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Follow Up
#60
평일 오후의 마트는 앞사람에 막혀 카트를 돌려야 하는 일도, 마지막 세일 품목 홍보에 열을 올리는 소리도 없이 적당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열심히 장을 보는 시우 뒤에서 다른 생각에 빠지기 좋은 환경이었다.
시우의 손이 두 시리얼 박스 사이에서 망설이는 동안 지한은 몇 밤을 자도 떨쳐지지 않는 순간들을 곱씹었다. 지한의 휴대폰을 바닥으로 밀어버리던 도경. 가격을 묻기도 겁나는 오토바이를 지한이 왜 거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도경. 헬멧으로 도경의 차 보닛을 찍어 내리던 무영. 도경의 머리통을 자비 없이 흔들어대던 무영. 물을 쏟아내는 수도꼭지처럼 피를 쏟아내던 무영의 코. 그러면서도 끝까지 지한을 무시하던 무영. 무영의 뺨을 갈기던 도경.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낮의 길가에서 뺨을 맞고도 도경의 얼굴에 직접적으로는 주먹을 날리지 않던 무영, 개새끼.
“이거 살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리얼 박스에 눈길을 고정한 시우가 지한의 의견을 물었다. 지한의 눈높이보다 아래에 위치한 정수리가 지한의 것보다 밝은색 머리카락으로 덮여 있었다. 남들보다 연한 빛깔의 눈동자와 어울리는 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은 결이 약해 툭툭 잘 끊겼다. 그래도 시우는 꾸준히 염색했다. 지한이 좋다고 말한 적 있는 색깔이라.
“맘대로 해.”
“별로 안 달다는데.”
달든 말든 그깟 시리얼 맛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확 일어나려던 성질이 어째선지 금세 힘을 잃고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돌아버린 개새끼에게 머리통을 붙들린 상태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던 도경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일로는 언성을 높일 자격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차분한 도경도 마지막에는 손을 휘둘렀지만. 사실 지한의 눈엔 무영의 뺨을 날리는 순간의 도경마저 우아해 보였다. 병이었다.
“그냥 이거 사.”
시우에게 묻지도 않고 아무 박스나 꺼내어 카트에 넣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염없이 시리얼 박스 앞에서 서있을 인간이 시우였다. 그는 지한이 원한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돈을 썼다. 지한의 의사를 모르는 상태로는 샴푸 하나도 마음대로 사지 않았다. 정작 지한은 확고한 취향이랄 게 없었다.
가끔 호흡이 힘들어지는 증상을 보이고, 그것보다는 조금 더 자주 물건을 부수고 싶어 하는 지한을 정신병원에 데려가고 싶어 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말고는 시우에게 크게 바라는 바가 없었다. 그나마도 최근엔 그런 일이 드물었다. 부숴먹은 물건은 고물 휴대폰이 마지막이었다.
“이거 하나 살까? 안 필요해? 담배 피우고 나서.”
순서를 기다리던 중 시우가 계산대 옆의 진열대를 가리켰다. 민트 캔디였다.
“필요 없어.”
“그러고 보니까 너 요새 담배 잘 안 피우네. 끊으려고?”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아니라고 하기도 뭐해서 그냥 딴청을 피웠다.
어느 순간 도경과 있을 땐 담배를 꺼내지 않다 보니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양이 줄었다. 도경은 지한에게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한 적 없었다. 지한의 담배 냄새는 좋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의 진심으로 받아들여 본 적도 없지만, 최근 들어 확신하게 되었다. 싫은데 말을 안 해온 것이 분명했다. 무영이나 이안 같은 진상들한테도 속 시원하게 꺼지라고 말하지 않는 도경에게 담배 냄새를 참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시우에게 제일 가벼운 봉지를 들게 하고, 지한은 나머지 봉지를 양손에 든 채 마트를 나섰다. 그들은 더럽고 비좁은, 그렇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하루에 몇 번을 지나치면서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간판들이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정형외과. 피부과. 비뇨기과. 정신의학과.
도경의 집에서 본 약통 숫자로 짐작했고, 무영이 하는 말로 심증을 굳혔다. 이안이 도경의 약은 수면제일 뿐이라고 거짓말하고 다녔다고 했다. 발작이란 단어도 나왔다. 무슨 약인지는 몰라도 소염진통제나 해열제가 아니란 점은 명백했다.
「쟤도 너 발작하면서 다 때려 부수는 거 받아줘?」
도경은 무영이 욕설보다 더 무섭게 퍼붓는 말들을 정정하지 않았다. 악에 받친 무영의 말에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 있을지언정 아예 없는 소리는 아니란 증거였다. 도경이 정신과 약을 타 먹는다는 것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도경처럼 미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혼자서만 정신을 놓지 않고 살려면 지한이어도 많은 약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다만 때려 부순다는 대목은 상당히 놀라웠다. 도경이 뭔가를 때려 부순다고? 지한이 또래들을 때려눕히고 휴대폰을 던지고 어쩔 땐 의자 다리를 부러뜨렸던 것처럼?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 맞아.」
무영에게 저자세로 나가는 도경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 복장이 터져서 그랬다. 도경의 몫까지 빼앗아와 지랄발광을 떨고 싶은데 억지로 참느라 쌓인 분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그만 건방진 조언을 했다. 내가 형이었으면 지금보다는 말을 많이 하고 살았을 것이라고 뱉어놓고 도망치긴 했는데, 사실 지한이 하루만 도경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말보단 주먹을 더 휘두르고 다녔을 것이다.
도경은 그 나이에 이미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지역의 좋은 아파트에 살았다. 이사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억 소리 나는 부모에 본인의 능력까지 갖추었단 이야기였다. 누구를 얼마나 패 놓든, 심지어는 어디 하나 다신 멀쩡히 못 쓰게 만들어놔도 도경의 위치라면 아무 일 없었던 척 살아갈 수 있었다.
지한은 장담했다. 그가 도경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면 무조건 친구들부터 팰 것이다.
“엄청 좋아지지 않았어?”
“어? 뭐?”
“날씨 말이야.”
좋아졌다는 말에 괜히 가슴이 철렁했다. 날씨 얘기에 지나치게 놀라는 지한이 우스웠는지 시우가 킥킥댔다. 지한은 얼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깨끗한 색의 구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가슴이 또 한 번 쿵쿵댔다. 날이 좋아지면 놀러 가자던 제안, 지금도 유효하려나.
“어, 그러네.”
의도치 않게 반응이 느려졌다. 혹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까 싶어 시우를 슬쩍 보니 그냥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미심쩍게 여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안심은 금물이었다. 눈치 없인 살아남을 수 없는 보육원에서도 제일 눈치가 빨라 원장 부부의 강아지 취급받은 시우였다.
무영이 코피를 흘리며 사라졌던 날, 시우는 꼬박 하루 만에 돌아온 지한에게 왜 없던 상처가 생겼느냐고 묻지 않았다. 시우가 제일 먼저 알고 싶어 한 것은 지한이 연락도 없이 밤을 보낸 장소였다.
여기서 아는 척해봤자 둘 다 득될 것 없으니 이따 얘기하자는 말로 되돌아온 지한을 무영의 클럽에서 내보냈던 것이 둘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러고는 연락 두절이었으니 걱정을 살 만도 했다. 지은 죄가 있는 지한이 큰소리치며 방문을 닫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시우가 먼저 물어보았다. 도경의 집에 있었느냐고.
한 10초는 고민했다. 도경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우에게 다 털어놓을지 말지. 하지만 역시 그건 이르단 결론에 다다랐다. 도경에게 시우와 키스만 해봤다는 반쪽짜리 진실을 털어놨듯, 시우에게는 도경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 그만 잠들어 버렸다는 왜곡된 진실을 공유했다. 뺨에 생긴 상처의 출처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놓은 거짓말로 잘 둘러댔다. 이안이라는 도경의 친구가 술에 취해서 부축해 주려다 같이 넘어져서 긁혔다.
궁금한 바를 다 해소한 시우는 그제야 지한을 끌어안았다. 걱정했잖아. 다음부턴 연락 안 되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알았지? 지한은 시우가 놔줄 때까지 꼼짝없이 서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차 봤어?”
건물에 도착해 갈 때쯤 시우가 지한의 팔을 건드리며 작게 말했다. 주차장 입구와 경비실 사이에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차는 이목을 끌만한 조건이 둘이나 있었다. 첫째, 체육관에 나오던 놈들이 꿈의 차로 꼽곤 하던 차종이었다. 둘째, 남색도 아니고 그야말로 새파란 색이었다.
납작한 차의 운전석이 열렸다. 불길했다. 도경의 동네에선 발에 치이는 차종일지 몰라도 지한의 동네에선 아니었다. 체육관 친구 중 누구도 손에 넣지 못한 차 문을 열고 나오는 인물이 제발 아는 얼굴만은 아니길 바랐다. 바람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 잠깐. 나랑 얘기 좀……”
이안을 알아본 시우가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놀란 기색만 있을 뿐 불쾌해하는 빛은 보이지 않았다. 클럽 지하에서 이안은 지한을 쳐다보느라 다른 연놈들이 시우를 가지고 노는 데에 끼지 않았다. 시우에겐 개중 멀쩡한 놈으로 인식된 듯했다. 이제 와서 사실은 저 새끼가 휘두른 우산으로 인해 얼굴이 이렇게 됐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시우 너 먼저 올라가.”
“어?”
“건물 안에서 기다리든지.”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지한의 혈압을 감지했는지 시우는 시키는 대로 먼저 들어갔다. 시우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이안은 지한을 쳐다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른 눈을 돌렸다.
한은 크게 내쉬어도 모자랄 숨을 꾸역꾸역 안으로 삼켰다. 지겨웠다. 성인 남자라면 한 번씩은 꿈꿔보는 차에서 내린 이안과 대형마트 로고가 찍힌 봉지를 양손에 들고 있는 지한 본인의 차이가 꼴사나워 봐주기 힘들었다. 봉지를 아스팔트 바닥에 내려놓고 이안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이안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당일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시우가 무영의 클럽에서 바텐더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 과연 우연이었는가. 아니라는 데에 손가락 두 개쯤 걸 수 있었다.
시우를 끌어들였을 후보는 둘 중 하나였다. 이안 아니면 무영. 둘이 합심해 한 짓이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어찌 지한과 시우의 관계를 알고 시우를 끌어들였냐는 것이었다. 지한을 엿 먹이려 시우를 부른다는 발상은 둘의 관계를 알아야만 가능했다. 지한과 시우를 둘 다 아는 사람은 도경밖에 없었다. 그런데 도경이 시우를 끌어들였을 린 없잖은가.
“무영이 형이, 그니까 내가 원래는 네 친구 있잖아. 아까 쟤, 바텐더. 쟤 연락처를 알아내려고 했는데.”
“연락처는 뭐 하게. 또 불러서 갖고 놀게?”
“내가 언제 쟤를 불러서, 아니, 그날 쟤 내가 부른 거 아니거든?”
“그건 안 중요하니까 하던 말이나 계속해.”
이안은 언제 발끈했냐는 듯 도로 쪼그라들어 웅얼웅얼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도 힘든 발음으로 말했다.
“암튼 내가 쟤 연락처 알아달라고 했는데 무영이 형이 쟤 상사랑 아는 사이라서 그냥 주소 알려달라고 했어.”
“내 주소를 왜 이시우 상사한테 물어보는데.”
“너희 둘이 같이 산다고 쟤가 그랬다는데…… 아니야?”
며칠 내내 지한을 떠나지 않던 각종 추측이 일시 중단되었다. 도경 말고는 아는 이가 없는 지한과 시우의 관계를 그 무리에게 알린 장본인이 시우라는 말이었다. 시우는 절대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선택엔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나 목적이 있었다.
“시우가 너한테 우리 둘이 같이 산다 그랬다고?”
“아니, 그거는 아니구…….”
“말 똑바로 해라. 네 얼굴도 똑같이 긁어버리기 전에.”
“나 말고 무영이 형한테 그랬다는데! 나도 더는 몰라.”
시우가 무영에게 대체 왜 신상을 털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약점이라도 잡힌 게 아니고서야. 머릿속이 혼잡해졌다.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얼굴을 긁어버리겠단 협박엔 바락바락 잘만 대답하던 이안이 다시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였다. 그 꼴을 더 보고 있다간 도경이 지켜보고 있던 골목에서 겨우 참은 것이 무색하게 손을 날려버릴지도 몰랐다.
“나 들어간다.”
“네 얼굴에 상처 내서!”
이안이 지한의 팔꿈치를 붙들었다. 소매나 팔뚝은 몰라도 팔꿈치를 붙드는 놈은 또 처음이었다. 상처 내서 뭐 어쨌다는 건지 들어나 보잔 마음으로 가만두니 질끈 감았던 눈을 빼꼼 뜨며 한다는 소리가.
“미안해……?”
지한은 팔을 휘둘러 이안의 손을 내쳤다.
“나한테 물어보는 거냐, 지금? 미안하냐고?”
“아니. 미안하다고 한 거야. 내가.”
어이가 없다 못해 웃겼다. 피식피식 입 밖으로 새어나가는 웃음을 굳이 감추고 싶지도 않았다. 이안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낯짝으로 지한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분노보다 더 강한 의문이 지한의 속을 채웠다.
“너는 대학 나왔을 거 아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주제에 대학 나왔을 거 아니냔 질문엔 잘도 긍정했다.
“근데 나도 아는 걸 왜 몰라.”
“내가 뭐를…….”
“누가 사과를 그렇게 해.”
마침내 이안이 닥쳤다. 차라리 잘됐다. 보나 마나 도경이 시켜서 억지로 하러 왔을 사과, 지한도 그다지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잠깐. 알았어. 다시 할게.”
봉지를 들고 건물로 들어가려는 지한의 앞을 이안이 가로막았다. 내가 사과받아줄 때까지 도경이 형이 안 본다고 했냐? 펄펄 끓어오르는 말을 삼키고 또 삼켰다. 안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 무영하고는 그 난리를 치고 싸운 도경이지만, 그래도 이안과는 잘 풀었을지도 모르니까. 지한이 모르는 그들만의 역사가 있을 테니까.
“내가 그날 우산으로 때린 거 진짜 잘못했어. 그러니까 치료비 다 낼게. 나중에 흉터 안 연해지면 레이저 쏴야 되잖아, 그것도 돈 다 내가 줄게. 그래도 네 기분이 안 풀리면, 그러면 더 배상해줄게.”
이안은 진짜로 사과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일생에 사과를 해본 경험이 전무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지한 같은 상대에게는 다르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든가 둘 중 하나였다.
“뭘 어떻게 배상할 건데. 돈으로?”
“돈 아니면 뭐, 가지고 싶은 게 따로 있어?”
“미치겠네.”
내려뒀던 봉지를 하나씩 다시 팔에 끼워 넣은 보람이 날아갔다. 봉지들을 바닥에 떨어트린 지한은 이안의 팔뚝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전투력을 수치화한다면 마이너스가 떠도 이상하지 않을 이안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지한이 어지간히도 미웠던 모양이다. 남이 손만 대도 숨넘어가는 새끼가 우산을 무기로 사용할 생각까지 다 하고.
“네 돈 필요 없어.”
“아, 알았어. 그럼 내 사과는.”
“끝까지 들어. 내가 지금 이렇게 좋은 말로 하는 건 도경이 형 생각해서야.”
여태 이안의 팔을 꺾고 다리를 밟지 않은 이유는 도경뿐이었다. 성호에게 손을 댔을 때 그랬듯 무영과 붙은 것도 도경에게 폭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도경의 친구들은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쓰레기였지만 그래도 한 놈만 고르자면 무영보단 이안이 나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것 같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회의적이 되기 일쑤였다. 둘 다 그냥 묶어서 한강에 던져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둘 다 사라지면 도경이 너무 외로워지지 않을까.
“형한테 똑바로 해.”
두 놈이 다 없어야 도경에게 더 나은 건지, 개중 도경에게라도 죽는시늉할 줄 아는 한 놈이 남아있어야 더 나은 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렸다 접었다 해도 아리송했다. 조금만 더 괜찮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면 좋았을 뻔했다. 조금만 더 떳떳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랬으면 지한 혼자서 도경의 뭐든 다 되어주겠다고 약속할 용기도 났을 텐데.
지한은 이안을 놔주었다. 바닥에 내던진 봉지들을 다 주워든 지한이 아파트 건물로 들어올 때까지 이안은 잠잠했다. 지한의 뒤통수를 째려보느라 조용했던 것이든, 아니면 뒤늦게나마 1프로라도 제정신이 돌아와 반성을 하는 중이었든 아무래도 좋았다. 꼴도 보기 싫은 면상을 눈앞에서 치웠다는 점만이 중요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우는 지한의 표정을 보곤 조용히 버튼을 눌렀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집 안으로 들어와 장 봐온 것들을 식탁에 다 올려놓은 직후였다.
“여기까지 왜 온 거래?”
무영의 클럽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이안의 되도 않는 사과를 받아야 했던 조금 전까지 보고 겪은 일들의 여파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진이 다 빠졌다. 새로운 거짓말을 떠올릴 힘은 남아있지 않았다.
“내 얼굴에 상처 나게 해서 미안하대.”
사건의 전말은 쏙 빼놓고 결과만 알려주는 교묘한 말이었다. 시우는 단번에 그 말 안에 담긴 진실을 잡아냈다.
“저 사람은 그렇게 안 봤는데.”
“뭐가.”
“때려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게.”
“근데 왜 네 얼굴만 이래? 너는 안 때렸어?”
마치 지한이 이안을 때리고 들어왔어야 한다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한이 누굴 때리고 들어올 때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얼굴을 했던 주제에.
시우가 다친 쪽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도경이 붙여줬던 밴드는 동네 병원에서 새로 붙여준 밴드로 교체된 지 오래였다. 뺨을 만지는 것 정도는 지한과 시우 사이에 아무것도 아닌 접촉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의식이 되고 있었다. 왜인지가 너무 뻔했다. 도경 때문이었다. 도경이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지한은 피부에 닿은 시우의 손을 떼어놔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내가 잘못 때렸다 어디 부러지면 돈밖에 더 나가?”
지한은 냉장식품들이 든 봉지를 통째로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자연스레 시우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봉지 안에 담긴 식품들을 남김없이 냉장고 안에 넣고 들어오는 지한에게 미심쩍은 눈길이 쏟아졌다. 생전 안 하던 짓을 했으니 이상해 보일 법도 했다.
시우와 더 있다가 추궁당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지한은 피곤한 척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꺼낸 지한은 대화창을 누를까 말까 망설였다.
도경에게 이안이 왔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하게는, 그냥 도경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완벽하게 솔직해지자면 목소리도 듣고 싶었으나 그냥 메시지를 넣기로 했다. 회사에 있을 시간이기도 했고, 메시지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던 도경이 지한에 꼬박꼬박 잘 답장해줬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안 걔한테 사과하라고 형이 시켰어요?]
퇴근을 앞두고 한창 바쁠 줄 알았는데 거의 곧바로 메시지 옆의 숫자가 사라졌다,
[응]
회사를 다녀본 적 없는 지한이 잘못 안 것일지도 몰랐다. 퇴근을 앞둔 시간이 제일 한가한 시간대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들뜨는 기분까진 어쩌지 못했다.
[걔가 똑바로 사과했어? 뭐래?]
연이어 도착한 다음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봐도 지한의 편을 들어주는 내용이었다. 졌다. 지한은 혼자 있는 방에서 술 취한 놈처럼 웃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바로 정색했다.
[만나면 말해줄게요]
보내고 나니 말이 어째 지금 당장은 알려주지 않겠다고 약 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글로는 설명하기 힘들다는 소리였다는 변명을 덧붙이려 엄지로 입력창을 누른 지한은 갑자기 바뀌는 화면에 대처하지 못했다. 수신 버튼이 눌렸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얼른 휴대폰을 귀로 올렸다.
“여보세요?”
―언제가 좋을까?
발신자의 이름을 봐놓고도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도경의 목소리에 반가운 마음이 폭발했다.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언제…… 뭐가요?”
―만나면 말해준다며, 네가.
“아. 아아. 그거. 아무 때나.”
도경의 말을 듣고 보니 만나면 말해주겠단 메시지는 단순히 약 올리는 내용만 담고 있지 않았다. 만나자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하도 도경의 생각을 많이 해서 그랬나 보다. 그냥 하는 말에도 진심이 숨어들어 가고.
―내일 금요일이야.
“아. 네.”
항상 뭘 먹을지부터 정하고 만났는지라 이번엔 한 박자 늦게 알아먹었다.
“아, 내일 만나자고?”
멈칫하는 도경의 표정이 안 봐도 생생했다. 그려 넣은 듯 자연스레 올라간 눈매를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 보이게 하는 눈빛. 상대방으로 하여금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가 무엇이었는지를 하나도 기억 못 하게 만들어 버리는 공기.
―만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어. 아니, 내가 지금 잠깐 말을 잘못…… 네. 그럼 내일 몇 시에.”
―저녁 먹을까.
“저녁. 어디에서.”
―우리 집?
도경이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질문보단 제안이었고 제안보단 통보였다. 도경이 어디서 뭘 먹자고 해도 지한은 따를 것이다.
“좋아요.”
이사님, 하고 도경을 찾는 여자의 목소리가 멀게 들려왔다. 도경이 뭐라고 하기 전에 지한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얼마 안 가 꺼진 화면이 지한의 얼굴을 비췄다. 멍해 보였다.
그리고 화면이 다시 환해졌다.
[일곱 시에 주차장에서 만나]
그 글자 열한 개를 보려 화면이 꺼질라치면 손끝으로 건드리는 짓을 한 열 번 반복했다. 그 이상으로 갔다간 스스로가 징그러워질까 봐 휴대폰을 이불 위에 던졌다. 별 효과는 없었다. 자꾸만 웃고 싶어졌다.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도경이 지한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이라고. 그냥 한 번 자보려던 것도, 어디서 굴러들어온 떨거지가 신기해서도 아니라고. 여기까지 왔으면 그냥 정말 좋아하는 것이라고 믿어보기로 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믿음은 스스로의 감정을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방어수단이었다. 현실에게, 그리고 도경과 평생을 함께해온 또라이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도경을 좋아하기 위한 수단.
지한은 도경을 믿었다.
#61
아파트 주차장에서 독일산 오토바이를 발견한 지한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행동도 없었다. 도경은 지한의 뒤에서 그가 보일 반응을 예측했다. 고맙다고 하려나? 일단 좋아는 하겠지. 지난번에 데려갔던 곳보다는 싸도, 대중적인 인기는 더 높은 회사에서 만든 물건이었다. 바로 싫다고 하지 않는 것만 봐도 절반은 성공이었다.
“형 지난번에 내가 한 말 기억 안 나요?”
그러나 한참 만에 도경을 쳐다본 지한의 입에선 뚱딴지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도경을 뭐로 보는지가 궁금해지는 질문이었다. 학창시절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냈던 도경은 특히 외국어 점수가 눈부셨다. 암기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타고나야 하는 능력이었다. 그런 도경에게 이 주일도 안 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묻다니.
“당연히 기억나지. 그때 거긴 너무 비싸다고 해서 훨씬 더 싼 걸로 샀는데?”
“이…….”
지한이 말을 하다 말았다. 뭐라고 하려다 만 것인지. 이 멍청한 놈아? 이 새끼야? 물론 도경을 그렇게 부를 작정이야 아니었을 테고, 현실적으론 이게 뭐가 싸냐는 정도의 말을 하고 싶었으리라.
“말을 왜 하다 말아? 이?”
“이…… 건 싼 게 아니라고요.”
도경은 인내심을 듬뿍 담아 미소 지었다. 지한이 왜 휴대폰은 받았으면서 오토바이는 못 받는지 알겠다. 휴대폰은 생일선물이란 명목이 있었는데 오토바이는 없다 이것이었다. 지한은 알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 너무 비싼 돈이 도경에게도 너무 비싼 액수는 아니란 것을.
“저거보다 더 싼 건 내가 별로 사고 싶지 않아.”
지한은 이미 도경이 지난번에 충분히 양보했다는 것 또한 알아둬야 했다. 참는 것과 양보는 별개였다. 도경은 양보에 관심이 없었다. 참고 참아서 이기는 데에는 관심이 많았어도.
“그래도 싫으면 그냥 놔둬. 가지겠다는 사람한테 줄게.”
지한에게 깔끔하고 멀쩡한 오토바이를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엔 흑심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하도 가식을 떨어서 에너지가 소모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한을 만날 때마다 몇 겹씩 장착했던, 위장복이라고 불러야 할지 방패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막들을 하나씩 벗으려는 것뿐이었다.
왜냐하면 계획이 바뀌었으니까.
할 말만 하고 돌아선 도경은 지한이 쫓아오든 말든 아파트 비밀번호를 눌렀다. 안 쫓아오면 얼마나 기다렸다 다시 나가야 하나 잠깐 고민도 했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지한은 문이 닫히기 전에 잽싸게 도경을 따라 들어왔다.
“안 싫어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경의 옆까지 와 선 지한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 주지 마요.”
웃고 싶었지만 웃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웃는 것은 너무 속 보이는 짓이었다.
“그래.”
손톱으로 손바닥을 열심히 찌르던 도경은 엘리베이터에 비친 자신을 보고 멈추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는 항상 목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있을 경우 손은 허벅지 옆에 있어야 한다. 앉았을 경우에는 허벅지 위에 얌전히 올려둔다.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손을 주머니에 넣지 못하도록 교육한 황 원장은 그 외에도 많은 자세들을 아들에게 달달 외우게 했다. 그랬으면서 이제 와 손 닦는 것에 집착하는 도경을 안타까워했다.
엘리베이터가 그들을 꼭대기 층에 데려다줄 때까지 꾹 참다 보니 웃음기는 저절로 사그라졌다. 집 안으로 들어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식탁에 둔 스마트키와 일반 키를 지한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상황 파악 덜 된 지한이 멍하니 도경을 쳐다보았다. 도경은 지한의 손을 잡아 올리고, 그 위에 키를 쥐여주었다.
“이번엔 도둑맞으면 안 돼?”
흔해빠진 모양의 키를 진귀한 보물인 양 들여다보던 지한이 급히 대답했다.
“도둑 안 맞을게요.”
“장난인데.”
전혀 웃지 않고 장난이라 말하는 도경에게 지한이 어설픈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 이런. 농담은 시도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왜 한 번씩 영양가 없는 말을 해버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지한에게 차를 내주려다 제지당했다. 목이 마르면 말할 테니 그냥 편히 앉으라면서 잡아끄는 손길에 제법 힘이 담겨 있었다.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 자신은 용납이 어려웠으나, 도경은 결국 지한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도경이 앉고 나서야 지한도 맞은편에 앉았다. 이젠 앉는 폼이 익숙했다.
“걔가 내 얼굴에 상처 내서 미안하대요.”
눈은 도경이 쥐여준 키에 가 있을지언정, 지한은 만나서 말해준다는 약속부터 이행했다. 도경은 다리를 꼬았다. 의식하지 못한 채 지한의 옆자리로 옮겨가 버리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음……. 흉터 남으면 레이저 비용 자기가 대준다고.”
덤덤하게 말하려는 지한의 노력은, 적어도 듣기만 했을 땐 꽤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속을 숨기지 못했다. 도경은 이안을 잘 알았다. 도경에게나 설설 기지, 무영만 와도 태도가 달라지는 녀석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저의 불찰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부담하겠습니다, 와 레이저 비용 내가 다 대줄게, 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지한이 아무리 순화해도 소용없었다. 이안은 후자의 방식으로 사과했다.
“했는데, 내가 됐다 그랬어요.”
“나한테 왜 연락이 없나 했더니 너한테 사과를 엉터리로 해서 그랬던 거네.”
이안이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든, 고아를 무시하든 둘에 다 해당하는 사람을 무시하든 사실 도경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둘 다에 해당하는 지한을 무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도경이 직접 사과하고 오라고까지 했는데 그것 하나도 깔끔하게 수행하지 못하다니 참작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하라고 해?”
“아니, 절대.”
다소 크게 말한 지한은 본의가 아니었단 듯 목소리 크기를 확 줄였다.
“걔 보는 게 더 스트레스예요. 이제 안 보면 그만이야.”
“그래.”
“형 친구를 이렇게 얘기해서 기분 나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거는 내가.”
“전혀.”
감정은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말, 수도 없이 남들의 입을 통해 들어왔다. 겪어보기 전까진 몰랐다. 그게 정확히 어떤 현상인지.
“난 걔가 네 얼굴에 상처 낸 게 더 기분 나빠.”
이제는 안다고 말할 자신이 조금 생겼다. 다는 아니라도 끄트머리 정도는 알겠다고. 세월도, 신념도 조금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버리는 그 어떤 것.
지한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도경을 바라보았다. 새로 붙인 밴드는 여전히 작고 잘생긴 얼굴의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레이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도경은 손끝으로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치료비용이 들어간다 해도 도경이 냈으면 냈지, 이안의 돈이 지한에게 가는 일은 두고 볼 수 없었다.
싱크대에서 도경의 휴대폰이 드르륵거렸다. 두고 나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감정이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배웠으면 최소한의 정신머리라도 챙기고 다닐 의무가 있었다. 액정에 뜬 이름은 도경의 미간을 절로 좁아지게 했다.
“왜.”
―너 왜 핸드폰 확인을, 아니다. 지금이라도 받아서 다행이야. 밖이야?
“집이야. 왜.”
찬바람 부는 도경의 통화 매너에 원래도 큰 지한의 눈이 살짝 더 커졌다. 도경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엄마 이번 주에 학회라 한국에 없는 거 알지?
“몰라.”
―프랑스 갔어. 주말에 온대. 근데 지금 이모님도 손자 태어났다고 대전에 내려가 있어서 내가 리즈 맡았거든. 엄마가 아버지는 못 믿잖아.
리즈는 황 원장이 기르는 개의 애칭이었다.
“설마 지금.”
―서율이 엄마한테 전화가 왔는데 서율이가 바이올린 콩쿠르에 나 안 왔다고 뒤집어져서 응급실 가기 직전이래. 그 미친 여자가 당장 안 오면 다시 재판 가서라도 면접교섭권 박탈시킨다고 협박하는데 어떻게 해. 밤비행기라도 타고 가야지. 아 아무튼 이거 거짓말 아니니까 못 믿겠으면 네가 전화해서 물어봐. 진짜야.
“그러니까.”
―그래서 말인데 네가 오늘 밤만 리즈를 데리고 있어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
벌써부터 날아다니는 개털이 보이는 것 같았다. 도경은 현경의 말을 더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도경더러 개를 돌보라고? 개에게 신경을 곤두세울 때가 아니었다.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지한이 있는 집에 현경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 아 아. 소리 지르고 싶다. 도경은 신음하지 않으려 주먹을 쥐고 발끝을 오므렸다. 인정하기 싫지만 도경의 탓도 있었다. 늘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연락해오는 현경의 메시지를 제때 확인하지 않는 습관이, 게다가 휴대폰을 놓고 나가기까지 한 나태함이 이 사달을 이끌어냈다. 어째서 꼴도 보기 싫은 놈을 형제로 줘서 미치고 팔짝 뛰게 하는지 하늘에 대고 삿대질이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한은 아무것도 모르고 눈을 굴리는 중이었다. 숨길까? 숨기려면 방이야 많았다. 그런데 뭐라고 하고 방으로 집어넣어야 하나? 내 친형이 오고 있으니 빨리 숨어라?
“방금 그건 누구……?”
아니지. 삐거덕대던 도경의 머리가 늦게나마 정상 속도를 되찾았다. 처음부터 현경을 집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었다. 도경이 밖으로 나가 개만 받아오면.
초인종이 울렸다.
“여기 있어. 택배일 거야.”
지한이 도경을 따라 일어나려다 움찔하며 도로 앉았다. 일단 앉혀놨으니 다음 임무는 어떻게든 현경을 집 안에 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 도경아. 이것 좀 받아줘.”
개만 받아 들어오려던 계획은 현경이 문틈으로 가방을 내미는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 양손에 켄넬과 일반 가방을 든 현경은 옆구리에 기다란 상자까지 끼고 있었다. 상자부터 받아들었다. 뭉툭한 폰트로 쓰인 내용물의 정체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커스텀 울타리’.
“안에 들어와서 전화한 거야? 건물엔 어떻게 들어왔어?”
“엄마가 알려줬어.”
황 원장이 현경에게 도경의 아파트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도경에게 개를 맡긴다는 현경의 가당찮은 아이디어를 그녀도 묵인했다는 뜻이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밀려들었다.
“웬만하면 다른 데 맡기려고 했는데, 너도 엄마 성격 알잖아.”
알다마다. 황 원장은 괜히 도경의 친모가 아니었다. 애견미용사를 집으로 부를 때마다 가사도우미에게 미용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으로 남겨두게 지시하는 견주가 애견 호텔에 개를 맡기도록 허락할 리 없었다.
“알았으니까 두고 가.”
“너 얘 꺼내줘야 해. 털 날린다고 계속 가둬두면 안 돼. 패드도 여러 군데 깔아놓고.”
“알았다고.”
“나 손 좀 씻자. 개 간식 냄새가 손에 뱄어.”
현경이 신발을 벗으며 켄넬과 가방을 실내로 옮겼다. 안 된다고 하려니 부엌에서 듣고 있을 지한이 걸렸다. 도경의 집에 딱 한 번 와본 적 있는 현경은 알아서 손님용 화장실로 들어갔다. 얌전히 있는가 싶던 개가 슬슬 나오고 싶은지 철창을 긁기 시작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화장실 앞을 지키고 있다 현경이 나오는 즉시 낚아채서 쫓아내야 할지, 지금이라도 부엌으로 가 지한을 다른 방에 숨겨야 할지.
도경에게 무시당한 개가 앙칼지게 짖었다. 제 딴엔 성질을 내는 수단이었겠지만 도경의 귀엔 버릇없게 징징대는 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펜스도 설치해야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현경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가 펜스를 알아서 설치한다고?”
애완견 울타리를 조립하는 동생은 상상할 수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현경이 켄넬을 들고 부엌 쪽으로 가려다 그대로 일시정지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 들어도 택배 기사는 아닌 남자와의 대화에 개 짖는 소리까지 나자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복도로 나온 지한을 본 것이었다.
“누구야?”
현경과 도경은 나이 차가 커서 겹치는 친구가 없었다. 소현이 죽기 전 다른 남자를 끼고 다녔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아는 현경이지만, 그 남자의 이름까진 몰랐다. 얼굴은 더더욱 몰랐고.
“친구.”
“네 친구라고?”
도경은 펜스 상자를 고쳐 안았다. 알아서 눈치껏 사라지리란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망부석처럼 서있는 지한에게 다가간 현경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경이 형이에요.”
불행 중 다행으로, 도경과 같은 배에서 나온 현경은 무영이나 이안에 비해 예의라도 훨씬 바랐다. 내밀어진 현경의 손을 한 번, 바로 뒤에 서있는 도경을 한 번 쳐다본 지한은 쭈뼛쭈뼛 악수에 응했다. 악수도 했으니 다음 차례는 통성명이었다. 현경의 뇌리에 우지한이란 세 글자가 입력되기 전에 둘을 떼어놓아야 했다.
“애 기다린다며. 그거 내려놓고 빨리 가.”
“진짜로 네가 펜스 설치한다고? 말만 그렇게 하고 하루 종일 얘 여기 가둬놓는 거 아니야?”
“대체―.”
“내가 할게요.”
불쑥 끼어든 지한이 도경의 품에서 상자를 빼갔다. 도경의 능력을 두 번씩이나 불신한 현경은 오늘 처음 보는, 이름도 모르는 지한에게 넘어간 상자를 보고도 토를 달지 않았다.
주식 투자는 무서워할 줄 모르는 현경이 강해 보이는 동물이나 사람 앞에서 이상하리만치 얌전해지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강해 보인다는 표현은 사회적 위치가 아닌, 말 그대로의 물리적인 힘을 가리켰다. 사자라든가. 코끼리라든가. 권 회장이 좋아해 사내 행사에 부른 적 있는 스포츠 스타라든가. 지한 역시 현경에게 그 부류로 인식된 것이 틀림없었다.
“개 좀 봐줄래? 나는 형 데려다주고 올게.”
현경의 손에서 켄넬을 빼앗아 지한의 앞에 둔 도경은 형제를 신속하게 신발장으로 끌어냈다.
“빨리 가.”
“쟤 네 친구 맞아? 새로 데뷔시킬 애 아니야?”
도경의 친구들보다 예의 바른 현경도 한계는 있었다. 당사자가 몇 미터 거리에 있는 상황에서 진짜 친구냐는 질문이라니. 도경은 신발장 문을 닫고 바닥으로 내려왔다.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지금은 빨리 나가라고.”
“친구 아니지? 어쩐지.”
“형.”
이를 악문 발음에 현경이 부랴부랴 구두를 신었다. 현관을 열고 나가는 등짝을 노려보던 도경은 빠르게 닫히는 문을 밀며 밖으로 나갔다. 1초라도 현경과 더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가 지한을 두고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를 듣지 않고는 곱게 보내기 싫었을 뿐.
“무슨 뜻으로 한 말이야.”
“뭐를 무슨 뜻으로 해.”
“방금. 어쩐지, 그랬잖아.”
“일반인치곤 너무 외모가 튀어서 그랬지.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뭐 그렇게 인상을 써. 근데 얼굴에 붙인 건 뭐래. 다쳤대?”
“……엄마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와서도 계속 집 안에서처럼 작게 말하는 도경을 의아하게 쳐다본 현경이 덩달아 작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가 뭔데?”
“내 친구 봤단 소리 하지 말라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도경은 현경이 더 말을 걸 수 없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버렸다. 어려서부터 받아온 친가의 기대와 사랑을 불륜 이혼과 주식 투자 실패로 갚은 장손이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엘리베이터 문 뒤로 사라졌다. 골을 조일 듯 말 듯 얼쩡거리던 두통의 낌새도 현경과 함께 가셨다.
개 짖는 소리가 집 안으로 돌아온 도경을 반겼다. 소리만 났다. 텅 빈 복도를 지나 거실에 도착한 도경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손을 안으로 말아 쥐었다.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켄넬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과 엎드린 것의 중간쯤 되는 자세로 앉은 지한이 철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해?”
“얘가 이거 자꾸 긁어서 쳐다봤더니 조용해졌어요. 방금 문 열릴 때만 잠깐 짖고.”
줄곧 개에게 가 있던 지한의 시선이 도경에게로 옮겨 왔다. 안 그래도 범상치 않던 자세가 완전히 이상해졌다. 꼭 개 흉내라도 내는 것 같은 자세를 지한 본인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는 도경만 곤혹스러웠다.
“꺼내줘도 돼요?”
“잠깐만.”
현경이 가져온 가방 안엔 개가 사용할 그릇, 간식, 사료를 옮겨 담은 비닐봉지와 얇은 패드만 잔뜩 있었다. 패드를 까는 판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패드라도 두 장 창가 앞에 깔았다.
“얘 주인이 누구예요? 아까 그 사람?”
켄넬을 벗어난 개가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거실을 탐방했다. 어느새 이상야릇한 자세를 버리고 제대로 앉은 지한은 좀처럼 개에게서 관심을 끊지 않았다. 도경에겐 시끄러운 털 뭉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짐승이 지한에겐 무척 귀여워 보이는 듯했다.
“우리 엄마 개야. 엄마 없으면 개 봐줄 사람이 없어서 형한테 맡기고 갔대.”
“이름이 뭐예요?”
“리즈.”
정신없이 킁킁대며 돌아다니다 지한의 무릎에 부딪힌 개가 앞발로 허벅지를 긁었다. 지한은 조심조심 개를 안아들었다. 개를 많이 안아보지 않은 티는 났어도 떨어트릴 것 같진 않았다.
“리즈면 그 축구팀 리즈?”
“아니. 별명 같은 거야.”
“원래 이름은 뭔데요?”
오지 않길 바랐던 순간이 왔다. 도경은 최대한 빠르게 말했다.
“엘리자베스.”
도경에게 대꾸하기 위해 입술을 뗐을 지한은, 얼마 안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말도 안 되는 작명을 비웃지 않으려 애쓰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긴 개 이름 처음 들어요.”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
가능한 한 대수롭지 않게 말했더니 지한도 더는 그 주제를 꺼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지한의 무릎에서 잘 있나 싶던 개가 그새를 못 참고 도경에게 쪼르르 옮겨 왔다. 간식 냄새를 들킨 이상 모른 척은 불가능했다. 간식이 담긴 백을 여는 도경의 시야에는 꼬리를 흔드는 개 이외에도 그 뒤에서 개와 간식을 주시하는 지한이 들어왔다. 지한의 눈이 왠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도경과 같은 키의 성인 남성에게 가당키나 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줄래?”
기다렸다는 듯 백을 받아간 지한은 말린 고구마처럼 생긴 간식을 두 개 꺼내어 그중 하나를 도경의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형도 하나 줘요. 얘가 형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개 간식 특유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와 후각을 건드렸다. 빈말로도 향기롭다고 할 수 없는 간식을 검지와 엄지로 들고서, 도경은 지한과 개를 지켜보았다. 지한은 그 쉬운 앉기 훈련도 없이 바로 간식을 개의 입에 물려주었다. 경쟁자 없이 자라 느긋한 개는 간식을 물고 편한 장소를 찾아 거실을 배회했다.
“진짜 작아.”
감탄한 지한이 동의를 구하듯 도경을 보며 웃었다.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꼬치를 먹으라며 사줬을 땐 그 꼬치로 지한을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었는데 오늘은 전혀 아니었다. 체액이 묻은 시트 위에서 자고 일어나는 경험도 한 몸이었다. 그에 비하면 냄새가 강한 개 간식을 잡는 정도는 아주 쉬웠다.
“그럼 개 이름은 엘리자베스고, 개 데려온 사람은 이름이 뭐예요?”
“현경.”
바로 그래서 복잡해지는 것이었다. 땀에 젖은 타인을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도 멀쩡할 수 있었다면 여태까지 뭣 때문에 그렇게 미친 듯이 갈고닦고 치워대며 살아왔단 말이지.
“형보다 몇 살 더 많아요?”
“여덟 살.”
“다른 형제도 있어요?”
“아니.”
“형이 집에서 막내?”
“굳이 따지면.”
다른 생각에 잠겨 기계처럼 대답만 뱉느라 지한이 어떤 눈빛으로 도경을 보고 있는지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지한은 개의 풀 네임을 들은 직후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웃음을 참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어울려.”
“뭐가?”
“가끔 형 되게 애 같을 때 있는데 그거 왜 그런 건지 이제 알겠어요.”
확실히 지한이 그리 말한 적 있긴 했다. 도경이 애 같다는 말. 언제 했더라.
“어디가 애 같아.”
“왜 그때, 닭꼬치 들고 있었을 때.”
킥 하는 소리를 내며 웃은 지한이 도경의 눈치를 봤다. 도경은 들고 있던 간식을 지한의 손에 넘겼다.
“이것도 네가 줘.”
지한의 표정이 풀렸다. 지한에겐 애 같은 도경을 본 날로 기억에 남았을 그날 사실 도경은 닭꼬치로 지한을 때리고 싶었단 진실은 굳이 공유하지 않았다.
대화가 끊겼다. 배변하라고 펼쳐둔 패드 위에서 간식을 다 먹은 개가 다음 간식을 받으러 오느라 내는 발소리 덕분에 그나마 적막감은 돌지 않았다.
영혼을 바쳐서 가증을 떨던 때가 대화를 끊김 없이 잇기엔 훨씬 적합했다.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해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때였다면 도경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지한의 가족관계에 대해 물었을 것이다. 보통 상대가 이쪽의 가족관계에 대해 묻고 나면 궁금하지 않아도 똑같이 관심 표시는 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이었다.
“형은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아니나 다를까. 말은 유려하게 못 해도 소통하기 위한 기본 조건은 알고 있는지, 지한이 힌트를 주었다. 너도 나에 대해 캐내고 싶어 하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난감했다. 이미 도경은 지한에게 가족이 시우뿐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가족 관계를 묻자니 지한이 대답하기 곤란할까 봐 걱정이었고, 궁금한 게 없다고 했다간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 뻔했다.
“강아지 좋아해?”
묘책이 없을 땐 당장 주변에 있는 것을 활용해야 하는 법이었다. 패드로 돌아가 지한에게서 강탈한 간식을 뜯던 개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자길 이용하지 말라고 따지는 것처럼.
“키워본 적은 없는데…… 쟤 보니까 귀여워요.”
“귀여우면 오늘 네가 데리고 잘래?”
도경의 농담이 최초로 통했다. 지한이 아니요, 하고 피식거렸다. 말론 아니라고 하지만 틈만 나면 개에게 눈길을 빼앗기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도경이 마음먹고 꼬드기면 진짜 개를 데리고 잔다고 할지도.
“그거 말고 또 궁금한 거는 없어요?”
그럴 리가. 궁금한 것이야 많았다. 시우와 지한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오래 첫 키스를 했는지도 궁금했고, 지한이 시우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했던 적은 없는지도 궁금했다. 지금은 정말 피 섞인 가족 같은 관계일 뿐인지, 한 번이라도 키스해본 적 있는 상대와 혈연처럼 지내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인지도.
“네가 나한테 말해주고 싶은 건?”
바닥과 오래 닿아있던 무릎이 아파왔다. 도경도 지한처럼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둘 사이의 거리는 두 뼘. 어쩌면 한 뼘 반.
“내가 말해주고 싶은 거요?”
“네가 말해주고 싶은 걸 말해. 뭐든지.”
지한이 도경에게 알려주고 싶은 정보를 고르는 동안, 도경은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청결했던 거실을 둘러보았다. 펜스가 담긴 박스, 열어놓은 가방, 그 주변에 꺼내놓기만 하고 정리하진 않은 개 용품, 하이라이트로 패드 위의 개까지. 너저분하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풍경이었음에도 도경은 손으로 어딘가를 두드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았다.
“나 소현이 누나랑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
방심하고 있었다. 도경은 주먹을 쥐었다.
“그런 사이?”
지한이 사료 통과 가방 사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형이랑 한 것들…… 하나도 안 했다고요, 누나랑은.”
어떤 깨달음이 찾아왔다. 지한에게 궁금한 것들을 속으로 나열했던 조금 전, 도경은 한 번도 소현을 떠올리지 않았다. 어떻게 깜박할 수가 있었을까. 그 이름을.
“난 네가 걔랑 그랬다고 생각한 적.”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서 나 싫어하는 거잖아요.”
의문스러운 대목이었다. 지한은 추측이 아니라 단정하고 있었다. 다들 자신을 싫어한다고.
“다들?”
“누나 친구들 다.”
글쎄. 소현의 친구들이 지한을 좋아할 이유야 없었다만, 지한과 도경을 두고 한쪽을 택하라면 지한을 택할 수가 적지 않았다. 특히 소현과 가까웠던 친구들일수록 지한을 택하는 비율이 높아질 것이다. 지한은 전반적으로 무례한 그들의 태도가 자신을 향한 감정 때문이라고 느낀 것 같았다. 아니었다.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들인 것에 불과했다.
“걔네 신경 쓸 필요 없어.”
“나도 신경 안 쓰고 싶어요. 근데 누나 친구들이 형 친구들이기도 하니까. 좀.”
“그날 김무영이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어?”
남의 회사 앞에서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찍고 사라진 무영은 아직까지 도경에게 연락이 없었다. 이대로 쭉 없어도 그리 손해는 아니지 않을까. 도경은 남몰래 생각했다.
“걔네는 너보다 내가 더 짜증날걸.”
“그래서 병원 다니는 거예요? 그 새끼들이 괴롭혀서?”
지한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누가 들으면 도경이 허구한 날 친구들에게 맞고 다니는 놈인 줄로 오해할 말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형은 똑똑한데 친구들 얘기 할 때만 나보다 뭐를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는 너는 나한테 큰 소리칠 때만 말을 안 더듬더라. 도경은 언젠가 지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아껴두었다. 지금은 그냥 듣기로 했다.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으므로. 그리고 지한이 큰 소리치는 경우는 주로 도경의 역성을 들 때였으므로.
“괴롭히는 거 맞아요. 김무영이 그날 형한테 한 말이랑 한 짓 다 괴롭히는 게 아니면 뭔데?”
당하는 쪽은 약자였다. 힘없고, 힘 있는 편도 없어서 결국 의지마저 잃게 되는 패배자. 도경은 절대 자신이 약하다고도, 졌다고도 여겨본 적 없었다. 미친놈 취급은 견뎌도 바보 취급은 참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알았어.”
그러나 도경을 안타까워하다 못해 화까지 대신 내는 지한을 보고 있자면 바보 취급당하는 것에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얘는 정말 나를 대신해 맞다가 몇 군데가 부러져도 보람차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게 했다. 도경을 알면 얼마나 잘 안다고.
“진짜 알아요? 내가 뭔 말 하는지?”
좋으면 얼마나 좋다고.
“알아.”
실컷 열을 내놓고 뒤늦게 민망해졌는지 지한이 입술을 씹어댔다. 쌍꺼풀이 참 깊게도 패였다. 동양인에게서 어찌 저런 눈과 코가 나왔나, 성형외과 의사들에게 설명해 보라고 하고 싶어지는 이목구비로 이루어진 얼굴이 도경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첫눈에 거칠고 위험해만 보였던 지한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인상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경계를 푼 눈에선 방어하는 빛 대신 갈구하는 빛이 뿜어져 나왔고 평균치보다 진하고 큰 동공은 언젠가부터 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를 내다 버린 남녀가 다 자란 그를 보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할 터였다. 앞으로는 잘하겠다며 데려가려고 들지도 몰랐다.
그랬다간 도경이 돈 주고 전문가들을 고용해서라도 떨어트려 놓을 것이다. 바뀐 계획에 지한을 빼앗기는 경우의 수는 없었다. 설령 친부모에게라도.
“지한아. 너 저 펜스…….”
당했다. 지한의 얼굴이 갑자기 가까워진다고 느꼈을 땐 이미 선수를 빼앗긴 뒤였다. 눈썹부터 입매까지 순해 보인다고 착각하게 만들어놓고 그런 짓을 할 줄이야. 도경은 순순히 지한에게 입 안을 맡겼다. 대신해서 화내고 욕해줬는데 한 번쯤 앞서나가게 두지 못할 것도 없었다.
늘 도경의 페이스를 따라오지 못해 헐떡거리기 일쑤였던 지한은 조심스럽다 못해 부드럽고, 간지러운 수준을 넘어서 다리마저 꼬아야 할 것처럼 키스했다.
여전히 능숙하단 느낌은 없었다. 그래서 더 온몸을 가만두지 못하겠단 기분이었다. 도경의 앞에서만 그토록 얌전하게 군다고 생각하니 손끝이 저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관자놀이가 띵했다.
낯설지만은 않은 감각이었다. 도경이 뭐라도 집어 던지거나 망가뜨리기 전까지는 결코 입을 다물지 않는 소현과 단둘이 남은 공간에서 수없이 느꼈던 감각과도 약간은 닮은 부분이 분명 존재했다. 소현의 메모가 적힌 악보를 한 페이지도 남기지 않고 다 찢어 그녀의 면전에 뿌렸을 때나, 그녀가 던진 로퍼에 입가가 찢어지던 순간 위에서부터 아래로 쫙 퍼지던 차갑고 시린 쾌감.
다만 이것은 차갑지도, 시리지도 않았다.
개가 자기들끼리만 몸을 비벼대는 인간들에게 왕왕거렸다. 감겨있던 지한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입술이 떨어졌다. 젖은 입술이 벌어지며 얕은 숨을 뱉어냈다. 도경은 지한의 어깨를 잡아 밀쳤다. 지한이 등을 바닥에 부딪쳤다.
인간들의 격해진 움직임에 혼자만 비상태세에 들어간 개가 지한의 머리맡에서 정신 사납게 돌아다녔다. 지한의 위에 올라탄 도경은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워 오로지 한 곳만 바라보는 얼굴을 감상했다. 벌써 촉촉해진 눈가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입술을 물고 옷을 벗긴 다음 숨도 못 쉬게 몰아붙이고 싶었다. 저보다 더 큰 남자도 잡아 누를 수 있는 지한이 도경을 받아내느라 힘들어 우는 것을, 그러면서도 그만하지는 말아달라고 간청할 때 짓는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다. 두 번, 세 번 열 번 백 번을 봐도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아랫배가 조여들며 박동이 빨라졌다. 목이 탔다. 피부가 따가웠다. 차갑지 않고 뜨거운, 시리지 않고 후끈한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의 대척점에 있는.
어떤 것.
#62
바 입구에서 새로 들어온 손님을 맞이하는 소리가 났다. 셰이커를 감싼 손바닥이 긴장으로 축축해졌다. 연인의 얼굴을 감상하느라 바텐더가 셰이커를 내려놓든 말든 눈치채지 못하는 손님 뒤로 중년 남성이 지나갔다. 팀장의 단골이었다. 안심한 시우는 다시 셰이커를 들었다.
오늘 출근하자마자 홀 담당 직원들에게 한 번, 다른 바텐더들에게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팀장에게까지 반복적으로 전달받은 사항이 있었다. 전날 식음료 총괄 부장이 직접 바에 행차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대표의 조카가 오거든 절대 술을 주지 말라’는 내용을 신신당부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부장도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를 전달한 것에 불과하겠지만, 헛웃음이 나는 내용임은 틀림없었다. 일개 호텔 직원이 무영의 오더를 거부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다행히 바에서 일하는 직원 중 하나의 말에 의하면 당분간 무영이 바에 올 일은 없었다. 브레이크 때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건물 근처에서 무영을 봤는데, 얼굴에 웬 보호대를 차고 있더라고 했다. 성형외과에서 대공사를 한 환자들에게 착용시키는 보호대와 똑같이 생겼더란 설명이 잇따랐다.
어쩌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도련님이 성형외과를 방문했냐며 웃는 직원들 사이에서 시우만 제대로 웃지 못했다. 왠지 무영의 얼굴 상태와 지한이 관련되어 있을 것만 같다는 꺼림칙한 예감 때문이었다.
증거는 없었다. 지한이 도경과 클럽을 빠져나갔을 당시 무영은 안에 남아있었다. 무영이 다쳐서 보호대를 찼다는 보장도 없었다. 어느 날 뜬금없이 치솟은 콧대를 더 높이고 싶어졌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여기저기 흩어진 고리들은 많았다.
도경과 지한이 사라진 지 얼마 안 되어 함께 클럽 안에서 없어졌던 이안, 이안이 지한의 얼굴에 낸 상처, 도경의 집에서 자고 온 지한 그리고 보호대를 차서 술도 마시면 안 되는 무영. 그 단편적인 고리들을 하나로 연결해줄 결정적인 핵심이 빠져 있었다.
핵심. 왜. 이안은 왜 지한을 다치게 했고, 지한은 왜 도경의 집에서 잤으며, 무영은 왜 코를 다쳤는가.
그날 도경은 왜 지한을 데리고 나갔는가.
지한이 그날 일에 대해 미안하게 여기는 것은 시우도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시우와 아는 사이란 것을 들키기 싫었는지, 아니면 그들이 도경과도 친구들이라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는지는 지한 본인만 알 사정이었다.
지한은 늘 그런 식이었다. 모르는 척해놓고 끝까지 뻔뻔하게 굴 낯짝은 또 없었다. 도경과 함께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혼자 되돌아왔던 그날처럼. 이기적으로 굴려면 철저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됐다. 천성이 못되질 않아 나오는 현상이었다. 그러면서 깔끔하게 미안하단 소리는 잘 못 했다.
고맙다고 해야 할 상황에서는 입을 다물고, 사과해야 할 상황에서는 외면하기 일쑤인 지한을 무뚝뚝하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 오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지한은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육성으로 표현하는 것이 낯간지러운 짓이며 본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행동이라고 여겼다.
남들은 몰라도 시우는 아는 진실이었다. 안타까운 적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굳이 지한을 대신해 남들의 오해를 풀고 다녀야겠다는 사명감은 가져본 적 없었다. 진짜 지한은 시우만 알고 있어도 충분했다. 다른 사람들은 알 필요 없었다.
라스트 오더로 나간 칵테일이 빈 잔이 되어 돌아오고, 마지막 손님들이 다음 주에 또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무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일도 안 와야 되는데. 바텐더 하나가 중얼거렸다가 팀장에게 눈총을 받았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지한이 오토바이를 잃어버렸으니 당분간 데리러 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봤다. 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 편의점 앞]. 시우는 먼저 주차장에 나가 있을 팀장에게 전화했다. 오늘은 알아서 갈 수 있다는 말에 팀장이 걱정부터 했다. 너 벌써 걔한테 새 오토바이 사줬어?
아니라고 하고 끊었지만 찝찝하기는 시우가 더했다. 제 돈으로 새 오토바이를 사겠다고 했을 때부터 불안했었다. 괜찮은 물건을 살 돈이 있을 린 없고, 어디서 고물을 주워 온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편의점 앞에 서있는 지한의 뒤로 오토바이 한 대가 보였다. 밤이라 멀리서는 어떻게 생겨먹은 오토바이인지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오늘은 빨리 나왔네.”
“응. 손님들이 다 일찍 나갔어.”
지한이 작은 병을 건넸다. 시우는 병을 받아들며 의외로 멀쩡해 보이는 오토바이를 빠르게 훑었다. 새것임을 숨길 수 없는 상태의 오토바이 옆면에 붙은 작은 로고가 어둠 속에서도 돋보이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눈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혹시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봤다. 몇 번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오토바이보다 차로 훨씬 더 익숙한 독일 브랜드의 로고는 사라지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이건 어디서 났어?”
목적어 없는 질문에 지한이 혀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도경이 형이 줬어.”
지한의 이목구비 중 유일하게 튀지 않는 부위가 입술이었다. 입이 작거나 입술이 얇은 것은 아니었어도, 색 자체가 별로 진하지 않았다.
“형?”
오늘 지한의 입술은 유독 혈색이 좋았다.
“아. 어. 그 사람 우리보다 형이야. 다섯 살 많아.”
평소보다 더 도톰해 보이기도 했다.
시우는 지한이 건네준 병 표면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ORGANIC. 100% APPLE JUICE.
“그 사람이 너한테 오토바이를 왜 줘?”
“자기 때문에 잃어버렸다고.”
“그 사람 때문에 잃어버린 거였어?”
“아닌데 자긴 그렇게 생각한대.”
지한이 시우의 머리통에 헬멧을 눌러 씌우며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그만 떠들란 말을 행동으로 옮긴 것 같았다. 아니, 같은 게 아니라 그런 것이었다. 시우는 주스를 가방 안에 넣었다. 주행을 앞둔 운전자의 신경을 건드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궁금한 점은 집에 가서 해소해도 늦지 않았다.
***
어두운 밖에서 봤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독일산 오토바이는 더러운 지하 주차장 구석을 차지한 낡고 지친 오토바이들 옆에 서게 되자 노비 옆에 선 왕자처럼 혼자서만 빛났다.
“저기 세워놓으니까 쟤만 엄청 비싼 티 난다.”
“그래서 나랑 안 어울린다고?”
시우는 계단 중간에서 지한을 돌아보았다. 농담이었으면 했다. 지한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래서 너랑 더 잘 어울려.”
물론 시우였다면 지한에게 줄 오토바이로 조금은 더 무식하고 무섭게 생긴 놈을 골랐을 것이다. 지한 같은 사람은 최대한 강하고 거칠어 보여야 했다. 그래야만 알고 보면 약해빠진 속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야 남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도경은 아직 지한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 까먹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계기판 위에서 느리게 변하는 숫자를 주시하던 지한이 시우의 헬멧을 가져가 대신 들며 말했다.
“너 김무영한테 우리 같이 산다고 말해준 적 있어?”
그 이야기는 또 어쩌다 그렇게 와전되어 지한의 귀에 들어갔을까. 어쩌면 얼마 전 단지 안까지 들어와 지한을 기다리던 이안이 범인일지도 몰랐다.
“어쩌다 보니까.”
지한이 여태 출처를 실토하지 않은 휴대폰 값을 치렀을 도경이 범인일 수도 있었고.
“어떻게 하면 그 새끼한테 어쩌다가 우리 얘기를 해.”
“별거 아니야.”
“뭐래.”
1층입니다. 상냥한 기계음이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렸다. 시우는 대꾸 없이 열리는 문 사이를 지났다. 뒤따라 타는 지한의 발소리에서 성화가 느껴졌다.
“빨리 말해. 걔한테 우리 얘기 왜 했냐고.”
“네가 잃어버린 목도리 있지? 내가 생일 선물로 줬던 거.”
층수 버튼도 안 누르고 보채던 지한이 잠잠해졌다. 시우는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혔다.
“내가 그 목도리 얘길 했거든. 너한테 줬다는 말은 당연히 안 했지, 그땐 그 사람이 널 아는지도 몰랐는데. 근데 나보고 그 목도리 사서 누구 줬냐고 하잖아. 그래서 그냥 친구한테 줬다 그랬더니 갑자기 나보고 남자 좋아하냐고 그러는 거야.”
“너한테 뭐라 그랬다고?”
“아무 일도 없었어. 팀장님이 나 도와주려고 끼어드셨다가 네 이름을 말해버리는 바람에 그 사람도 알게 되긴 했지만, 그게 다야.”
쾌적하지 못한 공기로 가득 찬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우를 내려다보는 지한의 만면에 떠오르는 표정은 더욱 쾌적하지 못했다.
“너는 걔한테 그 목도리 얘길 왜 해. 그 새끼 완전 돌아버린 거 딱 보면 몰라?”
“처음부터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진짜 별거 아니었다니까. 그 사람도 똑같은 목도리 하고 온 적 있어. 잘못 대답하면 잔 집어던질 것 같아서 그냥 핑계 겸.”
“걔가 너한테 뭐 집어던진 적 있어?”
“아니. 그럴 것 같아서, 라고 했지 던졌다고는 안 했어.”
17층입니다. 분명 1층에서 들었던 것과 똑같은 목소리가 어째서인지 약 올리듯 얄밉게 들렸다. 기분 탓이겠지. 내리며 생각한 시우는 도어록 번호를 누르며 확신했다. 기분 탓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난 그 사람이 완전히 돌아버렸는지 잘 모르겠던데.”
들으라고 한 말이긴 해도, 그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유도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시우는 불을 켜자마자 뒤로 자빠질 뻔했다. 지한이 뒤에서 어깨를 잡아챘기 때문이다.
“방금 뭐라고?”
“흥분하지 말고.”
“야. 너 진짜 내가 지금 하는 말 잘 들어야 돼.”
지한은 넘어질 뻔한 시우의 사정보다 무영이 얼마나 돌아버렸는지를 알리는 일이 더 중요해 보였다. 섭섭하진 않았다. 고작 그깟 걸로 섭섭하려면 진작 지한을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김무영 그 새끼랑은 엮이지 마. 이거는 내가 원 애들 만나기 싫어하는 거랑 완전 다른 차원 문제야. 김무영 걔는 진짜 그냥 돌았다니까? 걔가 얼마나 미친놈이냐면.”
섭섭하진 않았어도 의심이 단단해지기는 했다. 무영이 진짜 돌아버렸는지를 지한은 어찌 그리 잘 알아서 시우에게 경고까지 하는 것일까.
“계속 말해. 나 듣고 있어. 김무영이 얼마나 미친놈인데?”
시우가 끼어들거나 그만하라고 말리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말을 하다 만 지한이 갑자기 이상한 꼬투리를 잡았다.
“너 지금 걔 편들어?”
“편이라니.”
시우는 지한에게 다가섰다. 지한의 발 옆에 시우를 돌려세우며 놓친 헬멧이 떨어져 있었다. 다른 손엔 여전히 헬멧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그것부터 치우지 않으면 대화가 끝날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을 예정이었다.
“나 그런 손님들 하루도 안 거르고 보는 거 알잖아. 걔보다 더 심한 진상도 많단 소리였어. 그 정도 가지고 미친놈이면 그날 클럽에 있던 사람들도 다 미쳤게?”
“미쳤지 그럼. 거기 있던 년놈들 다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아니.”
다른 사람들 앞에선 말을 똑바로 맺지 못하는 것이 일상인 지한이지만 시우의 앞에서도 똑같이 버벅거리는 것은 흔한 현상이 아니었다. 무영이 얼마나 미쳤는지를 설파하려다 만 것에 이어 벌써 두 번째였다.
“아, 아무튼 그 새끼들 싹 다 돈만 없었으면 밤길에 칼 맞고 죽었을 놈들이라고. 너 다시는 걔네한테 돈 받고 뭐 하지 마. 김무영이든 에스던가 그 여자든. 누구든.”
“권도경도?”
“뭐?”
시우는 눈을 감았다 떴다. 깜박. 또 한 번. 깜박. 어떤 손님은 시우가 그렇게 눈을 깜박이며 쳐다볼 때마다 어린 조카가 떠오른다고 했고 어떤 손님은 만화 캐릭터가 떠오른다고 했다.
“권도경도 돈만 없었으면 밤길에 칼 맞고 죽었을 놈이야?”
키가 180cm에 못 미치는 예쁜 소년이던 시절의 지한은 시우에게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화를 못 내겠다면서.
“이시우. 왜 나한테 시비야.”
시우야 제발 그렇게 쳐다보면서 열 받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너 때문에 화병 걸려서 다른 애들한테 풀었으면 좋겠어? 원장이 들을까 무서운 말을 지한은 고래고래 큰 목소리로 잘만 질러댔다. 누구에게도 그 말을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 누구도 못 듣게 하려 170cm이 겨우 넘던 시우는 지한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미안해 화내지 마 내가 너 화 안 나게 할게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알았지 지한아? 그러면 지한은 또 넘어왔다.
십 번을 속이면 수십 번을, 수백 번을 속이면 수백 번을 속았다. 아무리 속여도 시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김무영 그 사람 얘기도 지한이 네가 먼저 꺼냈고, 클럽에 있던 사람들 다 칼 맞고 죽을 놈들이라고 한 것도 너인데.”
맞아 그랬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화난 건 다른 놈들 돈을 뺏든지 뺨을 때리든지 배를 걷어차든지 상관없으니까 다른 데서 풀고 와. 내 앞에선 그냥 예쁜 얼굴만 하고 있어.
“내가 시비를 거는 거야?”
어디 가지 말고 얌전히.
지한이 헬멧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손에 힘이 거의 안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재빠르게만 움직이면 뺏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냥 뺏어버릴까. 시우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두 시가 넘었다. 뺏으려다 실패하면 단순히 헬멧이 어디론가 던져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소음이 날 것이다. 새벽에 아랫집으로부터 항의전화가 걸려오길 바라진 않았다.
지한의 가슴이 들썩였다.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웬만하면 이쯤에서 시우가 물러났을 테지만 오늘은 안 되겠다. 탓하려면 아직까지 팔딱이는 혈색을 잃지 않고 있는 지한의 입술을 탓해야 했다.
“시우 넌 내가 만약에.”
불규칙적인 호흡을 가다듬은 지한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시우는 기다렸다.
“만약에 뭐?”
튕겨 나와서라도 시우를 맞출 위험은 없는 곳으로 지한이 헬멧을 집어던지기를.
여전히 숨소리는 안정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지한은 헬멧을 소파에 던지지도, 발로 문을 걷어차고 걷어차지도 않았다.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몇 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어려 보였던 현상은 그날만의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살이 찐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지한이 얼굴에 뭘 맞고 왔을 리도 없는데 희한하게 인상이 달라졌다. 피부에서 묘하게 윤기가 나고 눈가에는 은근히 붉은 기가 돌았다.
“하려던 말 있지 않아? 해봐.”
“아니.”
지한이 딱 잘라 말했다.
“없어.”
아니라는데 집요하게 굴 생각은 없었다. 질척거려 봤자 어쩐 일로 빠르게 가라앉은 지한의 성질만 도로 타오르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클럽에 있던 새끼들 다 뒈져도 싼 놈들인 거 맞는데, 권도경은 아니야.”
방으로 들어갈 줄 알았던 지한이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발음은 비교적 정확했다.
“너도 전에 도경이 형 좋은 사람 같다고 했었잖아.”
오류가 있는 기억이었다. 시우는 도경에게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했지, 좋은 사람 같다고 말한 적은 결코 없었다.
“나한테 짜증 났으면 나한테 짜증 내고 끝내. 가만히 있는 사람은 들먹거리지 마.”
말을 마치고도 지한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시우에게서 확답을 듣기 전까진 몇 분이고 그 자리에 그렇게 서있을 작정인 듯했다. 밝기 조절이 안 돼 늘 눈이 아픈 거실 등이 엘리베이터에서도 꼭꼭 숨어있던 흔적을 망막에 전달했다. 지한의 목과 쇄골 사이. 손마디 하나보다 조금 더 긴 자국은 불그스름한 색을 띠고 있었다.
“나 너한테 짜증 안 났어. 하나도.”
겨울은 끝났지만 아직 모기가 나오는 계절은 아니었다. 조심성 없는 지한이 상처를 달고 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못 되었다. 하지만 목도 아니고 쇄골도 아닌 그곳은 다른 부위에 비해 외부 마찰이 적어 안전한 부위였다. 상처가 아니었다.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보이기 쉬운 곳에 생겼을까.
“진짜로.”
보라고 일부러 남긴 것처럼.
습관은 자각하지 못해서 없애기도 힘든 것이었다. 평생 속아온 지한이 오늘만 속지 않는 반전은 없었다. 오늘도 속아 넘어간 그는 겨우 안심하고 돌아섰다.
#63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리 몸엔 그 빨갛고 진득한 액체보다 훨씬 더 굳센 강이 흐르지. 우리가 나눈 피는 색도 냄새도 없어 날쌔다. 보이지 않으면 잡아낼 수가 없는 법. 그래서 더 독하다.
잡아낼 수가 없으면 사라지게 할 수도 없거든.
그 누가 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