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Sweep
#46
줄어들지 않는 술을 앞에 두고 고사 지내던 무영은 귀를 의심했다. 바 스피커에서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재즈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총지배인한테서 선곡이 너무 중구난방이라는 잔소리를 들었다더니, 앞으로는 ‘Greatest Jazz Hits of All Time’ 같은 타이틀의 앨범 목록을 그대로 베껴와 재생할 계획인 듯했다. 재즈는 무영이 블루스와 더불어 자장가보다 더 수면 효과가 좋다고 여겨온 장르였다. 잠시라도 멍하게 만들어줬으면 지루하건 말건 안중에도 없었을 음악이다. 그러나 어째 오늘은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다.
―형 때문에 도경이 형이 나까지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 어떡해?
범인은 이안이었다. 그에게 시달린 여파로 환청까지 들렸다. 한국과 일곱 시간 차이 나는 나라에서 머물렀을 당시엔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 일부러 새벽까지 기다렸다 전화를 거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거늘. 이제는 제발 그만 좀 들렸으면 좋겠다는 복에 겨운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만큼 변덕스럽고 간사한 것도 없었다.
「걔가 너를 어떻게 안 본다고 해. 너 아니면 걔 친구 없어.」
그 새끼가 너를 안 보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라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무영은 대사를 읽는 심정으로 이안을 달랬다.
―형은 도경이 형 친구 아니야?
「아니, 친구지. 무슨 말이야.」
―나 말고 친구 없다며 방금?
「그건 그냥 표현. 그 뭐야 강조 그래 너희 사이를 강조하는 말이었지, 진짜 마음이 아니라.」
―몰라. 형이 빨리 도경이 형한테 사과하고 해결해.
진정되기는커녕 히스테리 지수만 증가한 이안이 버릇없게 전화를 끊어버린 지도 어느덧 두 시간째를 기록하고 있었다. 메신저로 무영을 줄기차게 쪼아대다 전화까지 해서 짜증 내는 사람에게 너 회사에서 매일 이러고 있다간 시말서가 아니라 사직서를 써야 할 거란 조언은 굳이 하지 않았다.
지한의 연락처를 달라며 애꿎은 이안을 달달 볶는 성호 새끼가 짜증 나서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라고 스튜디오 주소를 불러준 게 뭐 그리 큰 죄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안은 잔뜩 심통이 났다. 심통 난 애는 어르고 봐야 했다. 그 전엔 아무 말도 안 통했다. 이 말 저 말 하고 싶은 말의 90프로는 아끼느라 씹어댄 입 안이 아직도 너덜거렸다.
환청과 지루한 음악 사이에 껴 고문당하는 동안 얼음이 너무 많이 녹았다. 분명 머리로는 새 술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손은 잔을 들어 입가에 대령했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더 마시지 않고 글라스를 바에 내려놓았다. 큰 소리를 내려는 의도는 없었다. 어쩌다 보니 소리가 크게 났다. 가까이 서있던 바텐더가 무영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시선을 피하는 솜씨가 자연스러웠다.
그렇기는 한데. 무영은 기다란 유리잔 닦는 데 여념이 없는 바텐더에게 관심을 돌렸다. 방금 그건 왠지 무영이 낸 소리 때문에 눈이 마주친 것이 아니라 한참 전부터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근거는 없었다. 하필 도경이 이상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 바텐더였다. 이안과 왔다가 갑작스레 자리를 떠야 했던 날 이후로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지라 수상한 바텐더에 대한 추리는 깜박하고 있었다.
징징대는 이안의 목소리가 또 커졌다. 추리고 뭐고 환청부터 없애야 가능했다.
무영은 목을 양옆으로 꺾었다. 운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무게를 떨칠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어쩐다. 아직 기다리는 상대가 도착하려면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다. 클럽으로 직행하기도 글렀다. 꼼짝없이 남은 시간을 혼자 앉아서 괴로워하며 보낼 운명이었다.
딱히 할 것도 없겠다, 무영은 빈 의자에 올려뒀던 가방 안을 확인했다. 집에서 나오기 직전에 이안의 전화를 받는 바람에 겉옷도 안 걸치고 나올 뻔했다. 그 정신으로 잘못된 가방을 들고 왔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가방 안엔 빅토리야가 호텔 대표에게 주라며 직접 챙겨준 선물이 들어있었다.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다는 공예품이라는데 무영은 전혀 관심 없는 분야라 열어보지도 않았다. 막내 작은아버지인 호텔 대표는 유일하게 무영을 무시하지 않는 친가 사람이었다. 그런 것에 감동받을 나이는 지난 지 오래였지만, 이날 이때까지도 빅토리야는 아들의 동아줄이 되어주었던 단 한 사람에게 매번 선물을 보냈다.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직접 만나 정중하게 전해줄 것을 당부해 가면서.
덕분에 대통령만큼 바쁘다는 대표님을 기다리느라 바에 죽치고 있게 되었다. 이안이 지랄거리는 환청을 떨치지 못해 아픈 골을 처리하지 못한 상태로. 또 지랄하면 그땐 진짜 확 한 대 때려버릴까 생각도 해봤다. 물론 무영은 이안을 때리지 못할 것이다.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바였다. 아무리 변덕스러운 마음이라도 본질까지 쉽게 변하진 않았다.
그런데, 누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지.
그 기분은 착각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무영은 고개를 똑바로 하자마자 바텐더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쳐다보고 있던 것은 또 그 바텐더였다. 이름이…… 분명 몇 번이고 봤는데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명찰 위의 이름을 빠르게 훑었다. Shi Woo Lee. 이시우.
이번에도 바텐더가 먼저 눈을 피했다. 이리저리 튀던 무영의 집중력이 드디어 한데 모일 기미를 보였다. 그래서 도경은 대체 왜 저 자라다 만 것처럼 생긴 바텐더만 가까이 올라치면 목소리를 줄이거나 아예 말을 아꼈나. 원래도 언성을 높이는 경우는 없는 인간이라지만 그렇다고 도경이 언제 하고 싶은 말을 참거나 미루는 스타일이었나. 죽어도 아니었다.
무영의 머릿속이 도경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도경으로 차오르다니 어쩐지 이안에게 빙의한 기분이었다. 이안은 24시간 중에서 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이런 상태로 지내는 걸까? 도경을 생각하느라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얼빠진 놈이란 평가를 들으면서? 그러니까 점점 히스테리가 늘어 아까처럼 구는 것이었다. 한 10년 후면 제2의 도경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끔찍했다. 도경으로 변한 이안을 보느니 한국 여권을 폐기하겠다.
정신이 피폐해졌다.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남은 술을 들이켰다. 얼음이 녹아 밍밍함에도 불구하고 수월하게 넘어가질 않았다. 술이 안 받는단 징조였다. 그러고 보니 도경에게 생일 선물로 특별히 센 술을 골라 줬건만 여태 술에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없었다. 안 마시고 그날 바로 버려서 아예 맛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도경은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 뭘 줘도 고마워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꽈서 들었다.
그건 그렇고, 또 쳐다본다.
더는 봐줄 기분이 아니었다. 무영은 글라스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야.”
“네, 손님.”
“내 얼굴에 뭐가 있어.”
“……예?”
야, 야 해도 영업용 미소를 잃지 않던 얼굴이 살짝 당황하는 빛을 드러냈다. 웬 미친놈이 걸렸다고 생각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영은 당장 머리꼭지까지 쌓인 스트레스를 풀 곳이 절실했다.
“뭐가 보이냐고. 내 얼굴에 뭐 있어.”
술도 잘 만들고 손님 응대도 잘해서 인기가 많다던 바텐더는 멍청히 무영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더 인내할 여유가 없었다. 무영은 검지로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이게 뭐야.”
“……눈, 이요?”
“그리고. 또 뭐 있어 내 얼굴에. 눈만 있어?”
바텐더가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말했다. 눈썹이랑, 코랑, 입…….
“그거 말고 또 있어?”
“없습니다.”
“근데 왜 나를 쳐다봐?”
“예?”
“아니라고 하지 마. 내가 세 번 봤어.”
무영과 떨어진 자리에 앉은 손님을 상대하던 수석 바텐더가 짧게 시선을 주었다. 들으라지. 무영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왜 자꾸 쳐다보냐고.”
“아, 오늘은 혼자 오셨나 하고…… 지난번에 같이 오셨던 일행분은 안 오시나, 해서요.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냥 죄송하다고만 빌면 넘어가줄 생각이었는데 웬걸, 바텐더는 의외로 변명을 했다. 어이가 없어 웃으려던 무영은 방금 들은 말을 다시 곱씹었다. 지난번에 같이 왔던 일행이라면 이안이었다.
“네가 왜 걔한테 관심을 가져?”
바텐더의 만면에 또다시 당황한 빛이 돌았다. 혹시 이안이 바텐더에게 이상한 소리라도 한 건가.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때때로 뇌가 너무 맑아지는 이안이라면 충분히 바텐더 나부랭이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을 수 있다.
“뭐야. 나 나갔을 때 둘이 무슨 얘기 했어?”
“예? 아니요.”
“그날 걔 짜증 나게 한 게 설마 너야?”
“아니, 아닙니다. 저는 그냥 목도리 떨어졌다고 알려드린 게 다였어요.”
목도리. 무영의 기억회로가 빠르게 작동했다. 그 목도리. 도경이 버리라던, 이안도 제발 버리라던 지한의 목도리. 머릿속에 빨간 불이 들어올 듯 말 듯했다.
“일 안 하고 계속 걔만 봤어? 남의 목도리가 떨어지는 걸 왜 네가 신경 써.”
말도 안 되는 시비였다. 억지스러운 소리란 것을 알면서도 그냥 했다. 거짓말쟁이 취급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알아서 술술 사건의 전말을 풀어놓았다. 결백할 경우엔 더 억울해하며 믿어달라고 호소하거나 분노했고.
“손님 물건이 떨어져서 말씀드린 거기도 했고, 그게 제가 산 거랑 똑같이 생기기도 해서, 신기해서. 그래서 눈이 그쪽으로 간 거였어요.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한 마디도 안 졌다. 원래 무영의 성정대로라면 이쯤에서 더 못 참고 잔 받침이라도 던졌어야 직성이 풀렸을 테지만, 말하랴 생각하랴 멀티태스킹을 하느라 행동력이 잘 생기지 않았다. 공손한 것 같으면서 묘하게 재수 없는 바텐더와 눈을 맞춘 채로, 무영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도경은 왜 그걸 갖다 버리라고 했을까? 지한에게 겉으로는 잘해주면서 뒤로는 엿을 먹이려고? 하지만 고작 목도리 버리는 정도로 무슨 엿을 얼마나 먹일 수 있다고.
“너도 그거랑 똑같은 거 있다고?”
“저한테 있는 건 아니고 누구 주려고 샀던 거긴 한데…….”
“그거 뭐, 좋은 거야?”
그 물건만이 가진 특별한 의미라도 있지 않고서야.
“크리스마스 에디션으로 한정 판매했던 거라 지금은 구하기 힘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싸진 않아요.”
“한정?”
“네, 한정 수량만.”
도경과 지한, 도경과 바텐더.
무영은 달아올랐던 머리를 애써 가라앉혔다. 처음부터 부자연스러운 점은 있었다. 도경과 우연히 바에서 마주쳤던 날만 해도 그랬다. 도경이 언제부터 무영이 자주 드나들 것이 빤한 바에서 죽치고 앉아있을 인간이었나.
그런 인간이었던 적이 없을뿐더러, 애초에 술 자체도 즐겨 마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날은 왜 하필 이 바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단 말이지? 바텐더의 동향을 살펴 가면서?
“그래서 넌 그걸 누구 줬는데?”
“친구…… 친구 줬습니다.”
“여자친구?”
바텐더는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다. 무영에게 적응하는 속도가 빨랐다.
“아니요, 남자예요.”
“남자 좋아해?”
적응했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바텐더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졌다.
“예?”
“같이 사는 친구인데 성별이 남자인 거죠.”
보다 못한 수석 바텐더가 끼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아끼는 바텐더의 팔을 툭 쳤다.
“지금 지한이 얘기하는 거 맞지? 아니야?”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시도로 보였다. 바텐더, 시우가 웃었다. 영업용 미소와는 확실한 차이가 느껴졌다. 그건 진심으로 기분이 좋을 때만 나오는 표정이었다.
“네.”
오, 어머니. 무영은 육성으로 러시아에 있는 빅토리야를 찾을 뻔했다.
“무슨 지한? 나도 지한이 하나 아는데.”
속단하긴 일렀다. 지한이란 두 글자만 떼놓고 보면 별로 특이할 것이 없었다. 무영의 친구 중엔 없었지만 이래저래 살면서 한 번씩은 들어봤을 만한 이름.
“지한이 우씨 아냐?”
“네 맞아요. 우지한.”
그 흔한 이름은 성씨를 붙이는 순간 더 이상 그리 흔치 않은 것으로 바뀌었다.
수석과 시우에게 놀란 속을 들키지 않으려는 일환으로, 무영은 휴대폰을 들고 일어섰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로 피신하고 나서야 마음 편히 큰 숨을 터뜨렸다.
한숨 돌린 그는 오늘 알게 된 정보를 정리했다. 시우라는 이름을 가진 바텐더는 지한의 동거인이었다.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지는 몰라도 상사까지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둘이 평균 이상으로 친밀한 사이란 증거였다.
미스터리는 도경이 지한과 함께 사는 바텐더의 눈치를 봐야 했던 까닭이었다. 틈만 나면 그쪽을 쳐다보고 무영과 바텐더의 대화가 길어질라치면 잘랐다. 비위를 맞추려 보는 눈치가 아니었다. 무영의 관심이 바텐더에게 가지 않기를 바라는, 더 나아가선 바텐더의 존재 자체를 약간 거슬려 하는 태도였던 것 같기도.
그게 목도리랑 무슨 상관이냐면, 옵션이야 여럿이었다. 1번. 시우가 준 거라서 버리라고 했다. 시우가 싫어서. 그런데 싫으려면 지한이 더 싫어야 상식적으로 말이 됐다. 소현과 붙어먹은 사람은 지한이고 시우는 그와 친한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도경은 지한이 싫지 않은 걸까?
상식적으로 말이 덜되긴 하지만 최근에 목격한 정황들을 합쳐보면 불가능한 가정은 아니었다. 어련히 숨겨둔 꿍꿍이가 있겠거니 하고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을 뿐, 지한을 대하는 도경의 태도는 꺼림칙할 정도로 가증스러운 면이 있었다. 지한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도경은 왜 무영에게 목도리를 버리라고 지시해야 했을까? 새로운 옵션이 무영을 강타했다.
2번. 시우가 준 선물이라 질투가 나서.
“미친.”
3개 국어로 아는 모든 감탄사 중 가장 적절한 표현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도경이 소현과 사귀던 남자를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하지 않는 걸론 모자라 다른 사람이 그 남자에게 준 선물을 버리라고 시켰다. 질투가 나서! 미쳤다는 말 이외엔 할 말이 없었다.
다음 스텝은 쉬웠다. 이안 앞에서 다 아는 척 명연기를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면 대체적으로 귀엽지만 가끔 어마어마하게 멍청한 이안이, 다는 아니라도 한 절반 이상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술술 불게 되어있었다.
무영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당분간 미국 드라마는 안 봐도 될 것 같았다. 도경이 잔머리 굴리다 역으로 나자빠지는 과정을 구경하는 것이 한 열 배는 흥미로웠다.
#47
“보디가드라는 설정이 진부한 거 아니냐고 그런 걱정을 해서 제가 일단 이사님하고 얘기해보고 알려준다고 했습니다. 저는 괜찮을 거 같거든요. 대중성 있다니까요. 마지막 작품 이사님도 보셨죠? 그, 연예계 얘기…….”
박 실장이 열심히 떠드는 소리는 도경의 오른쪽 귀로 들어오는 족족 착실하게 왼쪽 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오른쪽에 앉아 있어서 그렇게 느껴질 뿐 실제로는 양쪽 귀로 들어왔다 양쪽 귀로 나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턱을 적당히 끄덕이는 도경의 시선은 실장 가까이에 놓인 연필꽂이에 가 있었다. 기록을 남기기 싫어하는 성향은 업무 메모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도경은 최신 기종 휴대폰에 깔린 메모장보다 펜과 종이를 애용했다. 그래야 필요 없어지면 바로 태워 없애기 수월했다.
“그래서 제 생각엔, 이 드라마 하는 김에 다른 보디가드들 역 있잖습니까. 보니까 대사는 없어도 샷은 꽤 나오겠더라고요. 약간 주인공 양옆에서 후광처럼 쫙. 걔네 중에 제일 대사 많은 캐릭터를 저희 신인 주는 거예요. 그러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이사님 생각은 어떠신지.”
“저희가 신인이 있었나요?”
도경은 자꾸 구부정해지려는 허리에 힘을 주며 연필꽂이를 다시 보았다. 무엇인가 하나가 어긋나 있었다. 빨간 잉크가 담긴 펜은 몸통도 빨간색, 까만 잉크가 나오는 펜은 몸통도 까만색. 각자의 잉크색과 일치하는 몸통을 가진 펜들 가운데 한 펜만 여러 색이 섞여 있었다.
부하 직원에게 구매를 부탁한 적도, 직접 사거나 받은 적도 없는 펜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사용한 뒤 아무 생각 없이 꽂아두고 간 것일 수밖에 없었다. 도경과 눈만 마주쳐도 허리를 90도로 꺾는 직원들은 아닐 테고, 비서 노릇을 하며 도경을 파악하게 된 대리는 더더욱 아닐 테니 아마도 이안.
그런데 이상했다. 그가 왔다 갔다면 대리든, 다른 직원들이든 누군가는 도경에게 보고를 해야 했는데.
“지난번에 유 대리님이 논현에서 명함 주고 연락처 받아온 애 한 번 보시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계속 연락 안 된다 그래서 제가 관두라 그랬어요.”
“아…….”
한 60프로는 잡소리라 흘려들었을 뿐, 중요한 사항은 다 기억에 저장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소현이 창조해낸 캐릭터는 새 배우로 교체되며 대사가 늘었지만 그래 봐야 조연에는 못 미치는 분량이라 벌써 촬영이 끝났다.
이제 해당 배우는 추가 촬영이 잡히기를 기다리는 동안 들어와 있는 대본 열 개 중 차기작을 고를 차례인데 매니저와 의견이 갈리는 중이며, 따라서 도경이 선택을 내려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신인은 됐고요, 출연 여부는.”
대본 위에 올려둔 도경의 휴대폰이 밝아졌다. 눈만 살짝 내려 확인한 화면에 지한의 이름이 떠있었다. 양해를 구한 뒤 메시지를 눌렀다. 대화창에 막 들어갔을 때만 해도 하나였던 사진이 순식간에 한 열 장으로 늘어났다. 사진과 사진 중간에 섞여 들어온 메시지는 간단했다.
[쇼핑몰]
발끝에서 목까지만 나오고 가장 중요한 얼굴은 하나도 안 나온 사진들을 보고 무슨 말을 하라는 것인지. 그러나 사진을 하나하나 눌러본 도경은 생각을 바꾸었다. 지한은 얼굴 없이도 충분히 평점을 매길 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숫자로 환산하자면 한, 99점. 이 세상에 100점짜리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놔…… 줘. 놔주세요.」
혹시 몰랐다. 꽁꽁 잠든 셔츠 위에 다시 두꺼운 재킷을 걸친 몸도 99점인데 벗으면 100점이 될지도. 아직 본 적 없는 벗은 몸이 대충 어떠하리란 상상을 시작한 머릿속은 얼마 안 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의 한 장면을 재생했다. 나체도 못 본 사이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장 마지막까지 보여주길 꺼려 하는 부위를 손으로 만졌다.
손. 도경의 눈이 잠시 휴대폰에서 손으로 대상을 바꾸었다. 만지기만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끼지 않은 손으로 타인의 몸이 배출해낸 액체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는…… 끝이었다.
물론 지한이 휴지로 닦아주었고, 그 뒤에 물로도 한 번 씻긴 했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10분도 넘게 손만 씻을 때도 있는 도경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별다른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진작 품었어야 할 의문이 늦어도 너무 늦게 찾아들었다.
그날은 왜 멀쩡했지.
멈춘 줄 알았던 대화창이 마지막 사진으로 다시 밝아졌다. 쇼핑몰에 걸릴 사진이 아니었다. 낡은 오토바이. 그 앞에 보이는 재떨이 겸 쓰레기통. 도경의 회사 옆옆 건물 앞에 있는 흡연구역이었다.
안 그래도 형편없는 말솜씨가 문자를 할 때면 두세 배 더 없어지는 지한은 어느 순간부터 아예 사진으로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려왔다. 오늘은 지난주보다 더 일찍 도착했나 보다. 도경은 사진을 다시 봤다. 도무지 발전이 없었다. 앵글도 앵글이지만 피사체를 고르는 센스 자체가 전무했다. 100점 만점에 5점.
“괜찮을 거 같아요.”
넋을 놓고 기다리던 실장이 반 박자 늦게 반응했다.
“이거 출연해도 괜찮을 거 같다는 말씀이시죠?”
“좀 전에 말씀하신 거 있죠. 후광.”
“아, 네. 보디가드. 주인공 뒤에서 후광처럼.”
“그거 저희 줄 수 있다고 하면 이쪽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근데 저희 신인 없다고…….”
더 성가시게 굴지 말란 눈빛을 받은 실장은 바로 말을 바꾸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실장을 내보내고 도경도 거의 바로 가방을 챙겼다. 인력이 부족해 매니저 아닌 직원들까지 다 현장에 나가고 없는 사무실엔 대리만 남아 있었다.
“이사님 벌써 퇴근하세요?”
“유 대리님도 얼른 퇴근하세요.”
정신력으로 버틴 하루였다. 지난밤에도 거의 잠을 설친 탓이었다. 사실 실장이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눈꺼풀의 무게가 실감날 정도로 피곤했었는데, 텅 빈 사무실에 발을 내딛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온몸이 가벼워진 김에 손도 흔들어봤던 도경은 의아해하는 대리의 표정에 얼른 손을 내렸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주변인들이 겁을 먹기 마련이었다. 하던 대로 하고 사는 편이 스스로에게나, 주변에게나 더 편했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도경은 별 노력 없이 바로 지한을 찾았다. 아까 찍어 보낸 사진 속 장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서있는 지한의 입에 하얀 담배가 물려 있었다. 차가 다가오는 소리에 얼굴을 든 지한은 창문이 내려간 운전석 너머의 도경을 보곤 급히 담배를 입에서 뗐다.
“왜 안 피우고 와?”
조수석에 올라탄 지한은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안전벨트를 맸다.
“냄새나니까.”
“네 담배 냄샌 괜찮다고 했잖아.”
운전석을 쳐다본 지한이 허, 하고 웃었다.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그냥 하는 말?”
퇴근과 동시에 정상으로 돌아온 줄 알았던 도경의 뇌는 여전히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의 절반이나 되면 다행일 속도로 생각했다.
지한이 방금 한 말은 즉 도경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는 것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것이 맞긴 했다만 지한은 그 사실을 몰랐다. 도경이 말해주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얼굴에 써져있는데.”
얼굴에 써져있다고? 도경은 입술을 떼려다 도로 다물었다. 거짓말하는 중이라는 것이 표정으로 다 보였다는 소리인가? 그거야말로 거짓말.
“나 지금 싸가지 없게 말했나, 아니, 말했어요?”
이어야 하는데.
“아니.”
약간 바보같이 말하긴 해도. 말과 다른 진심이 표정으로 보이지 않길 바라며, 도경은 깜빡이를 넣었다.
아니라는 답변을 들은 이후 지한은 말이 없었다. 말만 없으면 괜찮았을 텐데 문제는 그가 계속 운전석을, 정확히는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고 있는 도경을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표정이 어떤지는 안 보여도 아예 도경 쪽으로 틀어버린 상체는 시야 오른쪽으로 너무 잘 보이는 중이었다. 어쩔 땐 말보다 행동과 표정으로 더 잘 표현하는 지한이 인간보다도 그, 간식 들고 있는 황 원장을 올려다보는 동물같이 느껴졌다. 생김새나 크기는 하늘과 땅 차였지만.
얼마 전에 본 영화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하지 말란 짓은 다 하고 돌아다니는 남자와 그런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고 싶은데 얼굴만 보면 마음이 약해져 곤란한 여자. 네가 무슨 찰리야, 왜 말은 안 들으면서 자꾸 칭찬해 달라고 해? 찰리가 누군데. 내가 어렸을 때 기르던 개!
도경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야말로 개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진 영화를 끝까지 다 본 며칠 전의 자신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신경 쓰여서 운전에 집중이 안 되잖아.”
싸가지 없는 말투를 걱정해야 할 사람은 지한이 아니라 도경이었다. 이래서 처음부터 일부러 더 깍듯하게 말했던 것이다. 무의식중에 평소처럼 말해버릴까 봐. 그러게 그날 왜 덥석 반말을 해버려서는. 생일날의 자신은 한심한 정도가 아니라 주둥이에 지퍼를 달아 잠가 버렸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화났어요?”
말은 잘 못해도, 지한의 어법에 장점이랄 수 있는 부분이 하나 있기는 했다. 꾸미거나 돌려 말할 재주가 없는 만큼 직설적이란 점이었다. 저 말 뒤에, 저 표정 뒤에 어떤 계획을 감추고 있나 살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생각나는 즉시 말로 옮겨버리니까.
“왜. 내 얼굴에 또 쓰여 있어? 화났다고?”
화까진 아니지만 짜증은 확실히 났다. 집중이 안 된단 말에 숨겨둔 의미는 없었다. 운전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나 하는 인간이 만일 이안이었다면 당장 못 쳐다보게 했을 것이다. 지한에게도 그리하지 못할 건 없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아야 했다. 여태 잘하다 잠 좀 못 잤다고 갑자기 성질을 부리기엔 지난 몇 달이 너무 아까웠다. 시간은 귀했다. 귀한 것은 지켜야지 날려버려선 안 된다.
“아니요.”
다행히 아니란다. 꾸밈없이 말하는 지한이 아니라면 정말 아닌 것이었다. 첫눈처럼 얕게 쌓여있던 짜증이 사르륵 녹았다.
“그럼 지금은 뭐라고 쓰여 있어?”
“……졸리다?”
정답이라 반박하지 못했다. 헛웃음이 났다. 몇 번 가짜 웃음을 짓다 보니 웃긴 것도 없는데 웃긴 기분이 들었다. 끝에 가서 난 웃음은 진짜였다.
“형. 저기. 있잖아요.”
“응?”
“그…… 술 마셨어요?”
큰길로 나오자 차들이 확 많아졌다. 도경은 속도를 줄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열심히 고민했다. 요 몇 분간 자신이 음주운전자로 의심받을 짓을 했는지. 결론은 금방 났다. 담배 냄새가 싫으면서 좋은 척하는 얼굴이었다가, 화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졸린 얼굴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아서.
“내가 술 마시고 운전할 사람으로 보여?”
“아닐 거 같긴 한데.”
“안 마셨어.”
차가 유턴하며 높은 건물들에 가려져있던 해와 맞닥뜨렸다. 도경은 눈을 찡그렸다. 먼지 색으로 뒤덮이지 않은, 여러 가지 색이 겹겹이 쌓인 저녁 하늘이 진한 빛을 차 안으로 통과시켰다. 노을은 작열하는 정오의 볕과 전혀 다른 힘으로 눈을 부시게 했다.
“창문 열어도 돼요? 금방 닫을 건데.”
“응.”
조수석 창이 내려갔다. 달리는 차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고 셌다. 도경의 시야 끄트머리에 창밖으로 손을 내미는 지한이 보였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표정 같은 자세한 것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차를 운전 중일 땐 정면만 봐야 안심하는 습관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도경은 아쉬워했다. 그랬으면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찬바람을 맞는 지한의 표정을 잠깐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신호가 바뀌었다. 차들은 멈추었고 사람들은 길을 건넜다. 아주 잠깐만, 정면에서 눈을 떼기로 했다. 이제 막 길을 건너기 시작한 직장인들이 보도 중간에 도착할 때까지만. 창틀에 팔을 걸친 지한은 차가 멈추면서 잠잠해진 허공에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결이 좋아 잡아도 자꾸 빠져나가는 새카만 머리카락.
지한이 도경을 쳐다보았다. 진한 빛과 만난 눈매가 한층 더 깊은 기운을 풍겼다. 도경의 이성이 느리게 경고했다. 지금 너는 저 남자의 눈에 이상해 보일 것이라고. 왜요, 왜 쳐다봐요, 그런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 그러니 빨리 그럴싸한 이유를 준비해 놓으라고.
“날씨.”
최근의 과거와 근 일 년이 다 되어가는 과거가 뒤죽박죽 섞여 도경의 의식을 어지럽혔다. 그의 의식이 흐른 방향은 대략 이랬다. 날이 풀려 창문을 연 지한. 더 나이 먹기 전에 함께 축제에 가보자며 날이 풀릴 듯 말 듯 한 늦겨울부터 애걸복걸했던 작년의 이안. 개가 나오는 영화 전에 본 일본 로맨스 영화. 전통 옷을 입고 축제에 가 터지는 폭죽을 구경하던 고등학생들. 이안이 하도 성가시게 해서 차를 끌고 갔다가 10분 만에 도망쳤던 작년의 축제. 꽃은커녕 시끄러운 폭죽 소음만 듣고 돌아왔던.
“날씨 더 따듯해지면, 놀러 갈까.”
말해놓고 깨달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부터 내뱉고 보는 어법은 딱 지한이 말하는 방식이었다. 설명은 상대방이 못 알아들은 것 같으면 그때부터 하는.
뒤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멍하다고 해야 할지, 풀렸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눈으로 도경을 주시하던 지한이 숨을 들이마시며 앞을 봤다.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경은 액셀을 밟았다.
여전히 활짝 열린 조수석 창문으로 들어오는 소음과 바람이 도경의 뺨과 귀를 식혔다. 그러나 속에서부터 증기가 역류하는 기분까지는 식지 않았다. 좋지만은 않은 기분이었으나 그렇다고 화가 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체했을 때의 배 속 같기도 하고 긴장한 상태의 배 속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운전석 창문까지 내린 도경은 결심했다. 이주일 뒤로 잡아놓은 진료 예약을 당겨야겠다고.
#48
시끄러운 말소리가 났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교복 무리가 거리의 웬만한 소음은 다 묻을 기세로 떠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맨 앞에서 친구들을 보며 떠드느라 뒤로 걷는 중인 중학생은 자신이 점점 도경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모르기는 거리에 늘어선 가게 중 하나에 관심을 빼앗긴 도경도 마찬가지였다. 무기처럼 생긴 중학생의 책가방이 도경의 등에 부딪치기 직전이었다. 지한은 더 늦기 전에 도경의 팔을 잡아끌었다.
“뒤에.”
끌어당겨 진 도경이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쳐다보건 말건 손뼉을 치고 점프를 하며 지나가는 중학생 무리를 본 도경은 알겠다는 듯 웃었다.
지한은 도경의 팔을 놔주었다.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도경이 보면 싫어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도경은 지한이 손바닥을 어디에 닦는지 보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다시 가게로 쏠렸다. 붓, 천처럼 생긴 종이 등 내국인보다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용품들을 진열해 놓은 가게였다. 굵은 선으로 그려진 그림 속 주인공들은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소년들이었다.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작게 쓰여 있었다. 형제들.
“사려고?”
지한이 묻자마자 그림에 주던 눈길을 끊은 도경은 발길을 돌리며 말했다.
“설마.”
“그럼 왜 계속 봤어요?”
기념품 가게를 처음 봤을 리는 없었다. 외국에서 학교를 나왔다지만 요샌 인터넷으로도 다른 나라의 명소나 특산품을 다 볼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그 넓은 아파트를 혼자 사는 도경이라면 분명 돈 많고 자상한 부모를 뒀을 텐데, 그런 부모가 자식을 기념품 가게 하나도 모르는 인간으로 키우진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지하철을 안 타봤다고 하면 믿겠다.
“집에 저런 그림 있었던 것 같아서. 어렸을 때.”
“부모님이 그림 좋아해요?”
“엄마가 조금?”
주말마다 그림을 보고 연주를 들으러 다니는 여자가 상상되었다. 도경과 닮았다고 했으니 하얗고 날씬한 중년의 여성일 터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모님들. 그들보다 더 예쁘게 생겼을 것 같아서 상상이 구체적으로 잘 되지도 않았다.
반대편에서 아까보다 더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이번엔 아까 본 중학생들보다 키도, 목청도 훨씬 큰 고등학생 무리였다. 도경도 그들을 봤으니 괜찮을 줄 알았지만 서울의 번화가는 상상 이상으로 사람이 많고, 공간은 부족했다.
고등학생 한 명이 손을 휘젓다 기어이 도경의 팔을 쳤다.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뭐라고 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성호에게 손을 휘두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도경 앞에서 못 배워먹은 티는 그만 내고 싶단 마음이 간절했다. 안 그런 척한다고 하루아침에 없던 교양이 생기진 않는단 것쯤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안 그런 척하고 싶었다. 가능한 한 오래.
멀어지는 고등학생들을 잠시 쳐다본 도경은 남의 손이 치고 지나간 부분을 손으로 털어냈다. 보통 모르는 사람과 스치거나 부딪혔을 때 어떻게 반응하더라, 지한은 새해 들어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친구들의 기억을 소환했다.
야 이 새끼야 이리 와봐 하면서 불러 세우거나 혼잣말로 욕을 하는 놈들은 많아도 도경처럼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코트 소매를 연달아 터는 도경과 가만히 놔두면 하루 종일 손만 닦고 있을 것 같던 생일날의 도경이 겹쳐지자 그동안 꾸준히 적립되어온 의문이 하나 풀리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도경은 살짝.
“아직도 배 안 고파?”
결벽증 끼가 있었다.
“고픈데.”
“뭐 먹고 싶어?”
그게 병인지 아닌지, 병이라면 고쳐지기는 하는 건지에 대해 아는 지식은 하나도 없었다. 어쩐지. 도경이 가진 것은 뭐든 깨끗했다. 집, 차, 옷 그리고 본인까지. 일반적인 정성으로는 그 수준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근데 먹고 싶은 건 별로.”
관광객들이 많은 구역일수록 맛있는 가게를 찾을 확률은 낮아졌다. 다행히 도경은 배고프다면서 먹고 싶은 건 없다는 게 어쩌라는 소리냐고 따지지 않고 조용히 지한의 옆에서 함께 걸어주었다.
학원가와 기업 건물들, 거기다 문화재까지 자리한 동네에서 가장 가게가 많은 거리였다.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인파가 줄어들 생각을 않는 것도 당연했다. 남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보폭을 넓혔다 줄였다 하며 걷는 도경에게 미안한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미안하다는 마음보단 끌고 나오길 잘했다는 마음이 훨씬 컸다.
「날씨 더 따듯해지면, 놀러 갈까.」
놀러 가자는 제안이 왜 그리 놀랍던지. 뚜렷한 목적이나 이유 없이 마냥 놀러 가자고 말하는 도경이 낯설어서였을 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도경은 많은 것들을 먼저 하자고 해주는 남자였다.
소현의 친구이니 술을 사주겠다고 한 것도, 덥석 휴대폰을 쥐여준 것도, 골프장에 데려간 것도 그리고 무영의 별장까지 부른 것도 다 도경이었다.
지한이 먼저 한 것들도 비등하게 많긴 했다. 이안을 핑계로 연락한다거나 성호에게 맞은 뺨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파트 앞에서 기다린다거나. 할 말이 없어서 엉터리로 찍은 사진을 보낸다든가.
「지금은 못 놀러 가요?」
왜 날씨가 따듯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라는 단순한 의문이었을 뿐이다. 놀러 가는 데 꼭 거창한 배경이나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도경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지금 놀러 가자고? 어디로.」
「여기?」
어디로 놀러 가느냐는 질문에 창밖을 가리킨 데에는 약간의 오기도 분명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노는 게 별건가, 아무 때나 재미있으면 노는 거지. 물론 그보다야 지금 당장 도경과 뭐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도경이 진짜로 핸들을 돌렸을 땐 좋으면서도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배짱 좋게 여기서 놀자고 한 주제에 막상 어디서 뭘 할지에 대한 계획이 하나도 없으면 멍청하고 짜증 나는 놈밖에 안 됐다. 일단 주차장부터 검색했다. 가장 가까운 데를 알려주려고 밖을 봤을 땐 이미 도경이 알아서 공영주차장을 찾아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 동네에 자주 오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혹시 그렇다고 하면 누구랑 자주 왔는지도 궁금해질 것이 뻔했다. 그랬는데 그게 오래 만났다는 그 한 사람이면 기분을 잡치고 말 거라서.
기념품 가게들이 많은 거리를 벗어나 더 좁은 블록으로 건너오자 길거리 음식 장사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있었다. 건강에 좋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어쨌거나 백발백중으로 후각을 자극하는 여러 냄새를 맡는 순간 지한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알아차렸다. 도경이 배고파서 물어보는 것이란 생각은 미처 못 했다.
“형 퇴근하고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응. 퇴근하고 바로 너 만났잖아.”
“그럼 말을 해야 알지.”
“내가 뭘.”
안 말했는데……? 도경의 뒷말을 들으며, 지한은 호떡 좌판을 지나 그 옆 좌판 앞에 섰다. 들고 먹기엔 꼬치가 제일 나았다. 불판에 올라갈 준비를 마친 채 쌓여있는 꼬치들 너머에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2000원.
점퍼 주머니를 뒤졌다. 담뱃갑과 휴대폰밖에 만져지지 않았다. 아직 실망하긴 일렀다. 가끔 시우는 팁으로 받은 현금 중 일부를 말도 없이 지한의 재킷이나 바지 주머니에 넣어뒀다. 그것 때문에 싸운 적도 몇 번 있었다. 시키지도 않은 짓 좀 하지 말라는 지한과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소한은 들고 다니라는 시우.
시키는 짓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여전했지만 오늘만큼은 시우가 아직 그 짜증 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길 바라며, 지한은 바지 뒷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접힌 지폐가 만져졌다. 5만 원짜리가 들어있을 때도 있는지라 나름 긴장했다. 지폐를 꺼낸 그는 안심했다. 초록색이었다.
오른손으론 거스름돈을 받으며 왼손으로 고기와 야채가 꿰인 꼬치를 받아 내밀자 도경이 눈을 깜박였다. 정말로 지한이 왜 그걸 내미는지 모르겠다는 낯빛이었다. 새로운 손님이 도경에게 저기요, 하며 좁은 좌판 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지한에게 붙어 서게 된 도경은 엉겁결에 꼬치를 받아들었다.
“이건…….”
“안 매운 건데. 매운 게 더 좋은가?”
“아. 아니.”
아니라고 해놓고는 먹기를 주저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하고 골목으로 끌고 들어와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도경은 꼬치를 손에 들고 있기만 했다. 서서히, 지한은 도경이 그러고 서있기만 하는 원인을 유추해냈다. 거리에서 파는 음식이라 더러워서 못 먹고 있는 듯했다.
불과 몇 분 전에 도경의 결벽증을 걱정해놓고 좌판에서 파는 닭꼬치를 먹으라고 쥐여주는 등신이 어디 있나. 어디 있긴 여기 있었다. 지한은 굴러가기는 무슨 기어가기나 하면 다행인 잔머리를 움직이게 하려 애썼다. 일단 오늘은 공기가 아주 맑은 날이었으니까.
“오늘은 공기 좋아서 괜찮아요.”
“……공기?”
“아, 그거 먹어도 안 죽는다고.”
하지만 입에 소스가 묻었는데 닦을 휴지가 없었다간 죽을 수도 있겠지. 여러모로 등신 같은 스스로를 자책한 지한은 도경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한 뒤 휴지를 받으러 다시 좌판으로 갔다.
휴지를 들고 돌아왔을 때, 지한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도경이 두고 간 상태 그대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꼬치를 든 손의 각도까지 똑같았다.
“왜 웃는 거야?”
“아니, 형이 너무 애같이 하고 있어서.”
도경의 귀가 또 불타올랐다. 애 같단 말도 처음 들어봤나 보다.
도경은 끝끝내 닭꼬치를 한 입 이상 못 해치웠다. 지한이라고 귀하게 자란 남의 집 아들의 입에 싸구려 고기를 다 처넣어야겠다는 사명감이 있진 않았기에, 이제 그만 됐다는 뜻에서 빈손을 내밀었다. 골목에서처럼 도경은 또 이상한 각도로 꼬치를 들고 지한을 쳐다보았다. 지한은 말로 다시 한번 용건을 확실히 했다.
“이제 줘요, 버리게.”
“버려?”
“맛없는 거 다 먹지 말고.”
“나 맛없다고 안 했어.”
“그럼 뭔데.”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가, 깨물었다가 하기까지 해놓고도 도경은 시간 내에 그럴싸한 변명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세상에 그런 일도 있었다. 도경이 지한에게 말로 밀리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지한은 도경에게서 꼬치를 뺏어 들었다. 또 웃고 싶어졌다. 겨우 참았다.
그들은 다시 걸었다. 대로변을 벗어나 낮고 오래된 건물들이 줄지어 선 거리에 들어섰다. 그래도 행인들은 끊이지 않았다. 별의별 음식을 파는 좌판들도 잊을 만하면 눈에 띄어 지한을 웃고 싶게 했다. 또 사줄까 봐 걱정됐는지, 도경은 간혹 특이하게 생긴 먹을거리들에 시선을 빼앗겼다가도 얼른 정면을 보았다. 그러면 더 웃긴 것도 모르고.
그러다 결국 도경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오래된 극장 주차장 입구에 붙은 포스터였다. 사실 지한은 도경이 그걸 보느라 안 오는 줄도 모르고 계속 걸었다. 옆이 허전해서 보니 도경이 뒤떨어져 있어 왔던 길을 돌아왔더니 극장 앞이었다.
“그거 뭐예요?”
“아.”
도경이 별거 아니란 듯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집중력을 낚아채 간 포스터엔 해변에 서있는 두 남녀의 뒷모습이 찍혀있었다. 회고전이라는 단어 앞에 붙은 외국 이름은 아마 감독의 이름인 듯했다. 어디서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잘은 몰랐다. 제목도 그렇고 포스터의 색감도 그렇고 잔잔한 멜로 영화로 보였다.
의외로 도경과 어울렸다. 왜냐하면 그는 조금만 칭찬해줘도 빨개지는 귀를 가졌고, 선물해준 향수를 매번 뿌리고 나오는 세심한 면이 있었다. 쓴 양주보단 달달한 와인을 더 잘 마시기도 했다. 그를 잘 몰랐던 때라면 서정적인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오해했겠지만…… 아니, 아주 처음 만났던 순간이었어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다. 예민해 보이기는 해도, 도경이 액션 영화를 좋아할 것처럼 생기진 않았으니까.
“보고 싶어요?”
“어? 아, 근데 이건 예매해야 할걸.”
“가서 표 남았냐고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럴 필요 없다고 할까 봐, 지한은 도경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극장 쪽으로 걸었다. 도경은 순순히 끌려왔다. 매표소 직원이 바로 표 가격을 알려줬을 때 지한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지한 때문에 그 사람 많은 거리를 걸은 날이 도경에게 반도 못 먹고 버린 닭꼬치의 추억으로 각인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왜 네가 사.”
티켓 두 장을 손에 쥐고 돌아선 지한에게 도경이 타박하듯 말했다. 심각하게 불쾌해하는 빛은 아니었고 그냥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나무막대기에 꿰뚫린 닭고기를 이로 빼서 먹어야 했을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은 느낌으로.
“내가 계속 사도 핸드폰값 채우려면 한 일 년은 걸려요.”
도경이 티켓을 받아들다 말고 피식했다.
“오늘 말 잘하네, 너.”
“그거 좋은 말인가.”
“좋은 말?”
“그니까, 칭찬?”
“보통은 그렇지.”
왠지 모르게 민망해진 지한은 얼른 스낵 코너로 향했다. 오래된 극장이라도 있을 건 다 있었다. 더 이상 메뉴를 가릴 처지가 아니라 팝콘을 샀다. 엄밀히는, 지한은 고르기만 하고 돈은 도경이 냈다.
포스터 한 장으로 도경을 홀린 영화는 지한에게 거의 절망적인 영화였다. 진지한 영화를 곧잘 보는 지한인 데도 그랬다. 여름 바다가 배경인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내용이 없었다. 대사도 없었다. 음악만 자꾸 아무 때나 튀어나왔다. 햇살과 바닷물이라도 많이 나와서 여름 기분을 내긴 좋다는 장점이 있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얼마 안 가 지루해졌다.
그를 졸음으로부터 지켜낸 것은 오로지 도경이 바로 옆에 앉아있다는 사실이었다. 포스터를 보던 도경의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지한은 별로 가져볼 일이 없었던, 그래도 뭔지는 아는 눈빛이었다. 대형 마트 장난감 코너를 지나다 보면 어렵지 않게 만났다. 부모가 저걸 사주리라 기대하는 자식의 초롱초롱한 눈. 그 눈은 부모의 안 된다는 말이 거듭되는 횟수에 따라 빛을 잃고 습기를 얻었다. 그러다 소위 말하는 바닥에 드러누워 구르기를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 꼴이 웃겨서 구경하다 보면 식료품 코너를 다 돌고 온 시우가 계산대로 지한을 이끌곤 했다.
영화 내용과 전혀 관계없는 회상으로 졸음을 떨치던 지한은 흠칫했다. 어깨에 가볍지만은 않은 뭔가가 닿았다. 뒷좌석에서 누가 손으로 만지는 줄 알고 식겁해 돌아보려 했지만 고개를 반도 못 돌리고 멈추었다. 지한의 어깨에 닿은 것은 도경의 머리통이었다.
첫 몇 초간 지한은 별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일하고 와서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영화를 보느라 기운이 없나? 목이 약한가? 남의 어깨에 기대서 영화를 보는 습관이 있나? 여러 가능성이 지한의 뇌리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동안에도 도경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한은 들었다.
사람이 잠들었을 때만 내는 약한 숨소리.
지한은 상체를 움직이지 않으려 팔만 한껏 뻗은 다음 상자를 놨다. 다행히 팝콘 통이 넘어지지 않고 바닥에 똑바로 섰다. 팝콘 씹는 소리에 깰 것이었으면 애초에 영화관에서 잠들지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용히 있고 싶어서 입 안에 남아있는 팝콘은 거의 입천장으로 뭉개다시피 해 삼켰다.
그 외에도 걱정할 거리는 많았다. 도경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꺾이지는 않을까, 그랬다 손잡이에 이마를 부딪치지 않을까 등 온갖 잡스러운 걱정이 지한을 긴장케 했다. 100분의 러닝 타임이 흐르는 내내 몸에 바짝 힘을 주고 정자세를 유지한 덕분에 그는 영화의 후반부를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포스터에 나왔던 두 남녀의 뒷모습과 그들에게 밀려드는 파도, 그리고 그 위로 새겨지는 영화의 제목이 다 같이 대형 스크린에 뜰 때까지, 도경은 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