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맨틱 클리셰 외전-별이 반짝반짝 (11/16)

따뜻하고 포근한 덩어리가 등을 타고 오르더니 어서 잠에서 깨어나라고 나를 흔들었다. 달콤한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아 몸을 옹송그리며 베개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계속되는 재촉에 머리가 징징 울렸다. 왜 머리가 아프지? 미세하게 균열이 간 머릿속에 어제 발표를 끝내고 조별 과제 팀과 늦게까지 뒤풀이했던 기억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나를 데리러 온 박래현 차를 탄 시각이 열두 시 반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데리러 오지 말라고 부득불 말려서 말귀를 알아들은 줄 알았건만, 술값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박래현이 다가와 비틀거리는 내 팔을 틀어쥐었다.

‘윤준영, 술 많이 마셨어?’

‘아니, 쪼오금….’

취한 와중에도 남자의 서늘한 옆얼굴에 꽂히는 시선들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성숙한 매력을 풍기는 분위기에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집에 데려와서는 침대에 바로 엎어지려는 나를 욕실로 끌고 가 욕조 가장자리에 앉혀 놓고 칫솔에 치약을 듬뿍 짜 왔다. 양 볼을 억센 손으로 잡아 누르고서 별이에게 하듯 구석구석 이를 닦아 주었다. 나는 그의 허리에 두 팔을 두르고서 얌전히 박래현에게 몸을 맡겼다.

‘우리 집엔 애가 둘이나 있네.’

‘…….’

‘내 눈엔 왜 큰애가 더 귀여워 보이지?’

‘이러케 술 취했어도?’

‘당연하지. 애기야, 옷 벗자. 형이 씻겨 줄게.’

박래현은 능숙하게 내 옷을 벗긴 뒤 자기 옷이 젖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샤워기를 잡아당겨 나를 씻겼다. 그가 나를 다 씻기고서 수건으로 몸을 닦아 준 것까지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압빠, 이더나아.”

보드랍고 축축한 것이 볼을 기어 다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등에 매달려서 마른 볼에 침을 묻혀 가며 뽀뽀를 하는 사랑스러운 아기가 열린 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왔다. 끈질기게 엉겨 붙는 잠을 떨어내고 아이 얼굴이 선명하게 보일때까지 눈을 깜박였다. 아이의 맑은 눈이 내 눈에 가득 들어차면서 일시에 세상이 환해졌다.

“압… 빠!”

“별아, 이쁜 내 새끼, 잘 잤어?”

얼굴을 씻지 않아서 뽀뽀를 피했더니 아이 표정이 금세 우울해졌다.

“아빠가 세수를 안 해서 그래. 세수를 안 하면 얼굴이 더러워서, 뽀뽀하면 안 돼. 별이 배가 아플지도 몰라.”

별이 배를 손바닥으로 통통 때려 주고는 아이를 한 팔로 번쩍 들어서 옆구리에 끼고 욕실로 데려갔다. 나비라도 된 듯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별이를 들고 칫솔에 치약을 짜 이를 닦았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거울로 향해 별이를 살폈다. 나를 보며 방긋 웃는 입술 안에서 새하얀 유치가 사랑스럽게 반짝거렸다.

“까아아! 까아악!”

까마귀 흉내를 내는 아이의 모습이 예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별이는 나와 박래현을 골고루 닮았다. 정우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박래현 유전자가 훨씬 강한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지런한 눈썹 모양과 갈색 눈, 오뚝한 코는 일견 박래현을 쏙 빼다 박은 듯한데 선이 뚜렷한 입술과 쫑긋한 귀는 나를 닮았다. 아빠가 둘 다 커서인지 18개월에 접어든 별이는 키나 몸무게가 20개월 된 아이와 비슷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별이를 보며 유모는 키워 왔던 아이 중에 별이의 발달 정도가 가장 빠르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발육이 남다른 만큼 발달 단계도 빨라서 아이는 벌써 대소변을 가리기 시작했다. 육아에 관련된 책을 완벽하게 섭렵해서 TV에 나와 상담을 해도 될 만큼 육아 박사가 된 박래현은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으므로 대소변에 관해 압박을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한번 기저귀에서 해방된 별이는 기저귀를 채우면 혼자 찍찍이를 뜯어 기저귀를 벗어 버리곤 했다. 그래서 요즘엔 잘 때 말고는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다.

“압빠, 옙뽀!”

별이는 오동통한 두 팔로 내 머리를 껴안더니 내 귓바퀴에 뽀뽀를 날렸다. 피어싱이 반짝반짝 빛나서 마음에 쏙 드는지 별이는 내 귓바퀴에 박힌 보석을 좋아했다. 별이의 옷에 치약 거품이 묻지 않도록 고개를 돌려 입 안을 헹군 나는 별이를 욕실 밖에 내려놓았다.

“별아, 아빠 샤워하고 나갈 테니까 래현 아빠랑 놀고 있어.”

별이가 구별할 수 있게 나는 아빠로, 박래현은 래현 아빠로 불렀다. 래현 아빠란 말에 귀를 쫑긋거리던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뒤뚱뒤뚱 드레스 룸을 지나갔다. 별이가 침실로 들어간 걸 확인한 뒤에 나는 옷을 벗고 부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고 어제 술을 들이부었더니 머리가 아팠다.

계속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나중엔 찬물에 몸을 헹궈 헝클어진 정신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드레스 룸에선 박래현이 오른팔에 별이를 안고서 콘솔에 기대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래현이 골격이 좋고 장신인 탓에 별이가 그에게 매달려 있으면 더 작고 귀여워 보였다. 단단한 팔뚝에 엉덩이를 걸친 채 토끼 인형의 귀를 빨고 있던 아이는 웃으며 내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잠꾸러기, 잘 잤어?”

박래현은 팔을 쭉 뻗어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감싸고서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 맞췄다.

“압빠, 달 다떠?”

토끼 인형에게서 입술을 떼고 별이도 제 아빠를 따라 내 뺨에 통통한 입술을 눌렀다. 아침부터 충만한 기분에 휩싸여서 나도 별이 볼에 쪽쪽 입을 맞췄다.

“아침은 먹었어?”

별이를 낳고부터 박래현에게 말을 놓았다. 나이에 상관없이 부부는 동등해야 한다는 내 주장을 관철한 결과였다. 박래현은 권위를 내세우는 타입이 아니어서 내가 말을 올리든 내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되레 거리감이 없어져서 좋다고 했다.

“별이는 먹였고 나는 너랑 먹으려고 기다렸어. 아침은 열한 시쯤에 준비될 거야.”

내가 박래현 옷차림에 맞춰 옷을 고르는 동안 박래현은 드라이어를 들고 내 머리칼을 말렸다. 박래현에게 안겨 있던 별이가 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에 두 귀를 손으로 가렸다. 나는 트레이닝복 바지를 먼저 입은 다음 면티를 뒤집어써 얼굴을 가렸다.

“앗! 별아, 아빠 얼굴 어디 갔지? 세상에서 최고로 잘생긴 아빠 얼굴이 안 보이네?”

“조기이! 조기 이써.”

박래현이 장단을 맞춰 주자 나는 면티를 아래로 쏙 잡아 내렸다. 별이의 손끝이 내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별아, 까꿍!”

눈을 크게 뜨고 호랑이처럼 머리 위에서 손을 움켜쥐었더니 나를 발견한 별이가 좋아서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박래현은 웃고 있는 아이 볼에 입을 맞추면서 아이를 따라 웃었다. 유아 사춘기가 찾아온다는 악명 높은 18개월인데 별이는 미운 17개월을 지나 지금은 오히려 예쁜 짓을 많이 했다. 종종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을 부릴 때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쾌활한 성격이었고, 또 잘 웃었다.

‘별이 예쁜 짓 보니까 곧 둘째 생기겠어요.’

‘왜요?’

‘아이가 예쁜 짓 하면, 부모들은 그동안 힘들었던 일 다 잊고 또 아이를 낳고 싶어 하거든요.’

별이 유모 조수아가 며칠 전에 한 말이었다. 전문가 말이 틀리지 않은 게, 5년 뒤에나 둘째를 가질 원래 계획을 별이가 마구 흔들고 있었다. 요즘 별이를 보면서 이렇게 예쁜 아이라면 하나 더 낳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었다. 말을 안 듣던 17개월 별이는 머리 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한창 회사 일에 몰두해야 할 때 중간에 쉬는 것보다 아예 아이를 하나 더 낳은 뒤에 일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열한 시 다 됐네. 가서 밥 먹자.”

별이를 고쳐 안은 박래현이 오른팔을 내 어깨에 두르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보던 조수아가 다가와 별이를 안으려고 했다. 별이는 그에게 가기 싫은지 박래현 목을 꽉 끌어안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별이는 온화하고 품성이 고운 조수아를 잘 따랐지만 아빠들이 집에 머무르는 날이면 아빠들한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수아는 책을 읽어 준다거나, 블록을 쌓는다거나, 도형을 끼워 맞추는 정적인 놀이를 즐겨 하는데 박래현과 나는 별이와 뒹굴면서 험하게 노는 편이라 움직이고자 하는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고 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라 아빠들이 더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별아, 우리 밥 먹고 올 테니까 이모랑 놀고 있어.”

“시더.”

“싫어? 아빠가 낙하산 태워 줄까?”

“웅!”

“그러면 밥 먹고 올 때까지 이모랑 있어야 해.”

낙하산이란 말에 별이는 목을 꽉 감았던 팔을 풀고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이 기대감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박래현은 별이 허리를 잡아서 아이를 공중으로 높게 날렸다. 토끼 귀를 쥔 채로 바닥에서 거의 2.5m 이상 날아간 별이는 양팔을 벌리고서 박래현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짧은 머리칼을 나풀나풀 나부끼며 그는 왁자한 웃음소리를 냈다.

박래현은 가볍게 별이를 받아서 이마에 입 맞추고는 그 뒤로도 낙하산을 몇 번 더 태워 별이가 만족한 모습을 보고서야 조수아에게 넘겨주었다. 지금껏 이런 장면을 여러 번 봐 왔으면서도 조수아 얼굴이 걱정으로 창백해졌다. 특히 박래현은 키도 커서 아이가 떠오르는 높이가 꽤 위험해 보였다.

“오늘은 별이 너무 높이 날렸어.”

“부러우면 너도 날려 줄까? 1m는 날려 줄 수 있는데.”

“나 받다가 허리라도 다치면 나만 손해잖아. 안 돼.”

박래현은 내 허리에 팔을 감고서 나를 바짝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내가 다쳐서 누워 있으면 네가 올라타면 되지, 뭐가 문제야?”

농담이어도 그가 다치는 건 싫어서 고개를 젓는 나를 박래현이 짙게 그늘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그는 의자를 뒤로 당겨 나를 먼저 앉힌 다음 옆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식탁에는 무와 호박을 넣은 갈치조림이 뚝배기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그 옆에는 메밀묵사발과 육전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갈치가 크고 싱싱해서 맛이 괜찮을 거예요.”

“진짜 맛있을 거 같아요!”

우리 앞에 잡곡밥을 내려놓는 이 차장과 대화를 하는 동안 박래현은 제일 통통하고 윤기가 흐르는 갈치 토막을 국자로 떠서 내 앞접시에 내려놓고 국물로 생선을 적셨다.

“형 건 내가 떠 줄게.”

“됐어. 얼른 먹기나 해.”

박래현은 내가 수저를 집는 것을 지켜본 뒤에 앞접시에 놓인 갈치에서 뼈를 발라냈다. 군더더기 없는 솜씨로 갈치 가장자리에서 뼈를 쏙 빼낸 그는 내가 먹기 편하게 살을 모아 접시 한쪽에 가지런히 쌓았다. 문득 박래현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내가 별이처럼 젓가락질을 못 하는 애도 아닌데 이러다가는 박래현 없이 밥도 먹기 싫어질까 봐 두려웠다.

“오늘은 안 나가고 집에 있을 거야?”

“응.”

작년 10월에 주주총회를 통해 JS 제약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한 박래현은 JS 제약과 바이언스 일을 적절히 섞어 가며 스케줄을 조율했다. 일이 많을 땐 토요일에도 종종 출근하지만 대체로 주말엔 집에 머물면서 별이를 돌보며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JS 제약 대표 이사로 취임하면서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상무이사였을 때와 비교해서 오히려 더 여유가 생겼다. 회사 이사진들과 간부들이 박래현이 원하는 대로 잘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출발은 별이가 태어난 해에 블록버스터 두 개를 터트리면서부터였다. 신제품 출시로 JS 제약은 단숨에 시가총액 3위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 추진력을 얻은 박래현은 회사 직원들의 숨통을 조여 왔던 리베이트 관행을 완전히 뿌리 뽑으면서 JS 제약 직원들과 간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고인 물은 퍼내고 쓸데없는 가지는 쳐 내면서, 직원들의 가장 큰 애로점을 해결한 그에게 반기를 들 사람은 없었다.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회사는 전에 없이 활기찬 분위기로 잘 굴러갔다. 회사가 안정되자 박래현은 지 실장과 업무를 분담했다. 비서실장을 뽑을 때부터 미리 염두에 두고 능력 있는 사람을 발굴했기 때문에 지 실장은 박래현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도란도란 얘길 나누며 밥을 다 먹어 갈 무렵 별이가 주방에 나타났다. 오동통한 손으로 탁자를 짚고서 발뒤꿈치를 들어 올린 그의 시선은 육전과 메밀묵에 고정되었다.

“별아, 방금 먹어 놓고 또 배고파?”

고개를 끄덕이는 별이를 번쩍 들어서 무릎에 앉힌 박래현이 새 숟가락으로 메밀묵만 떠 별이 입에 갖다 대었다. 별이는 살진 입술을 벌려 메밀묵을 와락 베어 물었다. 묵사발에 약간의 고춧가루와 식초가 들어 있어서 메밀묵을 맛본 별이가 얼굴을 크게 찡그렸다. 표정이 풍부한 아이는 괴로워하는 얼굴마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별아, 매워?”

빨개진 입술을 후후 불어 주자 별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나머지 묵을 마저 입에 넣었다. 호기심이 강하고 겁이 없는 아이는 새로운 맛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별이만큼 용감한 성격은 아니었다고 했다. 콩 심은 데 콩 날 테니 박래현이 유년기에 별이처럼 용감하고 호기심이 강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걸 찾아내고 몰두해야 하는 연구가 체질에 맞았는지도.

“매운 거 그만 먹이고 이거 먹이세요. 별이가 좋아하는 애플 망고예요.”

애플 망고란 말에 별이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나는 화장지로 별이 입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 주었다.

“벼리, 애프 망고 됴아!”

“그럼 우리 거실 가서 애플 망고 먹을까? 소파에 앉아서 먹자, 별아.”

나는 애플 망고가 가득 든 쟁반을 들고 박래현과 별이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별이는 박래현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나를 보며 웃었다. 내가 낳은 아이지만 어디서 저렇게 예쁜 게 태어났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별이는 우리가 볼 테니까 조 여사님은 댁에 들어가 쉬세요.”

“아니에요. 대표님도 주말엔 좀 쉬셔야죠. 제 방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 두 시간만 놀다가 저한테 보내세요.”

조수아는 소파에 흩어진 별이 동화책을 챙겨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입주 내니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택에서 근무하고 일요일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별아, 망고 먹자!”

별이를 소파에 앉힌 박래현이 내 허리를 잡아 옆자리로 끌어당겼다. 나는 박래현 옆에 앉아서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정 차장이 미리 깎아 놓을 수도 있지만 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려고 박래현은 일부러 아이 앞에서 망고를 깎았다.

“우리 예쁜 별이를 위해서 아빠가 이 빨간 애플 망고를 깎아 줄게.”

아이가 일상에서 다양한 어휘에 노출될 수 있도록 우리와 조수아는 사물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화법을 구사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조별 과제를 할 때 나도 모르게 별이에게 쓰는 말투가 나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 적도 있었다. 박래현은 물수건으로 별이 손과 자신의 손을 닦고서 잘 익은 애플 망고와 과도를 집어 들었다. 삼등분 된 과일이 황금색 속살을 드러내며 달콤한 향을 풍겼다. 애플 망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얌전히 앉아 있던 별이는 좋아서 궁둥이를 들썩였다.

“별아, 이 과일 이름이 뭐라고 했지?”

나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별이에게 눈을 맞추며 질문을 던졌다. 별이 입에 가득 고였던 침이 아래로 길게 흘러내렸다.

“애… 애뿌랑고!”

“아빠 따라 해 봐. 애, 플, 망, 고!”

“애, 프, 만, 고!”

“잘했어. 밖은 빨간데 안은 노랗네? 신기하다, 그치?”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래현은 노란 과육을 잘게 썬 다음 별이에게 건네 과일을 직접 뒤집게 했다. 처음엔 잘못 뒤집어서 끊어 먹기 일쑤더니 이제 능숙하게 망고 꽃을 만들었다. 얼른 먹고 싶어서 마음이 급할 텐데도 별이는 천천히 망고를 뒤집어 우리의 칭찬을 받았다. 그의 입으로 사각형 망고 조각이 들어간 순간 별이 눈이 기쁨으로 사르르 감겼다. 박래현은 다른 망고를 잘라 예쁘게 뒤집어서 내게 건넸다.

조각난 망고 몇 개를 먹어 입에서 비린내를 없앤 후에 나는 망고 조각을 입에 물고 박래현에게 입을 맞췄다. 망고만 밀어 넣으려던 혀가 박래현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혀끝이 질척하게 섞이는 달콤하고 황홀한 키스가 이어졌다.

“압~빠! 더, 더!”

입술을 떼고서 내 얼굴을 빤히 보던 박래현이 멈췄던 손을 움직여 일정한 간격으로 과육을 갈라 별이에게 건넸다. 토실토실한 볼과 손에 단물을 잔뜩 묻히고서 망고를 조심스럽게 뒤집는 데 성공한 별이가 눈을 반짝이며 칭찬을 갈구했다. 망고를 먹어서 좋은 건지, 망고를 잘 뒤집어서 칭찬을 받고 싶은 건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와, 우리 별이는 정말 대단해! 망고를 이렇게 예쁘게 뒤집다니!”

박래현은 톤을 높여서 별이를 칭찬한 다음 별이 볼에 쪽쪽 입 맞추고는 계속 망고를 잘랐다. 망고 다섯 조각을 먹고 드디어 배가 불렀는지 별이 다가와 찐득찐득한 손으로 내 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단내가 나는 얼굴을 가슴팍에 비비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내 옷뿐만 아니라 아이의 목이며 얼굴, 머리칼이 금세 망고즙으로 끈끈해졌다.

“별아, 애플망고 맛있어?”

“응!”

“별이 끈적거리니까 씻겨야겠다. 우리 별이 데리고 목욕할까?”

“그게 좋겠어.”

“내가 물 먼저 받을 테니까 10분 있다가 욕실로 들어와.”

별이 때문에 끈적끈적해진 나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래현은 흩어진 망고 껍질을 쟁반에 담아서 주방으로 사라졌고 나는 별이를 목에 태우고 정원으로 나갔다. 잘 익어서 따스한 가을 햇살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2년 전 내가 별이를 임신한 채로 이 집을 떠났던 날도 이렇게 햇볕이 따스한 가을이었다. 박래현과 나 사이의 악연을 끊고자 도주를 했고, 도주하고 나서야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상황 속에서도 별이는 용케 잘 견뎌 내 우리에게 빛이 되어 주었다.

“별아, 이 나무가 산수유나무야. 지금은 색이 후줄근한데, 겨울 되면 열매가 빨간색으로 변해.”

“…산슈, 남우….”

산수유 나무를 지나 막 노란색이 깃들기 시작한 은행나무 아래 서서 별이를 팔에 안고 핸드폰을 꺼냈다.

“별아, 웃어 봐. 사진 찍을 거야.”

“…….”

“하나, 두울, 세엣!”

핸드폰 화면에 하얀 이를 보이며 방긋 웃는 별이 얼굴이 잡혔다. 나는 사진을 한 번 더 찍고 나서 더 잘 나온 사진을 엄마에게 전송했다. 2주 전에 엄마랑 제주도 별장에 다녀온 뒤로 바빠서 통 연락을 하지 못했다. 사진을 받자마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 준영아, 우리 서윤인 잘 있지?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어, 잘 있지, 그럼. 엄마는 몸 괜찮아?”

- 괜찮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엄마가 요양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박래현은 엄마를 집에 모시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엄마는 해준과 있겠다며 우리 제안을 거절했다. 엄마 의사를 존중해서 박래현은 엄마가 힘들지 않게 도우미를 고용해 가사 일을 돌보게 했다. 

“엄마, 영상 통화로 별이 보여줄게. 잠깐 전화 끊어 봐.”

나는 전화를 영상 통화로 돌려서 엄마에게 별이를 보여 주었다. 화면에 웃고 있는 엄마 얼굴이 크게 잡혔다.

“서윤아, 할머니한테 인사해.”

엄마와 별이는 신기하게도 서로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를 둘이나 키워서인지 엄마는 별이 입에서 나온 의성어를 굉장히 능숙하게 해석했다.

“준영아, 별이 데리고 들어와.”

우리를 부르는 박래현 목소리가 엄마 귀에까지 들렸는지 엄마가 어서 들어가라며 재촉했다.

“별아, 할머니한테 안녕히 계세요, 해 봐.”

엄마에게 양손을 흔들어 열심히 작별인사를 하는 별이를 안고 침실로 향했다. 테이블에 핸드폰을 내려 두고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따뜻한 수증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작년에 욕실을 대대적으로 넓히고 뜯어고치면서 바닥을 파 대형 욕조를 만들었다. 주말에 느긋하게 쉬려고 만든 욕조는 정작 별이 놀이터가 되어 풍성한 거품 사이로 별이가 좋아하는 분홍색 플라밍고 튜브와 여러 모양의 물고기들이 둥둥 떠다녔다.

“아빠, 나 쉬….”

“오줌 마려워? 잠깐만!”

나는 별이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를 잡아 변기 끝에 앉혔다. 18개월 된 별이가 벌써 대소변을 가린다고 자랑했을 때 엄마는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몇 가지 알려 주었다. 안 그래도 이미 나를 오줌싸개라고 놀려 대는 박래현 귀에 그 사실이 들어가면 난감할 것 같아서 나는 엄마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

볼일을 다 보고서 팬티를 끌어 올린 별이는 내 품에서 벗어나 제법 의젓하게 욕조로 걸어갔다. 혹시라도 아이가 미끄러질까 봐서 나는 그 뒤를 조심조심 따라갔다. 그는 안아서 욕조로 내려 주려는 박래현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뒤 몸을 돌려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 한 발씩 욕조로 집어넣었다. 혼자서 욕조로 들어가 분홍색 플라밍고 튜브로 향하는 별이를 보는 박래현 눈에 언뜻 묘한 기색이 지나갔다. 나는 별이를 따라가 튜브에 태워 주고 박래현 옆에 앉았다.

“왜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

물 온도가 적당히 따뜻해서 금세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욕조 턱에 뒷머리를 기대고 별이를 보고 있던 박래현이 내 팔뚝을 잡아 나를 옆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별이 너무 빨리 자라는 거 아냐? 이러다가 곧 유치원 보내게 생겼어.”

“그러게. 그 생각만 하면 왜 이렇게 허전하지? 형도 별이처럼 말 빨리 배웠어?”

“어, 아마 그랬을 거야. 넌?”

수면을 다 덮은 풍성한 거품 안에서 뱀처럼 스르륵 기어 온 팔이 허리를 돌아 옆구리를 휘어 감더니 이내 장골 부근에 손가락이 닿았다. 자연스럽게 손가락 끝이 몸을 문질렀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서 혼자 잘 노는 별이를 보았다.

“난 그냥 보통 애들보다 약간 빠른 정도?”

“너 말 배울 때 별이보다 귀여웠을 거 같아.”

“뭐래. 이 세상에 별이보다 귀여운 아이는 없어.”

우리 대화 주제가 자신인 줄도 모르고 별이는 낚시에 정신이 팔려 우리에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온몸에 거품을 묻혀 가며 열심히 물고기를 잡아 튜브 안쪽에 가두고 있었다. 박래현이 귓가에 젖은 입술을 바짝 붙이고는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런데… 너 중간고사 준비한다고 요즘 들어 통 안 했잖아. 욕구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서 산을 이뤘어.”

“무슨 소리? 나흘 전에 우리가 한 건 대체 뭐였더라?”

“매일 하던 걸 지금 나흘째 안 하고 있어. 이 정도면 네 사정 엄청 배려해 주는 거지.”

“지금 그딴 걸로 생색내는 거야? 기가 막혀서….”

“이거 완전 뻔뻔한 자식이네. 기껏 생각해서 참고 있는데 그것도 몰라.”

일주일에 6일은 기본이고 적다 싶어도 4일은 섹스를 하는 사이라 박래현은 시험 기간이 되면 욕구 불만에 시달렸다. 어떤 땐 보다 못해 욕실에서 혼자 해결하고 오라고 해도 자위는 싫다면서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리는 건 박래현이나 별이나 똑같았다.

나는 잡았던 고기를 다시 풀어 주는 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이 따뜻해서 아이의 양 볼은 화사하게 붉었다. 저 아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좌절을 경험할 일이 있을까? 제 아빠에게서 눈부신 미모와 영특한 머리를 물려받았고 나중에는 엄청난 부를 거머쥘 아이 앞에는 오로지 탄탄대로만 펼쳐질 것처럼 보였다.

“형….”

“왜.”

“우리… 별이 동생 가질까?”

예상 밖의 말이었는지 겨드랑이를 쓸던 손이 우뚝 멈췄다. 우아하게 튀어나온 목울대가 큰 소리를 내며 꿀렁 움직였다.

“벌써? 언젠 5년 있다가 생각해 본다며.”

“원래 둘은 낳을 계획이었잖아. 중간에 쉬는 것보다 아예 아이 낳고 회사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조 여사님 다른 데 계약하기 전에 얼른 낳으면 좋을 거 같아.”

“글쎄… 좀 더 생각해 보자. 즉흥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잖아.”

“낳을 거면 지금 낳고 싶어.”

“…너 그때 입덧하느라 힘들었잖아. 멋진 근육이 사라졌다고 슬퍼하기도 했고.”

“귀한 걸 얻으려면 그 정돈 각오해야지.”

임신 초기엔 입덧으로, 임신 말기엔 배가 불러서 몸이 불편했던 점을 제외하고는 딱히 힘든 기억이 없어서 임신이 두렵지는 않았다. 육아 또한 조수아와 박래현이 있으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를 가지려면 별이가 미운 네 살이 되기 전에 가져야 한다던 조수아의 우스갯소리를 생각하며 나는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했다. 이 시기가 지나면 둘째는 요원해질 것 같았다. 내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별이가 부지런히 발을 놀려 우리에게 다가왔다. 박래현이 거품을 손바닥에 얹어서 별이를 향해 후 불자 별이도 거품을 두 손에 가득 담아서 박래현 얼굴에 문질렀다.

박래현이 별이를 데리고 노는 동안 나는 햇볕에 잘 말린 해면으로 별이 몸을 씻겼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살을 씻기면서 틈만 나면 별이 손바닥과 발바닥에 뽀뽀했다. 키가 크면서 팔다리도 길어진 터라 예전보다 덜 통통해 보였지만 팔이나 무릎이 접히는 부분, 손등은 여전히 살이 올라서 귀여운 보조개가 있었다. 지금 모습이 너무 예뻐서 별이가 오래도록 이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이제 물로 헹궈야겠다.”

아기 샴푸로 머리까지 감긴 후에 박래현은 별이를 안고 샤워기 아래로 가서 물을 틀었다. 욕조 턱에 팔꿈치를 기대 그 위에 얼굴을 괸 채로 박래현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강건한 어깨와 늠름하게 뻗은 등을 타고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물은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지나 잘 다듬어진 허벅지와 종아리로 향했다. 지난 3년간 수없이 봐 놓고도 볼 때마다 감탄하게 하는 근사한 몸이었다. 저런 몸을 갖고 싶어서 노력 끝에 근육을 되찾았지만 아직 내 양에 차지는 않았다. 나는 박래현이 좋아했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몸에는 전혀 미련이 없었다.

“별아, 좋아?”

“응!”

박래현은 별이에게 다정하면서도 거침없는 구석이 있었다. 하늘 높이 던졌다가 받는 놀이를 좋아하는가 하면 샤워기 옆 수납장에 버젓이 샤워 캡을 두고도 그냥 샤워기 아래 서서 샤워를 하곤 했다. 별이가 겁이 없어서 그러겠지만 조수아가 알면 기겁할 일이었다.

“별이 다 씻었으니까 이 닦을까?”

“내가! 내가 해!”

박래현이 샤워기를 꺼서 욕실 안이 조용해졌다. 별이를 안은 채로 자신의 칫솔과 아이의 칫솔에 치약을 짠 그가 아이에게 칫솔을 건넸다. 누가 박래현 자식 아니랄까 봐 별이는 왼손으로 칫솔을 받았다.

“별아, 아빠 따라 해.”

박래현은 아이가 볼 수 있게 입을 벌리고 느릿느릿 칫솔질을 시작했다. 박래현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별이는 서툴게 손을 움직여 이를 닦았다. 별이가 양치를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잘했다며 엉덩이를 토닥여 준 박래현이 별이에게 칫솔을 받았다.

“아, 해 봐. 우리 별이 이 잘 닦았나 보자.”

별이는 아 소리를 내며 입을 크게 벌려 박래현의 검사를 기다렸다. 입 안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박래현이 다시 칫솔에 치약을 짰다.

“저기 안쪽이 안 닦였어. 벌레 나오기 전에 아빠가 닦아 줄게.”

벌레라는 말에 별이가 박래현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박래현은 살살 이를 닦아 준 후에 다시 샤워기를 틀어 별이 입을 헹궈 주었다.

“압빠, 볼레 이쩌?”

“아빠가 다 잡아서 없앴어. 샤워 끝났으니까 우린 먼저 나가서 우유 먹자.”

박래현은 둥글게 튀어나온 별이 이마에 입 맞추고는 내게 먼저 나간다는 말을 하고 욕실에서 나갔다. 널따란 욕조에서 혼자 뒹굴뒹굴하며 아이를 갖자는 말에 박래현이 왜 쉽게 대답하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박래현은 별이를 예뻐하고 육아에 관심이 많은 아빠였다. 그가 지극정성으로 별이를 키워서 어쩌면 둘째는 자신이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별이에게 하듯 둘째한테도 정성을 기울인다면 박래현의 주말은 통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둘째를 낳을 무렵엔 내가 학교를 졸업하므로 지금보다는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할 수 있어 큰 문제가 되진 않을 터이다.

머리를 흔들어 둘째 생각을 떨쳐 버리고 나는 오늘 할 일을 정리했다. 오후엔 자료를 찾아 개별 과제를 완성한 뒤에 별이와 좀 놀아 주고 중간고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동안 무리해서 학점을 채웠더니 마지막 학기엔 과목이 많지 않아서 시험을 본다고 해도 여느 때와는 달리 꽤 여유가 있었다.

샤워를 끝내고 나는 트레이닝복 바지와 한 벌로 된 집업 후드티를 골라 입었다. 집에서 편하게 입는 운동복이지만 전체적으로 남자다운 몸을 돋보이게 해서 마음에 들었다. 다부지게 벌어진 어깨와 길쭉한 다리를 만족스럽게 훑어보고는 머리칼에 남은 물기를 털며 침실로 들어갔다.

어깨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초록색 원피스에 흰색 칠부바지를 입은 별이가 팔 굽혀 펴기를 하는 박래현 등에 기수처럼 올라타 있었다. 별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였다. 박래현은 별이를 등에 매달고 호흡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팔을 굽혔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나를 태우고도 곧잘 하곤 했으니 별이를 태우고 몸을 일으키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별아, 래현 아빠 지금까지 몇 개 했어?”

어려운 질문에 별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속으로 숫자를 세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대답을 내어놓았다.

“마니 해써.”

“별아, 아빠 꽉 잡아. 곧 신나는 우주선이 출발할 거야.”

오른팔을 뒤로 둘러 별이를 붙든 박래현은 왼팔로 몸을 지탱해 팔굽혀 펴기를 이어 갔다. 한 손으로 하면 몸이 한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별이는 놀이기구에 탄 것처럼 즐거워했다.

“형, 나도 올라타게 두 손으로 짚어 봐.”

나는 별이를 안고 박래현 등에 올라탔다. 강철 체력을 타고난 박래현은 나까지 태우고 팔굽혀 펴기를 반복했다. 회전목마를 탄 것처럼 몸이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쑥 내려갔다. 그의 몸이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어깨와 등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해 날개뼈가 불끈 솟아올랐다. 날개뼈 사이의 섬세한 굴곡과 목에서 불끈거리는 핏대가 왠지 야해 보여서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나까지 탔는데 힘 안 들어?”

“어, 괜찮아.”

“괜찮아도 이제 그만 해. 운동 충분히 됐겠다.”

자존심 강한 그가 그만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나는 별이를 들고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 몸을 틀어 내게서 벗어난 별이는 박래현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아빠, 택 일거됴.”

“그럴까? 우리 별이 열심히 운동했으니까 이젠 책 읽을 시간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별이는 이럴 때 꼭 박래현을 찾았다. 박래현과 별이는 별이가 골라 온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침대로 올라갔다. 박래현이 그중에 하나를 골라 잡고 읽기 시작하자 별이는 금세 책에 빠져들었다. 아이를 돌봐 주는 유모가 있는데도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를 키우는 건 보통 체력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준영아, 뭐 해. 얼른 올라와.”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리며 박래현은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갔다. 제일 좋아하는 토끼 인형 달이를 품에 안고 그림책에 나오는 원숭이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별이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요즘 한창 동물들에게 관심이 생겨서 별이는 동물에 관한 책만 줄줄이 읽으려고 들었다. 오른팔을 세워 턱을 괴고 다른 손으로 별이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동화책을 읽어 주던 박래현이 내게 어서 올라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서재로 올라가 공부하려다가 테이블에 놓아둔 전공 책과 노트, 필기구를 챙겨서 별이 옆으로 올라가 엎드렸다. 주말엔 될 수 있으면 박래현과 별이 옆에 있고 싶었다. 베개를 시트와 가슴팍 사이에 끼우고 조직 전략론을 펼친 나는 형광펜을 집어 들고 공부하다 만 부분부터 읽기 시작했다. 기업에 적합한 조직의 구조와 과정을 설계하는 내용이라 내가 가장 관심 있게 듣는 과목이었다.

“준영아, 오늘 밤에는 별이 동생을 만들어 볼까?”

미지근한 손이 내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공부를 방해한 것은 내가 책을 두 장도 채 넘기지 못했을 때였다. 막 공부에 몰입하려는 순간 흥이 깨져서 가자미 눈으로 박래현을 노려봤다. 긴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갈색 눈이 나를 다정하게 응시했다.

“히트 사이클까지 아직 3주나 남았잖아.”

“히트 사이클이 중요해? 별이 생길 때도 히트 사이클 아니었잖아.”

“…그땐 유산 때문에 주기가 불안해서 그랬던 거고.”

“어쨌든 가능성은 열려 있단 말이네. 기회는 미리 준비한 사람에게만 오는 거라고.”

“존나….”

핑곗거리 하나 생겼냐며 욕을 뱉으려던 나는 별이 눈치를 보며 뒷말을 삼켰다. 귓불을 만지던 손이 슬며시 뺨을 지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애무했다.

“별이가 무섭긴 하네. 윤준영이 욕을 다 삼키고.”

기름한 눈꼬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나는 어느새 그 눈에 푹 빠져서 황홀한 기분이 되어 그를 보았다. 이따금 이 현실적이지 않은 남자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곤 했다.

“압빠! 코끼니….”

“응?”

“코끼니 구해됴.”

잠깐 멈춘 틈을 참지 못하고 별이가 박래현 귀를 잡아당겨 책으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박래현은 별이 등짝만 한 손으로 토실한 엉덩이를 토닥거렸다.

“나 곧 시험 기간이야. 형이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그동안 밤일도 제대로 안 했으면서, 그 시간에 공부 안 하고 뭐 했어?”

박래현은 공부 때문에 애먹어 본 적이 없어서 내 고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보는 대로 다 기억하고 어려운 것도 쉽게 이해하는 사람이 학교 시험으로 고통받았을 리가.

“압빠. 코끼니이 아야 해애….”

“그래, 얼른 구해 주자. 별아, 별이라면 어떻게 구해 줄래?”

책으로 시선을 떨군 나는 형광펜으로 칠한 부분을 복습하며 노트에 필기한 교수 설명을 참고했다. 수업 시간에 노트북으로 받아 적은 다음 노트로 옮기며 정리하는 게 습관이 돼서 나는 주로 노트와 책을 보며 공부했다. 한참 책을 보는데 졸음이 찾아와 눈이 가물거렸다. 나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돌려 별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박래현 옆얼굴을 넋 놓고 쳐다보다가 책 읽어 주는 낮고 청량한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달짝지근한 잠에 빠져들었다.

***

- 선배. 커피 한잔하실래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