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47화 (47/250)

#47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아는 사람 중에 취미가 악플인 사람 있어.”

싸움이라길래…… 이거 아냐? 이연의 해맑은 얼굴에 혜강이 뭐라 말을 하려고 입을 뻐끔거리다 얌전히 다물었다.

“아, 아냐. 그냥 형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나 이연이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재경의 방식대로 하는 건 아니다 싶었다. 초면에 하기에는 다소 경우 없는 말이라고 생각됐던 것이다. 이연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일반]가문의영광굴비: 방금은 제가 말이 너무 심했죠

[일반]가문의영광굴비: 사과드릴게요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이미 곽철식은 어그로에 분기탱천한 후였다.

[일반]곽철식: 아니 ㅅㅂ

[일반]곽철식: 뭐하는놈이야 이거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이대로 채팅만 치고 있다가는 오해가 너무 커질 것 같은데. 음, 하고 고민하던 이연이 다시 타자를 쳤다.

[일반]가문의영광굴비: 저 근데 제가 인터넷 대화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서

[일반]가문의영광굴비: 혹시 만나뵙고 얘기 가능할까요?

“……형, 뭐 하는 거야?”

“만나서 이야기하면 잘 풀릴 수도 있잖아. 얼굴도 안 보고 대화하니까 좀 답답하기도 하고…….”

저쪽의 의도가 어땠든 먼저 심한 말을 한 쪽은 이연이었으니, 혹시 조금 먼 곳에 살더라도 충분히 찾아갈 용의가 있었다.

[일반]소르베: 아 ㅅ1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뉴비 골때리네

[일반]pomo: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반]시크릿주댕: ㅅㅂ 어그로다털어놓고 갑자기 현피신청 어질하다

[일반]소르베: ㅋㅋㅋㅋㅋㅋㅋ철식아 현피함가자

[일반]소르베: 쫄리냐?

“혜강아, 현피가 뭐야?”

“형이 방금 한 거.”

화해 자리 마련을 현피라고 하는구나. 이연이 새로운 지식을 가슴에 품었다.

[일반]두두리: 와 설마 뉴비가 현피 뜨자는데 ㅎㅎ 꼬리말고 도망칠거?

[일반]두두리: 역시 랜선으로만 허세떠는 양아치였죠?

주변 사람들은 피아 할 것 없이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 화해하자는데 왜 이런 분위기가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반]가문의영광굴비: 그냥 대화만 하는 거니까 걱정마세요

[일반]가문의영광굴비: 제가 커피도 살게요

[일반]제주홍돼지: 웬 맑눈광인같은게 골때리는 소리만 하네

[일반]소르베: 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반]소르베: 이거 제발 후기좀 제발제발

전투는 어느새 중지됐다. 방금까지 죽일 듯이 싸우던 건 어디 가고 갑자기 떠들썩한 분위기로 변했다. 모두가 곽철식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긴장이 섞인 분위기가 필드에 감돌았다.

그리고 곽철식의 채팅이 올라왔다.

[일반]곽철식: ㅋㅋ

[일반]곽철식: 번호불러

일반 채팅창에 냅다 전화번호를 적으려는 이연에게 귓속말이라는 기능을 알려 준 혜강 덕에 가문의영광굴비와 곽철식의 만남은 비밀스레 성사될 수 있었다.

“게임 시작한 지 하루도 안 돼서 현피라니, 형도 대단하다.”

“그래? 게임하다가 알게 된 사람들하고는 안 만나?”

이연의 태평한 물음에 옆에서 걷던 혜강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사람 성향에 따라 다르지. 친해지면 만나기도 하긴 해.”

“와, 진짜? 너도 만나 본 적 있어?”

“같은 길드 사람들은 몇 번…….”

“곽철식 씨랑은 안 친해?”

“사이 나쁘다니까.”

곽철식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아 어떤 인물인지 추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혜강은 40대 아저씨일 거라 굳건히 믿고 있었다.

“보나 마나야. 이 게임 조폭들도 많이 하는 거 알아? 다치면 안 되니까 산오 형이라도 부를까?”

“무슨 이런 일에 제산오까지 불러.”

곽철식이 다른 지역 사람이었다면 엘리베이터 보이의 도움을 받는 것도 고려했겠으나, 마침 초호시민이었다. 심지어 만나자는 장소도 이연이 사는 남구였다. 다른 지역이었으면 이동 시간에만 한참 걸렸을 텐데 다행이다 싶었다.

늦은 점심시간이었는데도 곽철식은 바로 만나는 데에 동의했다. 진짜 조폭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유로운 직업인 건 맞는 것 같았다.

PC방에서 나와 카페 쪽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거대 프랜차이즈 카페. 두 층을 전부 쓰는 대형 카페로 애매한 시간대라 그런지 테이블이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저희 도착했어요. 곽철식 씨 어디세요?

곽철식 ㄱㄷ

곽철식 역시 거의 도착한 것 같았다. 이연과 혜강은 먼저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시켰다. 아메리카노를 쪼록 빨아들인 이연이 중얼거렸다.

“김철재 씨는 그대로야?”

연구소에서 도주한 김 박사의 동향은 혜강이 전담으로 체크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없는 걸로 봐서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았지만…….

“뭐, 그렇지. 아마 한동안은 계속 조용할 거야.”

그 아저씨도 머리가 있다면. 심드렁하게 덧붙인 혜강이 복숭아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대수롭지 않은 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이연이 조금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있잖아, 혜강아.”

“응?”

“혹시 모르포가 뭔지 알아?”

“모르포? 모르포 나비?”

김 박사가 스치듯 흘렸던 단어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나비의 이름쯤이야 이연도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어쩐지 동물이 아닌 사람을 뜻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마치 누군가, 혹은 어떤 단체의 명칭 같은…….

“나비 말고 다른 거 없어?”

“잘 모르겠는데……. 왜?”

당시 혜강은 연구소 맵을 살펴보느라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한 듯했다. 이연이 간략하게 설명해 주자 혜강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장 생각나는 건 없는데, 나중에 출근하면 한번 찾아볼게.”

“부탁해.”

“응. 그리고…….”

말을 잇던 혜강의 시선이 한순간 깜빡이며 이연의 뒤를 향했다. 왜 그러지? 의아하게 여긴 이연이 뒤를 돌아보자, 어디서 많이 본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

“어머, 혜강이랑 이연 씨?”

밤꼬치 사장, 수아였다.

저녁 장사를 하니 점심에 놀러 나온 모양이었다. 그녀를 밖에서 마주친 적은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이연이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웃었다. 혜강 역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카페 단골이세요? 가게 아닌 데서 뵈니까 반갑네요.”

“아뇨, 저도 처음 와 봤어요. 맛 괜찮으면 단골 해야죠. 이연 씨는 웬일이에요?”

“아, 사장님이 말씀하신 취미 이야기 기억하세요?”

아는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있었거든요. 이연의 말에 수아가 성실하다며 박수를 쳤다.

“그래서 지금은 혜강이 취미 탐방 중? 예쁜 카페 찾아다니는 거예요?”

게임에서 싸우다 못해 현실에서까지 싸우러 왔다는 말을 단골집 사장한테 하기 민망해 혜강이 멈칫한 틈을 타, 이것이 민망한 사태라는 자각조차 없는 이연이 대답했다.

“아, 아뇨. 혜강이 취미는 맞긴 한데, 우리는 현피? 하러 왔어요.”

“현피요?”

수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다른 분하고 좀 오해가 있었는데, 잘 이야기하고 싶어서 커피를 사 드리겠다고 했거든요.”

“아……. 그렇구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수아는 들고 있던 음료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연 씨가 가문의영광굴비군요.”

“네?”

“제가 곽철식이에요.”

“……네?”

이연이 놀라서 말할 타이밍을 놓친 순간, 혜강이 벌떡 일어났다.

“수아 누나가 곽철식이라고요? 지갑전사 곽철식?”

“혜강이가 제아구나?”

“……네…….”

담배 냄새에 찌든 아저씨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괴리감이 커 멍하니 대답만 하는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수아가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그래요.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세상 정말 좁았다.

“미안해요. 한두 번만 할 생각이었는데 하다 보니 재미가 붙어서 그만.”

온화하게 웃으면서 비매너 행위를 고백한 수아에게 겨우 정신을 차린 혜강이 물었다.

“아니……. 수아 누나가 진짜 곽철식이에요?”

아직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는 거잖아.”

“그건 그렇죠…….”

그간 곽철식의 행적을 알아 더 패닉에 빠진 혜강과 달리 이연은 굉장한 우연이라며 해맑게 신기해하기만 했다.

“와, 그런데 저한테 왜 그러신 거예요?”

“아니, 그게.”

수아가 드물게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냥 커마가 너무 예뻐서 관심을 좀 끌어 보려다가…….”

“…….”

예상 밖의 대답에 이연이 멈칫한 동안 혜강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지얼…….”

“지얼? 그게 뭐야?”

대답은 수아에게서 나왔다.

“저희 길드명이에요. 지옥얼빠.”

진짜 이름값 한다.

“근데 왜 저한테는 건드린 적 없다고 발뺌했어요?”

“실제로 건드리진 않았잖아요. 틀린 말은 안 했어요.”

그건…… 그렇지만.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 캐릭터 생김새가 좀 예쁘다고 사람을 괴롭힌 거 아닌가? 이쪽도 은근한 게임 불량배였다.

“설마 이연 씨와 혜강이일 줄이야. 한 다리 건너면 전부 아는 사이라더니, 세상 정말 좁네요.”

“그러게요…….”

“이것도 인연인데, 다음에 선탑 같이 돌까? 접속하면 연락해.”

그 말은 혜강을 향한 인사였다.

“저희 그래도 사이가 안 좋았는데…… 잠깐만. 선탑이요?”

“응. 요즘 돌 만한 건 그거밖에 없잖아.”

“대박.”

혜강이 입을 벌렸다. 엄청 좋은 제안인 모양이다.

“그게 뭔데?”

“선황의 탑이라고, 최근에 나온 최상위 던전이야. 딜컷이 빡세서 사람 구하기 힘들거든. 지얼 길팟으로 가요?”

“보통은?”

“대박이다. 국룰?”

“조금 달라. 명령 때 3시, 5시, 7시 산개로 가고…….”

그 후로는 쭉 외계어의 향연이었다. 열띤 토론에 밀려 어느새 잊힌 이연이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부쩍 친해진 두 사람을 보니 흐뭇하긴 했지만, 역시 다른 취미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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