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모퉁이를 돌아
01.
오늘도 늦는다고 해서 혼자 저녁을 먹고 박래현을 기다렸다. 아홉 시쯤 집에 돌아온 박래현은 품에 다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꽃 뭉치를 내게 건넸다.
“윤준영 씨, 임신 축하해요.”
그는 심심할 때 먹으라며 초콜릿 조각이 박힌 케이크와 다양한 종류의 쿠키도 사 왔다.
“내 제안은 생각해 봤어요?”
“먼저 어떤 조건인지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씻고 내려올 테니까 기다려요.”
박래현이 2층으로 올라간 사이 정 차장은 꽃다발을 펼쳐서 유리병 세 개에 나누어 담았다. 뭉쳐 있던 꽃들을 적당히 벌려 모양을 잡은 뒤 그녀는 한 개는 거실 탁자에 두고 두 개는 내 방으로 갖고 들어갔다. 다 같은 장미인데 모양과 색이 다양했다. 꽃잎 위쪽은 짙은 분홍인데 꽃잎 아래로 내려갈수록 옅은 베이지색을 띤 장미가 있는가 하면 전체가 흰색이거나 분홍색인 장미도 있었다. 군데군데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섞인 틈에 짙은 초록색 이파리가 더해져 싱그러운 느낌을 주었다. 임신한 사실을 실감하면서 나는 꽃 속에 얼굴을 파묻어 향기를 들이켰다.
“꽃 마음에 들어요?”
“네. 향기가 좋아요.”
꽃에서 고개를 들어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막 샤워를 마친 그에게서 비누 향이 났고 덜 말린 머리칼에선 풀 냄새가 났다. 이 남자의 아이가 내 배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생경한 감정이 돋아났다. 든든한데 가슴이 시린,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랑 결혼하기로 마음 굳혔다니, 계약을 시작해 볼까요?”
“아직 굳힌 거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반대 경우는 생각해 보지 않은 듯 자신만만한 말투에 자존심이 상했다. 남자가 내 처지였다면 다른 대안을 내놨을까? 어쩌면 저 두꺼운 낯짝으로 나를 살살 구슬렸을지도 모르겠다. 박래현은 내 옆에 앉아서 새 계약서를 건넸다. 온갖 금지 조항과 위협으로 빽빽하던 이전 계약서와 달리 이번 계약서는 비교적 간단했다.
아이를 둘 낳는 것은 기본 의무이고 셋째부터는 쌍방 합의로 가질 것, 박래현이 집에 있는 시간에 맞춰 스케줄을 조정할 것,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동안에 타인을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지 말 것, 박래현이 잠자리를 요구할 땐 절대 거절하지 말 것 등이 전부였다.
“아이를 둘이나 낳을 생각이세요?”
“둘은 기본이고, 윤준영 씨가 합의해 주면 더 낳을 생각입니다.”
박래현 목소리는 단호했다. 남자가 이기적으로 생겨서 아이를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인 구석이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 한 명 정도는 더 낳을 수 있어서 첫 번째 조항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데 마지막 조항이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 조항은 좀 수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요?”
“박래현이 잠자리를 요구할 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절하지 말 것 정도로요.”
“윤준영 씨.”
“왜요.”
“내가 당신과 결혼하는 목적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
“아, 윤준영 씨는 직설적으로 말해야 알아듣는 타입이지? 똑바로 들어요. 내가 구멍을 벌리라고 하면 집에서든 차에서든 사무실에서든, 사람이 있건 없건 무조건 두 손으로 잡아 벌려야 합니다.”
결혼 계약서라고 해서 뭔가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박래현과 내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빚을 탕감하고 매달 생활비를 받는 데 감지덕지하자며 속을 달랬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눈 밑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박래현이 보는 앞에서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어 박래현 얼굴에 흩뿌리는 상상을 했다.
“어떻게 된 게 다 제가 지켜야 할 조항만 있네요? 이건 새로운 구속이지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좋은 점도 있잖아요.”
남자의 손끝을 따라 나는 결혼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대가로 시선을 내렸다.
박래현은 빚 32억을 탕감해 주고 생활비로 한도 없는 블랙카드와 운전기사가 딸린 차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엄마 병원비는 물론이고 매달 5억씩 생활비를 입금하겠다는 조항이 있었다. 아침에 미리 언질을 받았지만 너무 과한 조건이었다. 혹시 내가 빠트린 조항이 있는지, 행간에 숨겨진 의도는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았다. 가난뱅이에 빚투성이인 내게 과할 정도로 최상의 계약이었다.
“물어볼 말 있으면 하세요.”
“…박래현 씨 일정에 맞추려면 일주일 전에 미리 그쪽 일정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학교는 계속 다니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큰 일정은 일주일 전에 알리고 만일 변동이 있으면 적어도 하루 전에는 알리겠습니다. 학교는 애 낳고 내년에 복학하세요.”
“저 마음 내킬 때 엄마 만나러 가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당신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한 달 넘게 박래현에게 복종하며 살았더니 그가 자유를 준다고 해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박래현을 보았다.
“제 통장에 남아 있는 돈은 어떻게 할까요? 찾아서 박래현 씨 통장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돈은 임신 선물입니다.”
통장에 23억이나 들어 있는데 그돈을 선물로 주겠다는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혀 계약서만 만지작거렸다. 이 남자는 자기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은 듯했다. 사후 피임약으로 날 협박할 때만 해도 나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임신을 확인한 뒤부터 태도가 돌변했다.
“혹시 제가 잘못하면 위약금을 물어야 하나요?”
“아니요. 이번엔 위약금 조항은 없앴습니다. 세금을 제하면 당신 통장에 있는 돈은 무조건 당신 겁니다.”
“저한테 퍼 주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부에 익숙해지면 내가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가난한 생활로 돌아갈 생각이 사라지겠죠. 다른 질문이나 요구사항은?”
“제가 뭔가를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까?”
“주인과 개의 관계가 아니라 우린 부부로 동등한 관계입니다. 말해 봐요.”
내가 알고 있는 동등과 박래현이 알고 있는 동등은 다른 데 쓰이는 단어인 듯했다. 남자에게 돈을 받는 대신 나는 박래현에게 여전히 을이었다.
“결혼하게 되면 배우자로서 절 존중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 인격을 모독하거나 절 멸시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박래현은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재미가 쏠쏠했을 테니 퍽 아쉬울 것이다.
“일단 노력해 보겠습니다.”
“결혼은 언제 할까요?”
“귀찮게 따로 결혼식 할 필요가 있습니까? 혼인 신고만 하는 거로 하지.”
“그래도 부모님께 알리고 허락은 받아야 할 거 아닙니까. 결혼을 우리 둘이서 뚝딱 해치울 순 없잖아요.”
“그분들 허락은 필요 없고, 나중에 통보하면 됩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엄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갑갑했다. 엄마는 부부가 되려면 당연히 결혼식이 뒤따른다고 생각하는 분이었다. 부자 애인이라고 자랑해 놨으니 박래현이 찢어지게 가난해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다는 핑계를 댈 순 없었다.
“혼인 신고는 언제 하실 거예요?”
“혼인 신고서 작성해서 내가 제출하면 됩니다. 당신은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혼인 신고서는 제가 직접 작성하고 싶어요.”
“원하면 그렇게 해요. 형, 혼인 신고서 양식 준비해 줘. 증인은 형하고 은수 누나가 서 주고.”
“알았어. 병원은 언제 갈 거야? 그 전에 준비할게.”
“토요일 오후에 누나 진료 없을 때 가기로 했어.”
박래현은 계약서에 사인하도록 내게 만년필을 건넸다. 계약서 서명란에 나와 박래현 사인이 들어가고 그 아래 박영범 사인이 들어갔다. 박영범은 사각형 서류봉투에 나와 박래현의 결혼 계약서를 담았다. 고민했던 시간에 비해 절차는 터무니없이 간단했다.
“저기, 차는 제가 직접 운전하면 안 될까요? 운전기사 필요 없는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경호원은 둬야지.”
“엄마가 병원에 계시는데 튀긴 어디로 튀어요? 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 아닙니다.”
“윤준영 씨, 당신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박래현 머릿속에서 사후 피임약을 지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박영범은 이전에 작성했던 계약서 세 부를 가져와 내 앞에서 잘게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로써 박래현과 나는 부부라는 새로운 계약 관계에 접어들었다.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공을 들이고 아름다운 꽃다발과 반지를 준비해서 프러포즈를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과정은 전부 생략되었다.
“이건 당신이 사용할 핸드폰. 내 폰으로 다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핸드폰 사용은 알아서 해요.”
박래현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프로그램이 깔린 최신 문물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받아 들었다.
“이렇게 감시할 거면 결혼은 왜 하자고 하신 겁니까?”
“아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감시하고 그 이후엔 상황 봐서 풀어 주겠습니다.”
중간에 뒤통수 때리는 것보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 줘서 차라리 고마웠다. 어차피 5년은 박래현 감시를 받으며 그의 손바닥 위에 있어야 할 처지라 순응하기로 했다.
“내가 전화했을 때 통화음 세 번 이상 안 울리게 하세요. 단축 번호 1번에 내 번호, 2번에 영범 형 번호 저장해 뒀으니까 급한 일 생기면 전화해요.”
“네.”
“여기 당신 신분증, 현금카드, 그리고 이건 한도 없는 카드니까 당신 필요할 때 써요.”
박래현은 내게서 뺏어 간 신분증과 현금카드, 그리고 검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로고가 새겨진 카드를 건넸다. 나는 쭈뼛쭈뼛 손을 내밀어 내 물건들을 받았다. 박래현은 나를 힐긋 보다가 내 손에 자신의 손을 깍지 끼었다.
“형, 우리 들어가서 잔다.”
“무리하지 마. 은수 누나가 8주까진 조심하라고 했잖아.”
그가 보내는 신호의 의미를 잘 알기에 일어서 내 방으로 향하는 그를 따라갔다. 그가 문손잡이를 돌리기 직전 나는 문과 박래현 사이를 내 몸으로 가로막았다.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할 말 있어요?”
“오늘은 박래현 씨 방에서 자 보고 싶어요.”
박래현이 어떤 곳에서 지내는지 궁금했다. 정치헌이나 박영범은 스스럼없이 드나드는데 정작 배우자가 된 나는 그 방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괜한 요구를 한 것 같아 방문을 열려는데 박래현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 방에 들어가 보고 싶어요?”
“네.”
“당신 방과 비슷하게 생겨서 별거 없어요.”
기분 나빠하며 거절할 줄 알았는데 박래현은 내 손을 잡고서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2층 거실을 중심으로 서재 오른편에 박래현 방이 있었다. 남자의 비밀스러운 내부를 열어 보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의 방에 첫발을 내디뎠다.
“구경하고 있어요. 마실 것 좀 가져올 테니까.”
나를 남겨 두고 박래현이 방을 나갔다. 나는 내 물건들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의 방을 둘러 보았다. 크기는 내 방보다 작은데 침대에서 정원을 내다볼 수 있게 벽 한쪽을 유리로 만든 건 내 방과 비슷했다. 침대 머리맡과 문이 있는 쪽 벽에는 강렬한 색채의 유화가 걸려 있고, 나뭇결을 살린 커다란 책장엔 책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바로 옆이 서재이기 때문에 그가 자주 보는 책만 꽂혀 있는 듯했다.
책등을 살피던 내 눈에 박래현과 박수현 사진이 들어왔다. 작은 액자에 담긴 사진을 보며 이상한 소회에 사로잡혔다. 이 액자는 박수현 취향일까, 박래현 취향일까. 사진 속 박래현이 내게 보여 준 적 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어서 왠지 서운해졌다.
책장 옆에는 커다란 철봉이 설치되어 있었다.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 운동을 몇 번 하다가 꽂혀 있는 책 중에 시집 하나를 꺼내 들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두 번째 시를 읽을 무렵에 박래현이 들어와서 사이드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딸기 접시만 챙겨서 내 옆에 앉았다.
“아기 태명은 지었습니까?”
“고래는 좀 그렇죠? 술고래, 고래등, 뭐 이런 말만 생각나고.”
재미없는 대답을 하고서 내가 싱겁게 웃자 박래현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느슨하게 반짝이는 눈길에 내 마음이 물감처럼 쉽게 풀어졌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제 얼굴이 신기해요?”
“신기합니다. 눈, 코, 입, 귀가 다 시원시원하게 뻗었어요. 아기 태명은 초롱이 어때요? 당신 닮아서 초롱초롱 씩씩할 거 같은데.”
“초롱이요? 와, 태명 맘에 들어요.”
박래현은 내 어깨에 팔을 걸고서 손끝으로 내 볼을 더듬더듬 만졌다. 직접 딸기를 씻었는지 젖은 손끝이 서늘했다. 박래현에게 눈을 고정한 채 손목을 잡아 그의 손바닥에 가만히 입술을 댔더니 박래현 몸이 작게 움직였다. 이번엔 한술 더 떠서 그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박래현 몸이 싫다면 모를까 그가 주는 쾌락에 환장하면서 뒤로 빼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어차피 대 줘야 할 거라면 이 관계를 즐기는 게 나았다. 나는 이제 씨받이도 아니고 섹스 파트너도 아니고 정부도 아니니까. 박래현은 자유로운 손으로 내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딸기 먹여 줄 테니까 입 벌려 봐요.”
“…제가 직접 먹으면 안 돼요?”
“얼른 입 벌려요.”
재촉하는 말에 입을 벌렸더니 박래현이 커다란 딸기를 골라서 입 속에 퐁당 집어넣었다. 빨갛고 싱싱한 딸기를 반으로 깨물어 달큼한 즙을 맛봤다. 딸기를 삼키기 바쁘게 박래현이 다른 딸기를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지저분한 시선이 딸기를 씹는 내 입술로 향했다. 세 번째 딸기를 넣어 준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내 입술에 입 맞췄다. 입에 들었던 딸기의 반이 박래현 입으로 넘어가면서 박래현은 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등이 닿으면서 환한 전등 빛이 얼굴로 쏟아졌다. 네 번째 딸기는 그가 입으로 물어서 내 입술에 갖다 댔다. 벌려 준 입 속으로 딸기와 달짝지근한 혀가 동시에 들어왔다. 두 개의 혀에 짓눌린 과육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와 볼을 타고 떨어졌다. 박래현의 혀가 재빨리 빠져나와 내 뺨과 귓불에 묻은 딸기즙을 훔쳤다. 들숨 사이로 치자꽃 향기가 희미하게 섞여 들어왔다. 의도적인 페로몬 향에 몸이 노곤해지면서 밑에 습기가 돌았다.
“윤준영….”
“네?”
“결국 여기까지 오다니, 당신은 약삭빠르고 못된, 아주 사랑스러운 개새끼야.”
“전 교활하지 않아요.”
“난 당신 속을 하나도 모르겠어. 이 반듯한 얼굴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박래현이 무슨 목적으로 나와 계약했는지, 나와 결혼은 왜 하려고 하는지, 박래현과 내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어느 것 하나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 채 키스하고 성기를 결합하는 데 익숙해졌다. 언젠가 박래현이 이 결혼에 환멸을 느껴 이혼을 요구할 때까지 이 관계는 계속될 것이다.
“근데 우리 섹스해도 괜찮을까요?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과격하게 안 하면 괜찮아요.”
내 윗도리를 벗기는 박래현을 도와 등을 들면서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셔츠를 벗긴 박래현이 반바지 단추를 풀어 드로어즈와 함께 아래로 끌어 내렸다. 이어서 발목을 한쪽씩 잡아 바지와 속옷을 완전히 벗기고서 이번엔 자신의 옷을 벗었다.
이른 새벽에 혼자 운동을 하는지 박래현 상체는 보기 좋은 근육으로 꽉 차 있었다. 나는 팽팽하게 벌어진 어깨와 넓은 가슴에 시선을 묻으며 얼른 탄탄한 몸을 만져 보고 싶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벌써 발기한 성기를 훤히 드러내며 박래현이 콘돔을 찾아 포장지를 벗겼다.
“콘돔은 왜요?”
누운 자세로 고개만 뒤로 꺾은 나를 내려다보던 박래현이 미끈미끈한 고무 덩어리를 내게 건네고는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나를 위로 끌어당겼다.
“감염 위험이 있어서 콘돔하고 하는 게 좋대요. 당신이 씌워 봐.”
나는 팔을 괴고 엎드려서 위로 우뚝 솟은 튼실한 성기를 혓바닥으로 살살 핥았다. 울퉁불퉁한 핏줄을 꾹꾹 누르며 쿠퍼액을 흘리고 있는 귀두를 빨아 당겼다. 목구멍을 열고 깊게 삽입하려는데 박래현이 양 볼을 잡아 얼굴을 떼어 냈다. 그는 상체를 숙여 성기가 빠져나온 입술에 슬쩍 입 맞췄다.
“힘든 건 하지 말고 얼른 콘돔이나 씌워요.”
박래현 성기는 계속 빨아 달라고 나를 향해 불끈불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성기를 달래듯 기둥을 한번 쓸어 준 뒤 콘돔을 끝에서부터 조심스럽게 씌워 나갔다. 성기에 찰싹 달라붙은 얇은 고무 위로 용틀임하는 핏대가 퍼렇게 드러났다. 박래현은 칭찬하듯 머리칼을 한번 흐트러뜨리고 나서 나를 안아 자신의 사타구니 위에 눌러 앉혔다.
“8주까지는 조심해야 한다니까 당신이 살살 움직여 봐요.”
“조심해야 하는 거면 하지 말까요? 전 참을 수 있는데.”
“조심하라고 했지, 하지 말라고 안 했습니다. 당신 임신한 거 알기 전까지 여러 번 전쟁 치렀는데 괜찮았잖아요.”
허리를 움직여 성기를 삼키려는 나를 제지하고 그는 페로몬을 풀어 먼저 내 몸을 젖게 만들었다. 애액이 충분히 만들어졌는지 손가락을 넣어 확인한 박래현이 구멍을 잡아 양쪽으로 벌리고서 굵직한 성기를 밀어 넣었다. 느리게 진입한 성기가 뿌리 끝까지 들어서자 나는 운동으로 다져진 어깨를 두 손으로 틀어쥐고서 앞뒤로 허리를 움직였다. 나를 올려다보는 갈색 눈에 조명이 스며들어 노란색으로 빛났다.
“저랑 섹스하는 게 그렇게 좋아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매일 밤 당신을 안아서, 최대한 빨리 단물을 다 빨아 먹을 생각입니다.”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버릴 거면 결혼은 왜 하자고 했어요?”
기다란 속눈썹이 내 입술을 간질이고 커다란 손이 옆구리와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진득하게 쓸어내리는 손짓과 대조적으로 남자의 얼굴엔 깊은 상실감이 어렸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해 왔던 남자는 지금껏 자신을 통제하며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이 남자가 계획한 미래에 나 같은 오메가와 결혼할 예정 따윈 없어서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를 취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에 결혼을 택한 건 박래현 자신이었다.
“윤준영 씨, 그게 마음대로 되면… 내가 왜 이러겠습니까?”
자신을 질책하는 말투 안에서 나는 박래현이 숨겨둔 진실 하나를 캐냈다. 박래현은 내게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줄곧 괴로운 상태인 듯했다. 남자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던 나는 박래현의 변화를 확신하게 되었다.
남자는 남창이라고 무시했던 이의 몸에 푹 빠져서 흔들리고 있었다. 박래현이 내게 마음을 열진 않았을 테니 그는 매우 드물게 일어난다는 육체적 각인을 한 예인 듯했다. 28년을 성욕 없이 살았던 박래현에게 처음 욕구를 느끼게 해준 오메가가 나였다. 알파나 오메가가 각인 상대와 섹스하면 가장 강력한 마약을 하고서 섹스하는 것보다 더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 마약을 맛본 박래현이 내 몸을 독점하려 들고 욕심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러트 사이클이 찾아온 동안 남자에게 변화가 생긴 듯했다. 오메가에게 각인한 걸 인정하기 싫겠지만 태도가 바뀐 걸 보면 내 추측은 일리가 있었다. 아이를 낳게 한 뒤에 마음 내키는 대로 취할 수 있는 몸을 두고 굳이 결혼을 강행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나를 얻고자 버린 정치헌은 박래현에게 나보다 훨씬 가치 있고 도움이 되는 카드였다. 박래현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나를 택한 이유로 각인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박래현은 생긴 대로 각인도 참 특이하게 했다. 3% 확률이 채 안 되는 육체적 각인을 해서 마음은 여전히 나를 거부하는데 육체는 나를 갈망하는 모순 속에서 살게 되었다. 남자가 그 차이를 어떻게 극복해 낼지 자못 궁금했다. 한편으론 오만방자하게 굴던 알파가 내게 각인해서 결혼해 달라고 사정하는 꼴을 보니 존나 우습고 속이 후련했다. 나는 오메가가 알파를 휘두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쥔 것이다.
내가 박래현을 버리고 도망가면 박래현이 얼마나 미쳐 날뛸지 상상만으로 흐뭇해져서 웃음이 나왔다. 거기다가 내가 다른 알파와 각인해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자존심 강한 박래현은 반미치광이가 돼 4~5년은 제대로 진창을 구를 것이다. 그 앞에 대고 뭐라고 말해 줄까. 그러게 누가 나 같은 남창한테 각인하라고 했습니까?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죠. 이 정도면 일침이 되려나 모르겠다. 내게 악마같이 굴던 알파에게 나는 머릿속으로 큰 엿을 먹였다.
“윤준영 씨, 좋은 일 있어요? 기분 나쁘게 왜 혼자만 웃고 있지?”
그러나 내겐 지켜야 할 엄마와 아기가 있어서 망상은 망상으로 끝날 것이다. 거기다가 나를 만난 알파는 아무 죄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컸다. 이 남자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비밀입니다.”
마냥 기뻐할 수 없는 게 내가 쥔 무기 끝이 나를 향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집착 정도가 심하면 알파는 오메가를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박래현은 자제력이 강한 알파여서 그 정돈 아니겠지만 나를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은 각인 전보다 훨씬 강해졌을 것이다. 당장 결혼을 서둘러 나를 묶어 두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숨기려 드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으, 으응… 더 깊이 넣어도 돼요.”
깊이 들어와서 한바탕 안을 들쑤신 다음 뒤로 빠졌던 성기가 아직도 살을 벌리며 진입하고 있었다. 자지가 느릿느릿, 줄기차게 파고드는 느낌이 색달라 입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나왔다. 빠르게 들락거릴 땐 내벽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면서 성감을 자극받는데 지금은 기둥에 닿는 면적이 넓어 속살 전체로 은밀하게 쾌감이 번져 갔다.
“세게 안 박아 주니까 싫어요?”
“아니요… 전 이것도 좋아요.”
시간을 들여 끝까지 들어온 성기가 안에서 자맥질하며 성감대를 짚어 냈다. 그는 하체는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축축하고 까슬까슬한 혀로 젖꼭지를 짓눌렀다. 짙붉은 입술이 납작한 가슴에 달라붙어 젖꼭지를 빨아 먹는 모습이 미치도록 야해서 울컥울컥 물이 쏟아졌다. 젖꼭지를 빨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멀리 떨어진 꼬리뼈에 짜릿한 감각이 몰아쳤다.
“아, 아으윽! 흐, 흐으응, 으으응….”
내 신음에 놀라 박래현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가 이내 침으로 반들거리는 입술을 내 목덜미에 문지르며 단단하게 일어선 젖꼭지를 매만졌다. 더 빨아 줘도 된다는 의미로 나는 그의 얼굴을 잡아서 젖꼭지에 갖다 댔다. 박래현은 혀를 내밀어 젖꼭지를 핥다가 아쉬운 듯 입술을 뗐다.
“내가 깜박 잊었는데, 은수 누나가 젖꼭지 자극은 안 된다고 했어요.”
“아, 그래요?”
박은수 충고를 진지하게 듣고 있었을 박래현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는 젖꼭지를 빠는 대신 내 목덜미를 잡아 고개를 숙이게 하고 귓불을 핥았다. 날것의 혀가 솜털을 적시며 귓구멍 안에 뜨거운 숨을 뱉어 냈다. 혀가 귀를 뚫고 내 입으로 나올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흔들어 그에게서 벗어났다. 박래현이 심술궂게 허리를 짓쳐 올렸다.
“으, 으으음, 흐읏….”
몸을 뒤틀면서 안에 들어온 성기를 속살로 짓씹었더니 기다란 속눈썹을 파드득 떨며 박래현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속으로 감탄하면서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 이마와 남자답게 솟은 눈썹 산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그 아래로 경사진 콧날을 지나 쫀득한 볼을 손으로 감싸 얼굴을 들어 올렸다. 입술 가장자리에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자 깊게 쑤셔 넣은 좆이 꿈틀꿈틀 움직여 안을 자극했다. 박래현이 크게 움직이지 않아서 오르가슴도 뭉근하고 더디게 찾아왔다.
“으, 으으읏, 하아, 너무 좋아요! 흐, 흐읏.”
“당신은 이때가 제일 예쁘다고 누가 말해 줬어요?”
내 몸을 채우고 있던 성기가 쑥 빠져나갔다. 절정의 여운에 사로잡힌 날 안아서 침대에 눕힌 박래현이 내 몸을 뒤집어 베개를 허리 사이에 끼워 넣었다. 박래현 체향이 밴 침구에서는 내 것과 다른 야릇한 냄새가 났다. 여기가 내 방이 아니라 박래현 방이란 사실에 속이 크게 울렁거렸다. 커다란 그림자가 시트 위에 어른거리더니 이내 박래현이 뒤에서 몸을 밀착시켰다. 벌어진 구멍 안으로 성성한 성기가 조심스럽게 드나들었다. 빈틈없이 나를 끌어안은 박래현이 내 손가락 마디마다 자신의 손을 깍지 끼우고서 허리를 움직였다.
그는 벌어진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틀어막아서 내 신음을 통째로 삼켰다. 등과 엉덩이, 얽힌 다리에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나는 끈적한 절정에 빠져 허우적댔다. 내가 무리하지 않도록 배려해서인지 박래현은 평소보다 일찍 사정했다. 콘돔을 낀 상태라 질퍽하게 퍼지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가 가하는 압박이 느슨해져서 알 수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에 연신 입 맞추며 들어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조심해서 성기를 꺼냈다. 콘돔 끝을 묶어 쓰레기통에 던진 그가 엎드려 있는 내게 이불을 덮어 줬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어요.”
박래현은 내게 명령한 뒤 방을 나갔다. 박래현을 기다리며 몸을 뒤척이다가 내가 흘린 정액과 애액으로 엉망이 된 시트를 발견했다. 내 방도 아니고 박래현 방에서 나 혼자 질질 흘리고 있었다니 짜증이 날 정도로 부끄러웠다. 내 침대와 달리 박래현 침대는 방수가 안 되는 시트를 쓸 것 같아서 내일 침구를 통째로 세탁해야 할 이 차장에게 미안했다. 시트를 걷어 낼까 고민하는 중에 박래현이 들어와 나를 이불에 둘둘 감았다. 그는 내 목과 다리 사이에 팔을 넣어 나를 안아 올린 뒤 방을 나와서 계단을 내려갔다.
“헉, 무거운데 내려 줘요. 오늘 살살해서 힘 하나도 안 들었어요.”
이불 사이로 빨개진 얼굴을 내밀고 나는 팔다리를 흔들었다. 박래현이 나보다 키가 크지만 나도 180이 넘는 장신이라 남자에게 이런 식으로 안기는 건 어색했다. 박래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 귓가에 입술을 댔다.
“발버둥 치다가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요.”
그는 내 방을 가로질러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을 받으려고 잠깐 사라졌던 모양인지 욕실은 수돗물 떨어지는 소리와 습기로 가득했다. 박래현은 나를 욕조에 내려놓고 시트를 벗겨 욕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따뜻한 물이 늑골 부근에서 찰랑찰랑 흔들렸다. 나는 욕조 가장자리에 목덜미를 대고 얼굴을 뒤로 젖혀 박래현의 실루엣을 더듬었다.
시야를 흐리게 하는 수증기 속에서도 정교하게 조각된 남자의 몸은 뚜렷이 드러났다. 세련된 슈트에 둘러싸여 있을 땐 도도하고 우아해 보이는 몸이 한 꺼풀 벗겨 놓으면 퍽 관능적으로 변신했다.
나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남자의 몸을 핥아 내렸다. 활짝 벌어진 어깨와 날개처럼 펼쳐지는 활배근 때문에 박래현 몸은 완벽한 역삼각형을 이뤘다. 음영이 뚜렷한 가슴 근육이나 복근은 적당히 마른 몸을 돋보이게 해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피부색이 짙으면 훨씬 육감적인 분위기를 낼 테지만 피부가 깨끗하고 윤기가 흘러 위험한 분위기가 다소 상쇄되었다.
같은 남자가 봐도 탐나는 몸이라 나는 혼자서 입맛을 다셨다. 수납장에서 뭔가를 꺼낸 박래현이 길고 매끈한 다리를 움직여 내게 다가왔다. 넋 놓고 그를 쳐다본 게 부끄러워 얼른 시선을 돌렸지만 다 들켜 버린 듯했다.
“물 온도 어때요?”
“따뜻해서 좋아요.”
내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은 박래현 때문에 물이 순식간에 가슴께까지 차올랐다. 박래현은 내 왼손을 잡아서 노란색 하트 모양 입욕제를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금색 펄이 잔뜩 묻은 입욕제에서 페퍼민트 향이 났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 맡는 나를 빤히 보면서 박래현이 허리를 움직여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발끝에 하필이면 자지가 닿아서 나는 민첩하게 다리를 거둬들였다. 발끝에 닿은 성기는 나랑 섹스한 적이 없다는 듯 발기해 곤두서 있었다. 한번 할 때 두세 시간은 기본이라 아까 간질간질한 섹스에 만족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는 물에 젖은 박래현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어둠이 깃든 유리창에 시선을 두었다.
“내가 안 볼 땐 잘만 훔쳐보면서, 정작 멍석 깔아 주니까 왜 딴 데 보고 있어요?”
“그런 건 좀 넘어가 주면 안 됩니까? 근데 대체 언제 운동하세요?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하겠어요.”
“당신 자고 있을 때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씩 합니다. 회사에서 시간 날 때 맨몸 운동도 하고.”
박래현이 내 발목을 잡아서 양쪽으로 벌리며 다가앉는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입욕제가 물로 풍덩 빠져 버렸다. 입욕제는 시원한 바람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물에 녹아내렸다. 처음엔 노란색 거품만 나오더니 나중엔 파란색 거품과 흰색 거품이 뒤섞여 물이 청록색으로 변해 갔다.
입욕제가 다 녹은 물에는 금색 펄들과 작은 별들이 둥둥 떠다녔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 같기도 하고 별빛이 내린 깊은 바다 같기도 했다. 나는 물을 가득 떠서 박래현 침으로 끈적거리는 얼굴을 씻어 내렸다. 입욕제에 오일이 섞여서 물이 기분 좋게 미끈거렸다.
신경을 다 녹일 듯 뜨거운 눈으로 내 귓바퀴를 더듬던 박래현이 나를 마주 보게 안아 허벅지에 앉히고 욕조에 등을 기댔다. 무릎을 세워 내 몸을 단단하게 받친 그가 내 얼굴을 음미하듯 구석구석 어루만졌다. 얼굴 탐험을 끝낸 손은 목덜미를 거쳐 어깨를 어루만지더니 옆구리와 엉덩이까지 차례로 쓸어내렸다. 박래현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린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회계사가 되고 싶어요?”
“네.”
“회계 법인보다 더 좋은 곳에 취직했잖아. 연봉 세지, 시간은 남아돌지, 당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 텐데.”
“박래현 씨한테 언제 해고될지 몰라 불안해요.”
“영원히 해고 안 할 겁니다. 그런데 박래현 씨 말고 다른 호칭은 없어요? 그거 영 듣기 거슬리는데.”
“부부 사이에 주인님이라고 부르긴 싫어요.”
박래현을 부르는 호칭이 모호하긴 했다. 직장 상사가 아니라 상무님이라 부를 순 없고, 주인님은 치가 떨리게 싫고, 선배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자기는 차마 사용할 수 없는 호칭이었다. 나는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별 조각을 휘저으며 적당한 답을 찾으려 애썼다.
“역시 박래현 씨가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아니면 형은 어때요?”
“당신 편할 대로 불러요. 그만 나갑시다, 벌거벗은 몸 보니까 슬슬 박고 싶어지네.”
박래현이 일어서면서 바다색 목욕물에 작은 파도가 생겼다. 유연한 근육과 날카로운 몸 선을 따라서 펄 섞인 물이 흘러 내렸다. 시간이 지나 수분이 사라진 자리에 펄만 남아 금빛 비늘이 자란 것처럼 남자의 몸이 황홀하게 빛났다. 강인함과 우아함, 퇴폐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몸이었다.
박래현은 커다란 목욕수건 두 개를 찾아 욕조 턱에 걸쳐 놓고서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나를 물에서 건져 올렸다. 머리칼과 몸을 먼저 닦아 준 뒤에 그는 수건으로 나를 둘둘 말았다. 누에고치가 된 상태로 나는 박래현에게 안겨 번쩍 들어 올려졌다.
“박래현 씨. 혹시 저한테 각인했어요? 그래서 저한테 다정하게 대하는 거죠?”
박래현이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펄이 남아서 반짝이던 뺨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굳었다. 지나치게 확신에 찬 어조로 물어서 화가 난 건가 고민하는 나를 침대에 내려놓고는 내 몸에서 수건을 풀어 머리칼에 남은 물기를 마저 제거했다. 눈은 계속 나를 향한 채였다.
“당신이 나를 각인시킬 만큼 매력적인 오메가라고 생각합니까?”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대답은 제가 아니라 박래현 씨가 더 잘 알 텐데요.”
“그래서 내가 당신한테 각인했으면, 뭐 어쩔 건데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내가 원하면 당신은 날 거부할 수 없는데, 각인이 나를 잡고 휘두를 무기가 될 수 있을까요?”
“…….”
“죽었다 깨어나도 윤준영 씨한테 각인할 일은 없을 겁니다. 헛된 기대는 하지 말아요.”
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박래현 말을 반만 믿기로 했다. 내게 각인해서 나를 옆에 두고 싶은데 프러포즈해 봤자 안 받아들일 게 뻔해서 남자는 마침 찾아낸 사후 피임약으로 내가 결혼을 선택하게끔 유도했을 것이다. 아주 교활하고 사악한 남자였다.
***
결혼 계약서를 작성하고부터 놀랍도록 평온하고 잔잔한 일상이 지나갔다. 나는 자유롭게 엄마를 만나러 다녔고 박래현은 집에 도착해서 출근할 때까지 옆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퇴근하면서 사 온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를 직접 먹이면서 물을 떠다 주거나 손발을 닦아 주는 시중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를 돌본답시고 매일 밤 내 방에 머무르다가 은근슬쩍 나를 안고 잠들기도 했다. 몸은 언제나 찰떡같은 관계이므로 혼자 잠들었을 때보다 박래현 품에서 더 깊은 잠을 잤다.
계약서를 기점으로 뭔가 중대한 결정이라도 한 듯 남자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로 나를 대했다. 그 예로 말투와 행동이 한결 부드럽고 다정해졌다. 이전의 박래현과 지금의 박래현은 같은 껍데기와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자기 아이를 밴 오메가를 함부로 할 수 없어서이겠지만 나는 이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내 영혼을 좀 먹던 빚이 다 청산돼 숨통이 트였다. 빚이 있는 삶은 빛이 없는 삶과 비슷했다. 빚은 사람을 무력하게 해서 그 결과 제대로 사고할 수 없는 바보로 만들었다. 이 집에 들어오고서부터 계속 긴장을 늦추지 못했던 탓에 큰일 없이 굴러가는 완만한 일상이 퍽 고마웠다. 결혼 계약서를 작성하기 이전 상황으론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박래현에게 맞춰 주며 이 잔잔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허리에 둘린 무거운 팔을 거두고 일어나서 잠들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마와 뺨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자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 드러났다. 눈을 감고 있어서 내 시선은 단연 짙붉은 입술로 향했다.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장미꽃잎처럼 보들보들한 질감을 느껴 보다가 입술이 꿈틀거리자 놀라서 손을 뗐다.
모양 좋은 입술에서 어떤 말들이 쏟아져 나왔던가. 박래현이 내게 잘해 줄 때마다 박래현에게 당했던 치욕이 수면 아래서 튀어 올랐다. 계약하기 전에 그 부분을 명시했고 내가 기껍게 계약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내 상처를 완화해 주지는 못했다. 잔인하게 파헤쳐진 상처에선 여전히 진물이 흘러 박래현이 아무리 다정하게 굴어도 딱지가 생길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남자에게 고마운 점도 있었다. 나는 박래현 몰래 핸드폰을 챙겨 왔고 사후 피임약을 옷장 속에 숨겨서 계약 조항을 위반했다. 정말로 악랄하게 나를 몰아갈 작정이었다면 박래현은 결혼 계약서를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나를 착취할 수 있었을 테고 그마저 귀찮다면 돈을 갚지 못한 나를 감옥에 보낸 뒤 아픈 엄마를 병원에서 내쫓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박래현은 나와 결혼하는 쪽을 택했고 엄마에게도 변함없이 최상의 대우를 제공하고 있었다. 박래현 덕분에 엄마는 수술한 병원에서뿐만 아니라 요양 병원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 중이다.
분노, 애증, 질투, 조바심, 아픔, 욕망과 같은 모든 감정과 본능이 한데 뒤엉켜서 박래현이 제거된 인생은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 남자를 내게서 지우려면 감정과 본능을 담당하는 뇌의 어딘가를 도려내야만 가능할 것이다.
“아침부터 나한테 반했습니까? 표정이 왜 이래요?”
“아니요. 그런 일은 절대! 안 일어날 테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언제 잠에서 깼는지 머리카락 안으로 박래현 손가락이 들어와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미동도 없이 내 눈을 들여다보던 박래현이 뒤통수를 눌러 내 입술에 입 맞췄다. 도톰하고 육감적인 입술 사이로 윗입술이 빨려 들어갔다. 더 깊게 키스하고 싶어 입을 벌렸는데 민망하게 박래현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오후엔 병원 가야 하니까 오전엔 푹 쉬어요.”
“오늘 출근하세요?”
“응, 오전에 사람 좀 만나고 바로 들어올게요. 점심 먹고 기다리고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파자마 바지를 입은 박래현이 핸드폰과 시계를 챙겨 방에서 나갔다. 남자는 몸이 길고 커서 옆에 있는 것과 없는 것에 큰 차이를 느끼게 했다. 나는 박래현이 머물렀던 빈자리를 보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입맛이 없어 오전엔 죽으로 때우고 점심은 새싹 육회 비빔밥을 먹었다. 외출한다는 생각에 들떠서 숟가락을 놓자마자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 입고 나갈 옷을 골랐다.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어서 칼라와 소맷단에 붉은색이 들어간 줄무늬 셔츠와 발목까지 오는 청바지를 입었다. 젤을 사용해 머리칼을 매만지면서 박래현이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침실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그가 감시하고 있어서 핸드폰은 엄마에게 연락하거나 박래현에게 온 연락을 받는 데만 사용했다.
“네, 윤준영입니다.”
- 늦었어. 현관으로 나와요.
“네.”
핸드폰과 지갑을 챙긴 나는 흰색 스니커즈에 발을 꿰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현관 앞에 못 보던 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청색 스포츠카의 날렵하면서도 우아한 곡선을 감상하고 있는데 조수석 창문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그 안에서 박래현 얼굴이 나왔다.
“뭘 멍청하게 서 있어요? 얼른 타지 않고.”
박래현이 직접 운전해서 병원에 갈 모양이었다. 조수석에 올라탄 나는 안전벨트를 매고 새 차를 둘러보았다. 주차장에 주차된 차만 다섯 대가 넘는데 또 차를 사다니 돈 지랄이란 생각만 들었다. 박래현은 내가 타자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 면허증은 있어요?”
“네.”
1년간 휴학하면서 뭐라도 하나 이루고 싶은 마음에 운전 면허증을 땄다. 나중에 아르바이트의 범위를 넓혀 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박래현은 잘 됐다면서 황금색 몸통에 검은색 보석이 군데군데 박힌 재규어와 차 키가 달린 키링을 내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이 차는 윤준영 씨 주려고 샀습니다. 마음에 들어요?”
“네? 진짜요?”
“어디든 돌아다닐 순 있지만 혼자 운전하고 다니는 건 안 됩니다. 반드시 경호원들이 운전하게 하세요.”
비싸고 화려한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재규어를 만지작거렸다. 보석이 박힌 부분이 밖으로 튀어나와 촉감이 울퉁불퉁했다.
“마음에 안 드나 봅니다. 다른 차로 바꿔 줄까요?”
“아, 아니에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맙습니다. 잘 사용할게요.”
“당신 명의로 샀으니까 이제부터 당신 겁니다. 안정기 들어서면 운전 연수부터 받아요.”
“네. 연수 빨리 받고 싶어요.”
“선물 받아 놓고 입 씻을 겁니까?”
신호를 받은 박래현이 건널목 정지선 앞에 차를 세웠다. 차 안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콘솔 박스에 놓인 박래현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입 벌려 봐요.”
물티슈로 손을 깨끗이 닦은 박래현이 벌려 준 입술 안으로 손가락을 디밀었다. 어금니 안쪽까지 들어온 엄지와 중지가 혀 가장자리를 잡아 반으로 접고서 혓바닥 한가운데를 검지로 긁어내렸다. 셔츠에 침을 흘리지 않으려고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젖혀 박래현을 보았다. 벌어진 입술을 흐린 눈으로 보고 있던 박래현이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며 침을 삼켰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나서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 서울에 있는 차들이 다 거리로 뛰쳐나왔는지 토요일 오후의 정체가 길게 이어졌다. 키링을 무릎에 내려놓고서 나는 박래현 손목을 잡아 성기를 빨 듯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핥았다. 혓바닥으로 지문을 감별하며 입술을 오므려 쪽 소리가 나게 빨아들이기도 했다.
두 번째 신호를 받고 멈춰 섰을 땐 박래현 엄지가 내 입술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도 나처럼 키스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엄지를 빨려고 달려드는 내 얼굴을 가볍게 뒤로 밀었다.
“내 강아지가 예쁘게 차려입었는데, 발정 나서 다 젖으면 안 되잖아요. 당신 벌써 쌀 거 같은 얼굴입니다.”
박래현 말이 맞았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내 몸은 젖어 들 테고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지 않아서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자세를 바로 한 나는 민망해서 키링을 만지작거렸다.
“1층에 빈방이 하나 있는데 오늘 그 방을 영화관으로 꾸며 달라고 했어요. 심심하면 TV나 영화 보면서 시간 보내요. 책 필요하면 주문하고. 노트북은 좀 더 있다가 준비해 줄게요.”
“저는 뭘 해 드려야 할까요? 받기만 해서 부담스러운데.”
“내가 당신한테 원하는 건 딱 두 가집니다. 그 외에는 필요 없어요.”
박래현이 말하는 두 가지가 뭔지 알고 있다. 원할 때 다리를 벌려 주는 것과 초롱이를 건강하게 낳아 주는 것. 나는 대가로 받은 차의 내부로 눈을 돌렸다. 차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차가 굉장히 고급스럽고 화려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가격은 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배우자에게 선물 받은 차인데도 화대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씁쓸했다.
병원 지하 3층에 차를 주차하고 박래현은 빠르게 차에서 내려 내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로 키를 눌러 차 문을 잠갔다. 전화가 걸려와서 박래현은 누군가와 통화를 했고 나는 고급스럽게 생긴 차 키의 구조와 키링을 살폈다. 진료실에 들어섰을 때 동료 의사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박은수가 기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준영 씨, 예비 아빠 된 거 축하해요. 어떤 아기가 태어날지 벌써 궁금해 죽겠어요. 안으로 들어와요. 초음파 한번 봅시다.”
“이제 겨우 2주 지났는데 초음파에 잡힐까요?”
“준영 씨, 임신 주 수는 따로 계산법이 있어요. 준영 씨는 지금 4주째 들어섰다고 봐야 해요. 박래현, 너도 들어와서 봐.”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파티션 안으로 들어가 치마로 갈아입은 나는 박래현과 박은수가 기다리는 침대로 가 반듯이 누웠다. 임신 테스트기로 확인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니 가슴이 쿵쿵 뛰었다.
“무릎 세워 봐요. 이물감이 느껴지겠지만 힘주지 말고 마음 편하게 가져요.”
박은수 말이 끝나고 곧장 밑으로 차가운 기계가 들어왔다. 힘을 안 주려고 해도 긴장해서 자꾸 아래로 힘이 들어갔다. 연달아 사진을 찍은 박은수가 박래현과 내게 눈에 보일까 말까 한 작은 점을 보여 주며 아기집이라고 했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을 보고도 긴가민가했는데 사진으로 확인하니 정말 임신이 맞았다. 박래현과 나는 탄성을 터트리며 아기집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쳐다보았다.
“아직 초기라 잘 안 보이지? 다음 주 되면 확실하게 보일 거야. 준영 씨가 건강해서 착상 시기가 좋아. 아기도 아주 건강할 거야.”
검사를 끝낸 박은수가 초음파 기계를 내려놓자 박래현이 물수건으로 젤이 묻은 밑을 깨끗하게 닦아 냈다. 아기집이 보이는 화면에서 눈을 떼다가 박래현을 보며 웃는 박은수를 발견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박은수는 박래현이 너한테 반했다는 내 말이 맞지 않냐는 듯 오른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떴다. 멋쩍어서 나도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바지로 갈아입은 뒤 나를 기다리고 있던 박래현과 진료실로 나가 박은수 앞에 앉았다. 그녀는 오늘 찍은 초음파 사진과 임신 수첩을 박래현에게 건넸다.
“준영 씨, JS 제약에서 나온 엽산제 하루 한 알씩 먹어요. 착상이 안전하게 잘됐지만 이달하고 다음 달은 절대 스트레스 받지 말고 느긋하게 지내요. 운동 좋아한다던데 심한 운동은 하지 말고 가벼운 산책이 좋겠어요.”
박은수는 그 외에도 임신 초기에 지켜야 할 사항을 구구절절 얘기해 주었다. 그녀의 얘기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박래현이 서류 한 장을 그녀 앞에 꺼내 놓았다.
“여기 증인란에 필요한 거 쓰고 도장 찍어 줘.”
박은수와 미리 얘기된 건지 박은수는 혼인 신고서 증인란에 필요한 부분을 채우고서 서명을 했다. 아래 칸엔 박영범의 사인이 보였다.
“둘이 신혼이라 눈만 마주쳐도 타오르겠지만, 너무 격렬한 섹스는 지양해 줘. 제일 조심해야 할 때니까. 섹스하는 건 괜찮은데 부드럽게 살살. 알았지?”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박래현은 요즘 들어 섹스를 절제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가벼운 삽입이나 페팅으로 끝낸 다음 나를 끌어안은 채 잠들었다.
“우리 갈게. 병원엔 언제 와야 해?”
“이달은 됐고 한 달 있다가 와. 아, 그사이에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당장 연락하고.”
박래현과 나는 박은수의 배웅을 받으며 진료실을 나왔다. 차에 탈 때까지 나는 초음파 사진이 붙은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이 작은 점이 발아해 아이가 된다는 사실이 곱씹을수록 신기했다.
“오늘은 저녁 먹고 들어갑시다.”
“왜요? 이 차장님 음식이 담백해서 좋은데.”
“분위기를 바꿔 보고 싶어서 그래요. 당신한테 할 얘기도 있고.”
박래현은 병원에서 가까운 호텔 입구로 들어가 발레파킹을 맡기고 차에서 내렸다. 차 키를 내주기 아쉬웠으나 박래현은 미련 없이 내 손에서 키를 뺏어 직원에게 건넸다.
호텔 로비로 들어간 우리는 마침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박래현이 33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둥근 유리로 되어 있어 서울의 야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밤이 깃든 도시는 찬란하게 빛났지만 박래현처럼 표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레스토랑으로 들어간 우리를 직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박래현이 이름을 대자 그는 안쪽 룸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박래현은 내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뒤로 빼 준 뒤 맞은편에 앉지 않고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한 면이 유리로 된 룸이라 엘리베이터에서처럼 눈앞에 화려한 야경이 펼쳐졌다.
“여기 분위기 어때요?”
“좋아요. 밤하늘에 떠 있는 기분이에요.”
박래현은 물수건으로 내 손을 닦은 다음 새 수건으로 자기 손을 닦았다. 조금 있다가 주문한 요리가 코스대로 나왔다. 심심한 요리만 먹다가 오랜만에 짜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서 입맛이 돌았다. 박래현은 내가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스테이크를 하나 더 주문했다.
“다른 사람들은 임신하면 입맛이 없어진다던데, 윤준영 씨는 어째 식욕이 더 왕성해진 거 같네요?”
“배 속 애가 저 닮아 순해서 그래요. 박래현 씨 닮았으면 벌써 속 뒤집히고도 남았어요.”
“당신 빼닮으면 좋지 뭐. 아기방은 어디로 할까요? 2층은 위험하니까 형 방을 아기방으로 꾸미고 형은 2층 손님방으로 보냅시다.”
“알아서 하세요.”
“결혼하면 방은 같이 쓸 겁니다. 매일 섹스할 건데 따로 쓰긴 번거로우니까.”
“방도 넓고 침대도 크니까 그렇게 하세요.”
박래현과 같이 자는 건 나도 좋았기 때문에 흔쾌히 승낙했다. 그는 직원이 가져온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어 접시째 내 앞으로 내밀었다. 배가 덜 불렀던 참이라 나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박래현도 배가 덜 찼을 것 같아 고기를 찍어 입 앞으로 내밀었더니 그는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 달 말에 미국 나갈 일이 있는데 같이 갈까요? 일 끝나고 신혼여행 겸 10일 정도 쉬었다가 들어올 생각입니다.”
“제가 같이 가도 돼요?”
“내 일은 사흘 정도면 끝나요.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곳도 돌아다니다 옵시다. 윤준영 씨한테 사 주고 싶은 것도 있고.”
“미국 어디로 가는데요?”
“그린스와 시비티 본사가 뉴욕에 있어서 나흘은 뉴욕에 머물 겁니다. 동선 봐서 가 보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일 있으면 생각해 놔요.”
“네! 저 여권부터 만들어야겠어요.”
여행이란 말에 정신을 빼앗겨 후식으로 나온 음식들은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박래현과 신혼여행을 가게 되다니, 남자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다 먹었으면 갈까요?”
내 턱을 한 손으로 고정한 박래현이 냅킨을 집어 입술과 입가를 닦아 주었다. 깨끗해진 입술을 검지로 톡 치고 나서 그는 작은 상자를 챙겨 일어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간다는 생각에 마음은 벌써 태평양 위를 둥둥 떠다녔다. 계산을 마친 박래현은 내 어깨에 손을 감고서 나를 한적한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1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33층으로 올라와 멈췄다. 박래현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37층을 눌렀다.
“집에 안 가요?”
“호텔에 왔으면 우리 할 일은 하고 가야지.”
“저녁 먹으러 온 거 아니었어요?”
“호텔에 밥만 먹으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굳이 호텔에서 밥 먹는 이유가 뭔데? 응?”
어깨에 두른 손으로 얼굴을 감싼 박래현이 내 고개를 옆으로 꺾어 입 맞췄다. 나는 박래현 허리에 두 팔을 감고 들어온 혀를 내 혀로 감아올렸다. 혀를 깊게 얽은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박래현이 이끄는 대로 뒷걸음질했다. 문 같은 것에 등이 닿자마자 찰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닫히는 소리를 뒤로하고 마른 몸 어디에서 힘이 나는지 박래현이 엉덩이를 받쳐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허공에 뜬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박래현 목에 두 팔을 둘러 그에게 매달리듯 안겼다. 몇 걸음 걸어가서 나를 소파에 눕힌 박래현이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셔츠 단추를 성급하게 풀어 헤쳤다.
낯선 장소가 주는 야릇한 상상 때문에 몸이 금세 달아올랐다. 박래현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검은 유리창 뒤에 우리를 훔쳐보는 누군가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박래현 넥타이로 손을 뻗었다. 매듭을 다 풀기도 전에 박래현은 내 셔츠 단추를 쉽게 열고서 젖꼭지에 혀를 대고 둥글게 굴렸다. 보드랍고 연약한 살덩이가 박래현 입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넥타이를 겨우 풀고 나서 나는 박래현 어깨를 잡았다.
“으, 으으응, 흐읏! 젖꼭지는 안 된다고 했다면서요.”
젖은 혀에 굴려지면서 발딱 선 젖꼭지가 신기한 듯 박래현은 혀끝으로 젖꼭지를 살살 밀어냈다. 다른 쪽 젖꼭지는 엄지에 눌려 뒤로 눕혀졌다.
“임신하기 전에 실컷 빨아 둘 건데 그랬어요.”
박래현은 아쉬운 듯 젖꼭지에서 입술을 떼고 내 아랫배에 오른쪽 뺨을 댔다. 나는 단정하게 뒤로 넘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휘감았다.
“이 납작한 배에 우리 아이가 들었다니 정말 신기해요. 빼빼 말라서 당신 배부른 모습은 상상이 안 돼.”
배에 몇 번 입 맞춘 박래현은 풀어 헤친 단추를 도로 채웠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박래현이 등을 감아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내 옆에 앉았다.
“우선 혼인 신고서부터 작성합시다.”
박래현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혼인 신고서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가 건네준 만년필을 받아서 내가 작성해야 할 부분을 채워 나갔다. 고상하고 힘 있는 박래현 필체에 비교되지 않게 정성껏 글자를 썼다. 엄마 인적 사항까지 다 쓰고 만년필을 건네고 났더니 기운이 탁 풀렸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행사인 줄 알았는데 결혼은 서류 한 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다. 내 인적 사항을 쓰고 그 옆에 서명함과 동시에 남과 부부관계가 성립되었다.
“혼인 신고서는 내가 알아서 제출할 겁니다.”
“우리 부부가 된 겁니까? 진짜 쉽고 간단하네요. 이거 사기 치기도 쉽겠어요.”
자식이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박래현과 결혼한 줄도 모르고 잠들었을 엄마와 몇 개월째 행방불명인 해준이 생각나서 슬펐다. 나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데 해준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몸은 건강한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걱정하다가 박래현이라면 해준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박래현이 경찰에 전화만 걸어 줘도 경찰은 해준을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남자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하기가 껄끄러워서 섣불리 손을 내밀지 못했다.
혼인 신고서를 정리한 박래현이 테이블에 내려놓은 종이 가방에서 벨벳 상자 두 개를 꺼냈다. 작은 상자 뚜껑을 열어 안에서 반지를 꺼낸 그가 내 왼손을 잡아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로 추정되는 보석이 촘촘히 박힌, 초록색 눈을 가진 뱀 한 마리가 약지 맨 아래 매듭을 친친 감고 올라왔다. 반지 무게에 눌려 뱀에게 물린 것처럼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다. 박래현이 뱀처럼 나를 감고서 놓아주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당신 결혼반지입니다.”
“전 준비를 못 했는데, 박래현 씨 반지는 나중에 제가 사 드릴게요.”
“난 시계 말고는 안 하니까 반지는 됐어요.”
“제 손가락엔 반지 끼워 놓고, 박래현 씬 밖에서 총각 행세하고 싶어서 그러십니까?”
“그건 아니고. 늘 실험실에 있다 보니 병적으로 손을 씻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반지 끼면 씻을 때 걸리적거려서 그래요.”
박래현은 직사각형 상자에서 시계를 꺼내 내 왼쪽 손목에 채웠다. 보석을 좋아하는지 가죽 스트랩으로 연결된 시계 테두리에는 둥근 선을 따라 보석이 박혀 있었다. 로마 숫자 안에 든 시곗바늘도 퍽 특이한 모양새여서 눈길을 끌었다.
“마음에 들어요? 당신 나이에 어울리게 가죽 스트랩으로 했어요.”
“네, 마음에 들어요. 근데 제게 너무 과분한 선물을 주시네요.”
“내 연 수익을 알면, 과분하단 말은 안 나올 겁니다.”
시간당 최저 임금을 받고 일했던 내게 박래현은 딴 세계 사람이었기에 박래현 수입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대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지긴 했다. 내게 매달 지급하겠다는 생활비며 엄마 병원비, 오늘 받은 선물들,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들과 경호원들까지 해서 매달 지출 규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증권사에서 주최하는 대학생 모의 투자에 참여했을 때만 해도 JS 제약은 성장 가능성이 낮아서 관심 밖이었다. 제약 회사가 갖는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기업이 2년 사이에 이렇게 급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들어가서 먼저 샤워하고 나와요.”
“샤워요?”
“왜, 내가 씻겨 줄까요? 당신 알몸 만지면서 참을 자신은 없는데.”
“아니에요, 저 혼자 씻고 나올게요.”
나는 반지와 시계를 벗어 상자에 정리하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아직 박래현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니 1~2주 정도 충실하게 결혼 생활을 한 뒤 눈치껏 해준을 찾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커다랗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머리칼과 몸의 물기를 닦았다. 파자마를 챙겨 오지 않아서 나는 연노란색 목욕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박래현은 내게 등지고서 팔짱을 낀 채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얇은 드레스 셔츠가 가로로 팽팽하게 주름을 만들며 굴곡진 날개 뼈와 늘씬한 허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뒷모습을 더 지켜보고 싶은데 인기척을 느낀 그가 성큼성큼 걸어와 나를 안아서 침대로 옮겼다. 침대 양쪽에서 목이 기다란 무드 등이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빛이 시야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더니 등에 푹신한 매트리스가 닿았고 그다음 궁둥이가 닿았다.
박래현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내 발목을 꽉 쥐어 위로 들어 올렸다. 목욕 가운이 흘러내리면서 양쪽으로 벌어져 아랫도리가 훤히 드러났다.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엄지발가락이 박래현 입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미끈한 살덩이가 발가락 사이를 오가며 살갗을 간질였다. 발목을 꽉 잡혀 발을 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시계가 채워진 손목에서 핏대가 올라온 팔뚝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발가락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빨간 혓바닥에 눈을 고정했다. 그의 다른 손은 종아리를 거쳐 오른쪽 허벅지 안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흐읏, 박래현 씨는 안 씻어요?”
“손은 깨끗이 씻었습니다.”
갈라진 목소리 끝에 진득한 욕망이 배어 있어 몸이 배배 꼬였다. 발가락 열 개를 차례로 빨고 나서 박래현은 침대 밑으로 내려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그는 내 밑구멍이 자신의 얼굴과 가까워질 때까지 엉덩이를 바싹 당기고서 딸려 온 두 다리를 널따란 어깨에 올렸다. 직각으로 벌어진 무릎 사이에서 희고 잘생긴 얼굴이 보여 뺨이 달아올랐다. 무드 등의 목을 꺾어 내 아래를 비춘 박래현이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음란한 눈빛에 밑이 고스란히 드러난 게 무안해서 허리를 틀었다.
“배가 고픈가 봐요. 구멍이 벌써 움찔거리네. 윤준영 씨, 내 자지를 먹고 싶어서 그래요?”
오래간만에 듣는 음담패설에 얼굴로 열이 몰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발로 박래현 어깨를 세게 밀어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거짓말 아닙니다. 한번 만져 봐요.”
박래현이 내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리자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다리에 힘을 주어 박래현 목을 감았다. 미끄러운 감촉의 드레스 셔츠가 발뒤꿈치에 밀려 뒤로 젖혀졌다. 허벅지를 잡아 양쪽으로 벌린 박래현이 고개를 숙여 내 성기에 입술을 비볐다. 어디에도 박아 본 적 없는 성기에 뜨거운 숨과 입술이 닿자 성기가 흥분해 발딱 일어섰다. 박래현은 기둥을 한 손으로 잡은 상태에서 혓바닥 전체로 귀두를 핥았다. 그의 입 속으로 발기한 성기가 삼켜지는 모습에 나는 무릎을 붙이며 자지러지는 신음을 냈다.
“자지 묵직하고 큰 거 봐. 혹시 다른 사람한테 자지 써 본 적 있어요?”
“…없어요.”
“쓰지도 않을 거면서 이렇게 큰 걸 왜 달고 다녀요?”
뜨거운 혓바닥이 민감한 살을 파헤치며 작은 구멍 안으로 파고들었다. 귀두를 가볍게 빨다가 그는 성기 전체를 입에 넣고 얼굴을 움직였다. 파랗게 핏줄이 인 기둥이 박래현 입 안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박래현은 볼이 움푹 패서 광대가 드러나도록 성기를 빨았다. 쩍 벌어진 가랑이 사이에서 단정하게 정리된 갈색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남자의 목구멍 안으로 빨려들어간 귀두 끝에 부드럽고 두꺼운 점막이 닿았다. 입천장과 기둥 사이의 빈틈을 뜨끈한 혀가 바짝 조여 오자 격렬한 사정감이 차올랐다. 박래현은 틈을 주지 않고 입술과 목구멍에 힘을 줘서 귀두와 성기를 무자비하게 압박했다. 박고 핥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섹스 천재라 좆 빠는 것도 잘했다.
“으, 으응, 응, 자, 잠깐만… 흐, 흐아아!”
흥분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박래현 입에 싸고 싶진 않아서 나는 박래현 등을 발로 두드렸다. 그가 입을 떼지 않아 그의 머리칼과 오른쪽 뺨을 세게 쥐었더니 더 해 달라는 의미로 해석했는지 남자가 목구멍을 좁혀 성기를 바투 조이며 불두덩에 코를 문질렀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도 나는 윤곽이 뚜렷한 뺨과 귀를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으, 으으응! 저 쌀 거 같아요. 자, 잠깐만요! 저 빼고 싶어요. 아, 아흐윽!”
발광하는 내 허벅지를 박래현이 아프게 때렸다. 나는 허리를 들썩이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박래현 입에 사정하고 말았다. 더럽다고 뱉어 낼 줄 알았는데 박래현은 내가 싼 정액을 꿀꺽 삼키더니 성기를 한참 더 빨았다. 갓 찐 인절미처럼 말랑말랑해진 성기가 박래현 입에서 빠져 나왔다. 단아하고 깨끗한 얼굴에서 입술 주변만 정액이 묻어 지저분했다. 그는 목욕 가운 자락에 입술을 훔친 뒤 나를 타고 올라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붙였다. 비릿한 정액 냄새에 토기가 올라와 나는 욱욱거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박래현이 웃으며 입술을 뗐다.
“지금 입덧해요? 당신 정액, 고소하고 맛있는데 왜 그래요?”
그의 말에서도 비린 냄새가 나 속이 뒤집히려 했다. 박래현은 뺨에 입 맞춘 다음 도로 침대 아래로 내려가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살이 팰 정도로 엉덩이를 누르는 손에 힘이 들어가 다리가 절로 벌어졌다. 박래현은 쪽쪽 소리가 나게 주름에 입 맞췄다.
“구멍 잘 보이게 다리 활짝 벌려 봐요. 어디서 음란한 물이 흘러나오는지, 좀 봐야겠어.”
“흐흐으읏, 아, 아아, 그러지 말고, 훗, 얼른 박아 줘요, 어, 얼른, 하, 씨이발, 하, 하으응….”
뒤로 가는 데 익숙해진 내게 사정은 절정으로 가는 과정이지 결말은 아니어서 사정하고 나면 이상하게 몸이 더 달아올랐다. 얼른 박래현 좆이 안으로 들어와 황홀한 오르가슴으로 나를 몰아가길 바라며 안달이 나는 것이다.
“아기 듣는 데서 아빠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응?”
엉덩이로 매서운 손바닥이 날아와 철썩이는 소리를 남기고 떨어졌다. 누가 더 심한 말을 하는지 따져 볼 짬도 없이 힘을 잔뜩 준 혓바닥이 구멍의 갈라진 틈을 질척하게 문질렀다. 두툼한 살덩이가 빈틈없이 주름에 달라붙어 위아래로 움직이며 성감을 자극했다. 밑에서 불길이 확 치솟는 느낌에 발작하듯 허벅지가 떨렸고 나는 매트리스를 지지대 삼아 고개를 뒤로 꺾었다.
“아, 아흐윽, 아, 아아아! 아으읏… 하, 하으으응….”
날카로운 콧날이 회음을 누르면서 불알이 박래현 미간에 짓눌렸다. 그가 얼굴을 움직이자 불알과 다리가 동시에 흐늘거렸다. 하얀 시트 위로 어른어른 김이 올라와 눈을 꽉 감았다. 바르작거리는 다리를 잡아 침대 위에 고정하면서 박래현은 입을 크게 벌려 회음과 주름을 다 덮은 채로 혓바닥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한 손으론 시트를 거머쥐고 다른 손으론 박래현의 머리칼을 쥐었다. 박래현에게 잡혀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습윤한 아래를 탐하는 박래현을 놓치지 않았다.
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구멍을 벌리고 붉은 혀가 집요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까끌까끌한 혓바닥이 얇은 속살을 상처 내듯 문지르고 지나가서 나는 요란하게 신음했다. 남자는 양쪽 엄지를 구멍에 넣고 주름을 양쪽으로 쭉 잡아서 늘렸다. 안으로 들어온 엄지가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은 안을 꾹 누르자 줄줄 물이 새어 나왔다. 순식간에 아래가 젖어 엉덩이 밑에 깔린 목욕 가운이 흥건하게 젖었다.
“아, 아아앗, 흐, 으읏….”
“지금 당신 모습, 완전 사람 꼴리게 해. 참아야 하는데… 하, 돌겠다.”
남자는 내가 흘린 물에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잠시 들었다가 도로 사타구니에 처박았다. 빡빡하게 오므린 살을 양쪽으로 젖히면서 세로로 세운 혓바닥이 더 깊은 곳으로 밀고 들어왔다. 남자의 코가 이번엔 허벅지 안쪽 살을 짓눌렀다. 질벅질벅 소리를 내며 안으로 파고든 혀가 물 밖으로 튀어나온 생선처럼 자맥질을 시작했다.
쾌락에 움찔거리다 못해 밑이 아려 왔다. 나는 남자의 뒤통수를 힘껏 눌러 그가 숨도 쉴 수 없게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뭉근하게 퍼지는 쾌락을 좇아 얼굴에 구멍을 비벼 대자 요동하던 혀가 어느 부분을 짓궂게 긁어내렸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던 나는 오른쪽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박래현의 얼굴뿐만 아니라 머리칼도 끈적거리는 물에 잔뜩 젖어 뭉쳐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틀어 혀를 쑤셔 대는 방향을 여러 곳으로 바꿨고 그때마다 몸 전체가 작은 파도를 탄 것처럼 출렁였다. 내가 호흡을 멈춘 사이 박래현의 뜨거운 혀가 더 깊은 곳으로 들어와 안을 찔렀다. 점막에 푹 파묻힌 성감대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궁금한 듯 내벽을 더듬는 혀는 성기만큼 단단하지도, 크지도 않은데 나를 들끓게 했다. 굵디굵은 성기에 익숙해진 안이 작은 물건에는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할 텐데도 그랬다.
어쩌면 내 가랑이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더러운지도 모르고 밑을 빨아 대는 박래현 때문일 것이다. 도도하기 짝이 없는 남자에게 묘한 정복욕을 느끼며 허벅지를 움직여 박래현 귀를 앞뒤로 애무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와 갈색 머리칼이 허벅지 사이에 갇혀 너울너울 물결치는 모습을 황홀하게 지켜보는 사이에 내 몸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혀가 내가 좋아하는 곳을 반복해서 문질렀다.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곳이라 남자의 머리칼을 꽉 틀어쥐었다.
“흐, 으으응, 이제 그만하고, 헉! 흐, 흐으읏, 들어와요!”
나는 엉덩이에 힘을 주어 밀려오는 절정을 지연시켰다. 이대로 오르가슴에 이르기엔 박래현에게 미안했다. 이번엔 박래현과 같이 절정에 오르고 싶어서 나는 머리칼을 쥐었던 손으로 박래현의 뺨을 감쌌다. 겨우 얼굴을 떼는가 싶더니 박래현은 아쉬운 듯 계속 주름을 혀로 핥았다. 진공 상태가 된 입 속으로 구멍 전체가 빨려 들어가는 환상에 사로잡혀서 나는 무릎을 바짝 세웠다. 허벅지 양쪽을 손 전체로 틀어쥔 채 혀를 놀리는 박래현을 보고 나는 침대에 도로 누워 버렸다.
내가 헐떡이는 사이 목욕 가운 자락을 들치고 커다란 손이 들어와 가슴을 슬며시 쥐었다. 야릇한 자극에 젖꼭지와 밑이 동시에 움칠거렸다. 가슴을 더듬는 박래현 손에 내 손을 밀어 넣어서 손가락을 하나씩 깍지끼었다. 마주 잡은 두 손이 잔뜩 곤두선 젖꼭지를 눕히며 깊게 얽혀 들자 충족감이 몸을 채웠다. 박래현과 몸을 섞을 때마다 좋았지만 오늘은 혼인계약서를 작성한 후 첫 섹스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했다. 내 배에 품은 아이와 나, 박래현은 오늘부로 가족이 된 것이다.
내가 감회에 잠긴 동안 박래현의 혀와 손가락이 구멍 안을 파헤쳤다. 고리처럼 검지를 휘어 깊게 긁어내린 곳을 혓바닥이 느릿하게 문질러서 마무리했다. 뼈까지 녹이는 쾌락에 젖어서 내 안은 박래현의 혀와 손가락에 녹신해졌다.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네 개의 손가락이 젖은 안을 벌리고 들어와 거침없이 점막을 들쑤셨다.
“아, 아아! 흐, 하으윽!”
애쓴 보람도 없이 난 혼자서 오르가슴에 도달했다. 눈앞이 희게 번지면서 숨이 가빠지고 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갔다. 짙은 여운에 빠져 허덕이다가 여전히 구멍을 빨고 있는 박래현을 발견하고서 나는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었다. 곧장 일어나 쫑긋한 귀를 잡아서 뒤로 당겼다. 가랑이 사이에 묻혔던 얼굴이 순순히 내 손을 따라왔다.
“윤준영 씨, 나랑 결혼했으니까 딴 데 보지 말고 나만 보며 살아요.”
“으, 으응, 박래현 씨는요?”
“결혼으로 그 답이 된 거 같은데? 내 오메가 두고 다른 데 한눈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달콤한 목소리에 잠시 귀가 얼얼했다. 아무래도 흥분해서 잘못 들었나 싶은 말이 박래현 입에서 흘러나왔다. 충격에 휩싸여서 나는 애액으로 범벅된 박래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막 결혼한 배우자가 충성을 다 하겠다고 다짐하는데 내버려 둘 순 없어서 나는 그의 목덜미와 머리칼을 감싸 쥐고서 번들거리는 입술에 키스했다.
허벅지를 더듬어 올라온 손이 가운 끈을 풀어 헤치고 옆구리를 쥐었다. 나는 다리를 길게 뻗어 박래현의 앞섶을 발바닥으로 꾹 눌렀다. 크게 부풀어 올라 막대처럼 단단해진 성기가 무시무시한 존재를 과시하며 발바닥 아래서 굼지럭거렸다. 성기 상태를 보면 넣고 싶어 이성이 끊기기 직전일 텐데 박래현은 삽입을 시도하지 않았다.
오후부터 움직인 데다 두 번이나 사정하고 났더니 졸음이 몰려와서 얼른 섹스를 끝내고 싶었다. 무릎 사이에 팔을 넣어 교차하고서 나는 박래현 쪽으로 헤벌어진 구멍을 훤히 드러냈다. 어서 박고 끝내라는 재촉이었다. 욕망이 휘늘어진 눈으로 구멍 주변을 훑어보던 박래현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선 일어나 내 발목을 잡았다. 나를 침대 안쪽으로 밀어 넣고서 그는 목욕 가운을 벗겨 배에 흩어진 정액을 깨끗하게 닦아 냈다.
“피곤하면 먼저 자고 있어요, 씻고 올 테니까.”
“섹스 안 해요?”
“오늘 내 상태가 좀 위험해요. 신경 쓰지 말고 자요.”
박래현은 얇은 이불을 당겨 내 몸을 덮어 준 다음 침실에서 나갔다. 갑자기 숨 막히는 정적이 몰려왔다. 잠이 오지 않아서 오랫동안 몸을 뒤척이다가 내 인생처럼 막막한 야경을 오랫동안 내다보았다. 오늘 박래현과 덜컥 결혼했는데 이 결혼이 내 삶을 어디까지 휘저을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피곤해 보이던데 왜 안 자고 있어요? 내가 없으니까 잠이 안 와요?”
머리칼을 닦던 수건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박래현은 이불을 들치고 들어와 나를 마주 보고 누웠다. 그는 한쪽 팔을 세워 얼굴을 괸 채 내 어깨를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내가 안 박아 줘서 삐졌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된 게 임신하고 나서 성욕이 더 강해져?”
“그런 거 아니니까 넘겨짚지 마세요.”
“오늘은 자제하기 힘들어서 자리를 피한 겁니다.”
“왜 자제하기 힘들었는데요?”
“우리가 부부가 됐다고 생각하니까 지나치게 흥분해서, 즉 당신 몸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좀 참아요.”
자기가 말해 놓고 쑥스러운지 박래현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이 껄끄러운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는 말을 떠올리고자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길어진 침묵을 깨고 박래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윤준영 씨. 부부가 된 기념으로 나한테 선물 하나만 줘요.”
“제게 받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요?”
“나를 형이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생각해 보고 대답해 드릴게요.”
다정하게 등을 토닥이는 손이 일정한 리듬을 타며 수면을 몰고 왔다. 절대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박래현 품에 안기자마자 몸이 노곤해지면서 졸음이 쏟아졌다.
***
나와 박래현, 박영범은 새로 꾸민 방에서 영화를 보며 느긋하게 일요일 밤을 보내다가 열한 시가 다 돼서 침실로 건너갔다. 오후에 샤워를 해서 이만 닦고 침대로 뛰어든 나와 달리 박래현은 샤워까지 마치고서 파자마 바지만 걸친 채 내 옆으로 올라왔다.
“초롱아, 넌 언제 클래.”
박래현은 한쪽 팔을 세워 턱을 괴고서 왼쪽 손으로 내 배를 문질렀다. 나는 박래현 손에 내 손을 깍지 끼며 그에게 눈을 맞췄다. 같은 침대에 누워서 잠들고 같은 침대에서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박래현과 부부가 됐다는 사실을 실감했지만 여전히 박래현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 남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해졌다.
“저…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왜 경영권은 포기했어요? 일하는 거 엄청 좋아하잖아요.”
“수현이는 경영 쪽에 재능이 있고 난 연구가 적성에 맞아서. 그리고 내가 경영에 관심을 가지면 계부랑 계속 얽혀야 하는데 그게 너무 싫었습니다.”
“와아, 하기 싫은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이쪽엔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경영도 재미는 있습니다. 2년 안에 우리 회사 경영권을 장악하는 게 내 1차 목표예요.”
“부모님이랑은 왜 사이가 안 좋으세요?”
침묵이 길어지자 내가 너무 깊이 들어간 것 같아 거북해졌다. 자존심 강한 박래현이 내게 치부를 보여 줄 리 없는데 괜한 질문을 던져 버렸다. 어색한 적막을 깨고 박래현이 내 등을 끌어당겨 나를 품에 안았다.
“내가 왜 당신한테 그런 말까지 해야 합니까? 아니, 당신은 왜 내 얘기가 듣고 싶은 건데?”
“부부 사이에 뭐 어때요? 보통은 부부끼리 그런 거 다 공유하잖아요.”
박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겨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난번에 얼핏 들은 내용으로 판단하건대 좋은 얘기가 나올 것 같진 않아서 박래현의 망설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어머니랑 계부는 집안끼리 엮여 어려서부터 약혼한 사이였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회사 연구원이었던 내 친부한테 첫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한 겁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친부는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을 정도로 잘난 외모를 가졌대요. 그래서 얼굴값 한다고 오메가들을 후리고 다녔나 봐.”
박래현을 보면 친부의 외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분명 사람들이 한눈에 반하고 남을 외모였을 것이다.
“외가에서 두 사람 관계를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외할아버지 등쌀에 견디다 못해 친부가 말도 없이 어머니 곁을 떠나셨대요. 그때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셨고 그 남자한테 각인까지 한 상태였어요. 외가에선 날 지우라고 난리가 났는데 시기상 너무 늦어 버린 거죠. 어머니는 날 낳고 아버질 수소문해서 찾아다녔는데, 외할아버지 회유에 넘어간 친부는 외가에서 돈을 받고 독일로 건너가 다른 오메가를 만나 결혼해서 잘살고 있었답니다. 어머닌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그때부터 난 어머니한테 찬밥 신세가 됐어요.”
박래현 어머니를 사랑했던 계부는 집안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끈질기게 청혼했다. 그녀는 계속 청혼을 거절하다가 박래현 친부와 각인이 끊어지면서 계부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결혼을 결정하면서 박래현 어머니는 겨우 네 살 된 박래현을 미국에 사는 먼 친척에게 보내 버렸다. 친척 부부와 그 자식들이 다행히 박래현을 예뻐해서 박래현은 그들과 어우렁더우렁 잘 지냈다.
그러나 박래현이 열한 살 되던 해에 남편이 바람을 피워 친척 부부는 이혼을 감행했다. 이듬해 그 친척이 다른 사람을 만나 재혼하게 되면서 박래현은 한국으로 돌려보내졌다. 박래현은 한국에 돌아가기 싫다며 친척에게 매달렸지만 친척은 박래현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박래현에게 고국으로 돌아가서 자리 잡은 뒤 네 몫을 챙겨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미국 초등학교에서 월반을 거듭하던 박래현은 테스트를 거쳐 중학교 2학년으로 들어갔다. 눈치 빠른 박래현은 계부가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긴다는 걸 금방 알아챘다. 회장이 계부한테 각인하지 않은 것 때문에 그는 박래현 친부에게 끝없는 열등감을 느꼈고 커 갈수록 친부를 닮아 가는 박래현을 미워했다. 친척 부부가 이혼하기 전까진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자랐기에 박래현은 어머니와 계부의 냉담에 깊이 상처 받았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데다가 또래보다 세 살이나 어린 탓에 그는 친구를 사귈 수도 없었다.
외로움과 침묵에 갇혀 지내던 박래현에게 유일한 안식이 되어 준 사람이 박수현이었다. 박수현은 박래현을 잘 따랐고 박래현은 온순하고 착한, 자기보다 훨씬 어린 박수현을 귀여워했다. 부모처럼 따랐던 친척에게 버림받은 뒤 박래현은 뭐라도 붙들어야 했고 박수현이 그 대상이었다.
박래현은 또래보다 성숙해서 열다섯에 키가 187cm가 넘었고 열여섯에 알파로 발현했다. 학교에서는 한 번도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온갖 경시대회를 휩쓸었다. 계부의 질투가 폭발한 건 그 무렵이었다. 그는 박수현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싶은데 이대로 가다가는 박래현에게 다 뺏길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때부터 박래현을 망가뜨리고자 박래현 침대에 오메가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박래현이 몸 파는 오메가에게 푹 빠져 인생을 포기하길 바라서였다. 내친 김에 오메가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박래현이 좋은 집안의 오메가와 결혼할 가능성이 낮아질 테니 금상첨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침대로 기어들어 온 오메가들은 하나같이 작고 늘씬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박래현 눈에는 다 천박하고 더러워 보였다. 그들은 박래현에게 병을 퍼뜨릴 매독과 임질의 숙주들이었다.
“어머니는 나와는 말도 섞지 않았습니다. 내가 클수록 친부를 닮아 가니까 그게 싫었던 거죠.”
박래현은 남 얘기하듯 담담하게 말했지만 박래현이 어렸을 때 당한 일을 생각하니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들이 저지른 저열한 만행은 애정이 필요한 어린 소년을 상대로 할 짓이 아니었다. 나는 동요를 감추고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박래현은 내 입술에 입 맞추더니 말을 이어 갔다. 어려서 페로몬 조절에 서툴렀던 그는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 가며 오메가 페로몬에 맞서 싸웠다. 계부의 계략에 넘어가 빠져나올 수 없는 시궁창에 발을 담그고 싶진 않았다.
여자 오메가는 힘에서 밀리다 보니 계부는 남자 오메가 둘을 한꺼번에 집어넣기도 했다. 알파들이 선호하는 낭창낭창한 몸을 가진, 고운 얼굴의 오메가들을 골라 넣었지만 박래현에겐 먹히지 않았다. 알파 힘을 당해 낼 순 없어서 그들은 대부분 몇 대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방에 남은 역겨운 냄새에 속을 게워 가며 박래현은 절대 오메가와는 섹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로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박래현은 완벽하게 자신의 페로몬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계부는 박래현이 수능을 치르기 전날에도 오메가를 방에 집어넣어 컨디션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수능 전 과목 만점을 받아 최연소 전국 수석으로 약학대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집에서 독립할 계획이었지만, 박수현이 반대해서 포기했다. 박래현은 박수현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계부가 어려서부터 박래현과 비교하면서 박수현을 끝없이 닦달한 결과 박수현은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먹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 동생만 두고 독립할 수 없었다.
박래현이 대학생이 되면서 계부는 절대 먹히지 않는 더러운 수작질을 멈췄다. 대학 다니는 내내 학업과 연구에만 몰두했던 박래현은 졸업할 무렵 개발 후보 물질 여러 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과정을 밟고 목표로 하는 제약 회사에 들어가 그곳에서 정착할 생각을 했다. 박수현 우울증이 심각해지지 않았다면 원래 계획대로 실행했을 것이다. 결국 박래현은 동생 때문에 회사 연구센터로 방향을 틀었다.
박래현의 잠재력을 진작 파악해 쌍수를 들고 환영한 어머니와 달리 계부는 초조해졌다. 외모만으로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키는 박래현이 회사에 들어가서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면 이사진과 주주들이 후계자로 박래현을 지목할 확률이 높아질 게 뻔했다.
박래현이 약학 대학을 졸업하던 날 사촌 형제자매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날의 주인공이라며 박래현에게 술잔이 몰렸고 박래현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새벽에 술자리가 끝나서 방에 들어가 잠을 자는데 하반신에 이상한 감각이 몰려들었다. 축축한 살덩이가 성기 주위를 기어 다녔고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렸다. 화려하게 생긴 오메가 둘이 홀딱 벗은 채로 짙은 페로몬을 풍기며 자신의 몸을 핥고 있었다. 다시 악몽이 시작되었다. 취해 있어서 박래현은 어느 때보다 힘겹게 오메가들을 몰아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아서 자신이 알몸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박래현은 부모님 방으로 쳐들어갔다. 어머니를 안고서 잠든 계부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계부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한 번 더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콧대가 무너지면서 코피가 터져 계부 얼굴과 이불을 적셨다.
박래현은 계부의 몸을 올라타고서 얼굴과 가슴팍에 거침없이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퍽 살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계부 얼굴이 처참하게 뭉개졌다. 어머니가 말리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길길이 날뛰는 박래현을 경호원 여러 명이 뜯어말렸을 때 계부는 쇼크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계부는 코와 이가 부러졌고 귀와 내장을 다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후유증으로 계부는 왼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를 무너뜨려 부모에게 복수할 생각도 해 봤지만, 박수현이 물려받을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박래현은 계획을 바꿔서 외조부에게 물려받은 지분을 담보로 연구센터와 다를 바 없는 작은 제약 회사 바이언스를 설립했다. 저보다 네 살 많은 사촌 박영범을 영입한 박래현은 집을 나와 독립한 뒤에 인맥을 쌓기 위해 석사과정에 지원했다. 이번엔 박수현도 박래현을 막을 수 없었다. 집을 나오면서 박래현은 부모와 연을 끊고 일에만 몰두했다.
학부에서부터 박래현을 눈여겨 지켜보던 교수가 세포생물학, 독성학, 유기화학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원을 직원으로 추천해 주었다. 그들은 다국적 제약 회사 연구원들 연봉 기준으로 연봉을 받았기 때문에 대표의 나이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매달 연구 개발비와 인건비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 적은 돈으로 오래 버티기 힘든 상황에서 본사 연구센터로 들어가지 않고 직접 회사를 차린 것은 박래현에게 큰 모험이었다. 신약 개발은 돈과 시간이 많이 들지만 결과는 모 아니면 도였다.
박래현이 사라진 상황에서 계부의 비뚤어진 화살이 박수현에게로 향했다. 그는 박래현과 박수현을 이간질하고 비교하며 박수현을 몰아붙였다. 핸드폰과 노트북을 뺏어 박래현과 연락을 차단했고 과목마다 과외 선생을 붙여 공부만 시켰다. 계부의 노력에도 박수현은 박래현이 다녔던 대학에 입학할 성적이 되지 못해 다른 대학을 선택했다. 재수해서 박래현이 다녔던 대학에 입학하라는 말을 박수현이 들어주지 않아서 계부의 괴롭힘은 점점 심해졌다.
박수현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다. 박래현은 놀라서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만 3년 만에 집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 릴리프와 누시티가 전임상 시험을 통해 안전성과 유효성이 검증되면서 임상 1상에 성공했고 연구팀은 새로운 신약 물질 후보를 연속으로 도출해 냈다.
박래현이 스물여섯 되던 해에 회장은 결혼을 전제로 만나 보라며 박래현에게 정치헌을 소개했다. 세 살 연상인 정치헌은 야망이 넘치고 사교적인 성격이어서 박래현의 무심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들이댔다. 그러나 새로운 파이프라인 개발에 몰두해 있던 박래현은 정치헌에게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박래현이 집으로 들어가면서 안정된 것처럼 보였던 박수현이 한 번 더 자살 소동을 벌였다. 박래현을 집으로 불러들인 것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계부가 박수현에게 손찌검까지 하며 박수현을 모욕해서였다. 자신 때문에 고통 받는 박수현을 어떻게든 계부에게서 떼어 놓고자 박래현은 변호인단 앞에서 JS 제약 경영권 포기 각서를 썼다.
그 대가로 박수현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부로부터 완벽한 자유를 보장받았다. 만일 계부가 박수현을 감시한다거나 박수현 일에 간섭한 게 밝혀지면 그날부로 경영권 승계 전쟁에 뛰어들겠다는 게 박래현이 내건 조건이었다. 원래 경영에 관심이 없었기에 박래현은 자신의 결정에 미련이 없었다. 그저 동생이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계부에게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길 원했다.
아무리 계산해 봐도 남는 장사여서 계부는 흔쾌히 계약 조건을 받아들였다. 박래현은 이 차장 부부와 박수현, 박영범을 데리고 외조부가 물려준 이 집으로 독립했다. 그때는 벌이가 신통치 않아서 지금처럼 정문을 지키는 경호원들은 없었다고 했다.
박래현을 JS 제약 후계자로 여겼던 정치헌은 그 일로 완전히 틀어져 등을 돌렸다. 회사로 들어가 후계자 수업을 받는 건 고사하고 언제 실적을 낼지 알 수 없는 작은 제약 회사에 가진 돈을 다 꼬라박는 박래현이 그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치헌의 예상과 달리 이미 핵심 기술의 틀을 잡아 놨기 때문에 박래현이 신약을 개발하는 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그는 7년 만에 신약 두 개를 임상 3상까지 성공시켜 FDA의 승인을 받아 냈다. 그 첫 성과가 페로몬 억제제 릴리프와 당뇨 치료제 누시티였다. 릴리프와 누시티의 임상 성공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국의 제약 회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박래현은 누시티는 다국적 제약 회사인 요나스에, 릴리프는 JS 제약에 우선 협상권을 주었다.
요나스에 기술 이전한 누시티는 계약금 1조 1천억에 매출의 20%를 러닝 개런티로 받고 협상을 마무리지었다. JS 제약 측에는 회장이 가지고 있는 주식 10분의 1과 릴리프 매출의 30%를 러닝 개런티로 요구했다. 박래현 영향력이 커질 것을 염려한 계부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방만한 경영으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회장은 박래현 제안을 받아들였다. 릴리프는 세계를 뒤흔든 블록버스터가 되어 억제제 분야에서 대명사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JS제약은 단일 제품으로 단박에 글로벌 제약 회사로 떠오르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자금을 확보한 박래현은 복잡한 과정을 쳐 내고 버추얼 컴퍼니 형태로 바이언스를 운영하면서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핵심 연구만 직접하고 임상 실험 등은 모두 아웃소싱 하는 형태로 비용과 시간을 절감해 연구 시간을 확보했다. 그는 새 제품을 개발할 때마다 회장이 가지고 있는 주식과 러닝 개런티를 요구했고 받은 돈으로 회사 주식을 사 모으며 입지를 다져 나갔다. 박수현이 회사를 경영하기 전에 회사 가치를 높이고 지분을 확보해 부모들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게 그의 목표였다.
박래현 지분이 커지자 벼랑 끝에 몰린 계부는 마지막 발악으로 박래현 침실에 오메가 둘을 집어넣었다. 그때 들어온 오메가들은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한쪽 팔이 어긋나고 갈비뼈가 부러져 전치 12주 진단을 받은 오메가 둘이 계부를 등에 업고 박래현을 상대로 소송을 걸겠다며 협박해 왔다. 박영범이 중간에서 일을 무마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박래현이 망가뜨렸다던 오메가는 저 사람들을 뜻하는 듯했다. 그 와중에 박수현을 감시하던 스파이까지 잡혀서 박래현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경영권 포기를 철회하겠다는 박래현을 찾아와 계부는 무릎을 꿇고서 잘못을 빌었다. 그는 한 번만 더 박수현을 감시하다가 걸리면 자기가 가진 주식 전부를 박래현에게 넘기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전했다. 박래현은 아예 JS 제약을 접수해 부모들을 몰아낸 뒤 동생에게 경영을 맡기는 쪽으로 계획을 틀었다. 회장과 계부 둘 다 박수현에게 붙여 주고 싶지 않았다. 글로벌 제약 회사 반열에 오르고 나서 박래현이 보유한 신약 후보 물질들이 욕심 난 회장은 바이언스에 인수 합병을 제안했지만 비웃음만 당했다.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물어다 주며 스스로 2대 주주가 된 박래현을 계부는 함부로 건들 수 없었다. 되레 박수현을 위해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었다. 박래현이 권력을 쥐게 되면서 완벽한 자유가 주어지자 박수현의 우울증도 호전되었다.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면서 박래현은 어느 때보다 마음 놓고 연구에 전념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개발한 제품의 반을 JS 제약과 거래했고 나머지 반은 다른 기업과 거래하면서 회장을 애타게 했다.
그러나 평화로운 일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박래현은 요나스와 공동개발 중인 비만, 당뇨 신약 물질 연구와 더불어 글로벌 임상 1상을 준비하기 위해 작년 11월에 6개월 일정으로 박영범과 연구원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창 일에 열중해 있던 박래현에게 박수현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사고 원인은 운전 미숙으로 인한 추락사였다. 그는 강원도에 있는 별장을 향해 혼자 운전해 가던 중 사고를 당했다.
박래현은 귀국해서 동생의 장례에 참여했다가 장례가 끝나자마자 곧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에게 유일한 위로와 희망이었던 동생이 허무하게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다. 자신이 계부를 닦달하지 않았다면 계부는 박수현에게 감시를 붙였을 테고 사고가 났을 때 바로 구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동생에게 자유를 준답시고 그를 살릴 기회를 차단해 버린 자신을 두고두고 원망했다. 연구실을 떠난 순간 무너져 내릴 자신을 알고 있었기에 박래현은 연구실에 처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임상 실험이 조금 늦어져서 올해 5월에 귀국했습니다. 귀국해서 동생 유품을 정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뭘 발견하셨는데요?”
“그걸 본 순간, 내 동생이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했을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어요.”
“설마요.”
“사인이 운전 미숙이었는데 수현이는 운전을 꽤 잘하거든요.”
허탈한 표정에서 나온 목소리는 낮고 눅눅했다. 이상하게도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와 원망이 촘촘하게 내 목을 죄어 왔다. 원인 모를 갑갑함에 나는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박수현이 자살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모든 죽음엔 이유가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요?”
“수현이가 왜 자살했는지 뭐 짚이는 데 없어요? 둘이 학년은 다르지만 수업은 같이 받았잖아요.”
“얼굴과 이름만 알고 지낸 정도였어요. 전 복학생인 데다 알바 때문에 바빠서 정우 빼고는 친하게 지낸 학과생들이 없었어요.”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그저 벌어져 깜박이는 갈색 눈에 시선을 맞췄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게 없는 것마저 죄가 된 것처럼 마음이 초조해졌다. 박래현 입가에 소름 돋도록 차가운 냉소가 어리면서, 내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텅 비어서 말라 버린 눈이 무서워 나는 박래현 손목을 잡았다.
“아! 아파요!”
어깨뼈가 부스러질 정도로 아파서 비명을 지르자 박래현이 깜짝 놀라서 손을 뗐다. 그는 방금 쥐었던 어깨에 입을 맞추고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그의 등을 쓸어내리자 거칠었던 호흡이 점차 잠잠해졌다.
“저기… 박래현 씨가 발견한 게 뭔지 물어봐도 돼요?”
“당신과 결혼한 순간 과거는 다 잊기로 했습니다.”
지독한 내상을 헤집고 싶지 않아서 나는 박래현 쪽으로 몸을 돌려 그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엄마를 떠올리면서 나는 박래현의 비감을 이해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건 떠난 사람이 두고 간 기억까지 고스란히 떠안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지워야 할 것을 지우지 못한 채 그 무게에 비틀거리며 살아가게 된다.
나는 한쪽 팔을 구부려 박래현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면서 내가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를 건넸다. 이제 겨우 스물여덟이면서 남들보다 일찍 어른이 돼 버린 박래현이 가여웠다.
***
‘선배, 내가 선배 좋아했던 거 알아요?’
가끔 눈이 마주친 정도였기에 박수현이 나를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고등학교 다닐 때나 알바할 때 여학생들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지만 남자 알파에게 고백받은 건 처음이었다. 귀공자처럼 생긴 박수현이 깊고 다정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부친이 달라서인지 형제라면서 두 사람은 다른 구석이 더 많았다. 박래현이 수려해서 눈에 띄는 미남이라면 박수현은 담백하게 잘생긴 미남이었다. 눈동자 색도 다르고 성격은 더 다른 듯했다.
‘그때 선배 병원에 데려다주고 나서 계속 선배를 기다렸어요.’
박수현은 슬픈 얼굴로 나를 보다가 등을 돌려 내게서 멀어져 갔다. 퍼뜩 그에게 물어볼 말이 떠올라 나는 그를 쫓아갔다.
‘박수현! 잠깐 기다려! 잠깐만 시간을 내줘! 박수현!’
박수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뭘 남겼는지 궁금해서 열심히 뛰어갔지만 죽어 버린 그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난 그가 추락했다는 낭떠러지 맨 끝에 서서 굽이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발 디딘 땅이 무너져 내리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몸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기 전에 잠에서 깨어난 나는 경직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박수현이 남긴 게 뭐였을지 추측하며 잠들었더니 꿈에서 그가 나왔다.
박수현. 넌 왜 일찍 죽어 버렸어? 네가 살아 있다면 네 형이 덜 외로울 텐데.
박래현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부터 갖고 싶어 했던 이유가 외로워서였을까. 박수현이 사라지면서 벌어진 감정의 공백을 자신의 아이로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박래현은 내 임신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했고 배 속 아이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이고 있다. 나는 지금의 안락함이 좋아서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안정된 가정의 전제 조건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박래현 다리에 깔린 내 다리를 꺼내려고 몸을 뒤척이다가 이틀 전에 박래현이 사 온 꽃에 눈길을 주었다. 은은한 장미 향이 좋아서 숨을 깊게 들이켰다. 정 차장은 이번에 사 온 꽃도 유리병 세 개에 나눠 담아서 하나는 거실에, 하나는 내 방에, 하나는 욕실 세면대 옆에 놓아두었다.
꽃 감상을 끝낸 뒤 허리에 감긴 박래현 팔을 풀고서 살며시 이불을 내려 그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살펴보았다. 전부터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던 상흔이었다. 나는 열여섯 소년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만히 검지를 갖다 댔다. 흉터는 복근과 허벅지 안쪽에 점점이 분포해 있었다.
박래현은 인생을 일찍 알아 버린 탓에 어린 나이에 많은 일을 이뤘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으니 그가 이룬 것들이 조금은 공허해 보였다. 나는 박래현이 재벌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모든 부를 누렸을 줄 알았다. 성인이 돼서 당연하게 재산과 경영권을 물려받았을 거라 여겼는데 이 남자는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다. 내 배 속에 든 아이가 더러운 성격만 빼고 박래현 외모와 머리를 물려받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박래현이 번쩍 눈을 떴다.
“아침부터 어디를 그렇게 쳐다보고 있습니까?”
“허벅지에 상처가 있어요.”
박래현의 다정한 태도에 영 적응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돌변해서 버럭 화를 내며 남창이니 걸레니 온갖 욕을 해 대도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윤준영 씨, 형이라고 불러 봐요.”
“꼭 그래야 해요?”
“…뭐 싫다면 어쩔 수 없고.”
너무 친근한 표현이라 우리 사이에 안 어울리지만 박래현이 나보다 다섯 살이 더 많아서 못 부를 건 없었다.
“…형. 형은 앞으로 저한테 말 놓으셔도 돼요.”
“진짜 말 내려도 됩니까?”
“네.”
박래현이 피식 웃으며 내 귀뺨과 뒤통수를 잡아 아래로 당겼다. 입술이 닿기 전에 눈부터 닿았다.
“윤준영.”
“네.”
“이름이 반듯해서 당신과 잘 어울려.”
“저기, 조금 있다가 정장 입은 모습 한 장만 찍어도 돼요?”
“사진은 어디다 쓰려고 그럽니까?”
“엄마 보여 주고 싶어서요. 애인이 생겼다고 했는데 엄마가 궁금하실 거예요.”
“찍고 싶으면 찍어요.”
나는 양팔을 벌려서 사이에 박래현 얼굴을 가두고 약간 올라간 듯한 입꼬리에 입 맞췄다. 박래현이 그새를 못 참고 고개를 돌려 허겁지겁 입술을 집어삼켰다. 어른 범고래와 새끼 범고래가 내 영역으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들어왔다. 새끼는 예쁘니까 무조건 품고 어른 범고래는 모난 성질을 깎아서 둥글게 만든 다음에 품기로 했다.
***
병원에 들렀다가 오후 다섯 시에 박래현과 백화점에서 만나 아이 용품을 사기로 했다. 그가 엄마를 만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다는 걸 다음으로 미뤘다. 박래현은 아무 준비 없이 만나기엔 부담스러운 사람이라 엄마에게 결혼한다고 귀띔이라도 한 뒤에 만나게 해 줄 생각이었다. 나는 이 차장이 싸 준 음식을 들고 엄마 병실을 찾았다. 병실엔 엄마 말고도 반가운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너 제주도 잘 갔다 왔냐?”
“어, 잘 갔다 왔지. 와, 윤준영 너 아주 때깔 좋다. 그냥 온몸이 번쩍번쩍하네.”
정우가 다가와 내 손에서 보자기를 받아 들었다. 나는 간병인에게 반갑게 인사한 뒤 엄마에게 다가갔다. 환청이 들린다던 엄마는 어젯밤 잠을 잘못 잤는지 얼굴과 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 가장 오고 싶어 한다는 요양 병원 1인실에 있으면서도 엄마가 편해 보이지 않아 속상했다. 내가 더 해 줄 게 없다는 생각에 무력감이 몰려왔다.
“엄마, 몸은 좀 어때.”
“다 좋은데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이 너무 많아서 약만 보면 토할 거 같아.”
엄마 성격은 원래 밝고 쾌활했다. 홀로 해준과 나를 키우면서 늘 웃음을 잃지 않았는데 고통과 불안은 엄마 성격마저 바꿔 놓았다.
“엄마, 1년만 잘 버티면 돼. 건강해져서 엄마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자. 심장 공여해 주신 분 생각해서라도 그래야지.”
“알았어, 걱정하지 마, 아들. 요즘 네가 자주 와서 엄마는 행복하니까.”
엄마를 품에 안아 준 나는 엄마를 소파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았다. 접시에 딸기를 담아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정우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정우를 만났다는 걸 알면 박래현이 화를 내겠지만 난 오랜만에 친구를 봐서 그저 좋았다. 나는 딸기 하나를 집어 엄마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엄마, 내가 기쁜 소식 알려 줄까?”
“뭔데?”
“나 결혼할 거야.”
“결혼이라니? 네가 결혼한다고?”
정우와 엄마가 동시에 되물었다. 정우는 당황한 표정이었고 엄마는 화가 났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어, 저번에 애인 있다고 했잖아. 그 사람과 결혼할 거야. 다음에 올 땐 같이 와서 소개해 줄게.”
엄마의 차가운 손이 내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준영아, 너 나 때문에 서두는 거니?”
“뭐가?”
“나 때문에 지금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거지? 안 돼, 그러지 마라. 결혼은 너 좋다는 사람과 해, 응? 나는 이런 데 필요 없으니까 절대 안 된다.”
“무슨 소리야? 나 하고 싶어서 하는 결혼이야. 그 사람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나는 초롱이를 데리고 박래현과 결혼 생활을 잘 꾸려 나가기로 이미 결심했다. 내 얼굴을 보는 엄마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기묘하게 반짝거렸다.
“내가 모를 줄 아니?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결혼은 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나 그 사람 좋아해서 하는 결혼이야, 엄마. 그 사람 나한테 정말 친절하게 잘 해 줘. 우리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 거야.”
“지금 네 나이 스물셋에 연애 한 번 안 해 봤는데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다시 생각해라.”
“엄마, 내가 다음 주에 그 사람 데려올게. 직접 만나 보면 마음에 들 거야.”
“그 사람이 널 사랑한다면 대학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 대학도 졸업 안 하고 덜컥 결혼부터 해서 애가 생기면, 네 인생 망하는 거 금방이야. 졸업해서 취직부터 하고 결혼은 천천히 해라. 네 밥벌이는 스스로 해야 상대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거야. 결혼했다고 상대가 천년만년 같이 살아 줄 것 같니?”
아빠와 사별하고 나서 나와 해준을 키우느라 아등바등 힘들게 사셨기 때문에 엄마의 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오셔서 결혼도 당연히 받아들이실 거로 생각했던 내 불찰이었다.
“도둑놈 새끼가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애를 채 가려고 해! 돈이면 단 줄 알아?”
내가 박래현을 두루뭉술하게 표현했더니 엄마는 그를 나이 지긋한 중년으로 여기는 듯했다. 애인 부모를 이 병원에 입원시킬 정도면 상당히 부자여야 할 테니 어쩌면 타당한 추론이었다.
“엄마, 박래현 씨 그렇게 나이 많지 않아. 아직 서른도 안 됐어.”
“거짓말하지 마라.”
“내가 사진 보여 줄게. 진짜 잘생겼어.”
핸드폰을 꺼내 엄마에게 박래현 사진을 보여 주었더니 엄마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젊고 잘생기고 돈 많은 사람이 가난한 오메가를 살 이유가 없을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이제 겨우 스물여덟 살이야. 다음에 데려올 테니까 직접 만나 봐. 잘생겨서 엄마 마음에도 쏙 들 거야.”
“잘생기긴 했네. 그런데 너 정말 이 사람 좋아서 결혼하는 거니?”
“그렇다니까. 일단 만나 보고 다시 얘기해. 엄마, 식혜 마셔 봐. 식혜도 맛있어.”
“그래, 한번 데려와 봐. 아들이 어떤 남자를 골랐는지 직접 봐야겠다.”
엄마 표정이 풀린 걸 보고서 나는 물통을 흔들어 식혜를 잘 섞은 다음 컵에 식혜를 따랐다. 박래현이 밥알을 좋아하지 않아서 식혜에 밥알은 몇 개만 둥둥 뜨는 정도로 들어갔다. 식혜를 한 모금 마셔 본 엄마는 입에 맞는지 한 컵을 다 비웠다.
우리의 대화는 소소한 일상으로 넘어갔다. 엄마 얘기를 들어 주면서도 내 머릿속은 엄마가 한 말로 복잡해졌다. 연애 한 번 안 해 보고 결혼한다는 말이 가슴에 콕콕 박혔다. 연애 경험이 없는 건 박래현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얘기가 오간 상대가 있지만 정치헌이 일방적으로 구애하다가 이해타산을 따져 포기했다.
정치헌과 헤어지고 얼마 안 있어 박래현은 연속해서 신약 개발에 성공해 회사를 살렸다. 박수현이 죽고 회장은 박래현이 작성했던 경영권 포기 각서를 폐기하고 박래현을 회사로 불러들였다. 박래현은 자신의 회사를 부대표에게 맡기고 JS 제약에 상무로 입사했다. 야심만만한 정치헌은 자신의 근시안적인 판단을 후회하며 박래현에게 매달렸지만 버림받았다. 만일 박래현이 어려웠을 때 정치헌이 옆에서 버티며 그와 함께했다면 박래현과 내 만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준영아, 난 가 봐야겠다. 넌 더 있다 갈 거냐?”
“아니, 나도 가 봐야 해. 약속이 있어.”
나는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운전기사 겸 경호원에게 주차장으로 내려가겠다고 전화를 넣었다. 병실 앞에서 엄마를 들여보내고 먼저 간다는 정우를 붙잡았다.
“내가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줄게. 차 타고 같이 가자.”
“야야, 됐다. 네 알파한테 또 얻어맞긴 싫다고. 씨발 주먹이 존나 쇠주먹이더라. 근데 너 결혼 얘기는 뭐냐? 그 남자 유부라고 했던 거 같은데?”
“유부남 아니야.”
“씨발, 너 순진하게 속아 넘어가지 마라. 외모 번지르르하던데 싱글이면 결혼을 하지, 왜 너한테 애를 낳아 달라고 돈을 줘? 뭔가 구린내가 풀풀 나서 영 꺼림칙해.”
“몰라. 존나 복잡해서 설명하기 힘들어. 암튼 유부 아닌 건 확실해.”
“염병, 네가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질질 끌려다니는 거 봤는데 이제 결혼까지? 너 돈 주고 샀다고 그 자식 너무한 거 아냐?”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정우가 화 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는 정우가 누른 1층을 지우고 지하 3층을 눌렀다. 박래현과 내 관계를 직접 봤으니 정우 눈에는 내가 박래현 개로 보일 것이다. 따지고 들면 맞는 말이어서 난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허세를 떨었다.
“새끼야, 내가 데려다준다고. 박래현 씨 나한테 꼼짝도 못 해. 나는 별론데 그 사람이 매달려 결혼하는 거야. 아이한테 제대로 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너 아기 생겼어? 뜬금없이 결혼 얘기가 왜 나왔나 했다. 이거 축하해야 해, 말아야 해?”
“야, 당연히 축하해 줘야지. 박래현 씨 닮아서 아주 영리하고 잘생긴 애가 나올 거야.”
차 옆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이 정우를 힐끗 보더니 뒷좌석 문을 열었다. 내가 먼저 올라탄 뒤 정우가 따라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운전석에 오른 경호원은 시동을 걸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친구는 가다가 제가 말하는 지하철역 앞에 내려 주시면 돼요.”
“그러겠습니다.”
버튼을 눌러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를 칸막이로 가리고 정우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정우는 눈을 크게 뜨고 차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내게 귓속말로 물었다.
“야, 네 알파 뭐 하는 사람이냐? 젊어 보이던데 완전 재벌인가 보다.”
박래현과 결혼까지 한 마당에 정우에게 그의 신원을 알린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엄마가 알면 박래현이 어떤 사람인지 정우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특히 이번 결혼 계약서에는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조항 따윈 없었다.
“모 제약 회사 상무이사야. 신약 개발로 돈을 쓸어 담는다더라.“
“윤준영, 야! 정신 차려. 평범한 부자도 아니고 재벌이라고? 어머니 말씀대로 결혼은 좀 아니라고 봐. 괜히 네 서류만 지저분해질 텐데 애 낳아 주고 조용히 벗어나. 너 그러다 좆 되는 수가 있어.”
“그래, 뭘 더 속이겠어, 솔직히 말할게. 내 인생 이미 엉망으로 구겨져서 반듯하게 펼 수도 없고, 여기서 더 찌그러져 봤자 거기서 거기야. 나 박래현이랑 혼인 신고서까지 작성했어. 구청에 내기만 하면 돼.”
“뭐? 와, 씨발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네가 찌그러지긴 어디가 찌그러졌다고 그래? 너 나중에 질질 짜면서 후회나 하지 마, 새끼야.”
“후회해도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혼인 신고서 엄마한텐 비밀로 해 줘, 내가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까.”
그 뒤부터 지하철역에 도착해 내릴 때까지 정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잔소리를 귀가 따갑게 이어 갔다. 정우의 강력한 반대에 맞닥뜨리고 보니 내가 궁지에 몰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본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나는 커다란 그림 한가운데 서 있어서 새의 부리를 새의 발톱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백화점 입구에서 발레파킹을 맡긴 경호원은 나와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박래현에게서 30분 정도 늦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사이에 뭘 할까 고민하던 내게 라이터가 떠올랐다. 박래현은 정치헌이 선물해 준 라이터를 쓰고 있었다. 정치헌이 준 거라 아끼는 건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정치헌이 남긴 흔적을 보고 싶진 않았다.
안내 데스크에서 매장 층수를 확인하고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경호원은 자연스럽게 붙어 나를 따라왔다. 나는 매장으로 들어가서 직원에게 박래현 나이와 지위를 대며 어울리는 라이터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직원은 내게 고급스러워 보이는 라이터 몇 개를 추천했다. 그중에 한정판으로 나왔다는 라이터 두 개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데 직원이 내 반지를 보며 멋지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반지 선물해 주신 분께 선물하실 거죠? 그렇다면 전 이 제품을 권해 드리고 싶어요. 몸통은 18K 순백금에 여기 박혀서 빛나는 아이들이 3캐럿, 5캐럿짜리 다이아몬드예요. 매력적인 신사분께 어울리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겁니다.”
직원의 꼬임에 넘어가 나는 그녀가 권하는 라이터를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박래현은 눈이 높아서 무난한 선물을 하느니 안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주는 첫 선물이라 비싸더라도 박래현 마음에 드는 거로 사고 싶었다. 나는 박래현이 준 블랙카드 대신 내 현금카드를 꺼냈다. 영수증에 찍힌 금액이 너무 커서 서명하는 손이 덜덜 떨렸다.
“여기 카드도 넣어 드릴 테니까 카드와 함께 마음을 전달하세요. 받으신 분이 배는 기뻐하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직원은 포장된 라이터를 종이 가방에 넣으면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카드를 같이 넣었다. 박래현에게 1층에서 기다린다는 메시지를 받고 라이터를 챙겨 1층 로비로 내려갔다. 그새를 못 참고 어디냐고 묻는 전화가 와서 나는 박래현 앞까지 다가가 핸드폰을 흔들었다. 박래현은 경호원을 돌려보내고 차갑게 굳은 얼굴로 내 어깨를 감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다 주제넘은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평범한 부부들처럼 대하기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내가 김정우 만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왜 말을 안 들어요?”
그에게 대꾸하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꽂혔다. 오늘따라 화려하게 차려입은 박래현이 사람들 눈을 끄는 건 당연했다. 매일 보는 나만 해도 또 보고 싶어서 곁눈질할 정도니까. 배우자가 너무 잘생기면 피곤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박래현이 우리가 부부임을 과시라도 하듯 내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어깨에 있던 손이 옆구리로 내려가 허리를 붙들었다. 남성 오메가가 많지는 않아서 남자끼리 몸을 붙이고 있는 모습은 남의 눈에 충분히 요깃거리가 되었다. 특히 박래현처럼 눈에 띄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면 더 도드라져 보이는 법이었다.
“왜 대답 못 하지? 둘이 언제 연락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박래현이 무서운 기세로 나를 추궁했다. 허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귓가에 흩어지는 숨결은 뜨거웠다.
“사람 많은 데서 어떻게 대답해요? 엄마한테 오늘 간다고 했더니 정우한테 알리셨나 봐요. 저도 가서 알았어요.”
“어머니는 김정우를 어떻게 생각하셔? 혹시 당신 짝으로 여기시진 않겠죠?”
가감 없이 드러내는 독점욕이 나쁘진 않아서 나는 박래현을 떠보기로 했다.
“제가 엄마 생각을 어떻게 알아요? 아, 근데 한 가지는 확실해요.”
“그게 뭡니까.”
“저한테 박래현 씨랑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왜? 왜 결혼을 반대하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하셨어요. 뭐, 틀린 말씀은 아니죠.”
“내가 다음 주에 가서 어머닐 설득하겠습니다.”
“엄마가 박래현 씨 보면 결혼식부터 올리라고 하실걸요?”
“어머니가 원하면 결혼식 합시다. 난 상관없어.”
박래현이 절대 안 된다고 고집할 줄 알았는데 그는 선뜻 내 의견에 따르겠다고 했다. 고마워서 나는 허리에 감긴 박래현 손을 은근슬쩍 잡아 깍지 끼었다. 형식적인 절차라 해도 엄마가 그걸로 위로받는다면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다.
박래현은 여러 매장 중에 제일 넓은 유아용품 매장에 들어갔다. 물건을 살피며 정리하고 있던 직원이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손님, 어서 오세요.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네, 아기들한테 필요한 용품을 보러 왔습니다.”
“혹시 조카 선물 보러 오셨어요? 아이가 몇 개월인가요?”
매장 안에 진열된 아기자기하고 깜찍한 물건들에 금방 시선을 빼앗겼다. 색깔들이 다 분홍색, 하늘색, 노란색, 흰색 천지에 물건에서는 고소한 분 냄새가 나는 듯했다.
“지금 5주 됐습니다. 여기 배 속에 들어 있어요.”
박래현은 직원이 보든 말든 내 배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처럼 배가 납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려면 아직 9개월이나 남았는데 우리가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 축하드려요. 그러면 신생아한테 필요한 용품을 보여 드려야겠네요.”
직원은 우리 앞에 카탈로그를 펼쳐 보이면서 아기에게 필요한 물품을 짚어 주었다. 직원이 권하는 물건을 전부 사겠다고 하자 직원은 신이 나서 물건을 계속 추가했다. 속싸개, 겉싸개, 젖병, 젖병 솔, 카시트, 기저귀 등 설명을 듣고 보니 전부 필요해 보였다. 박래현은 직원의 말을 경청하며 마지막으로 아기 침대를 구매 목록에 넣었다.
“두 분 아이라니 너무 예쁠 거 같네요! 나중에 아이 데리고 백화점 오시면 꼭 한번 들러 주세요. 아이가 정말 궁금해서 그래요.”
나는 애착 인형으로 원숭이와 토끼, 코끼리를 추가했다. 원숭이와 토끼는 아기보다 약간 큰 정도였고 부들부들한 털로 덮인 코끼리는 가벼운데 꽤 커서 아기가 안고 자기에 좋아 보였다.
구입한 용품을 전부 배달시킨 다음 박래현은 나를 2층 의류 매장으로 데려갔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여름옷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가을옷 일색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짧은 기간에 내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상무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탁한 건 다 준비해 놨죠?”
“물론입니다. 상무님이 카탈로그 보고 주문하신 건 오늘 택배로 보내 놨습니다.”
“가을에 입을 파자마를 깜박 잊고 주문 안 했는데 나랑 윤준영 씨 사이즈 맞게 세 벌씩 준비해 줘요.”
“그러겠습니다. 준비하는 동안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됐습니다. 계산해 주시고 발레파킹 맡긴 차 준비해 달라고 하세요.”
“네, 상무님.”
“사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요.”
매니저에게 카드를 건네고 박래현은 내 어깨를 감싼 채 매장 안의 물건을 살폈다. 그는 스웨터를 꺼내 내 몸에 대 보더니 맘에 드는지 스웨터와 피케 셔츠, 운동화와 지갑을 추가로 계산했다.
“상무님, 1층 후문에 차 준비됐답니다.”
박래현은 이미 주문한 옷까지 해서 어마어마한 금액이 찍힌 영수증에 사인을 했다. 대체 1년에 얼마를 벌어들여야 이렇게 겁 없이 돈을 쓸 수 있는 걸까. 라이터 하나 사는데 손을 벌벌 떨던 나와는 대조적이었다.
박래현이 계산을 마치고 우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스물여덟에 이뤄 놓은 게 많은 남자가 부러워 내 스물여덟을 상상해 보았다. 박래현과 결혼까지 했는데 특이하게도 나 혼자서 쓸쓸하게 지내는 미래가 그려졌다. 내 미래에 박래현과 아이가 보이지 않아 우울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좋아졌다가 가라앉으며 널을 뛰는 걸 보니 박래현에게 휘둘리지 않게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지갑 낡았던데 이걸로 바꿔요.”
박래현은 운전석에 앉아 내게 안전벨트를 매 준 다음 아까 매장에서 산 지갑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나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안에 들었던 신분증과 카드를 새 지갑으로 옮겼다. 지갑 안에는 수표가 세 장 들어 있었다.
“윤준영 부자 되라고 넣었습니다.”
“덕분에 저 벌써 부잡니다.”
통장엔 이십억 넘게 돈이 들어 있고 지갑엔 한도 없는 카드가 들어 있고, 귀에는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콘솔 서랍을 열면 시계와 목걸이가, 내 손가락엔 무거운 반지가 있다. 박래현에겐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는 이미 엄청난 부자였다.
“다음 주는 좀 바쁠 것 같고 그 다음 주에 시간 잡아 보세요. 어머니 뵈러 갈 거니까.”
“근데… 형식상 결혼이라면서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데요?”
“그래야 당신 속이 편할 거잖아.”
“박래현 씨 부모님한테는 따로 인사 안 가도 될까요?”
박래현 인생에 참견할 자격이 없다는 걸 그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싫다는 박래현에게 정치헌을 붙이려고 수작을 벌였다.
“우리 일에 더는 신경 안 쓰기로 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을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어요. 어기면 바이언스에서 개발한 신약을 전부 다른 데로 넘긴다고 했거든.”
바이언스에서 개발한 신약을 다른 회사에 넘기면 JS 제약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뺏기는 셈이 된다. 박래현 자체가 JS 제약의 중심이라 부모들은 속이 쓰라려도 박래현 뜻을 따라야 할 것이다. 정치헌 문제만 해도 송림 병원에서 처방전으로 장난질할 수 없게끔 잘 조처해서 그들은 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혼인 신고서는 제출했어요?”
“바빠서 못 했는데 시간 내서 내일이나 모레 제출할 겁니다.”
“왜 다른 사람 안 시키고 직접 하세요? 그런 일은 박 실장님이 다 알아서 하시잖아요.”
“혼인 신고서는 당사자가 직접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시키고 싶지 않은 일도 있어요.”
박래현은 에두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나를 소유할 방도로 형식만 갖출 줄 알았는데 남자는 의외로 결혼을 가볍게 다루진 않았다. 이 남자가 내게 행했던 학대를 되짚어 보면 내가 좋아서 결혼을 결심한 건 아니었다. 발목이 잡힐 줄도 모르고 잠깐 삐끗한 사이에 원치 않는 각인을 한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나를 사랑해서 각인했다면 다 놓을 수 있겠지만 박래현은 마음과 육체가 반대로 놀아서 더 괴로울 것이다. 자업자득이었다.
***
구청에 가서 여권을 찾아온 뒤 늘어지게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창으로 오후 햇살이 비쳐 들었다. 나는 조금 달라진 방 안 풍경에 눈을 돌렸다. 박래현 옷과 책장, 철봉이 내 방으로 옮겨졌고 박래현은 나랑 한 침대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가 짐을 옮기기 전부터 종종 같이 잤기 때문에 불편한 점은 없었다.
실컷 자고 일어났는데 또 졸음이 몰려왔다. 임신했다는 걸 확인한 뒤로 유독 잠이 많아졌다. 오늘도 열 시에 일어나 눈 떠보니 박래현과 박영범이 출근한 뒤였다. 어젯밤에 박래현 허벅지를 안고 잠든 기억이 없었다면 박래현이 이 방에서 잤는지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임신을 해도 성욕이 줄어들지 않아서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던 박래현에게 다가가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새로 산 커플 파자마 위로 우뚝 솟은 성기를 어루만지고 냄새를 맡아 보다가 볼을 비볐다.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잡아서 내 얼굴을 허벅지 아래쪽으로 밀어냈다. 불뚝 발기한 걸 보면 성욕이 넘쳐흐르는데 그는 섹스를 시도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박은수가 한 충고 때문인 듯하여 나는 허벅지를 안은 채 잠들어 버렸다. 잠들기 직전 이마에 남은 흉터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던 것도 같다. 박래현은 이따금 그가 남긴 야만의 흔적에 입 맞추곤 했다.
“준영 씨, 이거 준영 씨가 주문했다던데 여기다 놔둘게요.”
잠에 취해서 노크 소리를 듣지 못했던 나는 이 차장 목소리에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는 내가 주문한 전공 책과 육아 관련 책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식탁에 간식 올려놨으니까 와서 먹어요.”
“네. 고맙습니다.”
일어난 김에 책들을 정리하고 그중 육아 관련 서적을 골라서 주방으로 갔다. 박래현에게 언제 전화가 올지 몰라 핸드폰도 챙겼다. 식탁엔 마름모꼴로 잘린 샌드위치와 과일 주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쟁반에 옮겨서 아기방으로 가지고 갔다.
동화의 한 장면처럼 꾸며진 방은 마음에 쏙 들었다. 하늘을 닮은 짙은 파란색 천장엔 별과 달 모양을 본뜬 조명이 박혀 있고 군데군데 줄을 따라 아래로 내려온 조명이 있었다. 창문 옆엔 커다랗고 튼튼한 인공 나무가 세워졌는데 무성한 잎이 천장까지 닿아 그 사이로 별 조명이 보였다. 나무줄기에 묶인 작은 그네를 지나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원숭이 꼬리를 잡아당겼더니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듯 좌우로 움직였다.
세심하게 신경 쓴 바닥도 마음에 들었다. 나무 곡선을 그대로 살린 원목 마루엔 크기가 다양한 나뭇잎 쿠션이 놓여 있었다. 쟁반과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기 침대에서 코끼리 인형을 꺼내 온 나는 제일 큰 쿠션 위에 코끼리 인형을 베고 누웠다. 창밖으로 정원수가 심어진 뒤뜰이 보였다. 딴 세상 같은 이곳에서 아이는 두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주스를 한 입 마시고 책을 집어 드는데 핸드폰에 문자 알림이 왔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내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낼 사람은 박래현밖에 없었다. 코끼리 코를 잡아당기며 고민에 빠져 있던 나는 답장을 보냈다. 이 차장이 먹고 싶은 건 다 만들어 주는데도 박래현이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게 좋았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요」
답장을 받았으면 당장 전화를 걸 사람인데 회의 중인 듯 문자로 답장이 왔다.
「집에 들어갈 때 사 갈게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주문한 책 와서 책 보고 있어요」
「무리하지 말고 피곤하면 잠 많이 자요.」
「몇 시에 들어와요?」
「집에서 저녁 먹게 일곱 시 안엔 들어갈 겁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엎드린 자세로 책을 폈다. 남자 오메가가 임신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계별로 차근차근 정리된 책이었다. 임신 초기에는 유산 위험이 있으므로 스트레스 받지 말고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엄마 일 말고는 딱히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서 내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박래현은 성욕을 눌러 가며 내 안위에 최선을 다했고 이 차장은 내 입맛에 맞춰 식단을 짰으며 정 차장은 듣기 좋은 말만 해 줬다. 누구 하나 내 신경을 거슬릴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런 사치를 누려 본 적이 없었기에 안락한 행복은 되레 위태롭게 느껴졌다. 각인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기 때문에 이 행복은 언젠간 깨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가족이란 테두리에서 벗어나 혼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배 속에 든 아이와 이미 정이 들어서 그 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렸다. 아직 5년이나 남은 먼 미래의 일로 우울해지지 말자고 다짐하며 코끼리 발을 쓰다듬었다.
생활이 안정을 찾아가자 나는 미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박래현에게 돈을 받으며 그가 원할 때 주야장천 구멍만 대 주는 오메가가 아니라 스스로 뭔가를 이뤄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박래현에게 벗어나 정신적으로 독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기 전에 나 자신을 재정비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졸업하기 전에 공인회계사 자격증 따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세웠다. 박래현이 내 인생에 등장하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더 나은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해서 건강하고 예쁜 아이를 낳는 것이다. 코끼리 인형에 파묻혀 새근새근 잠들 귀여운 아이를 상상하며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책을 반 정도 읽을 무렵 활자가 제멋대로 튀어나와 주변을 꾸물꾸물 기어 다녔다. 카탈로그에서 봤던 외국인 아기가 그 옆에서 같이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아기는 방실방실 웃으며 원숭이 인형을 물어뜯다가 양이 안 차는지 내게 기어와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아 당황스러운데 갑자기 나타난 박래현이 아기는 본체만체하고 내 입술만 쪽쪽 빨아 댔다. 입술을 꽉 다물고 있자니 박래현 손이 안으로 들어와 강제로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뜨끈뜨끈한 살덩이가 내 혀를 빈틈없이 비벼 대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동감 넘쳐서 나는 몸을 비틀어 박래현 어깨를 움켜잡았다. 드레스 셔츠에 둘러싸인 단단하고 부드러운 근육이 손바닥에 닿았다. 박래현은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젖꼭지 위를 더듬었다.
“여기서 뭐 해요?”
귓가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장 차림의 박래현이 다리 사이에 나를 끼우고서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지로 젖꼭지를 문지르면서 그는 고개 숙여 머리칼과 눈두덩에 입 맞췄다. 종일 보고 싶었던 얼굴을 끌어당겨 물어뜯듯이 키스했다. 손을 펴서 그의 얼굴 전체를 감싸고서 나는 각도를 바꿔 가며 부드러운 살덩이에 내 살을 비볐다.
혀 표면에 작은 돌기들이 휩쓸리며 미뢰에 상큼한 박하 향이 흘러들었다. 하나였다가 나뉜 존재처럼 살덩이 두 개가 격렬하게 서로를 문지르고 비벼 대며 섞여 들었다. 입으로 넘어온 침을 겨우 삼키면서 나는 숨을 헐떡였다. 폐활량이 좋은 편인데 키스할 때마다 숨이 차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엉켰던 살덩이를 풀고 박래현이 혀를 꼿꼿이 세워 내 혀 고랑을 길게 훑어 내렸다.
“선생님이 살살 하는 건 괜찮다고 했으니까 오늘 밤에 해요.”
“처음부터 습관이 잘못 들어서 그게 잘 안 돼요. 아예 안 하는 게 속 편합니다.”
박래현은 내 옆에 누워 오른팔에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손짓으로 그는 내 입술을 더듬었다.
“오늘 종일 뭐 했습니까?”
“책 읽었어요. 오늘 반 읽었으니까 내일 나머지 읽고 모레부터는 태교하는 방법 읽어 보려고요.”
“너무 애쓰지 마요. 내 아이면 머리는 타고날 테니까.”
“머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착하고 반듯한 애가 태어나야죠. 제가 왜 태교할 생각을 하겠어요? 박래현 씨 성격 닮으면, 우린 진짜 좆 되는 거예요. 아기 때부터 제멋대로 휘젓고 다녀야 직성이 풀릴걸요?”
“아주 성인군자를 낳을 생각인가 보네. 우리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효를 읊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생각 했어요?”
“제 장래를 고민했어요. 계속 집에서 빈둥거리고 싶진 않아서요.”
내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박래현 얼굴에 언뜻 실망스러운 표정이 지나갔다. 이 남자는 내가 주체적으로 사는 게 영 싫은 모양이었다.
“책장에서 책 주문한 거 봤어요. 정말 공부 시작하게?”
“네. 공부해서 자격증 시험에 도전하려고요. 휴학했으니까 지금이 딱 적기입니다.”
“대학 졸업하고 집에서 놀면 안 될까? 당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하게 놀아요.”
“그럴 거면 뭐하러 대학을 졸업해요? 졸업장 쓰레기로 만드느니 그냥 놀지. 등록금이 얼만 줄도 모르면서….”
“학교 그만두는 것도 좋은 생각이네. 내가 돈 많이 버는데 당신까지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공부하지 말고 집에서 애 보란 소리로 들리네요?”
“애는 내니가 알아서 키울 겁니다. 당신은 운동하고 쇼핑하고 나랑 침대에서 화끈하게 놀아 주면 돼요.”
박래현 눈빛이 진지해서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박래현이 제시하는 삶도 꽤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내 능력을 키워 보지도 않고 묻어 버리긴 싫었다.
“놀고먹어 달라고 사정해야 하는구나. 나랑 작성한 계약서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잊었어요? 내가 집에 있을 때 무조건 내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걸 만족시켜 줄 직장이 있으려나 몰라.”
“일단 자격증부터 따고 조건에 맞는 직장은 알아볼래요. 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하셨잖아요.”
더 얘기해 봤자 답이 안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책을 챙겨 아이 방에서 나왔다. 뒤따라온 박래현이 내게서 책을 뺏어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박래현이 씻을 동안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보란 듯이 세법개론을 펼쳐 열심히 공부하는 척했다. 예상했던 대로 오랜만에 책을 보니 내용은 눈에 안 들어오고 온갖 잡생각만 머릿속을 떠돌았다.
“아기방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 놨네요. 습관이 돼서 문 열고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박영범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게요. 저런 데서 자라면 창의적이고 감성 풍부한 사람으로 클 거 같아요.”
“근데 준영 씨 벌써 공부해요? 복학 준비는 천천히 하지 그래요?”
“복학 준비가 아니라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하려고요.”
“와, 그 시험 되게 어려울 텐데.”
“어렵긴 한데 도전해 볼 만해요.”
시선을 책으로 내리는 도중 정치헌이 선물한 라이터가 눈에 띄었다. 결혼한 사람을 앞에 두고 전 애인 물건을 버젓이 사용하는 박래현에게 짜증이 났다. 자주 쓰는 물건이라서 라이터는 유독 눈에 자주 들어왔다.
“준영 씨, 두 분 모시고 와서 식사하세요.”
주방에서 정 차장 목소리가 들렸다. 박영범이 먼저 일어나길 기다렸다가 나는 라이터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보기 싫은 물건을 당장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실행은 조금 뒤로 미뤘다.
저녁을 먹으면서 박래현과 박영범은 미국 출장 얘기를 했다. 일 끝내고 10일 정도 여행을 하고 들어오자던 말이 생각나 마음이 설다. 내일은 뉴욕을 중심으로 주변에 둘러볼 만한 곳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참, 오늘 여권 찾아왔다면서요.”
“네.”
여행 얘기를 듣자마자 부리나케 여권을 만들고 찾아온 게 창피해서 일부러 말 안 했는데 경호원이 박래현에게 다 말한 모양이었다.
“여행이 그렇게 가고 싶었어요? 윤준영 아직 어리네. 하긴 내가 대학 다닐 때 당신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으니까.”
“거기에 3년은 더해 주셔야죠.”
박래현은 자기가 월반한 사실은 쏙 빼 놓고 이상한 계산법을 사용했다. 처음에 주종 관계로 시작해서 아직도 자존감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나이마저 박래현보다 어려서 서러웠다.
“3년 더해도 뭐, 크게 달라질 게 있나요?”
“초딩하고 중딩은 천지 차이죠.”
박래현은 내 밥그릇에 불고기를 얹어 주고서 빈 컵에 물을 따랐다. 나는 마다하지 않고 그가 준 고기를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아이는 나를 닮아 식성이 좋은지 뭘 먹어도 좋아했다. 책에 입덧으로 고생한 사람들 사례를 읽은 직후라 내 아이의 식성에 새삼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데 준영 씨 미국 가는 거 은수 누나랑 상의해 봐야 하는 거 아냐? 미국까지 비행시간이 너무 길어서 좀 걱정인데.”
“어? 저 튼튼해서 괜찮아요.”
첫 해외여행이 무산될까 봐 나는 얼른 선수를 쳤다. 입덧도 없고 몸도 가벼운데 여행을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래현아, 혹시 모르니까 누나한테 물어봐. 우리 형수님 보니까 임신 초기라고 해외여행 못 하게 하던데.”
저녁을 다 먹고 우리 셋은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박래현은 자리에 앉기가 바쁘게 박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안 좋은 반응을 보였는지 박래현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가 전화를 끊을 무렵 나는 그녀가 뭐라 했는지 듣지 않고도 여행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임신 초기라 장거리 여행은 위험하대. 나랑 형만 갔다 와야겠어.”
신혼여행이 물 건너갔다. 여행 가서 돈독한 정을 쌓으려던 계획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국적인 장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서로를 잘 알게 돼서 관계가 진척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역시 되는 일이 없었다. 상심이 커져서 둘 얘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저 졸려요. 들어가 잘게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나 담배 한 대만 태우고 갈 테니까.”
박래현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두리번거리며 라이터를 찾았다. 내게 불똥이 튀기 전에 나는 얼른 자리를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라이터를 화장지에 둘둘 싸서 휴지통에 버리고서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계속 기다려 왔던 여행인데 미국에 갈 수 없어서 우울해졌다.
몸을 말리고 파자마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올라가 테라스를 향해 누웠다. 화분에 심어진 나무들을 보고 있는데 유리창에 박래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비쳤다. 쟁반에 아이스크림과 과일을 받쳐 들고 내 옆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잠든 척 눈을 감았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왔어요. 먹고 자요.”
박래현이 침대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서 나는 계속 눈을 붙이고 있었다.
“누나한테 물어보니까 4개월 이후부턴 비행기 여행해도 괜찮대요. 그때 가까운 휴양지로 여행 떠납시다. 미국 갔다가 일만 보고 바로 들어올게요. 오면서 선물 사 올 테니까 기분 풀고 아이스크림 먹어요.”
“4개월 후엔 정말 괜찮대요?”
“그렇다니까. 얼른 일어나서 아이스크림 먹어요.”
기분이 풀려서 나는 일어나 박래현이 건넨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떠먹기 시작했다. 커다란 통에 여러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어서 골고루 맛봤다. 한참 퍼먹다가 나만 먹기 미안해서 아이스크림 한 숟가락을 박래현 입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입을 벌려 아이스크림을 받아먹었다. 입술이나 더러운 구멍은 잘 핥으면서 내 침이 묻은 수저는 싫다는 건가. 비논리적인 행위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박래현에게 입 맞추며 안으로 혀를 넣어 달콤하게 녹은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복잡하게 얽힌 혀가 차가우면서도 뜨거워 오감을 자극했다.
“혀에도 유두가 있다는 거 알아요? 여기가 버섯유두.”
박래현이 아이스크림을 떠서 혓바닥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내려놓았다.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혀가 들어와 덩어리를 문질러 녹였다. 으으응, 작게 신음하며 나는 딸기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을 삼켰다.
“여긴 잎새유두.”
아이스크림이 혀 가장자리에 놓이면서 달콤한 살덩어리가 혀 모서리를 살살 긁으며 올라왔다. 아이스크림에 들어 있던 작은 알갱이가 톡톡 터져 상큼한 맛이 났다. 젖꼭지를 빨면 미치게 흥분하는 것처럼 혀에도 유두가 있어 키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그 증거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혓바닥만 마주 비비고 있는데도 몸이 축축해졌다. 사이드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은 박래현이 오른손으로 내 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아이스크림을 묻힌 검지가 혀끝을 문지르자 나는 박래현 손목을 잡고서 검지를 혀로 휘감았다. 손가락을 빨고 있는 입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박래현은 파자마를 위로 올려 젖꼭지를 혓바닥으로 문질렀다.
“난 이 유두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알갱이가 커서 먹음직스럽거든.”
아이스크림에 차갑게 식은 혀가 살갗에 스며들어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어깨를 눌러 나를 눕힌 박래현이 내 파자마를 먼저 벗기고 능숙하게 나를 타고 올랐다. 그가 아래서부터 니트를 벗어 던지자 황홀한 상반신이 드러났다. 나는 멋진 나체에 감탄하며 손을 뻗어 팔뚝을 만졌다. 살갗은 섬세하고 부드러운데 팔뚝을 이루는 근육은 탄탄하고 날렵해 오감을 만족시켜 주었다. 날개처럼 뻗은 빗장뼈나 보기 좋게 굴곡진 드넓은 가슴, 골이 팬 복근과 훌륭한 자지까지 온몸이 완벽했다.
키와 골격은 타고난 게 크겠으나 박래현은 몸 가꾸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중에는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하고 주말에는 두 시간씩 운동했다. 자기 전에는 방에 설치한 철봉을 이용해 온갖 신묘한 재주를 부려서, 임신한 뒤로 심한 운동을 하지 못하는 내게 대리만족을 주었다.
“매일 보면서 볼 때마다 침을 질질 흘리네. 욕정을 숨길 줄 몰라.”
“박래현 씨 몸이 너무 훌륭해서 그래요. 보면 만지고 싶어요.”
“당신 몸도 그래. 볼 때마다 혀로 핥아 주고 싶어요.”
“그래 봤자 뭐합니까. 이제 배 나오고 뚱뚱해지면 보기 흉할 텐데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난 윤준영 씨 귀여운 모습을 볼 생각에 들떠 있는데.”
길쭉한 손가락이 바지 단추를 열고 지퍼를 내리는 모습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로어즈와 바지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잔뜩 발기해 있던 성기가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붉은색으로 번들거리는 귀두와 바짝 핏대 오른 성기를 확인하자 밑이 혼자서 움질거려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박래현보다는 내가 욕구 불만 상태일 것이다. 박래현은 급하면 자기 손으로 딸이라도 칠 수 있는데 내 몸은 박래현이 쑤셔 주지 않는 한 만족을 느낄 수 없게 변해 버렸다. 그래서인지 박래현 자지가 오늘따라 더 야하고 탐스럽게 보였다.
나는 한쪽 팔꿈치를 매트리스에 대고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서 미끈거리는 자지 끝을 혀로 할짝거렸다. 끝을 입에 물고 깊게 빨았더니 짭짜름한 액이 새어 나와 비위가 상했다. 아기가 가리는 거 없이 다 좋아하는데 아빠 정액은 비리다고 싫어해서 우스웠다. 더 깊이 넣어서 밑동까지 빨아 주려다가 박래현이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귀두와 그 주변만 슬쩍슬쩍 빨았다. 굶주린 짐승에겐 그것마저 커다란 자극인지 박래현 입에서 낮고 느릿한 신음이 흩어졌다. 내 옆구리를 잡은 팔뚝에 퍼렇게 핏줄이 비추는 거로 보아 박래현은 거칠게 쑤셔 박고 싶은 걸 꾹 참는 듯했다. 이렇게 자제심 강한 사람이 내게 넘어와 각인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신기했다.
“그런데 라이터가 없던데 혹시 못 봤어요?”
박래현이 기둥을 잡아서 내 뺨에 좆 대가리를 대고 문질렀다. 미지근한 액이 냄새를 풍기며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거 고장 나서 제가 버렸습니다.”
“고장?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아까 켜 보니까 안 되더라고요. 오래돼서 낡았나 봐요.”
희부연 액을 질질 흘리며 벌겋게 달아오른 살 기둥이 입술 위에 비벼졌다. 나는 혓바닥을 내밀어 귀두 끝에 맺힌 액을 싹싹 핥았다. 자지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여린 속살을 벌리고 들어와 짓이기는 상상에 시트가 젖어 갔다. 나는 조르듯 허리를 흔들었다.
“정치헌이 사 준 거라 질투해서 버린 거 아닙니까?”
좆을 입에 문 채 고개를 흔들었지만 박래현은 내 속마음을 다 꿰뚫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입에서 성기를 꺼낸 박래현은 허리 밑에 베개를 넣고 하반신을 위로 띄우고서 내 다리를 벌려 어깨 위로 올렸다. 크게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박래현이 상체를 욱여넣었다.
“제가 새 라이터 사 드릴게요.”
“담배 끊을 생각이니까 사지 말아요.”
“흐응, 진짜요? 초롱이가 나오기 전부터 박래현 씨한테 효도하네요?”
“당신도 나 담배 피우는 거 싫잖아.”
박래현은 내게 무게를 전가하지 않으려고 무릎과 두 팔을 지지대 삼아 내 안을 벌리고 들어왔다. 박래현이 아이에게 자상한 아빠가 되어 줄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런데 왜 자꾸 박래현 씨야. 형이라고 부른댔잖아요.”
“그게 쑥스러워서 잘 안 나와요.”
“자꾸 불러야 익숙해지죠. 어디 형이라고 불러 봐요.”
육중하고 거대한 물건이 완전히 젖은 살을 젖히고 안으로 밀려들었다. 비좁은 길목이 침입자에 의해 쩍 갈라지면서 안을 빡빡하게 채운 기둥에 빈틈없이 눌어붙었다. 내가 미쳐 날뛰는 곳만 골라 진득하게 비벼 대는 살 기둥에 나는 허리를 틀며 짙은 신음을 냈다.
“어서.”
“형. 흐읏, 래현 형.”
“와, 듣기 좋네. 이제 박래현 씨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형도 말 놓아요. 그래야 제가 덜 어색할 거 같아요.”
“그럴까?”
긴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이며 안에 숨어 있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눈에 사로잡혀 이 눈이 오로지 나만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박래현이 내 유일한 알파임을 부인할 수 없듯 나도 박래현 인생에서 유일한 오메가가 되고 싶었다. 이제 박래현은 주인이 아니라 내 배우자가 되었다. 굴절된 과거를 거울삼아 박래현에게 함부로 꺾이거나 개처럼 납작 엎드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마음이 누그러지면서 나는 박래현에게 나를 조금씩 밀어 넣었다. 점점 차오르는 물속에서 얼굴만 내놓고 있다가 들어 올렸던 발꿈치를 바닥에 내려놓고 박래현 안에서 가만히 숨을 쉬어 보았다. 질식해 죽을 줄 알았는데 그의 안은 청량하고 포근했다. 언젠가 오늘 결정을 후회할 날이 오면 그땐 이 버거운 감정이 가벼워져 있길 희망하며 나는 박래현과 끝까지 가 보기로 했다.
***
“왜 안 잤어? 먼저 자라고 했잖아.”
상큼한 향기를 내뿜으며 박래현은 잠에 반쯤 잠겨 있던 나를 위로 끌어 올렸다. 나는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막 씻고 나온 박래현을 보았다. 남자의 미모에 늘 감탄하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박래현은 청순함까지 더해져서 사람 가슴을 뛰게 했다.
“잘 거예요. 형은 안 자요?”
“먼저 자. 난 잠이 안 와서 운동 좀 하다가 잘게.”
내가 반말을 허락한 뒤로 남자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제 그 말투에 익숙해져서 친근하게 들렸다.
“저 혼자 있기 싫어요. 그냥 옆에서 책 읽으면 안 돼요?”
“알았어. 여기서 운동할게, 됐지?”
지난번에 섹스하면서 배가 땅긴 뒤로 박래현은 내가 자기 전엔 옆에 눕지 않으려고 했다. 철봉 앞으로 간 박래현이 나를 등진 채 검은색 철봉 손잡이를 잡고 바 위로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반동 없이 몸만 쑥 위로 올라가면서 어깨 근육과 날개 뼈 부근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불끈 솟아올랐다. 곧게 뻗은 척추가 장골 근처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파자마 밑으로 꼬리를 감췄다. 얇은 비단 천을 따라 위로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를 감상하며 황홀한 기분에 젖어 박래현을 지켜봤다. 강단 있고 유연한 동작으로 오른쪽 바와 왼쪽 바를 번갈아 가며 풀업 운동을 하던 박래현이 철봉에 매달린 채 몸을 돌려 나와 마주 보았다.
“나중에 해 봐. 재밌어.”
“그다지 재미없어 보여요.”
“너 안정기 접어들면 우리 수영 다닐까? 임신했을 땐 수영이 좋다던데.”
“그래요.”
무릎을 붙여 가슴 위까지 끌어 모으는 동작을 반복하던 박래현이 다리를 쭉 뻗은 채로 동작을 멈췄다. 겨드랑이를 따라 펼쳐진 활배근과 복근 근육이 현란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몸은 약간 마른 듯한데 근육량이 많아서 나처럼 커다란 사람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윤준영은 풀업 운동 두 번에 나가떨어지겠지?”
“절 너무 얕잡아 보시네요. 저 운동 잘해요. 형이랑 붙어도 안 뒤질걸요?”
“입 터는 건 여전하네. 그 말 사실인지 나중에 확인한다?”
“그러시든가.”
내 눈에 무척 힘들어 보이는 동작인데 박래현 목소리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핸드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박래현은 내게 올라탈 시간만큼 철봉에 매달려 있었을 것이다. 철봉에서 내려와 핸드폰을 집어 든 박래현이 발신인을 확인하고 급격히 어두워진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상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신경질이 밴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알겠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바로 갈게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병원이란 말에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휩쌌다. 상대와 몇 마디 더 나눈 박래현이 파리해진 얼굴로 전화를 끊고서 내게 무거운 눈길을 보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입술을 이로 깨물었다.
“윤준영, 옷 입어. 병원 가자.”
“왜요, 엄마한테 무슨 일 생겼어요?”
“…….”
“무슨 일인데 그래요? 네?”
“어머니가 응급실로 이송되셨대. 호흡 곤란과 발열, 기침이 매우 심하다는데, 얼른 병원부터 가게 옷 입어. 아니 여기 있어. 내가 옷 챙겨 올게.”
이식 수술 후 거부 반응을 예방하기 위해 면역 억제제를 사용하는데 그 약은 면역체계를 붕괴시켜서 감염성 질환에 대한 저항을 감소시킨다고 했다. 엄마는 면역 억제제를 다른 사람들보다 대량 투여했기 때문에 병실도 1인실만 사용하면서 특히 조심했었다. 나는 박래현이 건넨 옷을 받아 재빨리 몸에 걸쳤다.
“흉부 방사선 사진으로 보면 세균성 폐렴일 확률이 높대.”
폐렴은 적절하게 치료받으면 쉽게 낫는 병이지만 엄마에겐 가장 조심해야 할 질환이었다. 눈물 때문에 박래현 얼굴이 덩어리로 뭉개져 윤곽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얼른 병원으로 가서 엄마를 만나야 했다. 박래현은 나를 품으로 끌어당겨 머리칼과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바로 항생제 치료 들어간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어서 가자.”
박래현은 벌벌 떨고 있는 날 데리고 직접 운전해서 병원으로 갔다. 그사이에 내 머릿속엔 온갖 불길한 생각이 드문드문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차가운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내 모습과 엄마 무덤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강소주를 마시는 내 모습이 연속으로 떠올랐다. 박래현이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달래 주지 않았다면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차에서 내려 중환자실 앞에 도착할 때까지 박래현은 나를 보호하듯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중환자실 앞에서 머리가 까치집이 된 주치의가 우리를 맞이했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죄송합니다. 환자분은 지금 어떤 상탭니까?”
“배양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폐의 우엽에 결절 형태의 폐렴 양상이 보여요. 우선 광범위 항생제를 투여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엄마 생명에는 지장 없는 거죠? 그렇죠?”
“경과를 지켜봅시다. 면역 억제제를 사용한 환자들은 일반 폐렴 환자들과는 달라서요.”
“저 들어가서 잠깐 엄마 좀 보고 나와도 될까요?”
“지금은 면회 시간이 아니라 안 되고, 내일 열 시부터 하루에 세 번씩 면회할 수 있으니까 내일 오세요.”
엄마를 두고 발길을 돌릴 수 없어서 나는 박래현 팔을 잡아 지금 면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박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자. 내일 면회 시간에 오는 게 좋겠어.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오자.”
“싫어요. 전 여기서 기다렸다가 내일 면회할래요.”
“너 임신 초기라 조심해야 하잖아. 네가 여기서 기다린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아.”
“혼자 들어가요. 전 안 가요.”
나는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서 고집을 부렸다. 엄마 수술이 끝난 날 나는 박래현 집에 들어가느라 엄마를 지켜 주지 못했다.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에도 엄마를 두고 떠날 순 없었다.
“선생님. 일주일 동안 쓸 수 있게 특실 하나 잡아 주세요.”
박래현 부탁에 담당의는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특실이 준비됐다는 연락을 받고 박래현이 내 팔을 잡아 나를 일으켰다.
“특실에서 자고 내일 어머니 면회해. 이것도 거부하면 너 둘러메고 병실로 올라갈 거야.”
당장이라도 나를 둘러멜 분위기여서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고 긴장해서인지 아랫배가 뭉친 것처럼 쿡쿡 쑤셨다.
“너무 걱정하지 마. 항생제 치료하면 곧 괜찮아지실 거야.”
특실로 들어간 박래현이 나를 침대에 눕히고 병실 불을 껐다. 그는 옆으로 올라와 나를 품에 안고서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다정한 눈빛과 손길에 아프게 두근대던 가슴이 조금씩 평온을 찾아갔다. 박래현 말에는 힘이 있어서 그가 괜찮다고 말해 주니까 엄마가 금방 쾌차하시리란 예감이 들었다.
“집에 안 가요?”
“내일 너랑 어머니 면회할 거야.”
“회사는요?”
“여기서 바로 출근하지 뭐. 아침에 깨워 줄 테니까 어서 자.”
내가 가장 힘들 때 함께 있어 준다는 말에 안심돼서 나는 박래현 허리에 팔을 감고 가슴에 얼굴을 붙였다. 건강한 심장이 일정한 간격으로 뛰며 나를 위로했다. 엄마도 건강한 심장을 지녔다면 되풀이되는 고통과 체념과 절망을 겪진 않았을 것이다.
“형, 병원에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윤준영, 우린 부부야. 이런 일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
박래현은 팔베개해 준 팔을 구부려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으론 등을 쓸어내렸다. 싸늘하고 무례하게만 여겼던 박래현에게 이토록 큰 위안을 얻을 줄은 몰랐다. 만일 나 혼자서 이 일을 겪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앞으로 계속 네 곁에 있어 줄 테니까….”
다정하게 위로해 주는 목소리에 긴장이 풀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나는 중학생 때부터 어른인 척해야 했다. 슬퍼도 울 수 없었고 힘들어도 내색할 수 없었던 내가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건 사치였다. 악착같이 혼자서 잘 버텨 왔는데 이 널따란 어깨에 무조건 기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왠지 박래현이라면 내가 어떤 무게로 기댄다 해도 그대로 나를 안아 줄 것 같았다.
“윤준영, 울어? 왜 울어. 어머니 괜찮아지실 거야.”
박래현 허리에 팔을 감고 그의 품에 깊게 파고들었다. 박래현은 내가 울지 못하게 말리는 대신 살가운 손길로 등을 토닥였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걷잡을 수가 없어서 박래현이 입고 있던 셔츠가 금방 눈물로 축축해졌다. 울음이 잦아들자 박래현은 화장지를 뽑아서 엉망이 되었을 얼굴을 정리해 주었다. 나는 젖은 눈을 깜박이며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오래전부터 내게 고정돼 있던 말간 눈동자에 주책없이 가슴이 뛰고 얼굴로 열이 몰렸다. 박래현 귀에 시끄럽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부끄러워졌다.
“형….”
“왜.”
“우리 초롱이 낳고 셋이 잘살아 봐요.”
“당연히 그래야지. 내 모든 걸 바쳐서 너랑 초롱이 행복하게 해 줄게.”
박래현이 할퀴었던 상흔이 너무 깊어서 절대 사라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우리의 첫 만남이나 그 과정에서 내가 박래현에게 받았던 대접 같은 것들은 언젠간 잊히게 될 것이다. 결혼 계약서를 작성한 이후로 박래현은 내게 다정했고 나를 배우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내게 중요한 건 이미 지나 버린 과거가 아니라 박래현과 함께 개척해나갈 미래였다. 박래현을 절대 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나는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멀게만 느껴졌던 첫사랑이 나도 모르는 새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로부터 피 말리게 초조한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그사이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엄마는 다행히 중환자실에 입원한 지 나흘 만에 건강을 회복해 특실로 옮겨졌고 내일이면 요양 병원으로 옮겨도 된다는 의사 소견이 나왔다. 나와 박래현은 8일을 건너편 특실에 머물면서 엄마를 보살폈다. 박래현은 임신한 내가 덜 신경 쓰도록 엄마에게 정성을 기울였다. 엄마는 박래현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도 어색한지 내가 집에 들어가야 박래현이 들어간다면서 자꾸 우리를 집에 들여보내려고 했다. 엄마가 불편해하시니까 집에 들어가라고 해도 박래현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오늘은 박 상무 집에 들어가서 쉬라고 해라. 회사 일로 피곤할 텐데 매일 병원 다니는 거 힘들어. 나 괜찮으니까 너도 들어가고.”
“내일 엄마 모셔다드리고 들어가도 돼.”
“준영아, 엄마가 미안하다.”
“뭐가?”
“이제부터 준영이 너 위해서라도 안 아플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나 때문에 너만 고생해서 내 마음이 안 좋았어. 그런데 박 상무 보니까 이제 네 걱정 덜 해도 될 거 같아서 좋구나.”
나는 붓기가 남은 팔을 정성껏 주물렀다. 엄마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며칠을 불안에 떨었더니 엄마가 살아 계신 것만으로 그저 감사했다. 엄마는 그만해도 된다는 의미로 내 손을 잡았다.
“박 상무가 널 진짜 좋아하더라. 엄마 눈은 정확해.”
“언제는 직장 잡기 전엔 결혼하지 말라면서.”
“내가 왜 반대했겠니. 어떤 빌어먹을 놈이, 내 아들이 젊고 잘생겨서 장난으로 그러는 줄 알았지. 막상 보니까 널 아끼는 게 눈에 보여 마음이 놓인다.”
박래현이 세상 다정하게 대해 주고 있지만 그가 날 연인으로 좋아한다는 확신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보지 못하고 놓친 어떤 점들을 엄마가 보았으리란 생각에 엄마 말에 귀 기울였다. 박래현에게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1개월은 트라우마가 되어서 나는 박래현이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늘 마음 한편에 간직하고 살았다. 박래현에게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고 해서 끔찍한 과거가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우리 사이에 완벽한 신뢰와 서사가 쌓이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준영아, 엄마는 너한테 늘 미안해. 해 준 것도 없이 고생만 시켜서….”
“나 고생한 거 없어. 고생은 엄마가 다 했지. 이제 안 아프면 돼.”
“고생한 게 없긴.”
엄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마음이 아파서 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면역 억제제 부작용과 이인증, 우울증과 합병증을 다 이겨 내고 여기까지 온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엄마, 나 박래현 씨랑 혼인 신고서 작성했어. 엄마 건강이 안 좋아서 결혼식은 미루고 일단, 혼인 신고부터 했어.”
“그래? 결혼식이야 나중에 올리면 되지. 요즘은 결혼식 안 하고 사는 부부도 많다더라. 그냥 동거 아니고 혼인 신고 했다니 잘했다, 준영아.”
“박래현 씨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다른 거 보다, 나는 너 아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면 된다.”
조만간 배가 불러올지 몰라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하지만 임신했다는 말을 하면 엄마가 나를 집에 돌려보내려고 할 것 같아서 아직 임신 사실은 감췄다.
“저기 박 상무 온다.”
엄마가 내 등 뒤로 밝은 시선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양손에 꽃다발과 종이 가방을 들고 나타난 박래현을 보았다. 언제 봐도 근사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박래현이 들고 온 종이 가방 안에는 담백한 맛이 나는 과자가 가득 들어 있을 것이다. 올 때마다 먹을 것을 사 와서 병실엔 박래현이 사 온 과일과 과자가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어머니, 몸은 좀 어떠세요?”
“덕분에 아주 좋아졌어. 매번 이렇게 안 찾아와도 되는데.”
“전 괜찮습니다. 안 피곤해요.”
엄마 얼굴로 환한 웃음이 퍼졌다. 무뚝뚝해 보이는 박래현은 의외로 사근사근한 구석이 있어서 그를 보기 전까진 결혼에 반신반의했던 엄마가 박래현을 보자마자 홀라당 넘어가 버렸다. 박래현이 나와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서인지 박래현을 보는 엄마 표정이 어느 때보다 밝고 사랑스러웠다.
손을 씻고 온 박래현은 롤 케이크를 썰어서 접시 두 개에 나눠 담은 뒤 하나는 간병인에게 건네고, 하나는 나와 어머니 앞으로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팩에 담긴 사과 주스도 놓여 있었다.
“여기 롤 케이크가 맛있어서 오는 길에 사 왔습니다. 좀 드셔 보세요. 너도 먹어 봐. 맛있어.”
박래현은 포크로 롤 케이크를 갈라서 그중 하나를 찍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부드러운데 달지 않아서 엄마와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매번 뭐 안 사 와도 돼. 지금 자네가 사 온 거 다 그대로 있어.”
“내일 병원 들어가실 때 가지고 가세요.”
두 사람의 정겨운 대화를 들으며 나는 롤 케이크를 먹었다. 팩에 빨대를 꽂고 기다리던 박래현이 내가 케이크를 삼키자 즉시 빨대를 입 앞에 갖다 댔다. 나는 그의 손에서 팩을 뺏어 주스를 빨아 먹었다.
“참, 박 상무. 요양병원 말인데, 나 2인실로 옮겨 주면 안 될까? 혼자 지내니까 심심해서….”
요양 병원에는 장기 입원 환자가 많아서 서로 친해진 환자들끼리 온갖 정보를 공유했다. 24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병원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가 어디 살고 있으며 누구네 자식과 손주가 뭘 하고 있으며 강아지는 무슨 종을 키우며 재산은 어느 정도 보유하고 있는지 서로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하나같이 부자였고 자식들도 훌륭하게 키워서 엄마는 그들을 부러워했지만 정작 그 사람들은 자식을 자주 보는 엄마를 더 부러워한다고 했다. 말을 들어 보면 찢어지게 가난한데 제일 좋은 병실을 쓰면서 개인 간병인을 둔 엄마가 그 병원 최대 수수께끼라고 했다.
“다른 분과 같이 쓰시면 신경 쓸 일이 많아 불편하실 겁니다.”
“그 병원은 2인실도 좋던데. 나는 하나도 안 불편해.”
“병원비 때문이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 그 정도 능력 되니까 어머니는 마음 편하게 지내세요.”
박래현에게는 적은 돈이겠지만 엄마와 나에겐 지나친 사치였다. 그러나 박래현의 단호한 결정에 엄마는 자기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아마 나중에 나를 닦달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바꾸신 듯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게. 준영아, 엄마 피곤하니까 좀 쉬어야겠다.”
롤 케이크를 다 드시고 엄마가 침대에 눕자 박래현은 가슴께까지 이불을 당겨 덮어 주었다. 피곤은 핑계고 엄마는 박래현을 쉬게 하려고 이른 잠을 청했을 것이다.
“무슨 일 있으면 저희 불러 주세요.”
간병인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우린 맞은편 특실로 건너갔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박래현은 나를 벽에 밀어붙이면서 팔 사이에 나를 가뒀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눈이 내 눈과 마주치자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뺨이 달아오르면서 귀가 먹먹해지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숨쉬기가 곤란해졌다.
“오늘 나 안 보고 싶었어?”
박래현이 내 얕은 마음에 커다란 돌을 던져서 물이 출렁출렁 흘러넘쳤다. 달콤한 목소리에 흠뻑 빠져든 귓가에 달그락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매일 보면서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해요?”
“나 미국 출장 다녀와서, 우리 결혼식 올리자.”
“진짜요?”
“이번에 네 어머니 아프신 거 보고 마음이 좀 급해졌어.”
“그럴 필요 없습니다. 혼인 신고서 작성한 거로 충분해요. 아이 때문에 저랑 형식적으로 결혼한 거 아니었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해.”
“뭐, 다른 이유라도 있어요?”
이렇게 된 마당에 박래현 속마음을 들어보고자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박래현 표정을 살폈다.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을 보내며 박래현은 엄지로 내 턱을 쓸었다. 심장을 꽉 움켜쥐는 시선에 홀려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윤준영 널 사랑해서 결혼해 달라고 한 거야.”
박래현은 진지한 눈빛과 목소리로 귓바퀴에 사랑이란 말을 새겼다. 담백하지만 황홀한 고백에 내 몸과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박래현이 육체적 각인만 한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내게 몸과 마음이 다 각인 된 거였나 보다.
“나 때문에 힘들었던 거 알아. 날 싫어해도 내 업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까 내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줘.”
박래현이 내게 육체적 각인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물어봐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서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고 나는 머리칼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결 좋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삐죽삐죽 빠져나왔다. 그대로 박래현 얼굴을 잡아당겨 입술에 입 맞췄다. 길게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아프게 뛰어 현기증이 났다.
“진짜 나 사랑해요?”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만 기대.”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박래현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었는데도 믿을 수 없었다. 박래현처럼 오만하고 잘난 사람은 오메가에게 각인하지 않고 혼자서 잘 살 것 같았다.
“그 말 믿어도 돼요?”
나는 박래현의 서늘한 뺨을 엄지로 쓸어 올렸다. 그가 눈을 깜박이자 숨어 있던 긴 속눈썹이 손가락에 닿았다. 나는 그동안 나중에 다치지 않게 박래현 말을 반만 믿자고 다짐해 왔다.
“내가 네 마음을 얻도록 노력할 테니까, 내 옆에 있어 줘.”
그러나 이미 활짝 열어 버린 마음에 반쪽짜리 다짐은 부질없었다. 나는 벌써 박래현 말을 다 믿고 있었다. 나도 형이 좋다는 말을 성급하게 되돌려 주려다가 내 고백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박래현 사랑이 변함없다면 우리가 함께 걸어갈 길은 멀고 까마득하다. 구불구불한 길을 가다가 잠시 갓길에 쉬어 갈 날이 오면 그때 고백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