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 Low Blow (34/38)

  34. Low Blow

#83

열린 블라인드 사이로 보이는 사무실 풍경은 평화로웠다. 현장에 나간 직원들의 자리는 비어있고 남아있는 직원들은 모니터를 두드리거나 키보드를 치고 있었다. 전화를 뺨과 어깨 사이에 끼운 대리는 통화하며 뭔가를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두가 각자 할 일에 열중해 있었다.

도경에게도 할 일은 있었다. 첫 대본 리딩 날짜가 잡혔다. 2주 뒤였다. 아직 작가나 피디에겐 지한이 하차할지도 모른단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주인공도 아니고 해봐야 대사 많은 조연이었다. 하차한다고 해도 대타를 구하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싫은 소리가 무서워 알리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2주면 14일. 지한이 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사무실 풍경이 차단되도록 블라인드를 치고 책상으로 돌아가 앉았다. 새로 들인 손님용 의자는 전에 있던 것보다 등받이가 더 높고 색이 진했다.

다리가 부러진 의자는 도경이 직접 내다 버렸다. 연필꽂이나 펜들은 다 멀쩡했지만 전부 새것으로 교체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의자와 사무용품들을 주문해달란 요구에 대리는 사연을 캐묻지 않았다. 그날 지한이 와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도 묻지 않았다.

도경은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식은땀 없이 건조했다. 경련도 없었다. 근래 보기 드물게 몸 상태가 멀쩡했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몸보다 머리가 문제였다. 머리가 불안해하기 시작하면 몸도 따라서 동요했다. 몸이 반응하면 그제야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척하며 살았을 뿐이다.

과연 지한은 언제부터 그 머리 안으로 들어온 것인지.

그런 것은 몰라도 됐다. 또 몰라도 될 것에 기운을 뺄 뻔했다. 몰라도 될 것들에 얽매여 허비해온 시간이 아까웠다. 이제라도 덜 생각하고 더 행동하며 살기로 했잖은가. 참기 싫으면 참지 말고. 잃어버린 것은 되찾고.

휴대폰 액정에 전화번호부가 떠있었다. 손끝이 두 이름 위를 배회했다. 하나는 지한의 얼굴에 더 상처가 나지 않게 잘 관리하라던 드라마 작가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무영이었다.

「네가 나를…… 왜 도와줘?」

너 나 싫어하잖아. 차마 그렇게까지는 묻지 못했다. 도와준단 말을 철회할까 봐.

「누가 공짜래.」

모두가 저처럼 얇은 정신을 가지지는 않았음을 망각한 도경의 잘못이었다. 무영은 도움을 의심하는 태도에 불쾌해하기보단 계산을 정확히 하고자 했다. 도경은 또 한 번 나약해빠진 자신을 탓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무영은 도경을 애정해서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라는 품목이 있어서 값을 부른 것이었다.

믿어도 될까.

잘 살진 못했어도 열심히는 살았다고 자부해왔다. 죽여서 내다 버리고 싶은 수백 명의 인간들을 살려두고, 스스로의 목숨이 질기게 느껴지는 수많은 낮과 밤을 식은땀과 약과 경련과 발작으로 견딘 31년의 끝이 그것이었다. 도와주겠다고 손을 내미는 사람이 무영뿐인 절벽. 그 손이라도 잡지 않으면 그냥 뛰어내려 바위에 두개골이 으깨져야 한다고 믿게 되는.

대기 시간을 넘긴 휴대폰이 액정 밝기를 낮췄다. 도경은 손가락을 안쪽으로 구부렸다. 보는 이마다 어쩌다 손가락을 한꺼번에 여럿 다쳤냐며 의아해했다. 도경이 기껏해야 커터 칼이나 다루다 손을 베었다고 짐작해 하는 말들이었다.

변색된 부분이 떨어져 나가 덜 차오른 생살을 보여주면 다들 열 배는 더 뜨악해할 것이다. 아마 눈치 없는 몇몇은 물어보기도 할 것이다. 아니, 이사님 어떻게 하면 손톱이 뽑혀요? 예전 같았으면 한여름에 장갑을 끼고 다녀서라도 남들에게 감추고 싶었을 손을, 도경은 책상 위에 내버려 두었다. 살은 반드시 차오르게 되어있었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한마디 없이 사라진 인간만이 기약 없었다. 도망친 사람을 잡아 오는 방법 같은 것은 배운 적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헤어졌던 상대를 되찾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묻고 싶었다. 제 발로 뛰쳐나가 버린 남자를 다시 예전처럼 자의로 곁에 머무르게 만드는 묘책이 뭔지.

버려야 할 잡생각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도경을 도울 수 없었다. 헤어짐의 사유가 뭐였든 간에 이런 경우는 없었을 테니까. 결혼할 여자의 남자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려 접근했다 좋아하게 된 상태에서 전말을 들켜 이별당한,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인.

삶엔 규칙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도경은 책상에서 손을 내렸다.

실전에서 비겁한 건 없다고 네가 그랬잖아. 이기는 게 중요하다고. 안 죽는 게 이기는 거라고.

도경은 죽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84

양옆으로 한 번씩 꺾였다 제 위치를 되찾은 무영의 목에서 뻐근한 소리가 났다. 통 운동을 못 나가 몸이 무거웠다. 오늘의 일정만 계획대로 흘러가면 내일부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계획이 틀어지면, 틀어져도 내일부턴 원상복귀였다. 머리 쓰느라 한 공간에 처박혀있는 짓은 체질에 안 맞았다.

입국 일주일 만에 무영을 만난 고려인들은 만나자마자 한 말을 중간에도 하고 헤어지기 전에 또 하는 무영을 간이 작은 인간 취급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휴대폰부터 손에 넣으라고, 휴대폰을 못 빼앗으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오란 당부를 반복해 들은 남자는 무영보다 더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희 귀 먹지 않았습니다.

자기네가 모시는 러시아 남자의 편애를 받는 무영을 귀하게만 자라 아는 것 없는 도련님쯤으로 여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식구들 없이 혼자서 만난 조직원들은 훨씬 더 노골적으로 무영을 무시했다. 고까워도 참았다. 야코브는 딸 몰래 손자에게 사람들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그 사람들의 무사한 출국을 내걸었다. 만일 사건·사고가 벌어져 한 명이라도 돌아오지 못하거나 뉴스에 나면 넌 실격이란 경고가 따라붙었다. 내 손자가 그런 놈일 리 없으니 믿는다는 부담스러운 격려도 잊지 않았다.

크게 신경 쓸 거리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무리 지어 다니는 덩치 큰 백인들만큼 눈길을 끌 것도 없는지라 최대한 이목을 피하고 싶었던 것일 뿐, 무영이라고 딱히 동양계가 더 믿음직스러워 그들을 고르진 않았다. 꼴 보기 싫어도 오늘만 지나면 끝이었다. 야코브의 사람들은 일을 처리하는 대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혹시 몰라 오픈 티켓으로 끊게 하긴 했다. 일은 언제고 틀어질 수 있으니까.

지한과 시우가 사는 동네는 아파트 단지와 술집들이 늘어져 있었지만 굴다리만 건너면 인기척 없이 망한 아울렛 거리와 버려진 논밭이 펼쳐지는, 개발되다 만 지역이었다. CCTV 없는 구역을 찾느라 며칠을 투자해 그 일대를 뒤졌다.

당연히 무영이 직접 하진 않았다. 남의 뒤를 캐는 덴 도가 튼 김 회장의 비서실장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생각도 잠시 해봤다. 하지만 그랬다 김 회장의 다른 자식들이 알게 되기라도 하면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한국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한 10년 뒤엔 몰라도 지금 당장 한국에서 쫓겨나면 곤란했으므로, 차라리 돈만 주면 뭐든 할 생판 남들을 택했다.

폐업한 가게들이 유령처럼 자리를 지키는 거리엔 떨어진 월세의 혜택을 놓치지 않은 카페나 레스토랑이 몇 군데 있었다. 지하철역과도 먼 그 거리는 동네 주민이 아닌 이상 무조건 자가용을 끌고 와야 했다. 블랙박스에 찍히는 일만 없게 하면, 그리고 신호등만 피하면 별문제 없었다.

간 작은 도련님 취급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러시아에서까지 사람들을 빌려와 놓고 실패할 경우였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미래를 두려워한 나머지 시도도 않고 포기해 버리는 패배자의 심정이 다 이해가 갈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연초에 불을 붙였다. 클럽을 드나들다 보면 필연적으로 맡게 되는 냄새라 입에 대지 않은 시간이 꽤 되었다고 냄새까지 낯설진 않았다. 입안에 확 퍼지는 쓴맛은 낯설었다. 약한 역함까지 느껴졌다.

담배 냄새라면 질색하는 이안에게 다음에 말해줄 거리가 생겼다. 나도 오랜만에 피우니까 그냥 담배 맛은 더럽더라. 그러면 거봐 내 말이 맞지, 하면서 의기양양해할 얼굴을 떠올리니 진정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하여간 쓸모라곤 없었다.

무영은 역한 맛이 나는 담배 필터를 한 번 더 빨아들였다. 사무실 안이 금세 연기로 자욱해졌다. 호스트바에 보내놨던 여자에게서 자리를 파했다고 연락이 온 지 두 시간 째. 그 레온지 뭔지 하는 새끼가 휴대폰의 부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래서 일부러 한 잔도 버리지 못하게 잘 감시하라고 신신당부하긴 했다.

이안에게 술을 잔뜩 먹여 알아낸 심부름센터는 도경이 냈던 값의 두 배를 요구했다. 달라는 대로 줬다. 넘겨받은 자료는 지한의 신상 위주였다. 레오의 가게는 딱 한 번 등장하는 배경에 불과했다. 주어진 시간이 적어 알아낸 정보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단기간에 획득한 정보 중 가장 유용한 것은 레오의 가게에 있는 호스트들 대부분이 휴대폰을 개인용과 업무용으로 나눠 최소 두 개씩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자가 훔쳐온 것은 개인용이었다. 잠금 해제 패턴까지 완벽히 외워온 여자는, 간단히 말해 프리랜서였다. 손님에게 선택당하길 기다려야 하는 가게 따위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 호스트들에게 정체를 들킬 위험도 없었다.

바에 가서 쓴 돈에 수고비를 얹어 현금으로 주는 무영에게 여자는 귓속말했다. 다음에 또 연락해. 여자는 무영과 잔 적 있는 유일한 한국여자였다. 섹스가 끝나기 무섭게 뭐랬더라. 커서 못할 줄 알았는데 잘하네. 대충 그런 감상으로 섰던 것도 죽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키도 크지만 눈코가 다 커서 골랐던 여자는 보면 볼수록 이안과 닮은 데가 없었다. 따라서 다시 섹스할 일도 없었다. 어쨌거나 무영은 여자에게 또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

여러 사람을 고생시킨 보람이 있는지는 기다려봐야 알 노릇이었다. 아직까진 휴대폰이 정지되지 않았다. 정지되면 제정신이 돌아와 자신의 휴대폰 하나가 바뀌었단 것을 알아차렸단 뜻일 터였다. 똑같은 기종의 기계로 바꿔치기해 놨으니 제발 몇 시간만 더 배터리가 나간 것이라 믿고 맘 편히 자길 바랐다. 몇 시간도 필요 없었다. 한 시간만 더. 물고기가 미끼를 물 때까지만.

남의 휴대폰이 무영의 책상 위에서 드르륵거리며 새 메시지를 띄웠다. 답장이 왔다.

[오래는 안 돼. 한 시간 정도면 괜찮아?]

호스트의 휴대폰에 저장된 시우의 이름은 정직했다. ‘이시우.’ 지한은 ‘지한이’로 저장되어 있는 것을 보면 레오란 호스트는 시우와 정말 안 친한 듯했다. 둘 사이에 마지막으로 오간 메시지는 거의 2년 전이었다. 그나마도 지한의 생일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전 메시지는 2년 반 전. 그들의 대화 주제는 항상 지한이었고 시우는 매번 화를 내고 있었다. 레오는 사과할 때도 있었고 발끈할 때도 있었다. 대부분은 레오의 사과로 마무리됐다. 시우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 대번에 느껴지는 예전 문장들을 최대한 흉내 내 메시지를 보냈다.

[지한이 때문에 할 얘기 있는데 시간 돼? 내가 너희 동네 갈 일이 있어서 너만 괜찮으면 출근 전에 만날 수 있어 지한이한테는 나 만난다고 하지 말고. 말하면 화낼 수도 있어]

지한으로 서두를 뗀 문장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답장은 바로 안 왔어도 읽기는 바로 읽혔다.

[한 시간 좋아 그럼 이따 저기서 보는 거다 지한이한테는 말하지 마 걔 알면 화내]

생전 본 적도 없는 타인의 말투를 따라 해 보낸 답장 역시 처음 보냈던 메시지처럼 바로 읽혔다. 답은 오지 않았다. 온다는 거겠지. 온다는 거냐고 확인 차 물어보려다 그냥 관두었다. 괜히 다 잡은 고기를 풀어주는 꼴이 될까 봐.

전자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면서 재떨이를 다 치워버려 급한 대로 컵 위에 얹어두었던 담배가 어느덧 끝까지 타 들어가 있었다. 필터를 쳐 컵 안으로 떨어트렸다. 치지직. 식은 커피에 빠진 담배가 불씨를 잃었다.

빅토리야의 귀엔 이 짓거리가 언제쯤 들어갈까. 무영이 남자란 이유만으로 빅토리야보다 더 신뢰하는 가부장적 꼰대 야코브는 절대 딸이 이 일을 모르게 하겠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빅토리야의 아들인 무영은 알았다. 그녀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알고야 말게 되어있었다.

러시아 인력과 고급 콜걸을 끌어들여 한다는 짓이 고작 남의 휴대폰을 훔쳐 웬 바텐더 놈을 유인하는 것이란 대목까지만 들어도 빅토리야는 권총을 꺼내들고 싶어 할 것이다. 그 바텐더 정신 좀 차리게 해주는 대가로 무영이 얻게 될 소득까지 알게 되면 권총으론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이 당나귀보다 멍청한 새끼가 돈 처들여 교육시켜 놨더니 기어코 사고를 친다며 장총을 빼 들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무영 역시 닥치고 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엄마, 내가 몇 년을 참았는지 아세요? 이젠 더러운 짓 좀 해서라도 내 걸 내 거로 만들겠다는데 그게 뭐 어때서요? 날 그 노망난 노인네랑 동급 취급하지 마세요. 난 지금까지 기다렸잖아, 엄마가 하라는 대로.

뭐, 충동적인 면이 아주 없다고 할 순 없는 결정이었다. 죽어버리겠다고 발작하는 도경을 억지로 잡고 있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나가라는 말을 안 듣고 버티는 이안은 정말 오랜만에 패고 싶었다.

무영을 도경과 단둘이 두면 사고가 날까 봐 걱정하느라 못 나가는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여 더 화가 치솟았다. 도경은 놔두고 이안부터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다스리고 있자니 문득 어떤 번개 같은 빛이 무영에게 내리꽂혔다.

아직도 도경이 형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안에게 끌려다니면서 뒤처리나 하고 있다니 네가 그러고도 남자냐. 이젠 뭐라도 해야 할 때가 됐잖아.

무영은 이해하는 이 상황을 지한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왜? 하고 묻던 순간만큼은 도경이 한 초등학생처럼 보였었다. 어려 보인단 것은 그만큼 취약해져 있다는 증거였다.

스무 해 넘게 알고 지내오며 본 모습 중 그날의 도경이 가장 연약했다. 무영이 조금만 몰아붙여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 정도라면 도와달란 애원도 충분히 할 것 같았다. 계시였다. 번개처럼 내리꽂힌 빛이 제발 계시이기를, 오독이 아니기를 빌며 던졌다.

「도경아. 이럴 때 네가 뭐라고 하는 건 줄 알아?」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도경이 원하는 바는 도망간 사람을 다시 잡아다 곁에 두는 것이었다. 돕겠다는 의지나 돈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종류의 일이었다. 전문가들이 따로 있는 영역이었다. 흥신소. 사채업자. 깡패. 도경의 주위에 그런 일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이는 무영밖에 없었다.

도와달라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한 문장도 멀쩡히 뱉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던 도경이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상황에서도 곧 도착할 엄마가 마음에 걸렸는지, 그는 기를 쓰고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는 전에 보여준 적 없이 간절한 눈으로 무영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나를…… 왜 도와줘?」

휴대폰이 새로이 진동했다. 시우에게서 못 만나겠단 메시지가 온 것일까 봐 마음을 졸였는데 진동한 것은 무영의 휴대폰이었다. 이안의 이름과 함께 텍스트만 봐도 음성이 지원되는 메시지가 떴다. 무영은 휴대폰을 거꾸로 엎어놓았다.

오늘은 이안과 연락하지 말아야 했다. 외가 남자들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피를 보고 온 날은 웬만하면 부인이나 자식들과 신체적으로 접촉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단순히 즐거워서 상승하는 흥분도와 주먹을 휘둘러서 솟구치는 두근거림은 종류 자체가 달랐다. 자칫하면 소중한 사람한테까지 지나치게 힘을 쓰게 되곤 했다.

직접 남의 몸에 손을 대거나 피를 묻힐 계획이야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안의 메시지는 내일 보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아는가. 피를 구경만 하고 와도 다 찢어발기고 싶어질지.

새 메시지들이 줄기차게 무영의 휴대폰을 진동시켰다. 사람이 바로 메시지를 안 보면 바쁜 줄 알고 기다릴 것이지 뭘 그렇게 난리 법석인지 몰랐다. 물론 이안이 귀여운 데엔 그 멍청함이 큰 공헌을 했다.

눈치를 두 스푼 정도만 추가해준다면 앞으로도 쭉 그렇게 멍청해도 예쁘게 봐줄 수 있었다. 똑똑해봤자 써먹을 데도 없었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무게를 자꾸 재게 되고 그러다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을 놓쳐 후회하기 쉬웠다. 도경처럼.

#85

아프다는 핑계로 반차를 내고 집에 온 이안은 침대에 누워 괜히 발을 굴렀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도우미까지 외출해 없는 집안에서 소리를 내봤자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알면서도 발로 매트리스를 팡팡 두드렸다. 애꿎은 공기청정기만 색을 바꾸었다.

이안은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아직도 무영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답을 하기는커녕 보낸 메시지를 읽지도 않고 있었다. 남들처럼 회사에서 일하는 중이라 바쁜 상황은 아예 겪지 않는 팔자를 뻔히 다 아는 사이에 그러니 괘씸함만 배가 되었다. 평소엔 보내기만 하면 바로바로 잘 읽는 인간이 왜 안 하던 짓을 하는지 모를…… 아니, 어쩌면 알 것도 같았다.

평소와 다른 것은 무영만이 아니었다. 이안도 달랐다. 오늘만 해도 평소 같았으면 냅다 무영의 아파트에, 그리고 거기 없으면 클럽으로 찾아가 왜 사람 연락을 씹느냐고 닦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안은 조용히 집에 혼자 남아 매트리스나 괴롭히는 길을 택했다.

도경의 아파트에서 그 난리가 났던 날 이후 이안은 무영과 만나지 않았다. 연락은 했다. 휴대폰 속 무영은 여태 알던 남자와 똑같았다.

잘못 배운 한국 음담패설을 농담이랍시고 던지거나 술이 마시고 싶으면 꼭 자기랑 마시란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풀어지려다가도 그날 나가라고 하던 목소리를 떠올리면 멈칫하게 됐다. 그러면 이안이 나가지 않자 벽을 걷어차던 발소리도 여지없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이안 없는 방 안에서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무영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도경이야 그렇다 쳐도 무영은 이안이 알려달라면 뭐든 알려줘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알려달란 건 안 알려주고 예전에 심부름센터에서 받았던 자료들만 싹 받아갔다.

도경과 무영이 이안을 빼놓고 비밀을 만들었다. 일단 둘이 화해했다는 의미인가 싶어 약간 마음이 놓이려고 하다가도 배알이 꼴렸다. 도경과 무영의 관계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도경과 이안의 관계 개선을 걱정해도 모자랄 판에.

아무튼 하나는 확실해졌다. 지한이 도경을 놔두고 떠나 버렸다는 것.

에스더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 무영은 이안과 함께 있었다. 정확히는 부모가 여행가고 없는 집에 혼자 있기 싫었던 이안이 무영의 아파트에서 자고 가겠다고 통보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휴대폰 밖으로 삐져나오던 에스더의 목소리는 소현의 귀신을 본 것처럼 질려 있었다.

―아무래도 도경이랑 소현이 사귄 거 우지한은 몰랐는데 우리가 알려준 건가 봐. 어떡해. 911 불러? 벌써 늦었나? 권도경 죽은 거 아니야?

「미스, 한국은 119예요.」

―야, 지금 농담이 나와!

입만 살았지 실제 사고를 처리하는 능력은 0에 가까운 에스더가 제풀에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무영은 정 그러면 제가 가보겠다는 말로 통화를 끝냈다. 무영은 놀라 아무 말도 못 하는 이안에게 물었다. 우리 도경이한테 가볼까? 저녁 메뉴를 묻듯 태평한 어조였다.

그리고 이안은 한 열 번 정도 마음을 바꾸었다. 가자며 일어났다 안 되겠다며 다시 앉았다. 그랬다 또 역시 가봐야겠다고 엉덩이를 들썩였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안이 말을 번복할 때마다 따라서 일어났다 앉기를 되풀이한 무영은 일곱 번째쯤 되어 평정심을 잃었다. 이안이 너 알아서 해. 난 안 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열 번째에 굳게 마음먹은 이안이 일어섰을 땐 따라 나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도경의 사무실은 불이 다 꺼져있는 상태였다. 1층 경비에게 확인하니 도경이 건물을 빠져나간 지 얼마 안 된다고 했다. 혼자였느냐고도 물었다. 차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상태가 어때 보이더냐고 묻진 못했다. 혹시 아무 일도 없었는데 괜히 상태 어쩌고 했다 나중에 도경이 알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일이었다.

나갈 땐 도경 혼자였더라도 지한이 사무실에 분명 들렀다 갔을 거라는 확신은 황 원장의 전화를 받으면서 굳어졌다. 따라오면 혀를 깨문다고 협박하고 나가 현경을 보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고 기사를 보낼 수도 없으니 네가 한 번만 가서 들여다봐 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는 황 원장도 체면을 전혀 차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도경의 아파트로 차를 몰면서 무영에게 연락을 넣었다. 도경이 만일 또 이마로 창문을 들이받았던 날처럼 눈이 뒤집혀 있다면 이안 혼자 힘으로는 한계였다. 연락을 받자마자 출발한 무영은 이안이 기다렸다 같이 올라가길 바랐다. 고민 끝에 이안은 무영을 무시하고 먼저 올라갔다.

이안은 오랜만에 올바른 판단을 했다. 무영을 기다리느라 아래에서 시간을 지체했으면 그동안 도경은 손바닥이 아니라 손목을 긋고도 남았을 것이다.

집안의 물건이란 물건은 다 때려 부술 기세로 손에 잡히는 것마다 집어던지고 있는 도경은 소현에게 머리카락을 잡혔을 때보다 몇 배 더 정신이 멀리 나가 있었다. 도경의 눈에 이안이 보이기나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만일 보인다 해도 누구인지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도경의 손에 들린 유리 조각을 뺏으려다 뺨을 긁히던 순간 이안은 어쩔 수 없이 그가 지한의 뺨에 낸 상처를 생각했다. 업보라고 생각할 뻔했다. 가까스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한은 더 당해도 쌌다. 다 그 때문이었다. 도경이 소현의 남자였다는 사실 하나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버릴 거였으면서 뭘 그렇게 도경을 위하는 척했는지. 얼굴밖에 없는 새끼란 건 알고 있었지만 약해빠지기까지 한 놈일 줄은 몰랐다.

보기만 해도 성질나는 휴대폰을 베개 아래 숨겨버리고, 이안은 똑바로 누웠다. 오히려 잘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 이쯤에서 지한의 본색이 드러나 다행이었다. 도경이 걱정되긴 하지만 질질 끌다 더 나중에 터졌으면 후폭풍도 더 컸을 것이다.

도경이 전조 증상도 없이 다량의 약을 먹고 잠드는 사태보다야 식기 좀 부수고 여러 사람의 살에서 피 좀 나게 한 정도로 끝난 이번이 훨씬 양호했다.

천장 위로 지한의 얼굴이 찍혔다 흐려졌다. 꺼져버려서 속이 다 시원하다가도 도경을 버리고 갔다고 생각하면 당장 붙잡아와 멱살을 흔들고 싶었다.

이럴 거면서 나한테 왜 그렇게 멋있는 척 큰소리쳤어, 이 속 좁은 새끼! 상상으로나마 소리치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도경을 담기에 지한의 그릇은 역부족이었다.

역시 지한은 도경을 가질 자격이 없었다.

#86

팔뚝을 부딪친 사람에게 사과한 시우는 팔로 이마를 훔쳤다. 땀이 묻어났다. 임시방편으로 폐업 사인이 붙은 가게 지붕 아래 멈췄다. 그늘도 더위를 앗아가진 못했다.

레오에게 처음 메시지를 받았을 땐 또 가슴이 덜컥했다. 레오뿐 아니라 지한이 체육관에서 사귄 놈들과 엮이면 좋은 꼴을 못 봤다. 평소 같았으면 간접적으로라도 지한을 떠봤겠지만 요즘 지한의 상태론 절대 안 될 말이었다. 아까도 방문이 닫혀있기에 그냥 열어보지 않고 나왔다.

요새 지한은 딱 유령이었다. 눈도 깜박이고 숨도 쉬긴 하는데 그 이상의 행동은 잘 하지 않았다. 밥을 먹기는 먹는 건지, 잠은 제대로 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안 쓰러지고 버티는 걸 보면 물은 마시는 것 같았다.

호텔에서 만난 도경이 지은 죄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결백한 얼굴로 남의 속 긁는 소리만 늘어놓기에 안 해도 좋을 말만 골라서 떠들고 왔지만, 사실 시우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다 알진 못했다.

첫날은 지한이 울다 얘기하다 또 울기를 반복하며 횡설수설해서 잘 못 알아들었다. 두서없는 이야기 속에서 소현이란 이름과 도경의 이름이 계속 묶여 나온다는 것, 지한이 시우에게 말하지 않고 소현이란 여자를 꽤 오래 만났다는 것. 그리고 도경도 그 여자랑 사귀었다는 것 정도만 알아들었다. 더 말하게 했다간 숨이 넘어가 응급실 신세를 져야 할 거 같아 수면유도제를 두 알 먹여 재웠다.

둘째, 셋째 날은 지한이 방 안에서 나오질 않아 말도 못 붙였다. 출퇴근할 때마다 방문을 열고 살아 있는지만 확인했다. 일주일쯤 됐을 때 한 번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말해보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말하고 싶은 게 없다고 중얼거리는 지한은 차라리 예전처럼 욕하고 뭐라도 때려 부수길 바라게 될 정도로 위험하게 무기력해 보였다. 그래서 싫다는 걸 붙잡고 재차 캐물었다. 말하기 싫어도 말하라고.

「그 새끼가 날 가지고 놀았다. 됐어?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어?」

지한이 시우의 손을 뿌리치며 한 말은 웬만한 욕설보다 질이 나빴다. 그 말은 마치 시우가 그 일을 바랐다는, 도경이 지한을 가지고 놀다 버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다른 말 다 참아도 그것만은 참아주기 싫어 시우도 한마디 했다.

「내가 언제 그 말이 듣고 싶대? 왜 너 혼자 당하고 와서 나한테 화풀이해?」

잘못된 선택이었다. 뭐라도 날아들거나, 아니면 진짜 지한에게 한 대 맞을 수도 있겠다고 각오했다. 그런데 인상을 쓰는 것 같던 지한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주저앉았다.

「맞아. 내가 씨발 멍청해서 당했는데 너한테 화내서 미안해. 나 같은 새끼는 뒈져 버려야지, 너도 내가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지. 그래야 너도 편할 거 아니야.」

발 근처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이 아니었다면 시우는 지한이 울고 있는지도 모를 뻔했다. 그렇게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매사에 너무 큰 소리를 내서 말썽이던 지한이. 소리 내 운다고 혼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 도경에게 고운 말이 나가려야 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복싱을 배워와야 할 체육관에서 사람 패는 기술만 배워와 원장 골치를 썩이곤 했던 지한이 소리도 못 내고 우는 동안 도경은 대화 좀 나누겠답시고 호텔 룸씩이나 빌리는 고상을 떨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의자에 앉은 자세부터 지한이 한 대도 못 때렸을 피부색까지 뭐 하나 거슬리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제일 거슬리는 부분은 그 사달을 벌여놓고 나서도 할 말이 돈 갚아주고 집 사주겠다는 소리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시우였다면 그 시간에 차라리 현관 앞에서 밤낮으로 석고대죄라도 시도했을 것이다.

물론 도경 같은 부류에게 그런 사죄 방식은 고려 대상이 아닐 것이다. 글쎄, 모르겠다. 안 하는 것인지 못 하는 것인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은 그런 부류가 되어보지 못할 것이니 죽을 때까지 모를 운명이었다.

그래도 지한이 도경에게 상처받길 바라본 적은 없었다. 감정적으로 동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말실수를 곧잘 하는 지한이니 감정이 격해져 한 말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이 계속 잊히지 않았다. 도경이 지한을 가지고 놀았다는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냐고 쏘아붙이던 지한의 말.

시우는 도경이 지한을 오래 데리고 다닐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뿐, 지한에게 상처 주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와 생각해보니 모순이 있었다. 도경이 이별을 고하면 지한은 무조건 상처를 받게 되어있었다.

이번처럼 막장 복수극 같은 방식이 아니었더라도, 시간이 흘러 자연스러운 이별을 맞이했어도 지한은 상처받았을 것이다. 사유가 뭐든 먼저 헤어지자고 하는 쪽은 분명 도경이었을 테니까. 따라서 도경과 지한이 궁극적으로는 헤어지리라 믿고, 또 원했던 시우는 결국 지한이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가.

땀이 식었다. 주말이나 되어야 다른 지역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보이는, 평일 오후엔 간혹 지나다니는 차만 아니면 폐허 도시로 착각하고도 남을 거리로 나서며, 시우는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난생 처음으로 인생에 회의감이 느껴졌다. 20년 넘게 옆에 붙어산 결과물이 너도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지, 라는 것을 선뜻 받아들일 사람은 드물었다.

그냥 해버릴걸.

손만 스쳐도 뻐근해지는 몸을 주체하기 힘든 사춘기 소년이었던 그 시절 그 화장실에서 지한의 말을 들어주지 말걸. 우린 이런 거 하면 안 된다는 지한에게 이런 게 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라며 더 밀어붙일걸. 혹시 네가 말하는 게 이런 거냐며 보여줄걸. 누가 와서 불러도 모를 때까지 지한을 보내버릴걸. 그랬으면 지한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놈과 붙어먹을 엄두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욕에는 반드시 끝이 있었다.

시우와 지한이 예시였고 그들과 한 시설에서 자란 모든 원생들이 끝난 성욕의 산 예시였다. 넣고 받는 순간엔 눈에 뵈는 게 없다가도 싸질러 놓은 애새끼를 보는 순간 현실 감각을 되찾는 인간들이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증거. 그런 인간들에게 버려졌으면서 또 똑같이 한 번만 하고 싶어 안달을 내던 소년들. 하기 전엔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였는데 하고 나니 전보다 덜 예뻐 보인다는 소릴 무서운지도 모르고 하던, 어리석은 친구들.

그 화장실에서 밀어붙였다면 지한은 지금까지 시우의 곁에 붙어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진작 갈라서서 소식 한 번 듣기 어려운 사이로 전락해 버렸을지도.

도경은 아직도 지한이 한없이 예쁘고 잘생겨 보이는 시기를 벗어나지 못했나 보다. 한두 번 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일까. 그 재력과 인물이면 손짓만 해도 알아서 벗는 사람들이 줄을 섰을 법도 한데. 지한이 특별나게 잘생겨서일까. 그럴 수도 있긴 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게 생긴 애들과 매일 잘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세상은 넓지만 어느 기준을 뛰어넘게 생긴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시우는 차도 앞에서 멈추었다. 영업 중인 가게가 몇 안 되는 거리라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예상처럼 바로 나오질 않았다. 카페가 널린 아파트 주변을 놔두고 굳이 성가신 위치의 가게를 약속 장소로 정한 레오에게 새삼 짜증이 일었다.

지도를 켜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인도에서 내려온 시우는 곧 빈손을 빼냈다. 착각한 줄 알고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찬가지로 빈손이 나왔다.

휴대폰이 없었다.

집에 두고 온 것은 아니었다. 굴다리를 지날 때까지만 해도 분명 손에 쥐고 있었다. 발열이 심해지는 것 같아 주머니에 넣었었다. 그러고 나서는 꺼낸 기억이 없었다. 휴대폰이 떨어질 만한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봤다. 오는 길에 팔을 부딪친 사람이 한 명 있기는 했다. 부딪치며 떨어진 것이라면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을까, 음악을 듣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경적이 울렸다.

#87

씻고 나온 지한의 귀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음이 걸려들었다. 몇 주 멀리했다고 새로 만난 것처럼 서먹해진 소리는 바로 휴대폰이 진동하는 소리였다. 충전도 안 시키고 방치했던 휴대폰을 다시 켜고 지낸 지도 며칠 됐다.

부활한 지한의 휴대폰에 꾸준히 이름을 띄우는 사람은 시우 하나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묵묵부답인 지한을 포기했는지 통 연락이 없었다. 그래 봐야 몇 명 되지도 않았다. 레오, 쇼핑몰 사장 그리고…… 도경.

머리카락에서 흐른 물방울들이 액정 위로 떨어졌다. 지한은 손가락으로 물방울을 닦아내며 열한 자리 번호를 보고 또 보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99프로의 확률로 광고 전화일 테니 안 받으면 그만이었다. 1프로의 확률을 위해 받아도, 그만이었다.

“여보세요.”

―지한이? 우지한 핸드폰 맞아요?

“네. 누구세요.”

―나 M호텔, 아니 시우네 팀장인데. 본 적 있지? 그때 바에서.

시우의 상사가 지한에게 전화를 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지한은 수건을 내려놓으며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네.”

―그쪽에 I복음병원이라고 알지, 지금 거기로 빨리 가봐. 시우 지갑에 있는 명함 보고 나한테 전화가 왔는데 내가 지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직계가족 그런 거 없다고 하긴 했는데 네가 빨리 가봐야 할 거 같아서. 사고가 그 근처에서 났다는 모양이야.

“사고요?”

―아, 내가 정신이 없어서 그걸, 그게, 면허 딴 지 얼마 안 된 놈이 사람 없는 데라고 막 밟다가 사고가 났대. 응급실에서 전화한 거야. 수술은 이미 들어갔을 거야.

“네?”

사고, 수술, 응급실. 뉴스로 매일같이 접하는 단어들이 어지러이 떠다녔다. 정리가 안 됐다. 그러니까 지금 누구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수술 들어간다는 말밖에 못 들었어. 거기도 엄청 정신없는 거 같더라. 그러니까 네가 빨리 가봐. 나한텐 가족 연락처 물어보려고 전화했던 거 같아. 수술동의 구두로라도 받으려고…….

지한은 그의 앞에 굳건히 서있는 벽을 쳐다보았다. 볼 때마다 그들의 초라한 처지를 상기시키는 것 같아 바꾸자고 말하고 싶었던 낡은 벽지. 휴대폰이 계속해서 팀장의 말소리를 전달했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지한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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