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킹 1위를 임시 보호 중입니다-63화 (63/250)

#63

“뭔데요?”

“저한테도 초대장이 왔으니 동반 입장으로 한 분 정도는 어렵지 않은데, 두 분 다 데려가기엔 좀 그래서요. 물론 쫓겨나지야 않겠지만, 남자 두 명 끼고 입장했다는 게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좀 귀찮아질 것 같아서…… 아!”

화색이 돈 얼굴이 고개를 휙 돌려 D.S를 바라보았다. 불길한 예감에 D.S가 움찔하며 물러서려는 순간, 수아가 D.S의 양손을 잡아 들었다.

“덕선 언니도 함께 가면 되겠네요!”

“……뭐?”

두 명을 전부 데리고 입장하려면 수아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혜강이 초대장 위조를 해 줄 수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네트워크가 거기서 거기인 명사들의 친목 파티에서 하기엔 위험한 방법이었다. 신분이 보증된 사람과 동반 입장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그쪽이 더 좋았다.

다행히 이 자리에는 초호시 명문가 자제가 한 명 더 있지 않은가.

D.S가 동행한다면 성별도 2:2로 맞고, 주최자와 친분이 있는 듯하니 파티에 입장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수아와 D.S 역시 친분이 있으니 함께 입장해도 어색하지 않다. 마치 누군가 안배라도 해 놓은 것처럼 안성맞춤이었다.

“싫어.”

당사자 설득에만 성공한다면.

“한 번만요. 네?”

D.S가 잔뜩 인상을 썼다.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지는 듯했다.

“내가 왜 그 동네를 나왔는데. 이제 와서 다시 내 발로 들어가라고?”

“제발요. 팔찌 파는 사람 찾을 동안 자리만 지켜 주시면 돼요.”

수아는 온화하고 상냥한 성격이지만, 질척거리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 간곡히 부탁할 정도면 아주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를 알았던 D.S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네 동생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미 찾아냈잖아. 굳이 거길 가지 않아도 치료하는 데에는 문제없어.”

“그 팔찌를 판 사람은 분명히 어떻게 될지 알았을 거예요.”

수아의 눈이 일순간 사나운 빛을 띠었다.

“그놈은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해요.”

수아가 이연을 돌아보자, 이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수아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갈 생각이었다. 일반인을 상대로 그런 위험한 물건을 함부로 팔고 다니는 놈은 공교롭게도 사람을 상대로 불법 초능력 실험을 하던 클럽 연구소와 연결고리가 있었다.

다양한 초능력이 담겨 있는 신기한 팔찌. 그 팔찌를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뻔했다.

“하…….”

D.S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너네 진짜 귀찮게 구는 거 알아?”

그 말에는 묵인이 담겨 있었다. 이연과 수아,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수아와 D.S는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 잠깐 헤어졌다 저녁에 만나 가기로 했다. 수아는 이연과 산오에게도 마땅한 의상이 없다면 같이 갈 것을 권했지만, 적연하게도 이연에게는 최근 정장이 한 벌 생긴 참이었다. 산오 역시 별말이 없었다. 아마 종희와 종찬에게 연락하면 의상 정도는 문제없을 것이다.

“그럼 저녁에 봬요!”

수락해 놓고도 별로 내키지 않는지 미적대는 D.S를 힘으로 끌고 가며 수아가 저 멀리서 외쳤다. 공방 앞에 선 이연이 손을 흔들었다. 그 뒤에 선 산오가 툭 내뱉었다.

“가자.”

“응? 집에?”

별생각 없이 내뱉은 대답에 산오가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가당찮은 말이라도 들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따위 꼴을 하고 갈 건 아니겠지.”

“아니, 나 정장 있어.”

“그 상복?”

“……상복 아닌데. 그런 건 안 돼?”

산오는 말없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곧 익숙한 세단이 공방 앞에 도착했다.

“산오 님. 이연 씨.”

짙게 선팅이 된 차창이 내려가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종희가 고개를 까딱 숙였다.

“타시죠.”

그들을 따라 웬 가게에 들어선 후로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에나 나올 드레스 업 장면들이 펼쳐졌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옷을 갈아입는 건 이연뿐이었고, 옷매무새를 만져 주는 건 직원들이라는 점이었다.

이연은 정장 분류가 그렇게 많은 줄은 생전 처음 알았다. 직원들과 매니저가 뭐라 떠드는데 온통 의미를 모르겠는 외래어들이었다. 영화에서 봤던 나비넥타이나 금박이 달린 단추, 체인을 건 조끼 같은 것이 쉴 새 없이 탈의실로 들어왔고, 명칭도 헷갈리는 장식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영화랑 현실은 다르구나…….”

거기서는 척척 기운차게도 갈아입던데, 실제로 해 보니 다섯 번 정도만 갈아입어도 지쳤다. 말이 다섯 번이지, 부분 탈의까지 세면 열 손가락은 훌쩍 넘었다. 이연은 새로운 옷을 입을 때마다 착장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참을 멀뚱히 서 있고 나서야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흐늘해진 이연이 산오가 앉아 있던 소파에 비척비척 다가와 늘어졌다. 일의 원흉인 주제에 다른 세상에 있는 것마냥 다리를 꼬고 앉아 잡지를 뒤적거리던 산오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떨어졌다.

산오는 평소와 똑같았다. 느긋하고, 심드렁하고. 그는 설령 쓰레기장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태도일 것이다.

“무슨 영화.”

“……영화도 안 보고 다녔냐?”

“아주 풍족한 문화생활을 즐겼나 보지.”

벽지로 돈을 바르는 게 더 저렴하게 먹혔을 것 같은 인테리어의 가게는 이전에 종찬과 종희가 정장을 맞춰 줬던 곳보다 훨씬 더 화려했다. 이전 가게도 절대로 저렴한 수준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따지면 여기는…… 생각하지 말자. 설마 나보고 내라고 하겠어? 이연이 재빨리 불길한 생각을 털어 내며 마저 투덜댔다.

“야, 다른 사람이랑 비교하면 난 완전 약과야. 그냥 운 좋게 몇 번 해 본 거지, 모르는 거투성이라고.”

“왜.”

팔락. 종이 넘기는 소리 사이로 무심한 목소리가 던져졌다. 뭐가 왜야? 질문의 진의를 알지 못해 의아하게 시선을 들자 조각 같은 턱선과 뺨이 빛을 받아 매끄럽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가운데가 살짝 솟은 입술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하는 김에 남들 하는 만큼은 하지 그랬어.”

“……언제는 방탕아라며.”

“어차피 욕먹을 거면 억울하지는 않은 게 낫지.”

“그냥 방탕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안 되겠냐?”

산오는 흥, 하는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욕은 하고 싶다는 거군……. 성격 한번 끝내준다.

“넌 옷 안 입어 봐?”

“난 많아.”

“그건 좀 의외네…….”

평소 입고 다니는 패션이 상당히 일관되어서 이런 정장 같은 건 구색만 맞춰 놨을 줄 알았다. 이연이 그렇게 중얼대자 산오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넌 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어?”

“무궁화 5단이면 이 나라의 어느 행사에도 참석할 수 있어.”

“……정말?”

뭐, 5단인 적이 있어 봐야 그런 걸 알지……. 그럼 D.S 씨 설득할 때 진작 말하든가. 구시렁거리는 이연에게 산오가 빈정거렸다.

“멍청함에도 정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

아무리 제산오랑 좀 친해졌다고 해도 여기서 꿀밤을 때리면 날 죽이겠지? 이연이 남몰래 주먹을 꾹 쥐며 생각했다.

“이연 씨, 잠시 이리 좀 와 보세요.”

다행히도 종희의 부름 덕에 생사를 건 갈등은 유혈 없이 종료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한참을 투닥거린 뒤에야 두 사람은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수아와 헤어질 당시에는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뭘 하고 있을지 고민했는데, 옷 한 벌 사고 나니 밖이 깜깜했다.

덕분에 두 사람의 차림새는 평소와 전혀 다르게 변했다. 왁스로 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내고 정장에 넥타이까지 멘 두 사람은 각자의 체형에 따라 다르게 맞추느라 느낌은 조금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사업가나 회사원보다는 돈이 아주 많은 집의 도련님이나 호스트처럼 보였다고나 할까.

1990년대 초 미국이 이랬다고? 이연이 팔을 들어 이리저리 제 모습을 살펴보았다. 움직일 때마다 윤기가 흐르는 원단이 몸에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이거 맞아요?”

베스트에 재킷까지 챙겨 입느라 평소 복장보다 훨씬 갑갑하고 불편했다.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대는 이연의 손등을 팍 내린 종찬이 잔소리했다.

“매듭 흐트러지면 고칠 순 있어? 괜히 만지지 마. 망나니처럼 보이고 싶지 않으면.”

……그거 조금 흐트러졌다고 망나니까지? 이연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정장에 대해 잘 모르니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산오가 손을 뻗어 조금 삐뚤어진 이연의 넥타이를 바로 했다.

“가지.”

가볍게 매무새를 가다듬은 산오가 등을 휙 돌려 차에 올라탔다. 깜빡 얼었던 이연은 종찬이 빨리 타라며 등을 두드린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따라 탔다.

갑, 갑자기 만지고 난리야…….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오의 손가락이 닿은 쇄골 언저리가 괜히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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