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굴절
01.
건물 1층에 있는 헤어숍에서 머리칼을 자르고 펌을 넣었다. 피어싱이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 것 빼고는 눈썹을 가리는 머리칼이 사라져 속이 확 뚫렸다. 머리 손질이 끝나갈 무렵 유리문 안으로 들어오는 박래현이 거울에 비쳤다. 들어서는 즉시 나를 발견한 남자는 긴 다리를 움직여 성큼성큼 다가왔다. 널따란 헤어숍에서 뒷모습만 보고 바로 나를 찾아내는 남자가 신기했다.
“상무님, 오셨습니까? 준영 씨 얼굴형에 맞게 자르고 웨이브를 넣었는데 인물이 확 살아납니다.”
헤어디자이너 조수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게서 가운을 벗겼다. 의자 뒤에 선 박래현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질반질 빛나는 내 얼굴을 거울을 통해 물끄러미 응시했다. 머리칼도 단정하게 정리되어서 지금껏 내가 본 얼굴 중에 제일 잘생긴 얼굴을 박래현이 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치자 박래현이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멀쩡한 내 모습에 영 적응이 안 된 모양이었다. 한 달 동안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하고서 언제 흘러내려도 이상하지 않은 파자마 가운만 입고 다녔던지라 나도 말끔한 차림을 한 내가 눈에 익지 않았다.
“마음에 들어요. 수고했습니다.”
그는 내게 일어나라는 눈짓을 보냈다. 디자이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박래현과 나란히 미용실을 나가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박영범을 보낼 줄 알았는데 그가 직접 데리러 오다니 의외였다.
“점심은 먹었어요?”
“네. 잘 먹었습니다.”
“이거 받아요.”
박래현은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내 무릎에 올려놓았다. 호기심에 안을 들여다보니 오일과 바디 스크럽 제품, 디퓨저, 그리고 내 손바닥 크기의 거북 인형이 우글우글 들어 있었다. 스파에서 파는 거북 인형을 색깔별로 다 쓸어 담은 것 같았다. 나는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거북 한 마리를 주물럭거렸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등딱지가 말랑말랑했다.
“반은 준영 씨 거고, 반은 아이 겁니다.”
박래현의 아이. 임신한 순간부터 아이에 관한 모든 권리는 박래현에게 귀속된다고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다. 나는 아이 얼굴을 보는 것도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얼른 생겼으면 좋겠어요?”
박래현이 서두르지 않아서 나만 아이를 기다린 줄 알았는데 박래현도 관심을 보여서 마음이 놓였다. 그가 아이를 아끼고 예뻐해 준다면 아이는 내가 없더라도 꼭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윤준영 씨, 내가 당신과 섹스하는 목적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내 구멍이 좋아서 아닌가? 임신이 목적이라면 매일 밤 나를 찾아오는 대신 히트 사이클에 날 안아야 논리적으로 맞았다. 내 구멍에 홀려서 화가 난다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데 이 남자는 자존심이 상해 그 사실을 부인하고 싶을 것이다.
“아이 얘기는 한 번도 안 하시길래 별생각 없는 줄 알았어요. 다른 오메가도 많았을 텐데 그땐 왜….”
질문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와 몸을 섞는다고 해서 이 사람에게 뭔가를 물어볼 상황은 아니었다. 박영범이 내가 박래현을 함락시킨 최초의 오메가라고 한 걸 보면 이전 오메가들은 인공수정을 시도하다 실패해서 쫓겨난 듯했다. 나처럼 돈이 필요한 오메가들이었을 텐데 이런 악질을 만나 인생 조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 미래도 그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래현과 함께하는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최근 들어 너무 해이해졌다. 이 남자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혼잡한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러 차는 백화점 입구에서 멈췄다. 먼저 내린 박래현은 내가 내리길 기다렸다가 차 문을 닫았다. 한 달을 혼자 지내다시피 해서 밀려드는 인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잠시 휘청거렸다. 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싸 쥔 박래현이 백화점 2층에 있는 매장으로 나를 데려갔다.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가 입구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박래현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뒤 우릴 매장 안으로 안내했다.
“상무님, 어제 신상품이 입고 됐습니다. 상무님 마음에 드실 것 같아서 따로 빼 뒀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남자는 어딜 가든 융숭하게 대접받았다. 무관심과 냉대에 익숙해서 나는 이런 환대가 거북했다. 매니저는 매장에 비치된 소파에 박래현이 앉도록 권한 다음 차를 준비시켰다. 내가 옆에 앉은 것을 확인한 박래현이 맞은편에 서 있는 매니저에게 눈을 돌렸다.
“제가 부탁한 물건은 다 준비되었습니까?”
“네. 이분이 입으실 거죠? 한번 입어 보시겠습니까?”
“윤준영 씨, 옷 갈아입고 나와요.”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드레스 셔츠와 바지를 챙긴 매니저가 피팅룸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는 피팅룸 안까지 따라 들어와 조심스럽게 옷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갔다. 입고 온 옷을 벗고서 드레스 셔츠를 입었다. 드레스 셔츠는 소매 부분이 넓은데 단추는 없고 소매에 구멍만 뚫려 있었다. 이러면 소매가 벌어져 불편할 텐데 실용성 없는 옷을 디자인한 사람이나 그 옷을 사는 사람이나 똑같이 속이 없다 싶었다.
게다가 광택이 흐르는 흰색 천에 왼쪽 가슴 부근에 연보라와 분홍색 꽃이 수놓아진 드레스 셔츠는 화려하고 우아해서 평소에 입기엔 적당치 않았다. 나는 단추를 다 잠그고서 검은색에 가까운 진회색 정장 바지를 입었다. 허리띠를 할 필요도 없이 바지는 내게 꼭 맞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 신랑처럼 의젓하고 늠름했다. 평소에 청바지에 티 하나만 달랑 입고 다녔기에 거울 속 모습은 내가 아니라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날아온 나 같았다. 새삼 박래현 본가에 간다는 사실이 실감 나 괴로워졌다. 도무지 박래현 속을 알 수 없어서 그저 답답하고 화가 났다. 어떤 일이든 이유와 근거가 있을 터인데 박래현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 적이 없어서 항상 추측과 억측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피팅룸을 나가 박래현 앞에 서자 차를 마시고 있던 박래현이 천천히 나를 훑어 내렸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저희 본사 모델보다 더 훌륭하게 옷을 소화하시네요.”
비싼 옷을 팔기 위해서겠지만 전문가의 사탕발림은 은근히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윤준영 씨, 옷 마음에 들어요?”
“다 좋은데 소매가 너무 불편해요. 벌어져서 음식 먹을 때 실수할 거 같아요.”
나는 박래현 앞으로 손목을 내밀어 벌어진 소매를 보여 주었다. 매니저가 웃으며 벌어진 구멍에 뭔가를 끼워 넣어 소매를 단정히 여몄다.
“커프스 링크스라고 단조로운 드레스 셔츠에 포인트를 줄 수 있는 멋스러운 장식입니다.”
“아, 그래요? 좀 비실용적으로 보이네요.”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한마디 덧붙였다. 매니저는 웃으며 넥타이 몇 개를 박래현 앞에 내밀었다. 박래현은 내 마음에 제일 들지 않은, 스카프처럼 생긴 특이한 모양의 넥타이를 골랐고 매니저는 선택받은 스카프를 매 주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치수가 큰 운동화를 벗고 광택이 흐르는 고급 구두를 신었다. 그 위에 재킷까지 걸친 내 모습을 박래현은 말없이 주시했다. 무감하게 메마른 눈동자에 웬일로 이채가 어렸다.
“윤준영 씨 옷과 내가 주문한 물건들은 집으로 보내 주세요.”
“여덟 시 전까지 댁에 안전하게 갖다 드리겠습니다. 물건들은 확인 안 하셔도 되겠습니까?”
“확인은 됐습니다.”
박래현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매니저에게 건넸다. 매니저는 소형 기계에 카드를 긁고 금액을 입력했다. 이런 정장은 대체 얼마나 하는지 궁금해 곁눈질로 금액을 봤다가 엄마 수술비 몇 배의 금액이 결제된 것을 보고 놀라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이깟 옷 몇 벌 값을 벌기 위해 나는 자존심 다 내려놓고 질퍽한 진창을 구르는데 남자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한 번 입고 안 입을 옷에 물 쓰듯 돈을 썼다. 아예 박래현을 안 보고 산다면 모를까 눈앞에서 확연하게 비교되는 삶에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갑시다.”
“이렇게 빨리요? 저녁 먹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박래현은 지하 1층에 주차된 차 앞에 이를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주차장엔 한여름의 열기가 고여 있어서 소매가 긴 드레스 셔츠에 넥타이, 재킷까지 갖춰 입은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차 앞에 멈춰서 나를 기다리던 남자는 내가 탈 수 있게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저택 주차장엔 여러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데 이 차는 중후하고 격조 높아서 주로 출퇴근용으로 사용하는 듯했다. 박래현이 내 옆에 올라타 문을 닫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 출발했다.
“본가 가기 전에 병원부터 들를 겁니다. 당신 어머니 보고 싶다면서요.”
거북 인형을 꺼내 등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박래현이 맨정신으로 할 말이 아니었다. 요즘 내게 심술을 덜 부린 게 짜증 나서 내 기분을 한껏 고조시켰다가 바닥으로 패대기칠 의도가 분명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수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거북 등에 코를 묻어 향기를 맡았다.
“왜 싫습니까? 엄마 보고 싶다고 칭얼대더니….”
“진짜 엄마 만나도 돼요? 농담 아니시죠?”
“지금 병원 가고 있습니다.”
난 멍청한 눈으로 박래현을 돌아보았다. 그는 긴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여 날 보고 있었다. 평소 아름답다고 감탄한 얼굴이지만 오늘따라 더 관능적으로 보였다.
“갑자기 왜 제게 잘해 주세요? 제게 뭐 바라시는 거 있어요?”
“전에 말했잖아요. 내 개가 예뻐 보이면, 그 정도는 해 주겠다고.”
표정을 감추는데 익숙한 얼굴에서 남자의 의도를 읽을 수는 없었다. 내 눈에 고정되어 있던 다갈색 눈동자가 콧잔등을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 시선이 미묘하게 결이 거칠어 닿는 곳마다 생채기가 생긴 것처럼 따가웠다. 나는 촌스럽게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긴장돼서 이러다가 거북 등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거북 인형을 꽉 틀어쥐었다. 남자와 계약을 하고 나서 엄마와 만나는 건 포기하고 있던 터라 남자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다른 이유는 없어요? 제가 엄마 만나도 되는 거 확실하죠?”
“같은 말 반복하게 할 겁니까?”
“아, 아닙니다. 엄마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을 수 없게도 남자는 정말 엄마를 봐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엄마를 본다는 생각에 부풀었던 기대는 현실 앞에서 금세 쪼그라들었다. 원양어선을 타고 태평양으로 떠난다고 했던 아들이 비싼 정장에 귀에는 피어싱을 줄줄이 달고 나타나면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겁났다. 배가 한국에 들어와 잠깐 내렸다고 핑계 대기에는 내 모습이 너무 화려했다. 작열하는 태양과 거친 파도에 맞서 싸우는 뱃사람이 이렇게 말갛고 고운 피부를 유지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지금 내 외양은 스폰 하나 잘 잡아 그 사람 취향대로 꾸민 남창 이상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금방 들통 날 테고 그 사유가 자신 때문이란 걸 엄마는 눈치채실 것이다. 우울증 증세가 있어 약을 드시는데 거기에 자책이 심해지면 엄마는 회복이 어려울 수도 있다.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당장 눈앞의 바닷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엄마 만나는 건 아무래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아요. 주치의만 만나게 해 주세요. 예약 안 해도 주인님이라면 가능하잖아요.”
“내 예상과 달리 반응이 영 시큰둥하네요. 내가 일정까지 꼬아 가며 직접 데려다주는데.”
“엄마한테 거짓말을 해서 들킬까 봐 그래요.”
“거짓말? 나한테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당신 식구한테도 거짓말을 합니까?”
“원양어선 타고 1년 동안 태평양에서 참치 잡는다고 했거든요. 제가 뭐 하는지 아시면, 엄만 병원 뛰쳐나오실 겁니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차는 병원 입구를 지나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엄마를 못 봐서 슬프지만 주치의라도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새를 못 참고 귓가에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려 얼른 박래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햇살이 투과해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는 티 한 점 없이 맑아서 남자에게 너무 아까웠다.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게 해 줄 생각입니다.”
“네?”
방금 들었던 말을 믿을 수 없어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박래현을 응시했다. 너무나 원해서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당신 어머니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게 해 주겠다고.”
“정말요?”
박래현은 대답하는 대신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모처럼 아량을 베푼 그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나는 얼른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주인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새 거짓말 쥐어짜 봐요. 거짓말은 윤준영 씨 특기잖아요.”
“저 주인님 속인 적 없습니다.”
말해 놓고 보니 화장실에 숨겨 둔 핸드폰이 생각났다. 박래현이 엄마를 만나게 해 주면 핸드폰은 더 쓸 일이 없으므로 없애도 될 것이다.
“방금 날 속인 적이 없다고 했어요? 몸뚱이로 온갖 개수작은 다 벌이면서, 끝까지 순진한 척하시겠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니까 내가 등신으로 보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더러운 성질 다 드러내고 솔직하게 굴어 보지 그래요? 윤준영 씨 대하는 내 태도가 한결 나아질 테니.”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을 홉뜨며 낮게 윽박지르는 박래현에게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박래현이 날 다른 인격체로 대할 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남자가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박래현이 내게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나를 닮은 누군가가 박래현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고 사라져 그를 대신해서 나를 괴롭히고 있으리라는 망상을 해본 적도 있다. 남창이 아니라고 사실대로 말해 봤자 믿지 않겠지만 오해하게 내버려 두기엔 내 과거가 깨끗해서 억울했다.
“주인님.”
나는 남을 속이거나 몸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차가운 박래현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을 남자에게 굳이 나를 변호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남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박래현이 어떤 이유로 나를 남창 취급하든 내 처지가 달라지진 않을 거라서 차라리 이럴 땐 정기적인 발작으로 여기고 무시하는 게 최고였다. 나는 박래현이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진짜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 만나게 해 주실 겁니까? 약속해 주시면 오늘 엄마 만나고 싶어요.”
“난 누구처럼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엄마를 만나게 해 주다니, 완전히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인간적인 측면이 약간은 있어 보였다. 엄마에게 갖다 줄 디퓨저를 챙기던 나는 방금 했던 생각에 화들짝 놀라 종이봉투에 디퓨저를 떨어뜨렸다. 성교 능력과 외모 빼고는 절대 박래현을 후하게 평가하지 않았던 내가 남자의 호의에 넘어가 말도 안 되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 남자가 잠깐 친절하게 군다고 그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디에 닻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게 거는 기대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처음에 닻을 내리는 위치가 중요하다. 나는 박래현의 가장 형편없는 지점에 닻을 내린 까닭에 그가 기준보다 조금 나은 행동을 보였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점수를 퍼 주었다.
박래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이 차고 넘치는 그에게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몸을 파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곳에 닻을 내리고 있으니 내게 발정하는 자신에게 화가 날 테고 나를 더 쓰레기 취급해서 자신의 화를 다스리는 건지도 몰랐다. 나와 몸을 섞을수록 박래현이 느끼는 분노는 커질 것이고, 내가 박래현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악순환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차가 병동 앞에 멈춰 서자 남자가 먼저 내려서 내가 내릴 수 있게 차 문을 잡아 주었다.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어리둥절했지만 남자는 몸에 익힌 대로 행동하는 듯했다. 나는 라벤더 향이 나는 거북 두 마리와 디퓨저, 오일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물건을 가득 쥔 내 손으로 시선을 내린 박래현은 가타부타 말을 하진 않았다.
“엄마 만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710호입니다. 어머니 한 시간 만나고, 예약해 뒀으니까 담당의 만나고 이리로 내려와요.”
“주인님은 어디 계실 건데요?”
“은수 누나 오후 진료 오프라 차 한잔 마시고 시간 맞춰 올 겁니다.”
“네.”
“우리 계약은 절대 비밀이어야 한다는 사실 잊지 말아요.”
“물론이죠!”
씩씩하게 대답한 나를 엘리베이터 앞에 남겨 두고 박래현은 본관 쪽으로 향했다. 습관이 돼서 눈으로 그를 배웅하다가 그의 뒷모습이 모퉁이를 꺾어 사라지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물건들을 팔에 안고 고개를 어깨 쪽으로 숙여서 귀에 박힌 피어싱부터 빼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피어싱 뺀 걸 박래현이 알면 노발대발하겠지만 엄마한테 의심을 사고 싶진 않았다. 7층에서 내린 나는 710호를 찾아 병실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노크를 했다.
“누구시죠?”
병실에서 인기척이 들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에서 책을 읽던 간병인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어머! 노혜정 님 아드님 맞죠? 아주머니께서 맨날 아드님 사진만 보고 계셨어요.”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엄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유령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휘저으며 자신의 뺨을 때렸다. 나는 들고 온 물건을 침대에 내려놓고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를 안았다.
“엄마, 그동안 잘 지냈어? 나 안 보고 싶었어?”
“아, 세상에… 준영아! 너 정말 내 아들 준영이 맞니?”
엄마는 부종 때문에 퉁퉁 부은 손으로 내 얼굴과 머리칼을 만지며 나를 확인했다. 수술하기 전 예쁘고 고왔던 얼굴은 면역 억제제 탓에 검은 반점과 여드름이 올라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우울증을 앓고도 남을 변화여서 나는 눈물을 꾹 참아 가며 내게 안겨 어린애처럼 우는 엄마의 어깨를 다독였다.
“엄마, 그만 울어. 눈이랑 얼굴 더 붓잖아.”
“나 정말 보기 흉하지, 준영아.”
“아니, 전혀.”
“거울을 봐도 나 같지가 않아. 심장도 내 것이 아니라서 내 말을 안 들어. 난 움직이고 있는데 심장이 뛰지 않을 때가 있어서 무서워.”
초점이 없는 눈에 말투는 어눌하고 느렸다. 나를 보는 낯선 눈빛에 순간 엄마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떨쳐 내려고 그녀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엄마 가슴에 들어 있으니까 심장은 이제 엄마 거지. 살아서 자식 얼굴도 보고 좋잖아.”
“그래. 그런데 너 분명 배 타고 바다에 나갔다고 했는데….”
“힘들어서 돌아왔어. 지금은 다른 일 하고 있어.”
“다른 일?”
“어, 무슨 일인지는 묻지 마. 대답하기 어려우니까.”
“…그러면 계속 엄마 옆에 있을 거니?”
핏기 없는 얼굴에 연한 홍조가 번졌다. 피곤해 보이는 엄마를 부축해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흰머리가 생겨 버린 머리칼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다. 독한 약 기운에 현실 감각이 사라져서인지 엄마는 갑자기 나타난 나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않아야 무사히 아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인지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약 꼬박꼬박 챙겨 먹고 건강하게 잘 지내면 일주일에 한 번은 보러 올게. 돈 벌어야 해서 그 이상은 오기 힘들어.”
엄마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 후유증에 시달려 생기를 잃어버린 엄마에겐 자식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올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듯했다.
“엄마, 이거 냄새 맡아 봐, 좋지?”
나는 디퓨저 포장을 벗기고 뚜껑을 열어 엄마의 코 밑에 갖다 댔다. 레몬그라스라고 써진 디퓨저에선 상쾌한 레몬 향과 꽃 향이 났다. 엄마는 향이 마음에 드는지 처음으로 이를 드러내며 웃으셨다. 리드를 꽂아 침대 옆 수납장에 디퓨저를 내려놓고 이번엔 오일 포장지를 벗겼다. 엄마의 발치에 앉아서 퉁퉁 부은 발등에 오일을 떨어트린 후 가볍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푸석푸석했던 발에 조금은 윤기가 돌아서 마음이 뿌듯해졌다. 발 마사지를 끝내고 엄마의 손도 정성껏 마사지했다. 엄마가 눈앞에 있고 엄마의 손을 만지고 있는데도 환각을 보는 것처럼 자꾸 눈이 흐려졌다. 수술이 끝난 직후 가장 힘들었을 시간을 혼자 보내게 했다는 생각에 가슴속에선 커다란 덩어리들이 울컥울컥 올라왔다가 가라앉길 반복했다. 나는 마사지를 받아서 부드러워진 손에 가져온 거북 인형을 쥐여 주었다. 병원에 오면서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못해 미안했다.
“잠 안 올 때 이걸 코 밑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켜 봐. 마음이 편해지면서 잠이 올 거야.”
“거북이네? 우리 준영이 닮아서 귀엽다.”
“응, 하나는 나고 하나는 해준이라고 생각해. 얘들도 일란성 쌍둥인가? 해준이랑 나 보는 거 같아.”
“너랑 해준인 똑같이 생겼는데 애들은 등 색깔이 달라서 금방 구별하겠다.”
엄마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부기가 빠지지 않은 손으로 거북들을 쓰다듬었다. 엄마를 더 즐겁게 해 주고 싶어서 나와 해준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우리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어. 정우 그 멍청한 새끼는 아직도 나랑 해준일 구별 못 해. 작년에 우리 매니저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기억나?”
“그럼, 기억하지. 작년 12월이었던가?”
“내가 매니저 대신 일해야 해서 해준이한테 사흘 동안 대리출석을 시킨 적이 있었거든? 해준이가 나인 척했더니 정우 그 새끼는 끝까지 난 줄 알았대.”
일란성 쌍둥이치고도 해준과 나는 많이 닮아 있어서 해준은 집에 놀러 오는 정우에게 가끔 나인 척 속이고 장난을 걸곤 했다. 정우는 그때마다 매번 속아 넘어가서 분통을 터트렸다. 엄마는 한참 즐거운 표정으로 웃으시더니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준영아, 오늘은 엄마 옆에 있어 줘.”
“안 돼. 곧 가 봐야 해. 다음 주에 올 땐 더 오래 있을지도 몰라.”
“배 안 탄다니까 이제 엄마한테 전화라도 자주 해.”
“내가 일하는 곳은 핸드폰 사용이 어려워. 대신 다음 주에 꼭 올 테니까 나 기다리고 있어.”
엄마는 더 캐묻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내가 곤란해할 말을 피했다. 무기력이 쌓이면 현실을 회피하게 된다는 걸 최근에 경험했기 때문에 엄마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피곤한지 느리게 눈을 깜박이더니 내가 지금껏 본 적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제야 찾아온 내가 많이 원망스러웠나 보다 하고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그래, 인제 그만 가 봐라. 나는 피곤해서 쉬어야겠다.”
거북 인형을 손에 쥐고서 엄마는 내게 등을 보이게끔 돌아누웠다. 살이 찐 건지 부은 건지 모를 어깨를 왼손으로 감싸며 난 엄마의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엄마,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해. 나 이제 가 봐야 해. 다음 주에 찾아올 테니까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밥 잘 먹어. 그리고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정우한테 말해서 사다 달라고 해. 정우가 다 사다 줄 거야.”
엄마의 어깨가 움찔움찔 떨리더니 그녀가 고개만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준영아,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지금 꼭 가 봐야 하니? 엄마는 너랑 더 있고 싶어.”
막상 간다고 하니까 내게 매달리는 엄마를 보며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나 오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박래현이 다음에 엄마를 만나게 해 준다는 말을 취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가야 다음 주에 또 오지.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어.”
“준영아.”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엄마가 내 손을 붙들었다. 눈물이 가득한 엄마 눈을 보면서 울지 않겠다는 결심이 흔들렸다. 나는 티슈를 뽑아 엄마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평소의 엄마로 돌아온 것 같아 엄마가 우는데도 되레 안심되었다.
“엄마, 눈 감고 자. 일주일만 지나면 또 올 테니까 그때 만나. 얼른 눈 감아.”
엄마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병실을 나서면서 간병인에게 잠깐 보자는 눈짓을 보내자 간병인이 입원실 밖으로 나를 따라왔다.
“선생님, 엄마 잘 부탁드려요. 요즘 제일 힘들 시기라고 들었는데 선생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으면 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요즘 상태가 별로 안 좋았는데, 오늘 아드님 만나셨으니까 기운 날 거예요.”
“우울증 때문에 걱정되네요. 될 수 있으면 엄마 혼자 두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간병인을 들여보내고 나는 차가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내가 들었던 것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살아 움직이는 엄마를 직접 확인해 보니 마음이 놓였다. 이제야 엄마를 만나게 해 준 박래현이 미웠다가 지금이라도 만나게 해 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
“피어싱은 왜 다 뺐습니까? 내가 절대 빼지 말라고 했을 텐데?”
차체에 기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박래현은 나를 발견하고서 시계를 확인했다. 그는 내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옆에 앉아서 시비를 걸었다. 피어싱을 뺐다는 사실을 아예 잊고 있었던 나는 재킷 주머니에서 피어싱을 꺼내 주섬주섬 귀에 달았다. 남자가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른들 뵈러 가는데 피어싱은 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상견례 하러 갑니까?”
“그건 아니지만, 주인님 사회적 지위가 있는데 제가 단정하게 보이면 더 나을 것 같아서요.”
“…….”
“그리고 주인님이란 호칭은 좀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집에선 상관없는데 주인님 부모님이 들으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요?”
“아예 부르지 마세요. 그냥 입 닫고 내 말 듣기만 해요.”
“아, 그러면 되겠네요.”
피어싱을 귀에 꽂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나는 박래현에게 귀를 잡혀 남자 쪽으로 끌어 당겨졌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파서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다.
“순서가 다 틀렸습니다. 고개 돌리고 손바닥 펴요.”
왼쪽 귀에서 피어싱을 뺀 박래현이 내 손바닥에 피어싱을 내려놓고 순서대로 다시 꽂았다. 오른쪽 귀는 원래대로 꽂혀 있는지 손대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서 풀려난 나는 거북 한 마리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아픔을 달랬다. 이 사람이 무슨 용도로 나를 본가에 데려가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나 때문에 그 집 분위기가 뒤집힐 건 분명했다. 박래현에게 거는 기대치가 있을 텐데 그 사람들 입장에서 봤을 때 나는 아무리 따져 봐도 기준미달이었다.
차량의 홍수에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차 안에서 박래현은 서류를 읽었고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엄마를 생각했다. 수술 전에 의사는 장기이식 부작용 중에 하나로 이인증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 심장은 사람의 감정과 성격이 응축된 장기라서 매우 드물게 수혜자의 성격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아까 엄마를 스쳐 갔던 낯선 눈빛이 떠올라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는 고개를 저어 불길한 생각을 떨쳐 냈다. 수술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부작용 때문에 그럴 것이다.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차가 주택가에 접어들었다. 차는 커다란 철제 대문을 지나 조금 더 달려갔다. 저택이 아니라 도심 공원에 들어선 착각이 들 정도로 집은 넓었고 정성 들여 꾸며져 있었다.
“김 기사님은 차 가지고 그만 퇴근하세요. 집엔 박 실장과 들어갈 테니까.”
박래현은 차에서 내려 나를 기다렸다가 내가 차에서 내리자 내 손을 잡아 곁으로 끌어당겼다. 남자와 여러 번 섹스했고 그 도중에 내가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손목을 잡은 적은 있지만, 그 외 상황에서 남자가 내 손을 잡은 건 처음이라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저녁 먹으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말아요. 당신은 얌전히 내 애인인 척, 나만 보면 됩니다. 내 말 알아듣겠어요?”
“그러니까 애인인 척 연기해 달라는 거죠?”
“그래요. 오늘 당신이 여기 온 이유입니다. 사랑에 빠져서 나밖에 안 보이는 것처럼 연기하세요.”
그건 좀 곤란합니다,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이 사람 배우자가 온다고 들었는데 그는 어떡하고 나한테 애인 역할을 하라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나를 방패 삼아 이혼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박래현을 따라 현관으로 들어가면서 주위를 살피던 나는 집 안 곳곳에서 풍기는 고풍스러움과 웅장함에 압도되어 완전히 기가 죽었다. 이렇게 꾸미고 오길 망정이지 평소대로 하고 왔으면 나만 이질적으로 눈에 띄는 존재가 될 뻔했다.
“상무님, 어서 오세요. 회장님께서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박래현은 내 재킷을 벗겨 자신의 재킷과 함께 직원에게 건넨 뒤 나를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박래현과 나를 발견하고서 대화를 멈췄다. 대기업 회장의 생일이라기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직계가족만 식사하는 자리인지 단출했다. 박래현 부모로 보이는 사람 둘과 박영범, 그리고 정치헌으로 추정되는 사람, 총 네 명이 식탁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수현이란 동생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는 외국에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회장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세요.”
“박 상무, 고마워. 그런데 같이 온 사람은 누구니?”
직사각형 식탁의 상석에 앉은 여자가 냉랭한 얼굴로 박래현에게 물었다. 박래현을 추궁하듯 말투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오늘 어머니 생신이라서 깜짝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제 오메가, 윤준영입니다. 준영 씨, 인사드려요. 내 부모님들입니다.”
“안녕하세요, 윤준영입니다.”
나는 단정하고 씩씩한 목소리로 어른들에게 인사했다. 박래현이 막무가내로 나오는데 내가 굳이 이 사람들 눈치를 보거나 비굴하게 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1년이 지나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게 될 사람들이었다.
“오늘 네가 누굴 데려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박 실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회장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가 박영범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박영범이 대답하기 전에 박래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영범 형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오늘 치헌 형도 온다길래 마침 잘됐다 싶었습니다. 제가 따로 자리 마련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의자를 뒤로 끌어낸 박래현은 내 어깨를 감아 나를 의자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맞은편에 정치헌과 나란히 앉은 박영범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내게 슬쩍 미소 지었다. 전쟁터에서 전우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뻤다.
“박 상무가 별일이구나, 오메가한테 눈을 다 돌리고.”
“제가 눈이 높아서 그동안 마음에 드는 오메가를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낯간지러운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티 나지 않게 주변을 살폈다. 널따란 식당은 생화와 커다란 이파리를 가진 나무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식탁 곳곳에 장미와 짙은 자주색 칼라 꽃이 풍성하게 배치되었고 동그란 접시 위에 흰 냅킨도 예쁜 꽃 장식으로 묶여 있었다. 박래현은 꽃 장식을 떼어 내 접시 옆에 놓고 사각형 냅킨을 반듯하게 펴 내 무릎을 덮어 주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치헌이 가족과 상견례 할 생각이다. 그렇게 알고 점심부터 시간 비워라.”
상견례? 박래현이 정치헌 식구와 상견례를 한다고? 둘이 이미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 앞으로 결혼할 사이란 말인가? 갑작스러운 혼란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결혼한 자식에게 상견례를 권할 부모는 없을 테니 박래현은 아직 미혼이란 말이었다. 능력 있는 알파들은 일찍 결혼해서 아이 문제까지 다 해결한 뒤 서른 즈음에는 일에 몰두하는 게 추세라는 말을 들어서 나는 박래현도 당연히 그런 예인 줄 알았었다. 어쩐지 배우자에게 불성실하다 싶었는데 아예 신경 쓸 배우자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혼자 불륜한다고 땅 파고 삽질했던 시간이 아까웠다. 박래현은 나를 괴롭히려고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숨기며 내 반응을 즐겼을 것이다. 내가 만난 인간 중에 이 남자처럼 얼굴 두꺼운 개새끼는 없었다. 그런데 결혼을 안 한 상태에서 아이를 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이는 결혼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갖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 아닌가? 나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아이가 걸림돌이 되면 박래현은 자신의 선택을 땅을 치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전 상견례 안 합니다. 제 오메가를 두고 왜 정치헌이랑 결혼합니까? 결혼은 이 사람이랑 할 건데.”
결혼이란 말에 뒤통수가 얼얼해 박래현을 노려봤다. 지배와 복종이 계약서의 주된 내용이라 해도 결혼까지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게 둘 순 없었다. 집에 가서 이 부분은 꼭 따지겠다는 결심을 눈치챘는지 박래현이 내게 눈을 맞추더니 뺨에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나머지 얼떨결에 눈을 깜박였다. 입술을 뗀 박래현은 웃으면서 내 머리칼을 헤집고, 손으로 두피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남들에겐 퍽 다정하게 보일 행동이 내겐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협박으로 느껴졌다.
“그래? 그 오메가가 네 마음에 쏙 들었다니, 어디 얘기 좀 들어 보자.”
회장은 생선의 살을 발라내듯 집요한 시선으로 나를 관찰했다. 박래현을 연상시키는 예리한 눈에 내 23년의 역사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까발려지는 듯했다. 그녀는 벌써 내가 박래현에게 어울리지 않는 요소를 백 가지는 넘게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박래현과 결혼할 생각이 없으므로 회장의 사나운 눈빛을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할 사람은 내 고용주 하나로 충분하기에 그의 식구들에게까지 휘둘리고 싶진 않았다.
“윤준영 씨 부모님은 뭐 하는 분들이죠?”
드디어 호구조사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어리바리했다가는 나중에 귓구멍이 뚫릴 것 같아서 나는 회장을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편하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아빠는 돌아가셨고, 엄, 어머니는 지금 큰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두 분 다 매우 평범한 분들입니다.”
“어려 보이는데 나이는?”
“스물세 살이고 1년 휴학해서 지금 효서대학교 경영대 3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아치 모양으로 휜 회장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내 나이가 어려서 그녀가 동요한다고 느꼈으나 그녀는 이내 표정을 감추고 질문을 이어 갔다.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 결혼할 생각부터 한단 말이지? 왜, 래현이랑 결혼해서 한몫 단단히 잡아 볼 생각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보다 커리어를 중요하게 여기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른가 보네.”
아이를 낳아 주고 거액을 받기로 했으니 한몫 잡는다는 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말문이 막혀서 적당한 대답을 고르고 있는데 관망하던 박래현이 끼어들었다.
“회장님, 그만하시죠? 가진 게 없어서 털어 봤자 먼지밖에 안 나옵니다.”
“털어서 먼지밖에 안 나오는 사람과 너는 무슨 이유로 결혼한다는 거냐? 내가 네 일은 쭉 관망해 왔지만 이번 일은 안 되겠다.”
“제가 가진 게 많아서 저랑 결혼할 사람은 많이 가지고 있을 필요 없습니다.”
“네가 가진 게 많다고? 우리나라에서야 업계 1위지만,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는데, 그게 무슨 건방진 소리냐.”
“더 중요한 건, 저랑 속궁합이 아주 좋아요. 배우자 조건으로 전 그거면 됐습니다.”
결혼의 전제 조건치곤 참 원초적이고 직설적인 이유였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마음이 맞는다거나 좋아한다거나 그런 구실을 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박래현의 뻔뻔한 대답에 사람들 표정이 다 일그러졌는데 특히 정치헌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얼굴을 했다.
“조 실장. 여기 음식 세팅해.”
박래현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옆에 서 있던 여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연보라색 잔에 술을 따르고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온 음식은 레몬을 곁들인 구운 연어였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연어 스테이크 옆에는 파릇파릇한 어린잎 채소가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박 회장이 식사를 시작하자 박래현은 연어 스테이크를 한 입 크기로 잘라 내 스테이크 그릇과 바꿨다. 지나친 친절이 부담스러워 내가 알아서 먹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박래현이 나만 알아볼 수 있게 왼쪽 눈을 살짝 감았다가 떴다. 기꺼이 연기에 동참하라는 신호였다.
“준영 씨 연어 좋아하잖아요. 맛있게 먹어요.”
“감사합니다.”
가식적인 눈웃음은 꽤 근사해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겨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 정치헌과 눈이 마주쳤다. 연어 스테이크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는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화려하게 생긴 얼굴과 아담하고 호리호리한 몸은 그가 꽤 어린 나이에 발현했음을 암시했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차림이나 몸에 밴 우아하고 도도한 태도에서 그가 상당히 부유한 집 자제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박래현 옆에 있으면 그림처럼 잘 어울릴 사람이었다.
집에서 배우자로 골라 준 조건 좋은 오메가를 두고 박래현은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정치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게 좋은 방향으로 해결될 일을 박래현은 어렵게 돌아가고 있었다. 혹시 저 남자에게 질투를 유발할 목적으로 나를 이용하는 걸까? 얼핏 듣기론 정치헌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나를 고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임신하게 되면 리스크가 너무 커질 텐데… 끝 모르고 이어지던 생각을 정치헌이 중간에서 싹둑 끊었다.
“험한 일을 많이 하셨나 봐요? 손이 거친 걸 보니.”
“네, 학교 다니면서 알바를 많이 했어요.”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어 대서 내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 박래현과 계약한 뒤 궂은일을 하지 않아서 그나마 나아진 상태였다.
“부모들이 얼마나 무능하면, 학교 다니는 자식에게 아르바이트를 시켜요?”
“대학 다니면서 알바하는 학생들 엄청 많아요. 전 대학까지 보내 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과장이 섞인 말이었다. 무책임하게 일찍 돌아가신 아빠를 원망했고 지병을 달고 사는 엄마 때문에 속상한 적이 많았다. 공부 시작한 지 십 분이 채 안 된 것 같은데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을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생활비로 다 들어가 맨날 똑같은 옷에 신발을 신고 궁상맞게 학교를 다녔을 때, 피 같은 돈이 학자금 대출 이자로 쑥쑥 빠져나갔을 때, 가난한 부모님과 내 처지를 한탄한 적이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 그걸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박 상무는 어떻게 꼬드겼지? 보아하니 꽤 놀던 친구 같은데, 겉 포장은 그럴듯하게 하고 왔네.”
이번엔 박래현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내 귀에 송송 박힌 피어싱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나를 멸시하는 눈빛에서 저 남자가 한 말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 술집 같은 데서 놀다가 우연히 낚은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박래현에게 비슷한 대접을 자주 받았던 터라 그러려니 하고 넘겨 버렸다.
“은수 누나 만날 일이 있어 병원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
“네, 준영 씨를 처음 본 순간, 이 사람이다 싶어서 유혹했습니다.”
“이런 앨 건들다니 박 상무 취향 한번 천박하네. 치헌이한테 똥 치우게 하지 말고 바로 정리해라.”
“아버지가 제 침대로 밀어 넣었던 오메가들보다는 투지 넘치고 용감합니다. 걔들은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져서 재미가 없었거든요.”
살벌한 신경전으로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터졌다. 마음 써 봤자 나만 속상할 게 뻔해서 나는 간이 알맞게 밴 연어 샐러드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맛을 음미했다. 스트레스가 쌓일 땐 역시 먹는 게 최고였다. 이 집이나 저 집이나 맛이 싱겁긴 마찬가지지만 허한 속을 달래는 데 맛이 중요하지는 않았다.
“박 실장. 저 아이 당장 정리해. 못 하면 너 상해지사로 빼 버릴 테니까. 그리고 래현인 상견례 준비해.”
회장의 지시에 박영범은 대답 대신 얼른 네가 해결하라는 듯 박래현을 보았다. 박래현은 술을 반쯤 마시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현실감 떨어지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제삼자가 되어 박래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자기 부모뿐만 아니라 내게도 어퍼컷을 날렸다.
“윤준영과 결혼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박 상무, 기어이 내가 나서게 할 테냐? 내 말 듣고 이쯤에서 정리해라.”
정치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음식엔 손대지 않고 앞에 놓인 와인 잔만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나 같은 게 라이벌이랍시고 등장해 분위기를 깨서 몹시 마음에 들지 않은 눈치였다.
“어머니, 제 사람들 건들지 마세요. 빈털터리가 돼서 거리에 나앉고 싶지 않으면.”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천하에 빌어먹을 새끼가….”
“협박은 어머니가 먼저 하셨잖습니까.”
“내가 저 아이 건드렸다 치자. 그래, 무슨 수로 나를 거리에 나앉힐 거냐?”
“방법이야 무궁무진하죠.”
“…….”
“현재 진행하고 있는 신약 파이프라인, 앞으로 진행할 CAR-T 치료제 핵심 기술, 다 제가 쥐고 있습니다. 다른 회사로 기술 유출해서 계약 파투나면, 줄줄이 거액 송사에 휘말릴 테고 두 분은 윤준영과 똑같이 빈털터리가 될 텐데, 그때도 가난하다고 이 사람 무시할지 궁금하네요.”
“네가 회사 2대 주주면서, 지금 같이 망하자는 소리냐?”
“기술을 넘기는데 제가 왜 망합니까? 어머니도 아시겠지만 바이언스 인수하겠다고 줄 선 기업들 많습니다.”
그 뒤로 베이면 피가 날 정도로 날 선 대화가 오가며 기나긴 식사가 이어졌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한 발 물러서서 내 앞에 차려진 음식에 최대한 집중했다. 마지막 디저트가 나왔을 땐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처럼 숨이 차고 머리가 징징 울렸다.
“저녁 잘 먹었어요? 음식은 입에 맞았습니까?”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이 거리를 좁혀 오더니 박래현은 한 손으로 내 볼을 붙들고서 무릎을 덮고 있던 냅킨으로 내 입가를 닦았다. 과장된 애정 표현에 양 볼이 달아올라 땀이 났다. 늙은 여우들에게 우리 진짜 관계를 들키지 않으려고 박래현을 향해 싱긋 웃어 주었다.
“식사는 다 했고 제 용건도 끝났으니 저흰 그만 일어서겠습니다. 준영 씨와 상의해서 결혼 날짜 잡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쯤 되니 이 사람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자기 부모님이나 정치헌을 엿 먹이려는 수작인 건 알겠는데 거짓말이 청산유수였다. 박래현이 일어서자 박영범이 같이 가 보겠다며 일어섰고 나도 일어서서 박래현 부모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했다. 그의 부모들은 할 말을 잃었는지 아니면 박래현을 따로 불러 얘기할 생각인지 박래현을 잡지 않았다.
“래현아, 잠깐 나랑 얘기 좀 하고 가.”
정치헌이 급하게 일어서느라 의자가 뒤로 길게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다가와 박래현 팔을 잡았다.
“나는 형과 할 얘기 없어. 갑시다.”
“잠깐이면 돼. 잠깐만 시간 내.”
박래현은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잡고서 식당을 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여러 개의 방문 중 하나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스위치가 눌러진 뒤 어두웠던 방이 환해졌다. 세월이 묻어 있는 넓고 고즈넉한 방에 박래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이 테라스 쪽에 놓인 소파에 마주 앉아 서로를 탐색하는 동안 나는 서가에 꽂힌 물리 약학이나 약품 분석학 같은 책들을 건성으로 보면서 두 사람 대화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박래현, 너 진짜 저 오메가랑 사귀는 거 아니지? 연극이 너무 그럴싸해서 헷갈리잖아.”
“형 믿고 싶은 대로 믿어. 그런데 형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해.”
“내가 한 번만 더 기회 달라고 사정했잖아. 일주일 시간 줄 테니까 저 오메가 정리해.”
“야망 없는 내가 싫다면서? 인제 와서 이러는 건 너무 속 보이는데.”
박래현이 누군가에게 차이다니 내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어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았다. 박래현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정치헌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펑 소리와 함께 라이터 뚜껑이 열리고 작은 불꽃이 올라와 맞닿은 담배 끝으로 옮겨붙었다.
“너 아직도 나 못 잊은 거 맞네. 그 라이터 내가 재작년 네 생일 선물로 준 건데.”
“아, 형이 준 거였어? 잊고 있었네.”
“너랑 헤어진 건 아버지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너에 대한 마음을 접은 건 아니었어.”
“어련하시려고. 시시콜콜한 과거사 얘기하려고 나 부른 거야? 그만 일어서자.”
“사실은… 내가 우리 결혼 선물을 준비했어.”
“결혼 선물?”
“이번에 우리 병원이 R&D 중심 병원으로 선정된 거 알고 있지? 정부에서 연구비로 대규모 지원이 나올 거야.”
박래현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뒤 잠시 틈을 두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흐릿하게 운무를 그리며 흩어지는 연기가 그의 표정을 가려서 박래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내 자리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 둘이 그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는 게 어떨까 해서. 성과가 나오면 그 이후로도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이 있을 거야.”
“고맙네. 우리 센터 소장님 보낼 테니까 얘기해 봐.”
“아니, 난 너랑 주축이 돼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어.”
여유로운 박래현과 달리 정치헌은 초조한 듯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문질렀다. 박래현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고 나서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그의 입가에 나긋한 웃음이 걸렸다.
“몸 로비로 따낸 혜택을 결혼 선물로 준비하다니, 형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놈이야.”
“몸 로비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별소릴 다 듣겠네.”
“정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형이 결혼 카드 꺼내 들 때부터 형한테 사람 붙였어.”
“박래현, 우리 집안에서 운영하는 대형 병원만 다섯 개야. 앞으로 중국에 진출할 예정이고. 너랑 결혼하면 서울과 인천에 있는 병원 경영권을 나한테 넘겨주신대.”
“그래서?”
박래현은 감흥 없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제약 회사 상무와 같이 살다 보니 제약 회사들이 병원에 자사 의약품을 처방해 주는 조건으로 엄청난 리베이트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치헌 가족이 꽤 큰 병원을 운영하는 듯한데 둘이 결혼하면 박래현에게는 큰 이익이 될 것이다.
“나는 병원을 물려받고 너희 회사는 안정적인 약 공급처를 확보하게 되니까 서로 윈윈이잖아. 재력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나 정도면 결혼 상대로 괜찮잖아? 안 그래요, 윤준영 씨?”
“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시선을 돌리기엔 늦은 감이 있어서 난 정치헌 의견에 동조했다. 박래현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매서운 눈길로 나를 노려봤다. 치정 싸움에 끼어든 게 민망해서 그의 시선을 피해 책으로 눈을 돌렸다. 물리학이나 화학, 약제학에 관련된 책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게 시집 몇 권이 꽂혀 있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분산시키고자 시집을 꺼내 첫 장을 펼쳤다. 선물로 받은 책인지 맨 앞장에 단정한 필체의 글귀가 있었다.
래현 형. 형에게 인생은 메마른 사막이라고 했지. 형 앞에 펼쳐진 사막을 함께 건너 주는 낙타가 되고 싶어. 형이 편하게 쉴 오아시스를 발견할 때까지. 사랑하는 동생 수현이.
이 닭살 돋는 글귀는 뭐란 말인가. 나와 해준인 인류의 보편적 정서를 따라 쌍욕을 해 가며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이 집 형제들은 사이가 좋아 보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글귀를 쓸 정도면 박래현도 자기 동생을 살뜰하게 잘 챙길 것 같았다. 항상 차가운 모습만 봤더니 박래현이 누군가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형, 마지막 경고야. 결혼 얘기 한 번만 더 내 귀에 들어오면, 그땐 씨발 너도 진창에 처박아 버릴 테니까 조심해.”
“네 부모님에 이어 이번엔 내 차례냐? 난 어떻게 진창에 처박을 건데?”
“나 장관이랑 호텔 드나든 사진, 여기저기 다 뿌려 줄까?”
“그게 내가 몸 로비했다는 증거가 돼?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객실 잡았어. 호텔 갔다고 다 떡 치는 거 아냐. 너 나랑 호텔 갔을 때 기억 안 나?”
“말 돌리지 마. 리베이트는 내가 아니라 검찰이 밝힐 일이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졌다고 열심히 우겨 봐.”
박래현은 협박이 일상인 듯 자연스럽게 상대를 압박했다. 자기 부모한테도 막 나가는 인간이니 다른 사람에겐 오죽할까 싶었다. 저렇게 잘난 인간들도 박래현한테 약점이 잡혀 을이 되는데 나 같은 건 정말 쉽게 구워삶았겠구나 싶어서 씁쓸했다.
“박래현 너 설마 질투하냐? 정조 같은 거 별로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더니 되게 꼰대처럼 구네.”
“형 정조엔 관심 없고, 대가성 뇌물치곤 되게 지저분해서 송림병원에 타격 갈까 봐 걱정돼서 그래. 잘 생각해.”
박래현은 타격이란 단어를 특히 강조했다. 나긋하지만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오해하지 마. 정말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둘 사이에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멈춘 공간에서 시집에 눈을 고정한 채 나는 누군가가 어서 침묵을 깨 주길 바랐다.
“형, 진심으로 나랑 결혼하고 싶어?”
“…그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대화를 들으며 내 운명을 좌지우지할 다음 말에 바짝 귀를 세웠다. 긴장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책을 쥔 손에 땀이 배었다.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나 장관하고 어떤 관계고, 어디까지 갔고, 앞으로 계속 만날 생각인지 아닌지 솔직하게 말해.”
“진짜 아무 일 없었다니까?”
“내가 형 앞에 윤준영을 왜 데려왔겠어?”
박래현이 나와 계약한 이유를 비로소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숨을 내쉬는 것도 잊고 모든 동작을 멈췄다.
“형이 결혼 얘기 꺼낸 뒤에 나는 저 오메가랑 뒹굴었어.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정조 안 지킨 건 마찬가지잖아?”
“그래서?”
“내가 솔직하게 까발렸는데 형도 이쯤에서 성의를 보여야지, 안 그래?”
내가 정치헌이라면 박래현에게 귀싸대기를 날리고서 미련 없이 이 방을 나갔을 것이다. 결혼할 사람 앞에 섹스파트너를 데려온 것도 기가 막힐 일인데 박래현은 되레 자신은 솔직하게 다 오픈했으니 너도 그렇게 하라며 종용하고 있었다.
두 사람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운 채 시집을 제자리에 돌려 두다가 책장 빈 곳에서 작은 액자에 든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 인물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웃고 있는 박래현 옆에 내가 아는 박수현이 같이 웃고 있었다.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인지 어두운 배경 뒤로 멋진 강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였다.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이상해져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아이를 낳아 달라고 제안한 남자가 첫 히트 사이클 때 도움을 준 이의 형이라니,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나는 묻어 두었던 기억을 쥐어짜서 그사이에 존재하는 연결 고리를 찾아보았으나 건질 만한 건 없었다.
히트 사이클을 그렇게 보내고서 박수현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박래현과는 한 달 전에 계약서를 작성하며 처음 만났으므로 이번 일은 드물게 일어나는 우연의 일치 중 하나였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집에 갑시다.”
크고 모양 좋은 손이 귀 옆을 가로질러 책장을 짚었다. 책등을 보고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마디가 긴 단정한 손가락으로 눈을 옮겼다. 내 뒤에 선 박래현이 왼손으로 턱을 잡아서 내 얼굴을 돌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까워지면서 다물린 입술을 비집고 검지가 들어와 틈을 벌리더니 거부할 틈도 주지 않고 그 사이로 혀가 밀려들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당황해서 몸을 비틀었지만 책장과 박래현 사이에 갇혀서 어떻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부림치던 나는 단단하게 턱을 쥔 손에서 까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어 냈다.
정치헌 앞에서 키스하는 연고가 있으리라고 추측하며 서툴게 입술을 벌려 주었다. 내 입이 꽤 큰 편인데도 안을 휘젓고 문지르는 혀를 받아 내기에 급급해 숨이 찼다. 정신없이 혀를 빨린 뒤에야 박래현이 내게 처음 키스했다는 자각이 들었다. 단단하게 발기한 살 기둥이 엉덩이 위쪽을 압박하는 바람에 나는 그에게 밀려 서가의 칸막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박래현이 입술을 떼고 눈두덩과 볼에 차례로 뜨거운 입술을 눌렀다. 그동안 수없이 몸을 섞으면서 한 번도 나누지 않았던 입맞춤을 남 앞에서 하고 있었다. 내 어깨를 잡아 가볍게 몸을 돌린 박래현이 스카프 매듭을 느슨하게 풀고 드레스 셔츠 단추를 열었다.
그는 한쪽 팔로 서가를 짚고 다른 손으로 내 뒤통수를 감고서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성교가 아닌 다른 접촉에 익숙하지 못한 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멋대로 떨렸다. 정치헌이 성큼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당연하게 그가 나간 줄 알았던 나는 당황해서 새카만 눈을 내려다보았다. 피부는 눈처럼 하얀데 눈알은 새까매서 꼭 살아 있는 인형을 보는 듯했다.
“일부러 나 보라고 이러는 거야? 박래현, 나 이번엔 너 포기 안 해.”
“곧 히트 사이클이 다가올 거야. 아직 각인은 안 한 상태지만, 그땐 장담할 수 없어. 난 윤준영이 꽤 마음에 들거든.”
뜨겁고 달콤한 목소리는 정치헌에게 나가떨어지라고 경고하는 게 아니라 내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아랫배에 밀착된 성기가 꿈틀꿈틀 용틀임했다. 얇은 천에 가려진 상태로 내 아랫배를 찌르는 성기의 감촉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직설적이고 야한 고백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빨리 이 어색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일단 프로젝트 건은 나랑 진행하자. 서로 만나면서 맞춰 갈 수 있잖아.”
정치헌은 다급하게 박래현 팔뚝을 손으로 잡았다. 스카프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트린 박래현이 셔츠째 내 젖꼭지를 깨물었다. 둥글고 뭉툭한 혓바닥이 젖꼭지를 짓누르며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잔뜩 곤두선 꼭지가 남자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저릿한 감각이 몸에 휘몰아쳤다.
“아, 아앗! 그, 그만, 멈춰요!”
나는 박래현 어깨를 틀어쥐었다. 그는 젖꼭지를 집요하게 빨면서 손을 아래로 내려 바지 훅을 열었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에 나는 어깨를 틀어쥔 손에 힘을 줘서 싫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박래현과 달리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라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교를 즐길 순 없었다.
“지금 싫다고 했어요?”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을 보니 박래현은 정말로 정치헌이 보는 앞에서 섹스할 모양이었다. 온갖 가정이 머릿속을 어수선하게 해서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관찰해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 대답 안 해요? 내 자지만 보면 넣고 싶어 환장하면서.”
박래현의 커다란 손이 속옷 안으로 들어와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의 거침없는 말에 더 환장할 지경이었다. 싫다고 해 봤자 자기 멋대로 할 거면서 내 의견을 물어보는 태도가 더없이 뻔뻔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둘이 붙어먹기 시작하면 정치헌이 자리를 피해 줄 것이다. 그때까지 눈을 감아 정치헌을 시야에서 차단하는 쪽을 택했다. 엉덩이골을 애무하던 손가락이 거침없이 주름을 파헤치면서 입구의 민감한 살을 자극했다. 손가락이 더 깊이 들어와 속살에 파묻힌 성감대를 문지르자 무안하게도 내 몸은 깃발이 되어 펄럭였다. 몇 번 몸을 섞었다고 박래현은 내가 느끼는 지점을 나보다 더 잘 알아서 나는 신음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윤준영 씨, 눈 떠요.”
눈을 떴을 때 정치헌은 서가에 어깨를 기대고서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사람이 있는 데서 이러는 박래현도, 그걸 빤히 지켜보는 저 남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늘 적극적이던 내가 밋밋하게 반응하자 박래현이 한 손으로 내 턱을 잡아 올려서 눈을 맞췄다. 노을을 닮은 눈동자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손가락 여러 개가 안으로 들어와 구멍을 넓혔다.
“윤준영, 평소처럼 해 봐. 당신 신음도 잘 내고 허리도 기가 막히게 돌리잖아. 얌전하게 굴면 정치헌은 내 말을 전부 거짓으로 치부하겠지? 내가 당신 알파라는 거 확실하게 보여 줘야 이 남자가 정신 차리지.”
정치헌과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아서 나더러 방패막이가 되어 달라는 건지, 정치헌을 자극해서 그가 질투하길 노리는 건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나더러 애인 역할을 해 달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주인 명령에 따라 그의 목과 뒤통수를 감싸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기꺼이 사랑스러운 연인을 연기하고자 그의 입술이 닿기 전에 입술을 벌려 다가오는 혀를 맞이했다. 촉촉한 살덩이가 혀를 문지르다가 혀 밑부분을 밀어 올렸다. 혀를 들추고 그 아래에 감춰진 부드러운 점막을 다른 살덩이가 들어와 맛을 음미하듯 샅샅이 훑어 냈다. 내 몸이지만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곳이 알파의 혀에 눌리면서 구멍 주위로 야릇한 감각이 찾아왔다. 입술을 빨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반응은 아래쪽이 먼저였다.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박래현은 입술을 떼고 숨이 차서 헐떡이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저 입 안을 핥고 빠는 단순한 행위를 끝냈을 뿐인데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졌다. 역할에 몰두한 나머지 박래현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줘 그를 끌어안았다. 키스의 여파로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계속 두근거려서 힘들었다.
“래현아, 일단 이 오메가는 내보내고 우리 둘이서 얘기하자, 응?”
내게 고정되어 있던 박래현 얼굴이 희고 고운 손가락에 둘러싸여 아래로 당겨졌다. 까치발을 들고 선 정치헌이 박래현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비며 마찰했다. 내가 빨았던 입술 위를 정치헌 혀가 날름날름 기어 다니더니 벌어진 틈을 비집고 그 안으로 쑥 사라졌다. 나와 몸을 섞던 알파가 내 눈앞에서 다른 오메가와 키스하는 걸 보고 있자니 속에서 불이 올라오고 눈이 홱 뒤집혔다. 저녁 먹은 걸 다 토할 것 같은 격렬한 거부감에 몸이 덜덜 떨렸다. 사고가 멈춰서 이성으로 제어하기도 전에 나는 정치헌의 양 손목을 틀어쥐어 뒤로 꺾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로 향했다.
“박래현 씨는 제 알파니까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뭐? 너 방금 뭐라고 했냐?”
“못 들으셨어요? 이 분은 제 알파니까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 기가 막혀. 박래현이 네 알파라고?”
“네. 그러니까… 남의 알파 함부로 넘보지 마세요.”
정치헌이 내 뺨을 무자비하게 후려갈겼다. 고개가 홱 틀어지면서 책등에 뺨이 부딪혀 볼이 얼얼했지만, 애들 장난 수준이어서 아프지는 않았다. 사실 정치헌에게 맞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에 느꼈던 소유욕 비슷한 감정 때문에 공황 상태에 빠져들면서 땅을 딛고 선 발바닥부터 감각이 사라졌다. 연극에 심취했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생경하고 날 선 감정이었다.
“너 뻔뻔한 애로 아주 잘 골랐다?”
“정치헌, 너 돌았어? 누구한테 함부로 손을 올려?”
박래현이 멱살을 잡아서 그를 책장에 밀어붙이자 가냘픈 등이 책장에 부딪히면서 쿵 소리가 났다. 정치헌은 박래현의 분노에 아랑곳하지 않고 형형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윤준영이라고 했지? 구멍 하나 믿고 까부나 본데, 준영아, 네 분수를 알고 끼어들어. 네가 백날 구멍 벌리고 조이고 흔들어 봤자, 이 남자를 가질 순 없어. 불쌍해서 충고하는데 헛물켜지 마.”
박래현이 정치헌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희고 고운 뺨에 시뻘건 손자국이 남았다. 틀어진 고개를 바로 돌리고서 정치헌은 여전히 내 눈을 직시했다.
“박래현, 너 내가 자자고 할 땐 잠자리 피했잖아. 그런데 아무 데서나 다리 벌리는, 싸구려에 천박한 남창이 네 취향이었어? 네 눈엔 내가 얘보다 부족해 보여?”
정치헌의 눈과 입술이 나를 비웃듯 비스듬히 곡선을 그렸다. 그 건방진 미소가 억누르고 있던 분노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박래현에게 돈 받고 몸을 팔았기 때문에 그가 나를 남창 취급하는 건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까지 그런 취급을 받으니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닥쳐. 형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박래현은 정치헌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할 때까지 목을 조르다가 그가 눈물을 떨어트리자 그제야 목에서 손을 뗐다. 정치헌이 콜록콜록 기침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박래현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정치헌의 턱을 비틀어 위로 꺾었다. 나를 이 자리에 데려와 비참하게 만든 박래현을 죽여 버리고 싶은데 또 두 사람이 마주 보는 모습은 진저리나게 싫었다. 왜 이따위 비릿한 양가감정에 시달려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조건이 안 맞아서 나를 버렸던 형을 내가 어떻게 믿고 결혼을 해? 적어도 내가 형을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해야지. 만약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다면, 나 장관하고 있었던 일 솔직하게 털어놔.”
“그러면 저 오메가도 정리할 거냐?”
“나 장관이랑 있었던 일, 음성 파일이나 영상으로 따 놨지? 그거 먼저 가져와야 다음 얘기 진행할 거야.”
정치헌이 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이래도 박래현이 네 알파냐고 비웃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 알파라니,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은 혀를 잘라 버리고 싶었다. 애인인 척해달라고 해서 정치헌을 떼어 낼 계획인 줄 알았더니 그 반대였다. 그동안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실이 갑자기 본 모습을 드러냈다. 박래현은 정치헌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킬 용도로 사용하고자 나와 계약한 거였다. 결혼하기 전에 그의 약점을 잡아서 결혼한 뒤에도 주도권을 쥐려는 계획일 것이다. 원래 나와 섹스를 한다거나 아이를 가질 의도는 없었을 텐데 내가 달려들어 일이 꼬여 버렸다.
“믿어 줘. 정말 아무 일 없었다니까?”
“여기에 곧 아이가 생길 거야. 일 키우기 싫으면 그 전에 판단해.”
박래현은 드레스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크게 원을 그리며 내 배를 쓰다듬었다. 독을 품은 뱀이 피부 위를 서성이는 것 같아서 아랫배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박래현은 바닥에 떨어진 스카프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내 곁으로 다가와 엉망이 된 드레스 셔츠 단추를 잠가 주었다.
“우린 먼저 가 볼 테니까 형은 잘 생각해 봐.”
지퍼가 열려 반쯤 벗겨진 바지를 제대로 입히고서 그는 나를 방에서 데리고 나왔다. 1층 거실 소파에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박영범이 소파에 놓인 겉옷을 챙겨서 다가왔다.
“회장님께서 따로 인사할 필요 없다고 그냥 가래.”
“잘됐네.”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인 나는 박영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차갑고 무서운 어른들을 두 번은 보고 싶지 않았다. 고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저택에서 나와 차에 탈 때까지 각자의 생각에 잠겨 우리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박래현과 정치헌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먼저 박래현은 어떤 사정으로 정치헌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다. 지금은 집안에서 결혼 얘기가 오가는 중인데 박래현은 정치헌을 믿지 못해 미행을 붙였고 정치헌이 나 장관이란 사람과 호텔에 들어가는 걸 포착했다. 미련이 남은 박래현은 정치헌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킬 요량으로 오메가를 고용했다가 사고로 몸을 섞어 버렸다. 그는 섹스가 끝나고 나서 간혹 깊이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잠시 이용하다가 버릴 오메가와 몸을 섞고 있으니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화가 났을 것이다.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치헌과 담판을 짓고자 나를 대동하고 본가를 찾았으리라고 결론 내렸다.
가장 깔끔한 추론이지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여전히 존재했다. 계약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어도 기꺼이 계약에 응했을 텐데 박래현은 왜 아이를 계약 조건에 집어넣었을까. 돈을 많이 제시해서 내가 계약을 거부할 수 없게끔 만들려고 그랬던 걸까? 박래현이 망가뜨렸다던 오메가들은? 여러 가지 의문에도 불구하고 정치헌이 박래현을 찾아와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고 결혼하자고 하면 나와 이 사람의 계약 관계가 끝나는 건 확실했다. 빠르면 이달 안에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다. 남자가 먼저 계약을 해지하자고 하면 나는 계약금 일부를 챙겨 집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남자 본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서 임신하길 간절히 바랐는데 이젠 필사적으로 임신을 피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내 몸에 흠뻑 빠져든 이 쓰레기에게 임신 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껏 나를 취하다가 내게 아이가 생기면 나와 아이가 받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병원에 데려가 아이를 지워 버릴 사람이었다. 계약서상 아이에 관한 권한은 전부 박래현에게 있어서 아이를 지우자고 하면 나는 꼼짝 없이 박래현 의견을 따라야 한다. 생각만으로 끔찍해 벌써 아랫배가 땅기고 아팠다.
이 상태에서 아이를 갖는 것도 싫지만 생긴 아이를 없애는 건 더 싫었다. 히트 사이클이 며칠 남지 않아서 앞으로가 문제였다. 최근 들어 꾸준히 알파 페로몬에 노출된 탓에 히트 사이클이 당겨질 가능성마저 있었다. 히트 사이클 이틀 전부터 임신은 가능하므로 당장 오늘부터 임신 가능 기간에 들어갈 수 있단 소리였다.
“형, 미래 바이오에서 보낸 자료 뽑아 왔어?”
“어, 당연하지.”
“이리 줘 봐. 자세히 보고 싶어.”
“집에 가서 편하게 봐.”
“역분화 줄기세포면 내가 관심 있는 분야라서 그래. 다른 데서도 아마 관심 보일 거야. 괜찮으면 먼저 컨택 들어가야지.”
박영범은 보고서로 보이는 파일을 박래현에게 건네고 차를 출발시켰다. 박래현은 차 등을 켜고서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당장 오늘 밤에 일어날 일을 걱정했다. 이 남자가 섹스를 요구하면 나는 순순히 남자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박래현에게 심각하게 길든 몸은 금세 쾌락에 젖어 박래현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와의 관계에서 섹스 시간이 긴 것 빼고는 아무런 불만이 없는 나였다. 박래현은 평소대로 내 안에 사정할 테고 나는 쾌락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나는 힐끗 곁눈질로 박래현을 보았다.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은 전부 잊은 듯 박래현은 문서에 몰두해 어느 한 부분을 보고 있었다. 박래현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정치헌이 박래현에게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느꼈던 섬섬한 감정은 여과되지 않은 본능에 가까웠다. 설마 각인 같은 건 아니겠지? 박래현을 잡으려고 놓은 덫에 미련하게 내가 걸려든 건 절대 아니어야 한다.
각인이 아니라면 내가 느낀 강렬한 감정은 어디서 기인한 걸까? 가장 소중하게 아껴 둔 물건을 눈앞에서 강탈당한 기분이었다. 정치헌 하는 짓이 좆같아서 붉고 둥근 입술을 짓뭉개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 순간을 회상하자 여전히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이런 반응은 오메가가 지닌 본능 문제라 논리적으로 따지고 재 봤자 원인을 찾을 순 없을 것이다. 육체관계로 시작된 감정은 육체가 멀어지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일이니 미리 겁먹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타일렀다.
“아까 하던 일, 마저 하고 싶어서 그렇게 쳐다봅니까? 하다가 관둬서 서운해요?”
보고서를 읽고 있던 박래현이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황해서 그를 훔쳐보던 눈알을 제자리로 돌리는 데 실패했다.
“아닙니다. 지금 몸이 별로 안 좋아서요. 저녁 먹은 게 체한 거 같아요.”
“체한 게 아니라 혹시 임신한 거 아닙니까?”
“설마요.”
“난 하던 일 마저 할 생각입니다. 옷 벗어요.”
“네?”
“옷 벗으라고.”
“정치헌 씨한테 복수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 다 알아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분한테 연락 올 때까지만 참으시면 안 될까요?”
다급해져서 그에게 정치헌을 상기시켰다. 아이가 생겨 일이 번잡해지기 전에 박래현과 계약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그분은 주인님께 마음이 있는 거 같던데요. 제 예감은 꽤 잘 맞는 편입니다.”
박래현이 나를 이용해 정치헌을 떠보려 했다면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정치헌은 질투를 감추지 않았고 박래현과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솔직하게 피력했다. 둘 다 안하무인에 비도덕적이고 불같은 성격이어서 내 눈엔 하늘이 점지해 준 짝으로 보였다.
“곧 히트 사이클이 다가오는데, 실수로 아이가 생기면 주인님이 곤란해지잖아요.”
“윤준영 씨, 오늘따라 피곤하게 왜 이러지? 우리 계약 조건 잊었어요? 당신이 내 아이를 낳아야 계약이 끝납니다.”
“왜요? 주인님 배우자 되실 분한테 실례란 생각은 안 드세요?”
“그걸 윤준영 씨가 왜 걱정하지? 당신은 얌전히 애만 낳아 주면 되는데.”
“정치헌 씨랑 결혼할 거면 그분과 아이를 만드세요. 좋은 상대 두고 왜 일을 복잡하게 꼬십니까?”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몰라요? 결과가 궁금하면 어디 끝까지 버텨 보세요.”
나는 울분에 차서 박래현을 노려봤다. 귀에 좆 방망이를 쑤셔 박았는지 남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면 정치헌을 자기 입맛대로 철저히 길들인 후에나 받아들일 생각인 듯했다. 그 도구로 다른 오메가와 자기 아이를 이용할 만큼 양심이라곤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정치헌이라면 박래현과 이별한 걸 천운으로 알고 절대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한테서 벗어나려면 계약 내용 착실하게 이행해요. 아이를 낳기 전엔 절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네요. 제발….”
복종하지 않은 내가 마음에 차지 않은 듯 박래현이 보고서를 잡지 않은 손으로 내 턱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대번에 고개가 꺾인 채로 박래현 눈과 마주쳤다.
“그래서 계약을 위반하겠다는 겁니까? 나한테 뒤 대 주면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미련하게 위약금을 물어 주시겠다? 나는 상관없는데, 윤준영 씨 처지에 괜찮겠어요?”
“…….”
“내가 벗겨 주길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요! 제가 벗을게요. 벗으면 되잖아요!”
설득을 포기하고 나는 무감한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드레스 셔츠 단추를 풀었다. 박래현 눈이 내 목덜미와 빗장뼈 부근으로 내려갔다. 바지를 벗고 드로어즈에서 한쪽 발을 빼고 있는데 칸막이를 내려 운전석과 뒷좌석을 분리한 박래현이 뒤통수를 휘감아 나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내가 입었던 값비싼 드레스 셔츠가 3년 입어서 걸레로 쓰는 티셔츠처럼 바닥에 깔려 있었다. 나는 참담한 기분이 되어 벌어진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수리 위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부슬부슬 흩날렸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끝냅시다. 쓸데없는 말만 지껄이는 주둥이, 자지라도 물려 놔야지.”
남자가 손바닥으로 내 입술을 툭툭 때렸다. 처음 남자를 유혹할 때 그의 좆을 빤 적이 있어서 더럭 겁부터 났다. 입을 가득 채우면서 안으로 들어온 살 기둥이 목젖을 짓누르고 긁어 대던 감촉이 여실히 되살아나서 몸이 떨렸다. 그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각오로 달려들었기에 힘든 줄도 모르고 좆을 빨았다가 이틀을 꼬박 목이 아파서 개고생했었다. 두려움을 떨친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고서 바지 훅으로 손을 뻗었다. 바지는 남자의 허리에 꼭 맞아서 허리띠는 보이지 않았다.
훅을 열고 이미 불룩 튀어나와 있는 지퍼를 천천히 열었다. 특이한 색깔로 맞물려 있던 지퍼가 양쪽으로 벌어지면서 회색 드로어즈가 나타났다. 커다란 굴곡을 이루며 똬리를 튼 덩어리가 그 안에 들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지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심호흡을 한 다음 음영이 진 곳으로 고개를 숙여 살 기둥을 따라 혀와 입술을 움직였다. 얇은 천이 침에 젖어 축축해지면서 기둥에 퍼진 핏대가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혓바닥으로 핏줄을 눌러 가며 드로어즈 구멍에 손을 넣어 불알을 주물렀다. 핏줄이 곤두서 탱탱한 고환은 주변 온도만큼 서늘했다. 기둥을 잘게 씹으며 기다란 살덩이 끝을 찾아서 볼을 비볐다. 딴딴하게 힘이 들어간 성기에서 유일하게 부드러운 해면체를 입에 물고 끝을 쪽쪽 빨았다. 침인지 쿠퍼액인지 모를 액으로 드로어즈가 군데군데 짙은 회색으로 변해 갔다. 언제부터 발기해 있었는지 벌써 비릿하면서 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까 박래현 방에서 발기한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장골에 걸쳐 있는 밴드에 검지를 걸어서 아래로 잡아당기자 성기가 대뜸 튀어나와 내 코를 때렸다. 나는 입술을 벌리고서, 굵은 기둥에 잎맥처럼 얽히고설켜 펄떡대는 핏대를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검붉은 색을 띤 귀두는 끝이 잘 벗겨져 반질반질 윤기가 돌았고 그 한가운데 구멍에서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맑은 물이 동그랗게 차올랐다. 나는 혀를 내밀어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액을 혓바닥으로 진득하게 문질렀다. 온몸의 피가 성기로 다 몰린 것처럼 기둥과 기둥을 둘러싼 핏줄이 흉흉하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기둥을 양손으로 쥐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가며 핏대가 일어선 기둥에 입술을 문댔다. 입술이 살에 붙었다 떨어지면서 연이어 젖은 소리가 났다. 기둥을 다 빨고 나서 남자의 성기를 오른손으로 잡고 쿠퍼액이 솟아오르는 귀두에 입술을 비볐다. 순간 겨드랑이에 닿아 있던 허벅지가 움찔 경련하면서 드레스 셔츠에 둘러싸인 탄탄한 복근이 안으로 움푹 꺼지는 게 보였다. 드레스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옆구리를 꽉 틀어쥐었더니 부드러운 껍질과 단단한 뼈가 손에 감겨들었다.
무릎을 벌려 몸을 지탱하고서 남자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바싹 붙여 성기 끄트머리부터 집어삼켰다. 기둥이 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좆 대가리가 목까지 들어찼다. 굵직한 성기 둘레에 못 미친 입술이 곧 찢어질 것처럼 벌어져서 나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얼굴을 움직였다. 뭉툭한 좆 대가리가 입천장에 쓱쓱 문질러지자 입 안 전체로 야릇한 감각이 번져 나갔다.
“으, 음….”
신음을 내뱉던 나는 좆을 빨면서까지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얼른 신음을 삼켰다. 입에 들어가면서 내 통제를 벗어난 좆은 울퉁불퉁한 입천장을 한참 문지르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볼을 찔렀다. 비좁은 입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서 성기가 휜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더니 피어싱 박힌 귓바퀴가 박래현 허벅지에 밀착되었다.
요도구를 몇 번 빨아 주고서 성기를 뱉어 냈다.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여 가랑이 사이에 뺨을 대고 고환 한쪽을 입에 넣고 혀를 굴렸다. 땀이 고인 부분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지만 싫지 않은 정도였다. 퇴폐적인 냄새가 오히려 성욕에 불을 붙여 밑이 움질거리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기둥을 손으로 잡고서 혓바닥에 귀두를 벅벅 문질렀다. 질벅질벅한 쿠퍼액이 음란한 냄새를 풍기며 혓바닥 위로 쏟아졌다. 숨이 차서 반은 흘리고 반은 삼켰다. 투명하게 맑았던 액은 이내 쌀뜨물처럼 희부연 색으로 변했다. 어느새 행위에 몰두한 나는 혀끝을 작은 구멍에 대고 원을 그리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헤벌어진 입술에서 타액이 쏟아져 나와 턱을 타고 가슴팍으로 뚝뚝 떨어졌다.
남자의 허벅지에 왼쪽 뺨을 대고서 삼켜도 삼켜도 끝이 없을 것 같은 성기를 요령껏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더니 드디어 곱실곱실한 털이 코끝을 간질였다. 박래현이 조금 움직여 줬으면 좋겠는데 모든 걸 나한테 맡긴 남자는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좆을 빨고 있는데 태연하게 보고서나 읽고 있는 박래현이 얄미웠다.
기둥에 돋아난 핏줄이 다 불거져 터질 지경이면서 보고서가 눈에 들어오기는 할까? 입과 목구멍에 힘을 준 채 성기를 빨던 나는 숨을 쉬기가 어려워 고개를 뒤로 물렸다. 묽은 색을 띤 끈적끈적한 액체가 성기와 입술 사이에 거미줄처럼 길게 늘어졌다가 툭 끊어졌다. 붉게 달아오른 기둥을 손에 쥐고 도드라진 핏대를 혀로 핥으면서 거대하고 투박한 기둥이 아래를 벌리고 들어와 엄청난 속도로 박아 대는 환상에 잠겼다. 기둥에 속살이 짓이겨지고 좆 대가리에 성감대가 문질러질 때의 쾌감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정작 박래현은 페로몬조차 풀지 않는데 쾌락을 학습한 몸은 벌써 뒤가 푹 젖어서 움찔거리고 있었다. 박래현에게 제발 박아 달라고 사정하기 전에 어서 이 짓을 끝내고 싶었다. 심기일전해서 두 손으로 기둥을 감싸 주무르며 다시 성기를 빨았다. 박래현이 사정하고 나면 성욕이 한풀 꺾여 오늘 밤은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입놀림에 박차를 가했다.
잔뜩 팽창한 성기를 목구멍 끝까지 삼켰을 때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났다. 숨을 헐떡이면서 나는 눈만 들어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서류를 옆으로 치우고서 박래현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빨갛게 달아오른 담뱃불 뒤로 박래현 얼굴이 보였다. 거의 다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박래현이 허리를 슬쩍 움직여 목구멍에 남은 공간으로 자지 끝을 밀어 넣었다. 목젖과 목 안에 미끌미끌한 성기를 비비면서 박래현이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 다 보았다.
“아래 구멍만 훌륭한 줄 알았더니 윗구멍도 나무랄 곳이 없어. 이렇게 조이는 기술은 타고 난 겁니까, 아니면 연습으로 익힌 겁니까?”
남자가 하고 싶은 말은 분명 후자일 것이다. 나는 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어렵게 혀를 움직여 기둥을 입천장으로 밀어붙였다. 들쭉날쭉한 혈관을 고스란히 느끼며 혀에 힘을 주었더니 낮은 신음과 함께 목구멍 안으로 뭔가가 넘어왔다. 눈앞에 검은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아찔한 기분이 들어서 나를 가두고 있는 허벅지를 꽉 움켜쥐었다.
“윤준영 씨, 그런데 내가 왜 당신 알파입니까?”
자기가 먼저 애인인 척해달라고 부탁해 놓고서 남자는 딴청을 피웠다. 항의하려고 입을 달싹였지만 기둥이 꾹 누르고 있어서 혀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날리며 남자는 왼손을 뻗어 내 얼굴을 감싸고는 엄지로 눈 밑을 살살 쓸었다. 긴 속눈썹과 연기에 가려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내 매캐한 담배 연기가 차 안에 퍼졌다.
“윤준영 알파 되기 쉽네요. 구멍에 자지만 쑤셔 박으면 자격 획득이니까.”
엄지로는 여전히 뺨을 어루만지면서 박래현은 머리카락 안으로 파고든 나머지 손가락에 힘을 줘 내 머리를 사타구니 쪽으로 내리눌렀다. 굵직한 좆 대가리가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와 목구멍 깊숙한 곳을 긁어내렸다. 그는 내 머리를 잡아 거칠게 흔들면서 여린 점막으로 구성된 안을 음미하듯 귀두를 문질렀다. 자지 끝에서 끈적한 액이 나와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내가 느끼는 자극이 쾌락인지 고통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나는 내 입을 드나드는 자지를 황홀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자격은, 후, 당신 구멍에 드나든 알파들한테 통행권 발급하듯 하나씩 나눠 주는 겁니까?”
고상하게 생긴 입술에서 동네 양아치들도 부끄러워할 말들이 서슴없이 흘러나왔다. 자지를 이로 물어뜯어 응징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자극을 이겨 내기 위해 남자의 허리와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남자의 생식기는 끝도 없이 굵어져 완전히 다 벌렸음에도 입에 담기 버거워졌다.
이제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이 섰을 때 완전히 팽창한 성기가 맥동하면서 점막과 혀, 목구멍의 여린 살에 진동을 가했다. 눈에 눈물이 고이고 숨을 못 쉬어 죽을 것만 같아서 주먹으로 남자의 허벅지를 때렸다. 끝까지 삽입한 성기를 한 바퀴 돌리고 나서 박래현은 내 뒤통수를 잡아 시선이 마주칠 때까지 뒤로 뺐다. 입 안 여린 살에 온통 들러붙었던 성기가 빠져나가면서 거품 섞인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입을 다물고 싶은데 턱뼈가 마비된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내 자지 오늘도 맛있습니까?”
우락부락한 성기 기둥을 잡아서 내 뺨에 비비며 박래현은 느긋한 표정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가 열심히 빨았던 성기는 불에 담갔다 뺀 것처럼 뜨거워 귀뺨에 핏대 모양이 그대로 찍힐 것 같았다.
박래현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고 나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내 몸을 시트 위로 끌어 올리려고 했다.
“오늘은 입에 싸 주세요. 주인님 정액을 입으로 먹고 싶어요.”
시트에 엎어 놓고 박을 기세여서 나는 박래현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성기를 입 안 깊숙이 담았다. 얼른 사정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얼굴을 움직여 박래현 대신 피스톤 운동을 했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좆에서 좆물이 계속 흘러나와 목구멍을 적셨지만 박래현은 사정하지 않았다. 그는 양손으로 내 뺨을 잡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얼굴을 뒤로 밀어냈다. 내게서 느릿느릿 빠져나가는 괴물 같은 성기를 입을 벌린 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았다.
박래현이 사정하지 않았다는 건 박래현 물건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나를 시트로 끌어 올린 남자는 내 몸을 뒤집은 뒤 허리에 팔을 감아 엉덩이를 위로 띄우고서 왼쪽 뺨이 시트에 닿도록 머리를 내리눌렀다. 베이지색 시트에서 가죽 냄새가 짙게 올라왔다. 나는 우락부락한 성기에 긁혀 생채기가 난 입 안을 가만히 혀로 쓸었다. 입천장과 점막, 목구멍뿐만 아니라 오른쪽 입가가 찢어졌는지 쓰리고 아팠다.
“윤준영 씨, 무슨 생각 해요?”
“…….”
“나한테서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정말로 저한테 아이를 낳게 할 생각입니까?”
“내일 집에 들어오는 길에 피어싱을 한 열 개쯤 더 사야겠습니다.”
“제가 정치헌 씨라면 주인님과 절대 결혼 같은 거 하지 않을 겁니다.”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박래현은 엉덩이골을 벌리고서 주름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그는 갈라진 곳에 손가락을 붙여 손바닥 전체로 압박하듯 구멍을 애무했다. 아이는 부부 사이에 갖는 게 낫겠다고 말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사람이었다. 내겐 선택권이 없는데 내 생각을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우리 관계에 있어 모든 결정권은 박래현에게 있고 계약상 을인 나는 따를 수밖에 없다. 역류하는 대신 흘러가는 대로 휩쓸리면서 그때그때 대처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세 개인지 네 개인지 모를 손가락이 주름을 젖히고 구멍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성감대를 문지르는 손에 바로 반응을 보였을 텐데 오늘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박래현 부부에게 아이가 없어서 나와 계약한 줄 알았는데 박래현은 유부남이 아니었다. 정치헌과 결혼하면 아이를 낳을 거면서 이 남자는 왜 내게 아이를 낳아 달라고 하는 걸까? 박래현이 원하면 아이를 낳아야겠지만 남자 속을 알 수 없어 영 불안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산만합니까? 집중 안 해요?”
빡빡한 안이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박래현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는 안 되겠는지 상체를 숙여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페로몬을 풀었다.
“이러다 구멍 찢어지면 당신만 손해지.”
구멍이 찢어지면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며칠 섹스를 안 해도 될 테니 그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두꺼운 질감의 페로몬이 안개비처럼 살갗에 스며들어 순식간에 성욕을 고취하고 감각세포를 일깨웠다.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주먹으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박래현은 구멍 안에 든 손가락을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며 밑이 충분히 젖어 들 때까지 페로몬 강도를 높여 나갔다. 치자꽃 향기가 빠져나갈 데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유일하게 나는 소리가 찌걱찌걱 젖은 살을 헤집는 소리여서 머리끝까지 수치심이 차올랐다. 나중에 후회하겠지만 결국 알파의 적나라한 유혹에 이성과 구멍이 성기를 받을 만한 상태로 헤벌쭉 벌어졌다.
박래현은 차 안이 좁은 탓에 내게 상체를 겹쳐 왔다. 육중한 몸을 빈틈없이 밀착하며 그는 한 손으로 몸을 받친 채 다른 손으로 구멍 안을 들쑤셨다. 벌거벗은 등에 얇은 드레스 셔츠를 사이에 두고 단단한 가슴팍이 팔딱거렸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것처럼 가까이서 들렸고 향수 냄새와 페로몬이 안으로 거세게 밀려들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어색한 체위에 귀 끝까지 빨갛게 익어 버린 듯 열이 났다.
“머리 모양 바꾸니까, 더 귀여워진 거 알아요?”
박래현은 혼잣말처럼 내 귀에 속삭였다. 두껍게 쌓인 점막을 헤치고 들어온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휘더니 쾌락에 익숙한 부분을 무자비하게 긁고 지나갔다. 그 종적을 따라 몽글몽글한 쾌감이 돋아났다.
“살살 달래고 예뻐하면서 박아야 할 거 같잖아.”
“흐, 흐으응, 그냥, 평소대로 해 주세요.”
남자의 손이 안을 드나들며 성감대를 문지르자 질척하고 끈적끈적한 물이 흘러내려 허벅지와 무릎을 적셨다. 몸 안 어딘가에 연못이라도 들어 있는지 남자가 자극만 주면 애액이 넘쳐흘러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남자는 깊숙이 넣었던 손을 꺼내 내 눈앞에서 흔들었다. 흥건하게 젖은 손에서 점성 가득한 액이 뚝뚝 떨어졌다.
“내 오메가는 세상에서 질질 싸는 걸 제일 잘해. 시작도 안 했는데 이게 뭡니까, 이게. 응?”
박래현은 축축하게 젖은 엄지로 귓바퀴를 어루만지며 나머지 손가락을 머리칼 속에 파묻고서 내게 몸을 바싹 붙인 채 하체를 움직여 골짜기 사이에 성기 기둥을 문질렀다. 페로몬과 남자의 애무에 녹아난 구멍이 어서 좆을 달라고 입을 쩍 벌리는 게 느껴져 울고 싶었다. 기둥이 쓸고 지나갈 때면 주름이 천박하게 움찔거리면서 그 사이로 애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골짜기에서 노닐던 성기가 천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므라진 구멍을 젖히고 붙어 있던 뼈를 양쪽으로 벌리며 내장 깊숙이 들어온 좆 기둥이 단번에 가장 예민한 부분을 쳐올렸다. 허벅지가 크게 벌어지면서 다리 한쪽이 시트 밑으로 떨어진 게 남자 눈에 거슬렸는지 허벅다리로 매운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아, 아윽! 흐, 흐읏!”
철썩이며 허벅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면서 하반신에 경련이 일었다. 머리칼을 붙든 손이 아니었다면 상체가 밀려 올라가 그대로 차 벽에 이마를 찧었을 것이다. 안쪽 성감대를 찍어 누른 성기가 멈추지 않고 더 깊은 곳을 벌리고 들어와 젖은 내벽을 문질렀다. 귀두가 내장 끝을 긁어 대는데도 아직 덜 들어온 성기를 보며 새삼스럽게 크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손을 뒤로 뻗어 접합 부위를 뚫고 들어오는 기둥을 만져 보았다.
아까 성기 둘레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차라 구멍이 성기를 품을 정도로 늘어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박래현은 내 손을 잡아 깍지 낀 채로 허리에 붙이고서 성기를 끝까지 박아 넣었다. 잘 다져진 점막이 안을 빠듯하게 채운 성기에 늘씬 눌어붙었다. 허기진 안을 빈틈없이 메우면서 나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몸이 좋아서 눈앞이 빙글 돌았다. 박래현은 기세를 늦추지 않고 성기를 치대며 좁아지는 안쪽을 뭉근하게 비볐다.
“아, 아악! 거, 거기! 흐, 흐윽, 으읏!”
들쑤셔진 안이 뜨거워졌다. 남자가 성기를 뒤로 빼는 게 아쉬워 엉덩이가 성기를 따라 뒤로 들렸다. 성기에 끈끈하게 달라붙은 속살이 기둥에 딸려서 쑥 뽑히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말 안 해도 당신 몸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다 알아요. 여기 불룩 솟아서 좁아지는 부분 맞지?”
박래현은 여기가 그곳이라는 듯 기둥으로 어느 한 곳을 불이 나게 문질렀다. 내벽 근육이 내 의지를 벗어나 멋대로 수축하면서 자지를 물고 있는 구멍을 좁혀 갔다. 일시에 몰려든 쾌감을 감당하지 못한 나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그만해 달라고 머리를 저었다.
“흐, 흐읏, 으, 으으응….”
“칸막이 있어도 그렇게 소리 지르면, 영범 형한테 다 들릴 겁니다.”
귓불을 살짝 눌렀던 입술이 뺨을 타고 내려와 입술 끝에 머물렀다. 박래현답게 입술도 온도가 서늘했다. 입꼬리를 꾹 누르던 입술이 방향을 틀어 입술 한가운데를 누르려는 순간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오늘 키스는 정치헌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극이 아니었던가? 목적 없이 박래현과 키스하고 싶진 않았다. 남자의 입술이 이번엔 왼쪽 뺨을 타고 내려와 입술 가장자리를 깨물었다. 숨 쉬기 힘들었지만 난 고개를 틀어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박래현이 낯설었다. 섹스는 알파와 오메가로서 본능에 끌려 할 수 있는데 키스는 그보다 친밀한 행위여서 왠지 꺼려졌다. 박혔던 몽둥이가 안에서 쑥 빠져나가면서 크게 벌어진 구멍 안으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비어 버린 안을 얼른 채워 줬으면 좋겠는데 키스를 거부해서 박래현이 화가 난 것 같았다. 조만간 귀가 뚫릴 것을 예상한 나는 엎드린 채로 벌벌 떨었다. 박래현 눈에는 내가 구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천적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타조처럼 보일 것이다.
별안간 한쪽 어깨가 드센 손아귀에 잡혀 상체가 젖혀지면서 내 뒤에 버티고 선 박래현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과 서행하며 따라오는 뒤차의 헤드라이트에 남자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가 어둠에 잠기길 반복했다. 한쪽 뺨이 밝아질수록 반대쪽 뺨은 그림자가 깊어져서 어떤 게 박래현의 진짜 모습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손을 뻗으면 얼굴과 몸을 만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나는 끝내 남자의 실체를 파악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깨를 비틀어 나를 쉽게 뒤집은 박래현이 무릎 안쪽을 잡아서 내 몸을 자신의 허벅지 위로 끌어당겼다. 나는 가랑이를 좌우로 크게 벌린 채 무릎에 남자의 양 옆구리가 닿을 때까지 끌려갔다. 엉망으로 흐트러졌을 주름 입구에 뭉툭하고 굵은 좆 대가리가 비벼졌다. 아래를 벌리고 들어오면서 박래현은 검지를 넥타이 매듭에 넣고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 넥타이를 풀었다.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그는 셔츠 단추도 두어 개 풀어 빗장뼈를 드러냈다. 흐트러진 남자에게서 평소에 볼 수 없던 조급함이 엿보였다.
“키스하기 싫은 이유라도 있습니까?”
두 팔 사이에 내 얼굴을 가두고서 박래현은 좆을 깊이 쑤셔 넣으며 삽시간에 거리를 좁혔다. 마주 본 채로 남자가 위아래로 움직이자 남자의 단단한 복근에 성기가 닿아 귀두가 비벼졌다. 박래현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부풀어 오른 내 성기를 강인한 근육으로 짓뭉갰다.
귀두 표피가 부드러운 살갗에 마찰되면서 자연스럽게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알파가 주는 쾌락을 느끼며 게걸스레 안을 파헤치는 좆에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 묵직하게 들어찬 살 기둥을 속살로 물어뜯으면서 나는 스스로 쾌락에 잠식돼 눈앞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알파에게 몸을 밀착하고 싶은 욕구가 들끓어 그의 팔을 지지대 삼아 엉덩이를 크게 움직거려 성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박래현은 노련하게 속살을 문지르다가 느릿느릿 성기를 뒤로 뺐다.
잠깐의 떨어짐도 용납하기 싫어서 좆대가리를 품은 엉덩이를 위로 붕 띄워 올렸지만 진공 상태에서 뽁 소리를 내며 성기가 뽑혀 나갔다. 미지근한 액이 엉덩이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 어렵사리 남자에게 눈을 맞췄지만 불빛을 등지고 있어서 입술이 웃고 있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달아오른 열기를 충족하고자 나는 성기 기둥에 구멍을 대고 절실하게 비비적댔다.
먹음직스럽게 벗겨진 좆 대가리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녀 얼른 씹어 삼키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내 욕구를 비웃듯이 예민하게 곤두선 회음과 구멍 주변을 굵직한 귀두가 장난처럼 쿡쿡 쑤셔 댔다. 지독한 자극에 구멍과 엉덩이 근육 전체가 움찔움찔 경련하며 기를 쓰고 성기에 반응했다. 어서 박아 주면 좋으련만 구멍에서 자꾸 엇나가는 성기가 야속해 나는 허겁지겁 박래현 성기에 갈라진 틈을 비벼 댔다.
물이 고인 부분을 질기게 치대던 성기가 예고도 없이 주름 한가운데를 꿰뚫고 푹 쑤셔 박혔다. 음탕한 좆 대가리는 한도 끝도 없이 밀고 들어와 종착지에 커다란 균열을 일으켰다. 퍽퍽퍽, 금 간 곳을 쉴 새 없이 치대는 좆에 살점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에 뭔가가 생긴 듯했다.
“아, 아흑! 그, 그만… 흐, 흐으읏….”
박래현이 나를 붙잡고 있는데도 내 몸은 시트에서 몇 미터 쯤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눈앞에 수많은 빗금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몰아닥친 쾌락의 범람에 눈이 발칵 뒤집혀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후읏, 아무리 좋아도 적당히 조여요. 이러다가 자지 부러지면 당신만 손해야.”
내가 새롭게 눈뜬 관능의 세계에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박래현은 움직임을 멈추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잇새로 욕설을 씹어 뱉으며 땀에 젖은 내 머리칼을 뒤로 쓸어 주었다. 얼굴로 쏟아지는 남자의 숨결이 아까완 달리 거칠고 뜨거웠다. 박래현이 슬쩍 허리를 움직이자 살기둥을 둘러싼 점막에 뭉근히 쾌감이 번져갔다. 흐릿해진 시야로 박래현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윤준영 씨, 하루도 안 빼고 배불리 먹여 주는데, 왜 아직 애를 안 배요. 혹시 나 몰래 피임하나?”
굵은 좆 대가리가 인정머리 없이 내벽의 돌기를 쳐올리자 현기증이 일었다. 잘 다져진 주름과 주름 안쪽의 묽은 살, 성기를 감싸고 있는 두꺼운 벽이 형체도 없이 녹아내렸다. 박래현은 내게 숨 쉴 시간도 주지 않고 성기를 짓쳐서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던 허벅지를 벌리게 했다.
연이어 절정이 지나간 뒤 겨우 눈을 떴다. 두 손은 남자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고 두 다리는 허벅지가 벌어진 채 날씬한 허리를 감고 있었다. 시꺼먼 수렁으로 가라앉는 몸을 제자리에 붙들어 둘 매개체가 필요해 그를 꽉 붙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퍽 민망한 자세였다. 박래현과 나는 키가 컸고 침실에서처럼 자세를 취하기엔 공간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몸을 밀착해야만 했다. 널따란 어깨에서 손을 떼려는 찰나 뒤로 빠졌던 성기가 단박에 가장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왔다. 속살에 선을 긋듯 사선으로 움직이는 살덩어리에 마비가 온 것처럼 몸이 굳었다.
“으읏… 하아, 으윽, 흐으윽….”
어깨를 틀어쥔 손과 허리를 감고 있는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좆 기둥을 물고 있는 입구와 민둥민둥한 사타구니가 남자의 불알과 음모에 긁혀 간지러웠다. 달아오른 몸에 더 큰 만족을 얻고자 나는 남자에게 매달린 채 성기를 조이며 허리를 흔들었다. 널따란 어깨 너머 유리창마저 부옇게 변해서 이 세상에 오로지 박래현과 나, 둘만 존재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왼손으로 시트를 짚은 남자는 내 쪽에 있는 보조등을 켜고서 상체를 숙여 내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그의 손이 보석이 박힌 귓바퀴에 잠시 머물렀다. 눈을 깜박거려 시야를 흐리게 하는 열기를 털어 내자 남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속눈썹이 길게 그늘진 희고 수려한 얼굴이 나와 박래현 사이를 좁히며 다가왔다. 눈동자는 욕정으로 혼탁했고 뚜렷한 각을 이루는 입술은 짙붉었다.
처음 섹스한 이래로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몸을 섞었지만 섹스할 때 박래현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복숭아색으로 상기된 낯선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이 무자비한 아름다움에 반해서 정치헌은 박래현을 잡고자 하는 걸까. 박래현의 본성을 알지 못했다면 사람 넋을 쏙 빼놓는 얼굴에 나 역시 마음을 뺏겼을지 모르겠다. 박래현은 박혀 있는 성기를 지그시 누르며 내 눈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다. 남자의 입술이 다가와 나는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박래현은 인내심 강한 성격이 아니라서 단숨에 드센 손아귀에 턱이 잡혔다.
“아래는 쉽게 벌려 주면서, 위는 안 벌려 주는 이유가 뭡니까? 다른 알파한테도 이랬어요?”
“키스한다고 애가 생기진 않잖아요. 애 만들려고 섹스하지, 다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뭔가 착각하나 본데, 당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내 겁니다. 입술도 예외는 아니지.”
“…….”
“내가 벌리라면 어디든 다 잡아서 벌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자 좆에 아래를 점령당한 채 알몸으로 남자에게 매달려 있으면서 키스는 싫다고 주장하는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여기서 더 뒤로 빼는 건 내 처지에 가당치 않았다. 나는 박래현의 머리칼 안에 오른손을 쑤셔 넣어 그의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상대가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내가 이렇게 나가면 물러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래현은 예상을 뒤엎고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1cm 간격으로 떨어져 있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물렸다.
푹신하고 탄력 있는 입술 안에서 미지근한 살덩이가 나와 입술을 가르고 안으로 밀려들었다. 혀 가장자리를 파고들어 어금니까지 미끄러져 들어온 혀는 더 안으로 들어가 혀뿌리를 문지르다가 입천장을 긁으며 밖으로 나와 혀끝을 얽었다. 처음부터 깊게 섞이는 혀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갈색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혀끝으로 내 입 안을 다 들여다볼 요량인지 목구멍과 입천장, 잇몸과 혀 밑바닥까지 샅샅이 만져 가며 집요하게 파헤쳤다. 얼굴을 붙이고 입을 맞추는 행위가 너무 친밀하게 느껴져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혓바닥을 진득하게 문지르던 혀가 침에 미끄러져 볼 점막을 찔렀다. 아래를 꽉 채운 살덩이가 열점을 찾아 찍어 누르는 동안 입을 가득 채운 살덩이도 예민한 곳을 찾아서 더듬었다.
“흐윽, 으으응, 하아, 흣….”
입 안에서도 성기가 움직이는 듯한 감각에 좆을 물고 있는 아랫배가 뜨끈뜨끈해졌다. 입술 안을 끈덕지게 헤집는 혀에 내 혀를 대고 문지르는 와중에 남자는 가장 깊은 곳까지 성기를 박아 넣어 내벽을 느릿하게 왕복했다. 핏대가 요동하는 기둥에 부대껴 장기를 이루는 세포와 몸을 구성하는 뼈가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듯했다.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거칠게 허리를 뒤틀면서도 활짝 열린 속살은 좆 기둥을 비틀어 짰다.
“으으응, 아, 아아! 하, 하아! 흐….”
흘러내린 미적지근한 체액에 시트에 닿은 궁둥이와 허리가 젖어 움직일 때마다 야릇한 소리가 났다. 허리를 비틀면서 틈이 생긴 입술에 다시 남자의 입술이 쫓아왔다. 나는 두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틀어쥔 채 좆을 빨 듯 그의 혀를 빨며 쾌감에 몸부림쳤다. 박래현은 시트를 짚지 않은 손으로 땀에 젖은 내 뺨을 쓰다듬었다. 동시에 남자의 좆이 거침없이 들어와 장기가 끝나는 지점을 아찔하게 내리눌렀다.
“하, 하윽, 흐읏! 이제 그만!”
박래현 허리를 감고 있던 다리 두 개가 허공에서 흔들리다가 그의 엉덩이를 지지대 삼아 발꿈치를 내리눌렀다. 더는 버티기가 힘들어서 머리칼을 쥐고 있던 두 손으론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머리칼이 쭈뼛 서고 온몸이 발발 떨렸다. 남자의 드레스 셔츠는 내가 쏟아 낸 정액으로 척척하게 젖어 갔다. 내 안에 머무른 채 박래현은 몸을 모로 세워 나를 뒤에서 안았다. 내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온 손이 시트를 단단하게 움켜잡았다. 그가 내 턱을 잡아서 고개를 뒤로 꺾었기 때문에 나는 다리를 활짝 벌린 채로 그의 눈을 응시했다.
“윤준영, 나 봐. 다른데 눈 돌리면 용서 안 해.”
그에게 시선을 맞추려 했지만 박래현이 피스톤 운동을 시작하자 시야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남자는 허리를 잘게 움직이다가 깊게 쑤셔 넣기를 반복했다. 피어싱이 박힌 귓바퀴를 입술로 문지르던 그가 혀를 내어 연골을 핥다가 귓구멍 안쪽으로 혀를 쑤셔 넣자 바깥과 차단된 귓가로 장맛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귓구멍도 성감대인지 박래현이 혀를 할짝댈 때마다 온몸이 간지러워 참을 수 없었다.
“으, 으응, 가, 흐윽, 간지러워요! 그, 그만!”
“왜, 귀는 싫어요?”
박래현이 빨아 주는 곳마다 열꽃이 핀 것처럼 살갗이 화끈거렸다. 박래현은 이마와 뺨으로 입술을 옮겨 가며 혀를 내밀어 얼굴 곳곳을 핥았다. 속눈썹과 콧대까지 애무하던 입술이 마지막엔 내 입술 전체를 물어 안으로 빨아들였다.
입술을 벌려 주자 포만을 모르는 굶주린 혀가 내 혀를 휘어 감았다. 나는 고개를 한껏 젖혀 뜨거워진 살덩이를 깊게 받아들였다. 두 개의 살덩이가 추접한 소리를 내며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던 성기가 쉬지 않고 물컹해진 속을 문질렀다. 그의 좆이 쑥 빠졌다가 치고 들어올 때면 풍성한 머리칼과 향수 냄새가 턱을 간질였다. 너무 좋아서 욕이 나왔다. 평생 박래현과 섹스만 하고 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이 순간이, 이 감각이 미치도록 좋았다.
“나랑 키스해서 싫었습니까?”
내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서 박래현은 턱을 지나 목덜미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서 성기 둘레를 따라 최대치로 벌어진 결합부를 엄지로 문질렀다.
“여기서 더는 안 벌어집니까?”
지금도 한계까지 벌어져 있는데 더 벌릴 순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을 듣기 위해 물어본 말이 아니었는지 박래현은 기둥을 꽉 물고 있는 주름을 억지로 벌리고 그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민감한 곳을 건드렸다. 손끝의 통통한 부분으로 내가 느끼는 곳을 누르고 비벼 대자 주름이 벌름거리면서 요동했다. 남자는 잠시간 그 감촉을 즐기는 듯 속살에 좆을 뭉근하게 돌리다가 손가락과 성기를 천천히 뺐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성감대를 긁으며 빠져나가는 좆 때문에 나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절정이 주는 아찔한 희열을 알고 있기에 장난치듯 주름 주위를 퍽퍽 박아 대는 성기를 손으로 잡아 직접 구멍에 넣고 허리를 움직였다.
이미 오르가슴을 두 번이나 느꼈지만 내 안은 다시 절정을 향해 시동을 걸었다. 박래현의 마지막 스퍼트에 육중한 차체가 흔들리고 가죽이 몸에 마찰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지나친 속도감에 머리가 어지러워진 나는 한쪽 발꿈치로 뒷좌석 등받이를 누르고 나머지 발꿈치로 차 바닥을 누르면서 몸을 지탱했지만 흔들림을 막을 순 없었다.
“흐읍! 조금만 천천히….”
높다란 코가 내 뺨을 뭉개면서 신음으로 벌어진 입술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내게 입 맞춘 채 체중을 실어 등을 내리누른 박래현이 하체에 힘을 줘서 나를 시트에 몰아붙였다. 허벅지와 다리가 얽혀 들며 더 들어올 수 없는 데까지 들어온 좆이 내벽과 점막을 쾅쾅 찍어댔다. 끝없이 상승하던 쾌락이 정점에 이르러 더 올라갈 데가 없어지자 사지가 벌벌 떨리고 온몸에서 땀과 물이 배어 나왔다.
“흐으, 으으응… 하아, 흐윽….”
뜨거운 액체가 안에서 퍼져나가는 감각에 나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남자의 혀를 물었다. 박래현은 입술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나를 덮치듯 안았다. 겨우 입술이 떨어진 뒤에 이번엔 뜨거운 입술이 화인처럼 내 뺨과 귓바퀴에 내려앉았다.
여전히 발기해 있는 성기와 정액으로 아랫배가 더부룩하게 불러 왔다. 온몸이 축 늘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지경이 되자 무력감이 찾아왔다. 임신이 되지 않았길 간절히 바라면서 성기를 빼 달라는 의미로 허리를 뒤틀었더니 박래현이 성기를 빼고 몸을 일으켰다.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왈칵 쏟아지는 바람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이제껏 벌어져 있던 구멍이 쉽게 닫힐 리 없어서 나는 한껏 벌어진 구멍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맥없이 쓰러져 박래현을 지켜봤다. 그동안 억제제에 의존해 왔던 나는 이런 꼴을 하고서 오메가의 본능이 얼마나 질기고 원색적인지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모호한 시선을 내게 고정하고서 박래현은 체액에 젖어 번질번질한 자지를 속옷에 집어넣고 지퍼를 올린 뒤 바지 훅을 잠갔다.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넣고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쓸어 올리자 섹스는 나 혼자 한 것처럼 그는 금세 출근할 때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서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차는 이미 저택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박영범이 먼저 내렸는지 에어컨이 꺼진 차 안은 비리고 텁텁한 냄새로 가득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몸을 가릴 게 없는지 차 안을 눈으로 더듬었다. 내가 입었던 드레스 셔츠와 바지는 박래현이 읽다 둔 보고서와 함께 바닥에 굴러다녔고 속옷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더러운 옷을 입고서 정액을 주룩주룩 흘리며 집까지 들어갈 생각에 끔찍해졌다. 한 손으로 아픈 배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 드레스 셔츠를 집어 든 내가 소매에 한쪽 팔을 꿰고 있는데 박래현이 셔츠를 잡아서 도로 바닥에 내던졌다. 또 무슨 심술을 부리고 싶어 이러는 걸까. 나는 지친 눈으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냥 이대로 있어요.”
옷을 갖춰 입은 박래현이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오늘 내내 내가 내리길 기다렸다 문을 닫았던 사람이 하필 이럴 때 냉정하게 굴었다. 차에 조금만 더 있다가 혼자 조용히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는데 내가 앉은 쪽 문이 활짝 열렸다. 박래현은 허리를 숙여 내 무릎 사이에 한쪽 팔을 넣고 다른 쪽 팔로는 어깨를 감아 나를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상승에 놀라서 남자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었다.
“내려 주세요. 여기 있다가 저 혼자 들어갈 겁니다.”
“얌전히 있지 않으면 어깨에 들쳐 멜 겁니다. 벌어져서 닫히지도 않는 구멍, 사람들한테 다 보여 주면서 자랑하고 싶어요?”
박래현이 안아 든 탓에 구멍이 벌어지면서 정액이 덩어리째 뚝뚝 흘러내렸다. 존나 쪽팔리고 수치스러워 엉덩이에 힘을 줬더니 좆대가리에 패인 안이 시큰시큰 아팠다.
섹스하면서 거세게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비가 내린 흔적은 없었다. 귓가에 두근두근 울리던 낯선 심장 소리를 빗소리로 착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후덥지근한 여름밤 열기에 취해서 달무리가 진 하늘이 보였다. 누군가에게 이 좆같은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널따란 어깨에 코를 묻었다.
***
옷장에 내 옷으로 추정되는 옷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박래현이 닥치는 대로 구매한 옷을 이 차장이 보기 좋게 정리해 놓은 듯했다. 집에 가둬 두고 파자마 가운만 입힐 거면서 비싼 옷을 전시해 놓은 박래현 심리를 분석하다가 포기하고 줄무늬 티와 팬츠 사이에서 파자마 가운을 꺼내 입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던 나는 목과 어깨를 잇는 곳에서 박래현이 남긴 잇자국을 발견하고 심란해졌다. 자세히 보니 어제 심하게 빨린 입술도 부어 있었다. 그에게 물린 표식을 달고 박래현과 나란히 앉아 밥을 먹으려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박래현과 어제 처음 마주 보고 섹스했다. 그는 내 뺨을 쓰다듬었고 심지어 키스까지 했다. 우리는 오래된 연인들처럼 서로의 입술을 빨고 혀를 섞었으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나를 보던 눈빛에 싱숭생숭해져서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그는 왜 갑자기 내게 키스했을까?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래현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 까닭은 정치헌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정치헌에게 화가 나서 내게 분풀이를 했다. 박래현이 나와 몸을 섞게 된 계기 역시 정치헌이 다른 남자랑 놀아나서 홧김에 저지른 일이었다. 박래현은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정말 내가 자기 아이를 낳아 주길 바라는 걸까? 정치헌 행동에 화가 났다고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래현은 JS 제약 후계자이고 그가 낳은 아이들이 다음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일 텐데 겨우 남창쯤으로 여기는 사람에게서 후사를 볼 이유가 없었다. 말은 저렇게 해 놓고 막상 내가 임신하면 박래현은 태도를 바꿔 아이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자던 박래현을 도발해서 섹스를 유도한 건 나였다. 그의 본심을 알았더라면 아이를 희생하느니 차라리 내가 괴로운 쪽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왜 매번 좆같은 선택을 해서 스스로 궁지에 빠지는 걸까. 일이 꼬일 대로 꼬여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언제는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간 적이 있었던가. 물길을 돌리려고 아등바등 노력해도 인생은 절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를 고용한 목적을 조만간 달성할 테니 박래현은 쓸모없어진 나를 버릴 것이다. 그전까지 아이가 생기지 않길 바랄 뿐이다. 나를 오작교로 사용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그들은 곧 결혼할 테고 나는 기껍게 내 길을 가면 된다.
이 집에서 나가게 되어 기뻐야 하는데 박래현이 다른 사람의 알파가 된다는 결론에 왠지 기분이 안 좋아졌다. 내 몸은 자연스럽게 박래현을 내 알파로 인식해 버렸나 보다. 박래현이 다른 오메가에게 눈길을 주는 것도, 다른 오메가를 만지는 것도 소름 끼치게 싫었다. 내 알파가 나만 보고 내게만 좆을 세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나는 존나 배알도 없는 등신이라고 자신을 욕했다. 박래현은 계약할 때부터 개와 주인의 관계라고 우리 사일 못 박고 시작했다.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나는 그에게 반려동물만도 못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에게 육체적으로 끌린다고 해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N극과 S극이 가까이 있으면 서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이치로 나는 오메가라서 박래현에게 끌리고 있다. 내가 박래현에게 느끼는 소유욕은 알파와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급격히 소멸될 것이다.
더 지체했다간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것 같아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던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누구의 시선이든 달갑지 않아서 못 본 척 박래현이 뒤로 끌어 준 의자에 앉았다.
“옷장에 옷 채워 둔 거 안 봤어요?”
“봤습니다.”
“파자마 차림이 편하다면 모를까, 앞으론 옷 갖춰 입어요.”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쁠 줄은 몰랐다. 박래현은 참 여러모로 평범한 것에 감사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박래현을 보고 크게 웃어 주었더니 박래현 시선이 내 눈에서 입술로, 목덜미로 천천히 움직였다. 내 눈도 무의식중에 박래현 입술로 향했다. 분홍빛으로 생기 도는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고 그 안의 뜨거운 살덩이가 내 혀와 얽혔다고 생각하자 아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재빨리 시선을 돌리다가 이번엔 내 맞은편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는 박영범과 눈이 마주쳤다.
“준영 씨, 새신랑 같아요. 그 헤어스타일 정말 잘 어울립니다.”
“어제 피부 관리를 받아서 그런가 보네요.”
이 차장이 잡곡밥이 소복이 담긴 밥그릇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하고 얼른 젓가락을 집어 반찬으로 향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여러 종류의 생선이 먹기 좋게 뼈까지 발라져 있어 침이 꼴깍 넘어갔다.
“거기 마사지 괜찮죠? 래현이도 시간 날 때 가끔 다녔는데.”
“요즘은 안 다니시나 봐요?”
맞장구치려고 별 뜻 없이 물었는데 분위기가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박영범은 박래현을 힐끗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원래 내 동생이랑 같이 다녔는데 그 동생이 올 초에 사고로 죽었어요. 박수현이라고, 당신도 알 것 같은데? 당신이랑 같은 대학 다녔고 한 학년 후배였으니까.”
내가 23년을 살아오면서 딱 두 명의 알파와 엮였는데 그게 박래현과 박수현이다. 그러나 첫 히트 사이클에 박수현에게 도움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와 얽힌 일이 없어서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했다.
“우리 과에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그냥 얼굴하고 이름만 아는 정도였어요.”
“하, 씨발….”
갑작스러운 욕설에 나는 박래현을 돌아보았다. 섬뜩하게 차가운 눈이 나를 향했다.
“정치헌만 난 놈인 줄 알았더니 윤준영은 한술 더 뜨네. 보통이 아닌 줄 알았지만 아주, 상상을 초월해.”
나는 박래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그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같은 과 후배인데 내가 말을 냉정하게 해서 화가 난 걸까? 여기서 더 격렬하게 반응할 만큼 박수현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고 어제 액자에 든 사진을 보기 전까진 그가 박래현 동생인 걸 모르고 있었는데 박래현 반응이 이상했다.
“수현이와 내 관계가 당신한텐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가 봅니다?”
“아니요, 놀랍긴 한데… 세상엔 우연이 존재하니까요.”
“하긴, 돈만 주면 몸도 파는 오메가에게 내가 뭘 바라는 건지.”
엄마 수술비 마련하려고 몸을 판 거지, 돈이 좋아서 몸을 판 건 아니다. 그런데 박래현은 마치 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몸을 팔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몸을 판 사람과 결혼할 사람을 두고 바람을 피운 사람 중 후자가 더 나쁜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해서 화가 났다.
“가진 거 없다고 너무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저를 모르시면서, 왜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세요? 자꾸 절 보고 남창이라는데, 제가 몸 파는 거 직접 보셨어요?”
박래현의 흰 공막에 붉은 실핏줄이 비쳤다. 남자가 화를 누르는 것 같아 두려웠지만 한번 물꼬를 튼 마당에 금세 잘못했다며 꼬리를 내리고 싶진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더니 박래현은 수저를 식탁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지금 말 함부로 하는 게 누구지? 내 말에 토 달지 않기로 한 계약 조건 기억 안 납니까?”
“더러운 남창 돈 주고 산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제가 더러우면 주인님은 깨끗합니까? 좋아하는 오메가 두고 딴 오메가한테 환장하신 분도 정상 아닌 건 마찬가집니다!”
“내가 당신한테 환장했다고? 윤준영 씨, 주둥이 함부로 놀린 대가는 생각해 보고 하는 말입니까? 계약 이딴 식으로 끝내면, 당신만 손해일 텐데, 안 그래요?”
내 팔뚝을 잡고서 나를 거실로 질질 끌고 간 그는 기다란 소파에 나를 내던졌다.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음을 직감했지만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한 달을 어렵사리 버티고 참아 왔는데 잠깐 방심한 탓에 모든 게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당신이 정 원하면 계약 해지해 줄게. 물론 귀책사유는 당신에게 있는 거로 하고. 어때, 해지할까요?”
정치헌에게 떡밥을 던졌으니 곧 답이 돌아올 테고 남자는 계약 파기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가 괜히 계약 위반으로 몰리면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박래현에게 복종하며 몸까지 다 내줬는데 원금에 위약금을 갚아야 한다면 나는 화병으로 일찍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지금껏 잘 참았으므로 정치헌이 연락을 주기까지 무조건 버티기로 했다. 결혼이 확정되면 정치헌 역시 나부터 치우려 들 테니 그때까지 트집 잡히지 않게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있어야 한다. 결론을 내리자마자 나는 소파에서 내려와 박래현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얼굴과 귓가로 순식간에 열이 몰렸다.
“주인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윤준영 씨가 뭘 잘못했는데요? 이유를 정확하게 대면 귀 뚫는 건 봐주겠습니다.”
박래현 손에는 일회용 피어싱 기계가 들려 있었다. 기계만 봐도 반사적으로 통증이 생각나 귀가 아팠다. 대리석 탁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며 박래현은 내 왼쪽 귓바퀴를 엄지로 문질렀다.
“주인님을 모욕해서 계약서 조항을 위반했습니다. 마음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왼쪽 귓바퀴에 구멍이 뚫렸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두 손을 맞잡은 채 이를 악물었다. 기계를 탁자 위에 툭 내던진 박래현이 호박색으로 반짝이는 보석을 집어 방금 뚫은 구멍에 쑤셔 넣었다.
“몸으로 때울 생각만 하지 말고 머리란 걸 좀 써 봐요. 당신이 왜 미움 받는지.”
커다란 손이 양 볼을 잡아 아프게 누르더니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손가락이 들어와 혓바닥을 죽 긁어내렸다. 무자비하게 헤집는 손가락을 피해 혀를 이리저리 움직여 봤지만 소용없었다. 손바닥을 위로 올려 입천장을 살살 긁던 손가락이 어금니 뒤쪽으로 움직여 아프게 혀를 주물렀다. 고여 있던 침이 남자의 손가락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신기한 물건을 관찰하듯 입 안을 들여다보던 박래현이 갑자기 내게 눈을 맞춰 왔다.
“나한테 키스해요.”
귀가 아픈 것도 잊고 상체를 세운 나는 흰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의 얼굴을 아래로 당겨 뾰족한 입술 산에 입을 맞추고서 윗입술을 입술 사이에 넣고 빨다가 벌려 준 입 안으로 혀를 길게 찔러 넣었다. 보드랍고 말캉한 살덩이를 혀로 문지르며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가만히 있던 박래현이 고개를 어슷하게 틀어 내 혀를 감아올렸다.
“래현아, 가자. 오늘 임원회의 있어서 일찍 나가 봐야 하잖아. 일산 연구소도 가 봐야 하고.”
기다란 속눈썹이 내 뺨을 간질이다가 떨어져 나갔다. 핏발 선 갈색 눈엔 얼핏 보기에 후회나 회한 같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보기 싫으니까 나오지 말고 여기 있어요.”
그는 따라 일어서려는 내 어깨를 눌러 자리에 주저앉혔다. 그들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짙은 안개 속을 걷는 사람처럼 나는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아이만 낳으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나는 출구 없는 미로를 발이 부르트도록 헤매고 있었다.
“준영 씨, 와서 식사해요. 생선 다시 덥혀 놨어요.”
“저 입맛이 없어요. 점심때 먹을게요.”
“안 돼요. 상무님이 오늘 하루 세끼 다 챙겨 달라고 했어요. 얼른 가서 먹어요.”
정 차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주방으로 가 아침을 먹었다. 배가 고플 땐 모든 게 우울하고 절망적이었는데 배를 채우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정 차장이 타준 냉 오미자차를 들고 방으로 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모든 걸 몸으로 때울 생각 하지 말고 머리란 걸 좀 써 봐요. 당신이 왜 미움 받는지.’
상대가 말을 안 하는데 그 마음을 어떻게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함께 자란 사이에서조차 상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박래현은 감정을 내비치는 스타일이 아닌 데다가 우린 완벽한 남이라서 상대의 마음을 읽는 건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매번 몸을 섞었지만 아름다운 애인을 두고 박래현이 나를 안는 이유조차도 아직 모르고 있다. 그는 새로운 유희를 발견한 사람처럼 이제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이 세상에 다른 오메가도 많은데 굳이 미워하면서 나를 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온갖 경우를 들어 고민해 봤자 나는 끝내 답을 알지 못하고 이 집에서 나가게 될 것이다.
달콤함과 씁쓸함이 혼재한 차를 마시며 무심코 산수유나무 아래 피어 있는 수국을 보았다. 무더위와 장마에 굴하지 않고 피어난 꽃은 젊은 시절 엄마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워낙에 곱고 예뻤던 분이라 지난번에 봤던 엄마 모습은 내게도 상당히 충격을 주었다. 수술 끝나고서 절대 거울을 보지 않는다던 엄마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를 보게 해준다고 했는데 다음 주엔 엄마를 볼 수 있을까,
나는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고단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머리맡에서 향긋한 냄새가 감돌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침대 헤드에 뚫어 놓은 공간에 거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중 한 마리를 집어 들어 코에 대자 시원한 허브향에 수선스럽던 머리가 다소 정리되었다. 몸을 웅크린 채로 거북을 코에 비비며 눈을 감았다.
잠든 줄도 모르게 잠들었던 나는 점심 먹을 무렵에야 잠에서 깼다. 꽤 심란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막상 생각나는 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뭔가 중요하게 할 일이 있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임신 테스트기가 떠올랐다. 즉시 서랍에서 테스트기 중 하나를 꺼내 욕실로 들어갔다. 사용 설명서대로 따라 한 뒤 테스트기를 세면대 옆에 반듯하게 내려 두고 결과를 기다렸다. 이젠 다른 의미로 결과 확인이 두려워서 시간이 지나도록 욕실을 어슬렁거렸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일 임신한 거로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 할까?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임신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당연하게 음성 반응이 나왔다. 불과 어제 오전만 하더라도 어서 아이를 낳고 이 집을 나갈 궁리를 했는데 하루 만에 상황이 반대로 바뀌어 버렸다.
문제는 히트 사이클이 다가오는 지금부터이다. 정치헌이 대답을 내놓기 전까진 될 수 있으면 박래현과 접촉을 줄여야하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내친김에 변기 물탱크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야 윤 너 어제 병원 왔었다며?」
「씨발아 오면 온다고 말하고 와야지 어머니한테 둘러대느라 혼났잖아.」
「너 담주에 또 온다고 했다며 미리 연락하고 와 네 면상 좀 보자. 안 보니까 보고 싶네.」
「어머닌 너 만나고 나서 계속 기분 좋으신가 봐」
박래현이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를 보게 해 준다는 말을 듣고 핸드폰을 없앨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그가 약속을 지킬 것 같지 않았다. 뭐든 자기 꼴리는 대로 하는 사람이 내 사정을 봐줄 리가.
나는 까매진 화면을 들여다보며 핸드폰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핸드폰을 없애면 엄마 상태가 궁금한 나머지 진짜 사고를 칠 것 같아서 핸드폰을 제자리에 돌려놨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들키지 않아서 조금 대담해졌다.
귀 소독을 마친 나는 임신 테스트기를 원래 들어 있던 상자에 넣어 욕실에서 가지고 나왔다. 나중에 정 차장이 청소하러 들어오면 그녀에게 버려 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테스트기를 서랍 구석에 넣어 두고 옷걸이에 걸린 옷을 살폈다. 지긋지긋한 파자마 가운을 벗고 목둘레가 둥글고 앞뒤로 그림이 스케치 된 베이지색 티셔츠를 골라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어깨선이나 길이가 맞춘 것처럼 내게 꼭 맞았다. 바지는 신축성이 있는 남색 반바지를 골랐다. 한 달을 훌훌 벗고 야생마처럼 지냈더니 얇은 여름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걸까? 귀에 피어싱을 박은 모습, 알파의 페로몬, 알파와의 섹스, 낯설던 것들이 의지와 무관하게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
박영범은 정상적인 옷차림을 한 나를 보고 멋있다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 싸구려 티에 계절별로 청바지만 입었던 나는 옷차림을 칭찬받은 적이 없어서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박래현은 불만스러운 눈길로 나를 한번 죽 훑어보고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옷을 사 준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저녁을 먹고 거실로 자리를 옮긴 박래현과 박영범은 계속해서 사업 얘기를 했다. 나는 박래현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를 마시며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온종일 심심하게 지내던 내겐 전문 용어가 가득해서 반밖에 못 알아듣는 그들의 대화마저 재미있었다.
“우리 회사는 바이오 의약품 분야를 따로 떼서 아예 계열사로 독립시켜야 해. FDA 제조승인을 받을 수 있는 공장도 하나 더 지어야 하고.”
“글쎄다, 난 좀 회의적인데? 세계적인 바이오 업체들도 한계에 부딪혀 손 털고 나가는 마당에, 보수적인 회장님이 그걸 승인하시겠어? 래현이 네가 강하게 나가도 이번 건은 좀 어려울 거 같아.”
“그래서 지금이 빈집을 털 기회야. 우린 역으로 투자해서 품질 높은 바이오 의약품들을 합리적인 가격에, 대량으로 제공해 승부를 보자는 거야. 이미 특화된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있잖아.”
“흠, 그래도 공장까지 새로 짓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봐.”
“형, 공장에서 꼭 우리 제품만 생산할 필요는 없어. 다국적 기업들과 계약해 의약품 위탁 생산을 하면 돼. 그리고 바이오시밀러 시장은 앞으로 더 커질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너 왜 이렇게 열성적이냐? 처음에 일 시작할 때만 해도 별 의욕 없었잖아.”
“일해 보니까 할 만해.”
내게서 찻잔을 뺏어 탁자에 내려놓은 박래현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나를 소파로 끌어 올렸다. 무례한 손이 티셔츠 자락을 들치고 들어와서 배꼽 아랫부분부터 시작해 천천히 위로 올라가 젖꼭지의 예민한 살을 만지고 지나갔다.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의도를 담은 손길에 양 볼이 뜨거워졌다.
“사라졌던 목표가 생겼거든.”
나는 고개를 돌려 박래현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내 배를 관찰하고 있었다. 박래현은 정말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질문해 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다음 주에 어머니 만나러 갈 때 은수 누나도 만나요.”
“진짜요? 정말 다음 주에 엄마 만나러 가도 돼요?”
나는 기뻐서 박래현 팔뚝을 두 손으로 꽉 붙들었다. 아침에 박래현이 내게 화를 내서 엄마를 만나게 해 준다는 약속을 어길 줄 알았다. 처음으로 박래현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약속 잘 지킨다고 했었는데.”
“언제 보내 주실 건데요?”
“원하는 날 미리 말해요. 일정 조절해 볼 테니까.”
박래현은 자신의 팔뚝에 감긴 손을 잡아서 아래로 내렸다. 내가 취한 철없는 행동에 민망해져서 나는 얼른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박은수 선생님은 왜 만나요?”
“왜긴? 히트 사이클 시작하기 전에 몸에 이상이 있나 없나 확인해야죠.”
“알겠습니다.”
박래현은 갈 데까지 갈 모양이었다. 아이를 품는 것도 지우는 것도 내 몸이라 자신은 상관이 없다는 태도였다. 이번 주 안에 정치헌에게서 연락이 오면 좋으련만 그는 자존심이 강해서 박래현 상대로 밀당을 벌이는 듯했다. 내 운명을 내 의지로 개척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맡겨야 해서 서글펐다.
나를 빤히 보고 있던 박래현이 손을 뻗어 목덜미를 감싸더니 그대로 얼굴을 내려 입을 맞춰 왔다. 대번에 밀려 들어온 살덩어리가 내 혀를 진득하게 문지르고서 언제 그랬냐는 듯 뒤로 물러났다. 타액이 휘발하며 입술이 간지러워져서 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눈은 여전히 내게 고정한 채 박래현이 입을 열었다.
“형, 이번 달 임원 회의 안건으로 상정할 생각이니까, 기획 1팀 주 팀장이랑 PT 자료 좀 준비해 줘.”
“그래, 네 의사가 정 그렇다면 일단 부딪쳐 보자.”
박래현은 내 왼쪽 손목의 맥박 뛰는 곳을 엄지로 쓱 문지르다가 손을 내려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하나씩 끼워 넣었다. 손톱 끝의 반달마저 단정하고 예쁜 손가락이 느릿느릿 손등을 문질렀다. 수상한 전조를 느끼고서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기도 전에 박래현이 나를 침실로 끌고 들어가 번쩍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혔다. 곧바로 따라 올라온 그가 허벅지 사이에 내 몸통을 끼운 채 무릎으로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윤준영 씨, 옷을 다 입고 있는데 왜 야해 보이지? 날 유혹하려고 일부러 야한 옷을 골라 입었습니까?”
박래현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다정해서 혹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술을 안 마신 멀쩡한 정신으로 할 얘기가 아니었다. 귀 옆으로 양팔을 뻗어 팔과 다리로 나를 완벽하게 구속한 박래현이 상체를 수그려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어둠 속에서 먹이를 찾아내는 올빼미처럼 남자의 눈알이 매끄럽게 빛났다. 영혼이 탈탈 털릴 것 같아서 가능하면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눈이다.
박래현은 사이드 테이블에서 리모컨을 찾아 전등을 켰다. 무작정 쏟아지는 빛을 피해 눈을 감은 사이 남자의 숨결이 얼굴로 퍼지더니 이내 입술이 겹쳐졌다. 마음에 쏙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처럼 박래현은 탐구적인 자세로 키스에 임했다. 먼저 윗입술이 남자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윗입술을 충분히 맛본 뒤 그는 얼굴을 기울여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아슬아슬하게 벌려 준 입술 안으로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운 혀가 아래서 위로 파고들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를 끌어 올리려는 집요한 시선을 피해 눈을 감았다. 달아오른 숨결이 뺨으로 퍼지면서 입 안을 탐색하는 살덩이가 끈적하게 점막을 비볐다. 역시 키스는 할 게 못 된다는 생각을 했다. 성기만 결합해서 섹스를 할 땐 지금처럼 가슴이 뛰지는 않았다. 절박하게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이 내 것인지 박래현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귓가가 시끄러웠다. 호흡이 거칠어져서 숨을 쉬기 힘들 지경이 되어서야 박래현이 입술을 떼고 눈두덩과 뺨에 차례로 입술을 눌렀다. 이 남자가 페로몬을 풀지 않아도 내 몸은 금세 열기에 휩싸였다.
“지금 너무 예뻐 보이는데….”
말실수를 했다는 듯 박래현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징조가 좋지 않았다. 발정기가 가까워질수록 오메가는 피부에 빛이 나고 아름다워진다고 했다. 꾸준히 억제제를 사용해서 그런 현상을 경험해 본 적 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해준이가 유독 예쁘게 보인 시기가 있었다. 박래현에게 내가 예뻐 보인다거나 내가 알파에게 쉽게 반응하는 걸 보면 히트 사이클이 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젊고, 몸이 굉장히 튼튼해서 히트 사이클에 알파와 성관계를 하면 임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에 따라 내 몸에게 일주일, 아니 삼 일이라도 버텨 달라고 빌었다.
“주인님,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건너뛰면 안 될까요?”
“윤준영 씨답지 않게 요즘 왜 이렇게 뺍니까? 딜도 구해서 나 몰래 쑤셔 박나?”
박래현은 티셔츠 자락을 밀어 올리며 늑골에 입술을 댔다. 오싹한 감각에 몸을 떨며 나는 심호흡을 했다. 뜨거운 혓바닥 전체가 젖꽃판과 젖꼭지를 내리눌렀을 때는 몸이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축축하게 젖은 혀를 곧게 세워서 젖꼭지를 위아래로 비비자 부드럽던 돌기는 남자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딱딱해졌다. 무감하다면 좋겠는데 몸의 변화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더 괴로웠다.
“으, 으응….”
발가락 끝에 힘을 주며 나는 남자의 머리칼을 잡아 한사코 그를 밀어냈다. 박래현은 다른 손으로 내 오른쪽 젖꼭지를 잡아 비틀다가 손가락 사이에 끼워 녹진하게 문질렀다.
“내 아이 배고 싶어서 먼저 유혹해 놓고, 이제 와서 발 빼는 이유가 뭡니까?”
“그땐 주인님 부부에게 아이가 급한 줄 알았어요.”
젖꼭지에서 입을 뗀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봤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서 내 설득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윤준영 씨. 진짜 험한 꼴 당하고 싶어서 이래요? 아니면 강제로 박히는 게 취향인가?”
“…….”
“순순히 다리 벌려요. 당신도 나랑 섹스하는 거 좋아하잖아.”
다시 고개를 숙인 박래현은 티셔츠를 말아 올리며 양쪽 젖꼭지와 빗장뼈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나는 그가 옷을 벗길 수 있게 양손을 위로 들었다. 남자는 내 몸에 키스하며 셔츠를 끝까지 벗겼다. 대낮처럼 환한 전등 빛 아래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늘 드로어즈만 벗은 채로 섹스했기 때문에 몸 곳곳에 쏟아지는 남자의 시선이 어색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박래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왼쪽 손바닥으로 빗장뼈를 꾹 누른 다음 가슴으로 손을 옮겼다. 손바닥은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 위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늑골을 지나 복근을 더듬었다. 남자의 손길에 배에 힘이 들어가 긴장한 아랫배가 움푹 팼다.
오늘은 건너뛰자고 해 놓고서 박래현 손길에 일일이, 정성껏 반응하는 내가 한심했다. 박래현은 바지 위로 손바닥을 펴 성기 전체를 덮듯이 문질렀다. 기둥과 불알이 만든 굴곡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면서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요. 이 야하고 예쁜 몸으로 알파들은 몇 명이나 꼬셨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많았단 소린가?”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에게 처음이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나서 연속으로 험한 말을 들었었다. 이번에도 같은 반응을 보일 게 뻔해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거짓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잠시 미간을 좁혔을 뿐 심한 말을 하진 않았다. 대신에 바지 훅이 열리고 지퍼가 아래로 내려갔다.
반바지와 드로어즈를 한꺼번에 벗겨 순식간에 나를 나체로 만든 박래현이 냉큼 하반신을 타고 올라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베개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여유 있는 손길로 셔츠 단추를 풀어서 일자로 곧게 뻗은 빗장뼈를 드러냈다. 셔츠가 좌우로 벌어지면서 단단하고 넓은 가슴팍에 채도 높은 조명이 쏟아졌다. 수십 번 넘게 섹스한 관계지만 밝은 빛 속에서 완벽하게 벗은 상체를 본 건 처음이었다. 얼굴만큼이나 잘 빚어진 상반신은 살갗도 균일하고 매끄러웠다.
“그중에 마음 줬던 알파는 있었습니까?”
이런 질문은 왜 하는 걸까? 나한테 뒤늦게 관심이 생겼을 리는 없고 요즘 잠잠하다 싶더니 슬슬 나를 괴롭힐 핑계가 필요한 듯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박래현이 화를 내지 않을까 고민한 끝에 없다고 대답했다.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박래현은 셔츠를 벗던 동작을 멈추고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적막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자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불안해졌다. 씨발,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란 말인가? 박래현 태도에 피곤하고 짜증이 났다. 질긴 감정 덩어리들을 애써 억누르는 듯 박래현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방을 나가 내 눈에서 사라졌다.
변덕을 부려 다시 돌아올 것 같아서 나는 침대에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그가 이 방에 들어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서자 나는 남자가 벗긴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베개를 끌어당겼다. 베개에 가려져 있던 박래현 시계가 시트로 흘러내렸다. 박래현은 옷차림에 따라 시계를 자주 바꾸는데 오늘은 짙은 파란색 바탕에 천체 모양을 따라 촘촘하게 보석이 박힌 시계를 찼다. 이런 시계는 가격이 얼마나 할지 궁금했다. 박래현이 하고 다니는 거로 봐서는 적어도 몇억은 훌쩍 넘어갈 것이다. 시계를 살펴보던 내 눈에 뒷면에 필기체로 새긴 문구가 보였다.
Love my brother, RH
박수현이 박래현에게 선물한 시계인 듯했다. 나는 엄지로 RH라는 글자를 따라 그려보았다. 박수현을 잘 모르지만 그가 형과 달리 예의 바르고 우아한 성품을 지녔다는 건 확실했다. 내가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면 박수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어쩌면 그와 잘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늘 시간에 쫓기느라 헐떡였고 일상은 잘 삶아진 달걀노른자보다 퍽퍽해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시계를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이불을 돌돌 말아 다리 사이에 끼운 채 모로 누웠다. 한때 사귀었다던 정치헌뿐만 아니라 자기 부모에게도 쌀쌀맞게 구는 박래현이 동생에게는 애틋해 보였다.
나는 박래현 집에서 본 시집의 글귀를 떠올렸다. 사막을 함께 건너는 낙타가 되겠다는 동생을 사랑하지 않을 형은 없을 것이다. 늘 엉켜 싸우고 서로에게 미운 소리만 했던 해준도 이렇게 보고 싶은데 사랑하는 동생을 잃어버린 박래현은 오죽하랴 싶었다. 한창 좋을 나이에 사고로 죽었으니 더 뼈에 사무칠 것이다.
이제 박래현 앞에 함께 사막을 건너 줄 다른 낙타가 나타날까? 박래현 인생이 사막이라면 내 인생은 어디에 비유해야 적당할지 모르겠다. 음흉한 덫과 독 묻은 가시를 몰래 감추고서 언제든 할퀴려고 숨죽이며 나를 기다리는 어둠, 그 정도면 적당할 것이다.
***
계약 해지 얘기를 꺼낸 이후 3일이 지나도록 박래현이 나를 안지 않아서 나는 정치헌이 박래현에게 연락했을 거라 짐작했다. 섹스에 미친 사람처럼 내게 달려들었던 사람이 갑자기 돌변한 데엔 까닭이 있을 것이다. 남자의 태도에서 계약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며칠만 더 박래현과 거리를 두고 지내면 무탈하게 이 집을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박래현과 관계하지 않아서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놓이는 동시에 묘한 상실감이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히트 사이클이 가까워지면서 그동안 박래현 페로몬에 익숙해진 탓에 박래현만 보면 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가 나를 그림자 취급하자 욕구 불만이 쌓여서 박래현 얼굴만 봐도 몸속 깊은 곳이 들들 끓어올랐다. 박래현은 내가 옆에 있어도 괜찮은지 평소처럼 잘 지내서 나를 더 열 받게 했다. 그때부터 3일 내내 새벽에 들어온 거로 보아 벌써 정치헌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박래현은 지금 애물단지가 된 나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입 안에 굴러다니는 게 밥알인지 모래알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나와 엮였던 알파가 다른 오메가를 찾아갔다는 사실에 안에서부터 날카로운 덩어리들이 올라와 밥을 삼키는 내내 목이 아팠다. 내 안을 드나들며 나를 흥분시켰던 좆이 정치헌을 들쑤셨을 테고, 내 혀를 문지르던 혓바닥으로 그의 귀에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육중하고 준수한 몸에 깔려 쾌락에 바들바들 떠는 정치헌과 정치헌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는 박래현이 그려져 속이 메스꺼웠다. 이럴 거면 빨리 계약을 해지하고 당당하게 만나라고 권하고 싶었다.
내가 그들을 질투할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 설득해 봐도 불쑥 치고 들어온 감정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나는 수저 가득 밥을 떠서 입에 밀어 넣었다. 이제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자고 나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스렸다. 욱해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거대한 빚더미가 남은 인생을 조질 것이다. 나를 질투용으로 이용해 톡톡히 효과를 본 박래현은 필요 없어진 나를 버리기 전에 그 돈을 회수할 생각으로 나를 이 집에 두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어? 이 시간에 누구지?”
“왜요?”
“방금 현관 벨 소리 안 들었어요?”
냉장고를 정리하고 있던 정 차장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면서 주방을 나갔다.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느라 나는 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 갑자기 주방 밖에서 정 차장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회장님. 어서 오세요. 지금 상무님 안 계신데 연락도 안 주시고 웬일이세요?”
“아들 집에 오면서 내가 연락을 하고 와야 하나? 래현이 오메가는 지금 어디 있지?”
“준영 씨는….”
정 차장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밖으로 달려 나가 회장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회장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일갈하더니 위풍당당하게 내 앞을 지나쳐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박래현이 없을 때 찾아온 거로 보아 나를 만나러 온 게 분명했다. 방패 없이 전장에 나가는 군인이 되어 나는 무거운 걸음으로 회장을 따라갔다. 그녀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 턱으로 내가 앉을 의자를 가리켰다.
“회장님, 차는 뭘로 준비할까요? 모과차 맛있는데, 모과차로 내올까요?”
“용건만 말하고 갈 테니까 차 내올 필요 없네. 이 오메가한테 할 말이 있으니 자넨 잠깐 나갔다가 들어오게.”
“네. 말씀 나누세요.”
“참, 오늘 나 봤다는 말, 박 상무한테는 말하지 말게.”
“네, 알겠습니다. 말씀 나누십시오, 회장님.”
정 차장은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둘만 남게 되자 회장은 처음부터 형형한 눈빛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기가 질렸지만 나는 비굴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회장에게 눈을 맞췄다.
“윤준영이라고 했지? 오늘 내가 온 이유를 짐작하겠니?”
싸늘한 목소리에서 한기를 느꼈다. 오랫동안 사람 위에서 군림해 왔던 이답게 눈빛은 냉정하고 목소리는 군더더기 없이 단호했다. 그녀는 내 대답 따위 안중에 없다는 듯 도도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박 상무 정치헌이랑 결혼 얘기 오가는 거 알고 있니?”
“네.”
“그렇다면 네가 박 상무 옆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상무님이 절 버리기 전에 제가 먼저 상무님을 떠날 순 없습니다.”
회장은 사람을 잘못 찾아왔다. 나를 만나서 설득할 게 아니라 당신의 아들을 만나서 나를 버리라고 설득해야 맞았다. 이 사람은 아무런 접점이 없는 박래현과 내가 기형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짐작했을 테고 이럴 경우 권력을 쥐지 못한 사람은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설득 대상으로 박래현을 택하지 않고 나를 택한 이유는 내가 그만큼 만만해서이고 박래현 심기를 건드려 봤자 일만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박 상무가 널 그냥 옆에 두진 않았겠지. 혹시 스폰 계약서 썼니?”
“…….”
“스폰해 준 대가로 박 상무한테 얼마 받았니? 네 모친이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던데….”
“저와 상무님 관계가 알고 싶으시면 상무님께 직접 물어보세요.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뭐, 알아보고자 한다면 못 알아볼 것도 없다만, 그 정도 수고는 하고 싶지 않구나.”
회장은 두 손을 깍지 끼어 자신의 무릎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약지에 낀 커다란 보석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화려하게 자수가 수놓인 치맛단을 정리하며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당장 박 상무랑 헤어지란 말을 하러 온 게 아니다. 내가 그 녀석 고집은 잘 알고 있지. 그렇다고 부모 된 입장에서 일이 틀어지는 걸 방관할 수만은 없잖니. 박 상무는 치헌이랑 결혼하면 널 정리할 텐데 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너와 아이를 포함해서 모두에게 비극이겠지?”
“…….”
“난 혼외자식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즉, 아이 낳아서 한몫 챙길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란 얘기다.”
회장은 들고 온 지갑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아 안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된 작은 약 상자가 들어 있었다.
“곧 히트 사이클에 접어든다지? 이제 피임약은 듣지 않을 테고 이건 사후 피임약이다. 성관계하고 나서 24시간 이내에 복용해야 효과가 크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고. 부작용으로 어지럼증, 구토나 출혈 증세가 나타날 수 있지만 박 상무한테 약 먹은 거 들통나지 않으려면 참아야 하겠지? 토할 때 만일 약까지 토해 버리면 얼른 한 알 더 먹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약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걸 명심해.”
“…….”
“윤준영 씨 아직 젊고 건강하잖아. 대학도 좋은 데 다니고 졸업만 하면 잘 나갈 텐데 애한테 발목 잡힐 일 있어? 내가 조만간 두 사람 결혼 성사시킬 계획이니까 그때까지만 버텨. 두 사람 결혼하고 나서 윤준영 씨 임신 안 한 거 확인되면, 내가 섭섭지 않게 잘 챙겨 줄게. 지금 당장은 돈을 줘도 박 상무 눈 피해서 둘 데도 없을 테니 그게 낫겠지?”
“전 이 약 받을 수 없습니다. 도로 가져가세요.”
내겐 박래현과 한 계약이 우선이라 약 봉투를 회장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너 치헌이가 얼마나 독종인 줄 아니? 박 상무는 치헌이 못 이겨. 박 상무 아이 배면 그 아이 지워야 한단 소리야.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치헌이가 그대로 둘 거 같니? 배 속에서 아이가 크면 클수록 너와 아이한테 안 좋을 거다. 내가 인정이 많아서 이렇게 신경 써 주는데, 판단은 네가 하렴.”
회장은 약 봉투를 받아서 대리석 테이블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의지를 천명하고자 회장이 보는 앞에서 약 봉투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가면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구기면서 회장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마. 지금 당장 래현이가 잘해 준다 해도 그게 얼마나 가겠어? 위에 떠 있는 허상을 잡으려고 밑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뛰어들 거니? 그 부부는 너 같은 애 잊고 잘 살아갈 테니, 가진 것 없고 불쌍한 너만 다칠 거야. 억울하지도 않니?”
자기 할 말을 다 마치고서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 들고 성큼성큼 거실을 벗어났다. 나는 현관까지 따라가서 회장이 나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다. 밖에서 회장을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 두 명이 나를 경계하며 회장에게 다가왔다. 회장은 구두를 신고 나서 나를 돌아보았다.
“약 다시 주워서 내 말대로 해라.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거 하나도 없을 거야.”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정 차장 계속 두고 싶으면, 오늘 나 온 것은 박 상무한테 비밀로 해라.”
차가운 표정에 부드러운 말투가 녹아 있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아들을 연상했다. 그녀가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탓에 현관 벽에 잠시 기대 서 있던 나는 거실로 돌아가 소파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속이 아팠다. 박래현과 정치헌의 결혼을 추진한다는 말과 아이가 생기면 박래현이 아이를 지울 거라는 말이 귀에 끈끈하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슬프게도 회장이 한 말엔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진실만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나는 당장 며칠 내로 히트 사이클이 찾아올 테고 박래현은 거리낌 없이 나를 안을 것이다. 지금도 속궁합이 잘 맞아 환장해서 붙어먹는 판국에 히트 사이클을 그냥 지나칠 리가.
아이가 생긴 뒤에 두 사람 결혼이 확정되면 박래현은 당장 병원으로 나를 데려가 아이부터 지우려 할 텐데 새로운 생명체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무책임한 부모 때문에 피어나지도 못하고 새 생명이 사라지리라는 생각에 슬픔이 몰려왔다. 차라리 착상하기 전에… 하지만 계약을 어겼다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나는 임신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임신하면 내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회장이 가고 나서 오후 내 체력 단련실에 머물렀다. 근력을 키우는 운동으로 잡다한 생각을 떨치려고 했는데 삼십 분 간격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느라 저녁을 먹을 무렵엔 기진맥진해졌다. 두 사람은 오늘도 늦게 들어온다고 해서 나만 홀로 저녁을 먹었다. 정 차장은 회장이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지 물어봤지만 그녀에게 내용을 알려 주진 않았다.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후 내 몸을 혹사한 것 치고는 잠이 오지 않아서 테라스로 나가 여름밤을 서성거렸다. 산수유나무 아래에 겹겹이 쌓인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밋밋한 향을 맡고 있자니 간절하게 술이 그리웠다. 술에 취해 모든 걸 다 잊고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 와인 셀러에 와인이 가득했고 냉장고엔 맥주가 들어 있는데 내 차지가 아니라 허락없이 마실 순 없었다. 지치면 잠이 올 것 같아서 정원을 몇 바퀴 돈 뒤에 욕조에 몸을 담가 봐도 소용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박래현 얼굴을 봐야 해결책이 생길 것 같은데 남자는 나를 방치한 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그 사람은 정치헌을 만나 희희낙락할 것이라 생각하니 풀썩 웃음이 터졌다.
회장 말이 옳았다. 박래현과 계약을 맺기 전부터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번 히트 사이클을 무사히 보내면 박래현은 적당한 선에서 나와 계약을 끝낼 것이고 나는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박래현 아이를 가져 봤자 괴로운 건 나다. 무책임한 그 남자는 돌아선 순간 나와 아이를 잊어버릴 텐데 나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않아서 아이를 지운 죄책감에 오랫동안 시달릴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고서 거실로 나가 회장이 건네준 약 봉투를 찾아서 방으로 들어왔다. 이 약을 먹을지 말지는 그때 가서 판단하기로 하고 서랍 맨 깊은 곳에 약봉지를 넣은 뒤 그 위를 속옷으로 덮었다.
***
“형, PT 자료 오늘 자정까지 넘겨줘.”
“알았어. 바이언스 임원회의 참석한 다음 점심은 어떻게 할 거냐?”
“임원들하고 먹어야지. 오후에도 거기 머무를 확률이 높아.”
“알았다. 그런데 너 회장님 제안 고려 안 해 볼 거냐?”
“메리트 없어.”
“치헌이네랑 공동 프로젝트팀 구성하는 거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정부 지원금이 커서 결과가 잘 나오면 확실하게 밀어주겠던데.”
“…….”
“이참에 치헌이랑 다시 시작해. 너 누구랑 연애할 생각 아예 없었잖아. 조건만 따지면 배경이든 인물이든, 아무리 봐도 걔만 한 애 없어. 서로 완벽하게 윈윈이라고 봐.”
결혼 얘기가 오가는데 한 사람은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몸 로비를 하고 한 사람은 상대의 질투를 유발하려고 오메가를 사서 몸을 섞고 있었다. 돈이나 권력도 중요하지만 나라면 찝찝해서 절대 이런 결혼은 하지 않을 텐데 참 신기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 일정 빡빡하다며. 출근 서두르자.”
박래현을 배웅하기 위해 수저를 놓고 그를 따라 일어섰다. 현관 앞까지 가서 그가 신발 신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문을 열고 나가는 뒤통수에 대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기….”
문을 열다 말고 박래현이 나를 돌아보았다. 타이밍이 별로 안 좋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엄마를 만나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오늘 뵈러 가고 싶어요.”
“월요일 아침부터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 윤준영 씨 아주 효자네.”
“그때 상태가 별로 안 좋으셔서 걱정돼서 그래요. 지하철 타고 다녀올게요.”
“내가 오후 두 시에 차 보낼 테니까 점심 먹고 병원 가요. 그리고 네 시에 은수 누나한테 진료받아요.”
“네.”
“차 대기 시켜 놓을 테니까 진료 끝나면 다른 데 새지 말고 바로 돌아와요.”
“그럴게요.”
“빈손으로 가지 말고 어머니 좋아하시는 거 있으면 사 가요.”
박래현이 지갑에서 수표 다섯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수표를 받아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은 뒤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내 눈이 아니라 입술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다.
“휴학계를 내야 해서 그러는데, 오전에 학교 들렀다가 병원에 가면 안 될까요?”
“휴학계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당신은 내가 말한 시간에 병원으로 가요.”
“저 학교 졸업해야 합니다. 2년 반 동안 되게 힘들게 다녀서 포기할 수 없어요.”
“이번 주 안으로 처리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두 분 다 잘 다녀오세요.”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박래현은 쉽게 내 편의를 봐줬다. 골치 아픈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해서 우울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어서 시간을 보내려고 체력 단련실로 올라가 두 시간 넘게 운동을 했더니 긴장이 풀리고 몸에 땀이 났다. 운동을 마친 뒤 입욕제를 푼 욕조에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담갔다. 나는 욕조 가장자리에 턱을 괴고 엎드린 채로 밖을 내다봤다. 정원에 깔린 초록색 잔디에는 뜨거운 여름 햇볕이 쏟아졌고 문을 지키고 선 아름드리나무는 커다란 그늘을 드리웠다.
바깥세상은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불볕더위가 시작되었다. 박래현 집은 전체적으로 냉방이 잘돼서 더위를 느끼지 못했는데 내가 이 집을 나서는 순간 나는 뜨거운 여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겪었던 일들은 전부 여기에 묻어 두고 나갈 생각이다. 엄마를 수술실로 들여보내고 나서부터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여기면 된다.
샤워를 마치고 마른 수건에 몸을 닦던 중 요즘 들어 멋있어졌다는 박래현 말이 생각나 거울 앞에 섰다. 그의 말대로 피부색이 밝아지고 살갗에서 윤기가 흘렀다. 곧 히트 사이클이 다가오는데 억제제 없이 어떻게 버틸지 눈앞이 아득해졌다.
세탁 바구니에 수건과 옷을 던져 넣고 옷장 문을 열다가 박래현이 준 수표가 생각나 도로 바지를 찾아 수표를 꺼냈다. 손에 쥔 백만 원짜리 수표 다섯 장에 내 한 달 아르바이트비가 생각나 헛웃음이 났다. 어쨌든 내겐 소중한 돈이므로 네 장은 서랍을 열어 안쪽에 감춰 두고 한 장을 챙긴 다음 즐비하게 늘어선 옷 가운데 체크무늬 셔츠에 베이지색 팬츠를 골랐다. 박래현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비싼 옷들을 사서 쟁여 놓은 걸까? 개중에는 가을에나 입을 법한 옷이 섞여 있었다. 휴학계를 대신 내준다는 걸 보면 나랑 당장 헤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대체 정치헌을 어디까지 시험해 보고 싶은 건지 알고 싶었다.
고민한다고 박래현이 알려 줄 것도 아니라 이런 상념 자체가 시간 낭비였다. 나는 외출준비를 마치고서 주방으로 가 점심을 먹었다. 엄마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이 차장이 즉석에서 잡채와 만두를 준비했고 커다란 문어를 삶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그릇에 담아 주었다. 정 차장은 청포도와 방울토마토를 씻어 플라스틱 통에 담고 집에서 만든 레몬차를 한 통 꺼냈다. 그녀는 커다란 보자기를 펼쳐 그릇을 차곡차곡 쌓은 뒤 끝을 나비 날개 모양으로 예쁘게 묶었다.
그들보다 한참 어린 나를 늘 깍듯하게 대하는 부부가 고마웠다. 집주인에게 개 취급당하면서 파자마 상의만 입고 집을 돌아다닐 때 이 부부가 나를 똑같이 멸시했다면 내 자존심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엄마랑 맛있게 먹을게요.”
“준영 씨 어머니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보다 약간 간을 더 하긴 했어요.”
“엄마가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정확히 두 시에 운전기사가 나를 데리러 왔다. 음식 보자기를 들고 차에 올라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엄마에게 좋은 기운을 주기 위해 온갖 시름은 젖혀 두고 오늘은 행복한 일만 떠올리기로 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햇볕과 차량으로 정체된 도로도 내 즐거움을 줄이진 못했다.
엄마를 만날 생각에 나는 피어싱을 차례로 빼서 화장지에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엄마가 좋아하는 케이크와 과자를 사려고 했는데 신분증이 없어서 백만 원짜리 수표가 무용지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 차장이 싸 준 음식만 들고 병실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려는데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리더니 생각지도 못했던 정우가 활짝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야, 윤준영! 그동안 잘 지냈냐? 와, 이 새끼 얼굴 좋아진 거 봐.”
“어? 너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오늘 네가 올 거란 확신이 생기더라. 어때, 이 정도면 돗자리 깔아도 되겠냐?”
“어, 깔아라, 깔아. 내가 단골 할게.”
“아무튼 네 얼굴 봐서 좋다.”
“나도. 정우 너 고생 많았지? 진짜 미안하고 또 고맙다.”
정우는 내 손에서 보자기를 받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엄마는 지난주보다 좋아진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얼굴에 붓기가 많이 빠지고 눈동자가 훨씬 총명하게 빛났다. 엄마의 낯선 모습을 보게 될까 봐 걱정했던 나는 기쁜 마음에 엄마를 꽉 안아 준 뒤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음식을 차리기 위해 욕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다.
“선생님도 이쪽으로 오세요. 정우야, 젓가락 좀 가져와.”
“아니에요. 전 산책 좀 하고 올 테니까 어머니랑 행복한 시간 보내요.”
앉으라는 엄마의 성화에도 간병인은 잠깐 나갔다가 오겠다며 책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 병실에는 엄마와 정우, 나 셋만 남았다. 나는 삼단으로 된 찬합을 하나씩 내려놓고 정우에게서 젓가락을 받았다.
“준영아, 이게 다 뭐니? 누가 준비해 준 거야?”
“나 일하는 곳 요리사님이 엄마 만나러 간다고 해서 만들어 주신 거야. 병원 음식만 먹으니까 질리지? 여기 문어 좀 먹어 봐.”
나는 칼집을 넣어 꽃처럼 말아 놓은 문어에 초장을 찍어 엄마 입에 넣어 주었다. 엄마는 반신반의한 눈으로 나를 보며 문어를 씹었다. 갑자기 나타난 아들을 두고 일주일 동안 엄마도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야, 만두 직접 빚은 거야? 내가 먹던 만두랑 맛이 완전 달라. 존나 맛있어.”
“나도 잘 몰라.”
이 차장이 직접 만들었지만 엄마가 의심할 것 같아서 모른 척했다. 정우는 며칠 굶주린 사람처럼 잡채와 만두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준영아, 네가 일하는 곳이 어딘데?”
“경기도 오지에 있는 공장이야. 기계 부품 만드는 곳인데 거기서 먹고 자고 해. 그쪽이 휴대폰이 잘 안 터져서 전화하기가 힘들어.”
엄마가 믿든 말든 난 거짓말을 했다. 이제 일주일이나 이 주일이 지나면 다 끝날 일일 테니 조금만 더 엄마를 속이면 조용히 넘어갈 일이었다. 지금까지 잘 넘겼는데 괜히 솔직히 말해서 엄마 속을 뒤집어 놓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정말이에요. 저도 그래서 준영이랑 통화 못 했잖아요.”
“근데 엄마, 일주일 새에 진짜 예뻐졌다. 아들 봐서 그렇게 좋았어?”
엄마가 계속 물고 늘어지면 거짓말이 들통날 것 같아서 나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엄마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아마 내 거짓말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 좋았다. 네 얼굴 보니까 좀 살 거 같더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내 얼굴 질리도록 보여 줄게. 좋은 생각만 하고 사니까 얼마나 좋아?”
엄마는 이제 곧 요양 병원으로 거처를 옮기실 예정이다. 엄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나는 엄마를 돌보면서 해준이를 집중적으로 찾아볼 계획을 세웠다. 다가올 내 미래에서 박래현과 나는 이미 계약을 끝낸 상태였다. 자유가 된 내 첫 번째 목표는 해준을 찾아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었다.
“준영아, 나 이제 괜찮으니까 6인실로 옮겨 달라고 해. 간호사한테 말했는데 절대 안 옮겨 주더라.”
“엄마는 감염 위험이 있어서 6인실 안 돼. 돈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여기 계속 있어. 6인실 옮겨서 폐렴이라도 걸려 봐. 돈 몇 배로 더 들어가.”
“그래도 그렇지, 1인실은 보험도 안 돼서 엄청 비쌀 텐데….”
“엄마는 그냥 병원에서 하란 대로만 해. 나머진 내게 맡기고.”
“어린 네가 도대체 뭘 어떻게 알아서 해? 혹시 나 때문에 이상한 짓 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무슨 이상한 짓? 열심히 돈 벌고 있는 자식, 격려는 못 해 줄망정….”
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거짓을 줄줄 읊조렸다. 엄마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낮은 한숨과 함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뒤로 별 대화가 오간 것도 아닌데 시간은 벌써 네 시를 향해 달려갔다. 내가 일어설 준비를 하자 엄마 얼굴에 금세 우울함이 깃들었다.
“엄마, 다음 주에 또 올게. 요양 병원으로 옮기면 더 자주 찾아갈게.”
“그래, 몸 상하지 않게 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마라. 엄마 그때까지 건강하게 있을 테니까 엄마 걱정하지 말고.”
“알았어. 엄마, 나오지 마. 나 간다.”
“내가 1층까지 데려다줄게.”
나는 병실 밖으로 따라 나오려는 엄마를 문 앞에서 가로막았다.
“엄마, 나오지 말고 여기 있어. 엄마 보는 데서 돌아서고 싶지 않아.”
“그래요, 혜정 씨. 여기서 보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산책을 마치고 온 간병인이 위로하듯 엄마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간병인에게 엄마를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하고 엄마가 보는 앞에서 병실 문을 닫았다.
***
정우를 밖에 세워 두고 화장실로 가서 순서에 맞춰 피어싱을 귀에 끼웠다. 박래현은 예리한 사람이라 순서가 뒤바뀌면 금방 알아차리고 나를 구박할 것이다. 순서까지 완벽하게 맞춰 피어싱한 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정우에게로 갔다. 진료 예약 시간까지 30분 정도 남아 있어서 정우와 노닥거리다가 갈 생각이었다.
“야, 윤준영,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네 알파가 병원 와도 좋대?”
“응, 개새낀 줄 알았는데 가끔 인간적 사고를 할 때도 있어.”
병동을 나가서 우린 커다란 플라타너스 아래 그늘진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시끄럽게 울어 대는 매미 소리가 싸라기눈처럼 곧장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매미 울음과 땅 밑에서 올라오는 더운 열기에 비로소 나는 여름 안으로 들어선 기분이었다.
“정우야, 너 엄마한테 가끔 이상한 기운 못 느꼈어?”
“이상한 기운이라니?”
“엄마가 좀 낯선 사람같이 느껴진다거나….”
“어? 그런 거 못 느꼈는데? 가끔 신경질적일 때가 있는데 그야 몸이 아프면 당연한 거잖아.”
역시 엄마가 힘들어서 그런 건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던 거였다.
“그래도 네 알파가 완전 개새끼는 아니라 다행이네. 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저기… 임신은 했어?”
“아직 히트 사이클이 안 찾아왔어.”
나는 벤치 등받이에 오른팔을 얹어 턱을 괸 채 정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의문이 가득한 새까만 눈동자를 보면서 지금 내 처지를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망설이지 말고 얼른 이 형한테 털어놔.”
“…….”
“너 얼굴 보니까 그 알파랑 무슨 일 있네. 야 인마,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나라도 알고 있어야 뭐 대책을 세우지.”
정우는 내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있으므로 속내를 털어놔도 괜찮을 듯싶었다. 지금까지 내게 일어났던 일들을 가슴에 담고서 혼자 끙끙거리고만 있으려니 속이 짓물러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 계약 해지가 된 게 아니어서 마음 놓고 얘길 꺼낼 순 없었다.
“나 잘 지내. 아무 일도 없어.”
제발 박아 달라고 사정했던 첫날밤이 떠올라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내가 정치헌 존재를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이를 악물고 버텼지 그런 불상사를 일으키진 않았을 것이다. 나를 보던 정우 얼굴로 언뜻 심란한 표정이 지나갔다.
“근데 너 분위기가 한 달 전이랑 되게 달라진 거 알아?”
“발정기가 다가와서 그래. 오메가들은 히트 사이클이 가까워지면 외모가 좀 변하거든.”
“나도 그건 알아. 너 발정기 맞는 거 한 번도 안 봐서 신기해서 그래.”
“그러게. 나도 영 적응이 안 돼.”
“근데 이 피어싱은 뭐냐? 알파가 선물해 준 거냐? 너 챙겨 주는 거 보니까 되게 자상한가 보다?”
“자상은 개뿔.”
“아니면… 설마 알파라고 너한테 흑심 품은 건 아니겠지? 선 정확하게 그어.”
“그냥 집에 굴러다니는 거 내가 끼운 거야.”
정우는 손을 뻗어 내 귓바퀴에 박힌 보석을 만졌다. 받은 게 아니라 그 남자가 화 날 때마다 내게 내린 응징과 같은 거였다.
“이거 혹시 다이아냐?”
“내가 감별사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야, 하나만 빼 보자. 우리 누나 예물 반지 보니까 다이아는 보증서도 있고 고유 번호 같은 거 새겨져 있더라.”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정우의 손목을 잡아 뒤로 꺾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우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햇볕을 가리고 서서 정우의 팔목을 비트는 남자는 놀랍게도 박래현이었다. 박래현은 정우의 등을 발로 차서 벤치에 고꾸라뜨린 후 무릎으로 등을 무식하게 찍어 눌렀다. 당황해서 몸을 밀었으나 박래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박래현에게 두 팔을 꺾이고 등을 눌려 제압당한 정우는 몸을 뒤틀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정우에게 힘든 일을 부탁해 그러잖아도 미안해 죽겠는데 그를 괴롭히는 박래현에게 울화가 터져서 그의 팔뚝을 힘껏 잡아당겼다. 손바닥 밑으로 돌덩이처럼 경직된 근육이 꿈틀거렸다.
“제 친구한테 왜 이러세요? 제가 주인님 개라고 제 친구까지 개 취급하십니까?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한테 이래요? 얼른 이거 놓으세요!”
“친구? 내 오메가 몸을 멋대로 만지는데, 친구라고? 머리 잘 돌아가면서, 좀 더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게 어때요?”
“피어싱이 신기해서 잠깐 만져 본 겁니다. 얼른 팔 풀어요.”
“친구가 이 시간에 왜 당신을 만나러 병원에 와요? 혹시 나 몰래 둘이 연락이라도 한 건가?”
“아니요! 지난번 왔을 때 엄마한테 월요일쯤에 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친구한테 말해준 거예요.”
쥐고 있는 정우의 팔을 곧 부러뜨릴 기세여서 나는 박래현 상체를 온몸으로 안고서 무작정 뒤로 당겼다. 힘은 어찌나 장사인지 죽을힘을 다해 당기는 데도 요지부동이었다. 아, 씨발, 욕설이 절로 나왔다. 다급해진 나는 박래현에게 업힌 자세로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 가장자리에 입 맞췄다. 당장 이 방법 외에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각도를 더 깊이 해서 입술을 빨았더니 그 와중에 박래현 혀가 들어와 내 혓바닥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몇 번 더 혓바닥을 핥고 난 뒤 입술을 떼고서 박래현은 생각을 읽으려는 듯 내 눈을 응시했다.
“윤준영 씨, 먼저 팔 풀어요.”
내가 그를 놓아주자 박래현은 꺾었던 팔을 내던지고 신음을 내뱉는 정우의 턱을 잡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정우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가 박래현에게 고정되었다. 붉게 달아오른 정우 얼굴을 보자 미안함과 분노가 뒤섞여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친군지 뭔지 모르겠지만 남의 사람한테 껄떡거리지 말아요. 다음엔 이 정도로 안 끝납니다, 김정우 씨.”
“정우야, 괜찮아?”
정우에게 다가가려던 나는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박래현에게 손목을 잡혀 병원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손을 뿌리치려 할수록 박래현이 더 깊이 손목을 눌러 왔다. 놀라서 커다랗게 뜬 정우의 검은 눈이 뒤통수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는 박은수 진료실에 도착해서야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두 분 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은수가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고 나서 빨개진 손목을 주무르며 박래현을 노려보았다. 나를 모욕한 건 괜찮은데 내 친구를 모욕한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진짜 무례하시네요. 제가 주인님 친구분을 그렇게 대하면 기분 좋겠습니까?”
“김정우랑 무슨 사이입니까? 우리 계약 관계는 비밀에 부치기로 했던 거 같은데.”
“정우는 제 상대가 누군지 모르고 있었어요. 주인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평생 모르고 지냈을 겁니다.”
“둘이 무슨 관계냐고 물었습니다.”
“친구라니까요? 제가 가장 어려울 때 도움을 준 형제 같은 친구요!”
“친구?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친구가 당신 어머니를 왜 돌봐요? 혹시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 어머니 만난다는 건 핑계고 사실은 저 남자 보고 싶어서 병원 온 거 아니냐고!”
내가 사실을 말해도 박래현은 믿어 줄 기세가 아니었다. 그럴 거면 대체 왜 물어보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설령 내가 정우랑 사귀었다 한들 박래현이 내 과거를 비난할 자격이 있나? 내가 부정한 짓을 해서 계약을 위반한 것도 아닌데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억울해서 남자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요, 사실대로 말할게요. 정우랑 사귀는 사이였습니다. 근데 제가 정우랑 사귀든 말든 주인님이 무슨 상관이세요? 저는 계약만 충실하게 이행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사귀는 남자가 얼마나 형편없으면, 애인이 몸 파는 걸 보고 내버려 둬?”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고서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나는 내 개가 발정 나서 아무나 하고 흘레붙는 꼴 절대 못 봅니다.”
“사귀는 사람이 아무나입니까?”
“윤준영 씨, 진짜 화내기 전에 닥쳐요!”
“아, 적어도 계약 기간엔 얌전히 지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있는 힘을 다해 쏘아붙여 놓고 나는 위압감이 서린 눈빛에 주저앉을 것 같아서 책상 귀퉁이를 손으로 꽉 틀어쥐었다. 참았어야 했다고 후회가 길어질 무렵 우리 둘 사이에서 감돌던 긴장감은 박은수의 개입으로 막을 내렸다.
“래현아, 질투 그만하고 어서 진료 보자. 나 오늘 모임 있어서 서둘러야 해.”
질투란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박래현이 박은수 쪽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돌렸다. 태연하게 웃으며 박은수는 내 손을 잡고 맞은편 의자에 나를 앉혔다. 간호사들이 없는 거로 보아 박은수는 오늘 쉬는 날이든가 오전 진료만 있는 날인 듯한데 쉬지도 못하게 매번 폐를 끼쳐서 미안했다.
“간단하게 피 검사랑 소변 검사부터 할게요. 팔뚝 이리 얹어 봐요.”
나는 지지대에 팔뚝을 얹고 피 뽑는 걸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던 박래현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시선이 아예 나를 뚫을 기세여서 나는 괜한 목덜미를 쓸었다.
“준영 씨, 움직이지 말아요.”
피를 뽑은 뒤 박은수는 고무줄을 풀고서 피를 뽑은 자리에 솜을 꾹 눌러 지혈시켰다. 지혈이 끝난 후 그녀는 내게 컵 하나를 건네며 소변을 받아 오라고 지시했다. 내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받아 간호사에게 건네고 진료실로 들어을 때 박래현은 전화기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초음파 검사할 텐데 넌 여기 있어, 준영 씨 불편할 테니까.”
“알았어. 급한 전화가 와서 전화 한 통만 하고 들어올게.”
나를 진료실 안쪽 공간으로 이끈 박은수가 치마를 건네며 지난번처럼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두려운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지난번에 검사했으니까 초음파로 아기집 부근만 살펴볼게요. 통로가 생겼는지 아직 안 생겼는지 확인해 봐야겠어요.”
“네.”
“불편할 텐데 조금만 참아요.”
박은수는 밑으로 기계 끄트머리를 조금씩 밀어 넣더니 몇 군데 사진을 저장하면서 아기집으로 향하는 통로를 보여 주었다. 박래현과 내가 미친 듯이 몸을 섞었던 증거가 컴퓨터 화면에 떠서 몹시 심란해졌다. 통로가 생겨서 이번 히트 사이클에 섹스하면 거의 백 퍼센트 임신 확정이었다. 최선인 줄 알고 뿌렸던 씨앗들이 하나 하나 독이 되어 나를 병들게 했다.
“며칠 전에 래현이 본가에서 둘이 세기의 로맨스 영화를 찍고 왔다면서요.”
“네. 거기서 정치헌이란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랑 상무님이 결혼 얘기가 오가나 봐요.”
“치헌이 아버지랑 회장님이 추진하고 있을 거예요. 치헌이가 어른들 상대로 정치를 잘하거든요.”
“그러면 제가 임신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상무님은 저를 미끼로 정치헌 씨를 유혹할 생각인가 봐요.”
“…….”
“히트 사이클이 며칠 남지 않았어요. 당장 내일 찾아올지도 몰라요. 제가 임신하면 박래현 씨는 아이를 지우라고 하겠죠?”
박은수는 측은한 표정으로 묵묵히 기계를 움직였다. 화면에는 이상한 파동이 계속 튀어나왔다. 검은 바다에 흰색 포말이 출렁이는 것을 계속 보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당분간 피임하자고 래현이를 설득해 봐요.”
“상무님은 제 말은 들은 척도 안 하세요.”
정치헌이 오늘이라도 확답을 주면 좋겠는데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정치헌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박래현 행동이 달라질 테니 제발 아이가 들어서기 전에 그가 결단을 내려 주길 바랐다.
“그러지 말고, 준영 씨가 래현이 꼬셔 보는 건 어때요? 이건 내 촉인데, 준영 씨한테 하는 거 보면 마음이 있어 보여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우린 서로 앙숙인걸요.”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는데, 래현이가 왜 원칙을 깨고 준영 씨랑 잤겠어요? 자기 오메가 알아보고 끌리니까 그랬겠지.”
“그게 아니라… 싫다는데 제가 일방적으로 덮친 거예요.”
“후, 복잡하네요. 진료실에 있을 테니까 옷 입고 나와요.”
나는 침대에 좀 더 누워 있다가 마음을 가라앉힌 뒤 옷을 갈아입고 진료실로 나갔다. 박래현은 책상에 비스듬히 앉아서 박은수와 얘길 나누고 있었다.
“아기집이랑 준영 씨 둘 다 건강해.”
“그래? 다행이네. 다른 곳도 다 괜찮아?”
“응, 다 좋아. 근데 넌 정치헌이랑 결혼 얘기 오간다면서 왜 혼외자식을 낳으려고 해? 준영 씨랑 치헌이, 아이한테 다 못할 짓이잖아. 준영 씨는 그만 돌려보내는 게 어때? 아니면 피임이라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누난 자기 일이나 신경 써, 이번에도 승진에서 밀리지 말고.”
“야, 박래현! 넌 준영 씨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라. 우리 병원 닥터 중에 준영 씨 잘생겼다고 눈독 들인 닥터 있던데, 나중에 내가 소개해 줘야겠어.”
“갑시다."
박래현은 내 등을 한쪽 팔로 휘감아 오른쪽 팔뚝을 잡았다. 팔뚝을 아프게 죄어 오는 손에서 거부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무언의 압력을 느꼈다.
“선생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오늘은 멀리 못 나가요. 준영 씨 다음에 또 봐요.”
내게만 활짝 웃어 준 그녀는 박래현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책상 위에 펼쳐진 보고서로 눈을 내렸다. 내 어깨를 꽉 안은 채로 진료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박래현이 하강 버튼을 눌렀다. 내 키가 작은 편이 아닌데 박래현과 나란히 서면 시선이 그의 귀뺨에 닿을락 말락 해서 눈을 맞추려면 지금처럼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당신한테 눈독 들인 닥터 있다는 말, 농담이니까 새겨듣지 말아요. 저녁 먹고 들어갑시다. 뭐 먹고 싶어요, 회 먹으러 갈까?”
“전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박 실장만 보냈습니다. 미친개 풀어 놨다가 괜히 사고 치면, 나만 골치 아프잖아요.”
계속해서 같은 자극에 노출되면 신경이 무뎌지는지 개 취급받는데도 그러려니 했다. 대신 박래현이 개소리할 때마다 속으로 멍멍 짖어 주겠다고 생각하면서 멈춰 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