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Low Kick
#52
건물들이 더 많아졌다. 거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반대로 더 낮아졌다. 한눈에 보이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무영의 두 번째 클럽이 마냥 새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까만 간판의 필기체는 똑같았다. 스펠링도 아마 같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했다.
담배를 피우며 기다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한은 클럽이 보이는 카페를 택했다. 커피가 싫어 충동적으로 시킨 음료에서 달달한 향과 싸한 향이 섞여 올라왔다. 시우가 가끔 마시는 것을 봤던 기억이 뒤늦게 났다. 무의식중에 따라 시켰나 보다. 한 손으로 컵 표면을 감쌌다. 열기가 손바닥을 데웠다.
―혹시 먼저 도착해도 혼자 들어가지 말고 나랑 같이 들어가.
도경은 지한이 먼저 무영의 클럽 안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까 걱정이라도 하는 듯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길 신신당부했다. 솔직히 그냥 밖에서 기다릴 테니 혼자서만 들어갔다 오라고 하고 싶었다. 무영이고 이안이고 별로 자주 보고 싶은 얼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하지 못했다. 혼자만 들어가면 큰일이 날 것처럼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자는 도경에게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가장 큰 잘못은 무영에게 있었다. 회사 다니는 사람을 평일에 클럽으로 부르다니. 잘난 척은 있는 대로 하면서 정작 중요한 염치는 없었다.
도경도 그 의견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도경은 무영을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자꾸 도경을 만지작대는 꼴이 거슬려서 원래 저러냐고 물었다가 어렸을 때는 볼에 뽀뽀도 했다는 대답을 들었던 적도 있고.
시우를 제외한 나머지 보육원 동기들이나 체육관 친구들이 지한의 볼에 뽀뽀를 한다고 상상해봤다. 소름이 다 끼쳤다. 도경과 그의 친구들이 그런다고 상상하면 소름은 배가 되었다. 지한은 도경의 친구들이 별로였다.
놀랍게도 지한을 평일 저녁에 클럽 앞에서 대기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는 도경이 아니라 무영이었다. 메시지로 대뜸 월요일에 바쁘냐고 물어오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에게 누구시냐고 묻지 않고도 지한은 그게 무영이란 것을 알았다.
까만 바지와 대조되어 존재감을 뽐내는 요란한 신발이 인상적인 프로필 사진에서 한 번, 영어로 적어놓은 상태 메시지에서 두 번, 그리고 배경 사진 속의 대형견에서 세 번 힌트를 얻고 나니 물을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고 하려다 말았다.
남의 번호를 허락도 없이 넘겼을 유력 후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전혀 안 듣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던 쇼핑몰 사장.
처음엔 무시하려고 했다. 대화 상대 목록에 무영을 추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도경의 친구였다. 도경의 친구라서. 번번이 지한이 스스로의 주먹과 입을 통제하게 되는 이유였다. 갈팡질팡하는 속을 어찌 알았는지 무영이 귀신같이 도경을 언급했다.
[도경이도 오는데. 걔가 말 안 해요? 많이 바쁜가 봐]
어떻게 하면 힘쓰지 않고도 상대를 뒤흔들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놈이 분명했다. 홧김에 가겠다고 답장한 지한은 도경이 지한을 무영의 클럽으로 부르지 않으려 했던 데에 따로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퍼뜩했다. 거창한 사정이 아니라도 단순히 오랜만에 친구들하고만 시간을 보내고 싶을 수 있었다.
도경의 의중을 거스르게 된 것일까 봐 조급해져 얼른 메시지를 보냈다. [형 친구가 새로 여는 클럽에 나도 오라고 해서 알겠다고 했는데] 그렇게만 보냈다.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지까진 지한 본인도 잘 몰랐다. 한참 만에 도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먼저 도착해도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자고.
그러겠다고 했고, 착실하게 기다리는 중이지만, 영문을 모르기는 며칠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왜 같이 들어가자는 말을 그리 강조했는지. 지한이 도경 없이 클럽 안에 들어갈 것 같아서였다면 천하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소현의 친구들은 다 지한을 싫어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앞으로도 뇌에 문제가 오지 않는 한은 잊히지 않으리라. 이안에게서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내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괜찮았다. 도경이 있으니까. 도경만 지한을 싫어하지 않으면 나머지 놈들은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도경은 언제부터 지한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을까. 도경도 결국엔 소현의 친구 중 하나였다. 생판 남인 지한보다야 친구들이 하는 말에 동조했을 것이라 봐야 타당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혼자만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을 텐데, 지한으로선 암만 머리를 싸매도 그 계기가 뭔지 짐작가지 않았다.
처음 말을 섞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한을 향한 도경의 친절은 변하지 않았다. 에스더를 찾는 지한에게 바로 도움을 주었고, 소현과 알던 사람이라 잘해주고 싶다고 했다. 도경과 소현은 분명 사이가 좋은 친구였을 것이다. 납득 못할 것도 없었다. 소현이 도경에게도 지한에게 하던 것처럼 물건을 집어 던지진 않았을 테니까. 도경 같은 남자 앞에서라면 공공장소에서보다 더 예의 바르게 굴었을지도.
어차피 모든 것은 추측이었다. 어쩌면 도경은 처음부터 다른 친구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너희가 뭐라 해도 난 소현이 남자친구가 나쁜 놈 같지 않다고 해줬을 수도…… 있으려나.
도경을 만나는 날 소현의 생각으로 더 이상의 시간을 날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한은 애써 다른 생각을 머릿속으로 밀어 넣었다. 오늘 시우는 팀장이 연결해준 일 때문에 평소보다 더 늦게 귀가할 것이라고 했다. 지한을 걱정하느라 못 자고 기다릴 일은 없으리란 뜻이었다. 지한도 더 편하게 도경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클럽에서 나와 저녁을 먹고, 그런 다음엔 저번처럼 영화를 봐도 나쁘지 않았다. 이왕이면 덜 졸린 영화로. 사실 저번에 본 졸린 영화도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화의 분위기에 맞게 잘 자는 도경을 어깨로 받쳐주며 보낸 시간은 그 나름대로의 보람이 있었다.
볼 영화가 없다면 다른 할 일이 떠오를 때까지 태평하게 거리를 걸어도 좋았다. 지난주엔 관광객 한국인 할 것 없이 사람이 많은 동네에 갔다가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도경이 움찔움찔 놀라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다. 매번 바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에 지한도 도경의 장단에 맞춰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경 덕분에 지한의 모르는 척하는 실력이 부쩍 늘었다.
도경 같은 사람은 호텔이든 집이든 안전하고 깨끗한 구역에서 멀리 떨어지기 싫어할 줄 알았다. 소현은 진짜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첫눈에 소현과 남매처럼 닮았다고 느꼈던 도경은 안 그랬다.
밥 먹자는 단계를 항상 막힘없이 통과하는 그는, 그다음에 뭘 하겠다는 계획까지는 한 번도 제대로 세워 오지 않았다. 않는 것인지 아니면 지한더러 알아서 하라는 것인지 그 의중까지는 파악 못 했다. 아무튼 늘 밥 먹을 장소까지만 자신감이 넘쳤다. 문제는 지한이라고 두 사람을 위한 계획 짜기에 숙련된 사람이 아니란 점이었다. 그런 둘이 모였으니 만날 때마다 식사 이후로는 즉흥적이었다.
지난주엔 사람이 미어터지는 대로변에서 계속 걷다가 도경이 기절할까 봐(그는 괜찮다고 했지만 보는 지한이 안 괜찮았다) 피신한 뒤쪽 골목의 작은 와인 바에 들어갔다. 겉에서 보기에 작아 보였고 실제로도 평수가 그리 넓은 가게는 아니었으나 사람은 많았다. 돌아 나가자니 갈 데가 없어서 그냥 마지막 남은 자리에 앉았다.
도경은 시끄러워 죽겠는 가게의 좁은 의자에 앉아서도 싱긋, 주문을 받으러 온 남자가 도경의 말을 엉뚱하게 알아듣고 동문서답해도 생긋 잘만 웃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웃음을 잃지 않는 도경의 맞은편에서 지한은 열심히 다리를 떨었다. 그에게 결벽증 끼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로 신경 쓸 거리가 확 늘었다.
타고나길 섬세하진 않은 지한이었다. 도경의 앞에서 말을 가려 하는 데에 들어가는 집중력만 해도 이미 한도 초과였다. 거기다 언제 또 손을 닦고 싶어 하진 않는지, 인상을 쓰진 않는지 살피기까지 하려니 딱 돌아버릴 것 같았다. 정작 도경은 어딜 데려가도 불평불만 없이 잘 웃었다. 지한만 촉을 바싹 세우고 있느라 에너지가 금방 닳았다.
조명이 낮은 와인 바의 모든 테이블엔 특이하게 생긴 촛대가 놓여 있었다. 도경이 고른 와인에선 꿀 향 비슷한 것이 났다. 친구들보단 연인들에게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이성보다 동성끼리 앉은 테이블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아무도 지한과 도경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지금 무슨 냄새 났는데. 오늘 향수 뿌린 사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착각은 와인 한 병이 비어갈 무렵 깨졌다. 평일 밤에도 걸려오는 업무 전화를 마다 않은 도경이 통화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옆 테이블 남자들이 향수를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
「방금 나간 사람 향수 냄새야.」
「누구? 코트?」
「엉. 코트 너무 예뻐서 계속 쳐다봤잖아.」
「생긴 것도 잘하는데 냄새도 잘하네.」
하필 그때 가게 음악 볼륨이 잠시 줄어든 탓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지한의 청각이 전에 없던 높은 능률을 보이기도 했다. 남자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귀에 꽂힐 정도로 크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지한은 그들의 대화소리를 거의 다 잡아냈다.
도경의 향수 냄새를 제일 먼저 인지한 것 같은 남자가 지한을 힐끗거렸다. 일행들에게 뭐라 뭐라 속닥거린 후, 남자는 지한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혹시 좀 전에 나가신 분이랑 친구세요?」
친구란 호칭이 썩 와 닿진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호칭이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요.」
「아, 그럼 그분 향수 뭐 쓰시는지 아세요?」
남자의 일행들이 저들끼리 눈을 맞추고 웃었다. 아무래도 향수를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지한은 오기로 답했다. 당연히 알지, 내가 준 건데. 그런 마음으로.
「네.」
「어. 아신다고요? 뭐예요? 냄새가 너무 좋아서.」
당황은커녕 뻔뻔하게 맞받아치는 남자의 태도에 지한은 바로 괜히 오기를 부렸다고 후회했다. 도경과 만나는 빈도가 잦아질수록 원망스러워지는 습관이 바로 말버릇이었다. 말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생각하려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와인바에서도 그랬다. 안다는 대답을 먼저 하고, 자신의 의식이 흐른 방향은 나중에 인지했다. 그 향수 내가 준 거니까 너희는 저 남자한테 관심 꺼라. 그 말이 하고 싶어서 냉큼 안다고 해버린 것이었다.
눈 깔고 그냥 술이나 처마시라고 하면 안 되겠지. 그럼 뭐라고 해야 관심을 끌까. 고민이 덩어리처럼 부풀던 중 도경이 돌아왔다. 옆 테이블에 짧은 눈길을 준 그는 지한에게 고개를 가까이 해보라고 손짓했다. 다른 데 갈래? 귓속으로 들어오는 도경의 숨이 꼭 미풍 같았다.
「아까 옆에 앉았던 남자들 있잖아요.」
「어린 애들?」
가게 밖으로 나온 그들은 어딜 가자는 말 없이 경사진 골목을 내려갔다. 밤인데도 견딜 만한 추위였다. 지한은 주머니 속 담뱃갑을 세게 쥐었다 놨다.
「어린지 아닌지도 봤어요?」
「옆자리였으니까 봤지……, 왜?」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연습 중이었으므로, 지한은 입을 다물고 한 박자 쉬었다. 남자들 말이 맞았다. 도경에게서 풍기는 옅은 향이 찬 공기를 타고 지한의 콧속으로 들어왔다. 향. 지한이 선물한. 감각은 이성을 약화시켰다.
「걔네가 아까 나한테, 형 생긴 것도 잘하는데 냄새도 잘한대요.」
「냄새를 잘한다고?」
「잘생겼는데 냄새도 좋다는 거잖아요.」
「네 얘기를 잘못 들은 거 아니야?」
「형 나갔을 때 한 얘긴데 뭘 잘못 들어. 그리고 나한텐 아무 냄새도 안 나요.」
「그래?」
골목을 빠져나가려면 더 걸어야 하는 지점이었다. 갑자기 몸을 튼 도경이 지한에게 확 다가왔다. 얼굴 근처까지 왔을 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도경은 소리 없이 지한의 주변 공기를 들이마셨다.
「너한테서도 무슨 냄새 나.」
「냄새? 무슨 냄새, 나 오늘 담배 안 피우고 나왔…….」
「라임인가?」
혹시라도 안 좋은 냄새가 난다고 할까 봐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절로 늘어졌다.
「아. 우리 집 그 뭐야. 몸 닦는 거. 그게 라임.」
「샤워 젤이 라임 향이라는 거지?」
「네, 그거.」
「시우 씨가 과일 향 좋아하는구나.」
안 그래도 도경에게 관심을 보이던 놈들 때문에 속이 복잡한데 시우까지 들먹이는 것은 반칙이었다. 의도하지 않아도 말이 절로 퉁명스럽게 나갔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걔는 향 그런 거 잘 몰라요.」
「그래?」
「아니, 어쨌든 그건 됐고, 왜 자꾸 내 얘기 했다 그래요? 아니라니까. 아까 걔네 형한테.」
기세 좋게 시작한 말이 중간에 막혔다. 형한테 관심 있었단 말이에요, 같은 소릴 해서 지한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전혀 없었다. 그보다 남자들이 정말 대놓고 도경에게 그런 식으로 관심을 표했던 것인지도 100프로 확신하긴 어려웠다.
「어쨌든 형한테 한 소리예요. 잘생겼다는 거.」
「남자들 나한테 그런 소리 안 해.」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럼 여자들만 형한테 그런 소리 할 수 있어요?」
「아니, 여자들은 더 안 좋아하고.」
「누가 그래요?」
「응?」
「누가, 여자들이 형을.」
자신이 자신감 돋우기 프로젝트 강사나 할 법한 소리를 하기 직전에 다다랐음을 깨닫고, 지한은 닥쳤다. 도경은 가끔 그렇게 알다가도 모를 소리를 했다.
여자들이 자길 싫어한단 소리도 그랬고, 그보다 더 전엔 자신이 말을 안 예쁘게 하면 그건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고 알려달라고 한 적도 있었다. 지한이 아는 사람을 다 따져 봐도 도경보다 예쁘게 말하는 이는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며 사느라 스트레스를 쌓아 놓기만 하다 이성이 약해질 때에 한해 방출하는 것이란 의심이 굳건해졌다. 남의 머리를 벽에 박아댄다든가.
또 그날로 돌아갔다. 왜 모로 가도 자꾸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니, 실은 알겠다.
만지고 싶어.
지한은 앞을 봤다.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거리에 도경이 서있었다. 약한 바람에 살랑대는 코트 자락의 움직임이 가벼웠다. 계절이 확실하게 바뀌었다.
“커피 마시는 거 처음 봤어.”
음료를 받았던 상태 그대로 직원에게 돌려주고 나온 지한에게 도경이 말했다.
“커피 아닌데.”
“그럼 뭐야?”
“민트…… 초코. 어쩌고. 몰라요.”
“나도 민트 좋아해.”
지한은 혼란에 빠졌다. 마시고 싶다는 말인가. 그냥 한 말인가.
“사 줘요?”
“응?”
“민트, 좋다고. 방금.”
“아, 지금 먹고 싶단 얘기는 아니었어.”
도경이 살짝 웃었다. 치아가 보이려다 말고 도로 숨었다.
지한은 도경을 따라 길을 건넜다. 1호점과 똑같은 간판을 가진 2호점은 훨씬 더 경사진 계단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매사에 조심스러운 도경은 일정한 속도로 내려간 반면 지한은 손잡이를 잡고 더디게 내려갔다. 지하에 거의 다 와서는 식은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무슨 놈의 계단을 이렇게 만들어놨냐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찰나, 때마침 무영이 등장했다. 그는 도경을 보자마자 어깨에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도경이 좀 늦었어? 우리 할 얘기 있으니까 1등으로 와야지.”
“통화했잖아.”
“네가 욕만 하고 끊는 거는 통화가 아니야. 어택이지.”
“내가 언제 욕을 했어?”
도경에게 말을 걸기 바쁘던 무영이 처음으로 지한에게 시선을 던졌다. 새로 염색했는지 머리가 유난히 까매 보였다.
“안녕. 도경이 잠깐 빌려가도 괜찮아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지.”
“그럼 누구한테 물어봐?”
도경이 보고 있으니 곱게 말해야 한다고 자가 최면을 걸면서도, 지한의 관심은 자꾸만 무영의 팔로 갔다. 더 정확히는 그 팔이 걸쳐진 도경의 어깨로. 늘 무영의 손이 닿는 즉시 뿌리치던 도경이 오늘은 왜 가만히 있는지 궁금했다. 빨리 뿌리쳤으면 좋겠다는 강한 염원도 들었다.
“형이랑 얘기하고 싶으면 형한테 허락받아요.”
“오. 형이래. 언제부터 그런 사이 됐어? 네가 쟤 형이야 이제?”
드디어 도경이 무영의 팔을 쳐냈다. 무영은 불쾌한 기색은커녕 기분이 좋아진 사람처럼 샐샐 웃으며 위쪽을 가리켰다.
“그럼 진짜 잠깐만 빌린다? 빨리 돌려줄게요.”
“그럼 지한이는 여기 혼자 있으라고?”
“지한이……?” 생전 처음 듣는 단어인 양 어색하게 중얼거린 무영이 금세 얼굴을 폈다. “그래. 혼자 있으면 안 되지. 기다려.”
그는 가죽 재킷 앞에 달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도경이 왔으니까 내려와. 응, 문 잠그지 말고. 징그럽게 다정한 말투가 불길했다. 불길함은 현실로 이어졌다. 무영의 전화를 받고 내려온 사람은 이안이었다.
“금방 올게.”
허허벌판에 두고 가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미안할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었다. 지한은 잠자코 턱을 끄덕였다. 도경은 지한의 반응을 확인한 후에야 이안과 인사했다. 넌 나중에 나랑 얘기해.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닌지, 이안은 힘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무영과 도경이 사라졌다. 지한은 이안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들이 서있는 곳은 계단과 화장실 사이 복도였다. 일반 클럽처럼 시끌벅적했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엔 대화가 가능한 정도의 소음만 있었다. 빠르고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바가 구석에 있는지 웃음소리들만 나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소리는 또 있었다. 하찮고 미세하지만 아주 가까워 무시하기 어려운 소리. 지한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벽에 기대선 이안이 신발 뒤축으로 바닥을 쿵쿵 찧고 있었다.
“좀만 참아.”
지한이 쳐다보는 것을 알고도 발로 몇 번 더 바닥을 괴롭힌 뒤에야 이안은 그 이상한 짓을 멈추었다.
“……뭘 참아?”
이안이 눈을 치켜떴다. 위협적으로 보일 줄 알았다면 오산이었다.
“나랑 있기 싫어도 참으라구.”
얼굴 도장은 찍었으니 도경이 돌아오면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지한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를 싫어하지만 뭐 하나라도 더 알아내 욕하려 겉으로는 아닌 척 웃어주는 사람들을 몇 명이나 만나야 할지, 어떤 표정으로 인사를 해야 할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호흡이 과해지려 했다.
“너.”
때린다고 한 것도 아니고, 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너, 라고 했을 뿐인데 혼자 놀란 이안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럴 거면 왜 성질을 돋우는지 몰랐다. 설마 지한이 쥐죽은 듯 듣고만 있을 줄 알았을까. 무슨 근거로.
“나를 왜 싫어해?”
“누가, 뭐, 내가? 널?”
“넌 나 오해 안 한다며. 거짓말이었어?”
남들은 지한을 오해해 싫어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며 사무실에 지한을 처박아뒀던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도 이미 좋아하지 않는단 느낌은 받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한 자리에조차 있기 싫단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직설적인 질문에 당황했는지 눈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정신없이 굴리던 이안이 갑자기 또 발로 바닥을 세게 걷어찼다.
“네가 무슨, 뭔데. 내 생각이 다 읽혀? 왜 나는 한 적도 없는 말을 네 마음대로 그렇게.”
“너 나 싫어하잖아.”
“아! 왜 이렇게 매너가 없냐고. 싫어하는 거 같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지 그걸 따져? 따져서 뭐하게, 진짜로 나한테 훅 날리게?”
“매너가…….”
없다고. 무식하다는 소리였다. 뭐, 할 말은 없었다. 지한과 대화다운 대화 한 번 나눠보지 않은 주제에 어찌 그리 확신 있게 무식하다고 단정 짓는지 모르겠다가도, 순간 욱해서 아가리를 찢어버린다고 했던 도경의 생일을 생각하면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이안인데.
지한은 되살아나려는 억울함을 눌렀다. 순수한 궁금증이었을 수 있나, 이안의 위치에 서본 적 없는 지한은 알 길도 없었다. 골프 못 치는 게 정말 그렇게나 놀라울 수도 있나. 너무 놀란 나머지 초등학생들도 알 것들까지 모를 거라고 넘겨짚는 게 가능한가.
구질구질하게 살다 보면 생각할 시간은 사라지고 몸을 쓸 시간만 늘어났다. 굳은 머리를 탓할 상대도 없었다. 묻기라도 하고 싶었다. 지한이 그렇게 매너가 없고 무식해서, 그래서 도경이 직접 나쁜 애는 아니라고 두둔했던 그 이안이 싫어하는 거냐고. 그러나 물어볼 상대마저 없었다. 시우는 도경과 지한의 사이를 모르니까.
도경에겐 더더욱 물어볼 수 없었다. 그랬다가 도경이 정색이라도 하면. 그럼 네가 안 무식한 줄 알았냐고 하기라도 하면 그땐 어쩐단 말인가.
물론 도경은 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사람이었으면 지금까지 지한에게 잘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끊임없는 기습과 배신 속에서 살아온 지한의 불안정한 자아가 빚어낸 의심이었다. 마냥 꿈속 같다가도 조금만 삐끗하면 바로 곤두박질쳤다. 저렇게 예쁜 얼굴 뒤에 다른 생각이 숨어있으면 어떡해? 뭘 해도 좋다고 따라다니는 꼴이 멍청하고 한심해 보이면 어떡하지.
곤두박질치고 싶지 않았다.
이안과 더 마주 보고 있느니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소개를 하는 편이 나았다. 이안에게서 등을 돌려 복도를 빠져나온 지한은 도경이 무영을 따라 올라간 1층 쪽으로 틀었다. 아까부터 음악에 섞여 들려오던 대화소리가 커졌다.
“이런 귀여운 애를 어디서 찾았대, 김무영은? 너 무영이랑 친구야?”
기분 좋게 들리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무심코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안면을 익힌 소현의 친구 중 하나일 텐데, 먼저 인사할 낯짝까진 없어도 아는 척을 해오면 응대해줄 깜냥은 됐다.
“너는 왜 그런 걸 물어봐. 친구겠냐?”
“근데 너 칵테일도 만들 줄 아는 거 맞아? 대학생 아니야?”
자기가 말해놓고 혼자 웃느라 신난 여자는 에스더였다. 어이없어하던 그녀의 친구들도 하나둘 따라 웃었다. 술이 들어갔는지 다들 목청이 컸다.
“원하시는 칵테일 따로 있으면 말씀하세요. 바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농담을 가장해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에게 차분히 대응하는 바텐더의 목소리는, 에스더의 것보다 백 배쯤 익숙했다. 지한은 숨 쉬는 것도 잊고 바를 쳐다봤다. 에스더가 친구에게 기대느라 몸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가려져있던 바텐더의 얼굴이 드러났다. 지한의 귀는 틀리지 않았다. 유니폼이 아닌 사복 차림으로 바 안에서 칵테일 잔을 꺼내드는 바텐더는 시우였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시우가 무영의 클럽에서 바텐더 노릇을 하고 있었다. 성격 나쁘다던 그 손님이 무영이었다? 무섭게 맞아떨어지는 이야기였다.
핑핑 돌다 거꾸로 뒤집어져 작동을 멈춰버린 머리가 삐걱대는 동안 몸은 착실하게 반응했다. 지한은 저도 모르는 사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인지하고 멈추었을 땐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 앞이었다. 생각, 생각을 해야 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무영의 클럽이 범죄 소굴도 아니고, 시우가 나쁜 짓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한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다. 지한과 시우는 더 이상 서로의 모든 스케줄을 꿰고 있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10대들이 아니었다. 여태 소현의 존재를 비밀에 부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충 바빴다고 둘러대는 지한을 시우가 매번 믿었기 때문이다. 더 캐물었다면 다는 아니라도 절반 정도의 진실은 털어놨을 것이다. 지한은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지한이 시우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도경은 소현처럼 돈으로 지한의 시간을 사는 사람도 아니었다. 둘이 떳떳하지 못한 짓을 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비록 시우에게 도경과 지금까지 뭘 했는지 낱낱이 보고하라면 그건 안 될 것 같지만.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다.
도경이 지한에게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사이가 될 것이라 정해준다면 시우에게 말할 자신이 생길 수도 있었다. 도경이 최종적으로 뭘 원하는지 모르기에 아직은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관계였다면, 두려워도 용기를 내서 시우에게 말했을 것이다.
“떡같이 생겨서 손은 똑 부러지네? 너 보기보다 쓸모 있다.”
시우의 칵테일 맛을 봤는지, 누군가가 욕 같은 칭찬을 했다. 안 될 것 같았다. 시우에게 도경과 함께 여기 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일은 둘째 치고, 다른 사람들이 시우를 의외로 쓸 만한 싸구려 물건 취급하는 자리에서 오래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나가게?”
뒤늦게 복도에서 나온 이안이 계단 앞에 서있는 지한을 보고 인상을 썼다.
“도경이 형이 금방 온다고 했잖아.”
안 그래도 그 때문에 결단을 못 내리고 있던 중이다. 도경이 올 때까지 얌전히 숨어있다가 나가자고 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렇지만 시우가 있다 한들 도경이 안절부절못할 이유는 없었다. 지한만 곤란했다. 나가자는 지한에게 도경이 왜냐고 물으면 뭐라고 할 건가. 형 친구들이 시우 대하는 꼴을 못 견디겠어서? 그건 도경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말이었다.
핑계일지도 몰랐다. 시우가 고작 무례한 몇 마디에 상처받을 성격이었다면 호텔에서 몇 년째 별탈 없이 근무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한이 바에 가면 에스더와 그녀의 친구들이 아는 척을 해올 터였다. 그러면 나중에 시우에게 저 여자들과는 또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지한이 자리를 뜬 뒤 소현의 친구 중 하나가 말해버릴 가능성도 충분했다.
뭐라고 할지 몰라서 더 걱정이었다. 소현과 사귀는 사이었다고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소현의 돈을 노리고 접근한 놈이란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어, 이안이 와 있었어? 언제 왔어?”
망할. 꾸물대는 사이 계단 오를 타이밍을 놓쳤다. 화장실이 있는 복도로 가던 여자 한 명이 이안에게 다가왔다. 별장에서 본 기억이 나는 여자였다.
“아까. 사무실에서 뭐 좀 하느라…….”
“이안이 왔다고?”
조심성 없는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에스더가 나타났다. 무슨 칵테일을 마셨는지 목청이 더 좋아졌다.
“너는 왜 왔으면서 여기 서있어?”
“할 게 있어서. 좀 이따 인사하러 가려고 했어.”
“네가 하긴 뭘 해 이런 데서. 무영이한테 놀아달라고 귀찮게나 했겠지.”
“가만히 있는 애한테 왜 그래.”
“애는 무슨 애야?”
스물여덟이나 먹었는데, 하며 입구 쪽을 돌아본 에스더가 흠칫했다. 그때까지 지한이 이안의 그림자라고 착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놀란 모습이었다.
“우지한 씨 오랜만이에요?”
“맞지? 그런 것 같았는데 이안이가 아무 말도 안 해서 아닌 줄 알았어.”
기억 속 에스더는 엄청 친한 척하는 여자였는데 오늘은 어째선지 오랜만이란 말을 끝으로 돌아서 버렸다. 이안이 에스더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른 여자는 모퉁이를 돌아 복도로 사라졌다. 지한은 보이지 않는 손에 강제로 끌려가듯 느리게 이안과 에스더의 뒤를 따랐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했으나 에스더가 지한을 봐버린 이상은 소용없었다. 우지한은 어디 갔냐는 한 마디면 시우의 관심이 온통 그녀에게로 쏠릴 것이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꽤 됐다. 목소리는 여자들이 더 많이 났지만 바에 모인 인원 중 과반수 이상은 남자였다. 별장에서 봤던 사람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성호가 도경과 아는 사이라도 친구로는 절대 보이지 않듯, 에스더와 몇몇 여자들을 제외한 남자들은 도경의 친구들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 왔다고? 어디. 아, 쟤?”
도경의 친구로는 안 보여도 무영의 친구들로는 보이는 남자들은 굳이 지한을 향한 호기심을 숨기려 노력하지 않았다. 지한에게 매너가 없다고 했던 이안이 태연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있는 꼴을 보니 또 속이 욱하고 뒤집어지려 했다. 다 들리게 쟤, 쟤 거리는 놈들은 괜찮고 지한은 안 되는 그 기준이 뭔지나 알고 싶었다.
“우지한 씨 뭐 마실래요?”
따라온 이상 어차피 들키게 되어있었다. 그런데도 에스더가 그 이름을 시우에게 다 들리게 부르는 순간 아찔했다. 마침내 도경을 두고 도망칠까 말까 고민하게 했던 주인공이 진열대에서 양주병을 꺼내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 아니, 저는…….”
아직 정식으로 오픈하지 않은 클럽 지하에서 지한과 마주한 시우의 첫 반응은, 눈을 깜박이는 것이었다. 지금 시야에 잡히는 사람이 정말 지한이 맞는지를 확인하려는 듯 여러 번 빠르게 눈을 감았다 뜬 시우가 그다음에 취한 행동은 에스더와 이안을 힐끔거리는 것이었다. 지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시우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리는 것밖에는.
“그냥 이 사람한테 어울리는 걸로 알아서 만들어 줄 수 있어?”
“네, 바로 만들어 드릴게요.”
싹싹하게 대답한 시우는 바로 잔을 꺼냈다. 불과 몇 뼘 떨어진 거리에 있는 지한은 벌써 잊어버린 듯한 태도였다.
이안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에스더가 일어나 빈 의자를 두드렸다. 여기 앉아요, 나는 저쪽에 앉으면 되니까. 일어서면서까지 양보해준다니까 일단 앉았다.
자리를 옮긴 에스더는 곧장 다시 친구들과 떠들기 시작했다. 별장에서처럼 다른 친구들에게 일일이 지한을 소개시키는 일은 없었다. 성가시지 않아 다행이긴 한데 확연히 달라진 태도는 그것대로 찝찝했다. 어쨌든 지금은 소현의 친구까지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지한은 시우가 얼음을 담아온 잔에 위스키를 따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난리를 피울 것이라 예상하진 않았어도 이 정도로 무반응일 줄은 몰랐다. 설마 화가 났나. 지한은 시우가 화내는 방식을 잘 몰랐다. 시우가 지한에게 화를 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잭콕이야?”
“드시기 가벼워서 이걸로 했는데, 새로 만들까요?”
“뭘 바꿔. 우지한 씨 콜라 잘 먹죠?”
위스키가 깔린 유리잔의 나머지 부분이 콜라로 채워지고 있었다. 단맛이 나는 칵테일이나 쌩 양주보단 콜라를 섞어야 더 잘 마실 지한의 입맛을 알고 만든 메뉴였다. 지한은 멍하니 대꾸했다.
“아, 네.”
시우가 얇게 썰린 레몬 조각을 잔 주둥이에 끼워 컵 받침과 함께 앞에 놔주었다. 잔을 내려놓는 동작이나 표정에서 화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눈을 안 마주쳤다. 화가 났을 수도 있겠다.
지한이 거짓말을 했다 들킨 상황은 아니더라도, 시우의 하루를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의 일행들과 나란히 앉게 되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금도 공유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는 했기에.
다리가 자동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하루치 미움은 이안에게서 받은 양으로도 충분했다. 시우에게까지 부정적인 감정을 받을 여유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안 되겠다. 말을 걸기로 했다. 보는 눈들이 있으니 길게는 못해도, 이따 다 설명해 주겠다는 말 정도는 칵테일에 대해 물어보는 척하며 전달할 수 있었다. 지한이 먼저 말하겠다는 의지만 보여주면 시우의 기분도 풀릴 것이다.
소현의 친구들은 자기네끼리 요트 얘기를 하느라 지한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있었다. 지한은 몸을 숙였다.
“그.”
“나중에.”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한 시우의 말을 지한은 알아들었다. 그나 되니까 알아들었지 남들 같았으면 다시 말해달라고 했어야 할 만큼 부정확한 발음이었다. 그리 빨리 반응한 것으로 보아 지한이 말을 걸 줄 알고 있었나 보다.
민망해져 몸을 세운 지한은 가까이서 꽂혀 오는 시선을 감지했다. 손등에 턱을 괴고 앉은 이안이 지한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지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어깨에 무겁지 않은 무엇인가가 살포시 얹어졌다. 마디마디와 핏줄이 도드라지는 하얀 손. 두 겹의 옷이 손과 어깨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음에도, 지한은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진다고 착각했다.
“여기 있었네. 저쪽에 있는 줄 알고 찾았어.”
하마터면 이곳에 도경과 지한 둘만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지한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시우가 이쪽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도경이 말을 거는데 주의를 돌리기 뭐했다. 도경의 눈은 시우보다 지한의 앞에 놓인 잔을 먼저 포착했다.
“그거 술이야?”
“내가 한 잔 만들어 주라고 했어.”
에스더가 큰 소리로 끼어들었다. 지한의 등장에도 몇몇만 말하길 쉬었을 뿐 꾸준히 시끄러웠던 남자들이 이번엔 다 같이 조용해졌다.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 술 마시는 걸 한 번도 못 봤지 뭐야.”
묻지도 않은 사정까지 자세히 알려주는 에스더에게 도경은 아무런 답변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상을 쓰거나 째려본 것은 아니었다. 웃음기 없는 얼굴을 유지했을 뿐이다. 얼마 안 가 에스더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뭔가 이상했다. 마지막으로 본 둘은 절대 서먹하거나 안 좋은 사이로 보이지 않았었다. 오늘은 이상기류가 지나치게 상승하고 있었다.
“도경이도 뭐 마셔야지. 브랜디 어때?”
불쑥 끼어든 무영이 긴장감을 끊어놓았다. 그가 반가울 때도 다 있었다.
“쟤가 브랜디를 마시겠니?”
“너희 몰랐지. 도경이 이제 술 잘 마셔.”
“농담이면 재미없어.”
“아, 맞아. 생각해보니까 오늘 바텐더도 도경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지한의 어깨에 올라와있는 도경의 손이 힘을 잃었다. 이제야 시우를 본 모양이었다. 의식적으로 지한을 쳐다보지 않느라 도경이 온 줄은 모르고 있었는지 시우도 눈이 동그래졌다.
“도경이가 좋아한다고?”
“이 사람이 주는 술은 다 받아먹는 거 내가 봤어. 얼마나 맛있으면 도경이가 술을 마시게 하나 신기하잖아? 그래서 데리고 왔지.”
“어쩐지. 김무영이 혼자서 이런 귀여운 애를 뽑을 리가 없지.”
“에스더 취향이 좀 위험하네.”
다른 자리 다 놔두고 굳이 이안과 에스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선 무영이 시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우리보다 열 살은 어려 보여. 에스더가 무영의 팔을 때렸다. 전혀 아플 것 같지 않은 소리가 났다. 다른 남자 하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귀엽다고 말만 하지 말고 그냥 바텐더한테 명함을 넘겨. 보는 내가 다 부끄럽다.”
“왜 이래, 다들. 나 몰래 뭐 맞고 왔어?”
“위험하게 뭘 맞아. 저기 바텐더 씨.”
바텐더 씨는 또 뭐냐며 킥킥대는 친구들을 무시한 남자가 시우를 불렀다. 개중 정신이 똑바로 박힌 인간인가 했던 희망은 이어지는 질문에 바로 깨졌다.
“얘가 하루에 백 준다고 하면 만날 거야?”
“야, 그게 뭐야 진짜!”
“너무 적은가? 그럼 한 이백?”
“누가 촌스럽게 백, 이백 거려. 에스더, 그냥 카드 한 장 딱 줘버려.”
입구 계단 앞에서 이안에게 언제 왔냐고 물었던 여자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단체로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지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들 딴엔 굉장히 웃긴 말이었던 듯하다. 시우는 용케 웃는 낯을 잃지 않았다. 탄생하는 순간부터 폐기되는 순간까지 한 표정만 지을 수 있는 인형처럼.
간신히 어깨에 매달려 있던 도경의 손이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다. 마른 손가락 끝이 긴장한 등을 쓰다듬으며 내려갔다. 지한은 허리를 폈다. 등줄기로 저릿한 기운이 흘렀다.
왜 소현과 친했는지 알고도 남을 것 같은 인간들의 주둥이를 뜯어놓고 싶은 충동. 그 김에 아까부터 지한을 박물관 전시품 보듯 주의 깊게 보는 이안의 뒤통수도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 시우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 수많은 충동들은 항상 한 가지 욕심에 부딪혀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욕구. 욕망. 도경.
지한은 가만히 있었다.
#53
화면에 뜬 숫자가 어느새 또 바뀌었다. 8:05. 도착한 지 한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도경은 옆을 보았다. 눈을 감다시피 내리깐 지한이 다리를 떨어대고 있었다. 한참 떨다 말기에 겨우 멎은 줄 알았더니만 다시 도졌다.
슬슬 일어나고 싶었다. 지한을 봐서라도. 무영이나 이안이 붙잡을 수 있으니 화장실에 가는 척 그대로 나가버려야 할 듯했다.
“요새 바쁘신가 봐요.”
반쯤 빈 물컵을 가져가며 시우가 말을 걸었다. 그가 도경에게 말을 거는 순간 마법처럼 지한의 다리가 잠잠해졌다. 과대해석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새롭게 따라 넣은 물로 가득 찬 컵이 도경의 앞으로 돌아왔다.
“몇 주 째 안 오셔서 궁금했어요. 저도 그렇고 다른 직원들도 그렇고.”
또 누가 들었다간 멋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혹시 들은 사람은 없는지 주위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시간에 지남에 따라 바에 몰려있던 인원들이 여기저기로 분산되어 있었다. 누구는 DJ 부스를 건드리느라, 누구는 플로어와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떠드느라 각자 바빴다. 도경과 바텐더가 나누는 대화에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조만간 한 번 가야겠네요.”
“지한이랑 같이 오세요.”
관심을 주는 이가 없다는 말은 취소였다. 바로 옆에 앉은 지한이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다리 떠는 것도 멈추고 집중해서. 도경은 시우의 의중을 파악하려 답변을 미루고 그와 눈을 맞췄다. 아니, 맞추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런 데보다는 저희 바가 훨씬 술 마시기 편하지 않으시겠어요?”
호텔 바에선 수시로 잘만 도경을 쳐다보던 시우가 시종일관 아래를 보고 있었으므로. 마치 지한처럼.
“그래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시우가 빈 얼음 통을 들고 돌아섰다. 신경 쓰였다. 시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지한이 신경 쓰여서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했다. 어젯밤에도 잠을 설쳐서 컨디션이 난조였다. 자꾸 악을 쓰고 싶어지는 까닭은 피로 때문이었다.
아니었다. 피로의 탓만은 아니었다.
도경은 주먹을 쥐듯 웅크린 채 바 위에 올라가 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지가 움찔거리며 위로 튀어 올랐다. 위험했다. 언제 멋대로 움직여 지한을 놀라게 할지 몰랐다.
“우리 나갈까.”
아무도 도경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누가 들을까 봐 지한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드디어 시우에게 쏠려 있던 지한의 관심이 도경에게로 옮겨왔다.
“벌써 가도 돼요? 형 친구들은.”
“인사했으니까 됐어.”
너도 불편하지 않느냐고 하면 더 불편해하면서 아니라고 부정할 것이 뻔했다.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을 하느니 무작정 데리고 나가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지한과 함께 움직이는 도경을 몇 명이나 봤지만 말을 걸거나 붙잡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무영은 에스더에게 DJ 부스를 보여주느라 바빴고 이안은 화장실에 갔는지 아예 보이질 않았다. 소란 없이 사라질 기회였다.
단숨에 계단을 올랐다. 지상으로 통하는 입구를 몇 칸만 남겨두고 있었다. 따라붙던 발소리가 끊겼다. 뒤를 돌아보니 중간지점에서 멈춘 지한이 머뭇거리고 있었다.
“왜 안 와?”
“그, 형 먼저 나가요. 난 시우랑 얘기 좀 하고. 간다는 말도 안 했고.”
도경은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지한이 놀라 굴러떨어질 만큼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도경의 상태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담당의의 조언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되새겼다. 압박감이 들 때는 생각의 포커스를 다른 곳으로. 단순할수록 좋다. 숫자. 일, 이, 삼, 사, 오.
“형은 안 와도 돼요. 내려갔다가 친구들이 보면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형이 옆에 있으면 편하게 얘기 못 해요.”
네가? 아니면 이시우가. 그렇게 되물을 뻔했다. 물론 도경은 평생 그래왔듯 잘 참았다.
“알았어. 나올 때 누가 어디 가냐고 물어보면 담배 피우러 가는 거라고 하고 그냥 나와.”
열심히 끄덕인 후 내려가는 지한의 뒤통수를 표적 삼아, 도경은 끊겼던 숫자를 이어 셌다. 육, 칠, 팔, 구, 십. 십일, 십이, 심삽, 십사, 십오. 십육, 십칠 십팔, 십구 이십 이십일, 이십이 이십삼 이십사 이십오 이십육이십칠이십팔이십구
삼십.
역시 그 조언은 엉터리였다. 두 번 다시는 찰나라도 담당의의 말에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지 않으리라. 그는 몇 개 남지 않은 계단을 마저 올랐다.
거리의 공기가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커졌고 옷차림은 화려해졌다. 무영이 두 번째 클럽을 낸 구역엔 다른 클럽들이 몇 개 더 있었다. 소현 때문에 억지로 간 클럽에서 들었던 온갖 비난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고여있던 수치심이 역류했다. 네 친구들이 내 욕 하는 걸 듣고만 있을 거면 왜 나랑 사귀냐는 도경을 비웃던 소현.
「나 말고 누가 너를 감당해? 몇 명이나 너 같은 환자를 사랑해준다고 하는지 궁금하면 네가 직접 나가서 사람들한테 물어봐. 너 책임지겠단 사람이 있으면 데려와 보라고.」
차마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자신이 없어서 수긍해야만 했던 밤.
“형.”
참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도경의 입 안을 탈출했다. 회상만으로 긴장한 몸이 본능적으로 호흡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도경은 옆으로 비켜섰다.
“이거 가져가. 비 올지도 모른대.”
위에 달랑 셔츠 한 장만 입은 상태로 쫓아 나온 이안의 손에 지팡이처럼 긴 우산이 들려 있었다. 이안은 도경의 차에는 항상 우산과 우비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우산은 도경을 따라 나오려고 만든 구실이었다.
“너 써. 난 차에 우산 있어.”
오늘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해도 도경은 이안에게 한 소리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무영이 지한에게 먼저 연락해 일을 벌이는 동안 말리지 않고 뭘 했느냐고 따지기라도 해야 짜증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시우와 얘기해야겠다며 내려간 지한의 뒤통수가 눈앞에서 깨끗하게 지워지질 않고 있는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안에게 무영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따져봤자 입만 아팠다.
“우지한은 안 데리고 가?”
“지금 기다리는 중이야.”
무엇보다, 말귀를 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상대와 입씨름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근데 형, 왜 우리한테 인사 안 하고 나왔어?”
“안 하고 싶어서.”
있는 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되도록 혈압을 유지하고 싶었다.
“나한테도?”
“너한테만 하고 나올 순 없잖아.”
더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단호히 말한 도경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들어가 있어. 내가 이따 봐서 연락할게.”
“도경이 형.”
“왜.”
“쟤한테 진짜로…… 관심 생긴 거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였다면 훌륭했다. 덜컥거리는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심호흡했다. 심장이 계단으로 굴러떨어지는 공처럼 퉁, 퉁 뛰었다.
“들어가라고 했지.”
“대답해주면.”
“나 일하고 와서 피곤해. 너랑 이러고 있을 기분도 아니야.”
“남자도 되는 거였어?”
무영의 클럽은 번화가에 있었다. 가게 앞에 언제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람 많은 데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누가 우리 얘길 들어? 그냥 대답해주면 끝나는데 왜 그래. 남자도 되는.”
도경은 이안의 소매를 잡아 골목으로 끌어당겼다. 도경에게 끌려 골목으로 들어온 이안이 눈을 느리게 끔벅끔벅했다. 제가 지은 죄를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고작 그따위 연기력으론 도경을 속일 수 없었다. 다른 땐 몰라도 오늘만큼은 알고 하는 도발이었다.
도경의 차 안에 항상 우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산을 챙겨 나온 이안은, 도경이 남들 보는 데서 허튼짓하는 것을 치욕쯤으로 여긴다는 점도 굉장히 잘 알았다. 그러면서 그딴 질문을 했다.
“이번엔 또 뭐야.”
“남자는 되냐고 물어보면 안 되는 거야?”
“그게 왜 하필 지금 궁금한데?”
“나 믿는다며. 그렇게 믿는 나한테 왜 말을 못 해? 쟤한테 관심 있냐는 게 어려운 질문이야?”
아니라고 해. 도경은 억울해 보이는 낯짝을 마주한 스스로에게 외쳤다.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 왜 그 쉬운 말을 못 하지? 지한이 들을까 봐? 지한은 시우와 얘기하겠다며 들어가서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아니야.”
한없이 솟구치던 감정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도경은 이성을 되찾았다. 간단한 일을 어렵게 꼴 뻔했다.
“아니라고. 알겠어? 뭘 보고 오해하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형 거짓말 잘하면서.”
이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더 이상 연기하고 있지 않았다.
“너무 잘해서 거짓말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하면서, 그러면서 방금은 왜 그렇게 대답하는데 오래 걸렸어?”
오는 게 아니었다. 아무도 지한의 앞에서 소현이란 이름을 꺼내지 못하게 할 테니 그냥 편히 데리고 오라고, 지한은 이미 오기로 했다고 주둥이를 터는 무영에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무영의 초대를 수락했다는 지한에게 가지 말자고 했다가 쓸데없는 오해를 살까 봐 내키지 않는 자리까지 함께 온 도경이 잘못했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고 비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무엇이 자꾸 도경을 충동에 지배당하는 족속으로 전락시킬까.
“말꼬리 잡지 마.”
“그럼 나는 뭐야?”
“그건 또 무슨.”
“지금까지 알면서 무시했던 거야, 나를? 몰랐던 게 아니라?”
잘 자다 말고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다. 어이가 없어 화도 안 난다는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지금까지 자기를 몰랐던 게 아니라 무시한 거였냐는 이안의 토로가 조금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진정해. 목소리 낮추고.”
“소현이 누나는, 누나는 그럼 뭐였어. 누나랑 진짜 섹스도 안 했어?”
모를 것 같기도 했고.
“무영이가 너한테 이상한 약 먹였어?”
“안 먹였어!”
이안이 빽 하고 소리쳤다. 도경은 손으로 왼쪽 귀를 감쌌다.
“그러면 뭐가 문제야. 잘 있다 갑자기 왜 이래.”
“내가 잘 있다가 갑자기 이러는 거 같아? 내가 왜 형이 시키는 대로 하는데, 내가 왜, 등신 소리 들어도 맨날 형 편들고 다니는데…… 형이 뭐 던져도 그거 다 맞고만 있는데.”
알 것 같다는 쪽으로 기우는가 싶던 저울이 냉큼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도경은 다시 미로 속에 빠졌다. 착실하게 친구 노릇을 한 데에 비해 보상이 형편없었다고 이러는 건가.
“요새 내가 너랑 같이 밥 잘 안 먹어서 이래?”
“형은 밥이 중요해, 지금!”
“제발 소리 지르지 마.”
“내가 별로야? 왜? 얼굴이 취향이 아니야? 몸이? 쟤가 더 취향이야? 아니면 뭐, 쟤처럼 무식한 게 좋아? 못 배워서 아는 것도 없는 새끼가 형 말 잘 들으니까 재미있어?”
씩씩대는 이안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도경은 남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이제 알겠다.
“진짠가 보네.”
몰랐던 게 아니라 무시했던 거냐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쟤 좋아하는 게 진짜란 거잖아 그럼. 그러니까 아무 말도 못 하는 거지.”
이안이 눈을 문질렀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바로 새로운 눈물방울이 솟구쳐 흘러내렸다.
“너…… 울어?”
“그럼 이게 웃는 걸로 보여?”
골목 입구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도경은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반으로 접힌 휴지가 나왔다. 클럽 바에서 잔의 물기에 젖은 손을 닦은 뒤 남은 휴지를 버릴 데가 없어 그냥 넣어뒀었다. 그거라도 일단 건넸다.
이안은 도경이 뭘 내미는지 보지도 않고 뿌리쳤다. 휴지가 나풀거리며 골목 바닥에 안착했다. 툭. 작은 빗방울이 휴지 위로 떨어졌다. 하나였던 빗방울은 순식간에 불어나 눈 깜짝할 새 표백된 휴지의 색을 앗아갔다.
“강이안. 너 일단 집에 가. 쉬고 나서 다시 연락해.”
“싫어.”
“가.”
“싫다고!”
이안이 양손으로 도경을 밀쳤다. 그러고는 팔도 한 대 때렸다. 어안이 벙벙해 맞고 있었더니 나중엔 가슴팍도 때렸다. 놔뒀다가는 어딜 걷어찰 기세라 팔을 붙들려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뭐가 확 튀어나왔다.
“뭐 하는 짓이야.”
이안을 벽으로 날려버린 지한이 도경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묻는 말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잇새로 쥐어 짜내는 발음이 고성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진정시킬 놈이 둘로 늘어났다.
이안을 진정시키기보다 지한을 진정시키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어쨌거나 이안은 지한의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지한은 도경의 직업이 뭔지도 확실하게 모르고 있으니까. 그런 지한에게 이안이 흥분하게 된 내막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했다.
“넌 빠져!”
맞기 싫어서라도 조용해질 줄 알았던 이안이 더 크게 빽빽거렸다. 그가 지한까지 도발하는 사고를 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도경은 지한의 등을 두드렸다.
“얘는 내가 알아서 보낼게. 지한이 넌 저쪽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누나들 말이 맞았어.”
또 어떤 기상천외한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이젠 짜증 나는 것이 아니라 살짝 무서워지려고 했다.
“형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소리 들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형 그런 사람 아니라고 했는지 알아?”
“알았어. 네가 그동안 힘들었다는 거 알았으니까.”
“형이 뭘 알아, 형은 몰라. 남들 말대로야. 형은 남한테 관심 없어. 형 말고 다른 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지.”
도경은 신음을 삼켰다. 당장에라도 살가죽을 찢고 나올 듯이 강한 두통이 머리통을 쑤셔댔다.
“이 새끼들은 근데. 사람 앞에다 세워놓고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머리를 부여잡고 아파할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한이 이안에게 바짝 다가섰다. 말려야 하나. 도경은 이를 꽉 물었다. 굳이 따라가서 말리는 것은 지한의 화를 부추기는 꼴밖에 안 됐다.
“나보고 매너 없다 했으면 넌 매너가 좀 있어야지.”
지한이 이안의 손목을 잡아 벽에 던지듯 가져다 박았다.
“남들은 그런 소리 못 해서 닥치고 있는 줄 알아? 들으면 기분 좆같아지니까 안 하는 거잖아.”
“이거, 이거 놔.”
“나도 너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줄게. 넌 멍청하고, 눈치도 없는데 못됐어. 어디 갖다 쓸 데도 없어. 딱.”
지금까지 지한을 만나오면서 그 정도로 막힘없이 길게 말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가 이안의 뼈를 부러트려 놓기 전에 끼어들어야 하지 않을까 걱정되면서도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쓰레기야.”
“손 놓으라고!”
다행히 지한은 도경의 걱정을 전해들은 것처럼 이안의 손을 놓아주었다. 한숨 돌리려던 도경은 바로 이어지는 광경에 사고가 일시 정지하는 현상을 겪었다. 도경을 밀치고 때리는 과정에서 떨어트린 우산을 주운 이안이 그것으로 지한의 얼굴을 갈긴 것이었다.
“거지 같은 게.”
빗방울들은 금세 빗줄기가 되어 이곳저곳을 때렸다. 울퉁불퉁한 골목 바닥. 상처 하나 없는 이안의 뺨. 우산의 어디에 긁혔는지 눈 밑에서부터 턱까지가 일직선으로 찢어진 지한의 상처.
우려하던 바가 상상과 똑같지만은 않은 형태로 눈앞에 펼쳐졌다. 도경의 상상 속에서 지한은 이안의 뼈를 여러 대 부러트려 놓았다.
현실에서, 지한은 이안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입을 다문 채 가슴팍을 들썩이며 숨을 고르고 또 고른 그는 이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도경은 말리지 않았다. 한 대만 때리고 멈춘 것은 지한의 의지였다. 고작 한 대에 주저앉았던 이안이 비틀거리며 섰다.
“이안아.”
원망 어린 눈빛이 쏟아졌다. 도경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고, 이안은 그대로 달려나가 버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대신 젖은 땅을 밟고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경은 바닥에 쓰러진 우산을 주워 펼쳤다. 부부와 어린 자식으로 구성된 세 식구쯤은 거뜬히 수용하고도 남을 크기였다. 우산을 지한의 머리 위로 높이 들고서, 사과했다.
“미안해.”
“왜 형이 사과를 해요? 저 새끼가 잘못한 건데.”
지한이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머리카락에서 흘러나온 물방울이 쪼르륵 콧대를 타고 내려왔다.
“그래, 그렇지. 미안.”
“사과하지 말라고요.”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똑바른 모양으로 난 상처에 피가 맺혔다. 사람의 피는 어린 체리처럼 새빨갰다. 지한이 상처 부위를 손등으로 거칠게 훔쳤다.
지한의 피부에서 나는 피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다 멎을 때까지 미안하다고 빌어야 할 것 같다는 강박이 도경을 사로잡혔다. 참았다. 참는 것이야말로 그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였으니까.
지한이 사과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54
다정하기도 하지.
바보같이.
로 블로(Low blow)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