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바닥을 뚫는 것은 쉬웠다. 그냥 거대한 동그라미를 그리면 되니까.
이연이 매직을 꺼내 주저앉은 지 1분, 곧 찌그러진 네모 모양대로 바닥이 파이기 시작했다. 예쁜 동그라미는 아니었지만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벌어지는 구멍을 피해 뭉치가 이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칭찬해 달라는 듯 애교를 부리는 뭉치를 슥슥 쓰다듬어 준 이연이 구멍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바닥 아래는 어두워서 뭐가 뭔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연이 팔을 뒤로 뻗어 가방을 뒤적였다.
“잠깐만.”
주섬주섬 그린 못생긴 손전등을 하나씩 받은 세 사람이 동시에 아래를 비추자, 날카로운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찾았다.
가장 처음 보인 것은 격자무늬 철창이었다.
변이종 보관실은 작은 철창을 여러 개 이어 붙인 듯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수많은 철창 사이에서 차 있는 철창은 네 개. 변이종 역시 네 마리였다.
연구소 규모는 물론이고 갇힌 초능력자에 비해서도 적은 개체 수다. 명백하게 주객전도였다.
촘촘한 철창에 단단한 강화 유리까지 덧댄 공간은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다. 변이종에게 산소가 필요하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으니 밀폐되어 있다고 죽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열악하잖아. 이연이 혀를 찼다.
크기 역시 하급 변이종이 몸을 누이면 절반이 차는 넓이였다. 변이종들은 하나같이 축 늘어져 있었는데,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건 아닐 터였다. 적대적인 것보다 기운이 빠져 있는 게 구조에는 더 낫긴 할 테지만.
이연이 재경을 돌아보았다. 변이종들을 바로 여기서 끌어 올릴 수는 없었다. 초능력자인 두 사람을 보자마자 날뛸 게 뻔했다.
“얘네 데려갈 방법 있어요?”
“잠깐만.”
컴퓨터 쪽으로 달려간 재경이 이내 무언가를 작동시켰다. 유리 너머의 실험실 불이 켜졌다.
“보고서에서 본 게 단순히 기력 소진의 문제라면 내가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요?”
이연의 낯이 환해졌다. 재경이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문제는 없었다.
“응. 일단 시도해 볼게.”
그 말과 함께 재경은 변이종들을 실험실에 데려다 넣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무언가를 입력했다. 봐도 모르는 전문 지식들의 바다를 멀뚱히 지켜보던 이연이 이내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리다 갇혀 있던 연구원과 눈이 마주쳤다.
철창을 쥔 손등의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진 채로 힘을 준 연구원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발길이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향했다.
“저기요.”
“…….”
연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보를 주기는 싫다는 건가.
“이런 걸 하시면 안 되죠. 윤리라는 게 있잖아요.”
이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왜 이런 문제에 이렇게 미치는 건지 모르겠네. 쓸데없이 욕심부리면 안 된다고 학교에서 안 배웠어요?”
훈계 조의 말투에 연구원의 시선이 험악해졌으나, 평범한 일반인이 눈빛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온도가 조금 내려간 시선으로 그 꼴을 바라보던 이연이 다시 입을 열려던 그때.
“인간은 욕심으로 성장해.”
낯선 목소리에 고개가 휙 돌았다. 출입구 쪽에 웬 군단이 우르르 서 있었다. 혜강이한테 문 잠가 달라고 하는 걸 깜빡했네. 이연이 뒤늦게 혀를 찼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중년 연구원과 무장한 경호원들. 척 봐도 적은 수는 아니었다.
이연이 재경을 보호하듯 한 발 앞으로 나온 것과 동시에 뭉치가 으르렁거리며 이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침입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재경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내내 조용하던 연구원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김 박사님!”
“아는 사람이에요?”
대답은 재경에게서 나왔다.
“우리 연구소 총책임자야.”
느닷없는 최종 보스였다.
컴퓨터 쪽을 보니 재경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키보드가 계속 눌리는 것을 보니 투명인간 상태로 작업하는 듯했다. 판단력이 빠르기도 하다.
어차피 재경은 전투에 적합한 초능력도 아닌 데다 환자이기까지 했으니 도움은 기대도 안 했다. 내 능력도 전투용은 아니지만……. 이연이 구시렁대며 뭉치 장난감을 고쳐 쥐었다. 외상이 생기긴 했지만 얼마 전에 D.S에게 다녀오길 잘했다. 여기에 뭉치가 제 몫을 해 줄 테니 크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문을 그렇게 벌컥벌컥 열면 어떡해요? 놀랐잖아요.”
이연의 말에 중년 연구원의 시선이 꽂혔다. 가소롭다는 기색이 만연했다.
“내 연구소에서 침입자를 발견한 나보다 더 놀랐겠어?”
“이런 곳을 만든 이유가 뭐죠?”
“불법침입자 주제에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서로 불법 저질렀으니까 쌤쌤으로 치고 정보 공유 좀 합시다.”
대답 대신 경호원들이 달려들었다. 쩨쩨하긴. 이연이 혀를 차며 뭉치 장난감을 휘둘렀다. 경호원의 발목을 노려 공격하려는데, 경호원의 몸이 순간적으로 둥실 뜨는 것이 보였다. 초능력자였다.
“와……. 여기 돈 많나 보네.”
초능력자 경호원이라니, 반칙이다. 초능력이 1단에서 2단에 그친다고 해도 경호원 직업을 가질 정도의 신체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인건비가 비쌌다.
게다가 합법적인 시설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곳에 초능력자 다수를 동원할 수 있다니, 변이종 교육이랍시고 많이도 벌어먹은 듯했다.
같은 2단 싸움이라면 능력의 특수성을 감안해 이연이 불리했다.
크헝!
물론 그거야 뭉치가 없었을 때 얘기고. 포효한 뭉치가 경호원들 사이를 뛰어들었다. 크기가 작아진 탓에 강아지인지 뭔지 모를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 봬도 엄연한 2급 변이종이었다.
2단 초능력자 백 명이 와도 안 된다.
지잉.
뭉치가 날뛰는 사이사이 이연이 뭉치 장난감을 휘둘렀다. 붉은 레이저가 선을 남기며 지나간 곳에는 막 뭉치를 걷어차려던 경호원의 진압봉이 동강 나 있었다. 신체를 자를 생각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겁을 줘야 몸을 사릴 것이다.
“저도 돈은 많거든요.”
태연하게 구라를 친 이연이 빙긋 웃자 경호원들이 주춤댔다. 중년 연구인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고작 한 명에 하급 변이종 하나잖아. 빨리 죽이고 끝내!”
“무서운 말을 하시네.”
이연이 과장되게 혀를 내둘렀다. 다시 덤벼드는 경호원들의 기세가 사뭇 매서웠다.
몸싸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레이저로 견제하는 싸움은 다소 요란했다. 이연은 여기저기 뒤지느라 꺼내 놨던 종이를 휘저었다. 온갖 곳에서 흩날리는 종이 비는 상대의 시야를 막는 데에 유용했다.
정신없는 광경 속에서, 레이저로 자른 가구가 쏟아지기도 하고 부서진 물건들의 파편이 튀기도 했다. 천장 일부가 뜯겨 먼지가 날렸다. 그 사이를 뭉치가 종횡무진 휘저었다. 꽤 손발이 잘 맞았다.
제 손발처럼 장난감을 휘두르던 것도 잠시, 이연은 레이저가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부러 힘을 줘 휘두르자 뭉치 장난감은 급기야 희미한 선만 남기고 레이저가 끊겼다. 이연이 황당한 눈으로 장난감을 탁탁 두드렸지만, 반응은 없었다. 이거 뭐…… 충전식이야? 가지가지 한다. D.S에게 무상 A.S를 요구할 것이다.
장난감을 더 이상 쓸 수 없다면 작전을 바꿔야 했다. 장난감을 집어넣은 이연이 뭉치가 주의를 크게 끈 틈을 타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 갔다. 산오와 찢어진 지도 한참이 지났다. 이 정도 시간이면 해킹도 끝났을 터다.
혜강을 부르자 금방 대답이 왔다.
- 어, 형.
“데이터베이스 열었어? 총책임자라는 박사가 여기 왔는데 누군지 알겠어?”
- 어디 보자…….
막 책상 아래를 들여다보는 경호원과 눈이 마주친 이연이 팔을 뻗는 경호원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떨어져 나간 경호원이 비틀거리는 것을 발로 차고 나자 혜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이 사람인가 보네. 본명 김철재. 49세. 변이종학 박사 학위가 있어. 보안 등급 최고 단계인 걸 보니까 실험 최고 책임자도 맞는 것 같고.
“김철재 씨란 말이지.”
- 몇 년 전에 횡령으로 국가 연구소에서 잘려서 그 길로 이혼당했나 봐. 그 후로 떠돌다가 몇 년 전에 스카우트당하고, 추천으로 지금 연구소에 들어왔어.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맨날 아빠 욕하고 다닌대.
갑자기 뇌리에 꽂히는 쓰잘데기없는 정보들의 향연에 정신이 혼미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이연이 화제를 바꾸었다.
“여기 있는 경호원들 전부 초능력자거든. 그 사람들 인적 사항도, 좀…….”
무심코 전방 시야로 초점을 옮긴 눈동자가 느리게 깜빡였다. 주변이 묘하게 서늘했다. 이연이 숨어 있던 책상 밑에 다리가 여러 개 서 있었고.
구두 코가 전부 이연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