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차는 주차장 입구 바로 옆쪽 벽에 세워져 있었다. 차 뒷문을 열어 나를 먼저 태운 박래현이 옆에 올라타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박래현이 자주 가는 곳인지 기사는 내비게이션을 찍지 않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몸이 건강하다니 아이는 잘 생기겠네.”
서랍 속에 숨겨 놓은 피임약의 존재를 알게 되면 박래현이 어떻게 나올지 추측해 봤다. 박래현 성격에 위약금은 물론이려니와 제 뜻에 따르지 않은 나를 가만히 두고보지는 않을 것이다. 살얼음 위를 위태롭게 걷는 것보다 약을 치우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는데 박래현이 오른쪽 다리를 포개고서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돌렸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얼른 정신을 추슬렀다.
“어머니는 어때요? 많이 좋아지셨어요?”
“네. 이제 곧 퇴원하셔서 요양 병원으로 옮길 예정입니다.”
“요양 병원은 내가 잘 아는 곳으로 합시다.”
“어딘데요?”
“성심 요양 병원이라고, 원장님과 잘 알고 지냅니다. 아, 비용은 걱정하지 말아요. 퇴원하실 때까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좋으면 계속 거기 계셔도 되고.”
“아닙니다. 제 어머니 일은 제가 결정합니다.”
한 달 안에 헤어질 사이인데 박래현 말대로 했다간 엄마가 적응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이다. 처음부터 가격이 적당한 곳을 알아봐서 입원하는 게 나았다.
“당신 생각해서 결정한 일인데 별로 안 기뻐하네요? 무슨 일 생기면, 주치의랑 바로 연결해 주기로 했습니다. 당신 어머니한테 안성맞춤인 곳이지.”
박래현이 말한 병원은 최고의 의료진과 최첨단 설비를 갖추고 있어서 환자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대신 병원비가 너무 비싸 고려조차 하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우리 형편에 어울리는 병원으로 엄마를 옮기고 싶어서 정우에게 적당한 곳을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들어가실 병원은 이미 알아봤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갑은 계약 기간 내내 을에게 소유권을 지닌다. 갑은 을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을은 무조건 갑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야 한다. 윤준영 씨는 정기적으로 상기시키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지?”
“제게 호의를 베푸는 목적이 있을 텐데요? 밥 한 끼 사 주는 것도 다 부탁할 일이 있어 그러는 건데, 아무 이유 없이 제게 이러실 리가요.”
“돈이 많아서 내가 쓰고 싶은 곳에 쓰겠다는데 이유가 필요해요?”
실랑이 벌여 봤자 늘 그렇듯 박래현이 이기리란 생각에 전의를 상실했다. 박래현과 복잡하게 얽히기 싫지만 당장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병원은 1년으로 계약할 겁니다. 대신 김정우한테 도움 받는 건 그만둬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차가 멈춰 섰다. 분명 원하는 바가 있으리라고 여기며 박래현이 내게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확실한 결론에 이르진 못했다.
“왜 대답이 없어요? 김정우 계속 만나고 싶어서? 만일 그랬다간 어머니 더는 못 볼 줄 알아요.”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어머니 병원 옮기고 제가 정우를 안 만나면 되죠?”
박래현은 먼저 내려서 내가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 문을 닫았다. 조형이 잘된 정원을 지나 식당 안에 들어서자 직원이 곧장 방으로 안내했다.
박래현이 안쪽에 앉을 수 있게 나는 문을 등지고 바깥쪽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을 줄 알았던 박래현이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내 옆 의자에 앉았다. 소매 단추를 푼 그가 소매를 두어 겹 접어서 기다란 팔뚝이 드러나게 위로 올렸다. 오늘은 옷차림에 맞춰 가죽끈으로 된 다소 고풍스러운 시계를 차고 있었다. 내 방 콘솔 위에 올려 둔 시계가 생각났다. 박래현에게 돌려주려고 했는데 그날 이후 이 남자가 내 방을 찾지 않아서 나도 깜박 잊어버렸다.
“사흘 동안 혼자 자니까 좋았습니까?”
내게 물수건을 건넨 박래현은 물수건을 하나 더 집어 손을 닦았다. 냉장고에서 막 꺼내 왔는지 물수건이 차가웠다.
“편하게 잘 잤습니다. 주인님은요?”
“잠도 안 오고 머리가 아파서 몇 번이나 당신 방에 들어가려다 말았습니다.”
귀가 시간에 상관없이 박래현이 파고들면 나는 언제든 다리를 벌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자기 꼴릴 때마다 박아 대던 박래현이 욕망을 억누르는 이유는 딱 하나, 정치헌때문일 것이다. 지난 사흘간 남자는 매일 열두 시 넘어서 집에 들어왔다. 중요한 미팅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남자가 정치헌을 만나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거라고 추론했다. 회장이 발 벗고 나서서 추진하고 있으니 두 사람이 결혼을 발표할 날이 머지 않은 듯했다.
“오늘 휴학 처리했어요. 경영대 졸업하면 뭐 할 생각이었습니까?”
“직장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준비할 생각이었습니다.”
“직장 다니면서? 그렇게 만만한 시험인가?”
“제 사정상 시험 준비만 할 순 없어서요. 그렇다고 꿈도 없이 살긴 싫고….”
직원이 전복 튀김과 양념된 생굴을 상에 내려놓았다. 박래현은 내게 맥주를 따라 준 뒤 전복은 트러플 오일과 먹어야 맛있다며 오일이 든 작은 접시에 전복을 덜어서 내 앞으로 밀었다. 바싹하게 튀긴 전복은 오일 맛과 섞여 향긋하고 쫄깃했다. 남자는 양념 된 굴을 굴 껍데기에서 떼어 내 그것도 내 앞 접시로 옮겼다.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주인님도 어서 드세요.”
“내 걱정 말고 윤준영 씨나 많이 먹어요.”
키가 크고 몸이 좋아서 잘 먹을 것 같은데 박래현은 의외로 소식했다. 박영범도 많이 먹는 편이 아니라 그 집에서는 내가 제일 대식가였다. 전복과 굴을 다 먹었더니 새 음식이 상에 채워졌다. 내가 음식을 비우는 족족 새 음식이 나왔는데 다 입에 맞았다.
“윤준영 씨.”
“네?”
“힘들게 공부하지 말고, 놀면서 편하게 살아요. 내가 뒤는 봐줄 테니까.”
겨우 집었던 해삼이 젓가락에서 빠져나가 상으로 뚝 떨어졌다. 미끌미끌한 해삼을 집는 데 집중하던 나는 남자가 한 말을 재깍 이해하지 못해 한 발 느리게 반응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힘들게 살지 말고 편하게 살라고 했습니다.”
“공짜는 아닐 테고 그 대가로 전 뭘 해 드려야 하는데요?”
“내가 원할 때 안게 해 주면 됩니다. 어때, 괜찮은 조건이죠?”
황당한 말에 기가 막혀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멀거니 박래현을 보았다. 박래현은 태연한 얼굴로 내 앞 접시에 음식을 옮겼다.
“사지 멀쩡한 제가 왜 섹스를 팔면서 살아야 하는데요? 전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할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아이 낳을 때까진 주인님께 묶인 몸이잖아요.”
“당신을 더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싶어서 그래요.”
“…….”
“계약서 새로 작성합시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돈이든 집이든 차든 당신이 원하는 만큼 협상해 줄 용의 있습니다.”
“전 누구에게도 구속당하며 살고 싶진 않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정부가 되어 달란 소리에 화가 나서 목소리가 강경하게 나갔다. 박래현 눈에는 내가 돈만 주면 뭐든 다 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듯했다. 결혼은 정치헌과 하고 정부를 따로 둘 생각을 하다니 개자식이 따로 없었다.
“당신이 손해보는 거래는 전혀 아닐 텐에? 내가 원할 때 내게 안겨 주면 나머지 시간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좋아요. 아, 물론 그사이에 나 말고 다른 알파를 만나는 건 금지입니다.”
“한마디로 정부가 되어 달란 말씀이시죠? 전 계약을 이행하고 나서 절대 주인님과 엉킬 생각 없습니다.”
얼굴로 쏟아지는 싸늘한 시선을 견뎌 내며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 몸이 마음에 든 것 같은데 남자가 한번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면 달아날 틈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속이 하얗게 탔다.
“불과 한 달 전에 당신이 이런 처지에 놓이리라고 예상했습니까?”
“아니요.”
“난 미래에 당신이 어디 있을지 눈에 보이는데….”
“…그 예상에서 주인님은 빼 주세요.”
직원이 상을 치우고 새 음식을 세팅하는 동안 박래현은 맥주를 한 잔 더 마시는 나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는 레어로 구운 채끝살을 내 앞 접시에 옮기고서 그 위에 부추와 양파를 얹었다. 우스갯소리로 소고기를 사 준 사람은 상대에게 흑심이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빈 잔에 맥주를 따르는 길고 가지런한 손으로 눈을 내렸다. 상대편 잔에 담긴 술은 그대로인데 나만 혼자 박래현이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마시고 있었다.
“윤준영 씨, 정중하게 제안할 때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제 귀엔 제안이 아니라 협박으로 들립니다. 돈에 몸을 팔았다고 제 도덕심마저 팔아먹은 건 아닙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하셔도 전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나는 큰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엄마 수술비와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 남자아이를 낳아 주기로 했던 초반의 결심을 상기했다.
“윤준영 씨는 도덕적 기준에 전혀 일관성이 없네요. 나를 유부남으로 알고 있을 때,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자던 내 말을 무시하고 육탄 공세를 펼친 건 당신입니다. 싫다는 사람 덮쳐서 순결을 뺏어 놓고 지금 와서 도덕적인 척하면 그걸 누가 믿어요?”
박래현 입에서 순결이란 말이 나오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였다. 내가 들었던 말이 있는 데다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박래현처럼 잘난 알파를 주변에서 가만 놔뒀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어쨌든 전 주인님 정부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팔뚝을 잡은 손이 팔꿈치를 지나 서서히 아래로 내려와 손등을 쓰다듬었다.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은 박래현이 피스톤 운동을 하듯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손등을 다 덮은 채 오르락내리락하는 손이 뜨거워져서 덩달아 내 손등도 열이 올랐다.
“내 제안보다 더 좋은 조건 끌어내려고 수작 부리는 거 다 알아요. 몸을 들이대며 필사적으로 달려든 최종 목표는, 날 각인시켜서 나랑 결혼하는 거겠지.”
“미, 미친… 제가 돌았어요? 주인님이랑 결혼할 생각을 하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박래현이 미워서 각인을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박래현을 각인시킨 뒤 그를 걷어차면 얼마나 짜릿할까 망상했지만 그걸로 한몫 잡을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런 적 없으니까 소설 쓰지 마세요.”
남자는 무엇을 근거로 나를 평가하고 내 속마음을 재단하는 걸까. 무심코 넘기곤 했던 가시 돋친 말들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혀 내려가지 않았다. 늦은 시간까지 몸을 섞으면서 가장 은밀한 부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정작 살갗에서 몇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음은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씁쓸해졌다. 이 남자 눈을 가리고 있는 질기고 두터운 편견만이라도 없애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이라….”
한쪽 팔로 의자 등받이를 짚고 왼손으로 내 뺨을 쥔 박래현이 입술 쪽으로 얼굴을 비스듬히 숙였을 때 직원이 회가 든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박래현은 뺨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내 입술 끝과 인중을 가볍게 물었다. 뺨이 눌려 입술이 위로 들리면서 남자의 입 안으로 윗입술이 쏙 빨려 들어갔다. 늘 그렇듯 우뚝한 코끝이 내 코끝을 비켜 가며 뺨으로 따스하고 간지러운 숨결이 퍼졌다.
안으로 들어온 살덩이가 깊은 곳으로 향할수록 고개가 뒤로 꺾여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바닥에 눕혀지지 않으려고 나는 박래현 목을 두 팔로 감아야 했다. 뜨거운 혀가 점막과 입천장의 얇은 막을 벗길 것처럼 안을 긁어내렸다.
나는 반항하는 대신 혀를 뒤로 말아서 키스에 응하지 않았다. 박래현은 아래로 감춘 혀를 들춰내 혀끝이 끈적끈적해질 때까지 내 혀에 자신의 혀를 비비고 문질렀다. 혀가 빨리고 침이 섞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남부끄러웠다. 남자는 내가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일 무렵에야 입술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뺨은 여전히 커다란 손아귀에 잡힌 채여서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남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박래현이 엄지로 내 입술을 살살 쓸어내리며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입술을 벌려 주는 건, 어서 자지를 쑤셔 달란 뜻입니까? 목구멍에 자지를 박아 주기만 해도 당신은 혼자 젖잖아.”
“제 입은 그런 용도가 아닙니다.”
“그런 용도가 아니긴. 물려 준 건 뭐든 잘 먹고 잘 빨면서.”
벌어진 줄 몰랐던 입술을 꼭 붙이며 박래현을 노려봤다. 박래현은 내 뺨을 쥐었던 손으로 젓가락을 잡고서 고추냉이를 회에 얹어 살코기를 간장에 살짝 담갔다. 투명한 흰 살에 연분홍색이 서린 회가 얇고 길쭉하게 썰어져 동글동글한 옥돌 위에 놓여 있었다.
“입 벌려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나를 괴롭히는 게 인생의 낙인 박래현에게 낙담한 모습을 보여서 그를 기쁘게 해주긴 싫었다. 입 안을 자세히 들여다본 박래현은 더운 혓바닥으로 내 혀를 쓱 문지른 뒤 생선 살을 혀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접시에서 회가 한 점씩 사라지면서 농도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지난 사흘간 하지 않았던 키스를 오늘 다 할 기세였다. 나를 모욕하는 재미로 살아가면서 더러운 남창에게 입은 왜 맞추고 몸은 왜 만지는지 갈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회가 바닥날 무렵엔 남자의 손이 단추를 풀고 안으로 들어와 손가락 사이에 가슴 돌기를 끼우고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연하고 말랑한 젖꽃판 주변으로 스멀스멀 열기가 번지면서 밀착된 손가락 밑에서 젖꼭지가 단단하게 일어섰다.
몸을 섞은 것도 아닌데 왜 키스만으로 몸이 달아오르는지, 한숨 담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내 깊게 섞이는 혀에 호흡이 가빠지면서 잡생각이 사라지고 몸서리가 쳐졌다. 우리가 키스를 멈췄을 때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면서 직원이 장어 구이와 대게 다리 튀김을 가지고 들어왔다. 박래현은 물티슈를 꺼내 내게 건네고서 새 물티슈로 자기 입술과 손을 닦았다.
“맛있어요? 아주 잘 먹네.”
음식과 술을 내려놓고 빠르게 사라진 직원은 우리를 영락없이 다정한 연인으로 여길 것이다. 그것도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인들로. 그러지 않고서야 이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서로 입술을 빨고 있진 않을 테니까.
“네. 맛있어요.”
열기를 담은 눈이 발갛게 달아올랐을 내 입술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대게 튀김을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얇은 튀김 옷 안에 숨어 있던 짭짜름한 대게 살이 툭 튀어나왔다. 자세히 보니 접시에는 단호박 튀김과 버섯 튀김이 섞여 있었다. 대게 튀김을 먼저 먹고 단호박 튀김과 버섯 튀김을 하나씩 맛보고 있는데 박래현 핸드폰이 울렸다. 곁눈질로 발신인을 살펴보니 박영범이었다.
“지금? 윤준영이랑 저녁 먹고 있어.”
박래현이 술을 새로 주문했는지 맥주가 아닌 다른 술과 소스를 발라 구운 소고기가 나왔다. 나온 음식의 삼분의 이를 나 혼자 먹어 치웠던지라 배가 불렀다. 박래현은 박영범과 통화하면서 내 잔에 독해 보이는 술을 가득 따랐다.
“어, 형. 고생했어. 그래, 조심해서 운전해.”
그 뒤로도 음식이 몇 가지 더 나왔다. 식사가 끝날 무렵엔 포만감에 적당히 술기운이 돌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다 먹었으면 집에 갑시다.”
핸드폰을 챙긴 남자가 옷걸이에 걸린 재킷 상의를 팔에 걸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고서 팔뚝을 잡아 나를 일으켰다.
“괜찮습니다. 안 취했어요.”
항의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지런히 놓인 구두에 발을 꿰고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박래현은 팔을 잡아 주었다. 멀쩡한 상태로 남자의 부축을 받는 게 이상해 차라리 취한 척하고 싶었다. 음식값을 계산하고 나와 박래현은 직원들의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정원으로 나섰다. 시원한 곳에 있다가 나와서 더위가 더 끈적하게 느껴졌다. 박래현은 차에 도착할 때까지 내 팔을 잡은 채였다.
그는 뒤쪽 문이 아니라 조수석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게만 열심히 술을 먹이던 박래현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차 안의 기계에 은은하게 빛이 들어왔다. 차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박래현의 차는 웅장하고 멋있어 보였다. 특히 공간이 넓어 다리를 쭉 뻗어도 차체에 발이 닿지 않아 좋았다. 차는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 조용하고 부드럽게 출발했다.
침묵을 깨고 싶지 않아서 나는 조수석에 머리를 기대고 부어오른 입술을 손등으로 누르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키스를 너무 오래 해서 아직도 박래현 입술이 내 입술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박래현은 아까 첫 상대가 나라고 했는데 내 귀로 들어 놓고도 믿기 힘들었다. 그가 원하면 다리를 벌려 줄 사람은 많았을 테고, 무엇보다 처음이라기엔 섹스를 너무 잘했다. 남자는 한번 시작하면 절정의 끝까지 가차 없이 몰아붙이기 때문에 이따금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언제 잠든지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경험이 없어서 딱히 비교할 대상은 없지만 박래현이 섹스를 특출나게 잘한다는 건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치렀던 첫 섹스를 떠올렸다. 엄밀히 따지면 기교를 부린다기 보다는 힘과 지구력이 뛰어나서 내가 맛이 갈 때까지 밀어붙였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 말이 사실이라면 정치헌과 사귀었다면서 왜 발정기를 함께 보내지 않았던 걸까. 박래현이 섹스를 싫어한다면 모를까, 그는 특별히 늦게 들어온 날이 아니고서는 거의 매일 내 방을 찾아왔다. 나는 결국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다.
“그런데, 진짜 제가 처음이세요?”
“뭐가요?”
“섹스 말이에요. 그 전엔 한 번도 해 본 적 없으세요?”
“당신이 처음 맞아요.”
“의외네요. 되게 경험 많으실 줄 알았는데.”
“사람은 겉가죽으로 판단할 수 없는 겁니다. 당신도 겉만 보면 되게 순진해 보이거든.”
이야기가 안 좋은 방향으로 흐를 게 뻔해서 침묵을 선택한 나는 밋밋하고 지루한 창밖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까지 박래현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 없었던 걸까? 박래현 때문에 망가졌다던 오메가들은 무슨 연유로 그렇게 된 거고, 정치헌과는 사귀었다면서 왜 몸을 섞지 않았을까? 혼란스러운 와중에 결혼할 사람을 두고 나랑 첫 관계를 한 박래현의 불순함에 새삼 치가 떨렸다.
“정치헌 씨랑 사귈 땐 왜 같이 안 잤어요?”
“내가 알파로 발현했던 해에 침대로 발정 난 오메가가 기어 들어왔어요.”
“오메가가 왜 주인님한테 달려들어요?”
“양부가 심심하면 발정 난 오메가를 사서 내 잠자리에 밀어 넣었습니다. 내가 대학을 들어가기도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잔잔한 물속을 유영하듯 고저 없는 말투 속에서 나는 박래현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박래현이 성숙한 편이라 해도 어린 나이에 부모가 나서서 성적 학대를 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난 어렸고 페로몬 조절을 완벽하게 할 수 없어서 나와 상대를 극한까지 몰아가며 싸움을 벌였어요. 다른 알파 냄새를 풍기며 달려들던 싸구려 남창들은 지금 생각해도 구역질이 나요. 섹스에 환멸만 남아서 성욕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안 하고 잘 살 수 있는데, 그 더러운 짓을 내가 왜 해요.”
화가 나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열여섯에 나는 엄마가 만들어 준 떡볶이를 먹으며 해준과 마지막 하나를 두고 다투곤 했다. 떡볶이를 먹는 대신 설거지를 하기로 해 놓고 떡볶이만 먹고 도망간 해준을 찾아 골목 어귀를 쏘다녔을 때 박래현은 자신을 타락시키려는 아버지한테 맞서 발버둥 쳐야 했다.
“씨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미성년자한테 그런 짓을 해요? 그 사람 제정신이에요?”
“아주 비루한 남자죠. 회사를 당신 아들한테 물려줘야 하는데, 내가 당신 아들보다 잘 나가는 게 싫었던 겁니다. 그래서 내 진로도, 인생도 부수고 싶었던 거죠.”
당신 아들이라면 박수현을 말하는 건가? 그 사람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목도했지만 덜 자란 청소년에까지 손댄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풍채 좋고 잘생긴 얼굴로 나를 대놓고 무시하던 박래현 계부가 떠올라 치가 떨렸다.
“좋은 얘기도 아니고 재미없는데 그만합시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나는 그를 따라서 입을 다물었다. 박래현의 비틀린 모습에서 그가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고만 여겼지 이런 과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저녁 식사가 있던 날 박래현은 자기 부모에게, 특히 그의 계부에게 차가운 태도로 일관했는데 이제야 그가 계부를 증오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박래현 과거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성욕이 사라졌다는 말은 도저히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달려드는 오메가들에게 질려 성욕을 상실했다는 사람이 나를 안을 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알파처럼 생겼다 해도 나는 알파를 유혹할 페로몬을 가진 오메가였다. 나와는 왜 섹스할 욕구가 생겼는지 물어보려다가 첫날 박래현을 정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지를 빨던 내 모습이 생각 나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생각에 잠긴 새에 집에 도착해서 차가 주차장의 빈 공간에 세워졌다. 시동을 끈 박래현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오른뺨을 감싸고서 내 얼굴의 방향을 바꿨다.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이 생각을 읽으려는 듯 가만히 내 눈을 응시했다.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넣어 이마에 남은 흉터를 살살 문지르던 그가 그곳에 입술을 갖다 대고 혀로 조심스럽게 핥았다. 이마를 찍었을 때의 아픔이 되살아나서 미간을 찌푸리는데 박래현이 갑자기 내 뒤통수를 끌어당겨 입 맞추기 시작했다. 혀가 섞이고 오가는 침과 헐떡임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차 안 공기가 열기로 탁해졌다. 그는 안으로 파고든 내 혀를 이로 잘근잘근 씹다가 입술을 뗐다.
사흘간 금욕한 몸은 안에서부터 욕정이 거세게 끓어올랐다. 박래현도 마찬가지인지 나를 보는 눈에 욕정이 득실득실했다.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운전석에서 내린 그가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손을 잡고 차에서 끌어 내렸다. 집으로 들어가 침실 문을 열고 나서야 그는 잡았던 내 손을 놓아주었다.
“씻고 올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
“저 피곤한데….”
“먹을 땐 눈 반짝이면서 잘만 먹더니 뭐가 피곤하다는 겁니까?”
“정말 피곤해요. 너무 먹었더니 배가 터질 거 같아요.”
“알았어요. 오늘은 일찍 끝내 줄게요.”
눈빛은 당장 나를 덮칠 기세면서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는 더는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나를 방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어둠에 잠겨 있던 방이 삽시에 밝아져 잠시간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옷을 벗고 즉시 샤워 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면서 박래현에게 들었던 끔찍한 말을 떠올렸다. 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한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정글 같았다. 우거진 나무에는 이파리 색을 띤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고 늪에는 날카로운 이를 가진 악어가 있으며 동굴에는 굶주린 호랑이가 살고 있다.
돈과 권력을 위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덫을 치고 틈을 보이면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세상인 것이다. 사랑 역시 철저하게 계산된 행위여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과감하게 포기하고 이익이 될 것 같으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쟁취하려 든다. 결혼과 아이는 단지 흥정의 대상일 뿐이다. 아이만 낳아 주면 되는 줄 알았던 나는 운 나쁘게 이상한 일에 휘말려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고 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순서대로 정리하던 도중 문득 박래현에게 잡혀 버둥대던 정우가 생각났다. 당장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착한 내 친구는 자기가 겪은 부당함보다는 덫에 걸려 꼼짝 못 하는 나를 더 가엾게 여길 것이다.
나는 박래현을 상무님도 아니고 주인님이라고 불렀다. 주인님은 지금 내 상황을 제대로 응축한 한마디였다. 정우는 그 단어로 내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단박에 눈치챘을 것이다. 아무리 허물없는 사이라 해도 내가 개 취급당하는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웠다. 그래 놓고서 내게 섹파 제안을 하다니 뻔뻔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마른 수건에 젖은 몸과 머리칼을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드레스 룸 벽면에 걸린 커다란 거울에 발가벗은 내 모습이 비쳤다. 조명 탓인지 피어싱과 고동색 눈알이 별처럼 색색이 빛났다. 정우의 말이 생각나서 피어싱 하나를 빼 보석의 측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보석 측면에 영문과 고유 번호가 아주 작게 새겨져 있었다. 이런 보석은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이 집을 나가면 더는 피어싱을 할 이유가 없으므로 다 팔아 버릴 것이다.
피어싱을 제자리에 꽂은 뒤 표범 무늬 파자마 가운을 꺼내 입었다. 박래현은 드로어즈만 벗긴 채 박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파자마를 입어야 했다. 박래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보통 때처럼 뺨을 매트리스에 대고 엉덩이를 위로 들어 올린 자세를 취했다. 파자마 자락이 엉덩이를 타고 내려와 끈으로 고정된 허리 부근에 고였다. 손을 뻗어 파자마 자락으로 엉덩이를 가렸지만 미끌미끌한 천은 도로 내려와 엉덩이를 훤히 드러냈다. 매번 수치스러운 자세지만 오늘따라 이 자세가 더 싫어서 박래현이 어서 들어오기만 바랐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빨리 끝내고 싶었다.
이윽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후에 내게 걸어오는 박래현 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 매트리스에 걸터앉은 그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더니 서늘한 손으로 둔부를 주물렀다. 없는 살을 다 모아 터트릴 기세로 엉덩이 살을 쥐던 손이 이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느리고 진득한 손길에 민감한 몸이 벌써 떨렸다. 침대 위로 올라와 헤드에 등을 기댄 박래현이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나를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허벅지를 벌린 채 그의 하반신에 앉혀진 나는 무릎으로 매트리스를 짚어 내 몸을 지탱했다. 마침 박래현이 무릎을 세워 뒤로 넘어지지 않게 허리를 받쳐 주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박래현 얼굴이 있었다. 남자의 황홀한 이목구비에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기다랗고 풍성한 속눈썹이나 아찔하게 솟은 콧대, 산 모양으로 우뚝한 붉은 입술은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 윤곽이 더 뚜렷했다. 이 남자를 못 보게 되더라도 쉽게 잊을 얼굴은 아니었다. 비현실적인 얼굴 때문에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이 순간이 정말 꿈으로 여겨질 것이다. 기분이 울적해져서 나는 벽에 걸린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라리 엎드린 자세로 성기만 받아들일 때가 마음 편하고 좋았다. 얼굴을 마주 보며 섹스할 때는 서로의 표정이 보여서 쓸데없이 성가신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커다란 손으로 내 뒤통수를 감싸 아래로 지긋하게 내리눌렀다.
“윤준영 씨, 키스해요.”
그가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른 것처럼 기분이 이상해져서 나는 널따란 어깨를 두 손으로 짚고 도톰한 입술에 내 입술을 겹쳤다. 입술 끝이 닿는 순간까지 박래현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첫 입맞춤도 아닌데 손바닥에 땀이 맺혀 어깨를 잡은 손이 축축해졌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혀가 엉켰고 곧게 뻗은 어깨를 쥔 손에 힘이 가해졌다. 남자의 손이 가운 안으로 들어와 젖꼭지와 젖꽃판을 희롱하며 간질였다. 다른 손은 내 밑을 파고 들어와 주름 안을 빠르게 헤집었다. 그의 입술이 턱을 타고 내려와 목울대를 깊게 빨아들인 뒤 빗장뼈에 닿았다.
빗장뼈에 잇자국을 남기고서 축축하고 뜨거운 혓바닥이 젖꼭지를 짓눌렀다. 유륜과 젖꼭지 살을 한 꺼풀 벗길 기세로 혀의 날 선 면이 민감한 곳을 건드려서 저절로 밑이 움찔거렸다. 젖꼭지를 깊숙이 물린 채 나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으며 청신한 샴푸 향기가 나는 머리칼 속에 입술을 묻었다.
***
밝게 퍼지는 아침 햇살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피곤해도 자고 일어나면 몸이 가뿐했는데 오늘따라 가위에 눌린 듯 전신이 무거웠다. 곧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허리를 친친 감은 기다란 팔, 등에 붙어서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단단한 가슴팍, 목덜미에 쏟아지는 따스한 숨결, 그리고 내 밑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부피감까지 전부 박래현과 관련 있었다.
구멍에 박혀 있는 성기를 빼내려고 허리를 튼 찰나 박래현이 팔베개를 한 손과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줘서 내 몸을 완전히 결박했다. 말뚝처럼 발기한 좆이 안에서 꿈틀거리자 내벽이 수축하며 성기 기둥을 감았다.
“으, 으으응….”
아래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저릿한 감각에 신음이 터졌다. 남자가 잠이 덜 깬 몸짓으로 목덜미에 진득하게 입술을 문질렀다. 누군가에게 안겨 잠이 든 것도, 누군가의 품에서 깨어난 것도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을 더듬었다. 지금까지 박래현은 섹스가 끝나면 즉각 옷을 주워 입고 내 방을 나가 버리곤 했다. 그런데 어제는 피곤해서 박래현이 내 곁에서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미간에 힘을 주며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모아 그림을 맞춰 보았다.
일찍 끝내겠다던 박래현은 내가 서너 번의 오르가슴을 통과해 롤러코스터를 타는 동안 한 번도 사정하지 않고 발기한 좆을 내 안에 쑤셔 박았다. 막바지에 이르러 거의 기절하다시피 쓰러져 절정을 맞은 이후부터는 아예 기억에서 사라졌다.
“윤준영 씨 안은 아침부터 부지런하네요.”
“이거 좀 빼 주시면 안 돼요?”
“이거라니 뭘 말하는 거죠?”
“주인님 좆이요. 밑이 벌어져서 아파요.”
“지금은, 음… 안 빠지겠어. 자지 크기를 좀 줄여 볼까요?”
목이 잠겨서 더 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박래현은 귓바퀴와 귓불을 혀로 핥으며 내 등을 타고 올랐다. 이불처럼 온몸을 덮어 누르면서 남자는 내가 느끼는 곳을 찾아 느릿느릿 성기를 문지르고 비벼 댔다. 아침부터 눈앞에서 새빨간 불씨가 탁탁 피어올랐다. 나는 벌레처럼 구물구물 허리를 움직여 내 안에 파고든 성기를 바투 조여 물었다. 박래현이 성기를 뒤로 뺄 때마다 물컹물컹한 액이 같이 빠져나와 허벅지에 고여 들었다. 아래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마저 성욕을 자극해 나를 미치게 했다.
“내 자지가 그렇게 좋아요? 밤새 박아 줬는데도 부족한가 보네.”
박래현은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입술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단지 입술을 붙이는 게 아니라 입술 안에서 뭔가를 찾는 사람처럼 날렵한 혀가 입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동시에 내벽에 산재한 성감대에 도장을 찍듯 그는 좆 대가리를 꾹꾹 눌러 댔다. 내벽 어딘가 확 좁아지는 지점이 있는지 그곳을 공략당하면 무기력하게 사지가 벌어지고 몸은 쾌감을 좇아 리듬을 타게 된다.
“박래현, 너 어젯밤 여기서 잤냐?”
갑작스럽게 끼어든 박영범 목소리에 박래현이 내게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내가 얼굴을 들 수 없게 한 손으로 뒤통수를 내리 눌렀다.
“형, 내가 이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노크도 안 하고 멋대로 들어오는 거 별로인데.”
“노크 여러 번 했어. 출근 시간 다 됐는데 2층에도 네가 안 보이고 노크해도 문이 안 열려서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지. 오늘 오전에 드럭 스토어 건 때문에 마케팅 팀 간부들 회의 있으니까 빨리 준비하고 나와.”
“알았어.”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남자는 내 허리에 팔을 감아 엉덩이를 위로 띄웠다. 표범처럼 앞발을 쭉 뻗은 자세로 나는 박래현의 허릿짓에 맞춰 엉덩이를 흔들었다. 몇 번이나 속을 맞춘 육체가 절정을 향해 빈틈없이 맞물려 굴러갔다. 쿵쿵 찍어 대는 격렬한 움직임에 매트리스가 출렁이고 시야가 흔들렸다. 시간이 없어서 박래현이 평소보다 일찍 사정한 탓에 우린 처음으로 함께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끈적한 손길로 내 몸을 쓸다가 안에서 성기를 꺼냈다. 움질거리는 구멍에서 미지근한 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닌데도 허벅지 안쪽에서 정액이 떨어지는 감각은 늘 섬뜩했다.
어깨를 잡아서 내 몸을 반듯하게 눕힌 박래현이 널브러진 몸뚱이를 타고 올라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남자의 왼쪽 측면을 환하게 비쳤다. 완벽한 몸매를 홀린 듯 보고 있던 눈에 왼쪽 옆구리와 허벅지 부근에 길게 난 상처들이 보였다. 흉터 위로 부서지는 빛을 잡고 싶어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가 잡을 빛이 아니라는 자각에 애꿎은 내 머리칼만 만지작거렸다. 박래현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한 햇빛 아래서 몸을 붙이고 있자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괜히 볼이 달아올랐다. 아침부터 짙붉게 피어난 입술이 퍽 야하단 생각을 하며 나는 괜히 헛기침했다.
“내가 했던 말 잘 생각해 봐요.”
“무슨 말요?”
“나랑 새로 계약서 쓰는 거.”
“싫다고 거절했을 텐데요? 저는 계약 끝내고 어서 여길 뜨고 싶어요.”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생각해 뒀다가 저녁때 말해요. 웬만한 건 다 들어줄 테니까.”
“억지 부리지 말고 정부가 필요하면 다른 오메가 알아보세요.”
“다른 오메가는 필요 없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을 마친 박래현은 다음은 네 차례란 눈빛으로 내가 대답하길 종용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나를 묶어 두고자 하는 황당한 제안에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내 시답잖은 과거를 왜 당신한테 오픈했을 거 같아요? 설마 당신이 좋아서, 당신한테 동정받고 싶어서 그랬을까?”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 음흉한 속을 어떻게 알아요?”
“오늘 결정 못 하면 기회는 사라질 겁니다. 내가 당신한테 베풀 수 있는 인정은 거기까지예요.”
박래현은 침대 끝에 걸터앉아 파자마 바지를 찾아 입고서 나를 돌아보았다.
“더 쉬었다가 아침은 천천히 먹어요. 이 차장님한텐 열한 시쯤에 시트 바꾸라고 할 테니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나는 이불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가랑이 사이로 정액이 줄줄 새어 나와 기분이 더 우울해졌다. 남자가 과거를 털어놓은 연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다른 오메가에겐 욕정이 생기지 않으므로 결혼은 결혼대로 하고 나를 정부로 둬서 성욕을 해결하고 싶다는 뜻인데 과연 정치헌이 박래현 의견을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성격은 잘 모르니 제쳐 두고 외양만 따졌을 때, 정치헌은 누가 봐도 욕심낼 만한 뚜렷한 미인이었다. 그래서 내 앞에선 잘만 세우던 박래현이 그에게 욕구를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계부 때문에 성욕이 사라졌다던 말이 사실일까? 오메가를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어나 정치헌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래현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피했을 가능성이 컸다. 박래현같은 알파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는데 이제야 미스터리가 풀렸다. 돈이 많고 완벽한 외모를 갖추었다 해도 오메가의 본능을 채워 줄 수 없는 알파라면 거부당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헌을 되찾고 싶은 욕심에 박래현은 이곳에 오메가들을 끌어들여 사라진 성욕을 복구하려고 시도했을 것이다. 그를 발기시키지 못한 오메가들은 망가진 상태로 저택을 나갔을 테고 그의 성기를 세우는 데 성공한 나만 살아남아서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박래현에게 일종의 성욕 촉진제인 것이다. 그는 정치헌을 아끼지만, 그와 원활하게 성관계를 맺을 때까지 나를 치료제로 사용하려고 그런 제안을 한 듯했다. 덤으로 성욕까지 채울 수 있으니 정치헌을 잘 설득해 동의를 얻어낸다면 박래현에겐 꽤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져들던 나는 무거운 기분을 털어 내고자 욕실로 향했다. 한계까지 벌려졌던 허벅지가 후들후들 떨려 제대로 걷기가 힘들었다. 나는 손에 맨 처음 닿는 입욕제를 꺼내 욕조에 넣고 물을 받았다. 꽃향기와 꿀 냄새가 섞인 달콤한 향이 욕실을 은은하게 채웠다. 양치와 세수 먼저 마치고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 몸을 푹 담갔다.
머리를 비우려 해도 오늘까지 결정하라는 박래현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치헌이 청혼하기만 하면 박래현이 날 놓아줄 줄 알았는데 박래현은 결혼은 결혼대로 하면서 나를 정부로 둘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당분간 그가 나를 놔줄 의사가 없다는 건 명백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생기면? 머릿속이 잡다한 가정과 추측들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박래현에게 정부가 되는 대신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얘기해 볼까. 정치헌이 나와 박래현 사이를 묵인해 준다는 전제하에 1~2년 정도 박래현 정부로 지내면서 돈을 왕창 뜯어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그 돈으로 엄마와 물가가 싼 지방에 내려가 레스토랑 같은 걸 차려 걱정 없이 먹고사는 것도 나쁜 대안은 아닌 듯했다. 다년간 일한 경험이 있어서 레스토랑 프랜차이즈 정도면 잘 운영할 자신이 있다.
거기다 박래현과 성교하는 게 싫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박래현과 궁합이 잘 맞았다. 내게 성욕을 느낄 때 박래현이 흘리는 페로몬이 좋았고, 그와 키스하는 것도 좋았다. 그와 관계하는 건 최고로 좋아서 섹스하는 도중엔 이 알파의 오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이따금 하곤 했다. 박래현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성의 경고를 무시하고 내 몸은 이미 박래현에게 길들어 버린 것이다. 이후에 박래현만큼 내 욕구를 충족시켜 줄 알파를 못 만나리라는 예감은 하고 있었다.
아, 씨발! 윤준영,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나는 젖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썩은 내가 풀풀 나는 의식의 흐름에 실소했다. 박래현에게 세뇌당하더니 정말로 남창이 되어 버린 걸까.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손바닥 가득 물을 떠서 얼굴에 끼얹었다. 몸과는 반대로 내 이성은 박래현이 내뱉은 멸시의 말들, 조롱하는 눈빛들, 귀를 뚫는 냉담한 손길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엄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몸을 판 거지, 돈을 벌어 호의호식하려고 몸을 판 것은 아니다. 신체가 건강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내가 두 사람의 멸시 속에서 자존심을 진창에 처박으면서까지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의지가 꺾여 박래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인생을 살아가는 내내 이 순간을 후회할 것이다. 목욕을 끝낼 무렵 나는 박래현이 어떤 조건을 제시해도 그의 정부가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
혼자 저녁을 먹고서 거실 소파에 앉아 박래현이 읽다가 둔 잡지를 뒤적였다. 영어로 된 잡지는 의학 정보와 의학 자료를 가득 싣고 있어서 내가 읽기에는 어려웠다. 영어 실력을 총동원하여 피상적인 해석을 하다가 결국 잡지를 내려놓았다. 지겨웠던 세무회계가 그리워질 날이 올 줄이야. 운동만 하며 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그러잖아도 빈 머릿속이 더 빈 깡통이 되어 가는 것 같아 초조해졌다.
나는 소파에 반쯤 누운 자세로 높다란 천장을 보며 끝이라는 단어를 내뱉어 보았다.
끝. 관계의 끝.
단어가 주는 무게 때문에 그 단어를 박래현과 내 관계에 끌어들이는 건 적당하지 않았다. 우리 관계는 시작과 끝이 없는, 그저 쉽게 지워질 한 단면만 존재할 뿐이다. 이유 없이 숨이 탁 막혀서 어제 마셨던 독한 술이 당겼다. 화려하게 장식된 회가 없어도 소주에 과자 하나면 충분히 만족할 것 같았다.
언젠가 엄마 몰래 해준과 소주를 마시다 들켜서 셋이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 불만이 많아서 그땐 서로가 소중한 줄 모르고 가슴 아픈 말로 상대를 할퀴었다. 서로를 탓하고 원망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가 시간이 흐르면 용서를 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화해하곤 했다. 그동안 당연하다는 듯 엄마에게 받고만 살았는데 함께 살날이 오면 이젠 내가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 엄마를 지켜 주리라고 다짐했다.
“준영 씨, 저녁은 먹었어요?”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누워 있던 나는 벌떡 일어나 박영범을 맞이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장황하게 시선을 굴렸지만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저는 먹었어요. 박 실장님은요?”
“먹고 들어왔습니다. 참, 래현이는 오늘 좀 늦을 겁니다.”
“아, 그래요? 그럼 저는 방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기분도 별론데 우리 술이나 한잔 마실까요?”
“그게….”
“걱정하지 말아요. 래현이 오늘 꽤 늦을 겁니다. 씻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내 걱정을 알아차리고서 박영범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겠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 박영범은 씻으러 들어갔고 나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포도와 복숭아를 꺼냈다. 가위로 포도송이를 잘게 자른 뒤 물에 깨끗하게 씻어 접시에 담고 복숭아를 씻었다.
박래현은 무슨 일로 늦는 걸까? 그는 늘 박영범과 출퇴근을 같이 했다. 박영범이 먼저 들어온 걸 보면 일 때문에 늦는 건 아닐 테고 정치헌을 만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정치헌이 오늘은 대답해 줄까. 주기로 따지면 금요일부터 히트 사이클이 시작되는데 정치헌이 제발 그전에 대답을 해 줬으면 했다.
물론 정치헌이 청혼을 한다고 해서 박래현이 당장에 나를 놔주지는 않을 것이다. 박래현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내게 스폰을 제안했고 국가 지원금을 따내기 위해 몸 로비를 벌인 정치헌은 자기도 잘못한 게 있어 눈감아 줄 확률이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 둘 다 결혼은 왜 하겠다는 건지.
복숭아를 깎는 손끝이 혼란함에 떨렸다. 어느 쪽을 돌아보아도 바깥세상과 안전하게 연결된 문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쟁반에 과일 접시를 얹고 포크를 챙겨 거실로 나갔다. 탱글탱글한 포도알을 몇 개 따 먹고 있는데 박영범이 술과 술잔을 가지고 다가왔다. 그는 호박색 술을 잔 두 개에 따르고서 내게 잔을 건넸다.
“준영 씨, 래현이가 무서워요?”
“네. 그래도 자꾸 보니까 예전처럼 무섭진 않아요.”
“그런데 왜 술 마시자고 하니까 피해요?”
나는 박영범이 술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술 생각이 간절하던 차였다. 그런데 옆에 있지도 않은 박래현을 신경 쓰며 박영범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야 계약서 조항을 지키려고 그런 거죠.”
다른 얘길 하고 싶은데 우리의 공통된 화제가 박래현에 관한 것뿐이었다. 도대체 하루에 몇 시간을 박래현 생각을 하며 보내는지 모르겠다. 이 집에 갇힌 순간부터 내 좁은 세계는 박래현으로 가득 차더니 이젠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관심을 쏟아부을 다른 대상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본가에서 회장님이 호출하셨어요. 래현이는 늦거나 자고 올지도 몰라요.”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는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주말에 상견례 펑크 낸 것 때문에 회장님이 단단히 화가 나셨어요. 그래서 부른 거 같은데 래현이가 자세히 말 안 해 줘서 나도 잘 몰라요.”
짜증 섞인 목소리에 그가 박래현 부모에게 꽤 시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박래현이 말을 안 들으니 회장은 박영범만 들들 볶고 있는 듯했다.
“정치헌 씨도 같이 있겠죠?”
“아, 그건 안 물어봤네요. 준영 씨, 그 두 사람한테 관심 두지 말아요, 준영 씨만 힘들어지니까.”
그렇게 될 줄 알았지만 박래현의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니 구불구불 꼬인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 남자는 늘 박래현 옆에 있으니까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단숨에 잔을 비운 나는 빈 잔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박 실장님. 저는 어떡해야 할까요?”
“뭐, 뭐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는지 그가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 답답해 가슴이 터질 지경이라 나는 박래현 심복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상무님이 정치헌 씨랑 결혼할 거 같은데 우린 관계할 때 피임을 안 해요. 덜컥 애가 생기면 나중에 지우라고 할까 봐 겁나서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박영범은 테이블 아래서 담배를 꺼내 끝에 불을 붙였다. 그의 뺨이 홀쭉해지면서 담배 끝이 주황색으로 발갛게 피어올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먼 곳에 담배 연기를 뿜은 뒤 재떨이에 담뱃재를 툭툭 털었다.
“래현이는 준영 씨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 이유가 뭔데요?”
“나도 이윤 정확하게 몰라요. 다만 준영 씨랑 자고 나서부터 래현이에게 편두통과 불면증이 사라졌어요. 편두통과 불면이 같이 올땐 약도 안 들어서 며칠 일도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거든요. 우리 같이 두통이 없는 사람들은 래현이가 겪는 지옥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래도 준영 씨 페로몬이 래현이랑 잘 맞아서 진정 효과가 있는 거 같아요.”
나는 감기가 올 때 외엔 두통이 거의 없는 편이었고 설령 두통이 찾아와도 조금 지나면 가라 앉는 정도라 박영범 말을 듣고도 그게 박래현이 나를 곁에 둘 이유라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래현이 첫 오메가이기도 하고 준영 씨랑 궁합이 잘 맞아서겠죠. 자력으로 걔 손에서 벗어나긴 힘들 거 같고, 지금처럼 지내면서 준영 씨한테 흥미가 식을 때를 기다리는 게 가장 좋을 겁니다.”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조언이네요. 당장 아이가 생길까 봐 걱정인 사람에게.”
“계약서대로 아이는 낳아야 해요. 래현이가 수준 높은 내니를 구해 잘 키울 테니까 아이는 걱정하지 말아요.”
“전 그게 이해가 안 돼요. 결혼할 사람 두고 왜 다른 사람에게서 아이를 낳게 해요? 너무 기형적이고 미친 짓이라 소름 끼쳐요.”
“나도 래현이 속을 몰라요. 래현인 제정신이 아니라서 정상인 우리가 그 애를 설득할 수 없는 겁니다.”
말을 마친 박영범은 자기도 답답한지 담배만 뻑뻑 피워 댔다. 담배 한 대만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 걸 꾹 참고 나는 술을 마셨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박영범도 답을 모른다고 하니 속이 꽉 막혔다.
“정치헌 씨라면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의 아이를 키우고 싶진 않을 거 아니에요.”
“치헌이는 지금 래현이가 절실해요. 형과 누나를 제치고 서울과 인천에 있는 병원을 물려받는 조건이, 래현이랑 결혼하는 거라고 들었어요. 결국 래현이가 하자는 대로 할 겁니다.”
“아, 네… 둘이 천생연분이네요. 저라면 병원 안 물려받고 말겠어요.”
“치헌이네 병원 1년 매출이 얼만 줄 알면 그런 소리 안 나올걸요? 조 단위가 넘어요.”
“그렇게 돈이 많으면 더 결혼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가진 사람들은 손에 아무리 많이 쥐고 있어도 더 갖고 싶어해요. 이번에 중국 쪽으로 진출할 계획인가 본데 래현이가 현금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어요. 남아도는 자금을 좀 끌어 쓰고 싶은 거겠죠. 중국 시장에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으니 우리 측에도 나쁜 조건은 아니고.”
박영범이 두 번째 따라 준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 두 사람이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나는 결말이 정해진 이 연극에서 어서 빠지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다. 하지만 유모까지 구했다는 걸 보니 박래현은 끝까지 가 볼 생각인 듯했다. 아이를 낳기 전엔 계약을 끝낼 수 없다던 박래현 말이 떠올랐다. 박래현과 정치헌 관계가 어떻게 흘러가든 아이를 낳아야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미 돈을 받은 나는 계약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막연하기만 하던 아이의 미래가 구체적으로 그려지자 차라리 동요가 가라앉았다. 박래현이 알아서 잘 키울 거라고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돌렸다.
“전에 상무님 본가에 갔을 때, 상무님이 병원에서 절 처음 보셨다고 했잖아요. 그 말 사실입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요.”
“제 뒷조사는 박 실장님이 직접 하셨어요, 아니면 다른 사람 시켜서 하셨어요?”
“그건 왜 물어보는 겁니까?”
“좀 잘못된 정보를 알고 계신 거 같아서요.”
“예를 들면?”
담배를 비벼 끈 박영범이 흥미를 보이며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박래현 귀에 들어가면 그가 화를 낼지도 몰라서 망설이는 내게 박영범이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상무님은 제가 남창이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저는 몸을 판 적도 없고 문란하게 생활한 적도 없는데 그렇더라고요.”
“음….”
박영범은 입을 열려다가 현관문 여닫는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그가 당황한 것처럼 보여서 더 캐묻고 싶었지만 큰 걸음으로 다가온 박래현이 나와 박영범과 술을 번갈아 보는 바람에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둘이 무슨 말을 쑥덕이다 나 들어오니까 멈췄지? 내가 들어선 안 될 대화였어?”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몰래 숨을 들이쉬었다.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은 박래현이 내가 마시던 술잔에 와인을 따라 한입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준영 씨가 너 어디 갔냐고 물어서 본가 들어갔다고 얘기하는 중이었어. 그런데 벌써 얘기 끝났어?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어?”
“내 오메가가 여기 있는데 내가 왜 거기에 오래 있겠어.”
“회장님이 뭐라고 하셔?”
“그 사람들 하는 말이 늘 똑같지 뭐. 애 생기기 전에 윤준영이랑 헤어져라, 정치헌이랑 프로젝트 공동으로 추진해라, 결혼 날짜는 알아서 잡겠다, 뭐 이따위 영양가 없는 말들.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을 보였다고….”
심드렁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박래현은 넥타이를 풀고 재킷을 벗어 소파위에 내려놓고 손을 뻗어 가볍게 내 목을 쥐었다.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상체가 기울었다. 머리칼과 뺨, 입술에 차례로 입 맞춘 박래현이 내 볼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내 페로몬에 두통이 가라앉는단 말을 듣고 보니 나를 극도로 싫어했던 박래현이 거리낌 없이 나를 만지고 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래도 회장님 비위 좀 맞춰 드려. 재산은 물려받아야 할 거 아냐.”
“물려주기 전에 다 뺏으면 돼. 덩치만 컸지 실속이라곤 없는 회사 일으켜 세운 게 누군데. 릴리프랑 누시티 없었으면 이 유령 같은 회사, 기사회생 가능했을 거 같아? 이미 채권단에 넘어가 헐값에 팔렸겠지.”
“뭐, 맞는 말이다만, 그래서 너는 뭐라고 대답했냐? 나도 네 속 좀 알자.”
“곧 알게 될 거야.”
어떤 대답이 나올지 귀를 쫑긋 기울였다가 실망한 내게 박래현은 아까보다 더 길게 입 맞춘 뒤 귓가로 입술을 움직였다.
“윤준영 씨, 고민은 좀 해 봤어요?”
“네.”
“결론은?”
따스하고 습한 숨결에 귀에 난 작은 솜털들이 우수수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틀어 박래현 입술을 피하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안 되겠어요. 아이는 계약대로 낳겠습니다. 하지만 주인님 전용 남창이 되는 건 사양하겠습니다.”
“대체 왜 싫다는 거지? 당신은 전혀 손해 볼 게 없을 텐데 계산이 안 돼요?”
“이미 받은 돈이면 충분합니다. 전 계약을 이행하고 이 집을 나갈 겁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생각 바꿔요.”
남자의 목소리는 비탈길을 굴러가는 유리병처럼 아슬아슬했고 낯빛은 차갑게 굳어 갔다. 최근 들어 제법 부드럽게 나를 대했던지라 냉혹한 얼굴이 한층 무섭게 느껴졌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기혼자의 정부가 되는 건 사양이어서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싫습니다.”
“나한테 박히면서 워낙 좋아하길래, 난 당신도 내 제안을 환영할 줄 알았지.”
“전 오메가라서 알파 좆이면 다 좋아서 헐떡거립니다.”
“아, 잠깐 잊고 있었네, 윤준영이 구멍 아무한테나 벌려 주는 거. 뭐 싫다면 그렇게 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씻고 내려올 테니까 들어가 준비하고 있어요.”
내 목을 놓아준 남자는 재킷과 넥타이를 챙겨 2층으로 올라갔다. 의외로 쉽게 남자에게서 풀려나자 의혹과 안심이 같은 크기로 증폭했다. 내가 아는 박래현은 내 의사를 존중해서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욕실로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듬뿍 짜서 이를 닦았다. 샤워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를 닦고 세수로 준비를 마친 나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불안함 때문에 방 안을 서성였다. 박래현이 어떻게 나올지 가늠할 수 없어서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가 올 시간이 된 것 같아서 나는 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몇 번이나 발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나는 오랫동안 환청에 시달리다가 지쳐 잠들어 버렸다.
불을 켜 놓고 잠든 탓에 눈을 떴을 때 주변은 환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도로 침대에 누웠다. 박래현은 어젯밤 이 방에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내 결정에 화가 난 걸까? 박래현에겐 똑같이 돈에 몸을 판 것으로 보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몸을 판 것과 자발적으로 몸을 판 것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내 자존심을 박살 내면서까지 나를 극한으로 몰아가고 싶진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고자 테이블 서랍에서 박래현 시계를 꺼냈다. 문득 박래현과 박수현 관계가 궁금해졌다. 어제 들은 바로는 두 사람은 친형제가 아니라 이부 형제였다. 계부는 자기 아들 박수현에게 더 많은 재산을 넘겨주기 위해 박래현에게 못된 행동을 일삼았던 듯했다. 회장이 회사 일로 바빠 자식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박수현이 박래현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다정하게 사진을 찍고 시집과 시계를 선물하며 형에게 낙타가 돼주겠다는 데서 두 사람 사이의 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타인에게 무심한 박래현이 의지했던 낙타였으니 박래현은 동생에게 각별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출근했을 시간이어서 나는 임신 테스트기를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몇 번 해 봐서 익숙하게 테스트기에 소변을 묻히고 이를 닦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박래현은 곧 다른 오메가와 결혼할 텐데 욕실에서 혼자 음성 반응이 나오길 고대하며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하고 있는 내가 가여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박래현을 누구에게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날을 세우고 서로에게 증오만 쌓여 가더라도 박래현이 내가 아닌 다른 오메가에게 눈을 돌리는 건 끔찍하게 싫었다.
대체 이런 쓸모없는 자각은 왜 생겨나는 걸까? 박래현과 있는 한 비이성적인 집착이 더 깊어지면 깊어졌지 희석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벽 깊숙한 곳에 뿌려진 더러운 본능이 안을 파먹고 조금씩 위로 올라와 뇌까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 괴물들이 몸을 점령해서 영혼을 말살할 것이다.
***
두 사람은 오늘 늦게 출근했다. 박영범은 나가면서 중요한 미팅이 있어 둘 다 늦게 귀가할 예정이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는 말을 전했다. 박래현은 집에서 나갈 때까지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사흘째 새벽에 들어왔고 나와 마주쳐도 말을 걸지 않았으며 스킨십도 일절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담배를 피울 때 이따금 찾는 산수유나무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받았다.
박래현이 내게서 관심을 거둬들인 게 확실했다. 입 안의 혀처럼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그에게 내 저항은 짜증을 유발했을 테고, 쉽게 버릴 패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두통이야 평소 해 왔던 대로 약을 먹어 처리하면 될 테고, 어쩌면 그사이에 정치헌과 모종의 합의가 오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심란해진 나는 텃밭에 가서 상추와 오이에 물을 주고 나무 그늘에서 햇볕을 쬐었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박래현 때문에 서러워졌다. 여기 오래 있다가는 치유 불가능한 내상을 입을 게 분명하다. 계약서에 명시한 대로 아이를 낳아야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잔 대가리 그만 굴리고 정공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정우가 보낸 문자는 오후 늦은 시간에 확인했다. 엄마 소식은 뒷전으로 미루고 그는 며칠째 내 알파가 너무 위험해 보인다며 절대 각인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문자를 보냈다. 각인이 내 의지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히트 사이클이 끝난 뒤 어떻게 될지 두려웠다. 이미 박래현에게 각인한 건 아니겠지? 각인하려면 상대에게 마음을 열어야 하는데 나는 박래현에게 마음을 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요즘 내게 일어난 육체적, 심리적 변화로 봐서 의심할 만한 근거는 있었다.
내가 박래현에게 각인했는지 확인해 보려면 다른 알파의 페로몬이 필요한데 박영범이 피실험자가 되어 줄 것 같진 않았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러닝 머신 위에서 느린 속도로 달리다가 현기증이 생겨 기계에서 내려왔다. 40분을 뛰어도 거뜬한 체력인데 오늘따라 몸이 무거웠다. 사지가 축축 늘어지고 무기력했으며 미지근한 물속에 잠긴 것처럼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흐렸다. 감기가 찾아오려고 이러나? 여름 감기는 걸려 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체력 단련실을 나와서 계단 난간을 붙잡고 겨우 내려와 비척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찬물에 샤워하면 괜찮아질까 싶어서 샤워 부스에 들어가 찬물을 열심히 뒤집어썼다. 샤워를 마쳤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옷만 겨우 걸쳐 입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호흡을 정리했다. 방 온도는 서늘한데 급속도로 열이 오르고 옷이 땀에 젖어 갔다. 날카롭고 뜨거운 열기가 배 속 깊은 곳에서 확연히 끓어올랐다. 혹시 히트 사이클의 전조 현상인 걸까?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두려움으로 몸이 달달 떨렸다. 내 몸에서 레몬 향이 나는 것 같아 코를 킁킁거렸다. 연하던 냄새가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구멍 주변으로 애벌레가 느릿느릿 기어 다니고 혈관이 팽창해 금방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장 박동이 한계치까지 올라가 맹렬하게 쿵쿵거렸고 머릿속은 박래현 좆으로 가득 찼다. 벌름벌름 떨리는 구멍에 굵은 살 기둥이 파고드는 상상을 하며 나는 엉덩이를 시트에 비볐다. 박래현이 어서 나타나 구멍이 다 헤지도록 박아 줘서 나를 괴롭히는 이 감각을 없애 줬으면 좋겠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린 채 열심히 딴생각을 시도했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박래현이 내 엉덩이를 벌리고 좆을 쑤셔 대는 상상을 했다. 존나 거지 같은 상황이었다.
매번 억제제를 사용해 발정기를 넘겼던 나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시트를 바투 움켜쥐고서 몸 밖으로 넘쳐흐르는 성욕을 억눌렀다. 그래도 불길을 잡을 수 없어 허벅지를 세게 꼬집고 뺨을 대차게 때렸다. 폭력마저 쾌락이 되어 박래현 향이 못 견디게 맡고 싶었다. 호흡을 고르며 허벅지를 한껏 오므려 봐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까지 내리고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발기한 좆 기둥을 힘껏 감아쥐었다. 팔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기둥을 흔들고 귀두를 문지르고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지만 어디에도 나를 희락으로 몰고 갔던 쾌감은 없었다. 나는 좆이 아니라 뒤로 더 느끼는 오메가였다. 미친 듯이 좆을 흔들던 손을 뒤로 옮겨 이번엔 구멍을 문질렀다. 손가락으로 신축성이 뛰어난 얇은 주름을 뚫고 안을 파헤쳐봐도 박래현 좆이 비벼 대던 곳에 닿기엔 한참 부족했다.
“으, 으응….”
몸은 걷잡을 수 없이 열이 나는데 내 힘으론 신열을 내릴 수 없었다.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눈가로 열이 몰려 시야가 흐려졌다. 살갗이 뜨거워지면서 수없이 많은 가시가 몸 안팎을 쿡쿡 찔렀다. 귓구멍 안과 눈, 심장과 발가락 끝을 가리지 않고 찔러 대는 통에 나는 울면서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귀가 먹먹해지면서 식은땀이 났고 시야에 비치는 사물이 전부 휘어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더 깊은 곳을 쑤셔 줄, 내 손가락 따위완 비교할 수 없는 굵고 긴 물건이 필요했다.
와인 냉장고를 기억해 낸 나는 옷을 추스르고 주방 뒤쪽에 있는 창고로 달려갔다. 여러 개의 와인 중에 박래현 좆과 크기가 비슷한 와인 병을 골라내서 서늘한 병 주둥이를 쥐고 쏜살같이 방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정 차장 부부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은데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소파에 자리 잡은 나는 몇 번 헛손질을 한 뒤 바지와 속옷을 벗어 허벅지를 드러낸 채 엉덩이를 치켜든 상태에서 병 끝을 주름에 비볐다. 차갑고 싸늘한 감촉이 박래현 얼굴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준영 씨, 술 마실 거면 여기 안주와 잔을… 으앗, 준영 씨, 위험해요, 이러지 말아요!”
언제 들어왔는지 이 차장이 내 손에서 와인 병을 뺏아갔다. 극심한 절망감에 휩싸여 나는 거추장스러운 팬츠를 벗어 던지고 드로어즈만 겨우 챙겨 입고서 이 차장을 쫓아갔다. 구멍이 화끈거리고 아랫배가 열로 웅성거리는데 이 열을 식히려면 알파 자지 비슷한 게 필요했다. 와인 셀러 앞에 서 있는 이 차장을 발견하고서 나는 그에게 달려들어 와인병을 움켜쥐었다.
“준영 씨, 정신 차려요! 상무님께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
병을 뺏는데 열중한 나머지 이 차장 말은 들리지 않았다. 병을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서 격렬한 몸싸움이 계속되었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나는 젊고 힘이 센 데다 정상이 아닌 상태여서 엎치락뒤치락 끝에 술병을 빼앗았다.
“하아, 준영 씨, 그러다, 병 깨지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아, 제발! 제발요! 저 지금 괴로우니까, 따라오지 마세요. 네?”
정 차장까지 합세해서 두 사람이 내게서 병을 뺏으려 했다. 열이 올라 혼미해진 머릿속에선 병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준영 씨, 상무님 불렀으니까 조금만 참아요. 안 그러면 경비원들 부를 수밖에 없어요.”
토끼몰이하듯 몰아가며 이 차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구슬렸다. 물론 불붙은 욕구를 억누르기엔 동기가 부족했다.
“알았어요. 드릴게요.”
나는 이 차장에게 병을 줄 것처럼 다가갔다가 두 사람을 제치고 침실로 달음박질한 뒤 이 차장 눈앞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테라스 창문까지 단속한 나는 숨을 몰아쉬며 소파 위로 올라가 드로어즈를 벗었다. 눈가에 이유 모를 눈물이 맺혀 훌쩍거리며 엉덩이 사이에 병을 넣고 비볐다. 벌어지지 않은 주름을 억지로 열고 끝을 조금씩 밀어 넣었다. 박래현 좆밖에 모르는 내벽은 주인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살아 있는 좆은 핏대가 꿈틀거리며 알아서 내장을 자극하는데 유리로 된 병은 그저 밋밋하게 속살을 누를 뿐이었다. 그래도 닿지 않는 손가락보다는 훨씬 나았다.
“흐으윽, 하, 하아, 씨발, 아아!”
콧등을 타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가죽 시트에 문지르며 병을 안으로 욱여넣었다. 차라리 기절했다가 히트 사이클이 끝난 날 눈을 떴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부지런히 병을 좌우로 흔들었다. 박래현과 섹스하고 싶다고 몸은 울부짖는데 나와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 임신은 두려웠다. 한 움큼의 빛도 보이지 않는 회색 안개 어디쯤 나를 집어삼킬 푹 꺼진 블랙홀이 존재할 것만 같았다.
“윤준영, 이 발칙한 행동은 대체 뭐지? 당신 돌았어요?”
내 귀에 환청이 들렸다. 병이 박래현 성기라 생각하며 쑤시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손목을 잡아 움직일 수 없게 뒤로 꺾는 악력은 절대 환상이 아니었다. 가죽에 구겨 넣은 얼굴을 들어서 소파에 걸터앉아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무감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박래현을 발견한 순간 가슴이 빠른 속도로 뛰며 기쁨이 밀려왔다. 내 알파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고통이 사라지고 주린 배가 채워진 느낌이었다.
“내 자지가 필요해요?”
“…….”
“대답 안 해요? 나는 일 보러 갈 테니 당신은 계속 가짜 좆으로 자위해요.”
“…가, 가지 마세요.”
잠깐의 망설임 뒤에 병을 잡은 내 손에 박래현 손이 겹쳐지더니 뽁 소리를 내며 구멍에서 병이 뽑혀 나갔다. 박래현이 병을 바닥에 내려놓는 잠깐도 참지 못하고 네발로 기어가 목을 끌어안고 덮치듯 그를 소파 등받이에 밀어 눕혔다. 정장을 차려 입은 하반신에 올라타서 팔 사이에 박래현 얼굴을 가두고 무작정 입부터 맞췄다. 관능적이고 푹신한 입술을 벌려 혀를 밀어 넣은 뒤 그의 혓바닥에 거칠게 비벼 댔다. 뭘 하다가 달려왔는지 혀에서 달콤한 꿀맛이 났다.
내 알파와 몸을 섞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끈적끈적한 점성이 생길 때까지 숨도 쉬지 않고 남자의 혀를 비비고 빨았다. 맥없이 키스를 받아 주던 남자가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얼굴을 틀었지만 입술을 떼기 싫어 그의 윗입술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박래현이 나를 버리고 이 방에서 나가 버릴까 봐 겁났다. 박래현은 내가 매달리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내 얼굴을 붙잡아 떼어 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빠르게 눈을 깜박거리자 얼굴 윤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애타게 날 찾을 거면서 왜 내 제안은 안 받아들이는 겁니까?”
박래현은 넥타이 대신 맨 스카프를 풀어서 내 얼굴의 얼룩을 닦아 주었다. 박래현 손목을 두 손으로 붙잡고 나는 치자꽃 향이 미미하게 피어오르는 손등에 볼을 비볐다. 그의 페로몬에 들떴던 마음은 가라앉았는데 이상하게 몸은 더 뜨거워졌다. 더운 열기에 차라리 이성이 녹아내렸으면 좋으련만 머리가 맑아져서 되레 본능과 이성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생겼다. 당장이라도 박래현 성기를 꺼내 구멍에 박고 싶은 걸 참으며 박래현에게 눈을 맞췄다.
“히트 사이클입니까? 향기가 너무 짙어서 어지럽네.”
“주인님.”
“왜요.”
“나중에 아이 지우라고 할 거면, 피임해 주세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날카로운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박래현에게 확답을 받고 싶었다. 박래현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몇 번 말해요. 계약을 장난으로 한 줄 알아요?”
“전, 임신이 두려워요. 아이를 낳는 것도 무섭고, 주인님이 마음을 바꿔 아이를 지우라고 할까 봐 그것도 겁나고, 다 무서워요. 지금 저 놔주시면 안 돼요? 제발요!”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처럼 눈앞에 벽이 나타나자 나는 녹슨 창검이라도 꺼내 달려들었다.
“지금 놔주면 페로몬을 질질 흘리면서 다른 알파 새끼 자지를 물겠다는 겁니까? 이대로 집 나가면 아주 볼만 하겠네.”
“하, 제발….”
“내 아이를 왜 지워요? 절대 나처럼은 안 키울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스카프를 소파 구석에 버린 박래현이 손바닥으로 내 허벅지를 쓸어올렸다. 바깥쪽 허벅지를 만지던 손이 안쪽 허벅지를 지나 성기를 주물렀다. 그의 손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극도로 예민해진 몸에 오싹오싹 소름이 올라왔다. 마지막엔 박래현 손에 한 줌밖에 안 되는 내 엉덩이가 꽉 잡혔다.
연유를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결혼과 상관없이 내가 낳은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선택지는 이번 히트 사이클에 임신해서 빨리 계약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 집에서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게 내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란 생각에 심장이 수저에 눌린 두부처럼 납작하게 으깨어졌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웃음을 지었다. 오늘 생길지도 모를 아이를 위해 나는 기쁘게 이 알파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당신, 오늘 왜 이렇게 반짝거리지? 손에 빛이 묻어날 것 같아요.”
나를 보는 박래현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내 볼을 꼬집어 아프게 잡아당긴 박래현이 자신의 손가락을 눈앞으로 가져가 확인했다. 정우가 이런 말을 했으면 닭살 돋는다며 주둥이를 한 대 쳤을 테지만 박래현 입에서 나온 말은 기분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마음에 들면, 얼른 박아 줘요.”
박래현은 나더러 빛난다고 하지만 내 눈엔 박래현이 더 아름다웠다. 첫 발정기를 함께 보내는 이 알파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불안을 벗어 던진 나는 헤벌어진 밑을 박래현 좆에 문지르며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까슬까슬한 재질의 팬츠를 사이에 두고 곧추선 성기가 엉덩이골에 빈틈없이 맞물리자 숨을 들이켜며 만족스러운 부피감을 음미했다.
“밤은 긴데 왜 이렇게 보채요? 좀 비싸고 도도하게 굴 순 없나?”
“…….”
“하긴 참을 수 있었으면 추잡하게 와인 병으로 뒤를 쑤시고 있진 않았겠지. 술병 안 뺏기려고 아래 다 벗고 돌아다녔어요? 이 차장님과 몸싸움했다며.”
“아니요. 으, 응… 문 걸어 잠그고, 벗었어요.”
“그건 잘했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백자지 덜렁거리고 다녔다간,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박래현이 셔츠 자락을 잡아당기자 나는 그가 옷을 벗기기 쉽게 손을 들어 올렸다. 셔츠는 쉽게 벗겨져 내 옆으로 툭 떨어졌고 삽시간에 나는 알몸이 되었다. 옆구리를 잡아 나를 눕힌 박래현이 내 어깨 위의 소파를 팔꿈치로 짚고 상반신을 겹쳐 왔다.
“오늘 늦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빨리 들어오셨어요?”
도도하게 굴라는 말에 우글우글 끓어오르는 성욕을 삭히느라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마음과 달리 묵직한 하체에 눌린 좆에서는 쿠퍼 액이 질금질금 새고 있었다.
“내 개가 발정 나서 미쳤다는데 일이 손에 잡히겠습니까? 어서 박아 달라고 구멍 벌름거리면서, 주인만 기다리고 있었을 거 아냐.”
“으으응, 흐, 알았으면 얼른….”
“그만하라고 빌 때까지 계속 박고 싸 줄 겁니다. 당신 목구멍까지 내 정액으로 가득 채워 줄 테니까 기다려요.”
박래현 뒤통수를 내리눌러 다가온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말랑거리는 입술을 비집고 들어가 넓고 깊은 입 안을 샅샅이 훑었다. 감촉이 너무 좋아서 날렵한 혀끝을 내 혀로 휘어감아 성기를 빨 듯 혀를 통째로 입에 넣고 빨았다. 날것의 살덩이 두 개가 서로를 갈구하며 원초적으로 엉켜서 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처음부터 끈끈하게 변해 버린 키스에 벌써 오르가슴에 이른 것처럼 숨이 가빠졌다. 나는 두 손으로 박래현의 머리칼을 감아쥔 채 혓바닥 아래 움푹 팬 곳에 고인 침을 맛있게 파먹었다. 내게 침을 흘려 넣으며 박래현은 목구멍 깊숙이 혀를 넣어 예민하고 말랑말랑한 점막을 휘저었다. 찌릿찌릿한 자극에 성기가 바짝 일어나 박래현의 복부를 압박했다.
키스를 더 하고 싶은데 뒤엉켰던 혀가 쑥 빠져나가더니 목덜미로 입술이 내려갔다. 맥이 뛰고 있는 곳을 박래현이 이로 잘근잘근 짓씹어서 따끔한 통증이 지나갔다. 그는 깨문 곳을 혀끝으로 쓸다가 입 속으로 살덩이를 쭉 빨아들였다. 쾌감과 고통에 못 이겨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침대 두고 왜 소파에서 이러고 있어요?”
“으, 으으응… 시트 젖을까 봐….”
박래현과 섹스할 때는 상관없지만 나 혼자 자위하면서까지 침대 시트를 버릴 순 없었다. 이미 정 차장 부부에게 우스운 꼴을 보여 버렸지만 말이다.
“윤준영 씨, 당신한테서 나는 향기는 정말 좋아요. 맡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
내 몸이 흐물거려서인지 박래현 목소리가 귓가에 우렁우렁 울렸다. 남자는 내 페로몬을 음미하듯 깨물던 살에 코를 비비며 깊이 숨을 들이켜고서 그대로 얼굴을 내려 젖꼭지에 입술을 문질렀다. 그는 관능적인 혀로 젖꼭지와 유륜을 할짝할짝 어루만지더니 이내 우뚝하게 선 젖꼭지를 색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줄기차게 빨아 당겼다. 생소한 자극에 허리가 뒤틀리고 요의가 느껴져 남자의 양 옆구리에 놓여 있던 허벅지를 바싹 오므렸다. 젖꼭지를 입 속으로 가득 집어삼키면서 박래현은 무릎으로 내 좆을 비벼 눌렀다. 단단한 뼈와 깔깔한 천에 문질러진 좆에서 좆 물이 흘러나와 박래현 바지를 적셨다. 눈앞에서 펑펑 커다란 불꽃이 터지더니 짙디짙은 레몬 향을 풍기며 애액이 쏟아져 나왔다. 물에 젖어 든 안은 자지가 고파서 혼자서 꿈틀꿈틀 요동을 했다.
“당신은 왜 젖꼭지도 귀엽지?”
남자는 빨던 쪽을 놓아주고 반대쪽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그가 빨아 댄 젖꼭지가 화끈거려서 만져 보니 약간 부어 있었다. 풍성하고 결 좋은 머리칼을 손끝에 휘감으며 나는 허리를 움직여 남자의 무릎뼈에 좆을 치댔다. 남자의 본능이 살아 있어서 좆을 자극받으면 성감이 고조되었다. 내 움직임에 멋대로 흐트러진 박래현 머리카락이 턱과 가슴을 간질였다.
“애 낳으면, 이 납작한 가슴에서 젖도 나옵니까?”
허튼소리 그만하라고 쏘아붙이려 했지만 입술에서는 신음만 비져 나왔다. 배꼽으로 옮겨 간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가 불두덩을 짓눌렀다. 화들짝 놀라 도망가려는데 박래현이 무릎 안쪽을 잡아서 내 몸을 고정하고 사타구니에 얼굴을 묻었다. 당황해서 나는 허리를 거세게 흔들어 남자에게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흐, 흐으응… 하, 하지 마세요!”
“젖꼭지처럼 자지도 분홍색으로 예쁘네.”
기둥을 잡고 흔들면서 박래현은 불알 한쪽을 입에 넣고 알사탕처럼 쪽쪽 빨았다. 기묘하고 선득한 감각에 몸부림치면서 나는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해 박래현을 내려다보았다. 활짝 벌어진 가랑이 사이에서 갈색 머리통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박래현이 좆을 물고 있는 모습에 사타구니에 불이 난 것처럼 온몸이 파드득 떨렸다. 거만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 손짓 하나로 펠라티오를 받는 것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내 좆을 빠는 모습을 보며 기묘한 정복감에 휩싸여서 나는 허벅지가 떨리지 않게끔 두 다리에 불끈 힘을 주었다. 불알과 기둥을 한참 빨던 박래현이 나를 일으켜 등받이에 기대게 하고 아예 소파 밑으로 내려갔다. 내 발목을 잡아 다리를 넓게 벌린 그가 가슴에 허벅지가 닿을 때까지 다리를 접어 올렸다.
“구멍 잘 벌어지게 다리 잡고, 활짝 벌리고 있어요.”
“왜요? 얼른 박아 주고 끝내면 안 돼요?”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하지? 얌전히 기다려요. 내가 기분 좋게 해 줄 테니까.”
남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흐트러진 정신을 한데 모으려고 애썼다. 내 팔을 잡아서 들어 올린 다리 사이에 단단히 끼운 박래현이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대고 살점을 물어뜯을 기세로 깨물었다.
“흐, 흐윽! 아파요, 흐, 으으응….”
엉덩이를 틀어쥔 묵직한 손이 구멍을 양쪽으로 잡아 열었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구멍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남자가 보여 얼굴로 피가 몰렸다. 남자의 시선을 받기 전부터 혼자 우물거리던 곳이 부끄러워 나는 힘을 주어 입구를 오므렸다. 예민한 주름 위를 축축한 뭔가가 느릿느릿 지나갔다. 엉덩이의 갈라진 골부터 시작해 주름을 지나 회음까지, 더운 살덩어리가 건드린 곳마다 이슬비가 내린 흔적이 남았다.
주름에 빈틈없이 밀착한 살덩이는 굳게 다물린 주름을 맛보며 굼뜨게 움직였다. 텅 빈 머릿속으로 빗물이 고인 상추 위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던 달팽이가 생각났다. 쾌락에 잠식된 머리는 한참 후에야 그 축축한 것의 정체를 인식했다. 혼비백산이 되어서 들고 있던 다리를 내려 박래현의 어깨를 발꿈치로 퍽퍽 걷어찼다. 몸부림치는 허벅지를 잡아 꽉 누르고서 박래현은 엉덩이골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주름 안으로 혀를 삽입했다. 점막을 뚫고 들어온 뭉클한 살덩어리가 주름 주위에 분포한 민감한 지점에서 자맥질을 시작하자 나는 진저리 치며 남자의 가슴팍을 발바닥으로 밀어냈다.
“으, 으으읏, 하, 하읏… 그, 그만!”
가슬가슬한 혓바닥에 연약한 속살이 문질러진 순간, 안에서 뭔가가 팍 터지는 느낌이 들면서 페로몬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짙은 레몬 향이 흐드러지게 번져 나갔다. 몸이 소파 밑으로 가라앉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두 다리로 박래현의 목을 감아 파들파들 경련하는 허벅지를 꽉 오므렸다.
“아, 하윽! 흐, 으으으응….”
뜨겁고 끈적끈적한 액이 갈라진 골짜기로 줄줄 흘러내렸다. 붙어 있던 내벽이 벌어지며 혀가 더 깊이 삽입되었고 혀가 들어오는 길을 따라 벌어진 살이 도로 혓바닥에 철썩 달라붙었다. 비단뱀처럼 스르륵 안으로 들어온 혀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맛보겠다는 듯 내벽을 들쑤셨다.
박래현의 높다란 코에 불알이 뭉개지고 도톰한 입술에 주름이 다 덮인 채 그가 치대는 대로 몸이 흔들렸다.
“거, 거기, 그만 빨아요! 주인님, 아으윽!”
절실한 외침에도 개의치 않고 독기를 품은 혀가 내 안을 휘젓고 있지만 나는 그저 허벅지를 오므리며 신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단단한 자지와는 다른 부드러운 살덩이가 주름 바로 안쪽 속살들을 짓눌러서 구멍에 힘이 풀렸다. 삽입이 깊어지면서 부끄러움마저 본능에 자리를 내줘서 나는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싼 채 허리를 위아래로 흔들어 얼굴에 은밀한 곳을 비볐다. 접촉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쾌감 또한 수직으로 상승해 곤두선 내 성기에서 뽀얀 물이 굴러 떨어졌다. 잔뜩 조인 허벅지 사이에서 박래현의 이마와 치켜뜬 눈썹이 보일락 말락 움직여 더 안달이 났다.
“하아, 더, 더 쑤셔 주세요! 으읏… 흐, 흐읏, 아, 아읏!”
주름을 문지르던 손가락 몇 개가 질척한 안을 쑤시고 들어와 열점을 파헤쳤다. 결국 한계점에 이른 나는 히트 사이클의 영향인지 평소보다 빨리 사정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박래현은 구멍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온통 젖어서 번들거렸고 앞 머리칼과 기다란 속눈썹이 애액에 젖어서 짙은 색을 띠었다. 내가 싼 체액으로 뒤덮인 박래현에게서 짙은 레몬 향이 났다. 방금 사정했음에도 내 향을 묻히고 있는 야한 모습에 아래로 피가 몰렸다.
“윤준영, 안이고 밖이고 다 젖어서, 아주 볼만하네.”
어깨를 잡아 소파 팔걸이 쪽에 나를 눕힌 박래현이 무릎을 양손으로 눌러 벌린 뒤 젖꼭지를 빨았다. 유두와 유륜이 동시에 시원하게 뻗은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엉덩이 아래 깔린 셔츠를 집어 젖어 버린 얼굴과 머리칼을 닦아 주면서 남자의 얼굴을 감상했다. 촘촘한 속눈썹과 가파르게 솟은 콧날을 사선으로 내려다보며 이 남자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갈망과 결핍을 느꼈다. 내가 처음이고 아직은 나만 아는 알파지만 이제 곧 다른 오메가에게 떠나보내야 한다.
젖꼭지를 빨던 남자가 갑자기 내 목을 움켜쥐더니 경동맥을 따라 천천히 엄지를 움직였다. 당장 숨통을 끊어 놓을 것처럼 힘을 준 손이 목을 쓸고 올라가 뒷덜미를 눌러서 앞으로 당겼다. 입을 맞출 듯 삽시간에 다가온 얼굴은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욕망에 굶주린 갈색 눈동자가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난폭하게 번쩍였다. 나는 기다리지 않고 거리를 좁혀 높이 솟은 콧대에 입을 맞췄다. 박래현이 입을 벌린 채로 내 입술을 기다렸지만 짓궂게 그의 코만 물고 늘어졌다.
박래현은 안 되겠는지 고개를 뒤로 꺾어 내 입술을 빨았다. 내리뜬 눈에 깨끗하게 그어진 턱선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혀가 질척하게 섞이는 동안 구멍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와 안을 한바탕 헤집어 놓고 빠져나갔다. 안은 미끌미끌한 액에 젖어 있어서 혓바닥이든 손가락이든 참 쉽게 드나들었다. 입술을 붙인 채로 박래현은 나를 번쩍 안아서 침대에 내려놓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섹스를 시작하겠다는 선포 같아서 기대감이 폭발한 나는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서 나를 타고 오르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제외하면 남자는 출근할 때 모습 그대로였다. 야만적이고 상스러운 본성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감추고서 박래현은 오만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발정기의 오메가들을 물리친 알파답게 그는 요동하는 내 페로몬에도 흥분한 기색이 없었다. 나만 혼자 열이 올라 눈가며 입술이 뜨거웠다. 살갗은 예민해져서 남자가 눈길만 줘도 따끔따끔 아팠고 내벽은 두껍게 부풀어 올라 어서 남자의 좆을 먹고 싶다고 아우성이었다. 처음 섹스한 이래로 무수히 몸을 섞어 왔지만, 히트 사이클을 맞아 바라본 알파는 퍽 생경했다. 원래 하나였다가 쪼개진 조각처럼 맞물리는 부분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남자는 내가 안달 난 모습을 즐기면서 느릿느릿 손목시계를 풀고 소매 단추를 열었다. 본능에 휩쓸리는 내가 더 천박하게 느껴져 박래현 몰래 엉덩이를 세게 쥐어뜯었다. 의도와 달리 통증마저 뭉근한 쾌락으로 변해 몸이 들썩거렸다. 박래현이 다음으로 손을 옮긴 곳은 내가 쏟은 체액으로 얼룩진 드레스 셔츠의 단추였다. 나는 박래현 밑에서 기어 나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박래현이 고귀함과 금욕을 다 벗어 던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다림질이 잘된 바지 훅을 열었다. 지퍼와 바지를 내리고 쿠퍼액에 젖어서 불룩 솟아 있는 청색 드로어즈에 입술과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자기도 흥분했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한 번의 사정으로 다소 진정되었던 욕정이 드로어즈에서 풍기는 짙은 알파 냄새에 급속도로 불어났다. 위로 한껏 치솟은 성기에 기뻐면서 나는 드로어즈 가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기둥을 쓸고 귀두를 찾아서 엄지로 문질렀다. 낮게 퍼지는 신음을 들으며 덩어리진 살과 드로어즈를 같이 입에 물고서 성기를 빨았다. 이내 박래현 특유의 향긋하면서도 비릿한 체액 냄새가 코 밑으로 확 끼쳐 들어왔다.
알파 자지 냄새에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허벅지를 타고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얼른 자지를 빨고 싶어서 드로어즈 밴드를 잡아 거칠게 아래로 내렸더니 핏대가 우락부락하게 올라온 굵은 자지가 목하 모습을 드러냈다. 끈적한 액으로 뒤덮인 짙붉은 귀두를 보자마자 기둥을 잡고 끝을 집어삼켰다. 박래현에게 얼굴을 붙잡혀 성기를 빨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을 줘 가며 허리를 움직여 몇 번 왕복 운동을 하던 박래현이 입에서 성기를 꺼내고 그 자리에 혀를 집어넣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한 뒤 다리 사이를 벌렸다. 이어서 손바닥으로 주름을 몇 번 문지르다가 엉덩이 사이의 골짜기에 좆을 밀어 넣었다. 녹진해진 안을 빈틈없이 채우며 들어온 좆은 처음부터 굵고 딴딴해 막힘이 없었다. 살집이 양쪽으로 벌어지면서 진공 상태가 된 안을 좆기둥이 비벼 대자 점막에 파동이 일면서 속살이 떨렸다. 박래현은 내 골반과 엉덩이를 단단히 틀어쥐고 아래서 위로 살을 쳐올렸다. 살 기둥에 어지러이 올라온 핏대가 내벽의 세포를 지그재그로 긁고 지나갔다. 내벽 근육에 오목하게 홈이 패일 것 같은 감각에 매트리스를 짚었던 팔꿈치가 위로 밀리며 버티고 있던 상체가 무너졌다.
“일어나요, 윤준영 씨. 다른 알파들은 당신을 아주 곱게 다뤘나 보죠? 이 정도도 못 받아 내면 실망입니다.”
상체를 일으킨 나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다리를 더 벌려 안정적인 자세를 잡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내 둔부에 양손을 짚어 체중을 실은 박래현이 성기를 뺐다가 깊숙이 쑤셔 박았다. 내벽을 이룬 신경에 쾌락이 잔물결처럼 번져 나갔다. 기둥이 빠른 속도로 왕복하면서 만들어낸 열기에 늘어진 속살이 자지에 한 움큼 달라붙었다. 얼마 없는 엉덩이 살이 출렁거렸고 상체가 흔들려 눈에 보이는 것들도 흔들거렸다. 박래현은 한참 박아 대던 좆을 쑥 잡아 빼더니 구멍에 다시 얼굴을 처박고 혓바닥으로 안을 쓸었다.
“아, 아아악! 흐, 흐으윽, 으읏… 그, 그만! 거긴 제발….”
눈앞에 쏟아지는 유성우를 피해 무작정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던 나는 허리를 붙들려 도로 아래로 쭉 끌어 당겨졌다.
“윤준영 씨, 어딜 도망가? 어서 박아 달라고, 여기가 난리 났는데.”
박래현은 얼굴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혓바닥 전체로 주름을 느릿느릿 덮어 나갔다. 아뜩하고 황홀한 감각이 몰아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신음을 내뱉었다. 남자는 내 모든 걸 가지려는 듯 탐욕스럽기 그지없었다. 무른 듯 단단한 혀 기둥의 감각적 움직임은 육체보다는 정신에 더 큰 쾌락을 주었다. 누구 앞에서도 무릎 꿇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남자가 납작 엎드려서 내 구멍을 빠는 모습은 야릇한 떨림을 동반했다. 질기게 살을 빨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 전체가 질척한 주름 안으로 들어와 구멍을 양옆으로 잡아 벌렸다.
“당신 밑이 얼마나 자극적인지 알아요?”
“…….”
“구멍 안쪽 속살에 부연 물이 맺혀 있는데, 굉장히 난잡하게 오물거려요.”
“흐, 흐응…. 그런 말 그만해요!”
“푹 쑤시면 붉은 살들이 자지에 달라붙어 움찔움찔 움직이는데, 그 모습이 사람 돌게 해.”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을 하면서 남자는 내 등허리를 눌러 엉덩이를 위로 띄웠다. 그는 퍽 소리가 나게 좆을 쑤셔 박은 뒤 상체를 밀착해 귓불을 물어뜯었다.
“앞으로 여기에 다른 알파들 자지는 받을 생각 하지 말아요. 당신도, 구멍도, 아기도, 전부 내 거니까.”
흥분한 상태여서 알파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남자 입에서 나온 말이니 내가 들어 좋은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짐작해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귓바퀴를 날름날름 핥던 혀가 귀 안으로 파고들었다. 귓구멍에 침이 고이는 섬뜩한 감촉을 견딜 수 없어 고개를 돌리려 해도 박래현이 뒤통수를 잡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내 말 알아들었어요? 다른 알파한테 다리 벌렸다가는, 살인 날 줄 알아요.”
“허, 허억, 저 죽이겠다고 협박하세요, 지금?”
“내가 당신을 왜 죽입니까? 천지 분간 못 하고 당신한테 좆 쑤신 놈을 죽여야지.”
별 미친… 욕이 와르르 쏟아지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살인이란 말은 귀에 쏙 들어왔다. 헛소리하는 걸 보니 박래현은 히트 사이클을 맞이한 나보다 더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나를 안고 있는 몸이 평소보다 배는 뜨거웠다. 이상해서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눈이 들어왔다. 눈뿐만 아니라 귀뺨과 입술마저 붉게 물든 얼굴이 섬뜩하게 아름다워 가슴이 마구잡이로 뛰놀았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서 나는 꽃잎 같은 입술에 내 입술을 붙이고 짓이기듯 고개를 틀었다. 짧게 입 맞춘 박래현이 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허리를 움직였다.
거대한 좆이 빠른 속도로 박혔다가 느린 속도로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뭉툭한 좆 대가리가 안을 쳐올릴 때면 거대한 쾌락에 휩쓸려 몸이 비틀거렸고, 속살에 기둥을 갈면서 뭉근하게 빠져나갈 때면 곳곳에서 자잘한 열락이 피어올라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상체와 하체가 박래현의 거친 움직임을 받아 내면서 머리칼과 몸에 비죽비죽 땀이 배었다. 무엇보다 불나게 성기가 드나드는 내장이 수증기가 나올 것처럼 뜨거워져서 온몸에 열이 올랐다. 조금 더 박히다 보면 땀구멍으로 김이 뭉텅뭉텅 새어 나올지도 모르겠다. 앞뒤로 물을 질질 흘리며 나는 오로지 내 안을 들쑤시는 성기에만 집중했다. 좆이 들어오면 심지를 부러뜨릴 듯 구멍을 조였고 좆이 빠져나가면 엉덩이와 허리를 격하게 움직여 뒤로 따라갔다.
“윤준영, 흐, 흐읏, 조이고 씹는 거 아주, 타고 났네.”
남자는 상스러운 욕을 짓씹으며 낮게 웃었다. 이렇게 잘 느끼는 몸을 하고서 그동안 어떻게 참은 건지 나도 신기했다. 섹스가 황홀하고 중독적인 행위란 걸 알았으니 앞으론 달라지지 않을까. 다른 알파와 몸을 섞는 날 상상하긴 어렵지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래현은 내 입술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더니 검지와 중지를 입에 밀어 넣어 혓바닥을 긁었다. 혀로 남자의 손가락을 감아 쭉쭉 빨아 젖히자 뒤에서 치자꽃 향기가 물씬 나를 감쌌다. 팔꿈치와 무릎을 매트리스에 고정해 몸을 지탱한 나는 박래현의 움직임에 맞춰 몸 전체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살이 박히는 차진 소리와 시트가 구겨지는 소리, 내 신음이 난잡하게 어우러져 조용한 방을 뒤흔들었다. 허리를 치켜들고 남자에게 시선을 맞춘 채 둥글게 원을 그리며 엉덩이를 움직였다. 성기가 더는 들어올 수 없는 곳까지 들어와 깊이 박히자 눈앞에 어른어른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으, 으으응… 하, 아, 아아, 아윽….”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고 귀가 먹먹해졌다. 출구를 찾지 못해 갇혀 있던 욕망이 일시에 둑을 무너뜨리고 범람해 나는 그 안에 푹 빠져 허우적거렸다. 호흡이 차오르고 답답해져서 나는 입을 벌려서 숨을 들이켰다. 내가 무너지지 못하게 오른팔로 단단히 목을 감은 박래현은 결코 박아 대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끝까지 들어와 모든 걸 짓부수겠다는 일념으로 자지는 퍽퍽 소리를 내며 내벽을 잘게 다져나갔다. 내가 흘린 정액과 애액으로 흠뻑 젖은 시트가 복부에 엉겨 붙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남자의 좆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어 허리를 움직였다. 눌리고 비벼지는 곳마다 쾌락이 뭉텅이로 솟아올라 온몸이 거대한 쾌락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아, 아아! 하, 하으윽… 흐읏….”
머리칼에 맺혀 있던 땀이 이마를 타고 눈으로 들어와 눈이 시큰시큰 아팠다. 땀 때문인지 벅찬 오르가슴 때문인지 눈에 눈물이 맺혀 시야가 부옜다. 박래현은 빨갛게 익었을 뺨에 코를 박고서 부어오른 점막을 난잡하게 들쑤셨다. 두 번의 절정으로 한껏 민감해진 안은 살 기둥에 일어난 핏대마저 적나라하게 감지하고서 게걸스럽게 자지를 빨아 먹었다.
“윤준영 씨, 좋아요?”
“흐, 흐읍, 네! 좋아요.”
“얼마나 좋은데요? 말로 해 봐요.”
“아, 아으읏… 너무 좋아서 흡, 눈에, 아무것도 안 보여요!”
진득하게 뺨을 핥던 혀가 입술을 벌리고 들어와 격하게 혀를 겹쳤다. 들어오기 전부터 입을 벌리고 있던 나는 박래현의 혀를 기꺼이 안으로 끌어 당겼다. 퍽퍽퍽 소리가 나게 성기를 치대면서 박래현은 오른손으로 유륜과 젖꼭지를 움켜쥐었다. 위아래로 문지르는 손길에 발딱 선 젖꼭지가 휩쓸려 갔다. 안을 들쑤시는 성기가 더 딱딱해지고 점막이 찢어지도록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박래현이 내뿜는 페로몬 농도가 짙어지면서 구멍과 내벽이 전에 없이 크게 양쪽으로 벌어졌다. 충격적인 고통 뒤에 기둥과 귀두가 비벼지는 곳에 낙차 큰 절정이 찾아왔다.
“아, 아윽! 아, 아으응!”
구멍이 저절로 움찔거리며 내벽이 요란하게 출렁거렸다. 온몸이 무중력 상태에 빠져들면서 나는 사지를 벌린 채 침대에 납작하게 눌어붙었다. 눈물과 침으로 축축해진 시트에 볼을 비비며 절정의 맨 꼭대기에 있던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숨을 죽였다. 몸을 가득 채웠던 발정열이 돌연히 빠져나가면서 몸에 엉겨 붙은 시트가 차갑게 느껴졌다.
아직도 성성한 자지를 안에 박아 넣은 채로 박래현은 축 늘어진 내 몸을 돌려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그는 양손으로 내 얼굴 옆의 매트리스를 짚고서 실핏줄이 번진 불길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손을 뻗어 붉게 달아오른 박래현의 뺨을 만졌다가 너무 뜨거워서 화들짝 손을 뗐다. 박래현 이마에서 내 뺨으로 땀이 떨어져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섹스를 하면서 박래현 얼굴색이 변한 건 처음이었다. 불안하고 야릇한 기분이 들어 허리를 뒤로 빼려는데 육중한 하반신에 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 결합된 곳이 불에 지진 듯 뜨거워지고 나를 내리누르는 남자의 몸도 불덩이로 변해 갔다. 초점을 잃은 눈이 옆으로 흘러가더니 박래현이 내 귀를 혀로 핥았다.
“당신 정말 야하고 사랑스러워요. 너무 예뻐서 자제할 수가 없어.”
눈물과 침과 체액으로 엉망이 된 내가 박래현 눈에 예뻐 보인다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방금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내서인지 나는 그에게 첫 오메가로서 좋게 기억되고 싶다는 감상에 빠져 버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속을 들킬 것 같아서 남자 어깨에 걸쳐진 팔뚝과 손으로 눈길을 보냈다. 놀랍게도 다이아몬드를 갈아서 뿌린 것처럼 기다란 팔뚝에 빛이 가득했다. 얼굴에서도 이렇게 빛이 난다면 오늘은 특별히 예뻐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일이면 원점으로 돌아갈 테지만 말이다.
“하, 하아… 내 아이는 윤준영 씨가 낳아요.”
말을 끝내자마자 박래현에게서 페로몬 향이 발작하듯 퍼져 나왔다. 짙은 치자꽃 향이 폭력적으로 몸을 덮어 눌러서 그 위압감에 손가락 하나 놀릴 수 없었다. 침대 주변에 치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것처럼 향이 강렬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쉴 새 없이 발산하는 페로몬에 온몸이 젖어 든 순간 홀연히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져서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흉악한 자지가 내 뼈를 잘게 부순 뒤 살을 찢고서 뛰쳐나올 기세로 부풀어 올랐다. 성기를 품은 주름이 더 벌어질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면서 안이 난폭하게 열렸다. 나는 호흡을 멈춘 채 박래현 어깨를 뒤로 밀어내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아, 아파요, 흐, 흐윽!”
“흐, 흐읏, 조금만, 조금만 참아요.”
“아, 아아악! 으윽!”
남자는 달래듯 눈물을 혀로 핥고서 내 입술을 찾았다. 혀가 입 안을 점령함과 동시에 좆대가리가 거침없이 밀려 들어왔다. 알파 좆을 받아들이기 위해 활짝 열린 아기집 입구가 좆을 꽉 붙든 채로 문을 닫는 순간 온몸에 신열이 오르고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탐욕스러운 자지 끝은 아기집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어젖히고 그 끝에 콱 박혀 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내 안에 따스한 액체가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터져 나갔다. 박래현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나온 찰나 고통과 희락이 뒤범벅되어서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으, 으으윽! 하, 하으읏… 좆, 좆 빼 줘요! 아윽!”
“흐, 잠깐만!”
“아, 아파! 안이 다 찢어질 거 같아요! 제발! 흐, 으윽!”
“안 돼요. 지금 노팅 중이야.”
“거짓말! 아, 아악! 아, 아파! 아파, 씨발, 얼른 빼 줘!”
“지금 빼면 당신이 다쳐요. 조금만 참아 봐.”
“흑, 빼 줘요. 살려 줘요!”
“몸부림치면 더 아파요. 고통은 금방 사라지니까, 기다려요.”
“씨발, 개새끼. 너 때문에 내 인생 다 망가졌어! 책임져! 책임지라고, 이 나쁜 새끼야!”
“내가 책임질 테니까, 후, 걱정하지 말아요.”
너무 아프고 화가 나서 여과하지 않은 말을 마구 쏟아 냈다. 박래현은 땀에 젖은 내 머리칼을 연신 쓸어 올리며 부드럽게 이마와 뺨에 입술을 눌렀다. 한차례 극심한 고통이 지나간 뒤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박래현은 내게 가해지는 압박을 줄이기 위해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채 버티고 있었다. 단정하고 표정 없던 얼굴이 고통과 쾌락에 일그러졌고 총명하던 눈빛은 흐릿해졌다. 새삼 나와 결합하고 있는 알파가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는 새에 손을 뻗어 그의 눈가와 뺨을 쓸었다.
“윤준영, 내 오메가가 되어 줘.”
“…….”
“어서 대답해.”
절실한 눈빛에 홀려 고개를 끄덕이자 박래현이 얼굴을 돌려 뺨을 감싸고 있던 손바닥에 깊게 입 맞췄다. 이윽고 완벽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내 안을 꽉 틀어막았다.
몸이 반으로 갈라질 듯한 아픔이 지나간 뒤에 내 안에서 쿵쿵거리며 맥동하는 성기를 느꼈다. 꽉 맞물려 결합한 성기가 교접한 채로 영원히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말로만 들었던 노팅을 이런 식으로 경험할 줄은 몰랐다. 오늘 행위로 난 90%의 확률로 임신하게 된다. 허탈함과 무기력함이 동시에 찾아와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도저히 누를 길 없던 발정열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힘들어요? 좀 더 편하게 눕혀 줄게요.”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박래현 눈에 초점이 잡혔다. 박래현이 조금 전에 내뱉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왠지 시선을 맞추기 힘들어서 눈을 내리깔았다.
“저, 언제까지 이렇게 박혀 있어야 해요?”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내가 뒤에서 안아 줄 테니까 편하게 자요.”
내 몸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돌린 박래현이 한쪽 팔을 내어 주며 다른 쪽 팔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네 개의 다리가 마치 한 몸에서 자란 것처럼 사이좋게 얽히고설켰다. 뒤를 가득 채운 이물감에 하반신이 무거운데도 정신이고 육체고 다 지쳐 버린 나는 그가 내민 팔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았다. 박래현은 내 귀뺨과 목덜미, 어깨를 연신 깨물거나 혀로 핥으며 밑으로는 정액을 흘려 넣었다. 박래현이 정액을 풀 때마다 배가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엄청난 양을 사정했음에도 부풀어 오른 성기가 가로막고 있어서 정액은 한 방울도 새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아파요?”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여기에 곧 우리 아기가 생기겠네. 누굴 닮을지 궁금합니다.”
남자가 부풀어 오른 내 복부를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귓가에 착 감기는 나긋한 목소리와 내가 부닥친 현실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균열이 존재했다. 나를 안고 있는 안락한 팔에 조만간 다른 오메가가 안길 거라는 생각에 내 기분은 걷잡을 수 없게 바닥으로 곤두박이쳤다.
이 팔뚝에 머리를 기댔던 짧은 장맛비 같은 이를 미래의 박래현이 기억해 줄까. 박래현에겐 우리 사이에 1년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남을 테니 종종 나를 떠올릴 것이다. 나는 언젠가 박래현을 완전히 잊겠지만 박래현은 반은 나를 닮은 아이 때문에 평생 나를 잊지 못할 것이다. 속이 텅 비어 가는 걸 보니 별 위안이 되지 않는 결론이었다.
“윤준영, 아이는 당신 닮았으면 좋겠어.”
낮게 갈라지는 목소리가 껍질만 남은 내 안을 채웠다. 박래현은 뒷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내게 몸을 기대왔다. 첫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내면서 내 발정열을 해소해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박래현이란 남자를 파악할 수 없었다.
***
벽을 밀고 나와 정지 화면처럼 움직임이 없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뜨거운 사막에 발을 내디뎠더니 무방비하게 노출된 발바닥에 모난 모래알이 파고들었다. 멀리 모래 둔덕을 넘어가는 박래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낙타가 사라진 사막을 혼자 걷고 있는 그를 빠른 걸음으로 쫓아갔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평행선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실제 사막을 달린 사람처럼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
블라인드가 쳐진 침실에 시간을 짐작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금요일에 시작한 발정열은 노팅으로 가라앉았지만 내 페로몬에 반응해 러트가 찾아온 박래현은 사흘간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사흘 내내 박래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섞었다. 밥 먹을 때만 빼고 심지어 씻을 때조차 계속 뒤엉켰다. 첫 번째 노팅에 성공한 박래현이 어젯밤 두 번째 노팅을 시도했을 때 나는 기력이 다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허리에 감긴 묵직한 팔을 걷어 내고 박래현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이불은 어디로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박래현은 헐벗은 채로 나를 안고 있었다. 중력에 이끌리듯 내 눈은 곤히 잠들어 있는 박래현 얼굴로 내려갔다. 깨어 있을 때나 잠들어 있을 때나 똑같이 잘난 사람이지만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과 사나운 눈을 덮고 있는 눈꺼풀 때문에 한결 청순하고 순한 인상이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속눈썹과 입술 끝을 만져 보았다. 손바닥 밑으로 굴곡이 뚜렷한 얼굴을 음미하듯 더듬으며 꿈같았던 사흘을 상기했다.
히트 사이클과 러트 사이클을 같이 보내면서 우린 상대의 욕구에 충실하게 반응했다. 박래현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고 빨면서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귓바퀴 뒤에 숨어 있는 움푹 팬 부분이나 겨드랑이 안쪽의 민감한 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혀로 핥고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별것 아닌 곳도 성감대로 개발했다. 심지어 불알을 들춰 그늘진 부분에 코를 박고 회음을 정신없이 짓씹기도 했다. 색이 있는 곳은 더 짙게 만들겠다며 쪽쪽 빨았고 색이 없는 곳은 색을 만들어 주겠다며 이로 긁었다. 어디든 가리지 않고 빨아 대는 박래현을 보며 몸이 완벽하게 채워지는 상태를 경험했다. 그래서 사흘 내내 박래현이 진짜 내 알파가 된 듯한 착각을 했다.
며칠간 알파 페로몬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이 알파의 사랑을 받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해 하기도 했다. 박래현은 불같은 면이 있어서 연애를 시작하기가 어렵다뿐이지, 막상 연애를 시작하면 무섭게 돌진할 것 같았다. 남자가 사랑한다고 매달리면 꽤 기분 좋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지근하게 열 오른 손이 엉덩이를 쓸었다.
“왜 벌써 일어났어요? 배고파요?”
어둑어둑한 곳에서도 고양이처럼 밝은 눈동자는 눈에 띄었다. 두 눈이 서로를 향하자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낸 알파에게 마음이 설레어 심장이 높은 속도로 고동쳤다. 아직 섹스의 여운이 남아서인지 미래 따윈 생각하지 않고,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이 눈에 풍덩 빠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투명하게 비치는 비극적 결말을 알면서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뚱이가 비틀거렸다. 외길 아래에 시퍼런 강물이 나를 집어삼키려고 거센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또 하고 싶어서 날 유혹해요? 그렇게 쳐다보면, 참을 수 없는데.”
허리를 왼팔로 휘어 감은 박래현이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뒤에서 나를 안은 채 다 헐어서 쓰라린 엉덩이 사이에 부풀어 오른 좆을 비볐다. 지나치게 섹스에 몰두해서 어젯밤엔 기절까지 했던지라 내 안을 파고드는 성기에 진저리가 났다. 박래현은 시도 때도 없이 박았던 구멍을 벌리고 그 안에 불덩이를 쑤셔 넣었다.
“아, 아아! 으응, 그런데 오늘 출근 안 하세요? 월요일이잖아요.”
“내내 발정 난 개 달래 줬으니까, 오늘은 출근해야죠. 어디 몇 신지 볼까?”
발정은 나만 났나? 자기도 발정 나서 실컷 즐겼으면서.
박래현은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눌러 그 안에 나를 가두고 느릿느릿 허리를 움직였다. 며칠 동안 파 놓은 구덩이에 커다란 좆이 쑥 들어왔다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을 진득하게 문지르며 박래현은 손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했다.
“나가지 말고 오늘도 온종일 섹스만 할까요? 당신 의견은 어때요.”
“주인님 마음대로 하세요.”
“구멍이 너덜너덜해져도 그만하자는 말은 절대 안 하지. 당신 통째로 씹어 먹고 싶은데, 오늘은 그냥 놔줘야겠습니다.”
안을 찍어 대던 성기가 빠져나가자 벌어진 구멍이 왠지 허전해졌다. 남자는 내 뺨을 손등으로 툭 친 다음 침대 끝에 걸터앉아 바닥에 떨어진 파자마 가운을 주워 들었다. 파자마 안으로 날갯죽지와 널따란 등, 곧게 뻗은 척추가 사라지는 걸 눈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 차장님한테 열한 시쯤에 아침 준비하라고 할게요. 피곤하면 더 자다가 그때 먹어요.”
“네.”
“씻을 거면 지금 씻어요. 이 차장님한테 시트 갈라고 시킬 테니까.”
“시트 갖다 주시면 제가 갈겠습니다.”
“일하는 사람 두고 그걸 당신이 왜 해요? 얼른 씻고 옷 단단히 챙겨 입어요.”
“…….”
“발가벗고 돌아다녀서 당신이 백자지란 거, 온 동네에 소문났어.”
활짝 벌어진 허벅지를 미처 오므리기 전에 박래현이 성기를 손에 쥐고서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속옷 입고 있었다니까요?”
“당신 구멍에 쑤셔 박았던 와인은, 애 낳고 나면 선물로 줄게요. 내가 표시해서 셀러에 따로 보관하라고 했거든.”
“그냥 없애면 안 돼요?”
“와, 놀랍네. 윤준영 씨가 수치를 알아요?”
선이 뚜렷한 입술에 언뜻 서늘한 웃음이 지나갔다. 그는 손가락 네 개로 구멍을 한번 들쑤시고 나서야 방에서 나갔다. 이게 마지막 섹스라는 듯, 너에게 더는 관심 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은 차갑고 단호했다. 히트 사이클에 맞춰 계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몸을 섞었으니 앞으로 박래현과 섹스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묵직한 몸을 이끌고 테라스 쪽으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활짝 걷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기다렸다가 환기하려고 문을 열었더니 아침부터 더운 기운이 몰려왔다. 지독하게 밴 정사 냄새를 빼려고 문을 열어 둔 채 욕실로 향했다.
사흘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렸다. 박래현과 나는 블라인드를 내린 상태에서 지구상에 단둘만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밤낮 구별 없이 뒹굴었다. 세상과 단절돼 섬에 살고 있는 오메가가 알파와의 섹스에 몰두하는 건 당연했다. 나는 외로웠고 박래현이 내보내는 페로몬은 달콤했으니까. 입욕제를 푼 욕조에 물을 틀어 놓고 세면대 앞에 서서 발가벗은 몸을 살폈다. 귀부터 시작해서 목덜미, 가슴, 복부, 허벅지 안쪽과 발등이 크고 작은 상흔으로 가득했다. 특히 쉼 없이 빨렸던 젖꼭지와 유륜은 원래의 색을 잃고 붉은색 피멍으로 얼룩이 졌다.
목덜미와 젖꼭지에 난 상처를 쓸어 보다가 날름날름 핥아 오던 혓바닥이 생각나 얼른 손을 뗐다. 나는 욕조로 들어가 다리를 길게 뻗고 욕조 가장자리에 뒷머리를 기댔다. 몽글몽글한 물방울이 장미 향을 톡톡 터트리며 살갗에 달라붙었다. 전쟁 같은 순간이 지나고 오랜만에 맞이한 평화에 몸을 맡겼다. 물살을 따라 아무렇게나 흘러가던 생각 끄트머리에 또 박래현이 있었다. 러트 사이클이 찾아온 상태에서 나를 안은 박래현은 본능에 충실한 야만인이었고 자신의 오메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안달 난 알파였다.
알파와 섹스하면 바로 가라앉는 히트 사이클과 달리 알파의 러트는 꽤 오랫동안 이어져 박래현은 사흘 동안 쉬지 않고 뜨거운 몸을 내 안에 파묻었다. 심지어 잘 때도 넣고 자다가 심심하면 허리를 움직였다. 나중엔 움직이는 게 귀찮아 박래현에게 몸을 맡긴 채 마냥 박히고만 있었다.
박래현에겐 러트 사이클이 처음이었을까? 러트는 히트 사이클과는 달리 정해진 기간 없이 발정기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응해 찾아온다. 형질이 강한 알파는 통제력 또한 강해서 발정기 오메가와 섹스해도 러트 사이클을 조절할 수 있다고 들었다. 상대 오메가에게 지나치게 흥분해 이성을 통제하지 못할 때 혹은 상대에게 자신의 아이를 갖게 하고 싶을 때는 예외이다. 내 발정기에 맞춰 박래현에게 러트가 찾아온 건 그가 강력하게 아이를 원해서일 것이다.
임신은 거의 확정이니 남은 일은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것뿐이다. 나는 물속에서 굴절된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을지 걱정했다가 곧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정기적으로 박은수에게 진료를 받을 테니 궁금한 건 그녀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다. 옷장 안에 숨겨 둔 약에 생각이 이르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박래현이 아이를 원하는 건 알겠는데 정치헌과 합의를 보지 않은 것 같아 불안이 남아 있었다.
약을 먹으면 다음 히트 사이클까지 40일의 여유가 생긴다. 40일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정의 내려질 테니 정치헌과 박래현이 합의를 보고도 아이를 원하면 그때 임신해서 낳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이미 받은 돈은 박래현과 적당히 조율해서 돌려주면 될 것이다.
하지만 박래현은 벌써 아이를 키울 유모까지 구해 놨다고 했다. 계약을 끝내려면 아이를 낳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를 잘 돌보겠다는 말 역시 빈말은 아닌 듯했다. 박래현은 계약서를 작성한 순간부터 일관되게 아이를 원한다고 했다. 그 말을 믿지 못해 나는 온갖 가정을 세워 머리를 굴렸고 해결된 일은 없었다. 약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래현에게 들키기 전에 오늘 정원 어딘가에 묻어 버리기로 했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깜박 잠들었는지 나는 미지근해진 물속에서 눈을 떴다. 사흘 내내 다물어진 적이 없던 허벅지와 다리가 따뜻한 물에 풀려 통증이 완화되었다. 욕조 물을 빼고 비틀거리며 샤워 부스로 가서 한껏 늘어진 몸을 씻었다. 얼른 침대로 가서 자고 싶은 생각에 드라이어로 머리칼을 대충 말린 후 서랍을 열어 속옷을 꺼냈다. 묘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어 서랍 깊숙한 곳에 손을 넣어 약을 찾았다. 분명 속옷 서랍 맨 안쪽에 넣어 뒀는데 약이 손끝에 닿지 않았다. 아예 서랍을 다 꺼내 뒤져 봐도 약은 보이지 않았다.
“윤준영 씨, 이 약 찾아요?”
씨발, 나 완전 좆 된 건가? 눈앞이 아뜩해지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심하게 두근거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내 눈앞에 피임약 끄트머리를 쥔 손이 좌우로 흔들렸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내 몸을 만지며 예뻐해 주던 손이었다. 무조건 시치미를 떼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귓가에 음산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 그 약이 무슨 약인데요? 전 모르는 약이에요.”
“지문 검사를 의뢰할까, 멍멍아?”
“…….”
“이거 우리 회사에서 만든 사후 피임약이네. 24시간 안에 먹어야 효과가 가장 좋다죠?”
등 뒤에서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머리칼이 쭈뼛 솟는 기분이었다. 이마와 손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은 남자가 왼손으로 턱을 쥐어 얼굴을 뒤로 꺾었다. 지금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갈색 눈동자가 내 눈알에 날아와 박혔다. 위압적이고 냉철한 눈빛에 주변 공기가 눌려 몸이 짜부라질 것만 같았다. 입술과 턱이 덜덜 떨리는 걸 막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머릿속을 정리했다.
“약 누가 줬어요? 은수 누나? 아니면 어머니?”
“아니요! 여기 오기 전에 혹시 몰라서 구해 왔던 거예요.”
“어디다가 숨겨 왔을까? 숨길 데라곤 밑구멍밖에 없는데 이 네모난 상자가 당신 구멍에 들어갈 수 있어요? 어디 나 보는 데서 한번 넣어 봐요.”
나는 박래현이 내미는 약 상자를 받지 않았다. 박래현 입가가 비틀어지는 걸 보면서 변명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여기 온 첫날 나는 박래현 앞에서 발가벗은 채 굴욕적인 신체검사를 받았었다.
“거짓말을 하려거든 좀 그럴듯하게 하세요. 작년에 피임약 처방받은 뒤로 병원에 간 기록 없던데? 이 약은 전문 의약품으로 분류돼서 처방전 없인 살 수 없습니다.”
더는 변명할 거리가 없어져서 나는 박래현 앞에 납작 엎드려 싹싹 비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인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실은….”
“당신 지금 현실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주인? 누가 당신 주인이야? 우리 계약은 이제 끝났습니다.”
“…….”
“법적인 얘기 들어가면 길어질 테니까, 저녁에 변호사 끼고 차분히 얘기하자고.”
“제가 잘못했어요. 약은….”
“치졸한 변명 더 듣고 싶지 않습니다.”
박래현이 분노를 억제하려는 듯 어금니를 깨물자 턱 근육이 단단해졌다. 하얗던 공막에 실핏줄이 일며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가 화를 참고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가슴이 높게 고동쳤다. 남자는 진심으로 아이를 원하는데 나를 둘러싼 상황과 다른 사람 말에 휘둘리며 그를 믿지 않은 건 나였다.
“약은 회장님이 갖다 주신 거예요. 오늘 버리려고 했어요. 믿어 주세요.”
약을 발견한 즉시 남자는 박은수에게 전화해서 약을 줬는지 물어봤을 테고 그녀는 부인했을 것이다. 당연히 다음으로 회장이나 양부를 의심했을 것이다. 이미 확인이 끝났는데 여기서 모른다고 버텨봤자 괘씸죄가 추가돼 박래현을 더 화나게 할 뿐이다.
“당신한테 누가 약을 갖다 주든 나한테 바로 얘기하고 버렸으면 이 사달이 안 났죠. 당신도 이 약을 쓸 마음이 있었으니까 여기 곱게 모셔놨겠지.”
“잘못했습니다. 주인님이 정치헌 씨랑 결혼하면 아이를 지우라고 할 것 같아서…. 그런데 정말 먹을 생각은 안 했어요. 믿어 주세요, 정말이에요.”
“행동을 이따위로 하면서 나한테 믿어 달란 말이 나와요?”
“제발 믿어 주세요. 저도 건강하고 예쁜 아이를 낳고 싶어요.”
박래현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나를 차갑게 일별했다. 우리 사이를 가까스로 연결하고 있던 선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박래현이 내게 유일하게 원하는 것을 없애려고 했으니 이 남자가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기 위해 나와 계약했고 몸을 섞었고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냈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입 안이 타는 듯해서 나는 혀를 내밀어 까슬까슬해진 입술을 축였다.
“내가 당신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죠? 그것 말고도 나 속인 거 또 있을 텐데?”
또 속인 거? 남자의 추궁에 즉각 욕실에 숨겨 둔 핸드폰이 생각났다. 박래현은 피임약을 뒤지면서 핸드폰까지 찾아낸 듯했다. 절망감에 휩싸여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나를 썰어 버릴 것 같은 시선을 피했다.
“경비 늘렸으니까 도망갈 생각 하지 말아요. 도망가다가 잡히면 아주 처참한 꼴을 당할 테니까.”
남자는 내 얼굴을 쥔 채로 입술에 입 맞추더니 잡았던 턱을 미련 없이 놓아주고 자신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가 큰 걸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주저앉은 채로 내 선택을 후회하고 있었다.
핸드폰은 왜 즉각 없애지 않았으며 그때 쓰레기통에서 약은 왜 꺼내 왔을까. 소용없는 자책을 하며 옷장에 이마를 쿵쿵 찧었다. 계약이 깨지면 박래현에게 물어 줘야 할 돈이 32억이 넘는다. 박래현이 인정을 베풀어 위약금을 받지 않는다 쳐도 당장 엄마 치료비로 썼던 돈은 어디서, 어떻게 충당한단 말인가? 수술이 끝나고 예후가 좋지 않아서 엄마는 다른 환자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잠을 줄여 가며 한 달 내내 돈을 벌면 치료비는 어떻게든 마련하겠지만 박래현이 당장 돈을 갚으라고 하면 나는 궁지에 몰릴 것이다.
한순간의 잘못으로 나는 40일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채무자가 되어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게 가장 현명할까.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거실로 나갔다. 테이블을 닦고 있던 정 차장이 유령처럼 나타난 나를 발견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준영 씨, 얼굴이 왜 이렇게 파리해요? 어디 아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데 혹시 상무님께서 제 방 다 뒤지라고 하셨어요?”
“네.”
“언제요?”
“준영 씨 히트 사이클 오기 전날에요. 이 차장 불러서 준영 씨 방과 욕실 샅샅이 검사하라고 했대요. 이상한 물건 있으면 다 찾으라고 했다는데 나도 오늘에야 들었어요.”
“알겠습니다.”
“상무님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모르겠어요. 오늘 저녁에 퇴근하고 나서 보자고 하시네요.”
정 차장이 사다 준 임신 테스트기는 다 써 버려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주방으로 가려다 말고 정 차장을 돌아보았다.
“저기, 정 차장님.”
“왜요?”
“그 사후 피임약 며칠 전에 회장님이 주고 가신 거예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회장님이 괜히 여기 오시진 않았을 거 같더라니.”
“그날 여기 들르신 거, 상무님한테 고자질하면 정 차장님 해고하신다고 했는데, 오늘 상무님한테 말씀드려 버렸어요.”
정 차장은 걸레질하던 손을 멈추고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등으로 쓸어 올렸다. 시름에 잠긴 그녀의 얼굴을 보며 어쩔 수 없었던 내 처지를 설명하려다가 말았다.
“회장님이 준영 씨 협박하셨네요. 저희 부부는 작년부터 상무님께 고용돼 있어서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돼요.”
회장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정 차장을 자르겠다고 해서 나는 당연히 정 차장 부부가 회장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심리전으로 사람을 갖고 노는 데 탁월한 기술을 가진 모자였다.
“아,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혹시… 회장님 다녀간 거, 상무님한테 말씀드리셨어요?”
“당연히 말씀드렸죠.”
나는 주방으로 가서 커다란 유리컵에 냉수를 받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셨다. 박래현은 회장이 왔다는 것도, 그녀가 사후 피임약을 건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오기 전에 약을 다 치워 놓고 나를 임신시킨 뒤 오늘에야 그 사실을 밝혔다. 내 약점을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던 그는 내가 약을 버리지 않아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씨발, 끝에 가서는 제일 불쌍한 너만 다칠 거라던 회장의 말이 옳았다. 박래현이 어떤 인간인 줄 뻔히 알면서 그를 속이려 했던 나를 책망하면서 물 한 잔을 더 마셨다. 차라리 햇볕을 쬐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서 정원으로 나가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았다.
나무 이파리 사이를 뚫고 들어온 빛이 박래현에게 물어뜯겼던 피부 곳곳을 살갑게 어루만졌다. 상처가 난 곳을 살펴보며 곰곰 생각해 보니 기가 막혔다. 사흘 동안 격렬하게 몸을 섞으면서 내 혼을 쏙 빼놓은 사람이 배신의 증거를 쥐고 날 짓누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단 말 아닌가. 언제는 자신만의 오메가가 되어 달라더니… 섹스하는 내내 사랑스럽다는 듯 몸 곳곳을 깨물고 핥아 주어서 그가 딴생각을 품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박래현과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내면서 그가 나를 특별하게 여긴다고 느꼈었는데 아주 멍청한 착각이었다. 그가 골로 보냈다던 오메가들처럼 박래현은 처음부터 나를 이용하고 버릴 계획이었다. 병원에서 우연히 나를 발견한 그 남자는 내가 처한 조건을 파악하고서 물 수밖에 없는 화려한 미끼를 던졌다. 박영범이 여러 번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음에도 나는 안이하게 대처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우매한 나를 한없이 자책하다가 문득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박래현이 파 놓은 함정에 걸려들었을 거란 확신이 생겼다. 이미 약을 치웠으므로 화만 내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기어이 계약 얘기까지 꺼낸 걸 보면 분명했다. 내가 일찌감치 우둔한 짓을 해서 그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이란 생각에 허탈해져서 웃음이 나왔다. 당장 오늘 저녁에 박래현과 만날 일이 암담했다. 핸드폰과 피임약 둘 다 계약에 어긋나는 물품이었다. 특히 피임약은 계약 목적 자체를 위협하는 물건이라 정상참작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박래현의 차가운 얼굴을 보아하니 그는 위약금을 철저하게 계산해서 전부 물릴 기세였다.
계약을 위반한 벌로 아이는 아이대로 낳아야 하고 거의 7억에 가까운 빚을 떠안은 채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엄마 병원비와 약값은? 복학은?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고 진흙탕을 구르고 구르다가 다 늙어서야 빚을 갚고 자유로워질 것이다. 끔찍한 인생이다. 내가 어쩌다가 박래현 눈에 들어 이 고생을 하는 걸까. 순진한 사람 마음을 살랑살랑 흔들어 놓고 뒤로는 칼을 갈고 있었다니, 새삼 박래현이 두려워졌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친다는 걸 보여 주며 손발이 닳도록 싹싹 비는 것 말고 내가 취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몸까지 섞었던 사람이 아량을 베풀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면 대부분은 매정하게 내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박래현이 그럴까? 냉소를 머금은 채 그 웃음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내 간청을 툭툭 끊어 버릴 남자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나는 아이를 낳아 박래현에게 건네줘야 하고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돈을 위약금까지 계산해서 돌려줘야 한다. 씨발, 좆같아. 이게 말이 되냐고. 나는 있는 힘껏 허공에 빈주먹을 날렸다. 오후로 넘어가면서 햇볕은 뜨거워졌고 내 비참함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박래현과 박영범은 신약 후보 물질의 기술 이전에 관한 얘기로 열을 올렸다. 평소라면 그들 대화에 귀를 기울였을 텐데 지금은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밥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몇 술 뜨다가 수저를 내려놓고 물만 홀짝홀짝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박래현과 나는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까지 박래현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박래현이 앉은 자리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엉덩이 끝을 붙이고 다가올 지옥을 대비했다. 박래현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탁자에 쌓여 있는 논문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읽던 곳을 펼쳤다. 남자의 평온한 태도에 아침에 있었던 일이 혹시 내 착각이나 꿈이 아니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박영범이 따뜻한 차와 과자, 서류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차 마셔 봐요. 자몽 청에 허브차를 블렌딩한 거래요.”
차 두 잔을 우리 앞에 내려놓고 박영범은 자기 찻잔과 서류를 들고 맞은편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에 내 시선이 고정되었다. 저 안엔 박래현과 내가 작성했던 계약서가 들어 있을 것이다. 무심결에 차를 한 입 마셨는데 맛이 달콤해서 날뛰는 신경을 약간 가라앉혀 주었다.
“형,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박래현이 보고 있던 논문을 내려놓고 다리를 포갰다. 실내화 끝으로 가지런히 나온 발가락은 주인을 닮아 길쭉하고 모양이 좋았다.
“윤준영 씨. 내가 무슨 말 할지는 알고 있겠죠?”
“말씀하세요.”
“계약서에는 을의 귀책사유로 본 계약의 이행이 불가능해지면 을은 갑이 지급한 모든 비용의 1.3배액을 배상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을은 본 계약에서 정한 가장 중요한 사항을 위반했고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지급받은 돈의 1.3배에 해당하는 32억을 즉시 갑에게 지급해야 합니다.”
동요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나는 가만히 입술 안쪽 살을 짓씹었다. 질긴 거미줄에 걸려 갈기갈기 찢긴 나비의 날개처럼 가슴이 쩍쩍 갈라졌다. 참담한 심정에 사고가 불가능해진 내 눈앞에 박영범은 사후 피임약과 핸드폰을 그 증거물로 제시했다.
“계약의 가장 큰 목적은 을이 갑의 아이를 낳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을은 갑과 관계를 한 후에 의도적으로 아이를 낙태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을의 명백한 귀책사유이며 갑은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이미 지급한 금액과 위약금을 합해 32억 원을 을에게 청구합니다.”
“즉시라면, 당장 그 많은 돈을 다 지급하라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제 사정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들이 어떻게 제게 이래요? 그 돈 있었으면 제가 몸 팔아 가면서 이따위 짓 했을 거 같아요? 없으니까 이랬을 거 아닙니까?”
나는 박래현에게 다가가 무릎 위에 단정하게 놓인 그의 손을 잡았다. 동정의 여지라곤 느껴지지 않는 서늘하고 차가운 손이었다. 오늘 새벽까지 내게 키스하며 사랑을 나눴던 남자가 생판 남인 것처럼 냉랭한 얼굴로 나를 주시했다.
“내가 왜 윤준영 씨 사정을 봐줘야 합니까? 난 당신이 아이를 낳아 주는 대가로 선수금 25억을 지급했어요. 당신이 계약서 조항을 성실히 이행해서 원칙을 어겨 가며 어머니를 만나게 해 줬고, 며칠 전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계약을 어기고 아이를 지우려고 해요? 변호사 대동한 계약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았습니까?”
“잘못했어요. 주인님이 정치헌 씨랑 결혼하면 아이를 지우라고 할 거 같아서 그랬어요. 그럴 필요가 없단 걸 깨닫고 약은 없애려고 했어요. 믿어 주세요.”
나는 앵무새처럼 아침에 했던 말을 반복했지만 남자의 얼굴엔 변화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래현에게 32억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보다 박래현이 내게 냉정하고 모질게 구는 게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아이를 낳아야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매번 확인시켜 줬을 텐데요?”
“용서해 주세요.”
“당신 혓바닥은 입 맞추거나, 자지 빨 때 말곤 쓸모가 없어. 그 외엔 다 거짓말이거든.”
박래현은 내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나는 두 팔을 뻗어 박래현의 허리를 휘어 감고 그의 품에 뺨을 문질렀다. 처음부터 말보단 몸으로 통하는 사이였으니 일단 내가 가진 무기로 비벼 볼 생각이었다.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아이 낳을 때까지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낼게요, 네? 주인님!”
잠시 멈칫하던 박래현이 내 어깨를 잡았다. 손끝에서 망설임을 느낀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감은 팔에 바짝 힘을 줬다.
“주인님, 제발요.”
“미안하지만 난 그럴 필요성을 못 느껴요. 기꺼이 다리 벌려 줄 오메가들이 천지에 깔려 있는데, 내가 왜 당신을 봐줘야 합니까? 날 설득할 생각 말고 어떻게 돈을 갚아야 할지 궁리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박래현은 내 어깨를 가볍게 꺾어 손쉽게 나를 떼어 냈다. 나는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을 꿇은 채로 박래현이 아량을 베풀기를 기대하면서 그의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묻고 훌쩍훌쩍 눈물을 터트렸다. 한참을 미동 없이 있다가 박래현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서 들어 올린 뒤 눈을 맞췄다. 내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후회가 첩첩이 쌓였지만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윤준영 씨, 내가 좋은 방법을 제시해 줄까요?”
“뭔데요?”
박래현은 물티슈를 꺼내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정리해 주고서 뺨에 우물이 생기도록 얼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나한테 뒤를 대 줄 때마다 빚은 이백씩 차감해 주겠습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진 여기서 나갈 수 없어요.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죠?”
빈털터리가 돼서 납작 엎드린 채로 박래현 전용 남창이 되라는 소리였다. 쇼핑 한 번에 일억 이상을 쓰는 인간이 위약금이 필요해서 나를 갈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이 취미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치헌 때문도 아니고 다른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단지 적당한 오메가를 골라 괴롭히고 굴려서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게 남자가 즐기는 유일한 취미였던 것이다.
음침하고 위험한 이 남자는 계부 때문에 생긴 오메가 혐오증을 불쌍하고 돈 없는 오메가들을 표적으로 삼아 표출해 왔다. 아이를 들먹이며 거액의 돈을 제시한 게 내가 처음은 아닐 것이다. 박래현은 힘 없는 오메가들을 물색해서 그런 식으로 구라를 치며 꼬드겼을 것이다. 내가 처음이라면, 첫 섹스부터 그렇게 잘할 리 없었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해 이 순간까지 참고 기다렸는지 모른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그래도 주인님과 한 달 넘게 몸을 섞었고, 배 속에 주인님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게 관용을 베풀어 주세요.”
“정확하게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내 아이를 밴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아일 없앨 생각을 했는데, 내가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착실하게 계약 사항을 이행하겠습니다. 믿어 주세요.”
“그런 각오는 진작에 했어야죠. 한참 늦었습니다.”
박래현 눈은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벽을 세우고 있었다. 절망에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다가 더 비굴하게 굴어도 남자를 설득할 수 없다는 자각이 들면서 지금껏 억눌러 왔던 분노에 불이 붙었다. 남자는 지금 계약에 종지부를 찍었다. 어서 아이를 낳아 주고 내 삶을 찾아 떠나려던 계획이 산산이 조각났다. 계약이 끝났으므로 이 남자는 이제 더는 내 주인이 아니다. 모든 걸 가진 남자가 그러잖아도 구질구질한 내 인생을 엉망으로 비틀어 버린 데 화가 나서 있는 힘껏 남자에게 따귀를 날렸다. 내 주먹에 왼쪽으로 꺾인 얼굴이 제자리를 찾기 전에 한 번 더 귀싸대기를 후려갈겼다. 계약을 끝내는 마당에 나는 안에 담아 뒀던 말들도 거침없이 내뱉었다.
“씨발, 당신은 악마야. 내가 당신만 보면 꼬리 살랑살랑 흔들어 주니까 당신 눈엔 내가 정말 버러지로 보여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당신보다 악랄한 인간은 본 적이 없어! 힘없고 빽 없는 사람 당신 멋대로 가지고 노니까 좋아요? 즐거워요? 남이 괴로워하는 모습 보니까 행복하냐고, 이 씨발 개좆같은 새끼야!”
박래현이 내 주먹을 피하는 바람에 주먹이 퍽 소리를 내며 소파 등받이에 꽂혔다. 박래현은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고서 허벅지 사이에 내 허리를 가둬 몸부림치는 걸 막았다. 맞아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계약 해지할 거면 해요. 나도 소송 걸 테니까. 세상에 다 까발릴 거야, 내가 이 집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윤준영 씨, 당신이 이 집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데? 우린 합의로 계약서를 작성했고, 당신은 인공 수정하겠다는 날 페로몬으로 눌러 강제로 덮쳤어. 소송 걸어 봤자 당신은 소송비만 날리게 될 거야. 비렁뱅이 처지에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미혼의 남성이 계약을 통해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갖는 건 합법이다. 박래현은 애초에 인공수정을 주장했기에 성교를 통해 임신을 유발한 건 내 책임이었다. 내가 걸고넘어질 게 있다면 박래현에게 받은 정신적 고통과 이 집에서 들었던 모욕적인 언행 등이 있는데 증거가 없었다. 나한테 유리한 게 하나도 없어서 더 부아가 치밀었다.
“박래현 씨, 내가 다른 사람한테 몸을 팔면 팔았지 당신한텐 절대 안 팔 겁니다.”
“당신이 몸뚱이를 어디서 굴리든 상관없어요. 내가 요구한 돈만 갚으면 돼요.”
“아, 그러셔요? 알겠어요. 당장 짐 싸서 나가겠습니다! 나가서 돈 벌어 갚으면 되겠네.”
“이 집을 나가는 즉시 전액 지급해야 합니다. 32억을 바로 해결할 수 있겠어요?”
잔인한 말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내 머리채를 잡아 현실로 아프게 내동댕이치는 효과를 발휘했다. 흐트러진 정신을 그러모으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서 나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일단 통장에 들어 있는 돈 드리고 나머진 버는 대로 입금해드릴게요.”
“즉시란 말뜻을 모르나? 당신이 번 돈으로 어머니 병원비도 못 낼 텐데, 빚은 어떻게 갚을 겁니까? 난 흐지부지 넘어갈 생각 없습니다.”
“당신은 씨발, 인간쓰레기란 것만 알아 두세요.”
“계약 파투 내서 돈 날린 건 당신인데 왜 내 탓을 합니까? 당신 말마따나 그동안 꼬리 살랑살랑 흔들어서 봐준 겁니다.”
내가 어떤 말로 모욕해도 박래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위인이었다. 상처란 동등하거나 우위에 선 사람에게 받는 것이지, 자신이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사람에게서 받는 게 아니다. 내가 뭐라고 하든 박래현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게 뻔했다.
“분할 납부는 내 뜻을 따를 때만 가능해요. 내 제안에 따르든가 돈 못 갚아서 감방을 가든가, 선택은 당신이 해요.”
나는 인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에게 질릴 대로 질려 버렸다. 박래현이 허투루 말할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그의 제안이 무겁게 가슴을 내리눌렀다. 박래현은 내가 엄마를 두고 감방에 갈 수 없다는 걸 이용해 나를 제 손아귀에 쥐고 멋대로 주무르려 하고 있었다. 두 가지 선택지가 다 치 떨리게 싫지만 이 상황에서 나는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를 위해 이 짓을 시작했는데 적어도 마무리는 잘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울며 겨자 먹기로 박래현 전용 남창이 되겠다고 결심한 찰나 며칠 전에 박래현이 했던 제안이 떠올랐다. 남창으로 구르든 정부로 구르든 박래현 밑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협상해 주겠다던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나을 듯싶었다. 나는 수치를 무릅쓰고 안 떨어지는 입을 열었다.
“그때 섹스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했던 제안, 수락할게요. 제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잖아요.”
“개좆같은 인간쓰레기의 섹스 파트너가 되겠다는 겁니까? 그러면 당신은 뭐가 되죠?”
“부탁드립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더 좋은 조건으로 당신을 착취할 수 있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뭐든 타이밍이 중요하지, 안 그래요?”
자존심이 상해 얼굴에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이 남자에게 더한 보복을 당한다 해도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씨발, 박래현 씨 인간 맞아요? 언젠가 당신도 저처럼 존나 비참하게 당할 날이 있을 겁니다.”
“개처럼 충성하겠다더니 속으론 칼을 갈고 있었네.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아주 금언이야.”
아무리 욕을 해도 속이 풀리지 않아서 잘난 주둥이를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었다. 한 인간의 밑바닥이 얼마나 추잡하고 추악한지 박래현이 가감 없이 보여 주었다.
“그래서 당장 짐 싸서 나간다고? 당신답게 잘 생각했어요.”
“자, 잠깐만요.”
이 남자에게 실망한 건 실망한 거고 당장 엄마와 내가 살 길은 따로 모색해야 했다. 한 번 할 때마다 2백이면 열 번에 2천, 백번에 2억. 사백 번이면 8억이다. 엄마에게 들어간 돈이 1억 정도 되므로 위약금까지 팔억을 만들어야 하는데 1년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섹스를 해도 갚을 수 없는 돈이었다. 박래현 정력을 고려했을 때 매일 섹스했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을 테고, 3일에 한 번씩 한다고 치면 난 꼼짝없이 4~5년을 박래현 전용 남창으로 살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얼른 아이를 낳고 이 집을 나가겠다는 계획은 이로써 무너져 내렸다.
“섹스할 때 한 시간 초과하면 백만 원씩 추가하겠습니다. 굉장히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라서요.”
“그동안 함께한 정이 있으니까 그 정도는 고려해 줄게요. 한 번 할 때 이백이면 당신한테 나쁜 조건은 아니잖습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당신 좋아하는 섹스로 빚 갚는 건데.”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박래현 씨와 섹스하는 거 전혀 즐겁지 않았어요. 다른 알파들과 비교했을 때 배려심도 없고 테크닉도 영 꽝이라서요. 혹시라도 그쪽과 하고 싶어서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착각하진 말아 주세요.”
“당신이 꼭 즐길 필요 있습니까? 윤준영 씬 나만 즐겁게 해 주면 됩니다.”
내가 박래현 마수에서 벗어날 날이 오긴 올까. 이 지옥에서 어서 나가고 싶은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불구덩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열 오른 눈을 치떠 박래현을 직시했다. 그의 시선은 명료하고 여유로워서 내 감정의 진폭을 더 크게 만들었다.
“돈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아요, 기분 존나 더러우니까.”
“내 성질 건들지 말아요. 그 약 발견한 뒤 당신 죽이고 싶은 거 계속 참고 있으니까.”
가면을 벗듯 남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가 두렵지 않았다.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더 대담해졌는지도 모른다.
“씨발, 당신이 참긴 뭘 참아요? 참는 게 뭔지는 알아요? 귓구멍 안 뚫리려고 있지도 않은 꼬리 흔들며 개처럼 네발로 기어 봤어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구멍을 벌리면서 생판 모르는 남자 좆 받아 봤냐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 말고 내가 당신보다 못한 게 뭡니까? 저도 우리 엄마한텐 귀한 자식입니다! 박래현 씨한테 이런 취급 받을 이유가 없다고!”
“내가 그러라고 했습니까? 난 처음부터, 윤준영 씨 어떻게 대우할지 다 밝히고 시작했습니다. 다 참작하고 이 집에 걸어 들어온 건 당신 아닙니까? 난 충분히 대가를 지급했다고 생각하는데.”
“덫 치고 내가 걸려들 날만 숨죽여 기다려 온 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박래현 씨야말로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오늘부로 우리 계약 끝난 거 아니었어요?”
“하, 진짜….”
“자꾸 저 몰아가면, 확 죽어 버릴 겁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커다란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 본 적은 없었다. 나는 속에 있는 울분을 다 토해 내듯 남자를 향해 악다구니를 쏟아 냈다.
“씨발,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죽는다고 했어요? 내가 당신 죽게 가만 놔둘 것 같아?”
“가만 안 놔두면, 회사 그만두고 24시간 내 옆에 붙어서 저 감시할 겁니까?”
“끝까지 해 보자는 거야, 윤준영?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데서 멈추는 게 좋을 거야.”
낮은 목소리로 위협했지만 내 협박이 통했는지 여유롭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박래현은 새하얘진 얼굴로 소파 팔걸이를 손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아이는 낳아요. 그 대신 당신이 빚 갚는 동안 어머니 병원비는 내가 충당하겠습니다.”
“그것 참 감사하네요.”
나에게 더 많은 돈을 빚으로 뜯어 가면서 인심 쓰는 척하는 말에 일부러 비꼬듯 힘주어 대답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려던 남자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자는 내가 죽든 말든 상관 않겠지만 자기 아이가 죽는 건 싫을 것이다.
“준영 씨, 진정해요. 래현이가 사후 피임약 발견하고 화나서 저러는 겁니다.”
“약 버리려고 했어요.”
“그러게 왜 약을 몰래 숨겨 놨어요?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습니까.”
“저 머리 아파서 먼저 들어가 쉴게요.”
쥐고 있던 걸 강제로 놓아 버려서인지 하루 내내 불안에 떨었던 것치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박영범을 두고 방으로 들어가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잔뜩 긴장해서 저녁을 먹은 탓에 소화가 안 돼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대체 박래현은 내게 왜 이다지도 잔인한 걸까. 내가 추론한 대로 분풀이할 오메가를 찾고 있던 박래현에게 내가 잘못 걸려든 건가? 사고의 틀을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작금의 일을 관조해 보니 박래현이 나를 괴롭힐 목적으로 접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병원에서 우연히 날 봤다는 말이 거짓이라면? 박래현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면 그 까닭이 무엇일까? 어쩌면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지점에 박래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박래현과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행적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그려 보았다. 쭉 살펴봤을 때 박래현과 접점을 갖는 부분이 하나 있긴 한데 바로 박수현이었다. 그러나 내가 페로몬을 맡은 유일한 알파가 하필 형제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접점에 특이점이 없었다.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는 일이지만 세상엔 그보다 더한 우연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더 파고들 건더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테라스로 향하는 유리문에 멈춰 선 나는 나를 등진 채 정원에서 담배를 피우는 박래현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둠 속에서도 오만해 보이는 어깨너머로 회색 연기가 길게 피어올랐다.
박래현은 내가 약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안 상태에서 지난 사흘간 나랑 뒹굴었다. 내 마지막 자존심까지 박살 내 나를 파멸시키려고 기꺼이 날 기만했다. 보통의 알파라면 러트까지 오게 한 상대에게, 특히 자기 아이를 가졌을 오메가에게 이따위로 잔인하게 굴지 못한다. 알파들의 보편적인 감정을 뛰어넘을 만큼 박래현은 오메가를 싫어하고 있다.
자신의 오메가가 되어 달라던 말은 페로몬에 취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었나 보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심장이 무참하게 뛰었다. 그 말에 잠시나마 설던 내가 등신이지만 허공에 기반을 둔 감정은 작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연약한 발톱을 세워 무언가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게 설령 지나가는 뜬구름이라 할지라도.
눈앞이 아득해져서 손으로 유리창을 짚었다. 박래현의 넓은 어깨가 왼쪽으로 기울더니 그의 시선이 언뜻 내 쪽으로 향하자 블라인드를 재빨리 내려 그의 시선을 차단했다. 발정기를 함께 보내면서 박래현에게 거세게 흔들렸던 감정은 봉우리를 채 피우기도 전에 썩둑 잘려 나가 흙탕물에 더럽혀졌다.
***
엄마가 병원을 옮기는 날이었다. 원래 지난주에 옮겼어야 했는데 우울증이 심해져서 의사가 퇴원을 일주일 뒤로 미뤘다. 박래현과 어젯밤에 몸을 섞긴 했지만 대화 한마디 나눌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여서 엄마를 만나러 가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차피 허락해 주지 않을 텐데 거절당해서 기분 잡치고 싶지 않았다.
아침을 먹은 뒤 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왔다. 계약이 파기되고 새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 굳이 박래현 개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다. 몸이 무겁고 기분이 울적해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에 엎드렸다.
“존나 재수 대가리 없는 새끼.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 같은 인간 말종을 만났을까. 씨발, 짜증 나!”
“윤준영 씨, 사람 안 보인다고 위아래도 없이 막 까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만 들어 박래현을 쳐다봤다. 정장을 갖춰 입은 그는 삐딱한 자세로 침대 옆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그쪽 앞에 두고 더한 말도 할 수 있는데. 1박 2일로도 부족합니다.”
계약이 파기된 이후 나는 박래현을 주인님이 아닌 그쪽 혹은 박래현 씨로 불렀다. 박래현은 처음엔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이더니 이제는 내가 뭐라고 부르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새 계약서를 작성할 때까지는 절대 주인님이란 호칭을 사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뭐 그딴 거 안 궁금하고, 오늘 어머니 병원 옮기는 날이죠? 내가 한 시까지 차 보낼 테니까 어머니 병원에 모시고 가요.”
“진짜요?”
기대하지 않았던 말에 좋아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박래현이 그 사실을 기억해 준 게 신기해서 나는 그를 향해 오랜만에 활짝 웃어 주었다. 박래현은 잠시간 내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괜히 헛기침을 했다.
“어머니랑 같이 있다가 여섯 시 반까지 집에 들어와요.”
“내가 죽어 버린다고 해서, 걱정돼서 그래요?”
“듣기 싫으니까 그 소리는 절대 입 밖에 꺼내지 말아요. 그리고 당신 어머니 병원비는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습니까.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다 거짓으로 들려요?”
“아니요.”
“이 돈으로 어머니 좋아하는 거 있으면 사 드리세요.”
“고맙습니다.”
박래현은 지난번처럼 백만 원권 수표를 몇 장 꺼내 시트와 베개 사이에 꽂아 넣었다. 화대를 받았으니 배웅이라도 해 줄 생각에 몸을 일으키는데 박래현이 어깨를 눌러 도로 눕혔다.
“여섯 시 반까진 늦지 말고 들어와요. 다른 데로 새면 가만 안 둬.”
“샐 곳도 없어요.”
“당신 열 있는데 병원 안 가 봐도 될까?”
“네, 저 굉장히 튼튼해요. 약 안 먹어도 감기는 혼자 알아서 나가요.”
박래현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엄마가 드디어 퇴원하고 요양 병원에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돼서 기뻤다. 괴로운 일이 연달아 닥치면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박래현을 원망했는데 그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서 그가 상식적으로만 행동해도 괜찮아 보였다.
엄마에게 활기찬 모습을 보여 주고자 오전엔 체력 단련실에 가서 운동으로 시간을 보냈다. 러닝 머신을 뛰며 땀을 흘리고 하체 운동을 했더니 오전이 금방 지나갔다.
박래현은 약속한 대로 한 시에 차를 보냈다. 퇴원 절차는 이미 끝나 있어서 우린 담당의와 간호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요양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 의심을 사지 않으려고 박래현이 붙여 준 운전기사를 요양 병원에서 보낸 운전기사로 둔갑시켰다.
정우는 엄마에게 식구와 제주도 여행이 잡혀 있어서 오지 못한다고 미리 죄송하다고 말 해놨다고 했다. 박래현에게 전화기를 뺏겨서 정우가 보낸 문자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내가 박래현에게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본 뒤라서 정우는 걱정이 많을 것이다.
엄마는 퇴원하기 전까지 우울증이 심해져 집중 치료를 받았다.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게 스트레스 요인이 되고 있지만 다 필요한 약이라 약을 줄일 순 없었다. 엄마는 최근 들어 이상한 꿈을 꾼다고 했다. 가슴속에서 뛰고 있는 심장이 자신이 아니라 전 주인을 찾으며 피를 흘린다는 내용이었다.
의사는 환자가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면서 이식된 심장을 받아들이고 친해져야 사라지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약이 지겨워 정신과 치료를 거부하는 엄마를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술만 끝나면 한시름 덜 줄 알았는데 아직 갈 길이 요원했다.
“그런데 손기호 씨한텐 연락 없었니?”
“엄마, 그 아저씬 잊어. 엄마한테 마음 있었다면 병원에 한 번이라도 찾아왔겠지.”
“그게 아니라,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혹시 네 앞에 나타나진 않았지?”
“내가 그 사, 아니 그 아저씨를 어디서 만나. 그쪽 동넨 얼씬도 안 했는데.”
손기호는 5월 하순에 우리 가족 앞에 나타났다. 명예퇴직한 공무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잠깐 휴식을 취하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7년 전에 상처했고 장성한 자식 둘은 외국에 나가서 혼자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 남자가 무척 예의 바르고 멀쩡하게 생겨서 순진한 우린 당연히 그런 줄로만 알았다. 빠른 속도로 엄마 생활에 침투한 그 남자는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엄마를 나 못지않게 열심히 설득했다.
엄마와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비용이었다. 집 보증금은 수술비를 대기에도 빠듯해서 수술을 받고 난 후 어디서 살지가 문제였다. 엄마와 내가 자기 집에 들어와 지내도 괜찮다는 손기호 말을 듣고 엄마는 마침내 수술을 받기로 했다.
“준영아, 그 남잔 내가 아니라 너한테 더 관심 있었던 거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정신이 맑을 때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아무래도 그 날강도가 꼴에 알파라고 너한테 접근하려고 날 이용한 게 아닌가 싶어. 혹시… 너한테 이상한 수작 부리진 않았지?”
“엄마, 그런 늙다리가 나한테 수작 부리면 내가 가만 뒀겠어? 근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그 남자가 자꾸 너에 관해서 뭘 물어보더라고.”
“그런 말을 왜 이제야 해?”
“그땐 내가 아프고 힘들어서 별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마음에 걸리네. 혹시 연락 오면 절대 받지 마라.”
우리 전 재산을 갖고 튄 그 씹새끼가 먼저 연락할 리가. 얼굴에 가면을 쓰고 지금도 어디선가 우리같이 가난하고 어리숙한 사람을 찾아 등쳐먹기에 바쁠 것이다.
“나에 관해 물어봤을 때 엄만 뭐라고 대답했어?”
“뭐라고 하긴. 너 애인 여러 명 있다고 했다. 거기다 젊고 건강한 알파들이 너랑 사귀고 싶어서 줄 섰다고 했지. 네가 나한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 인물에 애인이 없겠니?”
나이는 처먹을 대로 처먹어 놓고 그 좆같은 새끼가 우리 돈을 가로챈 거로 부족해 나까지 넘봤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편으론 차라리 본색을 일찍 드러냈다면 반 죽여서 눈깔을 파 버렸을 텐데,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 우습게 볼까 봐 해준이 가출했다는 소리도 안 했어. 어디 돈 벌러 갔다고 했지.”
“어, 잘했어. 우리 그 뱀 같은 새낀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리자.”
차에서 먼저 내린 나는 엄마가 내리길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팔짱을 끼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최고의 요양 병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병원 입구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1층 로비 벽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 정성껏 가꾼 바깥 풍경을 어디서든 내다볼 수 있어 좋았다. 여름이 한창 익어 갈 때라 녹음이 우거진 소나무와 정원수, 색색이 핀 꽃들이 우울증을 앓는 엄마에게 큰 위로를 줄 것 같았다. 장비와 의료진도 최고라는데 엄마가 이런 곳에 머물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엄마는 전망이 좋은 1인실 방에 배정되었다. 엄마의 의심을 사기 싫어 2인실로 배정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박래현은 들어주지 않았다. 작은 평수의 방은 병실이라기보단 가정집처럼 아늑하고 편리하게 꾸며져 있었다. 담당의와 간호사, 24시간 엄마와 있을 간병인까지 전부 마음에 들어 기분이 가벼워졌다. 둘 다 괴롭고 힘들게 사는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좋은 곳에 있으니 대리만족이 되었다.
엄마는 병원을 둘러보는 동안 시종일관 내게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엄마의 우울증에 나도 한몫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수술 후유증과 우울증으로 두뇌 회전이 느려졌다곤 하지만 엄마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엄마의 침묵에 항복한 나는 부자 애인이 생겼다고 반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나는 엄마를 소파에 앉히고 그 맞은편에 앉았다.
병원에 있다 보면 엄마는 다른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게 될 테고 병원비로 한 달에 1,500만 원 이상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원래 병원비가 비싼 데다 엄마에겐 간병인이 단독으로 붙어 더 비싸다는 말을 들었다.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어서 더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엄마를 평범한 병원으로 옮기고 빚을 갚게끔 나머지 돈을 내게 주었으면 싶었다.
“엄마, 나 사실은 연애하고 있어.”
“연애? 누구랑?”
엄마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진 걸 보고 가슴이 뛰었다.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배 타고 나갔다가 돌아온 직후 인천에 있는 술집에서 우연히 알파를 만나게 되었다고 얘기했다. 잘생기고 돈 많고, 성격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박래현을 치켜세웠다. 그 남자 덕에 배 타러 나가지 않게 되었고 엄마를 만나러 올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첫 만남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그럴싸하게 꾸며 내면서 애인에게 사랑받으며 잘 지낸다는 말로 엄마를 속였다. 엄마가 걱정하지 않게끔 그가 너무나 잘해 줘서 행복하다고 열심히 엄마를 설득했다.
“나랑 여기 오겠다는 걸 내가 말렸어. 엄마한테 먼저 얘기하는 게 순서일 거 같아서.”
“준영아, 혹시 내 병원비 때문에 그러니? 난 이렇게 화려하고 좋은 병원 필요 없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자식 팔아 목숨을 사.”
“우리 서로 좋아해.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서 엄마 병원비 대 주는 거야. 나 졸업해서 직장 구할 때까지 그 사람이 다 책임지겠대. 날 좋아하지 않으면, 내가 어디가 예쁘다고 이렇게 잘해 주겠어? 그러니까 나 믿고 엄마도 마음 편히 가져.”
“네가 젊고 사랑스러우니까 늙은 알파가 널 꼬셨겠지. 병들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어미까지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잘 생기고 젊고 능력 있는 사람이야. 그 사람도 나도 서로 좋아해.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
“…….”
“내가 다음에 올 때 데려오든가 아니면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여 줄게.”
가난한 청년이 한 달에 천만 원 이상을 병원비로 낼 방법은 부자 애인을 두는 것 말곤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는 말에 엄마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방어기제가 발동해 그녀가 내 말을 믿게끔 유도했을 수도 있다. 진실을 알아봤자 해결할 방법이 없으므로 나를 위해 적당히 속아 넘어가 주는 게 좋을 것이다.
애인이 해외 출장이 잦은 탓에 그를 따라다니느라 병원에 자주 찾아올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진작에 이 핑계를 찾지 못한 나를 타박했다. 나중에 배불러 나타나도 애인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덜 놀라실 것이다. 최선을 다해 엄마를 안심시키고 감옥에 돌아가기 위해 날 기다리는 차에 올랐다.
새로 계약서를 작성하자던 박래현은 10일이 지나도록 별말이 없었다. 그사이 섹스 네 번으로 1,200만 원을 탕감했다. 한 시간을 늘려 돈을 더 벌고자 천박한 음담패설로 박래현을 흥분시켰다. 구멍과 속살로 굵다란 자지를 빨아들이고 조이면서 빚을 갚는 동시에 내 본능을 채웠다.
육체와 마음의 경계는 정확하게 분리된 게 아니라서 살갗이 닿고 성기가 섞이면 분계선이 흐트러지고 모호해졌다. 엄마를 보면서 몸 안에 든 장기에 감정과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에 새겨진 기억은 습관이 돼서 오랫동안 마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박래현과 꾸준히 섹스하다보니 내 몸에 박래현의 일부가 아로새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박래현이 나 이외에 누군가를 사귄다거나, 나 이외에 누군가와 몸을 섞는다거나, 나 이외에 누군가에게 눈을 돌린다는 상상을 하면 속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박래현이 미운 것과는 별개로 그자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강해졌다.
육체적으로 떨어지기 힘든 관계라면 내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사람 옆에 다른 이가 얼씬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상무님. 윤준영 씨 지금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회사로 들어가겠습니다.”
운전기사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박래현에게 전화를 넣었다. 박래현이 회사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했는지 그는 바로 퇴근하겠다고 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들어가세요.”
기사에게 인사하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차에서 내렸다. 박래현에게 몸과 마음이 시달렸더니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근육이 아프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오늘 밤엔 빚을 탕감하는 대신 잠을 푹 자는 게 좋을 듯했다.
신발을 벗으려던 나는 못 보던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디자인이 특이하고 고급스럽게 보이는 신발이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어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주방으로 갔다. 이 차장과 정 차장이 얘기를 나누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우 갈비에 소스를 발라 스테이크처럼 구운 요리는 내가 일하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제일 잘나가는 스테이크보다 맛있었다.
“저 다녀왔습니다.”
“병원 잘 다녀왔어요? 어머닌 좀 어때요?”
정 차장이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녀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피임약 사건 이후 내게 더 살갑게 대했다.
“덕분에 많이 좋아지셨어요. 오늘 싸 주신 약과랑 떡 잘 드시겠대요. 와, 저녁은 제가 좋아하는 갈비 스테이크네요!”
“준영 씨 요즘 밥 많이 안 먹는다고 상무님이 직접 전화해서 주문하셨어요. 오늘 저녁은 많이 먹어요.”
정 차장은 박래현이 나를 생각해서 전화한 것처럼 말하지만 박래현이 걱정하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배 속에 들었을지도 모를 아이였다. 내가 영양을 잘 섭취해서 잘난 아이를 낳아 주길 바랄 것이다.
아이가 험난한 세상을 잘 헤쳐 가도록 나도 아이에게 튼튼한 몸과 지혜로운 머리와 멋진 외모를 주고 싶었다. 내가 아빠로서 해 줄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 왔어요? 현관에 못 보던 신발이 있네요.”
“정치헌이라고 상무님 친구분이 왔어요. 저녁 같이 먹을 건가 봐요.”
정 차장의 시큰둥한 표정이 정치헌을 반기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보여 줬다. 목소리에도 불만이 가득했다.
“거실에 아무도 안 보이던데 어디 가셨지?”
“2층 거실에 있나? 음식 준비하느라 차만 대접했어요.”
“제가 만나 볼게요.”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박래현 본가에 들른 지 딱 3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정치헌은 박래현과 담판을 지으려고 찾아왔을 것이다.
씨발, 결혼할 거였으면 히트 사이클이 오기 전에 결정했어야 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 쉽진 않겠지만 언제 임신할지 모르는 오메가를 박래현 옆에 두고 이제야 찾아온 정치헌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정치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2층으로 올라가려던 발길을 돌려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에게 박래현을 뺏기는 것도 싫은데 나와 배 속에 들었을지도 모를 아이의 운명이 내 의지가 아닌 정치헌 의지에 결정된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에 나는 잽싸게 잡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2층은 박래현 개인 공간이라 체력 단련실 말고는 내게 금지된 곳인데 내가 허락받지 못한 곳을 정치헌은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그 작은 차이가 섹스 파트너 혹은 씨받이라는 내 존재를 확실하게 했다. 점점 가까워지던 발소리가 내 앞에서 뚝 멈췄다. 난 그제야 눈을 들어 그에게 가볍게 눈인사했다.
“윤준영, 오랜만이야.”
“네, 그러네요. 식사하러 오셨다면서요.”
“뭐, 식사는 부차적인 거고 목적은 다른 데 있지. 래현이 곧 도착할 때 됐는데 늦네. 차가 밀리나?”
“앉으세요.”
내 허락 없이 말을 내려서 괘씸했지만 참기로 했다.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꼰 정치헌이 테이블 위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불을 붙이는 동작이 별 것 없는데도 우아해서 시선을 끌었다. 둘은 오래 사귀었을까? 몸 로비를 할 정도면 박래현에게도 꽤 적극적이었을 것 같은데 왜 박래현을 넘어뜨리지 못한 걸까.
나는 티가 나지 않게 정치헌을 살폈다. 그가 입은 드레스 셔츠에는 꽃 속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프린트돼 있었다. 약간 짧은 듯한 검은색 팬츠는 작지만 호리호리한 정치헌에게 잘 어울렸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오늘 박래현을 제대로 유혹할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하고도 내가 신경 쓰이는지 도도한 표정으로 나를 살피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소원대로 아이는 가졌나?”
“지난주에 박래현 씨랑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냈습니다. 아직 결과는 모르겠습니다.”
“걱정했는데 박래현이 고자는 아니네. 너한텐 페니스 잘 세우나 보지?”
“네.”
“래현이를 꼬신 걸 보니 기술이 꽤 좋은가 봐. 나이도 어리던데 씹질은 어디서 배웠어?”
“제 사업 기밀이라 알려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박래현이 말해주지 않아서 내가 어떻게 박래현 뇌관을 건드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저 단순하게 육탄 공세로 밀어 붙여 박래현을 쓰러뜨렸다. 그 사실을 알면 정치헌은 놀라서 뒤로 자빠질 것이다.
“그래, 먹고살려면 그런 노하우라도 있어야지.”
붉은 입술 사이로 희부연 연기를 내뿜으며 정치헌이 조소 어린 눈길로 나를 보았다. 공정하게 실력으로 대결해야 할 국가 프로젝트를 몸 로비로 따낸 사람이 당당하게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뇌물 중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지저분한 게 성 상납일 텐데 이 사람들의 도덕적 기준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회장님이 주신 선물 쓰레기통에 버렸다면서. 보아하니 사용 안 했나 보네.”
사후 피임약 때문에 박래현에게 당했던 일이 생각 나 몸이 떨렸다. 그 사실을 얘기한 걸 보면 회장은 벌써 정치헌을 박래현 배우자로 여기는 듯했다.
“너 아이 낳아 주는 대가로 얼마 받았냐? 돈 받고 아이 파는 게 좋아? 돈이 궁해도 아이를 사고파는 건 좀 아니지.”
그는 볼이 홀쭉해지도록 필터를 빨고 나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나는 딱히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들고 있던 잡지로 눈을 내렸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정치헌이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래현이가 부른 돈에 5억 더 얹어 줄 테니까 아이 지워. 나도 아이를 낳을 텐데 나중에 법적인 문제로 복잡해지는 거 질색이야. 네가 어질러 놓은 거, 뒷설거지 어차피 내가 해야 할 거 아냐.”
“싫습니다. 저는 박래현 씨와 계약했지 정치헌 씨와 계약한 게 아닙니다.”
“아이 낳아서 래현이 발목 잡고 싶구나. 아니면 통 큰 분이라 5억 더한 게 너무 작아서?”
“저 정치헌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싸구려 아닙니다. 계약금이 40억인데, 제게 5억 더 얹어주셔봤자 위약금도 못 내요. 한 200억 부르면 고려해 볼게요.”
정치헌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5억을 더 얹어준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전혀 상상해 보지 않은 금액이었을 것이다.
“박래현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여전하네. 아이 낳아 주는 오메가한테 어떻게 40억을 줄 생각을 해?”
“…….”
“너 그날 우리 대화 듣고도 머리가 안 돌아가니? 내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래현이가 그 아이 그냥 둘 거 같아?”
“저는 박래현 씨와 계약을 했고, 선택권이 없습니다.”
“너 머리 잘 돌린다. 설마 여기 계속 눌러앉을 생각은 아니겠지?”
사후 피임약 때문에 반쯤 돌아 버린 박래현을 겪지 않았다면 정치헌 말을 고려는 해 봤을 것이다. 위약금과 내가 쓴 돈을 합해 8억 정도 되므로 정치헌이 내게 그 돈만 대 준다면 이 판에서 깨끗이 물러나겠다며 협상에 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뒤끝 끝판왕인 박래현을 두 번이나 속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회장도 믿을 수 없는데 내가 정치헌을 언제 봤다고 믿겠는가? 내게서 승낙을 얻고 난 뒤 정치헌이 박래현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쳐 나를 곤경에 빠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이라곤 엄마와 정우뿐이었다.
“둘이 무슨 얘길 나누고 있어?”
박래현과 박영범의 등장으로 정치헌은 내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정치헌이 일어나 박래현을 반갑게 맞이하는 동안 나는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계약이 깨져 버린 상태라 나는 월요일부터 박래현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계약 전이나 주인이었지 이제 박래현은 내게 채권자 이상은 아니었다.
“래현아, 어서 와.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네.”
“길이 좀 밀렸어. 그런데 내 강아지는 주인 보고 인사 안 합니까? 요즘은 주인이 먼저 인사해야 하나?”
강아지란 말에 등줄기로 소름이 내달렸다. 평소였으면 개새끼였을 텐데 박래현은 정치헌에게 질투를 유발하고자 낯간지러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서류가방과 재킷을 스툴에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칼을 부스스 흩트리더니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췄다.
“아직도 열 있네. 영양제 한 대 놔 줄까요?”
“피곤해서 그래요. 오늘 푹 자고 나면 나을 거예요.”
피임약을 들킨 이후로 처음 하는 입맞춤이었다. 요즘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 섹스하면서 입을 맞추지 않았다. 오랜만에 하는 키스가 어색해 입술을 피하려다가 내게 심한 말을 퍼부은 정치헌에게 복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나는 즉각 박래현 뒤통수를 잡아 누르며 다른 손으로 그의 입술을 벌려 혀를 깊게 삽입했다. 담배 향이 나는 혀를 질척하게 문지르고 빨다가 아쉽다는 듯 입술을 떼자 박래현이 나를 보고 슬쩍 웃었다. 뒤로 밀어낼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고마웠다.
“어머니는 좀 어때요? 병원 마음에 든다고 하셔?”
“네. 병원이 아니라 호텔인 줄 알았어요. 너무 좋아서 엄마가 돈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제 애인이 재벌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켜드렸어요.”
“잘했습니다.”
늘 건조했던 눈과 입이 부드럽게 풀어지면서 잠깐 내보인 웃음에 호흡을 멈췄다. 나긋해진 갈색 눈동자가 신기해서 나는 멍청하게 그를 응시했다. 딸깍거리는 작은 소리가 아니었다면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박래현 속눈썹을 만졌을 것이다. 박래현이 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정치헌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입술에 물려 있는 담배를 꺼내 반으로 부러뜨렸다.
“담배 피우려면 테라스 나가서 피워. 여기선 담배 못 피워.”
“아냐, 됐어. 나 배고픈데 밥 안 줘?”
“잠깐만 기다려.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같이 올라가. 할 얘기가 있어.”
박래현과 정치헌이 나란히 계단으로 향하는 모습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내 심장처럼 댕강 부러진 담배로 시선을 옮겼다. 옷만 갈아 입고 금방 내려올 줄 알았던 두 사람이 2층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두 사람은 방에서 무슨 얘길 나눌까. 아직 밤도 아닌데 벌써 수상한 짓을 하고 있진 않겠지.
내 알파가 다른 오메가와 한 공간에 있는데 속수무책 방관할 수밖에 없는 내 처지가 답답했다. 내 안에서 불이 일고 속이 거꾸로 뒤집히는데도 그저 이 불길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불끈 쥔 주먹을 풀고 열이 오른 눈가를 손등으로 눌렀다. 모든 불안을 내게 떠넘긴 채 시간은 혼자 느릿느릿 걸어갔다.
2층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망막에 잡힌 사물이 기괴하게 굴절되었다. 박래현에게 내가 가진 감정과 비슷한 형태였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싫어하면서도 저 남자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내가 갖고 싶은 유일한 알파란 점에서 그랬다.
만신창이가 된 나를 구덩이에 처박아 놓고서 저 빌어먹을 남자는 다른 오메가와 새로운 둥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씨발, 이건 명백한 반칙이었다. 나와 몸을 섞은 박래현도 진창에서 뒹굴어야 형평성에 맞았다. 같이 붙어먹었는데 나만 너덜너덜해져서 망가지는 건 옳지 않았다. 박래현도 나처럼 힘들어야지 혼자만 빠져나가게 내버려 두진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웃으면서 내려오는 모습에 나는 허무맹랑한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적당한 키 차이에 둘 다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박래현을 엿 먹이겠다는 의욕이 무참하게 꺾였다. 나는 머릿속을 채웠던 생각들을 냉철하게 비웃었다. 박래현이 정치헌과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그건 박래현 마음이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내가 박래현에게 느끼는 독점욕은 나중에 다른 알파를 만나 박래현보다 더 오랫동안 관계하다 보면 사라지게 될 본능이었다.
“윤준영 씨, 당신 좋아하는 밥 먹으러 갑시다.”
자수 장식을 가미한 검은색 티에 베이지색 팬츠를 입은 박래현이 내 팔을 잡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공교롭게도 박래현이 입은 티는 내가 입은 티와 바탕색만 다르고 무늬가 같아서 꼭 커풀룩처럼 보였다. 정치헌 신경을 긁지 않아도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욕심이 과한 사람이었다.
주방에 들어가서도 박래현은 정치헌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앉을 의자만 뒤로 끌어당겼다. 나와 박래현이 나란히 앉고 정치헌과 박영범이 우리 맞은편에 앉았다. 기분 탓인지 처음보다 붉은 기를 띠는 정치헌 입술이 눈에 거슬렀다.
이 차장과 정 차장이 밥그릇에 밥을 수북이 담아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네 개의 밥그릇 중에 밥이 제일 많이 담긴 밥그릇이 내 앞에 놓였다. 반찬은 버섯으로 장식한 갈비 스테이크에 야채오이쌈말이, 새우 두부전, 갓 담은 김치 등이었다. 싱거운 음식에 적응돼서 드디어 이 차장이 만들어 주는 요리가 맛있어지기 시작했다.
“형, 많이 먹어.”
말은 정치헌에게 하면서 박래현은 내 앞 접시에 갈비와 버섯, 새우 두부전을 덜어 가지런히 놓았다. 빚을 갚으려면 몸이 건강해야 해서 혓바늘이 돋은 혀로 열심히 밥을 먹었다. 박래현은 사업 얘기를 하면서 내 앞접시가 비는 족족 갈비와 다른 음식으로 접시를 채웠다. 박래현이 내게 친절하게 구는 까닭을 알고 있기에 더 가증스러웠다.
세 사람은 식사하는 내내 정부의 새로운 의료 정책에 관해 열심히 의견을 나누었다. 잘 모르는 분야라서 나는 돌멩이처럼 둔하게 앉아 꾸역꾸역 밥만 먹었다. 책도 TV도 핸드폰도 없는 세상에서 나 혼자 도태되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상무님, 말씀하신 대로 위스키 안주와 라즈베리 에이드 거실에 준비해 뒀습니다.”
“네, 정 차장님, 고마워요. 저녁 잘 먹었어요.”
저녁 식사가 슬슬 마무리될 것 같은 분위기여서 나도 사람들을 따라 일어섰다.
“저녁 잘 먹었습니다. 저는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쉴게요. 말씀들 나누세요.”
나는 몹시 피곤한 표정으로 박래현을 쳐다봤다. 이 사람들 대화에 끼었다간 오늘 밤 잠을 못 이룰 것 같아서 얼른 발을 뺄 작정이었다.
“아홉 시도 안 됐는데 어딜 내빼려고. 내 강아지가 옆에서 왕왕 짖어 줘야 재밌지.”
박래현은 내 어깨를 꽉 움켜잡고서 나를 거실로 끌고 가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박래현을 노려보는 정치헌 얼굴로 불쾌한 기운이 지나갔다. 박래현 행동만 놓고 보면 정치헌에게 마음이 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심인지 의도된 연출인지는 박래현만 알 것이다.
박영범은 위스키와 얼음을 챙겨 뒤늦게 자리에 합류했다. 그는 유리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따른 다음 얼음이 들지 않은 잔을 박래현에게 건네고 얼음이 든 잔을 나와 정치헌에게 건넸다. 일주일 만에 마시는 술이었다. 위스키의 독한 향이 마음에 들어서 나는 허겁지겁 술잔에 코를 박았다.
“당신은 술 마시면 안 되잖아. 술 대신 이거 마셔요.”
내게서 술잔을 뺏어 든 박래현이 얼음을 동동 띄운 라즈베리 에이드를 손에 쥐여 주었다. 아쉬운 마음에 눈은 술잔에 둔 채 다홍색 음료를 마셨다. 에이드는 시원하고 새콤달콤해서 맛이 괜찮았다.
“참,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얘기해 봐.”
“그동안 왜 내 전화 안 받았어? 내가 네 앞에서 이렇게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겠냐?”
“윤준영이랑 아기 만드느라 바빠서, 딴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
“그만 화 풀어. 그땐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왜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해? 배신감이 커야 화도 나는 거야. 안 그래요, 윤준영 씨?”
사후 피임약 때문에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당장 내 멱살을 쥐고 흔들 기세로 박래현 눈이 험악하게 빛났다. 좆같은 박래현은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고찰하지 않았다. 모든 걸 내 잘못으로 돌려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서 꼴리는 대로 나를 갖고 놀았다.
“우리가 결혼하면 너희 회사나 우리 병원, 둘 다 좋은 거 아냐? 그리고 나 계속 너한테 마음 있었어. 약혼 얘기 취소하고 후회했다고.”
“나한테 마음 있는 사람이 결혼 얘기까지 오가는 상황에서 왜 함부로 몸을 굴리고 다녔어?”
정치헌은 나와 박영범을 힐끗 쳐다보면서 다음 말을 망설였다. 도도하고 예쁘장한 얼굴에 연한 홍조가 올라왔다.
“2층 올라가서 따로 얘기하면 안 될까?”
“여기서 말해. 윤준영은 들어도 뭔 말인지 모르고 영범 형은 내 측근이라 어차피 다 알게 돼.”
“그 프로젝트 못 따면 누나와 동생한테 밀릴 거 같았어. 씨발 나라고 그 짓 하고 싶어서 했겠냐? 나 장관은 처음부터 날 표적으로 삼고 우리 프로젝트 퇴짜 놨어. 한번 대 주고 나 장관 약점 잡아서 우려먹으려고 그랬어. 영상으로 찍어 놨으니까, 그 새낀 이제 독 안에 든 쥐야. 박래현 똑똑하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형은 평생 아버지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고 살아.”
“래현아, 나랑 결혼해. 내 치부까지 다 드러내면서 지금 너한테 매달리고 있잖아.”
사뭇 떨리는 목소리로 청혼을 한 정치헌이 대답을 기다리며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나는 물방울이 맺힌 유리컵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손바닥이 차가워지면서 살갗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박래현은 협상의 대가답게 정치헌이 원하는 대답을 쉽게 내놓지 않았다. 바람피운 건 자기도 마찬가지면서 그는 정치헌이 완전히 밑바닥을 드러내며 자신 앞에 무릎 꿇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우리를 에두른 적막에 숨이 막혀 곁눈질로 힐끗 박래현을 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위스키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박래현이 갑자기 내 눈을 직시했다.
“윤준영 씨,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랍니까?”
“네? 뭐가요?”
“내가 저 사람이랑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
“왜 대답이 없어요? 윤준영 씨가 하란 대로 할게요.”
“박래현! 너 진짜 이렇게 나올 거냐? 우리 일을 왜 윤준영이 결정하는 건데?”
내가 뭐라고 대답을 내놓기 전에 정치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고막을 흔들었다. 화가 나서 발개진 얼굴로 정치헌이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눈물을 참고 있는지 그의 흰 눈자위가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각오가 대단하다면 나 장관이랑 형이 떡친 동영상 내게 넘겨.”
“그, 그건…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영상을 공개해?”
“왜 못해? 윤준영 버리라면서. 내 아이를 밴 오메가를 버리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지. 다른 용도로는 안 쓸 거야. 형이 나중에 내 뒤통수 치는 것만 막고 싶어서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 각오 아니면 돌아가. 내가 호구야, 두 번을 같은 사람한테 속게.”
나를 버린다는 박래현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나를 버릴 생각이라면 사후 피임약을 핑계로 내게 위약금을 씌워 내쫓았지 그렇게 길길이 날뛰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손에 떡 들고 자기 취향대로 즐기겠다는 건가? 박래현은 내 어깨에 팔을 얹더니 손을 꺾어 뺨을 쓰다듬었다.
“윤준영 씨 의견을 물었는데 왜 대답이 없습니까?”
내 의중이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진지한 눈빛이었다. 박래현은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 습관처럼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두 분 문제는 두 분이 알아서 하시면 안 될까요? 저는 드릴 말씀이 없네요.”
속으론 그 결혼 절대 반대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사실 박래현에게 다른 오메가가 붙는 것도 법적인 배우자가 생기는 것도 다 싫었다. 많이 바라진 않았다. 아이를 낳고 내가 돈을 다 갚을 때까지만 박래현이 온전히 내 소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배는 둥실 부풀어 오르는데 정치헌 눈치를 보며 혼자 구석에 숨어서 뒤뚱거릴 상상을 하면 치가 떨렸다. 여기다 정치헌이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박래현 관심은 온통 그 아이에게 쏠릴 것이다. 나야 그런 대접에 익숙하지만 태어날 아이는 귀하게 대접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박래현이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 줄 뻔히 알면서 내 진심을 말할 순 없었다. 내가 속말을 입 밖에 낸 순간 이 남자는 나를 비웃고 놀리며 얼마 남지 않은 내 자존심을 날려 버릴 것이다.
“영상 보여 줄게. 대신 내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어.”
“올라가서 보여 줘.”
“좀 피곤한데, 오늘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될까? 너랑 정리해야 할 일도 있고.”
“내 옆방 비었으니까 거기서 자.”
“나 집에서 입을 옷 하나만 빌려줘. 네 건 좀 크겠지만.”
남은 위스키를 비우고서 박래현은 정치헌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내 알파가 나 아닌 다른 오메가를 데리고 자신의 거처로 올라가는 모습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칼날에 살점이 난도질당해 검붉은 핏덩이가 뚝뚝 떨어졌다.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는데 고통은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찾아와 나를 질식시켰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충격과 울분에 이성이 흐릿해졌다. 많은 밤과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낸 나를 두고 박래현은 배우자로 정치헌을, 정부로 나를 택했다. 나는 아이를 낳아서 두 사람에게 건네줘야 하고 박래현이 놓아주지 않으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어딘가에 처박혀서 저 남자 몸을 받아들여야 한다. 섹스파트너는 가당치 않고 심심풀이 섹스토이가 될 신세였다. 두 사람이 사라진 2층을 노려보던 나는 갑작스럽게 피로가 몰려와 몸을 일으켰다. 어딜 보아도 내가 벗어날 수 없는 벽만 존재했다. 사방을 둘러싼 시꺼멓고 견고한 벽이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나를 압박했다. 가슴이 답답해서 나는 옷의 목둘레를 잡아당겼다.
“준영 씨, 방에 들어갈 겁니까?”
“네.”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나도 방에서 작업해야겠어요.”
작업대에 노트북을 펴 놓고 뭔가를 작성하던 박영범이 방으로 향하는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가 들어갈 수 있게끔 문을 열어 주었다.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세상에 알파가 래현이 혼자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 상심 안 했어요. 저 두 사람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해요.”
“…잘 자요.”
“박 실장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닫은 문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박영범이 내 말을 믿어 줄 것 같지 않았다. 이대로 쓰러져 자기엔 이른 시간이라 샤워부터 끝내고 파자마 가운을 입었다. 열이 더 오르는지 눈알과 입 안이 건조하고 빡빡해졌다.
박래현은 아이를 낳겠다고 했는데 박래현이 결혼하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될까? 박래현이 찾아오면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결혼을 미뤄 달라고 부탁해 볼까? 내 의견을 참고할지도 모르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얘기를 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박래현이 파 놓은 함정으로 한 발 내딛던 나는 그 인간이 내 의견에 따라 결혼 같은 중대한 일을 결정할 까닭이 없다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오가는 동안 시간이 흘러갔다. 대략 한두 시간 흐른 것 같은데 박래현은 날 찾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침대 위에 풀썩 몸을 던졌다.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청하고 싶은데 내 마음은 어느새 2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정치헌이 박래현을 유혹하고 있을까?
내가 첫 오메가라면 박래현은 나와 관계하면서 오메가에게 면역이 생겼을 테니 다른 오메가를 안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키스하고 몸을 섞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할수록 두 사람 모습이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 숨을 몰아쉬며 벌떡 일어났다. 잠이 오지 않아서 반바지를 입고 테라스로 나갔다.
슬리퍼에 발을 꿰고 정원의 잔디 위를 걷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내가 걸어 나온 환상 속의 성을 돌아보았다. 환하게 불이 켜진 일층 거실에서 천천히 눈을 들어 2층을 올려다보았다. 박래현 방으로 짐작되는 방을 한참 쳐다보다가 측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 그림자가 비치지 않아 저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입이 바싹 마르고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정치헌은 박래현에게 아이를 지우자고 꼬시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정치헌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박래현은 그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박래현이 결혼하든 하지 않든, 아이를 낳아야 하고 빚을 갚아야 하는 내 처지가 변하진 않는다. 갑자기 종아리가 따끔거려서 모기가 문 곳을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먹이를 발견한 모기떼의 공격에 한군데만 물린 게 아닌지 양쪽 다리가 다 간지러웠다.
별수 없이 욕실로 들어가 종아리를 찬물에 씻어 내렸다. 확인해 보니 여덟 군데가 물려서 발갛게 부어 있었다. 침대에 앉아 화풀이하듯 다리를 긁으면서 2층에 올라갈 구실을 고민했다.
방 안을 둘러보던 내게 박래현 시계가 든 테이블이 보였다. 시계를 꺼내 들고 발소리를 죽여가며 2층으로 올라간 나는 박래현 침실로 추정되는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이 없어 그 옆방 문에도 귀를 대 보고 있는데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방음 시설이 잘된 집이라 문에 귀를 대 봐도 윙윙거리기만 할 뿐 대화 내용을 알아들을 순 없었다.
이어지던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찾아와 나는 후닥닥 계단 쪽으로 몸을 피했다. 서재에 있던 안락한 카우치가 생각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알파와 오메가인 두 사람은 사귀던 사이였고 곧 결혼해 부부가 된다. 계약 관계로 맺어져 섹스를 파는 나와 달리 키스나 섹스는 그들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온 나는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힘겨운 하루 끝에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두개골이 깨질 듯 아팠고 몸에 열이 올랐다. 여름 감기는 걸려 본 적이 없어서 쉬면 금방 나을 줄 알았는데 수분이 다 빠져나간 고목처럼 몸이 버석거렸다. 나는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몸을 웅크렸다.
“엄마, 나 아파. 씨발 존나 아파서 뒤질 거 같아….”
죽음 앞까지 다녀온 사람에게 투정을 부리는 내가 한심했다. 내가 투정 부릴 대상은 엄마가 아니라 다른 오메가와 시시덕거리느라 아픈 나한테 내려와 보지도 않는 박래현이었다. 무력감과 열기 때문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계속 몸을 뒤척였다. 열두 시가 넘어 정원의 외등이 꺼지자 방에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열이 오른 몸은 오감이 예민해져서 나는 나를 안아 주던 강인한 팔뚝을 그리워했다. 내 입술과 얼굴을 핥아 주던 육감적인 혓바닥, 구멍 안을 파고들던 굵은 살 기둥. 좆 대가리에 몸이 다 파먹히는 줄도 모르고 좋아서 허리를 흔들던 형편없는 내 모습까지 생생하게 기억났다.
자기만 보게 내 몸을 길들여 놓고 박래현은 이제 다른 오메가와 몸을 섞고 있다. 부어오른 목에서 울음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슬픔인지 노여움인지 모를 버거운 감정에 가슴이 눌려 숨쉬기가 힘들었다.
정치헌의 흰 등을 타고 올라 핏줄 선 자지를 박아 대는 박래현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붉은 입술에 입 맞추는 입술이며 몸을 더듬는 손이 선연하게 그려져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지금 정치헌이 임신하게 되면 내가 낳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찬밥 신세가 될 것이다. 그래도 내 아이가 1~2년은 오롯이 혼자서 사랑받게 해 주고 싶었다. 아이도 아이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박래현이 다른 오메가를 안는다는 사실이 진저리나게 싫었다.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박래현을 죽이고 싶었다. 막연하게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때는 이렇게 괴롭지 않았는데 두 사람 결혼이 현실로 다가오자 가시 돋은 손이 오장육부를 뜯어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있어선 안 된다. 박래현은 내 페로몬에 익숙하니까 페로몬을 풀어서라도 박래현을 내 침대로 끌고 와야 한다. 다른 건 전부 무시하고 나는 본능적으로 박래현을 데려올 생각만 했다. 그러나 상황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렸을 때 침대 시트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정신은 가물가물해졌다. 어지러운 몸을 일으켜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리자 시꺼먼 바닥에서 빛 덩어리들이 튀어 올라 내 발목을 끌어당겼다.
***
몸 어딘가에 시원한 감촉이 느껴져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커다란 물수건이 이마를 덮고 있고 팔뚝엔 링거줄이 매달려 있었다. 옆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 가만히 귀 기울였다. 박래현과 박은수였다.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였더니 박래현이 순식간에 다가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는 미지근해진 물수건을 없애고 새 물수건을 이마에 얹었다. 서늘한 손바닥이 열을 재듯 내 볼을 만졌다.
“윤준영 씨,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혼자 쓰러져 있으면 어떡합니까?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나 부르기 힘들면, 영범 형이라도 불렀어야지. 나 완전히 도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요?”
바싹 마른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나는 입술 끝만 달싹거렸다.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행동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가 박래현과 정치헌을 방해할 생각까진 했는데 실행에 옮겼는지 안 옮겼는지 헷갈렸다.
“정치헌 씨는요? 갔어요?”
“집에 갔어요.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그런데 왜 출근 안 하고 여기 계세요?”
“지금 새벽 네 시입니다. 당신 자고 있나 보러 내려왔다가 쓰러진 거 발견하고 은수 누나 불렀어요.”
2층 서재에 들어가 두 사람 앞에서 추태를 부리진 않아 다행이었다. 지금은 괜찮은 걸 보니 발작처럼 찾아왔던 광기는 아마도 열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박래현 옆에 서 있는 박은수에게 눈을 돌렸다. 자다가 달려왔는지 박은수는 수더분한 옷차림에 화장기 없이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안해 나는 힘없이 웃었다.
“선생님, 주무셔야 할 시간에 죄송해요.”
“괜찮아요. 래현이가 어찌나 호들갑을 떨던지, 나는 정말 큰일 난 줄 알았어요.”
“누나, 내가 언제 호들갑을 떨었어? 시간 되면 와서 봐 달라고 했지.”
“나 이날 이때까지 너 그렇게 서두는 모습 첨 봤다. 꼴불견인데 봐줄 만했어. 열도 내리고 영양제도 놨으니까 난 집에 가야겠다.”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준영 씨, 딴생각하지 말고 푹 쉬고 잘 먹으면 금방 나을 거예요.”
박래현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는 바람에 난 누워서 인사해야 했다. 바닥에서 가방을 챙겨 든 박은수는 몸이 안 좋으면 내일 오후에 한 번 더 들르겠다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박래현, 준영 씨 절대 스트레스 받게 하지 마. 지금 제일 조심해야 돼.”
“알았어. 형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차 갖고 왔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 혼자 가도 돼.”
“다음 주에 진료받기 전에 연락할게.”
박은수를 현관까지 배웅해 주면 좋으련만 박래현은 뻔뻔하게 내 옆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다. 박은수는 신경 쓰지 않고 내게 싱긋 웃어 준 뒤 방을 나갔다.
“이제 가서 주무세요. 열 내려서 괜찮아요.”
“아까 2층에 올라왔어요?”
“아, 아니요! 제가 왜 2층에 올라가요? 운동할 시간도 아닌데.”
“시계가 서재 앞에 떨어져 있던데, 시계에 날개라도 달렸나?”
거짓말한 게 들통나 볼이 달아올랐다. 들킬까 봐 당황해서 시계를 떨어트린 줄도 모르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나 보다.
“선물 같던데 시계는 괜찮아요?”
“시계는 멀쩡해요. 뭐가 궁금해서 2층 서재까지 올라왔습니까?”
“정치헌 씨랑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요. 둘이 거기서 잤어요?”
“당신은 나 말고 다른 알파랑 잘 수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박래현은 이마의 수건을 뒤집고서 상체를 숙여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미 박래현에게 익숙해져서 다른 알파와 자는 내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은 안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내 유일한 오메가니까.”
내 오메가가 되어 달라던 말이 떠오르면서 나는 남자가 어디까지 뻔뻔해질 수 있나 의아해하며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메가와 알파 사이에선 사랑 고백이나 마찬가지인 말을 남자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태연하게 지껄였다.
“왜, 내 말이 안 믿어져요?”
“그러면 어젯밤에 왜 안 내려왔어요?”
“나 기다렸어요? 서류 검토할 게 좀 있어서. 당신 혼자 자서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할 얘기가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단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나는 박래현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병에 든 노란색 액체가 일정한 간격으로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영양제 덕분인지 열이 내리고 머리가 맑아져서 지쳤던 몸에 활력이 돌아왔다.
“정치헌 씨랑 결혼하실 거예요? 그 사람은 내가 아이를 낳아도 괜찮대요?”
“정치헌 욕심에 괜찮을 리가.”
“아이가 생겼으면 지우라고 하던가요?”
가슴 깊은 곳에서 진저리가 올라와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서 내가 피임해 달라고 사정했을 때 박래현은 아이를 낳겠다며 내 말을 무시했다. 그래 놓고서 내 배 속에 실재할지도 모르는 생명체를 부인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모욕과 조바심과 슬픔과 자책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인사불성이 될 지경이었다.
“그 질문 또 하면 화낸다고 했을 텐데요. 윤준영 씨는 왜 말귀를 못 알아듣지? 일부러 그러는 겁니까?”
박래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를 쏘아보았지만 박래현 말을 무턱대고 믿을 수는 없었다. 정치헌은 불도저를 닮아서 일단 결혼부터 하고 나머지는 해결할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박래현도 마냥 자기 고집만 내세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제 의견이 유효하다면, 정치헌 씨랑 결혼하지 말아요.”
“기회 줬을 땐 놓치고 왜 뒷북을 쳐요?”
“애 낳고 제가 돈 다 갚을 동안만요. 그게 아이에게 더 좋을 거 같아서요.”
“애 낳고 돈 다 갚으면 5년인데 나한테 5년 동안 결혼하지 말란 소립니까?”
“…….”
“내가 결혼하는 게 싫어요? 아이 때문이야, 아니면 당신 때문이야.”
“아이 때문에 그래요.”
“애는 나 혼자 키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완벽한 가정에서 자라는 게 더 낫겠지?”
박래현은 정치헌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그답지 않게 완곡하게 표현했다.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무력함에 빠져 힘없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박래현이 이번엔 무슨 말로 내 속을 긁을지 몰라 긴장한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박래현은 나를 응시하던 눈을 거두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정치헌이 아니라 당신과 결혼하면 되겠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방법은 그 외엔 없어요. 당신이 나랑 결혼하면,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 일이 없잖습니까.”
박래현 말투는 사업 보고서를 읽는 것처럼 차분하고 단조로워서 내가 내용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기가 막혀서 다음 말을 외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미쳤습니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할 겁니다! 제가 왜 박래현 씨랑 결혼해요?”
“난 여기서 더 양보할 수 없어요. 결혼한 사람 상대로 빚 다 갚을 때까지 몸으로 때우든가, 아니면 나랑 결혼하든가 둘 가운데 하나 택해요. 당신이 낳을 아이까지 생각해서 현명하게 판단하길 바랍니다.”
정치헌을 두고 나와 결혼할 생각을 하다니 박래현 머리를 반으로 쪼개 사고 회로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연구해 보고 싶었다. 박래현과 박영범의 대화를 통해 제약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고 있는 내게 박래현의 결정은 멍청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서울에 있는 종합병원을 기점으로 송림 병원은 전국에 다섯 개의 대형 병원을 가맹점으로 두고 있어서 정치헌과 결혼하면 박래현이 얻을 시너지 효과는 상당히 크다고 들었다.
“결혼 조건이 나쁘진 않을 겁니다.”
“…….”
“나와 결혼하면 빚을 다 탕감해 주고, 운전기사 딸린 차와 당신이 사용할 블랙카드 제공은 기본에 매달 5억씩 통장에 별도로 입금할 겁니다. 나 출근해서 일할 동안 당신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요. 대신….”
계약서 조항을 미리 생각해 놓은 듯 막힘없이 조건을 읊던 박래현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주시했다. 나는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집에 있을 땐 무조건 내 옆에 있어야 하고 중요한 모임이나 행사가 있을 땐 같이 참석해야 합니다. 물론 나와 결혼한 동안에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둔다거나 딴 곳에 눈 돌리는 건 절대 안 돼요.”
내가 빠져나갈 수 없게 촘촘하게 덫을 놓은 박래현은 이 순간만 기다려 온 사람처럼 얼굴을 빛냈다. 얼핏 나를 법적인 테두리 안에 가두겠다는 의도로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박래현이 손해 보는 거래였다.
“얻을 게 없어 보이는데 왜 저랑 결혼하겠다는 겁니까? 진짜 이유가 뭔지 말씀해 주세요.”
“결혼으로 내 오메가와 아이를 얻을 수 있는데, 내가 왜 얻는 게 없어요?”
“섹스는 정치헌 씨랑 할 수 있잖아요. 오메가니까 아이도 문제없이 가질 테고.”
“언제는 내가 정치헌이랑 결혼하는 게 싫다며? 그래서 대신 당신과 결혼하겠다는데 뭐가 문젭니까. 당신이 먹긴 싫은데 남 주긴 아까워요? 원하는 걸 얻으려면 자기 패도 내놓을 줄 알아야지.”
“저 미워한 거 아니었어요? 어떻게 미운 사람과 결혼할 생각을 하십니까?”
“당신은 내가 꼴릴 때마다 구멍만 잘 벌려 주면 돼요. 당신이 제일 잘하는 일이잖아.”
내게 수치를 주려고 그런 말을 골랐겠지만 그의 막말에 면역이 된 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감추고 있는 의중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겨우 1,200만 원 갚았으니 결혼이라는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박래현이 질릴 만큼 나를 안고 버릴 수 있는 빚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한 말은 결혼의 핑계치고는 빈약하게 들렸다.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정치헌 씨랑 예정대로 결혼하실 겁니까?.”
다른 선택권은 없다는 듯 박래현은 배 위에 놓아둔 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손을 뒤로 꺾었다. 아파서 나는 손가락을 굽혀 박래현의 손등을 꽉 찍어 눌렀다.
“결혼은 너무 급작스러운 제안이라서… 생각 좀 해 볼게요.”
“계산기 두드려 봐도 내가 밑지는 장산데, 왜 당신이 손해 본 표정입니까?”
“그러게 왜 저랑 결혼하시려는 건데요? 결혼하지 않아도 절 396번은 안을 수 있어요.”
“그렇게 구체적으로 계산 안 해도 됩니다.”
박래현은 내 귀에 체온계를 넣어 체온을 잰 다음 이마에서 수건을 걷었다. 욕실 쪽으로 사라진 그는 물수건을 들고 나타나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얼굴을 꼼꼼히 닦고 나서 허리끈을 풀어 파자마 자락을 양옆으로 젖혔다. 그의 시선이 빗장뼈에서 가슴으로 어지럽게 흩어졌다. 열기 어린 시선이 꽂히는 곳마다 근질근질한 감각이 발아해 살갗을 뚫고 나왔다.
내 반응에 개의치 않고 미지근한 수건이 목덜미와 가슴을 지나 옆구리를 스쳤다. 박래현은 오른팔을 소매에서 꺼내 땀을 닦아 낸 뒤 링거 바늘이 꽂힌 쪽 소매를 솜씨 있게 벗겨 왼팔마저 깨끗하게 닦았다. 이러다간 바지를 벗기고 아래를 닦을 기세여서 나는 배에 머물러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만해도 돼요. 영양제 다 맞으면 샤워할게요.”
박래현이 내게 눈을 맞춘 채 오른손으로 아랫배를 살살 문지르자 배꼽을 중심으로 미열이 번져갔다. 그는 자연스럽게 바지 단추를 열고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잡아 밑으로 끌어내렸다. 흥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알몸을 보여 주는 게 쑥스러워서 허벅지를 힘껏 오므렸다. 박래현은 억지로 바지를 벗기는 대신 내 발을 붙잡아 발바닥 움푹 팬 곳을 간질였다.
“아, 하지 마세요!”
간지러워서 다리를 배배 꼬는 사이에 박래현은 잽싸게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수건으로 불두덩과 사타구니를 닦았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고환과 기둥을 들어 올려 살끼리 맞붙은 곳이나 접힌 곳까지 일일이 땀을 제거했다. 새 수건으로 교체해 허벅지와 종아리를 닦던 그가 모기에 물린 자국을 발견하고 혀를 찼다.
“어젯밤에 정원에 나갔어요?”
“네. 달리기 좀 하느라….”
“아주 가지가지 했네, 그냥.”
발바닥까지 다 닦은 뒤 수건을 바닥에 던지고서 박래현은 내 옆으로 올라와 아랫배를 살살 문질렀다. 어제까지만 해도 정치헌과 결혼하겠다며 나를 쥐어짜던 사람이 오늘은 왜 이러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박래현은 급기야 내 배에 입술을 비비더니 음식 먹은 게 다 소화돼서 꼬르륵 소리만 들릴 배에 귀를 갖다 댔다.
“당신 임신했을지도 모른답니다. 은수 누나가 혈액 뽑아갔으니까 조만간 연락 올 겁니다.”
임신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히트 사이클을 알파와 보내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막상 박래현 입에서 임신 소식을 듣게 되니 기분이 묘해졌다. 기쁨이나 슬픔보다는 무력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가난하고 고될망정 주체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박래현과 엮이면서부터 온통 박래현과 외부 요소에 휘둘리고 우왕좌왕했다. 내 삶은 내 의지가 아니라 박래현 의지에 맞춰 굴러가고 있었다.
“박은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상식적으로 임신이 안 됐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당신 안에 싼 정액만 한 트럭이고, 노팅을 두 번이나 했는데.”
내게 부드럽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별안간 말도 안 되는 결혼 얘기를 꺼내 의아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박래현은 내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서 나와 결혼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았다.
“아빠가 된 기분이 어때요?”
“실감이 안 나서 잘 모르겠어요.”
“내가 그저께 꿈을 꿨는데, 아무래도 그게 태몽이었나 봐.”
“태몽? 무슨 꿈을 꿨는데요?”
옆에 누워 왼손에 얼굴을 괸 박래현이 경직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은 목덜미를 타고 내려와 계속해서 배를 문질렀다. 갑자기 형성된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어색해서 나는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었다. 불과 며칠 전에 할 말 못 할 말 다 해 가며 잡아먹을 듯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박래현은 그런 자각이 전혀 없는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밤중에 요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갔는데, 범고래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돌진해 오더니, 요트 앞에 멈춰서 꼬리를 흔들더라고.”
“고래면 착하고 영리하겠네요.”
“범고래는 사납기로 악명 높은 놈입니다.”
새파란 어둠 속에서 쏟아질 듯 무겁게 빛나는 별들을 등지고 하늘로 뛰어오르는 범고래를 상상해 봤다. 역동적이고 우아한 도약에 물보라가 일어 그 사이로 달 무지개가 피어났다. 잠시 현실을 잊고 주책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범고래가 박래현 씨 성격과 비슷한 걸 보니, 애가 착하긴 어렵겠어요.”
“그러게. 당신 성격을 닮아야 할 텐데….”
아이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아이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복잡한 생각은 다 떨쳐 버리고 아이 낳는 일에만 집중하면 될 것이다. 긴장이 풀리고 몸이 나른해지면서 잠이 쏟아졌다. 길쭉한 손가락이 머리칼 안으로 들어와 두피를 느긋하게 어루만지며 잠을 재촉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
부드럽고 단단한 뭔가가 몸을 돌아다니고 있어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랫배를 만지던 손이 산책하듯 여유롭게 내려가 불두덩과 성기를 만졌다. 기둥을 잡아 흔들고 귀두를 문지르는 손길에 의지를 상실한 성기가 속절없이 커졌다. 성기에서 남자의 손을 떼어 내려 했으나 되레 단단한 손과 얽히고설켜 내 손으로 내 성기를 더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복스러운 자지를 보고도 참는 게 낫겠지?”
말과는 달리 남자의 입술이 귓바퀴와 귓불 위를 기어 다녔고 손은 끊임없이 귀두 끝을 문질러 나를 자극했다. 허벅지를 오므렸다가 펴며 짜릿한 쾌감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남자의 집요한 손놀림에 밑이 떨렸다.
“출근 안 하세요?”
“지금 오후 세 십니다. 오전에 나가서 급한 일 해결하고 들어왔어요.”
이제 보니 거치대에 매달려 있던 링거 줄이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몸은 언제 아팠냐 싶게 가벼워져서 기분이 상쾌했다. 성기를 만지던 손은 물이 흐르듯 아래로 내려가 구멍 주변을 더듬거렸다. 박래현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구멍을 전부 덮은 뒤 힘을 줘 위아래로 쓰다듬다가 손가락을 넣어 내가 좋아하는 곳을 깊게 문질렀다. 섬뜩한 손놀림에 신음을 내며 몸을 돌려 박래현을 마주 보았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잠을 못 자서 피곤할 텐데 박래현은 실컷 자고 일어난 나보다 싱싱하고 건강해 보였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아래가 푹 젖었지? 나만 보면 자동입니까?”
“제가 오메가라서 그래요.”
“나 말고 다른 알파랑 할 때도 이렇게, 난잡하게 젖었어요?”
“…….”
“아, 아니, 그만! 듣고 싶지 않으니까 대답하지 말아요.”
자문자답하며 쇼를 하던 박래현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득실거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존재하지 않은 내 전 알파들을 혼자 질투하고 괴로워했다. 나와 계약하기 전에 내 뒷조사를 했을 텐데도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박래현 머릿속에서 오메가들은 알파만 보면 좋아서 다리를 벌리는 존재들로 각인되어 있는 듯했다. 고정관념이 확고해서 그는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마저 왜곡해 나를 판단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나와 결혼을 생각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에게 유일한 알파와 오메가라서 그럴 것이다.
“저 더러워서 씻고 싶어요.”
“머리만 안 감겼지, 몸은 내가 다 닦았어요.”
나를 잡는 끈적끈적한 손길이 음습했다. 쉬이 물러설 사람이 아니라 일찍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는 무릎을 굽혀 박래현 성기를 문질렀다. 무릎뼈에 내 뼈만큼이나 단단한 성기가 부딪혔다. 나도 섹스를 좋아하지만 박래현은 섹스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28년간 풀지 않고 축적했던 욕정을 나한테 한꺼번에 다 쏟아 내고 있었다. 박래현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이러니하게 그의 몸은 늘 내게 안달 나 있다. 자존심 강한 남자는 그 불일치를 견디지 못하고 차라리 결혼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해도 좋은데 대신 얼른 끝내요. 이번에 하면 1,500만 원 갚은 겁니다.”
박래현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어깨와 허리를 잡아 나를 반듯하게 눕히고서 입부터 맞췄다. 오늘 하루 건너뛴다고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텐데 박래현과 나는 본능에 충실했다. 옷을 벗어 던진 뒤 내 허벅지를 벌리고 그사이에 자리 잡은 박래현이 한쪽 팔을 귀 옆에 내려 몸무게를 지탱한 채 손바닥으로 주름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이미 젖어서 미끌미끌한 곳으로 손가락 네 개가 한꺼번에 들어와 안을 뒤집었다. 박래현 허리를 휘감은 두 다리가 쾌락에 겨워 덜덜 떨렸다.
“아, 아아! 흐으윽!”
“윤준영 씨, 당신 가장 좋은 점이 뭔지 알아요?”
“뭔데요?”
박래현 입술이 눈두덩에 내려앉으면서 굵은 살 기둥이 막을 젖히고 안으로 침입했다. 단번에 깊숙이 꿰뚫고 들어오는 성기 때문에 눈앞에서 폭죽이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나는 허리를 움칠거리며 박래현 팔뚝을 거머쥐었다.
“뒤로 안 빼고 적극적인 거.”
“언제 저한테 선택권이, 흐윽! 있었나요? 흐윽….”
“인공수정 말고 섹스를 택한 건 당신입니다. 그때 말려들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되면 다른 오메가하고 해 보세요. 혹시 알아요, 이젠 제대로 설지.”
“나중에 울지 말고 닥쳐요.”
박래현은 더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듯 흉흉한 기세로 내 입술을 틀어막았다. 나는 안으로 파고드는 혀를 빨면서 넘어온 침을 삼키느라 벌써 허덕였다.
박래현 말이 소용없는 게 나는 이미 후회할 일을 잔뜩 저질러 놓은 뒤였다. 아이를 갖기 위해 무모하게 몸을 던졌을 때부터 후회는 예고된 일이었다.
한참을 빨다가 겨우 입술을 뗀 박래현이 한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나는 손을 뻗어 침이 묻어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을 엄지로 문질러 닦았다. 이내 손목이 잡혔고 손바닥에 박래현 입술이 닿았다.
“당신은 평생 나 말고 다른 알파 애는 못 밸 겁니다. 내가 절대 안 놔줄 테니까.”
내 몸을 훤히 알고 있는 남자는 최대한 자제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곳을 놓치지 않고 억세게 긁어내렸다.
“벗어날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내 경계 안에 있어요. 그게 가장 안전할 겁니다.”
내 안위에 제일 큰 위협을 준 사람이 본인이란 사실을 박래현은 잊고 있는 듯했다. 난 튼튼하고 강해서 박래현에게서 벗어난다면 누구에게 보호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부드러운 허릿짓을 이어 가며 박래현이 입술을 겹쳐 왔다. 이 남자는 내 대답이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옆에 두고 꼴릴 때마다 박고 싶은 오메가에게 일방적인 통보면 충분했다. 여기서 벗어나는 게 현명한 일인지, 아니면 결혼해서 버림받을 때까지 옆에 있는 게 나은 일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박래현과 같이 있어서 지금은 후자로 생각이 기울 테니 내일 혼자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윤준영, 내 눈에 먼저 띄지 그랬어.”
박래현은 귀뺨과 턱에 무수히 많은 입맞춤을 했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깊은 곳을 문질러 대는 통에 성감이 느리게 차곡차곡 차올랐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침대 밑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아찔한 감각이 찾아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박래현 어깨를 움켜잡았다. 튜브가 꽂혔던 왼손엔 힘이 들어가지 않아 오른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 몰골로 좋다고 엉덩이를 흔드는 내 한심함을 비웃을 새도 없이 박래현이 자지를 박은 채 밑에서 위로 허리를 쳐올렸다.
“아, 아으응, 으응….”
저릿한 쾌락에 허공으로 올라간 팔다리가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공중에서 맥없이 흔들리는 다리는 분명 내 것인데 혼자 달랑달랑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희락에 덜덜 떨며 박래현 목을 두 팔로 끌어안고서 성기가 든 내벽에 힘을 주었다. 판판하고 넓은 가슴이 내 가슴에 맞닿았고 귓가로 뜨거운 숨과 낮은 신음이 쏟아져 내렸다. 귓구멍으로 젖은 혀가 들어와 안을 파헤치자 견디기 힘들어 고개를 한껏 뒤로 꺾었다.
귓바퀴와 귓불을 질겅질겅 씹던 박래현이 무방비하게 열린 목덜미로 얼굴을 옮겨 맥이 뛰는 곳에 이를 박았다. 박래현에게 피를 다 빨릴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낮게 비명을 질렀다.
소나기를 피해 가려고 잠시 나무 그늘에 섰을 뿐인데 나뭇잎에 고여 있던 빗물에 더 흠뻑 젖어 버렸다. 박래현 움직임에 맞춰 끝없이 흔들리는 팔다리를 보다가 허무해져서 눈을 감았다.
***
박은수가 주고 간 임신 테스트기에 양성 반응이 나타났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욕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래현이 참지 못하고 들어와 임신을 확인했다. 임신 테스트기를 보는 박래현 얼굴로 벅찬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갔다.
“윤준영 씨, 고마워요.”
나를 욕실 벽으로 밀어붙인 박래현이 내 볼을 부여잡고 입술에 나긋나긋한 키스를 퍼부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박래현 모습에 아이의 미래에 관한 일말의 의심이 사라져서 나도 키스에 응했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던 키스가 점점 농밀해지더니 맞붙은 입술에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단단한 살덩이가 아랫배를 아프게 누르자 얼굴을 비틀어 키스에서 빠져나왔다. 꿀을 쫓는 벌처럼 박래현 입술이 집요하게 쫓아와 몇 번 더 입을 맞췄다.
“당신 배 속에 내 아이가 들었다니, 정말 신기합니다. 내일 병원에 가 봅시다.”
납작한 배 안에 새 생명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나도 믿기 힘들었다. 내 허리에 팔을 감은 채 박래현은 나를 식당으로 이끌었다. 그는 핸드폰을 보고 있던 박영범과 이 차장 부부에게 기쁜 얼굴로 임신 소식을 알렸다. 사람들에게 열렬한 축하를 받으며 나는 박래현이 뒤로 꺼낸 의자에 앉았다.
“준영 씨, 내일 저녁에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요.”
이 차장이 식탁에 밥그릇을 옮기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갈비 스테이크는 어제 먹었으므로 나는 꽃게찜을 주문했다.
“꽃게찜이면 우리 상무님이 좋아하는 음식인데… 우리 아기가 상무님 입맛을 닮았나 보네요.”
“아빠가 상무님에 윤준영 씨면, 아이는 절세 미남아니면 미녀겠어요.”
정 차장과 이차장의 아부가 마음에 드는지 박래현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외모는 박래현을 닮길 바라며 나도 이 차장 의견에 동의했다.
“이 차장님, 잘 먹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해서 덩달아 기분 좋아진 나는 숟가락 가득 잡곡밥을 퍼서 입에 넣었다. 정갈한 손짓으로 생선을 발라 그 살을 내 앞 접시에 옮기며 박래현은 태명을 짓자고 했다. 맞은편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보던 박영범이 안경을 추어올렸다. 임신을 축하해 줬지만 그의 얼굴은 심란해 보였다.
“치헌이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대? 좀 걱정된다.”
“애초에 정치헌이랑 결혼할 생각조차 없었어. 내가 어머니 생신 때 윤준영이랑 결혼한다고 밝혔던 거 같은데?”
“정치헌이 자기 병원에서 우리 제품 다 빼 버리면, 그 손해는 어떻게 감당할 거냐? 이러다 제일 약품에 처방 의약품 1위 자리 도로 내주는 거 아냐? 그럴 거면 처음부터 여지 주지 말았어야지, 줬다 뺏으면 더 화난다는 거 몰라? 너랑 결혼하겠다고 다 굽히고 들어온 애를 그렇게 모욕하면, 내가 치헌이라도 가만 안 있어.”
“내가 안전장치 걸어 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정치헌은 절대 보복 조치 못 해.”
“왜 못 해? 너 걔 성격 몰라?”
“더러운 성격 아니까 함정을 팠지. 정치헌이 나 장관과 관계한 동영상 확보했어.”
정치헌이 3주간 결정을 미뤄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박래현과 결혼하려면 자신의 약점을 담보로 제공해야 하는데 박래현에게 약점만 잡히고 버림받을 위험이 있어서였다. 그는 과감하게 패를 던졌지만 도박에 성공하지 못했다.
“정말? 나한테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지.”
“형은 연기를 못 하잖아. 두 사람 목이 걸린 일이라 정치헌도 함부로 못 나댈 거야.”
“그런데 넌 영상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넘겨짚었는데 정치헌이 제 발 저린 거냐?”
“정치헌이 그 바닥에서 구른 짬밥이 있는데 능구렁이한테 얌전히 당하고 넘어가겠어? 자백만 받고 조용히 덮으려고 했는데, 그 씨발 새끼가 어머니 부추겨서 윤준영한테 사후피임약을 건넸더라고. 약을 받아서 감춘 새끼도 나쁘지만….”
박래현은 말을 멈추고 이상하게 생긴 나물을 내 숟가락에 얹었다. 목이 꽉 막혀서 나는 차가운 물을 한 컵 들이켰다.
“내 애를 밴 새낄 조질 순 없고, 정치헌을 찢어발겨야겠다고 생각했지. 본가도 한바탕 뒤집어 놨으니까 두 번 다시 결혼 얘긴 못 꺼낼 거야.”
“다행이네. 정치헌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조마조마했거든.”
“한번 떠나면 그걸로 끝이지 두 번은 없어. 윤준영 씨, 안 그래요?”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면 너도 비슷한 꼴이 될 거라는 은근한 암시였다. 새삼 박래현의 비열함에 치를 떨었다. 애초에 결혼할 생각이 없었으면서 회사의 이익을 위해 정치헌을 결혼으로 낚은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에게 잘못 걸린 정치헌과 내가 불쌍했다. 속이 복잡해진 나와 달리 박영범은 그제야 안심하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박래현은 내 밥숟가락 위에 통통하게 발라진 갈치 살을 얹었다.
“정치헌 씨한테 잔인하게 구는 이유가 뭐예요? 박래현 씨 버려서 복수한 겁니까?”
“가만 놔두면 앞으로 계속 귀찮게 할 테니 아예 싹을 잘랐습니다. 내가 다른 오메가에게 신경 쓰는 거 당신도 싫을 거 아냐.”
박래현은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진심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괜히 얼굴이 뜨끈뜨끈해졌다.
“생선 말고 다른 거 집어 줄까요? 뭐가 먹고 싶어요?”
“먹고 싶은 거 제가 직접 먹을 테니까 박래현 씨도 얼른 드세요. 출근 시간 됐어요.”
박래현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숟가락을 놓고 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나는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박래현과 박영범을 배웅한 뒤 거실에서 정 차장이 준비한 과일을 먹었다. 정 차장은 신이 난 얼굴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준영 씨, 상무님이랑 결혼할 거예요?”
“네. 지금 생각 중이에요.”
“정말 다행이네. 어제 정 나부랭이가 찾아와서 깜짝 놀랐잖아요. 상무님이 준영 씨 두고 그놈이랑 결혼할까 봐 내가 잠을 못 잤다니까요.”
“정치헌 씨가 상무님을 버렸다면서요. 상무님이 버림받다니 상상이 안 돼요.”
“상무님이랑 전에 집안끼리 약혼 얘기가 오간 적이 있어요. 정가 놈이 상무님 꼬시려고 꼬리를 살살 흔들다가 상무님이 경영권 포기 각서를 쓰신 뒤로 약혼 못 하겠다고 튄 거예요.”
박래현이 경영에 관심이 없었다는 얘길 언뜻 들었던 기억이 났다. 박영범이 그 말을 했을 때 박래현이 짜증을 내서 박영범은 곧 입을 다물었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 박래현은 일을 즐기는 편인데 경영권 포기 각서를 썼다니 이유가 궁금했다.
“상무님은 왜 경영권 포기 각서를 쓰셨대요? 일 잘하신다면서요.”
“그게….”
“곤란하면 말씀 안 해 주셔도 돼요.”
정 차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집에 이 차장이 없는 걸 확인하고도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준영 씨가 알아도 될 거 같으니까 말해 줄게요. 상무님은 원래 연구 말고 다른 덴 아예 관심이 없던 분이었어요. 이날 이때까지 연구실에서 연구만 하고 경영엔 전혀 관심이 없으셔서 수현 도련님한테 일찌감치 경영권 다 넘겼죠. 그런데 작은 도련님이 사고로 죽어서 회장님이 본사로 불러들이신 거예요.”
“…….”
“준영 씨, 상무님은 오메가한테도 관심이 없으셨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준영 씨한테만 푹 빠지신 거예요.”
박래현이 내 몸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라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박래현과 박수현 관계를 더 알고 싶은데 정 차장은 더 말해 주고 싶지 않은지 일이 많다며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박래현은 낙타가 되어 함께 사막을 건너겠다는 동생에게 경영권을 전부 넘겼다. 동생을 정말 아끼고 사랑하니까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두 사람 관계를 부러워하며 나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바깥을 내다보았다. 가지가 휘도록 열매를 매단 산수유나무 아래로 짙은 여름 그림자가 졌다. 열매가 빨갛게 물들기 전에 이 집에서 나갈 줄 알았는데 어느덧 8월도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셔츠 자락을 들어 올려 아이가 든 배를 살살 문질렀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쑥스러운 목소리로 배 속의 수정란과 첫인사를 나눴다.
“안녕, 아기야. 만나서 반갑다. 먼 길을 날아 나한테 와 줘서 고마워. 내가 널 위해 잘 먹고 잘 지낼 테니까 너도 10개월 동안 건강하게 쑥쑥 커라.”
아이를 갖기까지 내가 겪었던 부침이 파노라마가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기억 대부분이 박래현과 함께한 것들이었다. 이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박래현은 정말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통제했다. 그가 나를 안 만큼 나도 그를 알아야 하는데 박래현은 작은 틈도 주지 않아서 나는 여태 그의 말과 행동을 혼자 분석하고 추리해서 결론 내리고 있다. 박래현을 예측할 수 있다면 그에 맞는 대안을 세울 텐데 그를 몰라서 더 암담했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나는 정치헌에게 비교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벌써 많이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엄청난 부를 축적할 박래현에게 필요한 이는 사업 파트너가 아니라 섹스 파트너인 듯했다.
나는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박영범 말로 확인했듯 박래현은 연애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흔한 재벌가 3세처럼 결혼으로 세력을 키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성욕이 없어서 섹스 없이도 잘 살았던 남자였는데 나와 실수로 몸을 섞으면서 유일하게 결핍이 생겨 버렸다. 그 남자는 28년 만에 발견한, 그에게 꼭 맞는 내 몸뚱이를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내킬 때마다 박을 수 있는 작고 조밀한 구멍. 내 볼기짝 사이에 은밀하게 숨어 박래현 자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입구를 필요로 했다. 박영범 말이 맞다면 진통제 역할을 해 주는 오메가가 자기 아이까지 가졌으니 나를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이 자랐을 것이다. 본능이 우선인 박래현과 달리 나는 욕망과 감정이 새끼줄처럼 꼬아진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수평을 잡고 있어서 문제였다. 박래현과 결혼하게 되면 그 경계는 모호해져서 나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균형을 잃고 외줄 밑으로 추락하게 될 순간을 견딜 수 있다면 결혼은 내게 꽤 좋은 선택이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넉넉잡고 5년간 비굴하게 몸을 파느니 박래현과 결혼해서 돈을 버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다.
박래현은 결혼 조건으로 빚을 전부 탕감해 주고 매달 5억씩 통장에 입금해 준다고 했다. 가장 좋은 점은 그가 퇴근하기 전까지 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낼 수 있다는 거였다. 엄마 병원비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내 미래를 다질 수 있는데 이보다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방금 인사를 나눈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얼마간은 지켜볼 수 있다.
박래현은 언젠가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후회하고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자유는 그때 가서 찾아도 충분할 것이다. 어차피 5년은 박래현에게 빚으로 묶여 있으므로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결혼하는 게 더 나았다.
나는 푹신푹신한 베개를 끌어안고 갓 쪄낸 햇볕 냄새가 밴 곳에 코를 묻었다. 박래현처럼 무심하고 가볍게 상대를 섹스 파트너로 받아들이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 박래현이 제공하는 안정된 울타리 안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계획대로 자격증을 따서 혼자서 살 수 있게 준비하는 거다. 그사이에 아이를 마음껏 예뻐할 수 있고 해준을 찾아 달라는 엄마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 지금 상태를 지속하면 빚은 빚대로 지고 아이는 뺏기고 몸은 착취당할 것이다. 결혼이 새로운 감옥이 될지언정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감옥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동안 박래현이 나 말고 다른 오메가와 얽히지 않는 것도 장점이었다. 각인 여부는 아직 확인할 수 없지만 발정기를 함께 보낸 뒤부터 알파에게 느끼는 독점욕은 전에 없이 강렬해졌다. 박래현이 정치헌과 결혼한 상태로 나와 관계를 유지한다면 내가 먼저 버티지 못하고 어떻게 돼 버릴 것이다. 내 히트 사이클에 맞춰 박래현에게 러트가 왔고 그 결실로 배 속엔 아이가 생겼다. 박래현에게 러트 사이클이 찾아온 건, 그에게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매력적인 오메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