가지 없다며?
“그래도 내가…… 내가 물어보고 알려줄게. 기분 나쁜 애랑 왜 연락해.”
―근데 이성호 얘는 왜 우지한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거야? 그때 무영이랑 싸우고 끝난 거 아니었어, 그 문제는?
“거기까지는 나도 몰라.”
―넌 아는 게 뭐야?
하도 속이 갑갑해서 담배에까지 도전하려는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덜어주진 못할망정 더했다. 가까스로 평화롭게 통화를 마친 이안은 손안에서 이리저리 구부러지다 기어이 부러지고 만 첫 담배를 재떨이에 버렸다. 제 담배를 다 태운 남자가 꽁초를 버리며 이안을 흘끗거렸다. 역시 어딘가 이상한 놈이라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남자가 나가자 흡연실은 다시 이안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새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이성은 간직하는 습관을 길러야 했다. 이안을 흡연실까지 이끈 걱정만 해도 그랬다. 침착하게, 어른스럽게 생각해보면 도경이 지한과 자주 만난다는 것만으로 불안해할 근거는 없었다. 지한은 어쩐지 몰라도 일단 도경이 지한을 좋아하기란 불가능했다. 지한처럼 못 배운 데다 없기까지 한 놈은 도경과 교감하려면 죽고 다시 태어나야 했다.
인간적 호감이란 가능성을 지우고 나면 남은 것은 성욕뿐인데, 말이 안 되긴 피차 마찬가지였다. 지한은 남자였다. 남자가 남자에게 품는 감정을 진지하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도경이 이안을 여태 가까이에 뒀을 리가 없다. 일례로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치던 여자 후배가 도경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난 적 있었다. 소문에 불과했음에도 도경은 그 후로 시내 도서관만 다녔다.
소현이 그 후배와 싸울까 봐 미리 차단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도경은 성가신 일을 뿌리부터 잘라내고 싶어 했다. 그런 그가 이안을 내버려두는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라서. 도경은 동성이 자신에게 품을 수 있는 감정과 욕망의 종류를 다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본인이 남자에게 끌리지 않는 부류라 나오는 무지일 터. 그러니 도경과 지한이 아무리 오랜 시간을 단둘이서만 보내도 그런, 그런 짓만은 하지 않는다고 봐야 했다.
그런 짓. 은밀한 뉘앙스가 담긴 표현은 원치 않는 회상을 불러왔다. 클럽 하우스에서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지한. 그런 지한을 마치, 애교 부리는 대형견 보듯 바라보던 도경. 그들이 풍기던 이상야릇한 공기는 끝내 끔찍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도경에게 키스하는 지한.
스스로가 만들어낸 최악의 상상을 지우기 위해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빨아들인 이안은 기침을 하다 뒤로 넘어갈 뻔했다. 야심차게 꺼내든 담배는 단 한 모금을 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그 길로 카페를 빠져나왔다.
더 이상의 상상은 위험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지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가 당한 수모를 되새겼다. 어찌나 빠르게 이안을 벽으로 밀어붙이는지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굳이 되새기지 않아도 잘만 기억났다. 기억나는데도, 이안은 지한에게 달려들고 싶어졌다. 실행으로 옮겨져선 안 될 바람이었다.
#42
팀장의 차는 평소처럼 아파트 건물 바로 앞에서 시우를 내려주었다. 따라서 발길을 돌려 건물과 멀어진 것은 온전히 시우의 선택이었다.
새벽 세 시의 편의점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앉아서 휴대폰으로 열심히 뭔가를 하느라 시우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시우는 카운터를 지나쳐 냉장고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격이 제일 싼 캔을 아무거나 골라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았던 시우는 한 걸음도 못 떼고 돌아왔다. 캔보다 큰 병으로 콜라를 하나 집었다가 다시 작은 캔 두 개로 바꿨다. 양이 많으면 김이 빠지기 쉬우니 적은 양으로 두 번 마시는 편이 나았다.
“봉투 20원인데 드려요?”
“안 주셔도 돼요.”
초콜릿이나 바닐라 같은 단맛은 좋아하지 않는 지한이 콜라는 주는 대로 잘 마셨다. 오죽하면 그를 좋아하던 다른 학교 여학생이 꽃 대신 콜라 바구니를 만들어 배달시켰던 적도 있었다. 지한에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한 여자는 그 애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기도 했다.
지한은 그 많은 콜라를 바구니 째 시우에게 넘겼다. 바구니를 대신 전달해준 옆 반 애가 보는 데에서. 지한을 볼 때마다 숨은 죽여도 눈 마주칠 배짱까지는 없었던 같은 학교 여자애들이 입이 없어서 지한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마주치는 애들일수록 잘 알았다. 고백이든, 선물이든 받아주지 않을 지한을.
음료가 든 봉지를 손목에 끼우고 단지로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추웠다. 지한과 함께 걸으면 20분도 금방인데 혼자선 고작 1, 2분이 길었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지한은 어쩌다 따로 외출한 시우가 조금 늦으면 보육원 밖에까지 나와서 기다렸다.
누구를 만나고 왔는지, 뭘 했는지 꼬치꼬치 물어보고 싶은 속내를 못 숨기고 입만 꾹 다문 모습이 덜 자란 애 같아서 웃음을 참고는 했었다. 10대 시절의 지한은 20대 중반이 된 지금보다 더 말주변이 없었다. 외국에서 살다 왔냐고 물었다가 한 대 맞은 놈도 있었다.
「네가 다 해주니까 걔가 이 나이 먹어서도 정신을 못 차리지. 원래 동물도 필요해야 배우는 거야, 화장실 가리기든 묘기든.」
지한은 참석하지 않았던 생일 파티에서 술에 취한 동기 하나가 한 말이었다. 지한이 시우보다 작았으면 때려눕혀서라도 못 나가게 할 수 있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던 자리이기도 했다.
너희도 기억나, 우리 유치원 다닐 때? 우지한 화장실 가고 싶다는 것도 얘가 대신 말해 줬었잖아. 술기운을 빌려 그간 참아온 오지랖을 쏟아내는 친구의 주정에 불쾌해하는 동기는 없었다. 몇몇은 웃었고 다른 몇은 시우를 배려해서인지 애매하게 안주나 술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쪽이든 시우가 다 해줘서 지금의 지한이 탄생했다는 의견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건 지한이가 낯을 많이 가리니까.」
「난 시우 네가 잘못했다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완전 그 반대라고. 넌 지금까지 걔한테 너무 잘했어.」
지한을 미워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보육원 동기 중 지한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시우와 지한을 잘 알 뿐이었다.
「이제 걔한테 그만 잘해도 된다고.」
오랜 시간 한 지붕 아래서 둘과 함께 먹고 자고 씻으며 자란 동기들이 가진 오해가 하나 있었다. 시우는 지한에게 어떤 부채 의식을 느껴 잘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상대에게 의무감으로 헌신하기에 20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사람이 움직여야만 불이 들어오는 다른 층들과 달리 아침이 될 때까지 항상 밝은 상태를 유지하는 1층은 불안정한 심신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엘리베이터 안 역시 충분한 밝기를 유지했다. 작게 숨을 내쉰 시우는 바뀌는 숫자를 주시했다.
20년 전만 해도 세상은 지금처럼 24시간 내내 밝지 않았다. 소등된 방 안에 누운 어린아이들은 서로의 웃음소리를 동료 삼아 어둠이 주는 공포를 잊고 잠들었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었다.
지한은 아무리 많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어도 어둠이 닥치면 안심하지 못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시간도 주지 않고 떨기만 하는 그에게 먹히는 자장가는 노래가 아니라 시우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또래보다 길었던 몸을 팔로, 다리로, 온몸으로 감으면 늦든 빠르든 아침이 오기 전엔 잠이 들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후에도 이어진 둘의 습관을 학교에 소문낸 녀석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다. 지한보다 시우가 먼저 잠드는 밤도 허다했다. 잠들기 위해 서로의 체온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선 사실상 둘 다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둘만의 비밀이었다. 둘의 편이었던 동기들조차 시우 없이는 자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지한 때문에 다 큰 사내자식들이 끌어안고 잔다고 생각했다. 지한이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은 시우도 지한 없이 잠들지 못한다고. 그랬다. 시우도 안 좋은 소릴 들을까 봐. 안 좋은 소리는 이미 실컷 듣고 있는 자기나 듣겠다는 그런 마음.
지한은 남들이 판단하는 것보다 꽤, 많이, 엄청나게
순진했다.
집 안이 어둡지 않았다. 부엌 불이 거실의 윤곽을 비추고 있었다. 지한이 깨어있을 줄 알고 비닐봉지를 부스럭거리며 부엌으로 간 시우는 뜻밖의 광경과 마주했다. 식탁 위에 엎어져있는 지한의 머리통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부러진 왼쪽 팔에 뺨을 기댄 채 잠든 그의 오른쪽 팔은 식탁을 가로지르며 쭉 뻗어있었다. 자세히 보면 체육관에서 얻은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는 손 아래 휴대폰이 깔려 있었다. 저를 깔아뭉개고 있는 손과 달리 새 전자기기는 미세한 흠 하나 달고 있지 않았다.
음료가 담긴 봉지를 빈 의자에 내려놓고, 가벼워진 손으로 미동 없는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좁아터진 침대 위에서 함께 잠들어야만 했던 시절엔 먼저 잠든 줄 알고 지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는데 알고 보니 깬 상태였던 적도 가끔 있었다.
그럴 때면 지한은 눈을 크게 떠 자신이 잠들지 않았음을 알렸다. 왜 만지느냐고 묻는 경우는 없었다. 달빛이 스며들어 시커멓지만은 않은 방 안에서 성견이 되기 직전의 개를 닮은 눈으로 시우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동그랗고 커서 예뻤던 눈은 5년이 10년으로, 10년이 15년으로 그리고 15년이 마침내 20년으로 늘어감에 따라 모양을 달리했다. 순함을 잃은 눈매엔 딱 그만큼의 과격한 기운이 들어섰다.
그래도 시우에겐 여전히 보였다.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을 차마 내보이지 못해 망설이는 매 순간 5년, 10년 15년까지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버리는 지한의 눈.
신음이라기엔 너무 작고 한숨보단 확실히 큰 소리를 낸 지한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깨지는 않았다. 잠꼬대였던 것 같다. 그새 지한의 손이 뭘 건드렸는지 깔린 휴대폰 액정이 환해졌다. 시우는 지한의 손으로부터 반 이상 벗어난 휴대폰 윗부분을 잡아 살살 빼냈다.
밖에서 찍은 것 같긴 한데 도통 어디인지 알아보기 힘든 사진 위에 시간과 날짜가 떠있었다. 시우와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비밀이 뭔지 모르고 살던 지한의 휴대폰이 잠긴 지도 한 일 년쯤 되었다. 새 휴대폰에도 잠금을 걸어놨을 것이다. 그러니 잠금 해제를 시도해보는 것만으론 죄는 아니었다. 어차피 안 풀릴 테니.
손끝에 밀려난 대기화면이 사라졌다. 다음 순서로 액정을 차지한 것은 기대와 달리 비밀번호나 지문을 요구하는 화면이 아니었다. 정리되지 않은 아이콘들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있는 화면은 분명 홈 화면이었다.
시우는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휴대폰 자체를 잠가놓지 않았다면 메신저는? 배경화면 구석에 메신저 아이콘이 처박혀있었다. 누르자 채팅 목록이 떴다. 아는 프로필 사진도 있고 모르는 프로필 사진도 있었다.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은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는 맨 위의 대화창이었다.
[이 사진도 잘 안 보이는데. 놀리려고 일부러 그러시는 건 아니죠?]
미리 보기 옆으로 대화창에 쌓인 총 메시지 수를 가리키는 숫자가 떠있었다. 3. 빨간 꽃들이 잔뜩 꽂혀있는 병. 모르는 프로필 사진이었는데, 그 옆의 세 글자는 모르는 이름이 아니었다. 권도경. 단번에 떠오르진 않아도 분명 아는 이름이었다. 시우는 하루에만 수십 명의 데이터를 새롭게 받아들이느라 과부하가 걸린 뇌를 채찍질했다. 누구였지? 누구더라. 기억해내. 빨리. 착취당한 뇌가 팽팽 돌아갔다.
「도경이, 혼자야?」 「권도경이 오토바이 뒤에 타는 거 죽기 전에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진짜요? 지한 씨랑 친구세요, 시우 씨?」
기억났다. 뜬금없이 지한의 술을 대신 주문해 황당함을 안겼던. 알고 보니 제작사 직원이라던. 일개 직원이라기엔 머리도, 차림새도, 생김새도, 말투도, 손동작도 심지어는 냄새까지 귀한 티가 나는. 얼마 전에는 멀쩡히 대화하다 말고 갑자기 틱 장애가 온 사람처럼 미친 듯이 컵받침을 두들겨 대서 팀장까지 놀라게 했던, 시우에게 손을 잡히고서도 정작 본인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단 태도를 보였던. 갑자기, 정말 갑자기.
지한의 이야기를 하다 말고.
휴대폰 화면이 꺼졌다. 그리고 거의 바로 지한이 손을 움직였다. 시우는 얼른 휴대폰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양쪽 손을 움찔대던 지한이 느리게 상체를 일으켰다.
“……뭐야. 언제 왔어.”
“방금. 들어가서 자지 왜 여기서 그러고 있어. 불편하게.”
“너 기다리다가.”
잠깐 눈만 감았는데…… 하고 중얼거린 지한이 고꾸라지듯 식탁에 이마를 박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이어지다 얼마 못 가 끊겼다. 부엌이 다시금 고요해졌다.
시우는 집 안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동일한 상태로 돌아간 지한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반응이 없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빗어 내렸다. 손가락을 통과시키는 머릿결이 부드러웠다. 그리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다 타고 내려온 손가락은 이내 휑한 목덜미에 닿았다. 지한의 맨살이 시우의 손바닥에 아낌없이 체온을 나눠주었다. 뜨끈했다.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성실하게 초를 샜다. 째깍, 째깍, 째, 깍 째 깍 째 깍.
아무런 보호막 없이 드러난 목덜미 위에 올라가 있는 다섯 손가락이 일제히 힘을 주었다. 살가죽을 잡힌 지한이 낮게 신음했다. 아.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그는 눈을 떴다. 급소를 함부로 움켜잡은 대상에게 보내는 것치곤 너무 경계심이 없는 눈빛이었다.
“들어가서 자.”
“아, 신경 끄고 네 할 거 해.”
“너 들어가서 자야 내가 씻지.”
있는 대로 인상을 쓰긴 했어도, 어쨌든 지한은 일어났다. 눈을 거의 감고 움직이는 와중에 휴대폰은 잊지 않고 챙겼다. 비척거리며 부엌에서 사라지는 뒷모습을 시우는 끝까지 지켜보았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알고 싶어졌다. 오늘밤 지한은 시우 없이 빨리 잠들 수 있을까?
시우는 그러지 못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