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No Holds Barred
#80
급히 잡은 룸은 넓지 않았다. 욕실까지 합치면 도경의 거실만 한 크기였다. 불꽃 축제를 보러 갔을 때 빌렸던 방보다는 넓었다. 도경의 눈에는 한없이 좁아 보였던. 지한에겐 전혀 좁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던 그 방보다는.
커튼이 한쪽만 열려 있는 창가로 빛이 쏟아졌다. 계절이 무르익었다. 아침에 본 종이신문에선 올해 첫 폭염 사망자가 나왔다. 몇 페이지였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뒤쪽에 실린 기사는 짧았다. 바로 다음 페이지엔 여름철 휴가지 추천 기사가 한 면을 가득 채웠다.
도경은 커튼을 쳤다. 빛이 차단되며 실내 밝기가 낮아졌다. 호텔 안에 앉아있는 도경의 피부엔 주기적으로 소름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의 몸엔 낮은 온도가 알맞았다. 소름은 냉방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지한이 회사로 찾아왔던 다음날 도경은 멀쩡하게 출근했다. 그다음날도, 다음다음날도, 다음 주에도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늦게 퇴근했다. 그동안 배우에게 들어온 두 개의 제안서를 거절했고 아이돌 그룹의 신규 앨범에 참여할 외국 작곡가 리스트를 확인했다. 가을에 크게 열릴 콘텐츠마켓 참가 명단도 체크했다.
주말엔 본가로 오라는 황 원장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화를 샀다. 그녀는 기어이 아들을 따로 불러내 점심을 사 먹였다. 식사 후엔 그녀가 새로 찾은 카페에 가 예쁘게 생긴 디저트를 먹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맛이 없었다. 맛이 나쁘거나 향이 고약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미각이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도경의 혀는 한식당에서 황 원장이 입에 넣어준 전과 베트남에서 온 커피의 맛을 구분하지 못했다.
차이를 알지 못하니 입에 넣지 못할 것도 사라져 황 원장이 맛 좀 보라며 건넨 차를 다 마셔버렸다. 안 뜨거웠냐며 경악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너덜거리는 입천장의 통증을 감지했을 때, 도경은 비로소 알았다.
지한이 앗아갔다. 무릎 꿇은 도경을 두고 돌아서 버린 지한이 감각을 절단한 범인이었다. 지한이 없어서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가 가버려서 잠을 못 자도 졸리지 않은 것이었으며 용서해주지 않았기에 발작할 기운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면 진통제를 먹고 잠을 못 자면 수면제를 먹듯 지한을 되찾으면 해결되었다. 어떻게. 방법이 문제였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연락해도 받아주지 않는 지한에게 찾아가지 않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자의로 남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순간 그런 건 다 바닥났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매달렸다 지한에게서 또 그날과 비슷한 소리를 들었다간 그 자리에서 벽이고 창문이고 할 것 없이 이마를 찧다 뛰어내리게 될 수도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죽으면 지한을 되찾아올 수 없으니까.
기다리겠다고 했다. 제가 얼마나 머리 나쁘고 배운 거 없는 새끼인지 다 봤으면 이제 그만 봐도 되겠다는 지한의 바지를 붙든 도경 본인이 그렇게 말했다. 기다리겠다고, 오래 기다릴 수 있다고.
의도치 않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못 기다리겠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타인의 말이나 행동, 그리고 상황을 참는 일과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서른한 살 먹고 나서야 배웠다. 이래 본 적이 없으니까. 좋아하지 않아도, 깔아뭉개지 못해 안달을 내도,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해도 누구 하나 도경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이제까지는 없었으니까. 그 많은 사람들이 도경을 증오할지언정 그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맴돌았으니까.
만일 소현이 살아서 무릎 꿇은 도경을 봤다면 곧 죽어도 그냥 돌아서진 않았을 것이다. 그 희귀한 광경에 경악하고 감탄하다 끝내 만끽하고 싶어서라도 지한보다는 더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그런데 지한은 가버렸다. 기다려주지 않고. 정말로 그만 보겠다고 결심한 사람처럼 단숨에.
똑, 똑, 똑. 도경의 방을 찾아온 방문자는 문을 정확히 세 번 두드리고 멈추었다. 도경은 문으로 걸어갔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난 문소리는 세 번에서 더 늘어나지 않았다. 노크 방식마저 성격을 나타냈다. 규칙을 벗어나지 않아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도경은 문을 열었다. 복도에 사복 차림의 시우가 서있었다.
“안녕하세요.”
말간 얼굴도, 예의 바른 말투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점은 도경을 보고 웃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룸으로 들어온 시우는 소파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도경을 쳐다보았다. 앉으란 허락이 떨어지기 전엔 계속 그러고 서있을 기세였다.
“앉으세요.”
시우가 소파에 앉았다. 작은 손이 옆으로 맨 가방끈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탈의실에 들르지 않고 바로 올라온 것 같았다.
“저한테 하실 얘기 있다면서요.”
도경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찬찬히 보았다. 작고 무르게 생긴 시우는 지한보다 강했다. 심부름센터에게 지한의 뒤를 쫓게 했을 때부터 짐작했다. 지한과 시우 중 더 굳센 쪽은 시우였다.
“네.”
“말씀해 보세요.”
많이, 깊게, 여러 번 생각했다. 지한을 돌려세우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 지한이 평생을 함께한 시우보다 더 효과적인 회유책은 없었다. 지한을 잃은 도경에게 지푸라기라도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안이나 무영이 아닌 시우였다.
그 현실이 절망적이었다. 시우는 도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한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시기부터 도경을 향한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던 시우다. 현재 상황을 얼마나 샅샅이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도경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모를 수 없었다.
뭘 어떻게, 어디까지 할 각오가 되어있다고 말해야 시우가 듣는 척이라도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지한과 시우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 돈. 빚. 돈으로 지한을 설득해 달라고 제안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시우에게 가장 들어 먹힐 회유의 수단으로 그보다 좋은 것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도경에겐 달리 내밀 카드도 없었다.
오토바이를 받기 곤란해하던 지한을 잊지 않았다. 뭐가 그리 부담스러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지한이 가난하단 거야 알았다. 사고 싶어도 살 돈이 없어 못 사는 선물을 주면 마냥 기뻐할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의외였고, 당혹스럽기까지 했었다.
소현에게 돈을 받았단 이야기를 듣고 나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한은 소현과 도경을 동일시하지 않으려 의식했던 것이다. 지한다웠다. 그는 솔직하고 거짓말을 할 줄 몰랐다. 순진해서 실익을 따지지 않았다.
도경에게 그 어떤 사심도 없는 시우는 다를지 몰랐다. 시우라면 지한보다는 현실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을까 하는, 절망 더미에서 찾은 희망이 있었다. 빚도 다 갚고 다달이 월세가 나가지 않게 집도 마련해주면. 그래서 하루하루가 보다 자유로워질 기회라면 시우도 진지하게 고려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 남자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널 되찾고 싶어 한다고, 시우가 지나가듯 언급만 해준다면 지한도 한 번은 재고해보지 않을까.
싫다면 돈을 억지로 쥐여줄 계획은 없었다. 절대로. 지한에게 찾아가 레이저 운운하며 엉터리 사과를 한 이안과 똑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야 했다.
도경은 준비해온 문장들을 차근차근 읊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얼마가 됐든 값을 지불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의지 표명일 뿐이다. 그만큼 지한과 다시 한번 대화할 기회가 필요하다. 달라는 건 다 주고 해보라는 건 다 할 테니 지한을 설득해줄 수 있겠느냐. 당장 도경과 만날 준비가 안 되어있다면 드라마 출연이라도 하라고.
짧지 않은 이야기를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들은 시우가 몸을 뒤로 기댔다.
“돈. 좋죠.”
가방끈을 잡고 있던 손은 어느새 무릎쯤으로 내려가 있었다. 언제라도 자리를 뜰 것 같던 자세가 한동안 머물다 가겠단 자세로 바뀌었다.
“돈 없으면 당장 내일 먹고 살 걱정하느라 대학은 무슨, 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할 시간도 없고. 그러면 열에 아홉은 10년 20년 일해도 월급 제자리인 데서 일해야 하고.”
도경은 시우의 손을 주시했다. 가지런히 모인 손은 까딱이거나 움찔거리는 미세한 동작 하나 없이 얌전했다.
“그런 데서 일하면서 권도경 씨 같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팁 받으면 감사하다고 허리 숙이고. 반말로 이래라저래라 해도 웃어주고. 성질난다고 때리는 거 맞고만 있었는데도 사과는 내가 해야 되고.”
권도경 씨 같은 사람. 그 비유가 내포하는 뜻은 명백했다. 도경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욱해버리지 않도록.
“그렇게 살다 보면 나이가 들어있겠죠? 그때 가선 일할 힘도 없고, 모아놓은 돈은 더 없고. 나라에서 주는 몇십만 원이라도 받아서 연명할 수 있으면 운이 좋은 거고, 그런 운도 없으면 추워서 죽든지 더워서 죽든지 차에 치여 죽든지 맞아 죽든지 어떻게든 죽는 거고.”
닫혀있는 커튼을 힐끗거린 시우가 다시 도경을 쳐다보았다.
“별일만 없으면 제가 권도경 씨보다 훨씬 빨리 죽겠네요. 돈이 없으니까.”
담담하게 죽음을 논하는 의중이 좀처럼 점쳐지지 않았다. 할 얘기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을 때도 시우는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전반적으로 속을 읽기 힘든 인간이었다.
“근데도 돈이 완전히 다는 아니거든요. 살면서 그런 거 못 느끼셨어요? 돈이 아무리 남아돌아도 못 가지는 게 있다는 건 배우셨을 건데.”
침이 말라붙은 식도를 억지로 적시며 내려갔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도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볕을 차단한 창가에 미련이 남았는지 시선을 한 번 더 준 시우가 커튼을 잡아 젖혔다. 빛이 훅 끼쳐 들어왔다.
“권도경 씨도 그쪽 친구들이랑 똑같다는 말이에요.”
눈이 부셨다. 유리를 뚫고 들어오는 볕쯤 끄떡없다는 듯 시우는 두 눈을 똑바로 떴다.
“권도경 씨한텐 나가도 그만 안 나가도 그만인 돈 쥐여주면 제가 지한이를 설득하겠다고 할 줄 아셨어요?”
의지와 상관없이 눈이 자꾸 감기려 들었다. 빛을 피해 어둠 속으로 숨어 버리려고.
“그런 말이 아니라.”
그래. 그런 말이 아니었다. 똑같지 않았다. 한평생 친구들이라 불러온 사람들과 도경은. 절대로.
“제가 뭐라도, 해줄 수 있다는. 할 마음이 있다는.”
“한 3개월 됐나요? 4개월?”
“뭐가…….”
“둘이 자기 시작한 지.”
그런 것도 다 말했나. 말했을 수 있다. 도경이 어딜 핥고 어딜 몇 번 쑤셨는지까지 다 알려줬다고 해도 괜찮아야 했다. 그는 그 무엇에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건 왜.”
“사람 처음 만나보신 것도 아닐 거고, 아시잖아요. 그거 평생 못 가요. 그러면 그때 가선 어떻게 하실 건데요? 지한이보다 더 마음에 드는 애가 나타나면 그땐 어쩌실 거냐고요. 어디 건물 하나 살 돈 준다고 하는 걸로 합의 보시게?”
시우는 마치 도경이 소현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지한이 소현과의 일까지 시우에게 빠짐없이 고해바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도경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도경이 소현처럼 지한을 적당히 가지고 놀기 편한 물건 취급한다고.
“전 지한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돈 얘기도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라고 분명히.”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지한이를 같은 사람으로라도 생각했으면 말했어야 정상이죠. 아니, 일단 정신 멀쩡한 사람은 아무리 누가 미워도 일부러 접근해서 속일 생각 같은 건 못 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한다고요. 근데 권도경 씨는 했잖아요. 내가 일하는 데까지 꼬박꼬박 와 가면서.”
“그건 제가 잘못.”
“좋아요. 너무 화가 나서, 잠깐 미쳐서 지한이가 어디 굴러다니는 쓰레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근데 나중엔 같이 좋다고 할 거 다 했잖아요. 그랬으면 하던 거 다 멈추고 털어놨어야죠. 오해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이제라도 너랑 잘해보고 싶으니까 용서해줘라.”
하려고 했다. 하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누가 입을 꿰매놓은 것처럼 그 말만 하려고 하면 벙어리가 됐다. 그게 네 생각처럼 쉬운 일인 줄 아느냐고 따지고 싶은 충동이 피부를 뚫고 나왔다.
“그러려고 했는데.”
“무서워서 못했다는 변명은 하지 마세요. 무서워? 뭐가. 지한이가 화낼까 봐? 걔한테 몇 대 맞을까 봐? 그정도 가지고 무서우면 당신한테 당한 사람은 어떨 거 같아요. 왜 그렇게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일이 안 돼요? 많이 배웠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는지 정말, 진심으로 이해가 안 돼요.”
골을 울리고 목덜미로 퍼지는 통증이 도경에게 위기감을 안겼다. 약. 약을 가지고 왔어야 한다.
“대체 지한이를 데려다 뭘 어쩔 생각이었는지, 처음엔 뭔 생각이었고 나중엔 뭔 생각이었는지 이해하려고 용써 봤자 나만 힘들더라고요. 별의별 상상이 다 들어서. 그래서 그냥 관뒀어요. 어차피 권도경 씨는 정상이 아닌데 노력한다고 그 머릿속을 내가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이 차에 있었다. 시우를 방에 두고 주차장까지 내려가 약을 먹고 올 수도 없었다. 참는 수밖에 없었다. 참을 수 있었다. 오늘 시우를 불러낸 목적은 결코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우가 더한 소릴 한다고 해도 도경은 듣고만 있어야 했다. 죗값을 치른다고 여기면 이것보다 수십 배 강한 비난에도 끄떡없이 버텨야 했다.
“잘못한 거 맞아요.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손이 경련하려 움찔거리고 식도가 따끔거렸다. 그래도 도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돈으로 다 된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제가 그거 말고 또 뭘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그런 거예요. 돈 아니라 뭐든 필요한 건 다 해줘서라도 지한이가 한 번만 다시 만나주면, 아니 그냥 연락만 받아줘도 되니까. 제가 하는 얘길 들어주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포기? 나쁜 선택과 그릇된 판단의 연속 끝에 낭떠러지까지 밀려났음에도 이것 하나만은 알았다. 도경은 지한이 필요했다. 없을 땐 몰랐다. 있다 없으니 몸이 알아서 깨우쳤다.
“그것도 잘못됐어요?”
지한보다 도경에게 더 잘 듣는 약은 없었다.
“일단 전 권도경 씨 도움 안 받을 거예요. 돈이든 뭐든.”
룸에 막 들어와 앉았을 때나 지금이나, 시우의 얼굴색은 똑같았다. 허벅지 위에 놓인 손도 여전히 잠잠했다. 도경은 초조해졌다. 저 여유로운 남자의 눈에 보이는 스스로는 어떤 표정과 눈빛을 하고 있을지. 움찔대는 손을 들키지는 않았을지.
“지한이한테 그쪽이랑 연락해보라는 말도 안 할 거고요. 또 몰라요. 기다리다 보면 지한이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당신한테 다시 가겠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건 지한이만 알겠죠.”
“지한이가 싫다고 하면 더 어떻게 안 할 테니까 말이라도.”
“아직도 못 알아들으시겠어요?”
도경의 말을 자른 시우가 상체를 등받이에서 뗐다. 그의 상체에 대각선으로 걸쳐진 가방이 앞쪽으로 쏠려 카펫 위에서 대롱거렸다.
“당신 세상에서 당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지한이 세상에선 걔가 주인공이라고.”
시우는 할 말을 끝냈고 도경은 할 말이 없었다. 주차장이 내다보이는 고층 룸에선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했다. 튀어 오르는 꼴을 방지하려 겹쳐져있는 도경의 손을 얼마간 보던 시우가 가방끈을 잡았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일어나보겠습니다.”
한동안 도경의 시야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던 얼굴이 사라졌다. 도경은 문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경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등신같이.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건만 알지 못할 어느 순간부터 도경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녀온 목소리가 그를 몰아세웠다. 얼마나 고민해서 여기까지 불렀는데 저 뭣도 아닌 새끼가 이래라저래라하는 걸 듣고도 멀쩡히 돌려 보낸다고? 지가 뭔데 입만 살아서 이래라저래라. 건방진 게 어디서. 잘난 것도 없는 새끼가 운 좋게 지한을 끼고 살았으면서. 정말 저 새끼를 이대로 지한에게 돌려보내려고?
저것도 사내새끼라고 낳아놓은 내가 죄인이야.
눈을 한 번 깜박였을 뿐인데 일어나 있었다. 두 번 깜박였을 땐 시우의 어깨에 걸쳐진 가방끈을 잡아채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아니면 다섯 번째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시우가 도경과 벽 사이에 갇혀있었다. 목이 도경의 손에 눌린 채로.
“너 지한이 좋아하지.”
혈압이 상승하고 박동이 빨라지며 얼굴로 피가 몰렸다.
“그래서 이러는 거지. 지한이가 데뷔하는 것보다, 나랑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것보다 그냥 평생 네 옆에서 지금처럼 살길 원하는 거지. 맞지.”
도경의 한 손에도 꼼짝 못 하는 시우의 목뼈를 그대로 아스러뜨리란 마음의 소리가 커졌다. 그리하고 싶었다. 그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벗어나려는 시도를 안 하는 것인지, 못 하는 것인지 목이 눌리는 상황에서도 입을 벌리고 숨 막히는 소리만 내는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얘가 뭘 잘못했더라.
부모에게 버려져서 보육원에 맡겨진 것? 하필 지한의 부모도 그 보육원에 자식을 버리고 간 것? 어려선 지금보다 훨씬 더 말도 못 하고 칠칠맞았을 지한의 옆에 딱 붙어 끈덕지게 챙겨준 것?
시우의 잘못이라면 지한을 사랑한단 것밖에 없었다. 누굴 사랑하는 건 죄가 아니었다. 그런 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도경도 뼈저리게 배웠다.
도경은 시우를 놔주었다. 발작적으로 콜록거리면서도 끝까지 주저앉지는 않던 시우가 고개를 쳐들었다.
“당신이 지한이랑 몇 번 잤다고 질투할 거였으면 내가 먼저 했어.”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났다. 환청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우의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전혀 즐겁지 않은 얼굴로, 그가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내가 해달라고 했으면 걘 얼마든지 해줬을 거거든. 박아달라면 박아주고, 빨아달라면 빨아줬을 거야. 지한인 그런 애니까. 자봤으면 알 텐데?”
주춤거리며 물러나려던 도경은 시우의 손에 멱살을 잡혀 끌려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머리카락에서 나는 샴푸 향을 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내가 안 한 거야. 난 지한이랑 오래 볼 거니까. 당신 아니라 누가 와도 상관없어. 지한인 나랑 안 떨어져. 죽을 때까지.”
시우에게선 지한의 몸 곳곳에서 맡았던 것과 같은 냄새가 났다. 365일 추위 없는 나라에서 나고 자라는 과일 향.
“때리고 싶으면 때려. 때려놓고 남한테 뒤집어씌우든지.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버리고 가. 당신들 그런 거 잘하잖아.”
삐―…….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온 이명이 꼭, 환자의 생명이 끝났음을 알리는 전자음처럼 섬뜩하게 귓속을 관통했다.
***
권 회장이 후원하는 시향의 음악회엔 항상 아는 얼굴들이 적지 않았다. 술 마시고 약 빨러 다니기 바쁜 자식 세대보단 권 회장과 황 원장 나이대가 더 많았지만 도경처럼 부모에게 끌려온 자식들도 없진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매번 보였던 장 회장은 손녀를 잃은 뒤로 규모를 막론하고 모든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관계로 보이지 않았다.
“아들, 인상 펴. 이따 저녁 같이 먹고 들어가. 회장님한테도 내가 주의 줬으니까. 알았지?”
음악회보단 그 이후의 저녁 식사에 더 많은 공을 들였을 황 원장이 도경에게 팔짱을 끼며 속닥였다. 입구 근처에서 대화하던 노부부가 다정한 모자에게 흐뭇한 눈길을 보냈다. 권 회장과의 저녁 식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구토하고 싶어진 도경의 속도 모르고.
권 회장과 황 원장이 2층 특별석 앞줄에, 도경과 현경은 뒤에 앉았다. 악장이 일어나 오보이스트에게 손짓했다. 오보에의 라에 맞춰 관악기들이 조율을 시작했다. 현악기들이 뒤따랐다. 음을 맞추기 위해 우는 악기들이 서로 엇갈리는 것 같은 소음을 냈다. 악기들이 울음을 멈추고 지휘자가 입장했다. 관객들이 박수로 오케스트라의 수장을 맞이했다. 연주를 앞두고 미리 뱉는 기침소리마저 멎었다. 지휘자의 팔이 힘차게 도약했다.
하늘 위로 모였다 퍼졌다 하며 나는 새떼처럼 강약을 넘나드는 현악기가 날개를 펼치면, 타악기가 그 새떼의 등장을 알리며 울린다. 그들 아래로 그림자처럼 깔리는 관악기. 지하의 생명들이 어둠 속으로 기어 올라온다. 나무도 관목도 없는 민둥산에서 마귀들이 괴성을 지르고 몸을 뒤틀며 혼란스럽게 춤을 춘다. 그들의 왕이 나타난다.
도경은 기괴하고 음산한 관현악이 전하는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안식일을 맞이해 자기네 우두머리를 기쁘게 하려 축제를 벌이던 사탄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와 떠오르는 해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러므로 그는 겁낼 것 없이, 두려워할 것 없이 불안해할 것도 없이 그를 낳아준 남자와 여자의 뒤에 앉아 인내하기만 하면 된다. 지휘자의 봉이 내려오면, 오케스트라가 그 손짓에 따라 악기에서 입을 떼고 현을 들고 말렛을 허공에 띄우면 사악한 귀신들도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면? 도경은 맨 위에까지 꼭꼭 잠근 셔츠 단추를 만졌다. 누가 목울대를 누르는 것처럼 갑갑하고 구역질이 났다. 사라지지 않기는 왜 안 사라져. 저것은 음악이고 이야기는 설화일 뿐. 현실이 아니었다. 악한 것들은 사라지게 되어있었다.
사라진다니?
현경이 도경의 팔을 때렸다. 도경은 형제를 쳐다보았다. 무대 위에 시선을 고정한 현경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했다. 쉿?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적어도 도경의 단기기억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거슬릴 만큼 큰 숨소리를 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입술을 꽉 다문 도경은 이제 새가 아닌 벌레 떼처럼 날뛰는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집중하려 사력을 다했다. 그 외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나는 어디로도 안 가.
또 들린다. 듣고 싶지 않다. 귀를 도려내고 싶다. 도경은 귀를 막고 허리를 수그렸다. 바지에 코가 눌렸다. 섬유유연제 향이 후각을 파고들었다. 도우미가 새로 사온 섬유유연제 통에 붙여져있던 꽃 그림. 꽃 냄새. 꽃을 흉내 낸 향수를 선물로 사와서 내밀던 지한.
「어울리는 것 같아서, 향이. 형이랑.」
눈짓 한 번에 여자를 쓰러뜨릴 수 있을 것같이 생겨서 도경이 꽃과 어울린다는 말을 하며 부끄러워하던 어수룩하고 순진한 그 남자, 그 사람, 그 애, 지한.
움찔거리던 허벅지가 기어코 근육을 세우며 튀어 올랐다. 토기가 치밀었다. 권 회장이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가야 했다. 경련하는 다리로 온전히 걸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눈을 꼭 감았다. 제 앞만 안 보이면 몸이 다 감춰진 줄 아는 개만도 못했다.
“……도경아. 도경아, 권도경!”
시야를 메우는 풍경이 교체되었다. 도경의 눈앞에는 무대를 내려다보는 권 회장과 황 원장의 뒤통수 대신 현경이 있었다. 현경의 뒤로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한가로이 지나갔다. 공연장 밖이었다. 두 발로 걸어 나온 기억이 없었다.
“야, 도경아. 나 보여? 이거 몇 개야. 내 손가락 몇 개?”
현경이 도경을 데리고 나온 것 같았다. 끙끙대며 질질 끌고 나왔는지, 들쳐 메고 나왔는지에 대한 기억 또한 삭제되었다. 현경이 저보다 큰 도경을 안고 왔을 린 없으니 질질 끌고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누가 봤으면 어떡하지. 도경은 제 행색을 살폈다. 신발, 바지, 셔츠 할 것 없이 다 깨끗했다. 위안은 되지 않았다. 옷차림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럼 뭘 신경 써야 할 때지?
“야! 나 봐. 정신 차려.”
“조용히 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누가 들어. 다들 안에 있어. 너 기억 안 나? 네가 저 안에서 막 손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듣는다고.”
시우를 때리지 않고 돌려보냈던 룸에서부터 집요하게 도경을 따라온 이명이 다시 활개 쳤다. 삐―. 머리통과 목덜미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들으라고 해. 아는 사람들도 아닌데. 너 약 어디 있어. 아니지. 병원에 가야 하나? 주말엔 안 하잖아.”
“형 필요 없으니까 들어가.”
펴고 있던 손가락을 접은 현경이 황당해했다.
“나 들어가면 너는. 이 상태로 혼자 어디를 가게 지금.”
“필요 없어.”
“알았으니까 일단 어디 좀 앉아서.”
“따라오면 혀 깨물 거야.”
붙잡지 못하게 뒤로 물러나 돌아섰다. 혹시 쫓아올까 봐 계속 뒤를 확인하며 걸었다. 현경은 도경이 유리문 앞에 도착해 멈춰 설 때까지 한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있었다. 부탁한 대로 꺼지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따라오지도 않는 형제를 눈에 담은 도경은 서둘러 탈출했다. 도망쳐 갈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
정신을 갉아먹고 육신을 축내는 강박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규칙과 질서를 잊지 않았다. 떨리는 손은 옳은 장소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고 떨리는 발은 제때 액셀과 브레이크를 오가며 도경을 가장 안전한 피난처에 데려다주었다. 집. 부모도 형제도 친구들도 없는 그 혼자만의 공간. 적들과 장애물들이 득실거리는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돌아와 쥐죽은 듯 잠들어 마땅한 곳.
평소 맨발로도 잘 밟지 않는 집안을 구두 바닥으로 휩쓸며 손에 집히는 물건마다 집어 던졌다. 유리는 깨졌고 플라스틱은 튕겨져 나갔으며 마른 꽃가지들은 밟혀 꺾였다. 모자랐다. 찬장을 죄다 열어젖히고 그 안에 든 그릇들과 컵을 다 내던졌다. 약, 잘난 의사들의 지시대로 꼬박꼬박 처먹어봤자 단 한 번도 도경을 구해준 적 없는 약들도 다 쏟아버렸다. 숟가락 젓가락 마지막엔 침실에 있는 향수병까지 다 깨버리자 더 부술 것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도경 자신을 부숴야 했다.
침입자가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손에 들려있던 것을 빼앗겼다. 깨진 유리 조각이었는지, 칼이었는지 알지 못했으나 도경은 개의치 않았다. 아, 너 소현이구나. 도경은 기척 없이 들어온 자객을 두려워하지 않고 웃었다.
그래 역시 우린 떨어질 수 없나 봐. 어쩌면 전생에 몸이 붙은 쌍둥이였을지도 모르지. 전생의 원수가 부부로 다시 만난다던데 그럼 우린 다음 생에 다시 만나겠네. 좋아. 이 저주가 끝나지 않는다면 몇 생에 걸쳐 너와 이렇게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왕이면 다음 생엔 남들 없는 데에서 태어나자. 아무것도 모르고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양이 나오지 않게. 봐봐, 이생에 우리가 죄 없는 그 애를 어떤 지옥으로 빠트렸는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온도가 내려가지 않는 불구덩이.
억센 힘이 몸을 눌러왔다. 팔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도경은 망각하고 있던 현실과 마주했다.
그런데 장소현은 죽었잖아.
넌 누구야?
***
나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고 했잖아.
***
번졌다 모였다 하던 초점이 잡혔다. 창가에 있던 의자와 피아노 의자가 전부 뒤집혀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언제 어떻게 들고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 물건들이 여유롭던 공간에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물건 중엔 한때 컵이었을 도자기 파편과 황 원장이 선물한 방향제 병도 보였다. 몸통은 어디로 가고 동강 난 입구만 찢긴 종이 위에 쓰러져 있었다.
“도경이 형.”
맞은편 벽에 붙어 서있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다. 발등을 반도 못 덮는 신발이 종이를 밟았다. 도경은 종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악보였다. 고등학교 때 처음 외웠고 지금까지도 피아노 앞에 앉기만 하면 손가락이 알아서 연주하는 조곡.
“형…… 내가 누군지 알겠어?”
당연히 알았다. 한 걸음 이상 내딛지 못하고 멈춘 사람은 이안이었다. 그의 뺨에 피가 묻어있었다. 비 오는 골목에서 그가 지한의 얼굴에 냈던 것과 비슷한 위치에 비슷한 길이로. 도경은 아직까지 다 돌아오지 않은 감각을 억지로 끌어모았다.
얼굴에 핏자국을 단 이안이 도경의 방 안에서 자신이 누군지 알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이안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앞으로 움직이려던 도경은 팔을 잡아 누르는 힘에 밀려 벽에 등을 부딪쳤다.
“형. 무영이 형. 이제 도경이 형 놔줘. 놔줘도 괜찮을 거 같아…….”
“놔줬다가 이번엔 날 찌르려고 할지 어떻게 알고.”
도경의 팔을 아프도록 잡고 있는 것은 무영의 손이었다. 그의 얼굴에도 피가 묻어있었다. 상처인지 남의 피가 묻은 것인지 보기만 해선 분간이 가지 않았다. 도경은 손바닥을 폈다. 핏자국이 무늬처럼 군데군데 찍혀있었다. 손에 힘을 풀고 아래로 떨어트렸다.
도경이 이안과 무영의 얼굴을 다 그어놓은 것이든, 도경의 피 묻은 손이 그들의 얼굴을 때려서 그리된 것이든 궁금하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쉬고 싶었다. 간절히.
“너희 다 나가.”
“살려줘도 이러네.”
무영이 입술을 거의 떼지 않고 말했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소리 들으면서 얘를 살려줘?”
“지금은 그런 얘기 하지 마.”
전염병 환자와의 간격을 유지하듯 일정 거리 이상은 간격을 줄이지 않고 있던 이안이 파편들을 밟고 다가왔다. 그는 무영의 팔을 잡았다. 이제 그만 도경을 놔주라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무영은 도경의 팔을 더 세게 잡았다.
“형, 원장님 곧 오신대. 회장님 알면 안 되니까 바로 못 빠져나오신다고 나한테 연락하신 거야. 현경이 형보다 내가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그러셔서. 현관 번호도 알려주셨으니까 그건 우리 가면 형이 다시 설정…….”
“시끄러워.”
공격하고자 뱉은 말이 아니었다. 누가 귓구멍에 벌레를 들여보낸 것처럼 간지럽고 시끄러웠다. 가능하다면 고막까지 끄집어내 밟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시끄러워 죽겠으니까 닥치고 그냥 나가.”
이안이 겁먹은 기색으로 주춤댔다.
“너 진짜 나한테 뒈지게 맞아야 정신을 차릴,”
“내 몸에 손대지 말고 나가, 나가라고, 나 좀 혼자 있게 제발!”
무영이 몸부림치는 도경을 양팔로 끌어안듯 속박했다. 손발 가릴 것 없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다 손톱이 어딘가에 푹 찍혔다. 무영의 광대 부근이 분홍빛으로 부풀어 올랐다. 색이 변한 피부 위로 핏방울이 솟았다.
순간적으로 무영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걸리는 건 다 태워죽일 듯한 눈빛으로, 무영이 도경의 턱을 잡았다.
“이안이 나가 있어. 난 도경이랑 얘기 좀 하고 나갈게.”
“무슨, 무슨 얘기 할 건데? 그 손 놓고.”
“이안. 나가 있어.”
“싫어.”
무영이 벽을 걷어찼다. 방 전체가 울렸다.
악력을 자랑하는 손에 턱을 내준 도경은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지긋지긋해할 힘조차 나지 않았다.
“괜찮으니까…… 나가 있어. 무슨 일 있으면 너 부를게.”
이안은 도경을 믿어도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난 괜찮아. 정말이야. 도경이 재차 말했다. 갈팡질팡하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뒤로 움직였다. 한 걸음. 두 걸음. 이안이 방을 완전히 나갔다. 열린 문은 그대로 두고서.
복도로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멈춘 발소리에 무영이 물러났다. 그는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잠겼다.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까지 하고 돌아온 그가 한숨을 쉬었다.
“들었어. 에스더한테.”
도경은 양 손바닥을 맞대 문질렀다. 핏자국이 말라붙어 번지지도 않았다.
“우지한이 뉴스를…… 잘 못 받아들였나 봐?”
손톱을 세워 긁자 핏자국이 조금씩 지워졌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손가락 전체에 퍼졌다. 들린 검지와 중지 손톱 아래 피가 고여있었다.
“나는 도경이 네가 뭐 그렇게 엄청난,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 안 해.”
무영이 도경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결혼할 여자가 다른 놈을 끼고 다녔다는데 괜찮을 남자가 어디 있어. 너랑 소현이가 남들처럼 사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얼굴이, 뭐야, 그래 체면이 있는데 그걸 걔네가 무시한 거잖아. 아 뭐 물론 내가 너였으면 뭘 성가시게 작업을 쳐, 그냥 데려다 어디 부러뜨렸지. 하지만 너는 내가 아니니까.”
무영의 나머지 한쪽 손마저 도경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소현이가 걔한테 준 것 좀 뺏고, 걔 친구한테 작업도 치고, 그러다 걔한테도 작업 치고. 그러다 한 번 자기도 하고. 근데 너무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알지. 아무리 예뻐도 몸끼리 안 맞으면 별로 안 예뻐. 반대로 개같이 생겨도 몸만 잘 맞으면 막 갑자기 사랑이야. 하루 종일 걔 생각만 나고. 얘랑 결혼하고 싶고. 지나서 생각하면 웃긴데 딱 그때는 그럴 수 있다니까 진짜. 난 너를 이해해.”
도경은 테두리와 그 바로 안쪽, 그리고 동공의 색이 다 다른 눈을 마주했다. 이국의 눈을 가진 무영이 이해를 말하고 있었다. 지한은 모르는, 시우도 모르는 도경에 대한 이해.
“근데 걔는 그걸 이해 못 하는 거야. 자기 거 뺏어가 놓고 지금은 좋다고 하는 거. 그걸.”
“왜.”
왜 이해 못 해?
“네가 뺏어간 게 엄청 좋은 건 줄 알았나 보지. 아니면 자기는 평생 거짓말 안 하고 살았든지. 몰라. 똑똑한 네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도경은 윗단추가 날아간 셔츠를 쥐어뜯었다. 내가 하는 건 다 좋다면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눈으로 봐놓고서 왜, 왜 이해 못 해?
“도경아. 이럴 때 네가 뭐라고 하는 건 줄 알아?”
무영이 도경의 어깨를 쥐고 짧게, 그러나 세게 흔들었다.
“무영아. 도와줘. 그렇게 말하는 거야.”
기력이 남아있었다면 웃었을 것이다. 발로 바닥을 짚고 서있는 것마저 기적적인 상황에선 웃을 힘도 없었다.
“네가 나를 어떻게 도와줄 건데.”
“그건 지금부터 생각해야지. 걔가 다시 너 만난다고 할 때까지 묶어놓고 패줄까?”
뇌는 간사했다. 분명 웃을 힘도 없다고 인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디서 났는지 모를 기운이 일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도경은 무영의 멱살을 잡았다.
“걔는 그냥 내버려 둬. 건드리면 너 죽여버릴 거야. 내가 못 죽일 거 같으면 해봐.”
“워, 오케이.”
무영이 양손을 들었다.
“알았어. 내가 잠깐 잊어버렸어. 너는 걔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거지. 깨끗하게. 더러운 생각 그런 거는 절대로 없이. 그래. 그러면 걘 안 건드려. 네 거 해야 되니까.”
도경의 손을 벗어난 셔츠 깃에 좀 전까지는 없던 핏자국이 생겼다. 도경의 손이 새로운 피를 흘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떻게 할까?”
말도 툭툭 잘라먹고 예의도 없는 것 같은 지한을 확 패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작동은 되는지 의심되는 휴대폰을 새 것으로 바꿔주면 고맙다는 말 정도는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내빼버린 지한에게 화가 나서, 무영의 힘을 빌려서라도 혼쭐을 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적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이었을 뿐이다. 실은 그때라고 정말로 지한이 사람 패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자들에게 맞길 바라진 않았다. 그냥 얄미웠을 뿐이다. 저건 왜 고맙단 말도 못 하고 바보같이 굴지. 내가 아무한테나 이렇게 잘해주는 줄 알아. 자신이 연기를 하는지, 진짜로 지한에게 섭섭해하는 것인지 분간도 못 하고. 진짜로 바보같은 쪽은 도경이었는데.
“네 도움 같은 건 없어도…….”
“없어도 돼?”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안이 방 앞까지 되돌아와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필요 없으면 똑바로 말해. 그러면 나는 너희 엄마 올 때까지만 기다렸다 여기서 나가. 나도 이 집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고.”
한평생 열심히 배우고 외운 언어와 숫자들이, 신념들이 바람에 실린 낙엽보다 가볍게 날아갔다. 무영이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 하는지, 지한을 붙잡지도 못하고 발작하는 도경을 가지고 노는 중인지조차 분별할 능력이 없었다. 앞으로는 누구의 앞에서도 자신 있게 뭔가를 아는 척하지 못할 것이다.
“무영…….”
혹시라도 도와준단 소리가 진심일까 봐, 남들 보는 데서 뺨을 갈기고 네 가족들은 너 죽으면 기뻐할 사람들 아니냐는 무시무시한 저주를 쏟아낸 도경을 그래도 두 번이나 살려준 무영이니까 그라도 붙잡아야 할까 싶어 시킨 대로 여섯 글자를 입 밖에 내려던 도경은 두 글자 만에 좌절했다.
눈앞이 뿌옇게 차오르더니 이내 뺨 위로 뭔가가 주룩 흘렀다. 그는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웃을 때도, 울 때도 소리를 내는 것은 창피한 짓이었다. 남에게 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는 것은 나약해빠진 놈이나 하는 짓이니까.
20여 년을 통틀어 처음 접하는 도경의 눈물에 무영은 울지 말라고 달래지 않았다. 왜 울고 앉아있냐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우는 도경을 보는 무영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두 개뿐인 손으로 눈과 입을 가리기에도 바빴기에.
***
황 원장은 도경이 앉아있는 소파 앞에 꿇어앉았다. 긴 치마에 가려 이안이나 무영처럼 신발을 신고 들어왔는지, 실내용 슬리퍼라도 신고 들어왔는지가 보이지가 않았다. 도경은 그녀가 집안 꼴이 어떤지 모르고 맨발로 들어오지 않았길 바랐다. 사방에 파편이 튀어있었다.
“난 그냥 우리 도경이가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첫 자식에겐 물려주지 않은 창백하고 마른 손이, 소중하고 어린 것을 쓰다듬듯 도경의 손을 어루만졌다.
“너 어렸을 때 내가 너무 욕심내서 미안해. 네가 뭐든지 잘해서 그랬지 뭐야. 현경이 기르면서 겪을 시행착오는 다 겪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왜냐하면 너는 항상 다른 애들보다 더 열심히, 잘했으니까…….”
음악회가 끝나면 지휘자를 비롯한 시향 사람들과 간단히 인사말이라도 나누고 와야 하는데, 뭐라 둘러대고 그런 자리에 권 회장 혼자 두고 나왔을까. 권 회장과 단둘이 남은 현경만 죽어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라지. 권 회장은 아무리 현경을 잡아봤자 도경에게 화낼 때만큼 진심을 다하지 않았다.
“다 나은 줄 알았어. 이제 남들보다 좀 유별난 수준 정도로 살 수 있게 된 건 줄 알았어. 도경이 네가 아직도 이렇게 아픈지 나는 진짜 몰랐어.”
황 원장이 도경의 손을 꼭 쥔 채로 일어섰다. 치맛자락이 들리며 구두를 신은 발과 가는 발목이 드러났다. 다행이었다. 맨발이 아니라서.
“현경이한테 들었어. 소현이가 키우던 애 네가 키워 보겠다는데 아빠가 못 하게 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엄마가 다 하게 해줄게. 네가 나오라 그러면 네 아빠 혼자 살라 그러고 그냥 그 집 나올게. 나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단 말이야. 엄만 너만 있으면 돼.”
황 원장의 맨손이 도경의 뺨에 닿아왔다. 그녀는 피가 묻은 부위를 손바닥으로 아프지 않게 문질렀다. 문지른다고 사라질 자국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는 굴하지 않고 계속 문질렀다. 자신의 손만이 아들의 얼굴을 깨끗하게 되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너 엄마 두고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너를 아프게 하고 싶으면 차라리 응, 엄마를 아프게 해, 엄마 하나도 안 아플 거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어떻게 해줄까. 응? 엄마가 뭘 어떻게 하면 내 도경이가 덜 아플까.”
하도 안 늙어서 마녀란 별명이 붙었던 적 있는 여자의 눈가가 사정없이 구겨지며 주름을 만들어냈다. 아이처럼 우는 그녀에게, 도경은 위로의 말을 건네지 못했다. 자기 자신도 위로하지 못하는 그는 누굴 위로할 처지가 못 되었다.
#81
아프고 싶지 않아.
#82
눈을 감고 있는데도 앞이 밝았다. 지한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거실 베란다의 시원찮은 블라인드는 외부로부터 빛을 반도 차단해주지 못했다. 눈을 절로 뜨이게 할 정도의 밝기를 감안했을 때 오늘의 기상 시간은 정오 전후였다.
식탁 위에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일찍 나가니 일어나면 연락하란 당부를 적은 글씨가 둥글둥글했다. 스물여섯 남자를 유치원생 취급하는 태도가 웃겼다. 웃겨서 웃고 싶었는데 입술이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속으로만 웃었다.
속으로나마 간신히 웃던 지한은 곧 그마저도 때려치워야 했다. 시우가 메시지를 남기고 간 메모지와 비슷하게 생긴 포스트잇에 적혀있던 필체를 떠올려 버렸기 때문이다. 모난 데 없는 시우의 글씨와는 백팔십도 다르게 끝이 길고 날카롭게 빠진 글자들. ‘지한.’ 단 두 글자만으로도 성격을 드러내던 도경의 글씨. 지한은 메모지를 구겨버렸다.
시우가 굳이 메모지라는 방식을 택한 이유는 지한이 휴대폰 전원을 며칠째 켜지 않은 탓이었다. 도경에게 오는 전화를 받아버릴까 무서워서 껐던 것이 3일 전. 어쩌면 4일 전. 잘하면 일주일이 지났을지도.
날짜를 세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세지 않으니 며칠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눈이 떠지면 일어났고 감기면 잤다. 잠드나 깨어있으나 큰 차이는 없었다. 다만 잠든 동안에는 도경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잠들어있는 쪽이 미세하게 더 편했다.
이상하게도 깨어있는 내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의식에 도경이 없는 시간은 거의 없었는데, 꿈에는 그가 안 나왔다. 꿈속의 지한은 고등학교 복도에서 동급생을 패거나, 난방이 고장 난 보육원에서 시우와 끌어안거나 그도 아니면 체육관에서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꿈에마저 도경이 나오는 날 지한은 마지막 피난처를 잃게 될 것이다.
구긴 메모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냉장고를 열었다. 우유병을 꺼내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기한이 지났는지를 알려면 날짜부터 알아야 한다는 사실은 냉장고 문이 닫히고서야 깨달았다.
달력을 봐도 소용없었다. 요일을 모르니 날짜도 알 수 없었다. 뚜껑을 따고 남은 우유를 개수대 안에 쏟아부었다. 아무래도 기한이 지난 것 같았다. 유통기한 며칠 좀 넘긴 우유를 마신다고 죽기야 하겠냐만.
TV를 켰다. 철지난 드라마의 재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악을 쓰는 남자의 얼굴이 뽀얬다. 아무리 얻어터진 분장으로 얼굴을 가리고 험난하게 살아온 삶을 연기해도 원래 얼굴이 가려지진 않았다. 얼굴이 곧 삶이었다.
드라마. 대본 리딩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계약서에 사인한 건 어떻게 되는 걸까. 성질 더러운 유 대리가 지금쯤 방방 뛰고 있지 않을까. 웃고 싶었다. 아까와 같은 이유로 웃지 못했다. 속으로도 못 웃었다. 대리와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을 남자가 생각나 버려서.
지한은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휴대폰이 충전기와 함께 엎어져 있었다. 휴대폰을 뒤집어 바로 눕혔다. 충전할까. 말까. 연락이 몇 통 더 와 있는지만 확인하고 다시 끌까. 말까. 확인해서 뭘 어쩔 건데.
그는 휴대폰과 충전기를 집어 서랍 안에 처넣고 신발장으로 갔다. 나가야 했다. 바깥공기를 마신다고 뇌가 잘 돌아가진 않겠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오늘도 도경의 생각만 하다 밤을 맞이할 순 없었다.
단지 내 벤치에 앉은 지한 앞으로 하얗고 작은 개를 끌고 나온 여자가 지나갔다. 하얗고 작은 개. 또 다시 도경이 연상되려고 했다. 지한은 여자와 개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 다음엔 건장한 남자가 초등학생만한 대형견 두 마리를 끌고 지나갔다. 눈을 빛내며 허름한 주택가를 구경하던 눈빛이 떠올랐다. 개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행인들이 산책시키는 대형견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던 도경.
오늘도 실패였다. 시우가 올 때까지 하루 종일 휴대폰을 켤까 말까, 도경의 연락을 받을까 말까, 연락해서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할까 말까 갈등하다 밤을 맞이하게 생겼다.
도경은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소현의 남자였단 것도, 지한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것도. 어디까지가 연기였고 어디서부터 진심이었는지는 도경만 알았다.
패서 반병신으로 만들어 놓을까 고민도 했다. 사무실 의자를 집어 던지면서는 의자 다리를 부러트려 갈겨버릴까, 연필꽂이에서 쏟아져 나온 칼을 봤을 땐 확 찔러버릴까 고민했다. 그런데 못 했다. 수십 명의 얼굴과 몸에 흉터를 새기고 뼈에 금이 가게 한 손이 도경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음에 걸리는 순간들도 존재했다. 적어도 지한을 당장 해외로 팔려나가도 찾아줄 이 없는 인생이라 모욕하는 무영에게 맞서던 모습은 연기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때도 연기하고 있었다면 도경은 이사가 아니라 배우를 하고 있었어야 한다.
그때 보여준 모습이 진심이었다면 그 전날도 진심이지 않았을까. 지한의 옷을 벗기고 몸을 만지다 아예 뚫고 들어오기까지 했던 밤은 속은 것이 아니었다고 믿어도 될까.
못 믿잖아.
이제는 누가 와서 진심이었다는 증거를 들이밀어도 믿을 자신이 없었다. 그것마저 철저하게 조작되었다고 의심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보나 마나 의심할 것이다. 이건 또 어디 있는 누구한테 얼마를 주고 시켰어 이 새끼야. 그렇게 따지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지한은 손바닥으로 목을 감쌌다. 살짝만 눌러도 헛구역질이 나는 부위를 도경에게 몇 번이나 내주었던가.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고, 지한을 수치스럽게 만든 도경을 때려죽이고 싶고,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새끼라고 욕해주고 싶은데.
보고 싶다.
눈에 밟혔다. 작은 꽃이 수놓아진 셔츠가, 피아노를 치던 손가락이, 가끔 믿기지 않게 애 같아지던 얼굴이, 지한의 몸 위에서 미안하다고 사죄하던 떨리는 목소리가, 눈물을 쏟아낼 것 같던 눈이. 잘 때도 자세 바른 남자가 무릎 꿇고 지한의 바지를 붙들며 짓던 표정이.
실은 꿈에 나와 주길 바랐다. 꿈에서라면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랑 자고 싶어서 잤다는 게 정말이야? 형이 나를 좋아해서 그 새끼들이 화냈다는 말, 믿어도 돼? 진짜 나를 기다릴 수 있어?
지한은 절망했다. 내일이 되어도 오늘보다 더 살고 싶어질 것 같지 않았다. 살 의지보다 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더 무거운 순간에마저 도경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도경은 자신이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고 살아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했다. 나쁘게 살았고 잘못 살았다고 했다. 틀렸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면서도 도경을 보고 싶어 하는 지한이 제일 잘못 살았다.
살아있을 면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