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부 로맨틱 클리셰-1화 (7/16)

4부 로맨틱 클리셰

01.

“준영아, 일어나서 죽 좀 먹을까?”

귓가에 다정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계속 자고 싶어서 나는 쇳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뒤척이며 그 목소리로부터 돌아누웠다. 박래현은 한쪽 팔로 어깨를 감아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부어서 잘 떠지지 않는 눈 위에 가볍게 입 맞췄다.

“내가 안아 줄 때 말고는 절대 나한테 등 돌리지 마.”

“아, 피곤해요. 좀만 더 잘래요.”

“그러지 말고 한 숟가락만 먹어 봐.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어.”

죽보단 잠이 더 급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 손으로 양 볼을 쥔 박래현이 볼을 눌러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하고서 그 틈으로 죽을 밀어 넣었다. 자지를 빨면서 입술과 혀가 헐었는지 입술 가장자리와 전복죽이 닿은 혓바닥이 쓰리고 아팠다. 그래도 죽에 든 전복을 씹다 보니 혼몽한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늘은 박래현이 출장 가는 날이자 내가 이 집에서 탈출하는 날인데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형 출장 가는 날이죠?”

“응.”

“박 실장님은 데려가실 건가요?”

조급함이 드러나지 않게 지나가듯 물어보았다. 여기서 박래현 의심을 샀다간 탈출이고 뭐고 감시만 더 심해질 것이다.

“너 놀리려고 농담했지. 네가 생각보다 진지하게 반응해서 귀여웠어.”

전복죽을 받아먹고는 있지만 머릿속으론 이미 죽그릇을 엎고 박래현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박래현 결심을 돌리려고 예정에 없는 섹스를 하다가 노팅까지 했는데 농담이었다니. 박래현은 끝까지 외모 빼고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어쩐지 이상하더라. 안 늦어요? 얼른 가세요.”

“너 죽 다 먹으면. 나 늦게 보내고 싶으면 천천히 먹어도 돼.”

탈진한 몸으로 공항까지 가려면 배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박래현이 떠 준 죽을 받아먹었다. 꽈배기 무늬가 있는 베이지색 니트에 검은색 슬랙스 차림의 남자는 여유가 넘치고 편안해 보였다. 아파서 곧 뒈질 것 같은 나와 달리 상대는 생기가 넘쳐서 억울했다. 어제 내 페로몬에 박래현이 이성을 잃고 노팅한 탓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부류여서 박래현은 노팅하고 나서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한낱 오메가에게 홀려 섹스 도중 통제력을 잃었으니 자신이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잘 먹을 거면서.”

박래현은 흡족한 표정으로 마지막 죽을 떠서 내게 먹였다. 그의 목덜미에 생긴 선명한 잇자국 때문에 어제 봤던 박래현 표정과 몸짓이 불시에 떠올랐다. 영롱하게 빛나던 갈색 눈동자,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칼, 침이 번들거리는 입술과 핏대 선 목덜미, 흥분으로 꿈틀대던 가슴팍과 식스팩으로 음영이 진 복근, 그리고 속살을 벌리고 들어오던 실한 자지까지 아주 세밀하게 기억나 몸이 떨렸다.

“얼굴이 왜 우울하지? 며칠 못 보는데, 웃어 줘.”

우리가 함께할 마지막 순간임을 상기하고서 나는 박래현이 원하는 대로 웃어 주었다. 찢어진 입술이 아파서 생각만큼 활짝 입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웃어 줬으니까 이제 됐어요? 조심해서 잘 다녀오세요.”

“일요일까지 외출 금지야. 답답하더라도 집에만 있어.”

“그러겠다고 몇 번을 대답해요, 진짜.”

“입술 안 아파? 약 발라 줄 테니까 너도 오늘 틈틈이 발라.”

쟁반에서 연고를 집어 든 박래현이 뚜껑을 열어 검지에 팥알 크기로 약을 짰다. 그는 오른쪽 입가에 조심스럽게 약을 찍어 바른 다음 그곳에 입술을 대고 약을 문질러 펴 발랐다. 뺨으로 따뜻한 숨을 흩뿌리더니 남자는 뒤로 물러서 내 머리칼을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따라 일어서려는 나를 박래현이 잡아 침대에 눕혔다.

“우겨서라도 너 뉴욕에 데리고 가는 건데, 내가 너무 착해졌어. 도착하면 전화할 테니까 전화하면 바로 받아. 알았지?”

박래현은 그러고도 한참을 옆에서 머뭇거리다가 박영범이 독촉을 하고서야 방에서 나갔다. 쓸쓸한 뒷모습과 새벽에 봤던 얼굴이 잔상에 남아 눈을 감아도 그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새벽에 몸을 뒤척이다가 허리가 아파서 눈을 떴다. 박래현을 등지고 잤었는데 깨어나 보니 그와 마주 보며 자고 있었다. 노팅이 끝난 다음 박래현이 나를 씻기고 시트를 갈았는지 몸과 시트가 다 보송보송했다. 새벽빛에 잠겨 단아하게 잠든 얼굴을 보다가 박래현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갖다 댔었다. 마지막이라는 자각에 미운 감정이 사라지고 애틋함만 맴돌았다.

뇌의 어느 부분과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에 박래현이 새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억을 가진 세포가 소멸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세포가 채워 가는 내내 나는 박래현에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스스로 다리를 묶어야 할 것이다.

20분 정도 지나 시간을 확인하고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핸드폰에 뜬 시간은 오후 한 시였다. 정 차장 부부는 화요일 오후 두 시 반에 장을 보러 마트에 가곤 했다. 그 차를 타고 이 집을 빠져나가서 바로 공항으로 가야 비행기 시간에 맞출 수 있다. 오늘 비행기를 놓치면 나는 박래현에게서 당분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머물게 될 곳의 기후가 서늘하다고 해서 긴 팔 후드 티에 청바지를 입었다. 짐을 싸기 위해 박래현 옷장을 뒤져 커다란 배낭과 적당한 크기의 백팩을 찾아냈다. 속옷과 양말, 입기 편한 옷들로 짐을 싸고서 가장 중요한 지갑과 여권을 챙겨 백팩 안쪽에 넣었다. 박래현과 신혼여행을 가려고 만들었던 여권인데 그에게서 도망가는 용도로 사용하게 되었다.

준비를 마치고 모자를 쓰면서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들여다보았다. 결연한 의지로 빛나는 눈동자 옆에 굴욕의 상징인 피어싱이 눈에 거슬려서 피어싱을 하나씩 뽑아 콘솔 위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서 반지에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자기를 데려가 달라는 듯 초록색 눈을 반짝였다.

나중에 급한 일이 생기면 팔 생각에 반지와 시계를 가방에 담은 뒤 큰 가방은 등에 메고 작은 가방은 품에 안고서 드레스 룸을 나갔다. 침대를 지나가는데 침대 헤드에 옹기종기 모인 거북들이 눈에 띄었다. 망설임 없이 거북들을 가방에 쓸어 담고 나는 테라스에 준비해 둔 운동화에 발을 꿰었다.

누군가 자꾸 내 목덜미를 잡아당겨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건 박래현도, 아기도 아닌 내가 여기에 두고 가는 마음 혹은 미련이었다. 감상에 젖기엔 시간이 촉박해서 나는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다. 건물에 몸을 바짝 붙이고 현관 반대쪽으로 돌아 주차장으로 갔다. 내 차를 포함해 총 여섯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어서 이 차장 차는 CCTV가 잡히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었다. 나더러 어서 도망가라고 보이지 않는 손이 돕고 있었다. 바람은 서늘하고 하늘은 푸르러서 여행이라 생각하며 도망가기엔 참 좋은 날이었다. 나는 최대한 수그린 자세로 이 차장의 9인승 차에 탑승했다. 이 집 사람들이 의외로 허술한 게 경호원들이 집을 지키고 있어서 다들 차 문을 잠그고 다니지 않았다.

나는 두 번째 좌석을 지나 세 번째 좌석과 두 번째 좌석 사이의 공간에 몸과 배낭을 구겨 넣고 이 차장이 차에 타기만 기다렸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이 차장이 나타나지 않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박래현이 없어서 오늘 일정을 다음으로 미뤘을까? 밀폐된 공간에 햇빛이 쏟아져 차 안 온도가 계속 높아졌다. 박래현에게 쑤셔 박힌 밑이 아려서 계속 쪼그려 있으려니 몸에서 쥐가 났다.

나는 급한 마음에 또 시간을 확인했다. 2시 50분이었다. 패닉 상태에 빠져 핸드폰을 노려보는데 설상가상으로 박래현에게 전화가 왔다. 안 받으면 그가 정 차장에게 확인 전화를 할지 몰라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준영아, 몸은 좀 괜찮아?

“아직 아파요. 오늘 쉬면 괜찮아지겠죠, 뭐.”

- 나 비행기 탔어. 이제 전화기 꺼야겠다. 뉴욕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형, 계약 잘하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낮게 번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전화를 끊고 무음으로 돌렸다. 그 순간 드르륵 소리를 내며 차 문이 열리더니 이 차장 부부가 차에 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할 말이 남았는지 핸드폰 화면에 박래현 전화번호가 떴다. 끊고 나서 무음으로 바꿔 놓기 다행이었다. 다섯 번 정도 전화를 했는데도 내가 받지 않자 이번엔 정 차장 핸드폰이 울렸다.

“네, 상무님.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존나 집요하고 지독한 남자였다. 차가 출발하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정 차장에게 내 방에 가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할 사람이었다.

“준영 씨 계속 방에 있어요. 저희는 지금 장 보러 가고 있고요.”

박래현이 어떤 지시를 내리고 있는지 정 차장은 연신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몇 마디 더 건네고서 전화를 끊었다.

“여보, 우리 상무님은 준영 씨 정말 좋아하나 봐. 처음이랑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셨어.”

“그래서 유산한 게 더 안타까워.”

“둘 다 젊고 건강한데 뭐가 문제야. 어제도 침대가 아주 난장판이 되었더라고.”

잊고 있던 밤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오줌을 줄줄 흘려서 침대 시트와 이불이 엉망으로 젖어 버렸다. 안에 방수 시트가 깔려 있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매트리스를 바꿔야 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씨발,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오줌을 싸다니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하필 마지막 섹스에서 그 지랄을 한 통에 박래현에게 나는 영원히 오줌싸개로 각인될 것이다.

“그런데 상무님은 언제쯤 준영 씨를 믿을까? 출장 다녀오실 때까지 경비 두 명 더 늘렸다던데….”

“수현 도련님 생각해 봐. 그때 너무 대책 없이 잃어버리셔서 또 그러긴 싫으시겠지.”

박수현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애인의 변심에 몇 날 며칠 강소주를 깔 수 있지만, 그리고 죽을 결심까지 할 수 있지만, 대부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할 것이다. 우연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하게 불행이 맞물려 내 비극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끝은 이별이었다.

몸이 아파서 더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할 무렵 차가 멈추고 시동이 꺼졌다. 두 사람이 내리고 10분이 지난 후에 나는 자리를 앞으로 옮겨 차분하게 차에서 빠져나왔다.

주차장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은행에 들러 현금 1,200만 원을 찾았다.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돈은 1,100만 원이 한계여서 더 찾아봤자 소용없었다. 해준에게 5억을 보냈음에도 통장에는 아직 엄청나게 많은 돈이 남아 있었다. 이 돈을 박래현이 압류할지 안 할지 모르겠지만 엄마를 위해 쓸 돈을 마련했으니 더는 욕심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에 핸드폰을 처리하려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런 소식도 남기지 않고 박래현을 떠나고 싶지만 박래현이 엄마를 찾아가면 낭패여서 문자를 보내기로 했다. 내가 박래현을 따라 뉴욕으로 떠난 줄 알고 있을 엄마에게 조그마한 충격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감정을 배제한 채 요점만 간단히 쓰고 나서 오타를 점검한 뒤 과감하게 전송 버튼을 눌렀다.

「박래현 씨. 윤준영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저는 형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서 도주를 결심했습니다.

형이 제게 준 돈 25억에서 5억을 꺼내 엄마 병원비로 쓰라고 해준이한테 맡겼습니다.

초롱이 때문에 받은 돈이니까 그 5억은 제가 쓰고 싶은 곳에 쓰겠습니다.

엄마가 걱정 안 하시게 형이 미국 지사로 발령 나서 같이 나간 거로 얘기해 놨습니다.

엄마를 찾아간다거나 엄마를 이용해서 저를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만일 형 때문에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형은 두 사람을 죽이게 될 겁니다.

형과 보낸 시간은 너무나 끔찍하고 비참해서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설령 절 찾아 가둔다 해도 절대 형 아이를 낳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절 찾을 생각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동안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쓸모가 없어진 핸드폰은 전원을 꺼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은행을 나와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저녁을 먹기 전에 정 차장 부부는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될 테고 태평양 위를 날고 있을 박래현에게 연락할 길이 없을 것이다. 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박래현이 어떤 행동을 할지 상상해 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에게 잡히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백팩을 꽉 끌어안았다.

한참 잘 달리던 택시가 갑자기 속도를 늦춰 다리 위를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 말로는 사고가 난 것 같다고 했다. 정우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려서 초조해졌다. 내가 탈출에 실패한 줄 알고 정우가 공항을 떠나 버리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가까스로 공항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는 내게 검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다가왔다. 척 봐도 김정우였다.

“야, 윤준영. 왜 이렇게 늦었어? 작전 실패한 줄 알고 철수할 생각이었다.”

“씨발 너 뭐냐? 무슨 첩보 영화 찍냐?”

“어, 흉내 좀 내보고 싶어서.”

“길 엇갈리면 어떡하려고 여기 나와 있어. 우리 3층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네가 안 와서 초조해서 내려와 봤어. 얼른 가서 비행기 표부터 끊자.”

내게 필요한 물건을 바리바리 쌌는지 정우는 뚱뚱해서 터질 것 같은 캐리어를 끌고 앞장섰다. 우리는 3층에 있는 체크인 카운터로 가서 항공권부터 끊었다. 필리핀은 무비자 방문인 대신 편도가 안 돼서 왕복으로 항공권을 끊어야 했다. 항공권을 끊고 우린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정우가 음료를 주문하는 동안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냅킨으로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입 안이 바싹 말라서 목이 탔다.

“야, 근데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냐? 그러고 비행기 탈 수 있겠어?”

“어,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래.”

정우는 맞은편에 앉아 내 앞으로 자몽에이드를 내밀었다. 목을 축이고 싶어서 나는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시원한 음료를 쉬지 않고 들이켰다. 차가운 음료를 마셔도 좀처럼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어제 박래현한테 무슨 일 당한 거 맞지? 안색도 안 좋고 입술도 찢어지고 난리가 났네. 너 필리핀으로 도망갈 게 아니라 그 남자 폭행죄로 고소해야 하는 거 아냐? 나랑 병원 가서 진단서 떼자.”

“그런 거 아냐. 비행기 타고 가면서 자면 괜찮아질 거야.”

“그 새끼한테 맞았어? 아니면… 강간당했어?”

“아니라니까!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정우 말에 자극받아서 찢어진 입술이 선득선득 아팠다. 몇 시간 전에 입술에 약을 발라 주던 박래현이 떠올라 나는 혀로 상처를 더듬었다. 틈틈이 발라 줘야 일찍 낫는다고 했는데 급하게 나오다 보니 약을 두고 나왔다.

“너 용케 빠져나왔다? 네 말 듣고도 반신반의했는데 박래현 씨 의외로 허술하네. 자기 전화 이용해서 네가 탈출한 것도 모르고 말야.”

“요즘 수면제 먹고 잠들어서 그래. 그리고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방심한 거야.”

“뭐? 혹시… 진짜로 너 그 사람 좋아해?”

“좋아하면 왜 도망을 치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옆에 붙어 있겠지. 아주 끔찍하게 싫어서 도망가는 거야.”

정우는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나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정우를 질 낮은 악당으로부터 친구를 구해 준 정의의 사도로 만들었다.

“비행기 출발 시각은 6시 55분, 마닐라 도착 시각은 10시 35분이야. 경준 형이 직접 너 픽업하러 온다고 했으니까 장소 알려 줄게. 여기 봐 봐. 여기가 터미널 1이야.”

정우는 작은 지도를 내 앞에 펼치고서 그림을 따라 이동 경로를 알려 준 다음 최종 목적지에 빨간색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는 지도 옆에 김경준 전화번호를 적고 나서 지도와 노란색 손수건을 건넸다.

“이건 뭐야?”

“이 노란 손수건이 너라는 표시야. 손목에 하든 목에 하든 너 알아서 해. 참고로 네 영어 이름은 랜디야. 내가 심사숙고해서 지은 거다, 인마.”

“그 이름 마음에 든다. 벌써 재밌을 거 같아.”

“씨발, 재밌냐? 어학연수는 24주 코스로 신청했고 네 부탁대로 토익 준비반으로 끊었다. 무비자로 30일 체류할 수 있어. 30일 지나면 불법 체류를 하든가 아니면 경준 형하고 상의해서 해결해.”

“오케이.”

“24주에 1,000만 원인데 전에도 말했듯 넌 좀 복잡해서 1,500으로 합의 봤다. 신입생 모집 기간이 아니라 입학이 안 된다고 튕기는 걸 사정사정해서 겨우 받아 준 거니까 가서 열심히 해.”

“고맙다. 은혜 차곡차곡 적립해 놨으니까 나중에 다 갚을게.”

엄마 일부터 시작해서 정우에게 도움만 받아 미안했다. 나중에 생활이 안정되면 제일 먼저 정우에게 진 빚부터 갚아 나갈 것이다.

“나중에 괜찮으면 24주 더 연장해 줘. 나 완전 개털이니까 수업료는 네가 입금해. 남은 돈은 너 취업할 때까지 생활비로 쓰고.”

“네가 보낸 돈 통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 귀국하면 그때 써.”

“내년에 귀국해서 회계사 시험 볼 생각이긴 한데, 잘 모르겠다.”

“마음 추스르면서 천천히 생각해. 도망도 힘든데 무리하지 말고.”

“참, 해준이한텐 절대 내 거처 말하지 마. 박래현이 해준이부터 털 거고 다음은 너야. 나 생각해서 절대 입 열면 안 돼.”

“그건 걱정하지 말고 기왕 가는 거, 가서 즐겁게 살아. 필요한 책은 경준 형한테 부탁하고. 근데 스케줄 봤더니 장난 아냐. 씨발 아침 여덟 시에 수업 시작해서 밤 열 시에 끝나더라. 다른 공부는 언제 하지?”

나는 공부할 양이 많고 일정이 빡빡할수록 좋았다. 1년을 그렇게 살다 보면 그냥저냥 박래현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야, 시간 다 돼 가는데 얼른 짐부터 부치자. 환전도 해야 하고 로밍은 어떻게 할래?”

“핸드폰 버렸어. 나한테 연락할 일 있으면 메일로 하든가 김경준 씨한테 전화해.”

“핸드폰 필요하면 경준 형한테 임시로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

“알았어. 일어나자.”

허리가 무겁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나는 정우 팔을 붙잡고 힘들게 캐리어와 배낭을 위탁했다. 환전까지 마치자 힘이 풀려서 어딘가 주저앉고 싶어졌다. 정우에게 마지막으로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속상했다.

내 주변에서 수다를 떠는 사람들은 여행을 간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생기가 넘쳤다. 나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다 죽어 가는 고목처럼 침울하게 가라앉은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다.

“참, 억제제랑 안경 챙겼지?”

“어, 당연하지. 네 부탁대로 가발도 넣었어. 거기 한국 사람 많은데 조심하고 절대 사진 찍히지 마.”

“알았어.”

“근데 너 밥 안 먹여서 영 맘에 걸린다.”

“지금 뭐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먹으면 토할 거 같아.”

일을 다 보고 나서 우린 서둘러 출국장으로 갔다. 정우와 더 있고 싶은데 아쉽게도 줄이 짧아 금방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정우는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겨울 방학 때 봐서 너 만나러 갈 테니까 건강하게 잘 지내.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래. 내가 존나 열심히 공부해서 토익 만점 찍는다. 너도 얼른 좋은 데 취직해라.”

“알았어. 첫 월급 타면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해준이 있다지만 어머니도 이따금 찾아뵐게.”

“고맙다. 사랑한다, 김정우.”

나는 정우를 향해 활짝 웃어 주었다. 정우는 눈과 코를 빨갛게 물들인 채 눈물을 참고 있었다.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서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보안 검색과 출국 심사를 마친 다음 면세점을 지나 탑승구로 가는 길이 퍽 멀게만 느껴졌다.

느릿느릿 걸어서 탑승구 앞에 도착한 나는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비행기에 탑승하려면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혹시 벌써 눈치채고 박래현이 사람을 풀었을지도 몰라 나는 조심스러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박래현에게 잡히면 그가 내지르는 광폭한 분노를 견뎌 내야할 것이다. 발가벗겨진 채 손과 발에 수갑을 차고 임신할 때까지 박래현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두려운 상상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박래현이 뉴욕에 도착하기 전에 돌아가면 모든 걸 제자리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공포를 털어 냈다. 막상 떠나려니 걱정이 앞서 흔들리는 마음을 재차 다잡아야 했다.

필리핀 마닐라행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안내 방송이 나와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끽해야 신혼여행으로 유럽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게 다였다. 그런데 박래현 덕분에 불법 체류자가 되어 타국에서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다.

나는 탑승구를 지나 비행기와 연결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는 박래현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에 거센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이제 박래현이 없는 곳에서 나만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빛을 처음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디뎠다.

***

“윤준영 씨, 그만 일어나요. 조식 먹고 출발합시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면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오늘 단체 상담이 있어서 얼른 들어가 봐야 해요.”

박래현 목소리가 아닌 낯선 목소리에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 거뭇한 피부에 건장한 몸을 가진 남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잠시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헝클어진 머릿속으로 어젯밤 장면이 조각조각 떠올라 아귀를 맞춰 갔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구역질만 하다가 탈진한 상태로 비행기에서 내린 나는 지도를 꺼내서 김경준과 만나기로 한 장소를 찾아갔다. 내 손목에 묶인 노란 손수건을 보고서 남자가 먼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남자는 짙은 파란색 캡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내 배낭을 어깨에 메고 캐리어를 끌면서 다른 쪽 팔로 나를 부축해 공항을 빠져나왔다. 거리엔 태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칼끝처럼 매서운 바람이 비를 동반하여 불어닥치자 몸이 무력하게 휘청거렸다.

CCTV를 피해 으슥한 곳에 세워진 차에 올라타면서 이대로 납치당하는 건 아닌가 하고 불안감에 휩싸였다. 박래현 옆이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야말로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곳이었다.

‘겁먹지 말아요. 저 여기서 사업하는 사람입니다.’

남자가 차를 출발시키고 얼마 안 있어 나는 기절하듯 쓰러져 버렸고 그 뒤의 일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아무래도 남자가 업어서 나를 여기까지 옮긴 듯했다.

“몸은 좀 어때요? 상태가 더 나빠지면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어요.”

“이제 괜찮아졌어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여긴 어딘가요?”

제일 어려운 일을 해낸 뒤라 다른 일도 순조롭게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드디어 박래현에게서 벗어났다!

“마닐라 외곽에 있는 호텔입니다. 바기오 들어가려다가 태풍이 너무 심해서 중도에 포기했어요. 윤준영 씨 상태도 안 좋은 것 같고.”

“아, 네….”

“나는 씻었으니까 씻고 나와요.”

나는 맨몸에 목욕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직접 옷을 벗은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저 남자가 목욕 가운으로 갈아입힌 듯했다. 의심쩍은 눈으로 객실을 둘러보던 중 옆 싱글 침대에서 사람이 자고 일어난 흔적을 발견했다. 내가 오메가란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랑 같은 객실을 쓴 남자에게 불쾌감이 들었다.

“혹시 여기서 잤습니까?”

“윤준영 씨가 머나먼 타국에 와서 객사라도 하게 되면, 전부 제 책임이잖습니까. 혹시 몰라서 방을 하나만 얻은 겁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소릴 하진 않겠죠?”

남자의 친절한 의도에 할 말이 없어져서 나는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몸 상태가 궁금해서 목욕 가운을 벗고 세면대 옆에 설치된 전신 거울에 몸을 비췄다. 귓바퀴와 목덜미, 빗장뼈와 유두에 온통 박래현이 만든 흔적들이 가득했다. 옆구리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에 기겁하면서 다리를 벌려 허벅지 안쪽을 살폈다. 저 남자가 옷을 갈아입히면서 요란한 정사의 흔적을 다 봤을 거로 생각하니 얼굴이 붉어져 화끈거렸다.

“씨발, 이게 다 뭐야.”

언제 만들었는지 허벅지 안쪽에 잇자국이 있었고 발목에는 멍이 올라와 푸릇푸릇했다. 어제 만들어진 흔적이라 전부 붉고 선명했다. 박래현이 몸에 화인을 만들 동안 나는 쾌락에 허우적대며 더 해 달라고 몸부림쳤다. 그래서 입술이 조금 찢어진 얼굴 외에는 멀쩡한 곳이 없었다. 이런 몰골을 하고 여기까지 오다니 기적이었다.

나는 정사의 여운으로 삐걱거리는 몸에 비누를 칠하면서 박래현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생각했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고 내가 보낸 문자를 읽었을 테고 아마 내가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것이다. 지금 한가하게 호텔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마닐라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자각에 후닥닥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었다. 배낭에서 꺼낸 옷이라 구깃구깃 주름이 져 보기에 흉했지만 어제 입었던 옷은 비에 젖어서 다시 입을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씻고 나온 나를 찬찬히 관찰했다.

“어제,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아깐 신경이 날카로워서 실례했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젖은 옷은 여기에 따로 넣어서 가져가세요.”

남자는 내게 커다란 비닐봉지를 건넸다. 남자의 세심함에 감사하며 비닐봉지에 젖은 옷과 속옷을 담아 캐리어에 넣었다. 정수리가 계속 따끔거려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씻고 나오니까 완전히 딴사람이 됐네요. 아, 내 이름은 김경준입니다. 어학원에선 로델이라고 부르면 돼요.”

“정우 어머니 친구분 아드님이시죠? 직접 데리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윤준영입니다.”

“웃으니까 보기 좋네요. 조식 먹고 바로 출발하죠.”

“아침 안 먹고 그냥 출발하면 안 될까요? 제가 속이 안 좋아서요.”

“난 배고픈데….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얼른 가서 먹고 올 테니까.”

“그러지 말고 일찍 출발해요. 제가 가다가 아침은 사 드릴게요.”

김경준의 까만 눈에 호기심이 서렸다. 그는 느릿하게 나를 훑어보고서 내 배낭과 캐리어를 집어 들고 객실을 나갔다. 나는 작은 백팩 하나만 메고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스토커한테 쫓긴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범죄 저지르고 도망 온 건 아니죠?”

“절대 아니에요. 정말 스토커 피해서 왔습니다.”

“윤준영 씨 몸에 상흔과 멍 자국이 있던데 그 스토커 짓인가요?”

“…….”

“대답해야 내가 결정을 하죠.”

“네.”

서울에서 네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왔는데 여전히 박래현에게 들킬까 봐 염려하는 내가 한심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도망쳤고 최선을 다해 숨어 있을 테니 박래현이 나를 찾아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경준은 데스크에 카드키를 반납하고 주차장에 주차된 차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조수석 문을 열어 나를 먼저 태우고서 차 뒤쪽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나는 안전벨트를 맨 다음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고 차 내부를 둘러보았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봤는데 TV에서 주로 연예인들이 타고 다니던 커다란 차였다. 운전석에 앉아 벨트를 맨 남자가 운전석 문짝에서 책자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넸다.

“가는 길에 이거 읽으면서 가요. 우리 어학원은 학원과 기숙사 일체형 학원입니다. 불이익당하지 않게 캠퍼스 규정과 기숙사 규정 반드시 숙지하세요.”

“네.”

“지난주 월요일에 신입생을 모집해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준영 씨는 제가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입학시켰으니까 배로 잘해야 합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토익 준비반 들어간다고 했죠? 반은 캠퍼스에서 입학시험 치른 후에 배정될 겁니다.”

김경준은 시동을 걸고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고 운전하는 걸 보면 이쪽 지리에 능통한 듯했다.

김경준이 건넨 소책자를 보면서 어학원 규칙을 머릿속에 새기다가 머리가 아파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열대의 가로수,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보며 비로소 나는 외국에 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수채화처럼 흐릿한 거리에는 낯선 모양의 차와 느긋해 보이는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나를 날려 버릴 것 같던 태풍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는지 오늘은 유리창에 비가 뚝뚝 듣는 정도였다.

“어학원에 한국 사람이 80%입니다. 80% 가운데 흐트러지지 않고 끝까지 공부하는 사람은 35%가 채 안 돼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영어보다는 섹스 스킬이나 성병을 얻어 갈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특히 남자들은 잘 휩쓸리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공부만 할 겁니다.”

“다들 처음엔 그렇게 시작해요. 그런데 필리핀이 유흥이나 도박에 빠지기 쉬운 곳입니다. 한국인 유학생이 많다 보니 그들을 표적으로 범죄도 자주 일어나고요. 흔들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세요.”

“네.”

“기숙사는 2인실이고 베타 남성과 같이 쓸 겁니다. 동료들과 오랜 시간 붙어 있어서 서로 눈 맞는 경우가 많은데, 기숙사 안에서 성교는 절대 금지돼 있습니다. 혹시 발각되면 곧장 제적처리 되니까 주의하세요.”

“알겠습니다.”

연애는 안 된다는 말을 강조하는 걸 보면 어학원 분위기가 내 생각만큼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비싼 돈을 내고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히 공부가 최우선일 거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닌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박래현과 질리도록 몸을 섞다 와서 다른 알파를 봐도 섹스 욕구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누구 덕에 눈만 높아져서 웬만한 알파는 눈에 차지 않을 게 뻔했다. 다양한 각도에서 따져 봐도 박래현은 내게 해로운 사람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주말은 자유니까 마음에 든 사람이 있으면 주말에 밖에서 만나는 건 괜찮아요. 그리고 기숙사 내에서 페로몬을 풍기는 건 금지입니다.”

“저는 공부하러 왔지, 사람 사귀러 온 게 아닙니다.”

“준영 씨가 사람 꼬이게 생겨서 특별히 더 주의 주는 겁니다. 지금 억제제는 먹고 있죠?”

남자가 너무 확신에 차서 물어보는 바람에 나는 그를 힐긋 쳐다보았다. 남자의 웃는 입매를 보면서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도 웃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준영 씨처럼 건장한 타입을 좋아합니다. 오메가로서 드문 유형이라 내 취향의 오메가 만나는 게 하늘의 별 따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서 아까 페로몬을 슬쩍 흘려 봤는데, 전혀 반응이 없었어요.”

알파와 오메가들은 마음에 드는 이를 발견하면 페로몬을 흘려 상대의 반응을 먼저 살펴보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 주파수가 맞을 때 중간 과정이 생략돼 붙어먹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베타들이 알파나 오메가 연인을 불안해하고 꺼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언젠 공부만 하라면서요.”

“내가 공부만 하도록 도와줄게요. 여기 있는 동안 나랑 사귀면, 준영 씨한테 집적댈 사람이 없을 거 아닙니까.”

“참 괴상한 논리네요. 농담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면요?”

“저 다른 어학원으로 옮길까요? 필리핀에 어학원 수두룩하다던데요.”

대화 도중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김경준이 페로몬을 흘렸다면 내가 각인된 상태가 아닌 이상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냄새를 맡지 못했을까. 아, 씨발! 혹시 박래현한테 각인했나? 불안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언제 박래현에게 각인했을까.

“씨발, 미치겠네.”

아주 드물게 육체만 각인하는 예도 있지만 대부분 각인은 상대에게 몸과 마음을 다 열 때 가능했다. 내가 박래현에게 각인한 게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란 말이었다. 박래현을 벗어나려고 죽어라 도망쳤는데 각인을 하다니. 나는 세상에 둘도 없이 미련하고 운 나쁜 남자에다가 섹스만 밝히는 짐승 같은 오메가였다. 각인이 자연스럽게 풀릴 때까지 박래현에게 종속될 비참한 미래가 그려졌다. 한번 각인하면 각인 기간이 5년 정도 된다고 하니 5년 동안 박래현에게 몸과 마음이 묶여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1~2년도 아니고 5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앞날이 막막했다.

한차례 패닉이 쓸고 간 뒤에 나는 어떻게든 희망을 찾고자 노력했다. 각인한 오메가가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에만 반응해서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에는 무감해지듯 다른 알파들은 각인한 오메가의 페로몬을 맡지 못한다. 거기다 오메가가 각인하면 각인한 알파만이 발정열을 풀어 줄 수 있기 때문에 각인한 알파가 옆에 없을 때 발정기는 이틀 정도 감기처럼 왔다가 흐지부지 지나간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페로몬 때문에 알파와 엮일 일이 없을 테고 억제제 없이 히트 사이클을 보낼 수 있어서 각인이 꼭 나쁜 건 아니었다. 성욕을 채워 줄 알파가 없어서 힘들겠지만 이렁저렁 지내다 보면 5년 후엔 각인이 끊어져 완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정우 말로는 이상한 스토커를 피해 여기로 왔다던데, 다른 어학원으로 옮길 수 있어요?”

“지금 제 약점 잡고 협박하시는 겁니까? 여기 어학원이 괜찮대서 믿고 왔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죠.”

“아, 전 화끈한 남자지 비열한 남자는 아닙니다.”

김경준과 대화 나누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서 나는 창으로 얼굴을 돌렸다. 억제제를 먹으면 베타라고 속일 수 있는데 내가 오메가란 사실을 공개한 정우가 원망스러웠다. 알파인 김경준이 나를 특별하게 신경 써 주길 바라서 그랬겠지만 지나친 오지랖이었다.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잘 보살펴 줄 테니까 우리 어학원에 조용히 박혀 있어요.”

남자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분노에 치를 떨며 내 행적을 추적하고 있을 박래현을 생각했다. 마닐라에 도착한 사실은 파악했겠지만 내가 탄 차량이 조회되지 않아 쉽게 찾을 순 없을 것이다. 정우 엄마와 김경준 어머니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한다면 박래현은 나를 찾는 데 난항을 겪을 것이다.

정우는 김경준 부모가 대단한 투기꾼들이라고 했다. 공인중개사인 그들은 정우가 사는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린 뒤 3년 전에 고급 아파트를 얻어 이사 갔다고 했다. 정우는 흔적을 안 남기기 위해 엄마와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돈 뒤 김경준 어머니 사무실까지 찾아가 일을 성사시켰다. 정우 엄마와 친하게 교류하는 사이가 아니어서 김경준 어머니가 박래현 레이더에 걸려들 확률은 낮을 거라고 했다.

이들이 불법을 무릅쓰고 날 받아 준 건 돈 때문이다. 우후죽순으로 어학원이 들어서면서 가격 경쟁이 붙었고 그 여파로 수강생 유치가 어려워져서 그들 입장에선 한 명이라도 더 받아야 했다. 비수기에 웃돈까지 얹어 주며 오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나름대로 박래현의 정보력에 대비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정우가 김경준과 통화할 때는 과에서 친구들 전화를 빌려서 했고 현금도 김경준 모친에게 직접 전달했다. 박래현이 돈과 인력으로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찾아내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가 자신이 세운 계획을 돌아보고 나를 포기하길 바라고 있다.

별안간 박래현 가방 속에 들어 있던 혼인 신고서와 내 운전면허증이 생각났다. 여기 오기 전에 찾아서 찢어 버렸어야 했는데 여러 일이 닥치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곧이어 나는 쓸데없는 걱정을 단박에 날려 버렸다.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이 혼인 신고서는 벌써 쓰레기통 어딘가에 버려졌을 것이다.

“배 안 고파요? 저기 식당 잘하는데 우리 밥이나 먹고 갑시다. 이 귀한 몸이 직접 픽업에 나섰는데 밥도 안 사 줄 겁니까?”

“사 드릴게요.”

김경준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음식점에 차를 주차했다. 이곳 나무들은 하나같이 이파리가 크고 무성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1년 내내 기온이 높은 열대 몬순 기후답게 차에서 내리자마자 습기를 머금은 더위가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가을옷을 입고 있어서 서울의 한여름보다 훨씬 덥게 느껴졌다. 종업원은 더위를 피해 뛰어든 우리를 에어컨이 있는 식당 안쪽으로 안내했다.

“준영 씨는 여기 음식 잘 모르니까 내가 주문할게요. 괜찮죠?”

“네, 그렇게 하세요.”

나는 옆 테이블에 나온 음식에 눈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음식이 양이 많고 맛있어 보여 군침이 돌았다. 어제 박래현이 떠 준 죽을 먹은 뒤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뱃가죽과 등가죽이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김경준은 귀퉁이가 반질반질하게 닳은 메뉴판을 펼치고서 일사천리로 주문을 마쳤다.

“베이비 백립이랑 새우 바비큐 꼬치, 치킨 샐러드 시켰어요. 새우 알레르기 같은 거 없죠?”

“네, 가리는 거 없습니다.”

“먹을 만할 겁니다.”

“기대되네요.”

“옷차림을 보아하니 돈 좀 가져왔을 거 같은데, 기숙사 내에서 도난 사건이 자주 발생합니다. 현금이나 귀중품은 몸에 지니고 다니세요.”

“현금이 좀 있는데… 저 대신 맡아 줄 수 있어요?”

“나한테 주세요. 내 이름으로 통장하고 카드 만들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안에 근육질 몸매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나이는 서른둘에서 서른셋 정도로 보였고 이른 나이에 성공한 사람답게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탄탄한 몸을 보아하니 스포츠를 좋아할 것 같고 성적 매력이 있어서 연애도 꽤 해 봤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박래현에게 눈높이가 맞춰진 내게 김경준은 조금 잘나 보이는 남자 이상은 아니었다.

“준영 씨는 피지컬이 좋아서 주변에 남자든 여자든 많이 꼬였겠어요. 사이코 스토커도 그중 한 명이겠죠?”

“스토커 얘긴 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이런. 준영 씨한텐 끔찍한 일일 텐데 내가 실수했네요.”

“어학원에서 다른 주의할 사항 있습니까?”

“토익 준비반에 벤자민이란 학생과 그 무리 조심하세요. 그 애 부친이 야당 대표로 출마할 건데, 그 전에 잡음 없애려고 잠깐 유배 보내 놓은 겁니다. 혹시 모르니까 본명도 알려 줄게요. 본명이 최우진입니다.”

“개망나닌가 봐요?”

“그렇다고 봐야죠. 질이 안 좋으니까 어울리지 말아요.”

한국에 두고 온 잘생긴 개망나니가 생각나서 손바닥으로 뺨을 툭툭 쳤다. 이제부터 박래현 생각을 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나는 테이블 위에 푸짐하게 세팅되고 있는 음식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색 소스에 버무려진 베이비 립과 망고 셰이크가 먼저 나왔다. 나는 허기를 참아가며 돼지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적당히 익어서 살이 부드럽고 소스와 어울림이 좋아서 순식간에 스테이크를 먹어 치웠다. 새우와 치킨 샐러드까지 다 먹고 났더니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아졌다. 김경준은 밥 먹는 내내 바기오에서 해서는 안 될 여러 행동을 주의시켰고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식사를 끝내고 지갑을 찾기 위해 카운터에 백팩을 내려놓고 안을 뒤적였다. 옷들 사이에 숨었는지 지갑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지갑을 찾느라 헤매는 사이에 김경준이 카드를 꺼내 계산을 마쳤다.

“저 돈 있습니다. 제가 계산하기로 했잖아요.”

“여기서 돈 쓸 일 많아요. 아껴 뒀다가 필요할 때 써요.”

“…….”

“아니면 준영 씨 편할 때 밥 한번 사든가.”

“그럴게요. 오늘 점심 잘 먹었습니다.”

“약속 지켜요.”

이미 계산을 마친 상태라 남자의 수법을 보고도 그냥 넘어갔다. 낯선 곳에서 첫 시작인데 어학원 관리자와 틀어져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밥 먹는 잠깐 사이에 빗줄기가 거세져서 나무 이파리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차까지 달려가서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폭우에 운동화와 바짓가랑이가 젖어서 축축해졌다. 남자는 수건으로 머리칼을 털면서 내게 새 수건을 건넸다.

“여긴 6월부터 9월이 우기입니다. 준영 씨가 평생 볼 비보다 더 많은 비를 보게 될 거예요.”

김경준은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와이퍼가 빠른 속도로 빗물을 제거했지만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려워 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나는 눈을 감고 유리를 때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박래현은 매일 밤 내 방을 찾아왔었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우린 섹스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거칠게 몸을 섞었다. 박래현은 새벽 늦게까지 구멍을 팠고 나는 그 아래 깔려 몸을 흔들며 숨 가쁘게 호흡을 내뱉었다.

손에 잡힐 듯 선연한 감각을 떨치고자 그에게 각인한 시점을 추측해 보았다. 아무래도 첫 히트 사이클을 함께 보내면서 각인했을 가능성이 제일 컸다. 내 발정기에 맞춰 러트 상태에 접어든 박래현이 태풍처럼 무자비하게 페로몬을 쏟아 내 나를 압도했었다. 그때 박래현에게 온몸을 관통당하면서 박래현이 내 알파였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로잡을 유일한 오메가가 되고 싶었다.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그 꿈이 실현되리라고 여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는 바람이었다.

나는 뻗어 나가는 잡념을 의도적으로 부러뜨리며 김경준이 준 책자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물리적 거리가 충분히 멀어졌음에도 각인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부터 박래현에게서 완전히 달아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박래현한테 벗어나기 위해 도망쳐 놓고 과거를 떠올리는 건 논리에 맞지 않았다. 나와 초롱이를 배신해 우릴 강제로 찢어 놓고 나를 시궁창에 처박은 사람은 박래현이었다. 나는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5년 동안 온 힘을 다해 각인을 끊어 낼 것이다.

***

비가 오고 우중충한 날씨가 이어졌다. 필리핀은 태풍의 길목에 위치해서 비가 잦고 한번 내리면 폭우가 쏟아졌다.

영원히 그치지 않을 기세로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좋아 오랜만에 새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속한 팀 팀원들은 주말을 맞아 외출할 생각에 들떠서 다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착실하게 밥을 먹는 나를 둘러싸고서 그들은 바기오 시내에 같이 나가자며 나를 꼬드겼다.

[랜디, 이 지긋지긋한 기숙사에 기어코 남겠다고? 그러지 말고 같이 시내 나가자. 삼겹살에 소맥 어때? 내가 저번 주에 삼겹살 맛있는 곳 알아 놨어.]

여기만 해도 한국 학생과 직장인이 많아서 신경 쓰이는데 시내엔 더 많은 한국 사람이 몰려들 것이다. 삼겹살과 소맥에 잠시 흔들렸던 나는 흔적을 감추고 숨어서 살아야 할 내 처지를 떠올리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맙지만 난 밀린 잠이나 잘래.]

[우리 영화 보고 쇼핑몰 가서 쇼핑할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필리핀 문화 정도는 체험하고 돌아가야지. 랜디, 공부도 중요하지만 우린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가져야 해.]

팀원들은 즐겁게 놀자는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나를 유혹했다. 나는 검은 뿔테 안경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재밌게 놀다 와.]

[진짜 네 고집 알아줘야 해.]

[다음에 기회 되면 같이 나가.]

적당한 선에서 물러날 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고 했다. 이 정도 완곡하게 표현했으면 내가 설득에 넘어갈 의사가 없다는 걸 깨달을 법도 한데 다들 눈치가 없었다.

[클럽에서 술 마시고 춤추면 스트레스가 확 풀려. 재미는 내가 보증한다.]

[그래. 신나게 놀다 와.]

식사를 마치고 못내 아쉬워하는 사람들과 1층 로비에서 헤어져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움직일 때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대신 계단을 이용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일과를 점검하면 운동도 겸할 수 있어 꽤 유익했다. 머릿속으로 오늘 할 일을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랜디, 나랑 같이 나갈래? 난 너랑 데이트하고 싶은데….]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내게 꾸준히 호감을 표현하는 일본인 로라였다. 나는 내 팔을 잡은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젊은 남녀가 계속 붙어 있으니 눈이 맞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어차피 내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반지를 보여 주면서 애인이 있다고 했지만, 로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방에 잠깐 들어가도 돼? 나랑 얘기 좀 해.]

[나 애인 있어. 연애 상대가 필요하면, 다른 사람 알아봐.]

[잠깐 바람 좀 피우면 안 돼? 네가 바람피운 걸 상대가 어떻게 알아?]

방 앞까지 따라온 여자를 밖에 세워 두고 쿵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서 아예 문을 걸어 잠갔다. 드디어 혼자가 돼서 속이 후련했다.

지난 2주 동안 나는 잡초 같은 생명력을 발휘해서 빠른 속도로 어학원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박래현 집에서 나무늘보처럼 생활하다가 아침 여섯 시 반부터 밤 열 시까지 꽉 짜인 일정대로 움직이려니 처음엔 죽을 맛이었다.

호화로운 생활에 젖어 있을 땐 몰랐는데 한 발 물러섰더니 그 생활에 중독된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 세끼 정성 들여 차려진 밥, 신경 쓰지 않아도 깨끗하게 세탁돼 정리된 옷들, 내가 청소하지 않아도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집. 거기서 내가 한 일이라곤 먹고 자고 놀고 운동하고 박래현을 기다렸다가 섹스한 게 다였다.

나쁜 습관은 몸에 쉽게 배서 3개월 동안 완전히 바뀌어 버린 생활방식을 원래로 되돌리는 데 10일이 넘게 걸렸다. 23년간 해 왔던 대로 돌아가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다행히 룸메이트 다니엘은 다정하고 착해서 부딪치는 일 없이 잘 지냈고 로라를 제외한 팀원들과도 무난하게 잘 어울렸다. 대학 다닐 때 학과 동기들과 서먹하게 지내서 걱정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었다. 신기하게 가발과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그랬다.

나는 욕실로 들어가 이를 닦다가 거울에 비친 나를 응시했다. 적갈색 가발은 답답하게 이마 밑으로 내려왔고 촌스러운 뿔테 안경은 얼굴의 반을 가려서 내 눈에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뉴욕에서 잘 살고 있을 아들이 변장한 모습으로 도망 다니는 걸 알게 되면 엄마는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정우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박래현이 엄마와 해준에게 무슨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서 조용하게 1년만 버티면 엄마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되새겼다. 어학원 생활에 익숙해지고 매일이 순조롭게 흘러가자 엄마가 더 보고 싶었다.

“씨발, 박래현 이 개새끼야!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그사이에 윤해준과 박수현이 끼어 있지만 나를 여기까지 몰아낸 건 박래현이었다. 나는 칫솔을 입에 물고서 티 목둘레를 아래로 당겨 빗장뼈 부근을 확인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박래현이 남긴 표식들은 본래 피부색에 밀려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낮에는 박래현과 보냈던 3개월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밤이 되면 박래현과 박래현 품이 그리워 잠을 설칠 때가 있었다. 그에게 각인해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현상이었다. 그런 날은 새벽까지 잠을 못 이루고 몸을 뒤치다가 아침을 건너뛰고 1교시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 외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동료들과 수다를 떨며 박래현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간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하루에 단어 100개가 기본인데 나는 150개씩 외워 50개는 혼자서 시험을 봤다. 작은 틈이 생기면 그사이를 아픈 과거가 파고들기 때문에 내 몸을 혹사해야 했다.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고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르면서 모두 잠든 밤에도 혼자 깨어 공부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2주 만에 토익 점수가 껑충 뛰어올랐다. 어제 레벨 테스트를 마치고 부매니저는 팀원들 앞에서 입이 마르도록 나를 칭찬했다.

각인한 사람을 떠나서도 나 같은 사람은 꾸역꾸역 살고 있는데 박수현은 죽음을 선택했다. 그는 윤해준 보란 듯이 살아남아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다. 죽음을 생각했을 때 무작정 형한테 날아갔으면 모두에게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욕실에서 나와 책상 앞에 앉은 나는 딴생각이 끼어들지 않게 일주일간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단어를 외웠다. 쉬는 시간 없이 내리 네 시간을 집중했더니 졸음이 몰려와 침대에 누웠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아침 먹은 게 소화가 안 돼서 속이 더부룩했다. 매점 가기도 귀찮아서 점심을 건너뛰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박래현에게서 벗어난 지 벌써 13일이 지났다. 시간은 느릿느릿 기어가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면 끝이 아득해서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흘러 있었다. 박래현이 뭘 하고 있는지 인터넷으로 소식 몇 줄은 찾아볼 수 있겠지만 박래현 소식을 접하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게 뻔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찾고 있을까, 아니면 나를 포기했을까.

이성을 갖고 판단해 보면 자신이 계획했던 일들이 우습게 보일 것이다. 동생을 죽인 사람에게 복수한답시고 그가 벌인 행각은 그에게도 고통을 주었다. 동생 아이를 가져야 할 오메가에게 덜컥 자신의 아이를 임신시켰고, 아이에게 정을 주었더니 아이는 유산되어 버렸다. 이제 복수 대상마저 사라져서 그는 돈과 시간과 인력을 쓸데없는 곳에 낭비한 꼴이 되었다. 지금쯤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후회하면서 그는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게 잘 굴러가는데 왜 마음은 갈수록 허전해지는 걸까.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서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박래현이 떠올랐다. 바싹 마른 나뭇잎 색을 띤 눈동자가 가을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상상 속에서 박래현은 떡 벌어진 어깨가 강조되는 버건디색 니트에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서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물고 있었다.

‘윤준영, 사랑해.’

박래현은 첫 고백 이후로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진 않았다. 그날 나를 짓누르던 고백의 중압감이 떠올라 사고의 방향을 틀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벌써 박래현에게 안기고 싶어서 몸에 열이 올랐다. 육감적인 입술이, 뜨거운 손길이, 내 안을 파고들던 성기가 그리웠다. 혓바닥이 구멍 안을 파고들어 깊게 쓸어 올리는 감각에 나는 움찔 허리를 떨었다. 박래현과 떨어져 있으면서 어찌 된 일인지 나쁜 기억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좋았던 기억들은 더 미화되어 부풀어 올랐다. 나는 왜곡된 기억을 바로 잡으려고 박래현이 내게 저질렀던 만행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랜디, 안에 있어요?]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철컥철컥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

[로델입니다.]

내가 문을 열어 주자 김경준이 들어와서 두꺼운 책 여러 권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는 방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다니엘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뻘쭘하게 서 있기가 그래서 나도 내 의자에 앉았다.

[주문한 책이 와서 갖다 주러 왔어요.]

[고맙습니다. 도착했다고 알려 줬으면 제가 가지러 가는 건데….]

[5층 학생들 전부 시내 나갔는데 왜 혼자서 청승을 떨고 있어요? 주말엔 바람을 쐐야 공부가 잘돼요.]

[피곤해서 쉬고 싶어요.]

[혹시 나 기다렸어요?]

“아니요! 제가 왜 대표님을 기다려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한국말에 나는 손바닥으로 입술을 때렸다. 김경준은 피식 웃으며 벌금을 내라는 의미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난주에 세부에 가서 수상 스포츠를 즐기고 온 탓에 남자는 더 거뭇거뭇해졌다. 그때 같이 가자는 제안을 거절한 뒤로 김경준은 내게 보였던 은근한 관심을 거둬들였다. 성격이 활달해서 주변에 사람이 끓을 타입이라 굳이 넘어오지 않는 사람에게 정성을 기울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랑 나가서 저녁 먹을까요? 공원 근처에 분위기 좋은 곳이 있어요.”

분위기가 자유롭다 보니 여기 사람들은 상대가 조금만 마음에 들어도 넘어오나 안 넘어오나 한 번씩 찔러 보곤 했다. 알파가 내게 관심을 보이자 박래현 말고 다른 알파를 사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유일하게 몸을 섞은 대상이 박래현이어서 끌린 거라면 다른 알파와도 섹스를 통해 비슷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테고 몸을 섞다 보면 정이 들어 과거를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반응을 보면 박래현에게 각인한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김경준이 내게 농담했을 수도 있고, 페로몬을 풀었더라도 그날 내가 지쳐 있어서 반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진실을 확인해 보려고 나는 김경준을 상대로 페로몬을 조금씩 풀어 보았다. 이 남자는 내게 페로몬을 푼 전적이 있어서 실험대상으로 적절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알파에게 페로몬을 푸는 건 위험한 행동이지만 호기심이 앞섰다.

“밥은 언제 사 줄 겁니까? 약속은 지켜야지.”

“조만간 사겠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페로몬 강도를 높여 나갔다. 레몬 향이 방 안에 진동하면서 긴장감이 높아졌다. 내 페로몬에 반응을 보일 시간이 지났는데도 김경준이 전혀 동요하지 않아서 나는 서서히 페로몬을 거둬들였다. 불행하게도 박래현에게 각인된 게 확실했다. 박래현은 혼자 잘 살고 있을 텐데 나 혼자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자빠졌다. 그는 헤어져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데 도가 튼 인간이었다.

“선생들 사이에서 랜디 씨 칭찬이 자자해요. 우리 어학원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한다면서요.”

“돈 들인 만큼 뽕을 뽑고 갈 생각입니다. 전 다른 학생들보다 돈을 더 냈잖아요.”

“그 돈 돌려줄 테니까 랜디, 여기서 계속 지내는 건 어때요? 지금 마닐라에 어학원을 하나 더 세울 생각인데, 나랑 같이 일합시다. 당신처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절 언제 봤다고 그런 평가를 하세요?”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합니다. 어때요?”

확답을 듣고 싶다는 듯 김경준이 내 의자 손잡이를 잡아 의자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선이 가까워졌다.

“조건은 괜찮게 해 주겠습니다. 내가 스토커로부터 준영 씨 지켜 줄 거고.”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어려운 일을 결정할 땐 직관에 맡기는 것도 꽤 좋은 방법입니다.”

“참고할게요.”

“그런데 나 만날 땐 이 둔해 보이는 안경은 벗는 게 어때요? 나까지 속일 필욘 없잖습니까.”

김경준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발과 무거운 안경을 벗겨 책상에 내려놓았다.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얼굴이 점점 가까워져서 나는 두툼한 어깨를 잡아 그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김경준은 벌떡 일어나 한 손으로 내 어깨를 틀어쥐고서 다른 손으로 턱을 잡아 얼굴을 고정했다.

“랜디, 키스해도 돼요?”

“아뇨. 그랬다간 여기 대표에게 성추행당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겁니다.”

입술을 겹치려던 김경준은 동작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우리나라 사람이 주 고객이기 때문에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건 싫을 것이다. 김경준은 내게서 손을 떼고 한발 물러났다.

[이럴 땐 정말 단호하네요. 랜디, 내가 지나치게 서둘렀어요. 미안해요.]

“책 갖다 줘서 고마워요. 이만 나가 주세요.”

이런 거절에 익숙하지 않은 듯 김경준이 볼을 벌겋게 물들이며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남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김경준이 발신인을 확인했다.

[네, 바기오 베스트 어학원 대표 김경준입니다.]

상대와 몇 마디 주고받던 김경준이 정우 전화라면서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 핸드폰에는 정우 전화번호가 아닌 다른 사람 번호가 찍혀 있었다.

“여보세요, 정우야! 너 김정우 맞아?”

- 오냐, 네 형 맞다. 그동안 잘 지냈냐?

“씨발아. 네가 언제부터 내 형이었냐?”

반가운 목소리에 가슴이 떨리면서 정우와 엄마가 보고 싶어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이별을 해가며 여기 숨어 지내는 내 처지가 어느 때보다 비참하고 서럽게 느껴졌다.

- 야, 너 살 만한가 보다. 아주 목소리가 팔팔하네. 박래현 떠나니까 그렇게 좋냐?

울먹이는 나를 달래려고 정우는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나를 추궁했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서 물러진 마음을 굳게 다졌다.

“새끼야, 나 존나 피 터지게 공부만 했다. 야, 엄마 소식 좀 전해 봐. 궁금해 죽겠다.”

- 어머니 엊그제 봤는데 건강하셔. 해준이가 네 몫까지 아주 열심히 보살피고 있더라.

“다행이다, 엄마 걱정 제일 많이 했는데.”

엄마가 잘 계신다는 소식에 목에 박힌 가시가 빠져나간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내 부탁을 들어준 건지 박래현이 엄마를 건드리지 않아서 고맙기까지 했다.

- 다행? 나는 너 때문에 뒈지겠다, 지금.

“왜? 무슨 일 있어?”

- 박래현이 아무래도 내 뒤 털고 있나 봐. 사람을 붙였는지 맨날 누가 따라다니는 거 같아. 지금 도서관에서 후배 핸드폰 빌려서 몰래 전화하고 있어.

“야, 전화 요금 나오면 네가 내줘. 그래야 다음에 또 빌려 쓰지.”

- 걱정하지 마. 근데 박래현 완전 사이코야. 너 진짜 꼭꼭 숨어 있어.

“왜 그래? 형이 너한테 해코지라도 했어?”

- 너한테 이 말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정우 입에서 불길한 말이 나올 것 같아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실은 저번 주 일요일에 그 남자가 날 찾아왔어.

저번주 일요일이면 박래현이 미국에서 귀국한 날이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만사 젖혀 두고 정우부터 만나러 간 것 같았다.

- 너 필리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고 닦달을 하더라. 그날 널 공항에서 배웅한 건 맞지만 너 필리핀에 도착한 후에 연락이 끊겼다고 했어.

“그래서?”

- 말 안 해 줘도 자기가 직접 찾는다더라. 근데 만일 그사이에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목숨 부지하기 힘들 거라고 날 협박했어.

“그거 질 낮은 농담이야.”

- 농담 같지 않았어. 그 남자 눈이 무서워서 오줌 지릴 뻔했잖아. 넌 어떻게 그런 남자랑 살 맞대고 살았냐.

정우가 말하는 눈빛을 알고 있었다. 박래현 눈빛은 가끔 사람 눈알을 도려낼 것처럼 날이 서고 무서울 때가 있었다. 최근에는 부드러운 표정을 주로 봤지만 처음 박래현을 만났을 때 봤던 서늘한 눈빛은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못 살고 도망쳤잖아. 그 말 말고 또 뭐라고 씨불이던?”

- 너한테 이렇게 전하래. 이번 주 일요일까지 전화 안 주면 너한테 했던 짓 해준이한테 그대로 할 거라고. 씨발, 미친 자식 아니냐? 내가 몰래 녹음해 놨는데 어떡하지? 경찰에 신고할까?

“해준이는 뭐래? 박래현한테 이상한 낌새 보이면 너한테 연락하라고 했거든.”

- 해준이랑 통화했는데 아직 접근 안 했다더라. 어떡해? 신고해, 말아?

“아, 박래현 확 죽여 버리고 싶네. 일단 가만 내버려 둬. 내일 지나고 판단할 테니까.”

이성을 잃게 되면 박래현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어서 내 말엔 힘이 실리지 않았다. 수틀리면 내게 그랬듯 해준에게 파자마 윗도리만 입힌 채 그를 개 취급하며 함부로 대할 인간이었다. 나를 감쪽같이 속인 줄 알았는데 되레 속아 넘어가서 나랑 똑같이 생긴 해준을 더 강도 높게 괴롭힐 수도 있다. 페로몬 향이 비슷하니 밤에 침대로 끌고 가서… 끔찍한 상상에 눈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무서운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씨발, 그랬다가는 박래현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 지금 사람 풀어서 필리핀 뒤지는 거 같아. 아마 30일 지나서 너 비자 연장할 날만 노리고 있을 거야. 비자 연장은 안 하는 게 좋겠어.

“알았어. 불법 체류는 각오한 일이야.”

박래현이 심어 놓은 사람들이 내 사진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가발과 안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준영아, 경준 형이 잘해 주니? 불편한 점은 없고?

“어, 난 잘 지내.”

- 윤준영, 지금 네가 비빌 언덕은 경준 형밖에 없으니까 형 말 잘 들어. 그리고 위험하니까 절대 혼자 밖에 돌아다니지 마. 거긴 총기 소지도 자유롭다면서.

“뭐 이 나라만 총기 소지하냐? 밤늦게 외진 곳만 안 가면 안전해.”

- 야, 너 필리핀 간 뒤로 내가 필리핀 뉴스는 다 챙겨 본다. 오가다 만난 한국 사람들 조심하고 존나 겁 없이 나다니지 마. 재수 없게 납치라도 당하면 무슨 일 벌어지는지 내가 말 안 해도 알지?

“알았어, 알았다고. 박래현이 다른 말은 안 했어?”

- 네가 스스로 기어들어 오면 없던 일로 조용히 덮어 준다더라.

제발 돌아와 달라고 사정해도 안 돌아갈 사람을 협박하다니 박래현은 참 한결같았다. 그런 성격에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고 협상은 어떻게 해 나가는지 의문이었다.

“정우야, 미안하다. 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나 같은 새끼를 친구로 뒀냐.”

- 안 들어올 거면, 여긴 신경 쓰지 말고 들키지 않게 잘 숨어 있어. 저러다 제풀에 지쳐 관두겠지, 뭐.

“너 취업 준비는 잘돼 가?”

- 이력서 몇 군데 내놓고 결과 기다리고 있어. 근데 취업난이 심각해서 별 기대는 안 된다. 경준 형한테 거기 일자리 있나 물어봐서 나도 그리로 갈까?

“그래도 우리나라가 제일 좋아. 거기서 자리 잡아.”

- 후, 알았어. 이거 빌린 전화라 끊어야겠다. 씩씩하게 잘 지내라.

“내일 해준이한테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고 아무 일 안 생기면 전화하지 마. 고맙다.”

통화 종료를 누르는 손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정우가 걱정할까 봐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지만 박래현이 전한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도려내고 있었다. 더럽고 치졸하게 윤해준이라는 카드까지 만지작거릴 줄은 몰랐다. 아무리 증오가 깊어도 나와 보낸 시간이 있는데 그 남자는 예의라곤 좆도 없는 인간 말종이었다. 그런 인간에게 각인해서 못 잊는 내가 한심하다 못해 살 가치조차 없는 인간으로 느껴졌다.

[랜디, 괜찮아요?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아, 저 머리가 아파서 혼자 쉬고 싶어요.”

[아까 일은 미안해요. 혹시 나한테 부탁할 일 있으면 부담 갖지 말고 하세요.]

“고맙습니다.”

김경준과 틀어지면 아쉬운 사람은 나였다. 핸드폰을 받아 든 김경준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다가 자신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듯 방을 나갔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잠시 그대로 있었다. 사고가 정지된 머릿속에선 의미 없는 생각들이 토막 난 채로 둥둥 떠다녔다. 나는 머리맡에서 거북 한 마리를 집어 들어 코에 대고 숨을 들이켰다. 상큼한 허브 향에 헝클어진 머릿속이 조금씩 정돈되었다. 기한은 내일까지라고 했으니 박래현이 아직 해준에게 손대진 않았을 것이다.

박래현은 나를 어디까지 망가뜨려야 만족할까. 아이를 잃었는데도 그 알량한 복수심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한가 보다. 윤해준마저 인질로 잡아 나를 불러들이려는 걸 보니 남자의 집착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마음이 약해진 순간 초롱이를 떠올렸다. 여기서 내가 굽히고 들어가면 원치 않는 임신을 해야 하고 불행한 아이를 낳아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를 희생하는 과오를 또 되풀이하고 싶진 않았다. 일단 내일까지 시간이 있으니 버틸 때까지는 버텨 보기로 했다.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어서 기숙사 밖으로 달려나갔다. 도시와 꽤 떨어진, 깊은 산을 등지고 선 기숙사는 맑은 공기와 솔향기에 둘러싸여 있어서 심호흡만 해도 체증이 내려갔다. 나는 야트막한 산 아래쪽을 달리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는 달릴 수 없을 무렵에야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소슬한 바람에 이마에 맺힌 땀이 금세 차갑게 식었다. 차라리 팀원들과 시내에 나가서 아무 생각 없이 놀다가 들어올 걸 그랬다. 온종일 이따위 생각으로 괴로워하느니 맛있는 저녁에 소맥을 말아먹고 클럽에 가서 신나게 몸을 흔드는 게 더 생산적인 일로 여겨졌다.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나갈까? 시내에 나가서 다니엘에게 전화하면 함께 어울리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박래현이 뿌린 사람들이 굶주린 눈을 빛내며 내가 밖으로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나는 벤치에 누워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짙푸른 하늘은 청신하고 어여뻤다. 하늘을 향해 왼손을 뻗고서 약지에 낀 반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기숙사 안에 귀중품을 두지 말라는 충고 때문에 끼고 다녔는데 반지는 다른 임무를 수행했다. 특이하게 생긴 반지는 눈에 띄어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내가 애인이 있다는 게 정설로 굳어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철벽을 치는 나와 달리 박래현은 윤해준을 안을 수 있을까? 나는 박래현에게 각인해 괴로운데 박래현이 내가 아닌 다른 오메가에게 발정한다면 억울해서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차분해지면서 박래현을 믿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내 예감에 따르면 박래현은 당분간 나 말고 다른 오메가는 안지 않을 것이다.

[야, 너 누구냐? 이번 주엔 신입생 안 들어 올 텐데….]

반갑지 않은 인기척에 나는 누운 자세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김경준이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던 벤자민이었다. 늘 무리와 어울려 다니더니 오늘은 웬일로 혼자였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그는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너 누구냐니까? 좀도둑이냐?]

[넌 너랑 같은 팀 팀원도 못 알아보냐?]

대답한 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김경준이 안경을 벗겼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혹시 랜디? 야, 너 안경 벗으니까 완전 딴사람 됐다. 이 얼굴을 왜 거지 같은 안경이랑 가발로 가리고 다녀?]

[가발은 내 취향이야. 그리고 안경을 써야 앞이 보여.]

얼른 기숙사로 들어가 가발을 쓸 생각에 나는 눈이 잘 안 보이는 척 미간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벤자민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먼저 들어갈게. 할 일이 있어서.]

[랜디, 그러지 말고 나랑 시내 나가자. 내가 굉장히 재밌는 일 시켜 줄게.]

[그건 네 친구들이랑 해.]

[어제 술 마시고 늦잠 잤더니 새끼들이 나만 두고 다 나갔더라. 이것들 만나기만 해 봐.]

[…….]

[보아하니 꽤 있는 집 자식 같은데, 너도 나랑 비슷한 이유로 여기 와 있지? 너 어느 학교 다녀?]

벤자민은 피어싱 자국이 남은 내 귓바퀴를 잡고서 음침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 손길이 소름 돋게 싫어서 나는 무의식중에 벤자민 손을 거칠게 쳐 냈다. 흐물흐물 웃음을 띠고 있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갔다.

[씨발 구멍을 몇 개를 뚫은 거야? 나도 이렇겐 안 뚫었어. 솔직하게 말해 봐, 너 좀 놀았지?]

벤자민은 내 어깨를 눌러서 일어서려는 나를 벤치에 주저앉혔다. 재미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녀석의 눈이 야비하게 반짝였다. 덥수룩한 가발과 커다란 안경으로 얼굴을 가려야 하는 내게 호기심이 생긴 듯했다.

[한 대 얻어터져서 울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이거 놔라.]

[미친 새끼,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그래,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나는 벤자민의 턱을 한 손으로 잡아서 얼굴을 뒤로 꺾어 가볍게 밀어냈다. 그다지 힘준 것도 아닌데 벤자민은 낙엽처럼 팔랑팔랑 벤치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따라 다니는 덩치들이 없으니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는 비리비리한 새끼였다. 몇 대 쥐어 패 줄까 고민하다가 사건이 커져 봐야 나만 불리해져서 미련을 접고 기숙사로 향했다. 주말에 시내와 클럽을 쓸고 다니는 벤자민이 내 맨얼굴을 봐서 불안했다.

***

그룹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평소처럼 뒤뜰에서 커피를 마신 뒤 학원 로비에 들어선 나는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절세 미남이 경찰과 경호원을 데리고 어학원에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수강생들의 술렁임에 나는 상담실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많은 수강생이 상담실 유리창에 매달려 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 틈에 끼어서 상담실 안을 슬그머니 들여다보았다.

필리핀 경찰복을 입은 남자 둘과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 둘을 대동하고서 의자에 삐딱한 자세로 앉아 서류를 한 장씩 살피고 있는 남자는 놀랍게도 박래현이었다. 그의 옆모습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덜컹 바닥으로 곤두박이쳤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썹이나 각진 턱선을 감상할 경황도 없이 쿵쿵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도망가야 하는데 바닥에 뿌리내린 나무처럼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윤준영, 어서 피해, 달아나! 왼발을 먼저 내밀고 그다음에 오른발을 내밀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어! 걷는 방법을 잊어버린 내게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안경알이 습기로 부옇게 변했다. 겨우 다리가 움직여서 서둘러 자리를 뜨려던 나는 그만 걸음이 꼬여 유리창에 매달려 있던 학생들과 와당탕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안경이 벗겨지고 가발이 흔들렸다. 나는 가발을 제 자리에 맞춘 뒤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찾아 썼다.

[9월 27일쯤에 들어온 학생 중에 혹시 이렇게 생긴 학생 봤습니까? 한국 이름은 윤준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왜 찾아요?]

[실종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한국에서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어요.]

[9월 27일에 랜디가 들어오긴 했는데….]

[글쎄요, 이렇게 생긴 학생은 못 봤어요.]

서류 검사를 다 끝냈는지 필리핀 경찰과 경호원들이 내 사진을 들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벤자민이 로비로 들어오는 걸 발견한 순간 눈앞이 암담해졌다. 벤자민은 며칠 전에 내 맨얼굴을 본 유일한 학생이었다. 나는 벤자민의 팔을 잡아서 잽싸게 그를 끌고 매점으로 향했다.

[벤자민, 이번 주말에 나도 클럽에 가 보고 싶어.]

[너 갑자기 뭐냐. 언젠 사람 취급도 안 하더니.]

[생각이 바뀌었어.]

벤자민 귀에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박래현이라면 내 뒷모습만 보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날카로운 창이 뒤통수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아서 벤자민 팔을 쥔 손에 땀이 흥건했다. 나는 매점에서 캔커피 두 개를 사서 벤자민에게 한 개를 던졌다.

[드디어 나랑 어울릴 생각이 든 거냐? 잘 생각했어.]

[클럽에 가면 주로 뭐 하면서 노는데?]

시간을 끌기 위해 관심도 없는 주제를 꺼내 들었다. 벤자민은 신이 나서 자신의 무용담을 펼쳤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스치듯 보았던 알파의 얼굴만 떠올랐다. 박래현은 갖고 놀던 장난감이 사라져서 무료하고 나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생에서 즐거운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얼굴엔 신경질이 가득했고 트렌치코트에 둘러싸인 몸은 메말라서 뼈만 남았다. 박래현을 생각하자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몸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숨어서 얼굴을 훔쳐보고 싶은 본능을 꾹 누르며 나는 매점 유리창을 통해 박래현 일행이 어학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랜디, 이번 주에 나랑 같이 가는 거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번 가 보는 게 더 나아.]

[커피 다 마셨으면 들어가자. 나 수업 있어.]

[이번 주에 클럽 갈 거냐고.]

[네 얘기 들어 보니까 별로 구미가 안 당겨. 좀 더 생각해 볼게.]

[씨발 너 뭐냐. 나 갖고 노냐?]

[아니. 나 먼저 간다.]

박래현이 기어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충격이 커서 벤자민을 신경 쓸 기분이 아니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용케 내 방까지 들어온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호흡을 골랐다.

박래현이 확인한 명단에는 내가 없지만 박래현에게 곧 잡힐 것 같아서 무기력해졌다. 침대에 누워 베개를 끌어안고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수업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박래현이 다시 돌아와서 내 목덜미를 낚아챌 것만 같아서였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내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미동 없이 숨을 죽였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내 방은 5층이라 뛰어내렸다간 어디 한군데 부러져서 한국으로 끌려갈 것이다.

“랜디, 안심하세요. 그 사람 갔습니다.”

김경준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이불을 내렸다. 습기에 차서 흐릿해진 안경알 너머로 웃고 있는 김경준 얼굴이 보였다.

“대표님, 저 아무래도 다른 나라로 건너가야겠어요. 저한테 위조 여권 좀 만들어 줘요. 제가 돈은 드릴게요.”

“안전한 곳을 두고 왜 다른 데로 가려고 합니까? 저 남자는 여기에 당신이 없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이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을까요?”

김경준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불이 붙지 않는 것처럼 박래현은 이곳에 내가 없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또 여길 찾지는 않을 것이다.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조만간 맛있는 점심 사 드릴게요.”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랜디 씨 스토커 꽤 대단한 사람인가 봐요. 필리핀 경찰을 움직이려면 돈 좀 들었을 텐데.”

“그러게요.”

“돈 많고 얼굴도 잘생겼는데 도망 온 걸 보면, 성격이 개차반인가 봅니다?”

“네.”

“놀랐을 테니까 오후엔 수업 빼고 쉬어도 좋아요.”

“이번 시간만 빠지고 4시 수업은 들어갈게요.”

“그래요. 나는 가서 나머지 일 처리 해야겠어요.”

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거북 인형 한 마리를 끌어당겨 코에 대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필리핀으로 도망 온 지 3주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박래현은 내가 바기오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걸까, 아니면 촉으로 여길 뒤지고 있는 걸까. 사람을 시켜서 잡으러 다닐 줄 알았는데 박래현은 직접 사냥에 나서 사냥감과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일요일에 귀국했을 테니 그는 2주째 회사도 안 나가고 미친 사람처럼 필리핀을 들쑤시고 다니는 듯했다. 몰골을 보아하니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나를 찾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얼굴이 야위어서 가파르게 깎인 콧대와 뼈만 남아 관절이 도드라진 손가락이 떠올랐다. 두근거리는 가슴의 울림이 점점 거세져서 귓가에 쿵쿵 맥 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오랜만에 조우한 알파에게 동요하고 있었다. 치자꽃 향이 맡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박래현이 나타나서 앙상한 손으로 내 목을 조르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입술을 피했지만 박래현 힘을 당해 낼 순 없었다. 어느새 눕혀져 침대에 팔다리를 묶인 채로 나를 타고 오르는 알파를 올려다보았다. 일순 호흡이 불안정해지고 기진맥진한 몸이 땀에 젖었다. 각인한 알파에게서 흘러나오는 치자꽃 향기가 온통 나를 뒤덮어 생각을 마비시켰다.

***

박래현이 사라진 뒤에 매일 그에게 잡히는 악몽에 시달렸다. 악몽 속에서 그는 엄마와 해준을 인질로 삼아 나를 어르고 협박하며 내가 무릎 꿇길 종용했다. 때로는 어학원에 들이닥친 경찰과 개를 피해서 한밤중에 산속으로 달아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바위나 나뭇가지에 걸려 넘어지면 기어서라도 박래현으로부터 도망갔다. 박래현은 내가 지칠 때까지 도망가게 했다가 기력이 다 빠질 무렵에 커다란 수갑을 들고 나타났다.

‘윤준영, 왜 쓸데없는 짓에 이렇게 열심이지? 넌 나한테 벗어날 수 없는데.’

‘씨발, 꺼져!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박래현은 악다구니에도 개의치 않고 가소로운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내 머리채를 잡아 강제로 무릎을 꿇게 했다. 내가 흘린 피로 흥건하게 젖은 그의 맨발을 보고 있노라면 철컥 소리를 내며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곤 했다. 강제로 다리를 잡아 벌리는 그를 피해 몸부림치다가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잠에서 깨어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어떻게 된 게 도망 오기 전이나 도망 온 후나 내 삶엔 변화가 없었다.

지난 일주일간 정신이 흐트러진 여파는 다른 곳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단어 시험과 패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5일 연속 벌금을 내야 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먹은 음식은 소화가 안 돼서 반은 토했다.

몸은 박래현에게 각인한 상태고 머리는 박래현이 어떻게 행동할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씨발, 이게 웬 지랄인지 모르겠다. 몸과 마음이 다 휘둘릴 거면 뭐 하러 도망 다니는지 회의가 들었다.

나는 박래현과 멀어지고 싶어서 김경준에게 위조 여권을 부탁했다. 박래현이 필리핀 경찰을 움직이고 있다면 내 여권으로 출국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착실해진 김경준은 불법은 안 된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업을 확장한다더니 내가 필요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내 처지를 이용해 다른 걸 요구하려는 것 같기도 해서 아리송했다.

[랜디, 나 미치겠어. 하필 그 자식이랑 같은 방을 써야 한다니.]

[그러게. 집에 돈도 많다면서 왜 1인실 안 쓰고 2인실을 쓰지?]

[몰라, 이상한 새끼야.]

4주에 한 번씩 기숙사 방과 룸메이트가 바뀌는데 나는 신입생과 룸메이트가 되었고 다니엘은 벤자민과 룸메이트가 되었다. 다니엘은 마지막 날까지 나와 헤어지기 싫다면서 징징댔다. 다니엘이 무던하고 얌전해서 생활하기가 편했는데 새 룸메이트를 만나 맞춰 갈 생각에 나도 심란해졌다.

나는 짐을 세 개로 분리한 다음 책을 한 아름 안고서 새로 배정된 방으로 갔다. 열려 있는 문을 발로 밀고 들어선 순간 내 품에 산더미처럼 안겨 있던 책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친절한 룸메이트가 책을 받아서 내 것으로 추정되는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 고마워.]

“안녕하세요, 선배님. 전 오승현입니다. 나이는 스물일곱이고, IELTS 과정 준비하려고 왔습니다.”

“영어 이름은 뭐예요? 여기선 영어 이름 써야 해요.”

“해밀튼이라고 지었습니다.”

“어학원에선 무조건 영어를 써야 해요. 모국어 하다가 걸리면 대화한 상대까지 벌금을 내야 하니까 조심해요. 저는 랜디라고 부르면 됩니다. 잘 부탁합니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리엔테이션 받을 때 한국에 두고 온 애인이라도 생각했는지 남자는 주의사항을 처음 듣는 표정이었다. 이 어리숙한 남자랑 엮이면 귀찮아지리라는 예감에 나는 한 발 뒤로 뺐다.

[지내다가 불편한 점 있으면 말해.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와줄게.]

“네, 감사합니다!”

해밀튼은 유도 선수라고 해도 좋을 만큼 덩치가 크고 몸이 좋았다. 키가 190은 넘어 보였고 운동복으로 둘러싸인 몸은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다. 야구 글러브같이 생긴 주먹에 한 대 맞으면 바로 저승행 예약이었다. 그래도 덩치가 큰데 비해 얼굴이 순하고 귀엽게 생겨서 위화감은 덜 느껴졌다.

“저기… 짐 옮기실 거 있으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별로 많지 않아서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제가 힘이 남아돌아서 그렇습니다.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 시키셔도 돼요.”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공부하려면 힘 아끼세요.”

“네, 그럼 저 먼저 씻겠습니다.”

거대한 몸이 욕실로 사라지고 나서 나는 나머지 짐을 옮겼다. 작고 날씬한 다니엘과는 달리 새 룸메이트는 몸집이 존나 커서 존재만으로 기숙사 방이 꽉 차 보였다. 나는 해밀튼을 성격은 무던한데 눈치가 없어서 같이 다니기엔 부담스러운 사람으로 분류하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방을 같이 쓰지만 나와 반이 달라서 자는 시간 외에 마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처음 내 우려와 달리 해밀튼은 빠릿빠릿하고 온순하고 착했다. 내가 네 살 어린데도 어학원 선배라고 깍듯하게 선배 대접을 했고 밥 먹을 때나 간식 먹을 때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몰래 사탕이나 초콜릿을 건네는 귀여운 구석도 있어서 나는 선배랍시고 어학원 생활에 필요한 팁들을 넌지시 알려 주었다. 박래현이 나타났을 때만 해도 금방 한국으로 끌려갈 줄 알았는데 평화로운 어학원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점심을 먹고 다니엘과 기숙사 뒷마당으로 갔다. 우기가 끝난 바기오는 연일 새파랗고 말끔한 하늘을 자랑했다. 배드민턴 채로 찌르면 파란 물이 후드득 떨어질 것처럼 짙은 색이어서 답답할 때면 하늘을 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소나무 향을 실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모처럼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뒷마당 벤치에서는 학생들이 햇볕을 쬐며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오늘은 해밀튼이 계속 안 보이네?]

[4교시 개인 수업 과제를 못 해서 그거 준비하는 거 같더라. 해밀튼은 언어 쪽으론 영 재능이 없어 보여.]

[야, 사람들이 너랑 해밀튼 보고 뭐라는 줄 알아?]

[왜, 뭐라고 수군거리는데?]

[왕자와 호위 무사래. 그 녀석 운동선수같이 생겨서 네 뒤만 졸졸 따라다니잖아. 로라가 해밀튼 무서워서 너랑 얘기도 못 하겠대. 너한테 다가가면 해밀튼이 독사 같은 눈으로 자길 째려본다더라.]

[해밀튼이 로라를 왜 째려봐? 성격 완전 순한데….]

그녀에게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해밀튼과 룸메이트가 된 이후로 로라는 내게 접근하지 않았다.

해밀튼이 내게 연애 감정을 느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매일 밤 한국에 있는 여자 친구랑 문자를 주고받으며 영어보다는 한국어 실력을 늘리는 데 매진하고 있었다. 영어가 어려운 해밀튼은 한국말을 써도 눈감아 주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서 나를 따르는 거였다. 비싼 학원비 지불하며 여기까지 와서 왜 공부를 안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부류 중 하나였다.

[참, 벤자민은 어때? 너 걔랑 같은 방 쓴다고 세상 무너진 표정이었잖아.]

벤자민은 돈을 아끼지 않고 펑펑 써서 동기들, 특히 남자 동기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주말에 밖에 나갈 땐 다들 경쟁하듯 벤자민에게 붙으려고 안달이었다. 내가 어학원 대표면 어학원 물을 흐리고 학습 분위기를 망치는 벤자민을 내쫓을 텐데 사업하는 입장에선 또 다른 모양이었다. 아마 김경준은 그 새끼를 입학시킨 대가로 충분한 커미션을 받았을 것이다.

[저기… 필리핀 여자들 소개해 준다고 주말에 같이 클럽 가자더라. 자기가 돈 댈 테니까 너도 데려오래.]

[야, 너 미쳤어? 좆질 하러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왔냐? 얌전히 혼자 딸이나 쳐.]

나는 배드민턴 채 끝으로 다니엘의 아랫배를 쿡쿡 찔렀다. 코피노 문제의 심각성을 여기 와서 알게 된 나는 필리핀 유학을 다녀온 남자는 결혼하기 전에 뒷조사부터 하라고 방송에서 인터뷰하고 싶어졌다. 다니엘처럼 순진하게 생긴 남자도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순간이었다. 다니엘은 홍시처럼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갈 마음 없었어.]

[잘 생각했어.]

[랜디, 귀국해서도 나랑 계속 친구로 지낼래?]

[그러자. 다니엘, 오늘은 2승 먼저 따내는 사람한테 아이스크림 사 주기 어때?]

[오늘은 기필코 내가 얻어먹는다!]

다니엘과 나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서서 배드민턴 공을 주고받았다. 내가 이 학원 와서 가장 잘한 일이 중고장터에서 배드민턴 채와 공을 산 것이었다. 높이 솟아올랐다 툭 떨어지는 공을 열심히 쫓아다니다 보면 나를 좀먹는 잡다한 걱정들을 떨쳐 내고 투지를 다질 수 있어서 좋았다.

오후에 개별 수업을 마칠 무렵 팀 매니저가 나를 호출했다. 지난주에 형편없었던 내게 팀 매니저는 이유를 물었고 내가 합당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그녀는 부모님이 힘들게 번 피 같은 돈을 낭비하지 말라며 따끔하게 충고했다.

나침반이 고장 나 풍랑 속에서 헤매던 나는 공부만 하자던 원래의 목표를 되새겼다. 오로지 배드민턴공에 집중했던 것처럼 내 목표를 향해 열심히 공부하기로 했다.

저녁 특별 수업까지 마치고서 그룹 사람들과 매점으로 향했다. 막 매점 입구에 들어서는데 멀리서 해밀튼이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게 보였다.

[랜디, 저기 네 호위 무사 달려온다.]

다니엘의 농담에 나만 빼고 전부 웃음을 터트렸다. 달려와 놓고도 숨이 차지 않은지 해밀튼은 차분한 얼굴로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한국 과자와 한국 라면으로 가득 찬 매점에 한국 학생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어서 여기가 한국인지 필리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오늘 간식은 내가 쏠게. 컵라면하고 과자 하나씩 골라 봐.]

[랜디는 공부도 잘하고 돈도 많아. 넌 부족한 게 뭐야?]

팀원들은 분에 넘치는 아부를 하며 컵라면과 과자를 골랐다. 계산을 마치고 컵라면에 물을 부어서 팀원들이 모인 테이블로 갔다. 3분을 못 기다리고 컵라면 뚜껑을 연 순간 평소 좋아하던 라면 냄새가 역하게 느껴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속이 홀랑 뒤집히며 구역질과 식은땀이 났다.

[랜디, 왜 그래? 속이 안 좋아?]

[어, 아무래도 저녁 먹은 게 체했나 봐. 나 먼저 올라갈게.]

[매니저님한테 말해서 약 받아다 줄까?]

다니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니 됐어. 쉬면 나아질 거야. 내건 네가 먹어.]

나는 컵라면을 해밀튼에게 넘겨주고 급하게 방으로 올라가 화장실부터 찾았다. 해밀튼이 뒤따라온 것을 보고 그 와중에 화장실 문을 걸어 잠갔다. 변기를 붙들고 저녁 먹은 걸 다 토해 냈다. 신물이 넘어올 때까지 토하고 났더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노래졌다. 밖에서 해밀튼이 화장실 문을 쿵쿵 두드렸다.

“랜디 씨, 괜찮아요? 저 들어가게 문 좀 열어 주세요.”

“아니 괜찮아요. 샤워할 테니까 들어오지 말아요.”

기진맥진해져서 욕실 바닥에 망연히 앉아 있다가 양치를 하고 얼굴과 손발만 대충 씻은 뒤 밖으로 나왔다. 해밀튼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불을 끈 다음 침대에 누워 어슴푸레한 어둠을 응시했다.

박래현을 본 뒤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위염이나 위궤양이 생긴 것 같았다. 두고 온 컵라면이 아깝다고 생각한 순간 가라앉은 속이 다시 울렁울렁 올라와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아까 다 토해서 쓰디쓴 물 말고는 넘어오는 게 없었다. 위장이 뽑힐 것처럼 아팠고 눈앞에서는 실지렁이 여러 마리가 기어 다녔다.

“씨발, 이러다 뒤져서 필리핀에 묻히는 거 아냐?”

내가 죽으면 유골은 한국에 안치해 달라는 유언을 남겨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는 땀에 젖은 이마를 수건에 닦고서 칫솔에 치약을 듬뿍 짜 올렸다. 입 안에 거품이 가득 일게 이를 닦으면서 나를 비참하게 만든 이에게 분노의 화살을 날렸다. 당장 박래현을 찾아가 담판을 짓고 싶은데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순 없었다.

입을 헹구고서 거울에 비친, 커다란 안경에 반쯤 가려진 창백한 얼굴을 응시했다. 시장바닥에 널브러진 생선 눈깔처럼 초점이라곤 맞지 않는 눈동자와 파리한 양 볼이 나 같지가 않았다. 생기가 빠져나간 얼굴이 보기 싫어서 욕실 문을 박차고 나가 침대에 누웠다.

오늘 공부한 내용을 복습하고 단어를 외워야 하는데 몸은 점점 침대 밑으로 가라앉았다. 울렁거리는 배를 손으로 문지르다가 유산하고 나서 한 번도 히트 사이클을 겪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신없이 사느라 잊어버렸는데 유산하고 벌써 50일이 넘게 지나 있었다. 알파에게 각인했더라도 발정기가 되면 몸에 증상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너무 조용하게 넘어가 버렸다. 혹시 다른 이유 때문인가? 이번 주 내내 몸이 나른하고 소화가 잘 안 되며 음식 냄새가 싫었는데 책에서 읽었던 임신 초기 증상과 비슷했다.

“미친… 이런 씨발!”

나는 머리칼을 아프게 쥐어뜯었다. 초롱이를 임신했을 때 입덧을 했으면 금방 알아차렸을 텐데 그땐 입덧이 없어서 그저 속이 안 좋은 거로만 여겼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절망에 휩싸여서 나는 혼잣말을 했다. 히트 사이클에 섹스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임신이 됐을까. 유산 후 주기가 흐트러져 히트 사이클이 일찍 찾아왔든지 박래현이 노팅해서 강제로 히트 사이클이 당겨졌든지, 내게 이유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내 배 속에 나도 모르는 새에 새로운 생명체가 자리 잡았다는 거였다. 박은수가 계산했던 식이면 나는 임신 8주나 9주에 접어든 셈이었다.

사지가 늘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라면 냄새를 맡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젓가락을 찾는 사람이 괜히 그 냄새가 역겨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임신이 확실한 것 같았다. 산 넘어 산이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끝없이 쌓였는데 거기에 아이라니, 기가 막혔다. 박래현에게 의심받든 말든 조용히 헤어질 걸 마지막이라며 존나 열심히 몸을 섞은 게 원인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이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제일 먼저 낙태가 떠올랐다. 필리핀에서는 피임과 낙태가 금기 사항이라 음지의 비위생적인 시설에서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야 낙태할 수 있다고 들었다. 돈도 돈이지만 여기서 목숨 내걸고 수술받느니 박래현에게 걸리더라도 귀국해서 수술받는 게 더 나았다. 그러나 박래현에게 걸리면 수술할 수 있을까. 괘씸죄까지 적용해 박래현은 내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병원에 가두고 나중에 아이만 빼 갈 것이다. 그걸 피하려고 여기까지 도망쳤는데 원점으로 되돌리긴 싫었다.

다른 해결할 방법으로는 위조 여권을 만들어 싱가포르로 건너가 낙태 수술을 받는 것이다. 위조 여권을 얻으려면 김경준이 내게 무엇을 요구하든 그가 요구하는 바를 들어줘야 할 것이다. 뭐든 쉬운 게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벽 쪽으로 돌아눕는데 거북 인형 두 마리가 베개와 벽 사이에서 해맑게 뒹굴고 있었다. 검지로 초록색 등딱지를 슬슬 쓸어내리다가 초롱이가 생각나서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문질러 봤다. 기분 탓인지 작은 생명체가 팔다리를 하늘하늘 움직이며 배 속을 부유하는 것 같았다.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배 속이 간지러워지면서 신기하게도 아이를 지우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건강하게 잘 지내서 네가 낳은 아이도 봐야지.’

엄마는 이 말을 하면서 행복하게 웃었다. 어렵게 날아와 내 안에 자리 잡은 아이일 텐데 초롱이처럼 허무하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힘든 시기에 내게 다가온 아이는 초롱이의 빈자리를 메워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덥석 아이를 낳을 순 없어서 감정에 치우치기보다는 내 처지를 고려해 차분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다.

“랜디 씨, 여기 약 가져왔는데 약 먹고 자요.”

해밀튼이 조용히 다가와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흔들었다. 덩치가 저렇게 큰데 해밀튼은 매번 발소리가 나지 않게 사뿐사뿐 걸어 다녔다. 그래서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놀랄 때가 많았다.

“랜디 씨, 괜찮아요?”

여기선 영어를 써야 한다고 참견하려다가 약을 먹고 싶지 않아서 잠든 척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졌나? 해밀튼은 중얼거리며 자기 침대로 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다음에 해밀튼이 여자 친구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나야. 오늘 잘 지냈어?”

목소리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간질간질한 대화를 듣고 있자니 해밀튼 애인이 부러워졌다. 해밀튼은 애인이 임신하면 금이야 옥이야 떠받들며 호들갑을 떨 것이다. 서로 사랑해서 합의로 아이를 가질 테니 아이 역시 행복할 것이다. 내 아이도 행복하면 좋으련만 아빠가 못나고 우유부단해서 배 속에 든 아이에게 미안했다.

“이왕 온 김에 영어 공부도 하고 싶은데, 자기 생각하느라 집중이 안 돼.”

해밀튼은 갑자기 소리를 낮춰 애인의 어디가 보고 싶은지 조곤조곤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통화료가 걱정되었는지 메시지를 보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왕 온 김에 영어 공부도 하겠다니 마치 다른 목적이 있어서 여기 온 사람 같은 말투였다.

어학원에 오는 목적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영어 공부를 하러 오는 거고 다른 하나는 적당히 영어 공부를 하면서 유흥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해밀튼 말을 들어 보면 후자 같은데 며칠 지켜본 바로 해밀튼이 애인을 두고 지저분하게 놀 인간은 아니었다.

물론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파악할 순 없다. 간과 쓸개를 다 빼 줄 것처럼 굴던 박래현은 속으로 딴생각을 품었고 그에 장단을 맞춰 주던 나는 그의 뒤통수를 거하게 가격했다. 내게 배신당해서 싸늘하게 굳어 가는 박래현 표정이 떠올랐다. 거짓말은 자신이 먼저 시작했다는 것을 박래현은 알지 못할 것이다.

***

나는 일주일 내내 두 갈래로 갈라진 길 앞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박래현에게서 달아나기로 결정했을 때 앞으로 이보다 힘든 결정은 없으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그때보다 더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문제에 직면했다. 낙태와 출산은 단어가 주는 무게감만큼이나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현재를 포함해서 나와 아이의 미래까지 신중하게 검토해 결정할 일이었다.

내 처지 때문에 오전엔 낙태로 마음이 기울었다가 오후엔 아이를 낳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곤 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노트를 반으로 접어서 왼쪽엔 아이를 낳아야만 하는 이유를 썼고 오른쪽엔 아이를 지워야만 하는 이유를 써서 각각의 항목에 점수를 매겼다. 점수를 다 매기고 양쪽을 계산해 봤더니 아이를 낳자는 쪽 점수가 훨씬 높았다.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아이를 키울 준비가 안 된 내가 부모 될 자격이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어른이라 어떤 일이든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아이가 나중에 세상에 태어난 걸 기뻐해 줄지 의문이었다. 나는 노트 한가운데에 아이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답을 그 아래 쓰면서 더 고민하지 않고 아이를 낳기로 했다.

정부가 출산 장려 정책을 강화하면서 혼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예전에 비해 쉬워졌다. 국가에서 지원을 받고 안정된 직장을 잡으면 내 아이를 먹이고 키우고 교육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별이다. 별처럼 단단하게 반짝반짝 빛나라는 의미야.”

문제는 박래현이었다. 우리가 관계할 때 나는 히트 사이클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별이를 다른 알파 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박래현에게 일찍 발각되면 아이를 지우려 들지도 모른다. 아이가 8~9개월이 될 때까지 숨어서 버티다가 출산하기 전에 귀국하면 박래현도 손댈 수 없을 것이다. 그쯤이면 박래현은 나를 포기하고 자기 삶으로 돌아가 있지 않을까. 설령 계속해서 나를 증오하더라도 다른 알파 아이를 낳은 내게 자신의 아이를 볼 생각은 멈출 것이다.

사람들에게 임신한 사실을 숨긴 채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이달까지 토익 반에서 점수를 따고 다음 달부턴 고급 회화 과정으로 코스를 옮겨 수업을 받기로 했다. 대학 졸업장을 못 따더라도 취업할 때 가산점을 얻기 위해서였다.

11월 초에 다니엘을 비롯해 친하게 지내던 학원생들이 귀국했다. 다니엘은 떠나기 전날 학원생들 전화번호를 건네며 귀국하면 연락해서 같이 보자고 당부했다. 그들이 귀국한 뒤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귀찮아서 나는 주로 아이와 대화를 나누며 쓸쓸함을 달랬다. 혼자 있을 때면 별이에게 모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말을 걸었다. 태아 때부터 외국어에 익숙해지라는 내 나름의 조기교육이었다.

[별아, 윤별. 오늘은 하늘이 맑고 바람이 선선해. 소나무 냄새랑 바람 냄새 좀 맡아 봐.]

박래현은 지난달에 내 앞에 나타난 뒤로 잠잠했다. 정우 말을 들어 보면 엄마나 해준을 건든 것도 아니었다. 오래도록 잠잠한 걸 보면 내가 눈에 안 보여서 남자의 복수심이 사그라든 것 같았다. 나는 아이가 바람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약간의 시간을 주고서 말을 이었다.

[근데 넌 누구 닮아서 이렇게 까다롭냐? 나 닮아야지, 박래현 씨 닮으면 안 돼. 네가 잘 보여야 할 사람은 나라고! 네 성도 윤이잖아, 윤별. 그러니까 내가 주는 대로 맛있게 좀 먹어.]

입덧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해결할 수 없는 욕정이 생겨서 나를 힘들게 했다.

“랜디 씨. 이번 주말엔 뭐 하실 겁니까? 약속 없으면 저랑 시내 나가실래요?”

“씨발, 깜짝이야!”

혼자 있고 싶어서 저녁 식사 후에 해밀튼을 따돌린 뒤 소나무 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밀튼이 내 뒤에서 불쑥 나타나 하마터면 발목을 접지를 뻔했다. 해밀튼은 수업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 내내 내게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가 지나치게 집요해서 어학원 내에서 해밀튼과 내가 사귄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주말에 약속 있어요. 시내 나갈 거면 다른 사람이랑 가세요.”

“약, 약속이요? 누구랑 데이트하는데요?”

추궁하는 목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해밀튼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저녁 날씨가 쌀쌀해서 카디건을 걸치고 나온 나와 달리 해밀튼은 반소매 셔츠 아래로 우람한 팔뚝을 자랑하고 있었다.

“데이트가 아니라 약속입니다. 그리고 내가 누굴 만나든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

“혹시 로란가 라란가 하는 그 일본 여자랑 데이트할 건가요?”

“해밀튼 씨. 지금 주제넘었다는 생각 안 들어요?”

“저는 랜디 씨가 공부만 할 줄 알았습니다.”

“씨발 미친 스토커도 아니고….”

일요일엔 김경준을 만나기로 했다. 그는 불법 체류자인 내게 마닐라에서 같이 어학원을 하자며 계속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어학원에서 오래 버티려면 어느 정도 비위를 맞춰 줄 필요가 있어서 주말에 점심 먹자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끔 밥 먹으면서 임신 사실을 넌지시 알려 줄 생각이었다.

“그 여자가 아니면 누구랑 데이트할 겁니까. 혹시 어학원 대표님?”

“해밀튼 씨,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좀 사귀어 보는 게 어때요? 여기까지 와서 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녀요? 공부하러 온 거 아닙니까? 한국에 애인도 있다면서요.”

“그야 랜디 씨가 착해서, 보호해 주고 싶어서 그렇죠.”

“내가 보호가 필요한 사람으로 보여요?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 해밀튼 씨 이러는 거 좀 귀찮네요. 앞으로 나 따라다니지 말아요. 부탁입니다.”

어학연수를 와서 한국말만 늘어서 간다면 해밀튼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자꾸 보호자처럼 구는 태도에 짜증이 나서 말이 심하게 나갔다.

“랜디 씨, 저는 저기….”

“계속 따라오면 화낼 겁니다. 지금 방을 바꿀까 고민 중인데, 조심해요.”

해밀튼이 더는 말을 붙일 수 없게 냉랭하게 그를 차단했다. 해밀튼은 방을 바꾼다는 말이 두려웠는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산책을 계속했다. 달빛에 젖은 소나무 숲은 청량하고 적요해서 날카로워진 신경 끝을 둥글게 마모시켰다. 소나무 향기에 취해 무작정 걷다가 뺨에 빗방울을 맞고 현실로 돌아왔다. 수업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해서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갔다.

“랜디, 오늘은 혼자냐? 보디가드는 갖다 버렸어?”

올라올 땐 보이지 않던 벤자민 무리가 길목을 막고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왠지 안 좋은 예감에 나는 무리들 너머 도망갈 길을 눈으로 더듬었다. 생각보다 꽤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해밀튼 말해? 그 사람 여기 공부하러 온 학생이지 내 보디가드 아니야.]

“네 뒤만 쫓아다니길래 네 애인이라도 된 줄 알았잖아. 학생들 사이에서 너희 둘 보고 말이 많아. 네가 오메가란 소문도 돌고 있고.”

[우린 친하게 지내는 친구야. 오해는 하지 마.]

“너 주말에 뭐 할 거냐? 나랑 클럽 가자면서. 비키니 클럽 가 봤어?”

[관심 없어. 곧 수업 시작하니까 나 먼저 들어갈게.]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선 벤자민 똘마니가 내 팔을 붙들었다. 벤자민이 다가와 내 얼굴에 이상한 냄새가 나는 연기를 뿜어내며 히죽 웃었다. 역한 냄새에 속이 뒤집혀 구역질이 났다.

“어, 우리도 들어갈 참이었어. 근데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나랑 얘기 좀 하다가 들어가. 샌님처럼 굴지 말고.”

[비 오잖아. 난 들어간다.]

“씨발 이 새끼 분위기 파악 존나 못 하네.”

벤자민 턱짓에 남자 둘이 내 팔을 잡아서 나를 길옆에 있는 바위로 끌고 갔다. 배 속에 아이가 없다면 발차기로 옆구리를 한번 봐주고 냅다 기숙사로 뛰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유산한 전적이 있어서 나는 성질을 꾹 누르고 바위에 앉았다. 벤자민은 소나무 기둥에 담배를 비벼 끄더니 꽁초를 풀숲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학생들이 애용하는 산책로를 멋대로 더럽히는 녀석에게 주먹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내게 가까이 다가온 벤자민은 얼굴에서 가발과 안경을 벗겨 바닥에 던졌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일어서려는 나를 벤자민이 어깨를 눌러서 앉혔다.

“랜디, 내가 필리핀 여자 꼬시는 법 알려 줄까?”

“…….”

“이거 아무한테나 전수해 주는 거 아니다, 너. 잘 들어.”

기가 막혀서 잠시 할 말을 잊고 벤자민을 노려봤다. 그는 아주 큰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나 수업 들어가 봐야 해. 네 강의는 다음에 들을게.”

“왜 여자한테 관심이 없을까. 음, 너 오메가 맞지. 그래서 해밀튼이랑 붙어먹는 거냐? 어쩐지 클럽 가자고 꼬셔도 반응이 없더라.”

어둠 속에서 벤자민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리란 생각에 해밀튼을 떼놓고 온 걸 후회했다. 그 남자는 내가 필요로 하지 않을 땐 옆에 딸랑딸랑 붙어 있다가 정작 필요할 땐 나타나지 않았다.

“난 여기 공부하러 왔거든. 그런데 클럽이 그렇게 재밌어? 주말에 같이 갈 테니까 나 데려가.”

나는 벤자민을 달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상황에서는 내 몸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후, 이제 와서? 좀 늦은 감이 있어.”

말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벌떡 일어나 기숙사 건물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남자 둘에게 양쪽 팔을 붙들려 더 깊은 숲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엉덩이와 허리가 울퉁불퉁한 길에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배 속에 든 아이가 무사할지 걱정되었다. 조급한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비가 오고 수업이 시작돼서 여기까지 들어올 학생은 없을 것이다. 숲 속엔 빗소리만 가득했고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엄습하는 두려움에 가슴이 거세게 방망이질했다.

누군가 손전등을 켜서 어둠을 밝히자 다른 누군가가 핸드폰을 들고 나를 찍기 시작했다. 벤자민 무리가 장소를 안 가리고 끔찍한 범죄를 실행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영상은 나중에 나를 협박하는 용도로 쓰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도망갈까 궁리하면서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클럽 가 보고 싶어. 주말에 가자.”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게 어디서 사람을 병신 취급해.”

뺨으로 바위같이 단단한 손바닥이 날아와 박혔다. 파열음이 울리면서 빗물에 젖은 뺨이 연속해서 두 번이나 오른쪽으로 틀어졌다. 눈앞에서 별이 보인다 싶더니 이번엔 운동화를 신은 발에 가슴을 걷어차였다.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면서도 배 속에 아이가 들어 있다는 생각에 아픔조차 느낄 수 없었다. 임신 초기라 충격을 받으면 유산될 위험이 있어서 나는 배를 맞지 않으려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붉은 핏덩어리가 울컥울컥 쏟아지는 환상에 사로잡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뾰족한 소나무 잎이 뺨을 찌르지 않았다면 발작을 일으켰을 것이다. 나는 바닥에 뺨을 붙인 채 잠시 머리를 굴렸다.

“너 시건방지게 구는 거 존나 맘에 안 들었어.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내가 교육 좀 해야겠어.”

남자 둘이 내 어깨를 잡아 일으키더니 한 놈은 내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뒤로 젖히고 다른 한 놈은 내 어깨를 잡아 몸을 고정했다. 연달아 구타를 당했더니 골이 흔들려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야, 조경훈, 너 잘 찍어.”

“영상으로 찍어 봤자 소용없어. 너희들 전부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

“어디 나한테 당하고도 그 소리가 입 밖에 나올지 두고 보자고. 아주 씹창 나게 박아 줄 테니까.”

“인생 망치기 싫으면, 여기서 관두는 게 좋아. 네 아버지 정치인이라며? 네 아버지 인생까지 끝장내고 싶으면 좆대로 해, 씨발 새끼야.”

“온갖 사이트에 네 반반한 얼굴 올리고 싶어?”

“상관없어, 개새끼들아. 올리고 싶음 올려.”

키들키들 웃으며 내 뺨을 후려친 벤자민이 얼굴을 잡아서 바지 앞섶으로 당겼다. 나를 잡은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근력이 약해져서 별 성과가 없었다. 빗물 때문에 눈앞이 흐려지고 암담해진 순간 박래현이 보고 싶었다. 박래현이 이 꼴을 본다면 나를 때리고 모욕하는 벤자민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어디 한두 군데를 부러뜨려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작살 낼 것이다. 내가 필리핀까지 도망온 게 박래현 때문인데 가장 위험한 순간에 박래현만 절실했다. 지금 박래현이 나와 별이를 구하러 와 준다면 그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나와 별이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벤자민, 우리 철수하자. 이 새끼 진짜 가만 안 있을 거 같은데?”

“닥쳐. 처음엔 다 이렇게 나와. 넌 이 새끼 얼굴 잘 나오게 영상이나 신경 써. 랜디, 대가리 굴리지 말고 입 벌려, 빨리.”

오늘 당한 모욕을 몇 배로 갚아 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눈을 질끈 감고서 입을 벌렸다. 벤자민과 저 일당들, 벤자민 아빠까지 가만두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불법 체류자이면서 나는 대담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대신 빨아 줄까, 벤자민 씨? 내 새끼손가락보다 작아서 그냥 씹어 삼켜도 될 거 같은데.”

“으, 으으윽! 아, 아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평소보다 거대해 보이는 해밀튼이 벤자민의 성기를 한 손으로 잡아 짜부라트리고 있었다. 목에 둘러맨 수건을 크게 벌어진 입 속에 쑤셔 박은 뒤 해밀튼은 벤자민을 가볍게 들어 땅에 내리꽂았다. 무쇠 같은 주먹이 퍽퍽 소리를 내며 희끄무레한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사태 파악을 하고 달아나려던 남자 셋도 땅에 내리꽂혀서 해밀튼의 주먹세례를 받아야 했다. 남자 넷을 순식간에 제압한 해밀튼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해밀튼 발밑에서 남자 넷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의기양양하게 굴던 새끼들이 해밀튼이 보여 준 힘 앞에서는 쉽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랜디 씨,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그런데 사람들을 이 꼴로 만들면 어떡해요? 이러면 치료비 엄청 나올 텐데….”

여기서 누가 피해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소 전치 12주 이상일 것 같은데 병원비가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가 합의를 안 해 주면 해밀튼은 폭행이나 상해죄로 구속될 상황이었다.

“전 랜디 씨가 다치지 않게 도와줬을 뿐입니다.”

해밀튼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벤자민의 뺨을 연속으로 후려쳤다.

“벤자민 씨, 눈 떠.”

벤자민이 부어오른 눈을 힘겹게 뜨자 그는 벤자민 귀에 대고 그들이 핸드폰에 녹화한 내용을 재생시켰다.

“경찰 부를 겁니다. 아버지가 아셔도 상관없다고 했죠? 이런, 냄새 맡아 보니까 대마까지 했네?”

어디서 힘이 났는지 벤자민은 벌떡 일어나 해밀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해밀튼에게 매달렸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네? 제발… 아버지 아시면 저 죽습니다.”

“당신이 잘못을 빌 사람은 내가 아니라 랜디 씨죠. 랜디 씨 앞에 엎드려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요.”

그는 피떡이 된 얼굴로 내 앞까지 박박 기어와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나는 뺨 몇 대 맞은 것으로 끝났지만 이 새끼들은 앞으로도 같은 짓을 되풀이해 피해자가 늘어날 것이다. 마음 같아선 경찰에 신고하고 싶은데 나는 불법 체류자였고 해밀튼이 저들을 반 죽여 놔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해밀튼은 상대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핸드폰을 주인 앞으로 던졌다.

“랜디 씨, 증거 확보하고 영상은 삭제했습니다. 안색이 안 좋은데 들어가 쉬세요.”

“당신은요?”

“이 사람들마저 처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같이 들어가요.”

“걱정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요.”

해밀튼만 두고 떠나기 미안했지만 비에 젖어서 추웠고 발에 차인 가슴이 아파서 더 버티기 힘들었다. 해밀튼에게 받은 손전등을 켜고 산에서 내려온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옷은 진흙투성이였고 바지는 군데군데 찢어져 보기에 처참했다. 옷을 벗어 구석에 던져 놓고서 얼른 샤워를 마치고 새 옷을 입었다. 잊으려 해도 자꾸 아까 일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거북 인형 두 개를 손에 꽉 쥐었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배가 계속 아프면 응급실에 가 볼 생각이었다.

향긋한 허브 향에 심장 박동이 가라앉으면서 아랫배에 생겼던 통증이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배를 다독여서 잘 버텨 준 아이를 칭찬했다. 착각이겠지만 작은 손발을 꼬물대며 아이가 몸을 뒤척이는 것 같았다.

해밀튼은 일이 복잡한지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이 없어서 해밀튼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해밀튼이 날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어떤 비참한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가 나타났을 땐 정말이지 내 호위 무사가 나타난 것처럼 마음이 놓이고 기뻤다. 해밀튼은 내게 심한 말을 듣고도 화가 나지 않았을까? 수업 들어갈 시간이 지나 있었는데 왜 거기에 나타났는지 신기했다.

갑자기 그에게 퍼부었던 말들이 떠올라 배로 미안해졌다. 나중에 우리 아이 이름을 해밀튼에게 지어 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겠지만. 나는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별이가 이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나길 바랐다. 박래현과 꾸몄던 방 주인이 되지 못하더라도, 미혼인 아빠한테 태어나 반쪽 사랑만 받게 되더라도 씩씩하고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생각에 잠겼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나는 해밀튼이 애인과 통화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는 애인에게 오늘 일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보고하고 있었다.

“넷 다 죽사발이 돼서 응급실에 실려 갔어. 당분간 남자 구실 제대로 못 할 거야. 나 잘했지?”

벤자민 아버지가 꽤 알아주는 국회의원이라고 들었기에 해밀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쪽에서 보복하고자 한다면 힘없는 해밀튼은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그 일에 엮여서 나도 빠져나가긴 힘들어 보였다.

사건이 필리핀 경찰에 넘어가면 내가 불법 체류자란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날 테고 필리핀 경찰에 돈을 뿌린 박래현 귀에도 소식이 들어갈 것이다. 어서 위조 여권을 만들어 필리핀을 뜨는 게 답이었다. 일과 보고를 마친 해밀튼은 보고 싶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일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해밀튼 씨, 아깐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해밀튼이 깜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미소 지었다.

“혹시 제 전화 소리에 깼습니까?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냥 깼어요. 그런데… 사람을 반 죽여 놨는데 괜찮겠어요? 저쪽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저쪽에서 잘못한 게 많아 조용히 넘어갈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걱정 안 해도 될까요?”

“네.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숨겨진 뒷배가 있는지 해밀튼은 사람을 패 놓고서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꾸하자 초조함이 약간 가라앉았다.

“해밀튼 씨는 공부하지 말고 차라리 몸 쓰는 쪽으로 진로를 바꿔 보는 게 어때요? 경호원 쪽이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그쪽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호원들이 영어를 잘하면 취업 폭이 넓어진다고 해서, 스펙 쌓으러 온 거예요.”

“놀러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우리 같이 공부합시다. 부족하지만 내가 봐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딴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챙겨 주고 싶어서 따라다닌 거였다. 나는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해밀튼과 얘기를 나눴다. 그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봤고 해밀튼은 기꺼이 대답해 주었다. 비 떨어지는 소리에 섞여 새벽까지 이어지던 대화는 내가 잠들면서 끊어졌다. 잠을 설쳤던 지난밤과는 달리 든든한 친구를 얻게 되어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

벤자민을 포함한 네 사람은 필리핀 경찰에 넘겨졌다. 나는 해밀튼의 도움으로 사건에서 제외되었고 해밀튼은 그 자리에 있었으면서 스태프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3주간 외출금지령을 받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주말에 외출하지 않았던 해밀튼은 페널티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랜디 씨, 즐겁게 놀다 오세요.”

“어디 가려고요? 해밀튼 씨는 외출 금지잖아요.”

“체력 단련실 가서 운동이나 할 생각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난데 죄 없는 사람이 징계를 받게 돼 미안했다. 내 잘못을 고백하고 해밀튼 대신 내가 징계를 받고 싶었지만 불법 체류자라서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들어오는 길에 컵라면 한 박스를 사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머리칼을 정리하는데 푸르스름하게 멍든 왼쪽 뺨이 눈에 띄었다. 안경은 산산이 부서졌고 가발은 흙탕물에 젖어서 빨아 놓은 상태였다. 변장용 안경이 없어 불안해하는 내게 김경준은 시내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나는 셔츠 위에 카디건을 걸치고 운동화를 신었다.

기숙사 음식에 질려서 새로운 음식을 먹을 생각에 오늘 외출을 기다렸다. 초롱이와 다르게 별이는 입맛이 까다로워서 가리는 게 많았다. 밥을 먹으면 속이 울렁거리고 안 먹으면 배가 고파서 기력이 달리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 차장이 해 주는 담백한 요리가 새삼 그리웠다. 김경준과 만나기로 한 11시에 노크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었다. 김경준이 잔뜩 멋을 낸 정장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단순히 점심을 먹기 위한 옷차림치고는 좀 과하다는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랜디, 오늘은 더 멋진데요? 아주 근사해요.]

[대표님도 멋있습니다.]

학생들은 어학원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갔기 때문에 기숙사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막 들어왔을 땐 기숙사에 남아서 공부하던 학생들도 한 달이 지나면 모두 주말만 기다렸다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외출한다는 사실 자체가 설레는 걸 보면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김경준은 전에 탔던 커다란 차가 아니라 은색 승용차에 올라탔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점심은 캠프 존 헤이 안에 있는 호텔에서 먹을 겁니다. 그쪽 구경하면서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먹고 새로 생긴 찻집도 갑시다. 우리 술도 마실까요?”

점심만 사 주고 들어와 쉴 생각이었는데 김경준은 나와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힘준 옷차림만 봐도 나를 얌전히 기숙사로 돌려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조용히 파묻혀 공부만 하려고 여기 왔는데 내 의도와 다르게 옆으로 새는 상황에 짜증이 났다.

“당신을 스토커한테 지켜 주는데 그 정도도 못 해 줘요?”

“온종일 대표님이랑 무슨 얘길 나눠요?”

“나랑 놀아보면 꽤 재밌을 텐데요. 그러지 말고 오늘부터 정식으로 만나 보는 건 어때요?”

“저는 연애할 마음이 없습니다.”

“난 진지해요. 준영 씨 누구한테서든 지켜 줄 자신 있습니다.”

“전 대표님 보호받고 싶지 않습니다. 어엿한 성인인데, 왜 다른 사람 보호를 받아야 하죠?”

말해 놓고 보니 며칠 전 해밀튼에게 도움 받았던 일이 생각나서 겸연쩍었다. 박래현을 만나기 전까진 누군가에게 보호받거나 의지한 적이 없었는데 그를 만나고부터 내가 존나 약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희한했다.

“그럼 도움 정도로 해 둡시다. 여기가 당신한텐 타국이지만 나한텐 홈그라운드잖아요.”

김경준 말투는 나를 어르듯 부드럽고 다정했다. 대가를 필요로 하는 친절이 달갑지 않아서 나는 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김경준 차 옆으로 말로만 들었던 지프니가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위험하게도 출입문이 열린 상태에서 차가 달렸고 심지어 남자 둘이 출입문 손잡이에 매달려 타고 있었다. 저러다 사고가 날 것 같아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저 차가 필리핀의 상징, 지프닙니다. 보기보다 안 위험해요.”

김경준은 캠프 존 헤이까지 가면서 자신이 겪은 필리핀과 필리핀 사람들을 얘기해 줬다. 어학원 대표답게 그는 사람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열성적인 얘기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차는 캠프 존 헤이 입구를 통과했다. 오른쪽 창문을 열어 손을 내밀고서 서늘한 공기를 주먹에 가득 쥐었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고산지대라 차갑고 맑은 공기가 코에 달았다. 숨을 깊게 들이켰더니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걱정과 불안이 녹아내려 몸이 가벼워졌다.

김경준은 호텔 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나는 백팩을 한쪽 어깨에 메고 차에서 내려 오색 깃발이 휘날리는 호텔 입구를 둘러보았다. 세련되고 화려하기보다는 주변 경관과 어울리게 고풍스럽고 웅장한 호텔이었다. 호텔 외관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김경준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호텔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뭐 먹을래요? 저번처럼 내가 알아서 시킬까요?”

“스테이크 시켜 주시고, 나머진 대표님이 알아서 하세요.”

김경준이 예약을 해 두었는지 직원이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옆자리에 백팩을 놓아두고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차가운 물로 목을 축였다. 김경준은 메뉴판을 보면서 여러 요리를 주문한 뒤 마지막으로 화이트 와인을 시켰다.

“술 마시면 운전은 누가 해요?”

“여기가 어딘지 잊었어요? 호텔인데 여기서 자고 가면 되죠.”

“오늘 처음으로 지프닐 타 보겠네요. 그거 위험하진 않다고 했죠?”

“랜디. 적당히 빼면 매력 있는데 지나치면 김빠지는 거 알아요?”

“쉽게 넘어가야 매력 터진다는 거, 오늘 첨 알았네요.”

김경준은 오른손에 턱을 괴고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다른 손으로 반지 낀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손을 뒤로 잡아 뺐더니 결혼반지가 김경준 손으로 넘어갔다. 보석이 촘촘하게 박힌 반지를 관찰하던 시선이 반지 안쪽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당신 스토커 뭐 하는 사람입니까?”

“왜요.”

“반지 가격이 꽤 나갈 거 같아서요. 이 정돈 아니겠지만 내가 새로 사 줄 테니까 이 방어용 반지는 끼지 말아요.”

내가 반지를 뺏기 전에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손이 김경준 손에서 반지를 뺏어갔다. 시간이 흘러도 낯설어지지 않은 향수 냄새에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았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세련된 정장 바지에 고급스러운 스니커즈를 보고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와 처음으로 교감했던 알파의 등장에 수명이 10년은 줄어들 것처럼 심장이 줄달음쳤다.

“김경준 씨,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남의 결혼반지를 뺏어갑니까?”

낮게 깔리는 위협적인 목소리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박래현은 백팩을 가볍게 손으로 쳐 바닥에 떨어트리고서 내 옆자리에 앉아 긴 다리를 꼬았다. 독특한 색감과 디자인을 가진 스니커즈가 내 정강이에 닿을 듯 말 듯 한 위치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결혼반지라뇨?”

박래현이 내뿜는 위압감에 눌려 어눌하게 말을 꺼낸 김경준이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무언의 질책에 나 역시 금시초문이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충혈된 눈으로 나를 지켜보던 박래현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번져 갔다. 박래현은 아무 짓 하지 않고 나를 보고만 있는데도 남자에게 목이 졸린 것처럼 호흡이 곤란해졌다.

“설마 윤준영 씨가 유부남인 거 몰랐단 말입니까? 이 반반하고 순진한 얼굴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이 타고 난 사기꾼이거든요. 안 그래, 윤준영?”

“박래현 씨, 헛소리 그만 하세요! 제가 왜 유부남입니까?”

박래현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뒤통수를 움켜쥐고서 내 얼굴을 뒤로 꺾었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자 뼈만 남아 앙상한 턱 근육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나한테서 도망갔으면 네 몸은 스스로 잘 간수해야지. 예쁜 얼굴에 왜 멍을 달고 와.”

늘어진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푸릇한 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얼굴이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내 볼을 더듬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입술을 벌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싫어서 고개를 트는데 나머지 손가락에 턱을 붙잡혀 얼굴을 움직일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박래현만 눈에 들어왔다.

“윤준영, 신랑 한국에 두고 여기 와서 바람피우니까 즐거워?”

“전 박래현 씨랑 결혼한 적 없습니다. 지금 사기 치는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이상하네. 내 기억엔 빚 변제에 나한테 매달 5억씩 받는 조건으로 나랑 결혼한 거 같은데. 네 손으로 직접 혼인 신고서도 작성했을걸?”

“…….”

“사랑한다는 말로 날 감쪽같이 속이고 나 없는 틈에 도망을 가? 신랑은 너 찾아다니느라 말라비틀어지는데, 넌 뻔뻔하게 다른 남자랑 호텔에 드나들며 밥이나 처먹고 있고.”

“제가 언제 호텔에 드나들었다고 그래요? 전 여기 와서 공부만 했습니다.”

박래현은 입가에 비스듬히 미소를 걸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호텔이 아니면 뭐냐는 눈빛이었다.

“석 달 전에 네 예쁜 구멍 빨아 주면서 내가 뭐라고 했어? 나 말고 다른 새끼한테 구멍 벌려 주면, 내가 그 새끼 뼈도 없이 녹인다고 했지. 그런데 씨발, 겁도 없이 다른 남자를 만나?”

“미친… 개소리 작작해요!”

박래현이 잘 쓰지 않는 욕설까지 섞인 원색적인 비난에 양쪽 뺨으로 열이 몰렸다. 밥 먹으러 온 거지 섹스하러 온 게 아니란 말을 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얼굴로 박래현은 나를 노려봤다. 그는 흥분하지 않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조 없는 새낀 거 다 알면서, 너 믿고 혼자 출장 간 내가 잘못했지. 내가 네 손에 놀아나서 아주 기쁘시겠어. 당장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네가 스스로 일어나.”

“박래현 씨, 경찰 부르기 전에 랜디한테 떨어지세요!”

관망하고 있던 김경준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내 눈만 들여다보던 박래현이 김경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차갑게 경직된 옆모습만 보고도 박래현이 얼마나 무서운 눈으로 김경준을 노려보는지 알 수 있었다. 스토커로부터 나를 지켜 주겠다던 남자는 나와 부부라고 주장하는 박래현 기세에 눌려 돌처럼 굳어 갔다.

“김경준 씨. 눈치가 있다면 간통으로 소문나서 어학원 문 닫기 전에 손 떼는 게 좋을 겁니다.”

“…….”

“다른 학생 명의를 도용해서 불법 체류자를 숨겨 준 죄까지 밝히면 어떻게 될지 당신이 더 잘 알겠지.”

“…….”

“이 정도면 내 선에서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있는 겁니다. 거리에 나앉기 전에 어학원 차리느라 끌어 쓴 돈은 다 갚아야 할 거 아닙니까?”

막힘없이 쏟아지는 협박에 김경준의 얼굴이 분노와 굴욕으로 까맣게 변해 갔다. 그는 여차하면 뻗을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고서 박래현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독기가 한풀 꺾인 눈이 박래현에게 위협이 될 리 없었다. 나는 박래현 입에서 더 험한 말이 나오기 전에 박래현 팔을 움켜쥐었다.

“박래현 씨, 비열한 짓 그만 하세요! 지금 절 도와준 사람을 협박하고 있습니까?”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기 전에, 넌 닥치고 가만있어.”

서슬 퍼런 눈빛에 질려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섰다. 박래현은 김경준 앞으로 흰 봉투를 집어 던졌다. 김경준은 봉투 안에서 서류를 꺼내 보더니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뭔데 그래요? 이리 줘 봐요.”

김경준이 내게 건네준 서류는 혼인 관계 증명서였다. 박래현과 내가 부부라는 증명서였고 신고일은 내가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날로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쓸모없는 증명서를 구겨서 레스토랑 바닥에 내던졌다. 허리를 숙여 서류를 집어 든 박래현은 정성스럽게 주름을 편 다음 증명서를 봉투에 넣고서 그 봉투를 내 백팩에 집어넣었다.

“랜디. 스토커라고 했지 당신 배우자라고는 안 했잖아요.”

“스토커? 기가 막혀서. 당신이랑 결혼한 내가 스토커야?”

혼인 신고서는 박래현 가방 안에 고이 잠들어 있다가 다른 서류들 사이에 섞여 파쇄기에 들어갔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혼인 신고서를 본 나도 김경준만큼 당황한 상태였다.

“대표님, 속이려던 게 아니라 정말로 박래현 씨랑 부부가 된 줄 몰랐어요.”

“불과 석 달 전에 호텔에서 너한테 반지 끼워 주고 혼인 신고서 같이 작성했잖아. 그때 넌 내 애를 배고 있었고.”

박래현은 내 왼손 약지에 화려한 뱀을 끼우고서 그 위에 서늘한 입술을 눌렀다. 나는 우리를 보고 있는 김경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입술 모양으로 전했다. 그는 화가 나서 흙빛이 된 얼굴을 창 쪽으로 돌렸다.

“가서 어머니도 만나 봬야지. 당신 효자면서 어머니 안 보고 싶어?”

“설마 엄마 만나러 가진 않았죠?”

“어머니 만나면 죽어 버리겠다면서. 내 목숨 같은 널 죽게 할 순 없잖아.”

“앞으로도 내 허락 없이 엄마 만나지 말아요.”

“…알았어. 얼른 가자.”

한국에 들어가면 꼼짝없이 갇혀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 유산에 도망이 겹쳐 박래현이 더 강력하게 나를 감시하리란 예측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아이를 둘 낳고 나면 아이를 뺏는 거로 부족해 계획대로 착착 올가미를 씌워 나를 괴롭힐 것이다. 나를 향한 비논리적인 집착은 남자의 증오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는 방증이었다. 어떻게 해야 박래현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침착하게 방법을 강구했다. 여기까지 도망쳤는데 맥없이 도로 끌려가긴 싫었다.

“같이 귀국할 테니까 먼저 어학원으로 가요. 여권이랑 제 짐은 챙겨 가야죠.”

여권을 핑계 삼아 어학원에 들러서 해밀튼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라 내가 부탁하면 나를 도와줄 것이다. 필요한 짐을 챙기는 동안 해밀튼이 박래현과 경호원 둘 정도만 해결해 주면 박래현 차를 탈취해서 택시로 갈아탈 수 있다. 성공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시도는 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 대신 내 차로 가야 돼.”

테이블 위에 김경준이 주문한 음식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치킨 샐러드가 먹고 싶다고 별이가 신호를 보내왔지만 음식을 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 오메가 보살피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김경준은 미동도 없이 창밖만 내다보았다. 유부남인 내가 그 사실을 속이고 총각을 꼬드겨서 벗겨 먹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박래현과 있으면 모든 일이 이런 식이었다.

“식사는 내가 대접할 테니까 맛있게 천천히 드세요, 김경준 씨.”

박래현은 지갑에서 100만 원권 수표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 위에 물 잔을 얹었다. 그는 내 백팩을 한쪽 어깨에 메고서 내 손에 자신의 손을 밀어 넣어 깍지 끼었다.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끔 손을 단단히 붙잡은 채 그는 호텔 밖에 주차된 차로 나를 데려갔다. 두 달 공백이 무색하게 끌고 끌려가는 우리 관계는 변화가 없었다. 우리를 따라오던 경호원 중 한 명은 운전석에 올라탔고 다른 한 명은 우리가 탈 수 있게 뒷문을 열어 주었다. 박래현은 나를 먼저 태운 다음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차 문 안 열리게 다 걸어 잠가요.”

차가 출발하면서 달칵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잠겼다. 박래현은 칸막이를 내려 운전석과 뒷좌석을 가리고서 다리를 꼬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담배 끝에 불을 붙이는 동작이 상황에 맞지 않게 우아했다. 내 시선은 그의 손으로 향했다. 내가 그에게 선물하려고 사 뒀던 라이터가 그의 손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라이터를 발견했으면 우리가 분위기 좋았을 때 썼던 닭살 돋는 카드도 읽었을 것이다. 그때 카드라도 없애야 했는데 급한 마음에 그대로 두고 온 내가 바보 같았다.

“윤준영, 그동안 잘 지냈어?”

“덕분에.”

그러잖아도 마른 볼이 담배를 빨아들이느라 홀쭉하게 팼다. 반지르르하게 윤기가 흐르던 얼굴은 며칠 굶은 상태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했고 짙붉은 입술은 각질이 일어 희었다. 드레스 셔츠 소매 사이로 툭 불거져 나온 뼈와 헐렁해져서 맞지 않는 바지를 보며 이 사람이 어떻게 두 달을 보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입덧하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나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박래현은 내 쪽을 힐긋 보더니 반대쪽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매캐한 연기를 피하려고 숨을 멈추고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한테 잡히면 어떻게 될지 각오는 하고 도망갔겠지?”

필터를 깊숙이 빨아들인 박래현이 담배 연기를 내뿜고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박래현에게 잡혔으니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걸까. 알파의 복수심이 사그라지지 않아서 나는 탈출 전보다 더 잔혹한 시간을 견뎌야 할 것이다.

“1년 휴직하고 너 임신할 때까지 섹스만 할 거야.”

만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남자는 내가 왜 도망갔는지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을까. 박래현과 내 관계는 이루어지기 힘들어서 다시 만난 이상 저항과 마찰은 불가피했다.

“애는 연달아 세 명 정도 낳는 게 좋겠어. 그러면 네 멋대로 달아나 다른 남자랑 붙어먹을 생각은 안 하겠지.”

자욱한 연기 너머에 있는 박래현의 뺨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후려쳤다. 뚜렷한 마찰음에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태연하게 나를 무시하는 그가 미워서 한 대 더 올려붙이려는데 비쩍 마른 손아귀에 손목을 잡혔다.

“제가 애 낳는 기곕니까? 낳아 봤자 다 뺏어갈 거면서 저한테 왜 이래요? 저는 박래현 씨 아이 낳고 싶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서 아이 낳으세요.”

“내가 아이를 왜 뺏어가? 너랑 같이 키울 건데. 우린 결혼한 부부야.”

감정을 응축한 목소리는 밀도가 높고 위협적이었다. 형형한 눈빛이 여전히 무섭지만, 납작 엎드려 짖어 보지도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제가 보낸 문자 안 읽었습니까?”

“삭제해서 기억 안 나.”

“다시 기억나게 해 주겠습니다. 혼인 신고 했다니까, 이혼하면 되겠네요.”

“이혼? 후회할 소리는 안 하는 게 좋아.”

“후회라뇨. 당신한테 몸 판 거 죽도록 후회하고 있는데 후회할 게 더 남았습니까?”

“나 몰래 쥐새끼처럼 도망가 놓고, 지금 네가 잘했다고 나한테 시위하는 거지?”

화가 조금씩 풀려 가는지 나를 향한 박래현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사냥이 끝난 뒤 포획한 먹잇감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리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비어 있는 내 귓바퀴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화끈거려서 나는 고개를 저어 그의 손을 털어 냈다.

“고심해서 골랐는데 피어싱은 왜 빼놓고 갔어.”

“마음에 안 들어서요. 그런데 한 가지 알아 두셔야 할 게 있습니다.”

“뭔데?”

“개새끼 취급을 하든 사람 새끼 취급을 하든 당신 마음대로인데 저도 더는 참지 않을 겁니다.”

“뻔뻔한 거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도가 지나치네. 넌 나랑 결혼해 놓고 내 핸드폰으로 김정우랑 뒷공작을 벌였어. 그걸로 부족해 내가 출장 간 틈을 타서 도망을 가? 어디 도망간 이유나 들어 보자.”

“씨발, 말 똑바로 하세요. 제가 그 결혼 하고 싶어서 했어요? 평생 돈 벌어도 박래현 씨한테 빚진 돈 다 못 갚을 거 같아서, 그냥 몸으로 때우려고 결혼한 거였어요. 다 알면서 무슨 부부간의 예의를 운운해요?”

내가 눈을 부릅뜨고 대들자 박래현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 그의 입에 물린 담배를 잽싸게 뺏어서 반으로 댕강 부러뜨렸다. 한 개비는 참았지만 아이가 있는데 두 개비까지 봐줄 순 없었다. 박래현은 미간을 찌푸릴 뿐 새 담배를 꺼내진 않았다.

“몸으로 때우려고 결혼한 거면 열심히 몸으로 때우면 되지, 왜 도망을 가.”

“좋아하지도 않는데, 아이를 낳아야 하는 제 처지가 비참해서요.”

휘어 올라간 박래현 입술 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는 생기가 사라진 눈으로 우두커니 나를 응시했다. 직설적인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박래현은 창백해진 얼굴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나 좋아한다면서. 나를 안심시키려고 거짓말한 거였어?”

“아무한테나 다리 쩍쩍 벌려 주는, 헤픈 새끼가 한 말을 믿으셨어요? 순진한 척하지 마세요.”

“내 동생한테 쓴 수법을 나한테까지 써서는 안 되지. 윤준영, 난 박수현이 아니야. 바닥에 추락해 죽는 한이 있어도 너 찾아서 데리고 죽지, 나 혼자선 안 죽어.”

갈색 눈동자에 깃든 광기를 보면서 이 사람이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내가 벗어날 방법이 없으리라고 직감했다. 박래현이 나를 버릴 즈음에 나는 다 깨지고 부서져 더는 윤준영이라고 할 수 없는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내가 두려운 건 슬픔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무감각해지는 거였다.

“당신 동생이 죽어서 슬픈 건 알겠는데, 제 탓으로 몰아가지 마세요.”

“우리 관계 생각해서 없었던 일로 하려고 했는데, 말 나온 김에 솔직하게 얘기해 봐.”

“뭘요?”

“천박하고 역겨운 영상, 왜 수현이한테 보냈어? 좋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게 어려웠어? 꼭 그딴 추잡한 방법으로 사람을 몰아붙여야 했냐고.”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박래현 눈을 보다가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이 뇌관이 점화되고 나서 얼마나 큰 파장이 몰려올지 알 수 없어 두려웠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곳은 더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래서 박수현이 그 영상 때문에 죽기라도 했단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수현인 그 영상을 받은 직후 차를 몰고 나가서 죽었어. 이게 우연의 일치란 건가?”

“…….”

“솔직히 말해 봐. 영상 보낸 새끼 너 아니지? 아무리 봐도 넌 그런 짓 할 사람이 아니야.”

내가 보낸 게 아니라고 하면 박래현은 동영상 보낸 사람을 추궁할 것이다. 별이를 임신한 상황에서 해준이 엮이지 않게 하려면 신중해야 했다.

“제가 보낸 거 맞아요. 헤어지자고 했는데 박수현이 제게 안 떨어져서 그랬어요. 동생은 실종됐고 엄마는 아프셔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결혼도 하기 전에 애를 낳자는 둥 헛소리를 해서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보낸 겁니다. 전 박수현이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특히 자살은… 생각도 못 했어요.”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숨이 막혔지만 한번 시작한 연극을 멈출 수는 없었다. 물꼬를 튼 김에 나는 마른풀 향기가 날 것 같은 트렌치코트 소매를 움켜잡았다. 불거진 뼈마디가 손에 박일 듯 엉겨 왔다.

“제가 잘못했으니까 이제 저 놓아주세요. 수현이한테 평생 속죄하며 살게요.”

나는 진심을 담아 간절하게 부탁했다. 박래현과 조용히 헤어진 뒤 별이는 온전히 내가 키우고 싶었다. 초롱인 계약 때문에 가진 아이라 처음부터 넘겨줄 생각을 했지만 별이는 내 의지로 선택한 아이라 절대 뺏기기 싫었다.

“속죄할 의지가 있다면 수현이 형인 나한테 해. 평생 나한테만 다리 벌리면서, 나만 사랑하면서 살라고.”

싸늘한 말에 두근거리던 심장이 얼어붙었다. 나는 내 볼에 와 닿는 서늘한 손을 차갑게 뿌리쳤다. 박래현은 나를 향한 증오를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놓아 달라고 사정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너무 미워서, 얼굴만 봐도 치가 떨리게 싫어서 버림받는 쪽이 더 빠를 듯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서 박래현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동영상 보낸 건 제 잘못이 맞아요. 하지만 그따위 영상 받고 죽은 당신 동생이 등신이지, 왜 나한테 이래요? 상대가 죽을까 무서워서, 연애하다가 헤어지잔 말도 못 하겠네요.”

“수현이한테 처음이라고 했다면서? 너 그 수법 나 꼬시면서도 써먹었지? 처음부터 수현이한테 솔직했으면, 적어도 배신감에 치를 떨진 않았을 거 아냐.”

나를 도와줬던 박수현에게 그때가 첫 히트 사이클이라고 말했었다. 박수현이 나랑 어떻게 만났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면 박래현은 내가 다른 알파와 관계해서 사후피임약까지 먹어 놓고 감쪽같이 박수현을 속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오해와 거짓으로 지독하게 꼬인 실타래를 풀 방법이 없어졌다. 박래현은 내 턱을 잡아 얼굴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갈색 눈동자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머릿속 생각을 완전히 파헤치겠다는 의지가 담긴 집요하고 끈질긴 눈이었다.

“윤준영, 솔직하게 말해. 영상 누가 보냈어.”

“제가 보냈어요.”

“언제 찍은 영상이지?”

열심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딱히 좋은 구실이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서 거짓말을 더 하고 싶진 않아서 나는 딴청을 부렸다.

“좋은 기억도 아닌데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박래현은 손가락 끝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박래현이 물고 늘어지면 꼬투리가 잡힐 것 같아서 끝까지 잡아뗄 작정이었다. 예상 질문에 열심히 모범 답안을 작성하던 나는 아예 화제를 돌려 박래현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끝난 일이니까 그냥 덮어요. 그러면 저도 박래현 씨가 제게 한 짓 다 덮겠습니다.”

“내가 한 짓?”

“박래현 씨도 제게 잘한 거 없잖습니까. 저한테 복수하려고, 손기호란 사기꾼 고용한 거 맞죠? 그래서 우리 돈 4천만 원 빼돌렸잖습니까. 당신이 더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면… 당신과 계약하지 않았을 테고 당신한테 쓰레기 취급당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아치 모양으로 부드럽게 휜 눈썹 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 아래, 두 개의 빗장뼈가 맞닿은 부근이 움푹 패 눈물이 고일 정도로 남자는 메말라 있었다.

“그래. 그 사람 내가 심은 거 맞아.”

“박래현 씨도 절 용서 못 하겠지만 저도 박래현 씨가 제게 한 짓 용서 못 합니다. 그러니까 우린 헤어지는 게 맞아요.”

“널 괴롭히고 네 어머니 못 만나게 했던 과거, 매일 후회하고 있어. 하지만 너 만난 건 절대 후회하지 않아. 설령 수현이가 살아 돌아와도, 난 너 안 놔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복잡한 감정으로 흐려진 눈동자가 나를 향하더니 손아귀에 뺨이 잡히고 곧장 입술이 겹쳐졌다. 익숙하게 파고든 혀가 어색하게 굳어 있는 내 혀를 쓸고 지나갔다. 두 달간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히며 사방에 치자꽃 향기가 만발해 몸이 나른해졌다. 박래현이 푸는 페로몬에 격하게 반응하면서 내가 이 남자에게 각인했음을 재차 확인했다. 허기진 안을 채우는 향이 눈물 나게 좋아서 남자의 목에 팔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달콤한 입술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전에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 그를 뒤로 밀어냈다. 박래현을 떠나야 했던 이유를 복기하면서 쉬이 흐트러지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제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실 겁니까? 박래현 씨 꼴도 보기 싫다고요!”

“내가 널 놔줄 생각이었으면 미친놈처럼 왜 찾아다녔겠어. 내가 미워도 그냥 옆에 있어.”

“씨발, 완전 자기 멋대로야.”

박래현은 표정을 굳힌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확답을 받지 못해 초조해진 나는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창밖으로 끊임없이 시골 풍경이 이어졌다. 지금쯤 어학원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차는 계속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학원 안 들려요? 여권이랑 제 짐 챙겨야 하는데….”

“지금 공항으로 가고 있어. 넌 벌써 도망갈 구상을 하고 있겠지?”

“제가 세 사람을 따돌리고 어떻게 도망을 가요? 여권 없으면 출국 안 되잖아요.”

“출국이 왜 안 돼?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나랑 잘 맞춰서 살 생각이나 해.”

좌석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세상으로부터 날 차단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내 도주는 여기서 끝났다는 생각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필리핀이 우리나라도 아닌데 두 달도 안 돼서 어떻게 나를 찾은 걸까. 필리핀은 7천 개가 넘는 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인구는 1억 이상인 데다가 교통과 통신망이 뛰어난 편이 아니어서 사람 찾기가 쉬운 나라는 아니었다. 정우가 말해 줬을 리는 없고 사람을 풀어서 찾았다는 소린데 집념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박래현은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형, 세 시간 후에 공항 도착해. 김포공항에는 여덟 시 반쯤에 도착할 거야. 공항으로 차 보내.”

박래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잠든 척 눈을 감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배가 불러올 테니 박래현은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곧 알아챌 것이다.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 탈출은 불가능해질 테고 나는 꼼짝없이 아이를 낳아 박래현에게 바쳐야 한다.

내 아이를 뺏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박래현은 우리가 관계했을 때 히트 사이클이 20일 정도 남은 거로 알고 있었다. 남성 오메가는 히트 사이클에만 임신할 수 있으므로 임신 주 수를 속여 아이가 박래현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 날 놓아줄지도 모른다. 박래현처럼 자존심 강한 남자가 다른 알파 아이를 밴 오메가를 곁에 두려고 하진 않을 테니 당장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전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임신한 뒤로 잠이 늘어서 땡볕에 내놓은 엿가락처럼 사고가 휘어졌다.

“준영아, 그만 자고 일어나. 공항 도착했어.”

어느새 잠들었는지 박래현 어깨에 볼을 댄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박래현이 내 머리칼에 입술을 비비자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백팩을 챙겨 박래현을 따라 내렸다. 경호원 한 명은 차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느라 보이지 않았고 다른 한 명과 박래현이 내 곁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주말이라서 공항은 들고 나는 사람들로 붐벼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공항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 틈으로 요령껏 파고들면서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병 속에 갇힌 줄도 모르고 빛을 향해 몸을 부딪쳐 죽는 꿀벌처럼 숨이 턱까지 차서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달렸다. 폐가 찢기는 고통에 기진맥진해질 무렵 나는 어떤 사람의 다부진 가슴팍에 부딪혀 뒤로 발라당 나동그라졌다.

“아! 준영 씨, 안 다치셨어요? 미안해요.”

나를 일으켜 세우는 남자는 해밀튼, 즉 오승현이었다. 나는 흐리멍덩한 기분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어학원으로 가서 이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려던 나를 비웃으며 고개를 돌려 박래현을 노려봤다. 달리느라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한 뒤에 박래현은 허리를 숙여 손을 내밀었다.

“너 왜 이렇게 빨라. 도망가는 데 선수네.”

“안 들어가요. 난 여기서 살 겁니다!”

내가 그 손을 쳐내고 바닥에 드러눕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사람들이 우리를 빙 둘러쌌다. 사람들 벽이 점점 두꺼워지면서 좋은 구경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밀고 밀리는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윤준영, 너 뭐 하는 짓이야? 사람대접 받고 싶지 않다 이건가?”

“끌려가서 씨받이 취급 받는 거보다 이게 더 낫습니다.”

“오승현 씨. 끌고 와요.”

박래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유한 표정으로 앞장서 걸었다. 나는 오승현과 또 다른 경호원에게 팔을 잡혀서 출국장 앞까지 질질 끌려갔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지만 지금 남의 눈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상무님, 그런데 준영 씨 여권이 어학원에 없었습니다.”

“메고 있는 가방 뒤져 봐요.”

“준영 씨, 잠깐 가방 좀 살펴보겠습니다.”

오승현은 매우 정중한 태도로 내 백팩을 열어 여권을 찾아냈다. 혹시라도 나와 시선이 마주칠까 봐 얼굴은 반쯤 돌린 채였다. 우리가 들어간 곳이 VIP 전용 통로인지 들어올 때와 달리 출국 절차가 퍽 간단했다. 박래현은 버티고 선 나를 어깨에 들쳐 메고 회사 전용기로 보이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박래현 키가 커서 계단을 오르는데 눈앞이 아찔했다. 순간 떨어지지 않으려고 박래현을 꽉 붙들었다. 웃음을 머금은 승무원 두 명이 거꾸로 매달린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나를 의자에 앉히고 박래현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옆자리에 앉았다. 경호원들은 우리 반대편에 마주 앉아 우리를 지켜봤다. 오승현은 나와 눈이 부딪치자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상무님, 시키신 대로 이륙하면 드실 수 있게 식사 준비했습니다. 이제 곧 이륙할 테니 안전벨트를 매 주세요.”

박래현은 내 쪽으로 몸을 숙여 안전벨트를 매 준 뒤 자신의 벨트를 맸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비행기 내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허벅지를 툭툭 치는 길고 곧은 손가락이 신경질적으로 움직여 내 시선을 뺏어갔다.

분노를 누르고 있는 커다랗고 정교한 손이 조만간 내 뺨으로 날아올지 몰라 긴장했다. 내가 도망간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박래현은 내가 자신을 이용해 엄마 수술을 끝내고서 튀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박래현은 비행기가 이륙할 동안 주먹을 쥐었다가 푸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은 손등에 전과 달리 퍼런 핏줄이 도드라졌다.

내가 눈을 들었을 때 나를 지켜보고 있던 해밀튼과 눈이 마주쳤다. 벤자민 무리로부터 용감하게 나를 구해 줬던 해밀튼은 고용주가 나를 때려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오승현 씨, 잠깐 이리 와 봐요.”

“상무님, 부르셨습니까.”

오승현이 다가와 박래현 옆에 섰다. 박래현은 내 안전벨트를 풀고서 길쭉한 다리를 왼쪽 다리 위로 포갰다.

“윤준영 씨 뺨에 난 솜털 하나라도 다치지 않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얼굴에 멍이 생겼습니까?”

“죄송합니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그랬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똑바로 안 지키면 당신 모가지 날린다고 했지.”

그날 밤 오승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최악의 경우 나와 별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충격을 받아 별이는 유산되었을 테고 나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자른다고 그래요?”

“네가 맞았는데 왜 잘못이 없어.”

“오승현 씨 잘못 없습니다. 오히려 절 위험에서 구해 줬어요. 자르지 말아요.”

박래현은 화가 덜 풀린 시선으로 내 얼굴을 응시하다가 멍이 든 왼쪽 뺨을 검지로 더듬었다. 3주 만에 나를 찾아서 옆에 스파이를 심은 남자가 두려워서 손을 쳐 낼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모든 게 남자 뜻대로 될 것 같아서 희망이 사라졌다.

“오승현 씨. 한 번만 더 실수하면, 경호 팀에서 내보낼 겁니다.”

“절대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최우진 일당은 어떻게 처리했어요?”

“변호사가 샬롯 씨를 설득해서 그 무리를 전부 마약 복용 및 특수 강간죄로 고소하기로 했습니다. 최우진 노트북에서 샬롯 씨를 협박하면서 성관계한 동영상 및 비슷한 동영상을 몇 개 더 찾아냈습니다. 다른 피해자들과도 접촉해서 고소 및 피해 보상을 설득해 본다고 하셨습니다.”

“잘됐네요. 필요한 돈은 전부 내가 댄다고 하세요.”

“네. 최 의원님 쪽에서도 변호사 고용해서 힘을 쓰고 있는 듯하지만 이미 늦었다고 합니다.”

박래현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알았다는 표시를 보내자 오승현은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두 사람 대화를 들어보니 벤자민 일당을 말하는 듯했다. 오승현이 그 무리를 반 죽여 놓고도 걱정하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윤준영, 다음은 누구일 거 같아?”

“뭐가요?”

“너 건드린 새끼들, 가만 안 둔다고 했잖아.”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김경준이었다. 내 신분을 위장해 숨겨 주었고 데이트 신청을 했던 사람이라 그는 박래현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혹시 김경준 씨 얘기라면 제발 부탁인데 건들지 말아 주세요. 저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왜 감싸고돌지?”

“감싸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승무원들이 음식이 담긴 카트를 끌고 와서 대화는 중단되었다. 테이블 위에 스테이크와 과일 샐러드, 치즈가 듬뿍 얹어진 피자와 딸기 주스가 세팅되었다. 우리 테이블에 음식 세팅을 마친 승무원들은 경호원들이 있는 쪽으로 카트를 밀고 갔다. 박래현은 스테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까지 샌드위치 두 조각으로 버티고 있었던지라 나는 전투적으로 포크를 집어 들었다.

나랑 같이 쫄쫄 굶었을 별이한테 미안했다. 박래현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이 시작될 텐데 버티려면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구역질이 나올까 봐 걱정했는데 적당하게 간이 밴 살코기가 입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스테이크와 샐러드. 피자를 다 먹어 치우고서 딸기 주스를 마셨다. 아이가 거부감을 보이지 않아서 음식은 눈물이 핑 돌게 맛있었다.

“스테이크 하나 더 주문할까?”

“아니요, 이제 배불러요.”

박래현이 미리 언급했는지 오늘 나온 스테이크는 레스토랑에서 한 끼 음식으로 제공하는 스테이크의 세 배 분량이었다. 박래현은 못 미더운 표정으로 자신의 스테이크를 한 조각 집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별아, 이 사람이 네 생물학적 아빠야. 인사해. 잘생겼지만 성격은 존나 더러워. 넌 절대! 이 남자 성격을 물려받아선 안 돼. 알았지?

스테이크를 씹으며 나는 별이에게 정자를 제공해 준 아빠를 소개했다. 재벌 아빠를 두고 가난한 아빠 밑에서 자라야 할 아이가 조금 불쌍해졌다.

박래현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주스를 마셨다. 그의 접시 위에는 반도 먹지 않은 스테이크가 남아 있었다. 남들보다 훨씬 긴 팔다리를 움직이려면 그에 맞는 열량을 섭취해야 할 텐데 박래현은 늘 먹는 게 시원찮았다.

“다 먹었어?”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기다란 손가락이 다가와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잡은 손에 힘을 줘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경호원들에게 끌려가기보다는 내 발로 걸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는 박래현이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베이지색과 연한 갈색으로 꾸며진 침실이었다. 등 뒤에서 문을 닫고 박래현은 문을 걸어 잠갔다.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뒷걸음질하다가 침대에 걸려 퇴로가 차단되었다. 도망갈 곳이 없으니 맞서 싸우자는 심정이 되어 박래현을 마주 보았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박래현을 봤을 때 가지각색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절망, 좌절, 무기력, 슬픔, 안도, 기쁨 그리고 그리움이 기 싸움하듯 터져 나와 몸이 불룩해지는 느낌이었다. 뾰족뾰족 돋아나는 감정들이 생생해서 어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사람처럼 박래현 존재는 자연스러웠다.

박래현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더니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막무가내로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살덩이가 혀에 비벼졌다. 키스를 피하려고 얼굴을 트는 방향으로 입술이 집요하게 따라와서 입천장과 볼 점막을 문질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박래현 어깨를 틀어쥐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혓바닥과 혀 가장자리를 핥으며 혀가 더 깊이 들어왔다.

박래현은 나를 안아서 침대에 눕힌 뒤 운동화를 벗기고 내 몸 위로 올라왔다. 다짜고짜 내 카디건을 벗기고는 조급한 손길로 셔츠 단추를 풀었다. 남자의 의도를 깨닫고 나는 박래현 손목을 잡아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임신 초기라 격렬한 섹스는 지양해야 했다. 초롱이를 임신했을 때 조심성이 없었던 나는 되는 대로 몸을 굴리다가 아이를 잃었다.

“말로 할 때 멈춰요.”

“지금껏 너 만날 날만 기다렸어. 얌전히 받아들여.”

“싫다고 했습니다.”

“안 어울리게 뒤로 빼지 마.”

박래현은 내 셔츠를 잡아 양쪽으로 벌린 뒤 내 위에 납작 엎드려 젖꼭지를 빨았다. 나는 왼손으로 박래현 머리칼을 움켜쥐고서 그의 얼굴에 힘껏 주먹을 날렸다.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박래현은 물러서지 않고 젖꼭지에 매달렸다. 주먹으로 박래현 뺨과 어깨를 정신없이 가격하는 동안 뜨뜻하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젖꼭지를 빨아 당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멀리 떨어져서도 날 지배하던 알파는 내게 매달리며 내 감정을 있는 대로 휘저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페로몬 향에 취해서 박래현의 마른 얼굴과 풍성한 머리칼을 만지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이 남자를 만지고 나면 분명히 거기서 멈추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박래현을 받아들일 기세여서 나는 젖꼭지에 붙어 있는 얼굴을 뒤로 밀어냈다. 박래현은 내 손목을 그러쥔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하반신에 남자의 몸무게를 고스란히 받아 내며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결혼 계약서상 넌 나를 거부할 수 없을 텐데?”

“박래현 씨랑 섹스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왜 도망갔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싫어서 도망갔습니다. 감시받고 억압받는 게 싫어서 도망쳤다고요!”

“앞으로 널 억압하지도 않고 감시도 안 할게. 또 원하는 거 있어?”

“…하, 미치겠네.”

주먹에 맞아서 얼룩덜룩해진 얼굴로 박래현은 답답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박래현을 떼어 낼 유일한 방법은 박래현이 복수를 마친 다음 내게 질려서 흥미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없어 보였다.

“우린 결혼했고 당신은 내가 원할 때마다 날 받아들인다고 했어. 부부 사이에 사랑을 나누는 게 뭐가 문제야.”

“부부 사이여도 합의 없는 섹스는 강간입니다.”

“네가 합의해 주면 되잖아. 아니면 잠깐 시간을 줘, 네가 합의할 마음이 들게끔 할 테니까.”

“씨발, 싫다고, 이 미친 새끼야!”

“5분도 안 돼? 페로몬 안 풀 테니까 5분만 줘.”

5분만 주면 나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 페로몬을 풀지 않으면 5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방심하는 사이에 청바지 단추가 풀리고 지퍼가 내려갔다. 박래현은 허벅지 사이에 나를 가두고 청바지를 잡아당겼다. 바지가 벗겨지면서 허벅지에 걸려 있던 드로어즈도 제거되었다. 민첩하게 허벅지를 잡아 양쪽으로 벌리고서 박래현은 허겁지겁 내 자지를 핥았다. 귀두 끝이 까슬까슬한 혀에 비벼지면서 아랫도리에 기분 나쁜 전율이 지나갔다. 그는 사타구니에 입술을 문지르다가 자지를 입에 물고 빨기 시작했다. 뜨겁고 달짝지근한 살덩이가 기둥에 들러붙어서 얇은 표피를 할짝거렸다.

“으, 으으응, 으읏….”

온몸의 피가 한곳을 향해 내달렸다. 5분도 필요 없이 1분이면 함락당하는 몸이 지긋지긋했다. 미칠 듯한 쾌감에 몸부림치며 나는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입술 안쪽 살을 아프게 깨물었다. 박래현은 밑을 빨 생각인지 자지에서 얼굴을 뗐다. 그 틈을 이용해 위로 기어 올라가는 나를 박래현이 쫓아왔다. 한쪽 팔로 내 목을 감아 상체를 고정한 박래현이 고개를 숙여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윤준영, 네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두통에 시달리면서 온종일 네 생각만 했어. 잠들면 꿈에서까지 널 봤는데, 정작 너는 달아날 생각만 해서 내가 얼마나 애가 탔는지 모르지.”

귓바퀴 연골에 뜨거운 숨결이 닿아 움푹 팬 곳에 수증기가 맺힐 것 같았다. 박래현의 절절한 감정에 전염돼서 얼떨결에 눈을 깜박였다가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박래현이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밝힌다 해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남자는 용의주도하게 나를 속여 왔고 내게 거짓으로 일관했다. 이 남자에게 속아 넘어가면 난 초롱이에 이어 별이 마저 잃게 될 것이다.

“준영아, 넌 나 조금도 안 보고 싶었어?”

끈적끈적한 고백을 하면서 남자는 어느새 밀부에 손가락을 넣어 안을 문질렀다. 주름 주위에 분포한 작은 돌기들이 움찔움찔 경련해 하반신에 쾌감이 퍼졌다. 박래현을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를 받아들이고 싶은 본능이 내부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각인한 오메가는 무력하기 때문에 알파의 요구를 거부하려니 지독한 상실감과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의지가 각인된 본능을 이길 수 있다면 애초에 각인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넣을 거야. 다 젖었으니까 들어가도 되지? 정말 싫으면 내 뺨을 때려. 그러면 그만둘 테니까.”

바지 지퍼를 내리고 성기를 꺼내 귀두 끝을 주름에 비비면서 박래현은 내 입술 안에 혀를 삽입했다. 꽉 오므리고 있던 주름이 벌어지면서 밀고 들어오는 성기를 처음부터 조이기 시작했다. 살 기둥이 속살을 콱콱 찍어누르는 감각에 내벽이 울렁울렁 들고 일어섰다. 낯설면서 익숙한 감각에 넋이 나가 나는 엉덩이를 매트리스 위에 비비적거렸다.

“흐, 흐윽, 하, 하으응….”

박래현은 기세가 꺾인 내 어깨와 등을 손으로 누르면서 단번에 성기를 삽입했다. 안이 크게 벌어지면서 곧장 찾아온 희락에 눈앞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귓가에 박래현의 뜨거운 숨과 헐떡임이 잘게 부서졌다. 허리를 흔들고자 하는 욕구를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나는 박래현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 느릿하게 이어지던 허릿짓이 멈추더니 안을 꽉 채우고 있던 자지가 축축한 습기를 남기면서 빠져나갔다.

“정말 싫어?”

“네. 저 임신했으니까 함부로 건들지 말아요.”

박래현이 언제 달려들지 몰라서 방어벽을 치며 나는 시트에 열 오른 얼굴을 묻었다. 온전히 자리 잡았던 성기가 빠져나가 밑이 허전해지면서 채우지 못한 욕구 때문에 경련이 찾아왔다. 수치스러워서 이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임신? 임신했다고? 혹시… 우리 아이야? 그때 히트 사이클도 아니었는데 임신했어?”

머리칼 안으로 들어온 손이 다정하게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나는 박래현에게 눈을 맞추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기대감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며 섬뜩하게 굳어 갔다. 묵직한 침묵이 흘렀고 박래현이 어깨를 잡아 나를 일으켜 세웠다. 초조한 마음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찬바람이 이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라는 존재를 낱낱이 해체해 없애 버릴 것처럼 무서운 눈이 나를 향했다.

“그때 히트 사이클이 아니었잖아요. 박래현 씨 아이 아닙니다.”

박래현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러다가 혹시 쓰러질까 봐 걱정하면서 나는 창백하게 변해 가는 낯빛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박래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렸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는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내 아이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 아이야?”

“…….”

“대답 안 해? 혹시 김경준 아이야?”

“아닙니다.”

“아니라고? 너 필리핀 도착한 날 그 새끼하고 호텔 들어갔지.”

“누구 아인지 저도 몰라요. 히트 사이클이 찾아왔고, 숨이 막혀서 기숙사를 뛰쳐나갔어요. 몸을 식히려고 벤치에 누워 있는데 그 냄새에 홀려서 따라온 알파랑 같이 잤어요.”

“억제제는 왜 안 먹었는데?”

“계속 먹다가 그 주에 바빠서 잊어버렸어요.”

희게 변색된 낯빛과 핏발 선 눈이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갈 악귀 같아서 공포가 스며들었다. 뼈만 남은 얼굴은 표정을 감추고 있지만 떨리는 턱과 싸늘한 시선에서 누르지 못한 노여움을 읽었다. 박래현 입에서 나온 말이 나긋나긋하고 살가워서 더 무서웠다.

“준영아, 거짓말하지 말고. 너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

“박래현 씨는 날 알지 못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하나도 알지 못해요. 그러니까 저를 잘 아는 척하지 마세요.”

“…내가 잘못했으니까, 거짓말이라고 해.”

“제가 왜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해요?”

“검사해 보면 다 나와. 솔직하게 말해.”

박래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면서 내 눈을 꿰뚫어 보았다. 박래현과 마지막으로 몸을 섞었던 날, 히트 사이클이 아니었음에도 박래현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요. 당신 애 아니라고요!”

“윤준영!”

박래현은 필사적인 눈빛으로 나를 보았지만 내 차가운 대답에 현실을 깨닫고서 얼굴을 처참하게 구겼다. 갈색 눈동자에 언뜻 눈물이 맺힌 것 같기도 했다. 박래현이 내게 분노를 표출한 적은 많았지만 숨김없이 맨 밑바닥을 드러낸 얼굴은 처음이었다.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남자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뭔가를 부숴 버린 게 확실했다.

별안간 내 얼굴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눈물이 떨어진 곳에 붉게 화인이 찍힐 것 같아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박래현이 왜 울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우두커니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박래현은 태어나서 처음 울어보는 아이처럼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울고만 있었다.

내가 아이를 가져서 충격을 받았겠지만 박래현이 눈물까지 흘릴 줄은 몰랐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박래현이 소매에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고서 붉어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금방 부스러질 위태로운 정적 사이로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진실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서 나는 박래현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빗장뼈 근처로 눈을 내렸다. 몸에 꼭 맞는 셔츠 안에서 흉곽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덜 다듬어진 소유욕과 날 선 집착이 남자가 내뱉는 불규칙한 호흡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 삶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려는 욕망은 내가 없는 2개월 동안 더 비대해지고 지독해져서 어떻게 박래현을 벗어나야 할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윤준영.”

“…….”

“나랑 결혼해 놓고 도망가더니….”

남자는 잇새로 물기가 서린 말을 내뱉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듯 목소리가 떨렸고 다음 말을 잇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

“내가 필리핀을 뒤져 가며 널 찾고 있는 동안 넌, 다른 알파 아이를 가져? 너 미쳤어? 돌았냐고!”

“억울하면 박래현 씨도 다른 오메가 만나요. 그 오메가랑 애까지 낳아서 날 잊어 주면 더 좋고.”

“윤준영, 씨발 끝까지 잘못했다고 안 빌지?”

박래현이 차가운 손으로 내 얼굴과 뒤통수를 감싸더니 엄지로 볼을 문질렀다. 부드러운 동작이지만 커다란 손안에 얼굴이 들어가고도 남아서 박래현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찌그러트릴 수 있다는 힘의 과시로 느껴졌다.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나랑 결혼했으니까 당연히 우리 아이를 배야지, 왜 다른 새끼 애를 배고 있냐고. 이게 잘못이란 생각이 안 들어?”

이번엔 박래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박래현 때문에 뼛속 깊이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법을 배웠다. 박래현 때문에 믿음이 쓰디쓰다는 걸 배웠고 5년을 안고 가야 할 지독한 사랑을 배웠다. 지금껏 잘 배웠으니 그 보답으로 잔혹하게 이별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차례였다.

“다른 새끼나 박래현 씨나, 저한텐 다를 바 없는 알팝니다. 당신이 저한테 뭐 특별한 줄 아세요? 강제로 결혼했으니까 제 의사로 이혼하고 싶어요.”

“…윤준영. 진심이야?”

차가운 눈빛과 말투에 느리게 뛰던 심장이 무참하게 짓뭉개졌다. 별이와 나를 위해 어서 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지는 줄다리기를 끝내고 싶었다.

“네.”

단호하게 대답하고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더니 간격을 두고 내 뺨으로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처음엔 눈물인 줄 알았는데 시트 위로 점점이 피가 고였다. 놀라서 돌아보니 박래현이 코피를 뚝뚝 흘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섭게 쏟아지는 피에 끔찍했던 기억이 떠올라 심장이 팔딱거렸다. 내 안을 채우고 있는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에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장지를 한 움큼 뽑아 박래현의 코 아래 갖다 댔다. 화장지는 금세 새빨간 피로 축축해졌다. 박래현에게 큰일이 생길 것 같아서 나는 허둥지둥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현기증이 나면서 눈앞이 노래졌다.

“형,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가서 승무원 불러올게요!”

“됐어. 내가 지혈할게.”

“피가 너무 많이 나요. 안 되겠어요.”

“준영아, 가만있어 봐, 내가 피 닦아 줄게.”

박래현은 손등으로 내 뺨에 묻은 피를 훔치다가 계속 코피가 흘러서 안 되겠는지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못 본 새에 박래현에게 병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느라 얼굴에 묻은 피를 닦을 말미도 없이 초조하게 침실 안을 서성거렸다. 화장실에서 간간이 물소리가 들리고서 한참 뒤에야 박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피는 멈췄고 세수를 해서 그의 얼굴은 말끔해졌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 있어요? 코피 자주 났어요?”

박래현과 살면서 그가 코피 흘리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새벽에 귀가해서도 매일 운동을 하며 자기 관리를 해 온 사람이라 건강 하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누구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래.”

“어디 다른 데 아픈 거 아니에요? 형, 서울 도착하면 병원에 가 봐요.”

“너만 속 안 썩이고 말 잘 들으면 돼.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쉬고 있어.”

옷에 피를 잔뜩 묻힌 채 피로에 물든 얼굴을 하고서 박래현은 침실을 나갔다. 태어나서 코피를 한 번도 흘려 보지 않았기 때문에 스트레스로 코피를 흘린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스트레스가 아니라 다른 데가 안 좋아서 코피를 흘렸을까 봐 걱정이었다.

박래현은 이래저래 존나 신경 쓰이게 하는 남자였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사라지고 거의 3주를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날 찾아다녔을 테니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학원에서 박래현을 보았을 때도 상태가 썩 양호한 편은 아니었다. 그는 금방 쓰러질 것 같은 기색으로 학원생 명단을 읽고 있었다. 불안함에 침실을 서성이던 나는 박래현과 이혼하겠다며 큰소리 뻥뻥 쳐 놓고 가슴 졸이며 그를 걱정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어이가 없어졌다. 이래 놓고 이혼을 입에 담다니 박래현이 내 말을 무시할 만했다.

박래현이 눈물을 흘리든 코피를 쏟든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화장실로 갔다. 박래현은 얼굴에서 피를 닦아 준 게 아니라 얼굴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나는 얼굴과 손에 묻은 피를 비누로 씻어내고 침실로 나갔다. 피가 묻은 침대에 눕고 싶지 않아서 블라인드를 걷고 타원형의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구름 숲이 천천히 다가왔다. 비행기가 구름 안으로 들어가자 희부연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봤을 땐 형체가 분명했는데 안으로 들어갔더니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원래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블라인드를 내리고 침대 모서리에 엉덩이 끝만 걸치고 앉았다. 박래현은 저 구름 같은 존재였다. 밖에서 볼 땐 커다란 구름인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박래현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그에게 각인해서인지 무차별하게 쏟아지는 감정들은 또렷하게 인식되었다. 그가 느끼는 절망과 분노와 소유욕이 고스란히 내게 흡수되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이성이 아니라 피부로 스며드는 거센 감정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별이가 쉬고 있는 배를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윤별, 미안해. 너한텐 다 미안해.”

JS 제약의 후계자가 될 기회를 박탈했으므로 배 속 아이에겐 잘못한 게 맞았다. 박래현과 아이가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한 거짓말이지만 아이에게 이미 마음을 줘 버려서 별이를 포기할 순 없었다. 이로써 박래현은 내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 테고 나는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내년엔 별이를 낳아서 엄마랑 셋이 오순도순 즐겁게 살면 내 인생은 해피엔딩이다. 이 기회에 박래현과 확실하게 정리하기로 마음을 굳힌 나는 바지를 입고 너절해진 셔츠 단추를 채웠다. 중간에 단추 두 개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옷 벗고 편하게 이 옷으로 갈아입어.”

박래현이 발소리도 없이 내 옷을 챙겨서 침실로 들어왔다. 폴로 티셔츠와 속옷, 신축성 있는 팬츠를 침대에 내려 두고 박래현은 창문 앞 안락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내게 쏟아지는 시선을 의식하면서 나는 셔츠를 벗고 티로 갈아입었다. 박래현은 내가 옷을 다 입은 것을 보고 옆 의자를 두드리며 와서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운동화를 질질 끌며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아이는 어떡할 거야. 낳아서 키울 거야?”

“네.”

“나랑 결혼했으면서 남의 아이를 낳아서 키우겠다고? 넌 뭐든 네 멋대로고 나는 안중에도 없지.”

“박래현 씨가 혼인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줄 알았어요.”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요.”

“대체 내 말을 왜 안 믿어 주지? 돌아가서 아이는 지우자. 넌 내 아이 아니면 못 낳아.”

“씨발, 방금 했던 말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아이에게 귀가 생겼다면 박래현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버럭 화가 났다. 내가 보고 싶었다며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던 박래현은 차갑고 오만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아이를 낳겠다는 이유가 뭐지? 혹시 아이 낳고 그 남자랑 다시 만나기로 했어? 그 사람한테 마음이 있다면 모를까 난 네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상대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박래현은 답답한지 자세를 고쳐 앉고서 내 팔뚝을 잡았다. 메마른 손등엔 박래현 심정을 대신해서 새파란 핏줄이 펄떡였다. 내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금방이라도 노여움을 토해 낼 것 같은데 박래현은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며 감정을 삼켰다.

“수술이 두려워서 그래? 수술 말고 먹는 약으로 안전하게….”

박래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팔뚝에 얹힌 그의 손을 잡아 거칠게 집어 던졌다.

“제 아이니까 제가 알아서 결정할 겁니다. 전 박래현 씨랑 이혼할 생각이니까 아이 걱정은 그만하셔도 됩니다.”

“윤준영, 아주 쉽네. 1초도 고민 않고 바로 이혼 얘기가 나와? 내가 너한테 그 정도밖에 안 돼?”

“…….”

“한 가지만 묻자. 내게서 도망갈 정도로 그렇게 내가 싫었어? 잠깐의 망설임도 없었냐고.”

박래현은 페르세포네가 삼킨 달콤한 석류 씨앗을 내게 건네며 라이터 뚜껑을 열었다가 닫는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했다. 나는 진득하게 올라오는 감정을 누르며 박래현과 박영범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대화로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도 상기했다. 초롱이를 생각하면서 나는 별이를 지키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네, 싫었어요. 전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박래현은 희게 각질이 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눈을 감았다.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 적막이 흐른 뒤에 박래현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관절이 하얗게 불거지도록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가 견고한 라이터가 부서질 것 같았다.

“오늘은 서로 감정이 격해진 상태니까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제가 원하는 결과는 변하지 않습니다.”

박래현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켜 침실을 나갔다. 피로가 몰려와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박래현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오늘 오전에 알았는데 오후에 이혼 얘기가 오갔다. 꽤 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몸이 축 늘어졌다.

헤어져 있는 동안 자신이 했던 행동을 돌아보고 그 결과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닫길 바랐건만 박래현은 오로지 나를 찾는 데만 집중한 듯했다. 박래현에게서 죽을 힘을 다해 벗어나려 했지만 내 도주는 아무 성과 없이 두 달간의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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