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Outfighter
진료실 벽에 네 개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지난번까진 셋이었다. 추가된 그림은 샛노란 꽃 그림이었다. 여전히 사람을 묘사한 그림은 없었다.
“요즘 꿈꾸는 건 좀 어떠세요?”
“계속 꿔요.”
“내용도 똑같나요? 집에 벌레가 많은데 도경 씨는 그 벌레들을 하나도 못 잡는.”
알면서 왜 묻는 걸까. 도경은 의사의 질문에 미소로 답했다. 의사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녀는 환자에게 마땅히 던져야 할 질문을 던진 것뿐이었다. 도경이 어젯밤 꾼 꿈의 내용은 그만 아니까.
“네.”
사람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 말해줘도 모른다. 거짓말일 수도 있고, 진실과 거짓을 적절하게 섞은 말일 수도 있으며, 제일 중요한 부분은 교묘하게 가린 엉터리 진실일 수도 있다.
컴퓨터 옆 액자가 도경의 눈길을 잠시 앗아갔다. 드디어 이 진료실에도 생겼다. 피사체가 사람인 액자.
“남편분이 야구를 좋아하시나 봐요.”
도경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간 의사가 웃었다.
“아니요. 제가 좋아해요.”
“선생님이?”
“네. 남편은 야구에 별로 관심 없어요.”
모자와 유니폼을 맞춰 입고 야구 경기를 보러 간 남녀. 야구에 관심 없다는 남편은 아내만큼, 어쩌면 그녀보다 배로 즐거워 보였다.
“동거인하고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초점이 다시 도경의 일상으로 맞춰졌다. 제 발로 진료실에 걸어 들어와 앉은 이상, 도경은 고분고분히 환자의 의무를 다하기로 했다.
“그냥…….”
권 회장이 하나뿐인 조카의 리사이틀에 참석하지 않은 도경을 잡으러 왔던 날 이후, 지한은 먼저 잠들지 않았다. 도경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안 자고 기다렸다. 어제만 해도 영화감독에게 양주를 퍼먹이느라 한 시가 넘어서 귀가한 도경을 식탁에 엎어져 조는 모습으로 반겨주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벌떡 일어난 지한은 도경이 씻고 나오자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다. 잠든 줄 알았는데 도경이 침대로 올라가자마자 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팔을 벌려 포옹하듯 안아왔다. 두 팔을 도경의 허리에 감은 지한의 다음 선택은 몸을 웅크리는 것이었다.
안아달라는 건지, 안아주겠다는 건지 헷갈려 도경도 지한의 허리에 한쪽 팔을 얹었다. 원래는 도경을 먼저 만지려 드는 경우가 드문 지한이었다. 잠든 후에 도경을 베개 대용으로 사용하는 버릇은 있어도, 의식이 있을 때는 잘 그러지 않았다.
서로를 마주 보고 끌어안은, 낭만적이지만 불편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잠들 각오를 마쳤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도경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지한이 갑자기 뭘 하다 이제 왔냐고 물어온 것이었다. 사실대로 술을 마시고 왔다고 하니 재깍 누구랑 마셨냐고 물어왔다. 감독이랑 마셨다는 대답에는 감독의 성별을 묻는 질문이, 남자라는 대답에는 의미 모를 한숨이 반응으로 돌아왔다.
지한이 얼굴을 들었다. 곧게 뻗은 코끝이 도경의 목을 스쳤다. 사람이 너무 졸리면 대담해질 수도 있다고 애써 납득하려는 도경의 귀에 한탄 섞인 혼잣말이 날아들었다. 남들 앞에서도 이렇게 좋은 냄새 나면 안 되는데…….
“잘 지내요.”
그래도 어제는 비교적 얌전하게 끝났다. 지한도 요령이 생겼는지 도경이 아무리 머리를 베개에 눌러도 기절할 것처럼 괴로워하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도경과 속도를 맞추려 애쓰는 지한의 하체도, 도경이 특정 지점을 찌르거나 누를 때마다 갈라져 나오는 신음소리도 다 좋았다. 도경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감은 지한이 막판에 그렇게 묻지만 않았더라면.
「지금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대답하기 싫어서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하필 사정 직전에 그런 것을 물어본 지한의 운이 나빴다. 대답하려면 행위를 마무리한 뒤에도 얼마든지 시간은 있었다. 하지만 도경과 비슷한 시점에 사정한 지한도 몸을 떠느라 자신이 던진 질문은 잊은 눈치였다.
“동거인이 잡아준다고 하셨죠?”
의사가 도경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네?”
“꿈에서 나오는 벌레요. 도경 씨는 하나도 못 잡고, 같이 사는 사람이 대신 다 잡아준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꿈에서.”
평정심을 잃을 이유는 없었다. 도경은 발끝을 까딱였다.
“네.”
도경의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그는 알람을 껐다.
“죄송합니다.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오늘도 다시 회사로 가세요?”
“아니요.”
“그럼 어떤 자리에…….”
“제 고향?”
몇 초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의사의 얼굴이 다양한 표정을 드러냈다. ‘고향’이라는 단어가 부모나 집을 가리키는 은유법인지, 혹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쓰였는지를 가려내려는 시도가 도경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농담이었어요.”
언제나 그렇듯 의사의 시선은 한참을 도경에게 머물렀다.
***
병원에서 나온 도경의 다음 행선지는 호텔이었다. 소현의 사촌 중 하나가 결혼하는 날이었다. 미국에서도 잘 어울리지 않았던 대학 동창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 연유는 장 회장이 직접 도경을 언급했다는 황 원장의 전언 때문이었다. 권 회장과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신경 쓸 테니 얼굴도장만 찍어 달라는 부탁에 차마 싫다고 하지 못했다.
황 원장은 권 회장이 도경의 아파트에 찾아와 떤 진상을 모르고 있었다. 권 회장을 곤경에 빠트리지 않으려 유지한 비밀은 아니었다. 앞으로 더 볼 일 없는 사이라는 가정하에 지켜주는 마지막 의리였다.
“요새 이안이하고는 통 만나지 않는 것 같던데.”
그 이름을 들을 각오는 황 원장의 부탁을 수락하면서부터 다졌다. 도경은 미리 연습해온 대사를 읊었다.
“제가 회사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걔가 혼자서 고집을 피우는데 누가 그걸 말려. 이 나이에 손자 놈 때문에 이렇게 골치 아파질 줄 알았으면 자식을 많이 낳는 게 아니었는데.”
홀을 빠져나가던 하객 하나가 끄트머리 테이블에 앉아있는 장 회장을 발견하고 급히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이제 남은 세 명만 보내시면 걱정거리가 없으시겠어요. 장 회장은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사람의 태도로 축하 인사를 받았다. 말 안 듣는 손자 걱정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그래도 언제 한 번 만나서 잘 좀 타일러줘. 가정을 꾸려야 할 나이인데 언제까지 형, 누나들하고 놀러 다니기만 할 거야.”
이안을 만날 계획이 없는 도경은 정중히 미소만 지었다. 빈말에도 경중이 있었다. 아흔이 다 되어가는 노인에게 헛된 희망을 약속하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참 권 회장이 부러워.”
장 회장이 권 회장을 성질머리 더러운 난봉꾼으로 여긴다는 것은 널리 퍼진 기정사실이었다. 이번에도 도경은 묵묵히 웃는 낯만 유지했다.
“이안이도, 기현이도 자네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황 원장에게 직접 언급까지 해가며 도경과 만나길 원했다던 장 회장은 샴페인 한 잔을 다 비우고 나서야 가족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도경은 손가락으로 입가를 눌렀다. 경련이 일기 직전이었다.
“무영이? 걔 러시아에 있잖아.”
감각은 신기했다. 몇백 명이 동시에 떠드는 홀에서도 평생 들어온 목소리 몇을 귀신같이 집어낼 줄 알았다.
“지금은 슬로바키아일걸. 며칠 전에 사진 올라왔어.”
“슬로바키아였어? 나도 사진은 봤지.”
“거기 예쁘더라. 다음 달에 우리도 갈래?”
와인 잔을 들고 서서 떠들던 에스더가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앉아있는 하객들의 머리통 위에서 두 시선이 만났다. 멈칫거린 그녀는 곧 글라스를 테이블에 내려두고 다가왔다.
―난 정말 몰랐어. 이성호도 몰랐고.
작년의 마지막 달이 다 끝나갈 무렵, 에스더에게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지한이 울며 사무실로 찾아온 지 반년이 꽉 차 가던 시기였다.
「누가 뭐래?」
―우리가 뭐 사랑 넘치는 사이는 아니란 거 알아. 그래도 미리 알았으면 우지한 앞에서 그렇게 말하진 않았을 거야. 너도 그래. 무슨 생각으로 걔한테 소현이랑 네 사이를 안 알려줬어?
변명 전화치곤 도경의 책임을 묻는 태도가 당당했고, 사과 전화라고 보기엔 미안하다는 단어가 쏙 빠져 있었다. 용건이 무엇이었든 너무 늦었다. 모든 일엔 놓쳐선 안 되는 시기가 있었다.
도경의 옆자리에 앉은 에스더가 몸을 낮춰 말했다.
“오늘 성호도 왔어.”
“그래서.”
“걔도 우리처럼 네가 안 올 줄 알았을 거야.”
“하고 싶은 말이?”
“결혼할 여자도 같이 왔어.”
도경은 말없이 에스더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입장은 변함없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에스더가 한숨을 쉬었다.
“걔가 잘했다는 건 아니야. 근데 걔도 그때 모르고 그런 거야. 우지한한테.”
“용건만 말해. 나한테 이런 얘길 하는 이유가 뭔데.”
에스더! 다른 테이블에서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 그녀를 찾았다. 자신의 테이블을 돌아본 에스더는 입술을 움찔대며 뭔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그녀는 그대로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도경과 에스더 둘 중 어느 쪽도 또 보자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도경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장 회장에게 얼굴을 비추려 참석한 자리였다. 더 버텨봤자 얻을 이득이 없었다.
주차장으로 향하기 전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었다. 쏟아지는 물 아래 아무리 오래 대고 있어도 비누의 미끈거리는 느낌이 가시질 않아 애를 먹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도경은 에스컬레이터 쪽에서 나는 남녀의 말소리에 걸음을 늦췄다. 일부러 아래층까지 내려와 화장실을 쓴 보람이 없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가서 주문해 놓을까? 아버님 바로 식사하실 수 있게.”
“근데 우린 방금 밥…….”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온 성호가 도경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도경도 아예 멈춰 섰다.
“누구야? 아는 사람?”
좋은 집 딸과 결혼하기 글렀다고 소문난 놈치곤 엄청 멀쩡한 여자를 골랐다. 지금 상태 그대로 상견례에 내보내도 손색없을 행색의 여자에게, 도경은 말해줄 수도 있었다. 남편 될 사람이 강남의 업소란 업소를 다 꿰고 있다는 정보는 알고서 결혼하는 겁니까?
“안녕.”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호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도경을 공격할 순 없으니 엉뚱한 데에다 화를 풀겠지. 시간과 돈을 뿌려가며 가까스로 막아놓은 지한의 과거에 살을 덧붙여 퍼트릴 수도, 짧았던 웨이터 경력을 호스트 경력으로 날조해 뿌릴 수도 있었다. 도경이 엮인 소문이라면 가문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권 회장이 막아 주겠지만 성호가 도경까지 건드릴 확률은 극히 낮았다. 지한만 공격할 것이다.
“어……. 안녕.”
도경은 그런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결혼한다면서.”
성호는 다가서는 도경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어어, 거리며 예비 신부의 눈치를 살폈다. 도경이 언제라도 돌변할 수 있다고 의심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듯했다.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도경은 실소하고 말았다.
“축하드립니다.”
방전된 기계처럼 구는 남자친구의 팔을 놔준 여자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경은 에스컬레이터를 지났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 열까지 센 뒤 에스컬레이터 쪽을 돌아보았다. 결혼이 예정된 남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
지켜야 할 대상은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었다.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가도,
잃지 않으려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
밤마다 안 자고 도경을 기다리는 습관이 생긴 지한은, 낮에도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도경과 함께 소파에 앉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몸을 지나치게 밀착하고 앉는 것이었다. 도경도 그렇지만 지한은 더더욱 부대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형도 저거 칠 줄 알아요?”
어린 시절에도 가족과 살을 맞대고 있는 시간이 드물었던 도경에게 누군가의 체온이 끊임없이 허벅지로, 팔로 전달되는 느낌은 낯설지언정 불쾌하지 않았다. 실은 조금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냥 따듯해서.
“저 곡 별로 안 좋아해.”
도경의 팔에 기대어져 있던 지한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상체를 똑바로 세운 지한이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왜요?”
얼마든지 알려줄 수야 있었다. 매 실기 바로크 곡만 쳐대던 도경이 처음으로 고른 낭만파 작곡가의 연습곡에 음악 선생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낭만적(romantic)으로 쳐야 할 곡을 어째서 로봇같이(robotic) 치느냐는 평가가 도경의 추후 선곡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서.”
그러나 재미없는 과거사를 줄줄이 늘어놓기엔 현재 도경의 상태가 별로 안정적이지 않았다. 눈을 뜰 때부터 고개를 들던 불안은 정오가 넘어가며 배로 크기를 키웠다. 원인은 명확했다.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황 원장이 현경의 딸을 도경에게 데려다주기로 한 시간도 두 시였다.
“형 전화 와요.”
도경은 휴대폰을 들고 일어났다. 따라오려는 지한을 도로 앉혔다. 하나뿐인 조카와 지한의 대면을 조금이라도 미루고 싶었다. 영문을 모르면서도 지한은 시키는 대로 다시 앉았다. 웬만한 개보다 훨씬 말을 잘 듣는 남자의 머리통이 오늘따라 쓰다듬고 싶게 생겼다…… 고, 도경은 잠시 생각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착각이었다.
황 원장의 차는 엘리베이터 입구 바로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운전석 밖에 서 있던 초면의 기사가 도경을 보고 짧게 묵례했다. 조수석과 뒷좌석 문이 동시에 열렸다. 조수석에서 내린 황 원장이 손을 흔들었으나 서율이 훨씬 더 빨랐다.
“도경!”
한때 도경과의 결혼이 꿈이었던 서율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여러 남자친구들을 마음에 두더니, 올해 들어선 남자 따위 필요 없고 그저 회장님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름으로 불러젖히기 시작했다. 통화로 도경, 도경 거릴 땐 장난인 줄 알았다. 오늘부로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왜 나 바이올린 보러 도경만 안 왔어? 진짜 화났어.”
“서율이 너 누가 내 아들 이름 맘대로 부르래. 삼촌이라고 안 해?”
“I don’t understand what you’re saying.”
“쟤가 정말. 도경아, 잠깐 이리 와봐.”
황 원장이 트렁크 쪽으로 가 도경에게 손짓했다. 쇼핑백 두 개를 꺼내 건넸다.
“이게 뭐야.”
“이번에는 꼭 다 먹어. 경매에서 산 거야.”
황당했다. 납작한 유리병 안에 들어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가공된 버섯이었다.
“구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 흰 봉투에 들은 건 네 거, 까만 봉투에 든 건 지한 씨 거.”
“걔 이런 거 안 먹어.”
“어휴, 남자 둘이 살면서 아주 잘하는 짓이야. 그럼 부모님 갖다 드리라 그러든가?”
깡! 개 짖는 소리가 지하주차장에 퍼졌다. 서율의 요구로 주차장 바닥에 켄넬을 내려놓은 기사가 개를 수월하게 꺼내지 못해 고생 중이었다.
“지한이 부모님 없어.”
안 받으려는 도경의 발 앞에 쇼핑백을 내려놓은 황 원장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폈다.
“왜? 돌아가셨어?”
“처음부터 없었어.”
“어머.” 황 원장이 서율에게 들리지 않을 만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부모님 얘기해도 가만히 있더라니.”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 없을 때 집에 오지 마.”
“너 은근슬쩍.”
“내가 빨리 연애했으면 좋겠다며.”
도경은 두 쇼핑백을 집어 들었다. 보기보다 무거웠다.
“엄마가 집에 아무 때나 찾아오는 남자랑 누가 만나고 싶어 하겠어.”
아들이 며칠 전 누구와 한 침대에서 뒹굴었는지 꿈에도 모르는 황 원장은 도경의 당부를 받아들였다. 딱히 지한을 배려해서 한 부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한은 황 원장을 꽤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지한이 황 원장에게 어찌 봤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황 원장은 무르지 않은 여자였다. 도경에게 조금의 흠집이라도 나는 순간 지한을 효과적으로 괴롭힐 플랜을 A부터 Z까지 짤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거리를 가급적 벌려놓는 편이 도경 자신을 위해서도 좋았다.
기어이 주차장에서부터 개를 꺼내 안은 조카 덕분에 도경은 버섯이 담긴 쇼핑백 두 개와 켄넬, 그리고 어린이용 백팩까지 도합 네 개의 짐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층수가 올라갈수록 도경의 불안도 심해졌다. 그는 서율에게 황 원장의 말을 상기시켰다. 너 아까 할머니가 하신 말씀 들었지. 삼촌 친구한테 인사 잘해. 아홉 살 소녀는 뾰족한 턱을 도도하게 까딱였다.
“너는 누구야?”
믿은 도경이 바보였다. 예의 바르게 굴지 않으면 혼자 지하철로 집에 와야 할 것이란 친할머니의 협박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린 서율은 개를 만지려 바닥에 무릎 꿇은 지한에게 대뜸 반말을 했다. 어린애와 언쟁을 벌이는 대신, 지한은 도경에게 어찌해야 하냐는 눈짓을 보냈다.
“서율. 한국어 못하는 척하지 않는다고 할머니한테 약속했을 텐데.”
“이름이 뭐야?”
도경의 말을 깨끗이 무시한 서율이 기죽지 않고 지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지한도 도경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지한.”
“이름이 두 글자야? 지, 한?”
“우, 지한.”
“한국 사람이야?”
“어.”
지한의 불퉁한 목소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이 둘 역시 오늘을 끝으로 다시는 한 자리에 두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서율을 상대하는 지한이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어도 도경에게는 차이점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지한은 서율을 재수 없는 꼬맹이라고 판정했다.
“오빠, 리즈 알아?”
한국어 초보라도 된 것처럼 너, 너 거리더니 이제는 오빠란다. 낯짝이 두꺼워도 유분수지.
“알아.”
“어떻게? 그레이스랑 친구야?”
혼자서 서율을 상대해보려던 지한이 백기를 들었다. 그레이스는 또 뭐냔 눈빛에 도경은 열심히 입술을 벙긋거렸다. 우리 엄마.
“친구는 아닌데. 알긴 알아.”
“아하.”
지한에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개를 주시하던 서율이 그러면, 하고 선심 쓰듯 제안했다.
“리즈랑 나랑 나가서 놀래?”
지한이 머뭇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서율이 냉큼 개를 안아 들었다.
“싫으면 집 지키고 있어. 나는 도경이랑, 리즈랑 놀고 올게.”
개가 발버둥 쳤다. 서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개를 더 꽉 안았다. 지한이 어쩌냔 눈으로 도경을 올려다보았다. 지한은 겉과 속의 결이 다르지 않은 인간이었다. 얼굴로 웬만한 속마음은 다 드러냈다. 지금 지한은 서율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는 중이었다.
“권서율. 너 계속 그렇게 말하면 이따 영화 보러 안 가.”
“왜? 할아버지가 이름 불러도 된다고 그랬어.”
“그건 영어일 때, 아니 영어로도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라고 불러야지.”
유치원생이었을 때부터 권 회장의 말에도 콧방귀를 잘 뀌던 서율이 도경에게 주눅들 리 없었다. 들은 척도 안 하고 신발장으로 가는 조카의 고집에 도경은 어쩔 수 없이 개 목줄을 꺼냈다.
“오빠는 왜 와? 같이 놀 거야?”
개에게 목줄을 채우고 현관을 여는데 서율이 뒤를 보며 쏘아붙였다. 신발에 막 발을 넣던 지한이 나쁜 짓을 들킨 것처럼 움찔거렸다. 지한에게 이 이상의 당황을 안기지 않기 위해, 도경은 서율의 주의를 끌었다.
“왜 나는 이름 부르면서 쟤는 오빠야.”
“쟤는 오빠처럼 생겼어.”
“나는 쟤라고 해도 되지만 넌 안 돼.”
또 뻗대면 싫은 소리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서율은 의외로 빨리 수긍했다.
“응. 그러면, 저 사람은 오빠처럼 생겼어.”
“오빠처럼 생긴 게 뭐야.”
뒤로 다가온 지한을 힐끗댄 서율이 도경에게 붙어서 속닥거렸다. 이따 알려줄게. 지금은 조용히 해.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을 지한은 모르는 척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쳐다보았다.
주말의 아파트 단지는 영유아들과 부모들로 적막을 잃었다. 전동킥보드, 자전거, 공, 줄넘기 등 저마다 뭐 하나씩은 가지고 나온 애들이 신나서 소리를 질러댔다. 혈기 넘치는 애들의 발에 치이지 않도록 개를 들어 안은 서율이 놀이터를 물끄러미 보다 불쑥 말했다.
“Mom said she loves me more than she loves Dad.” 엄마는 아빠보다 내가 더 좋다고 그랬어.
지한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보려 뒤를 살핀 도경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한이 없었다.
“Dad said he loves me more than he loves Mom.” 아빠는 엄마보다 내가 더 좋다고 했고.
스물일곱 먹은 지한이 아파트 단지에서 길을 잃을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리 놀랐는지 모른다. 놀이터 입구에 못이 박힌 듯 서서 어린애들을 구경하는 지한을 다시 확인한 도경은 마음 놓고 서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Who do you love more, me or Liz?” 누가 더 좋아, 나랑 리즈 중에서?
“비교 대상이 틀렸어.”
“비교 대상?”
“리즈는 개고 넌 사람이잖아. 비교는 같은 것끼리 하는 거야. 개는 개끼리, 사람은 사람끼리.”
끄덕거린 서율이 질문을 정정했다.
“나랑 우리 아빠. 둘이 있으면 누가 더 좋아?”
“너.”
서율이 턱을 치켜들었다. 개를 내려주고 앞으로 걸어가는 뒤통수에서 흡족한 기운이 피어났다.
“어!”
자꾸만 내달리려는 개와 씨름하던 서율이 우뚝 멈춰 서서 하늘을 가리켰다. 작고 하얀 손 옆으로 그보다 더 흰 얼음의 결정체들이 떨어져 내렸다. 등장 이래 처음으로 서율의 얼굴이 제 나이에 맞는 천진함을 되찾았다.
“이런 거 뭐라 하는지 배웠어.”
서율이 도경에게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여린 손바닥엔 체온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버린 눈 대신 물기만이 남아 있었다.
“뭐라고 하는데?”
“Crystal clear.”
눈이 온다는 것을 알기는 하는지, 흥분한 개가 본분을 망각하고 토끼처럼 점프했다. 서율도 개와 함께 폴짝폴짝 뛰었다. 한없이 멀어지는 조카와 개를 따라가려 한 발짝 내딛은 도경은, 아까부터 말 한마디 없이 따라오기만 하는 지한의 존재를 상기했다.
다음 겨울이 올 때까지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눈이 내리는 길 위에서, 지한이 걸어오고 있었다. 빨간 목도리에 코를 묻은 지한의 시야는 자신을 기다리는 도경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눈송이들은 얼굴에 닿는 족족 물이 되어 맺혔다.
삶이 맑고 명명백백하게 되감기된다.
죽여버리고 싶은 바람과 죽고 싶은 바람. 양보를 모르고 팽팽히 대립하는 두 가지 갈망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상대를 죽여버리고 싶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 우회하고 좌회하다 보면 어느덧 총구는 도경을 겨누고 있었다.
알 수 없었다. 도경을 똘똘 감고 풀어주지 않는 열망은 과연 누구를 태워야 끝날 열망이었는지. 진정으로 죽이고 싶었던 대상이 타인인지, 자신인지. 그 두 살의가 근본적으로 다른지, 같은지.
알 수 없었다. 지한이 도경을 죽이고 싶어 하는 날이 와도 과연 도경은 지한을 필요로 할지.
알고 싶었다. 지한이 도경을 죽일 수 있을지.
알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지한아.”
그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안으로 들어온 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도경은 지한에게 다가섰다.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면 적어도 지한이 도경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한 현재에 말해두고 싶었다. 한 번쯤은.
도경은 빨갛게 얼어붙은 지한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잘못 알아듣는 일이 없도록 글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했다.
***
한 글자, 두 글자, 세 글자.
***
도경은 조카의 리사이틀에 참석하지 않은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멀티플렉스에는 참 다양한 가게들이 포진해 있었다. 휴대폰 가게에서 케이스를 두 개 고른 서율은 바로 옆의 간식 가게에서 800g어치 캔디를 샀다. 맞은편의 잡화점에선 일회용 운명이 점쳐지는 머리띠를 다섯 개나 집었다. 그런 다음엔 밥 대신 나초와 팝콘을 저녁으로 먹겠다고 우겼다. 두 손 두 발 다 든 도경은 서율이 원하는 모든 메뉴를 주문했다.
침대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좌석은 침대보다 더 편한 감도로 몸을 받쳤다.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동안 도경은 스무 번 이상 잠들 위기를 겪었다. 그나마 수면제 장기 복용 환자라 졸기만 했다. 덕분에 영화가 끝난 후 재미있지 않았냐며 호들갑 떠는 서율에게 적당히 아는 척 맞장구를 쳐줄 수 있었다.
차로 돌아와 켠 휴대폰에 메시지가 여럿 와있었다. 지한에게 온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리즈 데리고 나왔어요]
혼자서 개를 데리고 갈 만한 곳이 어디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의문은 아이돌 그룹의 말단 매니저에게 온 메시지를 읽고 나서야 풀렸다.
[이사님 우지한 씨 저희랑 성동구 ○○로 31에 있습니다]
[강아지도요]
휴대폰을 집어넣은 도경은 기어를 바꿨다. 시작부터 불안했던 하루가 끝까지 평탄하지 못할 징조를 보였다.
운전하는 내내 도경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갔다. 조수석에 남의 자식이 타고 있지만 않았어도 신호 위반을 마다하지 않고 액셀을 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본가 골목에 입성할 때까지 운전수칙을 준수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카의 생명은 소중했기에.
“다음에 놀러 가면 또 오빠 있어?”
속도를 늦춘 차 안이 워낙 조용해서 그런지, 서율의 말소리가 배로 크게 들렸다.
“그럴걸.”
“도경은, 삼촌은 좋겠다.”
“왜?”
“그 오빠 같은 친구 있어서.”
“넌 나보다 친구 훨씬 더 많잖아.”
“그런 친구는 없어.”
“그런 친구?”
차가 골목에서 가장 높고 큰 저택 앞에 섰다. 모르겠어, 하고 서율이 짜증을 냈다. 아무리 휴대폰을 만지작대도 그럴싸한 답변이 안 나왔던 모양이다.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 친구랑 같은 거 아니야.”
“너희 엄마아빠한테는 내 친구 얘기 하지 마. 우리끼리 비밀.”
“비밀 하면 나랑 또 시네마 같이 가?”
“응.”
“좋아.”
대문이 열렸다. 현경을 본 서율이 벨트를 풀고 뛰어나갔다. 딸이 땅에 흘린 잡동사니를 주워든 현경이 운전석 창을 두드렸다. 들어보나 마나 고맙다느니, 잠깐이라도 들어오라느니 도움 안 되는 말을 늘어놓을 것이 뻔했다. 도경은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 핸들을 돌렸다.
동승자가 사라진 차는 자유롭게 속도를 냈다. 과속은 30분 거리를 15분으로 단축했다. 좁아터진 가게 앞에 대충 주차한 도경은 지체 없이 매니저가 알려준 주소로 들어갔다.
지하에 위치한 바는 걸음을 조심해야 할 정도로 어두웠다. 홀 한가운데 있는 자리를 제외한 나머지 테이블들이 죄다 비어있었다. 멤버들끼리 가게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술을 마시는 일은 종종 있었다. 거기 지한이 끼는 일이 처음이었을 뿐.
“이사님.”
카운터 근처에서 휴대폰을 보던 말단 매니저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매니저의 어깨를 눌러 앉힌 도경은 검지로 입술을 눌렀다. 쉿. 도경의 의중을 파악한 매니저가 얌전해졌다.
“하니는 우리 건데.”
“팀을 배신하고 더 잘생긴 사람한테 가냐?”
“배은망덕한 놈.”
도경이 온 줄도 모르고 떠드는 목소리들이 우렁찼다. 지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 년이 훌쩍 넘어가도록 도경은 남들과 어울려 노는 지한을 본 기억이 없었다. 남들과 술을 마신 지한이 어떤 식으로 취기를 드러내는지도 전혀 몰랐다. 만일 지한이 테이블에 고꾸라져 자고 있느라 조용한 것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즐거워하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려나.
“형 때문에 나 쫓겨나면 재워줄 거야?”
카운터를 돌아나간 도경의 눈이 지한을 제일 먼저 잡아냈다. 지한은 끝자리에 앉아있었다. 그의 바로 옆자리는 개가, 그 옆엔 아이돌 그룹 멤버가 앉아있었다. 도경은 일차적으로 안도했다. 개가 버티고 있는 한 다른 사람과 몸이 자주 닿진 않을 테니.
“그건 안 되는데.”
“왜? 형 가족이랑 살아?”
곤란하게 웃는 지한과 도경의 눈이 마주쳤다. 지한은 도경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매니저가 도경에게 가게 주소를 찍어주는 순간부터 도경의 등장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사님?”
놀란 것은 지한을 제외한 모두였다. 지한과 같은 소파에 앉아있던 멤버들 필두로, 맞은편의 멤버들도 하나둘 일어섰다. 도경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연예인들의 술자리에 나타난 소속사 대표라니. 파티를 망친 불청객이었다.
“리즈 여기 있어요. 혼자 두고 오면 무서울까 봐.”
“나도 보여.”
개를 무릎 위로 옮긴 지한이 엉덩이를 움직여 도경이 앉을 공간을 내주었다. 마음 같아선 지한을 끝자리에 앉히고 도경이 대신 가운데 앉고 싶었다. 참았다. 불청객이 된 기분만으로도 충분히 언짢았다. 꼴값까지 떨긴 싫었다.
“형이 엄청 반가운가 보다.”
부르지 않아도 도경의 무릎 위로 올라온 개를 가리켰다. 멤버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인사불성이 되지 않은 지한은 완전히 맑은 정신도 아니었다. 둘만 있을 때 사용하는 말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취하긴 취했다.
“얼마나 마셨어?”
평소 나이에 관계 없이 모든 소속 연예인과 직원에게 존댓말을 쓰는 도경도 오늘만큼은 될 대로 되라 싶었다. 반말은 그 무엇의 증거도 될 수 없었다.
“나 얼마나 마셨지.”
“형 별로 안 마셨어요. 칵테일 두 잔에 와인 두 잔인가?”
“그게 별로 안 마신 거예요?”
지들이 병나발을 분다고 지한까지 같은 취급하기에 오류를 바로잡아줬을 뿐이건만 테이블 공기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도경은 후회했다. 들어오지 말고 지한만 나오라고 했어야 한다. 그랬어야 지한에게도 미운털 박힐 가능성이 줄어들었을 것을.
“저 담배 좀…….”
한 멤버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지금 거리에 사람 많아요.”
“아, 네. 이사님. 여기 안에 흡연 부스 있어요. 전자담배라서.”
“나도 피우고 싶다.”
지한이 혼잣말했다. 맨정신일 때도 곧잘 생각하는 바를 소리 내어 말해 곤란해지곤 했던 그였다. 요새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지금은 술이 들어갔으니 그럴 수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 쪽은 담배를 피우겠다고 일어선 멤버였다. 갈 거면 가고 말 거면 말 것이지 왜 서서 도경의 눈치를 보고 있단 말인가.
“둘이 같이 피우고 오면 되겠네.”
지한의 눈꺼풀이 늘어진 테이프처럼 굼뜨게 내려왔다 올라갔다. 그는 담배 주인에게 물었다. 그래도 돼? 물은 사람은 지한이건만, 질문을 받은 멤버는 왜인지 끝까지 도경의 눈치를 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이 담배를 피우러 갔다. 남은 멤버들은 도경과 눈만 마주치면 고칠 데 없는 자세를 다시 고쳐 앉았다. 정작 도경은 그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원래도 술을 마시면 저렇게 흐물흐물해졌던가. 제대로 취한 지한을 처음 보았던 날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주는 양주를 다 받아 마신 지한은 흐물흐물한 정도가 아니었다. 도경이 바지를 내리고 속옷 안을 만져도 제지를 안 했으니.
“이사님도 한 잔 드릴까요?”
저보다 크고 센 동료들도 부리지 못하는 배짱을 부린 주인공은 한이었다. 관계자들과 팬들, 그리고 지한에 의해 ‘한이’라고 불리는.
“그래요.”
와인바 사장이 새 잔을 내왔다. 한은 두 손으로 든 와인 병을 조심조심 기울였다. 촛불보다 조금 더 환한 불빛에 비친 얼굴이 처음 보는 듯이 새로웠다. 새로우나 낯설지는 않았다. 앨범에 쓰일 사진과 뮤직비디오를 수십 수백 번 들여다볼 때는 미처 몰랐던 특징들이 총알처럼 날아와 도경의 눈에 박혔다.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피부를 가진 한의 눈매는 끝으로 갈수록 쳐졌다. 와인 하나 따르는 데도 심혈을 기울이는 손은 작았고, 손목은 가늘었다. 지한과 나란히 세워두면 단연 보호받아야 할 쪽으로 보일 것이다.
“조금만 따랐어요. 드셔보시고 괜찮다고 하시면 더 따라 드릴게요.”
지한 역시 조금은 그런 기분으로 연하의 남자를 대하고 있을지도.
도경은 유리 글라스 밑바닥에 깔린 붉은색 액체를 바라보았다. 삐……. 음악소리에도 묻히지 않은 소음이 희미하게 아우성쳤다. 이명이었다.
한과 눈을 맞춘 도경은 입술 끝을 올렸다. 뽀얀 얼굴이 눈에 띄게 안심했다.
“염색을 다시 하는 게 어때요.”
안심했던 얼굴이 곧바로 어두워졌다.
“저, 제 머리요?”
“네.”
“이사님 보시기에 이 색이, 어, 저랑 안 어울려요?”
가게가 떠나가라 시끄럽게 떠들던 멤버들은 그룹 내 최고 인기 멤버와 회사 대표의 대화를 놓치지 않으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그 정신머리를 유지한다면 10주년을 넘기는 장수 그룹이 되는 것도 영 헛된 꿈은 아니었다.
“네.”
“아……. 그, 그러면 무슨 색으로 할까요?”
“글쎄요.”
잔을 옆으로 밀어둔 도경은 입술 끝을 조금 더 위로 올렸다.
“갈색만 아니면 전 다 괜찮을 것 같네요.”
블루스가 흘러나오는 실내는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덟 명까지 수용 가능한 직사각형 테이블에 끼얹어진 적막 앞에선 장인의 연주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공기 중 단내가 섞여 들어왔다. 도경보다 개가 먼저 사탕 냄새를 몰고 온 지한을 반겼다. 지한이 도경의 팔에 제 팔을 기댔다. 담배를 피우러 가서 몰래 술을 마시고 왔는지 아까보다 더 취해있었다. 계속 뒀다간 어깨에 팔이 아니라 온몸을 기대는 짓도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았다.
도경은 개를 한 손으로 안았다. 다른 손으로는 지한의 팔목을 잡고 일으켰다. 지한은 뻗대지 않고 일어났다.
“매니저한테 카드 주고 갈 테니까 편하게 마셔요. 클럽엔 가지 말고.”
어째서 도경이 지한을 데리고 일어나는지, 지한은 또 왜 자연스럽게 따라 일어나는지 모르는 멤버들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나마 그중에서는 제일 눈치 빠른 리더가 일어나 인사했다. 들어가세요! 그제야 나머지도 우르르 따라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형도 잘 가!”
이번에는 미리 일어나서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약속대로 카드를 주려던 도경은 자유로운 손이 없음을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지한의 손목을 잠시 놨다. 접대용 카드를 빼서 넘기고 다시 손을 뒤로 뻗었다.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새 어딜 갔나 하고 뒤를 봤다. 카운터에 비스듬히 기대고 선 지한이 피식거렸다.
“뭐 해. 빨리…….”
빨리. 그 부사 뒤에 와야 할 명령어가 무엇인지 도경 본인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지한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지한의 손에 잡힌 것은 도경의 손목이나 손이 아니었다. 코트 소매였다.
차에 타기 직전까지 지한은 지하에서부터 잡고 온 도경의 코트 자락을 꼭 붙들고 있었다. 도경이 조수석 문을 여는 데 방해가 되자 비로소 놔주었다.
운전대를 잡은 지 불과 몇 분 만에 가게 안에서는 맡지 못했던 술 냄새가 차 안에 퍼졌다. 창문을 내려봐도 이미 퍼진 알코올 향은 잘 빠지지 않았다. 자는지 어쩌는지 조수석에서는 개가 헥헥대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만일 이것이 화를 내 마땅한 상황이라면 큰일이었다. 화가 전혀 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마음이 썩 가볍지는 않았다. 가슴 위에 뭘 얹어놓은 것처럼 묵직했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분노는 아니었다.
“대리님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잠든 줄 알았던 지한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뭘.”
“쟤네랑 놀지 말라 그랬는데, 대리님이.”
도경은 전방을 주시했다. 가로등 불빛이 유리창 위로 번졌다.
“너는 유 대리가 걱정돼, 지금?”
“아. 형도 쟤네랑 놀지 말라 그랬어요?”
“…….”
“아닌데. 형은 괜찮잖아요. 사진도 올리게 해주고.”
신호에 걸려 기어를 바꾼 도경은 말을 하다 만 지한을 쳐다보았다. 헛웃음이 났다. 창문에 머리통을 기댄 지한의 눈이 감겨 있었다. 그 와중에도 개는 소중히 끌어안고서. 차 안에서 얼마나 깊이 잘 수 있겠냐마는, 도경은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설 때까지 속도를 내지 않았다.
언제부터 다시 눈을 뜨고 있었는지 지한은 시동이 꺼지자마자 알아서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동작이 약간 굼뜬 감은 있어도 걸음걸이는 멀쩡했다. 집 안에 들어선 후에도 도경이 수고할 일은 없었다.
피곤하단 핑계로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면 그걸 놔둬야 하나 어쩌나 골치가 아팠는데 알아서 욕실로 잘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 한숨 돌리려는 도경을 따라온 개가 짖었다. 큰 껌을 하나 물려주었다. 집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씻고 나오니 지한이 어김없이 도경의 침대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이라도 새로 생긴 습관이 사라지진 않았다. 먼저 잠들지 않고 도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바로 눕는 대신 도경은 지한의 발 옆에 걸터앉았다. 지한이 긴 다리를 구부리며 침대 헤드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보통의 관계에선 이럴 때 어떤 말을 건넬까. 보통의, 연인들이라면. 부질없었다. 보통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일반적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냥 하고픈 이야기를 했다.
“낮에 서율이 때문에 기분 나빴지.”
“아닌데.”
도경이 서율을 언급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부정하는 속도가 재빨랐다. 분명 최근에 다시 자른 머리카락이 그새 또 내려와 눈을 찌를락 말락 했다. 도경은 지한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천천히 뒤로 넘겼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도경의 손에 물기를 옮겼다.
“어렸을 땐 지금보다 귀여웠어. 크면서 좀.”
“좀?”
“누굴 닮아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떨어지는 도경의 손으로 아쉬워하는 눈길이 따라붙었다.
“형 닮았잖아요.”
“내가 그렇게 싸가지 없어?”
“성격 말고 분위기나 생긴 게.”
“지금 칭찬하는 척하면서 욕하는 거야?”
지한이 킥킥거렸다.
“아니라니까. 걔 예쁘게 생겼다고. 놀이터에서 놀던 애들도 보고 예쁘다고 했어요. 공주 같대요.”
도경을 닮았다고 해놓고 바로 갖다 붙이는 미사여구가 그런 것이라니. 이따금 간절히 알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지한의 눈으로 보는 도경 본인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그래?”
어떤 눈빛으로 지한을 보며, 어떤 목소리로 지한을 부르는지.
“네.”
뒤늦게 부끄러운 기색이 된 지한은 눈을 내리깔았다. 안개처럼 깔린 침대 조명이 비현실적인 이목구비로 이루어진 얼굴에 음영을 드리워 극적인 효과를 냈다.
도경에게 불필요했던 잡다한 조명 기능은 지한에 의해 존재가치를 재확립했다. 어둠을 싫어하는 지한은 너무 환한 조명도 부담스러워했다. 반사판과 붙어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진 그가 밝은 빛을 무조건 싫어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고, 특정 상황에 한해서만 꺼려했다. 다 벗은 몸을 도경에게 보여줘야 할 때.
지한이 한쪽 다리를 뻗었다. 그의 발끝이 도경의 허벅지를 건드렸다. 도경은 지한의 발목을 감쌌다. 바짝 긴장한 종아리를 지나고, 세워질 듯 말 듯 움찔대는 무릎을 지나 허벅지를 눌렀다. 지한이 밭게 호흡했다. 손으로 골반을 더듬으며 올라간 도경은 셔츠 안의 허리를 매만졌다. 지한이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갈비뼈가 만져졌다.
“어떻게 하고 싶어?”
가슴팍으로 옮겨간 손이 끝을 세웠다. 이미 단단해지기 시작한 돌기가 손톱에 긁혔다. 허리를 들썩인 지한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도경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항변하듯. 혹은, 알아들었으나 자신도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는 듯.
도경은 지한의 셔츠 안에서 손을 빼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지한은 도경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선이 뚜렷한 눈을 여러 번 깜박이고, 잘생긴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머리통을 살짝 기울이기까지 한 끝에, 마침내 알아들었다. 정말로 알아들은 것인지는 지한 본인만 알 터였다. 적어도 도경은 그렇게 해석했다. 지한이 드디어 도경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지한의 손이 도경의 턱을 스쳐 귀 뒤를 만졌다. 머리통을 마사지하듯 누르며 움직인 손이 머리카락을 헤치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폈다. 그렇게 편 손가락들이 뒷머리를 살며시 잡았다가 놓았다. 지한의 얼굴이 다가왔다. 힘을 푼 이가 도경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까지 부드럽고 간지러운 접촉도 깨무는 행위로 간주된다면.
뭐든 해보라는데도 입 안 하나 정복하지 못하고 혀로 앞니와 아랫니만 건드리는 동안, 지한은 꾸준히 도경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았다. 꽉 쥐는가 싶으면 곧바로 풀어주었다. 잡아당기나 싶으면 또 금세 풀어주었다.
갚아주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도경이 그렇듯 지한 역시 도경의 눈으로 보는 지한이 궁금한 것일지도 몰랐다. 도경이 지한에게 늘 하는 것처럼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밀치면 이해가 쉬워지리라 믿었을 수도 있다, 얼마든지.
그렇기에 도경은 가슴팍에 닿아오는 지한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몸이 밀려나며 매트리스에 등이 묻혔다. 이제는 정말로 지한이 도경을 흉내 내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지한이 도경의 허리를 누르며 올라왔다. 호흡이 턱 막혔지만 이내 견딜 만해졌다. 늘 도경의 것이었던 위치를 선점한 지한이 숨을 골랐다. 떨림을 숨기는 데 실패한 손이 도경의 이마를, 정수리를, 귀를, 목을, 어깨를 그리고 쇄골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도경이 가만히 있자 용기를 얻은 손은 얼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위에 도전했다. 눈. 다가오는 손끝을 본 눈이 본능적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감긴 눈꺼풀을 건드리는 손끝이 쉼 없이 진동했다.
웃기지 마.
도경은 자기 자신을 꾸짖었다. 지한은 도경을 흉내 낼 수 없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는, 고작 그런 자세로는 도경이 지한에게 가한 고통의 일부분도 돌려줄 수 없었다.
“형.”
눈꺼풀이 올라갔다. 도경의 양 뺨을 감싼 채로, 지한이 띄엄띄엄 말했다.
“나도…….”
푹신한 입술이 뺨을 스쳤다. 도경의 귀를 씹어 삼킬 것처럼 벌어진 입이 타오르는 숨에 얹어 글자들을 뱉어냈다. 지한은 글자 하나하나를 빚어내듯 느리고 정확하게 발음했다. 한 글자, 두 글자, 세 글자. 지한이 온몸의 무게를 실어 도경을 껴안았다. 눅눅해진 목소리가 용케 울지 않고 도경을 북돋웠다.
울어도 돼요.
도경은 눈을 감았다.
***
듣고 나면 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을 것 같았던 말을 듣고 나니
질기게 살아남고 싶어졌다.
로 블로(Low bolw)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