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밤 열 시쯤에 집에 도착했다. 9월 26일에 떠나서 11월 17일에 돌아왔으므로 거의 두 달 만이었다. 박래현은 경호원들에게 퇴근을 지시하고 손으로 내 어깨를 감싼 채 집에 들어갔다. 정 차장과 이 차장, 박영범이 현관 입구에서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준영 씨, 얼굴이 반쪽이 됐네. 잘 좀 먹고 지내지, 왜 이렇게 말랐어요. 이 차장이 준영 씨 좋아하는 음식 많이 준비했으니까 어서 밥부터 먹어요.”
“정 차장님, 보고 싶었어요. 이 차장님도요.”
“준영 씨, 필리핀 가서 공부 열심히 했나 봐요, 얼굴이 수척해졌어요.”
“박 실장님도 잘 지내셨어요?”
겨우 3개월 머물렀던 집인데 마치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사람들이 나를 반겼다. 정 차장은 내 등을 토닥이며 주방으로 날 데려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들은 전부 깔끔하고 맛있어 보였지만 비행기에서는 모처럼 얌전하던 아이가 맛있는 음식을 보고도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꾹 참으며 나는 박래현이 뒤로 끌어 준 의자에 앉았다.
“준영 씨, 낙지볶음이랑 떡갈비 했어요. 김치도 새로 담았으니까 맛있게 먹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다가 토기를 참을 수 없어 내 방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변기에 대고 쓴 물이 넘어올 때까지 먹은 것을 게워 냈다. 토할 때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다 토하고 났더니 이번엔 목이 따끔거리고 숨이 차올랐다. 입덧이 심해서 아이가 제대로 영양 섭취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제일 걱정이었다.
밥 생각이 없어서 천천히 샤워를 마치고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못 보던 가방 두 개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내가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고도 박래현은 가방을 사다 주겠다던 약속을 지킨 모양이었다. 즉 그 남자 머릿속에 나를 찾지 못한다는 가정 따윈 아예 없었다는 말이었다. 나는 오랜만에 파자마를 꺼내 입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은 내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오전에 잠깐 필리핀으로 떠났다가 밤이 돼서 집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그대로였고 이곳에서 일상도 변함이 없었다.
달라진 건 별이를 임신한 나였고, 계절이었고, 테라스 너머에 있는 산수유나무였다. 집을 떠날 즈음에 나뭇잎이 노랗게 변색 되면서 구부러져 열매가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잎이 거의 다 떨어져서 붉어진 열매만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걸 보며 나는 마침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준영 씨, 들어가도 돼요?”
문이 열린 틈으로 박영범 얼굴이 보여서 나는 일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박영범이 딸기와 따뜻한 차를 쟁반에 담아서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쟁반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 안경을 한번 추어올리고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속이 안 좋아 보여서 딸기랑 매실차 가져왔어요. 몸은 괜찮아요?”
“입덧 때문에 그래요. 이번엔 입덧이 좀 심해서요.”
“아, 임신했어요? 혹시… 래현이 애입니까?”
“아니요. 상대는 누군지 모르겠고 제 애란 것만 알아요.”
보스를 닮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박영범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따가운 시선을 외면하고자 차를 들어 한 입 마셨다. 신맛과 단맛이 적당히 섞인 차가 뒤집힌 속을 살살 달래 주었다.
“그런데 두 분 능력이 참 좋네요. 나름대로 꼭꼭 숨었다고 숨었는데 3주 만에 찾아내다니.”
“래현이가 찾아낸 겁니다. 준영 씨 필리핀으로 떠나고 나서 래현이가 만사 제쳐 두고 준영 씨 찾는 데만 매달렸어요.”
나와 해준을 찾는 실력으로 보아 박래현이 마음먹어서 못 할 일은 없어 보였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왜 해준이 한 일은 밝혀내지 못했던 걸까. 오해와 편견이 눈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면 남자는 의외로 쉽게 진실에 접근했을지도 모르겠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박 실장님이 고생 많으셨겠네요.”
“저기… 래현이 지금 미친 듯이 술 퍼마시고 있어요. 가서 좀 말려 줄래요? 저러다 탈 나서 병원에 실려 가면 어떡해요.”
“제가 왜 말려야 해요? 취하면 그만 마시겠죠.”
“준영 씨 필리핀에 도착한 날, 어학원 대표랑 호텔 들어갔죠? 래현이가 둘이 같은 방 쓴 거 확인하고 충격을 받아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그래서요?”
“래현이 막을 사람은 준영 씨밖에 없어요.”
박래현이 해골처럼 마른 건 제대로 먹지 않고 술만 마셨기 때문이었다. 박수현과 다르다고 큰소리친 주제에 박래현은 박수현이 했던 것처럼 자신을 망가뜨리고 학대하고 있었다.
“준영 씨, 부탁할게요. 내가 말해 봤자 듣질 않아요. 걔 지금 정상이 아니라….”
“저한테 이러지 말고 박 실장님 보스는 박 실장님이 직접 챙기세요. 전 제 아이 보살피기도 바빠요.”
차가운 대답에 박영범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을 나갔다. 나는 매실차를 내려놓고 탱글탱글한 딸기를 집어 먹었다. 박영범 부탁을 쌀쌀맞게 거절했지만 해쓱한 얼굴이 생각나서 자꾸 신경 쓰였다. 게다가 박래현이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몰라 불안했다. 그가 들어와서 작정하고 페로몬을 풀면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금방 나가떨어질 것이다.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단속해야겠다는 생각에 문을 열고 바깥 동향을 살폈다.
“래현아, 술 그만 마셔. 연구 센터에서 올린 보고서는 다 확인했어? 내일 타깃 선정하기로 했잖아.”
“내일 아침에 보면 돼. 지금은 다른 일이 눈에 안 들어와.”
“알았다.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 자.”
환하게 불이 켜진 거실 쪽에서 박래현과 박영범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박영범이 옆에서 그만 마시라고 채근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포기하고 2층으로 올라가는 듯했다. 박래현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대로 둬선 안 될 것 같아서 거실로 나갔다.
박래현은 얼음 없이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있었다. 한 병을 혼자 다 마셨는지 테이블 위에 텅 빈 병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술잔을 뺏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박래현 씨, 술 그만 마시고 들어가 자요.”
“윤준영. 준영아, 보고 싶었어.”
박래현은 약삭빠르게 내 허리를 끌어안고 파자마 자락을 걷어서 배에 얼굴을 비볐다. 아이가 들어 있는 아랫배에 따스한 숨결이 흩어졌다. 나는 박래현을 잠시 내버려 두었다가 그를 뒤로 밀어냈다. 박래현은 허탈한 얼굴로 술잔에 손을 뻗었다.
나는 도로 잔을 뺏어 장초가 수북한 재떨이에 술을 부었다. 박래현이 나를 보더니 입술 끝을 끌어 올려 웃었다. 술기운에 창백한 피부와 대조적으로 발갛게 단 입술이 도드라졌다.
“너, 네가 어떻게 다른 알파 애를 가질 수 있어? 임신 아니라고 말해. 나 골탕 먹이려고 거짓말하는 거지.”
“거짓말 아닙니다. 전 들어가 잘 건데, 박래현 씨는 제 방 말고 다른 방에서 주무세요. 그 말 하려고 나왔어요.”
손으로 짓뜯고 싶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빼빼 말라서 뼈대만 남은 얼굴은 우아한 선과 굴곡을 뚜렷하게 부각해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나는 일부러 눈을 내려 뺨과 입술 언저리를 훔쳐봤다. 박래현의 가장 큰 무기는 돈도 머리도 아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수려한 얼굴일 것이다.
“우린 부분데 왜 각방을 써. 혼인 관계 증명서 다시 보여 줘?”
박래현은 일어나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서 귀뺨에 입술을 비볐다. 독한 술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냈지만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풀리진 않았다. 방문 앞에 멈춰 서서 나는 문에 등을 기댄 채 박래현을 마주 보았다. 박래현은 팔을 뻗어 양팔 사이에 나를 가두고는 애타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윤준영. 너 진짜 내 앞에 있는 거 맞지?”
따뜻한 입술이 코끝을 스치고 인중에 닿았다. 더 내려오지 않고 입술을 뗀 박래현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주시했다.
“나 밀어내지 마. 준영아, 옆에 있게 해 줘.”
“저 피곤해서 들어가 잘래요.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저녁은 나랑 나가서 먹을까? 내가 괜찮은 식당 알아 놨어.”
“전 내일도 쉬고 싶어요. 다른 사람하고 가세요.”
박래현은 나를 놓아주기 싫은 얼굴로 머리카락과 얼굴을 매만졌다. 궁합이 잘 맞는 오메가와 오랜만에 만났으니 내 옆에 있고 싶은 심정은 십분 이해했다. 박래현 입술에 혀를 삽입해 부드럽고 뜨뜻한 살덩이를 맛보면서 희열에 젖고 싶은 욕구는 나도 갖고 있었다.
“정확하게 언제 애가 생긴 거야?”
“히트 사이클 때….”
“히트 사이클이 언제였는데?”
“그러니까… 10월 15일이었나? 그쯤 됐을 겁니다.”
필리핀에 도착하자마자 알파와 관계했다고 하면 나와 호텔에 간 김경준을 의심할 것 같아서 적당한 날을 골랐다. 머뭇머뭇 거짓말하는 목소리가 내 의도와는 달리 작게 떨렸다.
“15일이 확실해? 네 주기가 40일이니까 계산이 딱 맞네.”
박래현은 위스키 한 병을 비운 사람답지 않게 재빨리 계산을 마쳤다. 박래현과 나는 생각에 잠겨서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아이를 지우자는 말을 하면 화를 낼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박래현은 다른 말을 꺼냈다.
“유산 후엔 간혹 히트 사이클이 앞당겨질 수 있다던데, 혹시 우리 아이 아닐까? 가서 검사해 보자.”
대답을 기다리면서 박래현이 마른침을 삼켜 울대뼈가 크게 움직였다. 말을 고르는 동안 내 입 안과 입술도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박래현 기대를 또 짓밟아야 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박래현이 포기하면 깨끗하게 해결될 텐데 남자의 위험한 시선을 보면 그럴 일은 없을 듯했다.
“제 히트 사이클은 15일이 맞아요. 박래현 씨랑 전혀 상관없는 날짜입니다.”
“믿을 수 없어. 너 거짓말 잘하잖아.”
“설마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유전자 검사 같은 거 할 생각은 아니겠죠? 전 절대 검사 안 받아요.”
“아주 간단한 검산데 검사를 안 받겠다는 이유가 뭐지?”
“박래현 씨 아이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지울 생각이죠? 아이를 걸고 그런 짓은 절대 안 할 겁니다.”
나는 박래현이 보는 앞에서 문을 쾅 닫고 문을 잠그려고 손잡이 잠금장치를 찾았다. 내가 사라진 사이에 문손잡이를 바꿨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잠금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씨발, 아무 때나 밀고 들어오겠다는 건가? 한참을 문 앞에 서 있다가 침대로 가서 누웠다. 박래현은 별이가 자기 아이일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듯했다. 혹시라도 박래현이 포기하고 놓아주길 바라서 거짓말을 했는데 그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별이 친부가 누구인지 금방 들통날 것이다.
별이를 지킬 방법을 모색하던 도중 내가 보고 싶었다고 말하던 박래현과 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겠다던 박래현이 번갈아 가며 등장했다. 비행기에서 했던 말과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종합해 보면 박래현이 보여 준 애정과 질투가 거짓만은 아니었다.
박래현이 복수심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정말로 나를 좋아해서 놓아주지 않는 거라면? 내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서 나를 찾은 거라면? 나는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뒤척였다. 내가 박래현을 좋아하고 박래현이 내게 마음이 있다 해도 그가 나와 초롱이에게 했던 짓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각인 안 했어. 오늘도 오메가 둘이 노골적으로 날 유혹하더라.’
잊고 있던 말이 생각났다. 박래현이 나를 사랑해서 집착했다면 벌써 각인을 했어야 말이 된다. 그가 내게 각인하지 않은 건 내게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변함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객관적인 지표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엔 없던 살집이 생겼지만 새로운 생명체가 자리 잡은 거로 보이진 않았다. 별이와 내 운명은 어떻게 될까. 한번 도망갔다 잡혀 와서 이제 도망은 선택지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도망으로 해결할 단계는 지나 버렸다.
***
박래현과 마주치는 시간을 줄이려고 새벽까지 공부하고 오전에 늦게 일어나는 생활을 이어 갔다. 그러나 박래현이 6시나 7시가 되면 어김없이 퇴근해서 저녁 시간은 함께 보내야 했다. 그는 집에 오는 길에 케이크와 쿠키, 아이스크림 등을 사 와서 공부하는 내게 갖다 주었다. 간식만 갖다 주고 나가면 환영인데 간식을 구실로 그는 내 옆에 앉아 회의 자료를 읽거나 학술 잡지를 뒤적였다. 그러다가 뻔뻔하게 내게 기댄 채 잠들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기보다는 소파에 앉아서 편한 자세로 공부하다 보니 박래현이 쉽게 스킨십을 하는 듯했다. 오늘 밤에도 핑계를 대고 내 방을 찾을 것 같아서 나는 그가 옆에 앉을 수 없게끔 길게 누운 자세로 책을 봤다.
“온종일 공부만 했어? TV도 보고 거실에 노트북 갖다 놨으니까 인터넷도 하고 그래.”
박래현은 보고서와 한라봉이 든 쟁반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 옆자리를 눈으로 가늠해 보다가 나와 대각선 위치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나는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책장을 넘겼다.
“어머니 안 보고 싶어? 귀국하면 어머니부터 만나러 갈 줄 알았는데 의외네. 이번 주말에 나랑 같이 가자.”
집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어영부영 병원에 찾아가기보다는 박래현과 엉킨 실타래를 확실하게 풀고 가벼운 마음으로 엄마를 만나고 싶어서 나는 병원에 들르는 것을 뒤로 미뤘다. 엄마는 내가 뉴욕에서 산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만남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박래현을 예뻐하시는 엄마가 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당연히 이혼을 반대하실 것이다. 우리 사이에 벌어진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어서 나는 곤란한 상황에 빠질 게 뻔했다.
“박래현 씨랑 관계를 정리한 다음에 만나러 갈 겁니다. 중간에 괜히 혼선을 일으키고 싶진 않아요.”
“관계를 정리하다니?”
“같은 말 여러 번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을 뱉었다. 박래현이 한라봉 껍질을 벗기고 있는지 상큼한 귤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입에 저절로 침이 고여서 박래현 몰래 침을 꿀꺽 삼켰다.
“난 수현이 일 다 정리했어. 혹시 그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
“아니요. 박래현 씨한테 받았던 비인간적인 대우를 절대 잊을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 화 풀릴 때까지 준영이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뭘 해도 상관없어.”
박래현은 한라봉 속껍질까지 다 벗겨서 탱글탱글한 알맹이만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별이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나는 팔꿈치를 소파에 대고 몸을 반쯤 세운 채로 한라봉을 받아먹었다. 달콤하고 시원한 알맹이는 입 속에서 금방 녹아내렸다. 박래현은 솜씨 좋게 속껍질을 벗겨서 맛있는 알맹이를 계속 공급했다.
“어머니 만나러 가자. 어머니도 너 보고 싶으실 거야.”
“저랑 이혼 안 해 주는 이유가 뭡니까? 다른 오메가도 많은데 제가 꼭 박래현 씨 아이를 낳아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사랑한다고 백번 말해도 한 번을 안 믿지.”
내가 자고 있을 때 귀에 속삭였다면 모를까 내가 기억하는 고백은 딱 한 번이었다. 구차하게 따지지 않더라도 내가 박래현 말을 믿지 못할 근거는 많았다. 내 앞에서 거짓말하는 것과 내 뒤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 중 어떤 쪽을 믿어야 할지는 명백했다.
“준영아.”
박래현은 물티슈에 끈적해진 손을 닦으며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름만 불렀는데 어딘가가 만져지는 듯 질척하고 야한 목소리였다. 박래현 품에 안겨 냄새를 맡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가 필리핀에 도착한 날, 김경준이랑 호텔에 들어간 영상을 봤어. 그때 내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
“…….”
“김경준을 잡아다 찢어 죽이고 싶었어. 당장 널 데려다 족쇄를 채워서 집에 감금시킬까도 고민했지. 눈뜨고 널 놓친 사람들과 혼자서 뉴욕에 간 날 용서할 수 없었어. 나도 너처럼 수현이가 멍청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씨발, 네가 다른 남자 품에 안겨 호텔에 들어선 모습을 보자 눈이 확 뒤집히더라고.”
“안 궁금하니까 그만해요.”
김경준은 그날 태풍이 심해서 바기오로 가다가 마닐라 외곽에 있는 호텔에 들렀다고 했다. 마닐라만 해서 수백 개의 호텔이 있을 텐데 그걸 다 뒤지고 다녔나 보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서 나는 반듯하게 일어나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박래현은 틈을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로 다가왔다.
“심장이 난도질당해서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어. 그 찰나에 난 수현이가 저질렀던 극단적인 행동을 이해하게 됐어. 그 녀석도 죽을 만큼 괴로웠으니까 그랬을 거야.”
박래현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살아 있는 뱀이 되어 나를 친친 감았다. 굵직한 몸통으로 다리부터 목까지 나를 휘어 감아서 숨을 못 쉬게 옥죄었다. 나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절대 놓아주지 않을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 별이를 키우며 소소하게 살 미래를 꿈꾸다니 내가 순진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벌써 지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간 내게 잘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거라고 용기를 북돋웠다. 나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도 박래현에게 몸으로 부딪쳐 돌파구를 찾아낸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네가 사귀었던 남자들, 심지어 수현이마저 질투했지만, 그건 나를 만나기 전 일이라 어쩔 수 없다고 넘겼어. 그런데 김경준은 그게 아니잖아.”
그날 일을 설명하기 위해 벌어진 입술에 길쭉한 손가락이 안착했다. 한 손으로 소파 등받이를 짚은 채 입술선을 따라 다른 손을 움직이며 박래현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더 가까워지면 초점이 맞지 않을 거리에서 멈춘 그가 엄지로 입술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이 다디단 입술을 나만 빨아야 하는데… 안에 든 혓바닥과 손가락, 발가락, 머리카락, 네 몸에 숨겨 둔 구멍 전부 나만 만지고 넣을 수 있는데, 다른 새끼가 널 건드렸다고 생각하니까 심장이 부서지는 거 같았어.”
“그날 태풍이 너무 심해서 호텔에 들른 거예요.”
“네가 날 좋아한다고 해서 미련하게 마음이 떨렸어. 너한테 잘 보이려고 경호원들을 집 안에 안 두고 집 밖에 둔 게 패착이었어. 네가 도망가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네가 날 좋아할 이유가 없는 거야.”
그 순간을 회상하며 후회하듯 박래현 입가에 자조 섞인 웃음이 어렸다. 박래현은 내게 잘못한 게 많아서 내가 먼저 말해 주지 않는 한 내가 그에게 각인한 것도,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도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당장 어학원에서 널 끌고 올 수도 있었지만, 참았어. 내가 너한테 상처를 많이 줘서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잠시 지켜보자고 다짐했어. 오승현 말로는 착실하게 공부만 한다고 했으니까, 너 공부 끝날 때까지만 풀어 줄까 고민도 해 보고.”
박래현은 늘 그래 왔던 사람처럼 커다란 손으로 목과 뒤통수를 감싸며 윗입술을 깨물었다. 놀라서 고개를 틀었더니 까슬까슬한 입술이 귀뺨으로 미끄러졌다.
“최우진이란 새끼가 널 건드렸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 빡쳐 있는데, 네가 김경준과 데이트 한다고 하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 그래서 무작정 널 데리러 필리핀으로 날아갔어. 네가 더 큰 폭탄을 배에 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지켜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해야 합니까?”
“너 보고 싶은 거 참느라 힘들었다고.”
“그런 말 듣기 싫어요.”
“…책 봐.”
박래현이 보고서에 집중하자 나도 분철한 책을 집어 들었다. 박래현이 나를 찾은 진짜 이유를 한참 전에 알고 있는데도 거짓말에 마음이 쏠리는 걸 보면 나는 참 줏대 없는 남자였다. 필사의 각오로 뛰어들어도 부족할 판에 이따위로 박래현과 이혼할 생각이라면 패배는 단연 내 몫이었다. 박래현에게 별이를 뺏기지 않으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허벅지가 저리고 무거워서 자세를 바꾸려고 보니 박래현이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귀를 잡아 얼굴을 떼어 내려고 하자 그는 아예 방향을 틀어서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배에 푹 파묻힌 얼굴을 뒤로 밀어내던 손을 멈추고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필리핀에 있을 땐 임신을 확인한 뒤로 늘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는데 박래현과 함께 있으니 비어 있던 곳이 충족되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한참을 그대로 두었다가 박래현 머리를 소파에 내려놓고 책을 챙겨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 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이혼 얘기는 진척이 없고 하루가 물 흐르듯 지나갔다. 박래현은 이혼 얘길 피하며 자연스럽게 날 눌러앉힐 생각인 듯했다. 뻔히 알면서도 어영부영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 박래현 옆을 편하게 느끼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절대 박래현이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 넘어가지는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책을 펼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박래현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보다 둔 책들과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사이드 테이블에서 못 보던 핸드폰을 발견한 나는 핸드폰을 집어서 전원을 켰다. 핸드폰에는 아침 꼭 챙겨 먹으라는 박래현 문자가 와 있었다.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주방으로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아이를 생각해서 내일부턴 세끼를 다 챙겨 먹기로 했다. 임신한 뒤로 병원에 가지 않아서 아이 주 수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대략 9주에서 10주 정도 됐을 것이다. 별이가 첫째라면 불안에 떨며 얼른 병원부터 찾았을 텐데 둘째라 그런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마음 편하게 잘 먹고 잘 지내면 아이도 따라서 잘 지낸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정 차장이 갈아 준 토마토, 사과 주스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전공 책을 펼쳤다가 도로 덮었다. 별이를 낳고 복학해서 졸업하려면 3년이 걸리는데 현실적으로 대학 졸업은 힘들었다. 이제 나 혼자가 아니니까 취직을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내년 6월쯤에 별이가 태어날 테니 그사이에 전산회계 1급과 재경관리사 자격증을 따 놓고 별이를 낳은 뒤 바로 취직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목표를 하향 조정한 후에 공부 계획을 다시 짜고 있는데 박래현에게서 문자가 왔다.
「준영아, 우리 오늘 늦어. 저녁 먹고 먼저 자.」
학습계획과 시간표를 짠 뒤에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핸드폰으로 이혼하는 방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박래현은 이전 폰에 프로그램을 심어서 나를 감시했는데 이번이라고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이미 이혼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박래현이 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검색 결과 이혼에는 협의 이혼과 재판상 이혼이 있는데 부부가 합의해서 하는 협의 이혼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상대가 합의해 주지 않으면 재판까지 가야 해서 결혼 계약서 조항을 어기고 결혼 생활을 불성실하게 한 내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문제는 박래현을 어떻게 설득하느냐였다. 남의 아이를 가졌다는 데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박래현을 설득해서 협의 이혼을 끌어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내친김에 폰뱅킹을 열어 입출금 내역을 확인했다. 박래현은 10월과 11월에도 내 통장으로 5억씩 입금해서 통장엔 내가 출국하기 전보다 많은 돈이 쌓여 있었다. 내가 돈을 쓸 수 없게 조치했을 거라고 여겼는데 되레 돈이 불어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엄마 병원비도 박래현이 계속 내고 있을 것 같았다. 해준에게 전화해서 확인해 보려다가 마음을 바꿔 정우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녀석은 김경준에게 내 소식을 듣고 몹시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정우 전화번호를 눌렀다.
- 여보세요.
“정우야, 나야, 윤준영.”
- 윤준영!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너 지금 어디야.
“나 지금 서울이야. 일요일에 서울 왔어.”
- 씨발 나 경준 형한테 존나 깨졌다. 너 언젠 혼인 신고 안 돼 있다면서!
“내가 혼인 신고서 가방에 있는 거 분명 내 눈으로 봤거든. 나도 모르게 언제 했나 봐.”
박래현이 나와 결혼할 의사가 없다고 여겼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혼인 신고서를 내려던 박래현은 바쁜 와중에 유산 문제가 겹쳐서 제때에 내지 못하고 뒤로 미룬 듯했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쟁이가 돼서 정우에게 민망했다.
- 아주 둘이 쌍으로 지랄 쌈 싸 먹고 있네. 앞으로 두 사람 일은 두 사람이 해결해. 남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야, 알았어. 미안해. 대표님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
- 준영아, 근데 내 보기엔 너 그 남자한테 벗어나는 거, 아무래도 힘들 거 같아.
내 처지를 명확하게 짚어 낸 정우 목소리에 나는 수긍의 한숨을 내쉬었다. 벗어나려고 발악해도 박래현 손바닥 위만 맴돌고 있어서 기력이 달렸다.
“그래서 미치겠다. 아무튼 나 서울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중에 시간 되면 만나자, 연락할게.”
- 나 만나도 돼?
“내 친군데 왜 못 만나? 나 이제 박래현 씨 눈치 안 보고 내 의지대로 살아.”
- 퍽이나. 당분간 조심해. 나는 박래현 무서워서 너 못 만나겠어. 뭐라고 협박했는지 경준 형도 아주 벌벌 떨고 있더라.
“알았어, 나중에 뭐든 해결한 뒤에 연락할게. 끊어.”
뭐라고 협박했을지 안 봐도 본 것 같았다. 그 사람 약점을 잡아서 아주 탈탈 털었을 것이다. 정우 말대로 나는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이제부터 박래현과 관련된 일은 다른 사람 도움 받지 않고 무조건 나 혼자 해결하기로 결심하면서 주방으로 갔다. 박래현이 늦는다고 해서 정 차장 부부와 두런두런 얘길 나누며 혼자서 저녁을 먹었다.
“준영 씨,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요. 내가 다 만들어 줄 테니까.”
“만들어 주신 거 다 맛있어요.”
“준영 씨 없을 때 상무님이 준영 씨 애타게 보고 싶어 했어요.”
“…….”
“그런데 아이는 몇 주 정도 됐어요? 왜 병원에 안 가 봐요?”
두 부부는 배 속 아이를 박래현 아이로 알고 있는 듯했다. 굳이 두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정정하지 않았다.
“곧 가 볼 생각입니다. 저녁 잘 먹었습니다.”
밥그릇과 젓가락을 개수대에 옮겨 놓고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문득 아이 방이 궁금해서 방문을 열었다. 스위치를 켰더니 천장에 매달린 별 모양 전구가 색색으로 빛났다. 침대와 코끼리 인형,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까지 전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별아, 여기가 어딘지 모르지?”
질문만 던져 놓고 방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침대 위에 곱게 벗어 놓은 박래현 파자마를 발견했다. 박래현은 2층 손님방을 두고 내 방 소파나 여기 와서 잠을 자는 듯했다.
이 방엔 이불과 베개가 없고 침대는 박래현이 눕기엔 너무 작았다. 술을 마시고 아이를 그리워하며 바닥에 쓰러져 자는 박래현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쓰라렸다. 어쩌면 내 배 속에 든 별이 때문에 박래현은 초롱이가 더 그립고 안타까울 것이다.
정 차장에게 아기방 보일러를 켜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방을 나오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늦게 온다더니 빠른 귀가에 놀라서 후닥닥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박영범과 부딪쳤다.
“아, 준영 씨, 미안해요. 괜찮아요?”
박영범이 놀라서 내 어깨를 잡았다. 세게 부딪치진 않아서 아픈 데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혼자 들어오세요?”
“네. 회의가 길어져서요.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일찍 들어왔습니다.”
“저녁은요?”
“먹었습니다.”
박영범은 내게 할 얘기가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나는 그와 얘길 나누고 싶지 않아서 선수를 쳤다.
“그러면 들어가 쉬세요.”
“저기, 윤준영 씨.”
“네?”
“준영 씨와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잠깐 2층으로 올라갈래요?”
박영범 표정이 심각해서 심상치 않은 얘기가 나오리라고 예상했다. 나는 박영범을 따라 2층 거실로 올라갔다. 그는 내가 소파에 앉는 걸 보고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았다. 무슨 얘긴데 옷도 안 갈아입고 나와 얘기를 나누자는 걸까. 혹시 이혼 얘기일지 몰라서 나는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준영 씨. 정말 미안합니다.”
“뭐가요?”
내 시선을 피하면서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한번 묻자 박영범이 입을 열었다.
“…수현이랑 사귄 사람, 준영 씨가 아니라 윤해준 씨 맞죠?”
“그게 무슨….”
“래현이와 난 미국에 있다가 5월에 귀국했습니다. 15일경에 수현이 침실을 정리하다가 사람들이 매트리스와 헤드 사이에서 웬 차명폰을 발견했어요. 수현이가 급하게 떨어트리고 줍지도 못하고 나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요?”
“차명폰을 살펴본 래현이가 내게 윤준영 씨 뒷조사를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준영 씨 어머니가 급하게 심장 이식을 받지 않으면 위험한 상태여서, 제가 좀 서둘렀습니다. 그때 더 자세히 조사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
“윤해준 씨가 12월 초에 실종 신고가 되어 있어서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었습니다.”
박래현이 핸드폰을 발견했을 당시를 상상해 봤다. 동생 죽음으로 무기력의 늪에 빠져 있던 그는 핸드폰에서 영상을 발견하고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영상을 받은 시각으로부터 얼마 안 있어 박수현이 추락사했으니 그가 영상을 보낸 상대를 증오할 근거는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윤해준이 아니라 나를 잡아다가 분풀이를 했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조사를 제대로 해서 박수현과 사귄 사람이 해준임을 알아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납치당한 해준을 찾았을 테고 해준이 납치당하고 나서 영상이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것이다. 해준이 영상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박래현의 분노가 누그러져서 일은 간단하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준영 씨 유산하기 전에 래현이랑 내 방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래현이가 그때 준영 씨랑 윤해준 씨 뒷조사를 다시 하라고 지시했어요. 준영 씨가 동영상 보낸 거,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면서요.”
절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때 두 사람 대화를 듣고 충격에 빠져서 나는 박래현 핸드폰을 뒤져 내가 여기에 온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경찰이랑 윤해준 씨 찾으면서, 따로 윤해준 씨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
“자살한 알파 핸드폰을 입수해서 뒤져 보다가 수현이와 준영 씨, 아니 수현이와 윤해준 씨 사진을 한 장 발견했습니다. 그 알파가 준영 씨를 찍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찍힌 날짜를 추적했더니 준영 씨는 그 시간에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박영범은 흘러내린 안경을 추어올리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은 후회와 자책으로 심란하게 구겨져 있었다. 3개월을 함께 살면서 박영범이 불안하고 예민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그러리라고 예측했던 일이지만 박영범 입으로 직접 전해 들으니 분노로 속이 뒤집혔다. 나는 북받치는 화를 억누르며 땀이 축축하게 밴 손바닥을 바지 위에 문질렀다. 거짓말 위에 거짓말을 쌓아 겨우 정리했던 일들이 도로 엉망이 될 것 같은 예감에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윤해준 씨가 당신인 척 수현이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서 미칠 거 같았습니다. 제가 초반에 조사를 제대로 못 한 탓에 엉뚱한 사람 인생을 망치게 했으니까요.”
박영범의 까만 눈동자는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 이제껏 잘 묻어 두었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저 얘길 꺼내는 걸까. 침울한 박영범 얼굴을 보니 단단히 각오하고 얘기를 꺼낸 듯했다. 조용히 묻고 지나가기엔 이미 그른 것 같았다.
“사실을 알았으면서 상무님께 왜 말씀 안 드렸습니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윤준영 씨한테 마음을 주면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데, 또 래현이를 흔들고 싶지 않았어요. 유일하게 마음 줬던 동생이 죽고 나서 래현이는 진짜 못 봐줄 정도로 힘들어했거든요.”
“…….”
“윤해준 씨가 수현이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알게 되면 그 미친 자식이 복수한답시고 준영 씨한테 상처를 줄 텐데, 래현이가 그 때문에 또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웠어요. 그땐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바닥에 추락한 제 인권은 박 실장님께 좆도 아니었단 소리네요. 처음 조사를 잘못했으면 제게 미안해서라도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다 보니 화가 쌓여 갔다. 박영범은 내가 박래현과 계약을 맺고 지금까지 박래현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다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가증스럽게 끝까지 나를 외면하고서 자기 보스만 챙기려 들었다. 박영범은 고개를 숙이며 비난이 서려 있을 내 시선을 피했다. 고열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그의 목덜미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그 뒤로 얼마 안 있어 준영 씨가 사라졌고, 래현이 상태가 너무 극단으로 치달아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어요.”
“박 실장님, 존나 개좆같은 분이세요. 박 실장님 눈에는 오로지 박래현 씨 괴로워하는 것만 보였습니까? 누구 때문에 인생 꼬인 저는요? 씨발, 박 실장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준영 씨가 입 다물고 있길래 준영 씨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리라고 여겼습니다.”
내가 사정이 있어 입을 다무는 것과 박영범이 입을 다무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박영범은 잘못을 저질러 놓고 그 사실을 은폐하느라 급급해 나를 천하에 몹쓸 쓰레기로 만들었다.
“그래요. 저도 사정이 있어서 숨겼습니다. 박래현과 윤해준이 엮이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아서 입 다물고 있었어요. 이미 똥물 다 뒤집어썼는데 구정물 무서워서 피하겠습니까? 하지만 박 실장님이 그래선 안 되죠.”
박영범은 여전히 내 시선을 회피한 채로 붉어진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그는 묘하게 자포자기한 표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박래현 씨를 위해 계속 묻어 두지, 왜 이런 얘길 꺼내세요?”
“이번에 필리핀 다녀와서 래현이가 나를 거치지 않고 다른 루트로 일을 알아보는 거 같아서요.”
“…….”
“래현이가 알아내기 전에 사실대로 말해야죠. 미안해요, 내가 래현이를 상사로 모시면서 너무 래현이 위주로 생각했어요.”
“말로 사과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일을 책임지고 회사를 그만둘 생각입니다. 준영 씨한테 너무 미안합니다.”
“일을 그만두든 말든 그건 두 분이 알아서 하세요.”
필사적으로 감춰 왔던 비밀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되레 마음이 차분해졌다. 박영범이 증거를 쥐고 있다면 박래현 귀에 사실이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오랫동안 나와 박래현을 옭아맸던 일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을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우리 일을 남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나와 박래현 문제이므로 내가 직접 얘기하고 끝내는 게 좋을 것이다.
박래현은 복수 대상을 잘못 설정해 내게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가 자기 실수와 죄를 인정한 다음 우리 형제에게서 손을 떼고 조용히 물러나는 게 최선이었다.
“박 실장님. 제게 정말 미안하다면 상무님한테 입 다물어 주세요.”
“준영 씨. 래현이가 조사를 시작했으니 진실은 곧 드러날 겁니다. 더 감출 순 없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래현이 저도 한 짓이 있어서 준영 씨가 원하는 대로 이혼해 줄 겁니다.”
“상무님과 제가 풀어야 할 문제니까 제가 직접 말할게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직접 말하기 힘들 거 같은데 내가 하겠습니다.”
“제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뭐가 힘들어요. 박 실장님 덕분에 이런 일에 단련돼서 괜찮습니다.”
“…나중에라도 기회 있으면 내 잘못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쉬세요. 저 내려갑니다.”
나를 따라 일어서는 박영범을 두고 2층에서 내려온 나는 정신적인 피로에 지쳐서 거실 소파에 기대듯 앉았다. 다 알고 도망갔던 일이라 박영범 말이 큰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두 번째 조사를 통해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박래현에게 말을 하지 않은 건 계속 괘씸했다. 박래현이 필리핀에 다녀와서 세 번째 조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박영범은 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래현은 왜 뜬금없이 조사를 다시 하려는 걸까. 나는 필리핀에서 돌아오는 길에 박래현과 나눴던 대화를 곰곰이 분석해 봤다. 마구잡이로 지어낸 거짓말 속에 어떤 오류가 있었던 걸까. 박래현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동영상에 관해 내가 대충 얼버무려서 그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박래현이 알 거라면, 뒤로 미뤄 봐야 나만 힘들 것 같아서 주말 안에 담판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
「준영아, 오늘도 저녁 혼자 먹어야겠다. 회의 끝나면 바로 들어갈게.」
이 차장 부부가 3박 5일 일정으로 가족들과 휴가를 떠나서 나는 혼자 밥을 먹어야 했다. 냉장고 안에는 이 차장이 만들어 놓고 간 음식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커다란 접시 하나에 반찬 여러 개를 골고루 담고 그 한가운데 밥을 퍼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박래현은 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더니 그 일로 꽤 바쁜 모양이었다. 오늘도 새벽 한 시에 내 방문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 있다가 아기방으로 들어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아기방에 난방을 넣고 이불을 갖다 놔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박래현이 알면 다른 생각을 할 것 같아서 포기하곤 했다. 필리핀 호텔에서 박래현을 봤을 때 여기서 더 마를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갈수록 야위어 갔다. 밥도 잘 안 먹는 것 같고 밤에 혼자서 술 마시다가 잠드는 낌새인데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오랜만에 입욕제를 푼 물에 들어가 한가하게 노닥거렸다. 욕조에 등을 기댄 채 발뒤꿈치로 물을 첨벙거리며 놀다 보니 언젠가 내 발을 갖고 장난치던 박래현이 떠올랐다. 내게 못된 짓만 했던 것 같은데 다정하게 대했던 기억들도 꽤 있었다. 나는 과거를 씻어 내듯 손에 물을 가득 담아서 얼굴을 씻어 내렸다.
“별아,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아빠가 금방 할머니 만나게 해 줄게.”
어서 애매모호한 관계를 청산하고 엄마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샤워를 마친 나는 오늘은 기필코 끝을 볼 결심을 하고 옷을 골랐다. 파자마가 제일 편하지만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짙은 색 옷을 갖춰 입었다. 육아 책을 챙겨서 거실 소파로 간 나는 편한 자세로 앉아서 책을 펼쳤다. 책에 나온 주 수대로 별이는 순조롭게 잘 자라는 듯했다. 3주 후면 입덧이 가라앉는다고 하니 한 달만 더 고생하면 아이가 쑥쑥 자랄 것이다.
책을 보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어렴풋이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 보니 박래현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였다.
[KEB-C27은 FDA로부터 내년 4월 20일에 발효 일자를 부여받았습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이 날짜에 신약 허가를 받고 동시에 미국 전역에서 판매할 수 있습니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바로 내 위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비몽사몽간이라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잘 구별되지 않았다.
[아, EMA에서도 조만간 승인해 줄 겁니다. 그쪽은 내년 후반기부터 판매가 가능할 거로 내다봅니다.]
체온에 녹아 흐릿해진 향수 냄새에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커다란 손이 내 머리칼을 옆으로 쓸어 넘기고는 귓바퀴 뒤 움푹 팬 곳을 살살 어루만졌다. 어학원에서 보낸 2개월이 헛되지 않았는지 박래현이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도 신기하게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번 치료제는 재발 불응성 B세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항암제가 될 겁니다. 외에도 다수의 TCR-T 치료제 파이프라인을 개발 중입니다. 미스터 앤더슨, 그럼 잘 생각해 보고, 늦었으니까 자세한 얘긴 만나서 하죠.]
박래현은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내 다리와 목 사이로 팔을 넣어 나를 들어 올리려고 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 뒤로 밀어냈다.
“저 안 자요. 박래현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감았던 눈을 떴더니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박래현 얼굴이 있었다. 박래현 행동만 보면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2개월 공백은 가위로 잘라 낸 듯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박래현과 거리를 최대한 넓혔다.
“나 기다렸어? 보고 싶어서?”
“할 얘기가 있어서요.”
“무슨 말이 나올지 듣기 두렵네. 오는 길에 케이크랑 쿠키 사다 놨으니까 입맛 없을 때 먹어.”
“고맙습니다.”
“내일 토요일인데 우리 1박 2일로 스파나 갔다 올까? 따뜻한 물에서 쉬면 너랑 아기한테 좋을 거야.”
테이블에 걸터앉아 내게 눈을 맞추면서 박래현은 매듭을 풀어 넥타이를 재킷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가르마 없이 포마드를 발라 뒤로 넘긴 머리칼 아래로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가 희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데 입에선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언제까지 딴청 부릴 겁니까? 이혼하려면 서로 나눠야 할 얘기가 있을 거 같은데요.”
박래현은 재킷을 벗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내 쪽으로 상체를 숙여 눈을 맞췄다. 머리칼 몇 올이 남자의 이마로 흘러내렸다.
“난 너랑 이혼 안 해. 이혼할 사람과 결혼을 왜 하지? 윤준영에겐 결혼이 그렇게 쉬운 일이야?”
“우린 평범한 부부가 아니잖습니까.”
“난 이 결혼 깨고 싶지 않아. 네가 정 이혼을 원하면 이혼 소송 내고 나랑 싸워야 해.”
“소송은 복잡하니까 협의 이혼으로 하고 싶습니다.”
“소송 걸기 전에 알아 둬야 할 게 있는데, 혼인 관계 파탄의 주된 책임이 너한테 있기 때문에 넌 나를 상대로 이혼 청구 자체가 안 돼.”
“혼인 관계 파탄 원인이 제게 있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원인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나한테 있어. 하지만 법적으로 따지면 얘기가 달라지지. 결혼하고도 가출, 외도, 혼외 임신 기타 등등을 저지른 사람은 윤준영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박래현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노려봤다. 표정을 감춘 얼굴에서는 피로하다는 느낌 말고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헛된 희망을 품고 한 번 더 설득에 나섰다.
“우린 서로에게 맨 밑바닥까지 보였습니다. 그동안 저 충분히 괴롭혔으니까 협의 이혼으로 해 줘요. 소송까지 가고 싶지 않아요.”
어느덧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내가 소송을 걸면 박래현은 박영범을 비롯해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할 텐데 무조건 내가 지는 싸움이었다. 자격증을 따서 아이와 살 준비를 해야 할 판국에 별이를 배에 담고서 이혼 소송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소송을 한다면, 진흙탕 싸움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난 수단을 가리지 않고 널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지금 날 흙탕물에 굴리겠다고 협박하는 겁니까?”
“넌 절대 재판에서 이길 수 없어.”
“그 고고한 자존심 다 던지고 제게 집착하는 이유가 뭡니까? 정말 보기 추해요.”
“난 내 사람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 내가 너랑 아이한테 잘할게.”
내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박래현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빠른 속도로 평정심이 사라지고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다시는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상처를 직시하며 내 손으로 덜 아문 상처를 짓이겼다.
“왜요? 아직도 제게 복수할 마음이 남았어요? 사람 농락하지 말고 솔직해지는 게 어때요?”
“그 계획은 너랑 혼인 신고서 작성하면서 다 포기했어. 나한테 내 오메가와 아이보다 더 소중한 게 있겠어?”
“제가 들었던 말과는 완전 다르네요.”
“네가 들었던 말?”
나는 박래현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에 충격 받아서 나는 유산 방지 주사를 맞아야 했고 초롱일 보내야 했다. 끔찍한 말들은 아직도 이명으로 남아 나를 뒤흔들며 괴롭혔다. 행복의 정점에서 까마득한 바닥으로 추락하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한 미련한 감정들을 안고서 여기까지 왔다.
“박 실장님이랑 2층에서 술 마시면서 했던 얘기 다 들었어요. 이래도 아니라고 발뺌하실 겁니까?”
“형이랑 내가 술을 마셨던 날?”
“엄마 폐렴 다 낫고 얼마 안 돼서였어요.”
드디어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해 냈는지 박래현 얼굴에 가볍게 경련이 일었다. 그는 참담하게 무너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낮은 신음을 냈다. 한참만에 목을 뚫고 나온 목소리는 침전물이 일렁이는 물속처럼 탁하고 거칠었다.
“그날은 수현이 생일이었어. 난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너랑 몸을 섞었더라고.”
“…….”
“술에 취한 상태에서 수현이한테 미안한 감정이 앞서서 말이 심하게 나갔어. 어쨌든 넌 수현이 오메가였잖아. 그래서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했어.”
박래현이 내게 했던 짓들을 다 덮어 두고 박래현 인생에서 유일한 오메가가 되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날 박래현은 나를 깨끗하게 씻긴 뒤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었다. 그는 자정 무렵에야 박수현 생일을 알았을 테고 괴로운 마음을 안고 박영범과 술을 마신 듯했다. 그러나 박래현 말에 설득당하기 전에 초롱이가 생각나서 마음이 싸늘해졌다.
“전 당신이 밉습니다.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어요.”
총명하게 반짝이던 눈동자에 빛이 사라지고 굳게 닫힌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얼굴을 하고서 절망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 얼굴 위를 헤매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와 주먹 쥔 손에 머물렀다. 희게 관절이 일어난 손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그에게서 탄식 같은 말이 새어 나왔다.
“난 너랑 결혼한 순간부터 이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절 놓아줘요. 저는 제 아이 키우면서 열심히 살고 싶어요.”
표정 없는 얼굴 위로 조용히 시간이 지나갔다. 30분이 지났는지 한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시간이 흘렀어도 우리 사이의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에 나는 허벅지를 꼬집어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혼만 빼고 네가 원하는 거 다 들어줄게. 결혼할 때 썼던 계약서 다 찢고, 네 요구 사항을 담아서 계약서 다시 쓸 거야. 이혼은 절대 안 돼. 널 잃고는 하루도 못 버텨.”
“아이는 어떡하고요? 당신 아이도 아닌데 키우겠다는 겁니까?”
“우리 아인 거 다 알고 있어.”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확신에 찬 얼굴을 보니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내 말을 무시하고 유전자 검사를 했나 보다.
“씨발, 저 몰래 무슨 검사라도 했어요? 절대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너 자고 있을 때 몰래 피 뽑아서 검사를 맡겼지. 네 혈액으로 친부 확인이 가능하거든. 검사 결과 아이는 당연히 내 친자로 나왔어.”
“이 씨발! 미친 새끼야, 내가 유전자 검사 하지 말라고 했지! 왜 내 말 안 듣고 당신 좆대로 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모자란 애로 보여요?”
나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박래현 가슴팍을 퍽퍽 내리쳤다. 말라서 튀어나온 뼈대가 주먹 관절에 부딪혀 내 손이 얼얼했다. 내게 얻어맞으면서도 즐거운 듯 박래현 입가에 웃음이 맺혔고 그게 미워서 나는 더 힘껏 박래현 어깨를 주먹으로 찍어 내렸다. 몇 대를 더 때리고 나서 박래현에게 손목이 잡혀 그의 품으로 끌어당겨졌다. 나는 그에게 안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다.
“윤준영 반응 보니까 내 추측이 맞았네.”
박래현은 나를 소파에 앉히며 귀에 낮게 속삭였다. 멍청한 나는 그제야 박래현에게 속아 넘어갔음을 깨달았다. 팔뚝에 바늘을 꽂아 피를 뽑는데도 모르고 잠만 잘 정도로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혼자 설레지 말고 똑바로 들어요. 우리 아이 아니고 제 아이입니다.”
“너 혼자 어떻게 아이를 만들어. 내 자지가 너한테 들어가서….”
“입 닥쳐요. 저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박래현은 씩씩거리는 나를 안고서 어깨와 날개뼈 부근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머리칼에 입술이 비벼지고 이어서 뺨과 눈 위에 무차별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리면 귀뺨과 귓바퀴로 입술이 쫓아왔고 뒤로 젖히면 턱과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나는 몸을 심하게 흔들어 겨우 박래현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래현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아이 생긴 거 알고 힘들었을 텐데, 정말 고마워.”
“박래현 씨 좋아하라고 내린 결정 아닙니다.”
“그래도.”
박래현은 환하게 웃으면서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담배를 잡은 손이 기쁨에 떨리는 것을 보고 나는 침통한 마음에 주먹으로 가슴 부근을 두드렸다. 환희를 감출 생각이 없는지 박래현의 뺨과 눈가가 흥분으로 붉어졌다.
“나 얼른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들어올게.”
거실에 혼자 남게 된 나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별이가 박래현 아이란 게 밝혀졌으니 이로써 이혼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분명 내 인생인데….”
박래현이 열어 놓은 유리문 사이로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닥쳤다. 한여름에 박래현을 만났는데 벌써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사이에 박래현 아이를 둘이나 가졌으니 어떻게 보면 참 특별하고 끈질긴 인연이었다.
나는 혼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채 유리창에 비친 박래현 뒷모습에 시선을 보냈다. 박래현이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아이 문제는 언젠간 들통날 일이었다. 그 순간을 조금이나마 유예하고 싶었던 건 박래현이 나를 놓아줄지도 모른다는 미련 때문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툭툭 치며 고민에 잠겼다. 매번 박래현과 좆같은 상황에 휘둘리는 내가 한심하고 지긋지긋했다. 피하고 달아나 봤자 점점 무력해져서 같은 자리를 맴돌다 지칠 뿐이었다. 회피도 도망도 아무 소용없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정면 돌파가 남았다.
먼저 박래현에게 해준의 일을 사실대로 말하고 이혼 문제는 다시 논의해 보기로 했다. 내막을 알게 된 박래현이 내게 사죄하는 의미로 나와 별이를 풀어 주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지만 별이가 박래현 아이라 그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켜봐야 알 것이다. 이대로 덮고 조용히 이혼하고 싶은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교착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박래현과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든 별이를 박래현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담배를 피우고 돌아온 박래현이 내 옆에 앉았다. 욕실에서 이를 닦고 나왔는지 내뱉는 호흡에서 담배 냄새 대신 상큼한 박하 냄새가 났다.
“…내일 병원에 가고 싶어요. 별이 임신한 뒤로 병원에 한 번도 안 갔어요.”
“누나한테 전화해서 내일 진료 잡아 놓을게.”
“병원 갔다 와서 할 얘기가 있어요.”
“뭔데 그래? 네 얼굴 보니까 좋은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내일 얘기해요. 이혼이나 결혼 얘긴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
내 말투가 단호해서 박래현은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아랫배로 천천히 움직였다.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요즘 들어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렸다.
“배 만져 봐도 돼?”
“안 돼요. 저 들어가 자겠습니다.”
방문 앞까지 나를 에스코트한 박래현이 내가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오려는 그를 뒤로 밀어내며 문을 쾅 닫았다. 박래현이 밀고 들어올까 봐 문에 기댄 채 잠시 서 있다가 침대로 올라가 몸을 눕혔다. 박래현은 아이 방에 들어갔을까. 이불과 베개도 없이 바닥에 코끼리 인형만 뒹굴던 아이 방이 떠올랐다. 일부러 나 보라고 냉방에서 청승을 떠는 것 같아 오늘따라 짜증이 났다.
마음의 벽을 단단히 쌓고 싶은데 각인한 알파가 가까이 있으니 자꾸 마음이 물러져 탈이었다. 이럴 땐 거북들 냄새를 맡으며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거북들을 필리핀에 두고 와서 슬펐다. 초록색, 보라색 등딱지를 인 거북 인형들이 눈에 어른거렸다.
***
샤워하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하복부를 주시했다. 이 차장이 만들어 준 음식과 박래현이 사 온 간식을 꾸준히 먹은 뒤부터 배에 살이 붙은 것 같기도 했다. 별안간 배불뚝이가 돼서 뒤뚱거리는 내 모습이 그려져 기분이 우울해졌다. 같이 알바하던 남학생들이 감탄을 금치 못하던 탄탄한 몸에 말랑말랑한 살이 붙고 있었다.
“별아, 너 키우느라 아빠 몸이 엉망이다. 아빤 널 위해 멋진 근육을 포기했어. 감사히 여겨.”
아이한테 말을 걸자 신기하게 우울함이 사라졌다. 근육이야 나중에 다시 만들면 되니까 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칼을 털며 밖으로 나왔다. 바깥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박래현은 스트라이프 장식이 있는 후디 셔츠에 조깅 팬츠를 입고서 머리를 만지고 있었다. 편한 옷차림인데 박래현이 입어서 세련되고 여유 있게 보였다.
머리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그는 내 젖꼭지와 옆구리, 허벅지 안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얼른 속옷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에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로 서랍을 열었다. 이 자세가 별로라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트는데 눈앞에서 초록색 드로어즈가 팔랑팔랑 움직였다. 나는 박래현 손에서 속옷을 낚아채 드로어즈 구멍에 다리를 끼웠다. 박래현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비틀거리는 몸을 박래현이 한쪽 팔로 허리를 감아 잡아 주었다.
“힘들면 내가 입혀 줄까?”
“다 입었어요.”
“이리 와, 머리 말려 줄게.”
“제가 말릴 겁니다.”
나는 연한 하늘색 셔츠에 검은색 스웨터를 입고서 아래는 편안한 스타일의 팬츠를 골라 입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동작에 방해되지 않게 머리칼을 말려 주던 박래현은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손에 왁스를 묻혀 머리 모양을 잡아 주었다.
“아침은 거르고 가자. 검사 끝나고 점심은 사 먹을 테니까.”
정 차장 부부가 휴가를 떠나면서 그사이에 집을 돌볼 사람을 구하겠다고 했으나 박래현은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건 싫다며 거절했다.
“형, 우리 병원 갔다 올게. 형은 오늘 집에 있어?”
거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박영범이 꼬았던 다리를 풀며 일어났다. 박래현 태도를 보면 박영범이 아직 사표 얘기는 안 꺼낸 것 같았다.
“응, 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병원 잘 다녀와.”
“점심은 먹고 들어올게.”
박래현이 가자는 의미로 허리에 팔을 감아 나를 끌어당겼다. 그는 현관에서 새 운동화 두 개를 꺼내 나란히 내려놓았다. 자연스럽게 컬이 진 머리 모양과 조깅을 나가듯 가벼운 옷차림 때문에 박래현은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어 줄 만큼 어려 보였다. 따지고 보면 나나 박래현이나 아이를 갖기엔 어린 나이였다.
바깥 날씨는 서늘하고 맑았다. 산수유 열매는 빨갛게 익어서 꽃 덩어리처럼 보였고 담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 이파리는 노란색으로 물들어 바람을 타고 날아다녔다.
“머리 조심해.”
조수석 차 문을 잡고 있던 박래현은 내가 완전히 차에 탄 것을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그는 트렁크에서 무지개색 솔을 꺼내 차 유리창에 드문드문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쓸어냈다. 먼지와 낙엽이 사라지면서 시야가 깨끗해졌다. 오늘은 운전기사 없이 직접 차를 몰고 병원에 갈 모양이었다. 차에 올라탄 박래현은 물티슈를 꺼내 손을 깨끗이 닦은 다음 내가 안전벨트 맨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벨트를 맸다.
“할 얘기가 뭐야. 궁금해서 잠이 안 오던데.”
“좀 길어요. 병원부터 들렀다가 얘기해 줄게요.”
“무슨 일인지 귀띔만 해 주는 것도 안 돼?”
“네.”
“알았어. 병원 가는 동안 네 얘기나 해 줘.”
“제 얘기요?”
“필리핀에서 어떻게 지냈어?”
나는 두 달간 필리핀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열심히 단어를 외우며 수업을 받았고 매점에서 한국 과자와 컵라면을 사 먹었고 소나무 숲과 파란 하늘이 좋아서 산책을 즐겼다. 숨어 지내는 형편이라 학원생들과 사진을 찍는다거나 밖에 나가서 어울리진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즐거운 생활이었다. 오승현에게 얘길 다 들었으면서도 박래현은 내 얘기에 귀 기울였다.
“지난달에 어학원에서 박래현 씨 봤어요. 경찰하고 경호원들 데리고 왔었죠?”
“그래. 나는 너 없어서 죽을 거 같았는데, 윤준영은 행복하게 잘 살았네.”
“네, 박래현 씨 안 보니까 살 거 같았어요.”
“별이 생긴 건 언제 알았어?”
“지난달 23일쯤?”
“그때 기분이 어땠어?”
“처음엔 좀 복잡했는데 초롱이가 데려왔다고 생각한 순간 정신이 번쩍 났어요.”
“너 임신한 줄 알았으면 당장 데려왔을 거야. 오승현은 대체 뭘 관찰해서 내게 보고한 거지? 내가 사람을 잘못 보낸 거 같아.”
“필리핀으로 도망간 사람이 임신했다곤 생각 못 했겠죠.”
특히 나는 몸이 좋은 편이라 베타인 오승현이 나와 임신을 연관 짓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주차장에 도착해 먼저 내린 박래현은 조수석 문을 열고서 내가 내리길 기다렸다가 허리를 팔로 감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서 내릴 때까지 말이 없던 그는 내 어깨를 안으며 몸을 바싹 붙였다. 악착같은 손을 뿌리치려다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병원을 찾은 다정한 부부들을 보고 꾹 참았다.
박래현이 시간을 일찍 잡아서 바쁘게 오가며 진료 준비를 하는 간호사들을 제외하고 진료실은 한가했다. 차를 마시고 있던 박은수가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준영 씨,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선생님, 잘 지내셨습니까?”
“네. 아이 가졌다면서요? 축하해요. 래현이가 소식 전하면서 좋아 죽더라고요.”
지금은 내 눈치를 보느라 조용하지만 박래현이 별이를 얼마나 예뻐할지 눈에 선했다. 이혼하더라도 별이 아빠니까 박래현이 원하면 한 달에 한 번쯤은 만나게 해 줄 용의는 있었다.
“래현인 다음에 복부 초음파 할 때 들어오고, 오늘은 밖에서 기다려.”
“왜, 나도 보고 싶어.”
“준영 씨, 어떻게 할까요?”
“저만 들어가고 싶어요.”
박래현이 부성애를 느끼지 못하게 처음부터 차단하고 싶었다. 뜻밖에도 박래현은 고집 피우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바지와 속옷을 벗고 치마로 갈아입었다. 좁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면서 박은수가 어서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래현이랑 9월 25일에 관계했다고 했죠?”
“네.”
박은수가 들어와 장갑을 끼면서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았다. 임신하고 처음 찾는 병원이라 걱정과 기대로 아랫배가 땅겼다.
“긴장 풀어요. 음, 아이는 약 10주 정도 됐어요. 크기는 어디 보자, 3.8cm 정도 되네요. 더 잘 먹어야겠어요.”
박은수는 화면을 캡처 한 뒤 기계를 여러 각도로 옮겨 가며 태아를 살폈다. 내 시선도 컴퓨터 화면에 고정되었다.
“여기가 팔, 여기가 다리예요. 아이는 아주 건강해요. 심장 뛰는 소리 한번 들어 볼래요?”
“네.”
“심장 뛰는 속도가 굉장히 빠른데, 정상이니까 듣고 놀라지 말아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나는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니터 상으론 조그마한 강낭콩처럼 보였는데 심장 뛰는 소리가 우렁차 내 심장도 같이 뛰었다.
그동안 힘든 시간을 잘 버텨 준 별이에게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박은수는 인자하게 웃으며 화장지를 건넸다. 나는 눈물을 닦고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다음에 올 땐 사람 같이 보일 거예요. 오늘 1차 기형아 검사해야 하니까 채혈 있어요.”
“네.”
“래현이 말로는 입덧이 심하다던데, 힘들면 병원에 며칠 입원해서 관리받아요.”
“그 정돈 아닙니다.”
“얼굴 보니까 나쁘진 않네요. 옷 갈아입고 나와요.”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킨 다음 옷을 갈아입고 진료실로 나갔다. 팔짱을 낀 채 박은수와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던 박래현이 낯선 사람을 보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갈색 눈동자에 서린 기묘한 빛이 내 눈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윤준영 첫 알파가 나란 말이지?”
이건 또 무슨 봉창 뚫는 소린가 싶어서 나는 박은수를 보았다. 화면을 들여다보던 박은수가 마우스를 딸각거렸다.
“그걸 이제 알았어? 준영 씨가 너한테 얘기 안 하든? 난 네가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
“여기 첫 번째 진료 기록 봐 봐. 아기집으로 향하는 통로가 아예 없잖아.”
박래현은 내 진료기록을 뒤지다가 처음 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찍힌 사진을 발견한 듯했다. 그는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비틀거리며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준영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 사진은 다 뭐야.”
핏발 선 눈동자가 나를 향하며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더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달싹였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처음이라고 말했을 때 편견에 싸여 있던 남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처음이라고 하면 박래현이 화를 내서 나중엔 아예 경험 있는 사람인 척해 버렸다.
“제가 처음이라고 했을 때 박래현 씨는 거짓말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피로가 쌓인 얼굴에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면서 입술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번져 나왔다. 그는 몇 번이나 쓸어 넘긴 머리칼을 또 쓸어 넘기면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단 한 장의 사진은 그 어떤 설명보다 명확한 증거가 돼서 내가 사실을 말하기도 전에 박래현은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나를 보는 박래현 눈빛이 순식간에 짙어졌다. 진실이 밝혀져 속이 시원한 한편 다가올 미래가 두려웠다.
“너는 준영 씨랑 관계하면서 그것도 몰랐어? 페로몬 나와도 처음이면 꽤 힘들었을 텐데.”
박은수는 박래현이 알파로서 자세가 안 잡혔다며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박래현이 경험이 있었다면 그 미묘한 차이를 눈치챘겠지만, 박래현이나 나나 둘 다 처음이라서 알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서로 전쟁을 치르듯 정신없이 치고받은 첫 관계였다.
따지고 보면 박래현과 내 서사는 늘 반 박자씩 미묘하게 어긋났다. 하다못해 박래현이 처음이 아니었다면 내가 처음이란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박은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진료 시간이 다 되었다면서 내게 채혈실에서 피를 뽑으라고 지시했다.
“준영이 언제 또 와야 하지?”
“준영 씨랑 아이 둘 다 건강하니까 5주 후에 오면 되겠다. 그땐 2차 기형아 검사가 있어. 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 생기면 찾아오고. 여기 책자 줄 테니까 주의사항 다 읽어 보고 지켜. 지금 태아한테 제일 중요한 시기라 준영 씬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잘 먹어야 해.”
박래현과 어떻게 얘길 풀어 나갈까 고민하다 보니 두통이 생겨 손가락으로 머리를 눌렀다. 자신이 그동안 생뚱맞은 상대에게 분풀이하고 그 상대와 몸을 섞고 감정을 나눴다는 사실에 박래현은 기가 막힐 것이다.
“머리 아파?”
“네.”
“내가 지압해 줄게.”
박래현은 소책자를 겨드랑이에 끼고 내 양쪽 귀를 잡아 접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면서 몇 분에 걸쳐 지압을 마쳤다. 기분 탓인지 머리와 눈이 맑아진 것 같았다.
“좀 어때? 훨씬 낫지.”
“그러네요.”
박래현과 나는 박은수에게 인사하고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부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박래현은 채혈실 안까지 따라 들어와 피를 뽑고 난 자리에 솜을 눌렀다. 피를 보거나 뽑는 일은 언제나 무서웠기에 이럴 땐 멀쩡한 박래현이 얄미웠다. 같이 섹스해서 애를 가졌는데 불공평하게 나만 고생이었다. 바늘 자국이 난 곳에 공룡이 그려진 노란색 밴드를 붙이고 채혈실을 나왔다.
“우리 호텔 가서 쉬었다가 점심 먹고 집에 들어가자.”
“그냥 집에 들어가요. 전 집이 좋습니다.”
우린 조용히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서 차에 도착할 때까지 박래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차에 올라타자 그는 잡고 있던 조수석 문을 닫고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초점이 흐려진 눈을 깜박이며 핸들을 쥔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운전할 수 있겠어요? 우리 택시 타고 들어갈까요?”
운전을 잘하면 내가 몰고 갈 텐데 면허증만 있지 운전은 해 보지 않아서 차를 몰 자신이 없었다.
“아니, 운전할 수 있어.”
박래현은 시동을 걸고 능숙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이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박래현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궁금해졌다. 남자가 양심이 있다면 내게 잘못했다고 빌고 나서 내가 원하는 대로 나와 별이를 놓아줘야 옳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자비한 복수의 희생양이 되었다. 박래현이 날 억울하게 했으니 내 억울함을 풀어 줄 사람도 박래현이어야 할 것이다.
“…윤준영, 내가 처음이었어?”
주차장에서 빠져나가 도로에 진입한 박래현은 첫 번째 신호등에 걸려 차를 멈췄다.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에 거슬려 나는 박래현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얼핏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는데 박래현의 뺨과 귀 끝이 연한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모습에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핸들을 잡은 손등과 소매를 걷어 올려 드러난 팔뚝에 퍼런 핏줄이 움터 불끈거렸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서 박래현이 차를 출발시킨 뒤로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뒤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할 때까지 그는 말이 없었고 나는 박래현이 어떻게 행동할지 추측하느라 분주했다. 시동을 끄고서도 그는 한참 동안 조용했다. 답답한 마음에 먼저 내리려고 문을 열었지만 잠겨 있어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수현이랑 사귄 사람이 네가 아니라면, 윤해준이겠네.”
박래현은 왼팔을 창틀에 괴고 괴로운 듯 머리칼을 헤집었다. 기다란 속눈썹과 모양 좋은 입술에 작게 경련이 일었다. 마른침을 삼키느라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알바 때문에 해준이한테 대리출석을 부탁한 적이 있어요. 그때 둘이 만났대요. 해준인 박수현이 마음에 들어서 저인 척 속이고 박수현을 만났고요.”
“…….”
“영상은 해준이가 보낸 게 아니라 해준이한테 각인한 알파가 앙심을 품고 보낸 겁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박래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짧은 신음만 되풀이했다. 박래현이 이렇게까지 당황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몸을 돌려 무릎 위에 놓인 내 왼손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표정에 나는 그에게로 뻗어 나가려는 손을 뒤로 물려야 했다.
“준영아, 진작 얘기하지 왜 말 안 했어.”
내 손을 덮은 커다랗고 마른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천천히 눈을 들어 어둡게 그늘진 박래현 얼굴을 응시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충격 때문인지 남자의 흰 눈자위에 실핏줄이 터져 눈이 붉었다.
“사실을 말하면요? 이번엔 해준이 잡아다가 내게 한 것처럼 복수하려고?”
“내 인생에서 너 말곤 아무도 없어. 네 동생 일은 알았어도 네가 하자는 대로 했을 거야. 네가 내 동생과 관련이 없다면 나는 기뻐서 춤이라도 췄겠지.”
박래현이 어떻게 말해도 한번 의심이 싹튼 곳에선 불신만 자라고 있었다. 나를 살살 달래서 별이를 낳게 한 뒤 해준을 엿 먹일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로 속이고 박수현한테 접근한 건 해준이 잘못이 백번 맞아요.”
“…….”
“그런데 자살을 선택한 건 박수현입니다. 박래현 씨는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상실감에 엉뚱한 데다 분풀이를 한 거라고요.”
말을 시작하자 결과에 상관없이 나는 그동안 내 안에 담아 뒀던 말들을 다 터트리기 시작했다. 앙금이 되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모든 감정이 일시에 자기가 먼저라고 아우성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따위 영상 받았다고 다 자살하는 거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했다고 다 박래현 씨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무너뜨리지도 않아요.”
박래현은 낮게 신음하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곧게 뻗은 눈썹이 꿈틀거리면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흐트러진 표정을 감추지 않고 왼손을 뻗어 뺨을 만졌다. 거칠게 손을 쳐 내자 방향을 잃은 손이 내 팔뚝으로 미끄러졌다.
“준영이 네 말이 옳아. 나는 지옥에서 빠져나오려고 널 이용한 거야. 내가 살아갈 이유를 만들고 싶어서.”
“…씨발, 잘못한 거 알았으면 이제 내 앞에서 꺼져요.”
“널 좋아하게 되면서 내 감정을 부인하고, 인정하고, 부인하고 또 인정하면서 널 갖기 위해 온갖 못된 짓을 서슴지 않았어. 네가 날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하니까 초조해져서, 수단과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었어.”
박래현은 말을 끊고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남자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어둡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끊임없이 날 괴롭히며 힘들게 했던 시간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파자마 상의만 입힌 채 귀에 구멍을 뚫으면서 나를 남창 취급했던 때를. 엄마가 보고 싶다는 내 의견을 뭉개고 잔인하게 가뒀던 때를. 정치헌과 결혼할 거면 아이를 갖지 말자고 애원하던 나를 무시했던 때를. 그리고 자신이 자초한 초롱이의 죽음을. 과거에 떠밀려 고통으로 흐려진 눈이 나를 향했다.
“널 힘들게 했던 일들, 오래전부터 후회하고 있었어.”
“이미 늦었어요. 후회한다고 형이 내게 했던 일들이 사라지는 거 아니잖아요. 이제 우리 형제한테 손 떼요. 그게 제가 바라는 겁니다.”
“윤준영,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할 테니까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마.”
박래현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다가 포기하고 가만히 있었다. 박래현 목에 닿은 귓가로 천둥보다 더 크게 심장 뛰는 소리가 울렸다.
“전 박래현 씨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아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부부로 살아요.”
“난 너랑 아이 절대 포기 못 해.”
어깨를 잡은 손은 부드러웠지만 놓아주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박래현을 떼어 내야 하는데 이 남자와 얽힌 게 많아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고 아랫배가 땅기고 아픈 것 같아서 나는 급하게 박래현 팔을 잡았다.
“형, 저 어지러워요. 토할 거 같은데 문 좀 열어요.”
“준영아,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병원으로 갈까?”
“아니, 가슴이 답답해서….”
내 이마를 짚어 보더니 박래현은 운전석을 박차고 나와 차를 빙 돌아서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는 한쪽 팔로 의자 등받이를 짚고서 상체를 숙여 벨트 잠금장치를 풀었다. 금속성 소리와 함께 몸을 가로질러 옥죄던 벨트가 풀렸다. 박래현은 견고한 팔뚝으로 허리를 감아서 나를 밖으로 꺼냈다.
차가운 바람에 토기는 금방 가라앉았지만, 가슴은 여전히 울렁울렁 뛰고 있었다. 나는 차갑게 식은 손을 바지에 닦으며 너울대는 속을 가라앉히는 데 집중했다. 나를 걱정스럽게 보던 박래현이 박은수에게 전화를 걸어 초조한 목소리로 내 상태를 설명했다.
“좀 누워 있어 보고 그래도 안 좋으면 누나가 진료 끝나고 온대.”
전화를 끊고서 박래현은 나를 안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있었는지 박영범이 우리에게 달려왔다. 그는 박래현 품에 안겨 있는 날 걱정스러운 얼굴로 살펴보았다. 박영범과 눈을 마주치기 싫어서 나는 박래현 가슴팍에 얼굴을 감췄다.
“형, 침실 문 좀 열어 봐.”
“준영 씨 어디 아파? 병원에서 뭐라고 해?”
“별일 없어. 준영이 옷 갈아입히고 형한테 물어볼 말이 있으니까 밖에서 기다려.”
나를 침대에 눕히고 옷장에서 파자마를 꺼내 온 박래현이 능숙하게 옷을 벗기고는 파자마로 갈아입혔다. 나는 박래현에게 몸을 맡기고서 사지를 축 늘어뜨린 채 누워 있었다. 박래현은 커다란 손으로 내 팔다리를 주무르며 페로몬을 조금씩 풀어냈다. 지친 몸에 향긋하고 달콤한 치자 꽃 냄새가 촉촉하게 내려앉자 세포 하나하나에 생기가 돌아왔다.
신기하게도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은 어떤 영양제나 수액보다 효과가 빨랐다. 각인한 알파와 오메가들이 페로몬으로 서로를 치유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과장이 섞였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신기했다. 다른 사람 페로몬은 맡지도 못하는데 각인한 알파가 내보내는 페로몬은 코에 쏙쏙 들어와 독해지려는 의지를 갉아먹었다.
“이제 됐어요. 혼자 있고 싶어요.”
“배고프지. 잠깐 기다려, 내가 먹을 거 있나 보고 올게.”
“지금 말고 조금 있다가 속 진정되면 먹을게요.”
“그러면 쉬고 있어. 영범 형과 잠깐 얘기 좀 하고 들어올게.”
박래현은 땀에 젖은 내 머리칼을 가만가만 쓸어 넘긴 뒤 내키지 않은 얼굴로 침실을 나갔다. 박영범은 책임지고 사표를 낸다고 했는데 그를 필요로 하는 박래현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박영범이 원망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내 눈에 안 보이기만 하면 그가 사표를 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유리창 너머로 새빨간 산수유 열매를 보았다. 한여름에 핀 꽃처럼 열매는 탐스럽고 예뻤다. 저 열매가 초록색이었을 땐 초롱이가 배 속에 있었고 그때만 해도 박래현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내 작은 소망을 형체도 안 남게 박살 낸 건 박래현이었다.
나는 무던한 사랑을 바라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좋아하는 상대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람과 결혼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한 나를 받아 줄 사람이 있다면 물질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내 애정으로 가득 채워 주겠다고 여기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점점 내 꿈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날 속인 박래현에게 미운 감정만 있다면 이 상황을 어렵지 않게 견뎌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나와 초롱이에게 했던 짓을 용서할 수 없는데 박래현의 다정한 태도에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박래현에게 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에게 넘어가 어물어물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 나는 별이와 내 마음을 잃고 만신창이가 돼 이 집을 나가게 될 것이다.
‘난 너랑 아이 절대 포기 못 해.’
박래현 의지는 확고해서 나는 그를 흔들 수 없었다. 살아갈 의지가 필요해서 내게 복수했다면 그에게 별이는 다른 의미로 살아갈 이유가 될 것이다.
결혼 계약서에 따르면 아이는 둘을 낳아야 한다. 박래현은 다른 오메가에게 관심이 없으니 내게서 아이 둘을 낳게 하고 끝을 볼 작정인 듯했다. 박래현이 계속 결혼을 고집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결심이 서지 않아서 나는 테라스로 나가 정원을 산책했다. 말라 비틀어진 담쟁이덩굴 아래 국화꽃이 소담하게 피어 있어서 정원엔 국화 향이 가득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계절이 끝나감을 직감했는지 앞다투어 핀 꽃들은 색과 향이 짙었다.
“별아, 냄새 좋지? 넌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해. 너랑 나는 별개의 인격체니까 아빠 기분에 너까지 휘둘리면 안 돼. 우리 상추밭 가 볼까? 너만큼 큰 달팽이가 있어.”
나는 상추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여름 내내 물 주고 키웠던 상추와 달팽이들이 전부 사라져 텃밭은 휑했다. 11월이 다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자꾸 잊어버렸다. 이 집에 발을 들인지 몇 년은 지난 것 같은데 계산해 보니 아직 5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다. 5년에 거쳐 일어날 일들이 5개월 안에 다 일어났으니 앞으로의 내 삶은 단조로워지길 바랐다.
나온 김에 정원을 한 바퀴 돌아 주차장으로 갔다. 박래현이 선물한 차에는 검은색 덮개가 씌워져 있었고 주차장엔 CCTV가 몇 대 더 설치되어 있었다. 현관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다시 빙 돌아서 테라스를 통해 방으로 들어갔다. 국화 향이 바람에 실려 들어올 수 있게끔 문을 열어두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냉정하게 따져 봤을 때 박래현이 이혼을 원하지 않으면 이혼은 어려웠다. 박래현은 결혼 생활에 충실했고 결혼 계약서에 서명한 대로 엄마 병원비와 내 생활비를 꼬박꼬박 지급했다. 반대로 나는 결혼하자마자 돈만 받고 외국으로 튀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결혼 계약서를 어기고 결혼 생활에 불성실하게 임한 사람은 나였다. 박래현에게 귀책사유가 생겨 내가 소송을 걸 명분을 얻을 때까지, 혹은 박래현이 내게 질려 나가떨어질 때까지 결혼 생활은 이어질 테지만 현재 박래현 상태를 보면 두 가지 다 확률은 0에 수렴했다.
그나마 나은 선택지로 결혼을 골랐던 나와 달리 박래현은 처음부터 진지하게 결혼에 접근했다. 그는 내가 박수현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여겼고, 두 눈으로 직접 내가 어떤 성생활을 즐겼는지 확인했다. 그런데도 초롱이를 위해 결혼을 결심했다면 유산한 뒤에 혼인 신고서를 제출할 까닭이 없었다. 박래현은 나를 절대 놓고 싶지 않아서 결혼했던 거였다. 그런데 이제 내가 자기 아이를 배고 있고, 박수현 죽음과는 관련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해서 박래현이 내 첫 알파라는 사실까지 알게 됐으니 박래현 집착이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진 않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박래현이 내게 집착하는 게 싫지는 않았다. 내 말이 안 먹혀서 화가 났지만 각인한 알파가 오롯이 나만 보는 데서 오는 희열은 분명 존재했다. 이혼을 고집하는 내게 그가 이혼은 절대 안 된다는 태도를 보일 때마다 굳건했던 의지에 조금씩 균열이 갔다. 이러다가는 이혼하겠다는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펑펑 소리가 나게 소파 등받이에 주먹을 날렸다.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주먹질을 하다가 지쳐서 소파에 널브러졌다. 박래현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혼에 합의하지 않을 테니 결국 결혼 생활 안에서 돌파구를 찾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첫걸음으로 결혼 계약서부터 뜯어고쳐야 할 것이다. 박래현은 내가 원하는 대로 결혼 계약서를 작성하겠다고 했다. 지금 상황에선 나와 별이에게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게끔 결혼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게 가장 나아 보였다.
***
“준영 씨,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책을 보고 있다가 박영범의 방문에 침대에서 내려왔다.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한 나는 소파에 앉아서 박영범이 앉기를 기다렸다. 어제 박래현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박영범은 오늘 오후까지 밥도 먹지 않고 2층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는 내 맞은편에 앉아서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동안 잘 단속되어 표정이 없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생겨나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준영 씨, 그동안 정말 미안했습니다.”
“…….”
“준영 씨한테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왔어요.”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움직이면서 박영범은 잠시 말을 끊었다. 박래현은 박영범이 낸 사표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자기 잘못을 인정한다면 박래현은 박영범을 자르는 데 그치지 않고 내 의견부터 받아들여야 했다.
“준영 씨한테 한 짓을 어떻게 갚을 방법이 없네요. 다 내 잘못입니다.”
“왜 다 박 실장님 잘못입니까? 잘잘못을 따지자면, 박 실장님 보스를 따라올 자가 없죠.”
박영범은 박래현과 오랫동안 같이 일해 왔던, 박래현에겐 수족과 같은 사람이었다. 모든 사고와 판단을 박래현 중심으로 해 왔고 박래현에게 헌신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뒷조사 결과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도 비뚤어진 충성심에서 비롯한 거였다.
먼저 그만두겠다고 말했지만 박영범은 박래현 결정에 서운하고 속이 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래현 비밀과 치부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그가 악한 마음을 품고 박래현에게 등을 돌리면 JS 제약 경영권을 장악하겠다던 박래현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민의 가지를 뻗치던 나는 귀를 잡아당기면서 오지랖을 거둬들였다. 두 사람 일은 두 사람이 알아서 할 테고 나는 박영범 얼굴을 보지 않게 돼서 좋았다. 이제 난 박래현만 상대하면 될 것이다.
“그동안 미안했어요. 아이 건강하게 잘 낳아요. 준영 씨도 잘 지내고요.”
“다음부턴 남의 인생 함부로 재단해서 망가뜨리지 마세요. 힘없는 사람이라고 원하는 대로 구부러지는 건 아닙니다.”
박영범은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새삼 박래현에게 쫓겨나는 박영범이 부러웠다. 내겐 당분간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나는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JS 제약에 들어가기 전까지 박래현은 연구만 하고 실무는 거의 박영범이 맡았다고 들었는데 유능한 오른팔이 사라지면 박래현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래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서 금방 대안을 찾을 것 같긴 했다. 박영범도 집안과 직업이 좋아서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떤 상황에 부닥쳐도 능력 있는 사람은 살아남는다는 생각에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저녁 먹을 때가 가까워져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입맛은 없지만 별이를 위해 밥을 먹기로 하고 박래현을 찾아서 거실로 나갔다. 그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잠시 다른 세상에 가 있었던 듯 붉은 눈에 초점이 느리게 돌아왔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박영범은 박래현에게 비서실장 이상의 존재였다. 업무 의존도뿐만 아니라 박수현이 죽고 나서 감정적인 의존도도 꽤 높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잘라 냈으니 박래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박영범이 아니라 나를 내보내야 맞는데 박래현은 별이 때문에 잠시 이성을 상실한 것 같았다.
“저 배고파요.”
“맞아, 저녁 먹을 시간이지. 우리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사 먹을까?”
“아뇨. 박래현 씨가 밥 차려요.”
“그래, 그러자.”
주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간 박래현은 개수대에서 내 손을 깨끗하게 씻겼다. 길고 남자다운 손이 비누를 펌핑 해 손가락 구석구석을 문지르고 닦아 냈다. 박래현은 수건을 꺼내 손을 닦아 주고서 나를 의자에 앉힌 뒤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냄비에 사골 국물을 부어 끓이고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프라이팬에 데웠다. 떡갈비와 김치, 시금치나물, 송이버섯 볶음을 뚝딱 준비해 식탁에 놓고 수저와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았다.
마지막으로 밥과 국이 올라왔다. 보고 자란 건 있어서 사골 국물에 새파란 파를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해 보지 않은 일도 체계적으로 잘하는 박래현을 보며 이 사람이 못 하는 건 감정표현밖에 없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사골 국물에 간을 하고서 내가 먹는 걸 지켜봤다.
“왜 박래현 씨는 안 먹어요?”
“지금 입맛이 없어서. 나중에 먹을게.”
나는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아서 한 숟가락 떠먹었다. 이 차장이 직접 고았다는 사골은 맛이 깊고 풍미가 있었다. 입덧이 조금씩 가라앉는 시기라더니 별이는 얌전히 사골 국물을 받아들였다.
“박 실장님 일 그만둔다면서요. 후임은 알아보고 내보내는 겁니까?”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인수인계까지 완벽하게 하고 나가기로 했어. 사람들 물색해서 면접하려면 당분간 좀 바빠질 거야.”
“그렇게 한다고 제 화가 풀릴 거 같아요?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엎질러진 물, 조금이라도 주워 담고 싶어서 그래.”
“저 달래려고 이러는 거면 그냥 집에서만 내보내요.”
“영범 형이 먼저 그만둔다고 했어. 나도 당분간 형 얼굴 보면서 같이 일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면 박래현 씨 보는 제 기분이 어떨지 잘 이해하겠네요.”
박래현은 숟가락 위에 시금치나물을 얹고서 내 컵에 물을 따랐다. 마침 목이 말랐던 나는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우고 밥을 먹었다. 그나마 더 나은 상태로 돌릴 방법을 알고 있으면서 박래현은 모른 척했다. 밥을 다 먹고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저랑 이혼할 생각 없어요?”
“그래.”
“제게 미안하다면서요. 정말 반성하고 있다면 이혼해 주는 게 상식이죠.”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노력하는 게 내가 반성하는 방식이야.”
앞뒤가 꽉 막혀 있어서 박래현과 실랑이를 해 봤자 기력만 소진할 게 뻔했다. 모든 사실을 알고서도 결혼 관계를 유지해야겠다면 내가 취할 방법은 없었다.
“이혼을 안 해 주겠다면 결혼 계약서를 제가 원하는 대로 바꾸겠습니다.”
어둡게 가라앉았던 박래현 얼굴에 오랜만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엄지로 내 볼을 가볍게 문지르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후회할 겁니다.”
나는 박래현 얼굴을 멀거니 보다가 빈 밥그릇으로 시선을 내렸다. 결혼 승낙을 받은 것처럼 웃고 있는 박래현이 어느 선까지 수용할지 궁금했다.
“여기 치우고 과일 갖다 줄 테니까 쉬고 있어.”
나는 거실 작업대로 가서 컴퓨터 전원을 켰다. 나한테 유리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계약서를 직접 작성해 보지 않아서 무슨 내용을 담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무작정 내용을 적어 내려간 뒤 그 가운데 꼭 필요한 조항을 간추리는 브레인스토밍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박래현에게 요구할 게 많아서 첫 장이 금방 빼곡하게 채워졌다.
박래현은 과일 접시를 작업대에 내려놓으면서 어깨너머로 계약서 내용을 힐끗거렸다. 나는 그가 볼 수 없게 얼른 창을 닫고 망고부터 집어 먹었다. 말랑말랑한 과육에서 단물이 물씬 배어 나왔다. 망고가 달아서 뒤에 먹은 사과가 시게 느껴졌다. 내 뒤에서 어슬렁거리던 박래현은 잠깐 사라졌다가 와인과 잔을 들고 나타났다.
“술 좀 그만 마셔요.”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매일 밤 술을 들이붓고 아침에 어떻게 출근해요? 그러고 다니니까 코피가 나지.”
“술 안 마시면 잠을 못 자. 수면제 먹으면 온종일 머리가 무거워서 싫고.”
박래현은 오른손에 잔을 들고서 소파에 앉아 잡지를 집어 들었다. 저녁을 안 먹은 상태에서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는 박래현을 보며 나는 새삼 박래현 체력에 감탄했다.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내가 박래현처럼 생활했다가는 일주일도 못 가 병원에 입원했을 것이다. 나는 사과를 몇 개 집어 먹고 박래현 앞에 과일 접시를 내려놓았다.
“이거라도 먹으면서 술 마셔요.”
“계약서는 다 작성했어?”
“아니요. 지금 고민 중입니다.”
술보다는 학술 잡지에 빠져 있던 박래현이 내 허리에 왼팔을 감고 배에 뺨을 문질렀다. 가슴께에 갈색 머리칼이 조명을 받아 살랑살랑 날아다녔다.
“준영아, 별인 누굴 닮았을까?”
“박래현 씨, 개수작 부리지 맙시다.”
엉겨드는 박래현을 떼어 내고 자리로 돌아가 계약서에 넣어야 할 사항을 살펴보는 내내 끈끈한 시선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계약서 초고를 완성할 무렵 박래현은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위험한 눈빛을 한, 흐트러진 모습의 박래현은 당장이라도 거리를 좁혀서 날카로운 이로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았다. 박영범도 없이 이 커다란 집에 박래현과 나 둘뿐이었다. 술에 취한 박래현이 페로몬으로 나를 내리누른다면 꼼짝없이 당할 상황이어서 빨리 자리를 피하고자 컴퓨터 전원을 껐다.
“저 먼저 들어가 잡니다. 박래현 씨도 술 그만 마시고 얼른 자요.”
박래현은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마지막 잔을 기울였다. 나는 박래현을 내버려 두고 방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기 직전 소리 없이 다가온 박래현에게 어깨를 잡혀 몸이 돌려졌다. 나는 문을 등지고 서서 한 뼘 앞으로 다가온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준영아, 한 번만 안아 봐도 돼?”
박래현은 오른쪽 팔뚝으로 문을 짚고서 왼손으로 내 뺨을 만졌다. 겨울바람처럼 서늘한 손이 목덜미와 머리카락 안을 수런수런 지나갔다. 작은 접촉에 몸이 떨려 들이켠 숨을 내뱉지 못하고 호흡을 멈췄다.
“너 안고 싶어. 안게 해 줘.”
간절한 눈빛이 내 의지를 흔들었다. 필리핀에 있을 때 임신하고도 차오르는 욕구에 힘들어했었다. 상상 속에서 박래현을 불러내 자위했던지라 실체가 나를 만지며 애정을 갈구하자 욕망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며 구체화되었다.
밀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박래현은 뒷덜미와 목을 단단히 감싸고서 벌어진 입 안으로 혀를 삽입했다. 목을 쥔 손에 힘이 가해지면서 짓눌린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키스를 처음 해 보는 서툰 소년처럼 박래현은 막무가내로 혀를 들추고 빨고 문질러 대다가 입술 전체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의 뺨에 코가 눌려 숨이 막혀 왔다. 고개를 틀어 각도를 바꾸자 혀가 더 깊이 들어와 점막과 입천장을 훑었다.
“흐읏, 으읍…!”
잠깐 떨어진 입술 사이로 숨이 터져 나왔다. 흐릿해진 시야에 붉어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박래현이 잡혔다. 다시 입술이 겹쳐지며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나를 눕힐 동안 박래현은 침이 밭아지도록 입맞춤을 멈추지 않았다. 박래현이 다리를 벌리고 내 몸 위에 올라타고 나서야 긴 입맞춤이 끝났다. 밑을 압박하며 꿈틀거리는 성기는 어느새 딴딴하게 발기해서 엉덩이골 사이를 왕복하고 있었다.
입술을 놓아준 박래현이 이번엔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살을 빨아 당겼다. 연약한 살에 이가 박혀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화끈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식히며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상체를 세워 깊고 어두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박래현이 내 손목을 잡아 손바닥을 혀로 핥았다.
“해도 돼?”
나는 죽을힘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한 게 없는데 몸부터 맞출 순 없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박래현은 욕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내 얼굴을 핥았다.
“정말 안 돼?”
박래현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페로몬으로 나를 뒤흔드는 대신 박래현은 하반신을 누르던 무거운 몸을 비켜 주었다.
“결혼 계약서는 내일 저녁에 검토해서 조율하자.”
“…….”
“공증은 수요일이나 목요일쯤에 새로운 변호사한테 받을 거야.”
박래현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미련을 두지 않고 방을 나갔다. 몸에 남겨진 알파의 감촉이 잡힐 듯 생생해서 나는 베개를 품에 끌어안고 급하게 달아오른 욕정을 식혔다. 박래현은 같이 살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남자였다.
***
박래현 퇴근 시간에 맞춰 나는 그가 예약해 둔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박래현이 내가 차에서 내리는 걸 발견하고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긴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코트 깃이 바람에 펄럭였다.
“길 안 밀렸어?”
“좀 밀렸는데 일찍 출발했어요.”
자장면이 먹고 싶다는 내 의견에 따라 박래현은 중식당을 예약했다. 그는 내 어깨를 감싸서 식당 안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기다리고 있던 종업원이 우리를 2층에 있는 룸으로 안내했다. 박래현은 내 코트와 자신의 코트를 벗어 종업원에게 넘기고 내가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뒤로 끌었다. 주로 가족들이 이용하는 곳인지 룸은 꽤 컸다. 박래현은 많은 자리를 두고 하필 내 옆에 앉아서 종업원에게 식사를 주문했다. 자장면을 곱빼기로 시켜서 실컷 먹을 생각이었는데 박래현은 코스 요리를 시킨 뒤 내 컵에 차를 따랐다.
“요새 이 차장님이 안 계셔서 잘 못 먹었지. 오늘은 많이 먹어.”
아침은 박래현이 차려 줘서 먹었고 점심은 나 혼자 비빔밥을 해서 먹었다. 냉장고에는 이 차장이 만들어 놓고 간 음식이 반 넘게 남아 있었다.
“박 실장님은 집으로 들어가셨대요?”
“아니, 호텔에 머물면서 살 곳 알아본대. 인수인계 끝나면 좀 쉴 생각인가 봐.”
“저 때문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세요. 박래현 씨한텐 필요한 사람이잖아요.”
“내가 한 사람을 지나치게 믿고 의지해서 생긴 일이야. 괜찮은 사람들을 발굴해서 연구원들에게 책임을 할당하듯 일을 분산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이번 일을 계기로 일하는 방식을 바꿔 볼까 해.”
박래현은 물티슈로 내 오른손과 왼손을 구석구석 닦고서 자신의 손을 닦았다. 꼼꼼히 문지른다 했더니 그에게 닦인 손등이 불그스름해졌다.
“준영아, 학교 졸업하고 회사 들어와서 일해.”
“집에서 감시하는 거로 부족해 회사에서도 감시하려고요?”
“네 적성에 맞으면 바이언스는 너한테 맡길 생각이야. 물론 그 전에 경험부터 쌓아야겠지만.”
“농담하지 말아요.”
“앞으로 글로벌 제약 회사가 될 동력을 갖춘 회사야. 키우는 재미가 쏠쏠할걸?”
박래현 얼굴을 보니 날 떠보려고 장난으로 던져 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껏 샐러리맨으로 살 생각만 해 왔던 내게 박래현의 제안은 생뚱맞게 들렸다. 회사를 경영하려면 어려서부터 그에 걸맞은 교육을 받아서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다르고 진취적이어야 하는데 나는 겁 많고 보수적인 사람이라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네가 싫다면 전문 경영인을 두겠지만 네 능력을 키우기 전에 가둘 생각부터 하지는 마.”
첫 요리로 랍스타 냉채와 게살이 듬뿍 든 수프, 사과 에이드가 나왔다. 냄새부터 훌륭한 게살 수프는 부드럽고 고소했으며 랍스타 냉채는 매콤하고 시원했다. 그 뒤로 메로구이와 전가복, 동파육이라는 음식이 차례로 나왔다. 전가복과 동파육은 처음 먹어 보는데 동파육은 부드러운 고기에 맵고 단 소스가 버무려져서 특히 내 입에 맞았다.
“동파육이 맛있어?”
박래현은 자신의 접시에서 동파육을 찍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주는 대로 받아먹었더니 배가 불러서 정작 자장면은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야 했다.
“카메라 하나 주문했어. 내일쯤 도착할 거 같은데 받아 놔.”
“핸드폰 쓰면 되지 카메라는 왜 샀어요?”
“주말마다 너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려고. 나중에 별이한테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색낼 수 있고 좋잖아. 증거를 보여 줘야지 걔들은 말로 하면 못 알아들어.”
“우리 별이는 감성지수가 높아서 다 알아들을 겁니다.”
“사실은 네가 예뻐서, 꼭 찍어 두고 싶어서 그래.”
잘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어 봤지만 예쁘다는 말은 박래현한테 처음 들었다. 내게는 생소한 단어여서 박래현이 그 말을 하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주변에 있는지 둘러보고 싶어졌다.
“뒀다가 나중에 별이 태어나면 별이 실컷 찍어 주세요.”
“당연히 별이도 찍어 줘야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해서 내 턱을 잡은 박래현은 새 물수건을 뜯어서 입술 주변과 턱을 닦아 주었다. 고개가 들려서 자연스럽게 박래현과 눈이 마주쳤다.
“다 먹었으면 갈까? 결혼 계약서 뭐라고 작성했는지 궁금해.”
내게만 유리하게 작성한 결혼 계약서를 보고 박래현이 말없이 받아들일지 태클을 걸어 수정할지 나도 알고 싶었다. 옷걸이에서 코트를 챙긴 박래현은 내 허리에 팔을 감고서 카운터로 향했다. 남자는 장소를 이용해서 은근슬쩍 내가 거절하기 힘든 스킨십을 했다.
홀에서 식사를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던 기사와 경호원이 계산을 마친 박래현 뒤로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박영범과 같이 다니는 모습에 익숙해서인지 그 사람 없이 다니는 박래현은 왠지 불안해 보였다.
“오늘 저녁엔 입덧 안 하네? 좀 괜찮아졌어?”
“제가 원래 맵고 짜고 단 음식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박래현은 차 뒷문을 열어 안쪽에 나를 앉히고 옆에 올라탔다. 그는 코트를 옆에 내려놓고서 다리를 꼬아 무릎 위에 깍지낀 손을 두었다.
“별이한테 읽어 주려고 동화책 주문해 놨어. 내가 매일 밤 30분씩 읽어 줄게.”
“종일 집에 있으니까 제가 읽어 줄게요.”
“너도 읽어 주고 나도 읽어 주면 되겠네. 우리 별이는 상상력이 풍부하겠어.”
칸막이를 내려 운전석을 가린 박래현이 커다란 손으로 오른쪽 귀뺨을 감싸더니 고개를 틀어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비볐다. 그는 내가 고개를 흔들 수 없게 다른 쪽 팔로 내 뒤통수를 휘어 감았다. 결혼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몸부터 부딪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박래현 어깨를 뒤로 밀었다.
“섹스가 안 되면 키스라도 허락해 줘.”
“그게 그거 아닙니까?”
엄지가 입술 안으로 파고 들어와 혓바닥을 문지르고 더 안쪽을 더듬었다. 욕망에 흐려진 눈을 보고 있자니 그의 어깨너머로 박래현과 처음 마주 보고 섹스했던 차 안 풍경이 지나갔다. 제발 멈춰 달라고 사정하는 나를 무자비하게 바닥으로 끌어내려서 구음을 시켰던 남자가 지금은 안 된다는 말에 키스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욕구를 참고 있다. 그사이에 일어났던 일들을 고려해도 남자의 변화는 나를 놀라게 했다.
집에 도착해서 우리는 각자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거실에서 만났다. 나는 파자마 차림이었고 박래현은 면바지에 니트 차림이었다. 파자마를 입고 냉방에서 자기엔 너무 추워서 옷차림이 바뀐 듯했다.
“어디 계약서를 어떻게 바꿨는지 한번 볼까?”
박래현은 내가 소파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나는 엉덩이를 움직여 박래현과 거리를 두면서 인쇄해 온 계약서 중 한 장을 박래현에게 건넸다.
내 요구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갑: 윤준영 / 을: 박래현
1. 갑은 현재 임신한 아이 한 명만 낳고 더는 자녀를 낳지 않는다.
2. 양육은 공동으로 하되 갑과 을이 이혼하면 아이의 양육권은 무조건 갑에게 있고 을은 합당한 선에서 양육비를 제공한다.
3. 을은 갑이 사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완벽한 자유를 보장한다. (도청기, 위치 추적기, 몰래카메라 적발 시 경고 1회/ 총 3회가 쌓이면 협의 이혼으로 해결한다.)
4. 을은 갑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동안 매달 5억씩 지급하고 이혼 시 갑에게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
5. 갑과 을은 각방을 쓴다.
6. 을은 갑에게 먼저 성관계를 요구할 수 없고 갑이 허락하지 않는 한 갑을 상대로 먼저 페로몬을 풀 수 없다.
7. 1년 후 갑이 협의 이혼을 요구할 경우 을은 이에 응한다.
8. 차후에 윤해준에게 어떠한 보복 행위도 하지 않는다.
박래현은 손끝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계약서에 집중했다. 변호사가 입회하면 말이 더 번지르르하게 바뀌겠지만 내 요구 조건은 다 들어가 있었다. 나는 박래현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자못 궁금해서 초조한 마음으로 반응을 살폈다. 다른 조항은 몰라도 2번에서 별이 양육권을 내가 갖는다는 조항을 박래현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 계약서를 작성한 이유가 별이 양육권 때문이라서 수정하거나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다시 말해서 1년 안에 네 마음을 돌려놓으란 소리네.”
“마음에 안 들면 어깃장 놓으세요.”
“마음에 안 들긴. 1년이면 윤준영한테 너무 긴 시간 아닌가? 오히려 나한테 같이 살자고 사정할 거 같은데.”
“그렇다면 계약 만료를 1개월 뒤로 할까요?”
고심해서 만든 계약서를 박래현이 너무 쉽게 생각해서 자존심이 상했다. 박래현은 계약서를 내려놓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무난한 내용을 담았는지 박래현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게 나랑 잘해 보겠다는 조항은 하나도 없어.”
“그럴 마음이 없으니까요.”
“너도 섹스 좋아하잖아. 각방을 쓰면 나만 괴롭진 않을 텐데?”
박래현은 섹스를 잘했고 나는 박래현에게 각인해서 박래현을 보면 성욕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별이를 배에 담고 있어서 내 성욕은 박래현이 느끼는 성욕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도 괴롭겠지만 박래현이 더 괴로울 테니 그걸로 위안 삼으면 되는 거였다. 박래현은 손바닥으로 턱을 쓸면서 생각에 잠겼다. 남자가 2번을 제일 문제 삼을 줄 알았는데 박래현은 2번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다.
“계약서 내용이 눈에 안 찬다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아니 나한테 더 원해도 돼. 나는 내가 가진 거 너랑 별이한테 다 줄 거니까.”
“…….”
“내가 가진 바이언스 지분 반을 너한테 증여할 생각이야.”
나는 박래현 말에 충격을 받아서 화들짝 커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까 회사 일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로 나를 떠보더니 이미 다른 계획을 세워 둔 것 같았다. 사업가에게 지분은 자식에게조차 쉽게 증여할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었다. 그런데 겨우 5개월 만난 사람에게 주식의 반을 증여하겠다니, 남자가 드디어 미친 건 아닌가 하고 합리적 의심마저 들었다.
“바이언스는 내가 83% 지분을 가지고 있는 비상장 주식회사야. 내년 1월이면 8년째 되어 가는, 신약연구개발만 전문으로 하는 알토란 같은 회사지. 국내 유수의 증권사와 법무법인에서 서로 IPO 주관사가 되겠다고 러브콜 들어오는데 묵혀 두는 중이고.”
“박래현 씨가 키운 회산데 왜 저한테 지분을 줘요?”
“내가 일하는 목적이 너랑 별이 때문이니까. 너 부자로 만들어 줄게.”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말아요.”
“우리 회사는 우수 연구진과 신약 파이프라인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서 앞으로 터질 일만 남았어. 지금 개발 중인 CART-T 포트폴리오를 12조에 넘겨받겠다는 다국적 기업도 있고. 세금 포함해서지만 계약만 해도 너한테 4조는 떨어진다는 소리야.”
들을수록 경이로운 내용에 사고가 멈춰 대꾸를 찾지 못하고 잠시간 눈만 깜박거렸다. 이쪽 시장이 조 단위로 노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게는 딴 세상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내 손에 그 큰돈이 굴러 들어온다니 당연히 거짓말 같고 허풍으로 들렸다.
“전 한 달에 5억씩 받는 것으로 충분해요. 회사 지분은 됐습니다.”
“왜 준대도 안 받겠다는 거야?”
“제가 도움 준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걸 왜 받아요? 더구나 우린 특수 관계라 증여세가 엄청 나올걸요.”
“출혈은 금방 메울 수 있어. 내년에 블록버스터를 터트릴 거니까 증여하려면 지금이 적기야. 두 달 전부터 이미 작업 들어갔어.”
두 달 전이면 초롱이를 유산하고 필리핀으로 도망간 때였다. 별이와 나를 잡기 위해 즉흥적으로 결정한 게 아니라 그때부터 증여를 결정하고 작업에 들어갔다는 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충격을 받아 머뭇거리는 사이 박래현이 내 두 손을 모아 자신의 손으로 감싸 쥐었다.
“1년 동안 네가 이혼 청구 안 하게 최선을 다할 거고, 만일 그래도 이혼하겠다면 그땐 받아들일게. 결혼 계약서에 쓰인 대로 양육권은 너한테 넘길 거고. 별이도 좋지만 내겐 네 행복이 더 중요해.”
내가 박래현을 알지 못했다면 진지한 표정과 논리적인 언변에 이미 설득당했을 것이다. 사회성이라곤 좆도 없는 남자가 오로지 실력이 발군하여 승승장구하는 줄 알았더니 사람 꾀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박래현이 작정하고 협상에 임하면 실력은 논외로 치더라도 얼굴과 말재간으로 상대를 압도할 것 같았다.
“내일 회사 자료 넘겨줄 테니까 한번 읽어 봐.”
회사 지분까지 증여해 가며 나를 붙잡는 기세로 봐서 1년 후에도 박래현은 날 놓아주지 않을 듯했다. 박래현이 내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솔직히 내게 지분까지 줘 가며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는 박래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박래현에게 이혼 소송을 걸 수 없으니 박래현이 힘으로 밀어붙일 생각이라면 내게서 별이를 뺏어가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결혼 계약서를 수정하고 엄청난 지분을 제시하면서 박래현은 내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다. 달아날 생각만 하는 내게 힘을 실어 주는 일이라 증여가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는 박래현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 3번 조항은 수정이 필요해 보여. 위치 추적기와 경호원 붙이는 건 네가 양보해. 널 감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네 안전을 위해서야. 가진 게 많아지면 위험한 일도 따라서 많아져. 별이 생각해서라도 네가 안전해야지.”
힘들게 살아온 궤적이 있어서 나와 결을 달리하는 박래현의 삶에 쉽게 동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성을 갖고 판단했을 때, 웬만한 남자 네다섯은 쉽게 제압할 박래현도 경호원을 두 명씩 대동하고 다니는데 나와 별이의 안전을 위해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받아들이겠습니다.”
“내일 경호원 둘이 올 거야. 나 출퇴근하는 동안엔 그 사람들과 같이 다녀야 해. 특히 집 밖에 나갈 땐 꼭 같이 다녀.”
“네.”
“나머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줄게. 그리고… 하루에 한 시간씩 별이랑 시간 보내게 해 줘. 육아는 공동으로 하자면서.”
“그건 생각해 볼게요. 정말 이대로 계약할 겁니까?”
“…너랑 별이한테 더 많이 줄 수 있게 열심히 일할게.”
“해준인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윤해준한텐 관심 없어. 네 동생이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를 빡빡하게 옥죄어 숨도 못 쉬게 했던 사슬이 드디어 끊어졌다. 투명해서 보이지 않지만 늘 그 무게에 짓눌려 허덕이던 내게 마침내 자유가 찾아온 것이다. 내가 느낀 해방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서 나는 갑자기 무중력 상태에 돌입했다. 머릿속이 텅 비면서 먹먹해진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몸은 가볍게 흔들리며 공중을 부유했다.
그러나 이다지도 쉽게 해결할 일을 먼 길을 돌아 이제야 끝냈다는 자각에 나는 삽시간에 현실로 되돌아왔다. 내 이성을 마비시켜 논리적인 판단을 방해한 적은 질투와 두려움이었다. 대화로 풀 수 있었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는 내가 작은 의심을 크게 부풀렸기 때문이다. 박래현에게 당했던 부당함에 분노할 짬도 없이 나는 박래현이 해준에게 관심 두는 게 무서워서 진실을 숨길 생각에 급급했었다.
“결혼 계약서는 수요일에 변호사 불러서 공증 서게 할게. 주식 증여는 때를 조율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좀 걸려.”
나는 결혼 계약서를 정성껏 접어서 가방에 넣는 박래현을 황망한 눈으로 응시했다. 사람을 판단하기에 5개월은 부족한 건지 내게 다 퍼붓는 박래현이 낯설고 어색했다. 박래현을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그가 좁은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는 재벌에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어둡고 꽉 막힌 세상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래서 한번 마음을 준 사람에게 물불 안 가리고 다 퍼 주는 듯했다. 박수현을 대신해 내게 복수하겠다는 미친 발상도 눈에 뵈는 게 없는 박래현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저 들어가서 잘래요.”
박래현은 침실 문 앞까지 나를 따라와서 내가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었다. 오늘 밤은 2층에 올라가서 편하게 자라고 말하려다가 쑥스러워서 그만두었다.
“잘 자.”
“박래현 씨도 잘 자요. 술 마시지 말고.”
“네가 안아 주면 술 안 마셔도 잠이 올 거야.”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지난번 결혼 계약서 쓸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쓰는 겁니다. 별이 뺏기기 싫어서요.”
돌처럼 굳어지는 박래현을 앞에 두고 방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박래현은 쓸데없이 고집이 세서 내가 손을 내밀 때까지 차가운 방에서 혼자 잠들 것이다. 두통과 불면을 포함한 온갖 악조건에도 꾸역꾸역 버티는 걸 보면서 이따금 박래현이 나와는 달리 무쇠로 만들어진 인간이 아닐까 의심하곤 했는데 오늘은 유독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마음이 무거웠다. 체력 좋은 알파여도 이 상태가 오래되면 어딘가 고장이 나고야 말 것이다.
박래현이 노리는 대로 넘어갔다는 자각에 혀를 차며 나는 소파에 앉아서 박래현과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8년 전에 가진 돈을 전부 투자해 피와 땀으로 일궈 온 회사 지분을 그는 망설임 없이 내게 넘겼고 나머지 요구 조건도 군말 없이 들어 주었다. 내가 휘두르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깊은 내상을 입힐 수 있는 칼자루를 건넸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별이 양육권과 회사 지분은 박래현이 내게 모든 걸 걸지 않으면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
박래현은 출근하기 전에 경호원 두 명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한 명은 오승현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나진주라고 했다. 두 사람은 격일제로 근무하며 근무 시간은 오전 여덟 시부터 밤 열 시까지였다. 박래현 퇴근이 늦어지면 근무 시간은 더 연장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윤준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부리부리한 눈에 서늘한 분위기를 갖춘 나진주는 마른 체형에 다부진 몸을 하고 있었다. 척 봐도 무술에 조예가 깊어 보였다.
“오승현 씨,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준영 씨,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나는 오승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오승현은 박래현의 스파이였지만 나와 별이를 위험에서 구해 줬기 때문에 그에겐 늘 고마웠다. 나중에 여유를 찾으면 밥 한 끼 살 생각이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만나 더 기뻤다.
“이건 상무님께서 찾아오라고 한 짐입니다.”
오승현은 내가 필리핀에 두고 온 캐리어와 배낭을 끌고 와서 내게 건넸다. 잠이 안 올 때면 거북 인형들이 보고 싶었는데 그가 짐을 찾아다 줘서 기뻤다. 박래현은 캐리어를 옷장 앞까지 갖다 놓고 출근길을 서둘렀다. 박영범이 없어서인지 그는 평소보다 30분 정도 이른 시간에 출발했다.
“이따가 메일로 바이언스 자료 보낼게. 그리고 오늘 카메라하고 동화책 도착하면 받아 놔.”
나는 박래현을 따라 현관으로 가서 그가 신발 신는 모습을 지켜봤다. 늘 박영범과 함께 다니던 그였는데 혼자서 출근하는 모습을 보니 짝 잃은 새처럼 외로워 보였다. 인수인계할 동안은 회사에서 매일 볼 텐데 두 사람 마음이 어떠할지 상상하니 조금 서글퍼졌다. 새로운 사람을 찾는다 해도 박영범처럼 박래현을 챙겨 주는 비서를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신발을 다 신고 박래현은 허리를 숙여서 내 배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별아, 아빠 회사 갔다 올게.”
“잘 다녀오세요.”
박래현은 키가 크고 훤칠해서 단정하고 질감이 두꺼운 겨울 정장이 잘 어울렸다. 검은색 줄무늬가 있는 고동색 정장에 감청색 코트만 걸쳤을 뿐인데 세련되고 우아해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오늘 면접이 잡혀 있어서 좀 늦을지 몰라. 뽑는 김에 기사를 겸할 수행비서도 한 명 뽑을 거야.”
“수행비서요?”
“박 실장 혼자 했던 일을 이제 두 사람이 나눠서 해야지. 갔다 올게.”
“저 오늘은 외출할 겁니다.”
“사생활 침해하지 말라면서 왜 나한테 보고해.”
“그러네요. 습관이 돼서….”
말하고 나서 나도 당황스러웠다. 아침에 박래현을 배웅할 필요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따라와서 내 하루를 보고하고 있었다.
“그 습관 안 버렸으면 좋겠네. 밥 잘 챙겨 먹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올 때 사 올게.”
“집에 다 있어요.”
박래현은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내가 나오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 박래현 웃는 모습에 괜히 심술이 나서 나는 방으로 돌아와 캐리어에서 짐을 꺼냈다. 오승현이 곱게 개켜서 넣은 옷들 사이로 올망졸망 거북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거북들을 침대 헤드에 모아 놓고 옷은 세탁 바구니에, 책은 책장에 정리했다. 필리핀에서 공부했던 교재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그때가 생각나서 책등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책 안에 다니엘과 동기들 전화번호가 있는데 언제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쓸모없는 짐들은 버리고 가방 정리를 얼추 끝낼 무렵 한 번도 쓰지 않은 억제제 여섯 통이 눈에 들어왔다. 억제제를 사 달라고만 했지 종류는 말을 안 한 탓에 정우는 일주일에 한 번 먹는 약과 매일 먹는 약을 반씩 섞어서 넣어 보냈다. 필리핀에 도착하자마자 박래현에게 각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억제제는 잊어버렸다.
별이 낳고 먹으려고 억제제를 서랍 구석에 넣던 도중 박래현이 오승현에게 내 짐을 찾아오라고 한 저의를 깨달았다. 나는 거실로 나가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오승현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를 보자 벌떡 일어났다.
“집에선 편하게 지내요. 어차피 대문에서 한번 걸러지잖습니까.”
“네.”
“물어볼 게 있는데 여기 앉아요.”
오승현은 나를 따라 소파에 앉으며 눈치를 살폈다. 지금껏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지라 누군가가 내 눈치를 본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불편했다.
“그때 귀국한 뒤로 또 필리핀에 다녀왔나 보네요.”
“네, 상무님께서 준영 씨 짐을 챙겨 오라고 하셔서요.”
“귀국할 때 챙겨 오지, 그땐 잊어버렸습니까?”
“처음엔 다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다가 마음이 바뀌신 거 같아요.”
왜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 주에 깜박 잊고 먹지 않았다고 대답했었다. 박래현은 내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오승현을 필리핀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뜯지도 않은 억제제를 보고서 그는 내 거짓말을 진작 파악했을 테고 별이가 자기 아이란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씨발, 박래현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 엉큼하게 유전자 검사를 들먹이며 내게 수작을 부렸다.
“짐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거북이들 보고 싶었거든요.”
“저도 준영 씨한테 감사드립니다.”
“네? 왜요?”
“그때 비행기 안에서 준영 씨가 제 편을 들어주셔서 안 잘렸습니다. 이만한 직장은 정말 구하기 어렵거든요.”
“고맙기로 따지면 제가 더 고맙죠. 필리핀에서 저랑 별이 구해 줬잖습니까.”
“그게 제 일인걸요.”
서로 감사 인사를 주고받은 후 나는 방으로 들어와 남은 짐을 정리하며 비행기 안에서 일어난 일을 회상했다.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심한 말이 오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박래현의 코피에 충격을 받아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박래현은 내게 유도신문을 했고 내가 했던 말들을 다 기억해서 당장 조사를 했다. 늘 느끼지만 이런 점에선 정말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서 배를 내려다보았다. 계획 없이 무책임하게 임신한 어른들 때문에 별이만 고생이었다.
“별아, 넌 나처럼 꼬인 인생을 살면 안 돼. 탄탄대로만 걸어야 해.”
내일 결혼 계약서 공증을 받고 나면 박래현과 나는 1년간 부부가 된다. 결혼 계약서는 부부간 다짐을 보여 주는 증거로 사용될 뿐 변호사에게 공증을 받는다고 해서 법적 효력을 갖는 건 아니라고 들었다. 1년 후에 박래현이 돌변해 별이의 양육권을 주장한다면 법정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래현이 나를 사랑해서 결혼을 유지하고 싶은 거라면? 시간을 갖고 지켜봐야 알겠지만 그는 오래전에 복수를 포기했고 내게 했던 일들을 후회한다고 했다. 박래현은 별이 아빠이고 나는 박래현에게 각인한 상태라 언제든 내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린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문제는 박래현에게 모진 상처를 받아서 유산을 경험했던지라 선뜻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박래현에게 마음을 줬다가 뒤통수를 맞으면 도저히 정신을 추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갈무리하며 1년 이후의 일은 그동안 신중하게 생각해서 결정하기로 했다. 박래현과 부대끼면서 1년을 살다 보면 어느 쪽으로든 확실하게 결론이 날 것이다.
나는 사이드 테이블에서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일을 마무리 지었으므로 오랜만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그리운 목소리에 코끝이 시큰거리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목에 슬픔덩어리가 올라와서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엄마, 나야. 준영이.”
- 준영이라고? 준영아, 어디야? 미국이니?
이전에 쓰던 번호가 아니라 난 줄 모르고 전화를 받은 듯 엄마 목소리에 당황함이 가득했다.
“나 어제 한국 들어왔어.”
- 왜 벌써 들어와? 박 상무 바빠서 못 온다더니.
“형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아서 귀국했어. 그거 할 사람이 형밖에 없다나 봐.
- 그래? 너 들어와서 좋긴 하다만… 둘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우리 사이 좋아. 엄마, 나 임신했어. 지금 11주 됐대.”
- 임신했어? 준영아, 몸은 괜찮니? 아기는 건강하고?
임신 소식에 전화기 너머로 환하게 웃는 엄마 모습이 그려졌다. 엄마는 지극히 현실적인 분이라 박래현이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면 나더러 졸업하고 직장 잡은 뒤에 임신하라고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어, 우리 둘 다 건강해. 엄마 몸은 어때?”
- 엄마는 아픈 데 없이 건강해. 그러면 박 상무도 같이 들어왔겠네?
“건강하다니 다행이다. 형도 같이 들어왔는데 요즘 바빠. 내가 이번 주 안에 혼자 찾아갈게.”
- 해준이가 주말에 들르니까 엄마 괜찮아. 무리하지 말고 나중에 천천히 와도 돼.
“아냐, 힘 안 들어. 곧 찾아갈게.”
- 그래, 내 새끼. 맛있는 거 많이 챙겨서 먹고 푹 쉬어.
“알았어. 끊어.”
원래 점심을 먹고 오후에 엄마 병원에 들를 계획을 세웠다가 병원 방문은 다음으로 미뤘다. 갑자기 들러서 충격을 주는 것보단 미리 말을 해 놓고 가야 엄마가 덜 놀랄 것 같아서였다. 앞으로 엄마에게 거짓말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지만 별이가 나를 속이고 거짓말을 하면 무척 화가 나고 우울해질 것 같았다. 내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별이는 머리가 좋아서 나쁜 행동을 금방 보고 따라 할 것이다.
계속 안에만 있었더니 좀이 쑤셔서 외투와 핸드폰을 챙겨 정원으로 나갔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정원에는 아직 누렇게 변색한 가을이 머물러 있었다. 격하게 몸을 움직여 잡생각을 떨치고 싶은데 산책으로 대신해야 해서 답답했다. 정원을 다섯 바퀴 정도 돌았을 무렵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징징 울렸다. 화면엔 박래현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
- 나야. 뭐 하고 있었어?
“정원 산책 중입니다.”
- 추운데 옷은 따뜻하게 입었어? 감기 걸리면 너만 고생이야.
“외투 챙겨 입었어요. 무슨 일로 전화했어요?”
- 바이언스 관련 자료 메일로 보냈어. 확인해 봐.
“네.”
- 어디 간다며. 오후에 나갈 계획이야?
“엄마한테 가려고 했는데 다음에 가기로 했어요.”
- 내가 시간 낼 테니까 나랑 같이 가자.
“네. 일 보세요.”
- 점심 꼭 챙겨 먹어. 이 차장님 쉬게 하고 오늘 저녁도 밖에서 먹을까?
“오늘 면접 있어서 늦는다면서요.”
- 아, 그랬지.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 끊는다.
전화를 끊고 메일함에서 첨부파일을 다운 받아 자료를 열었다. 자료에는 바이언스의 연혁과 간부진들, 재정 상태와 그동안 만들어진 제품들, 연구 성과, 그리고 개발 중인 파이프라인이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바이언스는 게임 체인저로 꼽히는 CART-T 세포치료제를 보유하고 있고 다양한 T 세포 치료제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고 있어서 세계 유수의 제약업체로부터 라이센스 계약 및 인수합병 제의를 받는 중이었다. 나는 다른 첨부파일을 열어 제약 회사들로부터 온 메일을 확인했다. 박래현 말대로 CART-T 포트폴리오 인수가로 12조를 제시한 회사도 있었다.
바이언스는 작은 회사답지 않게 사회공헌 활동에 공을 들였다. 자리를 잡기 시작한 3년 전부터 매년 약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등 5개 기초과학 분야에서 선정된 젊은 과학자 20명에게 연구지원금으로 10억 원을 후원해 오고 있고 릴리프로 얻는 수익금 일부는 한 부모 가정 후원 단체에 후원금으로 들어갔다. 회사 연혁만 읽어 봐도 박래현이 8년 동안 얼마나 공들여 키웠는지 눈에 보였다. 그런 피 같은 지분을 내게 넘기려고 두 달 전부터 준비하다니, 박래현은 내가 짐작한 이상으로 나를 아끼고 내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래현이 투자해서 회사를 일궜고 그의 노력으로 벌어들인 돈이었다. 내 노력은 한 스푼도 들어가 있지 않은 지분을 준다고 덥석 받을 순 없었다.
***
싱가포르에서 1박, 리조트가 있는 섬에서 2박을 한 정 차장 부부는 태양에 그을려 새까매진 얼굴로 돌아왔다. 그들은 여행 선물로 코코넛 칩 두 묶음을 내게 안기고서 곧바로 저녁을 준비했다. 남은 반찬으로 알아서 먹겠다고 해도 이 차장은 막무가내였다. 덕분에 이 차장이 즉석에서 만들어 준 음식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준영 씨, 내가 따뜻한 차랑 케이크 갖다 줄 테니까 방에 들어가 있어요. 냉장고에 케이크가 그대로 있네.”
“기다렸다가 제가 가지고 들어갈게요. 새로 온 경호원도 같이 챙겨 주세요.”
오승현과 나진주는 다른 경호원들과 밥을 먹으러 식사 시간엔 잠깐 자리를 비웠다. 천천히 먹고 오라고 해도 그들은 30분 안에 자리로 복귀했다.
“참, 동화책이랑 카메라는 아기방에 옮겨 놨어요. 준영 씨가 직접 정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손 안 댔어요.”
“네, 제가 정리할게요. 오늘은 두 분 다 일찍 들어가 쉬세요.”
나는 작업대에 기대어 미지근한 물 한 컵을 비웠다. 정 차장은 모과차를 끓인 다음 케이크를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내서 접시에 담았다. 나는 모과차와 케이크를 쟁반에 담아서 거실로 가지고 나갔다.
“나진주 씨, 와서 이거 좀 먹어요.”
“아, 네. 고맙습니다.”
테이블에 나진주가 먹을 모과차와 케이크를 내려놓고 아기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박스 일곱 개와 카메라 장비가 든 상자 한 개가 책장 앞에 놓여 있었다. 나는 쟁반을 옆에 두고 테이프를 뜯어 박스 안에서 책을 꺼냈다. 내용이 궁금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표지부터 화려한 책을 펼쳤다. 독창적이고 화사한 그림도 좋았지만 내용도 재밌어서 별이가 좋아할 것 같았다.
나는 코끼리 인형을 베고 누워 별이에게 책 한 권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초롱이가 어딘가에 숨어서 요정처럼 귀를 쫑긋거리며 별이와 함께 얘기를 듣고 있을 것 같았다. 한 권을 다 읽어 주고 나는 발을 들어 나무 그네에 매달린 원숭이를 툭툭 건드렸다. 긴 꼬리를 살랑거리며 원숭이가 좌우로 몸을 움직였다.
방이 차서 잠깐 누워 있는데도 등이 시리고 허리가 아팠다. 직접 체험해 보니 박래현이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매일 밤 이 추운 곳에서 잠을 자다간 조만간 사달이 날 것 같았다.
“윤준영, 여기 추운데 누워 있으면 어떡해? 얼른 일어나.”
현관문 여닫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박래현이 방으로 들어와 나를 안아서 일으켜 세웠다. 겨울바람을 머금고 있어서 뺨에 닿는 코트 깃이 서늘했다.
“박래현 씨는 매일 여기서 자잖아요. 2층 올라가서 자요. 아니면 여기 난방이라도 하든가.”
“난 여기가 시원하니 좋아. 얼른 방으로 들어가자.”
“진짜 유치한 거 알아요? 고집 그만 부리고 2층으로 올라가요.”
“내가 걱정돼서 그래?”
“…네. 감기 와서 저한테 옮기면 안 되니까.”
“알았어. 그렇게 할게.”
박래현이 거부하면 무슨 트집을 잡아 협박할까 고민하고 있던 내게 의외로 선선한 대답이 돌아왔다. 케이크 쟁반을 챙겨 든 박래현은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쉽게 꺾이는 고집이 아닌데 그가 곧장 그러겠다고 해서 되레 의심스러웠다.
“저녁은 먹었어?”
“네, 박래현 씨는요?”
“먹었어.”
“그런데 빨리 들어왔네요. 면접은 어땠어요?”
“씻고 와서 얘기해 줄게. 아직 안 씻었거든.”
원래도 깔끔한 박래현은 내가 임신한 뒤로 더 청결에 집착했다. 나는 박래현이 씻으러 간 동안 옷을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허리에 살이 조금씩 잡히다 보니 집에선 파자마가 제일 편했다. 박래현이 오길 기다리면서 달고 떨떠름한 모과차를 마셨다. 여전히 음식 냄새가 역할 때가 있지만 푹 쉬면서 조절하다 보니 필리핀에 있을 때처럼 입덧이 심하진 않았다.
30분 정도 지나서 박래현은 팔에 동화책을 한 아름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 머리칼에 축축한 물기가 남은 걸 보니 어서 책을 읽어 주고 싶어서 머리도 제대로 안 말리고 달려온 것 같았다.
“이 책을 다 읽어 주려면 두 시간 넘게 걸리겠어요.”
“듣다 자면 되지, 뭐가 문제야.”
파자마 깃이 벌어진 사이로 근육 잡힌 가슴팍이 슬쩍 드러났다. 박래현은 파자마를 입을 때 속옷을 입지 않고 그냥 걸치곤 했으니 지금도 맨몸에 파자마만 입었을 것이다. 돌연 안에 들어있을 실한 자지가 생각나 나는 박래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그를 살피고 있었던 것처럼 박래현 눈도 내 얼굴과 입술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숨기려는 나와 달리 박래현은 나를 보는 눈빛을 결코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할 얘기가 있어요.”
박래현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번져갔다. 초조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그는 목덜미를 주먹으로 툭툭 치면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로가 누적돼 창백해진 낯빛을 확인한 순간 가슴 한가운데를 묵직한 둔통이 꿰뚫고 지나갔다.
“이혼해 달라는 얘기만 아니면 돼. 결혼 계약서에 더 요구할 거 있어?”
“아니요. 더 요구할 거 없어요.”
박래현은 다리를 포개며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안 좋은 말을 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는지 나를 보는 눈에 어둑한 감정이 스며 있었다.
“바이언스 주식 안 받을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건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왜. 내가 그걸로 네 발목을 잡을 거 같아서? 1년 동안 나 이용해서 나한테 가져갈 수 있는 거 다 가져가. 윤준영은 그 정도 욕심도 없어?”
“네.”
“반이 부담스러우면 30%만 증여할게. 별이 양육권 네가 갖는다면서. 나중에 별이한테 물려줘.”
박래현은 맨 위에 있는 동화책을 집어서 첫 장을 펼쳤다. 화려한 꽃들이 가득한 곳에 작고 귀여운 애벌레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초음파로 본 별이가 마침 이 애벌레 정도 크기였다.
“박래현 씨가 키운 회사니까 나중에 직접 물려주면 되잖아요. 양육권은 저한테 있지만 별이는 당신 자식이기도 해요.”
“윤준영은 나랑 잘해 볼 의지는 전혀 없고, 1년 뒤에 이혼할 생각만 하고 있네.”
“제게 믿음을 주지 못한 박래현 씨 때문입니다.”
최악의 상황을 입에 올리며 박래현이 어디까지 견딜 수 있나 떠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펀치를 날려서 박래현이 상처 입는 걸 보면 묘하게 만족감을 느꼈다. 오만하고 건방진 박래현이 내 말에 흔들리고 아파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존재감을 확인하는 질 나쁜 버릇이 들어 버렸다.
“지분은 별이 생각해서라도 받는 게 좋아.”
“…….”
“내가 다른 오메가랑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아무래도 별이한테 지분이 덜 가겠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라서 나는 눈알이 튀어나올 기세로 박래현을 노려봤다. 박래현 입에서 다른 오메가와 결혼한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었다. 도망을 결심하면서 박래현이 다른 오메가와 결혼해 자식을 낳는 상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박래현에게서 직접 결혼한다는 말을 들으니 속에서 확 불이 일어났다.
“나랑 이혼하면 다른 오메가랑 결혼할 겁니까?”
“난 너한테 최선을 다할 거야. 그래도 간택이 안 되면 포기해야지.”
“말 돌리지 말아요. 나랑 이혼하면 다른 오메가랑 결혼할 거냐고요!”
“네가 먹다 버려도 좋다고 나 주워 갈 오메가들 많아. 나 버릴 땐 그것까지 고려해.”
“씨발 나밖에 없다면서 사정할 땐 언제고!”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화내는 모습에 웃음을 참느라 박래현 입술 끝과 눈꼬리가 떨리는 걸 보고서 더 울화가 치밀었다. 박래현이 나를 놀리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분노가 수그러들진 않았다.
“너와 별이를 보내고 내가 어떻게 살아. 나도 죽지 않으려면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지.”
“결혼 말고 다른 방법도 있어요. 당신이 좋아하는 연구나 열심히 하면서 살아요.”
박래현은 손을 뻗어 내 머리칼 몇 올을 만지작거렸다. 그럴 기분이 아니라 그의 손을 쳐 내자 이번엔 귓바퀴를 쓰다듬었다.
“내가 다른 오메가 만나는 게 싫다면, 나 놓지 마.”
“…….”
“이렇게 꽉 잡고 있으면 되겠네.”
박래현은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마주 잡아 깍지 낀 채로 힘을 주었다. 손목을 비틀어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비쩍 마른 손에 악력은 대단해서 관절이 부러지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었다.
“다른 오메가 안고 싶으면 안아요. 그 훌륭한 좆이 잘 서지도 않겠지만.”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가 어렵겠어?”
심드렁한 목소리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박래현을 유혹하려고 여러 오메가가 페로몬을 흘린다고 들었다. 박래현은 완벽한 외모와 어마어마한 부를 갖고 있어서 애 딸린 이혼남이어도 상관하지 않을 오메가들이 많을 것이다. 사생활이 깨끗하고 각인한 오메가가 없으니 지랄 맞은 성격을 감안해도 객관적으로 무척 좋은 조건이었다. 나만 박래현에게 각인한 게 새삼 억울해서 나는 박래현 손을 뿌리쳤다.
“그러면 1년 기다릴 필요 없겠네요. 당장 이혼하고 각자 갈 길 가요.”
박래현과 얘기 나누기 싫어서 침대로 기어 올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내가 생각해 봐도 내 심경 변화가 양극단을 달렸다. 이혼해 달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정작 박래현이 나 말고 다른 오메가에겐 눈 돌리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나 보다.
“준영아, 왜 화를 내. 네가 나 안 버리면 되지.”
이불 밖에서 박래현 목소리가 들리고 매트리스 가장자리가 한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이불 안에서 잔뜩 몸을 웅크렸다. 이제 와서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해 봐야 무슨 소용 있겠는가.
“질투하는 걸 보니 나한테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네.”
“질투 안 했어요.”
“장난이었어. 난 너랑 별이밖에 없어. 네 마음 돌아설 때까지 평생 너만 보고 살 거야.”
“장난 아닌 거 다 알아요.”
“사람을 설득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뭔 줄 알아?”
나는 이불 속에 얼굴을 처박은 채 박래현이 뭐라고 헛소리를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좋은 기술이라면 나중에 써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얻는 게 아니라 잃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대개 사람들은 더 격한 반응을 보이지. 그래서 너한테 기술 한번 걸어 봤어.”
“그래서 저 화내는 거 보고 만족했습니까?”
박래현은 이불 밖으로 빠져나간 내 왼발을 잡고 발가락을 지압하기 시작했다. 움푹 팬 곳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바닥 사이를 엄지로 누르면서 숙달한 전문가처럼 손을 놀렸다.
“필리핀에 두고 온 가방에서 억제제 확인했죠? 별이가 자기 앤 거 알면서도 뻔뻔하게 모른 척하고.”
“네가 먼저 말해 주길 기다렸어. 너랑 별이한테 잘해 주고 싶어서 결국 참지 못했지만.”
“좋으시겠어요. 원하면 뭐든 알 수 있어서.”
“정작 알고 싶은 건 돈과 사람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 문제지. 예를 들어 윤준영 마음 같은 거.”
“제 마음을 왜 몰라요. 여러 번 말한 거 같은데.”
나는 박래현 손에서 발을 쏙 빼냈다. 박래현은 이번엔 오른발을 잡아서 지압했다. 내게 각인은 안 했지만 박래현이 나를 좋아하는 건 신기하게도 사실인 듯했다. 박래현이 연기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닌데 몇 달을 일관되게 메소드 연기를 펼칠 수는 없을 것이다.
“준영아, 근육이 뭉친 거 같은데 다른 데도 마사지해 줄까? 입욕제 풀어서 마사지하면 피곤이 풀리고 좋아.”
“됐어요. 그냥 잘래요.”
“알았어. 별이한테 책 읽어 줄 테니까 들으면서 자. 좋은 꿈 꾸고.”
“네. 박래현 씨도 술 마시지 말고 일찍 자요. 약속했으니까 꼭 2층에서 자는 겁니다.”
다른 오메가와 결혼한다는 말이 괘씸해서 무작정 내쫓으려다가 아빠 목소리를 들을 별이의 권리를 위해 충동을 눌렀다. 박래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강단 있고 매끄러운 목소리는 논문을 읽는 덴 적당하지만 동화책을 읽는 덴 뭔가가 부족했다. 별이가 지루해져서 잠만 쿨쿨 잘 것 같았다.
“좀 더 재밌게 못 읽어요? 별이가 듣고 감동할 수 있게 열심히, 영혼을 담아서 읽어요.”
“재미없어? 잠깐만 기다려. 다른 책 읽어 줄게.”
새 책으로 교체하고 나서 박래현은 톤을 높여 동화책을 읽었다. 아빠 목소리가 바뀐 걸 눈치챈 아이가 갑자기 구르고 뒤집는 것 같아서 화들짝 놀랐다. 곧 잠잠해진 걸 보면 박래현 목소리에 멍청하게 내 심장이 반응한 건지도 몰랐다. 박래현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계속 책을 읽었고 나는 이불 속이 답답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박래현은 책을 잡지 않은 손을 내 머리칼 안에 넣어 얼굴과 두피를 살살 문질렀다. 졸음이 쏟아져서 나를 만지든 말든 내버려 두었다.
잠에 취해 혼몽한 정신으로 박래현이 어쩌다가 나를 좋아하게 됐는지 생각해 보았다. 시작은 분명 경멸과 증오였다. 박래현은 무시하는 눈빛으로 나를 능욕하고 여과되지 않은 저질스러운 말로 내 귀를 더럽혔다. 나를 괴롭히는 게 세상 살아가는 유일한 낙인 것처럼 집요하게 내 자존심을 벗겨 내렸다. 그런데 언제부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걸까. 세상에서 가장 미워해야 할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서 박래현이 겪었을 갈등과 고통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을 것이다.
이성을 잃고 무아지경에서 붙어먹은 뒤에 후회하는 표정으로 날 보곤 했던 박래현이 떠올랐다. 박래현에게 나는 동생과 몸을 섞은 남자였다. 동생 아래 깔려 숨을 헐떡이는 내 모습이 중첩되어 나를 안을 때마다 자신을 혐오했을 것이다. 수백 번 자신의 감정을 부정했다가 인정하는 과정에서 박래현은 결국 나를 선택한 듯했다.
그가 바이언스를 키우고 JS 제약 지분을 확보한 목적은 박수현에게 완벽한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박수현이 부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게끔 든든한 울타리를 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박래현은 17년간 사랑해 온 동생을 고작 3개월 만난 나 때문에 배신했다. 각인을 조절할 만큼 자제력이 출중한 알파가 증오하던 오메가에게 빠질 이유가 없다고 여겼기에 나는 박래현을 더 믿지 못했다.
거의 잠에 취하기 직전 파자마 자락을 들치고 배를 살살 문지르는 손길을 느꼈다. 내버려 두었더니 이번엔 입술과 볼이 복부에 비벼졌다. 더 놔뒀다가는 옆으로 올라와 같이 잠들 기세여서 나는 박래현 머리칼을 잡아 고개를 뒤로 꺾었다. 박래현은 순순히 고개를 들어서 나와 눈을 맞췄다. 어느 각도로 보나 빼어난 얼굴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 만지려면 허락 맡고 만져요.”
“널 만지려던 게 아니라 별이한테 얘기 잘 들었는지 물어본 거야.”
“저 잘 테니까 어서 가서 자요.”
“쌀쌀맞기는. 잘 자, 별이 아빠.”
전등을 끄고 무드 등을 켠 다음 박래현은 침대에 흩어진 책과 소파 테이블에 쌓아 놓은 책을 들고서 방을 나갔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맞은편 아기방 방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박래현은 나와 한 약속을 어기고 오늘 밤도 아기방에서 잘 생각인 듯했다. 이불도 없는 냉방에서 쭈그려 잠들 박래현을 생각하니 오던 잠이 확 달아났다. 아까 잠깐 누웠을 때 바닥이 차서 등이 시렸는데 밤에는 더 추울 것이다. 이불과 베개를 갖다 주려고 몸을 일으켰다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도로 누웠다. 박래현은 내 성격을 다 파악하고 일부러 불쌍하게 보이려고 저러는 것이다. 이번에 얼렁뚱땅 넘어가 주면 앞으로 자기 의견을 관철할 때 비슷한 방법을 쓸 게 뻔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
박래현과 나는 수요일 밤에 바이언스 법무팀 변호사 입회하에 결혼 계약서 공증 절차를 밟았다. 그동안 사적인 부분은 전부 박영범이 처리했던지라 낯선 변호사가 우리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데 거부감이 느껴졌다. 변호사는 결혼 계약서가 상대의 의지를 확인하고 이혼 시 증거자료로 채택될 수는 있지만 법적 효력을 갖진 못한다고 밝혔다. 양육권을 포기한다고 합의해도 이혼 소송 시 상대방이 양육권을 주장한다면 양육권자 및 친권자를 재판부에서 판단하게 될 거라고 했다.
박래현은 이혼하게 되면 별이 양육권은 조건 없이 내게 넘기겠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나중에 박래현 마음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예측하는 건 무의미했다. 재벌에게 양육권을 뺏기지 않으려면 보험이 필요해서 나는 박래현이 제시한 바이언스 지분 중 30%를 증여받기로 했다. 주식은 기업 평가가 끝나는 12월 20일경에 양도받기로 하고 결혼 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20일에 주식을 증여받으면 나는 박래현에 이어 바이언스의 2대 주주가 된다. 손바닥 뒤집듯 쉽게 준재벌이 된 탓에 현실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나는 찢어지게 가난한 대학생이었고 불과 5개월 전에는 수술비 5천만 원이 없어서 박래현에게 몸을 팔았다. 그런데 박래현이 세운 회사의 대주주가 되다니 누구한테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후에 시간을 내서 박래현이 보낸 바이언스 자료를 꼼꼼하게 다시 읽어 보았다. 바이언스는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회사였다. 내가 읽은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제약 회사들은 박래현이 구축한 CART-T 치료제와 T 세포 치료제 파이프라인에 막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기술을 이전한다거나 신제품을 개발해서 판권을 팔면 바이언스는 머지않아 다국적 제약 회사 반열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박래현은 스물여덟이고 그의 머릿속엔 아직 발굴하지 않은 원석이 무궁무진하게 들어있을 테니 그가 축적할 부를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내년 후반기에는 기업 가치가 지금과 상당히 다르리라고 예측해서 박래현은 증여 작업을 서두르는 듯했다. 그는 내가 학교를 졸업한 뒤에 회사에 들어가 경력을 쌓아도 좋다고 했다. 별이 낳고 대학 졸업하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므로 그 부분은 더 고민했다가 결정해도 될 것이다.
박래현은 사람을 만나느라 일주일 내내 바빴다. 여러 사람 가운데 비서실장 후보가 둘로 압축되었고 최종 결정만 남은 듯했다. 수행비서는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아직도 물색 중이라고 했다. 박영범이 워낙 일을 잘해서 사람을 뽑다가 지치면 흐지부지 박영범을 다시 쓸 줄 알았는데 박래현은 한번 결정한 일을 무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바쁜 와중에도 그는 매일 한 시간씩 별이에게 책을 읽어 주거나 말을 거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박래현이 책 읽어 주는 소리를 듣다가 스르르 잠들곤 했다. 이따금 배를 만지거나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지만 별이를 위해 그 정도는 내버려 두었다.
“준영 씨, 상무님이 보낸 딜러가 왔습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오승현이 데리고 들어온 남자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장수찬입니다.”
“윤준영입니다. 이쪽에 앉으세요.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니요, 됐습니다.”
나는 장수찬과 마주 보며 앉았다. 정우에게 졸업 선물로 차를 선물해 주고 싶어서 밖으로 나간다고 했더니 박래현이 딜러에게 연락해 그를 집으로 보냈다. 졸업 선물로 현금을 주고 싶지만 정우는 나와 달리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친구라 안 받을 게 뻔했다. 고민 끝에 차와 면접 볼 때 입을 정장을 선물해 주기로 했다.
“친구분 나이가 스물셋이라고 했죠? 그러면 이 SUV가 어떻겠습니까?”
장수찬은 카탈로그를 꺼내 내게 보여 주면서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보다 안전하고 완벽한 차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다른 모델도 보여 줬지만 처음에 추천한 SUV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신입 사원인 정우가 상사들이 타고 다니는 차보다 더 비싼 외제 차를 회사에 몰고 다녀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보험료가 비싸서 이 차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이거 중고로 팔면 돈은 얼마나 받을 수 있나요?”
“어느 정도 사용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저희 차는 중고가도 굉장히 높게 형성돼 있습니다.”
외제 차가 부담스러우면 팔아서 정우가 타고 싶은 차를 사도 될 것이다. 나는 처음 봤던 청회색 SUV를 사기로 했다. 딜러는 필요한 옵션들을 추천했고 나는 추천받은 옵션을 빠짐없이 추가했다.
“이 차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출고되기까지 3주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 걸릴 수 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상무님께서 추천해 주신 이유가 있겠죠. 최대한 빨리 출고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3주 안 넘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변에 계신 다른 분들께도 추천 부탁드립니다.”
장수찬은 공손한 태도로 명함과 카탈로그를 건네고 직장으로 돌아갔다. 차가 멋져서 정우 마음엔 쏙 들겠지만 사 놓고 보니 그가 타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과 사양이었다. 어깨 너머로 카탈로그를 보고 있던 오승현이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준영 씨, 친구한테 차를 사 주시는 거예요?”
“네. 저한테 무척 고마운 친구가 있어서요.”
“차 정말 멋있네요. 얼마나 고마우면 이렇게 비싼 차를 사 주세요?”
“내 형제보다 더 귀중한 친구라서요.”
“친구분이 정말 좋아하시겠네요.”
자기 코가 석 자였던 취준생 정우가 내게 베풀었던 온정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우가 부담스러워하더라도 그 은혜에 걸맞은 성의를 보이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나는 정우에게 사진을 보내 주려고 카탈로그를 반듯하게 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준영 씨, 저녁 준비 다 됐어요.”
“네, 지금 갈게요.”
정 차장의 부름에 카탈로그를 정리하고 주방으로 갔다. 박래현에게 오늘도 늦겠다는 연락을 받은 뒤라 나는 혼자서 식탁에 앉았다. 며칠 가라앉았던 입덧이 다시 올라와서 저녁은 평소보다 적게 먹었다.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파서 나는 찬 바람을 쐬며 정원을 산책했다.
10분 넘게 정원을 거닐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욕실로 들어가 먹은 걸 토해 냈다. 20분 넘게 변기를 붙잡고 씨름했더니 눈앞이 노래지고 기진맥진해져서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쓴 물까지 다 토한 뒤에 나는 욕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목구멍이 터질 것처럼 아프고 속이 쓰라렸다. 그동안 박래현과 신경전을 벌이느라 사라졌던 입덧이 안정을 되찾자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
이만 닦고 침실로 들어가려다가 몸이 끈적거리는 게 싫어서 뜨거운 물을 틀고 욕조에 입욕제를 풀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지친 몸에 휴식을 주고 싶었다. 물이 차는 동안 배가 얼마나 부풀었는지 보려고 거울 앞에서 옷을 벗었다. 근력 운동을 안 한 탓에 보기 좋게 자리 잡았던 근육이 사라지면서 복부에 말랑말랑한 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얼굴은 필리핀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아져서 뺨과 코에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다. 나는 약간 살이 찐 복부를 손으로 꼬집으며 욕조로 들어갔다.
거품이 풍성하게 일어난 목욕물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나는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욕조 턱에 뒷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뜨거운 물에 피로가 풀리면서 몸이 녹신녹신해졌다. 별이가 양수에 잠겨 잠들어 있듯 나도 물속에 잠겨 편안함을 느꼈다. 엄마 배 속도 이렇게 편안했을까.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박래현이 엄마 병원에 같이 가자고 해서 기다렸는데 더 기다리긴 힘들었다. 내일은 나 혼자서라도 엄마를 만나러 갈 결심을 하고 있는데 욕실 문이 열렸다.
흰색 드레스 셔츠에 체크무늬 팬츠 차림의 박래현이 들어와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허리를 숙였다.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던 그는 검지 끝으로 거품이 묻은 코끝을 비비며 혼자서 다정한 부부 행세를 했다.
“다 벗고 있는데 왜 맘대로 욕실에 들어와요?”
“욕실은 미끄러워서 위험해. 너한테 무슨 일 생겼을지 몰라 확인차 들어왔어.”
“배 안 나와서 균형 잘 잡아요.”
“임신 초긴데 조심해야지.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저녁 안 먹었어?”
“먹었는데 다 토했어요.”
“힘들었겠네. 움직이지 말고 가만있어. 내가 씻겨 줄게.”
내 허락은 필요 없는지 박래현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말라서 뼈만 남은 팔뚝 위로 푸른 혈관이 솟아올랐다. 먹은 것을 다 게워 내 기력이 약해진 탓에 박래현을 말리지 않았다. 나는 입덧하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근육은 살로 변해 가는데 박래현은 마른 뒤로 더 잘생겨져서 목욕시중이라도 들게 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수납장을 뒤져 수건과 스펀지처럼 노랗게 생긴 물건을 찾아온 박래현이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욕조 턱과 뒤통수 사이에 수건을 넣어 자세를 편하게 잡아 준 다음 내 오른팔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는 바지가 젖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스펀지로 내 손가락부터 싹싹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한결 편해진 자세로 나를 씻기는 박래현을 올려다보았다. 코끝과 머리카락에 거품을 묻힌 채로 나를 씻기는 박래현은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을 하는 사람처럼 진지해 보였다.
“스펀지도 아니고, 이게 뭐예요?”
“천연 해면이야. 부드럽고 세정력이 좋아.”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해면이 피부를 문지르자 기분이 좋아졌다. 오른팔을 다 씻긴 박래현이 이번엔 해면으로 얼굴을 씻겼다. 이마와 눈썹, 콧잔등과 뺨을 지나 입술과 턱을 정성스럽게 문지르고서 물을 틀어 얼굴을 헹궜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목을 받치고 있는 수건에 얼굴을 닦았다. 해면은 목덜미로 내려가 빗장뼈 사이 움푹 팬 곳을 지나서 가슴팍으로 위치를 바꿨다. 젖꼭지 위를 지나갈 때 박래현은 일부러 속도를 늦춰 느릿하게 문질렀다. 해면을 꽉 누른 엄지가 젖꼭지에 비벼지자 나는 반사적으로 허벅지를 오므렸다.
“으, 으응….”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신음이 새어 나갔다. 어색한 눈빛이 서로를 향했고 박래현은 귀뺨을 붉히며 내게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
“잘 느끼는 건 여전하네. 섹스 안 하고 어떻게 참았어?”
“공부하느라 딴 데 신경 쓸 여유 없었어요.”
“나는 네 생각 하면서 자위했는데. 너 때문에 자위 처음 해 봤어.”
“와, 그동안 자위를 한 번도 안 해 봤다고요?”
박래현은 한 팔을 내 귀 옆으로 내려 욕조를 짚고서 아랫배를 해면으로 살살 문질렀다. 수증기로 축축해진 머리칼이 남자의 이마로 흘러내렸다. 그는 나를 잡아먹을 듯 응시하면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너랑 처음 해 본 게 많아. 섹스도 처음 해 봤고 사랑도 처음 해 봤고 결혼도 처음 해 봤어.”
“키스는요?”
“내가 먼저 한 건 네가 처음이야.”
정치헌과 잠깐 사귀는 동안 정치헌이 박래현을 가만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을 상상했더니 가슴 한복판에 날카로운 총탄이 날아와 박혔다.
“너도 내가 처음이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날 씨발 좆같이 이기적인 새끼라고 욕하고 때려도 좋아.”
“그게 기뻤어요? 당신은 존나 뻔뻔한 개새끼야. 양심도 없는 씨발 새끼라고!”
“병원에서 사실을 처음 확인했을 땐 너한테 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었지.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너는 수현이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고, 이 늠름한 백자지와 사랑스러운 구멍을 아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어. 내가 어떻게 안 기뻤겠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지.”
박래현은 어느새 해면을 집어 던지고 내 자지를 주물럭거렸다. 비눗물에 젖은 손은 미끄러워서 기둥 표피와 귀두를 빠른 속도로 마찰했다. 따뜻한 물에 잠겨 해면처럼 흐물흐물하던 자지가 알파의 손길에 단단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손바닥으로 기둥과 귀두를 한꺼번에 문지르던 손이 목표로 한 곳은 다른 데 있었다. 부어오른 회음을 누르고 더 밑으로 내려온 손가락이 꽉 닫힌 주름 위를 덮듯이 문질렀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아찔한 감각이 몰아쳐 얼굴로 열이 몰렸다. 몸이 풀려서 성감을 자극하는 손을 뿌리치려는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다. 박래현은 느긋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손가락 여러 개를 이용해 구멍을 벌렸다.
“준영아, 형이 빨아 줄까?”
손가락 네 개가 한꺼번에 구멍 안으로 파고 들어와 주름 주변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작은 돌기들이 손가락 지문에 비벼지면서 속살이 파드득 경련했다.
“대답해. 네 구멍 빨고 싶어.”
나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박래현 혀가 안으로 들어오면 여기서 조용히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박래현은 상체를 숙여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손가락을 요령껏 움직였다. 구멍 안을 꽉 채우는 선득한 감각에 허리와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속살을 젖히고 들어온 길쭉한 손가락들이 성감대를 찾아 문지르고 떨리는 곳을 찾아 깊게 갉작거렸다. 손바닥과 손등, 손가락으로 차진 점막이 질기게 들러붙어 조이고 비틀었다. 내가 허리를 틀자 거품이 가라앉은 물이 눈에 띄게 출렁이며 크게 물살을 만들었다.
“흐으, 흐으응….”
“아, 준영아….”
박래현 목소리가 수증기에 섞여 귓가에 울렸다. 안을 드나드는 손가락이 속도를 내면서 몸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욕조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서 엉덩이를 흔들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 냈다. 박래현은 목덜미에 파묻은 얼굴을 들이밀어 내 입술을 찾았다. 신음 때문에 벌어진 입술에 날렵하고 매끄러운 혀가 밀고 들어왔다. 혀끝이 부딪치고 살덩이가 섞이는 동안 박래현 손은 안을 비비고 문지르며 나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깊은 곳으로 능숙하게 휘어져 들어온 손가락들이 안을 쥐어뜯자 몸이 삽시간에 경직되었다. 머리카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으읍! 흐, 흐으읍!”
절정은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찾아왔다. 입술이 막혀 있어서 내 신음은 박래현이 대신 삼켰다.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붙잡을 곳이 없어서 박래현 어깨와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첨벙이는 물소리가 났고 박래현은 내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내 몸을 부둥켜안았다. 차마 박래현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눈을 감아 버렸다. 박래현은 물이 식지 않게끔 뜨거운 물을 튼 다음 물속에서 해면을 건져 내 왼쪽 팔과 다리를 문질렀다.
“저 목욕 그만할래요.”
“알았어. 머리 다 젖었으니까 감겨 주고 끝낼게.”
박래현은 샤워기를 끌어와 내 머리를 감기고 욕조에서 물을 뺐다. 그는 내 몸에서도 비눗물을 씻겨 내렸다.
“앞으로도 네가 나만 알게 할 거야.”
“그렇게 자신 있어요? 내가 이혼하고 다른 사람 사귀면 어쩔 건데요?”
박래현은 커다란 수건 두 개를 꺼내 와서 하나로는 내 몸을 감고 다른 하나로는 내 머리칼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물기가 어느 정도 닦이자 그는 나를 번쩍 안아서 들어 올렸다.
“부검을 해도 검출 안 되는 독이 있어.”
“씨발 존나 무섭네요. 배신하면 저 죽이겠다는 소립니까?”
“양육권을 너한테 줬는데 너는 별이랑 살아야지, 널 왜 죽여.”
다른 사람이 말하면 농담으로 알아들을 텐데 박래현 입에서 나온 말은 이상하게 농담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 때문에 부검을 해도 검출이 안 되는 독에 독살당할 사람은 없을 듯했다. 내가 박래현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확률은 0%에 가까울 테니까 말이다. 박래현은 나를 침대에 앉히고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있는 물기까지 완벽하게 제거했다.
“머리카락 말려야 하니까 아직 눕지 마.”
박래현은 이불로 나를 덮어 주고 드레스 룸에서 드라이어를 찾아왔다. 보여 줄 거 다 보여 준 주제에 나는 박래현에게 알몸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불을 양손으로 꽉 여몄다. 박래현은 드라이어에 전원을 넣고 따뜻한 바람에 머리칼을 말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내가 쾌락에 빠져 몸부림치는 통에 박래현의 머리칼이며 옷이 물에 젖어서 몸에 찰싹 붙어 있었다. 그래서 박래현이 팔을 움직이면 가슴 근육이나 젖꼭지의 움직임이 적나라하게 다 보였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아래쪽은 더 가관이었다. 젖은 팬츠 위로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여실히 드러나 보는 내가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다 말렸으니까 누워서 쉬고 있어. 씻고 와서 책 읽어 줄 테니까.”
내가 침대에 눕는 것을 보고 박래현은 수건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이불 속에서 얼굴만 내민 자세로 가만히 천장을 응시했다. 쌓여 있던 욕구를 해결했는데 몸이 가벼워지기는커녕 더 큰 욕구 불만이 찾아왔다. 거칠고 격렬한 섹스에 익숙해져서 손을 넣어 헤집는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우린 성인이고 부부이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굳이 섹스를 피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아직은 받아들일 때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박래현 진심을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정말로 좋아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내게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단지 박래현이 나와 초롱이에게 준 상처를 치유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었다.
박래현이 샤워를 끝냈는지 드레스 룸 안쪽에서 머리 말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광택이 나는 검은색 천에 붉은색과 흰색 꽃이 프린트된 파자마를 입고 내게 다가왔다.
“가서 책 가져올 테니까 잠깐 기다려.”
“목욕했더니 졸려요. 그냥 잘래요.”
“너 잔다고 별이도 같이 자는 거 아니잖아. 난 별이한테 들려줄 테니까 넌 졸리면 자.”
나는 박래현이 주로 앉아서 책을 읽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저녁 먹은 걸 다 토했더니 배가 고프고 속이 쓰렸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게 귀찮아 조용히 자는 쪽을 택했다. 책만 가지고 온다던 박래현은 20분 정도가 지나서 방으로 들어왔다.
“준영아, 배 안 고파? 일어나서 이거 좀 먹어.”
뭔가를 먹으란 소리에 귀가 쫑긋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박래현은 접시에 육포를 가득 담아 와서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 젓가락으로 한 조각을 집어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두툼하게 썰어서 잘 말린 육포는 씹을수록 달고 고소했다.
“이 차장님이 네 간식으로 먹으라고 직접 만들었대. 누워서 먹으면 체하니까 일어나서 먹어.”
나는 헤드에 몸을 기대고 접시째 무릎에 놓고 육포를 집어 먹었다. 옆에 젓가락을 두고 손으로 먹는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박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박래현 씨도 같이 먹어요.”
“난 됐어. 너 많이 먹어.”
박래현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맨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남자는 뭐든 잘해서 이제 책 읽는 것도 성우처럼 능숙하게 해냈다. 열심히 여우 목소리를 흉내 내던 박래현은 내가 육포를 다 먹고 물을 마시자 이마에 눈이 달린 사람처럼 잽싸게 접시를 치우고 물티슈를 꺼내 내 손가락을 닦아 주었다.
“김정우 차는 뭘로 골랐어?”
“이번에 새로 나온 SUV 모델로 골랐어요.”
“김정우는 행복하겠어. 윤준영 사랑을 듬뿍 받아서.”
“우리 이상한 관계 아닙니다. 괜히 엄한 사람한테 해코지하지 마세요.”
혹시 정우에게 이상한 독을 쓸까 봐 걱정돼서 정우는 단지 친한 친구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박래현은 생각이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어서 더 위험한 남자였다.
“김정우가 부러워서 그래. 애걸복걸해도 나한텐 눈길 한번 안 주잖아.”
“개소리 그만하고 안 나갈 거면 책이나 읽어요.”
이는 박래현이 나가면 닦기로 하고 나는 엉덩이를 움직여 침대에 누웠다. 박래현은 읽으라는 책은 안 읽고 내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부드러운 살을 손으로 문지르더니 그 위에 뭔가가 덧발라졌다. 박래현이 뭘 하는지 돌아보기도 전에 손가락 사이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지금?”
“움직이지 마. GPS 심었으니까.”
“뭘 심어요?”
“GPS와 경호원은 네가 양보하기로 합의했잖아.”
박래현은 거즈를 눌러 잠시간 지혈시킨 뒤 상처에 밴드를 붙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밴드가 붙은 내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박래현 행동에 기가 막혀서 목소리가 떨렸다.
“가방에 부착하거나 핸드폰을 이용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사람 몸에 이딴 걸 심어요?”
“눈에 보이는 장치는 버리면 그만이야. 오히려 납치범들이 이용해서 추적에 혼선을 줄 수도 있어.”
“저 납치 같은 거 안 당합니다. 괜히 핑계 대지 마세요. 내일 당장 빼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박래현에게 동의할 때 가방 안에 넣고 다니는 GPS 정도로 생각했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박래현을 노려보자 그는 오른손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너 보는 앞에서 나도 삽입할 거야. 여기 손으로 잡아 봐.”
박래현은 왼손으로 내가 어떻게 살을 잡아야 하는지 시범을 보였다. 나만 당하기 억울해서 시키는 대로 살을 잡았더니 박래현이 주사기처럼 생긴 물건을 이용해 잡힌 살에 뭔가를 삽입했다. 그는 피를 지혈하고서 상처 위에 밴드를 붙였다.
“등록 번호 알려 줄 테니까 내 위치가 궁금하면 언제든 조회해도 돼.”
“전 싫다고 했습니다.”
“윤준영, 공증까지 받은 계약을 안 지킬 거면 뭐 하러 계약을 한 거지?”
내가 계약서에 쓰인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박래현이 트집을 잡을 수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박래현과 결혼 관계를 유지한다면 가는 곳을 속일 필요가 없어서 칩이 있든 없든 상관없을 테고 만약 1년 후에 이혼한다면 칩을 제거하면 될 일이었다.
“네 위치만 확인하는 거야. 도청 기능은 없고 다른 용도론 절대 사용 안 해.”
박래현은 내 핸드폰을 열어 뭔가를 조작한 뒤에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 핸드폰 화면에는 못 보던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있었다.
“여기 등록 번호에 내 번호 집어넣으면 돼. 우리 번호는 이 회사와 우리 경호 팀 팀장만 알고 있어. 로그인 상태니까 아무나 열어 볼 수 없게 네 핸드폰도 지문 등록해 놔.”
박래현은 내 사생활을 침해하기 위해 자신의 사생활을 기꺼이 공개해서 반발을 무마했다. 어차피 내년 8월까지 나는 집이나 엄마 병원 말고는 갈 데가 없었다. 나보다 활동 반경이 훨씬 넓은 박래현이 자신의 손에 스스로 수갑을 찬 꼴이었다. 요모조모 따져 봐도 박래현이 더 손해 보는 거래인데 박래현의 밝은 표정 때문인지 억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책 더 읽어 줄 테니까 들으면서 자.”
박래현은 책의 첫 장을 펼치고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베개를 베고 반듯하게 누워 책 너머로 언뜻 보이는 박래현 얼굴을 감상했다. 글을 읽느라 눈을 내리깔아서 곱게 말려 올라간 속눈썹이 유독 탐스러웠다.
***
일요일엔 엄마 선물과 먹을 것을 잔뜩 싸 들고 박래현과 엄마를 만나러 갔다. 당신 말로는 건강하다고 했지만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걱정이 많았는데 해준이 옆에서 잘 보살폈는지 엄마는 밝고 건강해 보였다. 병원에서 프로그램대로 잘 관리 받으면 건강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안심했다.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춰서 병원을 방문한 우리는 밖에서 점심을 먹고 엄마와 시간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을 나오면서 이제 엄마에게 절대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계절이 바뀌면서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박래현은 새로 인선한 비서실장과 호흡을 잘 맞춰 가는 듯했다. 박영범은 2주 더 같이 일하면서 인수인계와 더불어 수행비서 뽑는 일을 마무리 짓는다고 했다. 임무를 완수하면 12월은 혼자 여행을 떠나 재충전할 시간을 갖는다는데 한때 내가 꿈꿔 왔던 샐러리맨의 모습이었다.
나는 잘 먹고 잘 쉬면서 비즈니스 영어와 전공 공부를 병행했다. 졸업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서 진로는 더 고민해 보기로 했지만 어디서 일하든 외국어는 기본이라는 생각에 박래현에게 학원을 다니겠다고 했더니 그는 곧장 바이언스 해외 사업부에서 근무하는 제니퍼 강이라는 직원을 내 과외 선생으로 데려왔다. 나는 그녀에게 수요일과 토요일에 과외를 받기로 하고 어제저녁에 간단한 테스트를 받았다. 그녀는 내 발음을 칭찬하면서 가볍고 재미있는 주제에서 점차 무겁고 깊이 있는 주제로 나아가자며 토요일에 올 때 커리큘럼을 짜 오겠다고 했다.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제니퍼에게 배웠던 표현을 복습하고 있는데 박래현에게 전화가 왔다.
“저예요.”
- 오늘 5시에 만나기로 한 거 안 잊었지? 길 밀릴 텐데 지금쯤 나와야 하지 않을까.
“얼른 준비하고 나갈게요. 옷만 입으면 돼요.”
- 그래, 서두르지 말고 조심해서 나와.
전화를 끊고 드레스 룸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편한 면바지에 윗도리는 여유가 있는 스웨터를 입어 배를 가리고 그 위에 모자가 달린 코트를 입었다. 박래현과 논의한 끝에 내일부터 초롱이 방을 별이 방으로 바꾸는 공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침대, 책상, 옷장 등 내부 인테리어는 디자이너에게 맡기고 우린 시간 날 때 나머지 필요한 물건을 사자고 했는데 박래현이 오늘은 여유가 생겼는지 나를 백화점으로 불러냈다.
핸드폰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4시에 맞춰 오승현과 집을 나섰다. 하늘에 회색 구름이 잔뜩 끼어서 대기는 비가 올 것처럼 습하고 무거웠다. 어제부터 급격하게 추워져 어쩌면 눈이 올지도 모를 바깥 풍경을 관찰하다가 핸드폰을 켜서 박래현이 어디 있는지 위치 추적을 시작했다. 박래현이 프로그램을 깔 때만 해도 박래현 위치 추적이나 하면서 한심하게 시간을 보내는 나를 상상하진 않았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는데 박래현 위치를 파악하는 짓은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곤 했다. 박래현은 주로 JS 본사나 JS 연구 센터, 바이언스 본사, 호텔이나 레스토랑에 있었다. 이상한 습관이 들지 않게끔 자중하자고 오늘 아침에 다짐해 놓고 나는 또 핸드폰을 켜서 이 짓을 하고 있었다.
프로그램 지도에 곧장 박래현 위치가 떴다. 그는 우리가 만나기로 한 백화점 옆 호텔에 있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박래현과 5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4시 20분이었다. 박래현은 외국인 바이어들이 이동하지 않고 편하게 협상에 임하도록 종종 호텔 컨퍼런스 룸이나 커피숍에서 그들을 만났다. 오늘도 바이어를 만나느라 호텔에서 위치가 잡힌 듯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인터넷을 열어 박래현 이름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기사가 떠서 최신순으로 정렬해 맨 위에 나오는 기사를 클릭했다. 놀랍게도 정치헌과 악수를 나누며 웃고 있는 박래현 모습이 기사 상단에 사진으로 떴다. 두 사람이 함께 담긴 사진을 보자 불쾌했던 기억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박래현에게 쏟아지던 끈적끈적한 시선과 나를 남창 취급하며 멸시했던 말들이 동시에 떠올라 기분이 엉망이 되었다. 나는 요동하는 속을 가라앉히고 눈을 내려 기사를 읽었다.
송림 병원이 JS사와 손잡고 폐암 표적 세포 치료제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에 착수한다. 송림 병원 종양내과 교수팀은 JS 연구 센터 마유림 박사 팀과 협력해서 새로운 면역 항암 신약 후보 물질 검증과 최신 항암 표적 세포 치료제 개발을 위한 공동연구에 착수하기로 합의했다.
JS 제약 박래현 상무이사와 더불어 이번 프로젝트 공동대표를 맡은 송림 병원 정치헌 부원장은 “JS 제약의 혁신적인 기술과 현장에서 축적된 우리 병원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국내 병원이 주도적으로 신약 개발에 참여한 모범적인 사례를 만들겠다.”며 공동연구에 자신감을 내비쳤다.
송림 병원은 임상 실험에….
오늘 박래현과 정치헌이 JS 제약과 송림병원 대표로 만나서 기자 회견을 하고 폐암 치료제 개발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는 기사였다. 두 사람은 12시에 만나 합의문을 조율하고 1시에 기자 회견을 했으며 4시 30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 호텔에 함께 있었다. 네 시간 넘게 둘이 같이 있었다는 계산에 불안과 분노, 배신감이 동시에 몰려와 핸드폰을 쥔 손이 떨렸다.
제약 회사와 병원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란 건 이미 주워들어 알고 있었다. 정치헌 일가가 대형 병원을 소유하고 있어서 제약 회사들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쓴다지만 다른 사람도 있을 텐데 박래현이 직접 나서서 정치헌과 프로젝트를 진행할 줄은 몰랐다.
버젓이 배우자를 옆에 두고 예전에 약혼 얘기가 오갔던 사람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니 둘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정치헌은 끈질기고 모럴이 없는 남자라 박래현이 결혼했다 한들 눈 하나 깜짝 않고 자기 꼴리는 대로 들이댈 것이다. 그가 박래현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지 상상하자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심장이 조각조각 갈라졌다.
두 사람이 나 몰래 불륜한 게 아니라 업무상 만난 것뿐인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걸까. 나만 속 좁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 했지만 기분은 밑이 없는 바닥으로 곤두박이쳤다. 박래현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정치헌과 얽히는 게 싫었다. 내가 능력 있고 자신 넘치는 사람이라면 정치헌 따위 좆도 신경 쓰지 않을 테지만 정치헌은 어느 면을 비교해 봐도 나보다 뛰어나서 어쩔 수 없이 열등감을 느껴야 했다.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추악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이었다. 이 엿 같은 자격지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해 박래현에게 인정받는 것 말곤 없어 보였다.
차가 백화점 발레파킹 지점에 멈춰 서자 차 뒷문이 열렸다. 뒤에 경호원들을 두고 박래현은 내가 차에서 내릴 때까지 직접 문을 잡고 있었다. 코트 위로 길게 늘어뜨린 체크무늬 머플러가 바람에 흩날렸다. 빼어난 외모에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정치헌은 두고두고 놓친 물고기가 아까울 것이다. 박래현이 유부남인 걸 인식하고 선을 넘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견물생심이라고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위치에 있어서 쉽게 마음을 비우지 못할 수도 있다.
“옷을 왜 얇게 입었어. 온 김에 네 옷도 좀 사자.”
“별이 낳고 내년에 몸 만들어서 살 겁니다. 지금은 편한 옷이 제일 좋아요.”
“편한 옷으로 사면 돼.”
복잡한 심리상태 탓에 오늘따라 유독 잘생겨 보이는 박래현이 내 등에 팔을 두른 뒤 왼쪽 팔뚝을 잡고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지금 남자 눈에는 나밖에 안 보이는 듯하지만 얇은 콩깍지는 찾아왔던 속도만큼 빠르게 벗겨질 수 있어 불안했다.
“오늘은 밥 먹을 때 입덧 안 했어?”
“좀 울렁거리긴 했는데 괜찮았어요. 오늘 바빴어요?”
“조금.”
박래현과 나는 유아용품 매장으로 가서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을 살폈다. 우리 얼굴을 기억해 낸 매장 매니저는 눈치가 빨라서 신생아 용품을 찾는 우리에게 지난번과 약간씩 다른 물품을 추천해 주었다. 박래현은 매니저가 추천하는 물건을 살폈고 나는 별이가 가지고 놀 애착 인형을 돌아보았다. 여러 인형 가운데 초롱이를 위해 샀던 코끼리 인형을 발견한 순간 코끝이 아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초롱이는 아마 우리보다 훨씬 성숙하고 좋은 부모를 만나 어디선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것이다.
눈물이 흐르지 않게 여러 번 눈을 깜박거리다가 까만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토끼 인형을 발견했다. 커다란 귀와 둥그런 발바닥에 꽃이 활짝 핀 천을 덧댄 토끼 인형이 마음에 들어서 품에 안아 보았다. 토실토실한 엉덩이와 분홍색 코가 귀여웠고 무엇보다 촉감이 부드러워 마음에 들었다. 나는 분홍색, 하늘색, 크림색, 베이지색 토끼 인형을 크기대로 골라 계산에 추가했다.
“혹시 네가 갖고 싶어서 고른 거야?”
“아니요. 별이가 갖고 싶대요.”
박래현은 물건들을 일요일에 집으로 배달해 달라고 부탁한 뒤 계산을 마쳤다. 그는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 중에 베이지색 토끼 인형을 꺼내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얼떨결에 토끼 인형을 안고서 내 옷을 고르러 갔다. 스포츠 용품 매장에서 운동복이나 두어 벌 살 생각이었는데 박래현은 늘 가던 매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상무님, 윤준영 씨, 어서 오세요.”
몇 번 봤다고 낯이 익은 매니저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했다. 나도 모르게 따라서 인사하는 날 보며 매니저가 살갑게 웃었다.
“토끼가 아주 귀엽습니다. 상무님, 액티브 웨어 찾으신다고 하셨죠? 이쪽에 진열돼 있습니다.”
“저 비싼 옷 필요 없어요. 집에서 입고 뒹굴 추리닝 두 벌만 사면 돼요.”
명품 로고가 새겨진 운동복을 마음대로 뭉갤 수는 없어서 나는 박래현 팔뚝을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옷을 고르고 있던 매니저 얼굴로 언뜻 당황한 기색이 지나갔다.
“이 옷은 저희 수석 디자이너가 선호하는 스포츠 웨어 스타일의 트랙 재킷과 조깅 팬츠입니다.”
매니저는 옷을 팔 욕심에 한 벌로 된 운동복 여러 개를 한꺼번에 꺼내 박래현에게 보여 주었다. 고개를 흔들며 싫다는 의사 표현을 했지만 박래현은 매니저가 꺼낸 옷들로 시선을 보냈다.
“전부 저지 패브릭이라 안 입은 것처럼 편해요. 슬리브를 따라 디테일한 무늬가 들어가 있어서 아주 세련미가 넘칩니다.”
매니저는 우리 눈앞에서 옷을 좌우로 죽죽 늘리며 신축성과 활동성을 강조했다. 박래현은 검은색, 오렌지색, 회색,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네이비색 트레이닝복을 선택한 뒤에 후드가 달린 티와 라운드 티, 겨울 코트와 패딩까지 추가해 계산을 시켰다.
“전부 집으로 보내요.”
“그러겠습니다, 상무님. 저희 브랜드를 이용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코트는 지금 입고 갈 겁니다.”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새 물건으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매니저가 코트를 가지러 간 사이에 박래현은 검은색에 갈색 방울이 달린 모자와 세트로 된 목도리를 골라 계산에 추가했다. 그는 내게 모자를 씌운 다음 목에 목도리를 감았다.
“날씨가 추워. 정원 나가서 산책할 때 모자랑 목도리 하고 나가.”
1년 내내 감기 한 번 안 걸렸던 내게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만에 하나 감기에 걸리면 별이가 영향을 받으므로 예방하는 편이 나았다. 박래현은 모자와 목도리에 파묻힌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볼을 잡아 양쪽으로 쭉 늘어뜨렸다.
“너 맛있는 찹쌀떡처럼 생겨서 군침 돌아.”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박래현은 고개를 숙여 내 윗입술에 키스했다. 짧은 입맞춤 뒤에 매니저가 가져온 코트로 갈아입고 내가 입고 온 코트는 매니저에게 맡겼다.
물건을 산 뒤에 박래현이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 들러 저녁을 먹고 케이크를 사서 차에 올랐다. 토끼를 품에 안고 토끼 코에 내 코를 살살 비비고 있는데 오른쪽 뺨이 따끔거려 박래현을 돌아보았다. 박래현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두 눈이 직선으로 마주쳤다. 이 예쁜 눈을 정치헌도 봤을 거란 생각에 불쾌해졌다.
“오늘은 왜 바빴어요?”
“왜 바쁘긴. 너랑 별이 위해 일하느라 바빴지.”
“호텔엔 왜 갔어요?”
“호텔이라니?”
“지금까지 호텔에 정치헌 씨랑 있었어요? 둘이 할 얘기가 꽤 많았나 보네요.”
“MOU 체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본 거야. 체결 끝나고 점심 먹었더니 시간이 애매해서 프로젝트 구성원들이랑 차 한잔 마셨고.”
“두 분 다 쿨하네요. 그 난리를 쳤으면서 얼굴 맞대고 같이 일할 생각을 하다니.”
“아무 감정 없으니까 가능한 거야. 약을 쳐 놨어도 우리 VIP를 외면할 순 없잖아. 여러모로 그 병원이랑 얽혀 있는 게 많아.”
“아, 그러세요. 프로젝트 공동대표면 그전에도 자주 만났겠네요. 전 그것도 몰랐어요.”
누가 들어도 비꼬는 말투에 박래현의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과거에 약혼 얘기까지 오갔던 사람과 만났으면서 박래현은 내게 전혀 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더 쏘아붙였다간 바닥난 인내심을 다 내보일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박래현은 내 사생활을 자기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는데 나는 박래현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박래현이 정치헌에게 관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깔려면 같이 까고 숨기려면 같이 숨겨야지 나만 박래현에게 낱낱이 노출되는 건 형평성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나 호텔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윤준영은 나한테 관심 하나도 없는 줄 알았더니.”
“GPS가 잘 작동하나 보려고 위치를 추적해 봤어요.”
토요일부터 거의 두 시간에 한 번꼴로 박래현 위치 추적을 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프로젝트 공동으로 진행하면, 앞으로도 정치헌 씨 자주 보겠네요?”
“아니. 오늘은 계약자로 얼굴 비춘 거고, 자주는 안 볼 거야. 프로젝트는 마 박사 팀이 알아서 진행할 테니까.”
“앞으로도 보긴 본다는 소리네요.”
“그냥 비즈니스야.”
“그냥 비즈니스면서 정치헌 씨 만난다고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그걸 일일이 너한테 보고해야 해? 회사에서 처리하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야. 내가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너한테 보고하진 않잖아.”
“정치헌 씨는 얘기가 다르죠! 둘이 약혼하려던 사이였잖습니까.”
“음, 혹시… 정치헌 질투해?”
“제가 왜요?”
“그러게. 윤준영이 뭐가 아쉬워서 정치헌을 질투하겠어. 그냥 물어본 거야.”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딜레마에 빠져 있는 동안 박래현은 내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고서 뺨을 비볐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코끝을 간질여서 나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기울였다. 어젯밤에도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잠든 것 같은데 술이 없으면 잠을 못 자겠다고 하니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몇 번 코를 문지르던 박래현이 잠들었는지 어깨가 점점 무거워졌다.
박래현이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하고서 나는 그의 정수리에 슬며시 뺨을 갖다 댔다. 앞으로도 정치헌과 종종 만나야 한다는 말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정치헌은 이상한 약을 구하기도 쉬울 테니 같이 얘길 나누다 술이나 물에 약을 타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내 생각은 자꾸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요즘 들어 섹스는 즐기면서 각인은 하지 않는 게 대세라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랑하는 오메가와 히트 사이클을 보냈는데 각인하지 않았다는 건 박래현이 내게 푹 빠져 있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그의 자제력을 무너뜨릴 만큼 매력적인 오메가가 나타나 유혹하면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사람은 얻는 것보다 잃는 걸 생각했을 때 더 동요한다는 말이 맞았다. 나는 박래현을 다른 사람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평생 박래현을 사랑하고 박래현에게 사랑받으면서 별이와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다. 더 바라지 않고 박래현이 지금처럼만 하면 불만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다. 나는 시선을 내려 GPS가 든 그의 오른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런 흔적도 없지만 이 안엔 박래현이 내게 속해 있다는 증거가 들어 있어 위안을 받았다.
박래현이 단잠에 빠져들고 얼마 안 있어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박래현이 더 잘 수 있게 대신 전화를 받아 주려고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기 이리 줘.”
내가 전화기를 건네주자 박래현은 여전히 내 어깨에 기댄 채로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박영범이었다.
“나야, 무슨 일이야?”
- 네 수행비서로 쓸 만한 애 하나 골라봤어. 지금 졸업반이고 기말고사 끝나면 바로 결합 가능하대.
“내일 4시쯤 이력서 챙겨서 사무실로 오라고 해. 지금 지 실장님이랑 같이 있어?”
- 지금 회사에서 업무 인계하고 있어. 너는 어디야?
차 안이 조용해서 박영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의 풀 죽은 목소리에 괜히 내 기분까지 안 좋아졌다.
“준영이랑 밥 먹고 집에 가는 길이야.”
- 오늘은 술 마시지 말고 일찍 자라. 처방받은 약은 먹고 있지?
“걱정하지 마. 끊어.”
약을 처방받았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박래현이 순순히 병원에 갔을 리는 없고 갑자기 쓰러졌거나 고통이 심해져 마지못해 갔을 것이다. 마른 것 빼고 멀쩡해 보이는 겉과 달리 박래현 안은 심하게 망가지고 있는 듯했다. 끼니는 건너뛰고 잠은 제대로 안 자고 밤엔 술만 마시니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박래현은 완전히 부패해서 악취가 진동할 때까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사람이었다.
“약 처방 받았어요?”
“어제 오후에 병원에 갔다 왔어. 별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지금 박래현 옆에는 폭주하는 그를 잡아 줄 사람이 없었다. 박수현도 없고 박영범도 없고 윤준영도 없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견뎌 내며 박래현은 홀로 버티고 있었다.
“오늘 밤부터 술 마시지 마세요. 술 마시다 걸리면 가만 안 둬요.”
“노력해 볼게.”
어느새 집에 도착해 나는 토끼 인형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 오승현은 내가 완전히 내릴 때까지 문을 잡고 있다가 천천히 문을 닫았다. 아까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얼굴 위로 차가운 눈송이가 떨어졌다. 나는 손바닥을 위로 향해서 눈송이를 받았다. 얇고 작은 송이들은 손바닥 위에서 금방 녹아 사라졌다.
“우리한텐 첫눈이네.”
“그러네요.”
“내년엔 별이랑 셋이서 첫눈 맞겠다.”
박래현은 눈 때문에 차가워진 내 두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손바닥에 곧 미지근한 열이 퍼졌다. 지금까지 눈이 오면 예쁘다고만 생각했지 별 감흥은 없었는데 박래현이 옆에 있으니까 사소하다고 여겼던 일들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윤준영.”
“왜요?”
“내 마지막 눈도 너랑 같이 맞을 거야.”
입술에 떨어진 눈이 녹기 전에 박래현이 혀를 내밀어 눈을 핥았다. 혀는 눈을 녹이고는 곧장 입술 안으로 파고들었다. 촘촘하고 긴 속눈썹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보면서 나는 박래현 목을 두 팔로 감았다.
***
오늘은 늦어서 별이에게 동화책 읽어 주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침실로 들어왔다. 씻겨 준다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샤워를 마쳤다. 나와 별이에게 신경 쓸 게 아니라 박래현은 먼저 자신을 돌보며 몸을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나를 추적해 찾아낸 다음 이혼하자며 발악하는 나를 달래려고 그는 거의 2달 넘게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거기다 경력 있는 비서실장을 뽑았다지만 여태 수족처럼 부려 온 박영범에 비하면 부족한 게 많을 테니 이래저래 피로가 누적돼 터지기 직전일 것이다.
나는 파자마를 입고 수건으로 머리칼을 말리면서 유리문 밖을 내다보았다. 달 모양을 한 외등 주변으로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이중으로 된 유리문을 슬쩍 밀어서 뼈를 얼릴 기세로 몰아닥치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가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금방 유리문을 닫고 방을 둘러 보았다.
책장과 박래현이 매달리곤 했던 철봉이 사라져 방이 텅 비어 보였다. 그가 사용하던 물건과 옷가지들은 박래현과 내가 엄마를 만나고 온 사이에 2층으로 옮겨졌다. 정 차장 부부는 우리가 각방을 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하루에 두 번씩 다른 욕실에서 씻고 내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 게 번거로울 테니 짐을 옮긴 건 서로를 위해 현명한 선택이었다. 추운 날씨에 냉방에서 자는 박래현이 신경 쓰였던 나는 그가 2층으로 옮겨서 내심 마음을 놓았다.
나는 방을 어슬렁거리다가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 화면에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여러 개 와 있었다. 나는 해준의 전화는 무시하고 정우에게만 전화를 걸었다.
“정우야, 나다. 웬일로 네가 전화를 다 했냐? 언젠 당분간 보지 말자면서.”
- 너 잘 지내나 걱정도 되고. 어디 갔다 왔냐? 왜 전화 안 받아?
“형이랑 어디 좀 갔다 왔어.”
- 형? 둘이 뭔가 잘돼가는 분위기다? 박래현한테 정착하기로 했냐?
“아니. 1년 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했어.”
오랫동안 반응이 없어서 나는 전화가 끊긴 줄 알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화가 연결된 상태인 걸 보니 정우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문 듯했다.
“김정우, 전화 받다가 자냐?”
- 아니, 잠깐 할 말을 잃어서. 와, 너희 두 사람 끝까지 야단법석이다. 그러지 말고 그냥 속 편하게 둘이 살아.
“야, 개소리 그만해. 기말 준비는 잘하고 있냐? 이제 마지막 시험이네.”
- 그럭저럭.
“너 전에 이력서 낸 데는 어떻게 됐어? 연락 왔어?”
- 내가 원하는 곳에서 연락이 오긴 왔는데 경쟁자가 너무 많아.
“야, 연락 온 게 어디야. 면접 잘 봐.”
- 고맙다, 친구야.
“면접 보기 전에 나부터 만나. 내가 네 졸업 선물로 정장이랑 차 한 대 뽑았거든? 차는 출고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정장은 면접 볼 때 입고 가.”
너무 비싼 차라 과연 정우가 타고 다닐지 걱정이었다. 신입이 과장급도 못 타는 차를 타고 다니려면 눈치가 보일 것이다. 딜러 말로는 중고여도 새 차와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고 했으니 일단 정우 소유로 하고 나머지는 정우한테 맡기면 될 것이다.
- 차는 무슨 차야. 내 걱정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
“야, 너한테 존나 차 사 줄 만하니까 사 주는 거야.”
- 왜, 박 씨한테 용돈 받았냐?
“그건 아니고, 나한테 회사 지분을 넘겼어.”
- 지분을 줬다고? 돈으로 따지면 얼만데.
“지금 당장 팔아도 나한테 떨어지는 돈이 최소 2조라는데, 안 믿어지지.”
수화기 너머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민망해져서 나는 거북 한 마리를 잡아 주물럭거렸다. 노란색 등딱지가 손아귀에 눌리면서 거북의 웃는 얼굴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정우는 체감상 5분 정도는 웃고 나서 웃음을 멈췄다.
- 야, 씨발 윤준영아,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발 닦고 얼른 자라. 형 지금부터 공부할 거다.
“거짓말 아냐. 정말….”
- 어떤 미친 새끼가 결혼했다고 지분을 턱턱 넘겨줘? 넌 너무 순진해서 탈이야. 그러니까 매번 사기꾼한테 속아 넘어가지. 안 되겠다. 너 이번 주말에 나 좀 보자. 넌 정신 교육을 받아야 해.
“미친놈아, 넌 존나 속고만 살았냐. 얼른 공부나 해.”
만나서 직접 얘기하지 않으면 못 믿는 게 당연했다. 얼떨결에 지분을 받겠다고 했지만 박래현이 정상이 아니라는 데 나도 동의했다. 나는 무드 등만 남겨 놓고 불을 끈 뒤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송이가 점점 커지는 거로 봐서 내일 아침엔 꽤 두껍게 눈이 쌓일 것 같았다.
박래현도 지금 침대에 누워 눈을 보고 있을까. 위치상 내 방 바로 위가 박래현 방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다면, 박래현은 잠을 이루지 못해 몸을 뒤척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건 좋은데 그것 때문에 자신을 혹사하고 몸을 함부로 굴리는 건 싫었다. 별이는 박래현에게 사랑받을 권리가 있으므로 이쯤에서 별이를 더 아끼고 예뻐할 기회를 그에게 주고 싶었다.
사실 별이는 내 방패막이일 뿐 나는 박래현이 필요했다. 그에게 마음을 줬고 그래서 각인까지 했다. 그와 갈라서려면 막 귀국해서 그가 한창 미웠을 때 끝까지 우겨서 갈라서야 했었다. 이젠 빈말이라도 그와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헤드에 세워 둔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부드러운 털에 코를 박고서 잠을 청했다.
***
‘준영아, 형 아파.’
박래현 목소리를 듣고 나는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박래현이 핏기가 사라진 파리한 얼굴에 코피를 뚝뚝 흘리며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몸을 일으켜 박래현에게 다가가려는데 가위에 눌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박래현은 내가 보는 앞에서 눈을 발딱 뒤집으면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울면서 바닥으로 기어 내려가 온통 피투성이인 박래현을 품에 안았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찾았지만 정우랑 통화를 끝내고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박래현이 죽을까 봐 두려워 심장이 미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형, 정신 차려요! 래현 형! 정신 차려 봐!’
울부짖으면서 몸을 일으킨 나는 눈물에 흐려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더니 그제야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벌떡이는 심장을 어렵사리 진정시켰다. 참혹한 꿈에 시달린 탓에 파자마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파자마를 갈아입고 그 위에 카디건을 걸친 나는 거실로 나가 불을 켜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2층으로 올라갔다. 꿈이 불길해서 박래현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잠이 올 것 같았다. 몇 번 노크해도 인기척이 없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 드레스 룸과 욕실, 서재를 다 찾아봤지만 박래현은 보이지 않았다. 약속을 어기고 술에 취해 아기방을 찾아간 것 같아서 화가 났다. 나는 2층에서 내려와 곧장 아기방 문을 열고 전등을 켰다.
그늘을 드리운 나무 아래서 박래현은 코끼리 인형을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 난쟁이 나라에 도착한 걸리버처럼 박래현은 아기자기한 동화 속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게 거인이었다. 나는 문에 기댄 채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작고 사랑스러운 침대와 예쁜 옷장, 원숭이가 매달린 나무와 바닥에 깔린 초록색 매트, 초롱이 애착 인형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내일이면 이 방은 별이를 위해 새롭게 바뀔 것이다. 나는 초롱이가 다른 곳에서 행복하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박래현에게 다가갔다. 차가운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맨발이 금세 얼어붙었다. 안락한 자기 방을 두고 이렇게 추운 곳으로 기어드는 박래현 고집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나는 박래현 품에서 코끼리 인형을 조심스럽게 꺼낸 뒤 그의 오른팔을 베고 누워 얼굴을 마주 보았다. 조명이 나붓하게 스며든 얼굴을 손등으로 쓸다가 길게 늘어진 속눈썹 그림자가 예뻐서 그 위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댔다. 손끝이 떨리면서 살갗을 만지는 손길에 구차하고 진득진득한 감정이 배어 나왔다. 내 세상은 박래현으로 포화상태가 돼 버려서 웃자란 감정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내 손에서 박래현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박래현이 무의식중에 왼손으로 내 등을 쓰다듬다가 파자마 자락을 들치고 맨 허리를 쥐었다. 옆구리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술 냄새가 나지 않는데 눈에 초점이 없는 거로 보아 박래현은 수면제를 먹은 듯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그가 이내 시름없는 눈동자로 내 얼굴을 더듬었다.
“윤준영, 내 꿈이라고 안심하면 안 돼.”
“꿈 아닙니다.”
“씨발, 이 새끼가 겁도 없이….”
“…….”
“나 지금 너 안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잠에 취해 느릿한 목소리에는 알파의 광포한 본능이 숨어 있었다. 박래현은 네발 달린 짐승처럼 무릎과 팔 사이에 나를 가둔 채 영민하게 내 몸을 타고 올랐다. 의식이 흐릿한 와중에도 내게 체중을 싣지 않으려고 무릎과 팔에 힘을 주었다. 그는 오른손 손바닥으로 내 뺨을 쓸며 머리칼을 드세게 움켜쥐었다. 다가오는 입술을 피해 얼굴을 돌리자 입술은 귓바퀴에 안착했다. 귓바퀴 전체에 이가 박히고 이가 박혔던 곳을 혀가 쓸고 갔다.
뜨거운 숨과 함께 혀가 귓구멍 안으로 들어와 안을 들쑤셨다. 푹푹 들어와 깊게 문지르는 혀에 귓가가 먹먹해졌다.
“하읏, 잠깐만요.”
차가운 공기 속으로 박래현과 내가 내뿜는 숨결이 하얗게 어른거렸다. 박래현은 얼굴 각도를 틀어 내 입술을 찾았다. 입술을 짓뭉개면서 능숙하게 파고 들어오는 혀에 입을 벌려 주며 나는 숨을 헐떡였다. 두 개의 살덩이가 서로를 쫓고 쫓으며 하나처럼 움직였다. 키스만으로 발정 난 몸은 어서 알파를 받고 싶어서 축축하게 젖어 갔다.
“하, 하아, 준영아….”
박래현은 몸을 일으키더니 눈 깜짝할 새에 내 파자마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그는 발목을 잡아 양쪽으로 벌리고 내 구멍이 우람한 자지에 닿을 때까지 나를 잡아당겼다. 양쪽 무릎이 박래현 옆구리를 사이에 두고 크게 벌어지면서 말려 올라간 파자마 때문에 등이 차가운 바닥에 노출되었다.
바지 지퍼를 열어서 시퍼런 핏대가 움튼 자지를 꺼낸 박래현이 기둥을 잡고 내 밑에 귀두를 문질러 댔다. 움찔거리던 밑이 부드럽게 열리며 자지 끄트머리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살을 벌리고 들어오는 미끈한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나는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가 잘 들어올 수 있게 허리를 슬쩍 틀다가 꼬리뼈를 바닥에 부딪쳤다. 몽롱하게 빠져들던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나는 두 팔을 뻗어 박래현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 차가운 방에서 이성을 상실한 박래현을 받아들였다간 몸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형, 여기 너무 추워요. 방에 들어가서 자요.”
“싫어. 아무 데도 안 가. 너랑 여기 있을 거야.”
박래현은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을 줘 얼굴을 고정하고서 얼굴 간의 거리를 좁혀 왔다. 입술이 맞닿은 건 순간이었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열 오른 혓바닥이 내 입술을 핥았다. 나는 키스가 깊어지기 전에 고개를 흔들어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면, 내 방으로 가요. 나 등이 아파서 그래요.”
“그래도 돼?”
박래현은 지금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전혀 분간을 못 하는 듯했다. 그는 몽롱한 상태에서 나를 번쩍 안아 들고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면서 입술에 키스했다. 이내 뜨거운 혀가 입 안을 점령했고 나는 박래현이 넘어질까 봐 그의 목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박래현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나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고 곧장 옆으로 올라왔다.
“이거 꿈 아니고 현실이에요.”
“거짓말하지 마. 현실이면 내가 여기 있을 리 없잖아.”
나는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있는 힘껏 박래현 어깨를 때렸다. 박래현은 맞은 쪽 어깨를 손으로 감싸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몇 번 눈을 깜박이고 나더니 그제야 현실을 인식하고서 눈을 빛냈다.
“진짜 꿈 아니네. 그런데 왜….”
“얼른 하던 일이나 마저 해요.”
박래현은 기회를 놓칠세라 내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서 그사이에 납작 엎드렸다. 민둥민둥한 자지와 구멍 위로 뜨거운 호흡과 시선이 느껴져 허벅지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무릎을 잡아 벌리는 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이미 여러 번 보여 줬고 박래현 혀와 성기가 수도 없이 드나든 곳인데 오랜만에 벌려졌다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내가 이상했다. 밑에 얼굴을 묻고 열심히 구멍을 빨던 박래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아랫배에 귀를 갖다 댔다. 나는 배를 간질이는 갈색 머리칼을 꼭 쥐고서 한숨을 터트렸다. 박래현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엉덩이와 옆구리를 느릿느릿 더듬었다.
“이제 나 받아들이는 거야?”
“완전히는 아니고 반만 받아들일게요.”
무릎을 잡아 벌리고 그 사이로 파고든 박래현은 파자마 자락을 밀어 올리며 입술을 옮겼다. 혓바닥을 넓게 펴 젖꼭지와 그 주변을 뭉근하게 문지르다가 쪽쪽 소리를 내며 돌기를 빨았다. 지나치게 빨려서 뻣뻣하게 굳은 알맹이가 남자의 입으로 똑 떨어질 것 같았다.
“젖꼭지 색이 짙어지고 더 커졌어. 애 낳으면 젖도 나와?”
박래현이 몰라서 질문한 건 아닐 테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 놀리려는 의도일 것이다. 박래현은 혀를 둥글게 말아 젖꼭지를 툭툭 때리더니 젖을 빨 듯 온 입술을 이용해 젖꼭지를 빨았다. 저릿한 자극에 허리를 뒤틀며 박래현 어깨를 붙들었다. 박래현이 내 가슴에 달라붙어 젖꼭지를 빨고 있는 모습이 잠잠하던 성욕을 부채질했다.
“으, 으으응….”
“으음, 벌써 젖이 나오는 거 같아.”
그는 일부러 크게 쪽쪽 소리를 내며 젖을 빨다가 내 턱을 쥐고 다음엔 입술을 빨았다. 언제 바지를 벗었는지 박래현은 내 손을 잡아서 팽팽하게 기립해 꺼떡이고 있는 성기 위로 가져갔다. 손바닥에 굵직하게 발기한 자지가 닿았다.
내 손이 절대 작은 편이 아닌데 한 손으로 다 쥐어지지 않는 기둥을 잡고 핏줄 선 표피를 문질렀다. 물속에서 막 건져 낸 물고기처럼 성기가 손안에서 파닥거렸다. 내 손이 움직일 때마다 한계를 모르고 커지는 살 기둥을 보며 더럭 겁이 났다. 박래현이 조금만 거칠게 움직여도 아기집이 들쑤셔질 것 같았다.
“같은 침대 쓰면 술도 안 마시고 수면제도 안 먹을 자신 있어요?”
“네가 옆에 있으면 그딴 거 없어도 돼.”
박래현은 내 무릎 사이에 두 팔을 끼워 넣어 다리 사이를 벌리게 한 뒤 두 팔을 지지대 삼아 상체를 숙인 채로 느릿느릿 자지를 삽입했다. 조심스러운 침입에 맞춰 허리를 잘게 움직여서 성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있는 힘껏 자지를 조였더니 박래현이 탄식에 가까운 신음을 냈다. 그의 뺨에 붉은 기가 돌아 오랜만에 얼굴이 화사해 보였다.
“별이가 아빠 자지 보고 놀라면 어떡하지?”
“어두워서 안 보일 겁니다.”
삽입을 끝내고도 박래현은 신중하게 움직였다. 내가 느끼는 부분을 잘 알고 있기에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느리게 올라오는 절정에 진저리치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
내 몸을 친친 감은 팔다리를 풀어 헤치고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갔다. 아이가 커지면서 화장실에 드나드는 횟수가 늘어 불편했다. 새벽에 몸을 씻어서 샤워는 건너뛰고 양치와 세수만 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서 잠든 박래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싹하게 잘생긴 얼굴을 넋 놓고 관찰하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출근 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오랜만에 단잠을 자는 박래현을 깨우지 않기로 했다.
박래현과 섹스하고 나면 으레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온몸이 노곤해야 정상인데 오늘은 몸이 가뿐했다. 박래현이 무리하게 박아 대지 않아서였다. 내가 오르가슴을 느낀 순간 박래현은 삽입했던 성기를 뺐다. 그는 무릎을 꿇고 선 자세로 내 허벅지를 모아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자지를 왕복시켰다. 힘들어서 허벅지가 벌어지면 엉덩이를 때려 가며 허벅지를 붙이게 했다.
나중엔 안 되겠는지 내 두 다리를 모아 한쪽 어깨로 넘긴 채 종아리와 허벅지를 팔로 안고 허벅지 사이를 쑤셔 박았다. 허벅지 사이를 가르고 짙붉은 귀두가 쑥 나타났다가 뒤로 물러서면 귀두 끝에 맺혀 있던 체액이 허벅지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단단한 허벅지를 벌리고 들어서는 살 기둥이 자신이 흘린 체액으로 번들거렸다. 뻐끔거리며 정액을 쏟는 좆 대가리가 신기해 손바닥으로 갈라진 틈을 쓱쓱 문질렀다. 살 기둥이 민감한 살 안쪽을 긁고 지나갈 때면 내벽 주름이 긁히는 듯 몸이 경련했다. 나중엔 허벅지와 사타구니가 박래현이 흘린 정액으로 흠뻑 젖어 정신이 혼미해졌다.
‘준영아, 넌 내 사람이야. 다른 데 보지 말고 나만 보고 나만 사랑하면서 살아.’
사정을 끝내고 욕실에 물을 받으러 가기 직전 박래현이 그런 말을 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는지 흔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박래현이 대답을 듣고 웃은 건 확실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박래현 입술에 가만히 입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혀를 집어넣으려다가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임신 초기라 조심해야 했다.
욕정을 식히고자 유리문을 열어 겨울이 찾아온 정원을 감상했다. 앙상해서 볼품없던 은행나무 가지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났고, 소나무와 정원수는 눈을 이고 있어서 잎의 푸르름이 더 돋보였다. 정원에 두껍게 쌓인 눈을 보자 몸이 근질거려서 나는 두툼한 패딩 점퍼를 걸쳐 입고 양말을 신었다. 모자까지 쓰고 나서 박래현이 더 잘 수 있게 블라인드를 내리고 현관으로 나가 운동화에 발을 꿰었다.
눈이 깨끗하게 치워진 주차장을 지나 테라스 쪽 정원으로 나가서 하얀 눈 위에 내 발자국을 남겼다.
“윤별, 너 눈 처음 보지? 아빠가 내년엔 여기다 네 발자국도 찍어 줄게.”
이제부터 박래현과 연애다운 연애를 해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박래현보다 어리고 부족한 게 많지만 그 차이를 열심히 따라잡아서 나중엔 그와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박래현도 그걸 원하기 때문에 내게 지분을 넘겨 나를 경제적으로 독립시켰을지 모른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박래현이라면 날 독립시키기보다는 매달 생활비를 지급하면서 지배하는 방식을 택했을 것이다.
결혼 계약서에는 내가 갑이고 박래현이 을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별이 양육권과 섹스 주도권, 1년 후 이혼 청구권까지 전부 내가 가지고 있는데 박래현과 내 관계가 동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각인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박래현에게 각인해서 오로지 박래현만 보는데 박래현은 내게 각인하지 않아서 마음이 옮겨 갈 수 있다는 불안함이 존재했다.
어제 정치헌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박래현이 정치헌과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도, 그와 호텔에서 4시간 30분 동안 함께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러한 불안과 집착은 박래현이 내게 각인하지 않는 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감정이었다.
“준영아, 여기 잠깐 봐.”
발이 시려서 마침 들어가려던 참에 박래현이 나타나 카메라를 내 쪽으로 향했다. 박래현은 취미용 카메라가 아니라 전문가용 카메라를 사서 틈만 나면 나를 찍어 댔다. 카메라 본체에 렌즈만 해서 다섯 개가 넘었다.
“산수유나무 옆에서 찍고 싶어요.”
선홍색 산수유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에 흰 눈이 쌓여서 붉은 꽃에 눈이 내린 것처럼 예뻤다. 나는 산수유나무를 등지고 카메라 렌즈를 응시했다.
“활짝 웃어. 넌 입이 커서 웃는 게 예뻐.”
진지한 표정으로 카메라 초점을 맞춘 박래현이 셔터를 눌렀다. 이마 위에 자연스럽게 흩어진 머리칼과 버건디색 니트가 박래현을 자유분방한 사진작가처럼 보이게 했다. 카메라를 잡는 각도나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자세가 근사해서 나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보지 말고 여기 렌즈 봐.”
박래현이 검지로 렌즈 쪽을 가리켰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은 뒤 그는 거치대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옆으로 달려와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셔터가 움직이기 직전 박래현은 내 머리카락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사진을 다 찍고 나는 산수유나무에 쌓인 눈을 모아 박래현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박래현은 차가운 눈에 어깨를 움찔거리면서도 얼굴을 빛내며 환하게 웃었다. 고작 하룻밤 숙면으로 박래현은 보약을 먹은 사람처럼 반짝반짝 생기가 넘쳤다. 일주일 동안 푹 자고 잘 먹으면 몸은 금방 회복될 것이다.
“너 별이 담고 있어서 무사한 줄 알아. 아니었으면 저 눈밭에서 데굴데굴 굴렀어.”
박래현은 내 얼굴을 옆으로 꺾어서 입술에 키스했다. 차갑게 얼어 있던 입술을 녹이며 박래현 혀가 내 혀를 거칠게 문질렀다. 박래현 어깨 너머로 거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오승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얼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박래현은 눈치 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에 누가 있든 없든 주저하지 않았다.
“회사 안 나가요?”
“나가야지. 지 실장님한테 좀 늦는다고 연락해 놨어.”
“새로 인선한 분이 지 실장님이세요?”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이라 마음에 들었어. 추진력도 있고 사리판단이 빨라서 점수를 높게 줬지.”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긴 박래현이 비어 있는 손으로 내 어깨를 안았다. 우리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테라스를 지나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나 다시 형으로 돌아간 거야?”
“네. 박래현 씨로 안 돌아가게 조심하세요.”
“뭐든 내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네.”
소파 테이블에 장비를 내려놓고서 박래현은 샤워하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패딩과 모자, 파자마를 벗고 어제 산 주황색 운동복을 입고 박래현을 기다렸다.
“가서 밥 먹자. 얼른 먹고 출근해야겠어.”
박래현은 흰 드레스 셔츠에 점선 무늬가 있는 검은색 팬츠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약간 여유 있는 바지와 넥타이를 대신한 짙은 자주색 리본은 세련된 박래현에게 잘 어울렸다.
“형, 잠깐만 저 의자에 앉아 보세요.”
박래현은 영문을 모른 채 내가 말한 일인용 소파에 앉아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서 예술 작품을 찍듯 아름다운 피사체를 찍었다. 렌즈를 통해 웃고 있는 박래현을 본 순간 심장이 쿵쿵거리며 요란하게 뛰었다.
“윤준영, 왜 손을 떨어.”
“제가 손을 떨었어요? 왜 그랬지? 배고파서 그랬나?”
“오늘 내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겠지.”
“배고픈데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요.”
박래현은 내게 다가와 허리를 가볍게 안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이 차장이 새로 개발했다는 찹쌀가루 불고기 튀김이 질그릇에 수북이 담겨 있었다. 찹쌀가루 묻힌 불고기를 튀겨서 견과류와 함께 양념장에 찍어 먹는, 고소하고 바삭바삭한 요리였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요. 준영 씨가 좋아해서 이 차장이 또 만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별이가 냄새를 맡고 거부반응을 보이기 전에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박래현은 내 컵에 물을 따라 주며 내가 먹는 모습을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형도 얼른 먹어요. 키는 저보다 크면서 몸무게는 제가 더 많이 나가게 생겼어요.”
“내 뼈가 굵어서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내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자 박래현은 그제야 젓가락을 집어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아침 식사를 하고서 나는 박래현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아침부터 얼굴이 별로야. 나한테 할 말 있어?”
“없어요.”
“혹시 정치헌 일 때문에 그래? 정말 업무상 만난 거야. 송림 병원은 우리랑 임상 실험도 같이 해 와서 어쩔 수 없어.”
“잘 알겠습니다.”
“그런 일은 실무자들이 처리해서 자주 만날 일도 없지만, 혹시 만나게 되면 미리 얘기할게.”
“벌써 11신데 출근해야 하지 않아요?”
“출근해야지. 네 덕분에 오랜만에 푹 잤더니 기분이 상쾌해. 나 갔다 올게.”
박래현을 배웅하고 침실로 들어온 나는 눈 쌓인 풍경을 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나를 달랜다고 꺼낸 말이었지만 박래현 말에 기분이 더 울적해졌다. 두 사람은 업무상 계속 만나야 하니 나더러 이해하라는 말이었다. 차라리 모르고 지나가는 게 나았을 텐데 괜히 GPS 추적을 해서 내 고민거리만 하나 더 늘게 되었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좋은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온종일 울적한 상태에서 보내다가 오후엔 내일 제니퍼와 토론할 주제를 찾아서 노트에 정리하며 복잡한 마음을 갈무리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일인데 그런 일로 질투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래현은 최고 경영자가 될 사람이니 앞으로도 매력적인 오메가들을 만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정치헌이 특별한 예이긴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옹졸하게 질투하고 의심해 봐야 나만 괴로울 따름이다.
박래현은 내 우울한 얼굴이 마음에 걸렸는지 시간마다 전화를 걸었고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와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박래현은 지 실장이란 사람과 꽤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나는 먼저 방으로 들어와 정리해 놓은 토론 내용을 안 보고 말할 수 있게 암기했다. 한참 연습을 하고 있는데 박래현이 한라봉이 가득 든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
“윤준영, 열심히 하네. 토론 주제가 뭐지? 나랑 예행연습 해 볼래?”
“지금 말고 나중에 제 실력이 조금 붙으면요.”
박래현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미국에서 보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제니퍼 강처럼 차라리 모르는 사람에게 배우는 건 괜찮은데 박래현 앞에서 영어를 쓴다고 생각하면 쑥스러웠다. 박래현은 내 심정을 꿰뚫어 본 사람처럼 더 강요하지 않고 한라봉 껍질을 깠다.
“기분은 좀 풀렸어?”
“뭐 풀리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접시 위에는 속껍질이 벗겨진 한라봉 알맹이가 켜켜이 쌓여 갔다.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노트를 넘기며 영어에 몰두한 척했다. 박래현은 마지막 한라봉을 까고 나서 물티슈에 손을 닦았다. 그는 내가 동아줄처럼 쥐고 있는 노트를 뺏어 테이블에 내려놓고 내 턱을 쥐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짙어진 갈색 눈이 나를 향했다.
“난 너밖에 없다고 몇 번 말해? 날 못 믿는 이유가 뭐야?”
“형을 왜 못 믿냐고요?”
“그래. 이 정도면 믿어도 되잖아.”
“저랑 히트 사이클을 같이 보내고 노팅도 했으면서 저한테 각인 안 했잖아요. 제가 왜 형 못 믿는지 이해되세요?”
나는 결국 자존심을 버리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 둔 진실을 꺼내 들었다. 박래현이 날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을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내게 박래현이 전부인 것처럼 박래현 세상도 온통 나로 가득하길 바라지만 그게 아니라 속상하고 불안했다.
“내가 왜 너한테 각인을 안 했다고 생각해? 너 필리핀으로 도망가기 전날 너한테 각인했는데.”
“형이 저한테 각인했다고요?”
“그런데 각인하자마자 날 좋아한다던 오메가가 도망가 버려서 내 기분이 얼마나 참담했겠어.”
지금껏 박래현에게 온갖 충격적인 말을 들어왔지만 지금 들은 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몽둥이로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에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멀거니 박래현을 응시했다. 그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후에 박래현이 내게 각인했으리라고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어서, 여러 생각으로 북적이던 머리가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박래현은 내가 충격을 흡수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싫어할까 봐 말 안 하고 있었어.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너한테 각인까지 했다고 하면 더 힘들어할 거 같아서, 나중에 천천히 밝힐 생각이었어.”
상큼한 귤 냄새가 밴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쥐고는 엄지로 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나를 안을 듯 상체를 숙이면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아마 나는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하게 눈을 크게 뜨고서 박래현을 보고 있을 것이다. 충격과 흥분이 가시지 않아서 내게 각인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말을 찾아서 입 밖으로 낸다 한들 벅차고 떨리는 이 감정을 완전히 표현할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눈물이 흐르지 않게 눈을 깜박거리며 수런거리는 감정을 애써 잠재웠다.
“네가 신경 쓰는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해 줬지.”
“…….”
“그러니까 나 믿어. 설령 네게 각인 안 했어도 난 다른 오메가한텐 관심 없어.”
“…네.”
겨우 입을 벌려서 대답하고 났더니 떨림이 조금 진정되었다. 박래현은 내 대답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손끝을 입술로 내려 민감한 살을 살살 문질렀다.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벗어나 박래현이 내게 각인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굴절되었던 마음으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 지독한 과거 때문에 박래현이 나나 다른 오메가에게 각인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박래현도 어느 순간엔 빈틈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 빈틈을 내가 만들어 벌렸다는 사실에 왠지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제 한라봉 먹을 거지?”
박래현은 접시에서 한라봉을 집어 내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가 넣어 주는 대로 한라봉을 받아먹다가 그의 목덜미를 깊숙이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방금 입에 넣어 준 한라봉을 박래현 입에 밀어 넣었더니 박래현이 군말 없이 한라봉을 삼켰다. 접시에 수북했던 한라봉이 다 사라질 때까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라봉을 먹여 줬다. 마지막 한라봉을 꿀꺽 삼킨 순간 박래현이 나를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올라와서 아래로 손을 넣어 배를 만지작거렸다.
“준영아, 돌아누워 봐.”
나는 박래현이 편한 자세로 배를 만질 수 있게 그에게서 돌아누웠다. 박래현은 내게 팔베개해 주면서 내 어깨에 턱을 얹고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뒷모습은 그대론데 배만 나왔어. 별이가 발로 차려면 아직 멀었지?”
“3, 4주는 더 있어야 찰걸요? 너무 세게 차면 갈비뼈가 아프다던데.”
“내가 살살 차라고 설득할게.”
박래현은 손을 움직여 목까지 채워져 있는 운동복 지퍼를 아래로 내렸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맞물려 있던 지퍼가 소리 없이 양쪽으로 열렸다. 박래현은 왼손을 갈퀴처럼 세워 내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귓가에 쏟아지는 숨이 뜨거워 배꼽 밑이 간질간질했다.
“준영이 네가 질투하니까 기분은 좋다.”
나는 고개만 돌려 박래현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박래현의 따스한 눈빛에 마음이 흐늘흐늘 녹아내렸다. 박래현은 팔베개한 손으로 귀뺨을 감싸고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촉촉한 입술이 내 입술을 열기도 전에 나는 박래현 손목을 움켜쥔 채 먼저 혀를 내밀어 그의 혀를 잡아챘다.
박래현 입 안은 깊어서 내 혀가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혀끝이 어금니 안쪽에 닿았을 때 박래현 혀가 내 혀 아랫부분에 거칠게 부딪쳐 왔다. 순간 가슴이 떨려서 호흡을 멈췄다. 박래현이 잠시 입술을 떨어트리자 나는 밀렸던 숨을 몰아쉬었다.
내 눈과 뺨, 입술을 오가는 시선이 욕망에 번들거렸다. 가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면서 박래현은 내 다리 사이에 자신의 다리를 얽어맸다. 어느새 강건하게 일어선 성기가 얇은 트레이닝복을 문질러서 엉덩이골 사이에 천이 비벼졌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호흡이 가빠지고 팔다리가 흐느적거렸다. 나는 박래현 팔을 꽉 움켜쥐고서 내가 잠긴 물속으로 박래현을 끌어들였다. 입술이 겹쳐지고 뜨거운 호흡이 섞이면서 우리는 점점 더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
박래현과 지태훈 실장은 실무단을 꾸려 4박 5일 일정으로 스위스 출장길에 올랐다. 얼핏 듣기론 TCR-T 치료제 파이프라인 중 하나를 다국적 제약 회사에 기술 이전하는 프로젝트를 논의하러 간다고 했다. 내가 모르는 분야라 자세히 묻진 않았지만, 꽤 큰 프로젝트인 듯했다.
박래현이 스위스로 떠나고 나서 나는 사흘간 오전에 두 시간, 오후에 세 시간씩 도로연수를 받았다. 박래현이 붙여 준 선생은 매우 자상하고 인내심이 커서 초보인 내가 운전을 편하게 배울 수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고 나진주나 오승현을 뒷자리에 대동한 채였다. 사흘을 배우고 났더니 자신감이 생겨서 오늘은 엄마 병원까지 직접 차를 몰고 가서 엄마를 만났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오승현에게 운전을 침착하게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초보 운전사 옆에서 온종일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이제 포기했는지 편안해 보였다. 내가 걱정된 박래현은 틈날 때마다 전화해서 내 안위를 묻곤 했다.
집에 무사히 도착해서 씻고 저녁을 먹은 다음 침실 소파에 앉아 부재중 전화가 뜬 핸드폰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샤워하고 밥을 먹느라 박래현이 건 전화를 받지 못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박래현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하는 내가 한심했다. 박래현에게 전화를 걸어 본 적이 없어서 그에게 전화를 거는 간단한 동작이 힘들고 쑥스럽게 느껴졌다. 연락처를 눌러 유일하게 즐겨찾기에 등록된 박래현 이름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마침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받으면 무슨 말부터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기만 보고 있었는지 신호가 울림과 동시에 박래현이 전화를 받았다. 미처 말을 준비 못 해서 순간 당황했다.
- 윤준영, 네가 웬일로 나한테 전화를 다 해? 무슨 일 있어?
출장 가 있는 동안 한 번도 먼저 전화를 걸지 않아서 박래현이 토라진 듯했다.
“저 집에 도착했다고 알리고 싶어서요.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받아요?”
말하고 났더니 순식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성격 탓인지 연애를 시작하고도 낯간지러운 말에는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 점심 먹고 너한테 전화하려고 전화기 들던 참이었어. 운전은 잘했어?
“네, 저 운전 진짜 잘해요.”
- 얼마나 잘하는지 궁금하네. 나중에 옆자리에 나 태워 줄래?
“형이 기겁할 거 같은데요.”
- 죽기야 하겠어? 준영아, 보고 싶다. 넌 형 안 보고 싶어?
보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하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나는 말을 돌렸다.
“내일 몇 시에 도착해요? 제가 차 몰고 마중 나갈게요.”
- 공항까지 멀고 위험하니까 나오지 마.
“언젠 태워 달라면서요.”
- 너 임신했잖아. 장거리 운전은 위험해.
“알았어요. 근데, 형.”
- 왜.
“돌아오면 줄 게 있어요.”
어제 도로연수를 끝내고 백화점에 들러 박래현 약지에 끼워 줄 반지를 샀다. 박래현이 반지를 끼지 않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해 줬지만 법적인 배우자가 있고 곧 아기 아빠가 될 사람이 싱글로 오해받는 일은 없어야겠기에 반지부터 사고 봤다.
- 뭘까 궁금하네.
“맞춰 봐요.”
- 음, 내 자지를 애타게 기다리는 구멍?
“…….”
- 아니면 내 자지를 빨고 싶어서 환장한 입술?
“씨발, 알프스 산 가서 스키나 타요. 귀국하지 말고.”
옆에서 미팅 시간이 다 됐다고 재촉하는 지 실장 목소리가 들렸다. 박래현은 회의에 들어가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불룩해진 배를 만졌다.
“별아, 래현 아빠 목소리 듣고 싶어? 그 아빠는 돈 벌러 갔으니까 오늘은 내가 책 읽어 줄게.”
박래현이 보고 싶어서 카메라를 노트북에 연결했더니 노트북 화면에 사진이 주르륵 떴다. 주로 내 사진이 많았지만 내가 박래현을 찍은 사진도 꽤 있었다. 눈 속에서 웃고 있는 모습, 엎드려 자는 모습, 열중해서 보고서를 읽는 모습, 상반신을 탈의해 멋진 근육을 드러낸 모습. 사진을 하나씩 클릭하다가 그중에 얼굴이 나온 사진을 확대해서 손끝으로 가만히 얼굴을 쓸었다.
“형, 진짜 보고 싶다.”
박래현 얼굴을 실컷 뜯어 본 뒤에 노트북을 닫았다. 나는 노트북 옆에 놓아둔 반지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약지에 끼워 봤다. 내 손가락엔 약간 헐렁했지만 매듭에 걸려서 빠져나가진 않았다. 박래현이 손을 자주 씻는다고 해서 일부러 단순한 디자인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골랐다. 박래현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눈이 높은 사람이라 걱정이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뒷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혼자 있으려니 박래현과 함께했던 기억이 부쩍부쩍 찾아왔다. 돌이켜 보면 결혼하자는 말을 하고서부터 박래현은 줄곧 자신의 감정을 투명하게 드러냈다. 내가 박래현과 박영범이 나눈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더 일찍 알아챘을 마음이었다. 두 사람 말을 들은 뒤로 그가 내게 보냈던 신호들이 그의 의도대로 해석된 적은 없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막아 가며 외면했던 진실들이 하나씩 본 모습을 드러냈다.
박래현은 나를 사랑하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과 싸웠을 것이다. 첫 연애에 들떠 있던 동생은 애인에게 버림받아 자살했고 형은 자살에 일조한 사람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동생의 연인이 눈에 들어오면서 좌절과 분노, 미움과 애정의 파고가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격침해 심해 깊은 곳에 수장시켰을 것이다.
깊고 차갑고 물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칠흑 같은 곳을 벗어나기 위해 감압 과정이 필요했던 박래현은 처음부터 내게 다정할 수 없었고, 그 과정을 알지 못했던 나는 그를 좋아하면서도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나를 목표로, 어쩌면 그에게 더 안락했을지 모를 심해에서 벗어난 박래현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내게 다가왔다. 그가 각인을 늦게 한 이유도 자신과의 싸움이 치열해서였을 것이다.
소파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침대 위였다. 잠결에 걸어 들어왔나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몸을 뒤척이던 나는 눈부시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피해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그런데 이건 뭘까? 허리께에 걸쳐진 묵직한 팔을 더듬다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풍성한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채 박래현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기척에 박래현이 팔에 힘을 줘서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왼손에 박래현에게 줄 반지를 끼고서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박래현 품에 안겼다. 어제 소파에서 잘 때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박래현이 옷을 벗긴 뒤 나를 안고 잠든 것 같았다. 나는 발가벗겨 놓고 박래현은 뻔뻔하게 파자마 바지를 입고 있었다.
“준영아, 아기가 움직여.”
“벌써요? 그럴 리가 없는데….”
잠에 잠긴 목소리는 다정하면서 허스키한데 밀착한 엉덩이골 사이에 비벼지는 자지는 썩 친절하지 못했다. 나는 배 위에 놓인 손에 내 손을 깍지 끼며 넓은 어깨에 뒤통수를 기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박래현 냄새를 맡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깍지 낀 손을 위로 올려 뼈마디만 남은 손등에 코를 대고 은근하게 풍기는 체향을 맡았다.
“오늘 오후에나 올 줄 알았어요. 왜 이렇게 빨리 왔습니까?”
“네가 공항으로 마중 나올까 봐 걱정돼서 급하게 날아왔어.”
“형은 처음부터 운전 잘했어요? 자기도 초보 시절이 있었으면서.”
“그건 농담이고 네가 줄 게 있다고 해서 일 끝나자마자 왔어. 자고 있길래 안 깨웠어.”
손으로 내 뺨을 쥐어 강한 소유욕을 드러내면서 박래현이 얼굴을 숙여 이마와 코끝에 입 맞췄다. 나는 혀를 내밀어 박래현 턱을 간지럽게 핥았다. 박래현은 얼굴을 내려 내 혓바닥에 입술을 비비더니 이내 입 속으로 혀를 빨아들였다. 처음엔 얌전하게 시작된 키스가 깊어지고 거칠어져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박래현 어깨를 잡고서 몸을 일으킨 나는 그를 밀어 쓰러트리고 쑥 들어간 복근 위에 올라탔다. 쫑긋한 귀 옆으로 두 팔을 뻗어 몸무게를 지탱하면서 상체를 납작 숙여 박래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길게 내리뜬 속눈썹 사이로 탁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고 집요한 눈이 내 눈과 뺨, 입술과 목덜미 위를 핥고 있었다. 그 눈이 빗장뼈를 지나 토실토실해진 아랫배로 내려갔다.
“입덧은 좀 괜찮아졌어?”
“네. 이제 잘 먹어요.”
나는 수척한 얼굴 이곳저곳에 빼곡히 입 맞췄다. 마지막엔 얼굴을 기울여 벌어진 입 속으로 혀를 넣어 안을 뒤적였다. 붉은색을 띤 도톰한 입술을 내 입술로 짓뭉개며 혓바닥을 맞대 춥춥 젖은 소리가 나게 비벼 댔다. 척추를 타고 아래로 짜릿한 감각이 내달렸다. 나는 묵직하게 일어선 성기에 엉덩이를 대고 몸을 앞뒤로 움직였다. 박래현의 파자마가 내가 흘린 물로 축축하게 젖어 엉덩이 사이에 질척하게 엉겨 붙었다.
“으, 으읍, 흐읍….”
벌어진 틈새로 신음이 새어 나가자 박래현이 한 손으로 뒤통수를 감아 자신의 뺨에 내 코를 깊게 내리눌렀다. 박래현 얼굴에 끈적해진 침을 묻히며 나는 게걸스럽게 박래현 입술을 빨았다.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이 불에 담갔다 꺼낸 것처럼 뜨거워서 나는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확 달아오른 분위기에 넘어가 몸부터 섞고 싶어지기 전에 힘겹게 입술을 뗐다.
못내 아쉬운 듯 박래현은 상체를 일으켜 나를 안은 채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내 허리를 두 팔로 꽉 안고서 가슴에 뺨을 문지르던 박래현이 작게 도드라진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습기 밴 살덩이가 돌기를 살살 돌려 가며 좌우로 움직였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며 신음을 삼킨 나는 박래현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얼굴을 들어 올렸다.
“형, 회사에서 총각행세 한다면서요.”
“뭐?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해?”
“결혼해 놓고 왜 총각행세를 해요? 오른손 이리 내 봐요.”
허리를 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박래현은 왼손잡이라 나와 달리 오른손이 곱고 예뻤다. 나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 박래현의 길고 반듯한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눈짐작으로 산 반지지만 박래현 손가락에 꼭 맞아서 기뻤다.
“반지 빼지 말아요. 잃어버렸다간 가만 안 둬요.”
박래현은 반지 낀 오른손을 위로 올려 반지를 살폈다. 박래현이 어떤 품평을 할지 궁금해서 나는 가만히 갈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반지 마음에 들어. 네가 해 준 거니까 절대 안 뺄게.”
이 집에 온 첫날 박래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성기를 꺼낼 때만 해도 남자가 소름 끼치게 차갑고 무서웠었다. 그 뒤로 갑자기 많은 것이 바뀌어 혼란스럽지만, 박래현이 나와 별이를 사랑한다는 믿음은 점점 확고해졌다.
“곧 안정기에 접어드니까 가까운 데로 신혼여행 떠날까? 필리핀만 빼고 다 좋아.”
“제가 좋은 곳 있나 찾아볼게요.”
박래현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팔꿈치로 매트리스를 짚어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옆구리와 아랫배에 박래현 입술이 닿아서 간지러움을 참기 위해 나는 발뒤꿈치로 매트리스를 밀었다. 아기도 간지러운지 배 속에서 손발을 휘적휘적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참, 나도 너 주려고 선물 사 왔는데 잠깐만 기다려 봐.”
박래현은 기다란 팔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에서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하늘색 벨벳 상자 안에는 색색의 다이아몬드로 만든 피어싱이 옹기종기 모여 빛나고 있었다.
“저번에 해 준 게 마음에 안 든 거 같아서 새로 샀어.”
그는 피어싱을 꺼내 비어 있는 귓바퀴와 귓불에 하나씩 박아 넣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굴곡진 연골을 따라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피어싱과 귓불을 더듬었다. 그의 손길이 간지러워 움츠리는 내 모습을 박래현이 황홀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그 눈이 너무 강렬해서 한낮에 태양 아래 서 있는 것처럼 얼굴이 따끔거렸다.
“윤준영, 사랑해. 너도 나만 사랑하면서 살아.”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어느새 위로 올라탄 박래현이 뜨거워진 입술을 내게 포갰다. 나는 이 사람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얇은 살갗 아래 불룩 튀어나온 날개뼈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너 다시는, 아무 데도 안 보내.”
내 입술이 헐도록 빨아 대던 박래현이 겨우 초점이 맞는 거리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서 달아날 궁리만 했을 땐 읽지 못했던 감정들이 명징하게 드러난 눈이었다. 언제부턴가 오로지 나만 보고 있는 박래현에게 손을 뻗어 보드라운 뺨과 입술을 어루만졌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박래현이 사막을 걷고 있다면 커다란 우산으로 햇빛을 가려 주면서 함께 걸을 생각이다.
각양각색으로 빛나는 별들이 사실은 하나의 모양을 갖고 있듯 누구나 유다른 사랑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결말은 흔하디흔한 해피 엔딩을 꿈꾼다. 나 역시 박래현만 바라보면서 그에게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그래서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클리셰로 가득한 사랑을 할 것이다.
<로맨틱 클리셰 끝, 외전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