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 Knock Down(4권) (30/38)

  30. Knock Down

#74

황 원장이 없는 저택은 평소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음식도, 음식을 만든 가사도우미도, 주인의 두 아들에게 자꾸 올려달라고 보채는 개도 똑같았다. 권 회장만 달랐다. 아내가 있을 때도 툭하면 식탁 머리에서 일어나거나 고성을 지르는 그는 아내가 사라지면 고삐 풀린 짐승이 되었다. 그렇게 황 원장에게 영향을 받는 남자가 어떻게 뒤로 구린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지는 영원한 불가사의였다.

“요새 병원 제대로 다니는 거 맞아, 너?”

“네.”

“약도 먹으란 대로 먹고?”

안 그래도 없는 밥맛이 바닥을 쳤다. 도경은 숟가락으로 밥을 푹 찔렀다. 보기 좋게 담겨있던 쌀밥에 틈이 생겼다. 차도를 기대하고 약을 먹는 시기는 예전에 지났다. 그간 들인 액수와 그에 비해 초라한 결과를 생각해보면 이미 근본적인 치료는 물 건너간 지 오래임을 알고도 남아야 하건만 권 회장이 제일 몰랐다.

“네.”

“근데 왜 어릴 때도 안 하던 싸움질을 하고 다녀?”

현경이 도경에게 빠르게 눈짓했다. 그들은 우애 좋은 형제가 아니었지만 권 회장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눈짓으로도 웬만한 사인은 주고받을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 있었다. 현경은 도경이 권 회장에게 말대꾸하지 말기를, 그냥 얌전히 네네 거려 저녁이 평화롭게 마무리되길 바라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형제의 마음이 맞았다. 도경은 간절히 혼자 있고 싶었다.

“M유통 막내 새끼랑 이 사장네 꼴통이 싸웠다는 얘기에 네 이름이 왜 껴있어.”

M유통 막내 새끼와 이 사장네 꼴통은 각각 무영과 성호를 일컫는 권 회장만의 호칭이었다. 권 회장이 물 마시는 틈을 타 도경은 현경을 흘깃했다. 현경이 머리통을 황급히 저었다. 자신은 출판기념회에서 벌어진 난장판을 권 회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항변의 표시였다.

“그날 무영이랑 저랑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어요.”

“너는 걔네 싸운 거랑 일체 관련 없다?”

“없어요.”

권 회장의 젓가락이 불에 구워진 생선 껍질을 찢었다. 살이 발라지며 앙상한 가시가 드러났다. 하얗게 익은 눈알이 도경을 노려보았다. 착각이었다.

“회사 건물 앞에서 러시아 놈한테 맞았다는 건 무슨 소리고.”

권 회장이 남들에게 붙이는 호칭은 그때그때 달라졌다. 어쩔 땐 한 자리에서도 여러 번 바뀌었다. 권 회장이 무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호칭은 주로 막내 새끼였지만 러시아 놈일 때도 있었고, 코쟁이일 때도 있었다. 그밖에도 현대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호칭까지 합치면 족히 열 가지는 되었다.

“그 얘긴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이사 소리 듣고 다니다 보니까 그 회사가 네 건 줄 아나 보지? 그거 다 내가 너한테 준 거야.”

툭하면 구멍가게 같다고 무시하는 그 기획사마저 권 회장 본인의 것이며 따라서 그 회사의 직원들도 다 제 사람들이란 소리였다. 말투는 불쾌할지언정 내용 자체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안 맞았어요.”

“그럼 네가 때렸어?”

“네.”

권 회장의 얼굴에 짙게 드리워져 있던 인상이 오늘 본 것 중 가장 옅어졌다. 주둥이뿐 아니라 주먹 솜씨로도 유명한 권 회장은 자식이 누굴 때렸다는 소식에 불쾌지수가 낮아지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젊어서는 뉴스에 난 적도 있다고 했다. 기업 비리 때문이 아니라 회의 중 임원에게 주먹을 날린 건으로.

“다음부턴 어디 안 보이는 데 가서 싸워. 다 큰 놈들이.”

그래도 서른 넘은 자식의 폭력을 대놓고 부추기면 안 된다 생각하는 정신머리는 남아 있는지, 권 회장은 애써 인상을 굳혔다.

“네.”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너 송 피디한테 신인 하나 끼워 팔았다면서.”

권 회장이 도경을 상대로 벌이는 취조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출판기념회에서 도경이 성호를 불러 세웠던 이유. 도경이 회사 앞에서 무영의 뺨을 날려야만 했던 까닭. 도경이 드라마 피디와 작가에게 주연을 주는 대가로 내건 조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다 지한이 원인인 건이었다.

도경은 권 회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생선 눈알에 집중했다. 누가 파낸 것처럼 패인 노르스름한 원. 동공이 증발해 까뒤집힌 것처럼 생긴 눈. 물리쳤던 착각이 끈질기게 되살아났다. 노려본다. 노려보고 있다.

“왜 말이 없어. 송 피디한테 신인 넣어달라고 부탁했어, 안 했어?”

“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들은 소문들이 다 없는 말은 아니었다 이거지.”

이혼 이후 집안에서도 큰소리를 못 내게 된 현경이 죽은 듯 밥만 먹다 갑자기 도경을 쳐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 머릿속에 뭐가 떠올랐는지 훤히 보였다. 도경의 집에서 마주쳤던 지한을 기억해낸 것이었다.

“최근에 희한한 얘길 하나 들었는데 말이야. 현경이 너도 들었겠지.”

“도경이 얘기요? 전 잘…….”

“네 동생이 지 약혼자를 못 잊어서 그 여자가 달고 다니던 나부랭이를 데뷔시키려고 한다는 아주 웃기지도 않은 소문이 비서실까지 올라왔는데, 너는 여태 그걸 못 들었다고?”

도경은 식탁 아래로 현경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현경이 왜 밥을 잘 먹다 말고 혼자서 움찔대는지 모르는 권 회장은 장손을 한심한 눈길로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도 안 된다고 했지. 내 둘째아들이 사내답지 못한 면은 있어도 그렇게까지 미련한 놈은 아니라고.”

동생의 발길질로 오히려 그 소문에 근거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 같은 현경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다. 그래선 입을 못 열게 한 보람이 없었다.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기나 할 것을 그랬다. 현경이 도경의 아파트에서 지한을 봤다고 발설할 가능성에 아찔해져 그만 성급한 짓을 저질렀다.

“내가 나중에 아랫것들한테 창피해질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언젠간 귀에 들어갈 줄 알았지만 그 시기가 지한을 카메라 앞에 세워보기도 전일 줄은 몰랐다. 황 원장이 없는 날을 골라 도경을 본가로 부른 속셈이 명백해졌다. 중간에 뛰쳐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꿍꿍이였다.

도경은 물을 마셨다. 이럴 때엔 권 회장이 흠잡을 데 많은 인간이라 다행이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쳐 요점을 흐릴 수 있었으니까.

“제가 송 피디한테 뭘 부탁했는지는 어떻게 아셨어요?”

이번엔 현경이 도경의 종아리를 발끝으로 꾹 밀었다. 도경은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넌 내가 아까 한 말을 뭐로 들었냐? 너희가 하는 일, 만나는 사람들 다 내 손바닥 안이야.”

“배우 하나 새로 찍으셨어요?”

“뭐야?”

찰싹. 현경이 손으로 도경의 허벅지를 때렸다. 소리가 그리 클 줄은 몰랐는지 때려놓고 자기가 더 놀라 손을 움츠렸다.

“송 피디 이번 작품 여주가 작년까지만 해도 엑스트라 급이었는데 올해 들어 광고가 확 늘었다고 하더라고요.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고.”

“권도경, 그만해. 아버지도 오늘은 그만하시고 다음에 다시 얘기하시죠.”

“지금까지 밀어주신 여자 중에 최연소네요. 걔 아직 스물다섯밖에 안 먹은 거 엄마도 알아요?”

권 회장이 앞에 놓인 잔을 드는 순간 도경은 알았다. 그것은 물이 담긴 잔을 그대로 집어 던지려는 동작이었다. 황 원장이 권 회장과 어울리는 색깔로 만들어달라고 특별히 주문한, 그래서 더 아끼기도 하는 도자기 잔이 상을 가득 채운 반찬들 위에 물을 흩뿌리며 허공을 가르고 날아왔다.

도경은 목을 움츠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묵직한 잔이 뻑, 하는 소리를 내며 손등을 때리고 튕겨 나가 벽을 때렸다. 놀란 개가 식탁 아래로 숨었다.

“아버지! 내일 출근하는 애 얼굴에 뭐 던지시면.”

“너도 맞고 싶어?”

거창하게 윽박은 질렀으나 권 회장이 정작 현경에게 던진 것은 젓가락이었다. 맞아봤자 아프지도 않은 막대기 두 짝. 더 있다간 권 회장에게 밥그릇을 던지고 싶어질 것 같았다.

“어디서 내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먼저 일어나? 앉아!”

의자에서 엉덩이를 다 떼지도 않았는데 일갈이 날아들었다. 권 회장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은 도경에게 그간 황 원장 때문에 못 한 말을 다 할 기세로 퍼부었다.

“어렸을 때 정신교육을 똑바로 시켰어야 하는데 네 엄마 등쌀에 그냥 내버려 둔 게 내 죄다. 저것도 사내새끼라고 낳아놓은 내가 죄인이야. 어? 무덤에 갈 때까지 두고두고 후회한다, 내가!”

뭘 후회한다는 것인지 똑바로 말하라고 함께 윽박지르고 싶었다. 도경을 본인 성에 안 차는 남자로 키워서인지, 그가 환자라서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그를 싸질러놔서인지.

“뭘 잘했다고 쳐다봐. 앉으라고. 앉으라는 말 안 들려?”

앉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권 회장의 말을 무시하고 일어섰다간 31년 만에 처음으로 물건이 아닌 손에 직접 맞게 될 수도 있었다. 그것도 현경이 보는 앞에서. 황 원장은 없는 집에서.

도경은 다시 앉았다. 손이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도경의 손을 본 현경이 권 회장의 자리로 가 팔을 붙들었다.

“아버지, 쟤 잘 타일러서 데리고 갈 테니까 일단 먼저 거실에 가셔서 제가 새로 가져온 술맛 좀 보세요. 이모님이 잔이랑 다 준비해서 가져다 놓으셨을 거예요. 화내시는 거 심장에도 안 좋으니까. 네?”

도경이 눈을 깔자 그제야 권 회장도 못 이기는 척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들으란 듯 한 걸음 한 걸음에 힘을 주어 멀어지는 발소리가 시끄러웠다.

“너 잠깐 이리 와 봐.”

현경이 도경을 일으켜 세웠다. 순순히 따라나섰다. 당장 도망칠 수 없다면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야 골치가 덜 아팠다.

“야 도경아. 내가 지금 과대 망상하는 거면 말해줘.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도경의 팔을 잡고 거실을 피해 집 안을 방황하던 현경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장소는 안방이었다. 방에 들어온 것만으론 안심이 안 되는지 안방의 욕실까지 들어가 문을 잠그기에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할까 하다 그냥 놔두었다.

“그때 너희 집에서 봤던 걔, 네가 친구라고 했던… 걔가 설마 아까 아버지가 말한 애야? 신인?”

도경은 욕실 벽에 등을 기댔다.

“맞아.”

“맞아? 아니, 그럼 잠깐, 걔가 그 소문, 아니, 그러니까 그 소문은? 그 소문도 진짜야? 네가 친구라고 했고, 곧 데뷔시킬 애가 소현이 남자랑 동일인물이라는 게?”

“걔 소현이 남자 아니야.”

“그럼 그냥 아니라고 하지 왜 쓸데없이 아버지 혈압을 올려?”

소현의 남자였던 적이 없다고 했지 소문이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남의 말을 저 좋을 대로 해석한 현경이 한숨 돌리는 눈치기에, 도경은 더 늑장 부리지 않고 정정했다.

“그 애 맞으니까.”

“뭐가 맞아. 소현이 남자 아니라며 방금.”

“소현이는 데리고만 다닌 거야. 그걸 걔 남자라고 하긴 좀 그렇지.”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한 현경은 그래도 안 되겠는지 기어이 문을 열고 안방에 아무도 없다는 것까지 눈으로 본 뒤 다시 문을 닫았다. 그럴 땐 도경과 한배에서 태어난 티가 났다.

“미친놈아. 너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너 진짜 사람을 막, 어떻게 할 생각은 아니지? 아무리 화가 나도.”

“어떻게 하면 뭐. 형이 어쩔 건데.”

또 남의 말을 멋대로 알아들은 현경이 기겁했다.

“도경아, 내가 네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게 아니야. 얼마나 화가 나겠어. 알지. 그래도 요즘 세상에 네가 직접 남을 어떻게 하는 거는 정말 큰일 날 소리야. 도저히 안 되겠으면 차라리 돈 주고 그런 거 하는 애들한테 시켜. 아니다. 그것도 위험해. 요즘에 믿을 놈이…….”

아마도 현경의 머릿속에선 한 편의 스릴러가 펼쳐지고 있는 듯했다. 그따위 사고력으로 유명 대학을 졸업한 것이 기적이었다. 현경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느니 혼자 주절거리게 놔두고 그 시간에 권 회장이 한 말이나 곱씹어보는 편이 이득이었다.

“아니, 근데 진짜 너 무슨 생각이야. 걔를 왜 데뷔시켜? 그럼 얼굴도 알려지잖아. 혹시 걔 과거 영상 같은 거 가지고 있어?”

권 회장이 소문을 다 믿지는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근래 들려오는 소문 속 도경의 근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 확인차 찔러본 것 같았다.

만약 권 회장이 소문을 100프로 진실이라고 생각했다면 도경을 잡기 이전에 지한부터 먼저 잡았어야 한다. 외국으로 보내버리든, 공갈 협박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든 지한을 처리한 다음에 도경을 죽이든 살리든 했을 것이다. 황 원장이 없는 날을 골라서.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다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일단은.

“영상 같은 거 없어. 기껏 데뷔시켜 놓고 나서 끌어내리는 헛수고를 누가 해. 연예인 하나 띄우기가 쉬운 줄 알아?”

“그럼 뭐야.”

현경이 얼빠져 중얼거렸다. 도경이 대꾸하지 않자 현경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뭐냐고. 네가 하려는 게, 그럼.”

“내가 소현이 대신 키워주려고.”

“진심이야?”

“난 내 일 가지고 농담 안 해.”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뱉지는 않던 숨을 한꺼번에 뱉어낸 현경이 넓은 욕실을 왔다 갔다 했다. 누가 저더러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사태에 대해 책임지라고 한 적도 없건만. 현경은 한 번도 도경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적 없었다. 고군분투하는 도경의 옆에서 자폭이나 했지.

“이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형 의견 안 궁금해.”

“언제까지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이기적으로 살래? 병원 다닌다고 봐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보다 그거 진짜 병도 아니잖아. 네가 성질만 조금 죽이면 지나갈 수 있는 일들을 왜 매번 크게 만들어.”

성질이 날 때마다 마음의 소리와 대화하고 사느라 이 모양 이 꼴이 났는데 성질을 죽이란다. 현경은 도움만 안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지한 형제였다. 권 회장의 말을 귓등으로 못 넘겼으니 현경의 말이라도 귓등으로 넘기고자, 도경은 잘 들어올 일 없는 욕실을 둘러보았다.

“걜 데뷔시킨다고 쳐. 네 아파트엔 왜 불러들여 걔를. 둘이 뭐 고 있었던 건데? 진짜 친구라도 할 생각이야?”

황 원장의 손길이 곳곳에 밴 욕실에선 좋은 향이 났다. 도경의 아파트에 있는 욕실과 인테리어도 흡사했다. 단 황 원장은 도경만큼 병적이지 않아서, 쓰다 만 용품을 제자리에 두고 나가지 않는 게으름 정도는 부렸다.

“친구하면 안 돼?”

“뭐라고?”

듣는 척만 한다는 것이 그만 습관적으로 대꾸해 버렸다. 도경은 한쪽 귀를 막았다. 대화 장소로 욕실을 택한 원래 의도는 싹 잊어먹고 언성을 높이는 현경이 앞에 없다고 생각하기 위해선 다른 데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황 원장이 선반에 두고 나간 제품들. 오일. 에센스. 크림. 젤. 대용량 튜브 표면에 깨알같이 작게 쓰인 문구가 눈을 사로잡았다. ‘자연에 가까운 성분으로 만들어 어느 부위에든 안심하고 바를 수 있는.’

“너 요새 안 하던 짓을 자꾸 한다고 엄마가 걱정하던데, 뭐야. 엄마한테 말 못 하겠으면 나한테라도 해봐. 혹시 처방받은 약에다 뭐 섞어 먹어?”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을 앞에 두고 떠올려선 안 될 편린들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 지한과 본격적인 신체적 접촉을 할 때마다 자제력을 지나치게 잃었다는 자각은 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지한이 도경을 이상하다고 여길까 봐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잘못되었단 생각은, 안 해봤다.

흥분한 상태의 도경에게 평소보다 훨씬 미약한 이성만이 남게 되는 것은 사실이나 과연 지한이 여자였어도 그렇게까지 했을까 자문하면 아니란 답이 나왔다. 그렇다고 지한이 남자라 막 대하고 싶었다는 것은 또 아니었다.

살면서 수많은 남자들의 모가지를 꺾어버리고 싶다고 느꼈으나 그중 누구도 섹스하면서 기절시키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기절시키고 싶다는 것도 수사였지 실제로 지한의 의식을 끊어놓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고…… 진짜 기절할까 봐 중간에 그만두려 했을 때는 지한이 제 입으로 그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지한도 싫었으면 그만하라고 했을 것이다.

실은 확신할 수 없었다. 지한은 웬만해선 도경에게 싫다거나 그만하란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다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너 내 말 듣고 있어?”

하여 도경은 각기 다른 점도와 향을 가졌을 수용성 화장품들을 보며 성찰했다. 자신이 여태 지한의 몸속에 정말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흘려보냈음을. 스스로의 손엔 먼지 하나 묻는 것도 싫어하면서 남의 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개차반이 되었다.

물론 도경에게도 할 말이 있긴 했다. 로션이든 샤워 젤이든 주변에 있는 액체를 지한의 속살에 닿게 한 것은 도경의 맨손이고 맨살이었으니까. 현경이 알면 까무러칠 일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믿지 않을지도 몰랐다. 지한이 도경에게 최면을 걸었다고 우길지도.

“다 떠들었으면 가서 회장님이랑 술이나 마셔.”

도경은 현경의 옆으로 가 욕실 문고리를 잡아 내렸다. 잠금이 풀렸다. 막아서려던 현경은 동생이 눈빛으로 보내는, 손대면 발작해 버리겠다는 경고를 알아듣고 손을 거두었다.

“아버지한테 인사 안 하고 그냥 간다고? 어디 가는데.”

“난 볼 일이 있어서.”

“야!”

고성만 질렀을 뿐, 현경은 도경을 붙잡지 못했다. 안방을 탈출한 도경은 현관까지 내달리듯 걸었다. 권 회장이 앉아있을 거실 소파는 벽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소리까지 안 들리진 않을 터였다. 힘차게 현관을 열어젖히고 나온 도경은 문을 닫을 때도 최선을 다해 세게 닫았다.

담벼락 아래 세워놓은 차 안으로 돌아와 앉고 나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가 조금씩 실감 났다. 권 회장에게 사죄는커녕 인사도 안 하고 나와 버렸다.

미쳐 날뛰는 집구석에서 뛰쳐나온 경험이야 몇 번 있었지만 황 원장 없이 혼자 저지르기는 최초였다. 발전이라고 봐야 할지, 퇴보라고 봐야 할지 헷갈렸다. 요즘 들어 부쩍 인내심이 닳았다. 자꾸 덜 생각하고 싶어 했다. 불쑥불쑥 충동적인 말을 육성으로 뱉게 됐다.

결코 발전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도경은 자동차 디스플레이의 수화기 아이콘을 눌렀다. 최근 통화 목록에 원하는 이름이 떠있었다.

단조로운 신호음이 차 안을 울렸다. 그는 벨트를 맸다. 갈 길이 멀었다.

***

세월의 흔적을 숨기지 못하는 쓰레기통들 옆에 쓰러져있는 종량제 봉투들이 하나같이 터질 듯 빵빵했다. 어떤 봉투엔 옷가지가, 어떤 봉투엔 아이스크림 봉지가 삐져나와 있었다. 열 시가 다 된 평일의 아파트 단지를 활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대는 도경이 사는 동네나, 지한이 사는 동네나 비슷했다.

쓰레기통들과 떨어진 곳에 차를 멈추었다. 반년도 넘게 알고 있었던 주소지만 직접 와보긴 처음이었다. 물론 도경이 이미 주소를 알고 있다는 것을 지한은 몰랐기에 오기 전 전화해 물어보는 단계부터 거쳤다.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지한은 영문도 모르면서 착실하게 살고 있는 아파트 동수까지 읊었다. 한 시간 안에 도착한다는 말에 지한은 비로소 잠이 달아난 목소리를 냈다. 우리 집에 온다고요?

도경이 제 동네에 오는 일은 이생에 없을 줄 알았다는 듯 기함하는 것 같아 가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절대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대뜸 찾아가겠단 도경의 통보를 지한이 어찌 받아들였든 잠 하나는 확실하게 깨웠다.

벨트를 풀고 등을 좌석에 기댄 도경은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 실기 곡으로 쳤던 독일 작곡가의 조곡이 재생되고 있었다. 도경의 소파 위에서 지한이 비몽사몽 중에 한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문이 닳도록 연습했던 곡들은 아직도 건반 위에 올려만 놓으면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였다.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라니까 엉뚱하게 도경의 피아노와 옷장을 읊고 다시 잠에 빠졌던 지한이 진심이었다면 못 들어줄 것은 없었다. 다만 피아노와 옷장을 연결하는 고리는 아직까지도 못 찾았다. 듣고 싶다던 피아노를 쳐준 다음 그 둘을 왜 같이 말한 것인지 물어봐야겠다.

지한을 태우기 전 덜 치운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 차 안을 둘러보던 도경은 조수석에 올려둔 물건을 포착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넣어놓는다면서 깜박했다. 젤이 담긴 튜브를 집어 든 도경은 그것을 어디다 넣어야 할지 망설였다. 글러브 박스에 넣으면 나갈 때 그걸 다시 꺼내야 했다. 그 과정을 지한이 보게 될 것이란 소리였다. 기온이 올라가 옷차림이 가벼워져 욱여넣을 주머니도 없었다.

앞으론 지한에게 아무 거나 사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즉각 실행에 옮길 계획은 없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는 길목에 늦게까지 영업 중인 약국을 봤다. 차 안에 구비해 둔 진통제가 다 떨어졌다는 것을 상기했고, 생각난 김에 사려고 차를 세웠다. 늘 복용하던 약 이름을 말하고 기다리는 동안 앞에 진열된 영양제와 각종 화장품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약국 명당을 차지한 화장품들은 주름이나 탄력이란 문구가 쓰인 기능성 제품들이었으나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눈은 이미 한 글자에 꽂힌 뒤였다. ‘젤.’ 앞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몇 초 안 되는 순간이나마 도경의 뇌는 그 한 글자에 지배당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것 있으시냐는 약사에게 대뜸 그 글자를 말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젤? 무슨 젤.」

어디 쓸 건질 말해야지, 하던 나이 지긋한 약사의 표정을 지우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릴 듯했다.

안 되겠다. 젤은 일단 커피 홀더에 대충 꽂아두고 차 밖으로 나왔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지 않아 그런지 밤바람은 덥지 않았다. 지한에게는 목에서부터 광대까지 후끈거리게 하는 열을 좀 식히고 난 다음에 내려오라고 연락해야겠다. 지금 내려오라고 했다간 빨개졌을 얼굴을 꼼짝없이 보여야 할 텐데, 그러면 할 말을 참지 않는 지한은 바로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물을 터였다.

도경이 서있는 곳과 가장 가까운 라인의 유리문이 열렸다. 건물에서 나오는 남자가 지한인 줄 알고 당황했던 도경은 곧 가까워지는 인물의 키가 지한보다 확연히 작다는 것을 인지했다. 지한과 똑같은 셔츠를 입은 남자의 정체는 시우였다.

“지한이 곧 내려올 거예요. 지금 씻고 있어서.”

집 앞에서 도경을 발견하고도 전혀 놀라지 않은 시우는 바에서처럼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묻지 않은 정보까지 친절히 알려주었다. 그의 한 손엔 종이 쓰레기를 담은 큰 박스가, 다른 손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일하실 시간인 줄 알았는데.”

“이번 주는 오프가 오늘이라서요.”

도경의 차 앞으로 다가온 시우가 박스를 길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쇼핑백을 들어 내밀었다. 공손하지 그지없는 자세와 태도였음에도 도경은 쇼핑백을 바로 받아들지 않았다. 뭔지 말도 안 하고 내밀기부터 하는 걸 넙죽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게 뭐.”

“지한이 옷이에요.”

지한의 옷 자체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시우로부터 받는 것일 때에 한해 문제였다. 내용물을 모를 때보다 알고 나서가 더 받기 싫었다. 도경의 속에서 오가는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우는 잘도 생글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서 제가 산 건 속옷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저랑은 상관없는 옷들이에요.”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자 한 말이라면 완전히 잘못 짚었다. 지가 산 건 속옷밖에 없다고? 목구멍에서 울컥하고 뭔가가 올려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그걸 저한테 알려주시는 이유가?”

“제가 산 건 줄 알고 버리실까 봐요.”

도경은 귀를 의심했다. 꿋꿋하게 쇼핑백을 도경 쪽으로 내밀고 있는 시우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적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깨끗하고 호의적인.

“방금 그게 무슨.”

“지한이 잘 부탁드려요.”

깨끗하지만 맑지는 않을지도. 도경은 순한 척하면서 말을 확 자르고 들어오는 시우를 보며 생각했다.

“물론 알아서 잘해 주시겠지만 걔가 예전 같지 않거든요. 운동 그만 둔 지 오래돼서 이제 옛날처럼 체력이 안 나와요. 그리고 이것도 아시겠지만 숨이 좀 빨리 차잖아요, 지한이가. 그 부분만 신경 써주시면 괜찮을 거예요.”

청력을 의심하게 되는 두 번째 순간이 찾아왔다.

“네?”

“아. 괜찮아요. 지한이가 다 말해줬어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단 말인지. 듣는 입장에선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뭘 다 말해줬다는.”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 가서 말할 데도 없어요.”

“아니. 저.”

“아무튼 이거는 그냥, 지한이가 또 서두르다가 놓고 갈 거 뻔해서 제가 쓰레기 버리러 나오는 김에 가지고 나온 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졸지에 도경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 시우가 다시 한번 쇼핑백을 들이밀었다. 분리수거함이 있는 방향을 흘끔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경은 시우가 말하지 않은 진짜 의도를 알아들었다. 시우는 도경이 그만 뜸 들이고 지한의 옷을 받아야 저도 쓰레기를 버리러 가지 않겠냐며 눈치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도경이 마지못해 쇼핑백을 받아들자 잽싸게 종이 쓰레기 박스를 주워든 시우가 걸음을 옮기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내일은 집에 보내주시는 거죠?”

질문을 했으면 대답은 듣고 가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시우는 제 할 말만 하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버렸다. 액셀을 밟으며 내달려오는 내내 서서히 가라앉힌 마음에 불씨가 던져졌다.

어디 하나 도경과 겹치는 구석 없는 얼굴을 짓이겨버리는 망상이 피어올랐다. 목이고 손이고 다 됐으니 지칠 줄 모르는 입부터 잡아 비틀어 다신 말을 못 하게 만들면 속이 좀 시원해질 듯했다.

“지한이가 가고 싶을 때 가겠죠.”

빈 박스를 들고 돌아오는 시우에게, 도경은 기어이 말을 걸었다. 한 마디라도 갚아주지 않고는 밤을 꼬박 새우겠다는 예감이 들어 그랬다. 시우는 갸웃거리다 이내 웃었다. 도경이 한 재미없는 농담을 어떻게 받아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다음에는 바에서 뵐게요.”

시우가 아까 마주쳤을 때보다 한층 더 정중히, 꼭 바에서 손님을 보내는 바텐더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도경은 인사를 마친 시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에서야 턱만 까딱였다. 도저히 교양을 지키고픈 기분이 들지 않았다.

쥐어뜯고 싶은 뒤통수가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혹시 몰라 기다렸다. 차 두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한 가족이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시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도경은 쇼핑백을 아스팔트 바닥에 내던졌다. 그랬다 인기척이 나 얼른 다시 주웠다. 소리를 낸 것은 고양이였다. 도경과 눈이 마주친 고양이는 쏜살같이 수풀 속으로 숨었다.

쇼핑백을 들고 운전석으로 돌아온 도경은 홀더에 꽂힌 튜브를 바라보았다. 몇 분 전과 똑같은 색깔, 똑같은 이름에 똑같은 내용물이 담긴 통이었지만 열기의 종류는 완전히 바뀌었다. 현재 도경의 체온을 올리고 있는 것은 지한이 아닌, 시우로 인한 열기였다.

어쨌든 사용하기 전까지 지한에게 보이지 않으려면 잘 감춰둬야 했다. 옷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쇼핑백이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손 한 뼘보다 조금 더 큰 튜브를 쇼핑백 안에 넣자 알아서 옷 옆으로 쑥 들어갔다. 살다 살다 별짓을 다 했다.

형! 하는 외침에 앞을 봤다. 도경의 차를 발견하자마자 형부터 외치고 본 지한이 조수석으로 뛰어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도착했다고 전화를 왜 안 했어요. 시우가 말 안 해줬으면 계속 집에 있을 뻔했잖아요.”

타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자연스레 조수석에 올라탄 지한에게서 과일 향이 물씬 풍겼다.

“씻었어?”

“형 온다 그래서…….”

도경이 온다고 해서 꼭 씻어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씻은 다음에 행해질 행위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말하면서 그 순서를 깨달았는지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어렵사리 가라앉혀 놔도 순식간에 불타오르곤 하는 속이 허무하게 재로 변했다. 탄내는 진동할지언정 불길은 사라졌다.

“그건 뭐예요?”

지한이 부르는 소리에 쇼핑백의 존재는 일시적으로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도경은 들키기 전에 쇼핑백을 뒷좌석으로 치웠다.

“시우 씨가 준 거. 네 옷이라던데.”

“아.”

“벨트.”

지한이 군소리 없이 벨트를 맸다. 도경은 기어를 바꿨다. 한시라도 빨리 시우와 지한이 함께 사는 동네를 벗어나고 싶었다.

차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지한은 도경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왜인지 도경도 알았다. 시우에게서 지한의 옷을 받은 도경이 어떤 기분일지 몰라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어디서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눈치나 보게 하려고 오밤중에 한 시간 거리를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냉정히 따지자면 서울을 출발할 때부터 이미 도경의 상태는 양호하지 않았다. 도자기 잔에 맞은 손등이 간헐적인 통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지한을 중심으로 일어난 욕망과 본가에서 얻어온 분노가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시우와 마주친 것이 도경을 악화시켰다.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차가 대교 위에 올랐다. 악보에 맞게 규칙적으로 흐르는 선율과 차가 도로를 달리며 내는 소음으로 간신히 유지되던 평화를 깨고, 지한이 말을 걸었다.

“형 근데…….”

“응.”

“화나는 일 있었어요?”

도경은 핸들을 고쳐 쥐었다. 주행 중엔 옆을 보지 않아야 했으므로.

“아니.”

“그럼…….”

미세한 짜증이 일었다. 말을 할 거면 한 번에 똑바로 하든가. 곧 도경은 엉뚱한 대상에게 화풀이하려는 의식을 다잡았다. 분명 도경은 지한을 보고 싶어서, 지한과 닿고 싶어서 먼 거리를 오가는 중이었다. 그를 만나서 이루려던 목적에 화풀이는 없었다.

“시우 때문에 기분 나빴어요?”

혼란한 도경의 속을 모르는 지한이 잿더미에 새로운 기름을 끼얹었다. 시우가 싫은 건지, 시우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어딘가 모르게 어려지는 지한의 목소리가 싫은 건지. 자신의 감정임에도 한 번에 확신이 가지 않았다.

솔직한 게 좋다는 지한이라지만 과연 시우를 향한 도경의 감상까지 숨김없이 알고 싶을까. 지한의 앞에서 시우를 나쁘게 이야기하는 짓은 솔직함이 아니라 아둔함이었다.

“아니.”

“걔가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형한테?”

“글쎄.”

고개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꾸 옆으로 돌아가려 했다. 도경은 지한을 탓했다. 운전 중인 도경에게 계속해서 시우를 언급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 없는 지한의 탓이었다.

“왜. 나한테 할 얘기 있대?”

“아니요. 걔가 형한테 할 얘기가 뭐 있어요.”

“그럼 네가 나한테 할 얘기 있어?”

“네?”

갈림길이 그들을 맞이했다. 왼쪽은 또 다른 대교로, 오른쪽은 일반 도로로 가는 길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머리론 분명 왼쪽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핸들은 오른쪽으로 틀었다. 이런 지랄. 권 회장과 마주 보고 식사할 걱정으로 한시도 푹 자지 못하고 깬 새벽에 이미 오늘 하루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감했다만, 이토록 줄줄이 재수 없기만 한 하루를 보내게 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시우 씨가 나한테 무슨 얘길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너.”

“그런 건 아닌데.”

지름길을 놓쳐 돌아가게 생겼지만 별일 아니었다. 이까짓 걸로 발작하지 말자. 도경은 공기를 배 속 깊은 곳까지 끌어들인다는 기분으로 깊게 호흡했다.

“그래?”

어느덧 눈에 익는 길로 들어왔다. 도로 양옆으로 낯익은 고층 아파트 단지와 비즈니스호텔, 5성급 호텔 등 오며 가며 숱하게 봐온 숙박업소들이 늘어서 있었다.

“근데, 시우가 진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도경은 핸들을 확 꺾었다. 상체가 옆으로 쏠린 지한의 머리통이 도경의 어깨에 부딪혔다. 놀랐을 법하건만 조수석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뺨에 쏟아지는 시선을 모르는 척한 도경은 속도를 줄였다.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냐고 물을 예정이었을 지한은 질문을 완성하지 않았다. 이미 차가 호텔 정문 앞에 선 뒤였다.

“좀만 쉬다 가자.”

“아. 여기서?”

“괜찮지?”

30분 넘게 정면만 보고 온 도경이 조수석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지한은 싫은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차에서 내려 발레 카드를 받은 도경은 호텔 직원이 운전석 문을 닫기 직전 뒷좌석의 쇼핑백을 기억해냈다. 쇼핑백을 꺼내고 차 문을 닫는 도경에게 다가온 지한이 손을 내밀었다.

“그거 이리 줘요, 내가.”

“됐어.”

지한이 무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이게 아닌가. 도경은 지한을 지나쳐 호텔 안으로 들어서며 남몰래 안쪽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아니긴 하지. 그는 아까부터 지한에게 줄곧 안 하는 것이 좋을 짓만 골라 하고 있었다. 더는 누굴 탓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피곤했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로비에 사람이 없었다. 도경이 카드를 맡기고 키를 받는 동안 지한은 멀찍이 떨어져서 눈만 굴리고 서있었다. 그래도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진 않았는지 도경이 카운터에서 돌아서는 즉시 따라왔다.

엘리베이터에도 사람은 없었다. 카드를 찍고 층수를 눌렀다. 17층. 넓고 조용한 방으로 달라는 요구 사항에 데스크 직원이 스위트를 줬다. 거실과 침실이 나누어져 있는 흔한 스위트였다.

와본 적 있었다. 4년 전쯤. 기념일은 아니었다. 밖에서 만나기로 했던 소현이 갑자기 피곤하다고 해서 급하게 잡았던 룸. 하필 남은 방이 제일 좁은 스위트 하나뿐이라 소현의 심사가 꼬일 대로 꼬였었다. 다른 호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이미 방 안에 들어온 소현을 다시 나가게 하느니 그냥 싫은 소릴 견디는 편이 수월했다.

도경의 SOS를 받은 이안이 먼저 왔고, 나중에는 무영과 에스더도 합세해 소현의 기분이 좋아졌었다. 그리고 혼잡해진 방 안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출근하느라 도경은 죽을 맛이었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추억으로 승격되지 못할 기억.

“형.”

그러고 보니 오토바이를 부담스러워했던 지한이 스위트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좀만 쉬다 가자고 해놓고 왜 이런 방을 잡았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던 도경은 몇 초 후 그 염려가 얼마나 순진해빠진 것인지 깨달았다.

지한이 소현과 어디서 만났겠는가. 소현은 호텔을 카페처럼 애용하는 여자였다. 그녀와 만나며 지한이 도경보다 더 다양한 호텔에 가봤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미친놈아.

현경의 비난이 한층 강해진 환청으로 돌아왔다. 도경은 아주 오랜만에 현경에게 동의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미친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인가.

“형?”

지한이 도경의 손을 잡고 있었다.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목적이었던 듯 도경이 쳐다보자 손은 바로 떨어졌다.

“우리 여기서 내리는 거 아니에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있었다. 도경은 발걸음을 옮겼다. 카펫이 온화하게 두 쌍의 발을 맞이했다. 복도는 도경이 원하던 대로 고요했다.

카드키를 꼽자마자 천장에 달린 등들이 빛남과 동시에 블라인드가 진동음을 내며 올라갔다. 가려져있던 창밖이 드러났다. 낮이었으면 방 안에 빛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냈겠으나 밤이라 방 안의 밝기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와.”

빌딩들이 뿜어내는 빛으로 이루어진 야경은 의외의 대상에게 영향을 끼쳤다. 차 안에서부터 바로 조금 전까지 도경에게 함부로 말을 못 걸고 있던 지한이 창가로 다가가 밖을 보더니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웃으며 돌아보았다.

“영화에 이런 거 많이 나오던데.”

“이런 거?”

“왜, 꼭 주인공이 소파에 앉아서 혼자 술 마시거나 통화하고. 그 옆에 이렇게 창문.”

소파에 앉을까 말까 고민하던 도경은 그냥 쇼핑백만 내려두고 지한을 들뜨게 한 야경으로 눈길을 돌렸다. 지한이 말하는 영화 속 장면이 뭔지는 잘 알겠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닳도록 봐서 풍경 자체엔 조금도 감흥이 일지 않았다. 게다가 어째서 지한이 뷰 좋은 룸에 처음 와보는 사람처럼 구는지도 이해가 안 갔다. 처음 봐보지 않았다는 것은 도경도, 지한도 아는 사실인데.

“아. 근데 형이 좋아하는 영화에는 잘 안 나오겠다, 그런 장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또 뭐야.”

“어― 그때 우리 같이 봤던 그런…… 그런 걸 뭐라고 하지.”

조용하고, 대사 없고, 음악은 많이 나오는 영화요. 지한의 말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잔잔해졌다. 가라앉은 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단 빌딩 숲에 사로잡혀 제 목소리 크기엔 전혀 관심 없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말수가 늘어난 지한이 웃기고 신기한 만큼, 젤까지 숨겨 들고 온 도경 본인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도경을 등지고 선 지한의 얼굴이 밖을 조금 더 자세히 보려 유리창 가까이로 붙었다. 나올 데와 들어갈 데를 확실히 구분하는 옆얼굴이 잠들지 않은 도시의 전경 한가운데 들어왔다.

비로소 도경은 지한을 조금 이해했다. 특정 풍경이나 대상에 사로잡히는 기분이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도경은 한 발짝 창가로 다가섰다. 여전히 스위트 창문으로 보는 밤의 풍경은 도경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도경의 눈엔 개성 뚜렷하던 옥상들이 지한에겐 다 똑같아 보였던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하니 이해도는 높아졌다.

“어. 저 백화점에 그 사람 사진 걸려 있다. 형네 회사에서 본…….”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고개를 튼 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도경이 가까이 와있는 줄 몰랐는지 지한이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빗질이나 하고 나왔는지 모를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말랐다. 헝클어졌어도 볼품없진 않았다. 실은 반대였다. 제법 볼만했다. 전문가가 멋으로 적당히 머리를 흩트려놓은 모델같이.

“왜 그렇게 쳐다,”

도경은 지한의 목덜미를 감싸 당기며 키스했다. 지한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의 뒤엔 야경을 담은 유리창밖에 없었다. 지한의 시선을 너무 길게 사로잡아 도경의 질투를 다 샀던 유리창이 쿵, 하고 울었다.

무영의 사무실에서보다야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까지 지한은 입을 맞추는 행위에 서투른 면이 있었다. 도경이 혀로 입 안을 휘저으면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다 혀끝끼리 닿으면 그제야 소극적으로 반응했다. 침을 제때 삼키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으며 호흡 조절도 못 했다.

그나마 안정적인 키스가 이어졌던 때라곤 지한이 거실에서 도경에게 먼저 입을 맞췄던 날 한 번뿐이었다. 적어도 그날의 지한은 숨을 못 쉬어 힘들어하거나 옆으로 흐르는 타액을 뒤늦게 닦진 않았다.

서투른 쪽은 사실 도경일지도 몰랐다. 능숙한 자들은 몰아붙이지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든.

입술을 맞붙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지한의 가슴팍이 들썩거렸다. 잠시 숨 쉴 틈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찰나, 들려서는 안 될 환청이 도경을 방해했다.

그리고 이것도 아시겠지만 숨이 좀 빨리 차잖아요, 지한이가. 그 부분만 신경 써 주시면 괜찮을 거예요.

시우는 체력 운운했지만 지한의 증상은 보면 볼수록 체력과 관계없었다. 그 뭉개고 싶게 생긴 남자는 알면서 일부러 도경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어 무지한 척한 걸까, 진짜로 무지한 걸까. 지한은 시우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했을까. 설마 도경이랑 뭘 했는지도 다 말했을까? 그 여우 같은 새끼의 말만 믿고 타들어 간 속이 불쌍해서라도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

입천장을 휘젓던 혀가 단숨에 빠져나가자 지한이 급히 숨을 내뱉었다. 다른 때보다 두 배로 번들거리는 것 같은 입술이 하염없이 벌어졌다. 도경은 지한의 턱을 잡았다.

“지한아.”

지한이 침을 삼켰다. 잔뜩 긴장한 눈빛이었다. 입술은 여전히 살짝 벌어진 채였다.

“네?”

“너, 나랑 뭐 했는지 집에 가서 말했어?”

긴장으로 굳은 눈에 당황한 빛이 들어찼다. 지한은 세차게 도리질 쳤다. 잡혀있던 턱이 자연히 도경의 손을 벗어났다. 도경은 지한의 턱을 다시 고정했다. 쉽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이번에는 손가락을 펴 뺨까지 눌렀다.

“하나도?”

“내가 그걸 왜, 아.”

뺨이 눌려 어눌해진 발음으로 나오던 말이 끊어졌다. 셔츠 위를 빠르게 타고 올라간 도경의 손에 눌린 가슴 때문이었다.

“말하고 말고는 네 마음대로 해. 그건 상관없는데.”

시우가 한 말 중 어느 하나 거슬리지 않는 구절이 없었다. 특히 잘 부탁한다는 말은 재 속에 남은 마지막 불씨처럼 언제라도 다시 타오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도경의 귀가 비뚤어져 잘못 들은 것이라도 도리가 없었다. 도경에겐 시우의 말이 힐난으로 들렸다. 지한에게 충분히 잘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싫은 게 있나. 알고 싶어서.”

지한의 눈썹이 요상한 모양으로 움직였다. 당최 도경이 뭔 소릴 하는지 모르겠단 의문과 도경의 손이 셔츠 위로 더듬고 있는 부위가 부끄럽다는 소심한 항의가 합쳐져 나온 표정이었다.

“싫은 게, 내가요? 뭘.”

“나야 모르지.”

시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를 확인받으려던 차 안에서의 태도를 봐도 그렇고, 역시 지한이 시우에게 뭔가를 말한 것 같기는 하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지한이 살짝 괘씸해지려 했다. 말하고 말고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던 것,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상관있었다.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대번에 가슴까지 올라갔다. 손끝에 감정이 실리는 것을 도경도 알았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싫어?”

크기가 작은 만큼 민감한 부위를 짓이기듯 누르는데 태연할 사람은 없었다. 지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흥분보단 곤혹스러움이 더 짙게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신음을 참느라 입술을 씹은 지한이 힘겹게 말했다.

“아니요.”

고작 그 정도 가지곤 싫단 말이 나오지 않을 줄 알았다. 가슴의 돌기를 누르고 있는 손끝에서 힘을 풀지 않은 채 왼손으로 목을 감쌌다. 튀어나온 울대가 손바닥 가운데에 닿았다. 그대로 손을 밀었다. 지한이 약하게 헛구역질했다.

“이건?”

유리창과 도경의 손 사이에 목을 눌린 지한은 볼에 이어 눈가도 붉혔다. 그래도 답은 변하지 않았다.

“안…… 싫어.”

한 열 가지 다른 방법으로 더 시도해볼 수 있었다. 열 가지가 뭔가, 마음만 먹으면 스무 가지 서른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지한을 괴롭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도경은 빠른 길을 택했다. 지한은 소각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를 받아내려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네 입으로 말하는 게 빠를 것 같네.”

지한을 보면 여러 가지 복잡한 욕망과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가장 중요하다 생각되는 것은 지한이 도경을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싫다는 건 정말 안 할 테니까.”

소망.

“말해. 내가 뭘 하면 싫어?”

최고치를 찍었다고 장담했는데, 아니었다. 지한의 얼굴이 한층 더 빨개졌다. 톤이 밝지 않은 피부도 그렇게까지 새빨개질 수 있다는 것을 도경은 새로 배웠다.

“없어요.”

지한이 더듬더듬, 하지만 확고하게 의사를 밝혔다.

“형이 하는 건…… 안 싫은데.”

아.

터진다. 폭죽처럼 높이 날아올라 폭발한다. 무엇이. 불꽃이. 수없이 타들어 가 잿가루로 뒤덮인 마음속에서. 터진다. 터진 불꽃들이 점멸하면 새로운 불꽃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형형색색 세상 모든 색으로 피어난 불, 불의 꽃들이 도경을 끓어 올린다.

도경은 지한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감았다. 잘생긴 코끝에 스스로의 코를 가져다 댔다. 멈칫거리던 지한이 도경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것으로 대답해왔다. 심장이 곧 파열할 것처럼 쿵쾅거렸으나 도경은 기꺼이 지한의 팔 안에 몸을 맡겼다. 용기를 얻은 지한이 팔을 더 조여 도경을 옭아맸다. 서로를 간질이던 코끝이 떨어지며 뺨이 맞닿았다. 두 몸이 틈 없이 밀착했다. 하나로 태어난 몸처럼.

유리창에 부딪혔던 뒤통수를 어루만지고 감싸며, 도경은 지한의 귀에 입 맞추었다. 부드러운 연골을 핥고 내려와 살이 모인 귓불을 깨물었다. 도경이 한 걸음 물러서면 지한도 한 걸음 다가왔고 두 걸음 물러서면 두 걸음 다가왔다.

한쪽이 이끌고 다른 쪽이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함께 움직였다. 발을 맞춰 거실을 지나는 과정에서 둘의 입술은 한시도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원활한 호흡을 위해 잠시 입술을 뗄라 치면 지한이 도경의 입술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침실로 들어가기 직전, 도경은 소파에 올려둔 쇼핑백을 통째로 낚아챘다. 밀쳐져 침대에 앉고 나서야 지한은 도경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알아차렸다. 달아오른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백 안에 손을 넣어 옷과 씨름하던 도경은 안에 든 것들을 모조리 침대 위에 쏟았다. 셔츠와 바지, 속옷이 차례로 이불에 안착했다. 그리고 그 위로 떨어진 통.

“이게 뭐.”

지한의 상체를 밀어 눕히며 허벅지를 깔고 앉았다. 뚜껑을 연 도경은 밀폐용 스티커를 보고 아예 마개 전체를 돌려 뺐다. 은박 스티커가 떨어져 나가며 투명한 액체가 막을 새도 없이 주르륵 흘렀다.

지한이 셔츠 위에 덩어리째 떨어진 젤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별로야?”

젤이 묻은 손가락을 든 지한이 도경을 쳐다보았다. 아파트 단지에서 도경을 부르던 순간부터 줄곧 긴장을 놓지 못하고 있던 지한의 표정이 처음으로 편히 풀어졌다.

“좋아요.”

도경의 아랫배에 엄청난 힘이 들어갔다. 아랫배뿐만이 아니었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온몸이 단단해졌다. 특히 튜브를 든 손에 쓸데없이 힘이 들어갔다. 바람 빠지는 풍선 소리를 내며 밀려나온 젤이 지한의 셔츠 아랫단과 바지 앞섶으로 떨어졌다.

“거기가 아니잖아요.”

지한이 웃으며 작게 말했다. 도경은 급히 젤을 세워 들었다.

“어. 아니, 뭐라고?”

“그거요. 내 옷에 묻히려고 샀어요?”

긴장을 풀어주려 한 농담이겠지만, 지한의 말은 역효과를 냈다. 쌓인 것들을 한꺼번에 방출하지 않으려던 노력이 무너졌다. 지한이 무너트렸다. 그러므로 지한은 자기 자신을 탓해야 했다.

“아니.”

도경은 지한의 버클을 잡았다. 급한 손이 한 번에 버클을 푸는 데 실패했다. 상체를 일으킨 지한이 스스로 버클을 풀려 했다. 도경이 조금 더 빨랐다. 지한의 손목을 잡아 치운 도경은 성공적으로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회색 드로즈 앞이 이미 부풀어 있었다.

“아.”

속옷 안을 파고들어 앞을 움켜쥐는 도경의 손에 지한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본능적으로 나온 몸짓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도경은 지한의 명치를 눌렀다.

“움직이지 마.”

지한의 바지와 속옷을 내리며 그때까지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튜브를 힘껏 눌렀다. 뭉텅이로 나온 젤이 지한의 허벅지를 적시며 양옆으로 퍼졌다. 근육이 선 허벅지를 세게 잡았다 놓은 도경은 거치적거리는 셔츠를 잡아 올리며 손바닥에 묻은 젤을 넓게 펴 발랐다.

지한이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판판한 배에 힘이 들어가며 가슴 아래로 옅은 근육이 나타났다.

“딱딱해.”

명치 부근을 중심으로 양옆에 길고 얕게 패인 근육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거칠어지는 숨을 감추고 싶은 듯 지한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배 아래 쪽을 누르자 허억,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경은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려갔다.

“여기도.”

어느새 크기를 키운 성기가 도경의 손안에 들어왔다. 기둥을 둥글게 감싸고 올라와 끝을 살살 어루만졌다.

도경이 지한의 몸 위로 완전히 올라갔다. 둘의 시선이 같은 선 위에 놓였다. 지한이 도경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형도 딱딱해요.”

지한의 손이 도경의 바지를 벗기는 동안 도경은 혀를 내밀어 지한의 목덜미를 핥았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로션이 발린 살에선 화장품 맛이 났다. 도경은 혀끝에 힘을 주었다. 다른 것이 묻지 않은 지한의 맛이 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어깨에서부터 턱 끝까지를 잘근잘근 씹었다. 지한이 한쪽 뺨을 베개에 대고 문질렀다.

“형, 간지러워…….”

하얗고 팽팽한 베개에 파묻힌 옆얼굴이 그보다 더 또렷할 수 없었다. 모자란 부분이 없는 얼굴. 처음 보았을 때 마취에서 풀린 짐승 같다고 생각했던 쌍꺼풀 진 눈이 깜박였다. 그 안의 눈동자가 도경을 올려다보았다. 이 순간에도 지한의 눈 어딘가에는 약 기운을 다 떨치지 못한 짐승처럼 위태로운 빛이 있었다. 그러나 도경은 더 이상 그 짐승을 내몰아 사냥하고 싶지 않았다.

안전한 곳에서 키우고 싶었다.

지한의 허리를 깔고 앉아버리지 않도록 무릎을 세운 도경은 손바닥에 웅덩이가 고이도록 젤을 가득 짜냈다. 덜 벗겨져 지한의 무릎에 걸쳐져있는 바지를 마저 밀어 내리며 시트를 깔고 누운 엉덩이 밑으로 손을 넣었다.

지한이 엉덩이를 들었다. 팔도, 배도 단단한 지한의 몸에서 가장 부드럽고 연한 살을 가진 부위에 손바닥을 비볐다. 손바닥을 흥건히 적시던 젤이 충분히 지한의 피부로 옮겨갔다 여겨지면 새로 짜내 또 발랐다. 볼기를 주무르듯, 쓰다듬듯 때로는 움켜잡듯 만지는 손길을 잘 견뎌내던 지한은 마침내 입구 근처를 문지르는 손가락에 허벅지를 세웠다.

지한의 한쪽 종아리를 어깨에 걸치고서, 도경은 중지로 천천히 구멍을 만졌다. 닫혀서 열릴 생각을 않는 문처럼 좁고 건조했다. 손톱만큼 들어가면 두 배는 강하게 수축하며 밀어내려 들었다. 입구를 아예 숨겨버릴 기세로 힘을 주는 엉덩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다리를 벌리고 들어가는 편이 훨씬 빠르겠지만. 도경은 온통 젤로 미끄덩한 손을 회음부에 가져다 대고 느리게 문질렀다.

하, 아, 하아. 지한이 내뱉는 숨결의 온도가 달라졌다. 그의 배에 근육이 일어서게 하는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점점 흥분의 밀도가 진해지고 있었다. 도경은 손으로 지한의 엉덩이를 받쳤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었다. 아까와 같은 좁기를 지닌 구멍이 흠뻑 젖어 축축해진 손가락을 수월하게 빨아들였다.

한 손가락만으로 전에 없이 시간을 들였다. 다섯 손가락 중 제일 긴 손가락을 끝까지 넣은 뒤 원을 그리며 돌려도 보고,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는 지점을 찾아 뻑뻑한 안을 더듬거려 보기도 했다.

건조해진 속살이 다시금 손가락을 밀어낼 것처럼 뻑뻑해지면 지체하지 않고 젤을 짰다. 한 움큼씩 짜 손에 묻히다 나중엔 지한의 몸에 대고 바로 들이부었다. 셔츠가 말려 올라가 드러난 가슴과 배, 성기, 엉덩이까지 지한의 맨살이 온통 젤에 젖어 번들거렸다.

손가락으로 제 뒤를 탐색하는 도경과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끙끙거리던 지한이 턱을 들었다.

“아―.”

도경은 손가락을 멈추었다. 지한이 눈을 정신없이 깜박였다. 한 마디 정도만 남겨두고 손가락을 빼낸 도경은, 검지를 중지 옆에 붙였다. 그런 다음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딱 붙은 두 손가락이 방금 건드렸던 지점을 찔렀다.

“아, 흐……!”

지한이 베개에 파묻힌 머리통을 크게 내저었다. 모양을 갖춘 그의 성기가 아랫배에 올라붙어 있었다. 도경은 손가락을 빼지 않고 그대로 내리눌렀다. 허공에 떠있던 손가락을 내려 건반을 누를 때처럼. 지한이 고개를 돌려 반대쪽 뺨을 베개에 묻었다. 또 눌렀다. 지한이 허리가 들렸다. 더. 도경은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더 세게 눌렀다. 더 듣고 싶었다. 더 숨도 못 쉬게 만들고 싶었다. 찌르는 족족 지한의 몸도 그에 맞춰 점점 더 격하게 튕겼다.

세 손가락을 동시에 빼냈다. 미끌미끌해진 내벽이 반쯤 딸려 나오다 말고 들어갔다. 도경은 달달 떨리는 지한의 두 다리를 벌려 누르며 성기 끝을 입구에 대고 문댔다. 눈을 슬며시 떠 아래를 본 지한이 다시 눈을 감았다. 끝부터 살살 밀고 들어갔다. 지한의 뒤는 아까처럼 성급하게 도경을 밀어내려 하지 않았다.

천천히, 느긋하게 들어가자고 생각했던 도경은 아래에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는 지한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언제부터 흘리기 시작했는지 모를 눈물이 빨개진 눈가를 적시며 관자놀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심장인지, 명치인지 어디인지 모르겠다. 배 안의 뭔가가, 어쩌면 그 안에 든 모든 장기들이 한 줌 먼지보다 작게 줄어드는 것처럼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허, 억…….”

허리를 위쪽으로 힘껏 쳐올렸다. 도경의 어깨에 닿아있던 지한의 종아리가 바짝 근육을 세웠다. 지한이 눈을 꽉 감았다. 그랬다가 떴다. 그랬다 다시 감았다. 아파, 그리 묻지 않은 것은 변하는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프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아파도 좋다고 할 테니까. 도경이 하는 것은 다 좋다고 했으니까.

한숨 같은 소리가 벌어진 도경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지한이 베개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틀어 도경을 쳐다보았다. 기껏 씻고 나온 머리카락이 금세 다시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줄도 모르고, 오로지 도경이 낸 소리에만 신경 쓰느라 긴장한 눈빛이었다. 도경은 지한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안심한 지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들어온 성기를 밀어내지만 않았을 뿐 끊어버릴 기세로 꽉 오므라들었던 뒤도 미세하게 느슨해졌다. 도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엉덩이를 약간 뒤로 뺐다. 그리고 처음보다 조금 더 깊은 지점을 목표로 쑤셨다.

“으아, 하……!”

입구부터 뿌리까지 성기를 촘촘하게 감싸오는 안쪽 살의 질감은 단순히 한두 마디로 정의될 수 없었다. 축축한데 뜨거웠다. 뻑뻑한데 질척였다. 벽과 벽 사이에 껴 압박당하는 느낌이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점점 더 좁혀와 사이에 낀 몸을 압사시키고 말.

지한이 몸을 뒤틀지 않을 때고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두 번째 삽입 이후 동작을 멈춘 도경을 따라, 지한의 몸도 서서히 안정되었다. 그의 몸에 이어 숨소리까지 안정감을 되찾았을 때, 도경은 조금씩 허리를 움직였다. 무작정 뒤를 조이기만 하던 지한도 점차 도경의 페이스를 따라오려 노력했다.

물론 노력한다고 해서 다 수월해지란 법은 없었다. 지한은 오히려 도경을 헷갈리게 하고 있었다. 성기가 살을 헤치고 들어갈 땐 방어적으로 수축했다가도, 빠져나올 땐 놔주기 싫은 것처럼 딸려 나오는 여린 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뒤에 들어가는 힘까지 조절하랴, 입으로는 숨을 쉬랴 정신없던 지한이 눈을 크게 떴다.

“네, 네?”

“나가라는 거야, 들어오라는 거야.”

반쯤 들어가 있던 성기를 도로 빼냈다. 뭐라고 하려던 지한은 정신을 못 차리고 파드득거렸다.

“아흐, 아.”

당장은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로 보였다. 이전엔 어떻게 했더라. 도경은 구멍에 끝만 걸쳐진 성기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멍하니 지한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은 그들의 첫 섹스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묘하게 어긋나는 둘의 페이스를 이제 와서 인지하고 앉아 있단 말인지.

“뭐, 뭐라고요. 방금, 형, 뭐라고…….”

지한과 섹스하고 나서 필름이 끊긴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매초 매 순간이 선명하게 기억나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 일종의 발작 상태였던 것일까. 의문을 품는 것은 기만이었다.

지한과 섹스할 때마다 도경은 변형된 발작을 겪고 있었다. 처음 섹스한 다음날 걱정했지 않은가. 지한이 도경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랬다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더 얌전해진 지한을 보고 안심했다. 그냥 괜찮은 줄 알았다. 계속 그래도 되는 줄.

“힘 좀 풀라고.”

도경의 말을 알아들은 지한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그게, 자꾸, 그게 내 맘대로 안 되는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알아. 네가 일부러 그런다는 거 아니니까.”

들어갈 때만 힘 좀 풀어줘. 도경은 지한의 허벅지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지한이 턱을 열심히 끄덕였다. 도경은 다시 허리를 앞으로 움직였다. 지한은 도경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반쯤 삽입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힘을 줬지만, 곧 알아차리고 얼른 힘을 풀었다.

두 사람의 몸이 점차 같은 속도와 세기로 움직였다. 들어가면 최대한 잘 들어올 수 있게 길을 터주었고 나갈 땐 온 힘을 다해 붙잡아 피부에 소름을 돋아나게 했다. 쉴 새 없이 팽창한 살덩이를 받아낸 통로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물이 고인 것처럼 찰박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물의 습성은 결코 뜨겁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물처럼 찰박이는 소리는 도경의 머릿속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 귀로 그런 소리가 들리고, 눈으로 도경이 들어갈 때마다 연한 근육이 조금 더 진해지는 배가 보이며.

“아, 흐, 아, 응…….”

피부로는 땀과 젤이 섞여 끈적이는 지한의 몸을, 힘이 풀려 도경의 골반에 닿았다 떨어지는 허벅지를 느꼈다.

내가 하는 건 다 좋다고 했으니까 괜찮잖아.

합리화에 써먹지 않고 싶었던 배려의 말은 어느새 맹신해도 좋을 진실로 탈바꿈했다. 도경에게 서로의 벗은 육체를 공유하는 순간은 영혼을 풀어줄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보통의 인간들이 상대에게 정성껏 애정 어린 말과 눈길을 쏟아내고 싶어지는 순간, 도경은 세상이 그에게 뱉어놓은 찌꺼기들을 흩뿌리고 싶어졌다. 정상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도경은 지한의 어깨를 잡으며 귀를 깨물었다. 고통과 흥분의 경계선 부근에서 헤매던 얼굴이 다소 간지러운 행위에 완화되었다. 손에 잡힌 어깨를 들어 옆으로 밀었다. 지한의 몸 전체가 돌아가며 성기가 쑥 빠졌다. 흠칫한 지한이 자세를 바꾸려 팔꿈치로 침대를 짚었다.

“악!”

지한은 무릎을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자세를 다 잡기도 전에 뒤에서 삽입한 도경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려고 다리를 움직이기에 뒷덜미를 잡아 눌렀다. 누르는 힘을 이기지 못하는 건지, 이길 마음이 없는 건지. 두어 번 무릎을 세우려 바르작대던 지한은 이내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아, 아…….”

몸이 침대에 눌린 지한의 신음이 멎어들었다. 한쪽 얼굴이 베개에 눌린 채로 도경에게 깔린 지한은 언제부턴가 자신의 입술을 있는 대로 물어뜯고 있었다.

얇은 이불을 꽉 구겨 쥐고 있는 손이 도경에게 미약한 두통을 주었다. 왜 그러고 있는 거야. 힘들어서? 아파서? 너무 좋아서? 아픈지 좋은지 분간이 안 가서?

도경은 지한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지한의 손가락이 억지로 펴지며 이불을 놓쳤다.

“지한, 지한아.”

그때까지도 도경의 오른손은 지한의 목을 잡아 누르고 있었다. 지한은 자유롭게 고개 하나도 돌리기 힘든 처지였다. 그래도 도경이 부르자 최선을 다해 고개를 틀려 했다. 눈가만 빨간 것이 아니라 어느새 눈마저 충혈된 것처럼 붉은 기가 돌고 있었다.

익숙해진 촉감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엎드려 눌린 상태에서 고개가 꺾인 지한이 참던 신음을 흘렸다. 저절로 벌어진 입술을 짧게 빨았다. 그리고 이것도 아시겠지만 숨이 좀 빨리 차잖아요, 지한이가. 되먹지 못한 그놈은 도경을 도발하겠답시고 그런 소리를 했겠지만 틀렸다. 지한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도경을 거부하지 않았다. 눈물이 나면 나는 대로 흘리면서, 숨이 차면 차는 대로 헐떡이면서 도경을 받아냈다.

그러니까 이대로 괜찮은 거라고?

발갛게 부은 눈가로 흐르는 눈물이 따가운지 지한이 눈을 찡그렸다. 여느 때처럼 몰아붙이고 퍼붓는 행위를 다 받아내느라 신음도 마음대로 못 내는 지한이 도경을 일깨웠다.

지한을 만나기 전 도경에게 삶이 생생하게 느껴지던 유일한 시간은 소현과 단둘이 남아있을 때였다. 누구와 스치기만 해도 죽어라 옷을 털고 닦아야 하는 도경이 남의 피부에 생채기가 나든, 자신의 입술이 터져 찢어지든 개의치 않을 수 있었던 시간. 말로 할퀴고 손으로 서로를 부수면서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게 분하고 억울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고통은 결코 해소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몸 안에 쌓여 찌꺼기를 만들었다.

그런데도 평생 그렇게 살아온 몸은 틈만 나면 착각했다. 자유로워지고 싶으면 너의 모든 짓을 받아줄 수 있는 저 상대에게 고통을 가하라고 자꾸만 귓속말했다.

“지한아.”

지한과 처음 섹스했던 날, 맨손으로 남의 몸을 만졌다. 남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끈적이고 질척였는데도 멀쩡했다. 도경도 멀쩡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왜 몇십 년을 멀쩡하지 않은 인간으로 살아왔는지 이해가 안 됐다.

지한은 도경이 자신과 대등하려면 갖춰야 한다고 여기는 최소한의 조건 중 무엇 하나 갖추지 못한 남자였다. 그런데도 괜찮았다. 모자라고 하찮다고 여겨온 부류에 속하는 지한이 도경을 괜찮게 만들었다. 왜 지금까지 아무도 안 알려줬어, 도경은 그를 거쳐 간 전문가들을 원망했다. 그래서 내가 이 지경이 됐잖아.

한 공간에 나란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도경의 숨통을 트여주는 지한마저 자꾸 누르고 밀쳐서 어떻게든 비명을 지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착각하는 인간이 되었다. 누가 도경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왜 안 싫어?”

누구긴.

“네, 네? 형, 뭐라고.”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너도 나한테 똑같이 하고 싶지 않아?”

머리카락이 잡혀 불편하게 고개가 들린 지한의 눈가를 닦아주며, 도경은 물었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절박했다. 제발 지한이 그렇게 말해주기를 바랐다.

“화나지 않아?”

맞아요, 나도 못 참겠어요. 형이 한 대로 똑같이 해주고 싶어요. 한 번만 그렇게 말해준다면. 해준다면. 밀치고 조르고 눌러서 헛구역질이 나고 눈물이 솟아오르게.

“난, 나는.”

그러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는데.

“화, 안 나요…….”

도경은 지한의 머리카락을 놔주었다. 몸을 일으켜 지한을 똑바로 눕게 해주었다. 접합되어 있던 부위가 갑자기 떨어져 아팠는지 또 한 번 작게 찡그린 지한은 도경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인상을 폈다.

“미안.”

“왜, 왜요.”

도경은 지한과 이마를 맞댔다. 뒤이어 가슴팍이, 배가 그리고 성기가 맞닿았다.

“미안해……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들은 닿아있었다.

“잘못했어.”

“형……?”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될까.

목구멍으로 삼킨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지한이 안절부절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똑같은 동작을 한참 반복한 그는 조심스럽게 도경을 껴안았다. 등줄기를 서툴게 쓰다듬는 손길에서 도경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안도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해야 마음까지 다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

도경은 지난밤 지한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창가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성급한 해가 자리를 차지한 하늘은 정오가 되려면 두 시간이나 남은 시간이라곤 믿을 수 없이 눈부셨다.

창틀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사님 천천히 오셔도 돼요. 미팅 내일로 미뤄져서 오전은 여유 있어요.] 미리 언질 없이 늦게 출근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메시지에 온 대리의 답장이었다.

라운지에서 가지고 온 커피는 진작 바닥이 났다. 약 없이 잠든 것까진 좋았으나 중간에 타의로 잠에서 깨버렸다. 지금까지 특이한 잠버릇을 보여준 적 없던 지한이 지난밤엔 몇 번이나 도경의 몸에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중에는 다리까지 둘러서 그야말로 바디필로우가 된 기분이었다. 나가는 길에 필히 커피를 한 잔 더 사야 했다.

어젯밤처럼 덜 말린 머리를 흔들며 거실로 나온 지한의 옷차림이 달라져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시우가 산 것은 아니라던 청바지와 긴팔 셔츠. 앞이 브이자로 파여 엿보이는 쇄골과 목 곳곳에 잇자국이 나 있었다. 지한은 알고도 무심한 걸까, 모르는 걸까. 일부러 잘 보이는 곳만 골라 세게 씹은 도경의 속내를.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가는 길에 지한은 두 번이나 입을 가리고 하품했다. 남을 베개 삼아 푹 자고, 도경이 먼저 일어나 씻고 라운지에 가서 커피를 가져왔을 때까지도 잔 지한이 도경보다 훨씬 더 피곤해 보였다. 이해하기로 했다. 자는 시간은 길었을지언정 몸이 더 고달팠을 쪽은 지한이니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지한이 맞다, 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잊었다는 듯 말했다.

“기억나요? 시우가 나한테 준 목도리, 그거 누구 건지 몰라서 버렸다 그랬잖아요.”

천천히 올라가 급속으로 하강하는 놀이기구처럼, 배 속이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답지 않게 재차 시우가 아무 말도 안 했느냐고 묻던 원인이 명확해졌다.

“그거 김무영이 다시 시우한테 갖다 줬대요.”

도경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정자세로 서있는 남자. 창의력이 고갈되었다. 그냥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지한아, 내가 사실은 널 두 번 다시 올라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걷어차고 싶었어.

“방금 뭐라고 했어? 잘 못 들었어.”

네가 나한테서 눈을 못 뗀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불쾌하지 않았어.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지. 알아서 더 좋은 판을 깔아주는구나, 그렇게 여겼어. 장단에 맞춰주다 네가 나를 위해 못 할 것이 없어지는 순간 말해줄 계획이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네가 장소현이랑 붙어먹는 동안 만신창이가 된 권도경이라고 해.

“목도리…… 목도리요. 김무영 사무실에 놓고 왔는데 내 건 줄 몰라서 버렸다고 하지 않았어요?”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너한테 키스하면, 네가 나한테 더 빨리 빠질 거라고 생각했어.

“아. 그랬지.”

“근데, 김무영이 그거를 시우한테 갖다 줬대요. 그러면서 그거 형이 버리라고 했는데 자기가 안 버린 거라고…….”

하지만 정직해지자면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너를 봤을 때부터 나도 조금은.

“내가 무영이한테 물어볼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아니다. 어디서부터 어그러졌는지 나조차도 모르고 있으니 네게 말할 수도 없어. 이때부터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회개할 수도 없어. 언제부터였는지 나도 모르겠거든.

“형이 김무영한테 연락한다고요?”

언제까지 거짓이었고 언제부터 진심이었는지. 그런 게 네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그런 소릴 했는지 알려면 내가 연락해서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네게 한 거짓말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하는 와중에도 난 이렇게 훌륭히 널 속이고 있는데.

“……아니에요. 그냥 하지 마요, 그럼. 그 새끼가 또 헛소리했나 보지.”

“왜?”

내가 아는 건 하나뿐이야.

“형이 그 새끼한테 연락하는 거 싫어요.”

나는 도저히, 네게 있는 그대로를 다 말할 순 없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맞은편에 비치던 도경의 모습을 앗아갔다. 도경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였다. 따라 들어온 지한이 도경을 보고 웃었다. 도경을 무영과 연락하게 하느니 그냥 의문을 풀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한 사람답게. 다정하게.

***

도경은 매캐하게 올라오는 연기를 마시지 않으려 뒤로 물러났다. 황 원장은 소현의 선물들을 매우 찾기 쉬운 곳에 숨겨놓았다. 그녀가 택한 장소는 뒷마당 정원이었다. 그녀 말고는 가족들만 드나들 수 있는, 하지만 식물과 동물에 다 관심 없는 권 회장은 절대로 갈 일이 없고 자식들은 집에 방문하는 횟수가 많지 않으므로 사실상 그녀만의 공간이었다.

황 원장이 별장을 지으려 산 땅은 땅 바로 뒤에 솟은 산 주인과의 갈등으로 건물 뼈대만 남아있은 지 오래되었다. 원래 사찰이 있었던 부지 옆엔 작은 탑처럼 생긴 소각장이 있었다. 현경이 팁이랍시고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서류나 물건을 태우기 좋다고 했을 때만 해도 별 등신 같은 소리라고 치부했다. 현경의 말이 옳았다. 100리터짜리 종량제 봉투 네 개에 달하는 물건들과 지한의 인적사항을 담은 서류, 그리고 사진을 태우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었다.

과거에도 불을 붙일 수 있으면 좋았을 테지. 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선택을 아쉬워하지 말아야 했다. 도경이 지한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 죽을 때까지 서로의 인생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잘 선택했다.

잿빛이던 연기 색이 짙어졌다. 냄새도 독해졌다. 도경은 몇 걸음 더 물러났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아무도, 도경을 대신해 심부름센터 직원과 만나고 다니며 지한의 인적사항을 배달했던 이안도 도경이 그 자료로 정확히 뭘 어쩔 계획이었는지는 몰랐다. 그러니 지한이 소현과 도경의 관계는 알게 되어있어도, 지한을 죽고 싶게 만들었다는 계획은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었다.

도경만 비밀을 지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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