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Keylock
#49
아무것도 누르지 않는 손끝 아래에서 꺼지는 화면을 보기만 벌써 세 번째였다. 도경은 다시 액정을 건드렸다. 약속한 시간까지 약 10분. 정 할 것이 없으면 그냥 앉아만 있어도 금방 갈 시간이었다. 불행히도 그냥 앉아 있는 것은 도경에게 가장 힘든 일에 속했다.
기어이 인터넷 탭을 열었다. 축약된 뉴스 헤드라인들이 줄줄이 떴다. 오전에 이미 종이신문과 실컷 씨름한 뒤였다. 세상 소식은 그만 알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화라도 몇 편 가지고 다닐 것을 그랬다고 후회했다가, 몇 초 안 되어 철회했다. 로맨스 영화를 서른 편쯤, 정확히는 스물여덟 편을 봤더니 어느덧 초반 10분쯤만 봐도 주인공들이 겪을 고난의 종류와 극복의 과정이 알아서 떠오르는 경지에 이르렀다. 애초에 로맨스를 좋아해서 보기 시작한 것도 아니라 경악스러웠다.
세간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연인은 어떤 식으로 서로를 만나는지, 요즘 성공적이라고 평가되는 방식의 연애는 뭔지 알려고 보기 시작했다가 열 편을 넘기면서부턴 본질을 잃었다. 점점 유행과는 관계없는 영화들도 봤고,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제작연도가 20년 전인 작품을 보고 있었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기 전에 즉각 관두었다.
굳이 남들이 어떤 말로 상대의 환심을 사는지 알겠답시고 애쓸 필요성이 점점 없어진 탓도 있었다. 지한은 도경이 무슨 말을 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집중했다. 처음 술을 마시던 자리에서도 느꼈던 점이다. 안 그렇게 생겨서 남의 말에 성의 있게 반응하는 인간이라 생각했었다. 지금이야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지한은 남의 말에 성의 있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경의 말에만 성의가 넘치다 못해 생생하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손길에는 더 생동감 넘치게 반응하고.
인터넷을 끈 도경은 폴더를 휙휙 넘겼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짙어지고 있었다. 손끝에 한 아이콘이 걸렸다. 잘 들어가지 않는 동영상 플랫폼이었다. 메인 페이지를 채운 영상들은 그의 관심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음식, 동물, 스포츠, 예능, 뉴스. 검색창을 누른 도경은 망설였다. 자신이 뭘 보고 싶어 하는지, 관심사가 있긴 한지조차 헷갈렸다. 곧 한 주제가 그의 의식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그는 신중하게 자판 위의 글자들을 눌렀다. 텍스트로 보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완성되었다.
―We welcome those joining us live, on S sports, as we get set now for the co-main event…….
휴대폰으로, 특히 사람 많은 장소에서 동영상 보는 일이 거의 없는지라 볼륨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경기장에 온 것처럼 큰 함성소리가 주변 테이블의 이목을 끌었다.
급히 볼륨을 내렸다. 소리를 잃은 후에도 진하고 강한 색으로 구성된 화면은 재빠르게 선수들의 프로필과 등장 장면, 그리고 심판을 보여주었다. 어쩌다 채널에 걸려 몇 초 본 적은 있어도 경기 시작 전부터 제대로 격투기 경기를 시청하기는 평생에 처음이었다. 거치적거리는 느낌을 싫어해 이어폰도 잘 안 끼고 다니는 습관이 걸림돌로 돌아온 셈이었다. 그는 카페 소음을 잊기 위해 화면에 몰두했다.
두 선수의 체급은 비슷했다. 상체를 전부 문신으로 뒤덮은 백인 쪽이 약간 더 컸다. 히스패닉 선수는 문신이 하나도 없었다.
양쪽 다 길고 탄탄한 몸을 가졌지만, 만일 지한이 복싱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 격투기 선수가 되었다면 반질반질하고 까무잡잡한 히스패닉 선수 정도의 몸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물론 스페인식 이름을 가진 선수보다는 지한의 피부색이 더 밝았다. 피부 전체에 감도는 매끄러워 보이는 톤이나 긴 팔다리, 체질적으로 지방이 잘 안 붙는 몸이 대강 비슷하단 것이었다.
열세에 몰리던 백인 선수가 크게 한 방을 날렸다. 히스패닉 선수의 코에서 피가 터졌다. 인중으로 흘러내린 빨간 액체는 순식간에 입술을 지나 턱까지 내려왔다. 선수가 팔뚝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피가 다 마르지 못한 채로 만져진 물감처럼 번졌다. 지한도 저렇게 피가 날 정도로 싸워본 적이 있을까, 도경은 알고 싶어졌다.
술에 취한 본인 입으로 살짝 흘린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에 솔직히 많이 놀랐다. 일곱 명이 알아서 줄행랑치도록 만들었다니 대체 세 명을 어느 정도로 패놨다는 것인지 잘 상상도 안 됐다. 그렇다고는 해도 누군가에게 맞아서 피를 흘린 적이 한 번도 없을까? 장담은 어려웠다. 승부를 가르는 결정타가 항상 힘인 것은 아니었다. 유니폼 차림의 지한이 손님으로 온 성호에게 뺨을 내줬던 것처럼.
도경은 무언의 격투가 벌어지고 있는 화면 옆을 누르고 있는 자신의 엄지를 들었다 놨다. 하도 남들에게 비슷비슷한 평가만 받아 세뇌가 되어버린 것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정말 한평생 힘쓰는 일은 일일체험으로도 안 해본 손처럼 생겼다.
「도경이도 해? 내가 너는 특별히 힘 많이 안 쓸게.」
때는 10대 중반의 여름. 장소는 무영의 친모가 당시 거주하던 아파트 꼭대기 층. 방학을 맞이해 귀국한 또래들은 백인 도우미가 현관을 열어주는 특이한 집에 모였다. 무영을 멋지다고 치켜세우는 놈들과 소현의 말이라면 시험 기간 노트보다 더 신봉하는 여자애들 틈에는 무영에게 끌려오다시피 한 도경도 있었고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도경만 졸졸 쫓아다니는 이안도 있었다.
「놔둬. 도경이 일부러 관심 없는 척하는 건데 자꾸 그러면 삐질걸?」
그리고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소현도 있었다.
「그런 거야? 나는 하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말 못하는 줄 알았어.」
이 세상엔 하다하다 팔씨름 대회 따위도 있다는 사실을 떠들어댄 어느 죽일 놈의 주둥이가 발단이었다. 육즙으로 만든 푸딩을 먹다 말고 난데없이 팔씨름 판이 벌어졌다. 모든 스포츠를 섭렵할 기세로 설치고 다니는 무영의 연승을 예상치 못한 척 매번 감탄하는 소리들이 도경의 짜증을 증가시켰다. 여기도 저기도 얼간이들뿐이었다.
「부끄러워서래.」
「부끄러울 수 있지, 도경이는.」
풉, 킥. 문자 그대로의 소리가 났다. 무영이 농담이랍시고 지껄인 소리에 동조하는 면상들에 비릿한 푸딩을 가져다 뭉개고 싶은 충동이 올라오고 있을 때, 에스더가 소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얼핏 이안, 질까 봐, 같은 단어들이 들렸다. 소현의 귀로 흘러들어 간 문장을 유추하기엔 충분한 단서들이었다. 세 살 어린 이안에게 질까 봐 도경이 팔씨름 대결에 끼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키득대고 있었다.
「아, 소현이랑 하면? 그러면 도경이가 이겨.」
「김무영. 너 내가 이기면 어떻게 하려고?」
「그거는 내가 모르지. 도경, 소현이가 이기면 어떻게 해?」
에스더가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냈다. 도경이가 이기면 소현이랑 둘이 무영이네 뷔페에서 밥 먹고 오기. 에스더와 한 번 해보려고 가방이며 신발을 매일같이 사다 바치던 등신 하나가 거들었다.
밥만 먹으면 재미없으니까 둘이 L월드 가서 이상한 머리띠 쓰고 사진도 찍어 오라 그래. 에스더는 좋다며 그 등신과 손뼉을 쳤다. 온갖 험한 단어와 표현들이 도경의 뇌리에 풍선처럼 떠올랐다 펑펑 퍼져나갔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수백 번 상상한 말들. 매일 매일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지만 참는 말들.
「내가 언제 한다고 했어? 난 하기 싫어. 안 해.」
친구들과 함께 웃던 소현이 싸늘하게 굳었다. 상황을 모르는 이가 그 순간의 소현만 목격했다면 필히 도경에게 모욕당해서 분해하는 중이라 오해했을 만한 표정이었다.
「권도경 넌 대체 하고 싶은 게 뭐야? 그런 게 있긴 있어?」
도경은 방어했을 뿐인데.
「지금? 이걸 네 얼굴에 던지고 싶어.」
도경은 빅토리야가 만들었는지, 그녀가 러시아에서 데리고 온 여자가 만들었는지 모를 푸딩을 그릇째 들었다. 미쳤나 봐 쟤, 하며 물러서던 여자애들. 저 새끼가 설마 진짜 저걸 던질까 걱정하는 기색 반, 던지면 완전히 재미있겠다고 기대하는 기색 반으로 지켜보던 남자애들. 혼자서만 웃겨서 죽으려던 무영. 울려고 하던 이안. 그 요란법석 속에서 던져보란 듯이 턱을 치켜들던 소현. 그리고…….
“뭐야. 뭐 이런 걸 보고 있어.”
테이블 위로 그림자가 졌다. 손에 힘이 빠져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겨우 모서리를 잡았다. 지한이 머리통을 기울여 도경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평소에 이런 거 봐요?”
이런 거. 지한이 격투기를 그리 표현할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 잘 보진 않는데 오늘은 어쩌다.”
지한이 도경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원래도 큰 편인 눈에 힘까지 들어가니 튀어나올까 걱정이었다. 도경은 휴대폰 화면을 끄며 일어났다. 나갈까? 지한이 턱을 끄덕였다.
계단을 몇 칸 내려온 도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서 나는 발소리가 너무 멀다 싶더라니 지한이 몇 발자국 간격을 두고 떨어져서 따라오고 있었다. 도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후다닥 따라잡는 속도가 잽쌌다.
저녁인 데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확연히 가벼워졌다. 공기에 노출된 도경의 목과 손도 더는 시리거나 따갑지 않았다. 도경은 어딜 가냐고 묻지도 않고 얌전히 옆에서 걷기만 하는 지한을 쳐다보았다. 태도와 달리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주는 눈빛은 별로 얌전하지 않았다. 딱히 도경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몰랐다. 워낙 생김새와 하는 짓의 차이가 심할 때가 있는 남자였다.
예를 들어 지한이 도경에게 목을 눌려도 반격은커녕 저항할 시도조차 안 하고 가만히 있으리라 예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바로 주먹을 날릴 것이라 예상하면 했지.
“경찰서에서 연락은?”
과거의 기억에 신경이 지나치게 곤두서 있는 상태로 만나 예민해 보였을지 모른다. 항상 지한에겐 남들 앞에서 하는 것보다 서너 배 더 유하게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특별히 더 정성을 다해 부드럽게 물었다. 지한이 한숨을 쉬었다.
“안 왔어요.”
충동적으로 영화를 함께 봤던 날 지한은 오토바이를 도둑맞았다. 신고를 도와주고 집까지 데려다주려 했더니 곧 죽어도 혼자 가겠다기에 택시비를 미리 결제해 보냈었다. 열흘이 지난 오늘까지도 무소식이라면 앞으로 다시 열흘이 지나도 다른 소식이 들릴 가망은 적었다.
“그럼 지하철 타고 여기까지 왔어?”
“네. 아 어떤 병, 아니, 바보 같은 놈이 그걸 가져갔지. 팔아도 뭐 안 나오는데.”
동의하는 바였으나 굳이 말로까지 동의하진 않았다. 고물이건 뭐건 본인에게는 오래 탄 물건이니 나름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내가 갈 걸 그랬네.”
“어딜?”
“너희 동네로. 지하철 오래 걸리지 않아?”
“별로 우리 동네에서는 안 보고 싶은데.”
“왜?”
설마 시우와 마주칠까 봐 그런 건 아닐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런 이유를 댄다면 간신히 가라앉혀 놓은 신경이 아까보다 더 곤두서 머리 가죽을 뚫고 나올 것 같단 망상이 피어났다.
망상이 감당하기 힘든 크기로 부풀기 전에, 도경은 신속하게 과학적 사실을 되새겼다. 분노는 절대로 머리 가죽을 뚫고 나오지 못한다. 혈압을 오르게는 해도.
“볼 거 없고, 술집만 많아요. 그중에 형이랑 어울리는 데 하나도 없고.”
“그래?”
“나중에 형이랑 어울리는 데 생기면 부를게요. 그때 와요.”
그러면 어울리는 곳은 어디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망설이게 됐다. 지한과 호텔 근처에서 마주쳤던 밤 이후 지금까지 쭉 끌고 온 전략의 연장은 아니었다. 그냥 물어보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할 것처럼 여겨졌다. 어떻게 보면 아주 살짝 두려움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물었을 때 나올 대답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나. 형이랑은 재미없는 음악만 틀고 맘대로 얘기하지도 못하는 데가 어울려요, 그런 대답이 돌아오면 어떡하지. 바로 전 지한이 도경을 동네에서 안 보고 싶은 이유로 시우를 댈까 봐 긴장했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었다.
“나랑 어울리는 데가 어떤 곳이야?”
물어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으면서 물어봐 버렸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었다. 말하고 행동하게 전에 미리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있는 것이 머리였다. 열심히 생각해놓고 반대로 행동하는 짓은 도경의 사전에 없었다.
“뭐 말로 잘 못하겠는데, 깨끗하고. 컵이랑 이런 거 다 예쁘고.”
도경은 걷는 속도를 늦췄다. 기껏 짜놓은 계획을 버리고 즉흥적으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분명 그가 지금까지 이끌어온 삶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 그리고 좋은 냄새 나는 데.”
소현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날 탄생한 계획이 여전히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짧지 않은 날들 동안 품고 지냈던 의문들, 걔가 정말 나보다 너를 가치 있는 인간이라 측정했는지 너희들은 내가 그렇게 우스웠는지 나는 정말 우스운 인간인지 죽으려면 같이 죽지 왜 살아서 나를 괴롭히는지. 그 감정들이 죽지도, 늙지도 않고 마음속 어딘가에 아직도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틀어졌다.
“형.”
계획이.
“뭐 해요?”
눈꺼풀이 무거웠다. 도경은 억지로 눈을 깜박였다. 그는 어느새 걷지 않고 있었다. 몇 발자국 앞서나간 채로 돌아선 지한도 멈춰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행인들이 지한을 피해 옆으로 비켜 갔다. 차들은 달리고 사람들은 걸었다. 조명들은 빛났다. 소리들은 떠들었다. 그 많은 것들이 동시에 살아 있는 거리에서, 도경은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절이 끝나려나 보다.
#50
눈앞에서 얼쩡대는 꽃가루를 날릴 때처럼, 잔뜩 들이마신 숨을 한꺼번에 뱉어냈다. 연기가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일반 담배 냄새 대신 싸한 향과 함께 살짝 눌어붙은 맛이 혀를 타고 들어왔다. 눌어붙은 맛이긴 한데 그렇다고 탄 맛은 또 아니었다. 타바코 향은 그 눌어붙은 맛이 너무 심하게 나서 도저히 피울 수가 없었다. 클럽 단골이 추천해준 향으로 액상을 교체했더니 이젠 한 번 빨 때마다 페퍼민트 차의 증기가 한꺼번에 입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기분을 견뎌야 했다. 연초 맛을 아예 몰랐더라면 한결 적응하기도 수월했을 것이다. 실제로 전자담배만 피워보고 연초를 피워본 적 없는 한 클럽 직원은 뭐가 그리 이상한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다.
처음은 중요했다. 각인된 이미지가 평생 가기 때문이었다. 태어나 처음 본 인형이 마트료시카였던 무영은 영단어 ‘doll’을 배울 때도 가장 먼저 마트료시카를 떠올렸다. 마트료시카를 인형 취급조차 안 하는 애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상당히 놀랐던 때가 열 살. 그전까진 다들 인형 하면 그런 식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줄 알았다.
선생의 인기가 워낙 높아 단체 수업을 들어야 했던 미술 과외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름을 붙여줄 정도로 좋아했던 인형이나 장난감을 자유롭게 그려보라는 주문에 소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회사의 동물 캐릭터 인형을, 이안은 미국 코믹스의 히어로 피규어를 꼽았다. 도경은 모르겠다고 했었다. 친구라고 생각도 안 하는 애들 앞에서 자신이 장난감에게 붙여준 이름을 공개하지 않으려 거짓말한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날 도경만 끝까지 자신이 뭘 그렸는지 밝히지 않았다. 허구한 날 그렇게 인간미 없는 짓을 해놓고도 그는 잘 모르는 눈치였다. 남들이 왜 자신보다 무영을 더 좋아하는지.
겉으로는 예민하고 쌀쌀맞지만 알고 보면 다정한 면도 있는 내면을 남들이 알아서 발굴해주리라 믿었다면 굉장한 착각이었다. 사람들은 타인의 영혼을 탐구하는 데에 그렇게까지 많은 공을 들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태도와 여린 본성의 양립 같은 스펙은 영화 주인공이 가졌을 때나 애정을 살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쉬운 사람이 가장 대중적이었다. 말 걸기 쉽고, 부탁하면 들어줄 것 같고, 잘 웃어주고, 잘 들어주고, 섹스도 곧잘 해주고.
마지막은 대중적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쉽게 하는 섹스였지 섹스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어느 나라에나 그런 골치 아픈 취향을 가진 놈들이 있었다.
무영은 대체 뭐 때문에 섹스 경험이 상대를 향한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했다. 사춘기 때부터 꾸준히 그래왔다. 여자친구와 하고 온 다음날이면 지구 반대편 나라 하나를 정복하고 온 장군처럼 의기양양해 하는 놈들을 단 한 번도 진정으로 이해해본 적 없었다. 무영의 개인적인 취향에는 경험 없는 상대보다 경험 있는 상대가 더 맞았다. 경험치가 높을수록 호들갑을 떨거나, 무서워하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만하자고 해서 김빠질 일이 없었다. 피 볼 일도 없고. 처음이 중요하지 않을 때도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처음은 다 중요했다.
「이안이 너도 엄마가 외국 사람이야?」
「아니, 얘네 엄마 한국 사람이야. 저번에 차에서 내리는 거 봤는데 한국말 완전 잘해.」
「외국 사람도 한국말 하는 사람 있어. 피터도 교장 선생님하고 한국말로 얘기하는 거 내가 봤다?」
「어, 근데 이안이네 엄마는 얼굴도 한국 사람인데……?」
「이안아, 그 아줌마가 너희 엄마 맞아?」
러시아에서 유년기를 보낸 무영은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마자 납치당하듯 한국으로 왔다. 납치라고 느낀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먼저 무영과 함께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온 빅토리야가 정작 차에는 같이 타지 않았다. 낯선 남자들이 무영을 데려간 차 안에는 낯선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김 회장의 법적 아내였다. 무영은 자신이 그길로 죽을 운명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에도 안 들어간 애가 총질하는 영화를 마음껏 보게 내버려 둔 외가 식구들 덕분에 상상 가능한 막장 시나리오가 너무 다양했던 것이다.
「야. 다 닥쳐.」
「뭐야. 김무영 너 선생님한테 욕했다고 이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러시아보단 교육 환경이 나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 더 크면 미국에 보내기로 강 회장과 빅토리야 간에 합의가 끝난 상황이었다. 빅토리야와 헤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무영이 가기 싫다고 난리를 칠까 봐 비밀로 했단다.
서른이 넘은 시점에서 돌이켜봐도 이가 갈리는 에피소드였다. 일곱 살 무영은 진짜로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줄 알고 박 여사에게 잘 보이려 착한 척을 했단 말이다. 두 시간 내내.
「너네 집에는 어른 없어?」
「우리 집에 어른 완전 많아. 할머니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고 이모도 두 명이나 있거든?」
박 여사는 남편이 젊은 외국 여자와 바람피워 낳아온 사내새끼를 아끼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무영은 김 회장과 박 여사를 부모로 둔 자식들과의 싸움에 큰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어차피 외국 피가 섞인 그는 그 집안에서 한자리해 먹기 그른 운명이었다.
「근데 왜 이안 엄마 얘기 물어봐?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어른들이 안 가르쳐줬어?」
무영에겐 성적이 중요하지 않았다. 친가 식구들에게 배척당하든 말든 그것도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한국 땅을 떠나게 된다면 그때 가서 남는 것은 스스로의 몸뚱이와 능력이었다. 그가 따돌림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한국 남녀 사이에서 동갑내기들보다 한 뼘 큰 키 덕도 있었지만 선생이 혼내도 바로 맞받아치는 패기 덕이 훨씬 컸다. 말만 못되게 했지 남을 때렸다간 세상이 끝나는 줄 아는 공주·왕자님들과 달리 진짜 주먹을 휘두를 줄도 알았다.
「형 나는 괜찮은데…….」
뭣 모르고 무영의 눈동자 색에 관심을 가졌던 녀석 하나가 난생 처음 맞아봤을 주먹에 코피를 흘린 이후, 그에겐 친구들이 생겼다. 부모들은 그를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애들은 좋아했다. 순수한 호감은 결코 아니었다. 못생기지 않은 외계인을 보는 시선 비슷했던 것 같다. 우리 별 애는 아닌 것 같은데 괜찮게 생겼고, 힘도 세고, 크고.
「뭐가 괜찮아. 엄마 얘기 안 괜찮아. 너 몰라?」
자라면서 점점 한국인다운 외형을 갖추게 됐을 뿐, 어린 시절 이안은 이국적으로 생긴 아이였다. 무영만큼은 아니어도 쿼터쯤으로는 충분히 오해 가능한 외모였다. 피부만 보면 도경이 더 하얬는데 이안은 남달리 눈이 컸다. 양친 중 누구도 코가 높지 않건만 자기만 유달리 우뚝 솟은 콧대를 자랑하기도 했다.
「엄마 얘기 안 돼? 왜?」
결정적으로 20개월 때부터 영어 쓰는 보모의 보살핌을 받다가 영어유치원에 입학하는 루트를 타 저학년 때까지는 한국어가 서툴렀다. 다른 애들보다 더디게 발전한 한국어 실력을 영어유치원 탓으로만 돌리기엔 도경과 소현도 다 그 유치원을 나왔다는 무시 못 할 사실이 존재했다. 모든 어린애가 그 독종들처럼 이중 언어에 소질을 보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안. 누가 너한테 엄마 아빠 얘기 해, 그러면 나한테 말해. 알았어?」
「왜?」
「뭐가 왜야, 나쁜 거라니까?」
이안의 부모는 경영권 싸움에서 애초에 배제된 각 집안의 막내들이라 뉴스에 나올 일이 적었다. 자식 교육에도 열을 올리지 않았다. 비록 무영의 주위에 자식더러 1등 하라 닦달하는 부모들은 없었어도 지켜야 하는 기준은 분명 있었다. 미래에 꼬투리 잡히는 일 없이 많은 것들을 물려받기 위해 갖춰야 하는 마지노선.
이안의 부모는 그런 선도 없었다. 핏줄들에게 크게 거슬리지만 않으면 손만 빨고 앉아 있어도 죽을 때까지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이라 일찌감치 외아들을 방치한 것일지도 몰랐다. 김 회장은 툭하면 이안의 부모를 철없는 것들이라며 깔봤지만 무영은 아주 가끔만 만날 수 있는 그들이 싫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부모들처럼 대놓고 무영을 경계한 적이 없었다. 만나면 언제나 반갑게 인사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았어…….」
이안을 외계인만큼 낯선 종족 취급받게 만들어 놨으니까.
무영에게 이안은 복잡하면서도 간단한 대상이었다. 송아지 같은 눈을 굼뜨게 깜박일 땐 하염없이 귀엽기만 하다가도 누가 자길 놀리는지 칭찬하는지 분간하지 못해 똑같은 표정으로 듣고만 있을 땐 답답해서 속이 뒤집혔다. 도경의 손동작 하나까지 눈에 담는 모습이 순진해서 웃기다가도 밤에 그 광경을 다시 떠올리면 침대를 산산조각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복잡했다. 성인이 된 친구들끼리 밤을 새우자는 목표로 클럽에 가서 막 첫 샷을 마신 직후 이안이 보낸 메시지 때문에 바로 나왔다. 먼지 많고 도로 위의 무법자들은 미친 한국 따위 두 번 다시 안 가겠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바닷가에 누워 있다가도 이안이 새로 올린 사진 한 장이면 한국행 티켓을 알아보게 됐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누구와 있어도 결국 한곳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래서 간단했다.
「너희 엄마한테 말하면 사람도 죽여줘?」
소현의 도발에 푸딩 그릇을 들었던 도경은 원래 그걸 어디로 던지려고 했든 본인이 계획했던 바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릇은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행동은 소현이 했다. 못해도 정강이는 걷어차겠거니 기대하고 있었던 무영은 도경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키는 소현의 선택에 당황했다. 아무리 도경이 날씬하다 해도 여자에게 패대기쳐지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소현은 도경을 일으켜 끌고 뛰쳐나갔다. 이안과 무영이 나갔을 땐 이미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중이었다.
「도경이 죽여달라는 거면, 안 돼.」
방학이 끝나고 다시 미국에서 마주쳤을 때 둘은 이미 사귀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아무도, 소현의 사촌이자 도경과 친한 이안조차 으르렁대다 함께 사라졌던 그들이 연인으로 돌아온 사정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다.
「내가 왜 걜 죽여달라고 해.」
「홀에서 싸울 때 보니까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날 거 같던데.」
많은 친구들로 하여금 밤잠을 설쳐가며 궁금해하게 만든 수수께끼를 푼 사람은 다름 아닌 무영이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수학 수업과 미디어 수업 사이에 낀 스터디 시간을 활용해 강당 무대 커튼 뒤에서 한숨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뿐이니, 정답이 알아서 펼쳐졌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었다.
「일부러 숨어서 들은 거 아니야. 너희가 너무 갑자기 싸워서 어떻게 할 수 없었어.」
인종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누군가와 주기적으로 언쟁을 벌이는 소현이 숨도 쉬지 않고 상대를 쏘듯 몰아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지 않고 받아치는 도경은 놀랄 일이었다. 받아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소현을 꽤 길게 닥치게까지 했다.
그렇게 말하는 도경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보지 못했다. 욕도 욕이었지만 물건을 던지고 부수는 소리가 더 충격이었다. 너무 놀라서 뭐라고 떠드는지는 다 알아듣지도 못했다. 한 번에 알아듣기 힘든 고난도의 욕설과 밀고, 치고, 밟고, 던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났다.
「너 설마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소현이 무영에게 엄마 운운하기 전까진 혹시 강당에서 들은 그 모든 게 꿈이었을 가능성도 고려했다. 그만큼 두 귀를 통해 들은 것들이 황당했다. 소현이 의미심장한 질문만 안 했더라면 무영도 일단은 입을 다물 작정이었다. 비밀은 아껴둘수록 가치가 올라갔다.
「내가 언제 그랬어? 나는 그냥 둘이 그렇게 싸웠으니까.」
「아이큐가 우리 엄마 고양이랑 비슷한 놈 하나를 어떻게 못 해서 보고만 있는 너보단 내가 덜 불쌍해.」
당하고만 있을 성격이 아니란 것이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수위 높은 공격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잡아떼려는 시도를 해볼 수는 있었을 것이나 무영은 침묵을 택했다. 아이큐를 고양이에 비교당할 만한 주변인은 이안 하나뿐이었다.
암묵적 휴전에 돌입한 무영과 소현은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로 향하는 대신 근처에 있던 중국인 무리에게 2달러를 주고 담배 한 개비를 얻었다. 반 이상 타들어 간 담배를 무영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주며 소현이 물었다.
「방금 나 미친년이라고 생각했지?」
정확한 추측이었으므로 무영은 담배 필터를 깊게 빨았다. 아니라는 거짓말보다는 듣기 싫더라도 영양가 있는 진실 한마디를 돌려주고 싶었다. 소현과의 우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괜찮아, 도경이도 미쳤어.」
훗날 아무리 무영을 죽이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아이큐가 고양이와 비슷한 놈에 대한 진실은 혼자만 알고 있어 달란 입막음 값으로.
「안 죽이고 참으면 도경이는 계속 소현이 네 거야.」
진심이었다. 무영은 진실로 도경과 소현의 결혼을 바랐다. 그래야 이안의 기나긴 헛짓거리에도 마침표가 찍힐 수 있다고 믿었다. 소현이 죽으면서 한낱 꿈이 되어버린 바람이지만.
괜찮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정신을 놔버리는 것은 도경 같은 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무영은 도경처럼 실속 없지 않았다. 1번 플랜이 틀어지면 2번을, 2번이 틀어지면 3번을 새로 짜면 된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공격당하면 반격하듯이.
넘어올 때까지 당긴다.
무영은 현관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섯 자리 숫자를 누르다 틀린 방문객이 다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급한지 처음보다 누르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전자담배를 쿠션 아래 숨긴 뒤, 그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시도를 성공시킨 손님이 문을 열었다.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으며 현관과 거실 사이에 설치된 문을 밀어젖히는 사람은 당연히 이안이었다. 무영의 현관 번호를 아는 사람은 빅토리야가 무영에게 붙여준 러시아인 도우미 겸 감시자 니나와 이안 둘밖에 없었다.
“형 아직도 도경이 형한테 사과 안 했지!”
휴일 점심시간부터 남의 집에 와 고함치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건강에 이상은 없는 모양이었다. 바람직했다. 건강해야 오래 살지.
“하려고 했어. 내가 매일 일어나서 걔한테 제일 먼저 연락했어. 하루도 안 빼먹고.”
“근데?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외투부터 벗고 앉으란 의미로 팔뚝을 톡톡 건드렸다. 웃기게도 이안은 징징거리는 것을 잠시 정지하고 재킷을 벗어서 무영의 팔에 걸쳤다. 자동 반응하는 기계 같았다.
“내 연락 읽지도 않고 씹어서 회사 가봤는데 나갔대. 그래서 내가 내 거 뭐 하나 두고 왔는데도 연락 없어. 뭘 더 해. 못 해.”
“형 거를 두고 와? 그게 무슨 소리야.”
“주머니에 펜 있어서 그거 두고 왔어. 걔 남의 물건 자기 방에 있으면 막 화내잖아.”
이안이 소파 앞에서 발을 굴렀다. 무영이나 도경보다야 작다지만 이안도 반올림하면 180cm는 됐다. 그만한 성인 남성이 발을 함부로 썼다간 아랫집에서 항의 전화가 오기 십상이었다.
“그걸로 형이 왔다 갔는지 어떻게 알아? 거기다 형 네임 태그 붙여놨어? 그냥 거기 그 무섭게 생긴 대리한테 형 이름 말해주고 왔으면 되는데. 이름 남기고 왔어?”
“아니. 서프라이즈니까 비밀로 해 달라 그랬는데.”
“아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나 이러는 거 재미있어서!”
발을 구르는 것으로는 모자랐나 보다. 이안은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가, 발을 동동 굴렀다가 하며 정신 사납게 굴었다. 스물여덟이나 먹은 놈이 그러면 징그럽단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조언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그냥 못 본 척했다. 일단 무영의 눈에는 안 징그러웠다.
“뭐를 걱정해? 걔가 메시지만 보면 돼. 내가 다 설명했어. 이성호가 이안이 귀찮게 해서 내가 스튜디오 주소 불러줬다. 이안이는 잘못 없다. 너도 똑같이 말하면 된다니까?”
“내 연락도 다 씹으니까 그렇지.”
“회사에는 가봤어? 너 도경이 회사 자주 가잖아.”
무영은 이안의 어깨를 잡아다 끌어당겨 소파에 앉혔다. 말로는 별 지랄을 다 하는 이안이 정작 몸을 직접 만지는 손길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연락받아 주기 전엔 안 갈 거야. 그냥 가면 이번엔 비닐봉지가 아니라 연필꽂이 던질 수도 있단 말이야.”
“걔 아직도 너한테 뭐 던져? 서른하난데 아직도 어른이 안 됐네, 도경이는.”
뭘 접어서 던지는 손버릇은 물리적으로 그 어떤 마찰도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 도경이 유일하게 행사하는 폭력이었다. 항상 하찮기 그지없는 종이나 비닐쪼가리를 던지는 데 그쳐 지금까지는 개입하지 않았다. 위험한 물건을 던져 이안의 피부에 흉이라도 남길 시 도경은 무영에게 들려서 멀리 던져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말 돌리지 마, 형.”
“그럼 너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마. 너 이마 계속 그렇게 하면 주름이 빨리 생겨.”
인상을 쓰느라 주름이 잡힌 미간에 검지와 엄지를 대고 위아래로 쭉 피는 시늉을 했다. 그런다고 이안이 갑자기 인상을 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영은 손을 내렸다.
“내가 다 생각한 게 있어. 너는 조금만 참고 기다려. 도경이 만나게 해줄게.”
“도경이 형 집 앞에서 서프라이즈, 이런 거면 나 안 해. 형도 그런 짓 좀 하지 마.”
“안 해, 안 해.”
“그럼 뭐 어떻게 할 건데.”
하여튼 버르장머리도 없는 게 인내심도 없었다. 무영은 이안의 몫까지 두 배로 기르며 살다 보니 평균치보다 훨씬 높아진 인내심을 발휘했다.
“나 다음 달에 2호점 오픈해. 지난번처럼 정식 오픈 전에 애들 부를 거야. 그날 도경이도 오면.”
“그니까 연락 안 되는 사람을 어떻게 오게 할 거냐고?”
“이시우한테 그날 하루만 클럽에서 바텐더 해 달라 그랬어.”
이안의 모든 움직임이 일시 정지된 화면처럼 멈추었다. 눈 깜박임도, 구겨졌다 펴졌다 하던 이마도, 수시로 나던 한숨소리도 다. 무영은 웃음을 참으려 목을 푸는 척 크게 헛기침했다.
한참 만에 이안이 침묵을 깼다.
“그게 누군데.”
짧지 않은 시간을 사용해 쥐어 짜낸 대응치곤 너무 형편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무영은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이안을 그 세월 동안 곁에 둔 목적이 참모로 쓰기 위해서는 아니었으니까.
“알면서.”
“난, 모르는데? 그게 누군지…….”
“이안. 너 만약 우리 엄마 집에서 지금같이 거짓말했으면 마카로프로 다섯 번 맞았어.”
상대가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다면 거짓말이 아니었다. 들켜야 거짓말이었다. 이안은 거짓말쟁이였다. 거짓말만 했다 하면 들켰으므로.
이안이 입술을 꽉 닫았다. 불리한 것 같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작전으로 가려는지도 몰랐다. 무영은 이안을 뒤로 하고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눈에 걸리는 족족 다 술이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다는 점을 생각해 맥주로 골랐다.
무영이 거실로 돌아오고 나서도 이안의 상태는 아까와 똑같았다. 입 다문 채로 죄 없는 러그만 노려보는 중이었다. 무영은 미리 따놓은 캔을 이안의 손에 쥐여주었다.
“안주도 줄까?”
맥주를 받아든 이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술에 취하면 꼴도 보기 싫어지는 부류가 있고, 술을 먹여야 대화의 질이 높아지는 부류도 있었다. 이안은 후자였다. 취기가 돌면 들킬 거짓말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묻는 말에 바로바로 정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왜 이시우 불렀냐고 안 물어봐?”
“아니, 나는 정말 그게 누군지.”
“또 거짓말할 거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날 도경이 만나. 네 마음대로 해.”
이안의 시선이 허공에서 방황했다. 머릿속이 암전됐는지 그는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영은 전자담배를 숨겨놓은 쿠션에 등을 편히 기댔다.
이안이 맥주 캔 표면을 만지작대며 소심하게 말했다.
“걔 불러서 뭐 어쩌게.”
“네가 나한테 빨리 버리라고 했던 우지한 목도리, 누가 샀게.”
“우지한이 샀겠지.”
“이시우가 샀다는데.”
“뭐? 형이 그걸 어떻게.”
“원래는 찾으러 오기로 했었다고, 그거. 근데 도경이가 왜 갑자기 그걸 버리라고 했을까?”
추론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었으니 이안은 맞추기만 하면 됐다. 여러 번 눈을 감았다 뜨기만 반복한 이안이 불신 가득한 투로 되물었다.
“이시우가 산 거라서 버리라고 했다는 소리야?”
“그게 말이 되지. 아니면 왜 버리라고 해?”
“아니야. 이시우랑 우지한은 그냥 보육원 때부터 제일 친한 친구라 지금까지 같이 사는 거라 그랬어. 그런 사이 아니야. 도경이 형도 다 알…….”
맥주 반 캔 가지고 벌써 취했을 린 없으니 순전히 말실수였다. 이안은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발설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래봤자 말해버린 후였다.
보육원. 무영이 알기론 고아원과 뜻이 동일한 단어였다. 이안을 너무 놀라게 했다간 도망쳐버릴 위험이 있었다. 시우와 지한의 역사를 눈치채고 있었던 척하는 편이 나았다. 무영은 아무렇지 않게 이안의 말을 받았다.
“친구인지 아닌지는 걔네만 알지. 네가 걔네 집에 카메라 달아서 봤어? 둘이 뭐 하는지?”
“둘이 뭘 하든. 도경이 형이 이시우를 왜 질투하냐고.”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하고 앉아 있다니. 한숨은 이안보다 무영이 더 쉬고 싶었다. 소현을 질투하지 않았던 이안이라면 진짜 몰라서 물었을 수도 있다.
“너는 다른 사람 질투할 때 왜 해. 생각을 잘 해봐.”
“나도 질투가 뭔지는 알아. 그건 도경이 형이 우지한을…… 그럴 때나 하는 거잖아. 근데 그건 절대 아니라고.”
도경이 시우를 질투하려면 지한을 좋아해야 하는데 그건 절대 아니기 때문에 무영의 가설도 다 틀렸다는 것이었다. 분간이 안 갔다. 믿을 만한 근거로부터 나온 확신인지, 아니면 그냥 도경이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 냅다 현실을 부정하고 보는 것인지.
“그럼 우지한이랑 뭘 하고 싶은데 도경이는. 먹고 버린대?”
“형!”
이안이 질색하며 무영의 팔을 때렸다. 클럽을 시작하면서 새로 알게 된 거래처 사장들이 잘 쓰는 말이라 한 번쯤 육성으로 뱉어보고 싶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영원히 봉인해야겠다.
“미쳤어? 내가 이래서 클럽 하지 말라 그런 거야.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큰일 나.”
“오케이.”
“그리고 먹기는 뭘 먹어. 도경이 형이 걜 왜 먹는데.”
“그럼 안 먹고 아끼는 거야? 그게 좋아하는 거라니까.”
이안이 또 한바탕 맥주를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한참 꼴깍대다 테이블에 던지듯 캔을 내려두는 폼이 거의 다 마신 분위기였다.
“나도 진짜 몰라. 난 그냥 심부름센터에서 준 서류 배달만 했어. 나한테도 뭐 어떻게 할 거라고는 말 안 해줬다고.”
심부름센터는 신중하게 골라야 했다. 정보력과 무력을 둘 다 갖춘 경우엔 그냥 주먹만 쓸 줄 아는 놈들보다 배로 위험했다. 골치 아파질까 봐 도경 본인이 안 가고 이안을 시킨 것이었다. 쌍놈의 새끼.
“알고 싶지 않아? 도경이가 뭐 하려고 우지한 데리고 다니는지.”
“나는,” 이안이 의욕 없이 중얼거렸다. “도경이 형한테 무슨 일만 안 일어났으면 좋겠어.”
“걱정하지 마.”
무영이 이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 말 들으면 도경이한테 아무 일도 안 일어나.”
지한에게 그리 큰 악감정은 없었다. 이안에게 훅이 어쩌고 하면서 겁주던 모습은 가소로웠지만 어떻게 해버리고 싶은 지경은 아니었다.
지한의 죄라면 도경과 엮였다는 것이었다. 그러게 누가 소현과 도경을 연달아 만나라고 했나. 플랜이고 뭐고 무영이 새로 여는 클럽에서 술을 만들고 있는 시우와 도경에게 딸려온 지한이 마주치면 어찌 될지 궁금해서 안달이 다 났다.
무영의 팔 안에 완벽히 들어온 이안은 연해 보이는 입술을 깨무는데 열중해 있었다. 무영은 슬쩍 손을 올려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빨리, 빨리 시우와 지한을 본 도경이 어떤 색다른 지랄을 부릴지 알고 싶었다.
#51
지한은 식탁 위 달력을 살폈다. 월요일이 되려면 이틀이나 더 남았다. 금요일이니 한 번 연락해볼까 생각해보긴 했다. 하지만 일주일에 두 번이나 만나는 건 회사 다니는 사람에게 피곤한 일일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어설픈 핑계를 대거나 시우를 데리러 간다는 명목으로 호텔 주변을 얼쩡거리지 않고도 도경을 만나는 일이 가능해졌다. 날씨가 따듯해지면 놀러 가자는, 서비스인지 진심인지 모를 한마디를 잘못 했다가 도경이 지한에게 이끌려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거리를 걸었던 그날이 확실한 계기였던 것 같다.
오토바이를 도둑맞았던 주가 끝나기 한 10분 전쯤 도경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요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먹고 싶은 거야 많았다. 생각나는 대로 두어 가지 음식을 말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답장이 왔다. 「내일 저녁에는 그중에서 뭐 먹고 싶어?」 별생각 없이 맨 처음 말한 메뉴를 고르자 도경이 그럼 내일 일곱 시, 라는 말과 함께 식당 지도를 보내왔다.
대화창을 끄고 나서야 지한은 도경이 만나자고 요청하는 방식에 감탄했다. 대화를 너무 자연스럽게 이끌어서 그게 뭐 하자는 건 줄도 모르고 끌려가다 보면 항상 도경의 뜻대로 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도경은 초짜가 아니었다.
초짜든 아니든. 그딴 건 안 따지고 싶었다. 연애는 한 상대하고라도 길게 해본 도경이 경험자였지만, 연애만 안 해봤지 지한도 다 처음은 아니니까. 지는 기분이 들 필요도, 억울한 기분이 들 필요도 없었다.
그럼 지한과 도경이 지금 하고 있는 건 연애일까.
깊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단 기분이 들었다. 이성보단 본능적인 기분이었다. 사귀자는 말을 주고받아야 인정되는 것이 연애라면 지한과 도경은 평생 연애를 시작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사귀자는 말을 하는 도경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지한 본인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좋아한다는 말은? 짧게 상상하는 것만으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연락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라 딱히 뭘 더 어쩌지 못했다. 휴대폰 화면을 켰다 끄기만 반복했다. 괜히 오버했나 싶었다. 지하철이 오래 걸리니 지한의 동네로 오겠다고 했을 때 못 이기는 척 와 보라고 할 걸 그랬다. 그럼 오늘은 형이 오라고 은근슬쩍 두 번 보기도 수월했을 텐데. 이래서 머리를 써야 했다. 성급하게 말부터 하지 말고.
배고플까 봐 사준 닭꼬치는 버려야 했고, 재미없는 영화를 혼자 끝까지 관람해야 했으며 오토바이까지 잃어버린 날이었음에도, 그날 도경을 끌고 나갔던 선택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확실히 지한은 도경이 더 편해졌다. 허점을 봐버려서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배경음악이 아무리 자주 흘러나와도 잘만 자던 도경은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에 바로 깼다. 정신을 못 차리고 눈을 꽉 감았다 뜨는 모습을 봤고, 그러다 지한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멀쩡한 척하는 모습도 봤다. 예전엔 도경이 유리성 안에서 나와 본 적 없는 왕족처럼 만져서도 쳐다봐서도 안 되는 대상으로 보였다면 요새는 약간.
귀여울지도.
“기분 좋은 일 있어?”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지한은 급히 휴대폰을 뒤집어엎었다.
“어, 아니. 뭐 웃긴 거 봐서.”
맞은편에 앉지 않고 지한이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온 시우가 싱크대에 기대섰다. 과일 향이 풍겼다. 지한이 꽃이나 민트 등 다른 향은 다 싫다고 한 뒤로 그들의 욕실에는 과일 그림이 그려진 제품만 들어왔다. 이제라도 말해줄까. 꽃 향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고민만 하고 말하진 않았다. 쓸데없었다.
“나 다음 주엔 하루밖에 못 쉬어.”
“왜?”
“팀장님이 다른 일을 하나 연결해주셨는데 그게 주말이라서.”
“다른 일? 바 말고?”
“하는 일은 똑같은데 호텔 말고 다른 데로 가서 하는 거야.”
둘이 집 안에서 진득하게 대화를 나눠본 것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지한은 시우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낯빛이 별로였다.
“근데 왜. 문제 생겼어?”
“문제까지는 아니고…… 나한테 그 일 맡기고 싶다고 했다는 사람이 좀. 그래서.”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 건 아니라 딱 말을 못 하겠어. 원래부터 성격 안 좋은 사람 같기도 하고.”
시우는 지한이 아는 인간들을 다 통틀어서 가장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사람 때문에 골치 아픈 상황이라면 지한은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가 없었다. 복면을 뒤집어쓰고 가서 기절시키고 오라는 부탁이면 또 몰라.
딱히 지한에게서 조언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시우가 주제를 바꿨다.
“오토바이는 못 찾았대?”
“어.”
“하나 새로 살까?”
시우에게는 그냥 혼자 있다가 음료를 사러 간 사이 도둑맞았다고 둘러댔다. 거짓말한 것도 양심이 아픈데 새로 사겠다고 할 철판이 있을 리 없었다.
“됐어. 내가 돈 모아서 살게.”
시우의 고개가 냉장고와 세탁기로 꽉 찬 베란다를 향했다. 속이 답답해지는 공간 너머의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달라진 건 없는데.”
어느새 다시 지한으로 관찰 대상을 바꾼 시우가 갸웃거렸다.
“뭐. 나?”
“응. 왜 이렇게 달라 보이지.”
“뭐가. 왜.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너 그…… 연예인들 주사 맞으면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
“살쪘다고?”
“아니, 아니.”
시우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인상이 좀 유해진 것 같아.”
“유해져?”
“응, 약간. 느낌이 부드러워졌어.”
부드러워졌다. 야한 단어도 아니고 수치스러운 단어도 아닌데 어째서 얼굴 주변 공기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지 의문이었다.
지한은 시우가 내다봤던 베란다 창문을 쳐다보았다. 얼른 날이 따듯해졌으면 좋겠다. 몰래 낯간지러운 소망을 품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