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켜져 있는 컴퓨터를 고글과 연결하자, 혜강이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조용해졌다. 그가 당당하게 해킹을 시도하는 것을 본 재경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전직 직원 앞에서 되게 당당하게 조작하네. 내가 신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이연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떨떠름한 말투의 내용은 과하게 솔직했다.
“못 할걸요.”
“뭐?”
“재경 씨가 쟤를 이길 수 있겠어요?”
하얀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산오였다. 줄곧 딴짓하고 있던 냉한 시선이 이연에게 향했다.
“아주 부하처럼 부려 먹는군.”
“야, 행정상 네가 알바잖아.”
“알바비도 안 주면서.”
“……계약서 쓸까?”
이연의 얼굴이 금세 비굴하게 변했다. 랭킹 1위에게 최저시급을 제안해도 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낯짝이었다.
“필요 없어.”
“너 근데 돈을 들고 다니긴 해야 돼. 지갑이 왜 없는 거야?”
“누가 보면 네가 모두 다 계산하는 줄 알겠군.”
서늘한 눈이 이연의 품 어딘가를 더듬었다.
“내 카드 받았다며.”
“…….”
소름이 쫙 돋았다. 언제부터 알았지? 아니, 종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그걸 후다닥 일러바쳤단 말이야? 쪼잔하게……. 내가 쓰면 얼마나 썼다고……. 이연의 뇌리로 사리에 맞지 않는 각종 잡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카드 고지서를 보여 준 건 아니겠지? 내가 뭘 샀더라? 여덟 자리는…… 넘었던 것 같은데, 아홉 자리도 넘었나? 그래서 눈치 주는 건가? 급기야 가계부 참회의 시간을 가지느라 조용해진 이연의 머리통을 한심하게 바라본 산오가 재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멍청한 변이종 선호는 관심 없어.”
나직한 말의 어투가 어찌나 차가웠는지, 재경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전 직장에 묻히고 싶은 게 아니면 여기서 뭘 했는지 설명해.”
고개를 까딱이는 몸짓은 가벼웠으나 눈빛만큼은 무시무시했다. 재경의 유일한 무기였던 손칼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박살 낸 사람이다.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높은 확률로 랭킹권 초능력자였다. 재경이 생존 본능에 따라 더듬대며 입을 열었다.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던 재경에게 클럽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온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었다.
클럽은 그에게 딱 맞는 곳이었다. 그를 스카우트한 상사의 말로는, 변이종이 인간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연구하는 곳이라고 했다. 아직은 하급 변이종밖에 다루지 못하지만, 점차 연구를 발전시켜 중급, 상급과도 소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합법적인 연구소는 아니었지만—변이종 관련 법률은 아직도 미비했으므로 완전한 불법 또한 아니긴 했다.— 원하던 방향의 연구였다. 재경은 당장 클럽에 취직했다. 정확히 말하면 클럽으로 위장한 미등록 연구소였다.
말단인 재경이 맡은 일은 클럽의 회원들이 데려오는 변이종을 일차적으로 분류하는 것. ‘교육’이라고 불리는 과정의 가장 첫 번째 단계였다. 큰 포부치고는 보잘것없는 일이었으나, 경력이 쌓이면 업무 내용 역시 발전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일을 수행했다.
연구소에 맡겨져 ‘교육’을 마친 변이종은 정말로 인간의 친구라도 된 것처럼 손길에 얌전해졌다. 원래 호전적이지 않다고 알려진 종뿐만 아니라, 호전적이라고 이름난 변이종도 예외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보너스’라고 부르는 부작용이 생기는 변이종도 있었다. 변이종이 다룰 수 있는 능력이 한 가지 더 생기는 것이다. 보너스는 변이종마다 발현되는 종류가 달랐고 그 능력이 강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특별해졌다는 것이 중요했다.
“보너스 변이종?”
“응. 왜?”
“아니에요. 계속 말해 주세요.”
생각에 빠진 이연의 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거, 설마……. 이연의 반응에 재경은 잠시 의아하다는 반응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이어 갔다.
변이종을 길들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능력까지 개발해 내다니. 재경은 교육의 나머지 과정이 더욱더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만큼 일을 더 열심히 했다. 그도 어서 이 실험에 기여를 하고 싶었다. 아직 미개척된 부분이 많은 변이종이라는 것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변이종 선호엔 관심 없다고 했을 텐데. 혀가 잘리고 싶나?”
“아니, 아니……. 이것도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이에요.”
“재경 씨, 왜 쟤한테만 존댓말 해요?”
“네 혀도 잘라 줘?”
……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최근이었다.
‘교육’을 받았던 변이종이 계속, 계속 연구소에 되돌아왔다. 되돌아오는 변이종은 종을 불문하고 호전성이 강해졌으며, 통제할 수 없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그런 변이종들은 재경이 건드릴 수도 없어, 바로 다른 연구실로 이동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높은 확률로 걔들은…….”
재경이 무겁게 덧붙인 말의 뒷부분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변이종의 사체는 재로 변해 사라진다. 실컷 실험하다 실수로 죽어도 존재 증거가 없어져 버리다니, 이 얼마나 편리한 현상인가.
연구소가 변이종을 죽였는지 아닌지는 눈앞에서 보지 않는 이상 주인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주인이 기다리는 곳은 술을 먹으며 흥청망청 노는 어두운 클럽 안이었다. 잠깐의 눈속임만 통한다면 그 후 변이종의 행방은 오롯이 주인의 책임이다.
이 초능력 가득한 도시에서 술 먹은 사람에게 눈속임하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설명을 들은 이연의 시선이 정확히 재경의 배로 향했다.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아침에 봤을 때는 분명히 칼에 찔린 자국이었다.
뭔가 냄새가 났다. 아주아주 구린 냄새가.
“그거, 여기랑 관련 있죠?”
확신하는 말투에 재경이 피식 웃었다.
“역시 그래 보이지?”
재경은 자신이 맡은 일에만 신경 쓰기 위해 애를 썼으나 호기심이란 건, 특히 연구자쯤 되는 인간의 호기심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그는 은근슬쩍 돌아다니는 반경을 점점 넓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구소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건 아니어서, 제대로 인수인계를 받지 않은 재경은 알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다. 의심을 사면 안 됐기 때문에 오래 뒤지고 있을 시간도 없었고, 다닐 수 있는 반경도 한계가 있었다. 변이종이 가둬진 케이지나 살균실 같은 거야 얼추 파악이 가능했지만, 아무리 봐도 뭐 하는 곳인지 모르겠는 연구실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도 보다 보면 알까 싶어서, 재경은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오늘 새벽에도 그렇게 여기저기를 기웃대고 다니던 차였다.
복도 끝에서 하얀 천으로 덮은 박스 같은 것이 운반되어 오고 있었다. 박스의 크기는 하급 변이종을 넣어 놓았다기엔 상당히 컸다. 사람들이 오기 전에 슬쩍 숨은 재경은 짐 운반하는 사람들을 따라갔다.
운반하는 일행은 어느 연구실 앞에서 멈췄다. 박스가 연구실에 들어가기 직전, 재경은 티 나지 않게 슬쩍 천을 들춰 보았다.
“뭐였을 것 같아?”
이연이 눈알을 굴리다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 중급 변이종일까요?”
재경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었어.”
기절한 건지 죽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변이종이나 들어갈 법한 케이지 같은 곳에, 사람이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네놈.”
그때, 줄곧 가만히 듣고만 있던 산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안 걸리고 그런 짓을 했지?”
당장 그들이 걷고 있는 복도만 해도 몸을 숨길 곳이 전무했다. 연구실 입구 같은 것도 전부 숨겨져 있는 모양인데, 가장 하급 연구실에 있던 재경이 다른 연구실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도 평범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물음에 재경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모습이 사라졌다.
“그게 내 초능력이거든.”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제야 이연은 재경의 능력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투명화…….”
“뭐, 1단이라 썩 훌륭하진 않아. 집중력 떨어지면 금방 풀리거든.”
바로 그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의식을 잃은 채 운반되고 있는 인간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재경의 초능력이 풀려 버린 것이다.
“그래도 나도 여기 직원이었는데, 가차 없더라고~ 바로 무기를 꺼내 드는 거 있지?”
그를 잡으려 드는 사람들을 피해 달리다가 칼을 맞았고, 죽을 위기에 처한 재경은 냅다 아무 방에나 뛰어들었다.
거기서 포탈을 발견했다.
“……여기 포탈이 있다고요?”
포탈. 지정된 공간으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충전식 기계로, 순간이동 능력자의 기력이 필요하다. 희귀한 순간이동 능력자만큼 비싼 기계였다. 이 도시에 있는 걸 다 합쳐도 열 개가 안 될 것이다. 초능력 관리청에도 겨우 두 개 있다고 들었다.
“마침 충전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어딜 가든 여기보다 낫겠지 싶어 뛰어들었지.”
그리고 이동된 곳이 이연의 동네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