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Head Kick
#58
세상이 온통 시커멨다. 지한은 반사적으로 옆을 더듬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촉의 침대였다. 손을 조금 더 옆으로 뻗었다. 여전히 시트가 만져졌다. 옆으로, 더 옆으로. 몇 번을 더 움직여도 끝이 나지 않았다. 한 번 옆으로 구르면 끝인 지한의 침대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확신이 가지 않았다. 잠에서 깨자마자 떠오르는 엄청난 순간들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겁이 날 정도로 캄캄한 방 안이 현실감을 앗아가 혼동을 가중시켰다. 불을 켜면, 그래서 눈으로 큰 침대를 확인하고 나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이 도경의 침실이라는.
넓은 침대를 더듬거리며 이동한 끝에 허공이 나왔다. 양발로 바닥을 딛고 선 지한은 절로 나는 헉 소리를 어쩌지 못하고 삐끗했다. 못 걸을 정도로 아파서가 아니라, 하반신을 울리는 통증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을 켜지 않고도 그는 확신했다.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추가되는 지난밤의 순간들은 모조리 현실이었다.
첫 번째로 든 생각은 죽고 싶단 것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것. 도경과 마주치기 전에 의식이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그러기 위해선 죽는 것이 제일 빠르고 깔끔했다.
안 그래도 지긋지긋한 삶이었다. 이대로 끝내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절대 이생에선 취할 일 없을 줄 알았던 자세로 울고불고한 다음날 맞이하는 죽음. 한심해서 욕도 안 나오는 게 딱 지한의 인생과 어울렸다.
하지만 얄궂게도 동일한 이유 때문에 죽기 싫었다. 죽고 싶단 생각까지 들게 하는 장면들을 자발적으로 연출하게 만든 근원이 도경이라서.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마음이었다.
도경을 마주하기 창피해서 죽고 싶다가도 그를 조금 더, 조금만 더 보고 싶어서 질질 끌다 여기까지 왔다. 아프거나 말거나 지한은 벌떡 일어섰다. 누가 들으면 연애도 못 해본 새끼가 섹스 한번 하고 눈 뒤집혀 염병 떤다고 할 속마음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라 더 창피했다.
문을 열까 하다가, 일단 꼴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아 불을 켰다. 지한이 자면서 돌돌 말기라도 했는지 벽으로 밀려난 이불과 구겨진 시트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경의 성격에 그 시트 위에서 편히 잤을 리가 없었다. 본인은 지한이 잠든 후 다른 방에서 잤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기억은 불을 끄고 돌아온 도경이 지한을 끌어안은 것이었다. 숨이 가빠오는 와중에도 이 남자 혹시 이중인격인가 의심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마음대로 고개도 못 들게 하다가 진짜로 숨이 넘어가려고 하자 단순히 쓰다듬는 것도 아니고 끌어안아 주다니. 알다가도 모르겠는 도경의 다정함에 대한 고찰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는 순간 뚝 끊겼다.
남이든 자신이든 자잘한 외모 변화에는 둔감한 지한이었다. 그럼에도 바로 알아차렸다. 얼굴이 부어있었다. 주먹까진 아니고 손바닥에 맞았을 때 정도의 붓기였다. 도경한테 맞기까지 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싶어 머리를 쥐어뜯어 봤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다. 도경은 지한을 때리지 않았다. 낯선 경험을 한 몸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거기다 울기도 했고. 필히 잊어버려야 할 기억이었다.
거의 벗겨진 상태로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있는 가운을 끌어당겨 여몄다. 상식적으로는 도경에게 인사라도 하고 나서 씻든지 말든지 해야 할 텐데 도저히 용기가 안 났다. 머리는 까치집이고 얼굴은 부었다. 도경은 보나 마나 일찍 일어나 모든 세팅을 마쳤을 것이다. 다시 한번 거울로 상태를 확인한 지한은 마음을 굳혔다. 세수라도 하고 나가야지, 절대 그냥은 나갈 수 없었다.
벽장 옆의 문을 열자 예상대로 욕실이 나왔다. 손님용보다 더 큰 욕실엔 욕조도 있었다. 소현이 자주 빌렸던 호텔 룸의 욕조만큼은 아니더라도 혼자 사는 사람이 쓰기엔 넘치도록 컸다. 성인 두 명은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였다.
불과 스물네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 욕조 안에 도경과 함께 들어가 있는 얼굴 모를 여자를 상상하고 비참해했을 지한은 고작 하루 만에 전혀 다른 상상을 하고 있었다. 텅 빈 욕조 안이 물과 거품으로 가득 찬 상상 속에서 도경과 마주 본 상대는 남자였고, 지한이었다.
필사적으로 입 안을 깨물어 괴상한 소리는 내지 않을 수 있었지만, 혼자 있는데도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라 버린 얼굴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얼른 찬물을 뒤집어쓰려 본 세면대 옆에 각 맞춰 갠 옷가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맨 위엔 포장이 뜯기지 않은 새 속옷, 그 밑엔 셔츠, 맨 아래는 바지. 도경과 어울리는 붉은 색 셔츠 깃에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길쭉하고 날씬한 글씨체로 적은 두 글자.
‘지한.’
누가 썼다는 정보 없이도 도경이 직접 적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을 빼다 박은 글씨였다. 포스트잇을 떼지 않고 고개를 든 지한은 변함없이 추레한 데다가 빨개지기까지 한 거울 속 남자를 보고 결심했다. 도경에게 아침 인사를 하는 건 샤워한 뒤로 미루자. 옷까지 가져다 뒀으니 도경도 간접적으로 지한에게 욕실을 허락한 것이라 해석하기로 했다. 이번만큼은 허락 안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간절히 씻고 싶었다.
항상 좋은 냄새만 풍기는 도경은 욕실에도 개성 강한 향을 가진 제품들을 구비해 두었다. 샴푸에선 박하 향이, 컨디셔너에선 일반적인 남성용 향수가 가진 이름 모를 향이 그리고 샤워 젤에선 달달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배어나는 독특한 향이 났다.
별생각 없이 물을 잠그고 나오려던 지한은 다시 샤워 젤이 담긴 통을 집어 들었다. 분명히 독특한 향인데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기운이 풍겼다. 예전에 도경의 향수 냄새에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었다. 샤워 젤이 담긴 통엔 어느 나라 말인지 감도 안 오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읽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못 읽었다.
고작 십몇 분간 물을 맞았다고 붓기가 싹 가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이 아까보단 한결 봐줄 만했다. 도경이 빌려준 옷을 입었다. 코트를 빌려 입었을 때도 느꼈는데, 도경은 지한과 옷 사이즈가 같았다.
도경이 입었으면 맞춘 것처럼 어울렸을 붉은 색 셔츠는, 지한에겐 어색한 감이 있었다. 재질이 너무 부드러워 피부에 스칠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맞기는 다 맞았다. 도경의 옷이 지한에게 맞지 않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면 뭐라고 했어야 할까, 아무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심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옷을 차려입고, 머리를 대충 털고, 가운을 팔에 걸친 뒤에도 지한은 바로 욕실을 뜨지 않았다. 쓰레기 갖다 버리는 일도 잘 안 시키는 시우와 떨어져 산 적이 없는지라 사실 욕실 바닥 상태에 신경을 써 본 적이 드물었다.
오늘은 달랐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주워서 버렸다. 도경이 욕실을 쓰라고 내어줬는데 흔적을 남겨서 인상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한이 암만 노력해도 도경의 성에 차진 않을 테지만, 노력한 티라도 나야 예쁘게 봐주지 않을까.
예쁘게, 라고.
지한은 욕조 안에 함께 들어간 도경과 자신을 상상했을 때보다 더 격하게 입 안을 깨물었다. 레오에게 찾아가 스트레이트로 열 대만 때려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속으로라도 개소리를 좀 덜할까 싶어서.
더 혼자 있다간 별 말 같지도 않은 상상까지 하고 말 게 뻔했다. 지한은 욕실을 나와 방문을 열었다. 고요했다. 순간적으로 도경이 없는 줄 알고 덜컥했다. 직장인이 출근하는 일은 지극히 평범한 일임에도.
“네, 초상권 부분 제외하고는 다 괜찮다고 전달해주세요. 제가 이따 가서 처음부터 쭉 보고 말씀드릴게요.”
도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엌 쪽이었다. 지한은 자신이 뭐에 그렇게까지 긴장하고 있었는지도 다 모르면서 안심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부엌으로 걸어갔다.
침실 쪽을 등지고 앉은 도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통화를 막 끝낸 도경은 노트북 화면을 보며 타자를 치는 중이었다. 손만 뻗으면 도경이 만져질 거리였으나 지한은 엉거주춤하게 멈춰 섰다. 타자 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바빠 보여서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하겠고, 부르지도 못하겠다.
“안 깨졌어.”
돌아보지도 않고 말해서 처음엔 새로운 상대와 통화를 하는 줄 알았다. 도경이 휴대폰을 옆으로 슥 밀어서 그제야 지한에게 하는 소리였단 것을 알아차렸다. 지한은 식탁으로 다가갔다. 풀로 충전된 휴대폰 대기화면을 넘기자 메신저 아이콘 우측에 두 자릿수 숫자가 떠있었다. 부재중 목록도 상황은 비슷했다. 시우에게 뭐라고 할지 하나도 생각해놓지 않았다. 집 가는 길엔 다른 생각 말고 말이 되는 변명 완성하기에나 몰두해야 할 판이었다.
그건 그렇고, 설마 그게 인사였나. 지한은 선뜻 도경의 옆 의자를 빼서 앉지 못하고 손만 꼼지락댔다. 도경이 집중해 있는 노트북 화면에는 메신저 대화창만 여러 개가 떠있었다. 출근하지 않은 대가로 더 바빠진 눈치였다. 오늘 도경이 출근하지 않은 이유는 역시 지한이 때문일 것이다. 좋아해야 할지, 미안해야 할지 헷갈렸다.
옆 의자를 빼도 아무 말 안 하기에 그냥 앉았다. 엉덩이가 의자에 닿는 찰나 온몸의 근육이 수축됐지만 곧 참을 만해졌다. 도경은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요새 타자 느린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노트북 자판을 치는 도경의 손은 거의 전투적이었다.
“그래도 기분 나쁘면 바꿔줄게.”
타자 치는 기세가 전투에서 훈련 수준으로 내려갔다 싶을 때였다. 도경이 불쑥 아리송한 말을 했다. 지한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의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아들었다. 휴대폰을 가리켜 한 말이었다. 깨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 나쁘면 바꾸라는.
“기분이 왜 나쁜데.”
“내가 떨어트렸잖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네가 나를 안 쳐다보는 게 더 기분 나쁜데요.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킨 지한이 헛기침했다.
“뭘 바꿔요. 멀쩡한 걸.”
“그래.”
반응이라고 하기도 뭐한 답을 끝으로 도경은 다시 노트북에 집중했다.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오롯이 지한에게 집중하지 않는 도경은 처음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별거 아니었다. 원래라면 회사에서 처리하고 있었어야 할 업무를 보는 중일 뿐이고, 바쁜 와중에도 지한이 원한다면 고작 한 번 떨어트린 게 다인 휴대폰을 교체해 주겠단 제안까지 해주었다. 섭섭할 게 아니라 황송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화가 난다기보단, 불안했다.
시우에게 답장하는 것도 미루고 도경이 봐주기만을 기다리던 지한은 참을성을 모두 잃었다. 평소였다면 도경이니 더 참을 수 있었겠지만 오늘은 힘들었다. 얼얼한 감각이 가시지 않는 특정 부위 때문에라도 더.
“형, 저기.”
탭을 끄는 건지 켜는 건지 어느덧 키보드 아닌 마우스를 달칵거리던 도경이 드디어 지한에게 얼굴 정면을 보여주었다. 억울할 만큼 하나도 안 부었다. 피부는 어째 더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지한은 시선을 내렸다. 저 얼굴에 대고 조금이라도 기분 나쁜 티가 나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선택 가능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불가능했다.
“아. 그, 뭐야. 안에 있는 칫솔 뜯어서 썼는데…… 말 안 하고 써서. 그래도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안 물어보고 써도 돼. 쓰라고 놔둔 거야.”
도경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긴 기다림을 지나 얻은 도경의 관심이 벌써 분산되려 했다. 다급해진 지한은 엉겁결에 속마음을 발설했다.
“집에 사람이 많이 오나 보지.”
다시 보게 만드는 데까진 성공했다. 이제 제발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면 했다. 지한이 창피해서 까무러치고 싶은 걸 무릅쓰고 나왔으니 도경도 해야 했다. 뭐든. 대놓고 거론하기 민망하면 돌려서라도. 제스처라도.
“이 집에?”
그래서 둘은 앞으로 어떻게 될 거란 힌트라도.
“가운도 있고, 칫솔도 많고…….”
“여기서 자고 간 적 있는 사람 다 합쳐도 다섯 명이 안 될걸.”
다섯 명이 안 되면 네 명은 된다는 말인가. 지한은 신속하게 도경이 친구라고 할 만한 얼굴들을 떠올렸다. 죄다 안면을 강타해 버리고 싶은 놈들밖에 없었다.
노트북을 닫은 도경이 앉아 있는 지한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리고 다시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무영과의 첫 만남에서 당했을 땐 기분 나빴던 행동이다. 꼭 무영이 아니더라도 지한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꾸준히 있어 왔다. 그때마다 빼놓지 않고 불쾌했다. 그랬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도경에게 당하니 전혀 불쾌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엄청나게.
“내 옷 입었네.”
“아. 이거, 세면대 위에 내 이름이랑 있어서.”
“어울린다.”
유혹당하는 기분이었다.
“밥 먹으러 갈까?”
팽팽하던 긴장감이 옅어졌다. 먼저 일어나는 도경을 따라 지한도 어제 걸어놨던 상태 그대로 의자에 걸쳐져있는 재킷을 주워들고 따라나섰다. 신발장이 있는 복도에 들어선 지한은 다른 기억들보다 늦어도 너무 늦은 한 기억에 경악했다. 복도 끝 화장실 앞이 텅 비어있었다.
“형, 나 저기 옷을. 내가 어제 까먹고 놔뒀는데, 저기다가.”
“빨았어. 젖어서.”
운동화처럼 생긴 구두에 발을 넣으며 그리 말하는 도경의 태도 어디에서도 화장실 앞에 옷을 놔두고 까먹은 지한을 탓하는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안도하긴 일렀다. 젖어서 빨았다면, 도경이 세탁기에 지한의 옷을 직접 다 넣었다는 소리인가?
“소, 속옷은 빨았는데. 내가. 그거.”
양쪽 신발에 무사히 발을 다 넣고 선 도경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네가 빨았는데 뭐 어쩌란 거냐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아니, 혹시 아닌 줄 알까 봐. 그냥.”
“잘 놔둘 테니까 다음에 와서 자고 갈 때 입어.”
“네……, 어?”
어느새 현관을 밀고 나간 도경이 턱을 까닥였다. 안 와? 지한은 급히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산만하고 운동을 놓은 지 오래된 삭신은 쑤셨지만, 적어도 아까처럼 불안하진 않았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먹은 첫 끼는 도경의 회사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먹었다. 붐벼야 할 시간대임에도 손님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장사가 잘 안되는 것 같단 걱정은 메뉴에 적힌 커피 한 잔 가격을 보고 바로 접었다. 한 테이블만 받아도 일반 가게 몇 테이블 몫은 할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뭘 시켜야 할지 감이 안 와 도경이 묻는 말에 무조건 좋다고 한 대가로, 지한의 앞엔 상추처럼 생긴 잎 몇 개와 콩알보다 조금 더 큰 토스트 조각들, 그리고 얇게 썰린 고기가 올라간 판이 대령되었다. 접시나 그릇이 아니고 정말로 두꺼운 판이었다. 도경의 앞에 놓인 그릇은 평범하게 생겼다. 걸쭉해 보이는 내용물의 정체는 약간 의심이 갔지만, 어쨌든. 그냥 똑같은 걸로 시킨다고 할걸. 쪽팔려서 털어놓지도 못할 한탄이 지한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허전하게 생긴 샐러드는 첫인상보다 훨씬 나은 맛을 냈다. 제 돈 주고 먹으라면 절대 안 고를 메뉴긴 했다. 하지만 도경이 골라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메뉴라 닥치고 입에 넣었다. 어차피 쓰레기만 아니면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입에 넣는 건 넣는 거고, 맛없는 건 맛없는 거였다. 씹을수록 자연의 맛밖에 안 느껴지는 잎을 한 세 개째 씹으려니 별 써먹을 데 없는 호기심이 다 들었다. 예를 들어 이 돈이면 그래도 훨씬 더 배가 부르고 맛도 나는 걸 먹을 수 있는데 어째서 도경은 굳이 이 메뉴를 먹겠느냐고 물었는지. 그러고 보면 소현도 만나서 식사를 할 때마다 별 듣도 보도 못한 메뉴를 시켜놓고 다 남기는 나쁜 취미가 있었더랬다.
물론 도경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음식을 급하게 먹거나 많이 먹는 것은 못 봤어도, 밥맛 떨어지게 깨작거리는 타입은 절대 아니었다. 한 입 먹고 나가떨어진 꼬치처럼 거리에서 만든 음식만 아니라면 입에 넣긴 했다.
지한은 오늘따라 말수가 반 토막 난 도경을 흘끔거렸다. 깨작거리는 타입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 지 몇 초 만에 생각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도경은 그새 숟가락을 내려놓은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대로변이 아닌지라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라곤 지나다니는 사람도 몇 없는 골목이 다였다. 구름이 움직이는지 멀던 볕이 급작스럽게 다가와 카페 안을 쨍하게 비췄다. 도경이 눈을 살며시 찡그렸다. 익을까 걱정되는 피부가 순간적으로 빛에 흡수된 것처럼 눈부시게 새하얘졌다. 볕이 지나갔다. 햇빛이 지나갔다. 도경의 피부가 제 색을 되찾았다.
발갛게 익지도, 그을리지도 않았다. 다행, 또 다행이었다. 겉으로 보기보다 더 부드러운 촉감을 가진 피부였다. 지한의 살에 닿을 때마다 얼마나 믿기지 않았는지. 그 손이 지한의 허리를, 더 아래를, 그 손가락이…….
도경이 지한을 쳐다보았다.
“피곤해?”
“아니요.”
웃는 듯 마는 듯 헷갈리는 표정을 지은 도경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한도 포크를 내려놓았다.
“형은, 피곤해요?”
“나야 괜찮지.”
혀끝에 남은 고기조각에서 짠맛이 났다. 침을 삼켰다. 입 안이 비었다. 기다렸다. 그래도 도경의 고개는 돌아올 줄 몰랐다. 기우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다. 집에서부터 밖에 나온 이후까지 쭉, 도경은 지한을 잘 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한 번 잤다고 사사건건 따지려 드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라, 도경이 너무 헷갈리게 굴고 있었다. 그냥 무신경하게만 굴면 모르겠는데 세면대 위에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두고, 그 옷을 잘 어울린다고 해주고, 다음에도 또 지한을 집에서 재우겠단 식의 이야기를 했다. 누구라도 확신이 서지 않을 만한 상황이었다.
“아니?”
“근데 왜 나를 안 쳐다봐요?”
탄식 비슷한 소리가 도경의 입술 새로 빠져나왔다. 그의 시선이 두 번째로 유리창을 떠났다.
“내가 안 쳐다봤구나.”
이번엔 조금 전과 달랐다. 지한에게 와 꽂히는 눈빛이 강하고 진득했다. 일깨워진 사람처럼.
“몰랐어.”
일부러 안 본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는 듯, 도경이 지한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부러 그렇게 쳐다볼 필요는 없다고 하려던 지한은 그만 보고 말았다.
빨개진 도경의 귀를. 볼도 살짝 빨개져 있었다. 아아. 지한이야말로 탄식해야 할 처지였다. 지한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고 부끄러워서 무의식적으로 딴청을 피우는 척했나 보다. 그냥 좀 놔둘걸. 그새를 못 참아서 귀가 빨개지게 하다니.
상황이 역전되었다. 원하던 대로 도경의 온전한 관심을 얻었건만 어째 이제는 지한이 눈을 들기 힘들었다. 왜 안 쳐다보냐고 따져놓고 바로 돌변해 이제 그만 봐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었다.
지한은 물을 들이켰다. 그깟 걸로는 속이 차가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한 컵을 다 비웠다. 안 마시는 것보단 나았다.
“어, 그럼, 이제…… 형 회사 갈 거예요? 나는 그냥 역에서 지하철 타고 갈게요.”
“안 되는데.”
“네?”
“너 나랑 갈 데 있어.”
“어디요?”
도경은 말해주지 않았다. 싱긋거리기만 했다. 성화도 못 내게.
그러나 차를 타고 이동해 도착한 다음 목적지는 지한에게 큰 당혹감과 후회를 안겼다. 도경이 지한을 오토바이로 유명한 브랜드의 판매점에 데려와서 당혹스러웠고, 도경이 붙잡는 것을 뿌리치지 못해 끌려온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여기를 왜 나랑.”
“권 이사님 맞으시죠?”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로고를 단 매장에 발을 들이기 전 도경의 해명부터 들으려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매장 안에서 도경의 차를 주시하던 남자가 유리문을 열고 뛰어나왔기 때문이다.
“김 사장님이랑 예전에 한 번 같이 오신 적 있다고 저희 직원이. 전화 주셨을 때 알려주셨으면 제가 미리 다 준비해놨을 텐데.”
“그거 한 3년 전 아닌가요?”
“김 사장님 친구분은 언제 오셨어도 저희가 다 기억합니다.”
말단이라기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남자가 우러러봐 마지않는 김 사장님의 정체는 무영인 듯싶었다. 우물쭈물하다간 도경이 영업사원의 말솜씨에 넘어가 결제를 해버리기 십상이었다. 지한은 도경의 코트 소매를 잡아챘다.
“잠깐 이리 와 봐요.”
영업사원에게 붙들리기 전에 얼른 도경을 끌어당긴 지한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카페와 달리 오토바이 판매점은 차도,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옆 블록에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는 낡은 건물이 보였다.
“여기 왜 온 거예요? 형도 이제 오토바이 타려고?”
“너 사주려고.”
“나한테 오토바이를 사준다고요, 형이?”
지한은 우중충한 건물 안으로 도경을 끌고 들어오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도경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되물었다.
“안 돼?”
“아니, 왜. 이유가 뭔데. 갑자기.”
“네 오토바이 우리 회사 근처에서 잃어버렸잖아.”
도경의 태도가 너무 당당한 나머지 지한은 설득당할 뻔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형이 훔쳐 간 것도 아닌데.”
“거기다 안 댔으면 안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요.”
“뭐가 말이 안 돼? 너 내가 준 핸드폰은 잘 쓰잖아.”
“그건 생일선물이었고.”
뭐든 하자는 대로 잘 따르던 지한이 강경하게 나오자 도경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지 입을 다물었다. 실은 애매했다. 도경이 생각에 잠겨서 입을 다문 것인지, 화가 나서 표정이 굳은 것인지.
도로 위를 내달리는 차들과 인도 위를 걷는 사람들, 어느 가게에서인가 크게 틀어놓은 음악. 들려오는 모든 소음의 근원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된 후로도 침묵은 이어지는 중이었다. 지한은 깨달았다. 그들이 방금 한 건 일종의 말싸움이었다. 하필 처음으로 몸을 부대낀 다음날.
그냥 좀만 더 얌전히 닥치고 있었어야 한단 한탄이 절로 들긴 했지만, 한편으론 어쩔 수 없었단 생각이었다. 일단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한은 한시도 안절부절못했다.
도경이야 부끄러워서 지한의 눈을 피한 것이라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까마득하게 모르고 마음을 졸이느라 힘들었다. 어제는 도경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놔뒀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 정도는, 듣기 좋게 걸러서 할 자격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준다고 해도, 오늘은 좀 아니잖아요.”
도경이 바로 반문했다.
“오늘이 왜?”
“우리가 어제 그랬는데.”
오늘 이걸 사주면……. 기세등등하게 시작한 말이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흐지부지 멎어 들었다.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이러면 내가 형을 장소현 대타로 얻은 것 같잖아요.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그렇다고 그와 같은 맥락의, 어제 섹스하고 오늘 나한테 고가의 선물을 주면 내가 꼭 나를 팔아먹은 것 같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도경을 돈으로 지한을 산 사람 취급하는 말이 됐다.
“아니에요. 방금 그건 잊어버려요. 잘못 말했어요.”
“그럼.”
“그래도 저기 건 못 받아요. 너무 비싸.”
“더 싼 거는?”
“아니, 형.”
“그것도 싫어?”
싫다고 몇 번을 말해. 그렇게 윽박지르는 상상을 했다. 상상만 했다. 눈앞의 도경을 통해, 지한은 시우가 했던 말을 이해했다. 느낌이 부드러워졌어.
소현의 장례식에서 스치던 순간의 도경과 낡은 건물 안의 도경은 절대로 똑같지 않았다. 눈앞의 그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평소보다 손질이 현저히 덜 된 머리카락이 옆으로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경은 지한만 쳐다보고 있었다. 싫다는 답변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이.
“보러 가요, 그럼. 보러만.”
내내 굳어있던 도경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자.”
건물로 올 때와 정확히 반대로, 나갈 때는 도경이 지한의 팔을 잡아끌었다. 도경에게 이끌려 차로 돌아가는 동안 지한은 점차 체념했다. 이겨먹을 자신이 없었다. 지한이 죽을 때까지 고통을 가하지 못하리라 확신하는 대상은 평생 시우가 유일했었다. 이제 도경도 그와 같은 대상이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같을 뿐, 시우와 도경은 아주 달랐다. 시우는 모든 것을 지한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었다. 도경은 지한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런 게 인과응보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59
도경은 회사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주차장 입구가 떡하니 있었지만 안 보이는 척했다.
“잠깐만 앉아 있어. 금방 나올게.”
“왜 주차장에 안 대고.”
“금방 나올 거라니까.”
뭐라 반박하려던 지한은 도경이 알았지? 하고 재차 묻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도경이 점찍어놨던 브랜드보다 더 싼 오토바이를 파는 곳은 아직 들르지 못한 상태였다. 지한은 어차피 근처이니 일부터 보라며 자꾸 도경을 회사로 보내려고 했다. 도경이 회사에 발목을 잡혀 오토바이를 보러 가는 일은 미루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려는 속셈인가 본데, 미안하게도 이미 다 간파했다.
“내 차 놔두고 도망가면 안 돼.”
“아 무슨. 안 도망가요.”
농담으로 던진 말에 지한이 눈을 부릅떠가며 부정했다. 웃음을 참으며 무심코 밖을 내다본 도경은 즉시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회사 건물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일반적인 한국인들보다 한 뼘은 더 위로 솟아 있는 형태만으로도 눈에 익은 남자.
무영이었다.
차에서 내리지 않는 도경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지한도 곧 주차장 입구 근처에 세워진 오토바이로 돌아가는 장신을 발견했다.
“형, 저기 봤어요?”
“응.”
“내가 나가서.”
“나오지 마.”
지한의 상체가 당장에라도 밖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들썩였다.
“나 나가면 문 잠가.”
“내가 형보다는―.”
“내가 너보다 쟤를 잘 아니까 내 말 들어.”
도경은 벨트를 풀고 문을 열었다. 문을 닫기도 전에 무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도경을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경은 넓은 보폭으로 가까워지는 무영의 얼굴과 그의 손에 들린 헬멧을 번갈아 보았다. 직감했다. 무영은 헬멧을 다른 용도로 쓰려고 들고 오는 중이었다. 오늘의 그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태세를 장착했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면 물건을 파손할 때까지 진정되지 않는 태세.
무영이 헬멧으로 도경의 차 보닛을 찍어 내렸다. 평평하던 보닛이 눈 깜짝할 사이에 찌그러졌다.
“그 새끼 어디 있어.”
“말로 해.”
“말?”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무영에게 실제로 멱살을 잡히자 웬만한 단어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만감이 교차했다. 무영에게 괜히 친구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는 친구들에게 손을 댄 전적이 없었다.
도경의 멱살을 잡아 운전석 문에 밀친 무영이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르렁대는 짐승 같았다.
“너도 처맞고 싶어?”
무영을 떼어놓으려 손을 들어 올렸던 도경은 생각을 달리했다. 흥분한 무영의 몸에 손대는 것은 별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말로 안 하면. 나랑 싸우겠다고?”
“싸워? 네가 나랑?”
멱살을 잡은 무영의 손이 도경을 비웃느라 느슨해졌다. 얼마 못 가 멱살을 더 세게 잡혔다. 무영이 도경을 제 쪽으로 확 당겼다. 둘 사이엔 자칫하면 코가 스칠 간격만이 남았다.
“너 진짜로 이안이가 맞는 걸 보고만 있었어?”
골목에서의 일을 무영이 알게 되면 곱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어도, 이안이 맞는데 손 놓고 있었다는 식의 추궁을 받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먼저 때린 사람도, 더 큰 상처를 낸 사람도 이안이었기 때문이다.
섣부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이안이 거짓말을 했을 것 같진 않았다. 우정이고 나발이고를 떠나서, 있었던 일도 깔끔하게 요약하지 못하기 일쑤인 이안에겐 거짓말을 그럴싸하게 꾸며내는 재주가 없었다. 말을 하다 말아서 사실을 왜곡하는 재주는 있어도.
현재로선 어떤 대응을 취해도 비슷비슷한 결과만 나올 것이 뻔했다. 무슨 말로도 무영을 진정시키기 힘들다면 오해부터 정정해야 했다.
“딱 한 대였어. 그리고 먼저 때린 건 이안이야.”
도경을 물어뜯을 듯 노려보던 무영이 멱살을 놓았다. 놓으면서 도경의 어깨를 뒤로 힘껏 미는 바람에 등이 차에 부딪혔다. 빈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만 반복한 무영이 다시 도경에게 붙어 섰다.
“너는 양심이 없지?”
“나는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한 거야. 양심이랑은 관계없어.”
“다른 애들은 그래, 너한테 해준 거 없으니까 너도 잘해줄 필요 없어. 나한테 싸가지 없게 하는 거, 지랄하는 거 다 좋아. 나도 너한테 별로 잘해주고 싶지 않아.”
“지금 그런 얘기를 왜.”
“근데! 이안이한테는 그러면 안 되지.”
무영의 뒤로 아는 얼굴들이 지나갔다. 바로 아래층을 쓰는 업체 직원들이었다. 커피를 하나씩 손에 든 그들은 도경에게 아는 척을 하려다 무영이 언성을 높이자 움찔해 물러섰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래층 업체 사람들은 대리와 통성명도 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올라가자마자 너희 대표가 지금 밖에서 싸움질하느라 바쁘더라고 전달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애들이 네 욕할 때 이안이가 어떻게 하는지 몰라? 너 약 먹는 거 소문났을 때 그거 특별한 약 아니라고, 그냥 수면제라고 거짓말하고 다닌 게 누구야. 이안이었잖아. 걔 아니었으면 너는 친구 아무도 없어.”
속이 울렁거렸다. 입을 열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붙어 움직이질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도, 그 말을 어떤 방식으로 쏘아대고 싶은지도 다 정해져 있었다. 바로 그래서 입을 열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으니까.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온갖 문자를 섞어서 비난하고 싶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안 되니까.
그들은 사람들이 많은 밖에서 대치하는 중이었다. 악을 쓰고 손발을 휘두르는 것은 체면이 떨어지는 짓이었다. 저속한 짓.
“너는 걔한테 뭘 해줬어. 같이 밥 먹어주는 거? 그걸로 다 된다고 생각한 거는 아니지? 너 안 멍청하잖아. 넌 걔를 그냥 쓴 거야. 편해서. 귀찮은 일, 남들한테 걸리면 안 되는 일, 그런 거 걔한테 시켜놓고 넌 깨끗한 척하는 걸 내가 다 알아.”
무영의 언어는 지켜야 할 수위를 넘은 지 오래였다. 언제 소현의 이름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까맣게 선팅된 차 안에 지한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무영이 어찌 나올지를 걱정해야 했다. 한 가닥 남은 이성마저 날아가 소현과 도경이 어떤 사이였는지를 발설해 버릴까? 그래도, 그래도 거기까진 안 갈까.
“나는.”
“부려먹었으면 잘해야지. 누가 걔랑 자래? 그건 나도 싫어. 네가 양심이 있으면 걔 앞에선 서는 척이라도 하라고. 그게 뭐가 어려워?”
망치로 두드리는 것처럼 강한 통증이 한쪽 머리통을 쉬지 않고 울려댔다. 회사 건물 앞에서 멱살잡이를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서니 안 서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이 상황이 비현실적이었다. 누가 뒷목을 쳐서 기절시켜줬으면 좋겠단 바람이 들었다.
“난 몰랐어. 알았으면.”
“걔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랐다고?”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모르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잘 써먹었으면, 그럼 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심각한 인간이야.”
목구멍에서 신 침이 올라왔다. 헛구역질하지 않으려 손톱 끝으로 손바닥을 죽어라 누르며, 도경은 무영의 눈을 마주했다. 무영은 더 이상 지한이 이안을 때린 일로 화내고 있지 않았다. 도경이 이안의 마음을 모르고 지나간 긴 세월에까지 감정을 이입하고 있었다. 아끼는 동생이라서? 우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엔 납득 어려운 분노였다.
“나랑 이안이 문제는 우리 둘이 알아서 풀 거야. 이안이랑 지한이 사이의 문제는 그 둘이 알아서 풀 거고. 그러면 끝나. 네가 여기서 이런다고 해결되는 게 뭐야.”
“알아서 풀어? 이안이랑 우지한이? 아니. 이제 내가 그 둘은 같은 자리에 안 놔둬.”
“그럼 둘 문제를 누가 대신 풀어줘. 네가? 내가?”
아악! 괴성을 지른 무영이 도경의 차 뒷좌석 문을 걷어찼다. 한 번으론 분이 안 풀리는지 연달아 발길질을 해 문에 흠집을 낸 뒤에야 그는 일말의 이성을 되찾았다.
“그래서 뭐. 이안이 보고 사과를 하라는 말이야, 지금?”
“지한이도 하겠지. 이안이가 먼저 사과하면.”
그리고 무영의 이성은 도로 날아갔다.
“도경아, 너 진짜 돌았냐?”
무영의 양손에 머리통을 잡혔을 때, 도경은 최소 뇌진탕을 각오했다. 무영이 머리통을 잡아 어디에라도 내다 꽂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영은 도경의 머리통을 잡아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이안이가 그 새끼한테 사과를 왜 해!”
“이안이가 먼저 때렸다니까.”
“그 새끼랑 이안이가 어떻게 같아!”
골이 통째로 흔들렸다. 그냥 뇌진탕에 걸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계속 이 지랄을 겪느니 그냥 때려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단 고민이 든 직후였다. 무영의 손에 잡혀 고문당하던 머리통이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여기다 숨겨놓고 말을 안 했어?”
무영이 봐주지 않고 흔들어댄 여파로 아직도 골이 울렸다. 도경은 토기를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까진 그렇게 말을 잘 듣더니 오늘따라 말을 안 들어먹는 지한이 조수석 문을 열고 나와 있었다.
“왜 기어 나왔어. 그냥 계속 숨어있지. 그럼 넌 안 맞았을 건데.”
“너나 말로 할 때 가지 그랬어.”
무영이 도경을 두고 한 발짝 뗐을 때, 지한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너는 오늘 그 얼굴로 집에 못 들어가.”
잊고 있었다. 지한은 복싱을 오래 배웠고, 상대를 불구 직전까지 때린 적 있었다. 이안이 말해주지 않은 이상 무영은 지한을 만만하게 보고 있을 것이다. 지한이 무영의 얼굴을 무너트려 놓기라도 하면 일이 커졌다. 반대로 무영이 지한의 얼굴을 망가트려 놓을 경우…… 아니, 그런 일은 도경이 허락하지 않았다.
“저 새낀 뭘 믿고 저렇게 자신이 있어.”
어느 상황으로 이어지든 순탄하게 넘기긴 글렀다. 도경은 표정 없는 얼굴로 무영을 바라보는 지한과, 그런 지한을 비웃는 무영 사이에서 갈등했다. 지금까지 무영이 손을 올린 상대들은 술병 하나만 깨져도 바로 도망치려는 놈들이 대다수였다. 성호 정도가 반격이란 걸 한 상대였는데 그마저도 가드들이 뜯어말려 중단되었다.
지한은 도경의 앞에서 폭력적으로 군 적이 없었다. 성호나 이안을 한 대 때리고 밀친 것 정도론 가늠이 불가능했다. 무영이 지한에게 얻어터지는 것과 지한이 무영에게 얻어터지는 것. 둘 중 뭘 더 염려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결국 도경은 이성을 잠시 버려두기로 마음먹었다. 점점 더 심하게 울리는 골을 부여잡고는 머리를 제대로 굴리기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한 번쯤 직감을 따르지 못할 것도 없었다. 누가 더 때리고 맞든지 간에, 나중에 무영이 지한을 암매장시켜 버리겠다고 날뛸 일부터 방지하려는 노력이 우선이었다.
“김무영. 내 말 좀 들어봐.”
“네가 병원비 다 대준다고 약속했나 보지?”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무영과 지한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무영이 차 앞을 지날 때쯤이었다. 지한이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러다가 무영에게 머리카락을 잡힐 것 같아 피하라고 하려던 순간이었다. 지한이 일어나며 까만 물체로 무영의 얼굴을 후려쳤다. 보닛을 찌그러트리고 바닥에 방치되어 있던 헬멧이었다. 헬멧은 주인의 얼굴을 직격으로 강타했다.
“한국말 몰라 씹새끼야? 오늘 너 그 얼굴로 집에 못 들어간다고.”
코를 감싸 쥔 채 물러났던 무영이 고개를 들었다.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빨간 핏줄기로 금세 더러워진 손등을 내려다본 무영의 입에서 영어가 터져 나왔다.
“You fucking piece of shit.”
그가 190cm에 육박하는 몸을 지한에게 날렸다. 쏜살같이 날아드는 주먹을 지한은 용케 피했다. 백인 피를 물려받은 피부가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재차 얼굴을 노릴 것처럼 주먹을 쥐었던 무영이 돌연 반대쪽 손을 뻗었다. 지한의 앞섶이 잡혔다. 붉은 셔츠에 달린 단추가 여럿 뜯겨져 나갔다.
어디가 불편한지 지한은 무영의 손을 바로 뿌리치지 못하고 주춤댔다. 무영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한을 끌어당겼다. 도경을 물어뜯을 듯 노려보기만 하고 끝까지 때리지 않았던 무영은 지한에게 손을 올리는 데 일 초도 지체하지 않았다. 주먹이 아니었다. 쫙 편 손바닥으로, 밴드가 붙어있는 쪽 뺨을 갈겼다. 일부러 그런 게 틀림없었다.
완전히 돌아간 얼굴을 원위치시킨 지한이 무영의 팔을 잡아 비틀며 주먹을 내질렀다. 이미 피가 흐르고 있는 코를 또 한 번 때림으로써 상처 있는 뺨을 골라 때린 대가를 돌려준 지한이 그대로 무영의 옷깃을 잡아 보닛에 던졌다.
“넌 내가 사람으로 안 보이지.”
도경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한이 무영을 누르고 있었다.
“근데 어떡해. 나도 사람인데.”
소란을 지켜보던 손님들이 제보했는지 1층 카페 사장이 뛰쳐나와 도경에게 긴박하게 전화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경찰을 불러야 하냐고 묻는 듯했다. 도경은 고개를 내저었다. 마지못해 물러나는 사장의 기색이 탐탁지 않았다.
“Get yours hands off me.”
“한국말로 해, 덜떨어진 새끼야.”
무영이 키득거렸다. 지한에게 목이 눌려 찌그러진 보닛에 눕혀진 상태로도 전혀 기죽을 기미가 없었다.
“손 떼라고 했다. 그것도 못 알아들어, 무식한 새끼가.”
엄청난 힘으로, 무영이 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앞이 너덜거리는 셔츠를 잡아채 지한을 보닛에 던졌다. 지한이 신음을 흘렸다. 하반신을 잘못 부딪친 듯했다.
“이안이가 널 먼저 때려서, 네가 걔를 때려도 될 줄 알았어?”
지한에게 일어날 시간을 주지 않고 턱을 잡은 무영이 낮게 말했다. 도경의 멱살을 잡았을 때처럼, 사람보단 짐승에게서 날 법한 소리가 섞여 나왔다.
“너 같은 거 내가 지금 당장 다른 나라에 갖다 팔아도 누가 신경 써.”
쌍욕을 하든,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하든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었을 시간이 지나갔다. 지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단 듯 무영이 실소했다.
“알긴 아나 보네? 아무도 신경 안 쓸 거.”
아니야.
심정지를 알리는 기계음과 징그럽게 닮은 이명이 도경의 귀를 통과했다. 소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날, 그녀의 친구들을 피해 몇 번이고 주차장으로 도망쳤던 장례식장, 시우를 어떻게 해보려다 운 좋게 지한을 건졌던 밤. 지한이 도경에게 가진 호감을 확신했던 순간, 무턱대고 키스했던 사무실, 지한이 도경에게 싸구려 음식을 사줘놓고 눈치를 보다 다시 가져갔던 거리, 그리고 지난밤까지.
과거의 토막들이 도경을 빨아들였다. 별 거지 같은 게 주제도 모르고 소현과 붙어먹어 도경을 모욕했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운 좋게 겉가죽만 타고난 새끼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려고 한 적 또한, 있었다, 등신같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도경만 보면 눈을 떼기 힘들어하기에 실컷 가지고 놀다 버려서 스스로 죽게 만들려는 계획을 세운 적 역시 있었다.
도경은 직시했다. 그라고 다 맞을 수만은 없다는 현실을. 누구에게나 세상은 스스로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릴 때가 있다는 것을.
그는 더 이상 지한이 죽고 싶어 하길 바라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은 생략되었다. 발이 알아서 움직이고 손이 알아서 움직였다. 도경은 무영의 어깨를 잡았다. 도경이 끼어들 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무영이 비교적 쉽게 딸려왔다. 도경은 무영의 뺨을 때렸다. 무영이 지한의 다친 뺨을 갈겼듯. 주먹이 아닌 손바닥에 온 힘을 실어서. 제 운명도 모르고 감히 피부 위에 앉은 벌레를 내려칠 때처럼.
“그러는 너는!”
무영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도경은 보닛을 막아섰다.
“너희 집에 너 죽으면 기뻐할 사람들 많잖아. 그러면서 네가 누구를 걱정해?”
도경의 손이 닿았던 뺨을 만져본 무영이 그래도 믿을 수 없는지 눈을 여러 번 깜박였다.
“도경아. 나를…….”
태어나 처음 접하는 생명체를 마주한 것 같은 낯빛이었다.
“좀 이해시켜 봐.”
멎지 않은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와 무영의 턱으로, 가슴팍으로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쟤랑, 저 새끼랑 뭘 어쩌려고?”
“왜 네가 이해하려고 해. 뭘 하든 내 일이야.”
“아. 쟤도 너 발작하면서 다 때려 부수는 거 받아줘?”
“뭐?”
“하긴. 남자라서 때리기 좋겠네. 상처 나도 저 새끼는 상관 안 할 거고. 그래. 여자보다 훨씬 편하겠다. 이제 알겠어.”
심장이 아래로 꺼지는 것 같았다. 소현과 도경은 누구에게도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밖으로 발설하지 않았다. 소현의 최측근들도 거기까지는 몰랐다. 그런데 소현과 남들보다 특별히 더 친하지도 않았던 무영이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래……. 맞아.”
지한이 듣고 있었다. 도박은 할 수 없었다.
“넌 다 아는 거 나만 모르고 있어서 이렇게 됐어. 이안이 마음도 모르면서 지금까지 옆에 둔 거, 내가 잘못했어. 걔가 용서해줄 때까지 사과할게. 그러니까.”
낯선 감각이 도경을 덮쳤다. 코끝이 시큰거리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는 차라리 죽겠단 각오로 눈에 힘을 줬다.
“그만해.”
무영이 침을 뱉었다. 입 안도 터졌는지, 아니면 입술에서 묻어나왔는지 피가 섞여 있었다.
“잘해 봐.”
보닛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굳어있는 지한에게, 무영이 말했다. 조금 전까지 주먹질을 주고받았던 대상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일상적인 말투였다.
“우리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니까.”
소매로 아직도 흐르고 있는 피를 훔친 무영이 헬멧을 주워 오토바이로 돌아갔다. 도경은 바닥에 떨어진 무영의 핏방울들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오토바이가 도경의 차를 지나쳐 멀어졌다.
***
차 안 디스플레이에 뜬 숫자의 맨 뒷자리가 바뀌었다. 시간을 가리키는 맨 앞의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도경과 지한이 차로 돌아와 앉아있기만 한 지 정확히 21분이 지났다. 참는 것에 자신 있는 도경이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이 이상 지한이 먼저 말을 걸길 기다리고 있다간 거품을 물고 발작하는 것도 먼 미래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까 걔가 한 얘기는.”
“안 말해도 돼요, 지금은.”
먼저 말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기는 지한도 다르지 않았는지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안 듣고 싶다는 게 아니고, 꼭 들을 건데요, 지금 말고 다음에. 형이 말하고 싶을 때.”
다시 침묵이 시작됐다. 두 번째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형이었으면 지금보단 많이 말하고 살았을 거 같아요. 좋다 싫다. 화가 난다. 이런 거.”
도경은 괜히 핸들을 꽉 잡았다 뗐다. 손바닥이 후끈거렸다.
“나는 말을 잘 못하니까 더 화가 나서 남들하고 자꾸 싸우고 그랬는데, 근데 형은 말 잘하잖아요. 그리고 누구 때려도 감옥엔 안 갈 거고.”
“…….”
“사람 때리고 다니란 말은 아니에요. 그런다고 나아지는 건 없더라고.”
조금만 더 나은 기분이었다면 도경은 지한에게 맞장구쳤을 것이다. 너도 잘 아는구나. 소리쳐봤자, 부숴봤자, 발광해봤자 분노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증식하기만 한다는 걸. 그런데도 일시적으로 드는 그, 내가 분노를 해소했다는 착각이 다시 맛보고 싶어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걸.
“나 혼자 갈게요. 형도 볼일 보고 집에 일찍 가요.”
차 문을 반쯤 열고 내리려던 지한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운전석을 한번 보았다.
“연락할게요.”
그가 차에서 내렸다. 누가 봐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멀어지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도경은 핸들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
비린내가 나는 고기 푸딩을 던지려다 관두자마자 소현에게 붙잡혀 끌려 내려왔던 무영의 아파트 주차장.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즉시 강도당한 사람 못지않게 악을 질러대던 소현. 나한테 아까 그걸 던지려고 했다며 눈에 눈물까지 차오르는 그녀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몇 번이고 항변했다. 네가 나를 기분 나쁘게 해서 그랬다, 던지려고 한 건 내가 잘못했지만 안 던졌으니 된 거 아니냐,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풀리겠느냐.
그 어떤 변명과 논리와 설득을 시도해도 먹히지 않았다. 소현이 보물처럼 어깨에서 떼어놓지 않던 작은 가방을 휘둘렀을 때, 그 가방에 눈두덩을 맞았을 때, 날카로운 모서리를 낚아채 소현에게 던졌을 때, 그런데 그것이 소현의 얼굴을 맞혔을 때.
「그만 좀 해, 미친년아!」
정수리에 대고 얼음을 깨트린 것처럼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차가운 느낌을 도경은 잊지 못했다.
긁힌 부위를 손끝으로 쓸어내 피가 난다는 것을 확인한 소현은 더 세게 때리려는 것처럼 가방끈을 한껏 뒤로 젖혔다. 그랬던 그녀가 도경을 바로 더 때리지 않은 진짜 이유는 오늘까지도 몰랐다.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아 서로의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너, 나한테 한 대 더 맞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아니야. 때리려고 한 게…… 실수였어.」
「그럼 너도 한 대 더 때리게 해줄게.」
소현이 가방끈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러고 싶잖아. 아니야?」
아무도 보지 않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CCTV가 깔린 주차장에서 도경은 깨달았다. 우리는 닮은 영혼을 가졌고,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겠구나.
나는 저주받았구나.
***
도경은 핸들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10대 중반에 예감했던 운명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순 없었다. 권 회장은 장손 타령하다 미쳐버린 나머지 도경을 내쫓았고, 소현이 도경을 버렸다는 소문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며, 이안은 도경을 원망했다. 그의 삶은 확실히 저주받았을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을 속단하긴 일렀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길었다. 도경은 지한을 나락으로 떨어트리지 않았다. 소현의 선물은 뺏었지만 시우와 지한의 인생에 본격적으로 훼방을 놓진 않았다. 틀어지면 보완하고 무너지면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이 계획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